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날 울린 슬픈 동화들

1. 행복한 왕자 (오스카 와일드)
2. 플랜더스의 개 (위다)
3. 성냥팔이 소녀 (안데르센)

19세기에 지어진 작품이고 주인공이 추운 겨울에 불쌍하게 죽는 걸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세세한 스토리가 기억이 안 난다면 인터넷 검색해서 찾아보시고, 여기에는 각 작품별로 본인의 논평만 싣도록 하겠다.

1. 동상과 제비를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아래의 2와 3에 비해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다. 2와 3이 지지리도 불우한 주인공의 처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1은 주인공 주변에 온통 불쌍하고 못 사는 서민들이 있다. 왕자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대인배. 오오~~
참고로, 진짜로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여기시는 것이(제비의 시체나 왕자 심장보다도!) 뭔지 알고 싶으면 성경을 찾아보시라. 단적인 예로, 구원받은 성도의 죽음--자연사든, 순교든--이 주님의 눈앞에서 귀중하다고 나와 있다. (시 116:15)
왕자의 부탁을 들어주면서 고생만 잔뜩 한 제비가 죽는 게 어렸을 때 무진장 슬펐다.;;

2. 1과 3에 비해서 분량이 길고 스토리 전개가 가장 현실적이며 소설 같은 면모를 갖추고 있다. 가난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화가를 꿈꾸던 어느 착한 남자애가 여차여차 한 끝에 결국은 아래의 성냥팔이 소녀처럼 추운 집밖에서(정확히는 성당 벽화 아래에서)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얘기. 충견 파트라슈가 추가되어 애절함을 더한다.

뒤늦게 부잣집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 그림이 아주 우수한 작품이었다는 식으로 좋은 소식이 주인공에게 도착하지만 이미 사후약방문이다. 마치 시대를 너무 앞섰던 천재 수학자 아벨이 결핵과 영양실조로 죽어 버린 후, 이틀 뒤에 베를린 대학 교수 임용 합격 통지서가 날아왔듯이 말이다.
정작 이 소설의 배경으로 설정된 벨기에의 그 지방 사람들은 “우리 주민들은 불우이웃에게 그렇게도 매정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 아냐!”하면서 소설 내용에 대해서 반발한다고... 하더라.

3. 그다지 교훈이나 감동적인 메시지보다는, 그냥 ‘여자애 너무 불쌍해. 지못미 안습’이라는 생각만이 강렬하게 느껴지는 스토리였다. 너무 가혹하다. 소녀의 이름도 안 나오고 정확한 가정 배경--알코올 중독자에 아동 학대를 저지르는 아버지 말고는 그닥;;--도 안 나오는 게 어린 시절 본인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_=;;
설정상 사건이 일어난 날짜는 섣달 그믐날, 즉 12월 31일이고 죽은 소녀가 발견된 이튿날이 New Year이라고 되어 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성탄절로 자꾸 혼동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소녀가 눈 내리는 길거리를 걷다가 마차에 치여 넘어지는 바람에 신발이 벗겨진다. 그런데 그 신발을 누가 갖고 튄다. 그래서 소녀는 맨발 신세로 전락...;;; 야, 이 정도면 가혹을 넘어 가학적인 설정이 아닌지? ㅎㄷㄷㄷ;;;;

잘 알다시피 중간에 판타지적인 장면이 있긴 하지만, 뭐 1과 같은 수준은 아니다.
성냥불 그어서 소녀가 새마을호 특실과 Looking for you 환상이라도 봤다면 행복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열차야~ 날 떠나지 말아 다오~~~”

흔히 저주의 의미로 ‘얼어 죽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얼어 죽는 건 굶어 죽는 것만큼이나 정말 비참하게 죽는 것이다. 추위에 이빨을 부딪치며 제대로 와들와들 떨어 본 적이 있다면 그런 말 함부로 못 한다.
성인도 아니고 10대 소년 소녀가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못 받고 겨울에 밖에서 객사하는 이야기... 정말 충격적이었다. 초딩 시절에 페르시아 왕자를 하다가, 왕자가 쇠꼬챙이에 찔리고 쇠톱날에 두 동강 나 죽는 걸 본 것만큼이나 말이다. =_=;;;

요즘이야 우리나라에 문자적으로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상대적인 빈곤과 박탈감이 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다. 앞으로 그런 현상이 더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지난 8월엔 패밀리 레스토랑 알바를 하던 어느 고졸 여성이 처지를 비관하여 한강 다리에서 투신해 목숨을 끊었다. 기억하시는가? 성장 배경 한번 정말 기구하더라. (대학도 못 갔음. 알바는 학비가 아니라 생활비를 벌려고 한 것이다.) 20살도 안 된 여자애가 극심한 빈곤에 이대로는 백날 이 처지 못 벗어날 거라고 염증을 느꼈을 것이며, 또 맨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즐겁게 노는 가족이나 커플들을 보면서 더욱 박탈감을 느끼고 삶의 의욕을 상실했을 것이니 참 마음이 아프다. 이 세상엔 자기 생일이라든가 크리스마스 같은 날을 증오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난 문학소년 체질이 전혀 아니며 “문학이란 모름지기 단순해야 한다”주의여서, 그냥 무조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권선징악 해피엔딩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딱 그런 스타일인 성경을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문학에 비극이라는 장르가 등장한 이유는 두말 할 나위 없이 죄 때문임이 틀림없다.
가령, 세속 문학가가 창세기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 이야기 같은 사건을 각색했다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는 아벨을 장렬하고 비극적으로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아벨이 죽었어도 믿음으로 지금도 살아서 말하고 있다고 진술한다. (히 11:4) 관점이 다른 것이다.

이 사회 구조가 잘못되어 있는 근본 원인이 사람들의 영적 상태와 관련이 있으며, 진짜 인생 역전의 길은 따로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할 텐데! 연말이 다가오니 추운 겨울 밤에 문득 저런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0/11/26 18:12 2010/11/26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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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자들의 글모음 (책 출간)

막간을 이용한 광고.

<성경 신자들의 글모음> -- 킹제임스 흠정역과 삶의 이야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라는 책에 제가 공동 저자 10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제가 옛날에 인터넷으로 공개한 신앙 쪽 칼럼과 간증들이 같이 실렸습니다. 저자들 중 저의 비중은(제 글이 차지하는 분량) 김 문수, 김 재욱 형제님에 이어 그래도 랭킹 3위 정도는 됩니다. 이 달 초에 갓 출간된 따끈한 책입니다.

책이 나온 곳은 킹 제임스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킹제임스 흠정역>을 낸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입니다.
공중파 TV 출연에 이어, 제 글이 어떤 형태로든 공중파 출판사를 통해 publish된 건 이게 난생 처음이네요.

제 글은 저의 트레이드마크-_-인 <음란한 성경은 가라> 부터 시작해,
<킬로그램 원기>
<성경을 안 덕분에, 예수님을 믿은 덕분에>

같은 것들이 수록되었으며,
이외에도 다른 분의 글 중에도 주옥 같은 성경 비평, 칼럼, 간증이 많습니다.
다들 keepbible.com 의 게시판에서 개념글 인증을 받은 글들을 다듬고 재정비한 것입니다.

yes24 http://www.yes24.com/24/goods/4330581?scode=032&srank=1
갓피플몰 http://mall.godpeople.com/?G=9788992485210
생명의말씀사 http://www.lifebook.co.kr/final/bookjumun.asp?gs_product=aa01070079788&detail=yes

책이 팔림으로써 제게 돌아가는 이익은 사실상 전혀 없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어차피 글들 자체가 제가 좋아서 혼자 끄적인 것이지 영리를 목적으로 돈 받고 글 쓴 것도 아니었고,
많이 팔리는 장르의 책도 아닌 데다, 참여한 저자도 워낙 많으니. ㅎㅎ

아무쪼록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더 널리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인터넷 상에 수많은 개독안티 사이트가 있으면, 한 곳 정도는 제 홈페이지 같은 곳도 있어야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서 KJV가 이단이라고 하는 사이트가 있으면, KJV에 대한 진실을 알리는 사이트도 좀 있어야 균형이 맞지 않겠나요?

대학원 다니면서 독자적인 책을 하나 쓰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게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주제는 <Introduction to 철덕>이 되겠고,
철덕 입문을 원하는 학생을 대상으로 대학교에서 한 학기 강의할 분량 정도 되는 교재 컨셉으로,
철도와 교통 공학, 도시 공학 개론부터 시작해 우리나라 철도의 변천사, 수도권 지하철 노선별 분석, 차량 계보 등등.

인문계는 역사와 지리, 이공계는 기계와 전자 공학, 예체능은 음악을 두루 아우르면서
이 책 한 권이면 철덕의 머리 구조를 다 파악할 수 있게. 음, 한 학기 강의만으로 다 되려나?

연습 문제로는 "다음 사진은 우리나라 어느 철도 어느 구간의 모습인가?"
"다음과 같은 지형과 행정구역이 주어졌을 때, 지하철 노선을 설계해 보시오."
"다음과 같은 배선을 지닌 선로에서 완급 결합 열차 다이아를 작성하시오."

그보다 먼저 Looking for you 악보를 피아노 양손 연주곡으로 편곡하고,
Looking for you의 각 소절별 화음· 음정 분석과 감상 포인트 해설을 집필하고 싶기도 합니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현실은 시궁창.
저 <성도들의 글모음> 책에서도 저는 철덕이라고 소개가 당당히 나갔습니다. ^__________^
(정확히는 철도 동호인이라고.. -_-)

아놔 기독교 서적 소개하다가 말고 옆길로 많이 샜네요.
아무튼, 이상입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0/11/06 09:03 2010/11/06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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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2006년 2월, <음란한 성경은 가라>라는 글을 개인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성경 역본 이슈에 대해서 인터넷을 돌아다녀 찾아보고 지인과 메신저로 교제하다가, 불현듯 소재가 떠올라서 서너 시간 끄적여서 완성한 글이었는데...
이 글은 자랑이 아니고 진짜로, KJV 독립 침례 교회 목사님들로부터는 가히 '형제가 지금까지 쓴 글들 중 최고로 뛰어난 명문'이라는 격찬을 아낌없이 받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4년 반만에..
어느 안티 KJV 진영이 그 글을 정면으로 난도질한 꽤 강경한 반박문을 올린 걸 우연히 발견했다.
글 올라온 날짜도 비교적 최근이다.

http://truthnlove.tistory.com/entry/%EC%9D%8C%EB%9E%80%ED%95%9C-%EC%A7%84%EC%A7%9C-%EC%84%B1%EA%B2%BD-%EC%88%AD%EB%B0%B0  (음란한-진짜-성경-숭배)

글쓴이는 김 삼(김 풍도 아니고. -_-)이라는 분인데 처음 본다.
프로필을 보니, 딱 우리나라 정통 신학 코스를 밟은 후 장로교 목사 안수를 받았고 미국에 목회 중이다. 나이도 나보다야 많겠지만, 그래도 글투를 보면 그렇게 나이 지긋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신학 공부 전혀 안 하고 히브리어· 그리스어 나부랭이는 하나도 모르는 풋 사과의 글을 현직 목사가 친히 반박을 해 주다니 감개무량하다. 체급이 서로 게임이 안 되는 수준인데... ㅋㅋㅋㅋㅋㅋ
KJV를 반대하는 대다수 목사들의 사상과 가치관을 글로써 잘 대변해 주었다.

저 사람은 프로필에 신앙 고백이 아예 대놓고 아래와 같이 쓰여 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을 믿지 않는다. 그러니 <음란한 성경은 가라> 같은 글을 보고 있으면 도저히 배알이 뒤틀려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 정세나 이단 교리 판단한 다른 주제의 글은 그럭저럭 건전한 편임에도 불구하고, 성경관에 관한 한은 본인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믿음의 소유자이다.
 
  성경은 최초의 원문 그대로가 곧 성령님의 영감으로 기자들을 활용해 기록하신 절대 완전/정확/무오한 말씀이며..현재의 원문은 여러 사본들이 합해지고 조화되고 종합된 결과로 원본에 거의 가깝다고 믿습니다.
(일부 주장자들의 말과는 달리, 절대/완전하게 보존된 사본은 없습니다. 지금은 사라진 원본만이 오직 완전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본을 모두 종합/조화시킨 현재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모자란다"는 뜻은 아닙니다. 완전에 가깝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의 해석과 번역 탓입니다.)

내가 KJV 숭배자라면 저런 사람은 아무리 봐도 원어 숭배자로밖에 안 보인다. 내가 KJV가 최종 권위인 것만큼이나 저 사람은 세속 학자들의 그리스어 히브리어 사전이 최종 권위이다.
저 사람들의 머릿속엔  "킹 제임스 성경 = 이 송오 & 럭크만 추종자 = 성경 역본의 맹신과 우상화" 밖에 없다. 본인은 이 송오 & 럭크만 추종자가 전혀 아닐 뿐더러, 예수쟁이가 신앙의 근간인 성경의 온전한 보존과 그 실체를 믿는다는데 어떻게 거기에 맹신, 우상화라는 딱지가 붙을 수 있단 말인가!
 
KJV와 외경 사이의 논란, 그리고 초창기 인쇄본의 철자법 얘기는(그리스도 예수안에 발행 흠정역의 부록에도 실려 있는 반박문)
이미 진실을 아는 사람들한텐 면역이 다 돼 있는 주제인데 언제까지 뻔한 레퍼토리를 상대해 줘야 하나 모르겠다.
 
반박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본질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생략하고 넘긴 KJV 출간 당시의 교회사라든가,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원어 해석 몇몇 개만 갖고 계속 끝도 없이 꼬투리 잡고 있다. 반박하는 게 다 저런 식이다. 그 사람이 추종하는 그리스어 사전대로라면(변개된 성경에 맞춰진) KJV는 당연히 오역투성이일 수밖에 없다.

또한, 일말의 반카톨릭 성향은 있는지 외경 나쁜 줄은 알아서, KJV가 1611년 초창기에 외경이 같이(본문으로 포함되어 나온 게 전혀 아니었는데도) 들어갔다고 이런 식으로 공격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게 통탄스럽다.

저 사람은 KJV도 어차피 온갖 카톨릭스러운 컨벤션이 잔뜩 들어있다고 KJV를 폄하하는데, 뭐 그 말이 일부 맞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문화권 교회의 컨벤션이 원래 그랬으니까...;; The translators to the readers 같은 서문을 읽어봐도 성 어거스틴이 어떻고, 무슨 교부가 어떻고 하는 천주교스러운 문체가 물씬 풍긴다 "카더라".
그러나 저런 사람은 천주교가 KJV의 출간을 결사적으로 막고 방해했으며, 첩자를 보내 gunpowder 사건 같은 걸 꾸며서 제임스 왕과 성경 번역자들을 암살하려 한 KJV의 안티 카톨릭 역사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고 있다.

KJV에도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몇몇 바리에이션이 생겼고 인쇄 과정에서 오탈자가 있었으며 몇 차례 에디션이 나온 것 정도는 나도 다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 갖고 "KJV의 여러 에디션 중에 어느 게 당신의 최종 권위입니까?" 같은 불순한 말장난 정도에는 다 대비가 돼 있다. 같은 크리스천끼리 그런 찌질한 짓은 좀 그만 하는 게 어떨까 싶다.

글쓴이는 본인의 글의 본질적인 주제인, 현대 역본들의 음란한 표현에 대해서는 정작 한 마디도 반론이나 해명이 없다. 하다못해, NIV처럼 "거시기를 짤라 버린다는 게 맞는 표현이고" KJV의 "끊어지기를 원하노라"는 오역이라고 떳떳하게 지적한 것도 없다. 반박문을 시리즈로 쓸 기세이니 앞으로 다루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반박을 어떻게 할지는 본인 눈에도 훤히 보이고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 한 마디로 말해 일일이 상대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영양가가 없다.

본인은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지금 내 방식대로 믿고 아니면 아예 때려치우고 말지,
저 사람처럼은 못 믿겠다.
아직도 성경보다 원어 사전에 더 믿음이 간다면, 김 문수 형제님의 다음 글들을 한번쯤 묵상해 보기 바란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3596 <원어 성경의 유혹>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474 <노새 이야기는 빼 놓고 왜 온천 타령을?> -- KJV와 non-KJV가 대표적으로 다르게 번역된 구절 중 하나이다.
http://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free&write_id=4230 <이삭이 리브가를 애무했다고?> -- 본인의 글 <음란한 성경은 가라>와 비슷한 주제이며, 본인 글을 언급도 하고 있음.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0/09/01 08:35 2010/09/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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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어와 영어가 서로 정반대인 관념 중에 대표적인 예로는 부정문에 대한 응답 방법이 있다.

"너 숙제 안 했지?"에 대한 대답이 한국어는 "아냐, 했단 말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Yes, I did"로 긍정 의문에 대한 대답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관점에서는 거 참 희한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영어에도 무조건 상대방의 말 자체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뜻하는 감탄사가 없지는 않은 것 같다.
Then Sarah denied, saying, I laughed not; for she was afraid. And he said, Nay; but thou didst laugh. (창 18:15) 안 웃었는데요. / 아냐, 너 아까 방금 분명히 웃었어.

킹 제임스 성경은 yes/no보다 yea/nay(예이/네이)가 훨씬 더 많이 쓰인다. 마 5:37의 "오직 너희 의사 표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라."에서도 yea/nay이다.

2.
이에 덧붙여 또 중요한 차이로 '가다'와 '오다'가 있다.

"너 빨리 이리 와 봐."에 대한 대답으로 한국어는 "지금 가는 중이야"인 반면, 영어로는 "I'm coming"이다.
영어는 남이 내게 come이라고 지시를 내렸으니, 나는 거기에 순응하여 그에게 come한다고 기계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한국어의 '오다'는 오로지 나에게, 화자에게 상대방이 움직여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오다'의 주체가 '나'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come이 성경 번역에서도 굉장히 어려운 요인 중 하나가 된다. 문자 그대로 죄다 '오다'라고 번역하면 우리말 어법에 어긋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같은 영어 성경 중에서도 킹 제임스 성경은 come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걸 go나 enter로 바꿔 버린 경우가 적지 않다.

3.
이렇게 단어 자체에 '나'라는 객체가 수반된 비슷한 예로는 불완전 동사인 '달다'가 있다.
sweet나 equip 말고 give이다. '다오', '달라', '도(사투리-_-)'로만 활용되는 그 이상한 단어 말이다.
불완전 동사가 '가로다', '더불다', '달다', '데리다' 말고 또 뭐가 있더라?
이 '달다'는 '주다'와 의미상으로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남으로 하여금 특별히 '나에게' 뭔가를 주기를 원한다는 아주 이기적인 뉘앙스로 쓰인다. '주다'라고만 하면 내가 남에게 베푸는 뉘앙스가 풍기지 않는가?

"저 사람에게 빵을 다오"라고 하면 뭔가 이상하고 어색하다. "저 사람에게 빵을 주게/주시오/주세요"라고 하거나 아니면 "내게 빵을 다오", "우리에게 빵을 달라"라고 해야 말이 된다.

흔히 한국어는 압존법이란 게 있을 정도로 최대한 청자 위주로 언어가 구성돼 있다고들 한다..
내가 언급하는 사람이 나보다 높더라도, 청자보다는 낮은 사람이라면 반말이 허용된다. "할아버지, 아버지께서 오십니다"가 아니라, "할아버지, 아버지가 옵니다"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오다-가다'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국어도 청자가 아닌 나 위주, 화자 위주의 사고방식이 배인 것도 분명 있다. 그래서 '달다' 같은 단어도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개인적인 친분 사이가 아닌 공식 석상에서는 압존법이 꼭 적용되는 것도 아니라는데? KBS 한국어 능력 시험 공부하면서 교재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있다. 가령, 할아버지/아버지가 아니라 사장/과장이라거나(자기는 대리-_-) 할 때 말이다. 이래서 한국어는 어렵다. -_-;;

끝으로, 성경 번역에서 유명한 토착화 표현을 덧붙이며 글을 맺는다.

(1) "누가 너를 데리고 오 리를 끌고 가면 십 리를 가 주어라"(마 5:41)가 영어로 원래 무엇인지가 아는가? 1 mile과 2 miles이다. 5리(약 2km)가 1 마일(약 1.6km)보다는 약간 더 긴 거리이다. ^^;;
(2) "장가 가고 시집 가기"는 영어로는 "결혼하거나 혼인 당하거나"(marry / be given in marriage / be married to)가 된다. -_-;; 성경에서 여자가 시집 가는 건 언제나 marry의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0 08:37 2010/08/1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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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수와 지구의 크기

현재 지구상의 인구는 60억을 넘어선 지 오래라고 한다. 뭐, 넉넉잡아서 70억이라고 치자.
지금으로부터 한 2, 30년 전엔 세계 인구가 50억을 넘어선 걸 갖고도 식량이 부족하네, 인구 조절을 해야 되네 하면서 온통 호들갑이었다.

그런데 이 70억 인구를 전부 한 명당 딱 1제곱미터(㎡)짜리 면적의 격자에다 꽉꽉 구겨 집어넣으면...;; (그것도 층을 만들지도 않고)
우리나라 일개 도 정도의 면적에도 다 들어간다! 전세계 인구가 그 좁은 한반도의 경상북도 안에 다 들어가고도 남는다면 믿어지는가?

거짓말이 아니다. 넓이는 2차원이다. 70억에다가 제곱근만 씌워도 겨우 8만~9만으로 숫자가 줄어든다.
1㎡라고 하니까 굉장히 좁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관이나 비행기 좌석은 말할 것도 없고 무궁화호 열차의 좌석 하나 면적조차도 1㎡가 안 된다. 앞뒤 간격이 83~85cm 남짓이다. 좌우 간격은 당연히 앞뒤 간격보다 좁다. 그러니 1㎡보다 작은 면적이다.

물론 그 인파만 해도 수십 km에 달하는 길이에 수천 ㎢의 면적에 달할 것이므로 70억 인구는 결코 만만한 양이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비교할 수 없이 월등히 더 크고 넓다. 남아메리카가 중국이나 인도 같은 처지라면 그 대륙 한 곳에만도 지금보다 20~30억에 달하는 인구가 더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본인의 생각이 좀 바뀐 게 있다. 인구 문제, 식량 문제나 환경 문제 따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치 심각하지 않으며, 진실은 우리의 예상과는 상당히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그렇게도 자연을 짜내고 착취해 가면서 식량을 생산하는데, 인구가 너무 많아서 먹여 살리지 못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건, 전적으로 생산된 식량이 분배가 안 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제아무리 지하자원 많고 식량 생산도 많은 나라라도 정치가 막장이면 국민들이 굶주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땅의 절대적인 면적이 좁은 게 절대, 절대로 아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옹기종기 모여 살고 좁게 사니까 좁은 것이고 그 때문에 부동산 집값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 때문에 환경이 좀 파괴되었기로서니, 지구가 겨우 그 정도 오염과 파괴 때문에 망하지는 않을 것이며 식량의 절대적인 생산량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자꾸 욕심을 부리니까 자원이 부족하고 에너지가 부족한 것이지, 농경 사회라면 이 지구상에 인구는 최소한 몇백억은 굶주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은 나이가 들고 보니까 가족 계획, 인구 억제 같은 건 정말 부질없는 발상이고 좀 심하게 말하면 영적으로 굉장히 마귀적인 정책이라는 걸 느끼게 됐다. 결혼과 출산은 하나님조차도 간섭 안 하고 부부의 결정을 전적으로 존중해 주시는 영역이다!

뭐, 에너지 낭비하고 환경 마음껏 파괴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지만, 본인은 지구가 겨우 인간의 뻘짓 때문에 그렇게도 호락호락 쉽게 파괴되고 멸망할 거라고는 믿지 않는다. 지구 온난화나 오존층 파괴 같은 것에 대해서도 그렇게까지 심하게 불안해하고 걱정하지 않는다. 인류가 망한다면 언제나 죄와 불의 때문에 망하지, 무슨 외계인의 침략이나 환경 오염 같은 불가항적이고 도덕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는 외부적인 요인 때문에 허무하게 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은 미우나 고우나 지구 밖을 떠나 우주에서 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테란 같은 종족은 SF 소설에서나... ㅎㅎㅎ

끝으로, 성경과 결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사항이 있다.
지금까지 독립된 인격체로 태어난 개개인의 사람은 총 몇 명일까? (성경대로라면 아담 이래로 지금까지)
제대로 살지도 못하고 낙태되거나 굶어죽은 아기들까지 합하면.. 몇 천억, 조 단위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새 예루살렘의 크기가 가로· 세로· 높이 공히 12000 스타디온이었다고 나온다. (계 21:16)
KJV에서 펄롱(furlong)이라고 번역된 이 단위는 1/8 마일로, 12000 스타디온은 약 2400km이다. 지구의 지름의 1/5이 좀 안 되는 크기 되겠다.

인류 역사상 구원받은 모든 신약 성도들. 뭐 사도 바울, 베드로, 주 기철 목사,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그리고 이 홈페이지 주인장 등등이 전부 한데 모여 살게 될 천국 도시의 크기가 그렇게 설정되었다는 게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어떤 사람이 얼추 숫자놀음으로 계산해 보니 저건, 그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 살고도 남는 공간이라고 하더라. 자세한 내막은 본인도 지식이 없지만, 2400km의 제곱이 아니라 세제곱임을 감안하면 정말 넉넉할 수도 있을 듯.

반대로 이 지구 밑에 자리잡고 있는 지옥도 아담 이래로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최소한 수백억 이상의 사람들이 전부 들어가기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성경에 따르면, 애초에 규격이 딱 명시된 새 예루살렘과는 달리 지옥은 크기가 가변이고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잠 27:20, 사 5:14) 흠좀무.

애초에 지옥은 마귀와 그를 따라 타락한 천사들을 집어넣으려고 만든 곳이지(마 25:41) 인간을 집어넣으려고 만든 게 아니다. 그런데 구원받지 못하고 죄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자꾸 지옥으로 불청객으로 가니까 지옥은 어쩔 수 없이 계속 확장 공사가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화산 폭발이 증가하는 게 지옥 확장 공사의 증거이며, 심지어 지구가 자꾸 더워지고 있는 이유가 이산화탄소 때문이 아니라 발 아래에 뜨거운 지옥이 자꾸 커지고 있어서라고 풀이하는 용자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 뭐, 성경대로라면 신이 노해서 천둥을 내린다는 해석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렇듯, 지구의 크기, 인간의 개체수와 차지하는 크기를 따져서 글로 정리해 보니 웬지 재미있다. 워낙 다양한 주제로 얘기가 나와서 카테고리 분류하기가 골치 아프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한 천년왕국 때는 지구상의 인구가 진짜로 앞서 예상했던 대로 몇백억 급으로 불어날 것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0/08/04 08:20 2010/08/04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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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막장 성경 만화

김 성모 + 개그 만화 일화 + 이 말년 스타일의 성경 만화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1.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창으로 다윗을 쳐서 벽에 박으리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1)

2. 온 도시가 격동하고 백성이 다 같이 달려들어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내매 문들이 곧 닫히더라. (행 21:30)

전자는 사울 왕이 다윗을 너무 시샘하여 죽이려 하는 장면이며,
후자는 바울이 광분한 동족 유대인들에게 붙들려 가 구타당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런 대사가 하나 들어가면 정말 빵터지지 않을까?

“마침 시간도 인간이 가장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잔인해질 수 있는 저녁 8시. 누굴 끝장내도 정말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 같아!”

그리고 보너스.

3. 그가 이 말하는 것까지 그들이 듣다가 소리를 높여 이르되, 이런 놈은 이 땅에서 없애 버리라. 그를 살려 두는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다, 하며 (행 22:22)

이건 "네놈을 살려 두긴 쌀이 아까워!" 로 받아쳐 주자. ㅋㅋㅋ

4. 날이 새매 유대인들 가운데 어떤 자들이 함께 단결하고 자신을 속박하여 저주 아래 두고 자기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말하더라.  (행 23:12)

이들은 웬지 이런 피켓을 들고서 농성을 할 것 같다.
“바울을 죽입시다 바울은 나의 원수”

5. 다윗이 이 말들을 마음속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 앞에서 자기 행동을 바꾸고 그들의 손 안에서 미친 체하며 바깥문의 문짝들에 휘갈겨 쓰고 침을 수염에 흘리매 (삼상 21:12-13)

이건 영락없이 개그 만화 일화에서 바쇼 씨가 독버섯 먹고 발작을 하는 장면이다. (3기 9화) ㅋㅋㅋㅋ 다음 14~15절은 아기스 왕 대신 후류 군으로 바꿔서 읽어보기 바란다.

6.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큰 존귀에 이르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행하리니 그러므로 원하건대 와서 나를 위해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매 (민 22:17)

민수기 22~23장을 읽어보면, 장소 세팅하고서 발람이 웬지 축시의 참배를 거행하는 것 같다. “한겨울에도 귀마개 쓰고 축시”
마치 개그만화에서 스토리가 잘 풀리지 않고 자꾸 꼬이고 돌발 상황이 발생하는 것처럼, 성경에서 발락이 발람에 저주를 요청하지만 저주가 잘 내려지지 않는 것도 똑같다. "죄송합니다. 기분상으로는 분명 저주하는 느낌이었습니다만." ㅋㅋ

7. 엘리사가 이르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그것을 솥에 던지고 이르되, 퍼다가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이 먹게 하라, 하매 솥에서 해를 일으키는 것이 없어지니라. (왕하 4:41)

독초가 들어간 국을 해독하는 방법으로는, “가루를 사용하며 그것을 솥에 던지고...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ㄲㄲㄲㄲ

8. 비록 무화과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올리브나무에 수고의 열매가 없고 밭이 먹을 것을 내지 아니하며 우리에서 양 떼가 끊어지고 외양간에 소 떼가 없을지라도 (합 3:17)

하박국의 유명한 찬송시는
“비록 코트 안에 마물이 살고 있고, 배구에 걸었던 청춘이 모두 맛이 갔으며 믿을 만한 동료들이 눈이 죽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주를 기뻐하며 내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하리로다” 정도로 패러디 가능하지 않을까? 성경 원전하고 대조해 보면 분위기가 묘하게 비슷함을 알 수 있다!

9. 또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날짐승과 들짐승에게 주리라, 하니 (삼상 17:44)

골리앗이 다윗에게 한 이 공갈은 김 성모 식 언어로는 “뼈와 살을 분리해 주겠다” 정도로 번역 가능하겠다.

10. 왕이 이르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너와 네 아버지의 온 집이 그러하리라, 하니라. (삼상 22:16)

사울 왕이 자기 멋대로 제사장들을 누명을 씌워 학살하는 장면인데... 앞부분 문맥을 읽어보면 영락없이 아래의 대사가 떠오르게 된다.
“좋다! 솔직하게 말했으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럼 저희는 어떻게 될까요?”
“죽을 것이다!”

11. 나발이 다윗의 종들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즘 각각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들이 많도다. (삼상 25:10)

뭥미, 듣보잡, 갑툭튀 같은 말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대사가 아닐 수 없다. 참고로 성경을 찾아보면 ‘이새의 아들’은 다윗을 굉장히 경멸조로 얕잡아 부르는 표현이다.

12. 평안히 가라 (Go in peace)

성경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인데, 본인은 김 성모 만화에서 “안녕히 가라”라고 막장 반말 자막이 떠 있는 동서울 톨게이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ㅋㅋㅋㅋ

13. 왕이 내게 이르되, 네가 병들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네 얼굴에 슬픈 기색이 있느냐? 이것은 분명히 마음의 슬픔이로다, 하므로 그때에 내가 매우 심히 두려워하며 (느 2:2)

문맥을 모르는 분을 위해 설명을 드리자면 이렇다. 그때는 왕 앞에서 신하가 감히 인상 쓰고 있는 건 굉장한 결례로 여겨지던 시절이었는데, 이방인 왕의 포도즙 시종장이던 느헤미야가 자기 동족과 관련된 슬픈 소식을 듣고서 슬픔에 잠겼고 그 감정을 왕이 간파를 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보면 딱 개그만화일화 대사가 생각나지 않는가?

"포도즙 마실까보냐! 뭣보다 왜 이렇게 유감스러운 표정의 시종장이냐! 이 포도즙 마시는 사람 얼굴이 기분 나뻐!"

14. 성경은 성경이 영감을 받아 기록되었다고 증언하지만, 개그 만화에서는 우사미가 영감을 받아 범인을 잡아낸다. "앗! 사도 바울이 펜을 든 순간, 그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이것은 곧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는 뜻이다!"

15.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여자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여자의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발꿈치를 내어 주고 목을 딴다고라... 김 성모 만화 대사에서 자주 발견되는 패턴이다.
"가랑비는 맞는다.. 하지만, 폭풍은 내 것이야!"
"한 대 맞고 두 대 친다"
"내 옆구리를 주고 네 목을 가져가는 전략일 뿐이야!" / "내가 십자가에 달린 것은 부활할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하나님도 이런 전략을 구사하셨단 말인가. ㄲㄲㄲㄲ (그렇다고 해서 으윽~ '옆구리를 너무 깊이 찔렸어' 같은 건 없다. ㅜ.ㅜ)

16. 내가 너희에게도 전해 준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님께서 배반당하신 바로 그 밤에 빵을 집으사 ... (고전 11:23)

고린도전서 자체가 육신적으로 옥신각신 티격태격하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책망 내용이다. "우리 이런 일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세요."
아주 경건하고 숙연한 분위기인데 예수님을 졸지에 저팔계로 만들고 말았다.. 그런데 어떡해, 분위기와 대사 패턴이 너무 잘 들어맞는데. 이거 고인드립인가? ㄲㄲㄲㄲ

이 외에도 ‘근성’, “세상이 대충 망한 뒤에”, “안 돼! / 돼!”, “리듬과 파워! 그리고 집중력!”(성경에도 은근히 배틀 씬 많다) 등, 여러 대사가 응용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가령, 아브넬의 부하와 요압의 부하들이 배틀 아레나를 하는 장면에서(삼하 2:14) "나의 40단 컴보는 자비심이 없지", "네놈의 공격 패턴 강약약", "풋 사과", "내 공격을 막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 것이다!" 같은 대사가 나올 수 있으며,
요압이 자기 정적들을 교활하게 죽이는 장면에서는 "발차기의 모든 것을 보여 주마" 하면서 훼이크로 주먹질을 하는 장면이 충분히 상상 가능하다. ^^;;

저런 만화를 잘 아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크리스천인 경우는 거-_-의 없을 것이다.
반대로 성경을 이 정도로 아는 크리스천 중에서 저런 만화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전혀에 가깝게 없을 것이다. 어? 그럼 난? ㅋㅋㅋㅋㅋ

* 참고로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영원한 고통의 장소이지, 아버지와 함께 럭키짱 만화책이나 실컷 볼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ㅠ.ㅠ
한번 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거기는 무슨 군대처럼
고참도 없고 말년 같은 개념도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13 12:20 2010/07/13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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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66권 모두가 하나님의 영감 받은 무오류한 말씀이라고 믿는다.
(그 성경이라는 막연한 존재의 실질적인 구현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본인은 오늘날 실존하는 특정 역본을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싸움 나기 엄청 좋으며 이 글의 주제는 그 분야가 아니므로 더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다.)

특히 그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절대자에 의한 세상의 창조를 믿는다.
오늘날 과학에서 말하는 진화론도 워낙 분야가 다양하며 소위 창조론자라는 사람들이 진화론이 뭔지 공부도 제대로 안 하고서 무작정 무식하게 깐다는 식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는 것, 본인 역시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무에서 우연히 창조되었으며, 내 조상의 100대, 200대.. 혹은 n대로 올라가면 유인원과 원숭이, 아메바로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진화론이 가르친다면 본인은 그런 학설은 누가 뭐래도 당연히 거부한다.

이 외에도 본인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된 6일 창조는 문자적인 24시간이었다고 믿는다. 식물이 셋째 날에 먼저 창조되고 나서 그 이튿날에 해와 달이 만들어진 마당에, 그 하루가 수억 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출 20:11 같은 곳에서 인간의 6일과 천지 창조 6일을 명백하게 동일선상에 놓으심으로써, 쓸데없이 원어라든가 영적 해석 나부랭이를 동원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놓았다.

다음으로 본인은 모든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며, 인류의 역사는 그로부터 약 6천 년 남짓이라고 믿는다.
고대인은 미개인이 결코 아니었으며 불이라든가 바퀴 같은 건 거의 아담 시절부터 곧바로 만들거나 활용하기 시작했다. 농사도 바로 짓기 시작했다. 인간은 바보가 아니다. 정말 아니다.

여기까지는 창조 교리에 관한 한, 본인의 견해와 우리나라에서 '창조 과학회'라고 불리는 단체의 견해는 서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실제로 본인은 어렸을 때 창조 과학회에서 가르치는 여러 지식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이를 통해 얻은 유익은 지금 생각해도 상당히 많다.

자 그럼, 이제 견해가 어긋나기 시작한 분야를 털어놓도록 하겠다.

본인은 인류의 역사만 6천 년이라고 믿지, 지구와 우주의 나이까지 덩달아 그렇게 짧다고 믿지 않는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성경과 과학이 일치하기 위해서 우주의 나이가 짧아야 할 필요는 없다' 주의.
사실, 성경엔 우주의 나이가 얼마인지 나와 있지 않으며 그건 인간이 알 수 없다. 그 이상은 순전히 과학의 영역이다.

창조 과학회는 '필트다운 인 구라설' 같은 걸 파헤치면서 생물학의 진화론자하고만 싸우면 됐던걸 자기 깜냥으로 지질학, 천문학 우주론 등마저 깡그리 부정하고 그야말로 과학계에서 자기네만의 영역을 개척해야 할 지경이 됐다. 그런데 종교적 신념을 떠나서 창조 과학회에서 내놓는 대안이라는 게 학문적으로 보기에 심하게 허접한가 보다. 그래서 사이비 과학 취급 받으면서 까이고 있다. 마치 과거에 말씀 보존 학회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기성 교회들로부터 간증을 잃었듯이 말이다.

과거에는 빛의 속도가 더 빨랐다거나, 달에 쌓인 먼지 두께라거나, 지구 자기장의 반감기라든가... 지구/우주의 나이가 젊다고 내놓는 근거들은 다 과학적으로 반박되어 있다(고 한다). 창조 과학 진영에도 전문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천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어줍잖은 지식으로 우주론을 논하고 현대 생물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사람이 엔트로피 운운하면서 진화론 까는 모습이 세속 학계에서는 상당히 찌질한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듯.

심지어 크리스천들 중에서도 이런 추태 때문에 창조 과학회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으며, 특히 연세 대학교 천문학과 이 영욱 교수의 경우(물론 크리스천) 강연과 글을 통해 창조 과학회 안티를 공공연히 자처하고 다니는 걸로 유명하다. 빅뱅(대폭발설)은 이제 의심하고 싶어도 의심할 수 없는 100% 절대무오 확실한 정설이 맞으며, 창조 과학회가 주장하는 성년 우주설이라든가 광속 가변설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오류라고 너무 단호하게 딱 잘라 말을 하는데, 본인은 과학 지식이 없으니 그에 대해 뭐라 코멘트 할 수가 없다.

2008년 가을엔 창조 과학회 주요 간부이던 양 승훈 교수가 "나도 다시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지구와 우주 나이는 많은 것 같아" 하고 커밍아웃을 한 후 창조 과학회를 탈퇴해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렇게 우주의 나이가 많은 쪽으로 돌아선 사람들은 결국 어디로 가는가 하면, 필연적으로 창세기 1장의 문자적 해석을 포기하는 쪽으로 빠진다. 하나님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냐? 이 day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원어로는 year가 될 수도 있고 두리뭉실 궁시렁궁시렁...;;; 나중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공격하는 쪽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진실은 어디 있을까?

이 모순을 속 시원하게 해결하는 것이 바로 간극 이론(gap theory)이다.
창세기 1:1 (천지창조) - 2 (심판의 결과로 땅이 혼돈) 사이에 엄청나게 긴 시간이 흘렀고 그 후 3절 이후부터 6일 창조는 문자적인 24시간이요, 인류의 역사는 6천 년이라는 시나리오이다. 우주의 나이까지 6천 년으로 좁힐 필요도 없고, 무리하게 6일 창조를 늘어뜨릴 필요도 없다!

그런데 간극 이론은 기독교계 내부에서 굉장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게 무슨 아담 이전의 인간 조상이라든가 귀신론을 주장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오해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으며, 간극 이론은 성경과 과학을 바르게 풀이하는 열쇠이다.

간극 이론의 핵심은 창 1:2의 without form and void를 마치 렘 4:23처럼 매우 부정적인 심상(=심판의 결과)으로 본다는 것이다. 본인은 비행기 사고로 끔살 당한 희생자 시체 중에, 새까맣게 타고 특히 이목구비가 싹 없어진 민얼굴을 사진으로 본 적이 있다. 후덜덜;;; 그게 바로 without form and void인 얼굴이다. 정확하다.

반대로 간극을 믿지 않는 사람은 창 1:1-2를 창세기 1장 전체의 주제 문장으로 보고, 2절은 창조 중간 과정이나 준비 상태로 해석한다. 식사를 준비하기 전의 조용하고 깔끔한 부엌을 without form and void 상태라고 비유하는 글을 봤다. 심지어는 첫째 날이 "하늘과 땅도 창조하고" 빛도 창조한 날이라고 뭉뚱그리기도 하는 듯. 하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거 같다. C/C++ 언어에도 등장하는 void는 공허하고 뭔가 비정상적이거나 최소한 관념적으로 텅 빈 심상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간극 이론은 인간 이전의 온 우주가 물로 멸망한 적이 있다고 가르치며, 벧후 3:6을 노아의 홍수로 보지 않는다. 간극 이론은 물과 어둠이 언제 창조되었는지를 알려 주고, 천사라든가 사탄 마귀는 언제 창조되었고 언제 타락했는지에 대해서도 딱 떨어지게 답이 나온다. 6일 창조 중 둘째 날에만 왜 하나님께서 보기 좋았다는 말을 안 하셨는지가 정확하게 설명된다는 것도 아주 큰 매력이다! 본인은 이 논리를 깨달은 뒤부터 간극 이론 매니아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젊은 우주 진영에서는 노아의 홍수만으로 지구의 모든 지질학적 격변을 다 설명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그쪽의 주장대로라면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지구상에 화석 연료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니, 인류는 창조 후 약 1600년 동안 석탄과 석유가 없이 살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용한 역청(pitch)은 아스팔트 같은 석유 화합물이 아니라 송진이라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극을 믿으면 굳이 그렇게 단정지을 필요가 없다. 우주와 지구의 나이가 길다는 증거는 아무 무리 없이 받아들이면 되고, 젊은 듯이 보이는 증거에 대해서는 6천여 년 전쯤에 한번 우주 물청소를 해서 그렇다는 식으로 해석하면 된다. 달이나 화성 같은 여타 행성에서 과거에 물이 흐른 흔적이 발견되었다는 뉴스 보도는 간극 주장자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여러 논쟁거리가 있으나, 이 글에서 더 다루지는 않겠다. 젊은 우주를 믿는 분들은 본인과 같은 믿음에 대해서 "과학과 신앙의 절충"이라는 딱지를 붙이면서 버럭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건 절충이나 타협이 아니다. 제아무리 "선장은 배와 함께 가라앉는다"란 말이 있다고 한들, 선장도 충분히 구조될 수 있는 상황에서 선장이랍시고 굳이 똥고집 부리면서 침몰하는 배에 남아 개죽음 당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객관적으로 싸울 필요가 없는 분야에서까지 바이블 빌리버들이 세속 과학을 상대로 전투종족이 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간극만치 기독교의 여타 근간 교리(특히 마귀론!)와 예표에 잘 부합하고 현대 과학하고도 충돌 안 하는 멋진 교리는 찾을 수 없는데 왜 이렇게 간극이 오해 받고 이단시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간극 이론은 진화론과의 절충이 아니며, 아담 이외의 인류 조상을 주장하지 않고 문자적인 6일 창조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간극을 반대하더라도 제대로 알기나 하고서 반대했으면 좋겠고, 창조 과학회는 젊은 우주를 주장하더라도 좀더 업데이트된 최신 과학적 데이터로 밀어붙였으면 좋겠다.

평소에 성경을 믿지 않았거나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이라면 이 글을 어떻게 받아들이려나 모르겠다. 진화론자 욕하는 내용은 없으니 부담 없이 편하게 읽으셨길 바란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본인 같은 사람(교회 진영)도 있음을 밝히는 바이다. ^^;;

* 2011년 12월 5일 추가
요약하자면, 원창조· 재창조 문제는 without form and void를 아래 그림에서 왼쪽처럼 보느냐, 오른쪽처럼 보느냐 문제와 정확히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잘 알다시피 왼쪽은 짓다가 만 미완성 건물인 반면, 오른쪽은 완공되었다가 파괴된 건물의 잔해이다.
세상에, 이걸 떠올리고는 내 머리에 내가 감탄하고 말았음.. -_-;; 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07/09 09:08 2010/07/0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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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이야기

금과 은, 특히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에게 값비싼 귀금속의 제왕으로 각인되어 왔으며 성경적인 의미도 풍부하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물질도 귀한 것과 흔해빠진 것을 구분해 놓으신 것이다.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누구라도 번쩍이는 누런 금을 보면 아름다움을 느끼고, 탐내고 갖고 싶어할 것이다. 금은 어디서나 보편적인 ‘경제적 값어치’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현찰만큼이나 검은 거래에서 쓰이는 매개체가 되기도 쉽다. 흔한 물질로부터 금을 만들려고 애썼던 연금술, 그리고 미국 서부 개척 시대의 골드러시를 우리는 역사를 통해 기억한다.

잘 알다시피 올림픽에서는 상위 입상자에게 금· 은· 동메달이 수여된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의 직전에 개최된 1912년 제 6회 대회까지는 메달을 단순 도금이 아닌 진짜 순금· 순은으로 만들어서 줬다는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흠좀무... 그렇게 해서는 올림픽 위원회의 재정이 남아나질 못했을 것이다.

금은 잘 알다시피 일단 외형이 정말 탐스럽다. 그런데 희귀하다.
그리고 매우 안정적이다. 공기 중에서 녹이 전혀 슬지 않으며, 수중이나 고온에서도 산화하지 않고 어지간한 화학 물질에도 반응하지 않는다. (뭐, 왕수 같은 일부 물질에는 녹지만) 제아무리 금이 보기에 아름다워도 공기 중에 조금만 놔 두자 쇠처럼 녹이 슨다면, 이 정도로 비싼 귀금속의 지위를 차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불변성 역시 금의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금은 액세서리를 만들 때뿐만이 아니라 그 안정성과 불변성 덕분에 치과 의료용으로도 쓰이고, 전기적 특성 덕분에 손전화 같은 전자 기기에도 소량 들어간다. 오죽했으면 그런 반도체 기판을 만드는 회사에서 수거되는 금을 몰래 빼돌린 직원이 경찰에 잡히기도 했을 정도이다.

태양계 바깥으로 떠난 우주 탐사선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에는 혹시 외계인이 발견하면 보라는 의도로 지구의 위치와 인간의 모습 등이 새겨진 일명 ‘파이어니어 금속판(Pioneer plaque)’이 장착되었는데 이 금속판의 재질은 알루미늄에다 금 도금이다. 11호에는 아예 금으로 만들어진 LP 음반까지 들어있다(지구의 소리 수록). 그야말로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여행할지도 모르는데 변질되지 말라고 비싸고 무거운 금을 쓴 게 틀림없다.

또 금은과 비슷하게 안정적인 금속으로 백금이 있다. 백금은 촉매로도 실용성이 매우 뛰어난 금속이며, 백금과 이리듐(Ir)이라는 희소 금속과의 합금은 전자 장비의 접촉 부품, 만년필 펜촉 등으로도 쓰이고 측정 기기의 재질로 활용된다. 특히 과거에 킬로그램 원기, 미터 원기 같은 물건도 안정성 덕분에 이 합금으로 만들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손전화 같은 정밀 전자 기기를 만들 때 쓰이는 이런 희소 금속들을 확보해 놓으려는 경쟁도 국가간에 치열하다고 소식을 전에 들은 것 같다.

은만 있는 게 아니라 수은도 있고, 금만 있는 게 아니라 백금도 있다는 게 흥미롭다. 백금과 은의 차이는 마치 여성 친구(female friend; 그냥 우정)와 여자 친구(girl friend; 애인-_-)의 차이인 것 같다. ^^;;

성경에는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동방 박사들이 그분께 바친 선물 세 종류 중에도 금이 있었다(마 2:11).
뭐니 뭐니 해도 황금 잔치가 벌어졌던 때는 솔로몬 왕 시절인데, 궁내 경비병들에게 지급된 방패의 재질이 금이었고 왕좌도 금이었으며, 왕이 사용하는 식기조차 다 금이었다! (왕상 10:14-22, 27)

은은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마냥 흔해 빠졌고 아예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니 믿어지는가? (왕상 10:27) 그때는 사실상 전세계의 모든 금이 예루살렘으로 몰렸다는 소리이다. 조금 상식이 있다면 불신자라도 666이라는 숫자가 아주 나쁜 의미로 성경에 나온다는 걸 알 텐데, 계시록에만 666이 있는 게 아니다. 1년 동안 솔로몬의 왕국으로 반입된 금의 무게가 666달란트(약 20~25톤)였다고 한다. 성경에서 666이 딱 두 번 이렇게 나온다는 게 아주 흥미로운 사실이다.

뭐 그래 봤자 금으로 도배를 해 놨던 성전과 각종 집기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망할 때 다 외적들에게 뺏겼다. 예수님은 헤롯 시절에 지어진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기고 다 무너질 것”이라고 예고하신 적이 있는데(마 24:2), 이것은 유대인들의 민족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이요, 마치 “제아무리 불침선 타이타닉이라고 해도 처녀 항해 때 싹 침몰해 버릴 것이다” 같은 메가톤급 예언이었다.
하지만 예언은 그대로 적중. 왜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안 넘기고 무너졌는가 하면, 탐욕스러운 적군들이 금을 추출하려고 돌을 하나하나 다 뒤지고 녹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정말 ‘지못미 성전’이다.

그래도 안타까워하지 말자. 예수님께서 그 황금 잔치를 벌였던 솔로몬의 영광도 보잘것없다고 말씀하시며(마 6:29), 자신이 솔로몬보다도 더 큰 이(마 12:42)라고 소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 받은 크리스천이 하늘나라에서 살게 될 곳은 도시 전체가 맑은 유리 같은 순금일 테니 말이다(계 21:18).

이상, 4월의 마지막 블로그 포스트였다. ^^

Posted by 사무엘

2010/04/30 21:35 2010/04/30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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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경 통독 내력

※ 1독 (1998. 10. 28 완료)
그 전부터도 성경을 한번 쭉 읽긴 해야겠다는 부담감은 갖고 있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세벌식 연습과 더불어 마음을 강하게 먹고 실행에 옮겼다. 개역 성경 본문에다 각종 관주와 주석, 해설이 딸려 있는 <아가페 큰글 성경>을 읽었다.

그 당시는 아무 신학 배경도 없고 성경을 혼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지식 수준이었으니, 이게 무슨 말인지는 온통 해설과 주석에 의존해야만 했다. 비록 다음 장을 읽으면 앞 장 내용을 까먹는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어쨌든 태어나서 꾸준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완독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예후, 히스기야 같은 사람 이름은 이 때 이미 익숙해졌다.

※ 2독 (2000. 5. 21. 완료)
이듬해에는 드디어 영어 성경에 도전해서 그 이름도 유명한 NIV를 다 읽었다. 아직 비록 킹 제임스 성경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각종 성경 책명과 인명/지명, 신학 용어의 영어 표기에 익숙해짐으로써 훗날 KJV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영어로 killed를 안 쓰고 slain을 쓴다는 걸 처음 알았고, crucify, atonement 같은 단어도 이때 알게 됐다. 사도행전이 무척 재미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각 책들이 분위기별로 차이에 대해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쓰는 신세계역(NWT)이 성경을 어떻게 변개했는지를 NIV와 대조하면서 분석했다. 이로써 본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성경을 두 번 완독했다.

※ 3독 (2004. 3. 6. 완료)
본인은 대학에 가서는 한동안 성경과는 동떨어진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인생의 일대 격변을 겪었다. KJV는 그저 400년 전에 출간된 ‘개역성경’의 영문판뻘 되는 성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2독 이후로는 현대어 위주로 여러 다양한 성경이나 읽어볼까 하다가 그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3독은 2003년부터 시작했는데, 영어 킹 제임스 성경과 기존 성경을 일일이 대조하고 메모하고 영어 단어장까지 만들면서, 지금까지 본인이 행한 통독 중 가장 꼼꼼하게 읽었다. 본인이 지금 갖고 있는 성경 지식의 상당수가 이때에 축적되었다.

※ 4독 (2006. 12. 22. 완료)
영어는 시간 관계상 보지 않고 우리말 흠정역 성경만으로 3독보다는 가볍고 빠르게 읽었다. 다만, 이때는 누나와 함께 번갈아가며 ‘낭독’을 했다. 덕분에 이때 우리 누나도 난생 처음으로 나와 함께 성경 1독에 성공했다.
이때쯤부터 드디어 이스라엘 주요 족장의 가계도, 사복음서의 구성별 차이 같은 게 슬슬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5독 (2007. 10. 3. 완료)
한국어, 영어를 거의 섞어 가며서 읽었다. 일과가 끝나고 남은 시간에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성경부터 읽고 다른 일과를 진행하는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1~3독 때와는 달리, 특별히 성경을 읽었나 하는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도통 기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소선지서의 각 책 내용도 머릿속에 남기 시작하고, 성경의 어느 책 어느 부분 하면 대충 무슨 내용인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6독 (2008. 9. 21. 완료)
5독과 동일한 페이스로 영어 문장을 다시 독해하며 읽었다. ‘성경 지도’가 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 7독 (2009. 11. 17. 완료)
가장 최근에 성경을 통독한 기록이다. 여전히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예전엔 이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느낌이 다르구나’ 하는 면모를 발견하면서 놀라곤 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상 1년 1독 속도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를 좀더 올릴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조금 해 봤는데 증속이 여전히 무리이다. -_-;;
그리고 7독이 끝난 후, 아직까지 8독을 시작하지는 못하고 통독이 중단된 상태이다. 4독째부터는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거의 쉬지 않고 성경을 많이 읽어 왔는데 그 페이스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바깥에서 온통 세상적인 고민, 번뇌-_-, 육신의 욕망에 노출되어 살다가 매일 짧게나마 세속적인 현대 영어가 아닌 킹 제임스 영어에 발을 담글 필요가 있으며,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사고방식에 내 머리를 동기화시키는 작업이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하다. 그게 꾸준히 진행되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나의 영적 상태는 알게 모르게 차이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신학 지식도 없고 히브리/그리스어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절대무오하게 온전히 기록해서 오늘날까지 보존하셨다는 사실을 못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최소한 신학의 저주 정도에는 안 낚일 자신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믿고 따르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22 01:11 2010/01/2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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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회복>

※ 요약
 
1월 17일 오전 예배 때 우리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소개 받은 독립영화 <회복>(김종철 감독)을 그 날 저녁에 청년부 명의로 단체 관람을 했다. (뭐 그래 봤자 본인 포함해 총 5인이었지만..)
 
정말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내용이었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기독교 컨텐츠가 외국물 번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으며 대단하고 자랑스럽다.
일제 강점기 교회 수난사라든가 북한/조선족 지하 교회 이야기처럼 민족주의 정서(?)가 전혀 없이도 이렇게 감명 깊은 영상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스라엘의 문자적 회복을 믿고 예수님의 전천년 재림을 사모하는 바이블 빌리버라면 누구라도 볼 가치가 있음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바이다.
 
이 정도의 감격은, 본인이 KJV 초창기에 읽은 바 있는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구영재 저)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이것도 번역서가 아닌 국내 저서라는 게 믿기 어려운 수준인 책인데, 그 책이 다루는 분야는 유럽의 종교 역사 내지 국제 정세인 반면, 저 영화는 이스라엘이라는 점이 차이이다.
 
※ 첫인상
 
목사님께서 처음에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본인은,
뭐 또 할리우드에서 쉰들러리스트라든가 아니면 비슷한 급의 시사/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나.. 유대인 관련 음모론은 다루나.. 그 정도로 짐작만 했을 뿐, 정보가 없었다.
 
제목이 '회복'이라고 하기에, 주찬양 선교단 극렬 매니아인 본인의 머리에 바로 뜨는 인덱싱 결과는, 그저 10집 앨범 <회복>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고, 이 <회복>은 놀랍게도 국내에서 제작된 독립영화이다. 감독은 수십 회의 이스라엘 방문 경력을 지닌 이스라엘 전문가였다.
관람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크리스천들이고 교회에서 추천을 받아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였다.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상영 전에 거의 10~15분은 온갖 광고들이 나오는데 역시 독립 영화이다 보니 그런 게 전혀 없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본인은 예전엔 영화관의 내부 모습이 철도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항과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상영 도중에 일부 사람들이 나가거나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정차역). 들어갈 때 사람이 표를 검사한다는 것, 처음에 비상시 대처 요령이 방송된다는 것 등이 공항 내지 비행기 여행과 매우 비슷하다. ^^ 역시 경험이 안목을 키우는 것 같다.
 
※ 영화 내용
 
예수님을 믿는 어느 유대인 가정이 괴한으로부터 폭탄 테러를 당하는 얘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런 짓은 90% 이상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폭발 현장을 분석한 결과 이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를 전역한 사람의 소행으로 판명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자까지 군대로 징집해야 할 정도로 국방이 위태롭다.
그런데 서로 그렇게도 사이가 나쁜 이스라엘과 인근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그래도 일말의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게 있다. 바로 예수님을 안 믿으며, 기독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진정한 우군인 크리스천들에 대해서 온갖 나쁜 감정을 갖고 있고 오히려 적군과 그런 사이라니!
마치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친구가 되었듯이(눅 23:12), 이들 사이의 불의한 동맹은 적그리스도에게 낚여서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대다수의 불신자들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천주교니 개신교 나부랭이 따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구교 신교 할 것 없이 자신들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고 괴롭히고, 십자가 내밀면서 못살게 군 코쟁이 원수일 뿐이다. 까놓고 말해 그들은 히틀러도 기독교의 교리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기독교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정통 유대교는 국교로 강제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정통 율법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가 그렇다는 거지, 이스라엘 내부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자유주의자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나라 법에 의해서 박해 내지 벌을 받는 건 아니다. 단지 왕따가 되고 그런 유대교 신봉자들로부터 사회적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배척하는 짓이 너무 오버이다 싶으면 이스라엘 경찰이 출동해서 제지도 하긴 하지만.. 그들도 이런 일에서는 좀 손 떼고 싶어한다.
 
배척을 어느 정도 받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얼굴을 사진 찍어 간 후 전단지를 마을에다 뿌린다. 이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고 '당신들을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불순분자이니 조심하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집 앞에서 농성도 하고,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 "당신네 종교 때문에 히틀러는 지금도 외롭지 않을 거다" 같은 폭언 악담도 한다.
심지어는 교회 앞에서 죽치고 앉아 농성을 하거나 예배 진행을 못 하게 난동을 부리고, 예배당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1인 시위, 침묵 시위 별 걸 다 하더라. 그 중에 엄청 과격한 사람들은 아까처럼 폭탄 배달까지..
 
사람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하는 종교 하나에 심취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느꼈다.
새까만 정장과 모자에 긴 턱수염을 한 랍비 아저씨가 평소에는 그래도 일말의 멋이 있어 보였는데.. 저러는 모습을 보니까 싸이코처럼 보였다. -_-;;
유대교 회당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는데, 거기는 오히려 천주교 성당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기도문 암송하고, 남녀 할 것 없이 머리에 면사포 뒤집어쓰고..
 
그들은 진짜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냥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 내지, 기존 유대교 체계에 반발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든 이단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기네 나름대로 메시야의 조건을 규정해 놓고 있는데, 지금까지 몇몇 랍비는 그 조건 중의 일부만을 충족한 경우가 있으나 완전한 메시야는 아직 안 왔다는 식이다.
신약 성경도 내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는 구약 성경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유대교 환경에서, 그것도 2, 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정말 몇백 명에 불과하던 "메시야닉 쥬" --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 -- 가 지금은 1만 4천여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로마서 11장 내용이 진짜 자기네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유대인의 인터뷰를 보게 될 줄이야!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대환란 때 14만 4천 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가 준비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전도지 나눠 주고, 도로변에 현수막을 펼치면서 정말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방해도 많이 받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복음은 지금까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거라 한다.
유럽은 이제 교회에 노인들밖에 안 남았고 오히려 아시아에서 역선교를 해 온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한국도 100년 전의 평양 대부흥은 이제 안드로메다로 갔고, 크리스천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중에 정작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스라엘이 꿈틀꿈틀 각성 중이다. 정말 이제 이방인 경륜은 끝이 얼마 안 남았다!
 
유대인의 실족과 실패만으로도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끼쳤는데, 하물며 이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복을 세상으로 나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밝아지고 그들은 일등 선민 노릇을 하게 될까? (롬 11:12)
메시야닉 쥬들은.. 자기 동족이 지금까지 이방인들로부터 당한 설움을 이제 자기들한테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동족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자기를 박해하는 게 신명기 13장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신명기 13장이 아니라 신명기 18:15가 적용된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역시 유대인들은 지금도 표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민족인가 보다. 예수님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꿈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체험으로 표적을 보고 곧장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영화 중에 줄을 잇는다. 영화 앞부분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 그 사람도 정말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
물론 이들이 다 바르게 믿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영화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아직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여전히 사도행전 15장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님을 배출하였으나 수천 년을 예수님 없이 지내 온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흐름!
모세오경을 골수로 암기하면서 자란 그들이 스스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기적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유대인의 덕을 본 이방인 중 하나로서, 본인에게 큰 도전과 유익이 되는 다큐멘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영어 무진장 잘 한다는 건 엄청 부러웠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말싸움까지 유창한 영어로... =_=;;
영화 중에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데, 원래 오리지널 구절은 이렇다.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6)

이상 이것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20 09:44 2010/01/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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