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 설교 외

* 스포일러: 이 글은 잘 나가다가 뒷부분부터 삼천포로 빠지는 구조이다.

본인은 정확하게 언제 구원받았는지 모르는 예수쟁이이다. 고등학생이던 1998년 가을에 처음으로 성경을 한 번 완독했으며, 2002년 무렵에 KJV believer가 되고 세례 대신 침례를 다시 받았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06년엔, 교회에서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거리 설교 때 난생 처음으로 preaching을 해서 지금까지도 이를 계속하고 있다. 본인은 길거리에서 직접 설교를 하는 교회 형제들 중에서는 최연소자이다.

주변의 불신자, 개독안티, 무신론자와 얘기를 나눠 보면, 그들은 교회 댕기는 주변 사람들의 행실 때문에 실망하고 기독교에 대한 호감을 잃은 경우가 많다. 도대체 어디서 접했는지 별 희한한 교회, 예수 사칭하고 다니는 듣도 보도 못한 이상한 사람에 의한 온갖 나쁜 기억과 응어리는 꼭 하나씩 갖고 있는 듯했다. 저런 놈들 때문에 예수 못 믿겠다고.

물론, “크리스천들의 행실은 불신자들이 보는 성경”이라는 말도 있을 정도로 크리스천들은 세상을 상대로 좋은 본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고 본인도 당연한 말이지만 그 점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예외가 아니다-_-. 그런 못난 것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훌륭하고 고상하게 산 사람들도 다 예수 안 믿었기 때문에 죽어서 지옥 간다고 말하면 그것만치 기분 나쁘고 정 떨어지는 소리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기독교는 애시당초 선행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그리고 교회란, 열심히 도 닦고 인격 수련해서 구원을 받으려 애쓰는 고매한 사람들의 모임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다니는 일종의 병원 같은 곳이다. 병원에 완벽한 사람, 성한 사람이 다닐 리가 없잖아..;; 100% 완벽한 교회에 당신이 가입하고 나면 그 교회의 100% 완벽 무결성은 깨진다. -_-;;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 초청에 차별이 있던가?? 신앙생활이란 그런 마인드로 하는 거다.

그리고 기독교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불신자들의 안목이 늘 객관적이고 정확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대형 교회에 대해서는 부패하고 비리 많고 돈만 밝힌다고 욕하면서, 한편으로 진짜 성경대로 좁은 길을 고집하는 마이너 교회에 대해서는 자기밖에 모르고 편협하고 옹고집 교조주의라는 식으로 응수한다면?
교회는 어떤 노선을 가든 어차피 욕을 하게 돼 있는 불신자의 취향까지 만족시켜 줄 의무는 결코 없다는 걸 알아야 할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마 11:18-19 같은 부류들.

난 지금까지 살면서 참 다행스럽고 고맙게 여기는 점이 하나 있는데, 신앙생활에 관한 한 사람 때문에 시험 들고 실족한 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가 또라이-_- 짓과 괴팍한 성격 때문에, 남들로 하여금 예수 믿는 사람이 원래 다 저렇나 식으로(ㄲㄲㄲㄲㄲㄲㄲㄲ) 시험 들게 하고 간증 망친 게 더 많을 것이며, 기독교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내가 빚진 게 더 많을 것이다. -_-;;; 죄인을 받아준다는데 내가 왜 마다하며, 다른 죄인으로부터 끼친 여파에 그렇게까지 피해의식에 사로잡힐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 사후 심판이 있다는 것,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으며 인간의 의는 몹시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거나 그에 반감을 품어 본 적이 없다. 신이 인간을 지옥에 보낸다는 말에 불쾌해하기에는 인간의 죄악이 너무 극심하다는 현실에 훨씬 더 공감이 갔다. 이런 발상의 차이가 불신자의 사고방식과 신자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만들어 냈음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누구 만만찮게 나만의 인생 개똥철학에 빠져서 하나님에 대해서 굉장히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히고, 죄의 결과와 여파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다가 열폭하고 인생이... 으, 생각도 하기 싫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가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 (고전 15:10)

길거리에서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를 들어보면 자기만의 패턴이 있다. 그리고 나도 나만의 패턴이 있다. 나는 내가 깨달은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성경이 어떤 책인지 먼저 얘기한 뒤, 인생은 유한하고 언젠가 죽음과 심판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경제· 교육· 정치 따위의 문제가 아니라 죄 문제를 해결하러 오셨고 그게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얘기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살인· 간음을 저질러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던 것, 절대적인 선과 악이란 없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모두 바로잡아야 한다” ... 이걸 전하려고 한다.

거리 설교라는 게 처음에 입을 떼기가 힘들다. 본인도 초창기에는 원고를 미리 써 보기도 하고 여러 방법을 찾아 봤는데, 결국은 여러 번 하고 나니까 요즘은 원고 없이도 한번 말을 하면 최하 15분은 금방 지나는 것 같다. 나 자신이 복음과 구원 메카니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면, 이를 조리 있게 얘기도 곧장 할 수 있다.
내가 평소에 다른 곳에서 공개적으로 얘기를 하다가 말 더듬고 혀 꼬이고 실수하는 것에 비하면, 내가 생각해도 거리 설교는 꽤 유창하게 잘 하는 것이다. -_-

오히려 나는 인터넷 공간도 그렇고 길거리도 그렇고,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메시지 전파가 차라리 속 편하다.
단적인 예로, 이곳 인터넷에서는 내 인격-_-보다 내가 쓰는 글의 메시지 자체만이 비교적 쉽게 전달되기 때문에 신앙의 동지도 여럿 만나고 이끌어 올 수 있었다. ㅋㅋ 하지만, 나와는 반대 방면으로 재능이 있는 분도 있겠지.

또박또박 길거리에서 설교를 하고 나면 굉장히 기쁘고 후련한 마음이 든다. 내 신앙 노선을 이미 잘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난 체험이나 경험 같은 데에 가중치를 덜 두고 그런 것 판단은 아주 보수적이고 신중하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리 설교를 하고 나면 감회가 새롭다. 이런 육신의 체험은 나도 보증 가능하다. 이걸 기독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이 주는 기쁨”이라고 한다.

“네가 드디어 나에 대해서 공개 석상에서 당당히 증언을 할 정도로 성장했구나! 아이고 기특해라!” 정도? ㄲㄲㄲㄲ
거리 설교가 주는 유익: http://biblebaptistpublications.org/streetpreaching.html 클릭. (영어)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난 어차피 좀 덕후에 남 눈치 볼 줄 모르는 철면피 기질이 있어서.. -_-;;
하루는 거리 설교를 마치고 돌아오는데, 문득 이런 선포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여러분은 매일 이용하는 지하철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우리나라 철도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전해 드리고자 이 자리에 나왔습니다.
(어쩌구저쩌구... 중략)

이처럼 철도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철도는 21세기의 트렌드에 어울리는 친환경 고효율 교통수단입니다. 우리나라 철도를 알면 역사와 지식을 보는 눈이 바뀝니다. 철도는 정서 수양과 교양 함양에 좋습니다. 철도를 알면 국토 사랑 정신이 생깁니다. 이렇듯 철도 덕질(?)에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선한 간증이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앞으로 철도에 관심을 갖고, 여행 갈 때 철도를 적극 이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드디어 본색이 드러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설마 진짜로 길거리에서 이렇게 외치고 왔다면, 여기 계시는 크리스천들께서 “용묵 형제가 부디 철도를 끊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기도라도 하셔야 할 배도(背道)-_- 단계이겠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철도를 전하는 데는 영적 전투가 필요하지 않다. 철도를 전하다가 순교? 순직?했다는 사람 얘기는 못 들었다. -_-
철도를 전하기 위해서는 죄, 죽음, 심판, 지옥 같은 유쾌하지 못한 주제를 꺼낼 필요가 없다.
“버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존중해 줘야지 왜 너만 독단적으로 구냐?” 이런 말을 들을 일도 없다.

요즘은 철도역, 시외버스 터미널, 고속버스 터미널을 통합해서 교통 허브로 건설하는 게 유행이라지만, 그게 무슨 교통수단간의 에큐메니컬 운동이랍시고 경계라도 해야 할 대상이지는 않다.

허나, 철도에는 불행히도 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 하늘로부터의 보상이 있다고 약속되어 있지도 않다. 그런 인센티브가 없으니 철도 전하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을 해야지 뭐, 별 수 없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내 안에 거주하는 성령님도 철도를 좋아한다고 굳게 믿는다. (뭐, 주변에서는 용묵 형제가 철도 덕질을 할 때마다 성령님은 탄식할 거라고 악담을 하는데... ㄲㄲㄲㄲㄲ) 새마을호 객실에서 Looking for you가 내 귀에 울려 퍼지던 그 날은 내게 정말 오순절 성령 강림절이나 마찬가지인 날이었다. 철도와 본인과의 만남은 가히 운명적이고 필연이었다.

본인은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 밑으로 지하철이 깔리는 날을 꿈꾼다.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에서 “열 도시를 다스리라”(눅 19:17)가 ‘10개 철도 노선(사철 ㄲㄲ)을 다스리라’가 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make straight in the desert a highway for our God.”(사 40:3)는 사막에서 철도가 건설되는 모습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어디 가서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나, 지하철 시스템에 대해서 강연이라도 실컷 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나는 예수님을 증거하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철도 얘기를 담대하게 늘어놓고 싶다. ^^;;

나는 한때는, 요즘 같은 영악하고 험악한 세상에 나 같은 별종, 괴짜, 덕후가 아니면 누가 성경 따위를 믿겠는지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다. 세상의 유행 풍조하고 성경의 사고방식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니까...;; 다시 말해, 철도 덕후나 KJV believer나 비슷한 수준의 geek라고 생각했....는데, 후자에 속한 분에 따르면 그건 절대로 그렇지 않으며, 그 둘을 상호 동급으로 취급하지 말라고 그러네.. ㅋㅋㅋㅋㅋ 정말인지?? ㅠㅠ

Posted by 사무엘

2011/05/21 08:41 2011/05/2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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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매년 4월 중하순에는 어지간한 개신교회들이 부활절이라고 지키는 절기가 있다. 잘 알다시피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한다고들 한다.
부활 신앙은 창조 신앙만큼이나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기독교 교리이다.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고 성경에 직접 선언되어 있다(고전 15:12-19).

일단 예수가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었다는 건 세속 역사가들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그건 인정하고 넘어간다. 하지만 백과사전이나 세계사 관련 서적을 보면, 예수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이렇게 살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까지만 서술하고 끝난다. 그 이상을 적으면 종교색을 띠는 민감한 영역이 되어 버리니까..;; 아니면 부활 승천 떡밥의 출처는 '카더라' 통신이라고만 얼버무린다. 이건 마치 “성경이 소설이냐, 비소설이냐?”와 비슷한 영역에 속하는 논쟁거리이다.

그러나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죽어서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했다고, 다시 말해 스스로 살아났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의 전말에 대해 좀 살펴보자.

각종 종교 성화나 영화들은 예수님을 무슨 리처드 스톨먼 같은 치렁치렁 장발의 나이 지긋한 도인, 교주, 심지어 록스타-_-처럼 그려 놓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좀 고증 오류가 아닌가 싶다. 더구나 한국어 성경은 예수님의 언행을 다 아주 위압적인 반말 '해라체'로 기록하고 있으니, 심리적으로 느껴지는 예수님의 연령대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공생애 시절의 예수님의 육신의 나이는 30대 초중반의 청년, 기껏해야 노총각이다. 그런데 벌써 제자를 뒀을 정도면 그들은 도대체 몇 살이란 말이냐?

어쨌든, '아름다운 청년'이든 도인 교주이든, 죽은 자를 살리고 물 위를 걷고 5천 명의 군중을 오병이어로 배불리 먹이던 화제의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악질 흉악범으로 몰려 그것도 민족 대명절에 너무도 무기력하게 십자가형을 당해 버렸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매수당한 사람이나, 예수가 슈퍼스타답지 않게 자신들의 정치적 육신적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하는(않는) 것에 대해 실망한 사람들은 옳다구나 예수님을 마음껏 조롱하고 욕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가히 패닉에 빠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 인맥으로 좋은 감투라도 얻으려고 제자들 내부에도 줄서기 파벌이 생길 지경이었는데(마 20:20-24 같은) 그런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이 났다. “난 모든 걸 버리고 오로지 그분만 따랐는데 내 주인님이 이렇게 죽어 버리시다니!”
물론 예수님은 그 전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수차례 예고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당시엔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들었다.

성경은 예수님이 죽으시고서 사흘간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그 시간 동안 제자들은 OTL(좌절) 모드로 있으면서 패잔병의 심정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생업에 종사할 채비나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 중에 너무 상심한 나머지 자살한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다. 물론 예수님을 대놓고 배반한 가룟 유다는 제외하고.

그랬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 그 부활한 주님을 처음으로 알현하는 영광을 누린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연약한 여인들이었다. 무덤을 철통같이 지키고 있어야 할 군인들은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고, 역사 기록에 따르면 황제의 봉인까지 굳게 쳐져 있었다는 무덤 입구는 뚫려서 훤히 열린 상태였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부활한 예수님이 나타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뭔 일 때문에 그렇게들 난리요?” / “헐, 요즘 예수 시체 증발 사건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이에요. 님은 소문도 못 들었어요?”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님에게(예수님인 줄 모르는 채로), 근래에 있었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본인은 눅 24:19-24의 기록은 정말 객관적이고 체계적인 진술이라고 생각해 왔다. 거짓· 과장이나 왜곡이 없고, 세속 신문이나 백과사전 기사, 그리고 21세기로 치면 블로그 포스트로도 손색이 없다. 성경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은 '오, 그래. 그 괴이한 사건에 대해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알기 쉽게 참 잘 설명했구나'가 아니었다.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심정으로 그를 크게 나무라셨다! 이 점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아야 한다.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넌 왜 그걸 남의 일인양 꼭 불신자처럼 얘기하느냐?)”

예수님께서 친히 성경(=구약)을 펼쳐서 창세기의 이건 내 예표, 레위기의 저것도 내 이야기, 이것도 내 예언, 저것도 내 예언... 풀이를 해 주자 그제서야 제자들은 마음이 열리고, 지금 시국은 겨우 가십거리 미스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이뤄진 것이고 그게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의심과 혼동의 구름이 걷히고 마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눅 24:32). 그때 왜 예수님이 글로바를 책망하셨는지 하나님의 그 답답한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크리스천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각종 성인군자들, 사이비 종교 교주들, 그리고 심지어 공산 독재 국가의 원수들은 다 무덤이 성대하게 꾸며져 있다. 특히 후자 같은 경우는 시신의 미라화와 방부 처리를 하느라 별 돈지랄까지 다 한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이고 굳이 말하자면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다! 이것이 기독교의 자랑거리이다.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인간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으나, 그 사망 권세가 예수님을 가둬 두지 못했으며 인간의 죄값이 2000여 년 전에 십자가에서 완전히 치러치고 청산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당히 부활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그 어떤 조직보다도 피비린내나는 순교 행렬이 넘쳐났음에도 불구하고, 예배 때 묵념이나 추모가 없다. 그분들이 다 지금도 살아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흔히 '죽다'의 높임말로 '돌아가시다'(자연으로, 흙으로 완전히 돌아갔기 때문에 지금은 세상에 안 계심)가 통용되는 반면, 예수님에 대해서는 일회적인 죽는 동작만을 높여서 '죽으시다'가 쓰인다는 점을 생각해 보자.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가! 이 얼마나 복된 소식인가? 이 기쁨을 힘차게 잘 표현한 대표적인 찬송가가 바로 <무덤에 머물러>이다. 마치 비행기가 이륙하는 느낌이다. '무덤에 머물러...'(택싱), '원수를 다 이기고...'(엔진 throttle 시작), '사셨네'(이륙 결심 속도 돌파.. 상승-_-)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었는지 모른다. 부활한 주님을 목격한 제자들은 겁쟁이에서 불과 며칠 만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자 같은 주의 용사로 180도 돌변했다. 조금 외람된 구석은 있지만, Looking for you를 듣기 전과 들은 후 본인의 철도관의 변화 추이 정도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엥?)

흔히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죽으신 날은 금요일이 아니다. 자세한 고증 과정은 생략한다만,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에 죽으셔서 진짜 말 그대로 사흘 밤낮을 무덤에 계셨다. 그러다 딱 사흘 뒤인 토요일 오후에 깨어나서 막힌 벽을 쓱 통과하든(요 20:26처럼) 군사들을 쫓아내든 무덤을 일찌감치 탈출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인 일요일 아침에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다. 쉽죠?

목요일은 명절인 유월절 안식일이고, 토요일은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안식일이다. 유대교 신자인 유대인들은 안식일인 토요일에 회당에서 집회를 열지만, 기독교회의 예배 시기는 예수님의 부활 시기에 초점을 두고 일요일이 전통으로 정착하게 됐다. 요 20:1, 요 20:19, 행 20:7, 고전 16:2 등. 여기서 first day of the week는 다 일요일을 뜻한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기 위해서 “예수는 잠시 기절해 있다가 무덤에서 깨어났다. 나중에 도망쳐서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후손까지 남겼다”-_-;; 같은 엄청난 낭설을 지어내는 사람이 있는데...;; 반박할 가치도 없는 개드립이다. 오히려 당시 문헌 기록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검토하다 보니, 예수님의 부활을 도저히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믿게 된 무신론자 석학도 존재한다. 부활은 기독교를 여타 종교와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핵심 요소임이 틀림없다.

※ 관련 아이템 1: 예수님과 요한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과 관련지어 하나 생각해 볼 주제는 예수님과 요한과의 관계이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이 어린 요한은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십자가로 돌아왔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맡겼다(요 19:26-27).
얼마 전 최후의 만찬에서 “너희들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폭탄 선언에, 다른 제자들은 다 “그게 혹시 저입니까?”라고 반문하였으나 요한만은 예수님 품에 스스럼없이 기대어 “주님, 그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죠?”라고 물었다(요 13:21-25). 그는 그만큼 그분과 각별히 가까운 사이였다.

이런 요한은 본이 아니게 아마 순교하지 않고 제자들 중에 제일 장수할 거라는 복선을 얻었으며,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그로부터 먼 훗날, 요한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고 90대의 백발노인이 된 몸으로 파트모스(밧모)라는 섬에 귀양을 갔다.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상황이었을 텐데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요한은 성경의 마지막 대단원인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오오~~~

예수님께서 가장 비참하고 고독하게 고난을 당하고 계실 때 요한이 십자가 곁에 있었으며, 그때 그는 비록 정확한 나이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무래도 20대 청년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완전 늙었고 홀로 외로이--자기 동료들은 거의 다 순교하고 없다-- 임종을 앞두고 있었을 때, 반대로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 주신 것이다. 이때 요한이 수십 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훗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날 사랑하느냐?”란 질문을 세 번 받았다는 일화만큼이나,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에피소드도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분의 인상은 계 1:13-16에 묘사되어 있듯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에, 예수님과 그토록 친밀했던 요한조차도 그 위엄에 완전히 압도되어 꼼짝없이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 관련 아이템 2: 부활절과 이스터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거창한 명분과는 달리, 오늘날의 기독교 문화권에 존재하는 일명 부활절은 유감스럽지만 그리 성경적인 기원에서 시작된 게 아니다. 영문 명칭부터가 이스터이고, 이는 기독교를 세상적으로 공인한 로마 제국이 이교도들의 절기를 기독교 관행에다 적당히 짬뽕하면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아주 유명한 논쟁거리가 있다.
킹 제임스 성경은 현존하는 성경 역본들 중 부활절의 유래를 정확하게 알려 주는 유일한 성경이다. 바로 사도행전 12:4에서 이례적으로 '이스터'(Easter)라는 튀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성경에서 그리스어 '파스카'는 행 12:4를 포함해 약 20여 회가 쓰였으며, 다른 곳에서는 유대인들의 명절 '유월절'(passover)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그러나 KJV는 딱 한 군데 저기서만은 그 단어를 '이스터'라고 번역했다. 파스카는 유월절도 되고 이스터도 되는데, KJV는 그 둘을 잘 맞게 분별한 것이다.

성경 본문을 보면 악한 헤롯 왕은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야고보를 죽인 후, 베드로까지 잡아들였다. 성경에 따르면, 베드로가 체포된 시기는 무교절 기간이었다고 한다. 헤롯은 베드로를 감옥에 가뒀다가, 파스카라는 명절이 다 끝난 뒤에 백성들 앞에 끌어내서 그를 아마 공개 처형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여기서 문제는,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뒤에 이어진다는 것. 레위기 23장처럼 구약 율법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에겐 이건 상식이다. 헐, 그런데 무교절 기간에 체포된 사람을 유월절이 끝난 뒤에 끌어낸다고라? 이건 21000원짜리 밥을 사 먹고 나서 돈은 20000원 내고, 포장마차 주인에게 “잔돈으로 애새끼들 과자나 사 주라”는 계산법을 구사하는 김 성모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논리이지 않은지? -_-

그래서 KJV의 번역자는 당대의 언어와 역사· 문화 배경상, 이 파스카는 유대인의 정통 성경 명절이 아니라 이교도들의 짝퉁 명절인 이스터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스카'를 정확하게 번역해 냈다.
KJV를 헐뜯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KJV에도 오역과 오류가 많답시고 다른 수많은 궤변을 들고 덤빌지 모르나, 우리는 다른 건 몰라도 이스터 하나는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본인은 지금까지 이스터에 대한 KJV 안티들의 재반박은 전혀 접하지 못했다. 오히려 이스터 하나만 딱 보고는 '우와!' 무릎을 탁 치고 KJV 유일주의자로 전향한 크리스천은 봤다. ^^;;

※ 관련 아이템 3: 십자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죄사함 받고 구원받아서, 지금 당장이라도 죽으면 바로 하늘로 갈 확신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면,
현재 가정과 교회와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당신 앞에 바로 놓여 있는 십자가나 묵묵히 지면서 주님을 잘 따르면 된다. '나는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 같은 소리 하지 마라. 그 고마운 예수님이 바로 교회의 머리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안 지키고는, 없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질 필요 없다!
특히 주님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겠답시고 육체적으로 자학을 한다거나 그런 짓 하지 마라..;;
교회 성도가 대환란 겪을 준비를 하겠다고 뻘짓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 세상이 그렇잖아도 성경대로 살기가 불가능에 가깝게 얼마나 힘든 시국인데, 그것도 모자라서 무슨 고난을 더 보태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1/05/07 08:49 2011/05/0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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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진화 -- 下

※ 창조 vs 진화 배틀

솔직히 본인은 논쟁을 할 정도로 충분하게 창조론이나 진화론을 공부한 적이 없으며, 별로 하고 싶지도 않다. 그리고 요즘 악의적인 네티즌들이 얼마나 말 꼬투리 잘 잡고 키보드 배틀 잘 뜨는지도 익히 안다. 그래서 본인은 본인의 주장을, “만약 진화론이 이런 걸 주장한다면, 나는 창조론자로서 당연히 성경 말씀과 약간의 과학적/경험적 사실에 따라 그걸 거부한다. 그 이상은 내게 묻지 말라” 정도의 선에서 끝내고자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화론을 믿는다고 해도, 최소한의 이성이 있는 과학자라면 “나의 x대 조상은 원숭이이고 y대 조상은 아메바이다. 그러니 인간도 동물과 동일한 진화선상에 있는 생물일 뿐이기 때문에, 아무런 도덕적 책임도 없고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ㅋㅋㅋ”라고 대놓고 이러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서 공부도 안 하고서, 진화론자들이 하지도 않는 주장을 지어내서는 “이런 황당한 걸 믿느니 차라리 신의 창조를 믿고 말겠다. 진화론자 비엉~신!” 이렇게 깐다고 그들을 굉장히 싫어한다. 가령, “진화론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유물론, 나치즘, 공산주의, 인종 우생학 같은 악한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같은 태클. -_-;;;

본인도 다윈이 딱히 골수 개독안티였다거나, 인종 차별주의자, 유물론자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윈이나 여타 이성적인(?) 과학자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진화론은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하는 데 본이 아니게 오· 남용되었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보기에 사실이다.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인류가 지금처럼 인권 따지기 시작한 지는 정말 얼마 안 됐다. 그 옛날엔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것도 과학적(?)으로 입증된 마당에, 루저들은 진화가 덜 된 종자이기 때문에 마음대로 노예로 부려먹고 죽여도 된다” 같은 사상은 너무나 잘 퍼져나갔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게 세속 과학이 말하는 관찰 결과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더라도 말이다.

“아메바보다도 멍청한 놈”이라는 욕설 역시 누가 뭐래도 진화론에서 유래된 상징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학원물인 <구타교실>(소설)에도 나오고 <말죽거리 잔혹사>(영화)에도 나온다.
평범한 들짐승이나 가축이 하는 짓이 띨띨하면 거기서 욕설이 유래될 수도 있겠지만, 아메바는 도대체 뭐냔 말이다.

진화론자들은 창조론자가 창조론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만치 진화론을 신봉하지도 물론 않는다. 그들에게 진화론이란, 단지 현존 생물들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으로 현재 정설로 여겨지고 있는 이론일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나온 시나리오들이 잘 알다시피 성경에 나오는 6일 창조 메카니즘과 정면으로 충돌하다 보니 끙..;;

서로 사이가 심하게 안 좋다. 서로 조작되고 잘못된 자료나 기록을 아직도 써먹는다고 상대방을 헐뜯는다(필트다운 인, 베이직 원인 vs 공룡과 인간 발자국 등).
창조론 진영에서는 어차피 진화론도 재연 가능하지 않으니 과학이 전혀 아니라고 지적하지만, 진화론에서는 창조론과 자신이 동일선상에서 취급받는 것 자체를 수치스러워한다.

창조론에서는 진화론 진영에서 창조의 과학적 증거를 고의로 외면하고 인정 안 한다고 주장하지만, 진화론 진영에서는 창조 과학을 과학계의 환단고기 급으로 완전히 사이비 취급하는 중이다. 이는 기독교에 반감을 지닌 학자일수록 더욱 심하며, 게다가 가재와 게 사이어야 할 크리스천 중에도 창조 과학회를 싫어하는 사람이 꽤 된다는 것은 심각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진화론자의 주장에 따르면, 무슨 조건에서는 종과 종을 넘나드는 대진화도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창조론자가 진화론을 반박할 때 자주 써먹는 엔트로피 법칙도 생물의 진화에다 적용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받아친다.
더 나아가 현대의 진화론이 주장하는 건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게 아니라, 인간과 짐승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도 좀 말장난 같은 게, 그럼 인간의 조상이 원숭이가 아니라면 진짜로 아메바이기라도 하냐는 것이다.

엔젤하이로 위키에는 “자잘한 발달 없이 갑자기 만들어진 복잡한 기관이 존재하는 것이 증명되거나 (...) 한다면 현대의 진화론은 붕괴하겠지만 창조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필사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발견된 일이 한 번도 없다”라고 적혀 있는데... 반대로 창조론 진영에서는 진화론자들의 필사적인 연구에도 불구하고 중간 화석 따위는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반대편을 까잖아? ㄲㄲㄲ

또한 본인은 창조 과학회 글에서 다윈이 동물의 눈이 어떻게 갑자기 만들어졌을까 엄청 고민했다는 자료를 접한 적이 있다. 눈은 잘 알다시피 굉장히 정교하고 복잡한 기관이며, 진화를 통해서 서서히는 만들어질 수 없다고 말이다. 어쨌든 창조론자나 진화론자나 상대방 진영에 대해서 잘 모르기는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 ㅋㅋㅋ

※ 천동설과 지동설

생명 기원 문제 얘기를 하다 말고, 잠깐 다른 얘기.
성경은 인간 중심일 뿐만 아니라 지극히 지구 중심이기도 하다. 사실은 유전자 조작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도전하는 것만큼이나 우주 개발도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대한 도전이다. 단, 도전이 다 반역이라는 뜻은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길.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다. 크리스천 과학자라고 해서 게놈 프로젝트 연구 따윈 때려치거나 우주 개발 계획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단지, 하더라도 조심해서 해야 한다.

성경의 창세기에는 하나님이 해와 달이라는 두 광체를 만들어서 전자는 낮을, 후자는 밤을 주관하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두 광체라는 해와 달이 실제로는 크기와 위상 면에서 서로 가히 넘사벽급의 차이가 있다. 그게 바로 성경의 진술 방식이다. 선언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코드를 절차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복잡한 알고리즘 구현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성경의 묘사만 읽고서 지동설 사고방식을 생각해 내기란 매우 어렵다. 뭐, 이사야서에 지구가 둥글다는(circle of the earth) 표현이 나오고 욥기에 지구가 우주 공간에 매달려 있다는 진술이 있다는 argument까지는 있으나, 이 역시 문맥이 좀 모호하고 어거지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의 관심사는 인간의 그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러니 성경책이 과학책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성경이 어쩌다 과학적 사실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건 당연히 과학적으로 일치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모든 과학 법칙을 만들었으며, 성경은 그분의 절대무오한 말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경에는 당대 사람들이 모르던 과학적 사실을 언급하고, 여타 신화나 설화와는 차원이 다르게 정확하게 진술한 부분도 여럿 존재한다. 이런 건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오늘날 창조론으로도 모자라서 천동설까지 믿는다고 하면 제대로 미친놈 취급받을지도 모르겠다. 천문 현상 중에 천동설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게 있으며, 또 잘 알다시피 갈릴레이 갈릴레오 종교 재판이 기독교계에 가히 평생까임권 급의 병크로 남아서 말이다. 그런데 여호수아기에 있는 태양 정지 사건이라든가, 정지로도 모자라서 아예 역주행까지 한 히스기야 왕 사건은 반대로 지동설 패러다임으로는 꽤 설명하기 힘들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돌던 지구가 갑자기 자전을 멈추면 관성 때문에 지표면에 무슨 일이 벌어질까?
(참고로, NASA에서 태양계 시뮬레이션을 하다가 이 시간을 찾아냈다고 하는 건 구라로 판명됐고. ㄲㄲㄲㄲㄲㄲ)

솔직히 천동설이냐 지동설이냐는, 창조냐 진화냐만치 사람의 가치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건 아니고 영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이긴 하다. 하나님이 특별히 배려를 해서 지동설로도 히스기야와 여호수아의 기적을 안전하게 구현했을 거라고 믿어 버리면 또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태양계의 우두머리인 태양도 뭔가를 돌고 있고 우리은하도 돌고 있고 세상에 절대적으로 멈춰 있는 기준이 뭔지도 모를 마당에, 사실 절대적으로 멈춰 있는 건 지구뿐이라고 누군가 단정지어 버린다면...? 거기까지는 내가 결론을 못 내리겠다.

아무리 아담의 생물학적 나이가 n년짜리 성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너도 낚였음. 저 아담은 10분 전에 내가 성인으로 창조한 거임” 해 버리면 끝이다. 천동설· 지동설 문제도 그런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 맺는 말

본인은 절대자의 지적 설계를 믿으며, 무생물로부터 생물이 저절로 발생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그건 파스퇴르가 이미 150년 남짓 전에 입증한 사실이기도 하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인간이 무생물· 아메바· 원숭이로부터 진화했다는 말만큼이나(기원), 인간이 죽어서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거나 환생· 윤회한다는 말도(내세) 참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매우 해치는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고 나면 이 세상을 완전히 떠나 버리고, 자기의 믿음과 행위에 따라 심판을 받아 하늘 아니면 지옥으로 딱 깔끔하게 떨어진다. 연옥 같은 것도 없다. 예수 믿고 나니까 무수한 거짓된 고인 드립-_-과 미신들, 소위 귀신 이야기 같은 것들에 관심이 안 가게 되어 정신 건강상으로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부활에 대한 소망이 생긴 것은 보너스이다. (예수쟁이들은 부모 제사도 안 지내는 호로자식이 아니라, 살아 계신 부모님을 공경하고 제사로부터 해방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심증을 과학이 말하는 물증으로 입증하기란 쉬운 일만은 아닐 수도 있으며, 그게 꼭 가능해야 할 필요도 없다. 본인은 기본적으로 창조 과학회의 노선을 지지하고 거기서 말하는 지식을 수용하지만, 그렇다고 다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또한 그들이 세속 과학계로부터 안 먹어도 될 욕을 필요 이상으로 먹고 좀 뻘짓을 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걸지도..;;

Posted by 사무엘

2011/03/29 09:43 2011/03/29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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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와 진화 -- 上

준비 운동: Vancouver Film school에서 제작하여 인기를 모은 창조 진화 대조 UCC The Duelity (2007) ㄲㄲㄲㄲㄲ GOD의 이니셜이 정말 센스 작렬;;


※ 인간의 독특한 면모 1

인간이 짐승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인간이 언뜻 보기에 생물학적으로 짐승과 굉장히 비슷한 점이 많다는 건 심지어 성경도 인정하는 바이다. (전 3:18-20) 물론 인간과 짐승이 완전히 같은 건 아니어서 최근 우리나라에 극심한 피해를 안긴 구제역이 인간에게는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으며, 반대로 동물에게 흔히 존재하는(=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풍토병이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병원균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걸 보면 신기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것뿐이라면 그럼 인간은 그저 숨만 쉬고 똥 만드는 기계요, 털 적고 지능 약간 더 뛰어난 원숭이 업그레이드 버전에 불과한 것일까? ㄲㄲㄲ

진화론의 관점에 따르면 인간도 여타 동물과 별 차이 없이 진화 중인 생명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경에 입각한 창조론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격체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유인원과 인간이 무슨 생물학적 특성이 많이 일치하는 것은, 이들이 동일한 설계자(designer)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암시할 뿐 공통의 조상(ancestor)으로부터 진화했다는 걸 증명하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 보면, 이 끝없이 넓은 우주 공간에 인간, 아니 생명 자체가 겨우 지구에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대단히 괴상한 일이다. 하필 지구에서 달과 태양의 겉보기 크기가 일치하는 것, 그리고 달은 공전 주기와 자전 주기가 딱 일치하는 것만큼이나 이건 너무 어색하고 뭔가 인위적인 조작이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반기독교 진영에 있는 과학자일수록 외계 생명 찾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것은 필연이라 하겠다. 생명이 진화의 산물이라면, 그 진화가 그 넓고 넓은 우주의 많고 많은 행성들 중에서 굳이 지구에서만 일어나란 법은 '절대' 없기 때문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라엘리안 무브먼트 정도까지 가면 어지간한 불신자라도 싸이코 취급하면서 멀리하겠지만.

인간은 그 어떤 짐승에게도 없는 후천성 언어 구사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말을 할 수 있다. 어린 아기가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그 원리가 제대로 규명되어 있지 못할 정도로 신비로운 현상이다. 그리고 인간은 불을 다룰 줄 알며 이 역시 그 어떤 짐승도 갖고 있지 못한 능력이다.

'호모 사피언스'처럼 인간을 나타내는 학명(?)들은 인간만이 지닌 이런 특성들로부터 유래된 게 많다. 단순히 단체 생활을 하는 동물이야 인간 말고도 포유류나 곤충 중에 많고, 개미는 심지어 집단끼리 전쟁까지 벌이고 포로와 전리품 노획까지 할 줄 안다. 동성애나 심지어 자살을 할 줄 아는 동물도 있다고 하던가? 그건 모르겠다.

※ 인간의 독특한 면모 2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튜링 완전성을 갖춘 컴퓨터가 인간이 만든 여타 기계들과 다른 점하고도 비슷한 점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로지 본능대로밖에 움직일 줄 모르는 짐승과는 달리, 인간은 학습에 의해서 가히 무한대에 가까운 후천적인 지식과 기술· 사상을 습득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인간은 각자 넘사벽 급으로 다른 양상의 인생을 살 수 있다. 컴퓨터 역시 프로그래밍을 통해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무한한 가짓수의 창의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타 전자 기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던가.

물론 사람과 컴퓨터 사이에도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는 건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이걸 속 시원히 설명하기 위해서는 좀 영적인, 종교적인 용어가 동원되어야겠다. 인간에게는 오늘날의 컴퓨터가 결코 흉내 내지 못하는 자유 의지가 있다. 디지털 컴퓨터가 겨우 0과 1밖에 분별을 못 하는 것과는 달리, 인간은 창세기 앞부분에 나와 있듯이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고 자기 행동에 대해 도덕적인 책임을 질 줄 안다.

성경에 따르면 오로지 인간만이 하늘(천당)이나 지옥 같은 내세가 존재하고 사후 심판이 존재한다. 인간만이 혼이 불멸이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오로지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그 반면, 짐승은 죽으면 그걸로 소멸하고 완전히 끝이기 때문에 하늘나라에서 볼 수가 없다. 지옥에 안 가는 것만큼이나 하늘에도 안 간다. 그러니 애완동물에 너무 애착을 가질 필요가 없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혼의 멸절 교리는 실은 동물에게나 적용된다. -_-

최근에 잘 알다시피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교육비에 답이 안 보이고, 또 요즘은 남녀 모두 예전처럼 오로지 가정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지도 않는다.
가히 암울한 현실이긴 하지만, 이거 하나는 알 필요가 있다. 죽어서 돈이나 다른 재산은 못 가져가도, 하늘에서까지 영원히 같이 남는 건 육신의 자식뿐이라는 것이다. 물론, 아주 어렸을 때 죽었거나 최소한 구원받은 자식에 한해서이겠지만. 이걸 감안하면 결혼과 출산이 세상의 불신자들이 말하는 것만치 어리석은 행동만으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 사람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

자, 본인은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해서, 동물 내지 컴퓨터를 대조군으로 제시하면서 짧지 않게 설명했다.
여러분도 곰곰이 생각해 보기 바란다. 저렇게도 인간만을 정말 너무나 유별나고 독특한 영적 존재로 취급하는 성경에 진화론 사고방식이 들어갈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을까? -_- 최소한 창조면 창조, 진화면 진화 이렇게 둘 중 하나이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같은 유인원도 다 하나님이 만들었고 진화가 창조 메카니즘의 일부라는 소위 유신론적 진화론이 과연 성립 가능하겠는가?

본인은 크리스천으로서 분명히 창조론자이다. 그러나 이 글의 집필 의도는 찌질하게 화석이 어떻고 무슨 연대기 측정이 어떻고 하면서 싸우는 게 아니다. 서로 상대방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왜 창조와 진화 논쟁이 영원히 평행선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지 문제의 본질부터 좀 보라는 것이다.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 학교에서 다루는 과목으로 흔히 생물학이나 지구과학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넓게 보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는 천문학하고도 연결이 되고, 국사에서도 본격적으로 고조선으로 들어가기 전에 아주 잠깐 유인원 내지 선사시대가 다뤄진다. 세속 역사에서는 인류가 불을 다루고 농사를 짓고 바퀴를 발명하고 문자를 만들고 화폐를 발명한 게 아주 대단한 업적이고 인류 역사에서의 대전환이라고 소개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가? 그딴 것 없다. -_-;; 바퀴나 문자는 모르겠지만, 불을 다루고 농사를 짓는 건 아예 최초의 인간인 아담부터가 당장 바로 할 줄 알았던 일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런 건, 자기 피조물인 인간의 지능을 감안했을 때, 아주 금방 자연스럽게 알아내고 습득하고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에 전~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에게 애초에 야만적인 선사시대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오히려 고대인들은 현대인보다 더 지능이 뛰어났으며, 자동차· 컴퓨터· 인터넷의 힘을 빌지 않고도 정교한 기계와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냈다. 물론 자동차나 컴퓨터 자체는 지식과 기술 자체만으로는 결코 만들 수 없는 물건이니 논외로 하더라도.

인간의 관점에서는 인류가 이뤄 낸 산업 혁명, 컴퓨터의 발명, 비행기의 발명, 달 착륙, 인터넷, 스마트폰, 정보화 혁명 같은 게 대단한 변화이지만 하나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그런 건 말세 이전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질 트렌드에 불과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 이후 하나님이 인류의 역사에서 관심을 갖고 계신 건 교회사이며, 당대의 교회의 보편적인 상태이다. (거기에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이스라엘.) 온갖 핍박에도 꿋꿋이 버티던 교회가 오늘날처럼 극도로 변질되고 막장으로 치달은 때야말로 세상이 끝날 때가 임박한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한다면 창조와 진화 논쟁을 접근하는 방식도 바뀌게 된다. 크기가 무려 200억 광년에 달한다는 온 우주를 만들고 인간과 생물의 그 복잡하고 정교한 DNA를 일일이 다 설계했을 하나님께서 왜 오로지 지구에만 초점을 맞췄을까? 그리고 보잘것없는 성막 하나에, 성전 하나에 왜 그리도 많은 관심과 성경 지면을 할애하여 시시콜콜 자세한 묘사를 해 놓았을까? 이러니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은, 당장 이해가 안 가더라도, 자기의 사고방식을 하나님의 관심사에다 맞추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창조와 진화 얘기를 계속 진행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1/03/27 08:49 2011/03/27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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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 이 글에는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이 있으므로 주의하기 바란다.

사람이 죽은 지

2-3일 경과: 복부가 얼룩덜룩해지고, 체내 가스 때문에 부풀기 시작한다.
3-4일 경과: 얼룩이 온몸으로 퍼지고 정맥의 색이 더욱 더러워진다. 혈액은 부패가 굉장히 빠른 물질이며, 사실 시체 부패의 핵심 촉매제나 다름없다. 성경에 따르면, 그리고 상식적으로도 이미 심한 악취가 나기 시작한다.
5-6일 경과: 몸이 계속 부풀고(몸 내부를 분해하는 박테리아가 만들어 낸 가스 때문), 피부는 우둘투둘 물집투성이가 된다.
2주 경과: 복부의 팽창이 최고조에 달함.
3주 경과: 몸 조직이 유들유들해진다. 장기라든가 신체의 구멍 부위(눈, 귀, 콧구멍 등)는 모조리 망가지고 형체를 잃는다(without form!). 손발톱도 떨어져 나간다.
4주 경과: 부드러운 조직은 다 녹아서 액체처럼 된다. 시체의 신원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게 된다.

http://en.wikipedia.org/wiki/Putrefaction 참고

사람이 죽고 나면 신체는 곧 자가분해(autolysis)가 시작된다. 장의사가 시신을 염습할 때 고인의 눈, 귀, 콧구멍 따위를 막는 이유는, 이로 인해 생긴 지저분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그 후 신체는 모든 부패 과정이 그렇듯이 가스 때문에 부풀어오르고, 이내 시커멓게 썩어 간다. 뇌, 허파 같은 장기가 가장 빠르게 분해되며 액체로 줄줄 녹아 내리는 수준이라고 한다. 근육은 박테리아가 먹어 치운다. 결국 그나마 가장 오랫동안 남아서 버티는 것은 뼈뿐이다.

시체가 썩는 모습을 직접 볼 일은 잘 없지만 본인은 그래도 시커먼 얼룩이 진 모습은 미라 사진을 본 것도 있고 해서 대충 상상이 된다. 하지만 부풀어오른 모습까지는 그다지.. =_=
자,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말하는 구절들을 복습해 보자.

...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창 3:19)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롬 5:12)
화 있을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이여! 이는 너희가 마치 회칠한 돌무덤 같기 때문이니 그 겉은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나 그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부정한 것으로 가득하도다. (마 23:27)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니 (요 11:25-26)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매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그가 죽은 지 나흘이 되었으므로 지금은 냄새가 나나이다, 하니 (요 11:39)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외치시니 죽은 자가 수의로 손발이 묶인 채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으로 싸였더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를 풀어 주어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요 11:43-44)
에스겔서 37:1-10 메마른 뼈들이 소생하는 장면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시되, 너 어리석은 자여, 이 밤에 네 혼을 요구하리니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눅 12:20)
너는 내일을 자랑하지 말라. 이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네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잠 27:1)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수증기니라. (약 4:14)


이 세상에서 아무리 돈, 권력을 한데 거머쥐고 안하무인으로 떵떵거리고 살았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노화와 죽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김 일성도 죽었고, 성인 군자들도 다 죽었으며 자칭 하나님이라고 떠들던 이단 교주들도 어김없이 죽었다.

그래서 그들은 죽은 뒤에도 추한 모습을 안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썼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인위로 시체를 방부 처리하여 원형 보존하는 것은, 오늘날의 과학 기술로도 대단히 어렵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에 속한다.

미라 하면 이집트가 유명하고 영화로도 더욱 유명세를 탔다. 성경에서 죽은 후 미라화됐다고(embalm) 기록된 인물도 창세기 말미의 야곱과 요셉 이렇게 딱 둘이라는 게 흥미롭다. 하지만 그래 봤자 지금은 잘 알다시피 완전 말라 비틀어지고 쪼글쪼글한 징그러운 형상밖에 안 남아 있다.

지금 지구상에서 냉동 창고에 안 들어가고 나름 상온에서 그렇게 상당히 원형에 근접하게 미라로 보존되어 있는 시체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극소수이며 다 김 일성, 스탈린 같은 공산주의 독재 정치가들뿐이다. -_-;;

알려진 김 일성의 사체보존 방법은 ▲사체를 발삼향의 액체가 담긴 수조에 넣고, 그 향액을 삼투압을 이용하여 피부로 삼투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뇌와 안구, 내장 등은 빼내고 젤 상태의 발삼액을 사체 내에 채워 넣은 다음 ▲생체의 수분량과 같은 약 80%의 발삼향액을 사체에 넣고, 피부가 건조되도록 몇 시간 공기에 노출시키고 ▲발삼향액이 새어나오지 않도록 노출부분을 미라처럼 가죽 포대로 감는작업을 하고 ▲얼굴에 화장을 하고, 새 옷을 입히면 보존처리가 완성된다.
사후 보존에도 매우 신경을 써야하는데 주 2회 관(棺)에서 꺼내 방부제를 얼굴과 손 등의 노출부위에 발라주어야 하며 2~3년에 한번은 발삼향액 수조에 한 달 가량 담궈두어야 시신을 보존할 수 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시체 보존에 들어가는 비용 또한 막대한 액수다.
1995년 7월 7일 러시아의 모스크바 뉴스는 “러시아인 기술자 7인에 의하여 (김 일성의)사체보존작업이 완료됐다”며 “100만 달러가 소요되었지만 이후에도 막대한 비용이 든다”고 보도했다.
또한 1996년 7월 북한을 방문한 인도네시아 골카당 대표단은 조선 로동당 간부로부터 “김 일성의 사체관리를 위해 연간 80만 달러가 든다”는 설명을 듣기도 했다.


시체를 보존하는 방법으로는 방부제를 사용하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김 성모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ㄲㄲㄲㄲㄲ
도대체 저 미친 인간말종 또라이는 죽어서까지도 산 사람들을 어쩜 이리도 피곤하게 하고 폐 끼치는지 모르겠다. ㅡ.ㅡ;;
저런 돈지랄 할 여력으로 쌀을 사 먹였으면 북한 주민들을 안 굶기고 얼마나 많이 살렸겠는가? (황 장엽 씨의 증언)

유리관 속에 썩지도 않게 고이 모셔져 있는 장군님의 시신 vs 아사 내지 익사하여 아무렇게 나뒹굴고 있는 북한 주민 시신.. (혐짤주의)

more..


그와는 반대로 본인은 예수님을 통해, 저런 헛짓 따위 전혀 안 하고도 이 죽음을 간단하게 극복했다는 사실이 더욱 뿌듯하고 고맙고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독자 여러분은 죽은 뒤에 어떻게 될지 대비가 되어 있으신지?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기 때문이라. (빌 1:21)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주께서 승리로 사망을 삼키시리라,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4,55. 사실 50-57 전체.. ㅜㅜ)

아멘.

Posted by 사무엘

2011/03/21 08:17 2011/03/2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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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2011년이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이하 KJV)을 최종 권위로 믿는 진영에서는 요즘 무척 들떠 있다.
올해가 그 성경이 출간된 지 만 400주년이 되기 때문이다. (1611년) 날짜로는 5월 2일이라 함.
KJV 신자들에게 1611은 아주 유명한 숫자이지만, 연도 이하의 정확한 날짜는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 날짜에 맞춰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도 400주년 기념판(5th edition)을 내려고 한창 작업 중이다.

본인에게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한 믿음이 생긴 건 2002년 무렵이다.
그 전에도 킹 제임스인지 흠정역인지 하는 고어체 성경이 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으나, “개역성경의 영문판 정도 되는 성경이겠지” 정도로 치부할 뿐이었다.
개역성경이 “하시니라, 가라사대” 같은 말투가 있듯이 영어에도 “thou, thee, ye”가 나오는 성경이 있다는 맥락. ㄲㄲㄲㄲㄲ
또한, 마치 손실 압축인 JPG 방식으로 그림을 계속 고치고 저장하면 할수록 그림의 화질이 떨어지듯이, 성경도 여느 고문서와 마찬가지로 세월이 흐르면서 내용의 일부가 소실되어 '없음'이 생긴 줄 알았다. 진짜다.

그랬는데.. 성경 이슈에 대해 알게 되면서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듯 엄청나게 충격적인 지식과 정보가 쏟아져 들어왔고, 이것들은 본인의 내면 속에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기독교 신앙의 고유 진동수에 딱 맞춰 나를 격렬히 진동시키고 말았다. 타코마 다리가 들썩들썩하다 와르르 무너지듯, 나의 기존 통념도 와르르...;;

사연을 다 설명하자면 복잡하다만..
내가 KJV 빌리버가 된 주 이유 중 하나는... KJV 반대자 내지 현대 역본 옹호자들의 논리랄까 사고방식이, 어쩜 저렇게 불신자 기독교 안티들의 그것과 똑같을까 그 이중적인 모습에 충격 받고 분노해서였다.

나는 나보다 성경을 많이 아는 목사, 신학자가 마땅히 내 신앙을 방어해 주는 사람인줄로 알고 있었다.
걔네들은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사람이다. 살인· 간음을 저질러서 지옥 가는 게 아니라 예수 안 믿어서 지옥 간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개독안티가 성경을 헐뜯고 “토끼는 되새김질을 안 하는데 성경이 잘못됐다, 뭐가 모순이다”라고 시비를 걸면, 반대편 진영에 선 사람들은 “토끼는 되새김질을 하는 게 맞다. 이거는 네가 성경을 문맥을 무시하고 당시 사정을 감안 안 하고 삐딱하게 잘못 읽어서 그런 거다 ... 어쨌든 결론은 성경은 일점일획도 손실이 없이 절대무오하고 자체 모순이 없다.” 그렇게 대응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이치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 팔아서 돈과 명성을 얻는다는 사람이, 자기들부터가 그 신앙의 근간인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돼 있지 않다고 하고, 세상에 무오류한 성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문자적인 성경 해석을 방어해도 시원찮을 판에 같이 앉아서 헐뜯고 있으니...! 그럼 그는 그런 하나님 파는 짓은 중단하고 자기 양심껏 목사질 때려치우고 안티 진영으로 가야지 왜 거기에 들러앉아 있는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독교에 대한 물리적인 박해보다도, 성경을 조롱하는 안티들의 집요한 독설보다도 훨씬 더 무섭고 치명적인 것은
기독교가 아닌 것이 기독교로 둔갑하여 악화가 양화를 몰아내는 현상이었다!

성경이 완벽하지 못하니까 그 완벽하지 못한 부분은 나의 해석이, 히브리/그리스어 사전이, 신학이, 교회 전통이 보완하겠다는 소리로 들려서 본인, 매우 심히 불쾌했다. 내가 아무리 멍청하더라도 그런 의도를 파악할 눈치 정도는 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내 신앙은 내가 지켜야겠다는 '신앙 자주국방론'(?)이 대두되었고, 작정하고 성경을 읽고 독학했다.

내 지론은 언제나 “안티는 안티답게, 신자는 신자답게”이다. 어느 것이든 모 아니면 도로 색깔과 노선만 분명하다면, 본인과 다른 신앙의 소유자라 해도 이 글 읽고서 기분 나쁘거나 불쾌해할 사람은 전혀 없을 것이다.

이런저런 사색과 공부의 결과로 본인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대안이 바른 성경에 있으며, 그 대안의 실체가 바로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당신이 읽고 있는 멀쩡해 보이는 성경이 실은 13구절이 삭제되고 6만 개나 되는 단어가 변개돼 있습니다”라고 그러면, 언뜻 보기엔 거의 “2011년 안으로 북괴 김 정일은 남침합니다” 수준의 미친 개소리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그건 무슨 루머나 음모론도 아니고 정말로 객관적인 사실인걸.

세상에, 삭제된 게 맞고, 킹 제임스 성경의 구절이 나중에 추가된 거라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막 9:44,48; 행 8:37 등등)
불순분자가 삭제한 게 아니라? 도대체 '어떤 사본'은 도대체 무슨 사본을 말하는 걸까?

본인은 히브리어· 그리스어 따위는 전혀 모르고, 신학을 공부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그런 것과는 인연이 거의 없는 인생을 살 것이다. 그래도 킹 제임스 성경을 최종 권위로 믿는다.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게 아니다. KJV 유일주의가 신앙면에서 건전하고 내 믿음을 세워 주고 안티들의 공격을 반박하는 사고방식이라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헛점(?)을 물고 늘어지는 안티들의 공격이 얼마나 집요하고 맹렬한지 본인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성경은 뜻만 통하면 되지 역본들이 다 같은 내용이라는 주장에는 도저히 공감할 수 없었다. (저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다!) 차라리 KJV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NIV가 절대무오한 하나님의 최종 권위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쓰신 선한 간증이 있는 성경이라는 식의 논리라도 폈다면 나는 응당 NIV 맨이 됐을 것이다.
최소한 예수쟁이 행세하고 성경 말씀에 꺼뻑 죽으려면 저렇게 하는 게 정상이다. 사실, KJV 진영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다혈질 골수이고, 모 아니면 도 노선이다.

본인 주변의 모 목사님은 왕년의 유학 시절에 KJV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이거 자료 찾고 번역만 하다가 문학 박사 과정 졸업을 포기하고 수료만 하고 돌아왔으며,
다른 모 목사님은 부와 명예가 보장된 전문직 종사자이면서 사재를 탈탈 털어서 그것도 욕 얻어먹고 오해 사면서까지 10년째 성경 번역에 매달리고 계시기도 하다. 한국에 이런 올바른 성경을 번역해서 알리지 않으면, 내 양심상 배기질 못하겠다고...;; 이런 분들에 비하면 난 그렇게 강경한 것도, 골수도 아니다.

본인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유명한 곳으로 '말씀 보존 학회'(말보회)라는 단체가 있다. 본인은 그곳과는 아무 개인적인 인연이 없다. 저곳은 한때 극렬 전투종족으로 기존 개신교로부터도 이단 판정을 받을 정도로 악명을 떨쳤었는데, 걔네들이 비록 간증을 잃을 잘못된 행동을 하긴 했으나, 본인은 심정적으로 그들에게 공감은 한다. 얼마나 답답하고 기성 교회에 대해 실망했으면!

내가 만약 말보회를 통해서 KJV를 접했다면, 아마 말보회 내부에서 만렙-_- 불화살 워리어가 됐을 것이다. ㅋㅋㅋㅋㅋ 지금보다 한 100배는 더 과격한 글 쓰면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 주필 논객이라든가 거기 신학원 강사 등으로 한 자리 차지했을지도 모를 듯.
본인의 성깔을 아는 교회 사람 중에는, “용묵 형제가 말보회를 거치지 않고 KJV를 알게 된 건 정말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KJV 유일주의를 주장하면 대체로 “그래도 원어 성경이 더 낫지 않습니까? KJV 이후에도 더 나은 필사본이 발견되지 않았을까요?” 라는 반응이 돌아온다. 하도 많이 들었다만... 뭐, 자연스러운 질문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최초의 성경 자필 원본은 오늘날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필사본만이 전해지며, 그 필사본들이 오늘날의 성경처럼 완전한 66권 합본으로 전해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이 필사본이 전체 중 어느 조각에 속하는지, 그리고 의미가 그토록 다양하게 변하는 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의 의미를 단정적으로 이거라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다시 말해, KJV와 동급으로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는, '원어 성경'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이다. 둘의 비교는 무의미하다.
그러니,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KJV가 하는 역할이 자기 밥줄을 뺏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KJV를 배척하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KJV는 변개되지 않은 바른 원문에서 바르게 번역되었고, 바르게 집대성(compile)되었다. 따라서 바른 히브리/그리스 원어 성경이라면 KJV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전통적인 고문헌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수되어 왔다. 다른 고대 문헌들은 가장 오래 된 게 원본에 가장 가까울 확률이 높겠지만 성경은 끊임없이 필사되고 사람들에게 수시로 읽히고, 그러다 닳아 없어지길 되풀이했다. 회전률이 높다는 뜻. 그렇기 때문에 많은 필사본이 존재하고 이들이 서로 일치하면 그게 곧 맞는 본문이다. (쉽죠?) 하나님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성경을 보존해 놓으셨다.

그 반면, 극소수 골동품처럼 전해내려져 온 튀는 필사본은 애초에 진작부터 버려진 가짜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마치 유다복음이라든가, 사악한 성경--'간음하지 말라'에서 not이 실수로 삭제된..;;;-- 같은 것들 말이다.

그나저나, KJV 번역을 지시한 제임스 왕은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난 세속 역사를 통해 알고 있던 건

  • 엘리자베스 여왕 다음으로 즉위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 하지만 선왕보다는 그리 훌륭하지 못했다는 평판을 받음
  • 왕권신수설을 내세웠고, 좀 독재자 스타일로 의회와의 대립이 심했던 듯?
  • 월트 디즈니의 만화영화 <포카혼타스>에 나오는 제임스타운의 어원이 된 사람. (포카혼타스는 설정상 배경이 1607년이다. KJV가 한창 번역되고 있던 시절이다.)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왕의 신분으로서 국민을 위해서 국비로 성경을 번역하라고 했을 정도이니, 제임스 1세 왕은 거의 영국의 세종대왕 급이다.
“나랏말씀이 라틴어와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무지몽매한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여도 마침내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더라. 내 이를 가련히 여겨 새로 성경 역본을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읽어 구원받고 영적으로 자라게 할 따름이니라.” 정도..;;

그 외에 더 알고 싶은 정보가 있으면 아래 사이트를 참고하자.
http://jesus-is-lord.com/kinginde.htm

물론 저 사이트의 운영자는 KJV 지지자로, 제임스 왕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사실들을 나열하면서 그가 아주 훌륭한 왕이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담배를 지독하게 싫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경 번역 작업에 앙심을 품은 교황청 세력에 의해 암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gunpowder 사건)
KJV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제임스 왕에 대해서도 굉장히 치졸하게 헐뜯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하고 싸우기 위해서는 영국 역사를 좀 공부해 놓는 것도 좋다.

킹 제임스 성경 이전에도 여러 성경 역본이 존재해 왔으나, 이 KJV만이 20세기 초까지 독자적으로 쓰이면서 전세계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고, 수많은 혼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켰다.
KJV는 400년 전에 출간된 후, 인쇄 오류를 바로잡고 개정된 영어 철자법대로 표기를 고치는... 몇 차례 edition이 나왔다. 그래서 1611년 KJV의 1769년도 edition이 오늘날까지 우리가 쓰고 있는 그 정확한 본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한글 개역성경도 번역 후 제정된 한글 맞춤법 통일안대로 새로운 edition이 나온 바 있는데, 바로 이와 같은 차원이다. edition은 코딩으로 치면 재컴파일이나 포팅일 뿐이지, 결코 프로그램의 로직을 바꾸는 revision이 아니었다.

영국에서 이렇게 성경의 절대 기준이 나오고 영어가 나오고 세계 표준시가 나왔다. 그뿐만이 아니라 철도 표준 규격도 여기서 정해졌다. ^^;;;
영국에서는 올해에 KJV 발간 400주년을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될 것이라고 한다. (내년에는 올림픽을 기념하여 콩코드도 다시 먼지 털고 잠시 운항할 거라고 하던데.)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성경을 이단이라고 하고 있고 그 많고 많은 기독교 서점에서 역본 자체를 거의 찾을 수가 없다. 대단히 통탄할 노릇이다.
오늘날 KJV는 영국에서도 듣보잡이 돼 가고 있다. 인도에서 불교를 찾을 수 없고,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예수를 찾을 수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라고나 할까..

아무쪼록 이 글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온전한 보존에 대한 믿음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블로그 말고 이곳 대문에 HTM 문서로 등재되어 있는 <음란한 성경은 가라>, <킬로그램 원기> 같은 본인의 글도 읽어 보시길.

Posted by 사무엘

2011/01/26 08:36 2011/01/2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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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의 모세 이야기 -- 上에서 계속된다.
이 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지식과 더불어 김 성모 화백 명대사에 대한 지식이 동시에 필요함을 밝힌다. ㅋㅋㅋㅋㅋ)

모세가 파라오 앞에서 막대기를 뱀으로 만들고, 물을 피로 만들고 각종 재앙을 행할 때,
“폐하, 저거 다~ 사기입니다. 우리 마술로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라고 훼방을 놓은 이집트 마술사의 실명이, 웬 생뚱맞은 바울 서신에 거론되어 있다. (딤후 3:8) 그러나 이들도 재앙의 레벨이 올라감에 따라 결국은 GG 치고 “이건 마술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입니다.”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자리에 제임스 랜디 같은 마술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_=;; (가짜 초능력자 잡아내는 걸 업으로 삼던 양반.)

보라, 주의 손이 들에 있는 네 가축 곧 말과 나귀와 낙타와 소와 양들에게 임하여 매우 심한 전염병이 있으리라. (출 9:3)

이건 구제역, AI 같은 것들일까...?? 이건 정말 21세기인 오늘날에도 답이 없어서 닥치고 가축들을 매몰 도살 처분하는 수밖에 없는데.
재앙이 하나씩 지날 때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이집트가 거덜날 지경이 되었다.
이건 그야말로 생명과 무생물의 경계를 넘나들고 기상 현상이 마음대로 바뀌는 말 그대로 초자연적인 이적이었다.
경제적으로 손해를 입는 건 둘째치고라도, 이런 재앙을 겪으면서 이집트 국민들은 자기 왕에 대해서, 또 자기들이 믿던 신에 대해서 분명 심각하게 다시 생각을 하게 됐을 것이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모세 자신도 점차 믿음이 생기고 담대해졌다. 성경을 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그는 파라오를 상대로 “아~ 그러셨어요? 님 저한테 지금 협박하는 거예요? 졸라 무섭군요” 같은 식으로 농을 치거나 말을 비꼴 정도로 간이 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는 칠전팔기 불굴의 의지로 모세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파라오는 결코 남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는다. 누가 이기나 보자!” 파라오는 정말로 김 화백이 롤모델로 삼기에 손색이 없을 근성가이였다. 마치 돈을 계속 잃으면서도 도박을 그만두질 못하는 것처럼.

아홉째 재앙은 말 그대로 어둠의 다크에서 죽음의 데스를 느끼는 재앙이었고, -_-;;
결국 마지막 열째 재앙인 모든 장자가 몰살 당하는 재앙으로 인해, 파라오는 자기 맏아들을 잃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 줬다. 앞의 재앙들이 이집트의 각종 동물· 자연 잡신들을 무력화하는 심판이라면, 마지막 재앙은 이집트가 과거에 저지른 이스라엘 유아 학살에 대한 심판이었다.

이 심판에 앞서 하나님은 이집트 탈출을 염두에 두고 유월절을 제정했다. 양을 잡아서 급하게 먹는 건 좋은데 왜 하필 피를 문설주에다 발라 놔야 할까? 아래의 그림에서 보듯,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묻어 있는 가정은 일명 죽음의 천사가 들어가지 않고 휙 돌아서서 열외(passover!)한 반면, 그렇지 않은 집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집트의 왕자>(이하 '이왕')에서 재미있게 묘사되어 있다. 죽음의 천사가 여러 스레드로 갈라져서 길거리 그래프를 DFS 탐색하는 듯하다.

'이왕' OST인 When You Believe가 흘러나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 변덕 한번 심한 파라오는, 군대를 보내서 이들을 죽이거나 도로 잡아 오기로 작정한다.
마침 유대인들이 모인 곳은 하필 막다른 홍해 바닷가였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오병이어만큼이나 불신자들도 다 아는 성경의 그 유명하고 위대한 기적이 행해진다.

홍해 바닷물이 둘로 갈라져서 경부 고속도로가 중앙에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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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출 14:21을 보면, 하나님께서 강한 동풍으로 바닷물을 뒤로 밀어냄으로써 길을 만들었다고 하신다. 동풍이라 함은 동쪽에서 불어오는 방향이다. 동쪽으로 부는 바람이 아니다.
그런데 이집트에서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경로는 서쪽에서 동쪽 방면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바다는 모세가 있는 곳에서부터 바다 건너편으로 쭉 전진을 하면서 폼나게 밀려난 게 아니라...
바다 건너편에서부터 물 밀려나기 시작해 그 흐름이 모세가 있는 쪽으로 왔을 거라는 뜻이다. 이해하시겠는가?

그러므로, 위의 영화 장면도 엄밀히 말하면 고증 오류라는 뜻이 되겠다.. -_-;;;

백성들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홍해를 건넌다.
그런데
http://www.youtube.com/watch?v=6ZjgH0H7DkE&feature=related
의 3:44-46 지점. 낙타가 입 헤 벌리고 '오오욱' 하는 소리가... 둠에서 좀비 몬스터가 죽을 때 나는 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다. ㄲㄲㄲㄲ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해가 갈라져서 생긴 길의 폭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살림 가득 싣고 노약자와 어린이까지 다 싣고 가는 수십, 백수십만 명의 행렬의 진행 속도가 빠를 수가 없을 것이다(창 33:13-14 참고).
이들이 모두 홍해를 건널 때까지 하나님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집트 군대의 진입을 차단하고 시야도 가리고 있어야 했을 것이다. 그 동안 이집트 군대는 근처에서 진을 치고 한없이 기다리다가, 유대인들을 추격하러 멋도 모르고 갈라진 홍해 밑바닥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갈라져 있던 바닷물이 원상복귀되면서 시ㅋ망ㅋ.

이때 파라오 자신도 죽었을까? 아들에 이어 아버지까지??
'이왕'에서는 파라오 혼자 살아남는 설정으로 나오고, 모세는 홍해 건너편에서 “형. 이제 영원히 굿바이.”라고 한 마디 한다.
성경에는 명시적인 언급이 없지만, 출 14의 정황으로 볼 때 파라오도 추격 작전의 선두에 나섰고 그 인원들이 한 명도 남김 없이 몰살당했다고 했으므로, 이집트는 이제 왕까지 잃고 군대도 잃고 국가가 존폐의 위기에 몰렸을지도 모르겠다.

천지창조 이래 전무후무한 기적을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쁨과 자신감으로 용기백배 했다. 정말 얼마나 기뻤겠는가? 출애굽기 15장의 대부분이 그 감격을 못이겨 불러진 찬송시이다. 이 엄청난 소식은 사실 해당 지역 주변의 민족들에게도 퍼져서 흠좀무와 충공깽을 선사했다. (수 2:9-10 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을 통해 홍해를 직접 건너지 않았다면, 이집트 군대의 몰살 같은 다른 수많은 관련 에피소드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란 말인가? 그런데 이걸 무슨 얘네들은 홍해가 아닌 갈대밭을 건넌 거라고 심지어 성경 지도의 출애굽 경로도 영 엉뚱하게 설명해 놓은 책도 있다. 원어상 홍해가 아니라 갈대밭이라고 설명하는 신학자까지 있는 모양인데, 이건 거의 '싫어요'가 두음법칙 상 '좋아요'로 바뀐 개드립 급이다.
믿기 싫으면 자기가 안 믿는 거야 개인 자유이고 내가 절대로 뭐라 안 하는데, 남이 믿는 것에 대해서 엉뚱하게 해석이나 하지 마셈..;;

역사를 보면, 성경 구절을 자기의 이념적인 일에다 영적으로 적용한 사람이 있다. 몇 가지 유명한 예를 소개한다.

A father of the fatherless, and a judge of the widows, is God in his holy habitation. (시 68:5) -- 고아원을 기도만으로 운영한 조지 뮬러
Stand fast therefore in the liberty (...) and be not entangled again with the yoke of bondage. (갈 5:1) -- 평생을 조국 독립을 갈망하고, 광복 후에도 자유 민주주의를 추구한 이 승만
... The just shall live by faith. (롬 1:17 등) -- 종교 개혁자 루터


이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을 영적으로 적용하여 우리나라 개신교의 성시 교독을 보면, 광복절 편에 “내가 주께 노래하리니 그분께서 영화롭게 승리하셨도다. 그분께서 말과 거기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도다.” (출 15:1) 같은 구절이 인용되어 있다. 이집트 군대의 패배를 일제의 패망에다가 비유한 모양이다.

맹렬한 김 정일 안티로 유명한 북한 인권 운동가 남 신우 씨는 “Let my people go”를 아주 즐겨 인용한다. 성경에서는 66권 전체를 통틀어 출애굽기 5장~10장 사이에서밖에 등장하지 않는 문장이다. 그가 사용하는 문맥은 물론 파라오로부터가 아니라 “인간개백정 김 정일로부터 가게 하라”이다.

이 정도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은 상징적인 의미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래봤자 모세를 포함해 홍해를 건넌 이 세대들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고 광야에서 뺑이 치다 다 죽었으니 그저 안습.
아니, 홍해를 건너면서 이제 뭘 해도 하나님 앞에서 꺼뻑 죽을 정도로 자신만만하던 그들도... 겨우 며칠 못 가 광야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놨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게 그만치 연약하고 어떤 면에서는 간사하다.

모세는 120세에 약속의 땅을 몸소 밟지는 못하고, 대신 산에서 내려다보기만 하면서 감격에 찬 채로 쓱~ 쓰러져 죽었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배려하셔서 죽는 순간까지 몸이 노쇠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 아마도 몰래 부활, 승천하지 않았나 추정된다(유 9).

그 위대한 모세가 출애굽 2세대들을 교육하면서 예수님이 오실 것임을 암시하는 의미심장한 예언을 남겼으며(신 18:15),
신약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두 번이나 그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게 바로 예수님이 맞다고 입증했다(행 3:22, 행 7:37).
오늘날의 유대인들은 모세를 그렇게도 추종하면서 정작 예수님을 모른다. 다른 엉뚱한 메시야 기다린다고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지 말고 하루빨리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여야 할 텐데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01/21 15:29 2011/01/21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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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2009년 말에 성경을 7독까지 했다. 그러나 그 후 한동안 개인적인 게으름, 바쁜 스케줄 등의 이유로 인해 성경을 읽지 않고 지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다시 각성하여, 석사 과정에 있는 동안 최소한 한 번은 더 완독해서 8독까지 달성할 계획이다.
성경을 꼬박꼬박 읽다 보면 블로그에도 성경 관련 글을 더욱 자주 쓰게 될 것이다.

최근엔 출애굽기를 읽었는데, 이번 기회에 모세에 대해서 심층 논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또 직업병이 발동하여 장문의 글을 쓰게 됐다. 특별히 성경 본문뿐만이 아니라 유명한 관련 영화인 <이집트의 왕자>(1998. 애니메이션)와 <십계>(1956)도 끼워넣었다.

영한사전을 보면 중학교 수준의 매우 중요한 단어는 별이 세 개, 고등학교 수준은 투스타 이런 식으로 등급이 매겨져 있다. 성경의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중요도 랭크를 매긴다면 모세는 단연 별 세 개짜리일 것임이 틀림없다.

★★★: 불신자들도 상식적으로 다 알고 관용적으로 인용하는 인물. 예수, 마리아, 모세, 아담, 이브, 솔로몬, 베드로, 유다, 아브라함, 다윗, 골리앗
★★: 위보다는 좀 인지도가 떨어지지만 그래도 여전히 유명하고 성경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 여호수아, 바울, 사울, 누가, 요한, 이삭, 이스라엘과 12지파
★: 일단 성경의 책이름에 등장하는 마이너 인물들, 그리고 덜 유명하지만 그래도 성경에서 두 번 이상 언급되는 인물. 요엘, 요나, 호세아, 스가랴, 히스기야, 스바냐. 이세벨, 발람..
(-): 이 정도까지 알면 꽤 '골수'이며, 성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한 사람임. 아히도벨, 아비멜렉, 아사헬, 고라, 데메드리오, 맛디야, 아가보, 나봇 ...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학정으로부터 구한 민족 지도자이며, 하나님과 직통으로 대화하고 그분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온 위대한 대언자이다(신 34:10-12). 골수 유대교 신자들은 '모세' 하면 정말로 꺼뻑 죽는다.

그런데 그런 모세는 그 누구보다도 출생이 위태로웠다. 이집트가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심지어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강제로 죽여 버리던 시절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때는 태아 성감별이라든가 강제 낙태 기술은 없었던 듯-_-;;;
대피라미드는 불가사의가 아니며 강제 노역이나, 외계인(?)의 힘으로 만든 게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집트가 강제 노역으로 거대한 건축 사업을 벌인 것 자체는 사실이다. (출 1:11-14)

이때 모세의 어머니는 3개월째 애를 숨겨서 키웠는데, 나중에 도저히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애엄마는 아이의 최후를 차마 자기 눈으로 못 보겠다며 아기 모세를 바구니에다 넣고 강물에 띄워 보낸다. 누나인 미리암은 바구니가 어디까지 떠내려가나 하염없이 강을 쳐다만 볼 뿐. <이집트의 왕자>(이하 '이왕')가 이 장면을 뮤지컬 형태로 잘 묘사하고 있다.

Brother, you’re safe now
And safe may you stay
For I have a prayer just for you:
Grow baby brother
Come back someday
Come and deliver us too
(자장가의 일부)

그런데 그 모세를 이집트의 공주가 발견했다. “흠. 어느 유대인 가정에서 (우리나라 정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린 애새끼군?” 이렇게 넘길 수도 있었는데 마침 아기가 울음을 터뜨렸다. 공주는 모성애가 발동하고, 아기를 입양하기로 마음먹는다. 이건 에스더기 만만찮게 드라마틱한 스토리이다.

이때 미리암은 “공주님, 혹시 젖 먹일 유모를 찾으세요?”라고 제안했다. 덕분에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자기 친아들의 유모 노릇을 하면서, 국가로부터 삯을 받고 애를 젖을 뗄 떼까지 키웠다. 그 후 애는 국가에 반납. -_-;; .. 이 성경의 스토리이나,

'이왕'에서는 저 장면이 안 나온다, 모세는 그냥 닥치고 바로 왕궁 행이다. 공주도 아니고 왕비가 입양한다.
그러나 '이왕'에서는,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의 자기 정체성 때문에 고민하는 모세의 모습이 더욱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성경에 없는 내용을 나름 각색했다.

모세가 왕궁을 나섰는데 미리암· 아론 남매와 극적으로 마주친다. 미리암은 '앗, 왕자님께서 웬일로 이런 누추한 곳에...' 하다가 수십 년 전 모세의 얼굴을 곧바로 알아보고는 “아, 드디어 네가 커서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러 왔구나!” 하면서 잔뜩 설레발을 친다.

그러나, '이왕'의 설정상 자기 가족 얼굴도 모르는 모세는 “너 미쳤니?”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미리암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나 필사적으로 “넌 지금이라도 알아야 돼. 넌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구! 친어머니가 널 강물에다 띄워 보낸 후 이집트 왕궁으로 입양된 거야! 잘 모르겠으면 아버지 되는 사람에게 물어 봐!” 라고 소리친다.
아론은 그저 데꿀멍 하면서 “왕자님, 제 여동생이 사람을 못 알아보고 헛소리를 하는가 봅니다. 무례를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만 할 뿐.

굉장히 불쾌해진 모세는 미리암 네년을 가만 두지 않을 거라고 엄포를 내리고 돌아선다. 그러나 이때 미리암이 흐느끼면서 부르는 자장가 한 소절이 모세의 옛날 기억을 깨운다.

잠시 후에 나오는 1분 30초 남짓한 벽화 CG 애니메이션은(모세의 악몽) 본인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가히 경이로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정말 인상적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러나 성경은 성경이고 영화는 영화. 성경에서 모세가 정체성 때문에 저렇게 고뇌한 모습을 찾기는 힘들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어렸을 때 유모(=친엄마 ㄲㄲ)에게서 철저하게 정체성과 사상 교육을 받은 채 궁궐로 들어갔으며, 훗날 장성해서는 애국 애족 정신이 충만하여 자발적으로 왕자 자격을 포기하기까지 했다고 나온다. (히 11:24-25; 행 7:23)

모세는 의협심이 너무 충만한 나머지, 동족을 때리는 이집트 노예 감독을 암살해 버렸는데... 정작 동족들은 그 선한 뜻을 못 알아보고 “당신은 우리도 그렇게 죽일 작정이냐?”하고 되물었다. 그렇다. 모세는 배척받은 민족주의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에는 모세에게 민족주의자적인 이념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찾을 수 없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쌍것들 피지배민이라 해도, 사내아이를 죄다 죽여 버리는 건 이집트의 왕자가 보기에도 너무 불쌍하다는 식으로, 꼭 그렇게 해야만 했냐는 그냥 인도적인 차원에서 동정한다. 그가 이집트 노예 감독을 죽이는 것도 계획적인 살인이라기보다는 동작을 단순히 stop 시키려 했는데 과실치사가 발생한 것처럼 묘사된다.

이런 뉘앙스의 차이를 잘 분별하도록 하자. 마치 실존 인물인 최 용신이 얼마나 억세고 강인한 분이었는데, <상록수>의 채 영신은 상사병이나 앓는 식으로 너무 유약하게 그려져 있어서 샘골 학원 당사자들이 심 훈 소설을 싫어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모세는 그렇게 이집트에서 사고를 친 후 광야로 도피한다. 그리고 거기서 양치기 일을 한다. 십보라와 만나서 결혼하는 장면에다 저 정도 각색 애드립을 넣은 건 애교로 봐 줄 만한 수준.
영화 <십계>를 보면, 모세와 관련된 모든 역사 기록이 이집트 왕조 실록에서 말소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가히 이집트의 흑역사가 된 셈이다.

모세가 목자가 되었다는 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그의 신변에 훨씬 더 심각한 변화였다.
양치기는 이집트에서 3D 중의 캐 3D로 취급받는 천한 직종이었다. (창 46:34) 한국으로 치면 백정급? 그런데 이집트의 왕자가 이전의 모든 지위를 잃고 양치기로 전락한 것이다..
양치기는 야곱이 삼촌 라반에게 그 고충을 토로하듯이(창 31:38-40) 정말 힘들고 고달픈 일이지, 절대로 낭만적이고 전원적인 직업이 아니었다.

이집트의 왕자로 40년, 목자로 40년을 산 뒤에야 모세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돌아온다.
성경은 이때 모세의 가정이 귀환하는 도중에 겪었던, 잘 알려지지 않은 깜짝쇼 해프닝에 대해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자기 둘째 아들에게 할례를 안 베풀고 있다가, 여관에서 하나님에게 끔살 당할 뻔한 것이다. (출 4:24-26)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은 이 사건이 기록된 출애굽기 4장 뒷부분을 읽다가 이 에피소드 때문에 어리둥절해하고 깜짝 놀라곤 한다.

시간과 분량 관계상 지금 그 문맥에 대해서 모든 설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대략 이런 상황을 상상하면 된다.

모세: 여보, (켁켁 숨막혀..) 그러게 둘째 아들에게도 (크허헉~) 할례를 해야 된다고 전에 내가 말했잖아! (나 죽겠어..) 그러니 제발 군소리 말고 지금 어서..;; (으윽~)
십보라: ㄲㄲㄲㄲㄲ 어휴 이런 야만적인 짓을 왜 하는지 몰라... (할례를 행하고 아들의 포피를 베어 던지면서) 이제 됐어요? 당신은 참 피비린내나는(bloody) 남편이군요.


십보라의 말은 기가 찬 듯한 비아냥거림에 가깝다. 모 성경 역본처럼 “당신은 피로써 맺어진 나의 달링님이에요” 같은 사랑 고백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성경의 본문으로 미뤄 볼 때, 모세는 이방신의 제사장의 딸인 십보라와 결혼한 후, 저런 할례를 포함하여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가정 불화를 겪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왕'에서 묘사된 것처럼 십보라가 이스라엘 백성하고 같이 홍해를 건너고 미리암과 함께 얼싸안고 기뻐하다가 “Look at your people. They are free!” 같은 멋진 말로 엔딩을 장식했을 가능성은.. 유감스럽지만 대단히 희박하다. 오히려 십보라는 모세를 따라다니는 데 염증을 느끼고, 도로 친정으로 돌아갔다가 출애굽기 18장에서야 다시 등장하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화에서는 모세-십보라 부부가 파라오 앞에 나아가는 장면이 나오지만 이 역시 완벽한 허구이다. 성경에 따르면 오히려 영화에서 믿음을 저버리고 모세에게 야유를 퍼붓는 사람으로 나오는 아론이 모세와 함께했으며, 그가 처음부터 모세의 대변인 노릇을 했다.
모세와 아론은 이집트에 재앙을 퍼붓기에 앞서 먼저 동족들 앞에서 표적을 행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민족을 구하는 임무를 맡았다는 인정을 받았다. “파라오님, 우리 민족 대표가 이집트를 향해 할 말이 있답니다. 잠시 좀 들어 보시죠.”

그러나 모세는 사실 파라오 앞에 서는 걸 극도로 꺼리고 두려워했다. 광야에서 하나님과 대면했을 때도, 자기는 그 일 못 하겠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할 정도로 얼마나 뒤로 내뺐던가? 예전에 이집트에서 사고 친 것도 있고, 또 한때 내 집이었던 이집트를 상대로 적대적인 행위를...
나라도 하기 싫었겠다. 나이도 80이나 되고 나니, 젊었을 때의 그 혈기와 깡은 찾을 수 없었다. 모세는 그냥 목자로 살면서 손자 보면서 잔돈으로 애새끼들 과자나 사 주고 조용하게 살다 가고 싶었을 것이다.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모세는 파라오 앞에서 대놓고 당당하게 “우리 백성을 종살이에서 풀어 주시오!”라고 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이집트 담화는 벌벌 떨면서 쥐꼬리 만하게...

“광야에서 종교 의식을 행하고 오게, 우리 민족에게 한 며칠간만 휴가를 주면 안 될까염? 안 그러면 우리 민족이(이집트가 아님!) 신님에게서 천벌을 받거든요. 유대인들이 죽으면 노예 노동력도 감소하니까 이집트의 국익에도 어차피 안 좋지..... 않겠습니까요?”


이런 애원, 탄원, 아니면 협상급이 되고 말았다.
'이왕'에서는 모세하고 형 람세스(현재의 파라오)가 극적으로 상봉해서 얼싸안는 장면도 나오지만, 성경에 그런 설정은 없으며,
파라오가 모세의 저런 연약함에 호소하는 간청에 귀를 기울였을 리도 없었다.
노예 주제에 웬 자기네 듣보잡 루저 민족신에게 종교 의식을 행하겠다니.. (이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적이다)
이것들이 군기 빠지고 살 만하니까 종교 타령이나 한다는 식으로 파라오는 알아들었다.

결국 제 1라운드에서 모세는 처절한 참패를 당했다. 자유가 찾아오기는커녕 파라오는 끄떡도 안 했고 오히려 노동 강도만 더욱 늘었다.
모세는 동족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손발리 오그라들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 (출 5:22-23)
그런데 이때 영화에서 또 등장하는 누나 미리암. 그녀는 특히 아론과 대비되어 완전 눈물나게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믿음의 여인으로 묘사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모세의 누나가 아니라 거의 어머니 수준이다. 비록 성경에는 없는 대사이지만, 이런 캐릭터가 좀 있어야 영화의 감동이 살아나겠지. ㅎㅎ

Moses. Hear what I say. I have been a slave--all my life. And God has never answered my prayers until now.
God saved you from the river, he saved you in all your wanderings. Even now he saves you from the wrath of Pharaoh.
God will not abandon you. So don’t you abandon us.

“하나님은 너를 결코 버리지 않으셔. 그러니 너도 우릴 버리지 말아 줘!”

그리고 본격적으로 파라오를 굴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재앙이 시작된다. 영화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The Plagues라는 뮤지컬이 나온다.

(글이 길어지니 이후 내용은 下에서 계속하겠다. 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1/01/19 15:14 2011/01/19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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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에 대한 고찰

오늘날처럼 세상이 급변하고,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게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 역시 뭔가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던 적은 역사상 없었지 싶다. 그런데 성경에 따르면 그런 트렌드 자체도 그렇게 새삼스러운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모든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있던 나그네들은 새로운 어떤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외에는 자기들의 시간을 달리 쓰지 아니하였더라. (행 17:21)

성경 66권 각 책들이 모두 개성이 넘치는 책이긴 하지만, 본인은 사도행전이 문체와 표현이 굉장히 독특하다는 생각을 해 왔다. 성경은 사도행전에서, IT 시대가 도래하기 전부터 이미 얼리어답터라는 집단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맨날 뭔가 새로운 트렌드, 조금이라도 더 창의적인 개똥철학에 탐닉하는 사람들이었다.

새로운 것과 관련된 언어 현상을 먼저 좀 살펴보기로 하자.
new에 대응하는 한국어는 원래 ‘새롭다’라는 형용사인데, 신기하게도 ‘새’만 써도 관형사로서 ‘새롭다’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유명한 컴퓨터 개그가 있다.

“교수님, 새에 대해서 논문이라도 쓰시나 보죠?” (레 11:13-19 같은?)
“아니. 파일을 ‘새 이름으로’ 저장해야 한다는데, 이젠 더 생각나는 새 이름이 도저히 없어서 고민일세.”


영어권의 “Press any key...” / “any라는 키가 도대체 어디 있지?” 개그와 쌍벽을 이루는 한국식 컴퓨터 개그가 아닐 수 없다. 썰렁했다면 죄송. ㄲㄲㄲㄲㄲㄲㄲㄲㄲ

사실, GUI 환경에서는 각종 메시지 박스는 반드시 ‘확인’(OK) 버튼을 클릭해야 하고, 이 버튼은 Space나 엔터로만 인식이 되니까 Press any key 같은 메시지를 볼 일은 없어졌다. 명령창(command prompt; console) 환경에서나 볼 수 있다.
요즘 소프트웨어들은 새 이름 같은 악명 높은 오해(?)를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해, ‘새’ 대신 ‘다른 이름으로 저장’이라는 표현을 써 주고 있다는 것도 알아 두자. ^^;;

하나 더, 본인은 한국어에서 ‘기존’이라는 표현이 오· 남용되고 있는 게 개인적으로 굉장히 거슬린다. ‘예전’, ‘종전’이라는 표현이 싹 다 저걸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다. 기존이란, 현존(현재 존재)· 실존(실제로 존재)만큼이나 ‘이미 존재’라는 뜻일 뿐이다. “기존하는 아이템”처럼 활용도 가능하다. 그런데 “기존에 있는 것은 지우세요”는 도대체 뭐란 말이냐. 역전앞, 프린터기보다 더 말이 안 되는 표현이다.

‘기존’이라는 말을 제일 널리 퍼뜨리고, 또 잘못 퍼뜨리기도 한 곳이 IT계가 아닐까 하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맨날 업그레이드, 업데이트를 밥 먹듯이 하는 분야이다 보니 늘 예전 것과 비교를 하고 뭔가 새롭다는 걸 강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IT계가 아니어도 자동차계도 차 이름 앞에다 new를 붙이는 게 유행이었다. 뉴 엑셀, 뉴 소나타, 뉴 프린스, 뉴 그랜저... 그러고 보니 포니는 ‘뉴 포니’가 아니고 ‘포니 2’였는데, 나중엔 네이밍 방식이 바뀌었다.

하지만 new가 붙고 화려하게 세상에 드러난 그 이름들이 세월이 흐르고는 어떻게 되었을까? 분야별로 살펴보면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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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에 출시된 MS-DOS 5.0의 미국 현지 CF의 한 장면이다. “It's new!!” 출처는 유튜브.
1985년에 스티브 발머가 온갖 오버액션으로 윈도우 1.0 광고 개그를 펼치던 동영상만큼이나 웃기다.

1. NE
오늘날 마이크로소프트 사의 윈도우 운영체제는 90%가 넘는 점유율로 PC 환경을 완전히 평정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5~20년 가까이 전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윈도우 1.0부터 3.x까지의 16비트 시절에 쓰이던 자체 실행 파일의 이름은.. New Executable이었다! 32 내지 64비트 시대가 된 오늘날에 이 실행 파일 포맷이 새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지금은 Portable Executable이라는 다른 포맷이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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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NDC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의 사진은 1984년에 도입되어 20년 남짓 국내에서 운행된 무궁화호 디젤 동차(기관차 견인형이 아니고)인데, 업계 종사자 내지 철도 동호인들이 부른 명칭은 NDC. 신형 디젤 동차(New Diesel Car)였다. 1984년에 철도청이 저런 CF를 찍던 당시에는 아주 새로운 차량이었으나,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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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부터 폐차가 진행되어 지금 NDC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못미 NDC.
출처: 류 기윤(현직 코레일 기관사 겸 철도 동호인) 님의 블로그

3. NIV, NASV, NRSV, NKJV 등등..;;
드디어 KJV 크리스천들에게 아주 친숙한 이름들이 나왔다.
new라는 이름이 유난히도 자주 눈에 띄는 분야는 다름 아닌 성경 역본이다.
물론 본인 같은 사람은 그런 것들을 변개된 old lie일 뿐이라고 폄하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과거 통근열차(CDC)를 무궁화호로 개조하여 2008년부터 NDC의 후속 차량으로 뛰고 있는 열차는 RDC라고 불리고 있는데, KJV 신자들이 싫어하는 RV, RSV의 R과 같은 의미의 이니셜이다. Revised와 New는 여러 분야에서 통용되는 단어임이 틀림없다. ^^;;

이런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큰 교훈이 있다.
지금 당장은 새롭다고, 참신하다고 new라고 상업적으로 막 떠벌려진 것들도.. 세월이 흐르면 그다지 대수롭지 않은 게 태반이며, 결국 인간은 동일한 패턴의 쳇바퀴를 돌고 있을 뿐이라는 것. 성경의 그 유명한 말씀에 공감하게 된다.

이미 있던 것 즉 그것이 후에 있겠고 이미 행한 것을 후에 다시 행하리니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전혀 없도다. (전 1:9)

자칭 이종 예술가로 활동 중인 김 형태 씨의 칼럼을 읽어보면 글쓴이가 저런 면에서 상당한 통찰력이 있는 분임을 알 수 있다. 기타 다른 주제의 글에서 느껴지는 인본주의· 자유주의적인 견해가 성경의 사고방식에서 왔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옛날과 오늘날이라든가 옛 것과 새 것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적으로 아주 잘 간파했다.

... 과거에 비해서 현재가 여러가지 의미로 더 좋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문화, 예술, 철학은 오늘도 옛것을 계속 리메이크하면서 팔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누군가 저에게 반문했죠? 정말 이 시대보다 옛날이 더 좋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문화와 역사에 대해 조금만 지식이 있으면 당연한 소리입니다. 아무 분야나 하나 잡아서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물어보세요. 20년, 30년 전, 40년 전, 50년 전에 비해서 지금이 더 좋은 시절이냐고. 음악, 패션, 건축, 디자인, 가구, 자동차, 경제구조, 세계 평화, 문학, 미술, 레크리에이션, 철학, 스포츠 등등 알고 보면 좋은 시절은 다 갔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따끔하지만 유익한 고언, 충고, 조언이 많으니 칼럼을 진지하게 읽어보기 바란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길들 가운데 서서 보며 옛 행로들 곧 선한 길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고 그 길로 걸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들을 위한 안식을 얻으리라. ... (렘 6:16)

굳이 이 구절과 비슷한 사상이 담긴 사자성어를 찾자면 온고지신인데...
이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세상의 변화를 무조건 배척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수구꼴통이 돼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극단으로 치우치면, 문명의 이기를 다 거부하고 생체 이식 칩과 신용카드가 666이라는 논리로 빠지게 된다.

말씀이 의도하는 바는, 언뜻 보기에 구시대적이고 수구꼴통(?) 같지만 결국 인간 세상이 유지되는 데 필요한, 그 검증되고 안정화된 성경적인 길을 일단 존중하고 따라 걸으라는 뜻이다. 그런 것들이 괜히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 중에 진짜로 새로운 건 극히 드물다. 인생의 법칙은 불변이며, 결국은 하나 좋은 걸 만들었다면 이를 위해 다른 하나를 반드시 희생했다는 식으로 대가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이를 잘 분별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란 없다. 상업적인 광고는 그런 이면의 그림자를 소비자에게 절대로 솔직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런 행간의 의미를 읽는 게 인생의 지혜이며,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 능력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여기에 대해서도 분야별로 여러 case study를 제시할 수 있으나, 시간과 분량 관계상 거기까지는 생략하겠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진짜 NEW란, 사람이 거듭나서 구원받은 후 바뀐 행적이고, 훗날 이 땅에 세워지는 새로운 왕국이며, 나중에 창조될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로만 new가 아니라 저게 진짜로 객관적으로 new이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 있는 분이라면 역설적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옛 길을 반드시 고려해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12/15 18:49 2010/12/15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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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이스라엘이 살 길이다

1.
http://news.donga.com/Inter/3/02/20101123/32816154/1
이스라엘은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에 대해 원색적인 용어를 사용해 강력하게 비난했다.
아비그도르 리베르만 외무장관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이번 사건은 `미친' 체제를 저지하고 쓰러 뜨려야 할 필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절감케 한다"면서 "그들의 무기 확산과 도발 행위를 중단시켜야 한다"고 밝혔다. (중략) 이스라엘의 대표적 영자신문인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날 인터넷판에서 북한의 연평도 공격을 자세히 보도한 뒤 리베르만 장관의 성명을 톱기사로 전했다.

독자 여러분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우리와는 지리적으로 멀고 딱히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도 없는데, 괜히 반기독교 반유대주의 감정에 편승하여 안 좋은 시선으로만 바라보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물론 그들이 팔레스타인 땅을 찾는 과정이 아무 마찰 없이 된 건 아니며, 그들 역시 무력의 오· 남용으로 필요 이상으로 이웃 나라에게 민폐 끼친 것도 있다(그게 없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북한 수준으로 국제법 어기고 깽판 부리고 무법천지 난동을 벌인 것도 아니며, 나름대로 국제적으로 승인 받고 합법적으로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또한 오늘날의 미국은 어차피 옛날처럼 이스라엘 편만 일방적으로 들어 주는 나라도 이제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 위정자가 대북 정책 때문에 골치인 것만큼이나, 미국의 위정자는 이놈의 이스라엘 때문에 골치 아프긴 마찬가지라고 한다. 원칙대로라면 이스라엘 편 들어 줘야 하는데 쪽수가 더 많은 아랍권 눈치도 안 살필 수는 없고.
이 글에서 이스라엘의 국제 정세나 외교 문제에 대해서 시시콜콜하게 다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크리스천으로서 구국의 일념으로 분명히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다.

첫째, 우리는 이스라엘을 고마워하고 본받아야할망정, 욕할 자격이라고는 정말 없는 처지에 있다.
둘째, 성경대로라면 우리는 이스라엘과 친하게 지내야 한다. 단적인 예로, 국익을 위해서 요즘 형제 국가로 통하는 터키 이상으로 더 가깝게 지내야 한다.

2.
이스라엘은 대한민국과 비슷한 시기인(3개월 전) 1948년 5월에 정부가 수립됐다. 남한보다 영토가 더 좁고 인구도 더 적고 열악했다. 남한처럼 이북 정도가 아니라 가히 사방에 적들이 깔려 있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자기네도 사정이 어렵고 대한민국과 딱히 친한 사이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6 25 때 UN의 각종 회의에서 남한에게 유리한 편을 들어 줬으며, 한국에 의약품과 식량을 지원했다! 남한이 북한보다 더 민주적이고 인간적인 정부인데도 북한의 불법 무력 도발에 의해 축출당할 위기에 처하게 됨을 알고부터이다. 원래 의도대로라면 이스라엘은 전투 병력까지도 파견해 줄 작정이었다고 한다.
(하긴, 그 당시엔 터키도 도와 줬고, 지난번에 지진으로 큰 어려움을 겪은 아이티 같은 나라도 남한을 도와 줬으니, 우리나라가 그 당시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가 실감이 간다.)

왜, 몇 년 전엔 김 충배 육사 교장의 편지라고 해서 정체불명의 ‘박빠성’(?) 글이 나돌았다. 기억하시는가? 거기 보면 앞부분에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는 박 정희 혁명 정부를 승인하지 않고 한국을 냉대했다” 같은 대목이 있다. 쿠데타를 일으켰지, 옛날에 남로당 경력까지 있지, 그래서 미국 정부가 박 정희에 대해서 처음엔 미덥잖게 여겼던 게 사실이며, 박 정희가 그 오명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민족일보 빨갱이 조작 사건 같은 걸 일으키기도 했다고 본인은 들었다.

그런데 이때에도 이스라엘은 은혜를 베푼다. 박 정희 정부를 국제적으로 승인했다. 미국과 그렇게도 짝짜꿍이 잘 맞는 나라가 한국을 인정해 줬으니 이게 박 정희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됐겠는가? 게다가 이스라엘은 영농, 수자원, 안보 등 여러 방면에서 한국을 돕고,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는 노하우를 전수해 줬다. 단적인 예로 박통 시절에 한반도에 민둥산이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20세기에 산림녹화 사업이 제일 성공한 걸로 손꼽히는 두 나라가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이라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그러나 박통은 몇 년 못 가 이스라엘과의 우정을 저버렸다. 뭐, 그 심정은 이해한다. 그 시절에 중동으로 노동자 보내서 토목· 건축 사업 벌이고 외화 벌기 위해, 결국은 이스라엘 대신 아랍 편을 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석유 문제도 있다. 1970년대에 석유 파동은 얼마나 치명타였겠는지 생각해 보라.

박통 초기이던 1964년에 한국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개관하였으나, 훈훈하던 두 나라의 외교는 대한민국의 노골적인 친아랍 노선으로 인해 점점 막장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1978년에는 한국 정부의 냉대 하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철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6일 전쟁의 영웅인 이스라엘의 모세 다얀 장군--훗날 이스라엘의 외무장관이 됨--이, 이대로는 남한과의 외교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뭔가 대만과 중국 사이의 관계 같은 게 된 듯.
그 후 1979년 10월, 박통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런 얘기는 우리나라의 어지간한 박까나 박빠 진영에서는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_-;;
폐쇄되었던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은 전 두환까지 거치고서 먼 훗날, 1992년에야 다시 문을 열었다.
솔직히 과거에 이스라엘이 우리를 도와 준 것만큼이나 우리나라가 이스라엘을 지금까지 도와 준 적이 있었나? 내 생각엔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무슨 권리로 이스라엘을 욕한단 말인가?

그런 마당에 이스라엘이 지난 연평도 무력 도발에 대해서 우리나라 편을 들고 북한을 맹비난했다. 우리가 해야 할 말을 걔네들이 우리나라 위정자보다도 훨씬 더 속 시원하게 해 줬다. 물론 이스라엘은 북한과 사이가 좋은 나라들과 어차피 대체로 적대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북한더러 잘 쐈다고 지랄을 하는 몇몇 개념 없는 중국 짱깨들에 비해 쟤들이 얼마나 훌륭한가?

뭐, 이스라엘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병역기피자도 있고 별 희한한 일도 많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어쨌든 걔네들 특유의 애국심과 상무 정신(적에게 절대로 비굴하지 않고, 내가 적에게 당하면 반드시 수 배로 강경 보복.. 미친 개에겐 몽둥이가 약이다)도 역시 우리가 오히려 배워야 할 점인 것이다. 북한 성질 건드리지 말고 고분고분 무조건 평화밖에 모르는 사고방식으로는 일제 강점기 때 독립 운동도 할 필요 없고, 이 완용의 친일 논리도 합리화 가능할 것이다.

3.
잠시 딴 얘기를 좀 꺼내겠다.
성경을 믿는 크리스천이 얘기를 할 때 굉장히 말을 아껴야 하는 분야가 둘 있다.
첫째는 종말론 쪽이다. 특정 인물, 특정 과학 기술 내지 세상 정세에다가 함부로 말세니, 누가 적그리스도니, 666이니 재림이니 하는 말 갖다붙이지 말아야 한다. 이 금기를 어긴 분별력 없는 크리스천들이 시한부 종말론 드립을 쳐서 망쳐 놓은 간증이 가히 이루 말할 수 없다.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은 틀림없지만 어느 타이밍에 휴거가 일어날지, 주님 다시 오시기 전에 북한 정권이 붕괴할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막장인 대통령이 정권을 잡을 때쯤에 세상이 끝날지 그건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Y2K 드립, EU 회원국과 요한계시록의 열 뿔 드립...;; 지금까지 그만치 예언이 빗나갔으면 이젠 좀 그만 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리고 둘째는 “저건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은 거다 / 안 믿어서 벌 받은 거다” ← 요런 부류의 말... 정말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대해 그렇게 즉각 결정론적으로 반응하시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말 잘못 하면 정말로 불신자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정 떨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해 오해를 하게 만든다.
무슨 대규모 재난이라도 발생했다 하면 걔네들이 우상 숭배하다 벌 받은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개드립을 치는 유명 목사가 국내엔 꼭 있는 거 같은데... 그건 누가 아프기만 하면 다 마귀 들려서 그런 거라고 갖다붙이는 무식한 부류들과 다를 바 없다.

예수 전혀 안 믿는 우상숭배 천국인 일본이 오늘날 세계 경제를 주름잡는 부자 나라 축에 든다.
또한, 태풍이나 쓰나미로 부족이 몰살당한 미개 부족 중엔 선교사가 들어가서 나름 ‘복음화’가 돼 있던 부족도 있었다. 왜 그렇게 앞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냐 말이다.

그런데, 이런 두 가지 금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21세기 오늘날까지도 단정적으로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주제는 이스라엘, 유대인이다!
“저건 이스라엘을 괴롭혀서 벌 받은 거다, 유대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서 복 받은 거다”
차라리 저건 오늘날에도 엄연히 유효하고 적용 가능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를 자기도 축복하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를 자기도 저주하겠다고 성경에 수차례 약속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창 12:2-3) 세상에 하나님이 존재하는 증거 중 하나가 이스라엘인 것이다.

미국의 경우 2001년의 9 11 테러도, 2005년의 허리케인 카트리나도 다 부시 대통령이 아랍 국가들을 옹호하고 이스라엘 땅을 빼앗아서 걔네들에게 넘겨줄 때 벌어진 비극이라고 풀이한 자료가 있다. 본인은 차라리 그런 자료에 훨씬 더 신뢰가 간다. 앞서 언급한 박 정희 정권의 몰락도 친아랍 노선과 함께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을까?

4.
이렇듯, 친이스라엘은 세상의 정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특히 우리나라는 은혜를 입었다는 역사적인 배경상, 이스라엘을 배척할 명분조차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유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너무 힘들어서인지 지금의 소위 ‘장로 대통령’마저도 과거의 박 정희 같은 불교 신자 대통령과 별 차이가 없이, 이스라엘보다는 두바이, 아랍 에미리트 같은 데에 훨씬 더 관심이 가 있는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친이스라엘 노선이야말로 나라가 잘 되는 길인데 말이다.

다음은, 이스라엘이 6 25 당시의 우리나라 외에도 각종 재난 때 다른 나라들을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지를 열거한 자료이다. 월남전 시절에는 다른 나라에서 다 거절한 베트남 보트 난민들까지도 이스라엘이 인도적 차원에서 받아 줬다고 한다;;;
이외에 저기는 사이트 첫 화면에도 이스라엘에 대해서 여러 오해를 풀 수 있는 자료가 많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보기 바란다.
http://www.conceptwizard.com/info.html

전세계적으로 반유대주의가 횡행하고,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100가지 잘못하는 것보다 이스라엘이 이따금씩 과격 대응으로 한두 개 좀 잘못하는 것에만 예의주시하는 이유에는.. 영적인 배경이 있다는 게 성경의 설명이다. “마귀가 유대인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유대인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미친 짓, 바보짓이다. 반유대주의는 그 어떤 명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에게서 난 생각이 절대로 아니며, 기독교가 지지하는 교리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아니, 예수님이 죽으시지 않았으면 우리 죄값이 어떻게 사해질 수 있었겠는가?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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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방은 영화 <회복>(김 종철 감독)의 한 장면. 시 122:6(Pray for the peace of Jerusalem)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12/11 08:48 2010/12/11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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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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