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

  • 구원받았다면서 행실에 변화가 없는 사람이 왜 이리 많나?
  • 거짓/페이크 영접 기도로 인해 양산된 거짓 구원 확신, 가짜 크리스천에 대한 트라우마
  • 신이 어떻게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지옥에 보낼 수 있나?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왜 이리도 많나?
  • 신이 존재한다면서 정작 세상엔 신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왜 이렇게 악이 가득하나?

등등의 이유로 인해, 세상에는 일명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이분법으로 설명하기 곤란해 보이는 상황이 무척 많다.
그렇다 보니 이 모순을 풀려고 결국 크리스천들은 마치 좌· 우파마냥 내부적으로 크게 두 극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a. 사람마다 구원 여부는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 상관 없이 애초에 다 정해져 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대해 인간이 감히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vs

b. 아무래도 예수님을 입으로만 믿고 시인하는 걸로는 부족하다. 죄로부터 완전히 회개한 뒤에 자발적인 선행이 뒤따라야 구원받을 수 있으며 이미 받은 구원도 이를 통해서만 유지할 수 있다.

a는 흔히 칼빈주의, 예정론이라고 불리며 b는 알미니안주의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들은 궁극적으로는 둘 다 비성경적인 양극단이다.

1.

예정론의 매우 큰 문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하나님이 그냥 허락하시는 뜻'을 완전 혼동하여, 죄를 무슨 죄인 역할극 정도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도, 이북의 김씨 부자가 인민들을 학살한 것도 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놨기 때문에 그리 된 거라니 이런 신성모독적인 발상이 어디 있는가? 그런 신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과 공의가 충만한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겠는가?

죄가 역할극이라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도 아무런 찬양받을 가치가 없이 그냥 짜고 치는 고스톱마냥 역할극에 불과할 것이다. 불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지옥도 무슨 가상 머신 매트릭스 샌드박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천차만별 불공평한 듯이 배분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지위나 위상뿐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태어나는 애와 북한에서 태어나는 애의 인생이 갈리고, 순교하는 신자와 기적적으로 살아나는 신자의 인생이 갈린다. 사람마다 신분과 빈부귀천이 갈린다.

그러나 개인의 구원 여부는 그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에 대해서는 철두철미하게 공평하다. 송명희 시인의 <나> 기억 안 나냐?
예정되어 있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향후 지위 그 자체뿐이다. 미리 아심(read-only)을 예정(write operation)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가령, 성경의 파라오는 재앙을 자초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순순히 풀어 줬어도 충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다.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겠지만, 인간 백정 인간 악마라 불리는 북한 김 정은이라 해도 어느 날 갑자기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면 그는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 당연한 말 아닌가? 예수님의 보혈은 말 그대로 모든 사람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인간이 예수님을 영접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구원이 아무리 대가 없이 행위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라 해도, “저 구원받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고 손을 내미는 것조차 선물 받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얘기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지거나 자신을 구원할 수 없지만, 스스로 예수님을 영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지는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무조건적인 은혜는 스스로 선과 악을 분간 못 하는 어린아기가 받는 특례 구원에나 적용되는 조항일 것이다. 또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지옥에 가는 사람이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나 공의, 전지전능과는 전혀 별개의 영역에 있는 현상일 뿐이다.

난 정말,
하나님이 공의롭거나 전지전능하지 않고 새디스트여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하나님이 공의롭고 전지전능하긴 한데 일부만 사랑하고 택했기 때문에 열외된 사람을 지옥에 보내는 것하고..
둘의 차이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이건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멍청한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아주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둘러대는 것만큼이나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자유의지를 빼고서 지옥을 설명하면 그 무슨 수를 쓰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지 않을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여담이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죽이기로 작정하시고 그의 마음을 더욱 강퍅하게 하고 뭐 어쩌기로 하신 것은, 일종의 가속(acceleration)이다. 그 사람을 보호하지 않고 그가 극단으로 치우치고 스스로 막장으로 빠지게 내버려 둔 것에 가깝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자동차나 비행기의 무거운 조향타를 움직일 수 없어서 파워스티어링 유압의 도움을 받는데, 하나님의 역할은 그런 유압인 것이다. 사람이 조향 자체를 무슨 pre-programmed된 로봇 조종 받듯이 하는 건 아니다.

2.

한편, 칼빈주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극단도 문제가 많기는 마찬가지다. 이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얻는 구원 교리를 아예 대놓고 부인하면서 기독교의 근간을 흔들기 때문이다. 구원의 결과로서 나오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혼동하여 이런 오류가 생긴다. 영어로는 fruit / root of salvation이라고 표현한다.

행위가 덧붙은 구원 획득 내지 구원 유지 교리는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뭔지 모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의 수준이 뭔지도 모르는 극도의 무지의 소치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 영접 기도를 이런 식으로 한다고 생각해 보아라.

“예수님, 저는 내가 죄인임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삶을 모조리 청산하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사랑하는 것만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미워하는 것을 미워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술, 담배, 마약 다 끊고 예전의 일체의 방탕하던 생활 방식을 다 그만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성결하게 살기 원합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아멘.”

정말 끔찍하지 않은가? 자기가 예쁜 짓 해서 들어갔다가, 심한 사고 치거나 나쁜 짓 하면 짤리고... 저런 식으로 믿을 거면, 예수 믿는 게 부처· 마리아를 믿거나 심지어 철도교에 입교하는 것과 차이가 도대체 무엇이냐?

선행이 결과론적으로 아무리 좋게 보인다 하더라도, 이런 교리의 누룩은 우리가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
술· 담배, 마약이 나쁜 줄은 솔직히 불신자도 다 알고 그런 건 자기 깜냥과 재량껏 끊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걸 그만뒀다는 게 하나님 앞에서 도대체 뭐가 대수란 말인가?

자기가 구원받아야 하는 죄인임을 알았으면, 그 다음에 구원을 요청하며 따라야 할 고백은 이것밖에 없다.
“예수님이 나를 위해 나를 대신하여 내 죄값을 치르고자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걸 믿습니다.” (단, 정말 진심으로 말할 것).

인간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나의 처참한 죄를 사하기 위해서, 공자· 맹자나 부처나 마리아가 아니라 2000여 년 남짓 전에 이스라엘 땅에 있었던 그 역사 인물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시인하는 게 참 회개이고 기독교의 구원 조건이다!

그리고 사람이 그 구원부터 받은 뒤에야, 물리적인 죄로부터의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는 원동력은 성령님에 의해 차차 생겨난다. 철도는 교통 체증으로부터나 구원할 수 있지 죄로부터 인간을 구원하지는 못한다. 예수님 말고 다른 사대성인 같은 걸 이런 식으로 믿는다고 해서 성령의 열매 같은 게 생기지는 않는다.

그 구원은 나를 담보로 유지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담보로 유지되는 거다. 내가 선행으로 구원받은 게 아닌 것만큼이나 내 악행으로 구원을 잃지도 않는다. 이게 바로 기독교와 여타 종교와의 넘사벽 급의 차이인 것이다.

구원 절차가 달랑 '믿음' 하나밖에 없고 너무 간단하고 쉬워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그 '믿음'이란 게 뭔지를 아직 잘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래서 자꾸 '행위'를 갖다 붙일려고 하는 것이다. 행위가 전혀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말 저렇게 제대로 믿으면서 구원받은 사람이 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 것 같은가?

물론, 정말 구원받았는데도 엄청 육신적인 신자도 있고 회개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신자도 있다. 신자의 영적 성장은 아주 느리고 답답하고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 행실만으로 사람의 구원 여부를 판단하기란 몹시 어렵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알 수 없는 것만큼이나 이것은 우리에게는 일면 불리한 면모이다. 그것만 바로 알 수 있으면 교회에서 불순분자를 훨씬 더 수월하게 솎아 내고 각종 분쟁도 시스템의 힘만으로 예방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그런 불편을 못 참겠다고 신자들을 거짓 교리로 겁주고 협박하는 건 목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갖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되듯, 혼의 구원과 관련된 교리로 장난을 치지는 말아야 한다.

3.

믿음과 행위 사이에 모순처럼 보이는 관계 문제는 크리스천 사이에서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논쟁거리로 남을지 모른다. 어찌 보면 답이 분명히 나와 있는 아주 쉬운 문제인데, 그걸 모순이 많은 이 현실에 적용하기가 껄끄럽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어떻게 '없음'이 있지? 완전한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있는가?” 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사항이므로 크리스천이라면 이 문제에 대한 바른 관념도 갖추어서 내가 도대체 예수님의 어떤 면모를 믿고 있는지를 잘 따져 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믿는 종교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느라 논리적으로 빼도 박도 못할 치명적인 모순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도 절대무오하다는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겠는가?

본인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오로지 믿음'이 모두 반영되어 있는 위와 같은 해석이 성경적으로 가장 바람직하다고 제시하며, 이 모델로 속 시원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참고 기다리면서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척 재미있는 것은 극과 극은 서로 통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도 은사주의와 거짓 영접 기도를 비판하면서 선행과 회개를 강조하는 폴 워셔 목사의 경우, 개념상 골수 알미니안주의일 것 같은데 실은 칼빈주의자이다. 아무나 구원받는 게 아니라는 주권 구원이 결국 행위 구원이나 다름없게 되는 셈이다. 계산 과정은 다르지만 궁극적인 결과는 일치한다고나 할까. 이 점도 우리는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4/04/12 08:12 2014/04/12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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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

성경의 요한복음 8장의 초반부에 나오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사건은 비기독교인이라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그러나 인지도가 높은 만큼 사건에 대한 오해도 굉장히 많다.

1. 먼저, 통념과는 달리 이 이야기--정확히는 요 7:53부터 요 8:11까지--는 정말로 원래 성경 원문에 있었는지 의심을 받고 있다. 거의 모든 성경들을 보면 “오래 된 사본에는 이 단락이 없음. 이것은 후대에 추가된 것임.” 같은 단서가 붙어 있다! 신약 성경에서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막 16:9-20)과 더불어 양대 의심 단락인 것이다.
물론 KJV 신자에게는 이것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시내 사본 및 바티칸 사본 같은 변개된 고대 필사본을 기준으로 하는 잘못된 주장일 뿐이다.

2. 간음은 여자 혼자서 지을 수가 없는 죄다. 간음하다가 누군가가 현장에서 적발되었고 이에 대해 여러 사람의 증언이 일치한다면, 율법대로라면 간음을 저지른 “남자와 여자를” 모두 죽여야 한다. 그런데 저 사건에서는 남자는 어딜 가고 왜 여자만 붙잡혀 있는가? 단순히 여자의 순결이 의심되기만 하는 상황이라면 곧장 죽일 게 아니라 민수기 5장의 판별법을 사용해야 한다.

3. 여자는 법적으로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부터 단순히 법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무슨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으니 무조건 다 사랑과 아량으로 감싸자는 식으로 물타기 된 게 아니다! 이 사건은 무슨 사형제 폐지, 간통제 폐지 등 온갖 이상한 비성경적인 프로파간다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절대로 될 수 없다.

4. 또한, 그 여자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름으로써 구원받았다고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요 8:11)

5. 북한 문화어로 성경을 번역한다면 stone(동사)을 '돌탕치다' 정도로 번역해도 되겠다.

6.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사건은 이런 패러디나 만들라고 성경에 기록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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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3/12/26 19:22 2013/12/26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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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기원에 대한 생각

“처음에 말씀이 계시니라. ...” (요 1:1)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왜 하필 자신을 '말씀'이라고 성경에서 계시하셨을까?

인간의 언어라는 건 자연과학의 영역인 우주, 지구, 생명체 세포 같은 것 만만찮게 참 신기한 물건이 아닐 수 없다.
문자는 수천 년 전에 인간이 발명했지만 문자의 기록 대상인 그 언어 자체는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생명 자체의 기원만큼이나 정말 “아무도 모른다.”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창조 아니면 진화밖에 답이 없듯이,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도 신수설 아니면 인위적인 발명설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더구나 언어는 화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진짜로 뭐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하여 연구할 여지 자체가 없다.

게다가 언어의 우열이나 기원을 함부로 가리는 건 정치적으로도 꽤 민감한 영역이기도 하다.
이 분야에 검증 불가능한 추측과 낭설들이 하도 많이 떠돌다 보니, 언어학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익히 잘 알듯, 먼 옛날 1866년에 파리 언어학회가 아예 공개적으로 이 분야는 불가지론의 영역이라고 못을 박아 버렸다.
언어의 기원에 대한 연구 같은 건 금지하고, 이 분야의 논문은 무조건 거절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난 무생물에서 생물이 우연히 생겨날 수 없고 원숭이가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사람으로 진화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동물의 울음과 사람의 말은 넘사벽 급으로 서로 다르다.

겨우 몸짓, 손짓, 맘마, 빠빠, 쭈쭈, 끙끙에서...
촘스키 계층으로도 다 설명을 못 하는 그런 재귀적이고 복잡한 언어 문법이 점진적으로 생성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상한 날랄랄따따따 방언이 질서를 갖춘 정상적인 인간의 언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ㅎㅎ
이건 내가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이지, 언어의 기원과 관련해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을 디스한다거나 논쟁하겠다는 의도는 아니다.

NOTES
1. 한국어는 언어 계통상 고립어로 간주되고 있다. 우랄 알타이 어족 떡밥은 약발이 다한 지 오래이고, 주변에 유사한 언어를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굉장히 특이한 언어라는 뜻이다.
일본어와 더불어 고립어치고는 그래도 사용자가 많은 축에 드는 언어이고, 또 영어권 사람이 배우기 몹시 어려운 언어로 분류되어 있다.

2. 우리말에는 '말'의 높임말로 '말씀'이라는 아주 좋은 말이 있어서 성경 용어로도 즐겨 쓰인다.
다만,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잘 알다시피 높임법이 어긋난 문장이다. 말씀이 '계실' 수 있는 문맥은 요한복음 1:1과 요한일서 1:1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12/24 19:31 2013/12/24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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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변의 크리스천 지인 중에는 크리스천의 ‘인격, 행실’에 대해서 정말 많은 관심을 갖고 거기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분이 있다. 왜 있잖은가, “크리스천이 되기에 앞서 인간부터 돼야지!” 같은 식의 주장 말이다.

크리스천으로의 사명감과 책임감이 얼마나 투철했으면, 세상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한 해석도 다르다. 세상이 악하고 마음이 강퍅해져서가 아니라, 기존 교회들이 병신같이 선교 행위를 하고 예수 간증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아주 강조한다. 성경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후 4:4보다 롬 2:23-24를 선호한다는 뜻.

이런 성향이 종교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결국 선행이 드러나 있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은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예정론을 잘못 적용한 주권 구원 내지 행위 구원 쪽으로 빠진다.

그리고 이런 성향이 정치적으로 극단으로 치달으면, 오로지 대형 교회들을 흠집 내고 잡아먹기 위해서 불신자들하고까지 손잡을 지경인 진보 성향으로 바뀐다.

뭐, 저 정도의 잘못된 극단으로 빠진 게 아니라면, 그런 성향에도 일리가 있는 지적이 분명 있다. 예전에 같은 교인들로부터 몰상식적이고 무례하고 육신적인 언행 때문에 상처를 많이 입었거나, 아니면 기성 교회의 비성경적인 관행에 트라우마가 생긴 경험 때문에 그런 성향이 깊어진 게 아닐까 싶다. 이해는 한다.

그런데 이 이슈에 대한 나의 내면의 생각을 좀 말해 볼까?

첫째, 기독교의 교리가 “크리스천이 되기에 앞서 인간부터 돼야지!”였다면, 나는 크리스천이 절대로 못 됐으며 인간은 더욱 못 됐을 것 같다. 나 자신부터 옛날에는 인간성· 사회성, 인격 따위가 지금보다 훨씬 더 거칠고 더러웠다. 그나마 예수 믿고 나서 같은 성도들끼리 부대끼면서 아주 차츰차츰 개선된 것이다.

둘째, 난 기독교의 탈을 쓴 종북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교인’들의 행실에 대한 기대 따위는 진작에 안드로메다에다 보내고 왔다. 이건 무슨 대형 교회의 부정부패나 몰상식한 선교 행위 같은 것하고는 아예 레벨이 다르고 차원이 다른 악행이지 않은가! (걔네들은 애초에 예수님을 내 구주로 제대로 영접도 안 한 사람일 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은 한다)

종북이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그 구원에 감격하고 지금 처한 여건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국가와 민족에 자부심과 애착이 생기고, 우리에게 있는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와 지금 진짜 인권 유린을 당하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다 자동으로 깨달을 줄 알았는데, 종북이 예수 믿으면 그냥 구원받은 종북이더라!

이게 겨우 일개 인격이나 성품 따위하고 비교가 가능한 문제일까? 성경 말씀이 그런 사람들의 사상 하나조차 제대로 바로 이끌어 주지 못한 걸까?

그러니 난 애초에 혼의 구원과 영원이 걸린 종교 문제는 전적으로 핵심 사상인 교리의 우월성을 보고 선택했지, 주변 사람들의 말단 행실이나 평판 같은 건 “개별적인 case by case”일 뿐, 진지한 고려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정말로 비성경적인 수위가 도를 넘어서는 잘못된 목사나 잘못된 교회가 있으면, 당신 혼자 그 교회를 조용히 탈퇴하면 된다. 대한민국은 자유가 있는 좋은 나라이다. 당신이 그런다고 해서 당신을 고문하거나 수용소로 보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도저히 구원받았을 것 같지 않은 막장 성도라면.. 성경에 규정된 대로 징계하고 쫓아내든가, 아니면 그냥 교제 끊고 이교도나 세리 대하듯이 최소한의 예의와 격식만 차려서 대하면 된다. 그 사람이 만에 하나 진짜 구원받은 게 맞다면 나중에 하늘나라에서나 오해가 풀리기를 바라는 수밖에.

영적 전쟁터는 원래 그 어떤 희한한 짓 험한 꼴이 벌어진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바닥 아닌가?
크리스천이 행동이 병신이었던 게 어디 한두 번이었으며, 그게 그렇게까지 납득이 안 되는 일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현실을 지나치게 탓하고 비관하는 건, 예수님이고 성경이고 복음이고, 게다가 그냥 성경도 아니고 신줏단지 같이 떠받드는 KJV 성경조차도 현실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자기 입으로 영적 전투의 패배를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다.

그냥 구원받는 것하고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사는 건 별개의 문제이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자기와 같은 사상을 지니고 자기처럼 성장하고 자기처럼 행동할 거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말지어다.

교회는 영적 전투 수행을 위한 무슨 소수정예 특수부대가 아니다. 이 세상에 아무 결점이 없는 완벽한 성도들로만 이뤄진 교회가 존재한다면, 당신이 그 교회에 가입하는 순간부터 무결성이 깨진다는 심정으로 교회 생활을 하면 된다.

구원과 행실 사이의 관계 문제는 하나도 어려울 것 없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보이는 행위로 나타내야 한다는 내 안의 성령님의 압박이 느껴진다면, 남 신경 쓰지 말고 당신이나 잘하면서 남에게 좋은 본을 보이면 된다.

잘못하고 있는 교회 지체를 성경으로 일깨우면서 권면하는 것 이상으로,
누구 다른 사람 때문에 복음이 실추되고 있다는 식으로 피해의식은 어떤 경우에도 가질 필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08 08:17 2013/11/0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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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노선도!

지금 각종 SNS와 구글, 네이버 등 검색엔진에서 '성경 노선도'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아래 그림은 원저자가 본인이다. 김 용묵, 내가 고안한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너무 남사스러운 거 같아서 그림에다 딱히 저작권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자기가 만들지 않은 작품을 자기 것이라고 사칭하는 일은 막기 위해서 최소한의 출처는 알리도록 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철도와 성경이라는 두 분야를 서로 융합해서 표현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품을 최초로 만든 건 2006년경이다. 다음은 2006년임을 인증하는 최초의 그림 링크이다.

그러다가 본인은 내 혼자서 발로 그린 노선도를 디자인 일을 하시는 교회의 모 자매님에게 부탁하여 깔끔한 그림으로 만든 뒤, 청지기 카페와 킵바이블에다가 공개했다.
그랬는데 역시 킵바이블의 인지도 덕분인지 이 노선도는 인터넷에서 크리스천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는 채로.. ㅎㅎㅎ

주황과 분홍 같은 붉은 계열은 신구약 성경의 배경 지식이 되는 기초에 속한다. 구약에서는 모세오경, 신약에서는 복음서이다.

파란색은 역사서이다. 구약에서는 역사서가 모세오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에스더기 구간이 저런 선형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느헤미야보다 이전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역사서가 사도행전이 전부이며, 사복음서 중 당연히 누가복음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자주색은 소위 대언서로, 신약에서는 계시록이 유일하다.
구약에서 위쪽은 major prophets이고 아래쪽 호세아부터는 minor prophets이다.

사무엘하~열왕기하, 그리고 역대기상~역대기하는 병렬로 배열되어 있고, 이를 대언서가 수직으로 관통한다. 왼쪽은 다윗 이전이고, 오른쪽은 다윗 이후이다.
그리고 에스라와 그 오른쪽의 책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의 시간대이다.

다음, 연두색은 문학서이다. 욥기는 창세기 시대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룻기는 역사적으로는 사사기 중간에 속하지만 결말이 다윗의 계보로 끝나는 점을 감안하여 그림과 같이 분류했다.
문학서는 위쪽을 차지하면서 예레미야서와 교차하여 예레미야애가로 끝나게 배치한 것이 특징.

신약을 보면, 사도행전 중간부터 바울이 활동하기 시작하므로 바울 서신서의 노선은 그림과 같이 분기되어 나온다.
시기적으로 사도행전 28장까지 다 끝난 뒤에(로마 감금 내지 그 이후 4차 전도 여행) 기록된 것은 사도행전보다 오른쪽에 놓인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바울 서신들 중 상당히 초기에 기록된 서신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의 경계에 있는 독특한 책이므로 응당 저렇게 배치된다.

즉, 이 노선도는
성경 각 책의 성격, 책이 다루는 연대나 기록된 연대, 그 책이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적당히 시각적으로 나타내면서 책의 66권 배열 순서도 크게 안 흐뜨리려 했다.

사소한 고증 오류가 있을 수는 있으나, 취지는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그런 부분만 약간 고치면 성경에 대한 시청각 교육에 꽤 유용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쪼록 우리 인류에게 성경을 남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한국 철도에게 영광 돌리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08 08:31 2013/10/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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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일 리플링거(Gail Riplinger). 194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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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 글자판 운동에다 비유하자면, 거의 킹 제임스계의 송 현 선생님 같은 분.
여성이지만 변개된 역본들을 까는 전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렙이다. 변개된 성경 옹호자 내지 원어· 원문를 빠는 사람들의 천적, 나이트메어이며, 킬러요 저격수이다.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다만, 그 덕분에 주변에 적도 엄청 많다.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 보면 일반 사진보다는, TV에 노출된 장면이 캡처된 게 더 많이 걸려 나온다. 예쁘장한 전형적인 미국 아줌마 인상이라나? 단, 그런 것들은 대개 최소한 20세기 시절의 굉장한 옛날 사진이다.

이분은 New Age Bible Version(국내엔 <뉴에이지 성경 역본>이라고 소개됨), In Awe of Thy Word, Hazardous Materials 같은 전설적인 책들을 썼는데, 다들 수백~천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작이다.
그냥 성경간의 차이를 대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KJV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알량한 히브리/그리스어 원어 사전이나 원문부터가 완전히 헛점투성이이고 싸그리 잘못된 이유를 다 밝혀 낸다. 그리고 그 바닥 학계가 얼마나 허접하고 더러운지를 까발린다. 종교적이 아니라 학술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적을 상대로는 디버프를 시켜 놓고, KJV에 대해서는 버프 그 자체다. 언어 차원에서 성경의 영어 번역은 KJV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음을 논증하고, KJV의 영어는 매 단어 하나 하나가 거의 뜻글자나 마찬가지라는 수준으로 의미 부여를 시켜 준다. 가령, do의 3인칭 단수가 왜 굳이 doth(더쓰)와 doeth(두이쓰)로 달리 존재하는지 같은 것까지 다 아무렇게나 번역된 게 아니라는 거다.

과장 좀 보태면, 400여 년 전의 KJV 번역자들보다 KJV를 더 잘 알 것 같기도 한 사람이다.

본인은 이분의 저서 Hazardous Materials의 일부를 번역하는 일에 투입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chapter 1만 봐도 이건 뭐..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한 비유가 들어간 문장들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이분밖에 없다. ㅋㅋㅋㅋㅋㅋ 번역하면서 내가 다 놀랐다.
나부터가 글을 좀 호전· 도발· 공격적으로 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런 스타일의 글을 번역할 때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1. 신학교 교수가 강의실에서 포르노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브의 ‘원판’(original)은 원래 이렇게 생겼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와이프라는 ‘판본’(version)은 원본보다 열등합니다.” 원어 어휘집은 우리의 신앙에 이와 동일한 맥락의 악영향을 끼치니, 정말 기독교계의 포르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이런 체계 하에서 성경학도들은 끝없이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소프트웨어와 서적들을 모으면서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신들처럼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미 뱀의 편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Yea, hath God said?)

3. 에이즈(AIDS)라는 질병은 원래는 GRID(게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라고 불렸다. 그런데 오늘날은 또 다른 GRID(그리스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가 학생들을 물들이고 있다. 영적 면역력을 파괴하여 이단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4. 하다못해 주변에 마약이나 포르노에 대한 유혹이 있다면, 성령의 검인 성경이 신자를 지켜서 그런 것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가 그 검을 빼앗아 버리면, 검을 빼앗긴 사람은 앞으로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5. 필자는 자라나는 대학생들로 인한 마음의 부담 때문에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그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은 어서 회개하고, 만약 회개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거짓말이 강제로라도 잠잠해지기를 말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되고 거짓말이 최소한 ‘영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 직업을 선택하면 얼마나 좋을까? 중고차 판매 영업사원이 적절할 것 같다. 주님은 여러 위험한 교수들과 성경 의심쟁이들을 본업에서 끌어내셨으며, 일부를 진짜로 중고차 판매업계로 보내 버리신 적이 있다.


사실, 영어로 the original이라고 하면 원어도 되고 원문도 된다. 성경 번역의 품질은 얼마나 정확한 원문을 바탕으로 얼마나 정확한 언어 지식을 동원하여 번역하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킹 제임스 진영에서 기존 성경들이 다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대부분이 '원문' 문제이고 <뉴에이지 성경 역본> 같은 책도 다루는 분야가 이쪽이다. 오리겐 같은 사람이 변개한 부패한 원문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같은 학자가 본문 비평이라는 정신승리 궤변을 들고서 다시 끄집어내어, 성경의 주류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리플링거 박사의 관심사는 원문을 넘어서서 이제 '원어'로 넘어갔다.
변개된 성경에 대해서는 경각심이 생긴 사람들의 마음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으니, 악의 무리들은 이제는 본문은 KJV 그대로 놔 두더라도 단어의 뜻이 이게 아니고 원어로는 이렇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을 구분해서 표현할 수 없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 사자음어 때문에 음가를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식의 괴담 말이다.

그래서 새로 나온 책은 변개된 역본이나 본문에 이어 원어 어휘집, 사전을 신랄하게 까고 있다.
요즘은 사전을 만들 때 편찬자의 주관이 아니라 다량의 말뭉치 분석을 통해서, 거기에 드러난 어휘의 용례를 바탕으로 뜻풀이를 추출하는 게 대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원어 어휘집들의 밑천은 이집트나 그리스 이교도들이 남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문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엉뚱한 걸 갖다대고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KJV의 오역이라고 트집 잡고 넘기고, 심하면 KJV의 단어의 의미를 세속· 인본주의적인 뜻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특히 지옥, 대속, 기도, 은혜 같은 단어가 그런 식으로 왜곡되면 이건 뭐 기독교의 근간이 다 무너지지 않겠는가?

단적인 예로 virgin이 사실 원어에 따르면 굳이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성'도 된다. 이런 식으로 원어드립을 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얼마든지 공격하고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 주제로는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겠다. 요컨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1. 변개되지 않은 바른 본문에서 번역되었으며,
2. 모든 바른 필사본들을 온전히 집대성했다.
3. 원문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으로 번역했고,
4. 원문을 교리적으로 바른 사상으로 번역했다.


이렇게 알면 정확할 것이다.
1은 무슨 뜻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겠지만, 2는 세상의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 전서가 다 담겨 있지는 않기 때문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2가 불안하면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라든가 요한일서 5:7 삼위일체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
1과 2는 원문 계층이고 3과 4는 원어 계층이다. 3은 KJV의 이스터(행 12:4) 같은 우수한 번역을 뒷받침하며,
4는 KJV가 동성애· 여자 목사 옹호, 지옥 부정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성경 역본 논쟁은 확실히 창조-진화 논쟁 바닥과 비슷한 양상이다.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화석이 없는 것만큼이나 원어· 원문의 막연한 환상도 허상일 뿐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창조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그 뒤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재림 같은 것도 결코 믿을 수 없게 되듯, 성경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말씀도 믿을 수 없게 된다.

KJV 신자의 믿음은 이런 성경 구절 패러디로도 요약될 것 같다.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요 14:9)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original(원어+원문)을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original을 보여 주소서, 하느냐?


한글-한자 논쟁으로 비유하자면, 리플링거 박사는 수천 년 전의 한중일 한문 고전을 죄다 술술 읽고 해석해 내는 한문 전문가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한글 전용을 적극 지지하고 한자 기득권 속에 숨은 위선자 헛똑똑이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의로운 일을 하는 셈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언어 가지고 말장난을 하시지 않는다. 언어 장벽은 인간의 동반 타락을 막기 위해 허락하신 것일 뿐, 이것이 성경 말씀에 대한 접근성 제약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쪼록 리플링거의 책의 번역문이 어서 출판되어 나와서 국내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에 대한 바른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02 08:37 2013/10/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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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짧은 생각 둘

1.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기독교 교리를 딱 함축적으로 요약해 놓음과 동시에,
요즘 같은 인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정말 꺼내기가 거북하고 과격한 구호이다.
또한 이것은 논리적으로 굉장히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명제이기도 하다.

책임이라는 게, 굳이 크리스천이 세상을 상대로 꼭 좋은 행실을 보여야 하고 모범생, 일류, 리더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선행이 아니다.

그보더 더 원론적으로...
예수쟁이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전에 자기네끼리부터라도 잘 지내야 한다!

자기 깡으로 아무리 착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자기 죄 가운데 죽고 지옥 간다고 경고했는데..
그럼 역으로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서로 어떻게 지내야겠는가?
좋은 간증 지키는 방법이 다른 먼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불신자 부부는 조금만 틀어지고 자기 이익이 침해받는다 싶으면 싸우고 이혼할지라도, 크리스천 부부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법이나 시스템의 힘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해도 크리스천 내부의 문제는 가능한 한 더 선하고 훈훈한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교회엔 공통된 신앙 빼고는 지역색이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르고 취미와 성격과 성장 배경과 가치관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래도 성도들간에는 교리 문제나 반역 문제가 아닌 이상은 이해와 사랑, 희생과 헌신, 섬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치 거짓 교리, 불순분자에 대한 에러 복구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구원 여부를 가시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가 없는 이상, 이 능력은 교회 성도에게 필수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세상적인 다른 소재를 두고 끼리끼리 갈라지고 친목질에 심지어 팀킬을 벌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바알세붑 팀킬 가설은 마태-마가-누가복음에 3콤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대신 공통의 목표와 공통의 믿음을 대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활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건 거리 설교의 큰 유익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기독교 정부,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를 만드신 게 아니라 그냥 간단히 지역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성경은 그리 호락호락 만만한 책이 아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치지만 그걸로 끝이 절대로 아니며 그 뒤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아주 판타스틱한 일생 여정을 가르치고 있다.

2.

세월이 흐를수록 성경 말씀이 그다지 믿어지지 않고 최소한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것에 몰두해 봤자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 구원받은 것까지는 좋다 치는데,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생각이 들고,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주변에 복음을 전하려는 의욕이 식어 가고
성경대로 살면 오로지 호구 되고 바보 되고 손해만 본다는 생각이 들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아련한 옛날 추억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건 그 사람이 연륜이 쌓이고 이치를 깨달은 게 전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첫사랑이 식어 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크리스천의 생명력이 소멸하고, 영적으로 배도하고 타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구원받은 불신자' 상태이다.

영적 엔진오일 부족 경고등이라도 켜져서 깜빡이고 있을 때,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정비소에 보내서 수리를 받아야 한다. 아예 차가 퍼져 버리거나, 수리 수준을 넘어서 폐차 단계로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말이다.

당신의 영적 프로그램에서 debug assertion failure가 나 있을 때 어서 디버깅을 해야 한다. 커널 패닉이 뜨기 전에 말이다. 그냥 나일롱 신자로 만족하고 지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아니며 겸손은 더욱 아니다.

또한, 예수 믿는 생활은.. 단순히 여타 종교나 이념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소극적인 이유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A, B 중 A가 틀렸다고 해서 B가 자동으로 논리적으로 맞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기 때문이다.
B가 절대적으로 맞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니, B와 같지 않은 A나 C 같은 다른 건 자연스럽게 거부하는 적극적· 능동적인 구도로 가야 한다. 위조지폐를 판별하는 법은 진폐의 특성을 마스터하는 방식으로 해야지, 위폐만 만지면서 익히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9/03 08:27 2013/09/0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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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품꾼 비유는 논조가 다소 이질적이며,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만큼이나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고, 마감 한 시간 전에 와서 1시간만 달랑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에다 이런 불공평한 이야기를 왜 써 놓으신 걸까?

나도 하나님의 심정을 다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이나 인류 역사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짐작해 보건대, 하나님께서 그런 정책을 취하시는 것이 충분히 가능은 하다는 걸 느낀다.

저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똑같은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도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곧장 순교한 반면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몇 번이고 구해 줬다. 이것은 하나님이 근본 성품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쟁이 기분파여서라거나,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영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꼭 실력 좋은 사람만 1등을 하는 게 아니라는 자조적인 차원(전 9:11)의 이야기도 아니다.

욥은 현대인 같았으면 몇 번이고 멘붕을 거듭하다가 자살했을 정도의 최악의 고난과 시련을 경험했다. 이를 체험하고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바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분께서 자신에게 그 어떤 일을 허락하시든지 그분은 선하고 전지전능하신 면모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을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내버려 두시든,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서 보호하지 않고 순교하게 내버려 두시든지 말이다(단 3:17-18).

그 정도인데 그런 하나님이 하물며 비유에서처럼 일꾼을 고용하고 품삯을 주는 정책 하나조차 마음대로 결정을 못 하시겠는가?
애초에 하루 일당을 1데나리온으로 계약했으니, 그 주인은 나중에 말을 바꾸지도, 임금을 떼먹지도 않고 품꾼에게 그 약속을 정확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 이게 바로 포인트다.

나중에 다른 일꾼이 추가 투입될 수도 있고 그들은 일당을 얼마만치 받을지에 대해서는 애당초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건 주인 사정이고 추가 일꾼의 사정이지,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자꾸 부각시킴으로써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신뢰를 틀어지게 만들고, 자기 처지를 불평하게 만들고 남을 탐내고 원망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공산주의도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주인의 이런 반응에 삐쳐서 “흥, 그럼 다음부터는 나도 문 닫을 때 다 돼서 일하러 가야지” 같은 잔머리를 굴리는 건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보고는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이 무슨 이런 허접한 재판이 다 있냐? 그럼 나도 아기를 납치한 다음엔 상대방에게 아이를 주라고 생색 내면 되겠네.” 이러는 것과 똑같다.
성경을 읽고도 그 집필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숲을 보지 못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의 잔머리에 결코 조롱· 농락을 당하지 않는다는 힌트까지 알려 놓으셨다(갈 6:7).

이런 비논리적인 하나님 무조건 킹왕짱 정신승리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뭐,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 원칙이며, 크리스천과 불신자의 사고방식의 큰 차이 중 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엎드리고 바보 되는 것 말이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셨고 킹왕짱 사랑을 베푸셨으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세상 스펙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마다 물질적인 여건이나 스펙이 불균등하게 분배된 것은 사실은 불공평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마태복음 20장의 품꾼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1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한 눈에 띄는 정책 자체보다도,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주권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하나님은 진짜로 공평해야 하는 분야에는 정말 칼날같이 공평하며, 정말로 논리가 필요한 곳에서는 완전 철두철미한 논리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냥 영적으로 적용해서 모태신앙으로 나태하게 산 사람보다 뒤늦게 구원받고도, 알찬 인생을 살고 주님으로부터 상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이다”란 교훈이 뒤에 등장하니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8/29 08:23 2013/08/2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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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보 3유형

내가 생각하는 3대 크리스천 바보

1. 유대인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2. 예수님은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사람
3. 성경 맹신주의, 성경의 우상화.. 이런 말을 쓰는 사람

애초에 불신자야 저런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 없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종교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이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은 아이템별 간단한 해설이다. 내가 괜히 ‘바보’라는 말까지 쓰는 게 아니다.

1. 반유대주의

우리도 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죄인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아니 그럼 예수님이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안 죽으셨으면, 우리가 대신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됐을 것이다. 도대체 유대인을 특별히 미워해야 할 명분이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반유대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기독교를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문자적인 회복을 예언하며, 이 교리가 사실 화체설, 마리아, 연옥 만만찮게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의 매우 큰 교리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유대인들도 죄악에 빠졌을 때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타 민족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벌하고 심판하셨다. 많은 불신자들이 간과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많은 만큼, 계약 위반시 뱉어야 할 것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쟤들이 뭔가 죽이고 학살한 게 더 많았나, 아니면 반대로 자기들이 당한 게 더 많았던가?

그 ‘여타 민족’에 크리스천이 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였던 사람들이 최후가 좋았던 적은 없다.

2. 교회 무용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머리이기까지 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크리스천들을 위해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 교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립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떳떳하게 회계 보고를 하고 싶다면, 당신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주변에 도저히 마땅한 교회가 없다거나),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어차피 완벽한 교회란 없고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만 이뤄진 교회도 없다. 한 치의 허물도 없는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당신이 거기에 가입하는 순간 그 무결성은 깨진다.
대형 교회는 부패하고 돈만 밝힌다고 싫고, 작은 근본주의 교회는 교조주의적이고 ‘가오’가 안 난다고 싫다면 그건 뭐 무슨 상황이든 싫다는 변명일 뿐이다(마 11:18-19).

3. 성경(말씀) 무용론

이건 도대체 기독교의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극심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지위를 부여하시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이 들어가야 할 곳에 성경이 들어가는가 하면(요 7:38,42; 롬 9:17, 11:2; 갈 3:8,22 등) 시 138:2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미 얼마나 높은 존재인지는 빌 2:9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 높은 성경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아무리 굳건히 믿어도 시원찮을 성경이 어찌하여 ‘맹신과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난 비슷한 맥락에서, 일부 행실이 바르지 못한 크리스천, 육신적인 신자를 빌미로 성경을 폄하하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 탓을 하는 주장을 매우 싫어하고 경계한다.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은 발상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증은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바보 크리스천 말고, 바보 불신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성경에서 시 14:1이나 눅 12:20에서 다루고 있다. 이 역시 누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18 08:31 2013/06/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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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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