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터널의 번호

예전에도 남산 터널에 대해서 글을 쓰면서 명칭의 일관성에 대해서 살짝만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개인적으로 서울 남산 터널은 “제1~제3 남산 터널” 같은 식으로 불렀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게 제1~제4 땅굴, 제2 경인 고속도로 같은 유사 분야의 다른 명칭들과 일관성이 있다. 교량조차도 한강대교, 양화대교, 한남대교는 예전 명칭이 각각 제1~제3 한강교였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순서를 나타내는 의존명사 ‘-호’는 일반적으로는 보통 제일 끝에 붙는다. 서식 2호, 명령 1호처럼.. 이게 자연스럽다. 그 반면 “남산 1호 터널”은 다른 유사 용례가 없고 너무 이상하게 느껴진다.
참고로 호 뒤에 추가로 더 붙는 ‘호실’, ‘호선’, ‘호기’ 같은 걸 보면 ‘실, 호, 기’도 의존명사이기는 마찬가지다. ‘터널’과 같은 위상의 형태소가 아니다.

요까지만 글을 썼는데..
팔당 역 근처의 국도변에 연달아 등장하는 터널들의 이름도 찾아보니 거기는 '팔당 제1터널', '팔당 제2터널'... 이렇게 이름이 붙어 있었다.;;; 일관성 없는 혼란의 극치이긴 하다만 제n이 그래도 차라리 n호보다는 나은 것 같다.

2. 비슷한 단어

decease (디씨-스) 죽다 / disease (디지-즈) 질병
철자와 발음과 뜻이 서로 은근히 헷갈리기 쉬운 단어쌍인 것 같다.
loyal(충성스러운)과 royal(왕가의)
 jealous(질투심 강한, 시샘하는)와 zealous(열광· 열성· 열심적인)에서도 비슷한 심상이 연상된다.

sharp / pointed
'날카롭다'와 '뾰족하다'의 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뾰족한 건 진짜 0차원 점으로 모이는 것만 해당하고, 날카로운 건 1차원에도 해당된다. 칼날이 닿는 곳이 선을 형성하니까 말이다. 송곳을 끝이 뾰족하다고는 하지만 날카롭다고는 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도 미래에 구분이 없이 모호해질 여지는 있음)

dark는 '어둡다'와 '캄캄하다' 중에 어디에 더 가까울까 궁금해한 적이 있다. 송 명희 시인의 찬송시 중에도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미워했고, 우리의 캄캄한 마음이 그를 몰랐으며"가 있으니 말이다.
물리적으로 빛이 안 비쳐서 풍경이 시커먼 것 중심인 단어가 있는가 하면, 바깥과는 무관하게 내가 지금 앞이 안 보이는 것 중심인 단어도 있다. 둘 다 dark에 대응할 수도 있지만, "아 문제가 너무 안 풀려서 눈앞이 캄캄하다"라고 말할 때는 "눈앞에 어둡다"라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진짜로 시력이 어둡거나 야맹증을 앓고 있는 건 "눈이 어둡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관계가 서로 오묘하다.

pull / tow / haul
모두 기본적으로 '끌다, 견인하다'라는 뜻이 있다. pull은 뜻이 제일 넓고 보편적이기 때문에 사고 차량이나 불법주차 차량을 다른 기계로 견인하는 건 tow라고 표현하는 것 같다. 공항에서 갓 출발한 비행기를 자력 주행 가능한 곳으로 밀거나 끌어 주는 차량도 tow car라고 부른다.
한편, haul은 기관차가 객차를 끌고 간다고 할 때 종종 본 것 같다. tow와는 어감이 미묘하게 다른 상황이어서 그런 것 같다.

3. 중국어

내가 제대로 구사할 줄 아는 외국어는 현재 영어밖에 없긴 하다만, 그래도 중국어에 일말의 관심을 갖게 만드는 것은 (1) 열차 안내방송과 (2) 아저씨 대사다.
(1)이야 “번쯔 리에처 목포 더 무궁화 하오 리에처” 같은 것이고, (2)는.. 해당 영화가 정말 명대사가 너무 많은 작품이어서 말이다. “즈 차예시 총 샨양 아이더. 허 디얼바.”

테이큰에 이어 아저씨에 너무 꽂힌 나머지 오죽했으면 도대체 심양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서 대륙 지도를 꺼내서 찾아 보기까지 했다. 딱히 차가 특산품인 동네는 아닌거 같던데. ㄲㄲㄲㄲㄲㄲ
그나저나 덩달아 같이 알게 된 건, 하얼빈이 우리나라에서 딱 정북향이라는 점이다. 안 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인 다롄-뤼순과도 생각보다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다. 하얼빈도 막연히 황해 건너편 대륙 어딘가에 있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시기적으로 별 관계 없는 임시정부의 망명 동선 같은 것과 헷갈렸던 것 같다. 만주, 훈춘 이런 건 그냥 동쪽 끝이고.

“중국서 조폭영화 좀 봤는갑네. 깜장으로 쫙 빼.. 무슨 장례식 왔나. ㅋㅋㅋㅋ” 를 통역할 수 있으려면 중국어 공부를 많이 해야 할 듯하다.

인터넷 글을 통해 보게 된 새로운 영단어들을 단어장으로 정리해서 틈틈이 외우고 있다. 일본어도 최소한 글자(히라/가타)는 좀 읽을 수 있게 테이블을 암기하고 있는데 머릿속에 정말 안 들어가진다. 특히 읽는 거 말고 쓰는 건..;;

어학이라는 게 사람에게 매우 큰 지적 자산이요 스펙이 되는 건 사실이다. 언어 장벽으로 사람들을 갈라 놓은 게 괜히 신의 한수가 아니다. 이거 생각 이상으로 극복하기 어렵다. 언어를 뒤엎는다는 건 아예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 놓는 거니까.
본인은 창조론자에 언어 신수설을 믿는 사람으로서, 언어마다 문법과 어휘에 이유 없이 존재하는 온갖 괴상한 굴절과 불규칙들도 배후에 일종의 지적 설계가 있다고 추측할 정도이다. -_-;;

이 와중에 그나마 영어 같은 언어가 세계어가 된 건 축복이다. 철자법이 개판인 것만 빼면 그나마 글자도 형태가 간단하고, 이 정도면 굴절어가 아닌 그냥 고립어(형태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굴절이 굉장히 단순해졌고, 그러면서 정/부정관사 단/복수처럼 엄밀해야 할 건 엄밀하게 남아 있고, 쓸데없는 높임법 따위 없이 2인칭은 하나님이래도 you라고 간단하게 호칭할 수 있고..

그렇다고 해서 모국어가 쓰레기라는 소리는 아니다. 본인은 이런 주류 영어· 알파벳과는 구조가 극과 극으로 너무 다른 한국어· 한글이 그 때문에 오히려 유니크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창의적인 활용 방안을 찾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어도 언어의 사회성을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는 최대한 모호하고 무질서한 면모를 없애고 문법과 어휘를 조금씩 개량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4. More..

  • 우리말의 '보통'은 생각보다 뜻이 굉장히 많고 중의적이다. 부사로서 in general이라는 뜻과 형용사로서 ordinary라는 뜻이 있는 품사통용어이다. 아, 거기에다 빈도부사(sometimes) 같은 뜻도 지닌다. 와/과(접속조사 and & 부사격조사 with), 그리고 '다른'(형용사 different & 관형사 another)만큼이나 어떨 때는 굉장히 불편하게 느껴진다.
  • 친정, 처가, 외가 .. 다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인 거 맞지?
  • 똑같이 '돌'이 들어가는 이름인데 리빙스턴 / 산돌(서체 회사 이름이기도!), 아인슈타인 / 일석..;; 어감이 굉장히 다르다.
  • 똑같은 lawyer이어도 성경에 나오는 율법사와 오늘날의 변호사는 완전히 다른 개념임. 유대교의 priest와 천주교의 priest가 완전히 다르듯이 말이다.
  • 정신승리, 영적 승리.. 영어로는 똑같이 spiritual victory인데 그야말로 천차만별로 뉘앙스가 달라진다. 영어는 <아Q정전>의 영문 번역본에서 실제로 쓰인 단어이기도 하다.
  • 영어는 I/Y 같은 고모음에서 장모음/단모음이 오락가락 하는 편인 것 같다. vitamin(바이/비타민), missile(미싸이얼/미쓸), direct(다이렉트/디렉트). 비타민은 그렇다 치지만 미국 영어는 뒤의 두 단어에 대해서 영국식 국제 영어와는 달리 단모음을 선호한다.
  • 난 '이름'이 full name(성명)도 되고 first name(...)도 되는 게 불편하고 싫었는데 잘 알다시피 영어에도 어차피 day(날/낮), man(사람/남자), egg(알/달걀) 같은 어정쩡한 의미 관계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man과 day는 성경 번역과도 아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정도의 의미 중의성을 제공한다.
  • pray, bless, repent 이런 단어들은 기본적인 심상은 공통이지만 동작 주체 내지 대상이 사람이냐 하나님이냐에 따라서 구체적인 번역이 달라지는 단어이다. (기도하다/부탁하다, 복을 빌다/복 주다/찬송하다, 회개하다/돌이키다)
  • 난 개인적으로 '미덥다 미쁘다' 이런 용언이 안 그래도 믿음 짱 종교의 경전인 성경에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솔직히 정치색만 없으면 두음법칙도 없는 게 더 낫고.. 친구와 동무, 국민과 인민도 구분해서 쓰는 게 더 나을 것이다. 굳이 얼음보숭이 같은 이상한 말 만들 필요 없이 이미 있는 말이라도 적절히 구분해서 잘 쓰면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24 08:34 2017/02/24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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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언어 관련 생각들

1.
“A is better than B.” (A는 B보다 더 낫다)라는 영어 평서문에 담긴 정보를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을 만든다면 “Who is better than B?” (누가 B보다 낫다고?)가 될 것이다. 이건 쉬운 문제다.
그럼 B를 묻는 질문은 뭐가 될까?

Who is A better than? (A가 누구보다 낫다고?)
Than who is A better?

내 문법 시스템으로는 위와 같은 두 문장이 만들어지긴 한데... 평생 저런 형태의 문장을 만들 일이 없다가 만들고 보니 정말 괜찮은가 모르겠다.
인간의 언어가 경이로운 점이 뭐냐 하면 화자는 평생 접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장을 그것도 안긴 문장· 이어진 문장 같은 복잡한 형태로 자유자재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2.
그리고 than 다음에는 문법 원칙상으로는 목적격이 아니라 주격이 온다. better than me가 아니라 일단은 better than I가 맞다는 것. 하지만 It's me/I만큼이나 이건 원어민들 사이에서도 구분이 굉장히 문란해져 있다.
게다가 who와 whom의 구분도 이와 같은 처지이다. 3인칭 단수는 him/her을 쓸 곳에다가 he/she를 갖다붙이지는 않을 텐데 왜 그러는 걸까?

테이큰에서도 리암 니슨이 유괴범을 고문하면서 "You sold my daughter? You sold her? Huh? To who(m)?"라고 물을 때 나는 당연히 whom이라고 말했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들어 보니 너무나 분명하게 그냥 who였다.
의문대명사 얘기가 나오자마자 이번에도 내 머리는 0.1초 만에 테이큰 대사를 검색 결과로 내놓았다. 영화 한 편 제대로 봐 놓으니 실생활에서 대사를 정말 많이 우려먹으며 지낸다. 테이큰은 좋은 영화이다~ㅎㅎ

3.
다음으로, “Replace A with B.” (A를 B로 바꿔라)라는 문장을 생각해 보자.
여기서 A를 묻는 wh 질문은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뭘 바꾸는가?) 이다.
그럼 또 B를 묻는 질문은 어떻게 만들면 될까? 영어는 with만 붙이면 간단히 해결된다.

With what do we replace? (우리는 무엇으로 바꾸는가?)
What do we replace with?

그래서 찾기/바꾸기 대화상자를 우리말로 옮길 때면 난 늘 껄끄러웠다. Find what / Replace with가 각각 "찾을 문자열 / 바꿀 문자열"이긴 한데, '바꿀 문자열'은 문맥에 따라 개념상 B뿐만 아니라 A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어에서 체언 없이 조사를 앞세워서 '으로 바꿈'이라고는 안 쓰니까 의미가 엄밀하지 못하게 되는 건 뭐 어쩔 수 없다. (뭐, See also를 가뿐하게 '도보시오'라고 옮긴 백괴사전은 참 기발하다.)

4.
우리말에서 (내가 보기에) 관계가 굉장히 이상해져 있는 단어의 쌍이 최소한 둘 있는데, 바로 '장/쪽'과 '성/이름'이다. 양면이냐 단면이냐가 분명치 않다 보니 '다섯 장'은 대부분의 경우 다섯 페이지이지만 가끔은 앞뒤로 열 페이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page/sheet에는 양면 개념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말만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이름의 경우, 가끔은 first와 family를 모두 포함한 full name을 뜻하지만 가끔은 그 자체가 '성'과 대립하여 first name만을 뜻하기도 한다. 한 단어가 상위 개념과 하위 개념을 모두 포함하다니 거 참..;;
성/이름도 그렇고 다시 '장'으로 돌아오면, '장'은 '쪽'뿐만 아니라 알다시피 chapter를 의미하기도 해서 더욱 지저분하다. 이런 건 순우리말만으로 도저히 변별이 불가능하다면 외래어를 로컬라이즈 해서라도 논리적으로 분간이 되게 만들어야 하지 않나 싶다.

5.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한국어에는 sibling을 뜻하는 한 단어가 없나 참 궁금하다. '내일', '초록' 같은 건 순우리말이 없어서 한자어라도 있지만, sibling은 부모/자식 같은 한 단어도 없어서 그냥 "형제 자매는 있습니까?" 이렇게 매번 풀어서 설명하게 되는 게 불편하다. 이렇게 꼭 필요한 우리말이 없으니 전산학에서 트리 구조를 설명할 때는 오늘도 '시블링, 시블링' 이런 외국어가 나올 수밖에 없다.

6.
한국어는 '저희'라는 1인칭 복수형이 존재하는 것도 다른 언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아이템이라고 한다. '우리'와는 달리 청자를 확실히 배제한 1인칭 복수이고 1인칭 쪽을 좀 낮춤으로써 청자를 높이는 효과까지 있으니, 특히 회사가 고객에게 말할 때 사용하기에 무척 적절한 대명사이다. 언어학자에 따라서는 이것을 제4인칭으로 분류하기까지 한다고 들었다.

7.
종교관 중에는 이신론(deist)이라는 게 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그 신은 아주 기계적이고 정교한 자연 법칙에 가까운 추상적인 존재일 뿐, 무슨 인격을 갖고 있고 인간의 삶에 관여하거나 인간에게 무슨 계시를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종교관이다. 뉴턴의 법칙은 절대적인 법칙이긴 해도 무슨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은 아닐 테니까. 유신론을 뭔가 무신론 내지 불가지론 스타일로 풀이한 것 같다.

미국이 지폐에까지 In God we trust가 적혀 있는 나라이고, 메이플라워 서약 역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으로 시작할 정도로 기독교 이념이 철철 넘쳤다고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초대 대통령을 포함한 건국 공신들이 다 프리메이슨이네, 구원받은 크리스천이 아니네 하는 이의 제기도 많다. 이들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믿은 신자가 아니라 실제로는 저런 이신론자였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신론의 '이'는 한자로 무엇일까?
二(2)는 당연히 아니요,異(다름)도 아니며, 바로 理(이치)이다. 이성이라고 할 때의 그 한자이다.
한때 일부 '유(柳)씨' 가문에서 자기 성을 한글로 '유'가 아닌 '류'로 쓰게 해 달라고 소송도 냈던 것 같던데, 理는 '리'로 좀 구분해서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리신론'. 二나 異와는 완전히 다르지 않은가?
게다가 우리는 이미 "그럴 리가 없다" 같은 문맥에서 의존명사 理는 두음법칙 없이 오랫동안 잘 사용해 오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생각이 더욱 강하게 들기도 하는 것 같다.

8.
뭐, 영어도 만능은 아니긴 마찬가지다. time이 시각도 되고 시간도 되고.. number가 번호도 되고 수도 되어서 꽤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건 본인이 예전 글에서 몇 번 지적한 바 있거니와, free가 무료 & 자유를 다 의미하는 것도 상당히 불편한 점이다. "free software"는 영어권 사람이 문서에다가 친히 'free as in free beer(맥주가 공짜!)'이라고 모호성 해소를 해 줄 정도로 free는 유명한 다의어이다.

한국어가 ㅐ와 ㅔ의 중화로 인해 '내, 네'가 동음반의어가 돼 버린 것은 굉장한 막장 상황이긴 하다만, 영어도 2인칭 대명사의 단· 복수 구분이 없는 것과, 남녀 구분 없이 3인칭 단수 사람을 간단히 일컫는 대명사가 없는 것은 굉장히 불편한 점이다. 이것 때문에 (s)he, he or she, 심지어 they 등 갖가지 꼼수가 나돈다. 그렇다고 사람까지 it으로 싸잡아 일컬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9.
영어에서 안테나(antenna)의 복수형은 antennas또는 antennae이다.
곤충의 더듬이를 가리키는 안테나의 복수형은 불규칙인 antennae인 반면,
더 나중에 생긴 기계 안테나의 복수형은 규칙인 antennas이다.

이와 비슷한 진통을 겪고 있는 대표적인 단어는 mouse이다. 요놈의 복수형에 대해서는 영어권에서도 혼란이 많다.
전통적인 생물 생쥐의 복수는 mice이지만, 컴퓨터 포인팅 장비인 마우스는 mouses도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동사 hang은 처음에는 '걸다, 매달다'이다가 '사람 목을 매달다 → 교수형에 처하다'라는 뜻이 확장되어 나갔다.
본래 뜻인 '걸다, 매달다'의 과거형은 불규칙인 hung이지만, '교수형에 처하다'의 과거형은 역시나 hanged이다.
이렇듯, 다의어의 경우, 단어의 활용· 파생 형태에까지 그대로 의미 확장이 반영되지는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10.
그나저나 일본어에는 우리말 주격조사 이/가(일본어 발음으로는 '가')와 보조사 은/는(일본어 발음으로는 '와')에 개념적으로 거의 그대로 대응하는 조사가 존재한다는구나..!! 신기하다. 그래서 '고레와', '고레가' 요런 말이 있었구나.
지구상에 이런 개념 pair가 존재하는 언어는 한국어/일본어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굉장한 레어템을 공유한다는 것만으로도 두 언어가 문법 구조는 무척 비슷하며, 상호간 학습 장벽을 크게 낮춰 준다.
일본어는 음운 구조가 워낙 간단하다 보니 한국어처럼 받침 유무에 따른 이/가 바리에이션 같은 건 없다. 다만, 쓰기는 '하'라고 적고 읽기는 '와'라고 이상하게 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들었다.

11.
'르' 불규칙이 적용되는 형용사 용언인 '빠르다'와'다르다'를 생각해 보자. 얘들은 '-ㄹ리'가 붙어서 '빨리, 달리'라고 부사형 활용이 가능하다. '-이/-히'라는 부사형 접미사가 붙어서 얼추'빠르게, 다르게'를 짧게 줄인 뜻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멀다/가깝다'에 서 '멀게/가깝게' 대신 '멀리/가까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런데 이런 활용은 보편 생산적이지 않다. 즉, '바르다'(right, correct 형용사), '가파르다', '푸르게' 같은 용언은 저렇게 활용이 가능하지 않다. '게으르다'는 '게을리 하다' 정도로만 활용 가능한데 양상이 좀 다른 듯.
그래서 '달리', '빨리' 같은 단어는 좀 예외적인 케이스로 간주되어서 사전에 별도로 등재돼 있기도 하다.
올림픽 표어를 '보다 빠르게'라고 번역할 때와, '더 빨리'라고 번역할 때는 어감이 서로 확 달라지는 것 같다. "더 빨리, 더 높게, 더 힘차게" 중에서 faster만 '-게'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주목하라.

'다르다'가 활용된 '다른'은 말 그대로 활용된 형용사(different)도 되지만, another를 의미하는 관형사 '다른'도 된다. 같은 형태의 단어가 두 의미를 모두 지닌다는 게 꽤 흥미롭다. '와/과'가 and뿐만 아니라 with의 뜻도 갖는 것처럼.
사전에서 '다른'을 찾아 보면 관형사의 뜻만 실려 있다. 형용사 하나만 있는 영어와는 달리, 국어의 체언 수식언에서 형용사와 관형사가 구분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가 이 때문이다. 국어에서 형용사는 수식언 중에서 용언에서 유래된 것만을 일컬으니까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새 이름으로'에서 '새'는 관형사이지만, '새로운'은 형용사이다.

12.
옛날에는 인간 학문의 모든 분야가 그런 것처럼 언어 쪽도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학풍이 꼴보수였다.
대표적인 예가 <걸리버 여행기>를 지은 조너선 스위프트인데.. 사회 풍자적인 선구자라는 점에서는 중국의 루 쉰과도 이미지가 비슷해 보인다.

루 쉰은 한자를 없애지 않으면 중국 인민은 망한다고까지 한자를 디스한 걸로 유명한데, 스위프트는 사전을 만들어서 사랑스러운 자기 모국어 영어의 스냅샷을 기록으로 남기고, 앞으로 세속화되거나(?) 더럽혀지지 않게 영원토록 불변의 언어로 남길 생각을 했었다고 한다. couldn't 같은 구어체의 어휘가 버젓이 인쇄되어 나오는 것에도 왕창 분노했다고...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일명 인터넷 축약어, 한글 파괴 이런 걸 보면 노발대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에휴.." 이랬을 것 같다.

오늘날은 분위기가 이와는 완전 반대로 갔으니 참 아이러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인 건 존재하지 않는다, 사전은 말뭉치 데이터를 바탕으로 당대의 언어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반영만 하면 된다."이다. '너무'도 사람들이 다 긍정적으로 쓰면 뜻풀이를 바꿀 수 있다. 동성애자들도 결혼을 하니까 결혼의 정의도 굳이 남자와 여자가 하는 건 아니라고 업데이트 할 필요가 있다는 식이니까.

지금 학풍이 0이고 스위프트가 1이라면 난 그래도 여전히 0.7~0.8 정도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모든 걸 감히 판단할 만한 실력은 없지만, 난 그래도 언어에도 타락이라는 게 있긴 하다고 개인적으로 믿는다. 물론, 그 타락이라는 게 겨우 맞춤법 안 지키고 상스러운 비속어 남발 같은 단편적인 현상만을 의미하는 건 아님.
그냥 쓰기 나름, 정하기 나름인 용례가 바뀌는 것은 상관없지만, '다르다/틀리다'처럼 분명하게 구분이 되고 있던 개념의 구분이 문란해지는 것만은 막았으면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01 08:35 2016/02/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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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관련 생각들

또 오랜만에 우리말 관련 뻘생각들을 투척한다.

1.
여자의 멸칭 '년'은 한자어가 전혀 아닌데, 남녀를 싸잡아 부르는 멸칭은 왜 '년놈'이 아니고 '연놈'이라고 두음법칙이 과잉 적용돼 있는지 나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ㄴ 음가를 빼서 ㅇ으로 바꿔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2.
'박다'와 '받다'에는 모두 다의어 명목으로 '충돌하다/부딪치다'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둘의 차이가 뭘까? 표준 국어 대사전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박다 01
「9」머리 따위를 부딪치다.
받다 02
「1」머리나 뿔 따위로 세차게 부딪치다.

공식 석상에서 더 정확한 단어로 인정되는 것은 '받다'인 듯하다. '들이받다'가 있으니까.
그런데 <블랙박스로 본 세상> 같은 프로를 보면, 사람들은 전부 '박았다'라고 말을 하는데 자막은 온통 '받았다'라고 보정을 해서 나가는 게 본인이 보기엔 굉장히 어색했다.

차와 차가 부딪친 것은 '들이받다'뿐만이 아니라 '꼬라박다' 같은 말도 쓴다.
사전의 뜻도 비슷해 보이는데, 현실을 반영하여 '박다'와 '받다'에 대한 더 정확한 관계가 정립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구어 말뭉치까지 분석을 해야 하려나?

3.
현재 사전에 '뱃속'이라는 단어는 오로지 다음과 같은 비유적인 의미만 풀이되어 있다.

‘마음01’(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을 속되게 이르는 말.

즉, 뱃속에 있는 것이 마음의 상징인 심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뱃속은 마음과는 다른 뜻으로 훨씬 더 많이 쓰이며 이는 말뭉치를 분석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뱃속의 아기", "뱃속에 들어간 음식" 등, 소화기관이나 자궁 용례가 더 많다. 배의 속에는 심장만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국어사전이 반영해야 하지 않나 싶다.

4.
언어학에는 동사가 기술하는 동사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태'(voice)라는 개념이 있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한자어에 접사가 붙어 동사가 되는 단어들을 보면, 태는 그 단어 자체의 의미에 의해 결정될 때가 있는가 하면, 그 접사에 의해 결정될 때도 있다. 이게 굉장히 뒤죽박죽이며, 국어사전은 이런 걸 딱히 명확하게 결정하지 않는 편이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 시키다: 남을 하게 함
  • 하다: 자기가 뭘 함(자동사), 남을 뭘 하게 함(타동사?)
  • 되다: 자기가 뭘 당함
  • 되어지다: (비공식. 마치 이중과거만큼이나 이중피동?)

단어마다 위의 태 매핑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 걸까?
예를 들어 지금 킹 제임스 흠정역 성경에는 창세기부터 계시록을 통틀어 '소멸하다'라는 단어가 없다. '소멸되다'와 '소멸시키다'만 있다. 남을 없애는 건 '시키다'이고, 자기가 없어지는 건 '되다'로만 옮겨졌다.
'소멸하다'라고만 써 놓고 consuming fire을 '소멸하는 불'이라고 써 놓으면, 이게 꺼져 가는 불인지 아니면 다른 걸 태워 없애는 불인지 언뜻 봐서 분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인해 '오염'이나 '마취' 같은 단어도 동사가 될 때엔 '시키다' 아니면 '되다'만 붙지, '하다'는 거의 안 붙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국어사전의 공식적인 규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5.
(1) And의 처리 문제랑, (2) 정관사 the의 표현 문제, (3) 과거 시제를 "-니라"라고 뭉뚱그리는 건
우리말 성경의 번역에서 정말 영원한 아킬레스건으로 남지 싶다.
뭐 특정 역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어의 구조적인 한계에 가깝기 때문에.
그리고 And it came to pass도 이거 번역하는 방법이 없을까?

6.
'장'은 page(페이지 수 단위)랑 chapter가 굉장히 헷갈리고,
'절'은 verse랑 clause(주어 술어가 갖춰진 안긴문장 단위)가 굉장히 헷갈릴 때가 있다.
우리말 순화를 연구하려면 괜히 잘만 쓰이고 있는 다른 외래어들을 다듬을 게 아니라 이런 것들부터나 좀 확실하게 구분하는 우리말을 만들어서 국립국어원 차원에서 밀어 붙였으면 좋겠다.

7.
"어머니께서 내게 과자를 만들어 주셨다"라는 문장을 길게 영작하면 My mother made cookies for me. 정도가 된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요건 그냥 My mother made me cookies. 라고 해도 된다. 중학교 영문법상으로는 전자와 후자는 각각 3형식과 4형식이다.

하지만, 맨 첫 예문에서 목적어가 me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길면.. 예를 들어 children who have never eaten anything since yesterday 정도 되면.. 영어는 길고 복잡한 덩어리는 뒤로 빼는 걸 좋아하는 언어이다. 오죽했으면 가주어 it까지 있을 정도이고.. 그러니 그때는 cookies for children who ... 이렇게 가는 게 훨씬 나은 작문이다. 또한 영어는 3음절 이상 정도 되는 긴 형용사는 비교/최상급도 -er, -est를 안 붙이고 more / most로.. 이것 자체도 형용사인데 부사로 임시로 품사통용이 된다.

이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길이에 대한 선호 편차가 한국어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예는 아마 긴 부정과 짧은 부정이지 싶다. '안'이 자연스럽게 붙을 수 있는 용언과, 그렇지 않고 '-지 않다'로 써 줘야 하는 용언의 차이를 규명하라고 하면 한국어 토박이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8.
우리말에서 품사 통용 때문에 헷갈리는 문법 요소 4천왕은 조사, 어미, 접미사, 의존명사이다. 이를 다음과 같이 표로 정리해 보았다.

  어미 (E*) 접미사 (X*) 의존명사 (NNB)
조사 (J*) 완전히 다름.
AND: 와/과/랑(조사) vs 고/며 (어미)
너희들(접미사) 다 안녕들(조사) 하신가? 너뿐(조사)만이 아니라 나도 그렇게 했을 뿐(의존명사)이었다.
어미   그림(명사 파생 접미사)을 잘 그림(명사형 전성어미). 이곳에서 산 지(의존명사)는 오래 됐지만 계속 여기서 살지(어미)는 모르겠다.
접미사     김 씨(의존명사)는 김씨(명사 파생 접미사) 집안의 자랑이다.

위의 표는 헷갈리기 쉬운 품사 위주로 둘씩만 비교했지만, 실제로는 한 단어가 셋 이상의 품사가 통용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지'는 위의 표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명사 파생 접미사도 되며, '들'에도 의존명사 의미가 있다.

9.
그리고.. 이건 아마 예전에도 했던 말일 텐데,
개인적으로 '다르다'와 '틀리다'는 반드시 구분해서 쓰도록 하고 국어사전에서도 different를 '틀리다'라고 쓴 것은 "'다르다'의 잘못"이라고 선을 그어 줬으면 좋겠다.
그 반면에 '서, 세, 석' 같은 단순 발음 편의를 위한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구분에 대해서는 관용을 베풀어서 "'세'로 통일을 원칙으로 하되 '석 장'도 허용" 같은 식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그리고 '맞다/맞는다'가 개판인 것, 그리고 '와/과'가 접속조사(and)뿐만 아니라 부사격조사(with)의 뜻도 있어서 굉장히 불편한 것 역시 이미 예전 글에 언급돼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5 08:42 2015/06/0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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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언어학 잡설

1. '여' 불규칙

ㄱ부터 ㅎ까지
'가다(go), 나다(bring forth), 사다(buy), 자다(sleep), 차다(kick), 타다(get on), 파다(dig)'
라는 용어들을 생각해 보면, 이들은 과거형은
'갔다, 났다, 샀다, 잤다, 찼다, 탔다, 팠다'
라는 아주 규칙적인 패턴으로 활용된다.

그러나 잘 알다시피 '하다'(do)만은..
'하였다' 아니면 '했다'라고 굉장히 이상하게 활용된다. 중등학교 국어 시간엔 이를 '여' 불규칙이라고 배운다.
그런데 어미 '여'가 쓸데없이 붙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축약되어서 '했다'가 되는 건 또 뭐냐..? '하다' 말고 그 어떤 용언도 활용 시에 ㅏ와 ㅐ가 그런 식으로 연계하여 변하는 경우는 없다.

'가다'의 경우, 다른 'Xㅏ다' 용언과는 달리, 명령형에서 '가거라'라고 생뚱맞은 '거'가 불규칙으로 첨가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 '거'는 명령형에서만 첨가되지 '해서/하여서, 했다/하였다'의 '여'에 비하면 등장이 훨씬 제한적이다.

'갔다', '팠다'처럼 '핬다'라는 단어는 한국어의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던 걸까? 원래 있긴 했는데 혹시 전설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서 '했다'라고 바뀌기라도 한 건 아닐까? 난 잘 모르겠다.

본인은 '바라다'가 자꾸 '바랬다', '바랬는데', '바램'처럼 활용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의 현상이 아닌가 하고 거의 10년도 넘게 더 전부터 생각해 왔다. '하다'는 '함'이 '햄'으로 바뀌는 건 아니니 둘이 완전히 같은 양상은 아닌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도 자음 하나만 다른 '자라다'는 활용 과정에서 '라'가 '래'로 바뀌는 현상이 결코 전혀 없으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랐다', '자랐는데', '자람' 등.. =_= 신기하다.

2. 지난 학기에 들은 변형 생성 문법 수업의 편린

(1) 아무래도 교재가 영어 원서이고 영어 통사론을 다루는 비중이 적지 않다 보니.. 선생님이 영어 고어 문법 얘기도 종종 하셨다. 그래서 내 머리엔 KJV 영어가 떠오른 적이 적지 않았다.

옛날에는 be + 동사PP가 수동태뿐만 아니라 마치 지금의 have + 동사PP처럼 완료 시제를 나타내기도 했다고 한다. KJV에 "is come"이 왜 이리도 많이 등장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2) have가 의문문으로 등장할 때 Do you have 대신 곧바로 Have가 나오는 거..
난 개인적으로 have ye any meat? (요 21:5)가 곧장 떠오르던데 오늘날에도 이런 패턴이 영국의 일부 방언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마치 C언어로 치면, C이긴 한데 오늘날 안 쓰는 오리지널 K&R 스타일 C 같은 느낌이다. #include 과감히 생략하고 main 함수에 int나 return 다 생략하고 바로 printf("hello, world!");를 하는... 좋게 말하면 간결하고 나쁘게 말하면 불친절한 스타일 되겠다.

(3) 문법을 설명하는 데도 문장 구조 binary tree를 그려서 노드를 이리 저리 옮기는 게 많다. 마치 빨강 검정 나무의 동작을 다루는 것 같았다. 물론 둘은 개념과 성격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말이다.
또한, 전산학 자료구조 시간에는 tree 노드를 표현할 때 sibling, child 등 다 중성 어휘를 쓰지만, 언어학에서는 sister, daughter 같은 여성형 어휘를 쓰더라.

프로그래밍 언어와 자연어를 설명하는 이론을 모두 마스터하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4/07/28 08:33 2014/07/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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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에 한글 맞춤법이 바뀌면서(본격적으로 시행된 건 1989년 3월 1일부터) 생긴 대표적인 변화 중 하나는 종결 어미 '-읍니다'가 '-습니다'로 바뀐 것이다.
이 변화 때문에 사람들이 '-음'까지 '-슴'으로 잘못 표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8시에 갔슴). 그리고 재야에서 현행 한글 맞춤법에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이것이 형태주의에서 표음주의로 후퇴한 개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습니다'는 한국어의 형태소를 더 잘 반영한 바람직한 변화이다.
이때의 '-습-'은 상대 높임을 나타내는 교착 선어말 어미로, '용언의 어간+시제 선어말 어미'까지 나왔고 앞 글자에 받침이 있을 때 등장하는 선어말 어미이다.
시제 선어말 어미가 마침 -ㅆ이기 때문에 '습'과 음운이 겹치는 것 같지만, 이들은 원래 서로 다른 형태소이다.

ㅆ이 아닌 다른 받침을 생각해 보면 명확해진다.
가령, '괜찮습니다'는 맞지만 '괜찮슴'이라고는 안 하고 '괜찮음'이 맞다.
그리고 '괜찮사옵니다'/'괜찮소'라고 하지, '괜찮아옵니다'/'괜찮오'라고는 안 한다.

앞 글자에 받침이 없으면 이 선어말 어미는 '습' 대신 그냥 '-ㅂ'으로만 훨씬 더 단순하게 실현된다. 갑니다, 감, 가옵니다, 가오 등.
이 정도면 '습' 또는 'ㅅ'의 존재감에 대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맞춤법 개정 전에는 ㅆ 다음에만 '읍니다'이고, '괜찮습니다' 같은 다른 자음 받침 다음에는 '습니다'를 썼었다. 어차피 둘은 동일한 형태소이니, 괜히 그럴 필요가 없이 ㅆ 다음에도 똑같이 '습니다'로 적어 주는 게 더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
1988년의 맞춤법 개정안에 비판적인 논조여서 내부적으로 성과 이름을 여전히 띄어 쓰고 있는 한글 학회에서도, '-습니다'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 제기를 한 적이 없다.

한국어의 변화무쌍함과, 그에 비례하여 한글 맞춤법의 복잡함과 어려움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습니다'냐 '읍니다'냐를 따지는 건 국어학 내지 언어학에서 형태론이라는 분야에 속한다.
국어학 전공자 내지 국어 교사 지망생들은 용언의 어미를 공부할 때 '가/시/었/겠/습/니다'라는 단어를 일일이 떼어내서 각 형태소들의 의미를 공부한다. 어간과 어말 어미 사이에 저 화려한 선어말 어미들의 나열을 보시라.

어떤 언어를 공부할 때 모르는 단어는 사전을 찾으면서 익혀야 할 텐데,
복잡한 용언 활용이 일어난 한국어 문장은 단어를 떼어내서 사전에 존재하는 표제어 형태를 유추해 내는 것부터가 굉장히 높은 수준의 언어 직관을 필요로 할 것 같다. 특히 한국어를 외국어로서 공부하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오랜만에 모처럼 우리말 분야에 글 하나 투척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16 08:32 2013/06/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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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언어 현상 관찰 -- 下

* 上에서 이어짐

5. 동사와 형용사가 오락가락 하는 단어

영어의 correct/incorrect 및 right/wrong은 형용사이다. 그 반면, 국어의 '맞다/틀리다'는 영어에서 같은 의미에 대응하는 단어들과는 달리, 품사가 동사이다.

국어에서 동사와 형용사는 똑같이 활용이 일어나는 용언으로 분류되나, 서로 차이점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동사는 현재 시제 선어말 어미인 '-ㄴ-/-는-'이 붙을 수 있지만 형용사는 그렇지 않다. '맞다'는 동사이기 때문에 “맞은 답을 고르시오”라고 안 하고, “맞는 답을 고르시오”라고 쓰인다. 형용사인 '낮다'(low)는 '낮은 언덕'이라고 활용된다는 점을 같이 생각해 보시라.

그런데 '맞다'와는 달리 '알맞다'는 형용사이다. '맞다'일 때는 “맞는 답을 고르시오”인데, '알맞다'를 쓰면 “알맞은 답을 고르시오”라고 써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맞다' 역시, 동사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형용사처럼 즐겨 쓰이기도 한다. “A가 하니라 B처럼 하는 게 맞다”라고 표현하지, “B처럼 하는 게 맞는다”라고 쓰면 굉장히 어색한 건 나만의 생각인지?

반의어인 '틀리다'도 마찬가지여서 '틀리다', '틀린다', '틀렸다' 등의 쓰임이 오늘날은 굉장히 뒤죽박죽이 돼 있다. 그런 와중에 잘 알다시피 '다르다'의 의미까지 들어왔으니 카오스 그 자체. 최신 말뭉치를 통해 용례를 뽑아 보면 아주 가관이지 싶다.

동사와 형용사가 오락가락 하는 단어로 또 '웃기다'가 있다. 원래는 누구를 웃게 한다는 뜻의 사동사인데, '웃긴'이라고 하면 '우스운'이라는 형용사로 사실상 보편적으로 통용 중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가 국어에 좀 더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6. 영단어 발음의 한글 표기와 관련된 혼란

첫째, 음절 말미의 자음을 별도의 음절로 빼내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아는 한 규칙성 따윈 없으며, 진짜 case by case이다. 이 요소를 이용해 똑같은 영단어의 다의성을 구분하는 경우까지 있다.

타이프, 타입(type): 전자는 인쇄 분야 용어, 후자는 그냥 보통명사
네트, 넷(net): 전자는 스포츠 분야 용어, 후자는 컴퓨터 쪽 용어
태그(tag), 백(bag), 랙(lag), 개그(gag)
빅(big), 버그(bug)


둘째, 단모음을 읽는 방식이다. 과거에는 일본이나 영국, 심지어 독일의 영향을 받아서 A는 쿨하게 ㅏ로, O는 ㅗ로 표기하는 색이었지만, 지금은 미국식 발음에 더 가깝게 A는 ㅐ로, O는 ㅏ로 바꾸는 추세이다. 특히 단모음 O의 혼란이 심하다.

도트, 닷(dot): 전자는 그래픽 용어(도트 노가다, 도트 프린터), 후자는 인터넷 용어(닷컴, 닷넷 등)
톱, 탑(top) / 톰, 탐(Tom)
알레르기, 앨러지 / 게놈, 지넘 같은 예도..


셋째, 모음을 장모음으로 읽느냐, 단모음으로 읽느냐이다. 한 단어에 모음 두 개가 있을 때 첫 모음을 장모음으로 읽을지 단모음으로 읽을지 문제는, 로마자 알파벳을 쓰는 영어권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혼란으로 남지 싶다.

프로필, 프로파일(profile): 전자는 누구의 신상 정보인 반면, 후자는 정밀 검사를 뜻한다.
디렉트, 다이렉트(direct): 전자가 영어권에서 더 널리 쓰이는 발음이지만, DirectX는 유독 후자의 발음으로 불린다.
ASUS: 아수스, 에이서스
Radeon: 레이디언, 라데온
LATEX: 라텍스-_-, 레이텍. 전자 발음을 꿋꿋이 고집하는 분들도 국내에 여럿 계신다.


인도 식 영어에는 data도 라라 크로프트(Lara)를 읽듯이 자기네끼리 '다타'라고 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7. 숫자의 한자음에 존재하는 두음법칙

국어의 한자어 숫자 0(영)부터 9(구) 중, 유일하게 자음이 ㄹ이어서 두음법칙이 적용되는 숫자가 있으니, 바로 6(륙)이다. 얘는 원래 육이 아니라 륙이 맞는 독음이지만, 이게 어두에서의 대표음이다 보니 '륙'은 존재감이 굉장히 줄어들어 있다.

이번 <날개셋> 한글 입력기 6.7은 '숫자를 한글로' 텍스트 필터의 알고리즘을 수정하여, 천 단위와 소숫점 단위에서 처음 등장하는 6은 '육'으로, 그리고 그 단위 안에서 그 뒤부터 등장하는 6은 '륙'으로 변환하게 했다.

숫자 하니까 떠오르는 여담이다만, 영어 number는 일반적으로 연속적인 양 내지 개수를 나타내는 '수'를 뜻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산적인 개체를 식별하는 '번호'도 된다(telephone number).

성경에서 이런 이중적인 개념 때문에 중의적인 심상이 만들어지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계 13:18의 그 이름도 유명한 짐승의 수 666임이 틀림없다.
666은 짐승의 number라고 하는데 수일까 아니면 일련번호의 성격이 더 강할까?

8. 접두사와 접미사

같은 접사나 단어라도, 단어나 문장의 앞에 등장할 때와 뒤에 등장할 때의 뉘앙스는 서로 달라진다. 예를 들어 女를 생각해 보자.

여형사(female)
형사녀(-ess 여성형 접미사)


요즘 '쩍벌남', '된장녀'처럼 남-녀를 꼭 접미사처럼 쓰는 게 유행이다 보니 위의 두 단어는 뭔가 쓰임이 달라져 있다. 접두사 '여'는 전통적인 female이라는 관형어 역할을 하는 반면, 접미사 '녀'는 웬지 단어 뒤에 붙은 여성형 접미사 역할을 하는 듯이 느껴지지 않는지?

난 영어에서 비슷하다면 비슷한 현상을 발견하는 게 뭐냐 하면 대명사에서 주격과 목적격의 관계 같다.
영어는 SVO형 언어라는 특성상, 도치 형태가 아니라면 주어는 언제나 문장의 처음에 나오고, 목적어는 언제나 문장의 끝에 등장한다. 그러다 보니 주격이 문장의 말미에 등장하는 게 되려 어색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런 심리 때문에 “나예요”가 It's I 대신, 구어를 중심으로 자꾸 It's me로 바뀌는 게 아닐까?
“He's taller than I.” 같은 문장도 자꾸 than me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I는 문장을 시작하는 단어이고 me는 문장을 끝내는 단어라는 편견이 내게만 있는 건 아니라 생각된다.

그러고 보니, 옛날에 봤던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에서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가 발견된다. <미녀와 야수>와 <알라딘>은 1991년과 1992년, 아주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장편 애니메이션이다.

전자는 결말부에서 저주의 마법이 풀린 야수가 벨에게 “자기야, 나야!” 정도의 뉘앙스로 말할 때 “Bell, it's me!”라고 me를 썼다.
그 반면 후자에서는, 갓 잠에서 깨어나 심기가 불편한 신비의 동굴(Cave of Wonders)이 “Who disturbs my slumber?”이라는 아주 유명한 질문을 할 때, 알라딘이 쫄아서 “어.. 접니다. 알라딘이에요.”라는 의미로 “It is I, Aladdin.”이라고 me가 아닌 I를 써서 대답한다. I가 me보다 격식을 차린 말투라는 뜻 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08 08:30 2012/11/0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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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언어 현상 관찰 -- 上

철도, 컴퓨터, 교통 덕질에 밀려서 너무 오랫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언어 카테고리에 오랜만에 글 나가신다.

1. 이다

영어에서 be 동사는 존재를 나타내는 아주 독특하고 중요한 단어이다.
한국어에는 be에 부분적으로 대응하는 개념으로 '이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역시 문법적 역할을 분류하기가 꽤 까다로운 단어이다. '다'로 끝나니 용언 같아 보이긴 하나 그러기에는 존재감이 너무 없고.

요즘은 '이다'를 '서술격 조사'로 분류하는 게 대세여서 학교 문법을 포함해 어지간한 사전에도 그렇게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사가 아닌 단순한 종결어미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be는 한국어로 치면 '이다'와 '있다' 사이를 함축적으로 감싸는 단어라 볼 수 있다. (이것도 영어로는 have를 쓸 걸 한국어로는 그냥 '있다'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어서 더욱 미묘한 구석이 있지만..) 게다가 I am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타이틀과도 관계가 있어서 성경 번역에 민감성을 한층 더하게 된다. 예를 들어 이런 것 말이다.

Before Abraham was, I am. (요 8:58;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나는 있느니라)
I AM THAT I AM. (출 3:14; 나는 곧 나니라;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등~)
I AM hath sent me unto you. (엥, I AM 자체가 명사로!)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도 아래와 같은 너무나 유명한 문장이 있다. 한국어는 영어 표현의 함축성을 그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서 한 단계 의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a question.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물론 영어권 사람들에게 와 닿는 의미는 한국어 번역과 동일하다. 그들에게 본디 문장에 대해 paraphrase를 시켜 봐도 to live, or to die가 들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라 영어의 be 동사는 한국어의 '이다'와 크게 다른 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그것은 바로 시제이다.

공 병우 박사는 세벌식 한글 타자기의 [발명가이다].
내가 [어릴 때는/어렸을 때]는 인터넷도 없었고 스마트폰 같은 것도 없었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성군이다].


이런 문장을 영작하게 되면 모두 현재 시제가 아니라 반드시 과거 시제인 was가 붙는다. 공 박사건 세종대왕이건 2012년 현재는 죽고 없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과거 시제를 쓰는가 보다.

그러나 한국어는 지금도 그분들에 대한 역사적 행적이 변함없는 사실이라는 점을 중점에 두고 '이었다'보다는 '이다'를 선호한다.
“세종대왕은 조선의 [성군이었다]”라고 쓰면 꼭 “명왕성은 태양계의 아홉째 행성이었다”처럼 역사가 번복되었거나, 아니면 세종대왕이 말기에는 폭군으로 흑화했다는 여운을 강하게 남기게 된다.

혹시 내 언어 직관과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신 분 있으면 의견 기다리겠다.

2. '-이/가'와 '-은/는'의 차이는 무엇일까?

간단한 것 같아도 둘은 개념적으로 서로 꽤 다른 단어이다.

전자는 격(格)을 갖는 조사로, 주격 조사와 보격 조사의 역할을 겸한다. 다시 말해 선행사가 주어임을 나타내거나 보어임을 나타낸다는 뜻이다.
그에 반해 후자는 격이 없는 보조사 또는 특수 조사라고 불리며, 문맥 독립이 아니라 문맥 의존적인 문법을 구성한다. 보조사는 대체로 주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으나, 문맥에 따라 목적격도 되고, 사실은 보격도 안 되라는 법이 없다. '-은/는' 말고도 보조사로는 '-만', '-도' 같은 것 게 더 있다.

보조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문법적으로 굉장히 wild하고 어려운 개념이다.
격조사는 국어 통사론의 맨 첫 단원에서 문장의 필수 요소로 곧장 다뤄지는 반면, 보조사는 통사론이 다 끝나고 화용론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다뤄진다. 그 정도로 서로 차원이 다르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스포닝 풀을 짓고 나면 저글링의 발업(격조사)은 해처리 수준에서 곧장 가능한 반면, 아드레날린업(보조사)은 무려 하이브까지 올린 뒤에야 가능한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타크래프트 세 종족을 통틀어서 한 유닛의 업그레이드 사이에 이 정도로 기술 격차가 존재하는 건 저것밖에 없다.

3. '없다'와 '아니다'

'없다'와 '아니다'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용법과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이게 구분이 아예 없으면 '없는 것보다는 낫다'와 '도대체 나은 구석이 전혀 없다'를 언어적으로 분간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영어에서 no는 감탄사로도 쓰임과 동시에 두 의미를 문맥에 따라 적당히 지니며, none이나 nothing 같은 파생어에도 그 형태가 살아 있다. 그 반면, not은 '아니다'의 의미만이 더 부각되는 것 같다.

No trespassing 무단 침입 금지
No way 길 없음 / 안 돼(not at all과 비슷)

... There is [none righteous, no, not one]. (롬 3:10)
의로운 자는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t]; for God took him. (창 5:24)
에녹은 하나님과 걷다가 [사라졌다/없어졌다.] ...

For my thoughts [are not your thoughts, neither are your ways my ways], saith the Lord. (사 55:8)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이 아니며/생각과 같지 않으며/생각과 다르며] ...


이런 부정문은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일대일 대응하지 않고 형태가 크게 달라지는 대표적인 문법이라 볼 수 있겠다.
한국어는 void처럼 공허함을 뜻하는 無에 해당하는 단어가 토박이말에 없는 반면, '없다'라는 용언이 따로 존재하는 건 때에 따라서는 굉장히 편리하다. 물론, 영어의 no처럼 '없음'이라는 의미를 넣어 주는 관형사가 없기 때문에, 한국어에서는 없다는 의미는 주어가 아닌 서술어에서 반드시 전달되지 않으면 안 되기도 하고 말이다.

잘 알다시피 킹 제임스 이외의 변개된 성경에서는 신약 성경에서 13개 구절이 삭제되어 있다. 한국어 성경은 행 8:37이나 막 9:44, 46 같은 유명한 구절을 펴면 '없음'이라는 간결한 표현이 있지만, 영어 성경은 그런 게 없다.  굳이 '없음'을 표현하려면 그 문맥에서 none, gone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고 missing, omitted이라고 '누락됨'이라는 단어로 돌려서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

한국어가 부정문도 서술어 형태를 좋아하는 것은, '알다'의 반대말로 '모르다'가 동사로 존재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알기로 '-에 무지한, 무식한'이라는 형용사 말고, '모르다'가 동사로 딱 존재하는 언어는 의외로 흔치 않다.

'전혀'라는 부사와 잘 어울린다는 특성상, '모르다'는 '아니다'와 '없다'와 더불어 부정의 의미가 담긴 대표적인 단어이다. M의 OST인 <나는 널 몰라>가 생각나는군.. 한국어를 가르칠 때 “모른다”와 “모르겠다”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도 꽤 쉽지 않을 것 같다. 참고로 영어로는 똑같이 둘 다 그냥 I don't know로 번역 가능하다.

4. 우편향

언어가 그 자체적으로 왼쪽보다 오른쪽을 더 좋아하는 현상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난 모르겠다.
한국어의 경우 오른쪽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옳은 쪽'에서  유래된 말인 반면, 왼쪽은 '외다'라는 '뭔가 정상 궤도에서 이탈하고 뒤틀림' 같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오른쪽과는 달리, 무슨 뜻이더라도 좋은 어원은 절대 아니다.

이말년이 이런 성향을 잘 간파하여 '외길'이라는 브랜드를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다. ㅋㅋㅋㅋ. 물론 최 현배 박사의 호 '외솔'은 속세를 초월한 빳빳한 지조, 강직함, 대쪽같음을 나타내려고 '외'라는 형태소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왼쪽과 오른쪽의 관계는 신기하게도 영어도 마찬가지여서, 오른쪽이 아예 right와 동음이의어도 아닌 다의어 관계이다! 글쎄, 반대로 left는 그렇게 안 좋은 심상이 담긴 걸까? 혹시 잉여? -_-
내가 제대로 아는 언어가 저 두 개밖에 없어서 다른 언어는 어떤지 궁금하다.

성경을 보면 물론 우리더러 좌로나 우로나 편파적으로 치우치지 말라는 권고(신 5:32, 잠 4:27 등)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은 우편향이기도 하다는 것이 성경을 통해 분명히 발견된다.
여러 근거들이 있지만 한 가지 예만 들면,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등장하는 하나님의 손은 열이면 열 모두 무조건 오른손이다. 시편에 '주의 오른손'은 수도 없이 등장하지만 왼손은 단 한 번도 안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왼손잡이가 무슨 동성애에 필적하는 나쁘고 가증스럽고 죄악된 기질이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경우를 빼면, 일반적으로는 사람이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들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며 왼쪽과 오른쪽에 대해 그런 편견을 갖고 사는 게 아무 근거 없는 인습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 이념에서 좌익과 우익이라는 구분이 역사적으로는 무슨 프랑스 의회에서 좀 진보 성향이 왼쪽, 보수 성향이 오른쪽에 앉은 것에서 유래되었다고 하지만, 이 역시 아무 근거 없이 정립된 개념은 아니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비록, '뉴 라이트'인가 뭔가 하는 진영에서 '오른쪽'의 의미를 모독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좀 한숨이 나오긴 하다만...

* 다음 下에서 다른 소재로 이야기는 계속된다. 기대하시라.

Posted by 사무엘

2012/11/05 08:29 2012/11/0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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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발음 넋두리 외

오늘날 영어는 세계와 소통하기 위한 필수 매개체요, 좋든 싫든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예전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싶은데, 난 그나마 한국어 "보다"야 영어가 세계어가 된 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언문일치가 개떡인 점, 한국어와 구조가 너무 다른 점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 어려울 뿐이지, 그나마 그 정도 굴절이나 그 정도 불규칙은 다른 언어에 비해서는 나은 편이다.

그 반면에 나의 모국어인 한국어는 높임법이나 다른 복잡한 요인을 차치하고라도, 언어에서 기본 중의 기본인 대명사부터가 정말 답이 안 나오는 안습한 언어이다.;;

1인칭: '날다'의 활용형(나는)과 충돌이 있어서 '날으는'이라는 기형적인 활용형이 어쩔 수 없이 쓰인다. 나/내, 너/네도 은근히 헷갈리지 싶은데, '내'/'네'는 이제 발음 구분이 안 된다. -_-;; (영어도 I와 eye가 동음이의어이긴 하지만, 문제될 상황은 거의 없다)

2인칭: you를 딱부러지게 옮기지를 못해서 님, 너님, 회원님, 고객님, 선생님 등등등등...;; 아 골치아파. (뭐, 영어는 2인칭에 단· 복수 구분이 없는 게 아주 기괴하긴 함.)

3인칭: 관형사 '그'가 3인칭 인격체 대명사처럼 굳어져 버렸다. 조사 없이 단독으로 쓰인 건 너무 어색하다. '그녀' 문제는 우리말 운동 진영에서 전형적인 떡밥이기도 하고... (반대로 영어는 he/she 성별 구분 때문에 굉장히 불편하긴 함. 그래서 단수까지도 they로 싸잡아 표현하기도 하고.)

요컨대 한국어는 1인칭과 2인칭 대명사는 불필요하게 쓸데없는 호칭만 너무 다양하고 자잘하게 발달해 버려서, 아주 neutral한 표현 하나를 콕 집어 쓰기가 어려우며,
3인칭은 관형사 '그' 말고는 어휘 자체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래서 가끔은, 하나님을 가리킬 때조차도 대놓고 you라고 깔끔하게 싸잡아 부르는 언어가 부러울 때가 있다. 불경스럽다고? 하나님은 그런 불경스러운 언어를 쓰셔서 절대무오 최종 권위 성경을 만드셨다! -_-;; 통념과는 달리, 킹 제임스 성경은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가리키는 대명사(You, He)에 첫 글자 대문자 처리조차도 되어 있지 않다.

물론, 글 써 놓고 보니까, 뭐 영어도 만능은 아니어서 언어적인 flaw가 있긴 하다.
그래도 한국어는 대명사의 표현이 부족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옛날 사람들은 그런 대명사 없이 글을 어떻게 쓰고 의사소통을 어떻게 불편 없이 했는지 '무척' 궁금하다. 내가 선조들의 삶의 방식은 공부 안 하고서, 그저 한국어가 영어 번역투로 잘 대응하질 않아서 찌질하게 징징대고 있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본인처럼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외국 장기간 체류 경험도 없는 사람은 글을 읽으면서 새로운 단어를 종종 접하곤 한다. 이 단어가 실제로 어떻게 발음되는지는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다. 뜻만 알면 되니까 발음 기호는 보지도 않고, 이 단어는 어렴풋이 이렇게 발음되겠지 하고 넘어갔는데.. 알고 보니 낚시였던 경우가 본인은 은근히 많았다.

오랜만에 학교로 돌아와 대학원에서 공부를 다시 시작하니, 공과 대학 수업은 다들 영어 강의로 물갈이되어 있었다. 몇몇 단어는 교수님의 발음이 이상한가 싶었는데, 사전을 찾아 보니 교수님이 맞고 내 짐작이 다 틀려 있었다. -_-;; 그도 그럴 것이 공대 교수들은 거의 다 영어권 국가에서 박사 받고 온 분들이니까.

다음은 내가 생각하던 틀린 발음과, 실제 맞는 발음을 나열한 것이다. 수 년째 잘못 알고 있던 발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단어를 실제로 입 밖에 내면서 외국인과 얘기를 주고받아 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suffice: 서피스, 서파이스 (surface 내지 office 때문에)
merely: 멀리, 미얼리 (were 영향)
duplicate: 더플리케이트, 듀플리케이트
Reagan: 리이건, 레이건
geek: 지크, 기크 (당연히 gee 영향)
obtain: 압튼, 옵테인 (certain 영향)
adjacent: 앧저슨트, 얻제이슨트

즉, 본인은 대체로 단모음 위주로 발음을 예상한 반면, 실제 발음은 장모음인 경우가 많았다.
G 다음에 I, E, Y가 오면 거의 다 ㄱ 대신 ㅈ으로 소리가 바뀌기 때문에 생물학 용어인 '게놈'도 영어식 발음은 '지넘'이지 않던가? 그런데 사전을 찾아 보면, ge... 단어 중에도 ㄱ 발음이 적지 않다. 결국 발음을 알아맞히는 건 복불복인가 보다. -_-;;

장모음 ea는 대부분이 그냥 '이'인데, 가끔 '에'(sweat)인 경우가 있고, great나 저 대통령 이름에서처럼 '에이'가 되기도 하며, create에서는 아예 '이에이'라는 긴 발음이 된다. 그래서 프로토스 기본 유닛인 Zealot도 영어 발음은 '젤럿'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완전히 '질럿'으로 알려져 있다. ㅋㅋ

어찌 보면, 이런 판타지 같은 정서법을 끼고 사는 영어권 사람들이 참 골치아프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adjacent는 프로그램 개발 관련 기술 문서를 읽느라 중학교 시절부터 알고 있던 단어인데, 본인은 10년이 넘게 '앧저슨트'라고 마음속으로 읽어 왔다. -_-;;

그래서 다국적 컴퓨터 회사인 Asus는 '에이서스'와 '아수스' 사이에서 발음이 난립하고 있다.
data는 '데이터'라고 읽지만, 툼 레이더의 여걸 Lara Croft는 '라라 크로프트'이다. '레이러' 따위가 아니다. -_-;;
영어권에는 단어를 발음하는 큰 줄기가 단모음식 아니면 장모음식으로 갈라져 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나라는 워낙 미국물을 좋아해서 영어 발음도 철저하게 아메리칸식으로 공부해 왔지만,
영국에서는 진짜로 모음+R은 해당 모음을 장음화만 하고 혀는 안 굴린다. 단모음 A를 ㅐ로 전설모음화하지 않으며, ㅏ로 있는 그대로 발음하는 걸 좋아한다. 오오..;;
무엇보다도 영국에서는 모음+T+모음 사이에서 T가 R로 안 바뀐다. water는 그대로 워터이지, 워러로 바뀌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F나 TH 같은 발음은 동일하며, 억양도 동일하기 때문에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가 무슨 표준 베이징 중국어와 광동어의 차이만치 심하기라도 한 건 절대 아니다.
사실은 킹 제임스 성경을 읽으면서도, 이걸 실제로 소리내어 읽는 소리는 어떻게 날까 적지 않게 궁금했다. 이놈의 thou, thee, -eth 어미를 원어민이 실제로 읽는 걸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며, KJV가 그렇게도 운율감이 좋고 읽기 편하다고 하는데 내가 그걸 실감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던 것이다. 지금은 그 시절에 비해서는 의문이 좀 해소되어, 덜 궁금하다.

공대는 그렇다 치고 문과대 쪽으로 가면,--난 인문계와 이공계를 두루 섭렵하는 협동 과정 소속 ㅋㅋ-- 교수님들이 본인에 대해, 공대 출신이다 보니 문과 출신만치 체계적인 글쓰기 스킬은 부족한 감이 있다고 생각하시는 듯하다. 그런데 난 공대 출신 치고는 사실 문과 기질이 강하며,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만 아니었으면 지금과는 완전 딴판의 진로를 갔을 사람이었다...... 라고 생각하였으나
그래도 진짜 문과 교수님들이 보기에는 본인 같은 사람도 그냥 영락없는 공돌이인가 보다. ㄲㄲㄲㄲ

그리고 사실은 공대도 대학원에 가면 비록 성격이 문과와는 좀 다를지언정, 글쓰기가 많으며 심지어 랩미팅에 대비한 프레젠테이션도 많다. 실험을 해야 하고, 돈이 많이 든다는 특성상 펀딩을 받으려면 눈에 보이는 연구 실적이 많아야 하고, 고로 대학원생은 석사 들어가자마자 논문을 정말 미친 듯이 써 댄다. 그것도 모국어도 아니고, 이공계의 학술 공용어인 영어로 쓴다. 논문에 이름 실린 경력이 연예인으로 치면 filmography 같은 거다.

그 바닥은 랩생활을 하기 때문에, 공동 연구의 공동 저자로 낄 기회도 많다. 그러면서 이공계 논문 잘 쓰고 발표 잘 하는 법 같은 테크닉을 랩생활 하면서, 혹은 대학원 수업을 통해 공부한다.

- 단독 저자이더라도 논문의 1인칭 주어는 We이다.
- 결론은 Conclusion이 아니라 반드시 Conclusions라고 복수형으로 쓴다.
- 세속 글쓰기와는 달리 성 구분 없는 3인칭 단수를 (s)he 처럼 쓰지 말라. 차라리 they로 대체하거나, 그런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다른 어휘를 고르거나 아예 문장을 다른 형태로 다시 써라.

이런 식의 팁이 엄청 많다. 이런 격식 있는 글쓰기 스킬이 하루 아침에 숙달될 리가 없으니, 지도교수한테 무진장 깨지면서, 또 아마도 랩 선배한테 코치를 가장한 갈굼도 당하면서 익숙해지는 거겠지...?

그나저나, 영어는 숫자 형태로 된 날짜나 시각을 말할 때 단위를 붙이지 않고 숫자만 연달아 읽는다.
그러면 “좀 있다 40분에 나가자. (지금이 6시 20분이면)” / “졸업식은 15일이다. (이 달 15일)” 이런 말을 영어로 표현하는 방법은 없나? 주변의 영문과 출신 선배에게 물어 보니, 자기도 그 생각은 미처 안 했는데 아마 방법이 없는 듯하다고 대답했다.
그냥 무조건 “20분 뒤에 나가자” / “이번 주 금요일이다” 같은 식으로 형태를 바꿔야 하는지 궁금하다. at the n-th minute, on the n-th day 이런 표현은 안 쓰는 듯?

Posted by 사무엘

2011/09/03 08:35 2011/09/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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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오랜만에 진지한 우리말 관련 글.

여러분은 중국이나 일본의 고유명사 한자음을 어떤 식으로 표기하는 걸 선호하는가?
예를 들어 타이 / 태국, 타이완 / 대만, 베이징 / 북경 같은 것.

a. 우수한 표음문자인 한글 뒀다 뭘 하나. 여타 유럽 언어와 마찬가지로, 너무 힘들지 않은 한도 내에서 최대한 현지음에 가깝게 읽어야 한다. 그게 속 편하고 일관성도 있다.
b. 엄연히 한국식 한자 독음법이 있는데 왜 그런 헛짓을 하나? 우리식으로 읽어야 한다.

우리말은 a와 b 표기가 굉~장히 문란한 상태이다. 이런 난잡한 실태를 한국어 학습자 외국인에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걔네들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난감할 지경. 다만, 영어에도 '씨저'와 '캐자르'(카이사르)가 공존하듯이, 비슷한 맥락의 표기 바리에이션이 없지는 않다.

요즘도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본인이 어렸을 때 보던 각종 백과사전류의 책에는 “신해혁명 이전의 중국 인명· 지명은 b대로 표기하고, 그 이후의 것들은 a로, 다시 말해 현지음으로 표기한다.” 같은 황당한 절충안(?)까지 명시되어 있었다.

본인은 a안을 선호한다. 걍, 장 제스, 쑨 원, 루 쉰, 마오 쩌둥, 덩 샤오핑이라고 쓰면 편하겠는데. -_-
이상하게 배우 이름은 현대인이라고 해도 전부 b안이 굳어져 버렸으니 원..;; 이연걸, 성룡처럼.
똑같이 라틴 알파벳으로 쓰인 유럽 인명이라고 해서 그걸 죄다 영어식으로 읽는 건 실례이고 무식한 짓 아닌가? (적당한 예가 당장 생각이 잘 안 나네) 본인은 한자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한다.

또한 중국과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인명과 지명은 똑같이 한자인데 우리식으로 읽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KJV가 출간되기도 전 시대를 산 엄청난 옛날 인물이지만 중국의 '서태후'와는 달리 언제나 현지음 표기로 통용된다.
일본인 중에서 우리식 표기가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내 기억으론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밖에 없다. 일왕 히로히토? 데라우치(일제 강점기 총독)? 우리식 한자를 내가 알 게 뭐야. ㅋ

일본은 지명도 비슷한 상황이어서, 동경(도쿄)과 대마도(쓰시마) 말고 우리식 한자음이 널리 통용되는 곳은 거의 없다. 대판이라고 적으면 오사카라고 알아들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물론, 일본어는 훈독이라는 복병 때문에 애시당초 현지음 표기가 더 보편화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처럼 한자 문화권이라고 해도 현지음 표기는 그냥 익숙해지기 나름일 뿐이다. 유럽, 프랑스, 이탈리아를 놔두고 굳이 구라파, 불란서, 이태리를 고집할 필요가 뭐가 있나?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현지음으로 부르면 된다.

그리고 어느 나라 인명이든 현지음으로 적다 보면 성과 이름은 저절로 서로 띄어서 적게 되고, 그 관행에도 더욱 쉽게 익숙해진다. 난 솔직히 그걸 원한다. (덧붙이자면, 현재 한국의 인명 체계 자체도, 성씨 수가 너무 적고 글자수가 짧아서 동명이인이 너무 많은 등, 무척 기형적이기도 하고 말이다.)

여기서 본인의 경험 하나.
본인은 어릴적 영어의 음운 구조에 대해 배우면서 은사님으로부터 이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들리는 말을 한글로 절대로 적지 마라. 한글은 무조건 잊어버려라. 소리를 소리 그대로 익혀라”

그래서 한글을 너무 사랑하는 분들 중엔, 저 말에 발끈하여, 한글을 변형· 개량해서 외국어 발음을 받아적는 기호를 만들고 그걸 퍼뜨리고 다니는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런 노력이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본인은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의 도움 없이 영어를 공부했다. 한글을 배제해야만, 영어를 공부하는 데 방해가 되는 “한국어 음운 구조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글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런 것처럼, 중국어를 공부할 때도 어줍짢은 한국의 한자/한자어 지식일랑은 잊어버리고 그 말소리를 익히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걔네들은 옛날 스타일의 번체자는 쓰지도 않는다. 현지음 표기는 그런 사고방식의 맥락에서도 더욱 바람직할 거라고 본인은 생각한다.

물론, 이 문제에 대해 본인과는 견해가 극단적으로 다른 분도 있다.
한글 찬양 진영(?)과는 반대로 한자 매니아들 중 일부는.. 중국의 인명· 지명을 중국 현지음으로 적는 걸 몸서리치게 혐오한다. 줏대 없는 짓, 미친 짓, 정신나간 짓, 사대주의 등 온갖 악담을 갖다붙이기까지 한다. 진짜로.. ㄷㄷㄷ;;

난 현지음 표기를 그 정도로 강경하게 고집하거나, 우리식 표기를 저 정도로 극단적으로 나쁘다고 매도하지는 않음. 절대적으로 옳은 게 없이 그냥 정하기 나름인 것에 너무 목숨 걸지는 않는다. 다만 어지간하면 현지음 표기 쪽을 대원칙으로 삼으면 좋겠다.

다음은 추가 잡설들.

1. 성 이름 표기 순서를 갖고도 열폭하는 분들이 있다. 이에 대해 본인은 한국식 이름의 로마자 표기랑, 아예 영어식 이름이라는 두 개념을 구분하자는 주의이다.
전자의 경우는 Kim Yongmook이라고 언제나 일관되게 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Samuel Kim이라고 쓴다.
일본은 로마자로 표기만 하는 순간에 성과 이름 순서를 알아서 싹 교환하는 반면, 중국과 한국은 그렇지 않다.

2. 중국의 사상가인 '공자'와 '맹자'는, 어른들의 사정에 의해 서양에서 라틴어 어미가 붙어서 Confucius와 Mencius라는 간지나는 영어 이름이 지어진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오늘날 한국어로 치면 부카니스탄, 귀차니즘, 오노스럽다.. 이런 것과 동일한 맥락의 작명법이지 않은지? ㅎㅎ

3. 오늘날은 한국어에서 한자나 한자어를 이용한 조어 자체가 사멸하다시피했다.
스키를 배우는데 강사가 말하길, 다리를 A자 모양으로 모으랜다. 옛날 같았으면 팔(八)자 모양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십자가처럼 말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걍 시옷자 모양이 더 편하겠네.)
아마 기독교가 21세기에 전래되었으면 십자가, 유월절, 휴거 같은 말이 생길 리가 없었으리라... 다 크로스, 패스오버, 랩처라고... 휴거를 뜻하는 랩처(rapture)는 유명한 컴퓨터 용어인 캡처(capture)와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7/31 08:35 2011/07/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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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잡설

오랜만에 전공 관련 잡설을 끄적인다.

1. 요즘 나오는 옥편이라면 각 한자들마다 글자의 유니코드 번호는 꼭 수록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컴퓨터 시대에 저 정보는 하다못해 필순보다도 훨씬 더 필요하고 유용할 것이다.

2. 한자는 입력하고 다루는 데는 굉장히 불편하지만, 뜻글자라는 특성상 한자가 적당히만 쓰이면 형태소 분석과 의미 파악에는 굉장히 유리하다. 한-일 번역과 일-한 번역의 난이도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명백하다. 일본어는 처음에 입력하기가 느리고 불편하지만, 나중에 자연어 처리에는 다소 편할 수 있다는 뜻.
그와 반대로 한국어는 한글로 입력은 전광석화처럼 할 수 있지만 그만큼 소리만으로 기계가 힘들게 유추해야 하는 정보가 많으며, 언어 자체도 구조가 미치도록 판타지 다이나믹 귀걸이 코걸이 식이다 보니 자연어 처리 입장에서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3. 카이스트에서는 100% '재수강'이라는 용어만 쓰이지만, '재이수'라는 말도 있다는 건 연세대에 가서 처음 알았다.
카이스트에서는 봄학기, 가을학기라고 학기를 구분하지만 연세대는 그냥 고등학교 이전처럼 1학기, 2학기를 쓴다.
인문계 대학원에서는 교수가 다른 교수를 일컬을 때나 강의실에서 학생이 교수를 부를 때 '선생님'이라는 말을 쓴다. 심지어는 나이 많은 학생끼리도 친해지기 전에는 서로 선생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공계 대학원에서는 여전히 '교수님'이 주도적인 것 같다.
이런 일련의 차이를 혹자는 '학교 방언'이라고 풀이하더라.

4. 이기다, 지다, 틀리다, 맞다, 모르다 같은 용언은 영어와 비교했을 때 용도에 따라 시제가 조금씩 일치하지 않는 면모가 있다.
격투 게임 같은 데서 흘러나오는 You win 같은 멘트를 '네가 이긴다'라고 번역하지는 않으며,
You are wrong도 '네가 틀리다'라고는 절대로 번역되지 않는다. wrong, incorrect를 언제나 과거 시제로 번역하다 보니 정작 현재 시제인 '틀리다'는 자꾸 '다르다'라는 뜻으로 이상하게 꼬이고 있는 것 같다.

5. 학교에서 구수한 옛한글들이 잔뜩 찍혀 있는 어느 옛날 한글 성경을 봤는데... '밥팀례'라는 희한한 단어가 있더이다. 밥티슴(baptism)과 침례의 합성어인지? 우리 선조들의 작명 겸 번역 센스에 감탄했다.
아울러, 개역성경도 '사단'이라고 적어 놓은 Satan을, 훨씬 더 옛날 성경이 '사탄'이라고 더 정확하게 표기하고 있었다.

6. 폐사: 가축이 폐사하는 것 말고 弊社 또는 ?社는 자기 회사를 겸손하게 낮춰 일컫는 말이다.
그러니 비즈니스 메일이나 광고에서 자주 볼 법도 한 단어 같은데.. 본인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폐사라는 단어를 본 곳은 자동차 취급 설명서가 전부이다. -_-;;; 그 업계만의 방언이기라도 한 걸까? '폐사가 보증하는 순정 부품을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주행 중 이 경고등이 갑자기 켜진다면 폐사 서비스 센터에서 정비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IT 업계에서도 쓰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텐데. '모 제품에 이런 버그 내지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었으므로 사용자께서는 폐사가 제공하는 업데이트를 반드시 받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겸손한 비하라지만 졸(졸고, 졸저)도 아니고 '폐'가 들어가니까 부정적인 느낌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7. 또 자동차 취급 설명서 이야기.
요즘 차 취급 설명서에 '핸들'이 '스티어링 휠'이라고 적혀 있는 걸 보고 놀랐다. 호치키스가 스태플러로 바뀌듯, 국민들의 평균적인 영어 실력이 증가하면서 콩글리시도 점차 바로잡혀 가는 것 같다. ^^;;;
하지만 백미러는 그냥 실외 미러라고 표기했고, 진짜배기 영어인 리어뷰 미러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8. 세월이 흐르면서 아래아한글 97이 이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구닥다리 한컴 2바이트 코드에 대한 지원을 차츰 줄여서 지금은 이게 변환기 유틸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가 돼 있다.
그런데 맨날 옛한글 말뭉치 자료를 다루는 이 바닥 사정을 들여다 보니까, 한컴 2바이트 코드가 그렇게까지 죽은 포맷은 아닌 것 같다. 한컴 2바이트 코드를 기준으로 만들어진 형태소 분석기 같은 툴들이 아직까지 쓰이고 있어서 말이다. 현실이 그만큼 낙후해 있다는 뜻 되겠다.

본인이 다니는 이 대학원에 있으면서 좋은 점을 꼽자면 이러하다. 국어학 쪽의 진짜 전공자, 현업 종사자들의 언어학적 소견과 역사 증언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글 쪽으로는 '운동꾼'이기만 할 뿐 비전문가의 편협한 주장만을 접한 것과는 다르다. 비록 자기 전공 분야에서는 공학 박사이고 뭐 별별 업적을 남긴 분이라 하더라도 국어학 계열로는 이상한 지론에 빠져 이상한 주장을 밀어붙이는 분이 안타깝지만 꽤 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1/05/13 08:39 2011/05/1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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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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