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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 일대 나들이

서울 서대문 새문안로 일대는 중구와 종로구의 경계이면서 서울 지하철 5호선이 지나며, 한양 겸 경성의 중심지로서 근현대 역사 유물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때도 일본인들은 여기보다 더 남쪽으로 남산· 남대문 일대에 많이 살았고, 조선인은 서대문 부근에 살았다고 한다.

지난번엔 각종 고궁과 서울 역사 박물관을 구경했는데, 알고 보니 거기 주변에 각종 박물관을 포함해 볼거리가 많다는 것을 추가로 발견했다. 그래서 본인은 하루 시간을 내어 순회 답사를 했다.

1. 경찰 박물관

<청년경찰>, <범죄도시> 같은 영화만 볼 게 아니라 이런 곳도 가 보면 좋을 것 같다.
경희궁의 동쪽으로는(광화문 역 방면) 서울 역사 박물관이 있고, 서쪽으로는 경찰 박물관이 있다(서대문 역 방면). 서로 아주 가까이 붙어 있으며, 도심 접근성이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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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박물관은 다층 건물 형태이다. 들어간 뒤에는 먼저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6층으로 간 뒤, 한 층씩 내려가면서 방을 관람한다. 중간에 3층인가는 예외적으로 직원 사무 공간이기 때문에 관람객이 입장할 수 없고, 건너뛰어야 한다.

입장료가 없으며 무료이다. 경찰이 뭘 하는 사람인지 소개하고 경찰 코스프레· 경찰 체험 코너가 있는 건 아무래도 애들 눈높이에 맞춰진 컨텐츠이지만, 맨 처음 관람하는 꼭대기 층에 마련된 한국 경찰의 역사 코너는 유일하게 애들한테 좀 어려운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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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로서 현재까지 유일하게 태극 무공 훈장이 추서된 최 규식 경무관에 대해서는 당연히 큰 비중을 두고 소개했으며, 그 외에도 순직한 경찰들 소개와 묵념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하긴, 6· 25 전쟁 중에 최전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북진하고 영토를 수복하기 위해서 북괴와 직접적으로 싸운 사람들은 군인이지만.. 남한 영토 내부에서 북괴 빨치산과 간첩들을 소탕한 사람은 경찰이었을 것이다.

내 머리에 편견으로 형성돼 있는 경찰에 대한 외형적인 이미지는..

  1. 평소에 교통정리와 범죄 “예방” 업무를 하면서 구역을 순찰하는 제복 차림의 경찰. 이건 일상생활에서 제일 자주 본다. 내근직도 제복 차림이긴 하지만 일반인이 경찰서를 방문할 일은 별로 없으니..
  2. 강력 범죄가 터져서 사복 차림으로 현장에서 잠복하고 피의자를 격투 끝에 검거하는 경찰. ‘형사’라고 종종 불리며, 이건 영화 같은 매체에서 제일 자주 본다.
  3. 투명한 방패와 검은 방망이 들고 있는 전경들. 시위· 집회 현장에서만 본다.

이렇게 생각해 왔는데.. 이게 근거 없는 분류가 아닌 것 같다.
나 초딩 시절 286 AT에서 재미있게 했던 블루스 형제 게임에서도 세 캐릭터가 딱 정확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ㅋ (물론 주인공을 죽이는 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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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울러, 경찰을 컴퓨터에다 비유하면, 정규 경찰 공무원들이 CPU라면 전경들은 GPU뻘 되겠다고 본인은 오래 전부터 생각해 왔다. GPU는 전문성과 범용성이 정식 CPU만 하지는 못하지만, 그래픽 연산이라는 특정 작업만을 압도적인 코어 수로 보조해 주니까..

어느 나라건 경찰과 군대, 첩보기관은 서로 사이가 좋은 적이 별로 없었다. (실적 다툼 때문..?) 심지어 이들과 검사도 사이가 안 좋다.
원래는 이들은 서로 전문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관계이다. 일개 조폭을 넘어서는 군벌, 테러리스트와 싸워야 할 정도로 나라 사정이 막장이라면 특수부대나 아예 정규군의 도움이 필요하다.

용공사범, 마약이나 산업 스파이처럼 심각하고 교묘한 범죄를 정확한 증거를 잡아내서 겨우 말단 조직원이 아닌 근원지까지 일망타진하려면, 위장 침투가 전문인 첩보기관으로부터 첩보를 제공받아야 한다. (영화 아저씨..!!)

군대가 아예 전문적인 대형 DBMS이고, 첩보기관이 심벌과 임의 정밀도 연산까지 지원하는 수학 패키지라면, 경찰은 그 중간에 속하는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가 아닐까 한다. 일반인이 컴퓨터에서 이 셋 중 가장 즐겨 사용하는 프로그램은 단연 엑셀이기도 하니 말이다.

얘네들이 자기들끼리 치고받는다거나, 정치와 야합해서 나라에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간의 가장 비열 사악한 본성을 자극하면서 세력을 키우는 공산주의는 정말 불가피하게 경찰, 군대, 첩보기관에 대한 필요· 수요를 자꾸 만들어 내고 그쪽이 타락할 빌미를 주기도 했다는 것 역시 엄연한 사실이다.

“하늘에서 정의가 빗발친다, 야 이 짭새야!”
청년경찰 각본 쓴 사람이 오버워치를 좋아하는 취향이었군.. ㅡ,.ㅡ;;

2. 경교장

경찰 얘기가 갑자기 좀 길어졌네..
경찰 박물관에서 더 서쪽으로 걸으면 강북 삼성 병원이 나온다. 그런데 그 안에 그 이름도 유명한 경교장이라는 근대 유적 건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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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교장은 원래 1938년에 지어진 부잣집 건물인데, 백범 김 구가 여기서 몇 년간 지냈고 임시정부 요원들이 여기서 회의를 열었기 때문에 역사적인 장소로 유명해졌다. 잘 알다시피 김 구는 아예 여기서 안 두희의 흉탄에 맞아 암살당하기도 했다.
이 건물은 비교적 최근인 2013년에 1· 2층과 지하를 원형대로 복원해서 전시관으로 공개되었다...고 입구의 안내판에 소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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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 가구로 응접실과 집무실이 있는 건 부산에서 본 임시수도 청사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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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는 마치 애니매트릭스의 첫 에피소드(오시리스 최후의 비행)에서 테디우스와 주에가 칼싸움을 한 장소와 비슷하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사진은 생략하지만 김 구가 암살당하던 당시의 2층 집무실 방, 그리고 고인이 입고 있던 피로 물든 겉옷도 어떻게 복원과 보존을 했는지 전시되어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역사가 실제로 이 장소에서 이뤄졌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김 구를 암살한 안 두희는 먼 훗날 1996년, 박 기서 씨에게 몽둥이로 난타 당해 죽었다. 그 당시 박 씨가 버스 기사였던 관계로, 안 두희가 버스를 타다가 잘못 걸려서 죽었다는 식의 낭설이 전해지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박 씨는 인천에 소재한 안 두희의 집 주소를 알아내어 거기로 직접 찾아간 뒤, 문이 열릴 때까지 오랫동안 잠복했다. 내연녀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녀부터 포박해서 제압한 뒤, 집으로 침입해 들어가서 안 두희를 살해했다. 그 뒤에는 곧장 고해성사를 받고 경찰서에 자수했다.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할 고의적 살인범이기 때문에 그는 일단 구속되고 징역형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이렇게까지 전국적으로 칭송받은 살인범은 없었을 것이다. 그를 변호하겠다는 변호인이 줄을 섰고, 전국 각지에서 박 기서의 집으로 익명 성금과 지원 물자가 도달했댄다. 그의 아들이 다니던 태권도장에서는 관장 선생이 수업료를 면제해 줬다. 김 구가 먼 옛날에 일본인 민간인 상인을 죽인 것보다, 차라리 박 기서가 김 구의 암살범을 죽인 게 더 훌륭한 일처럼 보일 정도이다.

본인은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독립 운동가 겸 건국의 주역으로서는 김 구보다는 미국물 먹은 할배를 훨씬 더 존경한다. 이화장도 복원해서 재개장할 거라고 소식을 들었는데, 완공된다면 거기도 당연히 0순위로 가 볼 것이다.

3. 4· 19 혁명 기념 도서관

북한산 기슭에 4· 19 묘지가 있는 건 본인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만.., 경교장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엔 4· 19 혁명 기념 도서관이라는 것도 있다. 저건 도대체 뭐지?
(사실, 상암동에 있는 박 정희 기념관도 정확한 명칭은 '박 정희 기념 도서관', 더 세부적으로는 '기념관 및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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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여기는 자유당 시절에 잘나가던 이 기붕· 박 마리아 부부의 자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승만 정권이 무너진 뒤, 그들은 가족 전체가 동반 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서 주인을 잃은 집과 부지를 국가가 환수하여 꽤 오래 전부터 4· 19 혁명 도서관이 이 자리에 조성됐다고 한다. 경교장과는 달리, 집 건물 자체는 문화재로 보존할 가치가 없으니 철거하고 도서관 형태의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건 마치 프랑스의 유명한 무신론 철학자 볼테르를 보는 것 같다. 기독교를 맹렬히 증오해서 "성경 같은 쓰레기는 앞으로 100년 안으로 세상에서 완전히 사멸해서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랬는데.. 그가 죽고 나서는 그의 생가 부지에 성경 인쇄소가 들어섰다나 어쨌다나..

잠시 들어가 봤는데, 역시나 4· 19 혁명 관련 자료의 보관과 열람에 특화된 도서관인 것 같다.
난 개인적으로 4· 19까지는 인정하지만, 5· 18은.. 너무 이상하게 왜곡되고 있는 것 같다. 폄하하는 쪽, 맹목적으로 신성시하는 쪽 모두 마음에 안 든다. 저건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재평가한다 해도 쌍방과실일 뿐이고 여파가 4· 19만치 크지도 않았으며, 지금 해 주는 것만치 그렇게 예우할 급도 못 된다.

사실은 4· 19조차도 대통령이 자격지심에 과오를 저질렀을지언정, 한편으로는 너무 착했고 진작부터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저런 항거가 일어나고 성공한 것이다. 진짜 악질적인 독재자 치하였으면 민중 항거· 항쟁으로 정권 교체? 택도 없는 일이다. (북괴 내부의 8월 종파 사건, 황해 제철소 사건 등..)

4. 농업 박물관, 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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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도 지나서 계속 서쪽으로 걸어가면 서대문 역이 나온다. 그 뒤 길 건너편 서대문 역 5· 6번 출구 방향을 보면 농협 은행 본점과 함께 농업 박물관과 쌀 박물관 이렇게 박물관이 두 곳 있다. 여기도 무료 입장 가능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도시와는 정반대 심상의 박물관이 있는 게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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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봉길 의사는 폭탄 의거를 벌인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생전에는 농촌 계몽 운동에도 크게 앞장선 이력이 있다.
지금처럼 국제 교역이 활발해진 시대에 농업 내지 식량 자급자족이라는 이념을 옛날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만치 목숨 걸고 붙들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6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은 여전히 땅에서 나는 소산물에 의존해서 명줄을 유지하고 있는 건 변함없다. 식량은 공산품이 아니다. 또한, 하늘의 기상 현상에 의존하지 않고는 땅의 소산물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항공업계는 20세기에 비행기의 발명으로 인해 등장한 최첨단 산업이지만.. 역시 하늘 날씨에 영향을 많이 봤고 심지어 새들을 쫓아야 하는 게 어찌 보면 그 원시적인(?) 농업과 비슷하다.

시간과 지면 관계상 더 자세한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인간이 농사를 지어 온 역사, 그리고 각종 논밭 개간 기술의 개발, 이앙법, 직파법 이런 얘기들이 나와 있다. 다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우 장춘 박사가 이룩한 영농 과학화 얘기는 전혀 없는 게 아쉽다.

박물관의 1층과 2층은 저런 농업 얘기이고, 지하에는 농협 자체에 대한 소개가 들어있더라.

5. 서대문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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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도성의 사대문 중 동대문(흥인지문), 남대문(숭례문), 북대문(북악산 숙정문)과 달리 서대문(돈의문)만이 유일하게 일제 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그 뒤 재건· 복원되지 못했다. 그래서 신길온천 역 주변에 온천이 없듯이 서대문 역 주변에 실제로 서대문이 있지는 않다.
여기는 주변에 이미 건물들이 많이 지어져 버린 관계로, 서대문의 부지 확보와 재건 복원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여기 근처에 있는 경희궁도 사정이 비슷한지라, 인제 와서 원형 복원은 난감한 상태이다.

참고로, 한양도성에는 사 '대문'(동 흥인지, 서 돈의, 남 숭례, 북 숙정) 말고, 사 '소문'도 있다. 창의문 또는 자하문은 북소문에 속한다.
동소문에 속하는 혜화문, 그리고 남소문에 속하는 광희문은 복원된 것이 남아 있긴 하지만 원래 있던 곳에 있지는 않다. 이미 도로나 건물이 자리를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다. 북소문만이 유일하게 원형이 원래 있던 곳에 그대로 있다.

그리고 서소문에 해당하는 소의문은 흔적도 없이 완전히 소실되어 있다. 대문과 소문 모두 '서'쪽만이 현재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소· 지명에만 '서대문, 서소문'이 전해질 뿐이다.

6. 경찰 기념 공원과 서대문 역 터

여기 근처에는 서대문이라는 조선 시대 유적 말고, 서대문이라는 이름의 '철도역'도 있었다. 경부선이 만들어졌던 초창기에는 지금 있는 서울 역은 '남대문 역'이었으며, 살짝 더(지하철 한두 정거장 남짓) 북쪽으로 가서 '서대문 역'이 실질적인 경성 역이요 경부선의 북쪽 종점이었다.

그랬는데.. 1920년대 초에 서대문 역은 폐지되고, 남대문 역에서 경의선으로 분기하는 신촌· 가좌 방면 드리프트 선로가 부설됐다. 어차피 일본인들이 주로 사는 곳은 남대문 쪽이었으니, 철길이 그쪽까지만 있어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서대문 역 6번 출구로 나와서 경찰청이 마주 보이는 정도까지 좀 걸어가면.. 인도 옆으로 아주 작은 풀밭 공원이 있으며, 거기에 "옛날에 이 자리에 옛 경성, 서대문 역이 있었음"이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었다. 유 관순 열사가 다녔던 이화 학당도 바로 이 근처(현재의 이화여고)이니, 그 학교는 가히 엎어지면 코앞인 역세권이었던 셈이다.

지난 2016년 여름에는 그 소공원이 '경찰 기념 공원'으로 리모델링됐다. 안 그래도 경찰청이 코앞이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경찰 박물관도 있으니, 내친 김에 순직 경찰을 기리는 공간을 더 만든 듯하다. 경복궁 역 근처에서 학교 가는 셔틀버스를 기다리면서 보던 건물은 경찰청 본청이고, 여기서 보는 건 서울 '지방 경찰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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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 자리에 있던 서대문 역 표지석 역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
나름 경찰청장 출신이 코레일 사장을 역임한 적도 있는데(허 준영).. 너무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렇게 서대문 역 일대에서 여러 뜻깊은 장소들을 잘 구경하고 돌아왔다.
표지석은 너무 아쉬웠던지라 집에서 검색을 좀 더 해 봤는데, 사진들의 구도를 보니 소공원에 있던 그 표지석은 이화여고 정문 바로 옆으로 옮겨졌다는 것을 뒤늦게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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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2/14 08:35 2018/02/1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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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불암산

산 세 군데를 연거푸 오른 뒤 본인이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서울 불암산이었다. 2016년 초에도 여기를 정상까지 오른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때와는 세부 등산 경로와 당일 날씨 같은 게 모두 달랐기 때문에 느낌이 새로웠다.
이번에는 하산할 때 주 능선을 타면서 작년에 들르지 못했던 불암산성 부근을 구경했으며, 남양주가 아닌 서울 중계본동 쪽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더 남쪽 끝까지 진행했으면 2017년초에 들렀던 태릉과 한전 연수원, 삼육 대학교 근처까지 도달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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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4호선 상계 역에서 내려서 정암사 방면으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국립공원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지만 나름 등산로 안내가 잘 돼 있었다. 본인이 선택한 경로는 거기 안내도 상으로는 제5 등산로라고 기재돼 있었다.
여기는 지하철 선로가 개천을 복개한 형태이더니만, 등산로를 따라 자그마한 계곡이 있었다. 그래서 뜻하지 않은 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계곡 따라 물 구경은 내 등산 패턴의 특성상 보통은 하산 과정에서 하는 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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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까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게 포장된 비탈길은 정암사까지만 나 있었고, 그 뒤부터는 좁은 등산로가 이어졌다. 사실, 완전히 정암사 부지까지 가는 게 아니라 도중에 등산로로 진로를 바꿔야 한다.
등산로는 대부분 온통 돌계단 형태로 닦여 있었으며, 이 상태로 산의 종축 능선인 깔딱고개까지 올라갔다. 산길은 깔딱고개가 가까워질수록 가팔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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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계단을 한참을 낑낑대며 오른 뒤에야 깔딱고개에 도착했다. 여기는 자동차 교차로처럼 길이 사방으로 뚫려 있었다. 본인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올라온 셈인데, 더 동쪽으로 진행하면 남양주로 빠져 버린다.
북쪽으로 더 가면 산의 정상 방향이며, 남쪽으로 가면 불암산성, 공릉동, 중· 하계동이 나온다. 본인은 정상에 갔다가 여기로 되돌아오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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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딱고개에서 정상 방면을 향하자 산의 최종 보스인 암반이 곧장 나타났다. 이정표 상으로는 정상까지 몇백 미터밖에 안 남았다고 나오지만, 지금까지 설렁설렁 걷던 오솔길로 몇백 미터가 아니다. 그러니 저 거리는 북한산 정상 근처의 이정표만큼이나 낚시이다.
일부 정말로 길이 없고 위험한 암반에는 계단이 설치돼 있었지만 일부 구간은 발뿐만 아니라 손도 써서 로프를 붙잡고 아슬아슬하게 올라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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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렇게 정상의 암반을 오를 때가 돼서야 산 아래의 경치가 훤히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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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은 확실히 돌산이긴 하다.
예전에 갔을 때는 국기와 지리 표시 마크를 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정상 표지석은 못 보고 지나쳤다. 산을 올라온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지 싶다.

그나저나 성남에 있는 산(영장, 망덕, 청계, 인릉 등~)들은 위치를 막론하고 딱히 돌산이 없었던 것 같다. 산이 많긴 하지만 높이도 막 높지 않고 그저 그런 흙산일 뿐이다. 흥미로운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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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개 역, 그리고 불암산의 정상보다는 낮지만 또 다른 산봉우리가 내려다보인다.
사실, 수락산과 불암산 사이로 지하철 4호선 선로를 가로막고 있는 저 산봉우리를 타는 것도 재미있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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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서울이 아닌 남양주 쪽도 내려다본다. 아파트들이 빽빽히 들어선 서울과 달리 저기는 훨씬 한적해 보였다.
단, 아직 아침 시간대였던 관계로, 동쪽인 남양주는 역광이 심해서 좋은 풍경 사진을 남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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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구경은 이 정도로 한 뒤, 본인은 다시 깔딱고개 쪽으로 내려가서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걷기 시작했다. 길이 전반적으로 이렇게 곱게 난 편이었지만, 이정표 없이 갈림길도 종종 나와서 헷갈렸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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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불암산에서 아마 정상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곳이라 여겨지는 장소가 나왔다.
아까 같은 오솔길이 아니라 꽤 넓고 큰 광장이 펼쳐졌으며, 그 광장의 위에는 아마 불암산 유일의 헬리패드가 놓여 있었다.
인릉산은 정상이 이렇게 공터+헬리패드로 꾸며져 있는 반면, 불암산은 제일 높은 정상은 암반에 따로 있고 헬리패드가 이렇게 딴 곳에 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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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에 아차산성이 있다면 불암산은 불암산성이 있다.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던 불암산성의 일부 성벽은 알고 보니 이 광장 등산로의 아래를 받치고 있었다. 그러니 가까이 접근해서 살펴보기가 곤란했다.
형태가 좀 더 온전히 남아 있으면 더 급이 높은 문화재로 승격됐을 것이고, 기록이라도 더 상세히 남아 있으면 복원 재건하네 마네 했겠지만 달랑 저 황량한 돌무더기 폐허만으로는 뭔가 거창한 유적지 관광지를 조성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황룡사처럼 아예 흔적도 없이 부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지(址)'자가 붙을 정도는 아니다.
아차산과 불암산 모두 서울에서 너무 흔해 빠진 조선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흔적을 아쉬운 대로 간직하고 있는 흥미로운 산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위치도 서울의 동북부로 비슷한 편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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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가는 길은 무작정 평지밖에 없는 게 아니라 작게나마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부분도 있었다.
학도암까지 지나자 역시 이 산에서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은 커다란 팔각정이 나타났는데, 여기는 방문 당시 웬 단체 등산객들이 잔뜩 점령해 있어서 사진을 남기지 못했다.

본인은 중계본동과 공릉동의 경계에 있는 백사 마을 쪽으로 하산하려 마음먹었다. 위의 사진은 착륙 예정지를 내려다본 모습이다. 이름은 뱀이나 모래가 아니라, 유래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숫자 104를 뜻한다고 한다. 마치 시인 '이 육사'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등산로는 아주 좁고 험해지고 길이 어디로 나 있는지 제대로 추적할 수가 없어졌다. 지난번에 인릉산에 다녀왔을 때도 마을이나 아파트 단지에 거의 다 내려와 놓고는 길을 못 찾아서 한참 헤맸는데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래서 정확하게 백사 마을로 진입하지는 못하고, 거기서 북쪽으로 몇백 m 정도 비껴서 중계 현대 5차 아파트 부근에 착륙하게 됐다. 남쪽으로는 도저히 더 진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거기서 약간만 더 걸어가면 백사 마을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할 수는 있었다. 참고로 저기는 서울 강남의 '구룡 마을'처럼 서울 강북에 거의 최후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달동네라고 한다. 몇 년 안으로 주민들을 다 이주시키고 철거· 재개발할 예정이다.

이번에는 평소의 내 등산 스타일과는 달리, 서울 시내를 벗어나지 않는 방식으로 등산을 마쳤다.
그런데, 귀갓길 버스 차창 밖으로 '한글비석로'라는 도로명 주소가 보여서 "저건 뜬금없이 뭐야?" 생각이 들어 폰을 꺼내 검색을 해 봤다.

오오.. '서울 이 영탁 한글 영비'라고 무려 1500년대에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쓴 묘비가 여기 근처에 있다고 한다.
내용 자체는 "이 비석을 훼손하면 방법 한다. 방법 하면 손발리 오그라진다. 이 사실을 한문을 모르는 후세에게도 분명하게 알리는 바이다"급의 아주 단순무식 원초적..(!) 경고문에 불과하지만, 그야말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순한글 묘비문이기 때문에 국어사와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얘는 '보물'로 지정돼 있으며, 남한산성보다 당연히 격이 더 높다.

아이고, 나도 이런 게 있는 걸 진작에 알았으면 여기까지 온 김에 당장 찾아가서 구경하는 건데... 지금 당장 그러지는 못했다. 그래도 불암산 등산 덕분에 이제라도 덤으로 알게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08 08:31 2018/02/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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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남한산

요즘 등산 답사기가 연이어 올라오고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일 뿐만 아니라 등산의 계절이기도 한 것 같다.
날씨가 너무 덥지 않고 숲의 나뭇잎도 몽땅 칙칙한 갈색으로 바뀌거나 떨어지기 전에 적당히 단풍이 들어서 경치가 아주 좋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날씨는 더 서늘하고 추웠으면 좋겠지만, 나뭇잎은 초록색이 더 유지됐으면 좋겠다. 그러니 두 함수의 교점인 시기를 찾으면 10~11월경으로 귀착되며, 본인은 이 시기에는 개인 일과의 우선순위를 조정해 가면서까지 일부러 등산을 집중적으로 많이 갔다. 내가 평소에는 아무 이유 없이 쓸데없이 몸 움직이고 운동하는 걸 굉장히 싫어하지만, 오지 탐험과 경치 감상 같은 동기가 생기면 그럭저럭 움직이기 때문이다.

성남의 오지들 다음으로 본인은 오랜만에 남한산성을 선택했다. 예전에 두 번이나 남한산성을 방문한 적이 있었지만, 둘 다 산성의 북쪽(하남 춘궁동)과 남쪽(검단산)으로 곧장 나가 버렸고 정작 성길 자체를 둘러보는 산행을 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동명의 영화까지 개봉했으니 시기적으로 더욱 적절했다.
아무튼, 이번에는 남한산성의 동쪽을 구경하고, 청량산 말고 성이 실질적으로 자리잡은 산인 남한산 일대를 답사하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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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산성까지는 저번처럼 일단 버스로 간 뒤, 산성의 북문인 전승문 근처에서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다. 문 밖으로 나가지는 말고, 성 안에서 문 주변을 보면 등산로 진입로가 보인다. 그리고 진입로 옆에는 남한산성 전체의 지도가 걸려 있는데, 이건 별도로 갖고 있지 않다면 사진을 찍어 두는 것이 초행 등산객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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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이렇게 쭉 이어졌다. 사실, 성 내부에도 다른 등산로 탐방로 산책로가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인근 주민이 아닌 본인 같은 외지인은 아무래도 성곽길에만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다. 누군가가 대도시를 처음 방문하면 굵직하게 노선 파악이 쉬운 지하철을 버스보다 즐겨 타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남한산성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여기는 문화재 때문에 도립공원인 것이고, 군포의 수리산은 내가 알기로 북한산처럼 그냥 자연 환경 때문에 도립공원이다. 경기도 수도권에 도립공원은 이 둘이 전부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수리산도 가 보고 싶은데.. 저기는 안산 일대에 차 끌고 놀러갈 일 있을 때 한번 노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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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으로 하남시 춘궁동 및 상· 하사창동 마을을 오랜만에 다시 산에서 내려다보게 됐다. 본인은 초창기엔 남한산성에서 저 마을 방면으로 곧장 하산한 적도 있다. 그 뒤, 이번에는 산을 타고 성곽을 따라 저 마을의 오른쪽으로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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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암문이라고 해서 공원 같은 넓은 공간에 쉼터가 있었다. 여기에는 성 안팎을 드나드는 길과 내부 탐방로를 오가는 길도 있었다. 그리고 여기 이후에는 꽤 가파른 오르막이 나와서 내 종아리와 발목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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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성곽길이란 게 원래 고도가 가변적이지만 여기는 지금까지 걸어온 구간 중에서는 제일 높은 곳 같았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고 해서 ‘동장대 터’라는 게 근처에 있고, 여기도 성 안팎을 드나드는 문이 있었다. ‘남한산성 여장’이라고 안내문이 있긴 했지만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두 종류의 성벽이 만나는 곳이었다. 지금까지 따라왔던 성곽길은 방향을 바꿔서 봉우리 아래로 고도가 하강했다.
성의 구조가 생각보다 복잡했다. 남한산의 정상이 정확하게 어딘지는 아직 감이 안 잡히지만, 벌봉이니 한봉이니 ‘외동장대 터’ 이런 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로 가려면 아무래도 이 성벽의 밖으로 나가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서 진로를 변경하여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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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종류의 성벽이 한데 만난다는 게 이런 뜻이다. 사진에는 흰 성벽의 문만 나왔지만, 이쪽으로 가기 위해서 기존 회색 성벽의 문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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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새로 난 길을 따라 벌봉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부터는 성벽의 보존 상태가 열악한지라, 성벽이 훼손되고 무너진 구간, 잡초가 무성히 뒤덮인 구간이 부지기수였다. 길도 그냥 흙길이지, 돌 같은 거 없다. 그래서 이곳 역시 장기적으로 복원 계획이 잡혀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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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흔적 + 높은 곳"을 쫓아 한 20분을 뺑뺑이 치니 외동장대 터가 나왔고 꽤 극적으로 정상 표지석을 발견했다. 남한산의 정상은 성 안이 아니라 성곽길 상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 안이 성벽 그 자체보다 고도가 높을 리가 없으니까.

남한산은 여느 산들 같은 정상 표지석이 없었다. 1970년대에 나라에서 높이 측정을 했다는 인증 돌판만이 바닥에 새겨져 있었는데, 생각보다 최근에 모 산악회에서 "여기가 남한산에서 제일 높은 곳이오~"라고 표지석도 그 옆에다 설치해 놓았다. 다만, 너무 아담한 크기이다 보니 누가 이걸 가져가거나 훼손하거나 심지어 다른 곳에다 옮겨 버리면 어쩌나 우려되기도 한다.

여기 부근을 돌면서 벌봉, 봉암성, 봉암신성 병인비 같은 바위들도 발견했으니 이번 산행의 목표는 어지간히 달성한 것 같았다. 이제 북쪽으로 나가는 길을 찾아서  ‘객산’이라는 산을 거쳐서 하산할 수도 있어 보였다. 하지만 본인은 남쪽의 한봉과 한봉성 정도는 더 구경하려고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갔다.
거기만 답사하고 나면 남한산성은 남옹성이 있는 남부와 좌익문 일대만 빼면 다 구경하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 본인은 남한산성의 사대문도 저 동문(좌익문)만 아직 못 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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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을 따라 가파른 내리막이 이어졌다.
한봉성(남한산성 성곽에서 특정 구간의 이름)이 먼저 나왔으며, 계속 더 걸어가자 다시 낮은 봉우리를 하나 오르는 게 나오고 성벽의 선형이 오른쪽으로(남쪽이던 것이 서쪽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내 여기가 한봉이라는 표지판이 나왔다. 복원이 덜 됐는지 아니면 원래 그랬는지 성벽은 여기에서 끝났으며, 주변에 딱히 볼 건 없어서 사진은 생략하였다.

성벽은 끝났지만 등산로는 계속 이어져 있었다. 이 길을 따라가면 남동쪽 광주시로 가는 차도와도 합류하게 되는 듯했다.
본인은 그 정도로 남쪽으로 가지는 않고, 여기보다 더 북쪽에서 성곽길을 적당히 이탈하여 산의 동쪽으로만 하산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봉성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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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본인이 남한산성을 완전히 빠져나온 출입구이다. 전방에는 저런 비탈길이 펼쳐져 있었다. 아무 이정표도 울타리도 계단도 없었지만, 낙엽들로 뒤덮인 바닥을 살펴보면 적당히 이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되겠다 싶은 정도의 흔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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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생각보다 굉장히 금방 끝났다. 내 기억으로 15분 남짓밖에 안 걸렸다. 이내 민가와 함께 잘 정돈된 길이 나타났다. 본인은 광주와 하남의 경계에 있는 ‘광주시 엄미리’ 방면으로 하산했다.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계곡을 따라 형성된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나중에 알고 보니 ‘엄미 농원’이라는 사유지의 내부였다. 이제 등산은 끝나고 후속 미션인 오지 탐험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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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생각보다 일찍 끝나고 건물과 차도가 등장했지만, 그래도 여기서 집에 가는 버스를 타려면 거의 2.5km 가까이 걸어야 했다. 이곳은 소형 마을 버스 같은 게 다니는 게 없으며, 마을을 완전히 빠져나가서 큰길까지 가야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었다.
차가 없는 안타까움을 절감하면서 터덜터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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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주변 가을 경치는 정말 아름다웠다. 여긴 나름 계곡을 따라 형성된 유원지인데, 언제부턴가 엄미천이라는 개울도 발원해서 졸졸 흐르고 있었다.
여기보다 살짝 북쪽의 하남시 상산곡동 일대도 비슷한 분위기의 마을이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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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43호선상의 서울 방면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아차산 동쪽의 구리에서 서울로 가는 도로도 같은 번호였는데..? 그 국도의 디자인 컨셉이 그런가 보다.

국도와 엄미마을 진입로가 교차하는 곳 주변은 "안녕히 가십시오(광주)"와 "어서 오십시오(하남)" 표지판이 보이고, 한편으로 저렇게 중부 고속도로와 제2중부 고속도로 고가도 볼 수 있었다.
여기서 탈 수 있는 유일한 시내버스는 13번이었는데, 하남 시내를 거쳐서 최종적으로는 천호, 강변 역까지 가지만 그 전에 서울 명일동 일대 주거 지역을 들쑤시고 다녔기 때문에 그 동네 구경도 덤으로 할 수 있었다.

이번 산행의 결론을 내리자면, 남한산은 군사 시설이라고는 그 흔한 헬리패드조차 하나 없이 모처럼 문화 유적 관람에만 충실한 산행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성남에서 시작했지만 대부분의 구간은 하남과 광주에 속했기 때문에 ‘성남 누비길’이 어떻고 하는 것도 전혀 없는 게 인상적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05 08:39 2018/02/05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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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발화산+응달산

청계산의 동쪽으로는 경부 고속도로를 건너서 인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청계산의 남쪽으로는 외곽순환 고속도로를 건너서 또 다른 산들이 존재한다. 이 산들 자체가 막 높고 유명한 건 아니지만, 이 영역에 속한 운중동, 석운동, 대장동은 성남시에서 개발의 손길이 닿지 않은 손꼽히는 오지이다. (뭐, 현재까지는 그런 편이지만 가까운 미래에 또 어찌 될지는 알 수 없다.)

여기는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온라인 공간에서 공개적으로 밝히기엔 약간 므흣한 국가 기밀 시설도 있어서(단순 군부대가 아님) 신비로움을 더욱 부추긴다. 그래서 본인은 다음 산행지를 여기 일대로 선택했다. 여기는 등산보다도 땅밟기 탐험의 성격이 더 강했다. 이번 산행, 아니 탐험은 입산 경로부터가 꽤 독특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배경 설명이 먼저 길게 나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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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청계 톨게이트(요금소)에 도착했다. 이런 곳을 자가용으로 스쳐 지나는 게 아니라 대중교통으로 방문하게 될 줄이야..
1650번 좌석버스는 송파 IC에서 고속도로로 진행해서는 가천대 정류장에 한 번만 정차한 뒤 곧장 여기에 도착했다. 성남 요금소에서 청계 요금소까지는 막히지만 않자 꽤 금방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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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곽순환 고속도로가 이렇게 광역 좌석버스 정류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하긴, 경부 고속도로에도 곳곳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지만 그건 요즘은 망하고 졸음 쉼터로 용도가 바뀌는 추세이다.

청계 요금소 주변에는 ‘청계 휴게소’라는 작은 휴게소도 있던데,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장거리 고속도로 휴게소라기보다는 그냥 경부 고속도로의 어귀에 있는 만남의 광장 내지 하이패스 센터 같아 보이는 아담한 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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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빠져나가면 곧장 아무나 무료로 이용 가능한 주차 공터가 나타난다. My precious!! 안 그래도 오지 탐험인데 본인 역시 여기엔 차를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산행 경로를 편도로 짰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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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정류장에서 반대 방향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서, 혹은 지금 본인의 경우 등산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고속도로를 횡단해서 반대편으로 가야 했다. 그렇다고 고속도로를 무단 횡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

주로 하이패스 관련 처리 착오 때문에 운전자나 요금소 직원이 차에서 내려서 고속도로 횡단을 시도하다가 차에 치이는 안타까운 사고 소식이 전해지곤 한다. 하이패스를 겨우 시속 30km로 통과하는 고지식한 FM 운전자는 요즘 세상엔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며, 특히 길가에 다 왔다고 해도 절대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4.5톤 초과의 대형 트럭 하이패스 차량들이 길가의 게이트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행자의 고속도로 횡단을 위해서 위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은 터널이 도로 아래에 마련돼 있다. 단, 이 터널은 길고 가파른 상구배(오르막)이며, 우회 경로가 너무 길고 불편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애로사항이었다.

청계 톨게이트 얘기가 좀 길어졌는데.. 아무튼 고속도로를 횡단한 거의 직후부터 흙길이 나오고 산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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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맨 처음으로 발을 디딘 산의 이름은 ‘발화산’이다. 순우리말인지 한자어인지(특히 ‘發火’!!) 그 남쪽으로 이어지는 네임드급 산인 ‘바라산’과는 어원이 어떤 관계인지, 그런 건 알지 못한다.

이 산은 남쪽 바라산 방향으로 흙길을 올라가면 무슨 묘지가 나오는 모양이다. 거기서 계속 남쪽으로 가서 완전히 바라산으로 가거나, 아니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산의 능선을 타고 응달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듯하다.
본인도 원래는 그걸 의도했는데.. 묘지까지 가지 않고도 고속도로가 보이는(그리고 그 대신 산의 고개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능선을 따라 동쪽으로도 길이 나 있는 듯해서 호기심에 그 길을 가 봤다.

그리고 그건 고난의 시작이었다.
뭔가 중장비가 지나간 흔적이 있고, 흙길이 없는 건 분명 아니었다. 좀 무리하면 지나가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진짜 공인된 정규 등산로를 만날 때까지 약 1km쯤 되는 이 길은 울타리, 이정표 등 그 어떤 등산 시설도 없었으며, 수십~1백 m 남짓 주기로 또 사람 키만치 자라 있는 수풀이 앞길을 막았다. 한때 개방돼 있었지만 버려지고 폐쇄된 지 몇 년쯤 된 옛 등산· 산책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풀을 발로 밟아 쓰러뜨리고, 커다란 거미가 앉아 있기까지 한 거미줄을 몇십 개쯤 헤치고, 손등과 팔목에 생채기가 몇 군데 나고 옷과 백팩이 흙투성이가 되고 바지엔 이름 모를 시꺼먼 식물 씨앗 같은 게 달라붙어서 일일이 떼내고, 집채만 한 나무로 둘러싸인 좁은 샛길을 통과하기 위해 양팔을 들거나 머리를 숙이기도 하고..

가끔 고속도로 아래로 바깥 경치, 그리고 무슨 수십 년간 보존된 DMZ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웅장한 가을 자연 경관이 펼쳐진 것에는 감탄했지만, 이거 "빠져나가는 건 가능한가? 무장공비도 아니고 아침부터 나 혼자 이거 웬 생쑈를 하는 건가? 지금은 간신히 나아가고 있지만 길이 도중에 진짜로 끊겨 버리면 어떡하지? 이러다 고개 건너편은 구경도 못 하고 능선만 따라 산이 끝나 버리면 어떡하지? 지금까지 온 게 얼마인데? (...)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별 잡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여기를 빠져나가는 동안 다른 등산객을 마주친 건 당연히 전무했다. 낫이나 정글도라도 하나 좀 챙겨 왔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험한 산행을 했지만, 그래도 이 넓은 산지가 전부 내 것 같았고, 여기서 잠을 자든 혼자 무슨 짓을 하든 티가 안 날 것 같긴 했다. 위의 사진은 그나마 덜 험준한 곳의 모습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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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언제부턴가 심겨져 있는 식물과 나무의 종류가 바뀌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울타리와 나무 계단이 쳐진 정규 등산로가 결국 나타났다. 드디어 고생이 끝났다. 이 부근에 고속도로 위로 청계산과 발화산을 횡단하는 육교(청계육교 + 하오고개)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등산로를 따라 드디어 고개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었다. 꼭대기에서는 무슨 KBS 송신탑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다른 철탑이 등산객을 반겨 주었다. 바라산 방면에서도 이쪽으로 오는 길이 있었는데, 내가 능선을 따라 이런 삽질을 안 했으면 그 길을 따라 여기에 도달하게 됐을 것이다.

이 지점이 아마 발화산에서 가장 높은 정상으로 추정되었다. 작고 낮은 듣보잡 산이어서 그런지 인근의 다른 산과는 달리 정상 표지 같은 것도 없다. 이제야 등산이 원래의 계획 궤도에 진입했으며, 본인은 동쪽의 운중· 석운동 방면으로 하산을 선택했다. 이 산 꼭대기에서부터 하산하는 길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성남 누비길 구간에 포함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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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산의 정상에서 본인이 입산을 시작한 청계 톨게이트를 내려다봤다.

산 내려가는 장면은 별로 볼 것 없는 흙길과 숲길뿐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사진은 생략한다. 여기는 주변 지역 탐험이 아니면, 산 자체는 멀리서 원정까지 와서 갈 만한 곳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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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어느 정도 내려가자 철조망이 나타났다. 정말 그 어떤 경고문이나 팻말도 없이 그냥 철조망뿐이었다.
사실, 발화산의 고개 너머 남쪽에는 거대한 코렁시설이 있다. 그쪽으로는 나무도 정말 빽빽하게 심겨져 있어서 위에서는 아래에 뭐가 있는지 도저히 확인할 수 없었다.

이유는 안알랴줌이고 어귀 딱 한 군데에만 "외부인 출입금지"라고 달랑 안내된 게 마치 청계산 상적동 구간 근처에 있는 군부대 입구를 보는 느낌이었다. 뭐 그래 봤자 여기는 그 코렁시설의 정말 북동쪽 변두리 외곽에 불과하기 때문에 여기 주변만 아무리 어슬렁거리며 들여다본다 해도 뭔가 대단한 걸 염탐할 수는 없다.

옛날에 경찰대가 용인에 있던 시절엔 학생들이 운동 차원에서 법화산 산길을 구보했을 텐데, 여기서 근무하거나 연수를 받는 ‘그분’들은 이 산 산길을 달리면서 체력 단련을 하지 싶다. 아무튼, 여기에 착륙하는 걸로 발화산은 답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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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 코스인 응달산을 찾아갔다.
발화산과 응달산 사이는 나름 높은 산중턱 고지대이지만, 비교적 넓은 평지와 함께 차도와 건물도 있어서 시골 마을 느낌이 났다.
응달산 등산로는 북쪽으로 차도를 따라 한 300m쯤 걸으니 나타났다. 중간에 오른쪽으로 꺾어서 자동차까지 진입 가능한 오르막길이 나오는데, 거기로 가지 말고 더 직진해야 한다. 거기는 한전 관할의 비밀 기지(송전? 변압?)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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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달산도 높이 250m가 될까 말까인 낮고 작은 동네 뒷산 급이어서인지, 산속엔 딱히 볼거리는 없었다. 다만, 등산로는 전반적으로 아주 크고 넓게 잘 닦인 편이었다. 산악 자전거가 다녀도 될 정도였다.
그나저나 ‘다음’ 지도는 2018년 2월 기준으로 응달산을 혼자 ‘옹달산’으로 잘못 표기하고 있다. 오타를 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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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건 응달산 중턱에 있는 한전 비밀 기지이다. 언뜻 보면 무슨 철도 차량 기지처럼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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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갈림길이 나오는데 이정표는 부실하게 마련되어 있어서 언제부턴가 살짝 길을 잃고 헤매기 시작했다.
본인은 계속 동남쪽으로 가서 대장동 시골 마을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였다. 예전에 태봉산에서 내려다보았던 그곳 말이다. 하지만 어떤 방향은 동북쪽으로 가서 산운마을 아파트 단지로 가는 것 같았다.

거기를 피해서 동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니 언제부턴가 묘지와 차도가 나오고 산이 끝나긴 했다. 하지만 마을로 가려면 한참을 더 걸어 내려가야 했다. 내 발 밑으로 용인-서울 고속도로가 터널로 지나갔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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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대는 역시 분위기가 판교· 분당 신도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다. 한적한 논밭, 한편으로는 형형색색의 빌라와 단독주택이 인상적이었다. 차가 없어서 두루 둘러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하지만 대장동도 이제 막 재개발 붐이 일고 있어서 곳곳에 굴착기와 덤프 트럭이 돌아다니면서 공사 중이었다. 사진에 나온 저 건물들도 대다수는 이미 주민들이 빠져나가고 철거 예정이었다. 내가 지금 본 광경을 불과 몇 년 뒤, 3~5년 안으로는 못 보게 될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그러니 지금의 오지 탐험이 더욱 뜻깊은 답사로 남을 것으로 보인다.

이 오지에서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은 대략 15~20분 간격으로 다니는 마을버스 32번이다. 주변에 버스 정류장 표식은 전혀 없지만, ‘두밀로’와 ‘모두마니로’라는 길이 만나는 삼거리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여기서 버스를 타고 무사히 귀가했다. 중간에 거친 동원동 일대와 낙생 저수지의 풍경도 인상적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02/02 08:30 2018/02/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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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인릉산(인능산)

본인은 지난 2016년 1월 말, 한겨울에 인릉산을 오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때는 본인이 지금 같은 등산 관행이 정착하기 전의 완전 초창기였기 때문에 사진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산에서 바깥 경치를 제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전망대를 들르지 못하고 바로 심곡동 서울 공항 방면으로 하산을 해 버렸다.

본인은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후 오랫동안 아쉽게 여겼으며, 결국 이를 보완하기 위해 훗날 경로를 달리하여 재등산을 하게 됐다.
인릉산은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창 밖으로도 잠시 볼 수 있는 낮고 작은 흙산이다. 청계산에 비해 그리 유명하지 않으며, 등산로 입구가 ‘어서 오십쇼’ 수준으로 잘 갖춰진 것도 아니고 역사적인 사연이 담긴 유물이나 절 같은 것 역시 없다. 그 대신 내부엔 예비군 훈련장 같은 군사 시설들만 잔뜩 들어서 있다.

그리고 얘 등산로의 상당 구간이 서울과 성남의 경계이며 ‘성남 누비길’이다. 서울과 구리의 경계인 아차산, 서울과 하남의 경계인 일자산처럼 말이다.
처음 등산하던 시절에도 각종 이정표와 소개 문구에서 성남 누비길이라는 단어가 있었지만 본인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했었다. 하긴, 그때는 서울 둘레길이라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등산이라는 분야조차도 그야말로 배경 지식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인릉산의 이름은 그냥 왕릉 이름에서 유래된 걸로 보인다. 자신의 북쪽에 있는 구룡· 대모산의 남부에 잘 알다시피 선릉과 ‘인릉’이 있기 때문이다. 대외적으로는 ‘인능산’이라는 표기가 훨씬 더 많이 쓰이고 검색 결과도 더 많이 뜨는데, 개인적으로는 여기서 왜 두음법칙이 표기 차원에서까지 적용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좀 혼란스러운 점이다.

처음 갔을 때는 본인은 옛골 마을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서-동으로 이동했다. 이번엔 본인은 방향을 달리하여 성남 신촌동에서 시작해서 동-서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쪽의 옛골 방면으로 하산한 게 아니라 최대한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서울 내곡동 방면으로 하산했다. 그래서 인릉산의 옛골 근처 구간에 존재하는 산불 감시 초소는 보지 못했다. 기왕 같은 산을 오르더라도 경로는 이런 식으로 최대한 차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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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을 위해 지방도 23호선상에 있는 서울 공항 내지 공군 제15비행단 기지 근처를 그것도 대중교통으로 오랜만에 방문했다.
요 알록달록한 도색의 물건은 뭔가 공군 기지의 상징인 것 같은데, 무슨 관제탑도 아니고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야전에서 식물과 흙을 벗하며 싸우는 육군이 아니니, 굳이 칙칙한 국방색이어야 할 필요는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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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촌동 마을의 풍경이다. 본인은 이런 건 보통 하산한 뒤에 감상하도록 등산 계획을 짜는 편인데, 이번에는 뭔가 순서가 바뀌었다.
군부대 활주로가 훤히 보이는 곳이니 여기는 15비가 이전하지 않는 한 재개발되어 고층 건물이 들어설 가능성이 전무하다고 보면 되겠다. 마을 내부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인릉산과 가까워지고 오르막 비탈이 가팔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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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울창한 숲길이야 어느 산을 올라도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니 너무 많이 올리지는 않겠다. 다만,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10월 하순), 단풍이 서서히 물들면서 산의 전반적인 색깔이 바뀌어 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참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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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어느 정도 오르니 15비 활주로도 이 정도는 내려다보이기 시작했다. 자그마한 프로펠러기가 이륙하는 것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눈으로 보고 엔진 소리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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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도 온통 진지라고 해야 하나 참호라고 해야 하나.. 이런 웅덩이가 가득했다. 군사 냄새가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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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 ‘전망대’에 도달했다. 산의 중앙이 아니라 동쪽에 치우친 곳에 있기 때문에.. 산을 동쪽에서 오르자 더 금방 발견할 수 있었다.
인릉산 2차 등산의 주 목표가 이렇게 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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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의 아래로는 이런 게 보인다. 저 밑에 있는 공터는 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군부대 연병장이다. 보이는 게 저게 전부는 물론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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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대모산 동쪽 기슭, 강남구 내곡동에 아주 기괴하게 생긴 아파트(LH 강남 힐스테이트) 단지가 이렇게 들어선 게 보인다. 저 건물을 이런 구도로 볼 수 있는 곳은 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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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한참을 더 걷고 올라가자 이 산의 정상이 나왔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 헬리패드가 있고, 헬리패드보다 약간 낮은 공터에 또 벤치와 참호, 풀밭이 놓여 있다. 막 높고 유명한 산이 아니어서인지, 특별히 정상 인증 비석이나 정자, 국기 같은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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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등산로의 한쪽엔 인릉산 특유의 군부대 철조망으로 길게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내곡 터널 위를 지나고, 신구 대학 식물원 방면 안내판도 지나고..
중간에 몇 번 길을 잘못 들 뻔하기도 했지만 요즘 시대가 어느 세상인가, 폰으로 위치를 확인하면서 그럭저럭 위기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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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서남쪽의 옛골 마을 방면으로 하산을 유도하는 이정표가 보였다. 하지만 본인은 그쪽으로 가지 않고 서북쪽 ‘홍씨 마을’ 방면을 선택했다.
거기는 길은 있지만 등산로 안내는 썩 친절하게 돼 있지 않았다. 그리고 군부대 철조망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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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가 본 길 대신 새로운 모험을 택한 것에 대한 보상은 이렇게 주어졌다. 공터가 나타나서 서울 남쪽 끝의 경부 고속도로 주변(신원동?) 경치를 내려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번 산행은 이른 아침 대신 한낮부터 시작했다. 이 당시 시각은 오후 4시가 좀 넘어 있었는데, 보다시피 벌써부터 날이 조금씩 저무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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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최종적으로는 입산할 때처럼 한가한 전원마을이 아니라, ‘서초 포레스타 5단지’라는 아파트촌에 착륙하는 걸로 이번 산행을 마쳤다. 신분당선 청계산입구 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서울 남부 그린벨트 지대가 이렇게 개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옛골이 아닌 이쪽은 인릉산 등산로가 막 적극적으로 마련돼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제 다 내려왔다고 생각되었는데 고속도로가 보이는 쪽으로는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해서 한참을 헤맸다. 결국 ‘내곡 마을 둘레길’이라는 산길을 더 가서야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저런 등산로를 통해 산을 벗어나게 됐다.

행정구역이 성남에서 서울로 바뀌니 각종 안내 표지판들의 글꼴과 스타일도 싹 바뀌었다. 하긴, 옛날에는 성남에 소재한 산들의 이정표가 추레한 명조체 계열이었는데 이게 조금씩 새걸로 교체되는 중인 것 같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30 08:36 2018/01/3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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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서울 밖으로 등산 갈 때는 성남, 하남, 구리 등 동쪽을 다니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서쪽의 광명으로 원정을 갔다.
광명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도덕산, 구름산, 가학산, 서독산이 자그마한 산맥을 이룬다. 산들의 높이 자체는 200m대에 지나지 않지만 수평 거리가 긴 편이어서 산책하기 좋다. KTX 광명 역은 최남단에 있는 서독산의 동쪽에 있으며, 광명 시내보다는 안양과 더 가까이 있다.

본인은 광명시 보건소 근처에서 구름산을 오르기 시작해서 구름산과 가학산의 정상을 보고, 거기서 곧장 하산했다. 그리고 광명시에서 대대적으로 밀고 있는 관광 명소인 '광명 동굴'을 구경하고 왔다. 즉, 맨 위와 맨 아래의 두 산은 건너뛰고 중앙의 두 산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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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어째 공원처럼 등산로가 넓고 울타리가 둘러져 있고 벤치와 정자도 많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는 그렇잖아도 '구름산 도시 자연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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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구름산과 가학산을 통틀어서 산 속의 정자들은 이렇게.. 나무 기둥이 수직이 아니라 아래로 쩍 벌어진 스타일이었다. 이런 정자는 처음 봤다.

공원 구간을 벗어난 뒤부터 등산로는 여느 산길처럼 울타리 없는 좁은 흙길로 바뀌었다. 중간에 산을 관통하는 구름산 터널을 타넘었다. 여기는 전반적으로 흙산이지만 바위도 종종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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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의 관악산 방면을 바라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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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을 앞두고 여느 정자보다 좀 높은 2층 정자가 나타났다. 산불 감시 초소라고 하는데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등산객용 전망대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장대비가 쏟아지는 산 속에서 이런 정자를 찾아가서 비를 피하고 야영을 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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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동쪽 아래는 빽빽한 시가지인 반면, 서쪽 아래는 비교적 한적한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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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는 커다란 표지석이 있고, 붉은 기둥의 정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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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산 정상에서 가학산으로 가려면 능선만 타는 게 아니라 고개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야 했다. 능선에는 군부대가 있고 철조망이 쳐져 있어서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꼭대기에 있지만 공군은 아니고 육군 부대였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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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이다. 등산로가 군부대 철책보다 아래에 있다.
그리고 어디서부턴가 이 길은 '광명 누리길'이라는 팻말이 나타났다. 각 도시들이 자기 관할인 산들에 등산로· 산책로를 개척해 놓고 이름을 붙이는 건 유행이라도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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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드디어 가학산의 정상에도 도달했다. 표지석은 앞면과 뒷면에 한글과 한자 표기가 모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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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얘기했듯이, 가학산 정상에서 계속 남쪽으로 진행해서 서독산으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그러지 않고 서쪽의 광명 동굴 방면으로 하산했다. 여기는 보다시피 그냥 절벽이기 때문에 굉장히 급격한 계단을 따라 잠깐 내려가야 했다.

산 아래에 분홍색으로 칠해진 저 건물은 '광명 자원 회수 시설'이라고 한다. 굴뚝이 정말 크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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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 동굴이란 자연 동굴이 아니라 가학산의 기슭과 아래에 꽤 방대하게 뚫려 있던 광산이 원조이다. 강원도가 아니라 서울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그리고 그냥 평범한 동네 뒷산 같은 이런 산의 아래에 광산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꼭대기는 군부대이고 땅 속은 광산이라니 으음..
석탄은 아니고 여러 종류의 중금속들이 그럭저럭 채굴돼 나왔다고 한다. 구리, 아연뿐만 아니라 금과 은도 약간이나마 나왔다.

이 광산은 일제 강점기이던 1912년에 처음 개척되었고 해방 후에도 수십 년간 광부들의 일터 역할을 했으나, 그로부터 딱 60년 뒤인 1972년에 환경 오염 문제(그리고 아마 채산성도 감소)로 인해 폐광하게 됐다.
그 뒤 이 부지는 몇십 년 동안 버려져 있었는데, 2010년대에 들어서 광명시에서 약 빤 모험을 시작했다. 폐광을 테마파크 관광지로 마개조한 것이다.

이건 온통 산이고 광산도 제일 많은(그래서 철도도 산업선이 제일 먼저 깔린..) 강원도에서도 시도한 적이 없는 일이었다. 강원도는 광업이 망하면서 지역 경제가 싹 죽자 호텔· 콘도 짓고 올림픽 유치하고 강원랜드 같은 카지노만 만들었으니 말이다.

이 과정을 거쳐서 구 가학 광산은 2011년에 처음으로 일부 구간만 민간에 개방되었다가 몇 년 뒤엔 별별 물고기· 식물 전시관, 좀비 체험(!)관, 그리고 와인 갤러리 등이 추가되고 이름도 '광명 동굴'로 바뀌었다. 그리고 유료 입장으로 바뀌었다.
예전에는 높은 천장에 거대한 계단을 타고 밖으로 나가던 홀(?) 비슷한 장소는 공연장으로 바뀌었으며, 그쪽으로 나가지는 않게 동선도 바뀌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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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갱도라는 게 대체로 그렇듯이, 출입구는 평지보다 높은 곳에 있지만 채굴을 계속할수록 엄청나게 낮고 깊어진다. 가학 광산도 원래 지하 9층까지 있었지만 광명 동굴은 두 층만 사용하며, 지금도 민간에 개방된 공간은 극히 일부뿐이다. 물론 그 두 층이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평범한 건물 두 층 높이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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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답게 나름 이렇게 보물 코스프레를 해 놓은 곳도 있다. "알리바바와 40명의 도둑"에서 '열려라 참깨' 동굴 안 모습이 이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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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전시관 구경을 다 하고 올라온 뒤에는 광산 역사관과 와인 갤러리를 둘러본 뒤 퇴장하게 돼 있었다. 저런 모형도 있고, 방 중앙에는 아래의 광부들이 탄 리프트를 끌어올리는 엘리베이터 기계실처럼 생긴 물건도 전시돼 있었다.
공교롭게도 Doom 2의 레벨 26 The abandoned mines가 딱 이런 구조물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맵이다.

세상엔 여러 극한 직업들이 있지만 광부는 그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3D 극한 직업이지 싶다. 뭐, 농부· 어부에 비해서 날씨는 별로 타지 않는 직업일 것 같지만, 날씨보다 더 위험한 요소가 널려 있다. 오죽했으면 미성년자는 물론이고 여성은 소수의 부득이한 상황을 제외하면, 갱내 근로가 아예 대놓고 "금지"돼 있으며(근로기준법 제72조),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어떻게든 외화 벌려고 그 먼 독일까지 괜히 광부(+간호사)를 보낸 게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시절엔 가정과 나라가 얼마나 가난했으면, 거기에라도 가려고 대졸자들이 바글바글 몰렸으며, 너도 나도 손에 일부러 연탄 가루까지 묻히면서 면접관에게 "꼭 가고 싶습니다!"라고 외쳤었다. 돈을 훨씬 더 많이 벌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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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전등갓조차도 와인 잔을 엎어 놓은 형태이더라.
하긴, 포도주는 생각보다 종류가 굉장히 많고 와인 잔도 종류가 다양했다.
포도를 재배하지도, 포도주를 생산하지도 않는 웬 수도권의 어느 도시가 전국 최대의 포도주 판매· 유통처가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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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등산과 동굴 구경을 마치고 나왔다.
차 없이는 다니기 힘들어 보이는 오지이지만 유일하게 17번 버스가 광명 동굴을 찾은 뚜벅이들의 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나가니 KTX 광명 역이 나왔다. 난 광명 역의 주변 지상에서는 철길을 전혀 볼 수 없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또한, 역 주변으로는 어마어마한 높이과 크기의 아파트인지 주상복합인지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호반베르디움??)
본인은 여기서 오랜만에 광명 셔틀 전철을 타고 귀가했다.

광명에는 저렇게 폐광을 창의적으로 활용한 동굴이 있고 고속철 역이 있고 경륜 경기장도 있고(광명 스피돔. 하남에는 미사리 카누 경기장), 이케아도 있다(하남에는 스타필드?).
나름 광명 시장이 시의 인지도를 올리려고 유치해 낸 거라고 하니, 그 사람이 참 유능한 인물인 것 같다.

저기는 그냥 경부선 철길에서 미묘하게 비껴 간 오지일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옛날에는 "지하철 타면서 농사 짓는 이색적인 사람"라고 해서 광명의 어느 서울 근처 그린벨트에서 사는 할아버지 소개를 본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거기도 온통 개발되고 있으니 그런 사람을 볼 일이 없어질 것이다.

광명에서는 광명 동굴을 명물로 밀고 있는데, 구리시에서는 왕릉을 밀고 있다. 오죽했으면 근처의 버스 정류장을 아예 긴 명사절로 지었다. (우리나라 최대 왕릉군인 동구릉.. -_-)
다음 산행 내지 산책 때는 저기도 언젠가 가 볼 생각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19 08:32 2018/01/19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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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아차산

본인은 지난 2년 남짓한 시간 동안 이 블로그의 여행 카테고리가 대부분이 등산 후기로 도배될 정도로.. 서울 근교의 어지간한 산들은 다 돌아다녀 봤다.
그러면 다음으로는 설악산이나 지리산, 한라산(!!)처럼 점점 더 먼 곳에 있고 더 크고 높고 유명한 산들로 원정이라도 가야겠지만 본인 여건상 그렇게는 못 하고, 일단은 예전에 이미 올랐던 산들을 다른 등산로로 다시 오르는 쪽으로 등산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특히 지금 정도로 지리 특성과 역사 배경을 치밀하게 분석하면서 사진과 여행기를 남기는 관행이 정착하기 "전", 완전 초창기나 더 옛날에 올랐던 산들이 이런 복습 대상이다.
아차산은 서울 시내에 가까이 있고 높이도 아주 낮아서 만만하고, 먼 옛날에 회사 사람들과 같이 오른 적이 있으며 2016년경에 용마산 쪽에서 혼자 답사한 적도 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또 찾아갈 일은 없으리라 여겨졌다. 하지만 그런 편견을 깨고 다시 가 보니 예상 밖으로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아차산은 도보 내지 대중교통으로는 말 그대로 서울 지하철 5호선 아차산 역에서 접근 가능하다. 단, 역은 천호대로라는 큰길에 있으며 여기서 등산로 입구까지는 또 수백 m~ 1km가량 떨어져 있는데, 등산로 코앞까지 도달하는 대중교통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산을 향해 미묘하게 오르막 형태인 긴 먹자골목과 주택, 빌라를 지나야 한다.

자동차로는 여기뿐만 아니라 ‘아차산로’라는 찻길을 통해 산기슭의 공영 주차장까지 접근할 수 있다. 아차산-광나루 사이의 고갯길을 지나다 보면 위로 차도가 고가 형태로 지나는 걸 볼 수 있는데, 바로 그 길이다. 아차산은 마치 북악산의 북악 스카이웨이처럼 막 높게는 아니어도 내부에 자동차 도로가 닦여 있으며, 이게 동쪽의 장신대와 워커힐 호텔 및 아파트 쪽으로도 간다.

아차산의 여러 등산로 중 이렇게 남쪽 공영 주차장 일대는 여느 산답지 않게 상당한 고퀄로 꾸며져 있다. 바로 근처에 외국인들이 찾는 고급 호텔이 있기 때문인지, 아차산성 같은 고대 유적이 있기 때문인지, 등산로가 서울 둘레길로 지정됐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가 법적으로 무슨 국립공원 같은 급은 절대 아니며 발굴된 삼국시대 유적이 무슨 경주 남산 같은 급으로 양과 질이 엄청난 것도 아닌데, 더구나 이웃의 용마산 등산로를 비교해 봐도 아차산 서울 구간은 뭔가 특별한 관리를 받아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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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기 전, 주차장 근처에 이런 생태 공원이 있는 걸 발견하고 들러 봤다. 공원 자체도 평지가 아니라 비탈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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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아차산성 + 아차산 정상을 향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날은 맑고 덥지 않으며, 나뭇잎들은 아직 단풍으로 물들지 않고 초록색이 남아 있으니 이런 날이 등산 가기 아주 좋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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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성은 주변 조사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니 여기 일대에 민간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울타리· 표지판과 함께 근처만을 스치듯이 구경할 수 있었다.
사실, 산에 군사 보안 시설이 전혀 아니면서 민간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경고문을 보는 일은 몹시 드물다. 우면산 같은 산은 아예 과거 지뢰 매설 지역이라는 경고문까지 있지 않던가?

아차산엔 군사 시설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등산로를 벗어난 다른 어딘가에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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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가 곁들어진 흙길을 벗어난 뒤부터는 등산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흙길 대신 암반이 등장하고, 나무 없이 하늘이 뻥 뚫린 곳이 나타났다. 그리고 산 아래의 전망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본인은 옛날에 아차산을 오를 때에는 이런 흙길 대신 암반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는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산을 올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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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망대에는 무료 망원경도 비치되어 있었다. 평범한 서울 야산에서는 보기 드문 시설이다.
아차산과 그 북쪽 산맥(?)은 나름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이다. 예전에 일자산이 동서로 서울과 하남시를 갈랐던 것처럼 말이다. 둘 다 서울 동부에서 서울 둘레길 경로라는 공통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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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한 언덕을 올라서 아까 전에 지나쳤던 다른 언덕을 찍은 것이다. 요게 아차산 상부의 특징이다.
여기 일대의 넓은 공터가 아마 정상은 아니고 "해맞이 광장"이었지 싶다. 여기서 풍경 사진을 여러 구도로 남기긴 했지만, 전부 게재는 시간과 지면 관계상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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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산 위의 풀밭 같은 평지를 지났다.
산 꼭대기 근처에 넓은 평지가 있으면 거기는 십중팔구 H자 모양의 헬리패드가 있을 텐데, 여기는 그렇지도 않았다.
풀밭에 돗자리 깔고 앉고 싶기도 하지만.. 길을 벗어나지 말라고 울타리가 낮게나마 계속 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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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돌무더기 위의 마지막 평지가 바로 아차산의 정상이었다. 정상 표지석 같은 건 없고 그냥 문화재 유적 설명만 있었다.
아차산 자체는 높이가 300m도 채 되지 않고 서울 남산과 비슷한 급일 뿐이다. 다만, 높이 대비 비탈이 완만하고 이동 거리는 긴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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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에 깔린 돌무더기는 역사 고증을 거친 건지 아니면 별 생각 없이 만든 건지는 모르겠다만, 흰색과 누런색이 어우러진 게 마치 은덩이 금덩이 같고 색깔 배색이 나름 화려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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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정상의 바로 옆에는 저렇게 이웃의 용마산이 있다. 아차산 정상 이후에 그냥 이 봉우리로만 하산하는 길은 딱히 제대로 보이지 않는 반면, 서울 둘레길은 용마산 방면으로 형성돼 있다. 거기서 용마산 정상으로 가려면 서쪽으로 더 가야 하고, 둘레길은 북쪽 망우산 방면으로 향한다.

본인은 아차산 정상을 찍은 이후에는 일단 서울 둘레길을 선택했다. 여기부터는 작년에 답사했던 구간과 중복이니 헬리패드나 보루 같은 장소를 옛날에 봤던 기억이 슬금슬금 나기 시작했다. 그때는 용마산 정상 도착 직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 반면, 이번엔 날씨가 아주 맑으니 분위기가 좋은 대조를 이뤘다.

단, 그때는 망우산 묘지 구경을 하느라 서울 북부로 빠져나가 버렸으니 이번에는 산 동쪽의 구리시 방면으로 나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깔딱고개를 오르내린 뒤 사거리가 등장했을 때, 본인은 "아치울 마을" 방면을 선택했다. 좀 충분히 많이 걷고 나서 구리시 북부에서 하산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심지어 발 아래로 아차산 터널조차 넘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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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작고 좁은 구리시에서도 아차산의 자기 관할 영역 내부에 나름 ‘구리 둘레길’이라는 걸 제정해서 홍보하고 있었다. 여기는 별다른 문화재 유적은 없고 그냥 울창한 숲길이 이어졌다.
처음 입산했던 서울 광진구 관할 구간에 비해 훨씬 조촐 단촐했으며 다른 등산객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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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수터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다만, 수질 검사를 언제 해서 결과가 어떻게 나왔다는 쪽지가 붙어 있지는 않았다.
아치울 마을 방면으로 내려가는 길은 나름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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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드디어 마을이 나타났다. 등산 마치고 내려가면서 과천, 광주, 남양주, 하남, 성남 등 여러 곳의 산기슭 마을을 구경했는데, 구리시의 마을을 이렇게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본인은 뒷산이 병풍처럼 깔렸고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들어선 한적한 마을에 사는 것에 대한 로망이 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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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차산 등산을 마치고 마을 어귀에까지 도달한 뒤, 대로(아차산로, 국도 43호선)로 나가서 버스를 타고 귀가했다. 바로 옆에 강변북로(거의 시점!)와 한강이 지난다.
이곳을 지나는 버스들은 대부분 광나루 역을 경유하고, 모든 버스들이 닥치고 강변 역으로 갔다. 거기가 시· 종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일대에 석유 공사의 본사일 리는 없고 철조망이 둘러진 무슨 시설이 있는 것을 차창 밖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민간 지도에는 당연히 숨겨져 있고.. 나름 아차산에도 보안 시설이 하나 있긴 하구나.
성남 석운동에는 송유관 공사가 있더니 성격이 비슷한 시설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16 08:37 2018/01/16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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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 전망대와 행주산성

본인은 작년에 강화도에 나들이를 다녀와서 이 블로그에다가도 여행기를 올린 바 있다.
그때 본인은 고인돌이나 마니산, 고려 행궁뿐만 아니라 북쪽에서 전망대도 보고 왔다. 남한과 북한이 첩첩산중의 육지가 아니라 거대한 강을 사이에 두고 나뉘어 있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러니 여기는 DMZ 같은 건 없으며, 강 건너편에는 의외로 북한의 마을이 곧바로 보이고(선전용으로 일부러 때깔 곱게 꾸며 놓은 것이지만..) 군인이 아닌 평범한 주민들도 보인다. 이런 광경은 한반도의 서부인 한강 하구에만 존재한다.

그러니 본인은 이렇게 강 건너편의 북한을 볼 수 있는 전망대가 강화도 말고 또 있는지 궁금해졌다. 지도를 찾아보니 '오두산 통일 전망대'라는 게 있다는 걸 새로 알게 됐다. 오두산은 높이가 100m 남짓한 낮은 산이며 백제 시대에 '오두산성'이라는 성곽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가 임진강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어서 경관이 아주 좋으며, 자연스럽게 강 건너편의 북한 땅을 보기에도 좋다. 게다가 그 어느 전망대보다도 서울과 가까이 있고 자유로 도로의 바로 옆이기까지 하니 접근성도 훌륭하다.

이런 이유로 인해 1992년 9월, 노 태우 정권 시절에 여기에 통일 전망대가 건립되었다고 한다. 사실은 자유로와 거의 동시에 완공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서 차를 몰고 여기를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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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을 올라서 아래의 자유로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반대로 자유로를 저렇게 달리는 도중에도 이 전망대가 차창 밖으로 보인다.
자가용이 없더라도 셔틀버스가 평지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전망대를 찾아갈 수 있다. 자세한 건 해당 기관의 홈페이지를 참고할 것.
그런데 이 높은 곳까지 자전거를 타고 올라온 근성의 자덕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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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의 입구 모습이다. 여기는 위도가 가장 높고 바다를 옆에 낀 강원도 고성의 통일 전망대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정반대이다.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오두산 전망대는 북한을 코앞에서 볼 수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전망대들과는 달리 "민통선 안에 있지 않다!" 여기 주변의 지형과 군사분계선의 특이한 선형 덕분에 가능한 전국 유일의 예외가 아닌가 싶다. 덕분에 이 전망대는 드나들기 위해서 신분증을 까고 차량 번호를 적고 출입 허가증을 받는 식의 난리를 칠 필요가 없다.

군부대 내부에 있는 전망대들은 북측 방면 사진 촬영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엄격한 통제가 걸리는 편이지만, 이 전망대는 그런 게 전혀 없이 아주 관대한 분위기였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전망대 주변에 일제의 군사 시설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다. 여기 일대는 국내의 인터넷 지도 사이트들이 항공 사진을 제공하지 않는 엄연한 전방 보안 지역이다.

전망대 안에는 실향민들을 위해 북한의 주요 도시들 내부를 3D 그래픽으로 재현해 놓은 동영상 상영관이 있고, 북한의 도발 역사와 통일의 필요성, 남과 북이 추구하는 통일 이념 같은 원론적인 얘기들이 전시돼 있었다.
남한이 서부 지방도 땅을 좀 더 많이, 송악산 정도까지만 수복했으면 우리가 접근할 수 있는 고려 시대 유적이 더 많아졌을 것이고 경의선 전철이 개성까지도 뚫렸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면 오두산 전망대 같은 전망대도 이곳이 아니라 송악산 정도로 더 북상하게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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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주된 풍경은 이것이다.
저~~멀리 보이는 땅은 북한 개풍군이다.
그리고 왼쪽 중간에 있는 땅은 남한 김포시 하성면이다. 북한 땅과 남한 땅 사이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과 합류한 한강으로, 반쯤 이미 서해 바다이다.
김포시 하성면과 내가 있는 곳 사이에 있는 물길은 한강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물길은 임진강이다. 지리 구도가 대략 이렇게 된다. 이 말이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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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안에 들어가 보면 여기가 어디쯤인지 지도와 함께 잘 설명되어 있다. 한강 하구 정도로 가면 강폭이 거의 2km에 달한다.
여기도 나름 두 물줄기가 만나는 셈인데, 남양주 두물머리나 정선 아우라지와는 분위기가 영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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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전망대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북한의 마을과 주민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사람은 망원경으로 봐도 매우 자그마해서 식별이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논밭에서 농삿일을 하는 건 분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여기 주변에는 선전 구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두산 전망대가 또 아주 좋은 건 여느 전망대들과 달리 망원경이 무료라는 점이었다. 덕분에 망원경을 비교적 오랫동안 만지작거리면서 망원경으로 비치는 상을 카메라로 찍는 시도까지 할 수 있었다. 물론 원하는 각도를 맞추기란 대단히 어려웠고 색깔도 뿌옇긴 하지만, 그래도 사물 자체는 카메라의 줌에만 의존하는 것보다 더 선명하게 찍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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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남한 쪽(김포 하성면)을 보고 찍은 모습이다. 흐리던 하늘이 맑고 파래져서 경치 구경하기에 적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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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폭(=거리)이 좀 압박스럽긴 해도 수심이 막 깊어 보이지 않고 심지어 밀물 썰물까지도 있다는데.. 누가 미친척 하고 근성으로 헤엄쳐서 월북이나 탈북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긴, 실제로 그런 사례가 있기도 했다.
다대포 해수욕장이 있는 부산 낙동강 하구와는 달리, 군사적으로 완전히 봉인되어 버린 한강 하구의 안습한 현실을 이렇게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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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에서 남한 내륙 쪽을 둘러보니, 맞은편 언덕 위에는 웬 거대한 한옥 건물이 보였다. 저건 도대체 뭔가 궁금해서 찾아 봤더니 '고려 통일 대전'이라고 고려의 종묘뻘 되는 행사를 치르는 '고려 역사 선양회'라는 단체 소속의 사유지라고 한다. 헐... 저기서 1년에 한 번 '대제'를 지낸다고..

이렇게 본인은 오두산 통일 전망대 구경을 잘 마쳤다. 이런 걸 보면 맨날 뉴스에서 핵 만들고 미사일 쏘는 그 또라이 북괴라는 나라가 내가 사는 곳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실존한다는 걸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파주에서 데이트 코스 관광지로 알려져 있는 헤이리 예술 마을, 프로방스 마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고 북한과도 불과 4~5km 남짓밖에 떨어지지 않은 전방이라는 것에 놀랐다. 거기도 보안 문제 때문에 국내 인터넷 지도에서 항공 사진이 제공도지 않는다.

말이 나왔으니 좀 정치적인 이슈 얘기를 하자면, 본인은 인제 와서 남북이 뭔가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방법으로 통일을 이룬다는 건 거의 '영어 공용어화'만큼이나 가능하지 않으며 타이밍이 물 건너 갔다고 상당히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북괴 체제를 붕괴시킬 기회를 다 놓쳐 버렸기 때문이다.

통일만 되면 한국이 인구가 7500만이 되고 탄탄한 내수 시장을 갖춘 동북아시아 강국이 되고 어쩌구 희망적으로 나불거리는 건, 북한 주민들이 굶주린 약골· 마약 중독자가 아니고 남조선 인민들에 준하는 체력과 생산성이 있으며, 김씨 정권에 세뇌되지 않은 정상적인 정치관 종교관 국가관을 갖고 있을 때에나 성립하는 얘기이다. 지금 그 전제조건이 성립하는가? 전혀, 네버..

그러니 지금은 정말 통일을 외칠 때가 아니라, 통일이 안 되고 설령 북한 땅을 다른 세력이 다스려도 좋으니 전적으로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소말리아 아이티 캄보디아보다도 못살고 있는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고, 북괴 정권을 고립하고 압박시키고 무너뜨리는 일에 신경써야 할 때이다. 지금은 우리가 힘이 충분치 못해서 휴전선 전방에서 '북괴의 위협'만 제거하고 예방하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북괴의 존재' 자체를 제거하는 것으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걸 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영구분단만 유지해도 중간은 간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북괴랑 대화하자네 퍼주자네 하는 놈들은 정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다 쳐죽이고 씨를 말려야 된다. 이놈들은 일제 시대 친일파 따위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나쁜 악마들이기 때문이다. 악마를 상대로는 전기톱이 훌륭한 대화수단이거늘 무슨 달러 현찰이 대화수단이란 말인가?
꼭 이런 애들이 북괴를 좋게 말할 수는 없으니 오로지 남한만 정체성을 부정하고 역사를 부정적으로만 평가하며, 맨날 민족 민족 들먹이지만 동족이 자유를 빼앗긴 굶주린 노예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두산 전망대 다음으로 본인은 동일하게 자유로와 아주 가까이 있는 행주산성을 덤으로 들렀다. 언덕의 높이가 서로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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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산성이 자리잡았던 덕양산은 서울 봉화산만큼이나 산맥 없이 혼자 우뚝 솟은 독립구릉이다. 강 쪽으로는 거의 절벽이고 육지에서는 경사가 완만한 편이어서 요새화에 유리하고 군사적 가치가 높았다고 한다.
언덕의 특성상 경사의 압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정말 낮기 때문에 성인 남자의 체력 기준으로는 슬금슬금 오르면 정말 금방 정상까지 갈 수 있다. 예전에 서울 응봉산을 오르던 정도의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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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도달하니 역시 자유로+강변북로와 한강, 마곡철교(공항 철도), 방화대교 등의 다리가 내려다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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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행주대첩 승전을 기념하는 기념비와 정자도 있었다.
행주산성 안에 있는 각종 건물들은 조선 시대에 있었던 오리지널이 아니라 다들 후대에 새로 건설된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간판이 '덕양정', '대첩비각', '충의정' 등으로 한문이 아닌 한글로 적혀 있었다.

행주대첩(권 율)은 진주성 대첩(김 시민), 한산도 대첩(이 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3대 대첩 중 하나이다. 이 순신은 임팩트가 독보적으로 너무 크고, 진주성은 그래도 2차 전투 때는 함락되어 버리기라도 했다만, 행주대첩에 대해서는 본인이 지금까지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주산성 안에는 적당히 나무 아래에서 쉴 공간이 많이 있었으며, 그 당시 전투를 기리는 기념관도 드문드문 자리잡아 있어서 휴식과 힐링용으로 좋았다. 단, 본인의 막연한 예상과는 달리 여기는 돌로 쌓은 성벽 같은 건 없었다. 토성 비스무리한 것만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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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본인은 이 정도로 서울 서부까지 온 김에 행주대교를 건넜으며, 인천 계양 역 근처의 경인 아라뱃길 공원을 구경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여기는 정작 배의 통행은 전무하다시피하고, 오히려 양 옆 둑길이 훌륭한 자전거 라이딩 코스가 되었을 뿐이다. =_=;; 이러려고 괜히 운하를 팠나 자괴감이 충분히 들 만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7 08:29 2018/01/07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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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창경· 창덕궁과 종묘를 다녀오고 나서 몇 달 뒤, 다음으로는 종로가 아닌 시청, 정동 쪽으로 놓여 있는 고궁을 답사했다. 이번에는 자전거 없이 전적으로 걸어다니기만 했는데, 답사 동선의 고저차를 감안하면 궁극적으로 이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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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시청 역은 서울 시청 및 서울 광장뿐만 아니라 덕수궁과도 아주 가까이 있다. 입구의 이름은 '대한문'인데, 본인은 저 명칭을 20여 년 전에 나왔던 어린이용 비디오 한자 교재의 출판사 이름으로 먼저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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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일대는 지난 2017년 3월, 반공 애국 시민들이 박 근혜 대통령의 인민재판 부당 탄핵을 반대한다고 태극기를 흔들며 목놓아 외쳤던 역사적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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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안으로 들어간다. 정전인 중화전이다. (돌바닥에 비석 같은 신하들 자리..) 이런 것들 이름을 붙이는 방식은 어떠했는지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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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에는 동서양 건축 양식이 퓨전으로 섞인 의외의 건물이 있었다. 이름은 '정관헌'이라고 하고, 구한말인 1900년에 고종이 연회장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추가로 지은 거라고 한다.
그리고 근처에는 '석조전'이라고 더 나중에 지어진 서양식 석조 건물도 있다. 덕수궁은 마냥 기와집 일색이 아니라 안에 의외로 이런 서양식 건물이 있었다. 물론 지금 있는 건물은 재건 복원된 것이고,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나머지 덕흥전, 함녕전 등의 건물도 둘러보고 사진을 찍었지만 소개를 생략하겠다. 이렇게 덕수궁을 둘러본 뒤 본인은 후문 쪽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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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구세군 회관을 지났다. 옛날엔 뭔가 근대식 건물이라 하면 전부 붉은 벽돌 일색이었던 것 같다. 그게 지금으로 치면 '유리궁전' 같은 유행이었던 듯.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도 뭔가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었는지, 제복 차림의 직원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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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로와 새문안로2길 사이에는.. 서울 도심의 최고 입지임에도 불구하고, 덕수궁 복원을 위한 문화재 발굴과 조사라는 명목으로 민간인의 접근이 봉인된 넓은 폐허(?) 공터가 있다. 다른 구간은 높은 담장 때문에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지만, 그래도 출입문이 있는 곳에서는 철문 사이에다 렌즈를 집어넣어서 내부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런 곳이 있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인제 와서 서대문(돈의문)이라든가 이 일대의 한양도성도 과연 부지 확보와 복원이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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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그 이름도 유명한 구 러시아 공사관 첨탑에 도달했다. 고종 황제의 흑역사인 1896년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구'에서 알 수 있듯, 지금의 러시아가 아니라 공산주의 소련 이전의 '러시아 제국' 시절 얘기다. 노(魯)뿐만 아니라 아(俄)도 러시아를 가리키는 한자로 쓰인 것이 생소하게 보인다.

원래 러시아 공사관은 훨씬 더 넓고 큰 건물이었지만 그것들은 6· 25 전쟁 중에 몽땅 파괴되고 이 부분만 현재까지 남아서 전해진다. 아까 그 폐허 부지와 직선 거리상으로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높이 차이가 상당하기 때문에 여기로 가려면 정동 공원 등 다른 곳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진들을 보면 알 수 있듯, 주변 지형의 특성으로 인해, 구도는 전부 탑을 올려다보는 형태 말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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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 아래의 정동 공원도 경치가 좋아서 사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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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 다음으로 나가서 새문안로를 횡단하니 경희궁의 진입로인 흥화문은 곧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경희궁은 조선의 궁전 5개 중에서는 존재감이 제일 없다. 서울의 궁전들 중에서 훼손이 제일 심해서 볼 게 제일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 궁전들보다 잔디밭 마당이 유난히 넓고, 곳곳이 복원 공사가 한창이었다.

본인조차도 한글 학회 회관 근처에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오피스텔 단지가 있는 걸 보고는, 수 년 동안 "경복궁도 아니고 경희궁은 뭐야?"라고 생각했지, 이 도심 근처에 다른 궁전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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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은 자기 건물만 철거된 게 아니라 부지 자체도 다른 건물로 막 잠식당해 왔다. 한때는 명문 서울 고등학교가 이 자리에 있다가 그나마 강남으로 이전했으며, 서울 교육청도 여기에 떡 자리잡고 있다.
컨텐츠가 빈약하고 온통 공사판이어서 그런지, 여기는 인서울 궁전들 중에서 유일하게 입장료를 받지 않았다. 아무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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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건물 없이 땅만 덩그러니 놀고 있다. 대문인 흥화문, 그리고 정전인 숭정전이 사실상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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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구경은 뭐 이 정도로 끝..?? 주변 사진을 더 찍은 것도 있지만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공개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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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인은 경희궁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서울 역사 박물관을 찾아갔다. 학교에 갈 때 버스를 갈아타는 지점이며, 마당에는 노면 전차가 하나 전시되어 있기도 하니 본인은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1층은 도서관 자료실과 특별 전시관이고, 2층은 조선 시대, 일제 시대, 해방 이후의 순으로 상설 전시관이 있었다. 아, 여기 역시 관대하게도 무료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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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특별 전시가 두 개가 진행 중이었다. 하나는 "파독 간호사 여성들의 삶"이라고 뭔가 국제시장스러운 소재였다. 그것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른 하나로, 우당 이 회영 육형제 가문에 관한 소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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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은 조선 시대에 요즘 시세로 치면 못해도 몇백 억에 달할 땅과 재산을 소유한 플래티넘 금수저 출신이었다. 단순히 농사나 장사로 부자가 된 것도 아니고 대대로 관료였다. 얘들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묵인만 해도 원래 하던 정치인이나 법조인 한 자리나 꿰차서 전관예우를 충분히 받고 얼마든지 계속해서 떵떵거리며 살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를 빼앗겼다는 소식에 육형제 전체가 삼국지의 도원결의보다 더 드라마틱한 결의를 했다. 그 많던 재산을 정말 헐값에 몽땅 처분하고 만주로 건너가서 '신흥 무관 학교'를 세우는 미친 짓을 했다. 그리고 지지리도 돈 안 되는 일인 무장 투쟁 노선 독립운동가의 양성과 지원에 가산을 탕진했다. 이거 무슨 독립 운동가 배출의 숨은 요람이었다는 남쪽 끝 '소안도' 섬 얘기를 듣는 느낌이다.

여섯째인 막내는 맏형에 비하면 거의 맏형의 아들 수준으로 터울이 크긴 하다만.. 이 육형제가 모두 그 부자 가문에 걸맞지 않은 힘든 가시밭길을 걷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나마 다섯째 '이 시영'만이 유일하게 해방 이후에까지 살아남아서 초대 부통령을 역임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엄청난 선행을 한 독립 운동가와 그 가문이 안 중근· 윤 봉길, 유 관순, 김 구만치 진작부터 널리 알려지고 칭송받지 못한 주 이유는 이들이 일체의 진영과 파벌을 싫어하고 뭔가 신 채호처럼 이상주의 순수주의 무정부주의 독고다이 아나키즘 성향의 항일 노선을 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그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도 그리 호의적인 관계를 맺지 않았다. 처음엔 같이 관여하다가 감투 싸움 밥그릇 싸움에 환멸을 느끼고 뛰쳐나왔다. 기독교계로 치면 하나님은 믿되 일종의 무교회주의를 지향한 셈이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어디든 진영 논리 파벌 싸움이 지저분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진영과 파벌과 정치로 여러 사람을 한데 결집시키지 않고서는 뭔가 큰 일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점에서 이분들의 행적은 2% 부족한 듯한 아쉬움과 한계가 남았다. 전근대적인 조선 봉건주의를 타파하고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점은 매우 훌륭하지만, 그 뒤에 현실적인 대안 역할을 할 이념을 제대로 판단하고 채택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저런 중립 노선만으로도 아예 사회주의 공산주의 좌빨 노선보다는 훨씬 더 건전하고 나았다.

부통령 '이 시영'이라는 이름을 본인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저 사람이 저런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은 지금까지 미처 몰랐다. 저런 이상주의 중립 성향의 사람이.. 미국물 먹은 노련한 현실주의자요 강경한 반공 독재 스타일인 이 승만과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전쟁이 나고 희대의 흑역사 병크인 보도연맹 학살 사건까지 터지자, 그는 "내가 이럴려고 정치인 됐나" 자괴감을 느꼈다. 그래서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담화를 발표한 뒤 정계를 은퇴했다. 청렴한 정치와 남북 통일까지 이루기에는 현실이 너무 급박하고 안 좋았다.

그나저나, '신흥 무관 학교'와 옆의 '경희궁'이 나란히 등장하는 건 참 절묘한 우연인 것 같다. 저 학교가 경희 대학교의 먼 전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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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구경을 한 뒤 2층으로 올라갔다. 박물관의 이름답게 서울의 역사가 조선 이 성계 시절부터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 순신· 세종대왕의 동상이 놓여 있는 광화문 앞의 세종대로가 옛날에는 저런 모양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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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이전에 한반도에서 통용되던 대로(큰길)들은 이런 형태였구나.
해남대로는 경부선+호남선을 얼추 합한 선형이며 오늘날의 국도 1호선과 비슷한 것 같고, 영남대로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긴 하지만 잘 알다시피 용인-이천-충주-문경을 경유하니 경부선이나 경부 고속도로와는 완전히 다른 선형이다. 그리고 부산도 우리가 지금 아는 부산항 쪽으로 가는 건 아니다.

블로그에다가는 여기까지만 소개하도록 하겠다.
자료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일제 강점기 때 경성의 파노라마 사진 내지 서울 축소 지도가 있어서 굉장히 흥미로웠다. 해방 후 대한민국 시절 자료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은 마장동의 청계천로에 있는 '청계천 박물관'도 가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아주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본인은 성곽이나 궁궐을 몽땅 원형대로 복원하라는 식으로 무작정 환경이나 문화재 덕후 성향은 아니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에 제대로 대처를 못 하고 굴욕적으로 망했으니 끝이 매우 좋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필요 이상으로 국뽕 불어넣고 미화할 필요는 전혀 없다. (특히 민비 미화..)
하지만 반대 극단으로 가서 무작정 조선만 인구의 과반이 노비이고 길거리에 똥덩어리가 굴러다니던 헬 중의 헬이었으며 차라리 일제 통치가 나았다는 식의 비하 역시 걸러 가며 들으려 한다.

그리고 본인은 항일 독립 운동가들을 예우하고 존경하지만, 그 사람을 띄워 주면서 의도하는 결론이 또 되도 않은 친일파 괴담 내지 분단의 원흉 이딴 식이라면 그 진영의 주장 역시 철저하게 씹을 것이다. 늘 말하지만 걔네들은 일본· 미국을 비판하는 잣대와 중국· 북괴를 비판하는 잣대가 절~대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믿고 거르는 게 건전한 역사관이라고 본인은 믿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8/01/01 08:32 2018/01/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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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이기는 법

* 예전에 썼던 일본에 대한 생각 글 및 기업 관련 일화 글과 함께 읽을 것을 권한다.

1. 학문· 기술 업적과 제품 시장 점유율로 이긴다. (100점)

2차 대전 이후의 국제화 세계화 자본주의 개방 경쟁 시대에 이거야말로 남의 나라를 합법적으로 제일 수준 높게 이기는 방법이다. 예전 글에서 소개한 적이 있듯이, 전범 기업인 미쓰비시를 쳐바르고 기술 종속 관계를 역전시킨 현대 자동차라든가, 반도체 분야에서 이름은 모르겠다만 일본 기업들을 쳐바른 삼성전자, LG전자 등등..
이것만 알아도 되도 않은 이상한 반기업 구호들 반 이상은 필터링된다. 이공계가 세상을 바꾼다.

2. 문화 예술로 이긴다. (50점)

겨우 한류 스타 욘사마가 어떻고 하는 것만 얘기하는 게 아님. 그야말로 사람들 정신 세계 전반을 점령하는 것을 말한다. 위의 100점짜리와는 분야가 굉장히 다르고 별 것 아니어 보이지만 그래도 중요하다. 이것에 대한 우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일본과 경제 협력을 위한 재수교는 무려 1965년에 했어도, 대중문화 개방은 90년대 말이 다 돼서야 성사됐다.
내 한글 입력기는 비록 기술 쪽으로 최첨단 극치를 추구하지는 않지만, 나름 이 바닥을 기여하고 공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예술은 아니지만 문화에는 해당한다.

3. 운동 경기에서 이긴다. (30점)

열심히 노오오력해서 한일전에서 일본 이겨 주는 것도 아주 합법적이고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스포츠는 경기 당시에 짜릿함 카타르시스를 주는 것 외에 우리 일상생활에 딱히 영향을 끼치는 건 아니다.
또한, 축구 한일전이 벌어질 때에만 열혈 민족주의 애국자이고 다른 상황에서는 자기 나라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나 태극기는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 존재인 걸까?

4. 목소리와 키보드 배틀에서 이긴다. (5점)

국가관 역사관이 이상한 사람을 키배로 제압하고 산업화해 주고, 어디에 일본해가 어떻고 독도가 어떻고 하는 곳에 득달같이 달라붙고, 일본 정치인들 망언을 규탄하는 시위 벌이는 건..;; 들이는 시간에 비해서 그렇게 생산적이지는 않아 보인다.

5. 국민성, 공중도덕 등으로..

이건 이기는 법이라기보다는 지지 않는 법의 범주에 드는 것 같다.

6. 전쟁에서 이긴다? (??)

가능하지도 않고 그래야만 할 필요도 의미도 없음.
한· 일은 정치 이념 프레임이 동일한 나라이며, 예측 가능한 미래에 서로 전쟁 벌일 확률은 남북한이 전쟁 벌일 확률보다는 넘사벽급으로 낮다.

한일전 하니까 옛날 일화가 하나 떠오른다.
뭐, 예전에 비해 반일 감정이 많이 옅어진 편인 지금도 한일전이라 하면 일단 나라의 자존심이 걸려 있고 그야말로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진짜 한일전의 원조는 먼 옛날 1954년, 우리나라가 FIFA 월드컵에 최초로 참가하던 시절에 벌어졌다(그 당시 스위스 개최).
우리로서는 6· 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됐고, 스포츠 분야에서 해방 후 최초로 앙숙 일본과 맞장을 뜨게 됐다. 1953년에 치러진 아시아 지역 예선전이다.

해방된 지 아직 10년이 채 안 되었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비장했을까?
씅만 리 할배 대통령은 승부에 대한 극심한 중압감과 부담감 때문에 처음엔 이 경기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냥 월드컵 출전을 포기하고 말지, 일본놈들과는 상종을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경기는 우리 홈그라운드에서 한 판, 일본으로 원정 가서 한 판씩 하는데 “쪽발이 왜놈들을 한국 땅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라는 똥고집, 그리고 그 와중에 일본이 우리를 이겨 버리기까지 했을 때 뒷감당을 할 수 없다는 걱정이 반반씩 할배의 머리를 압박했다.
(하긴,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정부와 협력해서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데 가담하고 부역한 외국인은 우리나라에 입국할 수 없다고 지금까지도 출입국 관리법에 명시돼 있긴 하다. 뭐 이젠 그런 사람들은 거의 다 죽고 없겠지만..)

뭐 어쨌든, 일본 선수들이 한국으로 올 수 없으니 우리 선수들이 두 판 모두 일본에 가서 경기를 치르게 됐다. 출정식 때 할배 각하는 친히 선수들에게 “이기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 졌다가는 국민 세금으로 배 탈 생각일랑 말고 대한해협을 헤엄 쳐서 귀국해라” 이런 급의 공포스러운 막말 훈화를 했다는 카더라가 전해진다. 아니면 축구 협회 대표와 선수팀 감독이 각하를 끈질기게 설득하는 과정에서 저런 맹세를 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저런 처절한 배수진 하에서 스포츠계의 합법 도핑인 반일로이드가 약발이 제대로 적중했다..;; 우리나라는 1차전에서 5:1로 일본을 압도적으로 꺾었으며, 2차전에서도 2:2 무승부를 달성해서 무난히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이때야 스포츠 분야의 극일 가중치가 지금 같은 30점이 아니라 당연히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독립 주권 국가로서 한국이 일본을 당당히 이겼으니까.

뭐, 본선 가서는 헝가리에게 9:0, 터키에게 7:0으로 지고 광탈하긴 했지만, 그건 너무나 열악한 여건 하에서 첫 출전을 하고도 정말 혼신을 다해서 얻은 결과였다. 10몇 대, 20대 0으로 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했던 값진 투혼이요 성공적인 실패, 위대한 패배였다. (그리고 일본만 이겼으면 됐고 그것만으로 목표 달성이지, 나머지 결과는 어차피 아오안이었을 것이다..;; )

이 승만은 정말 쥐뿔도 힘 없는 가난한 나라 처지에서도 그래도 미국을 최대한 이용해서 일본을 상대로 갑질을 하고 반일 노선을 고집했다. 평화선에, “대마도 내놔”에, 재일 교포 북송에 결사 반대하여 일본 적십자사 테러 시도에, 그것도 모자라서 왜관 발언은 최고의 압권이었다.
“지금 우리가 아무리 전쟁 중이고 위급하다지만, 감히 일본놈들이 우리 집안 내부 싸움에 개입하려 든다면(심지어 남한을 돕는 것도 포함) 우린 일본놈들부터 죽이고 나서 괴뢰군을 쏘겠다.

하긴, 이 할배의 입장에서는 일본이 유엔군 병참기지가 돼서 경제적으로 어부지리 덕을 보고 있는 것조차도 차마 눈꼴 시려 못 볼 지경이었을 게다.

저 때야 해방된 지 얼마 안 됐으니 그렇다 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지난 2002년 월드컵은 개최 장소도 이례적으로 한일 공동 개최로 귀착됐었다. 20여 년 전에 이거 개최지 결정하던 과정도 내 기억으로 분위기가 장난 아니게 험악했다. 둘 중 한 나라 단독 개최로 결정 났다면 무슨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그래, 한국과 일본은 뭐 그런 사이이다.

하지만 감정은 감정이고, 이성적으로 분별할 건 따로 분별해야지..
까놓고 말해서 일본이 평화 헌법을 건드리거나 심지어 자위대를 군대로 승격하는 것보다, 당장 코앞에 있는 미친 또라이 국가의 핵탄두가 실험을 거듭하면서 위력이 더 강력해지고, 미사일의 사거리가 갈수록 더 길어지는 게 훨씬 더 위험한 일이다!

지금은 20세기 초 같은 제국주의 군국주의 이념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아니다. 일본의 작은 또라이짓에 대해서는 난리를 치고 발광을 하면서, 바로 옆에 현존하는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고 방어 체계를 구축하지 말라고 X랄인 것은 정말 머리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

쟤들은 종북들을 이용해서 남조선을 살살 삥뜯거나 한반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완전히 떼어 놓기 위해서 핵을 만들 뿐이다. 터뜨려서 자폭하거나 심지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핵을 만드는 게 절대로 아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걔네들도 잘 알 것이다.

본인 역시 지금 당장 더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평소에는 종북 쪽을 더 비판하고 까며 지낸다. 하지만 우파가 반일· 극일 분야도 좌향좌들보다 훨씬 더 건전하게 실천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행동으로 입증하고 싶다. 사상과 행적 모든 면이 우월하다는 것을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2/05 08:33 2017/12/05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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