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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 3, 국제시장

2015년 새해 연초에 본인은 이례적으로 영화를 세 개나 영화관에 가서 봤다. (이 글에서 크게 코멘트를 하지 않은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까지 포함해서)

1. 테이큰 3

악당이 아니라 니슨이 남에게 굿 럭을 날리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잔뜩 기대를 하고 봤다. 예고편에서는 "우리는 FBI와 CIA를 총동원해서 당신을(니슨) 저지할 겁니다" 이런 말이 나오는 것 같던데 실제 영화에서는 놓쳤는지 못 들었다.

1편에서는 흑발 내지 갈색에 가깝게 염색을 하고 출연했던 킴은 원래의 머리 색깔인 금발로 바뀌었다. 1편에서는 끼만으로 먹고 살고 싶어하던 가수 지망생이었던 반면, 3편에서는 철이 들어서 공부를 했는지 심리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으로 신분이 바뀌었다.

하지만 대학교 학부생 주제에 벌써 혼전임신을 한 상태다..;; 1편의 '아만다'만치 심한 수준은 아니겠지만 킴도 좀 노는 타입인 듯. 임신 테스터는 영락없이 "킬빌"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상황에서 브라이언 정도의 딸바보라면 딸을 임신시킨 남친을 반쯤 죽여 놓고 머리에 샷건을 들이대면서 "내 딸하고 당장 결혼 안 하면 넌 뒈진다"라고 협박할 법도 한데 그 일에 대해서는 브라이언도 의외로 쿨하다.

이 3편에서는 무엇보다도 킴의 새아빠인 스튜어트가 배우 자체가 더 얍삽하고 사악하게 생긴 사람으로 바뀌고 완전히 악역으로 흑화했다. 1편에서 브라이언을 프랑스로 데려다 줬던 그 전세기가 3편에서는 새아빠가 의붓딸(자기 입장에서)을 납치하는 도구로 용도가 바뀌어 버린다. 이미 비행기가 뜨기 시작했는데, 자동차로 밑의 랜딩기어를 날려 버리는 것만으로 비행기를 저렇게 휘청거리게 만들고 떨어뜨리는 게 항공역학적으로 가능한지는 난 좀 회의적이다.

"다이하드" 어느 시리즈에서처럼 러시아 최종 보스를 해치우는 부분에서 이야기를 끝냈어도 될 텐데, 반전은 좀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이 든다. 어설프게 "쏠트" 흉내를 낸 듯.
이에 맞서 브라이언은 원하는 정보를 얻기 위해 이번에도 남에게 형사를 사칭하고 악당을 고문한다. 새아빠가 얼굴에다 헝겊을 쓴 뒤 브라이언에게 꼴꼴꼴~ 물 고문을 당한다. =_=;;

수사반장인 흑인 도츨러는 처음에는 골칫거리인 브라이언을 직업상 체포하는 역할을 하지만 나중에는 결국 브라이언의 혐의가 풀리면서 서로 화해한다. "브라이언은 너희(부하들) 능력으로 잡은 게 아니라 잡혀 준 척 한 것일 뿐이다. 빨랑 차 세워라" 이런 말을 할 정도로 똑똑하다.

끝으로, 종교적인 부분. 테이큰 시리즈는 나 같은 신자가 보기에 교리적인 왜곡 같은 건 없어서 보기가 참 편했다. (괜히 이상한 코드 집어넣는 영화들은 천하에 꼴도 보기가 싫었다) 레노어의 장례식을 진행하는 목사가 영어로는, 내 기억이 맞다면 the word of God says... 라고 말하지만, 자막 번역은 그냥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라고 떴다.
성경 말씀 자체에 인격이 담겨 있다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불신자가 대충 의역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성경은 말합니다"라고 직역을 못 하더라도 "성경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정도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이번 3편은 1편의 포스를 능가할 수준은 못 되지만 그래도 2편보다는 나은 것 같다. 그럭저럭 잘 봤다.
그러고 보니 나 완전 액션 영화 매니아인 것 같다. 인용하는 관련 영화들이 전부 그쪽.. ^^;;

2. 국제시장

"국제시장"은 정말 딱 "포레스트 검프"의 우리나라판 같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아래의 굵직한 사건들을 스크린에서 다뤄 줬다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매우 건전하고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

(1) 6· 25 흥남 철수(1950. 12.): 1차 세계 대전 때 크리스마스 휴전이라는 이벤트가 있었다면, 6· 25 전쟁 때는 이런 기적 같은 사건이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잠깐이나마 평양까지 진출하고 북진 멸공 자유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중공군 때문에 이 염원이 사실상 영원히 좌절돼 버렸다. 남쪽의 원산까지 이미 적군에게 점령당한 관계로 퇴로가 해로밖에 없었다. 그래서 배를 타야 했다.
참고로 월턴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로 순직한 때가 1950년 12월 23일로, 흥남 철수와 타이밍이 거의 일치한다. 지금 서울에 '워커힐'이 바로 저 사람 이름을 따라 명명됐다.

(2) 파독 광부와 간호사(1964~1966): 한 10여 년 전부터 육사 교장의 편지라는 정체불명의 글이 나돌면서 어쨌든 많이 알려졌다. 일류대에 들어갈 정도로 머리 좋고 똑똑하면 뭘 하나, 나라가 가난하고 스스로 부를 창출할 기반이 없으니.. 억만 리 타지에서 학벌에 어울리지 않는 힘든 일 궂은 일을 하는 것인데도 목돈 모을려고 다들 못 나가서 난리였다.

(3) 월남전(1972~1974): 무슨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네(민간인 위장을 한 스파이 얘기는 절대 안 하고) 어쩌네 이상한 헛소리 음모론 대신, 이렇게 건전한 얘기를 풀어 주니 관람하는 기분이 좋았다.
물론, 실제로는 동일 인물이 공무원· 관리 명목이 아닌 인부· 일꾼 명목으로 서독과 베트남을 모두 경험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래도 창작물이라는 허구에서는 한 주인공이 온갖 역사 사건을 다 몰아서 경험하는 게 관행이긴 하다. <여명의 눈동자>나 영화 <진주만> 등의 주인공을 생각해 볼 것.

(4) KBS 이산가족 찾기(1983. 10.): 재연을 한 건지, 아니면 당대의 레알 기록 영상물에다가 주인공을 CG로 합성해 넣은 건지? 어쨌든 재연을 굉장히 잘했다. 난리통에 생이별한 아버지는 못 찾았지만, 여동생은 미국으로 입양돼 있었을 줄이야.
내가 "님아 그 강을..."을 보면서는 그렇게까지 큰 감흥이 없었지만, 이산가족 상봉 장면만은.. 정말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다. "여기는 운동장 아니다." / "Am I really your sister?" ㅠ.ㅠ
미국으로 입양된 막순이 역을 맡은 배우.. 한국계 미국인 신인 같은데 정말 리얼하게 연기를 잘했다. 킬빌로 치면 뭔가 헬렌 김(암살자 카렌 김 역) 같은 위치일까?

부부싸움 하다가 어색하게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장면은 정말 다른 불순한 의도 없이 그 시절에 그랬다는 풍자가 들어간 개그이더구만.. 도대체 뭐가 이념이 들어간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뭐? "나이 많은 꼰대들한테서 지겹도록 들은 얘기를 굳이 또 영화로 봐야 할 필요 있나?" 이런 인간말종 수준의 개소리는 정말로 일고의 가치가 없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영화는 6· 25 시절의 부산을 다루고 있으면서 정확하게 그 시간과 장소에 있었던 대역경인 "부산역전 대화재"는 건너뛰었다는 점이다. 부산으로 피난 가서 살던 덕수네 집안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을 사건인데, 딱히 집어넣을 만한 공간이 없어서 안 넣은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5 08:38 2015/01/25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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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한 번의 여유

얼마 전, 본인은 회사에서 어도비 인디자인의 약간 구버전을 업무상 프로그램 구조 분석을 목적으로 설치한 적이 있었다.
본인은 프로그래머이지 디자이너가 아니며, 나의 컴퓨터 생업 밑천은 비주얼 C++이지 인디자인은 아니다. 이건 잠깐만 들여다보고 버릴 예정이므로 30일 트라이얼 버전만 잠깐 깔았다.
그리고 그걸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뒤, 본인은 그걸 방치했는데..

나중에 내 한글 입력기가 인디자인에서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 듯하다는 문의가 어디선가 들어왔다. 난 비록 30일 기간은 아득히 경과했겠지만 일단 내 회사 컴에 인디자인이 깔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그걸 일단 실행해 봤다. 그랬더니..
프로그램은 "트라이얼 기간이 경과했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실행 기회를 준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단 실행이 됐다.

어도비가 요즘 먹고 살기가 팍팍한지, 혹은 도를 넘는 불법복제에 이골이 났는지 소프트웨어 제품들에 인증을 강화하고 패키지 일회성 구매보다 사용권/사용 기간 구매 위주로 정책을 짜게 바꾸고 있다고 본인은 들었다. 하지만 30일이 경과하자마자 칼같이 실행을 거부하는 여느 데모나 셰어웨어와 달리, 트라이얼 버전에 대해서는 쟤들이 나름 자비심 있는 조치를 취한 것 같다.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준 것이지만 사용자의 입장에서는 훨씬 더 좋은 인상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다른 사례들을 주변에서 여럿 찾을 수 있다.
옛날에 '잔기'(목숨, 마릿수)가 존재하던 게임을 보면, 1이 마지막 잔기인 게임이 있는가 하면 0이 마지막인 게임도 있었다. 이 역시 1보다는 0이 더 관대해 보인다.

지하철의 경우, 운임이 중간에 오르더라도 예전 운임을 기준으로 이미 충전된 한 달치 정기권은 추가 정산 없이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진 지 10년이 넘었지만, 옛날엔 서울 지하철에 정액권이란 게 있었다. 구입가보다 더 많은 금액이 입력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진 직전 맨 마지막에는 금액이 100원이 남았든 50원이 남았든 무방하게 전철 최장거리 구간도 1회에 한해 더 이용할 수 있었다. 뭐, 지하철 회사의 입장에서는 이런 운임 누수 꼼수를 막으려면 정액권의 단가를 최대한 높게 잡아야 했겠지만 말이다.

이런 식의 아기자기한 '마지막 한 번의 여유'를 생각할 만한 일이 또 있었다.
한번은 교회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서 놀다가 야식을 시켜 먹었다. 이럴 때는 집 냉장고나 문에 쳐박혀 있는 야식집 메뉴판을 꺼내서 그 내용대로 주문을 하는데, 그 메뉴판 가격을 그대로 접수받는 집이 내 경험상 생각보다 적다. 수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사이에 가격이 올랐다고 그런다. 그러나 이것도 그렇게 센스 있는 조치는 아니다.

자기 집의 옛날 메뉴판 찌라시를 제시하면 그걸 회수하고 새 찌라시로 교환하는 조건으로 1회에 한해, 메뉴에 적힌 대로 옛날 가격을 받게 하는 게 고객에게는 훨씬 더 좋은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
자기네 가게에서 옛날에 집집마다 돌며 뿌렸던 광고 찌라시를 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나중에 그걸로 주문을 한 것만으로도 업소에서 보상을 해 주는 게 마땅치 않은가 말이다.

또한 이것은 "찌라시에 대한 신뢰도를 올리고" 한번 주문을 했던 고객으로 하여금 자기 업소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는 효과도 낸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할인 쿠폰이 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프트웨어 UI 내지 고객을 접대하는 장사를 하는 업종에서는 이런 '마지막 기회'에 대한 아량이라는 덕목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3 08:34 2015/01/23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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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뚜기 3분 고기덮밥

오뚜기 3분 고기덮밥은 본인이 태어나서 최초로 접한 레토르트 파우치 식품이다. 물론 밥까지 들어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덮밥 '소스'일 뿐이라고 단서가 자그맣게 붙어 있다.
영문 명칭 Goulash에서 알 수 있듯, 얘는 유럽풍의 매콤한 쇠고기 스튜 요리에서 컨셉을 따 온 듯하다.

처음 먹었던 때가 20여 년 전 초딩 중저학년 시절이었는데, 본인은 그때부터 이걸 굉장히 좋아했다. 비슷한 상품인 3분 짜장, 카레, 하이스보다도 더.
그 시절에 고기덮밥의 개당 가격은 700얼마 정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이 고기덮밥은 상점에서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서 더는 찾아 먹을 수가 없게 됐다. 유사 상품들도 다 변함없으며, 햄버그 스테이크나 미트볼도 지금까지 멀쩡히 팔리고 있는데 유독 고기덮밥만 없어진 것이다. 펭귄 통조림은 회사가 망하면서 단종된 게 맞지만, 고기덮밥은 왜 혼자서 단종됐지..??

그러나 여기에도 반전이 있었다. 없는 게 없는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보니 고기덮밥은 멀쩡히 잘 팔리고 있었다. 이에 본인은 곧바로 12개짜리 패키지를 질러서.. 오랜만에 옛날 맛을 즐겨 보았다. 냠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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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계몽사에서 에메랄드 색 '어린이 세계 명작 전집'을 재판해서 판매하자 옛날 추억에 잠긴 독자들이 많이 주문을 했었다... 내가 바로 그런 심정이다. 단지 이번엔 동화책이 아니라 인스턴트 식품일 뿐.

유통기한이 2016년 여름일 정도로 지금까지도 멀쩡히 잘 생산되고 있는 물건인데
왜 오프라인 상점에서는 편의점부터 홈플러스/이마트 등 대형 마트까지.. 좀체 물건을 찾을 수 없는지 난 이유를 도저히 모르겠다. 3분 고기덮밥을 오프라인 상점에서 목격하신 분(증명-_-), 혹은 반대로 그게 왜 온라인으로만 판매되고 오프라인 상점에서는 사라졌는지 이유를 아시는 분은 본인에게 제보해 주시길 바란다.

* 나같은 사람이 맛집이나 음식 소개를 한다는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다.. 전선 휴게소 메기 매운탕에 이어 음식 소개는 이번이 거의 두 번째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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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0 08:28 2014/12/2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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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 신선놀음 중

오랜만에 근황 겸 내 사진이나 좀 투척하겠다. 이제 날짜상으로는 여름이 다 갔다지만 난 여전히 낮과 밤에 반팔 차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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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북한산 맑은 공기를 주입해 주면 코딩이 잘 되는 거 같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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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전원 주택 2층 다락방에서의 신선놀음. 참고로 우리집 아님.

날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학교· 교회 등의 지인 한정으로나 의미가 있겠지만..
도대체 저 인간은 왜 어딜 가나 맨날 노트북 PC를 들고 다니고 게다가 인터넷조차 없이도 혼자 뭘 끄적거리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내 연구실을 오프라인 방문하는 걸 언제든지 환영한다. 장소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컴퓨터 펼쳐 놓고 작업하고 있는 곳이 어디든지 연구실.
내가 지금 한글 입력에서 관심사가 무엇이고 뭐가 고민인지를 코드와 함께 친절하게 알려 드리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4/10/01 08:39 2014/10/0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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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행 거리 20000km 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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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애마의 총 주행 거리가 지난달(8월) 하순에 드디어 2만 km를 돌파했다.
계기판에 ODO라고만 적혀 있어서 무슨 이니셜인가 궁금했는데 이건 합성어 이니셜은 아니고, odometer라는 단어를 줄인 글자이다. 우리말로는 적산거리계.

사실, 차 자체는 부모님에게서 인계받은 이래로 종합 검사까지 한 번 받았을 정도로 차령이 생각보다 많다.
그런데 이제야 2만 km를 겨우 넘었을 정도이니 이 얘기를 들은 분들은 다 허탈해하면서 “이거 뭐 완전 새 차군. / 차를 지금까지 안 굴린 거나 마찬가지군” 등의 반응을 보이곤 했다.

운전을 대부분 주말에만 하니 주행 거리는 매달 400~500km, 1년에 5~6천 km대에 불과하다. 평일에 회사나 학교에 몰고 가는 빈도는 한 달에 한두 번이 될까 말까이지만, 그래도 무더위나 우천 등 날씨가 안 좋을 때, 부득이 지각을 면해야 할 때, 짐이 많을 때 등 결정적인 상황에서 차를 아주 유용하게 활용해 왔다.
그리고 그렇게만 몰아도 차량 유지비는 기름값만 8~10만원 정도 꼬박꼬박 나온다. 자동차라는 게 참 비싼 물건이긴 하다.

하지만 차는 소유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금이나 보험료 등이 적지 않게 깨지며, 차령이 올라갈수록 세금만 줄어드는 게 아니라 중고 감가상각도 커진다. 그러니 무작정 안 몰고 세워만 둔다고 해서 돈을 아낄 수 있는 게 아니다. 일단 차를 장만한 이상, 어느 정도는 꾸준히 타야만 오히려 이득이다. 경제 속도만 있는 게 아니라 경제 주행 거리라는 개념도 있는 셈이다.

물론 본인 역시 세월이 흐를수록 주행 거리가 꾸준히 늘고 있으며, 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는 동안은 연간 1만 km 정도까지는 주행 거리를 늘릴 생각이다. 특히 박사 과정부터는 학교에 월 단위 정기 주차 등록도 가능하니까 말이다.

지금도 학교 근처의 동문 회관에다가 잠시 주차할 수는 있지만, 한계가 많다. 그건 명목상 연 10회 제한이 있으며, 또 한 번에 최대 3시간까지밖에 안 되기 때문에 수업 하나만 듣고 허겁지겁 돌아오기에도 빠듯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평일 일과 시간에는 서울 시내의 도로 정체가 매우 심하기 때문에 차의 가성비가 크게 떨어진다.
새벽에 일찍 학교에 가서 하루 종일 연구실에 있다가 밤 늦게 돌아오는 용도로 활용해야 도로 정체도 피하면서 차를 능률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데, 그럴려면 역시나 정기 주차 등록이 필수인 것이다.

집은 먹을 게 많고 내 마음대로 쉬기도 편해서 좋지만, 너무 덥고 또 아무래도 공부나 코딩의 집중이 잘 안 되어 나태해지기 쉽다.
학교는 반대로 뭔가 집중하고 작업하기는 좋다. 집보다 훨씬 더 시원하며 무선 인터넷도 빵빵하다. 학부생이라면 그저 공공장소인 도서관 독서실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 나 같은 대학원생은 아늑한 연구실이 있으니 더욱 좋다.
그러나 일단 움직여서 밖에 나가는 이상 당장 돈이 깨지며, 이동하는 게 매우 번거롭고 불편하다. 그 불편을 자동차가 크게 줄여 줄 것이다.

끝으로, 또 엔진 이야기.
본인은 내 차가 디젤이 아니다 보니, 힘 좋고 연비도 더 좋은 디젤 차량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디젤은 소음· 진동은 차치하고라도 같은 배기량이어도 더 무겁고 가격도 생각보다 더 비싸다. 단순히 차값뿐만 아니라 오일 같은 엔진 관련 소모품/부품 가격도 말이다.

차를 장만했으니 이제 내 사전에 대중교통이란 없다는 심보로 연 2만 km 이상씩 마구 굴릴 게 아니라면, 디젤 차는 의외로 수지가 맞지 않는다고 한다. 더구나 나처럼 이제 겨우 연 5~6000km 수준인 주말 운전족 정도로는 휘발유 차가 백 배 낫다고?
아예 충분히 출력이 큰 SUV 정도라면 모를까, 그냥 어정쩡한 1000cc대 후반 배기량의 디젤 승용차를 장만하신 분 중에는 다음에는 그냥 휘발유 차를 살 거라고 오히려 후회하는 경우도 있어서 의외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4/09/02 08:15 2014/09/02 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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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시작하기 전에, 심지어 철도를 빨기 전에.. 정말 까마득한 먼 옛날엔
자동차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얼마나 심취해서 진심으로 쪽쪽 빨고 지냈는지...;;

1991년, 지금으로부터 거의 23년 전에 혼자 다른 책을 베끼고 온갖 사견을 덧붙여서 만들었던 자동차 화보-_-;;가 고향집에서 뒤늦게 발견되었다. 나의 초딩 3학년 시절의 작품이다.
물론 사진 찍는 건 어머니께서 도와 주셨다. 디카가 없던 시절이니 당연히 필카로 찍고 현상해서 찾아 와서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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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눈에는 자동차별로 타코미터의 존재 여부, 파워윈도우의 존재 여부, 그리고 뒷좌석 중앙에 팔걸이의 존재 여부가 특별하게 다가왔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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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망, 각그랜저, 그리고 콩코드, 로얄 시리즈 등.. 정말 추억의 올드카들이다. 지금은 저 차 번호들은 존재할 가능성이 0에 한없이 수렴하므로 번호판을 굳이 가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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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우리집 자가용이었던 엑셀의 카탈로그 내지 취급 설명서를 베껴서 그린 거지 싶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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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액정 디지털 계기판, 그리고 헤드라이트에까지 와이퍼가 달려 있던 임페리얼을 무척 신기하게 여기고 인상깊게 관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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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내용.
걍 이 취미를 그대로 유지해서 현대 자동차에라도 입사했으면 돈은 더 많이 벌었겠다는 생각이 폭풍처럼 든다. ㅠ.ㅠ

Posted by 사무엘

2014/07/19 08:22 2014/07/19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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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 컴퓨터 음악 이야기

올해 상반기는 박사 첫 학기 진학과 <날개셋> 한글 입력기 7.4 완성이라는 본인의 개인사와는 대조적으로, 분위기가 은근히 우울했다.
월드컵 축구 경기는 기대를 저버리는 졸전 끝에 별 재미를 못 봤고, 신촌 동성애 퍼레이드에다 어째 1993년에 벌어진 것과 비슷한 패턴의 사건· 사고가 두 건이나 벌어졌다. 세월호(1993년의 서해 페리호), 그리고 총기 난사+무장 탈영(1993년의 임 채성 무장 탈영 인질극) 말이다. 정치판에서 돌아가는 큼직한 사건들은 좌파와 우파 성향 모두에게 최악의 실망만을 안겼다.

뭐 어쨌거나.. 이번 학기에 본인은 아직 프로그램 개발에 더 전념하려고 수업은 2개만 들었다. 언어학 문법 수업은 배경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확실히 어려웠다. 그래도 다음 학기에 프로그래밍 언어와 관련된 수업을 들으면서 경험을 서로 대조해 보면, 자연어와 인공 프로그래밍 언어가 개념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조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으로 학기 초부터 기대했던 컴음악은 어려운 한편으로 재미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텀 프로젝트를 발표한 걸 보니 모바일 또는 웹으로 간단한 미디 음악 시퀀서를 만든 경우도 있고, 미디 데이터를 일정 규칙대로 변조하거나 climax를 찾는 알고리즘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담당 교수님의 연구실에 들어가 있는 학생들은 여러 이미지와 여러 음악들을 분위기에 맞는 것끼리 서로 짝지어 주는 솔루션을 주로 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멜로디로부터 chord를 자동으로 매긴다거나 다른 감정 같은 의미를 읽어 내는 프로그램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곧 단념했다. 그런 것도 없는 곡을 새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엄청 어렵고 창의적인 일이라는 걸 곧 인지했기 때문이다.

결국, 컴음악 시간에는 이 기회를 이용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자동 작곡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걸로 방향을 선회했다. 복잡한 요소들 싹 다 제끼고 오로지 초등학교 음악책에 나오는 동요 급의 간단하고 짤막한 단음 멜로디를 생성하는 것.

음악이라는 게 어느 정도는 무질서하고 무작위한 요소가 있지만, 그 뒤부터는 정말 인간의 언어만큼이나 극도로 예전 문맥에 의존적이고 체계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이 그저 rand()의 결과대로 멜로디와 박자를 뿌리면 그건 음악이 되지 않고 아무 호소력이나 메시지, 시너지 효과가 안 나오는 횡설수설 노이즈밖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연구하면 할수록 음악도 마치 문장을 구문 분석하듯이 계층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각 마디 안의 음표들은 일정 chord 범위에 드는 한도에서 생성되는데, 그 chord가 바뀌는 규칙은 또 다른 상위 계층에 따라 정해지고, 그 계층의 상위 계층은 또??

맨 처음엔 박자를 재귀적으로 무작위 생성하는 것부터 해 봤다. 음색이 들어간 음악이 말 그대로 색, 컬러 그림이라면, 박자는.. 그냥 흑백 그림에 가깝다고 하겠다. 박자도 생각보다 가짓수가 많았으며, 취사선택을 잘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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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공교롭게도, 마지막 두 박자는.. 바로 “노래 시작했다 노래 끝났다 / 그런 노래 없다 다시 불러라”의 박자와 동일하다.. ㅋㅋㅋㅋ 컴퓨터가 그런 박자도 만들어 냈다. 하지만 박자에다가 음색을 입히는 건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다.

처음엔 1도 화음에서 시작하고 끝은 언제나 '도'로 끝나고, 주어진 chord와 어긋나는 음은 약박에만 들어가게 하고,
같은 음 반복, 1도씩 증가, 1도씩 감소 같은 인위적인 규칙을 일정 확률로 준 결과, 노이즈보다는 듣기 좋은 멜로디가 종종 생성되었다. 아 물론, Looking for you나 Let it go 같은 퀄리티를 기대해서는 안 되지만..ㅎㅎ

텀 프로젝트를 발표한 후 교수님의 반응은 “(1) 마디별 코드 전환이 부드럽고 꽤 그럴싸하게 작곡이 잘 됐다. (2) 단, 당초 계획만치 참고문헌 내용이나 관련 기존 연구 성과가 반영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었다.

내가 목표했던 퀄리티는 그냥 별 생각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수준의 작곡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무작위로 흥얼거린다 해도 결국 예전에 자기가 들어서 기억하고 있는 음악을 변형하는 형태인 반면, 컴퓨터는 그런 경험 데이터가 없이 난수 생성만으로 음악을 만든다. 결국 컴퓨터도 사람에게 듣기 좋은 음악을 만들려면 모방이 필요하며 기존 음악 패턴에 대한 데이터가 아주 없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래저래 음악은 탁월한 수리 능력에다가 창의성까지 갖춘 괴수 천재들을 매혹시키기 충분한 분야이다. 리서치 과정에서 Musimathics라는 책을 참고했는데, 저자는 이건 뭐 수학, 전산학에 소리를 물리· 전자공학적으로 분석하는 것까지 완전 다 통달한 천재다. 전자공학의 푸리에 변환도 나오고, 작곡 방법론에서 난수 생성 얘기를 하는 데서는 ACM 논문까지 소개한다.

나 또한 딴 건 몰라도 음악의 위력에 대해서는 Looking for you와 관련하여 할 말이 무진장 많다. 이런 음악 한 곡도 지적 설계자의 치밀한 설계 없이는 만들어질 수 없는데 하물며 이 세상 만물이겠는가 하는 생각도 응당 들었다.

사실, 과거에 마소에서는 미래엔 이렇게 실시간으로 작· 편곡을 하여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게임이 등장할 걸로 예상하고 DirectX에다가 미디 기반의 DirectMusic이라는 컴포넌트도 만들었다. 1990년대 말이면 아직 소프트웨어 기반 미디 신시사이저도 흔치 않던 시절이어서.. 하지만 게임 음악 기술은 음표 신호 방식이 아닌 waveform 방식으로 대세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DirectMusic도 개발이 중단된 흑역사로 전락했다.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다음은 여담이다.

1.
어떤 학생이 자기 결과물을 발표하고 시연하는 중이었는데, 파일을 기록했다는 영문 메시지가 writed라고 뜨고 있었다. 본인은 그걸 보면서 속으로 뿜었다. 우와, 정말 생각도 못 했던 단어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서 내가 발표했던 PPT 자료를 다시 보니, 나도 ‘결론’을 Conclusition이라고 써 놔 있었다. ㅋㅋㅋㅋㅋ

다들 시간에 쫓기는 상태로, 혹은 밤샘 하고 나서 머리 가동률이 70% 이하로 떨어진 상태로 비몽사몽 발로 영작을 하다 보니 저런 오타들이 나왔는가 보다.

2.
본인은 작곡한 멜로디를 출력할 때 미디 API를 쓴 게 아니라, 과거 BASIC에 존재하던 PLAY문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함수를 직접 만들어서 썼다. 지정된 음의 주파수에 해당하는 sine wave를 생성해서 오디오로 출력하는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waveOut*** 어쩌구 하는 함수들을 직접 공부해서 써 봤다.

난 간단한 콘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파일 재생 관련 통지를 그냥 callback 함수 호출로 받게 했는데... 뭐가 이상하게 꼬이면서 잘 되질 않았다.
한참을 디버깅 하다가 시간도 부족하고 설마 하는 심정으로 message-only 윈도우를 만들고 통지를 메시지로 받게 했더니.. 모든 문제가 싹 해결되었다. 메시지가 진리. 두 메커니즘의 차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픽 애니메이션 출력 때 더블 버퍼링을 하는 것만큼이나, 실시간으로 오디오 데이터를 보내는 것도 더블 버퍼링 기법이 쓰인다는 게 흥미롭다. 관련 코딩을 해 보신 분이라면 이미 잘 아실 것이다.
버퍼 A의 내용이 사운드 카드로 가서 재생되는 동안 미리 버퍼 B의 내용을 보내 놓고 기다리고, 다음으로 버퍼 B가 처리되었으면 다시 버퍼 A에다가 다음 내용을 보내는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07/05 08:36 2014/07/0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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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관광도 하고 식사도 한 뒤, 다음 남은 시간 동안은 철원 서북부의 민통선 이남 지대를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답사했다.
우리가 전선 휴게소로 갈 때는 지방도 464호선의 동남쪽을 통해 민통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으로 답사하는 곳은 그 도로의 서쪽 구간에 있다. 그래서 민통선 밖으로 나갈 때 그쪽으로 바로 나가면 목적지에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했으며, 철원 동북-서북 외곽을 횡단하기 위해 다시 남쪽의 고석정으로 되돌아갔다가 국도 87호선을 거쳐서 다시 지방도 464로 갈아타야 했다. (전선 휴게소는 동북 외곽에 있음) 동선이 대략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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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는 코너다. '오덕'의 압박..;;
하긴 그래도 야동리보다는 낫다. 옛날에 사람 중에도 이 오덕이라는 분이 계시기도 했고.
차 안에서 밖을 촬영한 것이어서 화면이 좀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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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백골 부대 백골 구조물을.. 국도 43호선상에서 실제로 봤다..;; (저건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님.)

자, 내가 동선의 삽질까지 감수하면서 찾아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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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87과 지방도 464가 만나는 월하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가면 '한다리'라는 자동차 교량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남쪽) 방면으로 한 200m쯤 떨어진 곳엔 옛날 금강산선 철도의 교량이 기둥만 남아 있다. 이걸 현장 답사했다.
그 옆을 보면 언덕이 두 동강 나기도 했을 정도로 옛날에 철길이 있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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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다리로부터 3km 정도 동쪽으로 더 가면.. '대위교'라는 교량이 나오며, 역시 여기서도 오른쪽을 보면 한다리보다 더 온전한 형태의 금강산선 교량이 남아 있다! “금강산 가던 철길!”이라는 글자까지 있음을 주목하시라.
이걸 직접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시겠는가? 자동차는 이런 걸 답사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인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나보다 어린 친구가 차도 없이 철원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간 뒤, 민통선이 코앞인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답사한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빠르고 편안하게 찾아갔는가? 완전 양반이다.
한다리, 대위교 근처에 있는 교량과, 전선 휴게소 근처에 있는 교량을 지도에서 찾아서 한 선분으로 이어 보면, 옛날에 금강산선의 선형이 대략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대위교 인근에는 '철길가든'이라는 식당이 있고, 또 민통선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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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교까지 간 뒤 본인은 차를 돌려 서쪽 백마고지 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 국도 87호선이 90도 꺾이는 지점이 있는데, 사실 길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방향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길일 뿐. 그리고 바로 그 교차점에 그 이름도 유명한 노동당사가 있었다.

철원이 북한 치하에 있었을 때 그들이 후딱 지어 사용하던 일종의 관청 건물이다.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2호.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6·25 때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폭격 때 다 폭삭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쟤만 그래도 뼈대는 저렇게 온전히 남았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조선 총독부 청사나 서대문 형무소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이 건물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는 북한 공산당이 양민을 수탈하고 애국 우파 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악마의 소굴이었다. 공산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걸 강제로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감시· 억압하고 거짓 선동하고 자유를 빼앗는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학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남산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 노동당사의 악랄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는 될까 싶다. 내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절대악과 필요악을 분간 못 하는 오류를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빨갱이라는 극단적이고 경멸적인 호칭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겠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사용해 온 악한 방법론과 배경 사상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악한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산당도 허용돼야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하는 건 정말 역사와 현실을 모르는 극도의 무개념· 무지의 소치이다..

오해가 없게 말씀드리자면, 나의 정치 성향은.. 악의 세력으로서 본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한 수뇌부와 잘 검증된 과거 역사 팩트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겨우 무슨 새누리당이니 민주당이니 일베 오유 같은 것에 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달랑 진보냐 보수냐, 성장이냐 분배냐 그딴 것만을 논하는 거라면 정치색 같은 걸로 논쟁하고 싸울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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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각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서쪽으로 수 km를 더 달려 도착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난 2012년 말에 개통한 경원선의 북쪽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었다. 근처에 백마고지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원래 옛날에는 백마고지 역 일대도 민통선 지대였는데 나중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어차피 또 민통선을 만나게 된다. 역 주변엔 걸어서 가 볼 만한 건 없다시피하다니, 연계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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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로가 심지어 민통선 안 구간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딱 끊어져 있다. 경의선 도라산 역은 잉여롭긴 해도 출입국 사무소가 있고 승강장에서 북쪽으로 쭉 이어진 선로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이곳은 단촐하고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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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신탄리 역 이북에 철도 중단점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철도 중단점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 이걸 실물을 직접 보면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승차권이나 입장권 없이도 승강장과 선로 끝에 슬쩍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원에서 철도 and/or 안보와 관련된 대부분의 명소들을 답사하면서 철덕력을 키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땅에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올 때는 국도 3호선을 이용했다. 길이 상당 부분 경원선 철길과 겹치다 보니 돌아오면서도 철도역과 철길 구경을 덤으로 할 수 있었다. 도로 정체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2시간이 좀 넘게 걸렸으며, 아침 7시 반으로부터 정확히 12시간 뒤인 저녁 7시 반에 서울에 무사히 귀환했다.

돌아오는 길엔 친구들은 너무 피곤해서 간식을 먹을 기력조차 없이 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집에 도착한 뒤에 침대에 쓰러져서 시체 모드가 됐을 뿐.

철저한 준비 덕분에 길에서 전혀 헤매지 않았으며 시간도 적절히 분배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장소를 답사할 수 있었다. 인파가 바글바글 몰리는 데가 아니어서 분위기가 좋았으며, 완벽에 가깝게 좋던 날씨 역시 성공적인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고 말이다.
다음날 교회에서는 같이 간 친구들의 부친께서 한 분씩 날 개인적으로 불러서 좋은 구경을 시켜 주느라 수고 많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4/05/14 08:24 2014/05/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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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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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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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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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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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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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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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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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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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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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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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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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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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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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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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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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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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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