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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색소폰 연주

아시다시피 본인은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들었다.
성경의 사무엘이 '사무엘아' 음성을 두 번 듣고 나서 세 번째 들은 뒤엔 출처를 공부한 뒤 들을 준비를 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네 번째 '사무엘아' 음성을 들은 뒤에야 하나님의 음성에 제대로 응답하게 됐다.

그것처럼 나도 새마을호에서 Looking for you를 두 번 듣고 나서 세 번째 들은 뒤엔 출처를 인터넷으로 검색했고, 다음엔 들을 준비를 하고 새마을호를 탔다. 네 번째 Looking for you가 흘러나왔을 때 나는 철도 안에서 거듭났고 철도를 내 개인의 교통수단으로 영접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뒤로 나는 Looking for you를 주선율, 주요 화음, 대략의 비트까지 다 청음 채보했다.
콩나물 대가리를 한땀 한땀 입력해 넣고 원곡과 대조하면서, 어느 기보가 원음에 더 근접한 정확한 기보인지를 고민하면서..
Looking for you 작곡자의 마음과 심정을 이해하는 자가훈련을 했다.

이 음악의 어느 부분이 나를 감화시켜서 나를 철덕으로 만들었는지, 왜 이런 결과가 야기될 수밖에 없는지를 연구했다.
그리고.. Looking for you의 주선율을 만든 악기 공부를 (잠깐 동안이지만)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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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성탄절, 우리 교회 복음 전도 집회에서.
아, 교회에서 Looking for you 연주했다는 얘기는 아님. 오해 마시길..

2. 나의 등산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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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부 서식이 있으니 올랐던 산들의 높이를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어서 매우 좋다.
이것도 중복 정보 없이 정규화가 잘된 구조로 구축하려면 산에 대한 테이블과 등산 세션과 관련된 테이블을 분리하긴 해야 하는데, 엑셀로 그것까지 하기에는 많이 귀찮지.

입산 지점에 최종적으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가서 어디로 하산했는지,
산 속에서 주로 본 게 무엇인지, 바깥 경치로 주로 무엇을 봤는지,
정상에는 무엇이 있었고 어떤 형태였는지, 산이 행정적으로 어떤 관리를 받고 있는지 같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조회 가능하게 했다.

3. 코딩

그럼 이제 일상생활 얘기로 넘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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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화면을 비추느라 명암차 때문에 주변이 어두워진 거지, 촬영 당시에 책상 주변은 실제로는 저 사진만치 어둡지 않았음)
화면이 미치도록 광활한 데스크톱 컴과,
눕든지 앉든지 편한 자세로 침대, 책상, 자동차 등 아무 데서나 사용 가능한 놋붉 컴 중
뭘로 코딩을 할지가 매우 고민된다. 일종의 행복한 고민.

참고로 노트북의 화면 전체와, 데스크톱 모니터의 오른쪽에 떠 있는 작은 프로그램 창하고 화면 크기(화소 수)가 동일하다. ㄲㄲㄲㄲㄲㄲㄲㄲ 미래의 리드미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 날개셋 편집기의 화면임.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던 그림과 동영상들이 화질이 얼마나 구린지를 까발리고 정죄하는 마법의 모니터다.

역시 프로그래머에게 화면이 큰 건 컴퓨터에게 램이 많은 것과 같다~! 정말 다다익선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꾸 창 전환이나 스크롤 하는 게(개발툴, 웹브라우저, 에디터, msdn 등등) 컴터로 치면 메모리 부족해서 하드디스크 스와핑 하는 것과 개념적으로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무식하게 혼자 3~5K급으로 해상도가 너무 높은 모니터 하나냐, 혹은 걍 2K 해상도급 모니터 듀얼/트리플 중 어느 게 더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제각기 장단점이 있어 보인다.
참고로 배(선박)와 DLL(Windows 파일..;; )은 작은 놈 여럿보다는 큰 놈 하나가 성능면에서 더 효율적이다.

일체형 PC는 간지나고 공간 덜 차지하고 지저분한 선 없이 콘센트 하나만 꽂으면 모니터 본체 스피커가 전부 OK이니 정말 좋긴 하다.
다만, 이렇게 한번 세팅된 이후로 부품 업그레이드가 어려울 것이고 발열 제어도 곤란하니 엔드급 게임은 무리일 것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철도 차량의 동력분산 / 동력집중의 차이와 비슷해 보인다. 일체형 PC가 동력집중이 아니라 분산식에 대응한다. 그리고 트렁크· 캐빈· 엔진룸 따위의 구분이 없는 원박스 형태의 자동차도 일체형 PC와 비슷한 컨셉이라 볼 수 있겠다. (공간 활용 최대, 그러나 정비가 어렵다는 점에서 비슷)

4. 시간 부족과 일정 압박

CPU 클럭 속도 향상의 병목은 발열이고, 자동차 속도 향상의 병목은 공기 저항이다. 스마트폰 성능 향상의 병목은 배터리 용량이다.
그리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개발에서 최악의 병목은 잠으로 인한 시간 부족 되시겠다.
난 오랜 경험상 매일 6시간이 정말 마지노선이고 그 이하로는 도저히 못 줄이겠다. 결국은 낮에 졸음과 집중력 저하로 인해 밤에 안 잔 것 이상의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 -_-;;

어지간한 고시 준비생만치 시간을 분초 단위로 쪼개며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이래 가지고 날개셋 9.0은 언제 완성할 것이며 박사 졸업은 도대체 언제 하나..;;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보다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 선호함. 눈 감았다 뜨면 그냥 6시간이 싹 워프되고 개운 가뿐하게 일어나긴 한다. 천성적으로 남 눈치 안 보고 앞날 걱정을 미리 안 하는 체질이어서 그런지 스트레스는 적게 받는 편. 불면증 같은 게 어떻게 존재하는지 이해를 못 한다.

단지 잠을 더 줄일 수가 없을 뿐임.
이것도 기초체력 문제인가..? 잠 적으신 분이 굉장히 부럽다.

5. 덕질

논문 쓸 '꺼리, 아이템'들을 만들어내는 활동은 재미있지만 (코딩, 시스템 구현, 실험 등등)
그걸로 온갖 형식 갖춰서 실제로 논문을 쓰는 건 꽤 성가시고 번거롭다. =_=;;
그래도.. 잔인한 주인이 무자비하게 내린 온갖 복잡한 재귀호출 뺑뺑이와 자질구레한 메모리 할당· 해제 요청들을 컴퓨터는 진짜 순식간에 전광석화처럼 해낸다.

소프트웨어의 추상화 계층이 올라가면 코드를 유지보수하고 확장하기는 편해지지만 컴퓨터의 입장에서는 뭘 하나 하려 해도 포인터가 가리키는 대로 메모리를 여러 단계 요리조리 따라가야 하고, 캐시 미스가 나면 더 느린 메모리에 갔다가 와야 된다.

사용자가 '확인'을 누르거나 키보드를 하나 눌러서 화면에 글자 한 자가 찍힐 때까지 컴퓨터가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일의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하물며 실존하지 않는 종이, 실존하지 않는 음악과 영상이 존재하는 것 같은 경험을 사람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컴퓨터는 얼마나 많은 계산을 순식간에 해치우고 있을까?
프로그래머로서 이런 컴퓨터가 고맙고 대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글자를 온통 배배 틀고 배경과 뒤섞어 놓은 일명 '캡챠'는 사람은 곧바로 알아보지만 컴퓨터가 알아보지 못하는 (걸 지향하는) 그림이다.
그러나 사람이 도무지 판독할 수 없는 랜덤 노이즈로 보이는 QR 코드 같은 건 컴퓨터가 곧바로 판독해 낸다.
예전에도 말했듯이 주석과 들여쓰기가 잘 된 코드와, IOCCC용 난독화 코드는 컴퓨터가 해석하는 데 아무런 차이가 없다.
이런 걸 생각해 봐도 사람과 기계는 근본적으로 특성이 달라도 이렇게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다.

6. 컴퓨터 세팅

개인용 컴퓨터를 새로 지르거나 회사 같은 데서 내 업무용 컴터를 받았을 때 내가 기종을 불문하고 제일 먼저 하는 일은

  • 키보드 속도를 최고속으로 맞춘다. 보통 디폴트 값은 반복 속도가 늘 최고속에서 한 단계 낮은 걸로 돼 있는데.. 난 이게 최고속으로 돼 있지 않으면 답답하고 불편해서 못 쓴다. 키를 이 정도 시간 동안 눌렀으면 cursor나 선택 막대가 어느 정도로 이동해 있을 거라는 예상치와 기대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재입력/반복 키보드 속도 조절 체계'는 IBM PC AT 시절 이래로 변함없이 이어져 온 유구한 전통이다.
  •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설치한다. 내 홈페이지에 대외적으로 공개돼 있는 최신 버전이 아니라, 나 혼자만 갖고 있는 "개발 중"인 진짜 최신 버전이다. 한글을 내가 원하는 형태로 입력 가능하고 그 구닥다리 16*16 비트맵 폰트를 화면으로 좀 봐야 내가 심리적으로 안정된다.
  • Looking for you.mp3 복사해 넣는다. 음악 파일 중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내가 무조건 제일 먼저 집어넣는 파일, 특히 사운드 테스트용으로 쓰는 파일은 답정너 looking for you이다. 이게 흘러나와야 내 개인용 컴퓨터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노트북 내지 미니키보드들의 왼쪽 아래를 보면 Ctrl의 오른쪽에 Alt가 있는 것은 보장되지만 이것 말고 Fn, Win, 한자 키 같은 것은 생각보다 배치가 제멋대로이고 파편화가 심하다. 규격이 통일돼 있지 않다. 이것 때문에 한 키보드에 적응되고 나면 다른 키보드에서 modifier 키를 잘못 누르기 쉬워서 몹시 불편하다.

말이 나왔으니 하나 더.. 요즘 Windows 10은 사용자에게 선택의 여지를 안 주고 시도 때도 없이 강제 업데이트를 해서 꺼져야 할 때 바로 안 꺼지고, 켜져야 할 때 바로 안 켜지는 게 굉장히 싫다. 대규모 업데이트가 너무 잦고, 심지어 업데이트 후에 컴퓨터가 맛이 가는 것도 몇 번 겪어서 하기가 더욱 싫어진다. 그리고 컴퓨터를 오래 쓰고 나면 언제부턴가 시작 메뉴에서 앱들 검색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기 시작한다. 나만 이러는 거 아니지?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서 이더넷 유선 랜도 데이터 요금이 부과되는 네트워크라고 속이는 레지스트리 패치를 적용시켰다. 그래야 운영체제가 제멋대로 깽판을 안 부린다. 제아무리 보안 업데이트도 인터넷 패킷 종량제 앞에서는 깨갱 할 수밖에 없으니까.

7. 삼각형의 오심을 그리는 프로그램

작년이니 엄청 옛날에 이미 작업된 사항이긴 한데, 막 중요한 건 아니어서 이제야 여기서 공지를 하게 됐다. 홈페이지의 '옛날 자료실'에 올라와 있는 '삼각형 오심을 그리는 프로그램'이 거의 10여 년 만에 기능이 크게 추가되고 보강됐다. 수학 강사인 교회 지인의 제안으로 행해진 작업이다.

삼각형의 오심이야 간단한 기하 알고리즘으로 (1) 두 직선의 교점과 (2) 두 변이 이루는 각을 이등분하는 변만 구할 줄 알면 컴퓨터로 아주 쉽게 구할 수 있다. 삼각형은 2차원 평면도형 중 가장 간단한 물건인데 얘의 모양에다 중심이라는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도 이렇게 다양하다는 걸 알게 된다.

구체적인 개선 사항은 해당 웹페이지에도 나와 있지만, '구점원'이라는 걸 그리는 걸 추가했다. 삼각형 세 변들에 대해 변의 중점으로만 이뤄진 작은 삼각형의 외심원을 구한 것인데, 이게 또 방점과 접하고 수심을 지나기도 하는 등 기하학적인 의미가 장난이 아니다. 이걸 제6심이라고도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내심을 제외한 수심, 구점원 중심, 무게중심, 외심 이렇게 네 점은 언제나 한 직선상에 있다는 게 보장된다..;; 이 오일러 직선을 그리는 기능도 추가했다.
또한 삼각형의 꼭지점만 마우스로 끌어서 이동시키는 게 아니라 삼각형 내부를 끌면 삼각형이 통째로 움직이게 했다. 한 점이 삼각형의 내부에 있는지 판별하는 건 세 점의 방향성 판별 공식을 이용해서 구현 가능하다.

웹브라우저에서 윤곽선 폰트 에디터까지 구동하는 세상인데 이런 간단한 그림을 그리는 프로그램쯤은 이제 플래시조차 필요 없고 HTML+(JS)로 다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엔드 유저의 관점에서는 EXE 형태의 프로그램이 점점 필요 없어지고 있긴 한데, 일단 내가 아는 skill은 C++과 Windows API이니 저렇게 간다. GDI 말고 다른 API를 동원해서 선들을 안티앨리어싱도 좀 시킬 걸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완벽하게 만들려고 욕심 부리면 뭐 한도 끝도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26 19:33 2017/02/2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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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중부에서 동쪽 북부까지 늘어선 산들을 살펴보면 북악산 - 북한산 - 도봉산의 순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쯤만 해도 본인은 북악산과 북한산의 차이도 몰랐는데 등산 많이 하면서 서울 지리 지식이 참 많이 늘었다. 북한산과 도봉산의 사이에 있는 것이 '우이령 고갯길'이며 본인은 거기도 갔다 와 봤다.

북한산은 서울 주변의 여러 산들과 비교했을 때 워낙 거대하고 등산로가 많은 산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지난번에 갔던 정릉-백운대-우이동보다 더 서쪽으로 가서 형제봉· 문수봉 일대를 오른 뒤, 평창· 구기동 일대로 하산하는 경로를 짜서 북한산을 올랐다.

본인은 예전에 북악산을 북동쪽으로 종단해서 국민 대학교 방면으로 하산한 적이 있었다. 계속해서 북한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근처에 존재한다는 것까지는 그 당시 확인했지만, 시간과 체력 문제 때문에 더 진행하지 않고 귀가했었다.
그때 더 가지 못했던 길을 이제야 다시 찾아가서 개척하게 됐다. 지하철 길음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국민 대학교로 러쉬를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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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가 대중적으로는 홍대만큼이나 미대가 유명한 걸로 본인은 알고 있다. 뭐, 주변에 애들 놀 곳이 차고 넘치는 홍대에 비해, 북악산과 북한산 사이의 산기슭에 자리잡은 국민대는 위치와 분위기 차이가 많이 나긴 한다. 국민대는 놀기 좋은 위치가 아니라 등산 가기 참 좋은 위치에 있다.

그리고 본인 개인에게 국민대의 인지도는 강 승식 교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어 형태소 분석기를 연구· 개발하고 있는 컴퓨터공학과 교수여서 말이다. 아, 그렇다고 개인적으로 만나 보고 아는 사이는 아님.
2010년대부터는 U-tagger라는 걸출한 작품 때문에 울산대가 국어 정보처리 경진대회에서 상을 연달아 휩쓸기도 하면서 이 바닥의 막강한 경쟁자로 등극해 있긴 하다. 거기는 주 개발자인 박사 출신 학생은 들어 봤지만 교수님은 누군지 잘 모르겠다.

이런 잡생각을 하다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국민대 정문을 지나서 더 북쪽으로 가면 사진과 같은 터널이 보이며, 사진 기준 오른쪽에 공터와 함께 등산로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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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도 몇 차례 언급했듯, 북한산은 평범한 산이 아니라 국립공원이다. 그래서 입구에 이런 간단한 초소가 있고 밤에 '통금'도 존재한다. 하지만 저 초소는 안이 잠겨 있고 근무자는 없었다.

국민대 근처에 있는 등산로 출입구의 명칭은 '북악공원 지킴터'이다. 여느 등산로 입구처럼 '탐방 지원 센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는 않다. 아마 '탐방 지원 센터'보다는 더 간소화된(?) 시설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바로 옆에 대학교가 있다 보니..;; 네임드급 산의 등산로 출입구라고 해서 식당과 등산용품 매점이 즐비하다거나 하지는 않은 것도 이색적이었다.

아, 등산 당시의 개인 근황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을 지금까지 얘기를 안 했구나.
본인은 지금까지 거의 모든 등산을 꼭두새벽이나 그에 준하는 매우 이른 아침에 해 왔다. 조금이라도 더위를 피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등산은 점심 시간이 지난 오후 2시 무렵에 시작했다. 그 이유는 이 등산은 평범한 정규 스케줄에 근거해서 진행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4년 반이 넘게 아무 탈 없이 잘 썼던 맥북이 아무 징후도 없다가 하드디스크 케이블의 노후화로 인한 인식 + 부팅 불가라는 중대한 기능 고장을 최초로 일으켰다. 교체 부품을 주문해서 받아야 하기 때문에 당일 즉시 수리는 안 되었으며, 컴을 얄짤없이 며칠 맡겨야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애플 공인 서비스센터는 무슨 삼성이나 LG전자 서비스센터처럼 곳곳에 많이 있지 않다. 회사와 가까운 분당 소재의 센터들은 아이폰만 취급하지 컴퓨터의 수리는 되지 않아서 서울 센터들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제 며칠간 날개셋 코딩은 어차피 못 할 텐데, 맥북 없이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그 동안 몰아서 미리 처리하는 쪽으로 개인 스케줄을 재조정했다. 그래서 오전에 서비스센터를 들렀던 당일의 오후에 등산을 급히 가게 된 것이다. 본인은 노트북 PC의 고장에 대비해서 이런 식으로 시간 손실을 최소화하는 Plan B 전략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이 날은 낮 기온도 10도가 안 될 정도로 매우 추웠던 덕분에 한낮에도 무더위 걱정 없이 높은 산의 등산이 가능했다. 단지, 낮이 매우 짧아져 있어서 등산 시간에 제약이 심했던 게 아쉽다. 오후 2시도 정말 아슬아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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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악공원 지킴터'의 등산로는 이런 모양으로 시작되었다. 오르막이 계속됐다.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마지막으로 등산을 갔을 때보다 단풍은 더욱 진행돼 있었다.
나중에 갈림길이 몇 번 나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서 북악산이나 정릉 탐방 지원 센터 방면으로 빠지지 않게 주의했다. 나의 목표는 '형제봉 + 대성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기에는 심곡사· 영불사라는 절을 찾아가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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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공원 특유의 울타리 쳐진 흙길과 문명화(?)의 흔적은 영불사까지가 끝이었다. 그 뒤부터는 여느 산처럼 숲이 우거지고 비좁고 가파른 산길 산행이 시작됐다. 해발 287m에, 대성문까지 약 2.5km가 남았다는 이정표를 지난 지 얼마 안 됐다.

여기서 능선에 도달할 때까지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다. 전망대나 계곡이나 특이한 자연· 인공물 같은 거 없고, 묵묵히 산을 오르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중간에 형제봉에 근접했으며 거기로 가는 갈림길도 있었지만 본인이 못 보고 그냥 지나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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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말의 전망대 비슷한 바위가 나왔다. 여기서는 전망이 훤히 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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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울타리 쳐진 흙길이 나왔다. 여기는 벤치 하나 없고 전망대가 있는 것도 아닌데 공간이 굉장히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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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더 올라간 뒤에야.. 드디어 첫 목적지인 북한산성 대성문에 잘 도달했다.
예전에 정릉에서 북한산을 올랐을 때는 보국문에 도달한 뒤 동쪽의 대동문 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보국문의 서쪽인 대성문에 도달한 뒤, 또 서쪽의 대남문으로 갔다. 여기 고도는 이미 620m쯤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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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국-대동과는 달리 대성-대남은 거리가 무척 짧은 편이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잠시 하강만 하면 곧 대남문이며, 성곽 전방의 저 봉우리는 그 이름도 유명한 문수봉 정상이다.
허나, 등산을 너무 늦게 시작했다는 시간상의 한계(이미 오후 3시가 다 돼 감), 그리고 어차피 성곽을 따라 그대로 오르지도 못한다는 이유(안전상의 문제로 우회 등산로 이용) 때문에 본인은 문수봉은 가지 않았다. 그냥 이 사진만으로 만족한 뒤, 대남문에서 하산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는 그게 바람직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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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대남문이다. 벌써부터 태양의 고도가 극도로 낮아지는(= 날이 저묾) 게 티가 난다. 이러면 찍은 사진의 색감과 명도· 채도도 별로 안 좋고 특히 역광은 감당할 수가 없어서 풍경 사진 남기는 데는 큰 악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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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남문에서 구기동 방면으로 하산을 시작했다. 저기까지도 대략 2.5km 정도라고 한다. 처음에는 통나무 계단이 있었지만 그게 끝난 뒤부터는 흙길이 아니라 돌길이 굉장히 길게 지겹도록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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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길은 언제부턴가 계곡으로 바뀌었다(구기 계곡). 산 중턱에는 계곡을 건너는 다리도 몇 개 있었지만 물은 바짝 말랐거나 고인 웅덩이 형태로만 있었다. 하지만 아래로 계속 내려가자 그래도 나름 흐르는 맑은 물이 몇 군데 있었다.
해수욕장뿐만 아니라 이런 계곡에서 물놀이 하는 것도 좋다. 물론 국립공원들은 계곡이 죄다 민간인 출입 금지이기 때문에 저것들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추워서 콧물이 나고 손이 시려운 지경인데도 본인은 물놀이 생각을 하면서 산을 내려갔다. 몸은 별로 안 추운데 손가락 같은 말단은 어쩔 수 없이 추위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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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 탐방 지원 센터를 지나서 드디어 하산을 마쳤다. 서울 종로구 산기슭 그린벨트 지대에 이렇게 땅밟기를 하게 됐다. 여기엔 정치인들이 많이 산다는데...

버스가 다닐 정도의 큰길에 도달하니 '현대'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도 아니고 3층짜리 벽돌 빌라가 있었다. 이건 물론 고도 제한 때문에 건물을 저렇게 지은 것이지 싶다.
지도를 보니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이북 5도청'이 여기서 불과 몇백 m, 버스 한두 정거장 남짓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다. 그러나 5km가 넘는 산길을 다니고 와서 다리에 근육통을 호소하는 상태에서 선뜻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다. 또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풍경 사진을 찍기에는 이미 날이 많이 춥고 어두워져 있었다.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귀가했다. 이북 5도청을 일부러 안 찾아가고 하산길에 자연스럽게 구경하려면 구기보다 더 서쪽의 비봉 탐방 지원 센터 방면으로 하산했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구기 터널과도 꽤 가까이 있었다. 거기를 지나면 이미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나오는 은평구가 나온다.

이북 5도청을 구경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신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한국 고전 번역원은 버스 차창 밖으로 잠시 구경했다. 조선 왕조 실록은 전산화와 번역이 완료됐지만 그보다 분량이 더 방대하고 디테일한 승정원 일기는 여전히 완역이 요원한 상태라고 한다.
한편, 북한산은 비록 서울 북부의 확장을 가로막는 지형 장애물이긴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덕분에 나름 군사· 안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고 또 시민들에게 굉장히 좋은 휴식처 역할도 한다는 게 느껴졌다.

북악산, 인왕산, 남산 (, 그리고 낙산)에 있던 성곽은 한양도성이다. 그러나 북한산에 있는 성곽은 북한산성이며 성남 쪽의 산엔 잘 알다시피 남한산성도 있다.
남한산성 일대는 6· 25 때 부산이 그랬고 고려 시대 때 강화도가 그랬던 것처럼 유사시에 임시 수도 역할을 할 수 있게 행궁이 있다. 저긴 워낙 천혜의 요새이기 때문에... 실제로 병자호란이 치러졌으며 지금은 도로가 닦여서 안에 자동차가 들어갈 수 있고 심지어 마을버스까지 다닌다.

그 반면 북한산성은 발로 힘들게 등산을 하지 않으면 접근할 방법이 없으며, 군사 목적으로 건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여기서 전쟁을 치른 내력이 없다.
그러니 북한산성은 접근성이 좋은 한양도성과, 역사 내력과 유적이 풍부한 남한산성에 밀려서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것 같다. 남한산성과 비교했을 때 마치 북극과 남극, 그리고 지구형 행성과 가스형 행성의 차이를 보는 것 같다.

또한, 남한산성은 거기 유적지 일대만 도립공원인 반면, 북한산성은 그냥 산 전체가 통째로 국립공원이니 격이 차이가 있다. 뭐, 유적지 때문이 아니라 자연 환경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12 08:36 2017/02/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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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도봉산

지금까지 서울 북부의 산행은 지난번의 북한산, 그리고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수락산· 불암산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다. 북악산은 북부라고 치기에는 생각보다 '덜' 북쪽이고.
수락산은 지하철 접근성이 좋으며 나름 두 번이나 다녀온 적이 있지만(각각 수락산, 당고개에서 출발), 그때는 산들의 특성 내지 등산 계획 수립 요령에 대해 지금 같은 지식과 노하우를 갖추지 못한 초창기였다. 그래서 정상까지는 안/못 가고 모두 중턱에서 내려왔다. 그때는 둘레길과 등산로의 차이도 모르던 정말 초짜 시절이었다.

가을은 날씨가 안 덥고 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시기이니 가히 등산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매니아들 중엔 아예 날 잡아서 멀리 지리산, 설악산 등으로 원정 가는 사람도 있다. 등산이 마냥 중장년 아재들의 전유물 취미이기만 한 것도 아니어서 가끔 보면 내 또래의 젊은 사람, 심지어 여자분도 있다.
이런 와중에 본인은 삼성산 다음으로는 지금까지 의외의 미개척 상태였던 도봉산을 다녀왔다.

도봉산은 북한산의 이웃에 있는 별도의 산이지만, 여기도 여전히 북한산 국립공원의 일부이다. 그래서 북한산처럼 시설이 잘 돼 있으며 경치도 매우 아름답다. 그 대신 입산 시간대가 제한되며, 쓰레기를 무단으로 버리거나 허용 등산로를 이탈해서 다니다 걸리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이런 점에서 도봉산은 건너편의 수락산과는 급이 좀 다르다.

도봉산이 같은 국립공원인 북한산과 다른 점으로는 성곽이나 무덤 같은 건 없고 사찰이 더 많이 있으며, 전철 접근성이 훨씬 더 좋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는 지리적으로 서울의 북쪽 끝인 관계로 근처에 근처에 시내버스 차고지가 있음과 동시에 지하철도 잘 알다시피 7호선의 종점과 도봉 차량 기지가 있다.
도봉산 역은 강릉의 정동진과 위도가 거의 같은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상 철도 2개가 평행하게 만나는 관계로 이 역은 그냥 1호선 역과 7호선 역 두 채가 나란히 놓인 형태이다.

철덕으로서 지하철 답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등산을 위해서 도봉산 역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역의 동쪽에는 '서울 창포원'이라는 야외 식물원이 있다. 반대로 국도 3호선을 횡단하여 서쪽으로 1km 남짓 걸어가면 국립공원 출입구가 나오고 등산로가 시작된다.
처음에 '도봉 탐방 지원 센터'가 나오고 그 다음 '북한산 국립공원 도봉 분소'에서 길이 본격적으로 갈린다. 북한산 둘레길도 있고 도봉산 등산로도 두 군데가 존재하는데, 본인은 은석암 방면으로 등산해서 도봉 대피소+도봉 계곡 방면으로 하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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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길은 여느 산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한참 산을 오르다가 커다란 바위가 나오기도 하고, 하늘이 간간이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여기 말고 하산길이 국립공원답게 훨씬 더 잘 닦여 있었다.
은석암은 말 그대로 암반이기 때문에 손으로 줄을 잡고 바위를 올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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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턱쯤에 도달하자 시야가 탁 트이고 산 아래가 그럭저럭 보이기 시작했다. 도봉산 전철역이 보이고, 저 멀리 도봉 차량 기지도 보였다. 주변의 외곽 순환 고속도로와 이웃의 수락산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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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사는 아닐 테고 아마 천축사가 아닌가 추정되는데.. 산 속 저 높은 곳에 저렇게 절이 하나 떡 놓여 있는 게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눈에 들어온 풍경이 가히 장관이었다. 그에 반해 여백이 부족한 건.. 아니고 카메라가 시야각과 색감이 부족하다.
본인은 뺑 돌아서 한참을 더 걸은 끝에 저 절이 있는 봉우리까지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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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커다란 봉우리 등장~! 그 뒤 등산 난이도도 덩달아 올라갔다.
장갑을 안 가져갔는데 로프를 잡은 손 내지 발을 딛고 있는 신발 바닥이 미끄러지면 어떡하나 겁이 나는 상황이 몇 번 있었다. 실제로 도봉산은 가까운 과거에 인명 사고가 발생한 적도 있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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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서 낮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인제 하늘이 좀 파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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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은 여러 개의 바위 봉우리들이 제각각 정상을 구성하고 있으며, 다른 산들과는 달리 봉우리 위에 딱히 정상 표지석이나 국기 같은 건 없었다. 최고봉을 등반 가능한 건 아니며, 등산객이 접근 가능한 가장 높은 봉우리는 신선대였다. 군사 시설 때문이 아니라 그냥 안전 때문에 최고봉에 못 가는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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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의 바로 옆에도 이런 돌무더기가 있었는데.. 크기를 짐작케 할 만한 레퍼런스가 없다시피하구나. 옆의 나무들을 보고 짐작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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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주변에도 온통 높은 산과 봉우리들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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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당초 계획은 오봉도 가까이에서 구경하고 양주나 못해도 송추· 의정부 방면으로, 산을 횡단하여 서울에서 더 먼 쪽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삼성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정작 정상에 도달하고 나니 지도의 묘사와 지금 위치가 씽크가 되질 않았다.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어서 길이 있는 곳으로만 내려가니까 결국은 서울 방면으로 되돌아가게 됐다.

단풍으로 물든 숲은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여기가 내가 올랐던 길보다 단풍이 더 든 것 같았다. 그리고 산 기슭보다 중턱이 붉은색이 더 짙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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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에서 봤던 계곡이 여기에도 있었으며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정오에 근접하자 이제야 이쪽으로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많이 보였다.

도봉산에 대한 종합적인 평을 하자면 등산 시설을 제외한 인공물이 매우 드물고, 북한산과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산 같다. 북한산은 어느 등산로든 지하철만으로 접근하기는 어려워서 버스가 필요한 반면, 도봉산은 국립공원으로서는 나름 역세권이기까지 한 게 좋다. 수락산, 청량산, 아차산 등 지하철 역세권인 산들 중에서는 가히 최고의 퀄리티가 아닌가 싶다. 등산기 두 편을 글 한 편에다 묶으려고 했는데 도봉산은 분량이 길어져서 또 단독 게재를 하게 됐다.

* 여담: 국립공원 이야기

자연 보호를 목적으로 근대적인 국가 제도 하에서 도입된 세계 최초의 국립공원은 미국의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이라고 한다. 요세미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구나. 어쨌든 미국이 최초이긴 하다. 'national park'라는 제도가 우리나라에 첫 도입된 건 1967년이어서 올해로서 딱 반세기가 지났다고 한다.
영예의 제1호는 지리산이며, 그 뒤로 국립공원은 대부분 네임드급 산들의 독식무대였다. 설악산, 한라산, 속리산, 주왕산, 계룡산, 오대산 등.
그렇기 때문에 이쪽 사정은 산악인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서울의 북한산은 1983년에 비교적 '늦게' 지정된 거라고 한다.

하지만 산만 있는 건 아니어서 남해의 한려해상 국립공원도 있으며 충남 태안 역시 해안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경북 경주시는 건물 지으려고 땅만 팠다 하면 문화재가 도깨비 방망이 두들기듯이 출토되는 특수성이 감안되어, 토함산, 남산과 일대 시가지 약 137제곱km가 국립공원으로 그것도 무려 1968년부터 지정됐다.
도시형 국립공원이란 건 경주가 전국적으로 유일무이한 사례이다. 여기에 사는 경주 시민은 법적으로는 국립공원에서 사는 셈이다. 경부 고속도로에서도 경주 근처에 '경주 국립공원' 운운하는 표지판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허나, 국립공원에서 산다고 실생활에서 별로 좋을 건 없다. 오히려 문화재 보호와 도시 미관 유지 명목으로 개발 제한에 고도 제한 같은 규제가 어지간한 그린벨트 이상급으로 걸리는 게 더 많기 때문이다. 지주의 입장에서는 재산권 행사에 애로사항이 꽃핀다.
미국의 워싱턴 D.C.에서는 모든 건물이 백악관보다 낮은 층수로만 지어져야 한다던데 그런 게 고도 제한이다. 그리고 작년에 지진 피해를 많이 입었던 황남동 일대는 전통 보존 운운하면서 주택은 반드시 기와집으로 올려야 한다는 게 법으로 규정돼 있었다. 그런 식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1/25 19:39 2017/01/25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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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예봉산, 삼성산

1. 예봉산

북한산 백운대 다음으로 본인이 찾아간 산은 남양주에 있는 예봉산이었다. 언젠가 한번 방문하려고 오래 전부터 점찍어 둔 산이었다.
예봉산은 한강을 사이에 두고 검단산을 마주보고 있으며, 해발 683m로 검단산과 비슷한 높이이다(검단산보다 약~간 더 높음). 그리고 예봉산은 주변에 예빈산, 운길산, 적갑산 같은 봉우리들이 있어서 산맥을 구성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반 년쯤 전에 검단산을 올랐을 때는 뿌연 안개 때문에 아래를 전혀 내려다보지 못했다. 한강이고 뭐고 하나도 안 보였다. 그래서 다음에는 강 건너편의 예봉· 예빈산 일대를 올라서 거기서 경치 구경을 다시 하려고 마음먹었으나.. 사실 이번에도 너무 이른 아침에 올라서 그런지 경치가 막 선명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다. 뭐, 그래도 한강을 내려다보겠다는 목표 자체는 그럭저럭 성취했다.

예봉산까지 무슨 교통편을 이용해서 갈지가 문제였다. 일단 산이 경의중앙선 팔당 역과 가까이 있긴 하다. 하지만 완전 가까운 건 아니고 몇백 m를 지나서 굴다리 밑으로 지난 뒤, 또 몇백 m를 걸어 올라가서 각종 마을과 유원지를 지나야 등산로 입구가 나온다. 직선거리가 아닌 실제 이동 거리는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등산로 근처까지 마을버스가 다니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 대신 로드뷰를 통해 등산로 입구 근처에 차를 세울 만한 넓은 공터가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 점을 감안하여 본인은 여기는 차를 가져가기로 마음먹었다. 차를 가져가면 알다시피 산을 편도 횡단을 할 수 없어지고 이동 경로에 큰 제약이 걸린다(차가 있는 곳으로 반드시 되돌아와야 하므로). 그걸 감수하고도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

서울 동부에서 저기로 가려다 보니 지난번 검단산에 갈 때처럼 하남 시내를 저절로 거쳐 가게 됐는데.. 팔당대교 진입로는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배배 꼬여 있었다. 그냥 직진만 하면 될 것 같은데 오른쪽으로 꺾었다가 P턴을 하고 뭔가 굉장히 골치아프게 돼 있었다. 그리고 양평으로 가는 국도 6호선(경강로)과, 팔당 역 경유 남양주로 가는 길(팔당로)은 같이 나란히 지나는 듯해도 서로 왕래가 불가능했다. 팔당대교에 있을 때부터 어느 길로 들어갈지를 결정하고서 빠져나가야 했다.

요컨대 팔당대교는 진입과 진출이 모두 좀 이상한 구조였다. =_=;; 뭔가 이렇게 된 사연이 있는 것 같다.
뭐 아무튼 현장에 도착은 잘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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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인터넷을 통해 미리 봐 놓은 공터이다. 본인은 등산 전날 밤에 정확하게 이곳에 미리 도착해서 차를 세워 놓고 캠핑을 했다.

밤이 되니 밖은 기온이 거의 10도 무렵까지 뚝 떨어졌다. 또한 주변은 가로등 포함 불빛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칠흑같이 어두컴컴했다.
그에 반해 차 안은 따뜻하고 아늑하기 그지없었다. 자동차 덕분에 이런 오지에서도 안전하고 편안하게 외박을 한다는 게 참 놀랍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차 안도 온기가 언제까지나 유지되지는 못하기 때문에 드디어 싸늘해지고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는 미리 준비해 간 담요를 뒤집어쓰기만 하면 됐다. 이튿날 아침이 되니 온도차 때문인지 차의 창문들은 온통 성에가 껴 있었다. 밖에서 차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은폐 효과까지 덤으로 달성됐구나.

아침 7시 무렵, 해가 뜨자마자 본인은 곧장 산을 올랐다. 정상까지 갔다가 차를 세워 둔 이 마을로 돌아오긴 하되, 그래도 갈 때와 올 때의 경로 자체는 다르게 경로를 구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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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봉산은 직전에 갔던 북한산에 비하면 정~말로 특징 없는 마이너한 산이었다.
계곡이나 암반 같은 자연 분야로나, 보안 시설이나 묘지나 역사 유적 같은 인간 분야로나.. 특이사항이라고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등산로 자체는 그럭저럭 닦여 있지만 계단이나 안내 표지판, 벤치, 난간 같은 것도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보다시피 인제 여기에 난간 하나 설치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전망대도 없어서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한강 경치고 나발이고 뭐 없었다. 그냥 비탈길 따라 끝없이 올라가고 내려가는 게 전부였다. 손이 필요한 구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다리 트레킹만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 높이와 규모의 산이 이 정도로 밋밋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이렇게 마이너하고 한적하고 덜 유명하니까 검단산보다도 훨씬 한산하고 주차 걱정도 없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공원인 북한산이었으면 저렇게 공터에 아무렇게나 차 달랑 세우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히 유료 주차장에다 차를 대야 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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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80분 동안 낑낑댄 끝에 정상에는 별 문제 없이 도달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는 관계로 타이머를 이용해 이렇게 내 모습을 남겼다.
아 그러고 보니 맥북을 챙기는 걸 깜빡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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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은 팔당 역 쪽으로 가긴 하지만 그래도 올라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했다. 인제 슬슬 산 정상으로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는 그래도 계단이 쭉 깔려 있고 중간에 한강 방면의 전망대도 딱 한 군데 있어서 등산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 건너편의 저 높은 산이 바로 검단산이다. 또한, 팔당대교와 희고 길쭉한 팔당 역도 선명히 보인다. 나머지 울창한 숲과 나무, 등산로 계단 장면은 그렇게 특별한 게 없으므로 첨부를 생략하겠다.

하산하면서 좀 걱정은 했다만, 마을 어귀에 있는 팔당2리 마을회관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차를 세워 놓은 쪽으로 몇백 m를 걸어서 차에 무사히 잘 도달했다. 차는 4시간 가까이 주인을 기다리며 잘 세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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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엔 팔당 역의 바로 옆에 있는 남양주 역사 박물관을 구경했다. 남양주에 무슨 특별한 역사 유물이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산대놀이, 묘비 글씨 탁본, 기와 무늬, 바느질 무늬 같은 것들이 전시돼 있었다.

아침 시간이 되니 역 주변에는 등산객과 자전거족들이 많이 서성이는 게 보였다. 이렇게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2. 삼성산

2016년 한 해 동안 서울 근교에 있는 어지간히 높은 산들은 다 오른 듯하다. 점찍어 둔 산이 두어 곳 정도 더 남았는데, 지금까지 관악산 일대의 서울 남서부를 못 간 상태였다.
관악산 자체는 예전에도 몇 번 간 적이 있기 때문에 예봉산의 다음으로는 더 서쪽에 있는 '삼성산'을 선택했다.

차를 가져가지 않고 전철을 1시간을 훌쩍 넘게 타서 안양까지 이동했다. 서울 방면은 전철역에서 버스를 타고 한참을 남쪽으로 또 가야 산에 접근 가능한 반면, 안양 방면은 전철역 + 국도 1호선 대로변에서 비교적 가까이에 등산로가 시작되는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싸한 산 입구나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니라 그냥 큰길에서 등산을 시작했다는 점에서는 예전에 성남 남동부의 불곡산을 올랐을 때와 비슷하다. 본인은 관악 역에서 내려서 등산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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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는 이렇게 흙길과 바위가 적절히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나무로 덮여서 하늘이 잘 안 보이는 곳과, 하늘이 뻥 뚫려 보이는 곳도 종종 교차되는 편이었다. 이 산에서 하늘이 중요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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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일대는 비행 항로이기 때문이다. 비행기들이 하늘 위로 정말 많이 지나갔다. 이것까지 이미 다 예측하고 비행기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 갔다.
비행기를 관찰하려면 엔진 소리가 나는 바로 그쪽을 봐서는 안 됨. 소리 근원지보다 소리의 진행 방향으로 한 발 더 나아간 쪽을 봐야 한다는 게 무척 신기했다. 그 이유는 두 말할 나위 없이 소리가 여기까지 전해지는 데 딜레이가 있으며, 그 동안에도 비행기는 앞으로 더 나아가기 때문이다. 굳이 비행기 자체가 초음속기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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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어느 정도 오르자 드디어 탁 트인 landscape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거 보는 게 등산의 묘미다.
주변 경치가 전반적으로 이러했다. 여기저기 봉우리가 솟아 있고, 푸른 풀숲에 부분적으로 황금빛 단풍이 물든 게 색깔 배합이 내가 보기엔 경이로움이 느껴질 정도로, "정말 아름다웠다."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게다가 이 날은 등산 가기도 아주 좋은 날씨였다. 직사광선 없이 흐리고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었다. 이런 날 등산 같은 활동을 안 하는 건 자연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 같을 지경이었다.

아, 위의 사진의 중앙 우측에 있는 건물들은 안양 예술 공원이라는 유원지이다. 내가 나중에 저쪽으로 하산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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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 이 사진은 호락호락 쉽게 찍은 사진이 아니다.
평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한 바위에다 카메라를 최대한 바른 구도로 놓은 뒤, 타이머 셔터를 눌러 놓고 허겁지겁 저 포즈를 취해서 혼자 찍은 것이기 때문이다. 저 땐 바람도 꽤 세게 불고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카메라가 균형을 잃고 바위 아래로 굴러떨어질 수도 있었다. 아무래도 삼각대가 필요한 듯.
그래서 그런지 내가 그렇게 밝은 표정으로 찍히지는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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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 교육 대학교가 내려다보였고, 저 멀리 KTX 광명 역도 보였다~! 등산 가서 고속철 철도역을 볼 줄이야.. 땡잡았다.
역 주위로도 온통 고층 아파트가 지어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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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들은 국내 인터넷 지도로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물건일 것이다. 저 거대한 둥근 원판은 군사 시설이기라도 한지 뭔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서울 강남 서남부에 무슨 성곽이 있을 리는 만무한데 저 봉우리는 왜 철책이 둘러져서 반토막이 나 있는 걸까? 저기는 산의 과반이 예비군 훈련장 등 군사 시설로 싹 봉인돼 있는 박달산이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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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산의 사실상의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국기봉에 잘 도달했다. 이름에 걸맞게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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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봉 정상 근처에서는 삼막사라는 절이 내려다 보였으며, 여기에서 몇백 m 정도 떨어진 곳엔 삼성산의 실제 정상이 보였다. 실제 정상에는 건물과 철탑이 있으며, 아무래도 일반인에게 개방된 것 같지는 않았다.
저기가 국기봉보다 약간 더 높긴 하지만 그래도 몇 미터 차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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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 도달한 뒤 내 의도는 북서쪽으로 진행해서 호암산 쪽으로 하산하는 것이었다. 안양 방면과 관악산 방면을 모두 등지고 하산하려 했으나.. 산에 실제로 있어 보면 방향 감각을 거의 유지할 수 없더라..;; 결국은 삼성산과 관악산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섰고 서울대 수목원과 안양 유원지(예술 공원)로 착지하게 됐다. 삼성산의 서울 방향에 무슨 천주교 묘지 공원도 있다고 들었으나 그런 건 전혀 구경 못 했다.

여기도 경치가 아주 아름다워서 온 보람은 있었다. 단지 하산 후에도 버스 정류장까지 엄청난 거리를 걸어야 했을 뿐.;;
흐음 어쩌다 보니 삼성산 사진이 예봉산 사진보다 훨씬 많아져 버렸다. 높이는 예봉산이 더 높은데 아무래도 삼성산이 특이사항이 더 많아서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24 08:38 2016/11/24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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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으로부터 계속됨)
그 다음으로는.. 한국어 정보 처리· 전산화 분야의 1세대 숨은 원로이며 올해 초에 작고하신 고 박 동인 부장을 회고하고 추모하는 순서가 있었다.
이분은 공식적인 최종 학력은 의외로 그냥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사가 끝이지만, 업계에서의 실력과 짬은 석박사급 연구원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였다. 주변으로부터 "대학원 가서 학위 좀 받지?" 권유도 받았지만 자기는 그냥 현장에서 '부장' 호칭으로 불리는 게 좋다면서 사양했다고 한다.

박사 학위 없는 사실상의 박사 포스인 게 철도계로 치면 30년간 열차 시각표 외길만 간 김 영근 씨 같은 인상이 느껴진다.
2014년 한글날엔 국가로부터 공로 표창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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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분을 대학원 코스웍 재학 시절에 교수님이 특강 강사로 초청하신 덕분에 알게 됐으며 나름 같이 얘기도 나눈 적이 있다. 알다시피 본인은 옛날 이야기를 좀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으로 도입되던 시절이 어떻고 성 기수 박사가 어떻고 글자판이 어떻고 하면서 맞장구를 치고 관련 질문을 하자 그분도 굉장히 놀라고 대단해하고 내 나이를 궁금해하셨다. "자네 대전으로 내려와서 살아도 괜찮으면 ETRI에 입사하는 거 어때?" 이런 말씀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셨다. ㅎㅎ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인이 박 부장님을 대면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이분은 전공과 학벌은 보다시피 박 근혜 대통령과 동일하지만, 외모와 인상은 대조적으로 문 재인 씨와 아주 비슷했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어째 고인의 생전 모습 사진 한 장을 제대로 구할 수가 없나 모르겠네.. 어쨌든 그렇다. 나이도 1952~53년생 연배로 거의 일치함.

추모 세션이 끝난 뒤엔 학술대회하고 나란히 개최된 올해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의 시상식이 있었다. 내가 참가했던 2011년 당시보다 대회 진행이 더욱 체계적으로 잘 바뀌어 있었다. 대회 측에서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성능을 측정해서 순위가 매겨지게 진짜 '경진대회'처럼 바뀌었으며, 분야가 이런 지정 과제와 자유 공모로 딱 이원화됐다. 단, 상은 여전히 두 분야를 통합해서 주더라.

이로써 학회의 첫째 날 일정이 저녁 7시쯤에 모두 끝났다. 주최 측에서 근처 식당에서 쇠고기 전골과 육회 요리로 만찬을 제공했기 때문에 밥을 맛있게 먹었다. 본인은 일행이 전혀 없는 관계로 어디에 앉을지가 좀 난감한 상태였는데.. NC 소프트에 재직하면서 동시에 대학원도 다니고 있어서 나처럼 박사 수료 상태인 어떤 여자분과 얘기를 나누며 저녁을 먹었다. 이분도 나와 비슷한 처지에서 논문을 투고했으며, 나중에 알고 보니 논문 발표가 나하고 같은 세션에서 나의 바로 다음 차례였다. 기막힌 우연이군.

식사를 마친 뒤엔 난 다시 혼자가 됐다. 이 날은 어제와는 달리 숙소 안 잡고 (1) 노숙하거나 (2) 24시간 영업하는 가게(PC방, 패스트푸드점, 카페 따위) 에서 버티거나 정말 춥고 피곤할 때에만 (3) 찜질방 정도에나 가려고 생각해 둔 상태였다.

어제 해운대 해수욕장에 갔으니 오늘은 그 다음으로 유명한 광안리 해수욕장으로 갔다. 광안리는 해운대만큼이나 지하철 2호선 역에서 비교적 편하게 접근 가능했으며, 21세기 부산의 명물이라는 광안대교가 전방에 보이고 경치가 멋있었다. 단, 모래의 품질은 해운대보다 못해서 자갈이 종종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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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들은 이튿날 아침에 찍은 것임)

여기서 돗자리를 깔고 누워서 뒹굴면서 바다와 교감을 했다. 본격 신선놀음 모드. 해변의 구석진 곳에 가서 진짜로 여기서 잠까지 잘 생각도 했으나..
부슬부슬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새벽 1시 반쯤부터는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근처의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비를 피하고 있다가 결국 근처에 24시간 영업을 하는 카페에서 이튿날 아침 6시까지 버텼다. 이렇게 하루를 보냈다.

차를 가져갔으면 전천후 이동식 텐트가 있으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런 상황에서 숙박 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자기기 충전은 해결할 수 없으며, 기름값과 톨비 깨지고 어딜 가나 주차비를 뜯겼을 테니 부산 정도는 이렇게 자는 게 더 낫고 마음이 편했다.

※ 토요일(10/8): 학회, 부경 대학교 석당 박물관, 용두산 공원+부산 타워, 국제/자갈치 시장

오늘은 드디어 논문 발표 세션이 있었다. 본인은 아침 9시에 제일 먼저 하기 때문에 서둘러 학교로 돌아갔다.
13년 전의 동일 학회에서는 금요일 오후부터 논문 투고자의 발표 세션이 곧장 시작됐고, 토요일에도 점심을 먹은 뒤에까지 세션이 이어졌다. 그 당시에 당장 내 논문의 발표가 토요일 오후 제일 끄트머리였기 때문에 교수님이 "니가 발표할 때쯤엔 사람들이 다들 가고 별로 없겠다" 그러실 정도였다(그리고 실제로 그러했던 걸로 기억. -_-).

허나 그 사이에 절차가 많이 간소화됐는지 지금은 토요일 오전에 발표 세션을 몽땅 몰아서 진행하는 걸로 바뀌었다. 그 대신 세션이 무려 4개가 동시에 진행된다.
어째 개수를 맞췄는지 논문이 총 64개가 투고됐으며, 구두 발표가 절반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우린 이런 실험을 했소" 통계와 결과 나열이기만 해서 굳이 구두 발표가 필요하지 않은 논문은 포스터 발표로 대체했는데, 이게 나머지 절반이었다. 논문 투고자들이 원하는 발표 형태가 처음부터 감쪽같이 32/32로 나뉘지는 않았을 텐데 중간 조정이 있었지 싶다.

나는 뭔가 발표나 강의를 할 때 비록 말하는 속도가 여전히 너무 빠를지언정, 시간은 그리 초과되지 않고 그럭저럭 지키는 노하우를 오랜 시행착오 끝에 터득했다. 이런 연구를 왜 했고 논문의 초 핵심 본질만 요약하는 한편으로, 논문에서 분량상 차마 다루지 못한 보충 설명 위주로만 발표를 했다. ppt는 14장이고 사실은 지금까지 탱자탱자 놀다가 ppt 자체를 전날 밤에 카페에서 급조해서 준비했다. -_-;;

나는 그럭저럭 후회 없이 말을 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아들었을지는 별개의 문제이다.
1인당 발표 시간은 15분에 불과하다고 공지가 됐을 텐데 다른 분들은 최하 20장 이상에 30~40장짜리.. 이거 무슨 30분에서 1시간 분량으로 자기 연구의 모든 것을 미주알고주알 소개하는 강의 자료를 가져오신 경우가 많았다.
난 14장짜리 ppt로도 15분에 간신히 맞춰서(약간만 초과해서) 발표를 마쳤는데도 말이다.

본인은 어쩌다 보니 한글 입력기와 글꼴 같은 글자 단위의 입출력 기술 관련 연구를 계속하게 됐다. 내 최대의 관심사는 "한글이니까 가능한 고유한 활용 방법을 개척하는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명백하게 언어정보학 내지 언어공학의 범주에 든다. 그게 아니면 다른 카테고리를 붙일 여지가 없다.
순수하게 전산학이나 컴공의 영역도 아니고, 순수하게 언어학이나 산업디자인의 영역도 아님. 저 바닥엔 난 독자적인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고 논문 쓸 거리도 더 있다.

허나, 언어공학을 한다면서 정작 인공지능에 통계, 빅데이터, 머신 러닝 어쩌구 하는 분야는 난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으며 딱히 전문가도 아니다. 내가 자동차나 철도 공학에 관심만 많지 그쪽으로 딱히 전문가가 아닌 것만큼이나 저쪽도 막 전문가가 아니다. 내가 창작한 프로그램과 논문들은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라는 범주에는 들지만 뭔가 '주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니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교수님들도 잘 모르고 생각 못 한 기괴한 주제로 논문을 쓸 거니까 뭐 시간만 주어지면 졸업이야 별 문제 없이 하겠지만, 이렇게 학위 받아서 내 논문의 연구 분야를 주제로 일자리 수요가 있을지, 취업은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이런 약간의 어두운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나 "걱정한다고 해결되지 않을 고민 할 시간에 날개셋 코딩이나 한 줄 더 해라"라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극복하기로 했다.

나 말고 '비주류' 주제 연구는 사실상 딱 하나 더 있었다. 숭실대에서 한글 메타폰트에 대해서 연구 발표를 했는데, 흥미롭게도 이 역시 본인과 동일한 세션에 있었다.
오전엔 이런 식으로 내 논문 발표 후에는 남들 발표를 듣고 포스터를 보는 걸로 시간을 보냈다.

학회에서는 먼저 가 버리지 말고 논문 발표를 끝까지 듣고 귀가하라는 취지에서, 세션이 다 끝난 뒤에 점심 식권을 배부했다. 덕분에 점심도 우동 스타일의 만두국으로 든든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학회가 완전히 끝났고, 본인은 오후에 계획했던 주변 관광을 시작했다. 그런데 비가 아침에 좀 그치나 싶었는데 낮부터 또 빗줄기가 굵어졌다. 본인은 열차의 선반에 올리기도 어려울 정도로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왔지만, 돗자리와 담요는 챙겼어도 우산은 가져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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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비도 피할 겸 먼저 학회장 바로 옆에 있는 석당 박물관부터 관람했다. 건물도 근대 문화재급인데 안에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기와, 토기, 인물화· 풍경화 등 고미술품과 과거 유물이 많이 전시돼 있었다.
연세 대학교는 일부 건물이 구한말 때 지어져서 근현대 문화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도 나름 건립 배경은 다르지만 그에 준하는 옛날 건물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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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물 밖에 있는 부산 전차도 가까이에서 구경했다. 원래 이 시간대엔 내부도 개방하지만 비 때문에 이번엔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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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학교 밖으로 나와서 비를 맞으면서 용두산 방면 동쪽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영락 교회라고 크고 역사가 길고 유명한 듯한 교회 예배당을 지나쳐 갔다.
용두산 공원 진입로와 부산 타워가 가까이 보일 무렵에 '부산 근대 역사관'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보수산에서 관람했던 '부산 광복 기념관'과 비슷한 컨셉으로 반일 항일 테마인 박물관이었다. 여기에도 응당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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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런 곳이었다. 부산이 항구 무역 도시이니만큼 일제의 경제 침탈을 더욱 부각시켜 설명해 놓은 게 인상적이었다.
아, 해방 후 얘기도 없지는 않음. 안에는 부산 전차를 비롯해 옛날 부산 시내와 상점들을 재연해 놓은 곳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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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이 남산에 타워가 있다면, 부산은 용두산에 타워가 있다. 하지만 용두산은 높이가 50여 m에 불과한 아주 낮은 언덕일 뿐이기 때문에 캐리어 끌고 도보로도 큰 부담 없이 쓱싹 정상까지 오를 수 있었다. 서울 남산 같은 케이블카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부산 타워도 높이나 크기면에서 서울 남산 타워에 비할 바는 못 된다. 부산 타워는 그냥 하얀 등대 컨셉이며, 서울의 것과는 달리 전파 송신 기능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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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옆엔 웬 공터와 정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어둑어둑하고 비 오는 날 공원이나 산 속 정자에서 혼자 누워서 비를 피해 자거나 코딩하는 것을.. 바닷가에서 뒹구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여기서 좀 쉬다가 입장료를 내고 타워를 올랐다. 본인 주변엔 온통 중국과 일본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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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에서 영도 쪽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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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 시장 쪽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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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건 자갈치 시장 방면이다. 본인은 타워에서 내려온 뒤엔 이쪽으로 직접 답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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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있는 다리가 영도대교이다. "매일 오후 2시 정각~15분, 도개 중엔 차량 진입 금지"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시간대가 안 맞아서 실제로 다리를 들어올리는 모습은 못 봤다.
본인은 몇 년 전에 해양 대학교로 가느라 바로 저 영도대교를 건넌 적이 있었을 텐데 그때는 지금 같은 부산 지리 감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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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도 노량진 수산 시장이 있으며 본인은 몇 번 가 봤다. 허나 부산은 아예 바다를 낀 항구 도시이니 수산 시장의 규모가 서울을 능가할 수밖에 없다.
'자갈치'는 과자 이름이기만 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원전이 따로 있더라. 또한, 저 캐치프레이즈는 "왔노라, 보았노라, 질렀노라"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시저가 남긴 말의 원래 뜻은 우리말로 치면 "나 왔음. 봤음. 이김."처럼 극도로 간결하고 시크한 뉘앙스일 뿐인데 번역 과정에서 '-노라'라는 종결어미가 동원되면서 필요 이상의 간지가 추가된 것에 가깝다.
갈매기 모양의 상점 본건물을 가까이에서 본 모습은 굳이 여기에 사진을 또 첨부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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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어는 개인적으로 얼마 전에 먹어 봤기 때문에 부산에서는 특별히 광어에 준하는 우럭을 선택했다.
예전에 해수욕장 투어를 하면서 식당에서 코스 요리도 먹어 보고 그냥 회덮밥도 먹어 봤으니, 이번에는 포장만 해서 먹어 봤다.

밖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데 우산 쓰고서 청승맞다면 청승맞은 모습으로 회를 혼자 열심히 "쳐묵쳐묵" 했다. 정말 꿀맛이었다. 돼지도 그렇고 광어나 우럭도 그렇고, 외형이 못생긴 편인 동물들이 살은 아주 맛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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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하면서 식사를 했다.

허기를 달랜 뒤 북쪽으로 가서 국제 시장 일대를 더 돌아다니려 했으나, 비가 계속 많이 오고 길거리가 예상 이상으로 차와 사람들로 굉장히 혼잡한 관계로, 계획한 것만치 많이는 못 다녔다. 안 그래도 날이 빠르게 어두워져서 사진을 찍기 더 힘들어지기도 했다.

해수욕장에서 더 놀자니 비가 계속 내릴 뿐만 아니라, 돗자리가 양면에 모두 흙이 너무 많이 묻어서 더는 무리였다. 김해 경전철 시승을 하자니 여기서 지리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동선이 안 맞았다. 사실, 비 내리는 한낮이라면 편안히 이동하면서 비 내리는 차창 밖을 구경할 수 있는 김해 경전철 시승도 나쁘지 않은 관광이긴 했을 텐데 말이다.

이것저것 고민 끝에 당초 계획보다 일찍 고향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갔는데 경주를 들르는 건 자연스러운 동선이니까. 다만, 지금 생각해 보니 부산에서 이 정도로 역사 안보 관광을 했는데 UN군 묘지 공원을 미처 못 들른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부산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부전 역에서 내렸다. 여기서 꽤 오랫동안 머물면서 폰과 컴퓨터를 충전했다. 역에서 자체적으로 아예 벽면 콘센트에다가 멀티탭을 연결해 놓고 "필요하면 전자기기 충전하고 가세요"라고 친절하게 써 붙여 놓아 있었다.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졌지만 복선전철로 탈바꿈한 동해남부선의 모습을 얼추 확인할 수 있었다. 선로를 복선으로 폭을 확장하려다 보니 시내 접근성을 희생하고 선로가 바다 구경을 할 수 없는 곳으로 많이 이설됐다. 대표적으로 (신)해운대 역은 바다와는 완전히 동떨어졌고 오히려 군부대가 가까이 있는 산기슭으로 이사 갔다. 경춘선 강촌 역과 비슷한 꼴이 났다. 얘도 이름과는 달리 이제 전혀 강 근처에 있지 않으니 말이다.

리모델링된 역들은 무궁화호가 서는 저상홈 승강장과 전철이 서는 고상홈 승강장이 수평으로 나란히(수직· 앞뒤가 아니라) 생겼는데, 신기한 것은 같은 역이 무궁화호 승강장에 적힌 역명과 전철 승강장에 적힌 역명이 서로 다른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가령, 전자는 수영 역인데 후자는 센텀 역, 그리고 전자는 그냥 해운대인데 후자는 신해운대. 궁극적으로는 전철역명으로 변경할 거라고는 하는데 그럴 거면 옛 역명으로 간판을 만들기는 왜 만들었는지가 의문으로 남는다.

2015년쯤부터는 동해남부선이 완전히 신선으로 이설돼서 지금의 서경주· 경주 역도 다 없어지고 신경주 역이 일반열차까지 취급하게 될 거라고 하는데 2016년 말인 현재까지도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도 동남권 '부울경'에 철도가 앞으로 많이 바뀔 예정이니 느긋하게 지켜볼 생각이다.
얼마 안 있어 동해남부선 광역전철이 개통하면 임랑이나 일광, 송정처럼 부산 북부에 교통이 더 불편한 곳에 있는 해수욕장들도 찾아가기가 더 수월해질 것이다.

경주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는 오랜만에 KTX를 이용했다.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저렇게 차선 곳곳을 틀어막고 공사 중인 걸 보니 주말에 고속버스를 탔다가는 왕창 막힐 것 같아서였다.
비록 철도 노조가 파업 중이긴 하지만 코레일도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사람이 부족하다 해도 회사에 돈을 압도적으로 제일 많이 벌어 주는 cash cow 효자인 KTX는 그야말로 최하 우선순위로 감축될 것이다. 게다가 입석 승객까지 넘쳐나는 일요일 오후에 상행은 감축 같은 건 절대 없다고 봐야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열차를 기필코 굴릴 것이다.

사실, 대전· 대구 시내 구간이 개통한 지도 1년이 넘었는데 그 뒤로 KTX를 타 보는 게 처음이었다. 열차는 대구 시내를 벗어나자 곧장 지하 터널로 들어갔으며, 대전 근처에서도 옥천에서부터 천천히 가는 게 아니라 또 터널로 들어가서 곧장 판암 IC까지 직통으로 달렸다. 예전에 비해 느리게 달리는 구간이 확실히 줄었다.
서울에 도착하니 이거 뭐 날씨가 싹 바뀌었다. KTX를 탄 게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계절이 다른 나라로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학회가 1주일만 늦게 열렸어도 해수욕은 못 할 수도 있었겠다.

이렇게.. 논문 쓰느라 코딩 시간을 빼앗기고 좀 힘든 나날을 보내긴 했지만, 덕분에 부산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고 왔다. 2003년엔 대전에 있다가 서울을 갔다 왔지만, 2016년엔 서울에 있다가 부산을 다녀 왔다.
그리고 학회가 끝난 뒤엔 내가 쓴 논문이 우수 논문 중 하나로 뽑혔다는 뜻밖의 기쁜 소식도 덤으로 접했다. 요즘 뜨고 잘나가는 연구 분야를 다룬 게 아닌데 이런 논문도 알아 주니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01 19:32 2016/11/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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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본인은 지난 여름에 <부산행>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얼마 전엔 어째 진짜로 부산을 갈 일이 생겼다. 한글 및 한국어 정보 처리 학술대회에다 논문을 투고하고 발표하게 됐기 때문이다. 올해는 28회째이다.
아무 이유 없이 쓴 건 아니고.. 학술지에 소논문을 게재하는 게 박사 졸업 이수요건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두 편이 규정돼 있기 때문에 이런 걸 조만간 하나 더 써야 한다.

이번에 쓴 논문은 사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에 넣으려 했던 새로운 기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주제이다(하지만 결국 못 넣고 또 다음 버전 기약을..ㅠㅠ). 분량 제한 때문에 모든 아이디어나 진짜 복잡한 고급 기능 소개는 넣지도 못하고 그냥 기본적인 것에다 약간의 응용 수준까지만 다뤘다.
이런 논문은 학술지 사이트에 영원히 기록으로 남고 후속 연구자들이 검색해서 열람도 하게 되는데, 저런 태생적인 한계만 감안한다면야 나름 후회 없게 논문을 썼다.

이런 기능을 넣을 생각 자체는 회사일을 하다가 떠올리게 됐다. 별개인 것 같은 기능이 알고 보니 한글 입력에다가 이렇게 접목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게 내 개인 프로그램에다가도 들어가고 논문으로 써서 졸업 이수요건도 채우게 됐으니 MS의 과거 캐치프레이즈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everything at once를 얼추 달성했다.

본인이 저 학술대회와 인연을 맺은 것 자체는 대학 학부 시절이던 엄청난 옛날, 2003년 제15회 시절이다. 지금은 은퇴하신 김 진형 교수님의 제안으로 논문을 덜컥 투고했는데, 지금도 검색하면 그걸 볼 수는 있다. 물론 그로부터 13년 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버전이 8.x가 꺾인 지금 관점에서 보면 겨우 2.x를 기준으로 작성된 논문은 가히 흑역사 급의 민망한 퀄리티가 돼 있다.
하지만 그 학술대회에서는 기조 강연 겸 기념품으로 Unicode CJK IME를 득템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아직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외부 모듈조차 개발돼 있지 않던 당시에 중요한 동기 부여와 기폭제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4년 전, 2012년에는 이 학술대회는 아니지만 비슷한 격으로 동시 병행 개최되던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를 참관하러 부산을 방문했었다. 거기서 전년인 2011년 대회의 입상자들을 초청해서 관람권을 줬기 때문이다. 그때 경진대회와 학술대회의 개최 장소는 해양 대학교였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에 부산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올해 대회도 또 부산에서 열리니, 본인으로서는 지리적인 면모가 약간 아쉬웠다.
여기는 자가용과는 완전 상극인 위치였다. 강원도나 경기도의 적당한 오지라면 미지 탐험도 할 겸 응당 차를 가져갔겠지만, 일행도 없이 혼자 이 장거리를 차 끌고 가는 건 금전과 체력 소모가 심하다.
또한 부산은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인구밀도 대비 도로 사정이 안 좋은 걸로 전국적으로 악명 높으며, 반대로 학회 장소는 지하철역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그러니 여행은 어딜 가든 캐리어 끌면서 뚜벅이 형태로 가게 됐다.

그리고 교통· 지리와 관련된 또 다른 악재는.. 기왕 부산을 대중교통만으로 방문하는 흔치 않은 기회가 왔는데, 하필 동해남부선 복선 전철의 개통 시기를 미묘하게 비껴 가게 됐다는 것이다. 선로는 다 완공됐지만 서울 수도권 바깥에서 통근형 전동차가 다니는 진풍경은 못 봤다.

단점 얘기는 여기까지. 뭐 그렇긴 하지만 이번에 본인은 태어난 이래로 제일 치밀하게 부산 투어를 해서 제한된 시간 동안 뽕을 뽑고 왔다.
<부산행>, <해운대> 같은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부산은 어째 재난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부산은 근대기 개항 이래로 일제 강점기, 6· 25, 그 뒤 민주화 운동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은 동네이다.

대도시로서 1960년대에 전국에서 최초로 직할시로 승격됐으며, 해방 직후에 서울· 평양과 더불어 한반도에서 노면전차가 다녔던 3대 도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또한 6· 25 전쟁 중에 평양에 잠시 태극기가 꽂힌 적이 있던 것만큼이나, 부산은 전쟁 중에 임시 수도였던 적이 있다. 그리고 전국의 피난민들이 한데 몰려들었으며, 전국의 대학교들이 부산에 한 자리에 임시 캠퍼스를 개설해서 학생들에게 수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알고 보니 학회 장소인 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부산 역사의 중심지인 아주 기가 막힌 곳에 있었다. 그래서 더욱 보람찬 관광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 목요일(10/6): 해운대 해수욕장

학회의 시작은 금요일부터이지만, 본인은 부산에서 작정하고 놀기 위해서 그 전날에 집을 나섰다. 물놀이와 노숙이 가능하게 갈아입을 옷 여러 벌에다 돗자리와 작은 담요까지 커다란 캐리어에다 몽땅 집어넣었다.

8월 말까지는 논문 쓰는 것 때문에 '문장을 어떻게 다듬을까, 주제별 분량 편성을 어떻게 할까' 갖고 왕창 고민했다면, 9월 말에 학회 참가가 확정된 뒤부터는 여행 계획을 짜느라 '일정 전후로 관광은 어떻게 할까, 열차냐 버스냐, 어디부터 먼저 갈까, 산에서 잘까 바다에서 잘까'로 고민의 양상이 바뀌었다.
차 없이 장거리 여행을 하면 무슨 교통편을 선택할지가 마치 프로그램 짜듯 고민거리가 된다. 그런데 동서울-해운대 직행 시외버스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가는 길은 모든 논란이 종결돼 버렸다. okay!

해운대까지는 5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오랜만에 보는 대구-부산 민자 고속도로 구간은 경부선 철길과 나란히 지나고 경치도 무척 아름다웠다. 단,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영동뿐만 아니라 전국의 고속도로들이 죄다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었으며, 차선이 하나 틀어막혀서 차량 정체가 발생하곤 했다.

버스에서 내려서 남쪽으로 몇 블록 걸어가니 말로만 듣던 해운대 해수욕장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곧장 근처 여관에 방을 잡아서 짐들을 갖다놓고, 물놀이용 복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버스 안에서 배터리를 다 소진해 버린 폰과 노트북 PC는 콘센트에 꽂아서 충전시켜 놨다. 그 뒤 방 열쇠만 몸에 지닌 채 해변으로 가서 물에 뛰어들었다.

나 요즘 해수욕 즐기는 데 재미 붙였다. 올해에만 해도 동· 서· 남해 바다에서 제각각 다 놀아 봤다.
계곡이나 강에 비해서 바다는 물이 덜 시원하고 끈적거리고 모래 붙는 거 신경을 써야 한다. 물놀이를 마친 뒤에 샤워 같은 후처리가 반드시 필요해서 번거롭다. 하지만 일단 면적이 압도적으로 넓으며 파도가 치는 게 역동적이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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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는 아주 맑고 따스해서 물놀이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바로 전날 이 동네에 강풍과 물폭탄이 쏟아졌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만, 시설이 부서진 게 있는지 근처에서는 무슨 복구 공사가 한창이긴 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명품 해수욕장답게 모래는 자갈· 돌 같은 걸 전혀 찾을 수 없으며 품질이 좋아 보였다. 글쎄, 소실되는 양이 많아서 모래를 외부에서 사 와서 보충한다고는 하던데..;;
또한, 시골이 아닌 대도시 소재이다 보니, 모래사장 바로 뒤로 곧장 고층 빌딩들이 즐비한 것도 이색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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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 가까이 물에서 돌아다닌 뒤엔 여관으로 돌아가서 씻고 옷을 다시 갈아입고, 해변에 두 번째로 찾아갔다. 이제부터는 물엔 가끔씩 발만 담그고 나왔으며, 모래밭에 돗자리를 깔고 이런 식으로 뒹굴거렸다. 점심 도시락도 이 자리에서 꺼내서 먹었다.
맥북은 산과 바다 어디에서든 저렇게 나의 든든한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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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욕장이 공식적으로는 폐장한 상태이고 평일에 날도 저물고 있었지만 저 정도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해변의 끝부분에는 낚시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물놀이에다 산책을 많이 하니 꽤 피곤해져서 숙소로 돌아가 좀 쉬었다. 그 뒤 완전히 밤이 된 뒤에 세 번째로 해변으로 갔다. 돗자리와 담요, 컴퓨터, 간식/야식거리만 챙겨서 아까보다는 짐을 줄인 상태로 가서 뒹굴거렸다.

부산 아니랄까봐, 해수욕장 모래밭에서도 인근 건물에서 쏘는 와이파이가 잡혔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의 업로드와 내 홈페이지 갱신은 바로 부산 해운대에서 행해졌다.
인제는 제법 쌀쌀함이 느껴져서 담요가 제 역할을 했다. 이대로 자 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잠들었다.

※ 금요일(10/7): 보수산 중앙/민주 공원, 임시 수도 기념관, 학회, 광안리 해수욕장

오후부터 드디어 학회가 시작되니 그 전에 아침엔 부산 역과 동아 대학교의 사이에 있는 보수산이라는 산을 올랐다. 이 산의 정상에는 꽤 큰 규모의 여러 공원들이 조성돼 있기 때문이다. 뒤에 설명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일제 강점기, 6· 25, 민주 항쟁 등 이념 한번 참 다양하더라.

해운대에서 부산 역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역에서 목적지까지는 버스 환승을 했다.
여담이지만 부산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서면 역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당한 개념환승(환승 거리 짧음)인 게 좋았다. 서울 지하철 최초의 환승역인 신설동 역은 전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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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북쪽에 있는 무슨 충혼탑. 검색을 해 보면 무엇을 기리기 위해 언제 세운 탑인지가 나오겠지만 생략한다. =_=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해 놓은 것 같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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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혼탑의 이남으로는 이렇게 조각 공원도 조성돼 있었다. 경치 좋고 날씨도 좋아서 여기서 산책이나 혼자 코딩, 아니면 심지어 노숙을 하기에도 적절해 보였다.
그 뒤로는 4· 19 혁명 기념탑이 있었는데 사진은 생략함.
또한 산 정상에서 주변 풍경을 몇 장 찍은 것도 있으나, 이것보다는 부산 타워에서 찍은 사진이 더 높고 전망이 좋으니 그걸로 대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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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 근처에는 부산 광복 기념관이 있었다. 이건 일제 강점기 역사 버전이다.
1876년에 체결되었던 강화도 조약이 생각보다 꽤 불평등한 조약인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엔 3· 1 운동 기간 당시(1919년 3~4월)에 서울뿐만 아니라 부산 각지에서 벌어졌던 만세 시위에 대한 기록도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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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판의 글씨체부터가 뭔가 노사모스럽고 "사람이 먼저" 이런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지금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내부에 안내 표지판들의 주요 용어들도 통상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순우리말로 바꿔 적어서 옷차림으로 치면 개량 한복스러운 느낌이 났다. 나도 엄청 국수주의적인(?) 한글 입력기를 전문으로 개발하는 사람이고 저런 시도 자체는 나쁠 게 없으나, 정치색과 관련된 이상한 편견이 생기고 나니 보기가 괜히 민망하다. =_=;;

보수산 꼭대기에 있는 각종 건물과 시설 중 이 민주 항쟁 기념관이 규모가 제일 컸다. 그래서 공원 전체의 대표 이름도 '민주 공원'이다.
이 승만 말기의 4· 19라든가 박 정희 말기의 부마 항쟁,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까지는 나도 의미를 인정하겠다만.. 거기에 왜 5· 18까지 다루고 있고(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며 지역적으로 딱히 부산과 관계가 있지도 않음) 효순· 미선 반미 시위나 6· 15 정상 회담 얘기는 왜 나오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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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민주 항쟁 기념관보다도 더 남쪽으로 가서 샛길로 빠지면 '대한해협 전승비'가 나온다.
6· 25 전쟁 당시에 북한군은 38선을 넘어서 육로 전방으로만 쳐들어온 게 아니라 동시에 부산으로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무장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랬는데 우리나라 해군이 1950년 6월 26일 새벽에 이 괴선박을 발견하여 격침시켜서 수백 명에 달하는 적군들을 꼬르륵~ 수장시켰다. 비록 국군이 그 뒤로 밀려서 서울도 빼앗기고 후퇴하게 됐지만 어쨌든 이 전투가 우리나라로서는 6· 25 '전쟁' 중에 벌어진 전투들 중 최초의 '승전'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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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산에는 이렇게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볼것들이 아주 많았다.
산을 오르내리는 지름길은 이렇게 압박스러웠다. 이런 데서는 살기가 무척 힘들 것 같다.
여기서 동아 대학교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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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대학교 부민 캠퍼스가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 건물이 먼저 날 반겼는데, 이건 실제로 옛날 건물이며 지금은 동아 대학교에서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건물이라고 한다. 학회는 그 옆의 신축 건물인 '국제관'에서 열림.
여기까지 관람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일단 본인은 학교 뒤에 있는 임시 수도 기념관을 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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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수도 기념관도 빨간 벽돌 스타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상하이에 임시 정부 거처가 있었던 것처럼 6· 25 전쟁 중엔 우리나라 정부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대통령이 바로 여기에서 지냈다. 국회도 부산에서 열렸고.
저 건물은 그때의 그 건물 자체는 아니고 원형을 따라 나중에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대통령 관저, 그리고 전시관 이렇게 두 파트로 나뉘어 있으며, 두 건물은 살짝 간격을 두고 서로 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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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과 대통령 집무실이다. 지난번에 고성에서 봤던 대통령 별장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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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에 대해서는 저렇게만 써 놔도 업적과 흑역사에 대해 충분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잘 써 놨다.
한강 다리 폭파나 보도연맹 같은 극단적인 팩트까지 다룰려거들랑 남조선 대통령의 실책에다가 0이 몇 개는 더 붙은 수준의 훨씬 더한 악행을 저지른 공산당의 민간인 학살까지 같이 거론해야지. 예를 들면 개전 초기의 서울대 병원 대학살 같은.

오글거리는 미화나 우상화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악의적이고 불순한 왜곡이나 좀 하지 마라. 그 시절에 저런 대통령이나 희생이라도 없었고, 욕먹을 걸 감수하고라도 살짝 장기집권 안 했으면, 남조선 전체가 빨갱이 치하에 들어갔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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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국제시장>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다. 역사 기록을 종합해 보면 1953년에는 부산에 화재 참사가 두 번이나 났었다. 1월 30일엔 국제 시장에서, 그리고 그 해 11월 27일엔 부산 역 일대에서 큰 불이 나서 피난민들의 생계 터전이 송두리째 박살이 났다.

그리고 195~60년대 우리나라의 컬러 사진을 보면 산업화 이전의 옛날이 오히려 꼬질꼬질하며, 산과 언덕에도 나무라고는 찾을 수 없고 지금의 북한처럼 누런 흙이 다 드러나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사진이 낡고 바래서 누런 톤으로 변한 게 아니다. 인간이 화석 연료와 각종 금속· 플라스틱 재료를 활용하기 전에는 당장 동네 뒷산에서 자라는 나무들이 그런 연료와 건축 자재 역할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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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순할 때는 총기를 갖고 오되(우리가 득템 노획해야 하니까), 손에 쥐지 말고 목에다 덜렁덜렁 걸치고 오너라."
"살 수 있는 유일의 길은 귀순뿐이다! 용단을 내려서 귀순하라!"
전시관에는 6· 25 전쟁 당시에 살포되었던 삐라들이 특집 전시되어 있었다. 하긴, 강원도 화천의 파로호 안보 기념관에서도 봤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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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에는 무슨 초등~중등학교가 아니라 인서울 대학교들도 부산으로 피난 가서 저런 데서 수업이 진행됐다.

역사 얘기를 더 보충하자면, 6· 25 전쟁 당시 우리나라 정부는 1950년 8월 18일부로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그러다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하고 국군과 UN군이 10월 19일에 평양까지 점령하자 정부는 10월 27일에 환도를 결정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951년에 전세가 도로 38선 이남으로 밀리자 정부는 1· 4 후퇴 바로 직전인 1월 3일에 다시 부산으로 본진을 옮겼다.
국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날이 1950년 10월 1일인데, 적군이 38선 이남으로 도로 넘어온 날이 1951년 1월 1일이니 정확히 3개월 만의 통한의 후퇴였다.

3월 14일, 아군이 2차 서울 수복을 이뤄 냈지만 이번에는 우리 정부는 예전처럼 곧장 환도하지 않고, 전쟁이 완전히 휴전으로 귀착될 때까지 후방인 부산에 계속 머물렀다. 그래서 1953년 광복절에야 2차 환도가 이뤄졌다.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다.
건전한 대한민국 국민, 특히 서울 시민이라면 윤 봉길· 안 중근 의사 같은 사람이 거사를 이룬 날이나 순국한 날뿐만 아니라 6· 25 전쟁 때 우리나라가 서울을 수복한 날도 기억하는 게 좋을 것이다.

여기까지 구경하고 나니 이제 시간이 되어 본인은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첫째 날에는 강당에서 가만히 앉아서 그저 강연들을 듣기만 하면 됐다. 처음에는 근래에(지금으로부터 1년 이내에) 언어 공학 분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신진 연구자들 4명이 초청을 받아 자기 연구 분야에 대한 강의를 했고, 그 다음엔 이 바닥에 이미 유명한 교수들 4분이 강의를 했다.

카이스트 학부 시절에는 얼굴을 한 번도 못 뵈었고 딱히 학부 강의를 하지도 않는 것 같으시던 최 기선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시맨틱 웹이 어떻고 온톨로지가 어떻고 하는 외길을 가시는 듯하던데 강의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다. =_=;;
경주에서 한번 뵌 적이 있는 변 정용 교수님도 여기서 강의를 하셨고 본인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이분들 말고 또 기계번역과 관련된 강의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학술대회에 후원을 많이 해 준 네이버, NC소프트와 솔트룩스라는 기업의 "자기 회사 자랑 + 인재 모집" 소개 세션도 있었다. 네이버야 검색엔진 전문이니까 자연어 처리에 관심이 왕창 많을 수밖에 없는 기업이지만, 엔씨는 온라인 게임 개발사 아냐?
비주얼 C++에 유니티 3D 엔진을 잘 다루는 클라이언트 개발자, 유닉스 셸 스크립트와 컴터 보안에 능통한 서버/DB 개발자, 혹은 2D 원화/3D 모델 디자이너만 뽑을 것 같은데.. 의외로 거기 내부에도 인공지능 및 자연어 처리 연구소가 있어서 석· 박사급 연구원들이 논문도 많이 내고 있었다. 경쟁사인 넥슨엔 그런 게 있다는 얘기를 못 들었는데 말이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10/29 08:30 2016/10/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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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2016년이고 좀 있으면 우리나라에 제6공화국이 출범한 지도 30주년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개헌과 디노미네이션(화폐 개혁)이 국가의 미래를 위해 21세기 전반부에 풀고 가야 할 대표적인 숙제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둘 다 지금 당장까지는 아니어도 예측 가능한 가까운 미래에 추진하는 것에 찬성 입장이다.
먼저 정치 쪽은.. 대통령 선거 타이밍을 국회의원의 타이밍과 맞추고, 대통령은 미국처럼 4년 + 호응 좋으면 1회 중임 가능하게 하는 게 어떨까?

우리나라가 역사 정서적으로 독재자의 엿장수 식 개헌에 대한 트라우마가 좀 있는 건 사실이다. 이에 대한 반발 때문에 지금 헌법은 반대로 고치기가 너무 어렵게 바뀐 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본인이 예전에도 생각을 밝혔듯이, 옛날에 그 정도 독재는 당대의 국민 의식 대비 북한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그 정도로 위태롭던 시기에도 그 정도 인권유린이나 정치범 탄압 부작용밖에 없었다면, 세계 역사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나마 아주 선량한(?) 독재였다고 본다.

그 독재 권위라도 없이 국론이 완전 사분오열돼서 나라꼴이 도떼기시장 개판오분전이 되고 뭐 하나 큰 사업을 시작하려 해도 맨날 반대를 위한 반대에, 조선 시대식 당파 싸움에, 제발 데모질 좀 하지 말라고 데모가 벌어지고, 이 틈을 노려 공산주의자 간첩들이 활개를 치면서 민· 관을 마음껏 이간질하다가 또 북한이 남침하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보라. 이것보다야 차라리 강력한 독재가 나았으며 특히 그 옛날에는 그게 더 절실한 필요악이었다. 오죽했으면 전땅크의 5. 18은 몰라도 박통의 5. 16 쿠데타는 그 시절에 어지간한 지식인 지도층들도 지지했을 정도였다(예: 장 준하).

그 와중에 민주화라는 것도 백성들이 그냥 저항만 한다고 이뤄질 수 있는 거 아니다. 통치자들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하는 최소한의 선량한 마인드는 갖춰져 있었으니 정권 교체가 가능했다. 그게 아니라면 북한은 주민들이 민주 의식 저항 의식이 남조선 인민들보다 부족해서 저 지경이 된 것이겠는가?

예전의 통치자들이 국민을 우습게 여기고 비리 저지르고 잘못한 거야 신나게 까고 비판하고 씹어야 할 것이다.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국민이 감시를 잘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큰 그림을 보면 명백히 썩은 내 풀풀 나는 쓰레기 시궁창 속에서 그나마 이 정도 꽃이라도 기적적으로 피워 낸 거라고 볼 수 있다.

그게 아니라 무슨.. 우리나라가 해방 직후에 우리 민족끼리 아~주 평화롭게 통일 국가 이뤄서 잘 살 수 있었는데 무슨 나쁜놈이 친미 친일 공화국을 만들고 나라를 분단시키고 좋은 기회를 다 망가뜨렸네 하는 그딴 소리에는 본인이 내 양심과 명예를 걸고 죽어도 전~혀 동의하지 않으며 온몸으로 반대한다.
통일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그 시절에 그런 식의 통일이란 100% 김 일성 치하의 적화통일을 의미할 뿐이지. 그 나이 쳐먹도록 아직도 그런 순진한 말을 믿고 있냐?

얘기가 좀 엉뚱하게 흘렀다만.. 아무튼 북한을 대치하고 있는 시국 속에서 우리나라는 미군정을 졸업하고 군사 정권까지 청산한 뒤, '직접 민주주의'까지 잘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1987년 체제도 좀 초월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게 내 생각이다.
물론, 이렇게 정치 시스템을 고치는 일은(민주화? 직선제 등등)..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게 무슨 북한 주민들을 구출한 급이 아닌 이상, 나라를 외적 침략으로부터 지키거나 가난을 극복한 일만치 위대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 역시 변함없다. 그게 급이 서로 같을 수가 없다.

다음으로 화폐 얘기다. 우리나라의 헌정 시스템은 since 1987이라지만, 지금의 '원'이라는 단위 체계는 무려 since 1962이다. 박통 때 제정된 돈이 만약 있기만 하다면 지금도 동일한 액면가로 통용 가능하다. (물론 그런 골동품 돈은 액면가 그대로 써 버리는 건 완전 바보짓이다. 수집가에게 파는 게 훨씬 더 이익이므로.)

허나, 대한민국 급의 선진국들 중에서 이 '원'만치 가치가 너무 작고 반대로 자릿수가 너무 큰 화폐단위를 쓰는 나라는 없다. 반세기 동안 인플레가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10만원 지폐까지 만들 지경이 된다면 그걸 하느니 끝의 0 한두 개를 좀 없애 버리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화폐를 새로 만들 때쯤이면, 제발 조선 시대 이씨 말고 대한민국 시대 인물도 모델로 좀 넣자.
굳이 조선을 또 넣을 거면 성역 고정출연급인 세종대왕 이 순신 말고는 장 영실· 정 약용 같은 발명가, 실학자 계열을 넣고 말이다. 유학자들만 너무 빨아댄다. 유교탈레반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요즘 저게 평판이 얼마나 안 좋은데!

이런 개헌과 화폐 개혁이 통일과 함께 안 그래도 어차피 사회 기반을 갈아엎어야 할 타이밍 때 원큐로 싹 같이 진행돼 버리면 비용도 제일 덜 들고 좋을 것이다. 이 시기 이전과 이후의 대한민국은 광복 전후, 6· 25 전후 같은 급으로 분위기가 싹 달라질 것이고 그 날은 아마 국경일· 기념일 정도는 돼서 달력에 표기될 것이다.

아, 한반도에 유일하게 바람직한 통일, 평화 통일, 진정한 통일이란 당연한 말이지만 이북의 김돼지 정권이 스스로 무너지든, 군사력으로 쳐부수든 어쨌든 걔네들이 축출되고 제거되고 처벌받는 통일밖에 없다. 그것 말고 적과 싸우다 져서 통일 '당하든가', 적과 내통하고 적당하게 타협하고 적에게 왕창 돈 갖다 바쳐서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얻은 통일 따위는 안 하는 것만도 못한 잘못된 통일이다.
아무리 통일이 좋기로서니 주체사상 내지 김돼지 부자 동상을 그대로 놔 두고 존치시킬 생각이신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생각해 보라.

제대로 된 통일이 불가능하다면 차선· 차악 차원에서 차라리 영구분단이 1억 배 이상 낫다. 사채· 보증 써서 막느니 차라리 평범한 신용불량자가 되는 게 나은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어차피 북괴는 교류 끊고 고립만 제대로 잘 시켜도 알아서 붕괴한다. 굳이 전쟁 벌여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조차 없다.
상황이 급하고 저자세로 나와야 되는 건 걔네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걔네들이 그 와중에 핵까지 개발하는 데 성공한 건 그렇게 고립시키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군인의 본분에다 비유하자면 작전에 실패한 것도 아니고 경계에 실패한 것과 같다.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비극이 앞으로 다시는 없어야 한다.

북괴 정권은 완전히 패망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폭탄 끌어안고 최후의 발악을 할 것이다. 자기가 없어지더라도 땅 한 평, 인민 한 명이라도 남조선에 도움이 될 건 하나도 남겨놓지 않고 독 뿌리고 방사능 오염시키고서 망할 게 뻔히 보인다. 차라리 중국에다 주면 줬지 우리한텐 안 준다. 옛날에 일제가 핵폭탄 안 맞았으면 마지막까지 전인민 옥쇄니 뭐니 하면서 무슨 짓거리를 하려고 했었던가? 그걸 생각하면 된다. 북한은 그런 나라이다.

그렇게 김돼지 정권을 몰아냈다고 생각해 보자. 못 먹어서 허약하고 기형이고 마약에까지 취한 인민들.. 물론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제는 해야겠지만, 반쯤 병신인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경제력이나 생산 능력이 있을 리 없을 것이고 이건 통일 비용을 왕창 잡아먹는 요인이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민족끼리'의 허상을 버리고, 북괴 정권을 도와준 건 인민에게는 절대 안 간다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괴를 조직적으로 고립 압박해서 망하게 해야 한다. 이럴 자신이 없으면 그냥 영구분단으로 가든가.

이 개념을 복습해 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전혀 사실이 아님

  1. 통일은 지금 외세의 방해 때문에 못 하고 있다.
  2. 김씨 부자 정권과 주체사상을 그대로 존치하면서 남북을 통일하는 것이 가능하다 / 적절하다 / 옳다.
  3. 북한 정권은 완전히 개과천선해서 대남적화 야욕이 없어졌다.
  4. 북한은 정부가 인민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데도 다른 외형적인 불가피한 이유 때문에 못살고 있다.

* 100% 절대무오한 사실임

  1. 통일은 남 탓 할 필요 없이 북괴의 잘못된 통치 이념과 사상 때문에 못 하는 것일 뿐이다.
  2. 북한은 이념으로서 스탈린이니 레닌이니 하는 공산주의는 물론 진작에 버렸다. 하지만 근처에 있는 제일 만만한 나라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던 위장, 간첩질, 거짓 선동, 유언비어, 역사왜곡, 계층간 이간질 등 온갖 비열하고 더러운 방법은 여전히 적극 운용 중이다.
  3. 정상적인 경제개발 및 군사력 육성으로 남조선을 적화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에 쟤들은 더 극단적이고(핵 등 비대칭무기) 치사한(위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북쪽에 대해서 positive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쟤들이 공략하는 건 오로지 남쪽에 대한 negative이다.
  4.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아는 게 힘이다. 이제라도 우리보다 힘센 일본을 배우자. 근대화하자" 이런 움직임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북한에게서 우리가 일말의 배울 만한 선한 것이 있나? 전혀 그렇지 않다. 쟤들은 하다못해 경제력과 군사력을 키워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적화통일을 꾀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비열하고 더러운 전술에 속지 말아야 하고 경계 분리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5. 자기도 말로만, 입으로만 북한 정권 싫어한다 김 일성 싫어한다 그러면서 필요악과 절대악은 구분할 줄 모르고, 6·25 전쟁이 무슨 남북 양비론인 줄 알고, 적화통일 반대한다면서 적화통일 자금줄 대주는 일에는 아무 관념이 없는 무지한 사람들이 남조선에 너무 많다.

위와 같은 나의 팩트 인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내가 우리나라 근현대사 내지 정치와 관련하여 쓰는 글에는 북괴, 종북개빨, 더 나아가서 좌좀 깨시민 같은 과격한 단어가 사라질 일이 없을 것이다.

나의 정치 성향이 마음에 안 들고 불편해서 견딜 수 없다면, 누구든지 위의 저 전제조건들만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 된다. 남이 지지하는 것의 욕만 자꾸 하지 말고 자기가 지지하는 것이 옳고 맞다는 걸 입증해 보이면 된다. A가 틀렸다고 해서 자동으로 B가 맞게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픈소스가 아니지만 난 사상 체계는 철저한 오픈소스다. 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 논리를 구성하는 근거 팩트들을 아주 투명하게 제시해 놓았다. 저것만 무너뜨리고 논파하면 내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진영논리에 사로잡혀서 남이 뭐라고 지껄이든 듣지 않고 답은 정해 놓고 박박 우기는 거야말로 폐쇄 클로우즈드 소스겠지.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 나라 체계 하에서 법망을 요리조리 피해서 특혜 받고 나쁜짓 하고 평범하게 부정축재 해 온 놈과,
아예 적국에게 자금 바치고는 그걸 온갖 평화드립 궤변으로 합리화하고 오로지 자국 폄하만 일삼는 놈이 어떻게 서로 레벨이 같냐..? -_-;;
저 둘은 성경에서 아담의 죄와 루시퍼의 죄가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고, 노아의 홍수와 이전 세상 홍수가 다른 것만큼이나 완전히 다르다.

후자가 전자보다 청렴하기라도 한 것도 당연히 절~대 아님. 선조의 친일 내력이나 자식새끼의 특혜/병역비리를 파자면 절대적으로 평균이나 그 이상 나온다. 서로 네거티브 대결만 해서는 양쪽 다 오십 보 백 보이고 끝이 안 난다. 6· 25의 책임이 양비론인 게 아니라 이런 거나 양비론 피장파장이다. 그러니 결국은 대적관과 이념의 건전함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다.

통일이란 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다. 마치 결혼이나 교통사고처럼 나(혹은 우리나라)만 잘한다고 혼자 할 수 있거나 예방 가능한 게 아니다.
그게 어느 때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가 통일에 덧붙여서 개헌· 디노미네이션까지 국가 체계를 적절한 타이밍에 잘 개편해 내는 복을 누리게 될지는 모르겠다. 옛날에 더 늦기 전에 좋은 타이밍 때 220볼트 승압을 싹 해치웠고 철도 표준궤 개궤를 해서 미래에 후손들이 편해진 것처럼 말이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그때쯤이면 한글 글자판도 세벌식 중심으로 다시 제대로 논의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26 08:31 2016/10/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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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동안은 등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100~200m짜리 언덕 산책에만 머물렀고 8월 동안은 그마저도 아예 포기하고 지냈다가..
폭염이 물러나고 가을이 되자 지금까지 올랐던 어느 산들보다도 더 높고 험한 산으로 과감하게 달려갔다. 오랫동안 마음에만 품어 놓고 있었던 산, 바로 북한산이다.

여기는 동네 뒷산 같은 듣보잡 산이 아니라 국립공원이다. 네임드급 산이고 또 괜히 그렇게 지정된 게 아니다. 등산로를 벗어나거나 출입 금지된 계곡 같은 데 무단으로 들어갔다가 걸리면 과태료를 먹는다. 그 대신 네임드급 산답게 등산로는 아주 잘 닦여 있으며 각종 위치 안내 시설도 잘 돼 있다. 공중 화장실도 꽤 높은 지점까지 설치돼 있다.
이런 거대한 산 때문에 서울이 북쪽으로 더 확장을 못 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휴양지가 서울과 가까이 있다는 건 또 다른 면에서는 축복이다. 주말마다 수많은 등산객들이 북한산을 찾는다.

역시 높고 험하고 길어서 오르내리는 시간도 왕복으로 6시간 가까이 꽤 오래 걸렸다.
마지막 분기점에서 백운대 정상까지 딱 300m라고 쓰여 있었는데, 저 거리의 낚시에 낚이지 말 것. 산책 하듯 설렁설렁 비탈길이나 계단을 오르는 300미터가 아니다. 발뿐만 아니라 손도 써야 하는 왕창 힘든 암벽 등반으로 300미터다.

그래도 (1) 남한산성과 같은 성곽(북한산성), (2) 우이령 같은 고갯길, (3) 아차산 같은 아래 전망, (4) 커다란 암벽, (5) 물이 졸졸 흐르는 계곡, (6) 용마-망우산 같은 애국지사 묘역 등..
여기는 지금까지 산에서 경험했던 여러 복합적인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좋은 산이었다.
본인은 정릉 탐방지원 센터 - 보국문 - 대동문 - 용암문 - 백운대 정상 - 백운 탐방지원 센터 - 우이동 분소의 순으로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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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일일이 등산객의 수와 신원을 파악하고 통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입산 가능 시간대가 정해져 있다. 산에서 무단으로 짱박혀서 외박· 야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뜻.
탐방지원 센터 근처에는 유료 주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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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예전에 갔던 우이령길처럼 울타리가 쳐진 흙길 형태로 등산로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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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중간 마주치는 계곡은 물이 참 맑고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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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등산로는 가파른 돌계단으로 바뀌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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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성 구간에 진입하여 보국문이 나왔다. 여기가 이미 해발 500m대에 달한다.
예전에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을 올랐던 생각이 났다. 거기는 분지 지형이어서 성곽 아래의 옴푹 패인 곳에 거의 마을 하나가 조성돼 있는 반면, 북한산은 그렇지는 않다.

여기서 서쪽 대성문 쪽으로 가면 평창동 방면으로 하산 가능하다. 본인은 하산은 그쪽으로 하고 싶었지만 오늘은 일단 정상으로 가고 싶어서 동쪽 대동문 방면으로 발길을 돌렸다. 북한산의 서쪽은 다음 기회에 방문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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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길을 한참을 걸었다. 이제 산 아래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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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에는 어째 넓은 공터가 있어서 많은 등산객들이 쉬고 있었다. 하지만 정상으로 가려면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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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문까지 지나고 백운대가 점점 가까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래 전망은 더욱 좋아졌다. 그러나 암벽을 타는 진짜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슬금슬금 오르던 고갯길과 성곽길도 다 지나고, 등산의 양상이 확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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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만 써서는 안 되고 손으로 로프를 꽉 붙잡아야 진행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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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저기가 백운대이다. 저렇게 보니까 정상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저 사진에서 사람이 어느 크기인지를 보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_=;; 저 육중한 바윗덩어리를 올라야 한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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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는 아예 저렇게 암반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저게 진정한 의미의 클라이밍이다. 고전 게임 레밍즈에서 '클라이머'를 생각해 보면 된다. 그냥 설렁설렁 발만 써서 비탈길을 오르는 등산은 하이킹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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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는 온통 이런 봉우리들을 볼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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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창 고생한 끝에 어쨌든 정상에 도달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긴 했지만 이 정도면 햇볕도 안 나고 등산 가기에 그럭저럭 괜찮은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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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인명 사고라도 났는지 119 헬리콥터가 떴다. 살다 살다 헬리콥터가 내 발 밑으로 날아다니는 건 처음 본다. 여기가 어지간히도 고도가 높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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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 주변의 암반들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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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던 길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는 원칙 하에 하산은 어째 계곡을 따라서 했다.
백운대 탐방 지원 센터는 산중턱에 있었으며, 자동차 도로가 닦여 있었다. 자동차 도로는 경사는 아주 완만하지만 사람의 입장에서는 걸어야 하는 거리가 왕창 길다는 단점도 있다.

한참을 걸어서 다 내려와 보니 결국 예전에 우이령 고개를 갈 때 들렀던 그 분기 지점에 도달했다. 하긴, 거기는 우이령길, 북한산 등산로, 북한산 둘레길 등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다.
4· 19 묘지라든가 손 병희· 여 운형· 조 병옥 등 유명인사들의 묘소는 등산로가 아니라 둘레길 영역에 있는 듯하다. 동북쪽으로 하산한다면 그쪽으로라도 들를 수 있지 않나 생각했지만 그쪽 구경은 못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23 08:27 2016/10/2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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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가족 여행 (2016/9/15~17)

지난 추석 때 본인은 제주도로 2박 3일 가족 여행을 다녀 왔다. 이로써 본인은 지금까지 제주도를 딱 세 번 방문했다.
맨 처음은 고등학교 수학여행인데,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가물거릴 정도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로는 4년 전에 회사 워크숍으로 역시 2박 3일간 다녀 왔다. 그 뒤 이게 세 번째이다.

이번에 간 건 버스를 타고 가이드를 따라다닌 단체· 패키지 여행이 아니라, 숙소만 잡고 차를 렌트한 뒤 가족 단위로 자유롭게 돌아다닌 여행이라는 점에서 이전의 여행과 차이가 있다. 글을 둘로 나눌까 하다가 귀찮아서~ 또 글 분량 대비 사진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어서 그냥 한 포스트에 전체 일정을 몽땅 소개하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의 지명으로서 '제주'라는 고유명사는 크게 세 가지 의미가 있다.

  • 제주특별자치도: 행정구역으로서의 명칭이다. 이때 접미사 '도'는 경기도, 경상도 할 때의 그 도이다. 그러고 보니 한자는 의외로 그냥 '길'을 뜻하는 道였다. 都 같은 다른 글자가 아니구나.
  • 제주도: 섬으로서의 명칭이다. 이 '도'의 한자는 당연히 島. 한라산이 있으며 대한민국 영토 중에 가장 넓은 그 섬을 가리킨다. 제주특별자치도라는 행정구역은 바로 제주도와 그 주변에 있는 우도· 마라도 등의 마이너 섬들을 통틀어 일컫는다.
  • 제주시: 다시 행정구역 명칭이다. 제주도를 정확하게 남북으로 이등분해서 북반구 영역(주변 섬들 포함)은 제주시에 속하며, 남반구 영역은 서귀포시에 속한다. 우도는 제주시 소속이지만 마라도는 서귀포시 소속이다.

이런 제주도와는 달리, 울릉도는 도 단위의 고유한 행정구역이 할당돼 있지 아니하다. 그냥 본토의 '경상북도' 소속이고 그 하위 범주로서 '울릉군'이라는 주소를 가진 형태이다. 뭐, 얘는 위도로만 따지면 강원도 소속이어도 할 말이 없는 위치이긴 하지만 말이다.

면적으로만 따지면 전국에 울릉도보다 더 넓은 섬은 거제도, 강화도, 진도처럼 몇 개 더 있다. 인천 공항의 건설을 위해 간척으로 합쳐 놓은 영종+용유도도 울릉도보다 약간 더 넓다. 그러나 이들은 본토와 상대적으로 가까운 편이며 아예 다리도 놓였기 때문에 섬이라는 느낌이 덜 든다.

울릉도는 본토와 다리로 연결되지 않은 섬 중에서는 아마 제주도 다음으로 가장 넓지 싶다. 제주도 만만찮게, 아니 그 이상으로 본토와는 100km가 넘게 멀리 떨어져 있다. 이 때문에 강원도에 준하는 급의 위도에도 불구하고 6· 25 전쟁의 포화조차도 비껴 갔을 정도이다. (공산당에게 점령 당했거나, 수복을 위해 군대가 상륙하고 전투가 치러진 내력이 없음)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도 단위의 구역을 독립시키기에는 울릉도는 너무 좁고 인구가 적다. 다리가 없고 공항도 없으니 자동차와 비행기 모두 아웃. 왕래하는 교통수단은 오로지 배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에 반해 제주도는 면적과 거리가 모두 독보적인 원탑이며, 고대엔 아예 탐라국이라는 별개의 국가를 이루기도 했을 정도로 단절성이 뛰어나기에 저렇게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이지 싶다. 서울이 특별시인 것만큼이나 우리나라의 섬들 중에 행정구역상으로 '특별'이라는 말이 붙은 곳은 제주도밖에 없다.
과거에는 제주도는 행정구역 명칭도 '특별자치'라는 단어가 없이 똑같이 '제주도'였다. 그래서 개념을 더욱 혼동하기 쉬웠다. 똑같은 단어인데 넓은 범위에서의 의미와 좁은 범위에서의 의미가 달라서 헷갈리기 쉬운 게 세상엔 많이 있다. ('이름', IME 등등..)

제주도와 울릉도에 비하면 쓰시마 섬(대마도)은 외국 영토치고 이례적으로 굉장히 가까이 있는 섬이다. 하지만 얘는 근대에 일제가 강탈한 게 아니고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일본인들이 살았던 곳이기 때문에 소유주가 진작부터 지금처럼 굳어졌다.
이런 걸 생각하면 섬과 행정구역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는 게 의외로 재미있으면서 한편으로 골치 아픈 문제인 것 같다.

사회 지리 얘기는 제끼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비행기는 평소에 자주 이용하는 교통수단이 아니니, 어딜 가든 비행기를 탈 기회가 찾아오면 이것만으로도 나의 신경이 바짝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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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창문으로 내려다 본 현대 자동차 남양 연구소이다. 지상에서 뭔가 익숙한 지형지물이 보이니 반가웠다.
뿌옇게 형상만 보이던 사진을 콘트라스트 올리는 보정을 하니 부득이하게 흑백 사진처럼 바뀜. 주행 트랙에서 저 둥그런 위쪽 끝과 아래쪽 끝 사이의 거리는 나름 거의 2km에 달한다.
저게 나타나기 불과 몇십 초 전엔 '자동차 안전 연구원'의 주행 트랙도 봤다. 두 기관의 거리를 알고 있으니 시간차를 통해 이 비행기의 주행 속도를 얼추 계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광주 부근에서는 광주 공항도 볼 수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내가 착륙하지 않는 다른 공항도 내려다보는 건 아무래도 자주 경험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엔.. 공항에서 렌터카 사무실은 어떻게 찾아갈지, 공항 주변은 분명 자동차들로 교통지옥일 텐데 어떻게 빠져나갈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의외로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공항 주변 도로의 혼잡을 완화하기 위해 올해 하반기부터 렌터카 업체들은 다 공항 바깥 외곽으로 이주했으며, 그 대신 업체들이 연합하여 승객과 렌터카 허브를 왕래하는 무료 셔틀버스를 굴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람직한 조치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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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이호 테우 해수욕장을 들렀다. 가족 중에 나만 유일하게 물놀이 준비를 하고 여행을 떠났으며, 나 혼자 바닷물에 들어가서 물과 흙을 묻히며 재미있게 놀았다. 물에 들어가는 건 언제나 웰컴. 이로써 올해 본인은 서해, 동해에 이어 남해 바닷물까지 모두 경험하게 됐다.

일행이 있으니, 혼자 달랑 해수욕장에 갔을 때와는 달리 소지품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이렇게 물에 들어간 내 모습을 사진 찍어 줄 사람도 있고 말이다.
이 해수욕장은 수심이 얕고 좀 끈적거리는 게 동해보다는 서해 바닷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단, 제주도답게 검은 모래도 있고, 바닥이 울퉁불퉁한 곳이 많아서 편하게 돌아다니기는 어려웠다.

해수욕장의 이름이 좀 특이한데, '테우'는 제주도 고유의 모양을 한 소형 어선을 의미하는 '제주어'이다.
물놀이를 딱 마치고 나니까 날씨가 급격히 흐려지고 비까지 내려져서 타이밍이 절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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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시내를 벗어나 남부의 서귀포시로 갔다. 제주도 남부를 횡단하는 동안 이런 산길을 굉장히 길게 지났다. 여기는 도로와 도로가 만나는 곳도 신호등 교차로가 아니라 로터리 형태로 된 게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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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제주도의 동남쪽 끝에 있는 성산 일출봉을 올랐다. 높이가 해발 180m 남짓 된다. 처음엔 초원과 오솔길로 시작하지만 정상 부근의 바위는 나름 가파른 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시간 관계상 한라산 등산은 하지 않았지만 이것만으로 아쉬운 대로 등산 흉내를 냈다.
식사와 이동 시간을 빼니 첫째 날의 일과는 이 정도로 마치게 됐다. 산과 바다를 제각각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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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아침엔 천지연 폭포를 구경했다. 사진을 따로 첨부하진 않지만 여기까지 가는 길도 울창한 숲과 호수? 개천이 아주 잘 꾸며져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또한, 저 사진엔 용케 안 들어갔지만 현장 주변은 아침부터 온갖 관광객들로 바글거리고 있었다. 구도가 잘 나오는 바위에 올라가 사진을 찍으려면 한창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유사품인 천제연 폭포와 혼동하지 말 것...;; 사실, 둘 다 비슷하게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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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천지연보다는 작고 덜 유명한 '원앙 폭포'라는 곳에 들렀다. 차를 세운 뒤 계곡을 따라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야 했는데..
여기는 천지연과는 달리 물놀이를 할 수 있었다. 물은 해수욕장보다 훨씬 더 맑고 차갑고 깨끗하고 좋았는데...! 어제 같은 물놀이 준비를 하지 않고 나온 게 너무 후회됐다. 발만 담그고 돌아가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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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절리(柱狀節理)라고 용암이 바닷물과 닿아서 식으면서 생긴 기묘한 지형이라는데, 중문 대포 해안에 있는 걸 봤다. 인간이 돌을 일부러 저렇게 깎은 게 아닌데 자연적으로 어떻게 저런 모양이 생길 수 있는지 모르겠다.
용암 아니랄까봐, 바위가 뭔가 흐르는 듯한 모양에 구멍이 숭숭 난 채 시꺼멓게 굳은 걸 보니, 선지 생각도 났다.

이로써 둘째 날 오후가 됐고 여행의 전체 일정은 후반부로 들어섰다.
지금까지는 보다시피 공무원들이 관리하는 자연 명소들을 주로 들렀다. 자연 명소라는 특성상 관광 장소는 100% 실외이고, 외지 관광객의 입장료가 2000원가량이었다.

이제 후반부부터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사설 박물관들을 들렀다. 이런 곳은 입장료도 9천원~1만원대로 훨씬 더 비싸진다.
4년 전에 제주도에 갔을 때는 첫째 날은 한라산 등산으로 하루를 보냈고 둘째 날 자연 관광은 송악산과 마라도가 기억에 남는다. 그때는 셋째 날은 서울 도착을 오후 2시쯤에 했을 정도로 식사와 이동 말고 딱히 활동한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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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인국 테마파크는 우리나라 포함 세계 각국의 온갖 유적· 유물과 유명 건물들을 적게는 1/3, 많게는 1/25급으로 축소한 구조물들을 넓은 실외에 전시해 놓았다. 만리장성, 자금성, 에펠 탑, 미국 국회의사당이던가 백악관, 이집트와 멕시코의 피라미드, 우리나라의 청와대, 경복궁, 옛 서울 역, 피사의 사탑, 자유의 여신상 등 볼것이 아주 많다.

여기 말고 누나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고 싶어했던 박물관으로는 오설록 녹차 박물관과 그 근처에 있는 제주 유리의 성이었다. 하지만 이 두 곳은 내가 4년 전에 갔던 곳이기 때문에 또 가지 않았다.
돌아다니면서 세계 자동차 박물관을 종종 지나쳤는데 여기에도 못 갔으며, '제주 아쿠아플라넷'도 후보지에는 있었지만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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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에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박물관은 살아 있다'라는 실내 응용 미술(?) 박물관이었다. 이런 식으로 2D와 3D 착시를 일으키는 벽화에 쏙 포즈를 취해서 자기가 그림 속의 주인공이고 높은 곳에 아슬아슬 매달려 있거나 사지가 잘린 것처럼(!) 흉내를 내고, 그걸 다른 일행이 사진 찍어 주는 곳이다. 걸어다니면서 조용히 눈팅만 하는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손수 퍼포먼스를 좀 하면서 추억을 남겨야 한다.

저건 내가 표정 연기를 잘했다고 가족들이 다들 좋아했다. 밑에 부대찌개 그림이 있는 줄은 현장에 있을 때 미처 몰랐다. 제기랄. =_=;;

지금까지 다녀갔던 곳들은 자연 관광지는 대체로 어머니께서 제안하셨고, 맛집 식당과 박물관들은 누나의 제안으로 들렀다.
그 반면 셋째 날에는 한림 공원과 넥슨 컴퓨터 박물관을 들렀는데, 이것들은 내가 제안한 장소였다. 컴퓨터 박물관은 4년 전 당시에도 없다가 새로 생긴 곳이고, 반대로 한림 공원은 먼 옛날 수학여행 때 들른 곳이긴 하지만 다시 구경하기에도 손색이 없었다.

둘째 날에는 주요 짐들을 호텔에다 놔 두고 편하게 다녔지만, 마지막 날은 다시 숙소로 돌아오지 않으니 체크아웃 후 첫째 날처럼 다시 모든 짐을 차에 싣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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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림 공원은 그야말로 식물원, 동물원, 동굴, 수석 전시관, 민속촌이 몽땅 합쳐진 멀티테마 공원이었다. 원래 있던 자연 지형을 토대로 조성된 국립공원이 절대 아님. 개인 사업가가 깡촌 황무지에다가 흙 깔고 외국에서 사 온 식물 종자들을 어렵게 심어서 일군 사립 공원이다. 어지간한 박물관들이 다 둘러보는 데 1시간 남짓한 시간을 잡지만, 여기는 1시간 반~2시간은 족히 잡아야 했다. 그러고도 입장료가 딱히 더 비싼 것도 아니었다.

맑고 하늘이 파랄 때 갔으면 경치가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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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여느 박물관과는 달리 서귀포 외곽이 아니라 제주 시내에 있었다. 이 때문에 여기는 동선을 고려하여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를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림 공원을 다니던 중에 줄기차게 내리던 비가 하필 오후에 컴퓨터 박물관을 관람할 때부터는 딱 그쳤고 하늘이 맑아졌다. 날씨를 감안하면 올실내인 컴퓨터 박물관을 오전에 관람하고, 오후에 한림 공원에 가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컴퓨터 박물관은 전반적으로 저런 곳이었다. 컴퓨터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옛날 컴퓨터 기계들이 즐비하고 특별히 고전 게임을 할 수 있는 옛날 컴퓨터, 그리고 일부 가상현실 게임을 즐기는 부스가 있었다.

하지만 나처럼 하드웨어 덕후가 아닌 평범한 프로그래머가 보기에도 넥슨 컴퓨터 박물관은 컨텐츠 면에서 좀 2% 부족하고 아쉬운 점이 있어 보였다. 옛날 게임 소프트웨어 자체는 오늘날의 컴퓨터에서도 인터넷으로 구해서 에뮬로 얼마든지 띄울 수 있으니 희소성이 부족하다. 컨텐츠를 보강해서 아예 비디오 게임 전용 테마 박물관으로 가든지, 아니면 컴퓨터 박물관이면 에니악이나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컴 같은 학술적인 역사 자료까지 잔뜩 더 보강해서 개성을 강화했으면 어떨까 싶다. 두 이념을 좀 어중간하게 빈약하게 추구한 것 같다.

전반적인 규모도 다른 테마 박물관보다 작기 때문에 관람은 서둘러서 하면 한 3, 40분이면 다 할 수 있다. 다만, 게임을 할 수 있는 곳이 많으니 어린애들을 풀어놓고 시간 보내기에는 좋다. 실제로 우리가 갔을 때도 여기는 아이들 천지였다.
지하 1층은 카페 + 무료 고전게임 오락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코인 제약도 없다 보니 한 사람이나 가정이 자리를 너무 오래 차지하고 있는 걸 방지하는 수단이 없는 건 아쉬웠다.

굳이 사진을 첨부하지는 않지만.. "그 날이 오면 3" 게임을 할 수 있는 컴퓨터가 비치돼 있던데, 출시일이 웬 1990년으로 기재돼 있었다. 1편이나 2편의 출시일과 혼동한 듯. 3편은 1993년작이다.

한메 타자 교사도 있어서 본인은 세벌식으로 바꿔서 베네치아 게임을 해 봤는데.. 키보드의 감이 생소하고 또 최종이 아닌 390 배열로 하느라 버벅대서 8단계 2만 점대 초반에서 죽었다.
그런데, 이 점수로도 순위권에 아슬아슬하게 들지 못했다. 이미 하고 간 사람들 중에 타자 고수가 많았다. 이 사람들은 다 두벌식으로 쳤을 텐데.. 이 모바일 시대에도 컴퓨터 키보드 타자 고수들은 여전히 살아 있는 듯하다.
공공장소의 컴퓨터를 사용하고 난 뒤엔 민주 시민답게 설정을 다시 두벌식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본인은 잊지 않았다. -_-;;

박물관 관람을 다 마친 뒤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은 걸 확인한 뒤엔 흑돼지 삼겹살을 먹었다. 제주도에서 한 마지막 식사가 제일 비싼 식사였다.
시간이 빠듯하지 않을까 서둘렀는데 그래도 시간이 1시간 남짓 있었기 때문에.. 공항 근처에 있는 자연 유적지인 용두암을 추가로 구경했다. 여기는 딱히 입장료가 들지는 않았다. 바위 사진보다도 비행기 사진에 더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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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제 시간에 무사히 자동차를 반납하고 공항 수속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았는데..
연휴 마지막 날엔 엄청난 트래픽을 감당치 못하고 비행기들이 줄줄이 지연을 먹고 있었다. 면세 구역은 돗자리까지 깔고 몇 시간째 탑승을 기다리는 인파들로 가득했고 마치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했다.

이거 김포 공항의 통금에 걸려서 인천 공항에서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닌가 우려도 했지만 다행히 통금 시각은 밤 10시가 아닌 11시였고,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그 전에 서울에 도착함. 돌아오는 비행기는 광동체인 보잉 777이어서 마치 국제선을 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비행기는 참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이륙할 때 엔진이 최고 출력으로 가동되어 온몸으로 공기를 내뿜는 그 소리(청각)는 선로 위 전동차의 VVVF 구동음에 필적하는 청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소리가 너무 크고 우렁차기 때문에 어설픈 장비로는 녹음을 제대로 할 수도 없다.

또한, 급격한 가속 때문에 뒤로 쏠리는 그 가속도는 다른 대형 대중 교통수단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짜릿함을 선사한다.
비행기 말고 뭔가 스릴있고 짜릿하다는 놀이기구들도 근본 원리는 다 사람에게 G의 왜곡을 경험하게 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바이킹 등.

착륙할 때 점점 고도가 낮아지고, 바퀴가 땅에 닿으면서 '쿵!' 착지 충격이 느껴질 때도 즐겁다.
서양 일부 문화권에서는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승객들이 박수를 친다던데.. 뭔가 사람의 심리를 자연스럽게 반영해서 생긴 문화 같다.
착륙 직후 플랩이 펼쳐지고 뭔가 저항이 걸리는 듯한 큰 소리가 나는 건 전동차로 치면 회생 제동이 걸리는 소리와 비슷하며, 자동차에서 엔진 브레이크가 걸리는 소리와 비슷한 것 같다.

이렇듯, 조종사에게는 제일 힘들고 긴장되는 순간이(이착륙) 승객에게는 제일 즐거운 순간이다.
모든 게 훌륭하다. 단, 딱 하나, 비행기에는 과거 새마을호 열차처럼 Looking for you 같은 "음악"이 없었을 뿐이다.
이것이 내게는 항덕과 철덕 사이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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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을 맺기 전에 아이템 하나 추가함.
제주도의 풍경 상징이라 하면 딱 연상되는 건 (1) 본토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야자수, 그리고 (2) 이 돌하르방이다.
돌하르방은 그저 장승의 제주도 바리에이션이기라도 한 건지, 처음에 누가 언제 왜 무슨 용도로 만든 물건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정말로 옛날에 만들어진 물건보다는, 근현대에 유명해지고 나서 관광 마케팅 목적으로 일부러 따라 만들어진 모조품 돌하르방이 월등히 더 많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_=;; '돌하르방'이라는 이름 자체도 '참치'만큼이나 근현대에 와서야 정립된 명칭이다.

돌하르방은 생각보다 크기가 다양하며, 사소하게는 저렇게 왼손과 오른손 중 위에 놓는 손의 위치도 통일돼 있지 않고 케바케이다.
제주도에 가면 "모처에 있는 요것이 현존하는 제일 오래 된 원조 돌하르방이다!" 이런 거라도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난 돌하르방은 여러 모로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과 비슷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왔다.
저 모아이 석상 사진은 소인국 테마파크에 있는 걸 촬영한 것이다. 모아이도 원래는 돌하르방처럼 모자도 쓰고 있고 심지어 눈알도 붙어 있으나, 오늘날은 소실되고 없는 석상이 훨씬 더 많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13 19:36 2016/10/1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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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에서의 관광 일정을 마친 뒤, 이제 평화의 댐을 보러 화천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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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바다와 산뿐만 아니라 계곡과 강, 호수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건 이것대로 또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물에 들어가서 발이라도 담그고 나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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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마어마한 높이 좀 보소.
평화의 댐은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에 다소 불순하고 비현실적인 동기 하에 만들어졌다. 하다못해 다목적 댐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만들어 놓고 보니, 훗날 북한이 진짜로 예고 없이 수공을 퍼부었을 때 물을 제어해서 재앙을 예방하는 역할을 그럭저럭 수행하긴 했다. 소 뒷걸음질치다가 쥐 잡듯이 "어쨌든 결과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처럼 된 셈이다.

사실, 4대강도 그렇고 우리나라처럼 계절 변덕이 심한 나라에서 치수와 관련된 토목 공사 투자가 무의미한 뻘짓인 경우는 별로 없었다. 불볕더위와 가뭄이 조금만 계속돼도 옛날엔 제한급수에 온갖 난리 호들갑을 떨었으며, 반대로 태풍이나 홍수가 한번 났다 하면 TV에서는 전국적으로 수재의연금 성금 모집하던 게 불과 20여 년 전의 관행이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다 뭐다 하면서 기상 이변이 예전보다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날씨가 결코 온순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같은 난리 호들갑이 왜, 무엇 덕분에 쏙 들어갈 수 있었겠는지를 잘 생각해 보자.

내가 방문하던 당시에도 평화의 댐은 또 무슨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댐 위로 지나가 볼 수는 없었고, 댐 주변에서 댐과 공원의 사진만을 남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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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공원에는 온갖 공격 무기들의 모형이 전시돼 있는데.. 예술 작품을 표방하다 보니 도색은 저렇게 형형색색으로 돼 있다.
평화의 댐 자체는 민통선에 있지 않다. 하지만 근처의 두타연 계곡은 민통선 안이라고 한다. 여기를 들어가려면 또 다른 장소에서 출입증을 끊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검문소에서 즉각 신분증만 까면 되는지 난 잘 모르겠다.

전국의 어느 민통선이든 자가용을 이용한 출입 허가를 받은 외지인은

  1. 받은 임시 출입증을 차 앞유리에 잘 보이게 노출시킬 것.
  2. 이런 데서 교통사고라도 나면 피차 왕창 골치 아파지니 절대적으로 안전 운전할 것.
  3. 목적지가 아닌 길가에 무단으로 주· 정차를 하지 말고 길을 빨리 통과할 것.
  4. 블랙박스를 끄고 다닐 것. (군사 시설을 무단 촬영하지 말 것)
  5. 민간인이 전투복을 입고 다니지 말 것.
  6.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모든 용무를 마치고 퇴장할 것.

이라는 수칙이 존재한다. 도로 통과형이 아닌 일반적인 민통선 구간들은 반드시 들어갔던 초소로 나오는 게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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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마지막 목적지가 있는 홍천으로 가기 위해 경로를 남쪽으로 바꿨다. 양구, 화천 다음으로 계속 서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온다. 하지만 철원은 예전에 간 적이 있으며, 어차피 우리나라의 최북단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서는 춘천-홍천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남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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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경치가 아주 아름다운 어느 쉼터를 발견했다. 이 사진엔 담기지 않았지만 뒤에는 지붕 달린 정자도 있다. 저 벤치에 앉아서 노트북 PC를 들여다보는 인증샷도 남기고 싶었으나.. 본인은 싱글 솔로이다 보니 사진을 찍어 줄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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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화천 수력 발전소를 발견했다. 역시 사진에는 담기지 않았지만 여기 근처에는 군부대 포병 훈련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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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계획에는 없었는데, '파로호' 안보 전시관이라는 게 있어서 여기도 잠시 들렀다. 파로호란 근처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북한강 상류가 화천댐에 가로막히고 고여서 호수를 형성한 것이다.
여기 일대의 댐과 수력 발전소는 일제 강점기 말기(1944년)에 건설되었으며, 6· 25 전쟁 중이던 1951년 4~5월 사이에는 북한군의 수공에 맞서 이 댐을 점령하거나 파괴하기 위해서 국군· UN군과 북한· 중공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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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풍경은 이 사진 한 장만 남겼다.
이렇게 화천을 지나고 드디어 춘천에 진입했다. 춘천, 그리고 더 남쪽의 홍천에서는 군사 훈련 중인 탱크들이 줄지어 도로를 달리는 걸 유난히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여러 대의 차량들이 저속으로 일종의 떼빙(대열운행)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민간인 자동차들의 통행이 좀 지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일반적인 군용차와는 달리 탱크는 엔진 소리가 뭐랄까.. 유별나게 시끄럽고 더 기괴했다. 여느 중장비의 엔진 소리와도 달랐다. 차마 말과 글로 묘사할 수가 없다. 게다가 탱크는 차체의 폭도 여느 자동차보다 더욱 크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서 교행이나 추월하기가 더욱 난감했다.

그래도 저것도 다 나라 지키려고 저러는 건데 신기한 구경 하나 하는 셈치고 관대히 넘어갔다. 6· 25 전쟁이 벌어지던 당시에 우리나라는 저런 탱크가 아예 한 대도 없었다. 그 반면 북한군은 242대 보유. 이 숫자 통계는 초딩 시절부터 배워서 알고 있었다.
안전 운전에 지장을 줄 정도로 졸음이 밀려 와서 춘천 외곽에서는 잠시 차를 세워서 20분 남짓 쪽잠을 잔 뒤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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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의 공식 명칭은 '강 재구 소령 추모 공원'이고 입구 주변이 이렇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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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목사 하면 '일사각오'가 떠오르듯 강 재구 소령은 그야말로 '희생정신', '살신성인'의 아이콘이다.
1960년대에 한국군이라는 게 조직 분위기가 지금 군대보다 결코 더 좋지 않았다. 아직 우리나라가 북한보다 못살던 시절이었고 북한의 무력 도발 위협은 임팩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컸다.

그러면 군대를 열악한 자원이라도 최대한 잘 활용해서 나라를 잘 지키기라도 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합리적인 시스템 대신, 까라면 까 식의 미개한 일본군 관행에 사람 잡는 구타· 똥군기가 만연했다. 그래 놓고는 "나 간부다" 편법 한 마디에 초소가 숭숭 뚫리기도 했으니 군대가 제 역할 제대로 못 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연간 군대 내 전체 자살자· 사고 사망자가 두 자리 수이지 그때는 세 자리 수를 가뿐히 넘어서곤 했다. 옛날 군대가 지금 군대보다 좋은 건 딱 하나, 아직 출산율 높고 인구가 많던 시절이다 보니 조금만 몸이 안 좋으면 방위· 면제로 빠지는 길도 지금보다야 훨씬 더 꽤 관대하게 열려 있었다는 것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부하가 실수로 병사들 한가운데로 떨어뜨린 수류탄을 수습하려고, 그것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상관이라는 사람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걸 온몸으로 웅크려 덮어서 막은 뒤 산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건 정말 전군의 사기를 진적시키는 미담이 아닐 수 없었다.

강 소령이 소속되었던 부대는 북한과 대치해 있는 평범한 전방 부대는 아니고, 베트남 파병을 갈 예정이던 부대였다. 박통이 외화벌이와 국력 신장을 위해서 선진국 군인에 비해 저렴한 인건비와 높은 가성비를 메리트로 내세우며 베트남전 파병을 결의했다. 그러자 맨주먹과 근성밖에 가진 게 없고, 시골에서 농사만 짓는 것보다야 더 짧고 굵게 돈을 많이 벌어 와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려 한 장정들이 여기에 많이 지원한.. 그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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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재구 소령 추모비와 추모탑이 이렇게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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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아담한 크기이고 강 소령의 흉상, 초상화, 유품들이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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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소령은 나이 30도 못 되어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 대신 그야말로 불멸의 이름을 남기고 영예를 얻었다. 고인의 모교에서는 육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 고등학교까지 다 고인을 기리고 있고, 육군 부대에도 '재구 대대'라는 이름의 대대가 생겼다.

어릴 때부터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라는 모델격의 인물을 마음에 두는 게 참 좋은 것 같다. 육사 32기 출신의 엘리트 군인으로 대장까지 역임한 정 승조 장군(1976년 임관, 2013년 예편)이 있는데, 이분이 1976년 당시에 육사를 수석 졸업하고 신문 기자와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강 재구 소령의 전기를 읽고 큰 감화를 받아서 육사를 갈 생각을 하게 됐다"라고 밝힌 바 있다. 군사정권 시절에 육사는 학비 걱정 없지, 진로도 안정적이지, 가히 오늘날의 SKY급 대학에 맞먹는 위상과 입결을 자랑했다는 점도 생각할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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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세로쓰기여서 읽기가 어렵다. 강 소령 역시 처음에는 수류탄을 다른 데로 멀리 던져 버리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몸으로 폭발을 막는 방법을 선택하게 됐다.

이분에 대해서 상훈 기록을 찾아보면, 어디서는 태극 무공 훈장이라는 최고 등급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고 다른 어디서는 4등 공로 훈장을 받았다고 돼 있는데.. 무슨 성경의 모순 구절을 보는 것 같다.
이것도 성경의 모순 구절 풀듯이 문제를 풀면 된다. 본문 텍스트에 나와 있듯, 정답은 '둘 다 받았다'이다. 더 높은 훈장은 나중에 추가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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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이 산화하던 당시에 입었던 전투복은 수류탄 파편을 맞아서 저렇게 너덜너덜해져 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다른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수류탄 폭발로 인해 고인은 사지가 절단될 정도의 치명상을 입었고, 그래도 폭발과 함께 즉사한 건 아니고 잠시 살아 있었다고 한다.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린 병사의 실명(박 해천 이병)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저 병사는 비록 무슨 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지만, 평생 얼마나 큰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살았을지 모르겠다. =_=;; 지금은 그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난 지 반세기가 넘게 지나기도 했고, 저분의 근황이 어떤지는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게 없다.
이름이 기록으로 남아 버린 이상, 나라면 은폐(?)를 위해 개명부터 했을 것 같은데, 그 시절은 지금처럼 쉽게 개명이 가능한 때도 아니었다는 게 문제다. -_-;;

실제로 생존 무장공비 출신인 김 신조 씨는 얼굴이 알려진 건 말할 것도 없고, 이름까지 교과서에 대문짝만 하게 실려서 그 당시 남조선 군필자들의 웬쑤가 됐다. "니놈 때문에 내가 군대 전역도 늦어지고 말년에도 얼마나 조뺑이 치고 고생했는지 알아?" 야사에 따르면 길거리에서 어느 예비역 아저씨에게 뒤통수를 까이기까지 했다고.. 결국 그는 부담감을 견디다 못해 실제로 '김 재현'으로 개명까지 했다. 최소한 법적으로는 김 신조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근황이 더 검색되지 않게 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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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 와서 새롭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강 재구 소령도 생전에 크리스천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금까지 인터넷으로만 봐 오던 곳들을 실제로 돌아다니면서 답사를 잘 마쳤다.
날씨가 여전히 덥고 물과 전기가 부족하고, 또 배고프고 피곤하기도 해서 여기서 더 놀지는 않았다. 조양 IC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여 집에 돌아갔다.

이틀 동안 1분 1초가 버릴 게 없는 즐거운 여행을 했다. 산과 계곡과 바다를 모두 구경했으며 고속도로부터 엔진 브레이크 비탈길까지 골고루 750km에 달하는 거리를 운전했다. 이 정도로 욕구를 해소했으니, 당분간은 또 서울을 빠져나간다거나 차 끌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은 생각이 안 들 것 같다. 시골은 차량 운행이 뜸하고 어디든지 주차 걱정 없이 차를 세울 수 있는 것 하나는 기가 막히게 좋았다.

강원도는 꽤 넓다. 내년 여름에는 정선, 영월, 태백, 동해처럼 태백선 철도와도 인접해 있는 강원도의 '남부'를 돌아다녀 볼 예정이다. 영역이 공교롭게도 강릉 이남이냐 이북이냐로 나뉘는 것 같다. 이번에 다닌 곳은 온통 북부이니 말이다.
또한 내년엔 이제 병특 마친 직후에 만들었던 여권이 유효 기간이 1년 남짓밖에 안 남는데, 아직도 여권엔 사증란이 많이 남아 있다. 어딜 가든 외국 여행도 한번 다녀오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3 08:31 2016/09/23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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