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노선도!

지금 각종 SNS와 구글, 네이버 등 검색엔진에서 '성경 노선도'라는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아래 그림은 원저자가 본인이다. 김 용묵, 내가 고안한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너무 남사스러운 거 같아서 그림에다 딱히 저작권 표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자기가 만들지 않은 작품을 자기 것이라고 사칭하는 일은 막기 위해서 최소한의 출처는 알리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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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철도와 성경이라는 두 분야를 서로 융합해서 표현하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작품을 최초로 만든 건 2006년경이다. 다음은 2006년임을 인증하는 최초의 그림 링크이다.

그러다가 본인은 내 혼자서 발로 그린 노선도를 디자인 일을 하시는 교회의 모 자매님에게 부탁하여 깔끔한 그림으로 만든 뒤, 청지기 카페와 킵바이블에다가 공개했다.
그랬는데 역시 킵바이블의 인지도 덕분인지 이 노선도는 인터넷에서 크리스천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누가 만든 건지도 모르는 채로.. ㅎㅎㅎ

주황과 분홍 같은 붉은 계열은 신구약 성경의 배경 지식이 되는 기초에 속한다. 구약에서는 모세오경, 신약에서는 복음서이다.

파란색은 역사서이다. 구약에서는 역사서가 모세오경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에스더기 구간이 저런 선형을 하고 있는 이유는 시간적으로 느헤미야보다 이전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역사서가 사도행전이 전부이며, 사복음서 중 당연히 누가복음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자주색은 소위 대언서로, 신약에서는 계시록이 유일하다.
구약에서 위쪽은 major prophets이고 아래쪽 호세아부터는 minor prophets이다.

사무엘하~열왕기하, 그리고 역대기상~역대기하는 병렬로 배열되어 있고, 이를 대언서가 수직으로 관통한다. 왼쪽은 다윗 이전이고, 오른쪽은 다윗 이후이다.
그리고 에스라와 그 오른쪽의 책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의 시간대이다.

다음, 연두색은 문학서이다. 욥기는 창세기 시대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룻기는 역사적으로는 사사기 중간에 속하지만 결말이 다윗의 계보로 끝나는 점을 감안하여 그림과 같이 분류했다.
문학서는 위쪽을 차지하면서 예레미야서와 교차하여 예레미야애가로 끝나게 배치한 것이 특징.

신약을 보면, 사도행전 중간부터 바울이 활동하기 시작하므로 바울 서신서의 노선은 그림과 같이 분기되어 나온다.
시기적으로 사도행전 28장까지 다 끝난 뒤에(로마 감금 내지 그 이후 4차 전도 여행) 기록된 것은 사도행전보다 오른쪽에 놓인다.
데살로니가 서신은 바울 서신들 중 상당히 초기에 기록된 서신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의 경계에 있는 독특한 책이므로 응당 저렇게 배치된다.

즉, 이 노선도는
성경 각 책의 성격, 책이 다루는 연대나 기록된 연대, 그 책이 성경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적당히 시각적으로 나타내면서 책의 66권 배열 순서도 크게 안 흐뜨리려 했다.

사소한 고증 오류가 있을 수는 있으나, 취지는 충분히 설명되었으므로 그런 부분만 약간 고치면 성경에 대한 시청각 교육에 꽤 유용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아무쪼록 우리 인류에게 성경을 남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한국 철도에게 영광 돌리는 바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08 08:31 2013/10/0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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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일 리플링거(Gail Riplinger). 1947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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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벌식 글자판 운동에다 비유하자면, 거의 킹 제임스계의 송 현 선생님 같은 분.
여성이지만 변개된 역본들을 까는 전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렙이다. 변개된 성경 옹호자 내지 원어· 원문를 빠는 사람들의 천적, 나이트메어이며, 킬러요 저격수이다. 나 같은 사람은 감히 범접할 수조차 없는 세계적인 전문가이다. 다만, 그 덕분에 주변에 적도 엄청 많다.

구글에서 사진을 검색해 보면 일반 사진보다는, TV에 노출된 장면이 캡처된 게 더 많이 걸려 나온다. 예쁘장한 전형적인 미국 아줌마 인상이라나? 단, 그런 것들은 대개 최소한 20세기 시절의 굉장한 옛날 사진이다.

이분은 New Age Bible Version(국내엔 <뉴에이지 성경 역본>이라고 소개됨), In Awe of Thy Word, Hazardous Materials 같은 전설적인 책들을 썼는데, 다들 수백~천몇백 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거작이다.
그냥 성경간의 차이를 대조하는 수준이 아니라, KJV를 공격하는 데 쓰이는 알량한 히브리/그리스어 원어 사전이나 원문부터가 완전히 헛점투성이이고 싸그리 잘못된 이유를 다 밝혀 낸다. 그리고 그 바닥 학계가 얼마나 허접하고 더러운지를 까발린다. 종교적이 아니라 학술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적을 상대로는 디버프를 시켜 놓고, KJV에 대해서는 버프 그 자체다. 언어 차원에서 성경의 영어 번역은 KJV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있을 수 없음을 논증하고, KJV의 영어는 매 단어 하나 하나가 거의 뜻글자나 마찬가지라는 수준으로 의미 부여를 시켜 준다. 가령, do의 3인칭 단수가 왜 굳이 doth(더쓰)와 doeth(두이쓰)로 달리 존재하는지 같은 것까지 다 아무렇게나 번역된 게 아니라는 거다.

과장 좀 보태면, 400여 년 전의 KJV 번역자들보다 KJV를 더 잘 알 것 같기도 한 사람이다.

본인은 이분의 저서 Hazardous Materials의 일부를 번역하는 일에 투입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chapter 1만 봐도 이건 뭐..
다음과 같은 기상천외한 비유가 들어간 문장들을 생각해 낼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이분밖에 없다. ㅋㅋㅋㅋㅋㅋ 번역하면서 내가 다 놀랐다.
나부터가 글을 좀 호전· 도발· 공격적으로 쓰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그런 스타일의 글을 번역할 때도 동질감이 느껴진다.

1. 신학교 교수가 강의실에서 포르노를 보여주고는 이렇게 말한다고 생각해 보라. “이브의 ‘원판’(original)은 원래 이렇게 생겼지요. 그러니 여러분의 와이프라는 ‘판본’(version)은 원본보다 열등합니다.” 원어 어휘집은 우리의 신앙에 이와 동일한 맥락의 악영향을 끼치니, 정말 기독교계의 포르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이런 체계 하에서 성경학도들은 끝없이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계속해서 소프트웨어와 서적들을 모으면서 “지혜로워지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신들처럼 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미 뱀의 편이 되고 말았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Yea, hath God said?)

3. 에이즈(AIDS)라는 질병은 원래는 GRID(게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라고 불렸다. 그런데 오늘날은 또 다른 GRID(그리스어와 관련된 면역 체계 이상증세)가 학생들을 물들이고 있다. 영적 면역력을 파괴하여 이단으로 빠지게 하는 것이다.

4. 하다못해 주변에 마약이나 포르노에 대한 유혹이 있다면, 성령의 검인 성경이 신자를 지켜서 그런 것들이 얼씬도 못 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마귀가 그 검을 빼앗아 버리면, 검을 빼앗긴 사람은 앞으로 어떤 공격도 막을 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5. 필자는 자라나는 대학생들로 인한 마음의 부담 때문에 매일 이렇게 기도한다. 그들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자들은 어서 회개하고, 만약 회개를 거부한다면 그들의 거짓말이 강제로라도 잠잠해지기를 말이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면 합법적으로 거짓말을 해도 되고 거짓말이 최소한 ‘영적인’ 해악을 끼치지는 않는 직업을 선택하면 얼마나 좋을까? 중고차 판매 영업사원이 적절할 것 같다. 주님은 여러 위험한 교수들과 성경 의심쟁이들을 본업에서 끌어내셨으며, 일부를 진짜로 중고차 판매업계로 보내 버리신 적이 있다.


사실, 영어로 the original이라고 하면 원어도 되고 원문도 된다. 성경 번역의 품질은 얼마나 정확한 원문을 바탕으로 얼마나 정확한 언어 지식을 동원하여 번역하였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킹 제임스 진영에서 기존 성경들이 다 변개되었다고 주장하는 건 대부분이 '원문' 문제이고 <뉴에이지 성경 역본> 같은 책도 다루는 분야가 이쪽이다. 오리겐 같은 사람이 변개한 부패한 원문을 웨스트코트와 호르트 같은 학자가 본문 비평이라는 정신승리 궤변을 들고서 다시 끄집어내어, 성경의 주류로 끌어올려 놓은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대하고 치밀한 음모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리플링거 박사의 관심사는 원문을 넘어서서 이제 '원어'로 넘어갔다.
변개된 성경에 대해서는 경각심이 생긴 사람들의 마음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으니, 악의 무리들은 이제는 본문은 KJV 그대로 놔 두더라도 단어의 뜻이 이게 아니고 원어로는 이렇다는 식으로 사기를 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어로는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을 구분해서 표현할 수 없다거나, 하나님의 이름은 히브리어 사자음어 때문에 음가를 영원히 알 수 없다는 식의 괴담 말이다.

그래서 새로 나온 책은 변개된 역본이나 본문에 이어 원어 어휘집, 사전을 신랄하게 까고 있다.
요즘은 사전을 만들 때 편찬자의 주관이 아니라 다량의 말뭉치 분석을 통해서, 거기에 드러난 어휘의 용례를 바탕으로 뜻풀이를 추출하는 게 대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원어 어휘집들의 밑천은 이집트나 그리스 이교도들이 남긴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문헌이라는 점이다.

그런 엉뚱한 걸 갖다대고는 단어의 의미가 서로 일치하지 않으면 KJV의 오역이라고 트집 잡고 넘기고, 심하면 KJV의 단어의 의미를 세속· 인본주의적인 뜻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다. 특히 지옥, 대속, 기도, 은혜 같은 단어가 그런 식으로 왜곡되면 이건 뭐 기독교의 근간이 다 무너지지 않겠는가?

단적인 예로 virgin이 사실 원어에 따르면 굳이 처녀가 아니라 '젊은 여성'도 된다. 이런 식으로 원어드립을 치면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얼마든지 공격하고 부정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이 주제로는 할 말이 무척 많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글을 맺겠다. 요컨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는

1. 변개되지 않은 바른 본문에서 번역되었으며,
2. 모든 바른 필사본들을 온전히 집대성했다.
3. 원문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한 실력으로 번역했고,
4. 원문을 교리적으로 바른 사상으로 번역했다.


이렇게 알면 정확할 것이다.
1은 무슨 뜻인지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겠지만, 2는 세상의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 전서가 다 담겨 있지는 않기 때문에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2가 불안하면 마가복음 16장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라든가 요한일서 5:7 삼위일체 문제에서 걸려 넘어지게 된다.
1과 2는 원문 계층이고 3과 4는 원어 계층이다. 3은 KJV의 이스터(행 12:4) 같은 우수한 번역을 뒷받침하며,
4는 KJV가 동성애· 여자 목사 옹호, 지옥 부정 같은 불온사상에 물들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성경 역본 논쟁은 확실히 창조-진화 논쟁 바닥과 비슷한 양상이다. 원숭이와 사람 사이의 중간 화석이 없는 것만큼이나 원어· 원문의 막연한 환상도 허상일 뿐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창조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그 뒤의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 재림 같은 것도 결코 믿을 수 없게 되듯, 성경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 성경에 기록된 그 어떤 말씀도 믿을 수 없게 된다.

KJV 신자의 믿음은 이런 성경 구절 패러디로도 요약될 것 같다. 매우 적절한 비유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 하느냐?” (요 14:9)
킹 제임스 성경을 본 자는 이미 original(원어+원문)을 보았거늘, 어찌 네가 말하기를 우리에게 original을 보여 주소서, 하느냐?


한글-한자 논쟁으로 비유하자면, 리플링거 박사는 수천 년 전의 한중일 한문 고전을 죄다 술술 읽고 해석해 내는 한문 전문가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계몽을 위한 한글 전용을 적극 지지하고 한자 기득권 속에 숨은 위선자 헛똑똑이들의 정체를 폭로하는 의로운 일을 하는 셈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언어 가지고 말장난을 하시지 않는다. 언어 장벽은 인간의 동반 타락을 막기 위해 허락하신 것일 뿐, 이것이 성경 말씀에 대한 접근성 제약을 의도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아무쪼록 리플링거의 책의 번역문이 어서 출판되어 나와서 국내의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성경에 대한 바른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10/02 08:37 2013/10/02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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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관련 짧은 생각 둘

1.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은 기독교 교리를 딱 함축적으로 요약해 놓음과 동시에,
요즘 같은 인본주의 다원주의 상대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정말 꺼내기가 거북하고 과격한 구호이다.
또한 이것은 논리적으로 굉장히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명제이기도 하다.

책임이라는 게, 굳이 크리스천이 세상을 상대로 꼭 좋은 행실을 보여야 하고 모범생, 일류, 리더 행세를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선행이 아니다.

그보더 더 원론적으로...
예수쟁이들은 남에게 잘 보이기 전에 자기네끼리부터라도 잘 지내야 한다!

자기 깡으로 아무리 착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자기 죄 가운데 죽고 지옥 간다고 경고했는데..
그럼 역으로 예수 믿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끼리는 서로 어떻게 지내야겠는가?
좋은 간증 지키는 방법이 다른 먼 곳에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불신자 부부는 조금만 틀어지고 자기 이익이 침해받는다 싶으면 싸우고 이혼할지라도, 크리스천 부부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믿을 수 없으니 법이나 시스템의 힘으로 분쟁을 해결한다 해도 크리스천 내부의 문제는 가능한 한 더 선하고 훈훈한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교회엔 공통된 신앙 빼고는 지역색이 다르고 정치 성향이 다르고 취미와 성격과 성장 배경과 가치관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래도 성도들간에는 교리 문제나 반역 문제가 아닌 이상은 이해와 사랑, 희생과 헌신, 섬김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만치 거짓 교리, 불순분자에 대한 에러 복구 능력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사람의 구원 여부를 가시적인 방법으로 확인할 수가 없는 이상, 이 능력은 교회 성도에게 필수이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세상적인 다른 소재를 두고 끼리끼리 갈라지고 친목질에 심지어 팀킬을 벌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 (바알세붑 팀킬 가설은 마태-마가-누가복음에 3콤보로 기록되어 있다)
그 대신 공통의 목표와 공통의 믿음을 대외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활동을 더 많이 해야 한다. 이건 거리 설교의 큰 유익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 기독교 정부,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를 만드신 게 아니라 그냥 간단히 지역 교회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이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법이다.
성경은 그리 호락호락 만만한 책이 아니다. 믿음으로 얻는 구원과 구원의 영원한 보장을 가르치지만 그걸로 끝이 절대로 아니며 그 뒤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아주 판타스틱한 일생 여정을 가르치고 있다.

2.

세월이 흐를수록 성경 말씀이 그다지 믿어지지 않고 최소한 내 삶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생각이 들고..
이런 것에 몰두해 봤자 밥이 나오나 돈이 나오나 하는 생각이 들고..
“그래, 구원받은 것까지는 좋다 치는데, 그래서 어쨌다고?”라는 생각이 들고,
내 삶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별로 느껴지지 않고, 주변에 복음을 전하려는 의욕이 식어 가고
성경대로 살면 오로지 호구 되고 바보 되고 손해만 본다는 생각이 들고,
구원의 기쁨과 감격이 아련한 옛날 추억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건 그 사람이 연륜이 쌓이고 이치를 깨달은 게 전혀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첫사랑이 식어 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크리스천의 생명력이 소멸하고, 영적으로 배도하고 타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른바 '구원받은 불신자' 상태이다.

영적 엔진오일 부족 경고등이라도 켜져서 깜빡이고 있을 때, 인생이라는 자동차를 정비소에 보내서 수리를 받아야 한다. 아예 차가 퍼져 버리거나, 수리 수준을 넘어서 폐차 단계로 상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말이다.

당신의 영적 프로그램에서 debug assertion failure가 나 있을 때 어서 디버깅을 해야 한다. 커널 패닉이 뜨기 전에 말이다. 그냥 나일롱 신자로 만족하고 지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랑이 아니며 겸손은 더욱 아니다.

또한, 예수 믿는 생활은.. 단순히 여타 종교나 이념이 틀렸기 때문이라는 소극적인 이유만으로 하는 게 아니다. A, B 중 A가 틀렸다고 해서 B가 자동으로 논리적으로 맞게 되는 건 당연히 아니기 때문이다.
B가 절대적으로 맞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니, B와 같지 않은 A나 C 같은 다른 건 자연스럽게 거부하는 적극적· 능동적인 구도로 가야 한다. 위조지폐를 판별하는 법은 진폐의 특성을 마스터하는 방식으로 해야지, 위폐만 만지면서 익히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9/03 08:27 2013/09/03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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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품꾼 비유는 논조가 다소 이질적이며, 누가복음 16장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만큼이나 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루 종일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고, 마감 한 시간 전에 와서 1시간만 달랑 일한 사람도 1데나리온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경에다 이런 불공평한 이야기를 왜 써 놓으신 걸까?

나도 하나님의 심정을 다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의 다른 부분이나 인류 역사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성품으로부터 짐작해 보건대, 하나님께서 그런 정책을 취하시는 것이 충분히 가능은 하다는 걸 느낀다.

저 비유는 ‘하나님의 주권’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사도행전을 보면, 똑같은 예수님의 사도 중에서도 야고보는 헤롯의 칼에 곧장 순교한 반면 베드로는 천사가 와서 몇 번이고 구해 줬다. 이것은 하나님이 근본 성품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쟁이 기분파여서라거나, 야고보가 베드로보다 영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꼭 실력 좋은 사람만 1등을 하는 게 아니라는 자조적인 차원(전 9:11)의 이야기도 아니다.

욥은 현대인 같았으면 몇 번이고 멘붕을 거듭하다가 자살했을 정도의 최악의 고난과 시련을 경험했다. 이를 체험하고 욥이 하나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은 바로,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고 그분께서 자신에게 그 어떤 일을 허락하시든지 그분은 선하고 전지전능하신 면모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욥을 죽을 때까지 그 상태로 내버려 두시든, 그리고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 불에서 보호하지 않고 순교하게 내버려 두시든지 말이다(단 3:17-18).

그 정도인데 그런 하나님이 하물며 비유에서처럼 일꾼을 고용하고 품삯을 주는 정책 하나조차 마음대로 결정을 못 하시겠는가?
애초에 하루 일당을 1데나리온으로 계약했으니, 그 주인은 나중에 말을 바꾸지도, 임금을 떼먹지도 않고 품꾼에게 그 약속을 정확하고 성실하게 이행했다. 이게 바로 포인트다.

나중에 다른 일꾼이 추가 투입될 수도 있고 그들은 일당을 얼마만치 받을지에 대해서는 애당초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그건 주인 사정이고 추가 일꾼의 사정이지, 내가 신경 쓸 필요가 없는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걸 자꾸 부각시킴으로써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신뢰를 틀어지게 만들고, 자기 처지를 불평하게 만들고 남을 탐내고 원망하게 만드는 것이 마귀의 역사이다. 공산주의도 이런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생겨났다.

주인의 이런 반응에 삐쳐서 “흥, 그럼 다음부터는 나도 문 닫을 때 다 돼서 일하러 가야지” 같은 잔머리를 굴리는 건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솔로몬의 재판을 보고는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이 무슨 이런 허접한 재판이 다 있냐? 그럼 나도 아기를 납치한 다음엔 상대방에게 아이를 주라고 생색 내면 되겠네.” 이러는 것과 똑같다.
성경을 읽고도 그 집필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숲을 보지 못한 모습이라 하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은 인간의 잔머리에 결코 조롱· 농락을 당하지 않는다는 힌트까지 알려 놓으셨다(갈 6:7).

이런 비논리적인 하나님 무조건 킹왕짱 정신승리법이 어디 있느냐고 비아냥거리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뭐, 틀린 지적은 아니다. 그게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는 기본 원칙이며, 크리스천과 불신자의 사고방식의 큰 차이 중 하나이다. 하나님 앞에서 낮추고 엎드리고 바보 되는 것 말이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셨고 킹왕짱 사랑을 베푸셨으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 세상 스펙이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사람마다 물질적인 여건이나 스펙이 불균등하게 분배된 것은 사실은 불공평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마태복음 20장의 품꾼 비유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일한 시간과 관계없이 1데나리온 일당을 지급한 눈에 띄는 정책 자체보다도, 그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주권이다. 성경을 제대로 읽으면, 하나님은 진짜로 공평해야 하는 분야에는 정말 칼날같이 공평하며, 정말로 논리가 필요한 곳에서는 완전 철두철미한 논리 체계가 갖춰져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냥 영적으로 적용해서 모태신앙으로 나태하게 산 사람보다 뒤늦게 구원받고도, 알찬 인생을 살고 주님으로부터 상을 더 많이 받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 역시 나쁘지 않다.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처음 될 것이다”란 교훈이 뒤에 등장하니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8/29 08:23 2013/08/29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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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바보 3유형

내가 생각하는 3대 크리스천 바보

1. 유대인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2. 예수님은 믿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교회는 싫어하는 사람
3. 성경 맹신주의, 성경의 우상화.. 이런 말을 쓰는 사람

애초에 불신자야 저런 주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 없지만, 예수 믿는다고 하고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종교 정체성을 밝히는 사람이 저렇게 생각한다는 건 정말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다음은 아이템별 간단한 해설이다. 내가 괜히 ‘바보’라는 말까지 쓰는 게 아니다.

1. 반유대주의

우리도 그들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죄인이라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아니 그럼 예수님이 인류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안 죽으셨으면, 우리가 대신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에 가게 됐을 것이다. 도대체 유대인을 특별히 미워해야 할 명분이 어디 있는가?

성경의 기독교는 그 어떤 명분으로도 절대로 반유대주의를 가르치지 않는다. 정작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기독교를 매우 싫어하지만 그래도 크리스천들은 유대인들을 미워하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이스라엘 민족의 문자적인 회복을 예언하며, 이 교리가 사실 화체설, 마리아, 연옥 만만찮게 천주교와 기독교 사이의 매우 큰 교리 차이이기도 하다.

물론 유대인들도 죄악에 빠졌을 때는 공평하신 하나님께서 여타 민족들을 이용하여 그들을 벌하고 심판하셨다. 많은 불신자들이 간과하는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게 많은 만큼, 계약 위반시 뱉어야 할 것도 많았다. 역사적으로 쟤들이 뭔가 죽이고 학살한 게 더 많았나, 아니면 반대로 자기들이 당한 게 더 많았던가?

그 ‘여타 민족’에 크리스천이 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된다. 유대인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쓰였던 사람들이 최후가 좋았던 적은 없다.

2. 교회 무용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그러나 당신이 사랑하는 예수님이,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머리이기까지 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수님은 크리스천들을 위해 기독교 국가, 기독교 기업, 기독교 학교가 아니라 교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립하신 것이다.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싶고 훗날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떳떳하게 회계 보고를 하고 싶다면, 당신은 아주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주변에 도저히 마땅한 교회가 없다거나),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 교회를 신실하게 섬기면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

세상에 어차피 완벽한 교회란 없고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만 이뤄진 교회도 없다. 한 치의 허물도 없는 완벽한 교회가 있다면 당신이 거기에 가입하는 순간 그 무결성은 깨진다.
대형 교회는 부패하고 돈만 밝힌다고 싫고, 작은 근본주의 교회는 교조주의적이고 ‘가오’가 안 난다고 싫다면 그건 뭐 무슨 상황이든 싫다는 변명일 뿐이다(마 11:18-19).

3. 성경(말씀) 무용론

이건 도대체 기독교의 믿음의 근간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극심한 무지의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지위를 부여하시는지를 기록해 놓았다. ‘하나님’이 들어가야 할 곳에 성경이 들어가는가 하면(요 7:38,42; 롬 9:17, 11:2; 갈 3:8,22 등) 시 138:2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자신의 모든 이름보다 크게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도 이미 얼마나 높은 존재인지는 빌 2:9 같은 구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그 높은 성경을 안 믿으면 무엇을 믿겠으며, 아무리 굳건히 믿어도 시원찮을 성경이 어찌하여 ‘맹신과 우상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난 비슷한 맥락에서, 일부 행실이 바르지 못한 크리스천, 육신적인 신자를 빌미로 성경을 폄하하고 특히 킹 제임스 성경 탓을 하는 주장을 매우 싫어하고 경계한다. 문제의 본질을 완전히 잘못 짚은 발상이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논증은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참고로 바보 크리스천 말고, 바보 불신자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성경에서 시 14:1이나 눅 12:20에서 다루고 있다. 이 역시 누구나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18 08:31 2013/06/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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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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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님은 누구는 애초부터 지옥 가라고 창조하셨고 누구는 천당 가라고 창조하셨다.
  • 빛이 없으면 자동으로 어둠이고 어둠이 먼저 있어야 빛이 필요하듯이, 선과 악도 서로 양 날개와 같은 존재이고 상대방을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하다.

이런 부류의 모든 거짓 교리들은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다(저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복 받은 사람이다).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충족하는 성경의 하나님을 완전 잔인무도하고 무지막지한 신으로 왜곡함으로써 불신자에게는 회개하고 구원으로 이를 통로를 원천 차단하고, 안티들로 하여금 기독교를 더욱 모함하고 조롱할 빌미를 제공한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천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런 교리들이 잘못되었음을 널리 알려야 한다.

내가 예정론에 대해서 무엇보다 분노를 느끼는 건, 죄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왜곡한다는 점 때문이다.

생각을 해 보라. 왜 하나님이 죄인을 지옥으로 보낼 수밖에 없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할 수밖에 없었나? 주위를 둘러보면 어지간히 평균적인 '교인'들보다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도 얼마든지 있는데도 우리가 어째서 감히 길거리에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가?

죄라는 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예수님의 보혈을 대가로 요구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존재인데, 지옥에 가야 마땅한 죄인을 무슨 죄인 역할극 악역 배우쯤으로 미화하는 이 무시무시한 교리는.. 마귀로부터 유래된 게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파라오와 헤롯의 유아 학살,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일본군 731 부대 생체 실험, 지존파, 북한 정치범 수용소가 전부 연기였다는 말인가?

파라오는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곱게 내보내 줘도 어차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으며 그게 피차 더 나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열 가지 재앙에 나라 경제를 완전히 말아먹고 험한 꼴을 다 당한 뒤에야 풀어 주게 됐다. 하나님은 파라오의 완악한 마음을 이용해서 그의 마음을 더욱 완악하게 '보호 장치'를 해제해 버리셨으며 재앙을 통해 영광을 받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광 좀 받아야겠으니 너는 좀 이스라엘 백성 풀어 주지 말고 완강하게 버티고 있어 봐라. 나는 그 짓을 시키려고 너를 창조했다”는 절대 아니다!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악역을 활용하였으며, 좀 대놓고 말하자면 그들을 조롱하며 갖고 노신 적은 있다. 허나 당사자는 악역을 자처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며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사실 어떤 경우에도 악역을 맡아서는 안 된다. (그 중 제일 해서는 안 되는 악역은 유대인을 심판하는 도구이다.) 악역은 죄이며 죄에는 심판과 형벌이 따를 뿐이기 때문이다. 악역을 자처해 봤자 삽질 잔뜩 하고, 시간· 돈 날리고 손해 보는 건 우리뿐이다.

하나님은 그 파라오인들 구원하고 싶지 않으셨겠는가? 그가 나중에라도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었다면, 유대인들을 악하게 다룬 것과는 별개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개인의 구원에 관한 한은, 이는 히틀러, 도조 히데키, 스탈린, 심지어 오늘날의 이북의 인간 악마 인간 백정 김씨 같은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성경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부정하는 운명 예정론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하다고 해서 자기가 무슨 아무 감정도 없는 로봇 컴퓨터이거나, 세상을 그런 기계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죄악으로 인해 인간을 지은 것을 슬퍼(repent)했다는 구절마저 성경에 들어있는 것이다. 로봇, 컴퓨터는 '정지 문제' 하나도 풀 수 없는 튜링 기계일 뿐이다. 0과 1만 분간할 수 있을 뿐, 선과 악을 분간할 수는 없으며 죄에 대한 책임도 질 수 없는 물건이다.

인간은 불가항적으로 죄인으로 태어난다. 하지만 하나님 역시 불가항적인 이유만으로 사람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도 않는다. 지옥은 언제까지나 사람이 선악을 스스로 분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로 지은 자기 죄로 인해서 가는 것이며,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자발적으로 거부하여 제 발로 간다. 즉 전적으로 100% 후천적인 요인만 작용한다.

요컨대..하나님에게 미리 아심은 있다.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이런 운명의 데스티니가 보장되었다는 예정 정도는 성경적으로 물론 있다. 허나, 인간 개개인의 구원 여부를 미리 정해 놓은 예정 따위는 없다. 미리 아심은 read-only operation일 뿐이다. 혼동하지 말자.

기독교의 구원 교리는 딱 체계가 잡혀 있고 논리가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다 이해할 수 없는 교리를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낭설을 맹목적으로 떠받드는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2 08:36 2013/05/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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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무신론자 중에서
“세상에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내세도 심판도 없다. 내 마음대로 얼마든지 상대적인 잣대로 살아도 된다. 그걸 모르고 하나님이나 찾는 무능하고 어리석은 인생들이 너무 불쌍하다. 나는 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무신론이 진리임을 알리기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내 생명이라도 내어 놓겠다
이렇게 말하고 행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을 알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구원받은 크리스천 중에서
“내게는 개역성경/NIV가 최종 권위인 하나님 말씀이다. KJV야말로 6만 구절의 단어를 변개하고 13구절을 후대에 ‘추가’하여 하나님 말씀을 뜯어고친 무시무시한 죄를 저질렀다. 나는 이 엄청난 사실을 정반대로 알고 있는 KJV 지지자들을 계몽하고, 진짜 절대무오한 다른 성경을 대안으로 내놓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시겠죠?
두 진영은 서로 계산 결과만 다른 게 아니라 계산 과정과 초기의 변수, 생각하는 전제 조건부터가 완전히 다릅니다.

* 평소의 내 블로그 스타일답지 않게 무지하게 짧은 글이 돼 버렸는데..
그래도 내 생각의 핵심은 다 담겨 있으니..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4/20 08:27 2013/04/2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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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둔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
“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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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후유증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
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드립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12 08:39 2013/01/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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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참히 망가뜨리고 죽이는 흉악 범죄가 양지나 음지에서 무수히 저질러져 왔다. 그 중에도 죄질이 특히 나쁜 축에 드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연약한 미성년자 내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을 납치· 감금하여 여럿이서 학대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고문까지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짓이다. 영어로는 torture murder이라는 비공식 용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엔 일본에서는 일명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라 하여, 제목부터가 섬뜩한데 정말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흉악하고 인간의 마귀적인 본성이 그대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을까 싶은 torture murder가 벌어진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구체적인 사건 내역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5년엔 미국에서도 실비아 라이컨스(Sylvia Likens)라는 소녀가 부모 사정으로 인해 타지에서 맡겨져 키워지던 중에, 집주인 아주머니와 주변 아이들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의 학대와 왕따, 고문을 당한 끝에 겨우 1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채 경찰에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학대를 깊이 살펴보았노니,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라.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편에는 권세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전 4:1)

후자의 경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법정 증언을 바탕으로 2007년엔 엘렌 페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An American Crime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 사건도 자국 내부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건 그냥 AV 배우를 동원해서 선정적인 고어물 성인물 영화로 돈이나 벌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그 반면, 미국의 영화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불리며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아메리카라는 나라에서까지, 옛날에 이런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었다는 분노와 자성의 뉘앙스가 제목에 담긴 것 같다. 감독이 제목을 하필 왜 저렇게 뽑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난 An American Crime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다가 열받아서 차마 끝까지 못 본다고.. 모니터를 때려부수고 악역 배우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그런다. 아무 죄책감 없이 군중 심리로 피해자를 심심풀이 하듯 때리고 괴롭히고 굶기고 배에다가 불에 달군 바늘로 글씨를 새기고는... 나중에 법정에 가서는 “몰라요. 기억 안 나요. /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심한 잘못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렇게 발뺌을 하는 뻔뻔한 인간 종자를 보노라면, 누구라도 짜증과 살인 충동이 하늘로 피어오르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영화는 일본 영화와는 달리 그렇게 선정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실비아가 당한 가혹행위에 비해 영화의 묘사는 정말 정말 많이 희석되고 절제되고 수위가 완화된 것이다.

처참했던 실제 사건의 결말에 비해, 영화는 감독의 희망 사항 내지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여지를 결말에다 두리뭉실하게 남겼다. 실비아가 죽지 않고 거투르드 아줌마의 집을 탈출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는 설정이 들어간다. 그런데 다시 거투르드의 집으로 돌아가니 자기의 몸은 죽어 있고, 그와 함께 탈출한 줄 알았던 실비아도 싹 사라지고 다시 고향의 회전목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실비아는 극도의 영양실조에다 구타로 인해 발생한 뇌와 내장의 출혈이 도지면서, 목욕 도중에 사망했다.)

우울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도 단조풍의 굉장히 구슬픈 여성 아카펠라 노래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의 고통과 아픔, 슬픔으로부터 벗어난(상징적으로나마) 실비아가 혼자 회전목마에 탄 채, 다음과 같은 독백 대사를 읊는 것으로 쓸쓸하게 끝난다.

And me? I returned to the carnival. The only place I always felt save.
Reverend Bill used to say, “For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
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

(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뒤) 그리고 난.. 놀이동산으로 돌아왔어요. 내 마음의 유일한 고향으로요.
빌 목사님은 전에 이렇게 얘기하셨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뜻하신 계획이 있으시다고..
난 아직도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찾아 헤매는 중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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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대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실비아 같은 불쌍한 아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나?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긴 하나?”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 메시지를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거야 세상의 불신자들이 역사상 한두 번 제기해 온 의문이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상에서 흥행하는 영화들치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세워 주는 친기독교 성향의 결론으로 끝나는 게 어디 하나 있긴 하던가? 예수 믿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개념 광신자로 묘사되거나, 개나 소나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밖에 모르는 위선자,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쩔쩔매고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찌질이 루저로 나온다. 이 셋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못 하는 살인범을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하냐?”(영화 <밀양>) 같은 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거짓으로 왜곡하거나, 민감한 부분만 이상하게 배배 틀어 적용해서 오해를 사게 만들고, 뭔가 말이 안 되고 모순되고 몰상식한 것으로 전달한다.
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런 왜곡에 불구하고 천주교 신부· 수녀에 대한 묘사는 교회 예배당이나 목사 쪽에 비해 월등히 더 낫다는 점도 특이한 점.

자, 대놓고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외하고, 여러분이 보았던 일반적인 세속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열거한 특성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꼭 알려 주시기 바란다. 본인도 적극 고려하도록 하겠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본인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An American Crime에서 실비아의 마지막 대사를 보아하니, 그 심상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다음 찬양이 생각 나서였다. 바로, Ron Hamilton--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중년 남자 모습이 많이 뜨는데, 그분이다--Rejoice in the Lord 되겠다. 가사 첫 줄에 곧바로 “하나님은 섭리나 계획 없이는 결코 역사하지 않으신다”란 말이 나오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실수도 결코 하지 않으신댄다!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
When trying His servant and molding a man.
Give thanks to the Lord though your testing seems long;
In darkness He giveth a song.

O rejoice in the Lord. He makes no mistake.
He knoweth the end of each path that I take.
For when I am tried and purified,
I shall come forth as gold.


이 곡은 클래식한 리듬과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는 최근인 1978년에 발표되었다.
세상에는 성경의 욥이나 요셉이나 다윗처럼, 정말 억울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멘붕 상태에서도 우리 같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긴 인고의 시간을 잘 견딘 끝에 정말로 '황금처럼' 연단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요셉은 누명이 벗겨지고 감옥에서 곧 풀려날 거라는 희망고문만 2년을 견뎌야 했다. 감옥에서 썩은 전체 기간이 2년이 아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다 그 사람들처럼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반드시 펴는 건 아니다.
또한 실비아 라이컨스처럼 연단이 아니라 아예 폭력과 학대의 희생양이 된 채,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인생도 역사적으로 한둘이 아닐 것이다.
찬양 가사는 세상의 참혹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저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작사자는 그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쓴 것일까?

하나님의 뜻 중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고, 당장 보기 안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 명목으로 잠시 '허락하시는 뜻'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후자에 속하는지에 대해서야 나라고 해서 뾰족한 해답을 알고 있을 리 없다.
더구나 세상적으로 잘못되고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을 죄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욥의 친구들처럼), “예수 안 믿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몰상식한 짓은 난 극도로 싫어하며, 그런 식의 논리 전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논증을 못 하면 마치 귀류법처럼 간접적으로, 역으로 접근할 수는 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어차피 그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신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릴 사람도 아니다. 예수님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죄인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서 십자가에서 못을 으랏차차 뽑아 내고 초자연적으로 내려와 버렸다고 해서 그들이 그분을 믿었겠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믿길 진짜로 원하시는 그 성품과 면모를 믿고 따르겠는가!?)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공개 석상에서 어떤 유명한 무신론자가 “자 신아, 네가 존재한다면 지금 3분을 줄 테니 이 공개 석상에서 날 죽여서 너의 영광을 드러내 보아라”라고 고래고래 독설을 날렸다. 성경에 기록된 그런 성품을 가진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진짜 그 무신론자를 죽여 버릴 리가 있겠냐 말이다.

솔로몬이 명판관으로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가 과학 기술을 육성해서 최첨단 유전자 감식 기술로 진짜 애엄마를 논리적으로 가려내고, 집집마다 CCTV를 설치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아이 바꿔치기 범죄 따위는 저지를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통치자로 칭송받을지 모르나, 그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온갖 비극이 찾아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역시 그걸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 직접 세상에 내려오시고, 비록 불신자들이 당장 이해나 수긍을 못 할 방법을 쓰셨지만 죄 문제도 해결하고 구원의 길도 마련해 놓으셨다. 단지 그 방법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에게 학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반박당하거나 없어질 교리를 가진 체계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라 불리는 이 세상의 참 신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안 바라고 '믿음'이라는 것 하나만 원하신다. 히 11:6을 읽어 볼 것. 피조물이 있다면 창조자가 있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이건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바라는 것치고는 너무 소박하지 않은지? (그러나 그게 소박한 요구가 아니라는 걸, 살아 보면 곧 알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북한이나 소말리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등, 모든 물리적인 여건이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조건 같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요소는 정말로 공평하다.

설령 이 세상에서는 정말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다 요절하더라도, 현세와 내세를 모두 합하면 정말로 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현세에서 못 받은 것은 죽어서 다 정산받게 된다.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정신 지체 장애인 사람에게는 아예 특별전형까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의 경륜이 아직 여전히 100% 이해는 안 가더라도, 그렇게까지 비난할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체계 하에서는 원칙과 질서가 있다.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지도 않고, 반증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의 알량한 과학으로 정체가 덥석 파악 가능한 신이야말로 허접한 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창조론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식의 증거들.. 아주 좋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부조리와 비합리도 세상엔 응당 존재하며, 그 사실을 크리스천이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가령, 이 세상엔 아름다운 생명체도 있지만 파리· 모기나 바이러스나 기생충 같은 생명체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이런 '아리까리'한 면모가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해 굴러가려는 영적 바퀴의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할 때 초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아라. 그걸 극복하는 데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논리 같은 다른 잘난 스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게 돼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그럴싸한 기독교 변증을 기대하고 있던 불신자라면 이런 무데뽀 정신승리법(?) 같은 본인의 결론에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신 걸 난들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선뜻 '믿음'을 선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거도 먼저 남겨 주셨다. 이 갈림길로 인한 유신론 무신론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나, 그 믿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 사건에 따라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버리고, 진지하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03 19:27 2012/12/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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