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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북악산 -- 上

한동안 너무 바빴던 나머지, 남한산성 이후 다음 등산 때까지 블로그에 다른 글을 올릴 시간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이번에도 아주 흥미진진한 산행을 다녀왔다. 이번에 간 곳은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이었다.

북악산은 자명한 이유로 인해, 서울에 있는 산들 중 아마 유일하게 신분증 까고 번호표 목걸이를 해야 입산 가능한 산이지 싶다. 인왕산은 사진 찍는 걸 감시하는 초소만 있던데 북악산은 그에 덧붙여서 저런 절차도 필요하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빨간 날의(일요일 + 공휴일) 다음 날은 입산 금지이다. 감시 초소 직원들도 한 주에 하루 정도는 출근 안 하고 쉬어야 할 테니까. 북악산은 거기에다 아침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입산 가능 시각도 정해져 있다. 현재 북악산에 있는 사람들의 신원이 모두 파악돼 있어야 하며, 해가 떨어진 뒤에는 산 속에 아무도 없게 마치 민통선에 준하는 수준의 관리를 하는 듯하다.

인왕산은 감시 초소는 있지만 저 정도까지 등산객들을 일일이 파악하고 통제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가 지고 나면 어차피 청와대 쪽으로 사진 찍는 것 감시는 할 필요가 없어지니 말이다.

사실, 청와대 근처에 있는 산들에 우리가 이 정도라도 접근하여 등산을 할 수 있게 된 건 생각보다 오래 되지 않았다.
21세기 이전엔 그런 거 없었다. 1968년 1월에 북한 무장공비가 청와대 바로 근처까지 쳐들어왔던 전대미문의 사건의 여파로 인해, 북악산과 그 일대의 산들은 민간인 접근 절대엄금으로 봉인돼 버렸기 때문이다.

서울 지리를 잘 모르던 시절에는 난 북한산과 북악산의 차이도 잘 몰랐다. 북악산은 북한산보다 훨씬 서울 중심부 안에 있다. 본인은 북악산을 오르기 위해 무작정 '창의문'으로 향했다. 예전에 인왕산을 올랐다가 돌아오면서 버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쳤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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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문의 바로 옆에 있는 최 규식 경무관의 동상을 가까이에서 다시 접했다.

그는 용감한 정의인으로 종로 경찰서장에 재직 중,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를 습격하여 오는 공산 유격대와 싸우다가 장렬하게도 전사하므로 정부는 경무관의 계급과 태극 무공 훈장을 내렸다.
비록 한때의 비극 속에서 육신의 생명은 짧았으나 의를 위하는 그의 정신은 영원히 살아 남으리라.
1969년 1월 21일
조각 및 제작: 이 일영
글: 이 은상
글씨: 김 충현


알고 보니 저 동상은 고인의 순직 1주기를 기념해서 만들어졌다.
태극 무공 훈장은 우리나라의 무공 훈장 중 최상위 등급으로, 이 정도 훈장은 6· 25 전쟁에서 나라를 구한 급의 영웅이 아니면 살아서는 못 받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군인이 아닌 경찰에게 이런 훈장이 추서된 사례도 현재까지 저분만이 유일하다.
바로 몇 년 전(1965), 강 재구 소령이 수류탄 투척 훈련 중에 부하가 실수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몸으로 감싸고 산화하여 동일한 태극 무공 훈장이 추서됐다는 것도 기억해 두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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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을 오르면서 작년에 갔던 인왕산과 부암동 쪽을 본 모습이다. 인왕산과 북악산은 모두 산 속에 성곽과 감시 초소가 있고, 아예 군부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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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길은 성곽을 따라 대략 이런 형태였다. 이 사진에는 보이지 않지만 성벽 너머로는 철조망이 둘러져 있다.
계단을 따라 산을 오를 수 있었는데, 경사가 꽤 가파른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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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 주변은 경치가 이러했다.
우리가 평소에 서울 시내 쪽에서 바라보는 북악산의 전면은 바위가 참 인상적이다. 하지만 지금 여기는 이미 북악산의 뒤쪽으로 가는 것이고, 산을 타면서 딱히 그런 바위를 볼 일은 별로 없었다. 앞쪽은 영구 봉인돼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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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가 바로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에 조성된 마을인 평창동이다. 각종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부자· 유명인사들이 사는 단독 주택들이 가득하여 마치 서울 안의 딴 세상 같다. 교통이 왕창 불편하겠지만, 다들 차를 끌고 다닐 테니 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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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산의 정상은 생각보다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북악산'이 한때는 '백악산'이라고도 불렸다. 창의문에서 북악산 정상까지는 지도상의 직선 거리가 짧은 만큼 경사가 굉장히 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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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1 사태 때 북한군과의 교전 중에 총알이 박힌 소나무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러 저렇게 표시를 해 놓은 게 좀 징그럽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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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을 따라 가다가 '청운대'라고 불리는 다른 봉우리에도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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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걷는 길은 성곽 안에 있기도 하다가 성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철조망이 저렇게 있으니 무슨 GOP 철책처럼 보였다.
이거 사진이 도대체 어떻게 찍혔는지 광량 조절이 이상하게 됐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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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도착한 뒤에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이 저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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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숙정문'이라고 불리는 대문에 도착했다. 나름 사대문 중 하나이며 '북대문'에 해당하는 대문이다. 얼마 전에 남한산성을 본 적이 있다 보니 모습이 친근했다.
본인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서울 성곽과 '대문'에 대해서 지금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야 좀 개념이 생겼다.
남대문은 서울 역 근처에 있는 그 숭례문이고, 동대문은 국도 6호선상에 있는 그 흥인지문이다.

서대문(돈의문)은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 역 근처에 있긴 했지만 일제 강점기 때 헐려서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옛날엔 노면 전차가 이 문을 통과했는데, 전차 노선을 복선화하려다 보니 이 성곽이 걸림돌이 됐다고.. 얘는 사대문 중 유일하게 복원이 못 되고 2016년 현재 존재하지 않는 문이다.

마지막으로 북대문이 바로 저 숙정문이지만, 높은 산 속에 있는 관계로 다른 문들만치 유명하거나 사람들이 막 드나들지는 않았다고 한다. 쉽게 말해 존재감이 별로 없다. 남대문하고는 접근성이 가히 넘사벽급으로 차이가 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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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처음에는 창의문에서 숙정문, 와룡 공원까지 북악산을 성벽을 따라 수평으로 횡단하는 코스를 생각하고 왔다.
차를 이용해서 북악산을 오르면 아까 같은 정상으로는 못 가지만, 그래도 성벽 둘레길보다 높은 곳으로 가서 '팔각정'이라고 불리는 정자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면 도보 등산로와 자동차 길은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창의문과 와룡 공원 사이에, 청와대와 더 가까운 지점에 '삼청 공원'이 있고 거기에도 북악산 숙정문을 경유하여 팔각정까지 가는 등산로가 있다. 이건 북악산을 횡단이 아니라 종단하는 코스인 셈이다.

북악산에는 일명 '김 신조 루트'도 있고 북한산 형제봉과 연결되는 '하늘다리'도 있는데 거기로 가려면 숙정문의 밖으로 나가서 서울 성곽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계속 올라가야 한다.
위의 사진은 그 종단 등산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찍은 것이다. 이 등산로는 나중에 북악산에 다시 와서 개척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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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이 정도로 보이기 시작하니 이번 등산도 거의 끝이 난 것 같다. 옛날에는 저기도 다 산이었을 텐데 산중턱까지 다 개발되고 도로가 생기고 길이 닦인 것이다.

정작 와룡 공원에는 가 보니 별 거 없었다. 공 병우 박사가 운영하던 한글 문화원의 소재지가 와룡동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서는 마을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으로 가면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성균관 대학교 서울 캠퍼스, 감사원, 통일부 같은 건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등산을 하면서 서울에 이런 곳도 있다는 걸 알아 가는 건 즐거운 일이다.

안국 역과 혜화 역이 지리상으로는 생각보다 굉장히 가까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30 08:26 2016/05/30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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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초, 봄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을 때 또 무작정 산을 올랐다. 이번에는 지금까지 말로만 수도 없이 들었지 직접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남한산성을 구경하러 청량산으로 갔다.
전에 불암산을 오를 때는 서울 지하철 4호선의 종점인 당고개 역으로 갔고, 하산은 남양주 쪽으로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번에는 5호선의 종점인 마천 역으로 갔고, 하산은 하남 쪽으로 했다.

또한 불암산은 하산한 뒤 남양주의 산기슭에 군부대가 있던데, 여기 청량산은 반대로 등산 전 서울의 끝자락 지점에 군인 간부 아파트와 군부대가 있었다. 듣자하니 특전사 부대라고 함.
지하철 운임에 조조할인이 적용될 정도로 굉장히 이른 시간에 산행을 했다. 덕분에 아침 7시 정각이 되자 군부대에서 기상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군가 BGM들..;; 단 4주간의 짧은 경험이지만 훈련소 시절 생각이 났다.

인근 주민들은 이거 듣는 게 일상이 돼 있겠구나. 단, 지도를 보니 이 군부대는 위례 신도시의 개발로 인해 딴 데로 이전하고 부지가 재개발될 계획인가 보다. 서울 2기 지하철이 없던 시절에는 여기만 해도 굉장한 외곽이고 오지였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말이다.

본격적으로 산을 오르기 전, 아직 맛집들이 즐비한 골목을 지나고 있는데 "서울 빠이빠이. 여기부터는 하남시입니다" 이런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산이 행정구역상 하남에 있는가 보다. 단, 나의 목적지인 남한산성은 하남이 아니라 광주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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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은 도립공원이며 여기 일대는 유명한 등산 코스이다. 그래서 등산로는 내가 가 본 산들 중 가히 톱급으로 잘 닦여 있었다. 난간에다가 바닥은 미끄럼 방지용 매트까지.. 비가 내린 직후의 날씨이지만 진흙 진창을 밟을 일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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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딱히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며 산을 남들 이상으로 빠르게 잘 타지는 못한다. 하지만 1시간 남짓 느릿느릿 쉬기를 반복하면서 산을 오르니 남한산성엔 생각보다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저기는 서문(west gate)이었다.
아침 7시 남짓한 이른 시간이어서 산은 한산했지만, 그래도 하산하는 몇몇 일행과 마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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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봉 옹성에 들렀다가 왔다. 아무 산에나 이런 구조물이 있는 게 아니니 남한산성은 확실히 레어템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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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올라온 길 방향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 날씨가 흐리고 어두워서 전망이 그리 좋지는 않다. 또한 그렇게 막 높게 올라온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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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가 하산할 지점(하남시 춘궁동)을 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좌우로 산(언덕?)에 둘러싸인 일종의 계곡 같은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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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안팎은 대충 이런 형태였다. 대포와 폭격기가 발달하면서 지금이야 이런 성 같은 건 군사적 가치가 전혀 없어졌지만, 옛날에는 가파른 산들 사이에 분지가 조성된 여기가 천혜의 요새 그 자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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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북문이다. 본인은 하산은 이쪽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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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로터리. 남한산성 내부에는 아예 각종 맛집 마을이 조성돼 있으며, 자동차가 들어오는 정도를 넘어서 정규 노선 버스가 다닌다. 물론 산중턱이니 올라가는 데 기름이 많이 들 것 같다. 북한산성 주변은 이런 거 없음.
주변엔 한옥 형태의 한식당이 가득하다. 내가 갔을 때는 시간 관계상 아직 문을 연 곳은 없었음. 그래도 다들 가격이 왕창 셀 것 같았다.

저기서 방향을 꺾어서 조금만 더 가면 남한산성 행궁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건 미처 생각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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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북문으로 나가서 하산을 시작했다. 지도에서 봤을 때 고도 대비 등산로가 좀 짧다는 생각을 했는데 역시나 지그재그 스위치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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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벗어나서 버스 정류장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걸었다. 서울 외곽에서 산 하나만 넘으면 이렇게 전원적인 마을이 펼쳐진다는 게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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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봐 뒀던 버스 종점 겸 공영주차장에 도달했다. 공간이 얼마나 여유로운지, 저 주차장은 관리인도 없고 전면 무료이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차를 여기에다 두고 안심하고 등산을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본인은 등산 원칙이 "갔던 길로 돌아오지 않는다"이기 때문에 어지간히 장거리 등산 원정을 떠나는 게 아닌 이상, 차는 가져가지 않는다. 여기서는 옆에 세워져 있던 마을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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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하남 시내에서 내려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는데...;; 시가지 도로의 모습은 약간 문화 충격을 느낄 정도였다. 나름 광역버스 9301이 지나는 길인데도 시내 도로가 이렇게 작다니.
하남대로라고 불리는 국도 43호선 구간을 제외하면 다 저런 것 같았다.

서울 역까지 가장 깊숙이 들어가는 버스는 9301뿐이고, 나머지 도시형 버스들은 다들 동서울 터미널 정도까지만 갔다. 물론 어느 것이든 국도 43호선의 천호대로 구간으로 들어가서 5호선 강동 역을 경유하는 건 변함없으므로 본인은 아무 거나 타고 귀가했다. 하남시와 인접한 서울 동쪽 끝자락에도 그린벨트가 풀리고 아파트가 곳곳에서 지어지는 게 보였다.
어쩌다 보니 남한산성 답사기는 다른 등산기보다 글이 좀 길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24 08:34 2016/05/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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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생활 관련 잡설

1.
내가 한겨울에 운전을 하면서 지금까지 본 가장 낮은 기온은 -13도이다.
그런데 기온이 영상과 영하를 오락가락 할 때 차에서 표시해 주는 온도계를 보면, 가끔 0도라고 표시할 때도 있고 -0도라고 표시할 때도 있다.

기온이 영상이었다가 어느 땐가 영하로 내려갔다면, 그 사이에 0도이던 순간이 적어도 한 번 이상 존재했겠다는 중간값 정리 개드립이 떠오르는 한편으로.. (시각 t에 대한 기온 변화 함수는 연속함수일 테니..)
또 하나 떠오른 생각은.. "저 컴퓨터는 온도를 내부적으로 부동소수점 실수로 표현하고 있겠구나!"였다.

2의 보수 기반 정수로 표현했다면 0이 두 종류가 있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이공계 지식을 알면 기계 내부의 별별 디테일이 머리에 들어온다.
그나저나 연도에는 서기 0년이 없다고 한다. 서기 1년의 이전 해는 바로 기원전 1년. 마치 건물에서 지상 1층의 아래는 0층이 아니라 바로 지하 1층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밤에 잠을 자는데 그냥 평범한 침실이 아니라, 밖에 어디 아늑하고 아담하고 눈에 안 띄는 곳에 콕 짱박혀서 자고 싶다. 집 밖에서 야영을 하고 싶다.
하루 종일 대형 트럭이나 트레일러를 몰다가 밤에 뒷좌석의 간이 침대에서 길다랗게 누워 자는 화물차 운전사 있잖아.. 뭐 그런 거에 갑자기 꽂혀서 로망이 생겼다.

트럭이 아니라 버스도. 땅 넓어서 이동에 며칠씩 걸리는 나라에서는 버스 안에도 화장실이 있고 운전사가 두 명 타서 한 명은 운전하고 다른 한 명은 짐칸에서 자다가 몇 시간 주기로 교대 근무를 한다는데.. 뭐 그렇게 자는 것도 좋다. 되게 편안하게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청계천 공원이나, 아예 깊은 산 속 수풀 덤불에 짱박혀서 침낭과 외투 껴입고 자고 싶기도 하고,
무슨 무장공비나 북파공작원처럼 비트 파서 맥북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싶기도 하다.
아 근데.. 산에서 자면... 그땐 식물들도 광합성 안 하고 호흡만 하기 때문에 산소 공급 측면에서는 안 좋으려나.

성경을 동원해서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밖은 폭풍 때문에 배가 다 가라앉게 생겼는데 밑전에서 쿨쿨 잘 쳐자던 요나처럼 자고 싶다. 서리해서 먹는 수박이 박진감 넘치고 더 맛있듯, 저거 그야말로 꿀잠이지 않았을까? 오죽했으면 선장이 한심해서 sleeper라는 단어까지 썼다. ㅋㅋ

3.
과식과 과속은 훌륭한 스트레스 해소 수단이다. 다음은 고기와 관련된 명언들이다.

  •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죠." (베어 그릴스)
  • "밥상에 자연의 향기가 물씬 풍기네. 자연에도 달리는 동물이 있는데 여긴 그게 없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빨리 라면 끓여 주세요~~" 의 주인공. ㅠㅠㅠ 그런데 세종대왕도 딱 저런 타입이었다~ 고기와 학문을 사랑하신 우리 대왕님)
  • "이모, 반찬이 죄다 잡범이네. 아니, 어떻게 살인사건이 하나도 없나?" (영화 아저씨 대사 중)
  •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일본군 병맛 졸장 무타구치 렌야)

4.
지금까지 컵라면으로만 접하던 육개장 사발면이 언제부턴가 봉지 라면으로도 나오는 걸 편의점에서 봤다.
이걸 보니 딱 바로 든 생각은... 뭔가 스마트폰 앱이 데스크톱 PC용으로 포팅되어 출시된 듯한 느낌이다~~!! 카카오톡처럼.
신라면과 짜파게티는 반대로 PC에서 오랜 인기를 누리던 장수 소프트웨어가 모바일용으로 포팅된 예이다.
식당에서 라면을 시켰을 때 보통은 면이나 스프가 신라면 베이스가 많다고 하는데, 그럼 이건 서버 기반의 웹 애플리케이션인 걸까? =_=;; 라면 하나를 두고도 별 희한한 생각이 다 들었다. ^^

5.
2000년대 이래로 우리나라 가요계는 그야말로 그냥 아이돌도 아니고 '걸그룹' 아이돌 위주로 구도가 급격히 바뀐 듯하다. H.O.T 같은 남자 그룹도 아니고, 이 효리나 박 정현 같은 여성 솔로도 아니고.. 하긴 옛날에는 핑클이나 SES 같은 그룹도 있긴 했다만 요즘은 그때보다 애들이 더 어리고, 무엇보다 그룹 당 인원 수가 무진장 많으며 게다가 다국적이기까지 하다. 아이고 정말 정신없다. 그 와중에도 아이유는 어째 솔로로 여전히 잘 나가고는 있다만...

올해 연초에 방영됐던 '프로듀스 101'은 참 인상적이었다. 슈스케 시리즈보다 스케일과 선정성이 더 커졌다. "정말 자본주의의 진수이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약 빨고 이런 프로를 만들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저런 걸 한다고 또 저기 출연을 하는 여자애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참가를 신청해서 저 고생인 걸까..?" 여러 생각이 들었다. 출연자들은 다들 98년에서 2002년생.. 나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어린 걸 보고는 기겁을 했다.

예능과 끼만으로 돈 버는 게 쉬울 리가 있겠나..;; 저런 스트레스 받느니 차라리 학업 스트레스가 낫지. 나중에 내 자녀가 철딱서니 없이 '나도 연예인 될래. 걸그룹 아이돌 할래' 이러면 참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드라마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정공파로 나가는 건 약발이 다했으니 '병맛'으로 승부하는 것 같다. "병맛으로 인한 중독성 때문에 욕을 하면서도 저게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자꾸 보게 된다" 같은 것이랄까.. 텔미, 크레용팝 빠빠빠, 픽 미 다 그런 부류인 것 같다. 걸그룹과 관련해서 본인이 최근에 얻은 경험으로는..;;

  • 서현과 설현이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걸 얼마 전에 확실하게 깨우쳤다. 특히 설현은 쏠 스마트폰 CF에 출연해서 더 유명해졌다.
  • 10년이 넘게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의 약자로만 알았던 이니셜이 이제는 걸그룹 명칭이 됐구나. 101이 그대로 알파벳으로.. 참 기발하다. =_=;;
  • 크레용팝 빠빠빠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은 서울 아차산 기슭에 자리잡은 폐업한 유원지인 "용마랜드"라는 것을 알게 됐다. 뮤비에 나온 장면을 항공 사진 지도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 한때 교회에서 <주께 가오니>를 굉장히 과격한 독수리춤 안무로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했던 그 당사자가.. 훗날 트와이스라는 걸그룹의 멤버로 데뷔했음을 알게 됐다! 이름은 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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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면은 거의 방사능 물질과 같은 급으로 왕창 위험한 물질이었구나. 수 년 전부터 "지하철 역사 내부에서 석면 검출" 이러는 뉴스 보도를 여느 "미세먼지 주의보"처럼 그리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지내 왔는데.. 그렇게 사소하게 치부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슬레이트 지붕도 전부 석면이라면.. 그렇게도 위험한 물질인 것치고는 일상생활에서 너무 흔히 봐 왔는데 말이다.

보온· 단열재로 쓰였다는데 그럼 스티로폼과도 용도가 비슷한 건가?
한 분야에서 가성비가 아주 뛰어난 물건이 환경을 치명적으로 파괴하고 인체에 안 좋다는 게 뒤늦게 밝혀져서 흑역사로 전락한 게.. 토머스 미즐리의 발명품 말고도 더 있었다.

7.
끝으로, 운전자의 직업병을 소개한다.
골목길을 거닐다가 옆에 요런 적당한 공터를 발견하면.. 차를 세워 놓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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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발견한 어느 한적한 골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08 08:23 2016/05/08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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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이야기 계속..)
유명한 순교자 중에 손 양원 목사는 신사 참배 거부로 인한 투옥(일제)에다 빨갱이들에 의한 순교라는 박해와 순교 2관왕을 달성했다. 게다가 그는 자기 아들을 죽인 폭도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미국으로 유학 보내려던 친아들에 대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보내 주신 것을 감사, 이 미천한 가문에서 감히 순교자가 배출하게 해 주심을 하나님께 감사" 이렇게 간증했던 정말 넘사벽급의 크리스천이었다.

저분 말고도 몰년이 1950년 가을/겨울인 분들이 너무 많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 원 성덕 목사: 공산 치하의 의주 영산 교회를 시무하던 1950년 12월,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살해당했다.
  • 이 창현 영수(領袖. 장로교의 직분 이름): 1950년 11월 18일 공산군에게 체포. 평원리 뒷산에서 "죽어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다"라는 신앙 고백과 동시에 총살 당하고 구덩이에 매장됨.

북괴 공산 빨갱이 집단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겠다. 빨갱이의 만행을 용서하는 것과,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인지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여기는 반공 정신 함양을 위해서도 방문할 가치가 있는 좋은 곳이었다.
기념관의 밖에도 야외 예배 공간과 산책로가 있는지라, 반쯤은 기독교 수양관이나 기도원 같은 분위기도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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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을 갖다 놓고는 "나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 엥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ㅜㅜㅜ 그런데 비록 대한민국이 지금 신앙의 자유가 마음껏 보장된 고마운 나라라고 해도, 이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볼 때 마냥 웃을 일은 아니다.

첫째, 우리는 비록 옛날처럼 성경을 대놓고 불태우거나 성경 소지자를 국가에서 나서서 죽이는 시대를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성경이 변개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자꾸 그 믿음을 고집하면 죽는다"라는 위협은 없지만, "그 고집을 조금만 꺾으면 돈도 훨씬 더 많이 벌고 인생이 참 편해질 텐데?" 같은 유혹은 곳곳에 상존해 있다. 옛날에는 가야 할 길이 참 물리적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이었겠지만, 지금은 가야 할 길이 뭔지조차 엄청 혼란스러워지고 전투 양상이 교묘해져 있다.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좁은 길을 가고 진리를 수호하고 살면, 그게 곧 사육신에 준하는 생육신이 될 수 있다. "죽기까지 신실하라"(계 2:10)라는 말은 정말 피할 수 없는 경우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로 신실하라는 말이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100% 죽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실제로 죽이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둘째로..
아직까지는 매우 극단적이고 비관적인 상상으로 비쳐질지 모르나, 대한민국 땅이라 해도 가까운 미래에 그야말로 물리적인 박해가 시작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지금과 같은 속도로 전세계적인 반성경 반기독교 감정이 횡행한다면 다른 모든 정치 집회나 폭력 시위는 허용되면서 공개적인 거리 설교나 선교 행위만은 금지될 것이다. 동성애가 죄라고 공석에서 말하는 게 금지되고, 이걸 어기면 잡혀 가고 전과자가 되고 재산을 몰수당하고 공직에서 쫓겨날지 모른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진보의 탈을 쓴 안티 대한민국 종북 성향의 흉악한 정치인· 국회의원· 법조인이 권력을 장악한다면, 저런 날이 훨씬 더 빨리 찾아오게 될 것이다.

비록 신약 크리스천들은 적그리스도 통치와 엄청난 자연 재해를 직접 경험하는 대환란까지는 겪지 않고 그 전에 휴거되겠지만, 대환란의 전이라 해도 어느 정도까지 세상이 맛이 가는 걸 보고 휴거될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세상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까지 절~대로 성경 친화적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러니 영적으로 정신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한다. 이것만 생각해도 끔찍한데 아예 교회가 대환란을 직접 겪는다는 말은 꿈에서도 생각하기 싫다.

...
자, 이렇게 경건한 곳을 들른 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용인에 있는 삼성화재 교통 박물관이었다. 마침 이 타이밍에 맞춰서 흐리던 날씨도 아주 맑아진지라, 분위기 전환용으로 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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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는 백 남준의 작품이라는데 흰색 칠을 씌운 옛날 자동차들이 쭉 세워져 있었다.
자동차 디자인이라는 건 마치 패션 유행처럼 변해 온 것 같다. 마차와 별 차이 없던 빈약하던 시절, 저렇게 동글동글 두툼하던 시절 등등~ 나도 차 모양만 보고는 이건 대략 몇 년대 디자인이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으면 좋겠다.
스페어 타이어도 한때는 차 뒤에 있다가 나중엔 측면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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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교통 박물관인데 이 물건이 없어서는 곤란하겠지. 1886년에 벤츠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4행정 휘발유 엔진 자동차이다. 오늘날의 어지간한 경차에 맞먹는 984cc 배기량으로 엔진 출력은 겨우 1마력이 채 되지 않았다.
컴퓨터 회로의 집적도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자동차 엔진도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엄청나게 발전해 왔다. 그런데 전자식 컴퓨터의 역사는 아직 100년이 채 안 됐다는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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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실물 전시는 자동차 위주이고, 거기에 철도와 선박 이야기가 약간 겉절이로 낀 정도였다. 비행기는 딱히 소개가 없고 야외에 옛날 소형 프로펠러기 두 대가 전시된 게 전부이다.
철도에 대해서는 증기, 디젤, 전기 기관차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있었다. 그리고 옛날 열차 승차권 컬렉션도 있었는데.. 이런 물건만 전문적으로 구경하려면 의왕에 있는 철도 박물관을 가는 게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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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의 언어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자동차인 '시발'. 미군 지프 부품을 이용해서 최초로 한반도에서 밑바닥부터 '생산'된 자동차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옛날엔 삼륜차가 있어서 지금의 다마스· 라보 같은 생계형 용달차 역할을 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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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나름 아주 어렸을 때(초딩~) 포니 2 말고 포니 1이 돌아다니는 걸 아주 가끔 본 적도 있는데.. 실물을 얼마 만에 다시 보는지 모르겠다. 반가워서 사진을 두 장 찍었다. 포니는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올드카가 전시된 건 포니, 시발, 코로나, 기아 삼륜차 정도가 전부였다. 여기가 무슨 <금호상사>처럼 올드카 전문 전시관은 아니니까. 그래도 브리사나 봉고를 보지 못한 건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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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풍미했던 영국과 미국의 대형 고급 승용차가 전시되어 있다. 롤스로이스 팬텀(검정)이야 유명하고, 캐딜락 엘도라도는 미국식의 각진 디자인이 참 인상적이다. 자기네 본토가 독보적으로 땅 넓고 자원 풍부하고 내수 수요도 많다 보니, 차를 엄청 크게 만들곤 했다.

딴 얘기이다만, 역사상 최초로 전륜구동 승용차를 만든 곳은 프랑스의 시트로엥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복잡한 엔진 부품에 끼여 있고 조향 역할도 하는 앞바퀴에다가 구동축까지 집어넣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 포니는 현실적으로 만들기가 더 쉬운 후륜구동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포니 택시를 탔을 때 뒷좌석의 중앙 하부를 관통하던 커다란 구동축을 지금도 기억한다.
그러나 전륜구동이 개발되면서 중소형 승용차는 효율이 더 좋아지고 뒷좌석 공간도 더 확보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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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외에 전시된 '혀기형 증기 기관차'.
얘는 수인선과 수려선에 투입될 목적으로 생산된 협궤용 증기 기관차이다. 아까 보고 온 그 오천 역 일대를 실제로 지나며 달렸다는 뜻이다. 서로 다른 두 개념이 이렇게 서로 연결이 된다. 이 증기 기관차는 디젤 동차의 등장과 함께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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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바깥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어서 돗자리 깔고 텐트 치고 놀거나 쉴 수 있었다. 가족 단위로 애들을 데리고 오기도 좋고, 학교에서 단체 관광을 오더라도 끄떡없을 듯했다.
그런데 토요일에 이렇게 날씨가 좋으면 이런 박물관보다는 근처의 에버랜드가 사람들로 터져 나갔을 것 같다. ^^

이상으로 이천· 용인 테마 여행을 아주 즐겁게 마쳤다.
여기 말고도 우리나라의 서쪽 끝, 남쪽 끝, 동쪽 끝, 중부 등 몇 군데 가 보려고 찜해 둔 곳이 있다.
거기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주요 기능 개발이 끝나고 박사 과정도 연구 학기로 들어갔을 때쯤 1년에 한 번씩 가 볼 생각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10/06 19:23 2015/10/06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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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작년 5월에 철원에 성공적으로 다녀 온 것에 고무되어 이번에는 토요일 개천절에 경기도로 테마 여행을 떠났다.
날씨는 한창 맑고 좋고, 학교는 입시생들 논술고사 때문에 폐쇄이고, 공휴일이라 교회 신학원도 안 하니 이런 날은 잠시 짬을 내어 어디 갔다 올 가치가 충분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2가 아직 갈 길이 멀며 회사일과 학교 과제가 날 압박해 오고 있지만, 일단은 잠시 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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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를 한 직후에 고속도로를 좀 뛰었더니, 역시나 시내 구간에서는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엄청난 연비가 나왔다.
사람에게 힘든 건 기계에도 동일하게 힘든 법. 경제 속도 + 최대한 관성으로 쭉쭉 달려 주는 게 답이다.
(주유를 하고 나면 차내 컴퓨터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던 연비 정보가 싹 없어지고 초기화된다.)

그리고 아침 일찍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옛 수려선에 있던 오천 역 건물이었다. 이것은 현재까지 전국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협궤 철도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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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려선(수원-여주)은 일제 강점기이던 1930년에 부설되었다가 지금으로부터 거의 반세기에 가깝게 전인 1972년에 이미 폐선되어 없어진 철도이다.
선로와 노반은 다 사라졌지만, 이천에 있던 오천 역 건물만은 민가로 바뀌어서 유일하게 원형이 잘 보존되었다. 붉은 벽돌 외형이 그 대표적인 예. 요즘 지어지는 철도역들은 유리궁전 스타일이 대세이지만 그때는 저게 주된 건축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와서는 이 건물은 거주민이 없이 흉가처럼 방치됐고, 부지 일대는 재개발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저 건물도 언제 불도저로 싹 밀려 쥐도 새도 모르게 철거될지 알 수 없다.
철덕으로서 나도 어서 가 봐야 한다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드디어 성지순례를 마쳤다. 역사 주변의 여러 지점에서 사진을 찍은 뒤, 마지막으로 옆 건물에 올라가서 역사를 내려다보며 한 컷을 더 찍었다.

아무쪼록 저 건물은 사라지지 않고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이 됐으면 좋겠다. 경의선 신촌 역 옛 역사가 보존된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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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 역 건물을 답사한 뒤에는 '진짜' 성지순례를 하러 갔다. 인근에 있는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을 방문한 것이다. 오천 역에서 거의 7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본인은 이 점을 염두에 두고 두 곳을 동시에 답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순교자 기념관은 어느 성도가 산 속 사유지를 기증해서 건립되었으며, 지금 서울 합정동에 있는 선교 100주년 기념 교회던가? 거기서 걷히는 헌금으로 운영된대서 입장료조차도 안 받는 대인배 기념관이었다.

가는 길부터가 포스가 넘쳤다. 몇몇 주택과 회사· 공장을 지나서 산을 계속 오르자, 산상설교부터 시작해서 성경 구절 팻말들이 방문자를 반겨 주었다. 나중에는 한국에서 순교한 목사· 전도사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들이 옆에 쭈욱 늘어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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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한국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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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에는 이런 그림체로 순교를 묘사한 그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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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 호 사건 때 목숨을 잃은 토머스 목사/선교사는 '순직'인 건 명백하겠지만 '순교'라고까지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마치 지난 2004년에 김 선일 씨도 이라크에서 업무상 '순직'을 한 것이지 '순교'는.. 글쎄? 인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요나에 대해서도 순교자로 묘사해 놓은 그림이 있었다. 요나가 요나서를 기록하고 나서 나중에 다른 일을 하다가 순교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나서의 그 사건에서만은 그는 성경적으로 볼 때 절대로 순교자 모드가 아니었다. 이런 건 좀 분별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거시적으로는 정말 선교의 빚을 지고 있는 게 맞다. 그 옛날에 미국에서 (헬)조선으로 선교사를 보낸 건 지금으로 치면 우리나라에서 무슨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따위로 선교사를 보내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본인 당사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처자식까지 얼마나 고생해야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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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2층에는 예배실이 있어서 교회에서 단체 관람을 온 사람들이 모여서 간단히 예배 집회를 열 수 있었다.
사진에는 안 나왔지만 벽에는 우리나라 교회사와 관련된 여러 글과 사진 자료들이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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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성경 번역의 변천사. 스캔 하나는 참 깨끗하게 잘 했다.
다만, 우리나라에 처음부터 킹 제임스 성경 계열의 역본이 전해지지 못한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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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지막 3층에는 '순교자' 믿음의 선배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다.
한반도에서 기독교(개신교 포함)는 천주교와 달리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는 그리 많지 않다. 기독교는 프랑스인이 아닌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전파되었고, 공권력에 의한 박해보다는 제사 거부 같은 걸로 인한 민간 차원에서의 박해가 더 많았다.
그나마 구한말 때의 거의 유일한 순교자로는 백 홍준 장로만이 소개되어 있다. 이것도 직접적으로 사형을 당한 건 아니고 옥사다.

일제 강점기 때도, 독립 운동과 무관하게 기독교 신앙 자체만으로 인한 박해는 말기의 신사 참배 강요 이전까지는 딱히 심한 지경이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정말로 엄청난 수의 순교자가 발생한 건 오히려 해방 이후부터였다. 공산주의자, 일명 빨갱이들은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일당독재 우상화를 거부하는 기독교를 지독하게 박해했기 때문이다.
다음은 기념관에 적혀 있는 소개 문구이다.

* 북한의 교회 재건
"38선이 놓이면서 북한에서는 교회의 탄압이 계속되었고, 이를 피하여 많은 신도들이 남한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북한의 공산당들은 교회가 새롭게 재건되는 강한 힘을 느끼게 되자 1946년 11월 3일이 일요일인데도 이 날을 북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의 날로 정했다(참고로 1948년 5월 10일 남한의 총선거일은 월요일!). 이에 교회들은 즉시 반발하고 결의문을 채택하여 북한 당국에 보냈다. 이러한 항거에 부딪치자 공산당들은 이들을 투옥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면서 박해를 가했다.
드디어 1946년 11월 28일에는 그들의 어용 단체로 기독교 연맹을 조직하여 교회를 공산주의 선전에 이용하고, 김 일성을 절대 지지하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까지 발표하게 했다. 이에 따라 이 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목사들은 투옥되거나 추방 당했다."


옛날 로마 제국 시절에 대음모자 콘스탄틴이 부패한 국가 어용 교회(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신)를 만들고는, 거기에 가담하지 않는 크리스천들은 더 악랄하게 괴롭히고 박해한 것과 완전히 똑같다. 평양이 한때 동방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기도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그에 반해 우리 남한, 대한민국은..

* 남한의 교회 재건
"해방 후 남한은 미군이 진주함으로써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었다. (만세!) 일제 말엽에 강제로 모든 교파의 통합이 이뤄졌고 해방 후에도 그 합동 교단을 그대로 존속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45년 9월 8일에 새문안 교회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목사들이 모여 교회의 통합에 대한 논의를 하였으나 각 교파 교회로의 환원에 대한 집념이 더 강한지라 통합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구세군 등 각 교파는 각자 활발히 선교하여 교세를 확장하여 갔다."


이래서 남한과 북한의 운명이 극과 극으로 갈린 것이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며 한없이 타락하던 북이스라엘과, 그나마 좋은 왕과 나쁜 왕이 번갈아가며 나오던 남유다 왕국처럼!
난 개인적으로 교파가 저렇게 찢어진 것을 그렇게 나쁜 현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일제 강점기 때처럼 사람의 신앙의 자유를 거슬러서 강제로 통합을 하고 그 통합을 주도한 주체가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게 훨~씬 더 나쁘고 악한 현상이다.

대한민국은 크리스천 초대 대통령 덕분에.. 한중일 나라들 중 유일하게 건국/정부 수립 거의 직후부터 성탄절이 빨간날로 지정되었으며, 군대 내부에 군목을 비롯한 군종 병과가 가장 앞장서서 제정되었다. 정교일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헌 국회 기도문 같은 건 본인은 아주 고맙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5/10/04 08:38 2015/10/0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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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과 잡설

* 이번엔 프로그래밍 말고 다른 분야의 컬렉션이다.

1. 이메일 주소 변경

이미 오래 된 일이지만... 본인은 대외적으로 홍보하고 사용하는 이메일 주소를 올해 상반기부터 드림위즈에서 gmail로 변경했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도움말에 안내되어 있는 메일 주소도 고쳤다. 지금까지는 영문 홈페이지에다가만 gmail을 안내했지만 이제는 한국어 사이트에다가도 주소를 바꿨다.

변경한 이유는 드림위즈가 이메일을 보내는 본연의 기능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서비스가 낙후해 있고 용량이 적고 비번이 8글자까지밖에 입력 안 되는 개막장인 정도여서가 아니다.
메일을 보냈는데 실제로는 상대방에게 메일이 가 있지 않아서 중요한 일정에서 골탕을 여러 번 먹고 나니, 이제는 안심하고 드림위즈 메일을 이용할 수 없어졌다.
지도교수님에게 보낸 수강 관련 중요 메일이 안 가고, 문서 작업 때문에 보낸 초안 원고가 안 가고.. 게다가 늘 발생하는 것도 아니고 진짜 러시안 룰렛마냥 복불복인 것 같다.

예전에 알집이나 알FTP가 왜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가? 구린 라이선스 정책은 부가적인 얘기이고, 중간에 파일을 잘라먹고 사용자의 데이터를 파괴해 버리는 크리티컬한 버그 때문에 욕 먹었던 것이다. 자기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을 못 하니까. 드림위즈 메일도 이와 동일한 이유 때문에 버리기로 했다.
하긴, 주변 지인에게 이걸 얘기하니 돌아오는 반응은 "드림위즈 아직도 살아 있었어?"이긴 했다. =_=;;

gmail은 다 좋지만 국내 포털들과는 달리 간편한 대용량 첨부 기능과 수신 확인 기능이 없는 게 아쉽긴 하다.
대용량 첨부 중에서는 오로지 다음만이 2GB가 넘는 ‘초대용량’까지도 첨부가 된다. 드림위즈와 네이버는 그렇지 않더라.

2. 복날 몸보신

교회엔 내가 철도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핫도그(ㄱㄱㄱ, ㄱㅈㄱ 또는 ㅂㅅㅌ의 애칭)에 사족을 못 쓰는 지인이 있다.
난 경험상 개고기는 수육은 좀 느끼한 것 같고 그래도 개장국은 맛있게 잘 먹는다. 양념도 마음에 들고. 개고기는 성경적으로는 하나도 걸릴 것 없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말씀과 기도로 성결하게 한 후 먹으면 된다. 난 오히려 청국장이나 홍어 같은 건 못 먹는다.

하긴, 핫도그라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의 아문센의 남극 탐험이 생각 난다. 그거야말로 그 당시 장비와 보급 기술만 갖고는 핫도그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다. 아, 거기서는 고기도 다 날것으로 먹었을 테니 '핫'은 아니겠다만.. -_-;;

일단은 개는 극지방에서의 생존성과 수송력 제공 가성비가 말을 훨씬 더 능가했다. 스스로 체온 조절이 가능하고 식량도 사람의 것과 동일했다. 영국의 스콧 팀은 조랑말과 스노우모빌을 운용했지만 둘 다 남극의 혹한 속에서는 죽고 고장나고 피봤다.

아문센 팀은 탐험 과정에서 효용이 떨어진 개들을 사정없이 잡아먹었다. 심지어는 먼저 잡거나 죽은 개의 고기를 다른 개에게 사료로 주기도 했다! 하지만 열량 소모가 극심한 남극에서는 최대한 여유를 갖고 준비한 기존 보급에다 바다표범 현지 조달로도 식량이 부족했고, 그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스콧과 영국 언론은 영국 신사 드립을 치면서 개썰매나 타고 개고기를 쳐먹은(는) 야만인이라고 아문센을 사정없이 깠다. 그러나 신사면 뭘 하나, 결국 스콧은 아문센과는 달리 남극에서 살아서 못 돌아오고 다 죽었다.

요즘은 고어텍스, GPS, 초고밀도 생존 식품 같은 첨단 기술 덕분에 그때처럼 '서플라이 디팟'을 미리 안 만들고 동력기관이나 동물도 안 쓰고, 심지어 비행기로 실시간 보급조차 안 받고 사람만으로 남극점에 뚝딱 갔다 온다. 하지만 그래도 한여름에만 갈 수 있는 건 변함없으며 1인당 100수십 kg에 달하는 보급 자루를 썰매에다 싣고 질질 끌면서 정말 힘들게 살 잔뜩 빠지면서 갔다 온다.

옛날에 우리나라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던 시절엔 "세계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프로파간다 하에서 손님들의 동선상에 있는 보신탕집들은 강제로 셧다운 당하고, 사철탕· 영양탕 등으로 간판 바꿔 달고 음지에서 영업하던 적이 있었다.;;; 정말로 개고기만 딱히 야만적이고 잔인하다고 볼 이유가 없는데..
오히려 애완견을 집 안에서까지 데리고 와서 키우는 게 성경적으로 당장 대놓고 죄악은 아니더라도 별로 비추에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인간 학살자 독재자들이 이상한 동물 보호론자였다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개고기는 아무래도 규모의 경제에서 밀리는지라 국밥류로 한 끼 식사 정도 하려면 초밥 정식 먹듯이 1만 몇천 원 이상 들 각오는 해야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러 사람이 가면 1인 1국밥 식사 대신 야채가 많아서 가성비가 더 높은 전골류를 권하더라.
저 친구가 "맛 한번 보지도 않고 개고기를 반대한다" 이렇게 한탄을 하길래, 모 전대통령의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드립이 문득 떠올랐다.

3. 전동차 재림 신앙

언젠가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던 때의 일이었다. "아차!" 도시락통을 놔 둔 채 전동차에서 내렸다는 걸 알아 챈 건 왕십리 역에서 하차한 지 3분 남짓한 시간이 경과한 뒤였다.
전동차 안에서 노트북 PC로 다른 작업에 너무 집중하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전동차로부터는 이미 100미터가 넘게 떨어진 상태.

유실물이 있다는 것을 감지한 직후에는 불안과 흥분 때문에 마치 차에 갓 시동을 건 직후처럼 심장 회전 rpm이 치솟았다. 그러나 난 최대한 침착하려 애쓰면서 rpm을 조절했다.
"역무실에다 신고를 해야 할 텐데 이 역에 코레일 역무실은 어디쯤 있더라?"(분당선이므로) 생각을 하면서 다시 코레일 관할 구간으로 갔다.

그런데 생각을 해 보니 왕십리역은 분당선의 시종점이고, 여기는 딱히 차량 기지나 주박 공간이 있지는 않다. 단지 인상선만 있을 뿐.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가설이 도출됐다. 그 열차가 떠난 지 아직 10분도 채 경과하지 않았으니, 내가 탔던 열차는 인상선을 거쳤다가 다시 반대편 승강장으로 곧 그대로 들어올 것이다. 청소부 아줌마는 바닥만 신경쓰지 그 짧은 시간 동안 선반을 일일이 다 살펴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행 1:11 말씀이 내게 평안과 위로를 주었다. "너희 갈릴리 사람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바라보느냐? 너희를 떠나 하늘로 들려 올라가신 이 동일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렇다. "너희 전철 승객들아, 너희가 어찌하여 패닉에 빠져 있느냐? 너희를 떠나 인상선으로 들어간 이 동일한 상행 열차는 너희가 봤던 상태 그대로 진행 방향만 바꿔서 하행선 승강장으로 되돌아오리라." 아멘.

상행 열차는 맨 앞칸을 탔으므로 이번엔 난 하행 승강장의 맨 뒷칸에서 다음에 들어올 열차를 기다렸다. 잠시 후 하행 열차가 들어왔고, 그 열차의 선반에 아까 내가 놔 뒀던 도시락통이 있는 걸 창문을 통해 확인했다. 역무실에 연락을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전동차 재림 신앙은 그 믿음대로 응답되었고 간증거리가 되었다. 지하철 영화 <튜브>에서 위기를 넘겼을 때 통제실 권 실장이 기뻐하던 그 장면이 떠올랐다.
다른 승객들은 열차에 올라타서 자리에 앉았지만, 나는 그 도시락통만 쓱 끄집어 낸 뒤 도로 내렸다. 주변의 다른 승객들은 나의 행동에 저런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7/29 08:33 2015/07/2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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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여름의 여행 일지

1. 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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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의 북쪽 종점인 당고개 역의 주변을 보면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는 게 참 인상적이다.
기왕 등산을 할 거면 그 산을 한번 올라 보고 싶다는 생각을 진작부터 했다.
결국은 같은 수락산이긴 한데 지난 3월엔 깔딱고개 근처까지 간 반면, 이번엔 귀임봉을 지났으며, '서울 둘레길'을 지나서 7호선 마들 역 근처로 귀환했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맥북은 나의 소중한 등산 동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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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앙선 아신 역

이제 전동차의 운행 계통은 경의선과 중앙선이 통합되어 경의중앙선이라고 불리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경의선과 중앙선은 같은 수도권 광역전철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분위기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중앙선이 지나는 지역인 양평은 상수도 보호로 인해 태생적으로 개발 제한 봉인이 걸린 곳이 많으며, 개량된 중앙선 역시 강을 가까이 지나는 구간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풍경 사진 중에서 역시 산과 강을 담은 것만 투척한다. 색감이 예뻐서. 한적한 경춘선이나 중앙선 전철역으로 나가서 코딩이나 독서를 하고 있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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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린벨트 마을 답사

방학+주말을 기념해서 등산만 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고 차 끌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했다.

난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와 같이, 서울 외곽의 야산과 그린벨트 지대 탐험에 대한 로망이 좀 있는 사람이다. 한번은 동부간선 → 지방도 23호선을 타고, 서울 공항 근처의 신촌동과 심곡동 마을을 드디어 밤에 몰래 답사했다. 여기 사는 주민은 어떤 사람들일까? 대대로 여기 살던 선조의 후손? 아니면 겁나게 부자들? 민통선 안에서 농사 짓는 사람들만큼이나 신기하게 느껴진다.
미처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전방에서 갑자기 굉음과 함께 거대한 수송기가 활주로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서울 공항(=공군 기지)이 코앞이니까.

그 뒤 청계산로로 갈아탔다.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는 으슥하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면서 대왕 저수지와 신구대학 식물원 일대를 구경했다. 여기는 바깥쪽 차선이 다 자전거 도로로 만들어져 있었다. 요런 데서 차 세워 놓고 혼자 자면 가히 야영 캠핑이 따로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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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고가 도로는 서울-용인 고속도로(171)이다.

계속 진행하자 길은 경부 고속도로를 나란히 지나면서 북쪽으로 가기 시작했으며, 말 그대로 청계산 등산로와 신분당선 청계산입구 역이 나왔다. 중간엔 서울 신원동의 새정이마을을 들러서 답사했다.

4.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

양재-서초 IC 사이는 잠깐 경부 고속도로 구간으로 건넜고, 다음으로 본인은 남부순환로를 타고 서울의 서쪽 끝으로 갔다. 남부순환로는 중간에 압박스러운 경사는 그렇다 치고, 중앙에 화단이 쭉 조성돼 있는 게 참 인상적이었다. 서울에서 이런 도로는 여기밖에 없는 듯. 도로 폭이 차선수를 홀수 개로 어정쩡하게밖에 만들 수 없는 규모이기라도 했나 보다.

그리고 본인이 새벽에 간 곳은.. 오류동 역과 푸른수목원의 사이에 있는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였다. 세상에, 주거지 근처에 이렇게 풀이 무성하게 우거진 폐선을 보는 건 옛날 수인선 협궤 폐선 이래로 처음이었다. 게다가 여긴 엄연히 인서울 지대인데! 과연 철덕의 성지 순례 코스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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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울 지하철 7호선 천왕 차량기지

서울 남서쪽 끝까지 먼 길을 찾아가서 철도 답사를 했는데, 여기를 들르지 않고 간다면 그건 철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천왕 차량기지를 경건한 마음으로 한바퀴 빙 돌면서 성지순례를 했다. 자동차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여기를 직접 가 보는 날이 오는구나!

차량기지 중에는 도봉이나 개화처럼 아예 내부에 역이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7호선 장암, 9호선 개화 역) 지축, 창동, 구로, 군자, 신내처럼 다른 전철역 근처에서 기지를 그럭저럭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아니면 철도로는 접근을 못 해도 고덕이나 수서나 모란처럼 고속/고속화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의 차창 밖으로 어렴풋이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하지만 천왕 차량기지는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차량기지들 중에 가장 존재감이 없고 접근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곳이라고 여겨져 왔다.

여느 차량기지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구간은 담장과 철조망이 쳐져서 은폐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용케 요런 곳을 찾았다. SR001 전동차가 지상에 나와 있는 실물 사진을 건지는 데 성공했다. 허나, 내가 하는 행동은 남이 보기엔 영락없이 국가 기간 시설에서 어슬렁거리면서 무단 촬영이나 하는 수상한 간첩-_-처럼 보였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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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을 통해 그린벨트 마을 3군데와 경기화학선 철길, 그리고 천왕 차량기지 답사라는 수확을 거두고 돌아왔다. 자동차는 이런 데 활용하라고 만들어진 편리한 문명의 이기임을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7/10 08:36 2015/07/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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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변 처리 관련 이야기 외

1. 하수도 시설

사람이 사는 환경에서 배설물의 처리는 생각보다 굉장히 골치 아프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오늘날과 같은 위생적인 상하수도 인프라가 없던 시절엔 정말 말도 못 할 정도로 상황이 열악했다. 건물들로 가득한 도시에서는 농촌과는 달리 퇴비로 활용할 수도 없으니, 오물을 그냥 바로 길거리에다 버렸다고 한다. 그럼 길거리는 대변 썩는 냄새로 진동하고 온갖 해충과 불결한 동물들이 들끓었으니 전염병이 돌기도 딱 좋았다. 길거리에서 똥을 안 밟으려고 하이힐이 만들어졌고, 구린내를 가리려고 향수가 발명되었다니 그 시절을 생각하면 무섭기까지 하다.

닥치고 기름 끼얹고 불태워 버리면 악취는 좀 줄어들지 않으려나 싶지만, 갓 배출된 대변은 수분이 상당히 많은 물질이어서 소각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매번 그렇게 처분하기엔 비용도 많이 들고 이산화탄소-_- 배출 측면에서도 별로 좋을 것 같지 않다.

잘은 모르겠지만 다른 동물보다도 사람의 X이 유난히 더 독하고 구리다고 어디서 들은 것 같다. 성경에서도 이 점이 감안되어, 에스겔이 징징대자 하나님이 인분 대신 소똥을 말려서 연료로 쓰라고 대체제를 제안하신 장면이 나오는 게 아닐까? (겔 4:12-15)
또한 같은 인분이어도 요즘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면서 육식 섭취가 늘면서 단백질 때문에 더 구려지기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이 문단에 나오는 말들은 다 개인적인 추측임을 밝힌다.

우리나라도 조선 구한말 때 한양에 인구가 크게 늘었을 때는 인구 대비 도시 기반 시설이 너무 열악했던 관계로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오물이 심각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조선이 미개하고 일제에 의해 망해도 할 말 없는 개막장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진영에서는 이런 사진도 제시하는 모양이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붉은 원이 전부 X이라고 한다. 노면전차가 다닐 정도로 사대문 안의 최대 번화가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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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1세기까지 지구상에 존속하고 있는 최악의 생지옥인 북한에서는 다른 깡촌도 아니고 평양의 상류층 아파트에서까지 안습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전에 한번 얘기한 바 있다.
수돗물과 전기, 가스 따위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겨울에 이불 뒤집어쓰고 냉방으로 지내는 건 차라리 양반. 수십 층 위에서 노인들은 집 밖으로 나오질 못하고(계단!), 게다가 수세식 변기도 물을 내릴 수가 없어서 신문지 위에다 응가를 본 뒤 오물을 밤에 몰래 베란다에서 아래로 투척한다.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감시를 해도 주변에 남조선처럼 가로등 불빛이 있나, CCTV가 있나, 그 암흑천지 속에서 누가 몰래 갑자기 투척하는 걸 잡아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게 크기가 아주 큰 것도 아니고..
그러니 매일 아파트 근처 바닥에 철퍼덕 떨어진 똥을 치우는 사람들이 고역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밤에 길을 지나가다가 똥벼락을 맞는 사람도 있다. 밤에는 아파트 근처에는 접근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나라는 그 정도까지 막장은 아니지만 철도 차량이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소변이 그대로 선로 밖으로 떨어져 나가는 '비산식 화장실' 객차가 다니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런 미개한 객차는 전국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지 20년 가까이 됐지만 말이다.

2. 극지와 험지, 특수한 직업

이런 상하수도 시설과는 별개로, 직업적으로 제때에 화장실에 갈 수가 없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가깝게는 화장실이 없는 교통수단을 운전하는 택시/버스 운전사나 지하철 기관사이다. 지하철 기관사의 경우, 정말 급할 때는 소변 정도는 섬식 승강장역에 정차했을 때 승강장 쪽이 아닌 벽 쪽 문을 열고 몰래 처리하기도 했다고 한다.

여객기가 아닌 전투기 조종사는 장시간 임무를 수행해야 할 경우 별 수 없다. 기저귀를 챙긴다고 한다.

성경에도 지금으로 치면 야전에서 싸우는 육군 보병에게 적용되는 말이 있다. 필드에서 볼일을 보고 나면 삽으로 흙을 파서 오물을 잘~ 덮어서 은폐를 하라고(신 23:12-14) 말이다. 마치 옷을 입어서 신체의 부끄러운 곳을 가리듯, 더러운 배설물도 안 보이게 잘 가려 놓으면 하나님이 전쟁 중에 복을 주실 거라고까지 약속했다. 의외로 이런 시시콜콜한 얘기가 모세 율법에 기록돼 있다.

옛날에 아문센과 스콧 시절에는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남극 조약까지 다 체결된 지금 남극을 탐험하는 팀은 사람이 안 사는 곳이라고 해서 주변에 무단 방뇨· 방변을 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인원의 배설물은 고이 회수해서 정화 처리를 한 후, 남극의 밖에다 버려야 한다.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인체의 생리 현상으로도 주변을 오염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국제 협정이 맺어져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달 포함 우주에 갔다 온 사람들도 자기 배설물을 감히 지구 밖으로 방출하지 않았다. 단, 이와 관련해서 황당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안습한 사건이 1969년 5월 말에 발사된 아폴로 10호 미션 때 있었다.

아폴로 10호는 달에 최초로 착륙을 한 11호의 직전 미션이었다. 달의 궤도에 진입하여 사령선과 착륙선이 분리를 하고, 착륙선이 달 표면 기준 15.6km 고도의 상공까지 내려갔다가 도로 사령선으로 합류한 뒤 지구로 돌아왔다.

달 탐사 우주선은 우주 정거장이 아니며, 화장실을 따로 만들 공간이 없다. 사람이 재량껏 엉덩이에다 봉지를 요강 삼아서 오물을 잘 담아야 한다.; 그런데... 사령선 안에서 누군가가 대변을 보는데 뒷처리를 제대로 못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주인을 알 수 없는 똥이 그 좁은 우주선 안의 무중력 공간에서 둥둥 떠 다니는 참극(...ㅠ.ㅠ)이 벌어졌다!

승무원들 3명이 모두 자기가 싼 똥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대화 내용이 고스란히 녹음되고 문서로 기록됐고=_=;;, 그게 수십년 뒤에 비밀이 풀려서 일반인에게까지 공개됐다. 예기치 않게 실수로 초대형 민폐를 끼친 당사자만이 그 똥이 누구 똥인지에 대한 진실을 죽을 때까지 혼자 간직하다 갈 것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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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륙선의 분리는 없이 최초로 달을 돌고 오는 것까지 성공했던 아폴로 8호 미션(1968년 크리스마스) 때는.. 창세기 1장 낭독 애드립이 있었다. 그 뒤 10호 미션 때는 저런 똥 해프닝이 있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3. 저격수 비유

본인은 예전에 군대에서의 전문직인 전투기 조종사와 저격수를 비교하는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저격수의 경우 총만 기가 막히게 잘 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다. 혼자 몰래 잠입해서 임무를 수행한다는 특성상 간첩, 무장공비, 공작원과 같은 성격도 지닌다.

이런 배경으로 인해 저격수는 수풀 속에서 위장을 한 후 목표물이 나타날 때까지 꼼짝도 안 하고 근성으로 기다리는 훈련을 한다. 공작원이 적진에서 비트를 파고 잠복하는 것과 비슷하다. 위장을 잘 하면 적군들이 자기 위를 밟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긴 시간 동안 정말로 꼼짝도 안 하고 있을까? 밥과 물은 안 먹는다 쳐도 대소변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지난 2011년 9월에는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저격수 특수부대를 취재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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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수: 위장을 한 채로 표적이 나타날 때까지 3박 4일 동안 한 자리에서 꼼짝도 안 하고 견뎌 본 적이 있습니다.
기자: 생리현상 같은 건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저격수: 그게 가장 힘든 부분인데, 최대한 자제를 하며... 정말 어려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절대 움직이지 않고 해결하고 있습니다.


이런 게 인생이고 현실이며 실전이다. 현실의 전쟁은 스타크래프트가 아니며 저런 임무에도 간지 나고 아름다운 모습만 있는 게 아니다.
머뭇머뭇 쭈뼛거리면서 "정말 어려울 경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저격수의 속사정은 무엇일까?

별 수 없다. 도저히 어쩔 수 없으면 결국은 바지에다 싼다는 얘기다.
그런 것까지 대비해서 저격수 훈련 중에 기저귀까지 미리 지급해 주는지는 난 모르겠지만, 결국 대놓고 직접 얘기를 안 할 뿐이지 뻔한 결말인 것이다.

자기 입으로 직접 말하기는 민망하지만, 직접 말 안 해도 결국 그 말이 그 말인 사례는.. 성경에도 많다.

  • 가인은 누구와 결혼했는가? (여동생 중 하나와 결혼했다. 그 시절엔 근친 결혼이 이상한 짓이 아니었으니까.)
  • 함은 술 취해 잠든 아버지 노아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검열삭제를 했다)
  • 입다는 자기 딸에게 결국 무슨 행동을 했는가? (결국 딸을 이삭 죽이듯이 죽였다)
  • 6일 창조가 있기 전에 이전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다)
  • 노아의 홍수 이전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에게 무슨 짓을 했는가? (유전자가 교란된 반신반인 괴생명체가 태어나게 되는 짓을 함)
  • 민수기 24장과 25장 사이에 발람이 무슨 짓을 했는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열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역이용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실족시켰다)

"에이, 저 멋진 정예 군인인 저격수가 바지에 똥을 쌀 리가 없어. 저건 문자적인 배설물이 아닐 거야, / 문자적인 3박 4일이 아닐 거야" 이런 반응을 할 게 아니라면, 성경에 기록된 엄연한 사건을 문자적으로 믿지 못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도 민망해서 굳이 일일이 디테일을 기록할 필요가 없고 정황상 안 봐도 뻔하니 간접적으로 기록을 해 놓은 것이다.

이상. 성경을 읽고 내용을 믿는 태도에 대해서 얘기하기 위해서 먼저 똥 얘기부터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었다. ^^

Posted by 사무엘

2015/07/04 08:28 2015/07/04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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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의 재발견

5년 전에 했던 얘기를 오랜만에 다시 늘어놓자면, 본인은 일단 운동이라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괜히 고생스럽고 힘만 들고 딱히 성취감이 느껴지는 게 없고, 이걸 해도 들인 노력에 비해 딱히 체력이 향상되거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느낌이 '거의'(전혀는 아니겠지만) 안 들어서이다. 가성비가 안 맞다.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서 체육 시간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1) 애들이 왜 이렇게 연예인에게 열광을 하는지, 그리고 (2) 공이라는 도대체 왜 차고 뛰어다니는지 뭔 재미로 하는지를 이해를 못 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구한말 때 서양 선교사들이 볼 차고 노는 걸 보면서 조선 양반들이 “ㅉㅉㅉ 하인을 시켜서 주워 오게 하면 될 걸 왜 저리 뛰어다니고 고생이냐” 라고 비아냥거렸다는 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쨌든 그 양반들 심정은 이해한다.

하물며 등산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난 “어차피 내려갈 걸 왜 힘들게 올라가냐”라는 지극히 경제적인 사고방식의 신봉자이다.
난 어떻게 '운동 중독'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 못 한다.

러닝 머신?
쭉쭉 달리면 서울 지하철 터널이나 중앙선, 경부고속선의 전경이 화면에 펼쳐지는 러닝머신이라도 있지 않다면 동기 부여가 안 될 것 같다.
그나마 난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고, 먹고 자는 걸 스트레스 없이 잘하고 지내며, 또 전철역에서 회사까지 편도로 3km가 좀 안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는 게 최소한의 건강 유지 활동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체중을 줄이는 데 부족하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는지라..
미리 운동 안 해 놓으면 40대가 넘어서 고생한다는 반 협박성 얘기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얼마 전부터 가끔 등산을 시작했다.

이건 뭐 안 믿어지지만 어쨌든 반신반의하며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의 심정과 같고(눅 5:5),
마지못해 일단 요르단 강에 가서 목욕을 한 나아만 장군의 심정과도 같다(왕하 5:13-14).
젊었을 때 실컷 개고생 해서 돈 벌어 놓고 늙어서는 병원비로 그 돈을 다 탕진하며 가족에게 민폐 끼치는 바보짓은 나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북한산 정상에서의 맥북 인증샷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사진이다.

그랬는데 요즘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차원에서 발상을 좀 바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체 활동을 귀찮하고 싫어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예외가 있다.

1. 난 운동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르지는 않으며, 성질이 급하다. 할일 없이 기다리는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싫어한다. 고로 평소에 달리기를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파란불 신호가 곧 끝나 가거나 지하철 문이 닫히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건너거나 탄다.
2. 난 뭔가 동기와 의미 부여만 되고 나면 움직이는 것도 삽질로 생각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한다.

그래서 2번 원칙에 의거하여, 등산을 괜히 삽질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여행과 지리 답사로 자가승화할 생각이다.
기왕 등산을 가는 거면 오르기로 한 산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여기 주변은 조선 시대엔 어떤 지역이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고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래로 어떤 개발 역사가 있었는지 같은 걸 모두 공부를 하면서 가는 것이다.

예전에 청계산을 오르던 중엔,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에 C123 수송기가 성남 서울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안개 때문에 시야를 잃고 여기 근처에 추락해서 탑승자가 모두 사망했다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이 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또한 본인은 서울 교외의 그린벨트 지역에 대해서 굉장히 동경을 하고 있다. 지방도 23호선의 왼쪽에 있는 성남의 그린벨트, 그리고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 최남단에 자리잡은 그린벨트 말이다. 철도가 없는 이런 오지들은 왜 분당이나 판교 같은 신도시와는 달리 개발되지 못했는지도 세세히 알고 싶다.
서울 남부의 산들, 그리고 분당의 동쪽을 가로막고 성남과 광주를 분리하고 있는 산들도 생각해 보면, 주변엔 가 보고 싶은 산들이 온통 널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초엔 타워팰리스가 내려다보이는 서울 강남 일대의 모 야산을 정상까지 오르고 왔다. 인터넷 항공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실제로 가 보니 힘들지만 재미있었다.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은 같은 시와 같은 구에 사는 사람끼리도 이 정도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단적으로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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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이남과 이북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한쪽 방향으로는 여러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는 반면,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건너편은 문화 유산과 군사 사실 보호라는 명목으로 능선을 따라 철조망이 빽빽이 쳐져 있다. 산 절반이 이렇게 틀어막혀 있는 곳은 청와대를 감싸고 있는 북악산 말고는 이것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난 왜 그렇게 됐는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자세한 내막을 이 자리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ㅎㅎ 직접 가서 보니까 역시 감쪽같이 잘 은폐해 놨더라.

하긴, 여기 말고도 서울 시내를 감싸는 산들은 다 이런 식으로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 시설이 조금씩 비치되어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덜 헉헉대고 덜 쉬고도 더 빨리 오랫동안 산을 잘 오르는 사람들이 좀 부럽긴 했다.
그래도 등산을 조금이라도 철도와 연관지어서 덜 괴롭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서 만족스럽다.

끝으로, 높이 300미터 남짓한 산의 정상이 이 정도라면, 비슷한 높이인 와룡산에서 내려오는 건 일도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개구리 소년이라고 알려진 옛날 성서 초등학교 애들은 나쁜 흉악범에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죽었지, 자기들끼리 스스로 길을 잃거나 조난 당한 건 확실히 아닌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19 08:27 2015/05/1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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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연휴 기간에 본인은 가족 전체가 동남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관광이다.
부모님이 퇴직하셨고 본인을 포함한 자녀들은 아직 미혼이니, 지금 같은 시기가 온 가족이 같이 여행을 떠나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탄 지도 무려 6년이 돼 가고..
더 늦기 전에 여행기를 이제야 간단히 정리해서 올린다.

가족이 한꺼번에 움직인 덕분에, 지금까지 공항 철도나 리무진 버스로만 가던 인천 공항에 난생 처음으로 자가용을 끌고 가 봤다. 운전은 언제나 본인이 도맡아 했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공항의 장기 주차장엔 벌써부터 차들로 포화 직전이었는데, 가까스로 빈 자리를 하나 발견해서 차를 세웠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베트남 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정비 상태를 이유로 거의 10시간이 넘게 지연됐다.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크리티컬한 업무를 목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인천 공항은 안 그래도 내부 시설이 굉장히 좋은 공항이니, 출국 도장을 찍은 상태로 탑승동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고 있는 것도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항공사 측에서는 처음엔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으라고 식권 정도를 내 줬으나, 지연이 길어지자 결국은 사람들을 버스에 태우고 도로 여객 터미널 입국장으로 보내서 출국 심사를 취소시키고 인근의 호텔에다 승객들을 보내 줬다. 저녁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고..;; 비행기 하나가 지연되는 바람에 승객들도 불편했지만 항공사 역시 손해를 굉장히 많이 봤지 싶다.

덕분에 현지 호텔을 구경하기 전에 운서동 공항 신도시 일대의 호텔부터 먼저 구경하게 됐다. 주변에 아파트 말고 전원 주택들은 전망이 참 좋아 보였다. 뭐, 본인이야 노트북 PC가 있으니 기다리는 동안 프로그램도 짜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밤 비행기를 타고 먼저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하노이의 탑'의 원조 국가에 왔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는 역사적으로 나름 프랑스를 이기고 미국까지 이긴 나라라고 자존심이 쩐다고 한다. 그리고 호치민을 정말 미치도록 숭상한다고.

베트남에서는 해안으로 건너가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 제주도나 남해를 뺨치는 다도해와 동굴을 구경하고 맛있는 해물 요리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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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시가지의 모습. 우리나라는 택시가 기본적으로 2000cc급 중형인 반면, 여기는 경차가 주류이다.
하긴, 우리나라도 2, 30년 전에는 1500cc급도 안 되는 소형차인 포니가 택시로 제일 많이 굴러다니곤 했다.
그리고 이보다도 베트남엔 오토바이가 훨씬 더 많이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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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호치민 광장을 구경했다. 호치민 자체는 나름 인품을 갖춘 좋은 지도자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어쩔 수 없는 사회/공산주의 국가이더라. 구소련이 망한 지가 언젠데 낫과 망치 깃발 실물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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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약 1시간 반 동안 1000km남짓을 비행하여 캄보디아의 씨엠 립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공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행기에서 내린 뒤, 브리지나 셔틀버스가 없이 승객들이 활주로를 직접 걸어서 여객 터미널로 들어가야 하는 공항이다. 철도역으로 치면 선로를 그대로 횡단해야 하는 시골 간이역 정도?

날씨는 베트남보다 더욱 더워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가 위도가 몇 도이고 자전축이 몇 도 기울어져 있지? 서울과 비교했을 때 햇볕을 받는 각도의 cos 값이 얼마나 차이가 나지?" 같은 별 잡생각이 다 들 지경이었다.
여기는 입국 관리 공무원에게 공식적인 비자 발급 비용 외에도 대놓고 1$씩 뇌물을 줘야만 심사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_=;;

날씨도 더운데 앙코르 와트는 정말 핵심만 초스피드로 보고 돌아왔다. 요게 제일 먼저 만들어진 사원이고, 그야말로 캄보디아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유적이다. 캄보디아를 먹여 살리는 제1순위 관광 자원인데.. 이것도 처음 발견되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많이 파괴된 거라고 하니 참 안습하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엔 이걸 미개한(?) 동남아시아 사람이 만들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인의 후손이 만들었다고 우기기엔 표현되어 있는 종교관이 전혀 서양스럽지가 않은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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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뿌리와 뒤엉킨 이 유적지는 아까 것보다는 더 나중에 만들어졌다. 앙코르 제국도 여러 시즌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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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유적지는 굉장히 넓기 때문에 중간 중간엔 툭툭이를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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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적지들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얼마나 더 화려하고 웅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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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도시인 씨엠 립은 6번 국도던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큰길만 벗어나면 곧장 그냥 황무지 깡촌이었다. 카누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서민들이 사는 수상 주택 단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단지가 조성된 것에도 다 사연이 있다고 함.

물은 별로 깊지는 않지만 정말 처참하게 더럽기 때문에 저 물이 몸이나 옷에 묻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저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1년 365일을 살 수 있나, 생계는 어떻게 꾸리며 위생 문제와 먹고 입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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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캄보디아라 하면 잊을 수 없는 건 일명 '폴 포트'라는 미치광이가 벌였던 킬링필드 학살극이다. 희생자의 유골을 안치해 놓은 어느 납골당을 방문하고 거기 적혀 있는 옛날 사진과 안내문을 보기도 했다.

어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고 나중에 독립조차도 자기 힘으로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라면, 결국은 한 외세가 물러난 뒤에도 다른 외세들의 이념 각축장이 되고 파란만장 기구한 역사가 이어지는 건 남의 일만이 아닌 것 같다. 특히나 그런 와중에 공산주의는 단순히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농민·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먹물깨나 먹은 지식인도 잘 현혹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결국 실현 불가능한 사상을 강제로 실현하려다 보니 인민들을 온통 바보 노예로 만들어야 하고 딴 생각 잡 생각을 못 하게 극도의 폭력과 공포로 통치를 해야 하고 종교도 말살하고 서로 감시와 밀고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우상화와 절대독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김 일성이고 호치민이고간에 자기 우상화를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어도 유언이 당연한 듯이 씹히는 이유는.. 그렇게 우상화를 해야만 공산주의 체제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매우 악한 사상인 이유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혹은 1/n만치 분배한다"라는 성선설을 제시해 놓고는 정작 그걸 실현하고 운영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성악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필요악이라고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성선설 따위는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고찰을 한 사람이라면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반공 때문에 불가피하게 벌어졌던 필요악이나 부조리를 보는 눈이 한결 관대해진다.

이런 것들을 보고 느꼈다.
귀국하고 나니 공항의 주차난은 더욱 심해져서 이중주차에, 도로변 주차까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이 수하물을 찾는 동안 본인은 먼저 밖으로 나가서 차를 여객 터미널로 가져왔다. 여객 터미널에서 장기 주차장까지는 수백 m 이상 떨어져 있으니까. 차는 깜빡 잊고 블랙박스를 켜 놓은 채로 추위 속에서 닷새 가까이 방치됐지만, 다행히 시동이 잘 걸렸다.

동일한 고속도로 구간에서 불과 1주일쯤 전에 짙은 안개 때문에 106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었지만, 지금은 안개고 뭐고 없이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3 08:30 2015/03/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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