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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동안 본인은 등산은 너무 더워서 한동안 못 했다. 자전거로 한강 공원 정도나 다니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울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큰 강이나 호수를 보러 놀러 갈 만한 곳은 없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 결과 본인의 눈에 띈 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남양주와 양평 사이였다. 강 두 개가 만난다고 해서 지명부터가 '양수'리, '두물머리'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거기 일대에는 웬 다산 정 약용 선생 유적지가 있고, 강가에는 숲과 풀밭이 잘 꾸며져 있었다. 놀다 오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토요일 아침에 곧장 차를 몰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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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검단산을 올랐다가 하남시 배알미동 방면으로 하산하면서 팔당댐을 멀리서 본 적은 있다. 그런데 댐 위의 '공도교'를 건너는 건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여기는 국가 기간 시설인 댐 위이고 이게 딱히 교량 역할을 하라고 만들어진 시설물은 아니지만.. 강북의 국도 6호선과 팔당대교가 주말에 워낙 많이 막히는 관계로 주말에만 소형차에 한해서 공도교의 통행이 허용되고 있었다. 도로의 폭은 그냥 2차선에 불과하며 좌우로는 온통 철조망이 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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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유적지 겸 생태 공원 주변은 한가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렇게 유적지 어귀에 공영 주차장이 있고, 카페나 생태 공원에 더 가까운 곳에도 주차장이 또 있었다.
아침 11시쯤에 왔을 때는 주차장이 널널한 편이었지만 오후 2~3시가 넘어가면서 여기는 차들로 온통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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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이 유적지의 주인공인 다산 정 약용 선생의 생가(복원된 레플리카), 기념관, 동상, 묘지가 한데 있는 단지를 들렀다. 이분은 경치 한번 참 좋은 곳에서 태어났구나.
묘지는 단지 안의 10몇 m 남짓한 높이의 언덕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가와 묘지가 같이 조성돼 있는 건 이 승복 어린이 기념관도 비슷한 형태였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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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약용은 '다산'이 아니라 '다작'이라는 호가 더 어울렸을 것 같다. 천재이고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목민심서 말고 나머지 책들은 일반인에게는 다 듣보잡이긴 하다만... ㅠㅠ

이 사람은 평범한 유학자가 아니라 실학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윤리 도덕 분야 말고도 왕년엔 수원 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를 고안해서 투입 인력과 공사 기간과 절감해 줬고, 과학과 추리를 이용한 사건 수사로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기도 했다. 손대는 분야마다 뭔가 비리를 척결하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경영 효율을 올려 놨다. 그런 능력에다가 어진 인품까지 갖췄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

설령 김 성모 식으로 우려먹기 재탕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그것도 한문으로 저렇게 많은 책을 쓰기란 매우 어려울 텐데.. 물론 정 약용의 경우 17년 동안, 다시 말해 박 정희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맞먹는 긴 기간을 유배 생활을 하느라 저술 활동을 할 시간이 많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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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근처에 있는 실학 박물관을 찾아갔다. 다산 유원지의 다른 모든 시설은 무료이지만 이 박물관만은 입장료를 받았다.
여기는 말 그대로 정 약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실학이 등장한 배경, 그때 깨어 있던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배경, 조선 후기에 지리학과 천문학이 조금이나마 발전한 과정 같은 게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실학의 이념은 훗날 국민 교육 헌장에도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며'라는 문구로 어느 정도 반영돼 들어간 셈이다.
참, 내가 갔을 때는 특별 전시회 명목으로 한글로 글을 남긴 조선 여성들의 실학 트렌드 이런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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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이 정도로 한 뒤, 그 다음부터 본인은 본격적으로 자연을 즐기러 나갔다.
실학 박물관을 나와서 강 쪽으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분위기 좋은 풀밭이 꾸며진 카페들이 날 반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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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 멀리 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돗자리는 이런 나무 아래 풀밭에 아무 데나 펴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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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라기보다 호수나 저수지, 심지어 바다처럼 보이는 커다란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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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여기는 엄연한 상수원 보호 구역이기 때문에 서울 시내의 한강 공원 따위와는 레벨이 다르다.
또한, 한강 종합 개발 사업 같은 게 없었으니 콘크리트 제방 같은 것도 없으며, 땅과 물의 경계는 그냥 흙· 뻘밭인 걸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물놀이를 할 수는 없다. 물에 들어가려면 바다나 산 속 계곡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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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면적이 워낙 크니 강바람도 바닷바람 만만찮게 느껴졌다. 시원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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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렇게 돗자리를 깔고 뒹굴뒹굴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고 프로그래밍 작업도 했다.
그러다가 폰과 노트북의 배터리가 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엔 아까 봐 뒀던 카페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음료수와 전기를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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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 내가 카페에 들어간 사이에 저녁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풀밭과 강가에 그 많던 인파와 돗자리족· 텐트족들은 어느새 쏙 들어가고 일부 우산을 들고 산책하는 사람만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차 안은 너무 더워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밖이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지내기엔 쌀쌀해지고, 차 안이 비바람을 피하는 아늑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아지트가 됐다.

이렇게 더 있다가 완전히 해가 진 뒤에 돌아왔다. 이런 휴양지가 있었다니, 가 보길 정말 잘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7/11/03 08:30 2017/11/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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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창덕궁, 창경궁

서울에서 광화문과 경복궁이야 매우 유명한 역사 유물 겸 관광지이다. 그리고 그 근처의 종로3가에는 탑골공원이 있으며, 여기까지는 본인이 오래 전에 진작부터 가 봤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옆에 종로3가와 4가 사이, 그리고 종로와 율곡로 사이에 서울 도심을 떡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유적지는 궁궐도 아닌 것이 도대체 정체가 뭔지 오래 전부터 굉장히 궁금했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진입로를 어렴풋이 보긴 했지만 들를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책을 사 오면서 드디어 저기를 들르게 되었다.
서울 시내는 차를 몰고 돌아다닐 곳은 못 되고, 대중교통은 자기 경로를 벗어난 곳은 가지 않으며 단거리를 조금씩만 이동할 때도 기본요금이 깨지는 게 부담되니.. 찔끔 찔끔 돌아다닐 때는 정말 자전거가 최고였다.
덕분에 먼저 창덕궁과 창경궁을 구경한 뒤, 그 아래에 있는 종묘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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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안국 역 근처 현대 그룹 사옥의 옆에 있다.
원래는 종묘와 창덕궁이 경계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일제가 교통 편의를 위해 둘 사이에 율곡로라는 도로를 닦으면서 둘은 담장을 두고 단절됐다. 율곡 이 이의 생가가 거기 일대에 있었대나 어쨌대나..
안에 들어가면 이렇게 넓은 공터와 드문드문 놓인 기와집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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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이라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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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기와, 담장, 벽면만 이렇게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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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터 구석에 혼자 짱박혀 있어도 힐링힐링 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곳은 아무래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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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창경궁 쪽으로 갈 수도 있다. 이때는 입장료가 추가로 부과되나, 구매한 당일 동안은 창덕궁과 창경궁 구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내부는 꽤 넓다. 북쪽으로는 저렇게 호수도 있고 식물원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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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과 그 근처에는 이런 건물과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판들이 다 저런 스타일이었구나.
몇 년 전에 광화문 현판 때문에 여론이 분열되어 대판 싸움 벌어졌던 시절이 생각난다. (1) 역사와 고증에 충실하게 저런 한문 스타일로 복원하자는 쪽이 있었지만, (2) 광화문은 여느 유적과는 달리 차들이 씽씽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 중심부의 상징인데.. 기왕 한글 현판이 몇십 년 동안 있었다면(박통 친필..!) 새 현판도 우리 고유 문자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 역시 매우 강경하게 맞섰다.

한글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본인 역시 적극 이해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문제는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이냐 같은 심각한 급이 아니다. 그냥 East Sea냐 Sea of Japan이냐 하는 문제와 비슷한 격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외국인이 무슨 명칭을 쓰건, 우리나라 동쪽 영해의 범위가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으니,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 Korea라는 명칭이 엄연히 붙은 채로 정착한 '대한 해협'처럼 말이다.

광화문 현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을 무슨 퓨전 사극 만들듯이 리메이크라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옛날 스타일로 복원하는 거라면 굳이 기를 쓰고 한글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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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근처에 있는 이 건물은 벽면에 붉은색이 없이 배색이 좀 소박했으며 담장의 텍스처도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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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랑 비교하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종묘로 넘어간다. 이곳은 조선 시대 왕들의 묘지는 아니지만 이들의 위패 안장해 놓은 사당이다. 뭔가를 쓸데없이 높게 떠받드는 걸 빈정댈 때 '신줏단지 모시듯'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의 '신주'(神主)가 바로 저 위패를 가리킨다.

태조 이 성계가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자기 궁궐보다도 종묘와 사직단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의 종묘는 설계 크기가 지금보다 작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셔야 할 위패가 증가하면서 가로로 쭉쭉 몇 차례 증축되어 왔다.
그래서 종묘는 100미터가 넘는 긴 길이를 자랑하는 목조 건물이다. 그리고 '정전'이라는 본 건물만 있다가 나중에는 좀 더 작은 복제품(?) 격인 '영녕전'도 따로 만들어졌는데.. 궁금하신 분은 구글 등에서 검색해서 유래를 알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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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안은 간단하게만 묘사하면 "숲이 우거진 공원 산책로 + 넓은 돌바닥 마당이 깔린 집회 장소" 정도 된다. 산책로 안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또한 나름 조상님들이 들어가라고 돌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내 눈에는 뭔가 철도의 전신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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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이 건물과 터뿐만 아니라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퍼포먼스까지 무형 문화재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1년에 다섯 번이나 임금님까지 친히 나서서 제사 행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1년에 두 번만 재연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공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이런 걸 진작에 버리고 전통과 단절해 버린 관계로.. 오히려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과거의 종묘 제도에 대해 연구한다고 그런다.

위의 건물은 음식을 요리하는 등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작업하고 거주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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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은 정말 길쭉하고 마당이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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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중앙에 이렇게 돌출된 입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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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단위 입장만 가능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취한 조치라고 그런다. 토요일(일요일 말고)이나 일부 특례가 적용되는 날에만 가이드 없이 개인 단위 자유 입장이 가능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는 옛 종묘를 불질렀지만, 그때 이후로 재건된 지금의 종묘는 훗날 일제 강점기 때도 별다른 훼손 없이 잘 버텼으며, 심지어 6· 25 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았다.
종로라는 그 번화가 바로 근처에 이렇게 속세를 완전히 이탈한 듯한 관광지가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비록 조상신을 이런 식으로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건 내 개인적인 종교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행이다만.. 임금은 어느 문으로 들어와서 어느 문으로 나가고, 건물이 이렇게 돼 있고 이렇게 설명을 듣는 게 마치 성경의 출애굽기와 에스겔서에서 각각 성막과 성전의 규격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서울에서 조선 시대 역사 관광지들을 많이 봤으니, 나중에 고향 갈 일이 있으면 더 옛날 신라의 역사 관광지도 더 눈여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 지역까지 갈 수 있다면 고려 시대 역사 관광지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여전히 불가능 봉인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31 08:38 2017/10/3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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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9월의 짤막한 활동 일지

1. 뚝섬 한강 공원에서의 외박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여름 밤엔, 아예 돗자리와 노트북 PC, 밤참 간식거리를 몽땅 싸들고 자전거를 몰고 여기서 외박을 했다. 여기는 아무래도 집 근처보다는 확실히 더 시원했고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이것도 지금 다시 회상해 보니 재미있는 추억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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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자리가 아니라 풀밭에다 아예 텐트를 친 사람들도 있었다. 나도 1인용 작은 텐트라도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 너무 작은 건 침낭이나 영현빽(..!!) 같은 느낌도 들긴 한다만.. 하긴, 잠도 생물학적으로는 일시적인 죽음이긴 하지.

2. 경기화학선의 흔적 추가 답사

본인은 2년 전에 오류동 역에서 분기해 나가는 전설의 지선 철도이던 경기화학선 폐선 부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그 뒤 근래에는 거기보다 더 남부인 부천 옥길동 일대에서 같은 선로가 이어지는 곳을 추가로 답사했다. (☞ 예전 글) 거기에 일종의 선로 분기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선로는 진짜 경기화학 공장 내부의 역(명목상)으로 들어갔고, 다른 하나는 시흥시 방면으로 10여 km 남짓 더 경기 자동차 과학 고등학교 근처까지 내려가서는 군부대에 도달했다. (제3 군수 지원 사령부 소속의 모 부대임)
그리고 이 분기점 일대는 마치 그린벨트처럼 자연의 정취가 살아 있는 곳이며, 이런 기막힌 위치에 '은빛 전원 교회'라는 예배당도 있었다.

본인은 이런 지리 여건에 깊은 흥미를 느끼게 됐다. 그리고 여기도 싹 다 개발되고 아파트가 지어질 거라는 소리에 하루 날잡아서 현장으로 달려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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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한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일단 은빛 전원 교회부터가 건물이 통째로 흔적도 없이 싹 철거되어 사라져 있었다. 몇 달쯤 전의 일이고 이 교회 예배당은 딴 데로 이사를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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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상으로 경기화학 공장 공터의 화물 하역장인 곳에도 그런 거 없다. 공장 방면 선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도로를 만들려는지 터가 닦이고 있었다. 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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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군부대 방면 선로와 공장 방면 선로가 분기하는 지점이다. 인터넷 지도 로드뷰 내지, 이곳을 나보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사진 기록과 대비해 봐도, 선로 상태는 더 안 좋아졌으며 잡초는 더욱 무성해져 있었다. 오른쪽이 공장 방면인데, 선로가 저걸로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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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군부대 방면으로 내려가는 선로도 지금 내가 있는 곳에서는 이 이상 더 접근을 사실상 할 수 없다. 다른 곳에서 또 선로의 흔적을 추적해야 한다.
여기는 그래도 간간이 군용 화물을 실은 열차가 오간다고도 들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런 상태가 아니었다. 열차가 다닐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수인선 폐선 부지와 별 다를 바 없다. 그나마 이런 상태의 선로를 볼 수 있는 나날도 얼마 안 남았고 조만간 다 없어질 것 같다.

재작년에는 본인은 이천에 가서 수려선 오천 역 역사로 쓰였던 옛 폐건물을 답사하고 촬영하고 오기도 했다. 그때는 정말 운이 좋았다. 그 건물 역시 주변 지역의 재개발로 인해 철거하네 마네 하던 상황이었는데, 내가 다녀간 뒤 거의 정확히 한 달 뒤에 실제로 철거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화학선 분기점 주변은 내가 한 발 늦었다. better late than never 차원에서 지금 같은 사진을 건진 거라도 다행으로 여겨야겠지만, 상태가 더 좋던 시절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3. 도산 공원· 도산 안 창호 기념관

서울 강북에는 지리학자 김 정호를 기리는 명칭인 '고산자로'라는 도로가 있다. 그런데 강남 압구정 일대에는 '도산대로'라는 도로도 있는 것을 언젠가 버스 차창 밖으로 어렴풋이 봤다.
도산? 검색해 보니 안 창호의 호를 가리키는 게 맞았다. 게다가 이분의 묘지와 기념관까지 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건 신사동 가로수길에 비해 굉장히 인지도가 없고 너무 생소하게 들렸다.

이런 곳이 있다는 제보를 입수한 본인은 도산 공원을 다녀왔다. 하긴, 근처의 전철역들과는 1km 가까이 골고루 어설프게 멀리 떨어져 있긴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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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는 순국 후에 처음에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 박통이 무슨 필이 꽂혔는지 안 창호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와 승격을 지시했으며, 1971년에는 이 부지에 기념관과 근린공원의 건립을 지시하고 묘지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잘은 모르지만 안 창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며, 미국에도 이 사람을 기리는 이름이 붙은 도로 내지 건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는 안 창호가 실제로 활동하고 지낸 곳은 아니지만 어쨌든 강남 금싸라기 땅을 당당히 점유하고 있는 공원과 기념관이 됐다. 시설이 완공되고 개장한 때는 1973년. 건설 당시에는 여기 주변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량한 허허벌판이었다.
안 창호 기념관은 1988년에 더 남쪽에 개장한 윤 봉길 의사 기념관보다도 건립 시기가 훨씬 더 이르다. 하긴, 윤 의사 기념관 역시 당사자의 고향이나 거처와는 무관한 곳에 있긴 하다.

나중에 이 홈페이지에 정식으로 여행기가 올라오겠지만, 본인은 다산 정 약용 선생의 묘지와 기념관도 다녀왔다. 왠지 안 창호와 비슷한 성향의 인물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이건 당사자의 출생지인 물 좋은 남양주 두물머리 시골 마을에 있기 때문에 부지가 훨씬 더 넓으며, 반쯤 강변 유원지 + 테마파크의 형태를 하고 있다. 어떤 인물을 기리는 공간을 이렇게 교외에 거창하게 만들지, 아니면 소박하지만 접근하기 아주 편한 인서울에 만들지.. 이건 제각기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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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은 이렇게 온통 나무들로 울창해서 직사광선이 바로 내리쬐는 곳이 거의 없었다. 중간 중간 운동 기구와 의자, 정자도 있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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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중간에는 안 창호 선생의 동상도 커다랗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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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 "나 하나를 건전한 인격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 민족을 건전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안 창호는 사상 세계가 굉장히 심오했으며, 남 탓 사회 탓 정치인 탓 외세 탓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은 가장 먼저 나 자신 개인에게서"를 통한 의식 개조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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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창호 기념관은 한 층의 넓은 방 한 칸에 이런 분위기로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는 정도였다. 정 약용 기념관보다는 훨씬 더 조촐하다. 이분에 대해서는 보통 콧수염 난 미중년 아저씨의 모습으로만 기억하는데, 생애에 마지막으로 찍힌 사진으로 여겨지는 1937년 서대문 형무소 수감 사진에서는 수염이 더부룩하고 젊은 시절보다 다소 초췌해져 있다.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해 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는 김 구로 치면 '나의 소원'과 같은 급의 발언인데.. 안 창호는 같은 말을 그래도 훨씬 더 실천주의적으로 멋있게 했다.
또한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이기도 했으니, 아마 고전 10:31을 염두에 두고 저런 말을 했을 수도 있다. (먹든지 마시든지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vs 대한 독립을 위해서..)

이 정도 구경을 했다.

4. 우이 경전철

그리고 지난 2017년 9월 2일엔.. 드디어 서울에서도 경전철 시대가 개막됐다.
어디 먼 곳이 아니라 서울 시내에, 그것도 서울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그 낡은 신설동 역을 기점으로 신분당선처럼 전방이 보이는 무인 운전 전철이 새로 개통하다니 느낌이 대단히 새롭다. 1974년에 최초로 생긴 역과 2017년에 새로 생긴 역이 이렇게 한데 연결됐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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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역들의 건설 시기가 너무 차이가 나는 만큼, 분당선 왕십리 역은 아무래도 북쪽으로 더 이어질 가능성이 없으며, 우이 경전철 신설동 역은 남쪽으로 더 내려갈 가능성이 없다. 신설동에서 경전철과 2호선 성수 지선 사이의 환승은 내가 직접 해 보니 굉장한 막장 환승인 것을 감안해야겠다.

열차의 구동음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형 전동차와 다를 바 없이 동일하다. 다만, 차량 편성은 듣던 대로 겨우 2량이다. 승강장이 정말 짧긴 하더라.
인구 수에 비해 전철 수가 너무 부족하던(4호선이 유일) 성북구 일대가 이 전철의 혜택을 많이 입겠다. 또한 130번 같은 시내버스가 타격을 입을지도 모르겠다.

도봉산에 이어 북한산도 궤도 교통수단으로 가는 날이 오다니 감개무량하다. 산으로 가는 전철답게 노선색도 산뜻한 연두색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25 08:37 2017/09/2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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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관악산

본인은 성남 산행을 마친 뒤, 그 다음으로는 정상에 거대한 구가 놓여 있고 방송사 송신탑과 기상청 레이더가 있는 서울 남부의 그 유명한 산을 올랐다. 나름 상수도에 준하는 대단히 중요한 국가 기간 시설이 놓여 있는 셈이다. 중구에 있는 남산은 이름만 남산일 뿐이고 실제로는 이 관악산이 서울의 실질적인 남산 역할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서울과 그 근교에 있는 별별 산들을 다 찾아가 봤지만, 정작 관악산은 이 블로그에서 다루지 않고 있었다. 수 년 전에 회사· 교회 동료와 이미 몇 번 가 봤기 때문이다. 관악산 대신에 서쪽의 삼성산은 가 봤었다.

하지만 등산로와 둘레길의 차이도 모르고 서울 지리에 대해서도 배경 지식이 전무하던 시절과, 2016년 이래로 수십 회에 걸친 개인적인 등산 노하우가 쌓이고 산들에 대한 비교 분석· 기록 관행이 정립된 지금이 동일한 산에 대한 등산 경험이 같을 수가 없는 법이다.
스타크래프트도 리마스터링판이 나오는 와중에 등산로를 그 시절과 최대한 다르게 하여 또 다시 '리마스터링 등산'을 했다. 사실, 2015~16년 초창기에 갔던 인능산, 대모-구룡산, 인왕산 같은 산도 기회가 되면 리마스터링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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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쪽 등산로는 너무 잘 알려져 있으니 거기를 피해서 사당 역에서부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당 역에서 제일 남쪽을 향하고 있는 4번 출구로 나간 뒤, 한 블록쯤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면 이런 아담한 골목이 나온다. 여기서 관악산 등산로까지는 거리가 1km가 채 되지 않으며 도보로 접근 가능하다.
단, 위의 사진은 내리막 경사가 말해 주듯, 산이 아닌 역 방면으로 뒤돌아보며 찍은 것이다.

등산로 입구에는 차를 대여섯 대 정도 댈 만한 공터도 있긴 했다. 완전 이른 새벽에 자기 차를 끌고 오면 주차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공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저기는 인근 주민의 차량으로 24시간 점령당해 있을 가능성이 90% 이상인 레드오션으로 보인다.
공원이나 둘레길 말고 '연주대'라고 안내되어 있는 곳을 찾아서 입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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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돌계단과 흙바닥 위주의 평범한 오르막 언덕이 시작됐다. 등산로 주변에는 각종 진지와 참호가 유난히 많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수방사 본부가 여기 근처에 있긴 하다.
숲이 울창하면서도 이렇게 서울 시내를 북쪽으로 쫙 바라볼 수 있는 곳이 많아서 좋았다. 경치 조망 하나는 용마산· 아차산급으로 아주 우수했다.
등산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맑고 땡볕이 이어지다가 이 날은 천만다행으로 흐리고 해가 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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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좌측에 공사판이 벌어진 곳이 살피재 고개이고, 그 오른쪽의 산이 서달산이다. 서울 현충원은 저 산 넘어 건너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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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산 자체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관악산은 엄연히 북악산, 도봉산 같은 바위산이다. 이름에 괜히 '악'(岳)자가 있는 게 아니다.
그런데 여길 오랫동안 안 올라서 그런지, 난 어이없게도 옆의 청계산 같은 퀄리티를 생각했다가 좀 당혹스러움을 겪었다. 관악산은 발뿐만 아니라 손도 써서 바위를 올라야 하는 험난한 구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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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지도에서는 볼 수 없는 어느 공터에 헬리콥터가 시동이 걸린 채 로터가 돌아가고 있었다.
위의 사진에서는 좀 짤렸지만 왼쪽으로는 남태령 마을의 아담한 집들이 옹기종기 늘어선 게 보였다.
관악산을 오르니 이런 곳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소득을 얻을 수 있었다. 등산 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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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돌로 가득한 어느 등산로의 모습이다.
관악산은 혼자 거대한 피라미드 같은 산이 아니며 나름 여러 봉우리들이 삐죽삐죽 솟았고 봉우리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능선도 복잡 정교하게 발달해 있었다. 다만, 보안 때문인지 그런 봉우리들에 대한 안내는 미흡한 편이었다.

흙을 판 것도 아니고 바위를 뚫고 또 저런 군사용 참호 같은 건 어떻게 만들었나 모르겠다.
비바람과 추위를 피해서 저기서 쉬거나 한숨 자면 아늑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움푹 패인 곳에 쏙 들어가서 짱박히는 걸 좋아한다. 테트리스라든가 세균전 같은 게임에서도 언제 가장 강렬한 쾌감이 발생하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다 인간의 그런 심리를 이용한 것이다. (작대기 쑤셔넣을 때, 주변의 상대편 세균을 몽땅 내 편으로 바꿀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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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돌길뿐만 아니라 여느 평범한 산 같은 흙길도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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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캠퍼스도 내려다보였고..
그러고 보니 비행기 항로인 것치고는 이 날은 비행기는 그렇게 자주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다.
근처의 삼성산을 오를 때는 하늘에서 그야말로 수 분 간격으로 비행기가 돌아다녔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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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쪽으로는 경마 공원이 보였으며 그 주변에는 비닐하우스들이 가득했다.

연주대 정상이 가까워져 오자 마지막 오르막 돌계단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 때쯤엔 본인도 체력에 살짝 한계가 느껴졌다. =_=;; 계단을 오르는 속도가 곤두박질쳤다. 해가 안 나고 덜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땀을 얼마나 흘렸으면, 물은 2리터 가까이 챙겨 간 것을 몽땅 다 마시고도 갈증을 겪었다. 그러고도 화장실은 아침부터 낮까지 한 번도 안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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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특유의 연주대 정자가 드디어 나타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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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이 됐건 밥이 됐건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까지도 온통 바위이구나. 저 바위 너머에도 등산로가 이어져 있다.
어느 정도 인지도가 있는 산은 정상과 가까워질수록 인구 밀도가 급증하는 것이 공통된 현상이다.
관악산은 정상 근처의 제법 높은 부위까지도 절이 있어서 불교스러운 냄새가 많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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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의 상징인 기상청 레이더와 송신탑을 가까이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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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산을 내려갈 차례인데.. 하산은 안양 쪽으로 갈까 하다가 그냥 더 짧고 대중교통 연계도 더 잘 되는 과천 방면을 선택했다. 산을 오르는 데 시간과 체력 소모가 예상보다 더 컸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은 전반적으로 계곡을 따라 온통 목조 계단 또는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오를 때처럼 바깥 경치를 볼 수 있지는 않았다.

군사 시설 같은 것도 없고, 반대로 오를 때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약수터가 종종 있었다. 여러 모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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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1시간 남짓한 시간 만에 과천 향교 방면으로 잘 착륙했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을 밟는 것으로 모든 산행이 끝났다.

사진 첨부를 생략하지만, 알고 보니 관악산 과천 구간에는 남산처럼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었다. 단지 민간인 관광용이 아니라 송신탑에서 볼일을 봐야 하는 방송사 직원 및 관계자 전용일 뿐..
거기 긴급히 갈 일이 있을 때 매번 등산(!)을 하거나 비싼 헬기를 탈 수는 없으니 뭐 수긍이 가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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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갔던 수락산에도 기슭에 무슨 향교가 있었던 것 같다. 검색해 보니 그건 노강서원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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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기슭에는 나름 공원· 공터가 잘 꾸며져 있었다. 단지 개울에 물이 바짝 말라 버린 게 아쉬운 점이었다. 삼성산 등산 후에 도달했던 안양 예술 공원을 따라 흐르던 개울도 상태가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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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이번엔 하남· 남양주가 아니라 과천에 잘 도착했다. 아담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났다. 서울은 산기슭에 빌라가 있는 편이지만 서울 밖에서는 대체로 산기슭에 알록달록한 단독 주택들이 놓여 있다. 붉은 벽돌 건물들도 심심찮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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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내려온 길을 올려다보는 걸로 여행기의 종지부를 찍는다. 공교롭게도 산행을 완전히 마치고 나자 빗줄기가 굵어졌다.
서울 사당뿐만 아니라 과천 정부청사 역에서도 관악산 등산로까지 비교적 가까이 접근 가능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12 19:35 2017/09/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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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변 자전거 라이딩

본인은 레저· 여행과 운동을 겸하는 활동 차원에서 등산을 작년 초쯤부터 적극 시행하고 있다. 단, 너무 더워서 등산을 원없이 하기 어려운 한여름에는 산이라기보다 공원에 가까운 낮은 산만 쉬엄쉬엄 오른다.
그리고 지금까지 언급을 별로 안 한 것 같은데, 본인은 사실 기름 안 먹는 자가용인 자전거를 타는 것 역시 굉장히 좋아한다. 수직 이동 대신 수평 이동이라는 대체제도 나쁘지 않다. 그러니 오늘은 오랜만에 날 잡아서 자전거 타고 돌아다닌 얘기를 좀 꺼내 보겠다.

아마 서울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4대강 사업..!!) 여기는 주변 하천을 따라 자전거 도로가 잘 닦여 있으니 좋다. 산에 등산로뿐만 아니라 둘레길이 있는 것처럼 강가에는 자동차 전용 도로나 산책로뿐만 아니라 자전거계의 고속도로가 닦여 있다. 신호, 장애물 따위 신경 안 쓰고 오로지 내가 지쳐서 못 달릴 때까지 원없이 속력을 낼 수 있다. 특히 한강, 중랑천, 청계천이 한데 만나는 용답-군자 일대는 최고의 교통 요지인 것 같다.

1. 청계천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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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청계천의 최말단 구간이다. 내부순환로 고가 아래의 그늘을 따라 길이 나 있어서 다니기가 수월하다. 오른쪽에 길이 끊어진 흔적은 아마 청계 고가 + 청계 IC의 철거의 결과물일 것이다.
이쪽으로 계속 가면 청계9~1가의 순으로 서울 도심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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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왕십리-청량리 사이의 경의중앙선 철교가 나오는 지점에서부터는 청계천을 따라 나란히 달리는 자전거 도로가 없다. 여기서부터는 도보만 가능하며, 자전거는 위의 차도를 따라 달려야 한다.
본인은 옛날에 청계천의 시점인 종각 일대와 심지어 세종 문화 회관 근처의 한글 회관까지도 자전거로 다녀온 적이 있다.

2. 중랑천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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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는 중랑천의 좌우로 상하행이 지나는 독특한 구조인데, 자동차 도로보다 더 안쪽에 이렇게 자전거 도로가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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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도로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위로 하늘은 뻥 뚫려 있으며 그늘이 없다. 가끔 등장하는 다리 아래에서나 햇볕을 피해 쉴 수 있다.
여기는 자전거 도로와 자동차 도로 사이의 높이 차이가 제일 작은 구간인 것 같다. 사진에는 잘 안 나와 있지만,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용마산의 경치를 구경하는 것도 여기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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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개인적으로 군자교를 넘어 장안교 정도까지 가 봤다.

3. 한강 북단, 서쪽 방면

한강은 '-천'으로 끝나는 일개 하천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훨씬 더 큰 강이다. 그래서 그런지 바람도 더 세게 불고 일부 구간에서는 바다 냄새조차 느껴진다.
경의중앙선 응봉· 옥수 역은 한강 공원에서 바로 탈 수 있을 정도로 한강에 가까이 있다. 그러니 강변북로는 철길을 피해서 더 외곽에 교량 형태로 건설되었으며, 그 교량 아래로 자전거 도로가 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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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자전거 도로가 자동차 도로와 만날 일이 전혀 없지만, 한강에는 반포대교라는 예외가 한 군데 있다. 아랫층은 두 도로가 교차하기 때문에 횡단보도와 신호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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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덕분에 반포대교에서는 굳이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교각 위까지 오르는 번거로움이 없이도 자전거나 도보로 한강을 건널 수가 있다. 그래도 배가 지나갈 최소한의 공간이 필요하니, 아랫층도 중간에는 좀 가파른 오르막이 있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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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동작대교 아래를 지나면서 찍은 사진이다. 옥수-반포-한남 이쯤 구간부터는 철길이 좀 더 내륙쪽으로 들어가고, 강변북로도 교량 구간이 끝난다. 자전거 라이더의 입장에서는 위의 그늘도 없어진다.

그리고 동작-한강 사이에는 둔치? 고수부지?의 공간이 넉넉한 덕분인지 이촌 한강 공원이 나온다. 많이 더우면 풀밭에 돗자리를 깔거나 심지어 텐트 치고 여기서 피서 외박을 하는 사람들도 많으며, 내가 찾아갔던 한낮에도 이미 텐트 치고 쉬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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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쪽 구간에서는 한강대교를 넘어 한강 철교까지 다녀왔다.

4. 한강 북단, 동쪽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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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중랑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구간이다. 저 멀리 앞으로 동호대교가 보이고, 길이 나와 있는 대로 왼쪽으로 뺑 돌면 동쪽의 한강 상류 방면으로 향하게 된다. 경치가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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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타워를 향해 동쪽으로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는 강변북로가 자전거 도로 바로 옆으로 나란히 지난다. 고가 같은 건 없다.
성수대교를 지나서 한참 달리면 영동대교가 나온다. 청담대교는 영동대교와 꽤 가까이 있다.
동쪽으로 끝없이 가면 서울을 벗어나 구리· 남양주까지도 직통으로 갈 수 있는 모양이던데.. 본인은 그러지는 못하고 청담대교까지만 다녀왔다.

이상이다.
기회가 되면 이런 식으로 한강 남단과 탄천 방면도 달려 보고 싶다.
더 욕심이 생기면 등산과 자전거 모두 차 끌고 서울 바깥까지 원정 가서 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전거를 몰다 보면 확 밟아 주고 나서 주기적으로 또 힘들여서 재가속을 할지, 아니면 평소에 페달을 덜 힘든 상태로 지속적으로 밟으면서 속도를 유지할지..
자동차 운전할 때 하던 고민을 자전거 몰 때도 동일하게 하게 된다.
요즘은 엔진 성능이 좋아서 초소형 경차급이 아니면 어지간한 승용차들은 경제 속도가 6, 70이 아니라 8, 90은 된다고 그러는데..
자전거는 사람이 덜 힘들고 가성비 높은 경제 속도는 한 2, 30은 될까?

등산을 가면, 나는 조금만 오른 뒤엔 힘들어서 쉬어야 되는데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지치지도 않고 날 추월해서 성큼성큼 오르는 걸 보면 자괴감을 느끼곤 했다.
자전거도 마찬가지. 어째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나 싶은 라이더가 적지 않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자전거 자체도 나보다 더 가볍고 잘 나가는 고급품을 쓰지 싶다.

강가에는 바람이 부는데 한강 구간에서 역풍이 세게 불 때면 참 죽을 맛이었다. 이거 무슨 비행기의 제트 기류도 아니고.. 정말 오르막과 대등한 급의 장애물이더라. 쒜빠지게 밟아도 자전거가 나아가질 않고, 밟아도 금세 속도가 떨어지니 말이다. 바람은 하필, 언제나 내가 진행하는 방향의 역방향으로만 분다는 징크스라도 있는 것 같았다.

끝으로, 강을 보니 마치 철길을 보는 것처럼 여러 생각들이 교차했다.
이 강을 따라 좌우 어디로든 얼마나 더 갈 수 있고 끝에는 뭐가 나올까? 버스나 철도 노선에도 시점과 종점이 있는데 강의 시점과 종점은 어떻게 될까?

산에는 물이 졸졸 흐르는 시내· 계곡이 있다. 거기는 물의 폭이 좁은 편이지만 지형의 고저 상하가 분명하며 물의 유속도 빠르다. 그러나 상류가 아닌 하류로 가면 바닥의 모든 지형이 바다를 향해 내리막이라는 보장이 없을 텐데 어떻게 물이 꾸준히 바다로 흐를 수 있는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다시 말해 그 긴 물줄기의 방향성이 어떻게 일관되게 유지되고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자연에서 강물은 바다로 흘러들어갈 때까지 여러 물줄기가 합류하곤 한다. 상류에서 하류로 갈수록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고, 탄천과 중랑천이 합류하며, 하류 막바지에서는 임진강도 한강으로 합류한다. 즉, 강물은 바다로 들어가는 지점을 root로 하는 tree 형태의 그래프와 얼추 비슷하다. 이런 양상은 졸업식 노래에서도 3절 가사에 "냇물이 바다에서 서로 만나듯"이라고 묘사되어 있다.

그럼 문득 드는 의문은, 그 반대의 경우는 자연적으로 결코 존재하지 않느냐이다. 상류에서 하류로 가는 과정에서 물줄기가 새로 갈라지고 분기하는 건 없나? 하중도가 생기는 원리를 보면 불가능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내가 당장 떠오르는 예는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성경의 창 2:10에서 강물이 무려 네 갈래로 분기되어 나갔다는 묘사가 굉장히 특이하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에덴 동산과 이 강은 과연 지구상의 어디에 있었을지 말이다. 성경의 진술이 과학· 역사적으로 레알이었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점을 더욱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강의 경우, 지리적으로 쭈욱 추적해 보니 강원도 태백에 소재한 '검룡소'라는 어느 고지대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남한강이 그렇고, 북한강은 북한 강원도 통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이건 무슨 까마득히 먼 조상 계보를 추적하는 듯한 느낌이다. 서울에서 폭이 무려 지하철 한 정거장 거리를 상회하는 그 큰 강도 시작은 저렇게 심히 멀고 미약했던 셈이다.

한강의 하류 종점은 6· 25 전쟁의 여파로 인해 사실상 군사분계선 역할을 하면서 민간인에게는 접근이 완전히 봉인되고 막혀 버렸다. 이 부근은 북한과 너무 가까워져 버리니 이건 뭐 도저히 어쩔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동쪽 상류 방면과는 달리, 서쪽 하류 방면으로 서울 시내 구간을 벗어나는 순간부터는 한가로운 풀밭과 자전거 도로가 펼쳐진 한강 공원 같은 거 없다. 북단과 남단을 막론하고 곧장 살벌한 철조망이 등장한다. 사실, 한강 공원 개발 전에 강 주변의 모습이 원래 저런 모래밭 황무지였다.

그리고 북한 같은 변수가 없다 해도, 배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서울 시내로 들어가는 건 꼬불꼬불 우회가 심하기도 하다. 그러니 조선 말기 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에도 인천항 + 육로가 여전히 쓰였으며(가령, 민비 살해 자객 일행이 한양에 올 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수로 운송을 위해 공항 고속도로와 비슷한 선형으로 한강에서 바다로 더 가깝게 가는 경인운하, 일명 아라뱃길을 팠다. 아라뱃길의 좌우로도 자전거 도로가 잘 닦여 있다고 들었는데, 거기 갈 일이 있으면 한번 구경하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09 19:32 2017/09/09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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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번에 이배재 고개에서 등산을 마친 뒤, 그로부터 거의 한 달 뒤에 거기를 다시 찾아갔다. 그리고 거기서 남쪽으로 산행을 계속했다. 이게 성남· 광주 산행 시리즈의 마지막이 될 듯하다.

4~5월을 전후하면서 계절이 바뀌면서 날씨가 급격히 더워졌다. 등산의 최대의 적인 더위에 의한 대미지를 최소화하기 위해, 지난번보다도 더 이른 거의 6시 무렵부터 산을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본인의 집에서 지하철· 버스의 첫차를 타서는 이배재 고개에 그 시간대에 도착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새벽에 출발해서 이배재 고개까지 내 차를 직접 가져가는 것도 무리였다. 주차 문제도 있거니와, 이번에도 목적지 미정의 편도 경로를 계획했기 때문이다. 산에서 내려온 뒤에 차가 있는 곳까지 되돌아가는 게 삽질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 5시 반에 암사가 아닌 가락시장에서 출발하는 서울 지하철 8호선 첫차를 탈 수 있는 곳에다 차를 세우고, 거기서 이배재 고개까지는 지하철과 버스로 갔다. 저 지하철 첫차는 마침 모란 역에서 5시 50분경에 광주로 출발하는 버스와 딱 연계가 잘 됐다. 이렇게 자가용과 대중교통을 적절히 혼합함으로써 이배재 고개에는 아침 6시 15분쯤에 도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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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재 고갯길, 그 아래로 저 멀리 펼쳐진 성남 시내의 모습이다. 산을 이제 막 오르기 시작했다.

반팔· 반바지 차림에다 차량까지 동원해서 최대한 일찍 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되자 금세 더위가 느껴졌다. 조금 힘을 쓰며 오르막을 오르자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제 가을이 될 때까지 긴팔 차림으로 여유롭게 등산은 못 하겠다.

또한,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번에 간 이배재 고개 남쪽의 갈마치 고개와 고불산· 영장산 일대는 북쪽의 검단산· 망덕산 구간보다 훨씬 단조롭고 볼 게 없었다. 온통 풀숲만 가득했고 유적이나 군사 시설, 전망대 같은 건 전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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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마치 고개 아래로 지나는 자동차 도로이다. 내가 육교를 다 건널 때까지 아래로 지나가는 차량이 없었을 정도로 차량 통행이 뜸해 보였다.
그리고 여기는 이배재 고개 육교와는 달리, 아래에서 등산로로 올라오는 계단 같은 게 없었다. 서로 그냥 단절돼 있다. 하긴, 서울의 북악 스카이웨이(북악산)에도 이렇게 차도와 단절된 육교가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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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걸 그만두고 한동안 정말 하염없이 걷기만 했다. 동쪽의 광주 방면으로 하산하는 갈림길이 종종 나오긴 했으나, 일단 분당 메모리얼 파크가 나올 때까지는 계속 앞만 보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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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드디어 묘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번 등산 때는 저 멀리 병풍처럼 펼쳐진 풍경으로만 봤던 메모리얼 파크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직접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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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로부터 몇백 m 더 진행하자, 예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영장산 정상이 나왔다. 지난번과는 전혀 겹치지 않는 완전히 다른 경로로 정상까지 오른 것이었다. 그때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일종의 수평 이동을 한 것이고, 이번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수직 이동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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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는 경로가 달랐으니 내려가는 경로도 차별화가 돼야 할 것이다. 지난번에는 태재고개 방면으로 적당히 가다가 분당의 새마을 연수원 방면으로 하산했지만, 이번에는 분당이 아니라 귀가 교통편이 더 불편할 수도 있는 광주 방면을 과감하게 선택했다.
그런데 정작 태재고개 방면(성남 누비길)으로 더 내려가는 길목에서는 광주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다들 율동 공원 방면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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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산을 오르내리니 이런 정자가 나타났다. 그리고 성남 누비길을 이탈하여 철망이 옆에 둘러진 좁은 산길이 나타났다. 철망 건너편에 있는 것은 '성남 300 컨트리클럽'. 산에서 골프장을 구경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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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 길을 따라가면 광주 방면으로 산을 내려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진로를 이쪽으로 바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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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위의 저 집은 정체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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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본인은 광주시 목동 소재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에 착륙했다. 어느 지점부터는 마을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보이지 않아서 그냥 마을을 향해 길이 없는 비탈길을 막무가내로 내려가기도 했다.
시골인데 논밭보다는 공장이 눈에 더 많이 띄는 게 인상적이었다. 맑은 한낮이니 풍경 사진 찍기에는 최적의 날씨였다.

이렇게 산행을 마치긴 했으나, 무작정 난생 처음 보는 동네에 발을 디뎠는데 여기를 대중교통으로 빠져나가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지금까지 산기슭의 여러 마을들을 답사해 본 내 경험상, 이럴 때는 그냥 산을 등지고 큰길이 나올 때까지 무작정 걷는 것밖에 답이 없었다. 그러다 보면 버스 정류장이 나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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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비만 내면 말 그대로 집의 잡다한 모든 관리가 끝나는 공동주택과는 달리, 단독주택은 모든 관리를 집 주인이 알아서 처리해야 한다. 그건 결코 편하지 않으며, 금전적으로도 관리비보다 저렴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그래도 한적한 시골에 마당과 차고가 갖춰진 내 집을 별장 형태로라도 갖고 싶긴 하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한참 걷고 나니 버스 정류장이 나왔으며, 배차간격이 긴 버스가 그래도 의외로 금방 왔다.
이 버스는 성남이나 서울로 가지는 않지만 그래도 경강선 전철역으로 가는 덕분에 이걸 타고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7/09/01 19:30 2017/09/01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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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나전 역이다. 얘는 무슨 등록문화재처럼 작정하고 옛날역 스타일로 꾸며 놓고 보존을 하고 있었다.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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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학교 건물도 목재로 된 문이나 창틀에 저렇게 에메랄드 도색을 한 게 많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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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선은 중간에 저런 터널을 통과하는 구간이 있었다. 세월이 흘러 본인은 차량으로 동일 구간을 방문한 뒤 그 터널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도로의 양 옆에는 저렇게 철길과 강이 지난다. 2006년에 찍었던 옛날 사진과 비교해 보면, 그때는 강 쪽의 가드레일이 좀 연약한(?) 평범한 가드레일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중앙분리대처럼 견고한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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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와 철길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었던 덕분에 여기서는 잠시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갔다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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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로는 그냥 한 정거장 거리이지만, 동일 구간을 자동차로 지나기 위해서는 고개를 하나 넘어야 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정선선 선로를 이렇게 내려다보는 풍경도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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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평 역은 시골 마을에 들어가서 뒤쪽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냥 문이 굳게 닫힌 채 휴업 상태였다.
그래도 코레일체의 '맞이방' 간판도 있는 걸 보니 완전히 버림받은 신세는 아닌 것 같다.

정선 역은 그나마 정선 시내에 자리잡고 있고, 아우라지와 더불어 승무원이 상주하는 역이기 때문에 사진 첨부는 생략한다.
그리고 별어곡 역은 유일하게 지방도 길가에 바로 놓여 있긴 하던데, 자그마한 억새 박물관으로 탈바꿈했고 본인의 방문 당시에는 역시 폐쇄돼 있었다. 역시 사진 첨부는 생략한다.

뭐 이렇게 정선선의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민둥산 역이 아닌 함백선 구간으로 달려갔다. 정선군을 나름 북쪽에서 남쪽으로 종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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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무슨 창자처럼 꼬불꼬불 배배 뒤틀려 있다. 산을 하나 넘느라 경사가 정말 가파르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 일대는 도로뿐만 아니라 철도(태백선)도 전국에서 손꼽히는 급경사가 펼쳐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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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로 보면 저렇고 실제로 주변 풍경을 보면 이런 곳이었다~! portrait와 landscape 구도로 각각 한 장씩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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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는 비가 와서 강과 개울이 흙색으로 변한 대신, 그 다음날 가을 같은 파란 하늘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뭐, 강원도뿐만 아니라 서울도 모처럼 하늘이 파랗고 좋았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곳 강원도도 뭔가 알프스 산맥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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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과 함백선이 합류하는 조동 역은 애초부터 여객 취급을 하지 않는 신호장 격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접근하기 힘든 오지에 있었다. 언덕을 한참을 올라가서 무슨 절이나 암자가 있을 법한 곳에 철도역이 떡 놓여 있었다.
그리고 현재의 선로가 놓인 고가 아래에도 말발굽 모양의 명백한 단선 철도용 터널이 있었다. 그건 태백선과 함백선이 지금처럼 연결되기 전에 놓였던 옛 선로의 흔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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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 역에서 분기하는 태백선과 함백선의 선형 구도를 보면, 태백선은 시종일관 쭉쭉 높게 올라간다. 그러나 함백선은 처음에는 고도가 낮다가 나중에 똬리굴 부분에서 고도가 올라가는 편이다.
그래서 함백선에 있는 함백 역은 아까 정선선의 별어곡 역과 마찬가지로 길가에서 쉽게 접근 가능한 곳에 있었다. 물론 여객 취급을 하지는 않으며, 이 역도 그냥 등록문화재처럼 보존만 해 놓은 것이다.

참고로 오리지널이 아님. 2006년에 철거됐다가 주민들의 요구로 레플리카를 재건해서 복원한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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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까지 사진으로만 봐 왔던 조동철교 라멘교 성지에 본인도 드디어 도달했다.
여기 일대를 스스로 답사해 보니까 지리 구조가 어떻고 주변 지형이 어떤 형태로 돼 있는지 감이 잡혔다. 정말 유익한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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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미 역 부근에서 분기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태백선과 함백선 선로이다. 멀리 작게 보이는 선로가 태백선이다.

이것으로 이번 여행 일정을 그럭저럭 마쳤다. 삼척 바다에서 계획했던 것만치 오래 있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일정이 당겨졌다.
강원랜드라든가 과거의 스위치백 선로 구간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긴 했지만, 체력과 보급, 도로 정체 등을 감안하여 거기까지 가 보지는 않고 그냥 돌아왔다.

정선에서 영월을 거쳐 제천까지 가는 구간은 철도로 치면 태백선에 대응할 텐데, 비록 고속도로는 없지만 그에 준하는 국도가 잘 닦여 있었다.
거기서 중앙 고속도로(55)를 타고 원주 방면으로 간 뒤, 강원도로 갈 때와는 역순으로 광주-원주 고속도로와 제2 중부 고속도로를 거쳐 집에 돌아왔다. 주말 낮이다 보니 상행은 그럭저럭 원활한 편인 반면 하행은 굉장히 막히고 있었다.

이렇게 북부와 남부로 나눠서 강원도를 다녀왔으니 다음에는 또 어디를 갈지가 고민된다.
예전에 철원을 갔을 때는 철도와 안보가 적당히 섞여 있었고, 작년에는 100% 안보 컨셉이었다. 그 반면 올해는 100% 철도 컨셉이 됐다. 자연 경치 감상은 어느 여행에서나 당연한 공통이었고 말이다.

그럼 관광 도시로서 본인의 고향인 경주는 어떤가 뜬금없는 생각을 늘어놓으며 글을 맺고자 한다.
사실, 남한 지역 전체를 통틀어서 경주는 관광 도시의 독보적인 본좌급이나 마찬가지 대접을 받아 왔다. 오죽했으면 그 옛날 1960년대에 야간 통금으로부터도 특례를 받아 제주도와 충북 내륙에 이어 1966년에 진작에 해제됐으며(시내만.. 외곽의 월성군 지역은 제외), 국립공원 승격도 1968년 12월 말, 이제 막 아폴로 8호 미션이 끝났을 무렵에 지리산에 이어 제2타로 받았다. 그것도 전국 유일의 '도시형 국립공원' 형태로 말이다.

물론 국립공원인 게 특혜만은 아니니, 부동산 주인의 입장에서는 개발 제한 고도 제한이 잔뜩 걸려서 속천불이 났을 수 있다. 작년 가을에 지진 피해를 많이 입었던 황남동 일대는 '역사 문화 미관 지구'라는 명목으로 주택들 지붕을 기와 형태로만 올리게 법으로 규정되어 있기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1960년대 말에 그 전기 먹는 하마요 사치품이던 에어컨이 거의 최초로 가동된 장소는 경주 석굴암이었다. 일제와 남한 정부가 복원을 어설프게 잘못하는 바람에 내부의 온도와 습기를 도저히 자연적으로 제어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뭐, 지금과 같은 복원도 당대로서는 악의적인 훼손이 아니라 나름 최선을 다해서 한 것이었으며, 석굴암은 우리 입장에서도 어차피 수백 년간 잊혀진 유물이었기 때문에 딱히 남을 욕하고 탓할 처지는 못 된다. 하지만 해체했다가 도로 조립을 못 해서 밖에 버려진 석재 부품들을 보면 좀 안습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경주는 문화재 유적지빨이지, 자연 경치가 관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강원도보다야 작다. 하지만 경주도 포항이나 부산과 마찬가지로 행정구역상으로 바다를 끼고 있으며, 나름 해수욕장도 몇 군데 보유하고 있다. 시내에서 굉장히 멀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경주가 전방 지역인 강원도와 크게 다른 점은 안보 배경이지 싶다. 경주는 울릉도나 부산 등과 더불어 6· 25 사변 중에 북괴에게 점령당하거나 전투가 벌어진 이력이 없는 지극히 조용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이점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8/28 08:33 2017/08/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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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과 식사, 삼척선 구간을 답사가 이렇게 끝났다. 물놀이를 더 했으면 삼척에서 더 오래 머물 수 있었겠지만 계획했던 것보다 더 일찍 이곳을 떠나서 이제 정선으로 향했다. 정선으로 가는 길은 고속도로가 아닌 꼬불꼬불 산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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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방 저수지'라고 경치가 아름다운 호수와 쉼터가 있어서 여기에 잠시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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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 산 아래의 공터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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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선 아우라지 역에 도착했다. 11년 전에 열차를 타고 가서 1시간 남짓 구경했던 곳을 자가용을 몰고 다시 방문하게 됐다.
승강장의 역명판 뒤로 아리랑 관광 열차의 측면이 보인다. 사진을 따로 찍지는 않았지만 이 열차는 나름 최신 7600호대 디젤 기관차가 견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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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바로 옆에는 11년 전에는 없던 어름치 모양의 열차 개조 카페가 놓여 있었다. 정선에서 자기 지역을 관광지로 기를 쓰고 홍보한다는 게 느껴졌다.
본인은 날이 밝을 때는 주변 지역을 더 돌아다니다가 카페에는 해가 진 뒤에 가 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저기는 마지막 레일바이크 관광객 팀이 셔틀버스를 타고 떠난 저녁 6시 무렵에 칼같이 문을 닫았다. 그래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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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서는 레일바이크를 타고 구절리까지 갔던 관광객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레일바이크가 최초로 도입된 건 2004년에 문경선 구간이고 정선선은 2타이다. 하지만 레일바이크라는 용어 자체를 최초로 만들고 더 적극적으로 마케팅과 홍보를 한 건 그 이듬해에 문을 연 정선선 지역이다. 정규 열차 운행이 중단된 북쪽 말단의 아우라지-구절리 구간을 이용해서 말이다.

본인도 언젠가 레일바이크를 몰 기회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고무 바퀴가 아스팔트· 시멘트 위를 굴러가는 것에 비해 쇠 바퀴가 레일 위를 굴러가는 게 역학적으로 얼마나 더 효율적인지 감을 익히는 차원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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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과 골지천이 합류하는 일명 '아우라지 강변'에 찾아갔다. 양평 두물머리가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이라면, 여기는 남한강의 먼 상류가 하나 형성되는 지점이다.
아우라지 시비와 강 건너편의 정자는 11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잘 있었다. 단, 강을 건너는 다리가 새로 생겨 있었고, 보아하니 북쪽의 구절리까지 차도뿐만 아니라 산책로가 만들어진 듯했다.
비의 여파 때문인지 11년 전에 비해 물이 꽤 불어나고 색깔도 탁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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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진 뒤엔 본인은 저 강 건너편의 넓은 공터로 가서 밤을 보냈다. 작년에는 거진항 근처의 공터에서 잤는데(바닷가) 올해는 나름 강변에서 잔 셈이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야영· 외박용으로 가히 최적의 장소였다. 차가 몇 대 세워져 있긴 하지만 딱히 사람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차에다 자전거도 싣고 갔으면 정선 시내를 더 광범위하게 정찰? 관광?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아폴로 달 탐사 로켓에다 월면차를 실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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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동이 트자 본인은 북쪽으로 차를 몰고 구절리 역으로 향했다.
자동차 도로와 철길과 강물이 나란히 지나고 멀리 산이 병풍처럼 둘러진 풍경은 정말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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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리 역과 주변 분위기는 이러했다. 이미 레일바이크 승하차장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이고 광장에는 넓은 주차장과 식당, 여치 한 쌍이 교미하는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열차 카페, 그리고 말로만 듣던 기차 펜션이 있었다.
정선선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 만들어진 철도이다. 석탄 산업 하나 때문에 이런 깊은 산속에다 힘들게 철도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건 망하고 관광 자원으로 재활용하는 상태가 됐구나.

여기를 들른 뒤부터 본인은 다시 태백선 방면으로 내려가면서 정선선의 모든 역들에 방문했다.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7/08/25 08:35 2017/08/2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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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여름에 본인은 1박 2일 강원도 종합 여행을 추진했다. 이게 기대 이상으로 쏠쏠하고 아주 좋았다.

  • 갈 때는 새벽에 널널한 고속도로에서 원없이 밟으며 쾌속 주행
  • 동해 바다에서 해수욕
  • 회 코스 요리로 혼밥
  • 바다를 즐긴 뒤에는 꼬불꼬불 산 타는 국도를 달리며 경치 감상
  • 내륙의 강과 계곡에서 물놀이

본인은 더위에 약하고 바다에 대한 로망이 크다.
언제 어디서나 눈만 감으면 정말 잘 자고 불면이라고는 도무지 모르고 지내는 타입이지만.. 이것도 무더위 앞에서는 답이 없다.
알람 안 맞춰 놓고도 새벽 2~3시에 저절로 깨는 게 가능하구나. 잠 자는 것조차도 중간에 시동이 꺼져 버린다. 지금은 "이게 나라냐?" 할 때가 아니고.. "이게 날씨냐?"가 목구멍 위로 올라오곤 했다.

하도 답답해서 하루는 냅다 컴퓨터를 켰다. 그러자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해수욕장"이 머리보다 먼저 손가락이 움직이며 검색란에 쳐졌다. 모든 일과를 중단하고 그냥 영종도든 강화도든 차 끌고 달려가서 바닷물에 반신욕 한 채로 잠들고 싶을 정도였다.

김 성모 만화를 보면 "벼.. 병원에 가면 돼. 아무리 심하게 다쳐도 병원에 가면 금방 회복될 수 있지"라고 굉장한 현대의학 병원 만능주의가 담긴 대사가 있는데.. 나는 "바.. 바다로 가면 돼. 아무리 습하고 더워서 땀이 쩔어도 바닷물에만 들어가면 금방 회복될 수 있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본인은 그때 돌아온 직후부터 내년 여름을 기약했으며,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여름에 강원도를 비슷한 방식으로 다녀왔다.
단, 작년에는 영동 고속도로 이북으로 '안보 관광'이 테마였던 반면, 올해는 영동 고속도로 이남으로 '철도 답사'를 테마로 삼았다. 덕분에 공통 테마인 자연 경치 감상 말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여행 분위기가 작년과는 사뭇 달라졌다. 올해는 반공 이데올로기 자가주입 이벤트는 없었다.

미리 결론부터 누설하자면, 이번 여행에서는 삼척선(동해 관광 열차), 정선선(아리랑 관광 열차), 그리고 함백선(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화물용 지선) 이렇게 정규 여객 열차로 가기 힘든 마이너한 철도들의 모든 역과 주변 지역을 차로 직접 답사함으로써 개인 철덕력을 강화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또한 작년 말에 개통한 광주-원주 고속도로(52. 일명 '제2 영동')의 혜택도 바로 입을 수 있었다. 중간에 나들목이나 분기점 따위가 없는 제2중부(37) 고속도로에도 저기를 드나드는 분기점이 하나 생겼다. 올해 여름부터는 주말에 영동 고속도로도 경기도 구간에는 버스 전용 차선이 시행된다고 그러던데, 강원도를 가는 게 목적이라면 그걸 볼 일은 더 없어졌다.

이번 여행에서 딱 하나 아쉬웠던 건 날씨였다. 동해 바닷가에 도착하던 당시에 강원도 전역에는 그냥 비를 넘어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뭐, 그래도 바닷물은 어지간해서는 따뜻한 편이고(나는 10월에도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물놀이 잘만 했음..) 나 같은 사람은 얼마든지 입수할 수는 있다. 파도가 강하면 멀리 나가지만 않으면 되니까.

그래도 땡볕이 내리쬘 때에 비해서야 해수욕으로부터 얻는 쾌감과 성취감, 가성비가 감소하는 건 어쩔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해변의 바닷물이 온통 흙탕물로 변하고, 고체 쓰레기가 둥둥 떠다니는 건 좀 문제였다.
이 때문에 황해보다 맑다는 동해 바닷물 본연의 모습을 볼 수 없었고, 해수욕은 그냥 하반신 정도만 잠시 담그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맑은 날씨에 맑은 바다를 구경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나머지는 다 좋은 편이었다.
긍정적인 점을 떠올리자면, 이 더운 8월에 밖이 쌀쌀하고 차가 따뜻한 곳에 가서 빗소리 들으면서 차 안에서 쉰 것도 피서라면 피서이다. 밖이 더웠으면 차 안에서는 도저히 지낼 수 없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해가 안 난 덕분에 피부가 탈 일이 없었던 것도 좋은 점이다. 예전에 맑은 날씨에 해수욕을 했을 때는 심지어 맨 밑바닥의 발등조차도 슬리퍼에 가려진 부분은 흰데 발가락 같은 노출 부위는 새까매지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물은 온도만 낮춰 줄 뿐, 자외선은 전혀 차단하지 않고 수심 1m를 넘게도 그대로 투과시켜 주는가 보다. 그 정도 수심이면 이미 총에 맞을 걱정조차도 거의 할 필요 없어지는데도 말이다.

자, 말이 길어져서 지겨우실 테니 이제부터는 사진을 투척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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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려서 강릉· 정동진을 열차가 아닌 자가용으로 난생 처음으로 찾아갔다. 게다가 해수욕장 개장 기간 끝물에 맞춰 간신히 찾아갔는데 입구부터가 벌써 물난리가 나 있었다. 안습..

하긴, 비 소식 자체는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미리 알고 있던 것이었다. 강릉과 가까워질수록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하지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복병은 해변뿐만 아니라 도로에도 있었다. 바다를 따라 꼬불꼬불 달리는 도로들은 자연히 해발 고도가 낮은 편이고, 곳곳이 침수되어 흙탕물 웅덩이가 생겨 있곤 했다. 차로 지나가다가 몇 번 아슬아슬한 상황을 겪었으며, 급기야 망상 해수욕장 이남의 길은 진입 통제까지 걸린 상태였다. 이런 건 다음부터 바다에 갈 일 있으면 참고해야 할 변수이고 시행착오였다.

뭐, 강릉은 고속도로의 경로 때문에 그냥 잠시 들른 것이고, 본인의 진짜 목적지는 삼척이었다. 여기 상황을 이렇게 확인한 뒤, 본인은 거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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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선은 영동선의 지선으로 취급되며, 무궁화호 같은 정규 여객 열차가 아니라 동해 바다열차라는 관광 열차만이 다닌다. 영동선의 정동진처럼 열차 안과 승강장에서 해변이 곧장 보이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요 구간이 해수욕장과 충분히 가까이 있었다.
그리고 추암 역은 지붕도 없고 높은 곳에 놓인 선로 옆에 철제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임시 승강장' 형태였다. 그런데 역 진입 계단의 바로 아래에는 공교롭게도 쓰레기장(...)이 있어서 미관상 별로 안 좋은 관계로.. 진입로의 사진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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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의 추암 해수욕장의 모습이다.

2017년 현재 우리나라에 동해선은 참 묘하게도 고속도로와 철도 모두 남쪽과 북쪽 구간이 서로 끊어지고 단절돼 있다. 얼추 포항-삼척 사이가 말이다.
일제는 1940년대에 태평양 전쟁 때문에 물자가 부족해서 한반도에서 이미 놓여 있던 철도의 선로를 막 뜯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동해북부선은 어째 새로 건설 중이었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물론 거기도 그 당시에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는 못했겠지만 말이다.

동해 고속도로(65)와 철도 동해선이 전구간 완공되어서 삼척선이 간선으로 승격되고, 삼척에도 정규 여객 열차가 다녔으면 좋겠다. 서쪽의 황해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0여 년쯤 전엔 군산선과 장항선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지선이 본선으로 승격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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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암 다음으로 '삼척해변'이라는 역에도 이렇게 땅밟기를 했다. 사진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바다열차가 도착하고 관광객들이 탑승하는 걸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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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해수욕장 부근에 차를 세우고 자리를 잡았다. 바다는 뭐.. 이런 상태였다. 하지만 물이 보기만치 심하게 더럽거나 차갑거나 파도가 살인적으로 강한 건 아니어서 마음만 먹으면 해수욕을 할 수는 있었다. 내 경험상 한여름에 바다는 계곡에 비하면 오히려 더 따뜻한 편이다.

하지만 이 날씨에 옷을 다 적시면서 해수욕을 했다가 전신 샤워를 하기에는 귀찮다는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는 30분 남짓 하반신만 담그는 걸로 만족하고 나왔다.
바다 코앞에 저렇게 테이블과 의자, 파라솔이 있으니 좋았다. 그리고 빗줄기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빗물을 잔뜩 뒤집어쓴 내 애마는 상부 한정으로 아주 깨끗해졌다. 비를 어설프게 맞거나 비 자체가 흙먼지가 섞여서 지저분하면.. 잘 알다시피 흙먼지 얼룩이 빗방울 모양으로 생기면서 차 표면이 아주 더러워지는데.. 비 맞고 나서 차가 더 깨끗해지는지 혹은 더러워지는지는 좀 케바케인 것 같다. 어떤 경우든 세차를 한 다음날에 비가 오는 건 차주의 입장에서는 머피의 법칙 같은 악재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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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는 역시 횟집들이 죽 늘어서 있었다. 본인은 여기서 점심을 먹었다. 반찬까지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비웠으며, 다음에 나온 매운탕도 혼자 다 먹어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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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해변을 나서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삼척선의 종점인 삼척 역도 입구와 승강장 선로 사진을 남겼다. 이 역은 영업 중이었으며, 바다열차를 타려는 승객들이 안에 좀 있었다.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7/08/22 19:23 2017/08/22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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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근래엔 거의 한 달 간격으로 나란히 산행 후기를 올리게 됐다.
본인은 이제 인서울에서는 어지간한 산들은 다 오른 것 같다. 서울 외곽은 지금까지 주로 동쪽으로 살펴본 편이었다. 남양주 예봉산, 하남 검단산을 오르면서 오지를 탐험한 건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경부선이나 과천선 철도 주변에 있는 산들은 직선 거리로는 본인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그러나 청계산 내지 관악산처럼 다른 산의 남쪽에 있는 산들은 교통이 불편해서 심리적으로 안 가게 된다. 북쪽으로 의정부의 사패산 같은 산도 다른 메이저 산에 가려져 있다. 게다가 그런 곳은 딱히 그린벨트 지대가 없어서 산기슭까지도 건물들이 빽빽해서 속세를 벗어난다는 느낌이 별로 안 든다.

본인은 서울의 동남부에 있는 성남에서는 불곡산을 올랐고 얼마 전에 영장산을 오른데 이어, 이번에는 분당이 아닌 구 성남 시가지의 동쪽에 있는 산을 다녀왔다. 성남과 광주 사이의 산맥 답사가 세 번째를 맞이했다. 등산 지점은 점점 더 북상하고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분당· 판교에 직장을 뒀던 사람으로서(지금은 회사가 서울로 이사를 감), 서울 지하철 8호선이 지나는 구 성남 시가지와 거기 산기슭은 분위기가 어떨지 참 궁금했는데 이 답사가 의문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됐다.

자, 그럼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어디까지 등산을 할지 경로를 짜는 게 첫 고민거리였다.
작년에는 서울 마천 역 근처의 청량산 방면에서 등산을 시작해서 남한산성까지 올라갔었는데, 그때는 남한산성의 북쪽(서문과 북문)만 그야말로 수박 겉 핥듯이 둘러보고 도로 북쪽의 하남시 쪽으로 하산해 버렸다. 남문이나 심지어 조선 행궁 같은 것도 전혀 구경을 못 했다.

그래서 이번 산행에서는 일단 남한산성 남부까지는 성남시에서 접근해서 그냥 버스를 타고 올라갔다. 그래서 그때 못 한 남한산성 유적지 구경을 잠깐 한 뒤, 남쪽으로 내려가서 검단산과 망덕산까지 쭈욱 걷고 이배재 고개까지 구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성남시에도 하남 검단산과 이름이 동일한 산이 있다.

아침 일찍(7시 무렵), 엄청난 높이의 에스컬레이터로 악명 높은 서울 지하철 8호선 산성 역에서 내렸다. 여느 출구로 나간 게 아니라 지하철역과 연결되어 있는 북쪽의 환승 주차장으로 나간 뒤, 거기서 더 북쪽에 있는 폴리텍 대학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서 9번 버스를 탔다. 산기슭의 '남한산성 입구'가 아니라 실제로 산을 올라가기도 하는 얼마 안 되는 버스이기 때문이다.

얘는 평소에는 성남 시내를 빙빙 돌다가 산을 오르지만, 주말 한정으로 등산객과 관광객을 위해 지하철역-남한산성 직행 셔틀이나 마찬가지인 9-1이 다니기도 한다.
산을 오르려면 기름이 굉장히 많이 들 것이고 평일에는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이 적어서 채산성이 안 맞을 텐데, 그래도 9번 버스는 10~20분대의 배차간격으로 다니는 편이었다. 지름길이 아니라 좀 이리저리 돌다가 산을 올라가는 것쯤은 얼마든지 봐 줄 만했다.

산을 오르면서 차창 밖 경치 중에서도 사진 찍고 싶은 게 여럿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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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남한산성 내부에 도착했다. 위의 사진은 만해 한 용운 기념관, 그리고 조선 행궁 '한남루'의 입구이다. 한낮인 것 같은 시간대이지만 방문 당시는 아직 아침 8시 남짓밖에 안 됐다. 그러니 둘 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이제 흙색의 낙엽은 바닥에서나 볼 수 있고 산들이 전반적으로 다 싱그러운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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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남한산성 남문이다. 자동차는 아래로 난 터널을 통해 성곽을 입체교차하여 산성 내부 구간으로 들어온다.
그러고 보니 서울의 북악산도 팔각정까지 자동차 도로가 있긴 하다. 그러나 얘는 애초에 북악산의 뒤, 한양도성(서울성곽)의 바깥만 지나며 성곽과 만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는 터널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북악산에서 한양도성을 근접 구경하고 싶으면 도보로 등산을 해야 한다. 그래도 이것도 차도가 전혀 존재하지 않고 험준한 북한산을 올라야만 도달할 수 있는 북한산성보다는 사정이 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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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밖으로 나가자 남쪽으로 내가 가려는 길은 안내가 아주 잘 돼 있었다.
서울에 공식적으로 '둘레길'이 있는 것처럼 성남시에서도 '누비길'이라는 산길 브랜드를 만들어서 홍보하고 있었다. 성남과 광주를 지리적으로 가로막는 산들의 쭉 이으면 자동으로 길이 나오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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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길이 이렇게 평범한 시골길 같다가 나중에는 그냥 산길 흙길로 바뀌었다.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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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턴가 차도가 합류하더니 길이 이렇게 바뀌었다. 산 속에 깔린 자동차 도로는 사람용 등산로보다 경사가 완만한 대신 우회하는 길이가 훨씬 더 길다. 누비길은 얼마 안 가서 차도로부터 분리되어 나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고 누비길도 자꾸 이쪽으로 안내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싶었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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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 검단산이 하남 검단산보다 훨씬 덜 유명하며, 누비길 말고 딱히 산 자체에 대한 등산로가 인터넷 지도에 별로 안 나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갑자기 길 좌우로 철조망이 둘러지고 "과거 지뢰 매설 지역" 경고문이 나타났다.
이 산의 정상에는 공군 부대가 있다. 그것 때문에 자동차 도로도 필요했던 거다.

그러니 성남 검단산은 서울로 치면 우면산 같은 분위기였다. 이 길이 공식적으로 성남 누비길의 일부이며 남한산성에서 검단산까지 가는 최단경로이긴 하다. 하지만 서쪽의 약수터 쪽으로 우회하면 이런 군사 시설을 덜 마주치고 검단산 정상 쪽으로 갈 수 있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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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도를 따라 걷고 또 걸은 끝에 검단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진짜 제일 높은 정상에는 군부대와 각종 통신 시설(KT 검단산 중계소?)이 있기 때문에, 민간인을 위한 정상은 차도를 벗어나 왼쪽으로 꺾어서 진짜 정상보다 2, 300m쯤 떨어진 공터에 따로 있었다. 공터에는 헬리패드가 있고 무덤 비석 같은 자그마한 '검단산' 표지석이 놓여 있는 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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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지체 없이 계속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검단산 정상을 지난 뒤부터는 군대 냄새도, 자동차 도로 같은 것도 없이 순수하게 자연의 정취가 느껴지는 산길이 쭉 이어졌다. 안 그래도 날씨도 맑고 따스하고, 주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여기는 간간이 사기막골(성남)이나 불당리(광주) 같은 주변 마을로 하산하는 분기점이 있었다. 성남 쪽은 산기슭에 공장(상대원 공업단지)도 있고 뭔가 대도시 같지만, 서쪽의 광주 쪽은 산봉우리가 더 있기도 하고 그나마 골짜기에 간간이 놓인 집들은 시골 분위기 그 자체였다. 다만, 어느 쪽으로든 시야가 나무로 가려져서 시야가 좋지 않은 건 아쉬웠다. 전망대 같은 건 누비길 전구간을 통틀어 전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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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도 그때 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는 즉석 코딩으로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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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을 오르내리며 한참을 걸은 끝에 드디어 망덕산의 정상에도 도달했다. 여기는 딱히 공터가 있지 않고 평범한 등산로 길목에 탁자· 벤치와 정상 표지석이 있었다. 봉우리 이름은 '왕기봉'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성남 누비길에서는 휴식 공간에서도 딱히 운동 기구 같은 건 못 본 거 같다. 만만한 공원도 아니고, 그렇다고 막 높은 산도 아닌 그 중간 컨셉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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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산 정상을 지나자 등산로는 다음 목적지인 이배재 고갯길을 향하여 고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산은 분홍색 꽃나무가 많이 섞여 있는 반면, 앞에 펼쳐진 저 먼산은 전적으로 초록색으로 배경을 은은하게 물들여 놓은 게 풍경이 장관이었다.
저런 산의 어귀에 있는 마을에 혼자 틀어박혀서 광주시의 맑은 공기 마시면서 논문과 코딩에 전념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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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재 고갯길에는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다. 사실, 산들의 높이가 500미터대로 막 낮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고갯길만 해도 이미 고도가 200m를 훌쩍 넘기 때문에 내가 발로 이동해서 만든 고저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출발할 때도 남한산성까지는 버스를 타기도 했고 말이다.

이름이 왜 '이배재'냐 하면, 옛날에 과거 보러 한양으로 올라오던 선비들이 이 고갯길에서 왕궁을 향해서 절을 두 번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다.
하긴, 근대화 이전에 한반도에서 한양(서울)-동래(부산)을 육로로 연결하던 지름길은 광주· 용인· 충주를 경유하는 '영남대로'였다. 수원과 대전을 경유하는 육로는 20세기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철도와 고속도로 모두).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듯, 비행기 항로도 지형에 구애받지 않으니 영남대로의 선형과 더 가깝다.

숭실 대학교 근처에 있는 고갯길은 조심해서 살펴 가라고 해서 옛 이름이 '살피재'였다는데, 고갯길의 이름에도 이런 식으로 다 사연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육교를 타고 맞은편 산으로 등산을 계속할 수도 있다. 예전에 서울 지하철 3호선 녹번-홍제 구간 사이에(지상 도로는 통일로) 백련산과 북한산을 잇는 육교를 봤던 게 생각났다. 성남 누비길도 맞은편 산을 한 번만 더 넘어서 '갈마치 고개'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과 보급 관계상 본인은 거기까지는 안 가고 이 고갯길에서 버스를 타는 것으로 등산· 답사를 마쳤다. 이 길목은 광주 북부에서 모란 역(분당· 서울 8)을 잇는 버스가 수 분 간격으로 많이 다니고 있었다.

이배재로 다음으로 성남 시내에서는 '둔촌대로'라고 폭이 굉장히 방대한 길이 나 있었다. 길가엔 차들이 평행도 아니고 수직으로 주차돼 있었는데 이건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광경이다. 서울 지하철 8호선보다 한두 블록 아래로 성남 구시가지의 남쪽 끝을 지나는 큰길이다.

이 둔촌과 서울 '둔촌동'의 둔촌은 모두 동일하게 '둔촌 이 집' 선생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서울 일자산을 미리 다녀와 본 덕분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지도를 찾아보니 이 사람의 묘지가 여기 일대에 있다.
그런데 고려 말기의 너무 옛날 사람이기도 하고, 그가 이 정도로 칭송받을 정도로 뭘 그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게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후손인 광주 이씨 사람들이야 떠받들 만도 하겠지만 타지의 다른 사람들은 글쎄..

이렇게 산에서 역사 유적(남한산성), 군사 시설, 그리고 자연 풍경을 모두 구경하고 성남 시가지 구경은 덤으로.. 오늘도 유익한 답사를 하고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7/08/06 08:31 2017/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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