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관광을 마친 뒤엔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동부의 최북단을 구경하기 위해 고성으로 향했다. 강릉 이북으로는 100km 가까이나 더 이동할 수 있을 정도이니 서부의 북방 한계와는 차이가 너무 크다. (참고로 정동진이 서울의 도봉산-장암뻘과 비슷한 위도이고, 양양 국제 공항이 있는 곳이 38선과 거의 같은 위도이다. 하지만 동부는 그 위로도 속초에 고성까지 계속 북상 가능하다.)

양양까지는 동해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갔다. 길 곧고 차가 거의 없는 덕분에 시속 140~150까지도 밟을 수 있었다. 하조대 IC 이북부터는 고속도로도 없으니 거기부터는 얄짤없이 국도 7호선으로 콜. 항구와 해수욕장을 나란히 끼고 달릴 때는 당장 차를 세우고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참고로, 내가 방문했을 때 기준으로 여기 국도 7호선은 옛 도로를 새 도로로 교체· 개량하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영동 고속도로는 올림픽 준비 때문이고 여기는 그냥 너무 후져서 갈아엎는 듯하다. 어디는 내비의 도로 선형과 실제 도로 선형이 전혀 일치하지 않아서 화진포로 들어갈 때도 한참을 헤맸다. 게다가 여기는 너무 북쪽이기 때문에 인터넷 지도들도 항공 사진이나 거리뷰를 제대로 제공하지 않아서 길을 더욱 익히기 힘들다는 걸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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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1시간 반이 넘게 달려서 드디어 화진포에 도착했다. 바다, 그것도 해수욕장 근처에 저렇게 호수가 있다니? 거기에다 숲과 나무가 드리워져 있으니 경치가 강릉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옛 정치인들이 교통도 왕창 불편한데 굳이 여기에까지 와서 별장을 괜히 만든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뭐, 나중에 5공 시절엔 전땅크 아저씨가 청남대라는 대통령 별장을 청주시 외곽에 또 만들기도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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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 일성 별장'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화진포의 성'부터 찾아갔다. 숲 속 언덕에 지어진 저 위치부터가 평범하지 않아 보인다.
화진포의 성은 그 자체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졌다. 그러나 해방 후에 여기 일대가 잠시 북한 치하로 들어가고, 김 일성 일가가 여기에 와서 놀았던 기록과 사진이 전해지기 때문에 김 일성 별장이라는 이름도 덤으로 붙었다. 북한 정권이 저걸 직접 건설한 건 아니다. 지금 건물은 원래 건물의 모양과 구조를 본따서 다시 지어진 거라고 한다.

안에는 옛날 응접실의 복원 모형이 있고, 옥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아, (1) 이 화진포의 성과 (2) 나중에 소개할 이 승만 별장, 그리고 여기에서 별도로 소개하지는 않은 (3) 화진포 생태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화진포 유원지 통합 입장권을 구입해야 한다. 이것도 한 곳에서 하나만 사면 당일 동안 세 곳에서 모두 통용 가능하기 때문에 강릉의 통일 공원 티켓과 역할이 비슷하다. 다들 걸어서 가기에는 몇백 m 정도 거리의 압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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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진포의 성 전망대에서 해수욕장과 호수를 내려다 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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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화진포의 성 근처의 평지에는 '이 기붕 부통령의 별장'도 있다. 이건 규모도 작으며 티켓 없이 누구나 간단히 들어갔다가 보고 나올 수 있다. 주변엔 잔디밭과 나무, 벤치가 잘 조성돼 있다. 얘 역시 의외로 건물 자체는 일제 강점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지은 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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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별장은 해수욕장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하지만 이정표가 잘 갖춰져 있으니 현장에서 각 별장들을 찾아가는 건 별 어려움이 없다. 이 별장은 6· 25 전쟁이 끝나고 남한이 고성군 일대를 확실하게 수복한 뒤인 1950년대에 새로 만들어졌다.
맑은 동해 바다에다 호수에 이런 유적지까지 곁들어져 있다니 화진포는 참 특별한 해수욕장인 것 같다.

화진포에서 5km 정도 더 북쪽으로 올라가면 우리나라 최북단 주유소가 아닌가 생각되는 '통일전망대 주유소'가 나오고, 길 건너편엔 통일 전망대 출입 신고소가 나온다. 여기에 들러서 대표자의 이름과 연락처를 적고 통일 전망대 입장료를 내면 민통선 출입증이 나온다.

출입증을 받은 뒤엔 지금까지 지나왔던 좁고 꼬불꼬불한 길로 도로 나오는 게 아니라, 4차선+중앙분리대가 갖춰진 국도 7호선 새 도로로 빠져나가서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민통선 진입을 위해서 누구 통제를 받는다거나, 일정 시각 간격으로 다같이 출발한다거나 하는 건 없음. 개인 행동 가능하다.

민통선으로 들어가니, 내륙 방면으로는 서쪽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역처럼 이곳 역시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제진 역과 금강산 관광 관련(지금은 파토 난) 출입경 사무소 등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 전망대로 가려면 오른쪽 해변 방면으로 가야 했다.
파주는 서울과 가깝고 워낙 관광객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개인이 자차를 직접 끌고 민통선에 들어가는 건 없다. 그 대신 버스 타고 다니는 패키지 관광이 발달해 있다. 하지만 여기는 오지여서 그런지 관광이 개인 방문 중심으로 운영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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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전망대의 주차장 앞마당에 도달하니 날 맞이한 것은 다름아닌 3010호 디젤 기관차를 개조해서 만든 카페였다. 철원 민통선 안의 월정리 역 근처에는 4001호 디젤 기관차가 있더니 이건 또 웬 떡이냐? 나 이런 거 완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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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마당에서 내려 언덕을 또 오르면 드디어 통일 전망대 건물에 도착한다.
여기는 듣자하니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전망대 중에 가장 먼저 생겨서 이름도 굉장히 흔한 보통명사스러운 '통일' 전망대라고 한다. 또한 전국의 전망대들 중 일단은 가장 북쪽에 있다. '일단은'이라는 단서를 붙인 이유는 잠시 후에 다시 설명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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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이것이 통일 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북쪽의 풍경이다. 바다에, 모래사장에, 산에, 동해선 철도까지..! 경치 한번 완전 죽인다.
관광지로 손색이 없는 해수욕장이 보안상의 이유 때문에 아무에게도 개방될 수 없는 장소로 봉인되었다는 게 안타깝다. 서부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광경이다. 날씨가 더 맑았으면 저 멀리 금강산까지 보였을 거라고 한다.

근처에는 관광객들로 하여금 부처님과 성모님(?)에게 빌면서 남북 통일을 염원해 보라는 배려인지 하얀 종교 형상들이 있었고, 또 6· 25 전쟁 체험 전시관도 있었는데, 사진 첨부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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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비 화면 인증.
통일 전망대는 비록 민통선 안에 있지만 내비 지도에 표시돼 있으며, 게다가 전망대 내부에서도 "북쪽으로 사진 촬영 금지" 같은 제약과 통제가 전혀 없었다. 주변에 민감한 군사 시설이 없는지 분위기가 훨씬 덜 삼엄했다. 그 이유를 본인은 나중에야 알게 됐다.

통일 전망대는 지리적으로 굉장히 북쪽에 있으며 북한 영토를 볼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군사분계선과는 여전히 수 km 이상 멀리 떨어져 있다. 이 전망대는 "북한과 가장 가까이 접해 있는 전망대"는 아니다. 덜 위험하고 군에서 딱히 북한군의 동태를 파악하는 용도로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분위기가 널널했던 것이다. 여기 주변엔 단순 철조망 이상으로 GOP나 해안 경계 초소 같은 건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우리나라가 동쪽 해안은 극단적으로 많이 북진해서 땅을 수복한 덕분에 공간이 이렇게 많이 생겼다.

여기 말고 진짜 군사 시설로도 활용되는 '위험한' 전망대는 '금강산 전망대'라고 따로 있다. 일명 717 OP. 얘는 통일 전망대보다 더 내륙(서쪽)에 있고 위도도 훨씬 더 북쪽이어서 남방 한계선 철책이 훤히 보이고 말 그대로 금강산도 더 가까이 보인다. 그 앞의 북한 땅에 있는 '감호'라는 호수도 '통일'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지만 '금강산'에서는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서 차이점을 참고하시라. (저건 내가 찍은 거 아니고 출처는 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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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전망대는 개인이 '신고'만 한 뒤 불쑥 방문할 수 없으며, 단체가 군부대로부터 사전 '허락'을 받은 뒤에만 방문 가능하다고 한다. 사실, 본인이 나중에 방문한 을지 전망대도 한때는 이런 '단체+허가' 형태였으나, 비교적 최근에 제약이 완화된 것이다. 금강 전망대도 민간 개인 단위로 개방해 달라는 요구가 없지는 않으나, 금방 성사될 것 같지는 않다.

뭐, 본인은 이렇게 통일 전망대의 관람을 마쳤다. 근처에 DMZ 박물관도 있었지만 월요일에 찾아갔던 관계로 휴관이어서 방문하지 못했다.
일과 시간 동안 계획했던 관광 코스들은 답사가 모두 끝났다. 시각은 오후 3시 반 무렵이었다. 이제 다시 남쪽으로 돌아오면서 동해 북단에 있는 해수욕장들을 둘러봤다.

최북단의 해수욕장은 명파 해수욕장이다. 크기는 생각보다 아담하다. 그런데 피서철이 끝나고 해수욕장이 폐장한 뒤엔 여기는 철책이 둘러지고 민간인의 출입이 완전히 금지돼 있었다. 역시나... 그 아래의 해수욕장들도 그러했다.
그러니 철책이 없고 1년 내내 적어도 낮에는 출입 가능한 최북단 해수욕장은 화진포였다. 그래서 본인 역시 아까 관광을 했던 화진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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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 바다는 보기만 해도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비록 해수욕장이 폐장해 있었지만 날씨가 습하고 후덥지근했으며, 본인은 이미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기온과 수온은 물놀이를 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상태였다. 해변을 걷고 다리 정도는 바닷물에 담그는 관광객도 몇 명 있었다.
본인 역시 여기까지 왔는데 동해 바닷물을 적셔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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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봐도 모래사장의 경사가 서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몸을 때리는 파도가 굉장히 강했다.
안전요원도 없는 상태에서 뒤로(바다 쪽으로) 밀려가는 파도에 잘못 휩쓸리면 큰일 나겠다 싶어서 여기서는 바닷가에서 몇 발짝밖에 들어가 보지 못했다. 해변에서 거의 2~300미터 가까이 진행했던 지난번 서해 해수욕장과는 완전 비교된다.
그런데 거센 파도 때문에 해변엔 물이 온통 흙탕물이어서 동해 바다가 서해 바다보다 딱히 깨끗한지는 제대로 실감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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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에게도 바다 구경을 시켜 주지 않으면 그건 맥북에 대한 실례이고.

이렇게 하루 일과가 끝나고 날이 점점 어두워졌다.
해수욕장 근처에는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에 더 남쪽의 거진항 근처의 마을로 갔다. 거기 식당에서 회 요리를 먹고 씻고 전자기기들을 충전했다.
완전히 밤이 된 뒤에는 해변 도로의 공터에다 차를 세운 뒤, 파도 소리를 듣고 바닷바람을 쐬면서 노숙과 차박을 했다. 돗자리를 깔고 담요를 덮고 손전등을 켜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3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8 08:31 2016/09/1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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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파주, 2014년 철원 당일치기 여행에서 축적된 노하우를 바탕으로, 올해엔 본인은 아예 2박 2일 일정으로 강원도 투어를 다녀왔다. 자료 리서치와 최적 경로 프로그래밍, 예산 편성, 운전, 관광 전부 1인 단독 플레이다.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고 돌아왔다. 여행의 자유가 있고 자동차가 있으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할 수 있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나중에 신혼여행을 가도 이 정도의 감흥은 못 느낄 것 같다.;;

※ Day 1: 동해 바다 최북단

한밤중에 집을 나서서 제2중부 고속도로(37)와 영동 고속도로(50)를 달렸다. 강원도에 가까워지자 길이 젖어 있었으며 금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차선이 안 보이고 와이퍼를 고속으로 가동해야 할 정도로 비가 오는 곳도 있었다.
거기에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도로 곳곳이 보수 공사 중이어서 운전을 더욱 조심해서 해야 했다. 갑자기 차선이 줄어들거나 도로 선형이 바뀌는 지점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심야가 아니라 주말 낮이었으면 병목 때문에 길이 왕창 막혔을 것이다.

난 운전대를 잡는 동안은 어지간해서는 몸 컨디션과 시간대를 불문하고 거의 졸지 않는 편인데, 이번엔 비 오는 밤에 고속도로 운전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이 느껴졌다. 그래서 부득이 휴게소에 들러서 3시간 정도 눈을 붙였다.
주변 경치 감상을 포기하면서까지 심야 운전을 강행한 이유는 도로 정체가 없을 때 서울을 빠져나가고 해가 뜨자마자 강원도에서 관광을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첫 목적지인 이 승복 기념관에 도착했다. 고속도로 속사 IC와 그리 멀지 않고, 또 올림픽도 얼마 안 남았으니 특별히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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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나름 해발 700m에 달하는 대관령 고지대라고 한다. 주변의 산들엔 안개가 자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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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은 단순히 건물 한 채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동상, 묘소, 생가와 학교의 복원 모형 등 볼거리가 많았다. 정식 개장하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지만(아침 7시 무렵) 친절하게도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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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포즈의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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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장공비에게 살해당한 일가족들이 이 언덕에 한데 묻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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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두 사람이 한데 공유하고 표면이 짙은 초록색 형태인 옛날 나무 책상은.. 본인도 초딩 저학년 시절에 학교에서 실제로 사용한 적이 있다. 교실 바닥도 저렇게 목재여서 청소 시간엔 밀대로 닦는 게 아니라 아니라 왁스칠을 해야 했다.
그 밖에 생가 사진, 각종 기념비 사진, 그리고 밖에 뜬금없이 전시돼 있는 각종 탱크와 전투기 사진은 첨부를 생략하겠다. 이것 말고도 올려야 할 사진이 너무 많아서 말이다.

역사적으로 명백히 입증된 사건을 안 믿고 자작극설 같은 엉뚱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꼭 있어 왔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라든가 난징 대학살, 그리고 아폴로 계획 달 착륙에 대해서 말이다. (종교의 영역으로 가면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뭐, 같은 맥락으로 이 승복에 대해서도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조선일보의 주작이라고 뜬금없이 이의 제기를 한 불순하고 이상한 사람들이 1990년대 말에 있었다.
이건 유족들의 강렬한 반발과 함께 주작이 아닌 팩트라고 최종 판결이 났다. 하지만 안 그래도 잊혀지고 동상이 철거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던 이 승복은 이미 완전히 확인사살을 당한 뒤였다.

쟤는 무슨 대단한 반공 영웅이 결코 아니다. 10살짜리 초딩이 무슨 정치를 알고 이념을 알았겠는가?
그저 학교에서 배운 대로 평범하고 순진하게.. 마치 "차조심 해라 / 낯선 사람을 무작정 믿고 따라가지 마라"를 실천하듯이 "공산당 나빠요 / 싫어요"를 시전한 죄밖에 없는데 빨갱이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한다.

1.21 사태 때는 김 신조라는 공비 딱 한 명만이 생포되었는데, 이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는 김 익풍이라는 사람이 생포되었고 훗날 완전히 전향했다. 그는 사건 당일로부터 무려 41년이 지난 2009년 12월에야 이 승복 기념관 관장의 제안으로 이 승복의 묘지를 참배하고, 유족들에게 공개적으로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한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주작설에 대해서도 극구 부인했음은 물론이다. 아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그때 이 승복의 가족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님..;;

이 승복 기념관의 관람을 마친 뒤 곧장 강릉으로 달려갔다. 해는 완전히 떴지만 중간에 비상등을 켜고 달려야 할 정도로 안개가 짙게 낀 구간도 있었다. 운전을 극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했다. 그래도 비는 더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하늘이 맑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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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통일 공원이 있는 곳은 바다와 산, 영동선 철도가 나란히 지나니 바깥 경치가 아주 아름다웠다. 함정 전시관에서는 퇴역한 커다란 전함과 탈북용 어선, 그리고 강릉 무장공비 잠수함을 구경했는데 생각보다 볼 게 많았다. 예전에 평택 해군 기지를 견학한 적이 있어서 전함 내부의 풍경은 그럭저럭 익숙했다.

해군은 배가 그야말로 생활관 겸 전장이고 안 그래도 힘든 선원 생활이 군대와 결합하니 얼마나 힘들까 싶다. 그리고 배는 곧 기계덩어리이며, 모든 기계는 관리하는 인력을 필요로 하니 육군 보병보다야 더 기술지향적이다.
여기에는 '전북함'이라고 길이 119미터, 배수량이 3천 톤 정도 되는 구축함이 1999년에 퇴역한 후 전시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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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옛날 골동품들.
난 25년쯤 전 초딩 시절에 컴퓨터 학원에서 GWBASIC을 배울 때, 정확하게 저 두 컴퓨터들의 실물을 구경하고 써 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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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바다를 보며 찍은 사진이다. 방파제 같은 시설 주변에서 파도를 막으려고 이렇게 잔뜩 집어넣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을 '테트라포드'라고 한다. 뾰족하게 만들어서 파력을 효과적으로 상쇄하기 위해 공이나 정육면체가 아니라 다리가 4개 달린 형태이다.

그런데 방파제에서 멀쩡한 길을 놔 두고 사람이 저기 위를 일부러 지나가는 건 바다의 낭만을 즐기는 것과는 억만 리 떨어진.. 거의 자살행위 급의 미친 짓이다. (☞ 더 자세한 설명)
십중팔구 발을 헛디디거나 미끄러져서 아래 틈새로 쏙 빠지기 쉬운데.. 몇 m 아래에 있는 단단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수 차례 부딪히면서 바닷물에 빠지기 때문에 매우 높은 확률로 중상 또는 사망이 보장된다.

물에 안 빠지고 목숨을 부지했더라도 혼자서 위로 다시 기어올라오는 게 거의 불가능하며, 심지어 살려 달라는 외침 소리가 바깥까지 퍼져 나가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안 그래도 인적도 드문 곳인데 비명 소리도 파도 소리에 그냥 묻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더라도 테트라포드들 사이에 갇힌 채로 조용히 탈진해서 죽기 딱 좋다.
더구나 구조 신고가 접수됐다 하더라도 빠진 사람을 찾는 건 심히 어려우며, 구조 작업 역시 극도로 힘들고 위험하다. 저기에 비하면 차라리 아무 지형 장애물이 없이 파도에 휩쓸려서 물에만 곱게 빠진 건 완전 양반이다. 거긴 보트를 투입해서 곧장 출동이라도 가능하지.

테트라포드는 어지간한 플랫폼 아케이드 게임에 있는 데쓰 트랩, 남극 크레바스, 민통선 안의 지뢰밭, 사냥용 덫, 함정 급으로 위험하다고 봐야 한다.
모래사장+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저길 갈 일은 물론 없고, 저기서 사고를 당하는 사람은 다 낚시꾼들이다. 낚시 명당이긴 하지만 안전을 등가교환하고 가는 장소라는 건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한편, 전북함의 옆에는 어느 북한 주민들이 탈북할 때 사용했다는 어선이 있었다. 이 배는 그나마 탈북에 성공한 경우에 속하지만, 어떤 사람은 배에 탄 채로 죽어 버려서 배는 식량과 연료가 떨어진 채 시체만 싣고 일본으로까지 떠내려간 비극적인 경우도 있다. 사진 첨부는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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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있는 것은 바로 1996년 강릉 무장공비들이 탔던 북한제 잠수함이었다. 벌써 20주년이 됐다. 같은 계열의 색으로 도색은 다시 반들반들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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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함은 일반 군함보다 공간이 훨씬 좁고 거주성이 열악했다. 일어서 있을 수가 없다. 물(잠수함..)이든 땅(땅굴..)이든 그 아래 속에서 지내는데 공간을 넉넉하게 내기란 힘들 것이다. 게다가 북한 사람들은 못 먹어서 키부터가 남한 사람보다 작으니까.
잠수함 안은 온갖 복잡한 계기판과 밸브, 스위치들로 가득했는데, 계기판 아래에 자그맣게 찍혀 있는 "1991. 평양"이라는 글자가 참 섬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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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잠수함이 좌초하면서 부서진 부분인 듯하다. 이것 말고도 사진 찍은 게 많이 있지만 첨부를 생략한다.

지금까지 함정 전시관을 살펴봤다.
강릉 통일 공원은 (1) 함정 전시관, (2) 항일 기념 공원, (3) 안보 전시관이라는 세 파트로 나뉜다. 함정 전시관은 나머지 둘이 있는 곳에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직선 거리 7~800m)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고저 차이도 상당하기 때문에 이동을 위해 차량이 사실상 필수이다. 뭐, 어차피 여기까지 찾아가는 수단 자체가 자동차밖에 없기도 하지만.

(2)는 그냥 공터에 각종 옛날 전투기와 6· 25 전투 전적비에다가 강릉 항일 인사 추모비가 있는 수준이지만, (1)과 (3)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한다. 하지만 둘 중 아무 한 곳에서만 입장료를 구입하면 당일 하루 동안 양쪽을 자유자재로 드나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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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기념 공원은 위와 같이 생겼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항일 관련 전시물보다는 해방 이후 관련 전시물이 더 많다.
언덕 꼭대기에 있는 파란 프로펠러기는 박 정희 대통령 시절에 사용되었던 대통령 전용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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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항일 관련 전시물인 강릉 의병 항쟁 기념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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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의 모습. 출입문의 위에 있는 파란 지붕이 뭔가 실사가 아닌 CG 그러데이션처럼 굉장히 예쁜 색상으로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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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안보 전시관에는 여느 6· 25 내지 반공 관련 자료뿐만 아니라 강릉답게 무장공비 침투 사건에 대한 자료가 더 많이 있었다. 무장공비들이 은신처 마련을 위해 판 구덩이를 가리키는 말인 '비트'가 이 사건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얘는 그냥 '비밀 아지트'의 약자라고 한다. 영어 bit나 beat와는 관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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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중인 동영상을 촬영한 건데 평소답지 않게 굉장히 선명하고 깨끗하게 잘 찍혔다.
조 창호 중위는 내가 이 블로그에서 전에 소개한 적도 있는데.. 참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슬픈 사례이다.
저건 행방불명 전사자로 현충원에 등재되었던 자기 이름을 몇십 년 만에 손수 지우는 모습이다.
전사한 걸로 간주되어 1계급 특진을 해서 '중위'를 추서받은 것이었는데, 당사자가 살아서 돌아왔으니 저분은 형식적으로나마 진짜 중위로 진급식을 한 뒤 곧장 전역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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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전시관을 나와서 언덕을 내려가면서 찍은 모습. 카메라는 내가 눈으로 본 색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파란 하늘과 바다가 저렇게 어우러진 모습이 정말 아름다웠다. (2편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6/09/15 19:20 2016/09/1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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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무더위로부터 자극과 동기를 받아 본인은 이번 여름에는 바다에도 다녀 왔다. 지난 봄엔 등산을 많이 갔는데 여름엔 드디어 바다도 간 것이다. 물론 등산은 한 10월쯤 돼서 덜 더위지면 운동 차원에서 다시 계속 진행할 예정이다. 가고 싶은 산이 아직 몇 군데 더 남아 있다.

단순히 산이나 계곡이나 강이 아니라 꼭 바다 구경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 바쁜 와중에도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다녀온 소감을 먼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제아무리 가정과 사무실에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들어온다 해도, 피서를 직접 가는 것에 비할 바는 못 된다는 게 느껴졌다. 안 갔다왔으면 후회했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다.

잘 알다시피 해수욕장의 퀄리티는 동해가 서해보다 더 낫다. 서해는 얕고 물이 더 탁하다. 서울 사람들이 가까운 인천 앞바다를 놔 두고 괜히 강원도나 부산까지 가는 게 아니다. 부산은 대도시답게 빽빽한 고층 건물이 해수욕장 모래사장의 바로 앞까지 닿아 있고 심지어 해운대 해수욕장은 지하철로도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거긴 잘 알다시피 피서철엔 사람들로 완전 터져나간다..;; 이런 풍경을 정작 수도권인 인천에서는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방학 동안 본인은 학기 중일 때보다 회사에 더 자주 출근하고, 주일마다 교회, 그리고 방학 기간 동안 성경 특강을 부탁받은 것도 있어서 행동 반경에 제약이 심했다. 그래서 동해보다 더 가까운 서해부터 1박 2일 스케줄로 먼저 가게 됐다. 동해는 멀기도 하고, 비단 바다 구경뿐만 아니라 각종 안보 관광 코스를 엮어서 최하 2박 이상의 스케줄로 다시 갈 예정이다.

일단 서해의 어느 해수욕장을 갈지 많이 고민했다. 사실, 공항이 걸쳐 있는 용유도에도 끝자락에 해수욕장과 유원지가 있긴 한데 그건 제외하고, 또 전라도 이남으로까지 너무 멀리 가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크고 유명해서 혼잡할 걸로 예상되는 해수욕장도(대천 같은..) 제외하고, 해변에 상업 시설들이 너무 다닥다닥 늘어서 있지 않고, 적당히 외지고 잠시 속세를 떠났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곳을 골랐다.

그래서 태안군의 북쪽에 있는 구례포/학암포 해수욕장이 선택됐다. 참고로 최후까지 경합했던 후보는 거기 남쪽에 있는 (1) 안면도에 소재한 해수욕장들, 그리고 (2) 장항선+서천화력선을 구경할 수 있는 춘장대 쪽이었다. 비록 철도 구경은 못 했지만 그래도 구례포/학암포 주변에도 마치 춘장대 해수욕장처럼 근처에 화력 발전소가 있긴 했다. 일말의 공통점이다.

서해를 갈 예정이니 응당 서해안 고속도로를 탔다.
평소에 자주 구경하는 경부 고속도로는 차선수가 정말 많고 넓다. 그리고 온갖 광역· 고속버스들이 넘쳐나며 버스 전용 차선까지 있다. 그 반면, 서해안 고속도로는 경부보다는 아담하며 수도권 구간에서도 버스를 거의 볼 수 없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서울 서남부는 이미 경부선 전철이 발달해 있고, 또 경부와는 달리 서울 진입로(서부간선)가 너무 비좁아서 병목이 심해서 경부 같은 교통망을 구축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이지 싶다.

태안은 서산을 경유해서 국도를 타고 산 같은 비탈길도 한참을 오른 뒤에야 나타났다. 일요일 예배를 마친 뒤 저녁이 돼서야 현장에 도착했는데, 오토캠핑장 주변은 차 끌고 텐트 친 피서객들로 가득했다. 나야 홀몸이고 자동차가 곧 이동식 텐트이니 따로 텐트를 치지 않았다. 에어컨 냉기가 남아 있는 동안은 차 안에서 좀 쉬다가, 냉기가 빠졌을 때쯤 이제 주변 지형과 시설 정찰을 시작했다. 그래도 바닷가답게 바깥도 제법 시원한지라, 냉기가 빠진 뒤에도 차에서 자는 게 가능할 정도였다.

심야와 이른 아침, 해수욕장이 정식 개장하지 않은 시간대이긴 하지만 모래밭에 돗자리 깔고 바닷바람 맞으며 책 읽고 코딩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꿈 같은 피서가 시작됐다. 먼 길 달려온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바닷물에다가는 아직은 발만 담갔다. 진짜 본게임은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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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주변은 몇십 m 떨어진 물체도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해무가 짙게 껴 있었다. 그리고 썰물 상태여서 동해에서는 구경할 수 없는 갯벌이 쫘악 펼쳐져 있었다. 바닷물은 한 200m쯤 뒤로 싹 밀려났으며 이 때문에 부표(사진엔 안 나옴)까지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지금은 저렇게 돗자리 깔고 노트북 PC까지 올려 놓은 채로 사진을 찍었지만, 밀물 때는 여기 일대는 다 물에 잠겼다. 아무튼, 이로써 등산 코딩에 이어 갯벌 코딩까지 달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해가 뜨고 더워졌으며, 해무가 차츰 걷히고 파란 하늘이 펼쳐졌다. 개장 시각이 지나자 텅 비다시피하던 해변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렇다고 인산인해 수준인 건 물론 아니고, 혼자 쾌적하게 물 속을 돌아다니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본인 역시 이 무렵부터 하반신뿐만 아니라 상반신과 얼굴까지 몽땅 바닷물에 담갔다. 기온과 수온이 모두 해수욕에 안성맞춤이었다.

본인은 비록 수영을 할 줄은 모르지만, 시원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이리 저리 돌아다니는 그 느낌이 정말 좋았다. 바다는 계곡이나 강과는 달리 계속 파도가 치니 물이 뭔가 역동적이고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이 많은 물을 밀어내는 엄청난 힘이 어디서 유래된 걸까? 지구의 자전? 달의 인력? 온도 차이? 이렇게 비열이 엄청난 물질이 액체라는 유체라는 게 지질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물의 저항과 공기 저항의 차이는 얼마나 될까 별별 잡생각을 하며 물놀이를 했다.

서해는 정말 얕고 바닥의 경사가 완만해서 모래사장으로부터 한참을 멀리 떨어져도 여전히 발이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럼 여기는 바닥의 경사가 몇 퍼밀인 걸까? 철도 차량의 경사 한계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까?" 뭐 이런 생각도 덩달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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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밀물과 썰물의 차이라는 것을 이렇게 직접 보니 몹시 신기했다. 정오 무렵이 되니까 물이 제일 많이 들어왔으며, 그 넓던 갯벌이 감쪽같이 몽땅 바닷물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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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안개가 곁들어져서 여기도 꽤 괜찮은 풍경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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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의 오른쪽에는 요렇게 나무로 덮인 언덕도 있는데, 이 산길을 따라 몇백 m쯤 걸으면 이웃의 학암포 해수욕장으로 갈 수도 있다.
그런데 물놀이에다 주변 지역 산책도 몇 시간 하니, 생각보다 팔다리가 쑤시고 피곤하고 배도 고팠다. 그래서 본인은 저 길을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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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점심 시간이 어중간하게 지난 오후 2~3시경, 드디어 해수욕장을 나와서 옷을 갈아입었으며, 학암포 근처의 민박·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한 마을로 가서 식사를 했다.
바다에 갔으니 해물을 먹어야지. 해수욕장 잘 찾아간 것에 대한 자가보상 차원에서 두세 명 분량의 회 코스 요리를 마지막 매운탕까지 혼자 다 먹어치웠다.

의식주 중에서 의와 주는 전혀 신경쓸 필요 없으니 교통비(유류/톨비)를 제외한 나머지 예산은 전부 '식'에 집중 투입되었다. 사실 여행 기간 내내 이때 말고 나머지 끼니는 거르거나 부실하게 해결한 편이었다. 또한 밥뿐만 아니라 전기 공급도 열악한 상태였는데 식당에 있는 동안 컴퓨터와 전화기를 덩달아 충전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때 총체적인 에너지 보충을 했다.

학암포 해수욕장은 마을을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는 또 물에 들어가지는 않고 다시 돗자리 깔고 누워서 해변과 언덕을 구경하며 쉬었다.
그렇게 저녁 무렵까지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엔 정체 시간대를 피할 겸, 서해안 고속도로의 유명한 행담도 휴게소에서 몇 시간 동안 머물면서(휴식+코딩) 추억을 더 만들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원하는 대로 머물 수 있는 것은 역시 자차가 있을 때에만 가능할 것이다.

피서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는 생업 전선에서 여전히 피서 전과 다를 바 없는 폭염을 경험하면서 좌절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해도 조만간 어서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해에서는 뿌연 해무, 갯벌과 초록색 바닷물을 보고 왔다면, 동해에서는 더 맑고 깊고 시퍼런 바다를 보게 될 듯하다.

그나저나 햇살이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물에서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얼굴, 팔뚝, 심지어 발등까지 제법 탔다. 물은 자외선의 차단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는 걸 실감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2 19:28 2016/09/1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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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dows 10 이야기

1. 메트로 앱

Windows 10이 나온 지 1년이 좀 넘었고, 마소에서 그 1년간 시행하던 사상 초유의 OS 메이저 버전간의 무료 업그레이드 기간도 끝났다.
처음부터 Windows 7 이하의 구형 OS를 쓰고 있었고 컴의 사양도 빠듯하다면 모를까, 8.1을 쓰는 중에 10으로는 업그레이드를 마다할 이유가 확실히 전혀 없다고 여겨진다.

잘 알다시피 시작 메뉴와 메트로 앱이 쓸데없이 전체 화면을 점유하는 게 아니라 창 형태로 실행 가능해진 것은 아주 환영할 만한 변화이다. 왜 진작에 이렇게 안 만들었나 모르겠다.
결국 PC용 Windows의 입장에서는 재래식 데스크톱 UI뿐만 아니라 외형이 뭔가 flat하고 modern하고 stylish(?)하고, 모바일에 친화적이고 보안 제약이 강하게 걸린 UI 모드가 하나 더 생긴 셈이다. 마소에서는 그걸 최종적으로 Universal Windows app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며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들을 이 형태로도 여럿 만들었다. 대표적인 게 Edge 브라우저이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같은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이 두 버전으로 중복 구현돼 있는 게 별로 마음에 안 든다. 특히 제어판도 기존 제어판에 덧붙여 '설정'이라는 메트로 앱과 이중 구도로 바뀌었다. 화면 해상도를 바꾸는 기능과 DPI를 바꾸는 기능만 해도 데스크톱 버전으로 갔다가 메트로 버전으로 갔다가 하면서 찾는 등 좀 혼란스러워진 느낌이다.

데스크톱 UI는 전통적으로 키보드가 주류이고 마우스가 옵션인 구도이다. 그리고 640*480 내지 800*600처럼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열악한 저해상도 디스플레이와 비트맵 글꼴 환경에서 시작해서 차근차근 발전해 왔다. 그렇기 때문에 글자 크기도 전통적으로 작은 편이다. 사실, 업무 환경에서는 한 화면에서 작은 글씨로 정보가 많이 표시되는 것도 중요하기도 하니까.

그러나 메트로 UI는 그런 레거시 배경이 없으며, 반대로 터치스크린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각종 글자나 GUI 위젯이 큼직하다. 키보드를 배려한 지저분한 focus rectangle 점선이나 액셀러레이터 문자 밑줄이 없다. 사실 마소는 데스크톱 UI에서도 진작부터 저걸 시각적으로 지저분하다고 인지했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없애 버릴 수는 없으니, 고육지책으로 마우스만 사용할 때는 저걸 기본적으로 표시하지 않으려고 세심한 신경을 썼다. WM_UPDATEUISTATE 같은 메시지가 추가된 건 무려 Windows 2000 시절부터이다.

과거에 닷넷이 C++보다 생산성이 더 뛰어나고 단순 바이너리 레벨에서의 API 통합 규격인 COM보다 규모가 더 큰 언어 통합 바이트코드 실행 환경을 추구했다면, 메트로는 PC와 모바일 기기간의 통합 UI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메트로와 닷넷은 큰 관련이 없으며 메트로 앱도 C++ 네이티브 코드 기반으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게 의외의 면모이다.

하지만 난 컴퓨터에서는 걍 데스크톱 앱만 있는 게 좋다. 모니터에 가로/세로 피벗 기능이 있는 건 봤어도 멀티터치 기능이 있는 건 난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봤다. 정작 멀티터치 API 자체는 Windows 7부터 도입됐는데도 말이다. 멀티터치는 문자 입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터페이스임에도 불구하고 날개셋 역시 그쪽 지원은 전무하다. 지원되는 기기를 지금까지 전혀 못 봤고, 고로 지원할 필요를 못 느껴서.
터치스크린은 호주머니에 넣고 들고 다니는 기기만으로 족하지, 커다란 모니터에다가 지저분한 지문 묻히고 싶지는 않더라.

2. 에디트 컨트롤

아 그나저나 굉장히 뜻밖인 점인데, Windows 10은 에디트 컨트롤이 내부적으로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쳤는지 메모장이 수~10수MB에 달하는 파일을 순식간에 읽고 편집할 수 있게 됐다. 아주 최근에야 알았다. 직전의 8.1만 해도 안 이랬는데.
Windows에서 에디트 컨트롤은 전통적으로 단일 버퍼 기반이기 때문에 아주 큰 파일을 읽은 뒤 맨 앞부분에서 글자를 삽입하거나 지우면 랙이 장난 아니게 발생했다. 평생 영원히 안 고쳐질 줄 알았는데.. 이건 뜻밖의 긍정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먼 옛날, Windows 9x에서 NT로 넘어가면서 일단 황당한 64KB 제약은 없어졌다. 하지만 2000/XP급에서도 16비트 기준에 맞춰졌던 비효율적인 내부 알고리즘은 여전했기 때문에 메모장이 편집할 수 있는 실질적인 파일 크기는 겨우 몇백KB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게 Windows 10에 와서야 완전히 개선돼서 한계가 없어졌다. 참 오래도 걸렸다.

3. 마우스 휠의 적용 대상

마우스 포인터의 움직임이나 버튼 누름 메시지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포인터의 바로 아래에 깔려 있는 윈도우로 전달된다.
그러나 휠 굴림 메시지는 사정이 약간 다르다. 맥 OS는 여전히 바로 아래의 윈도우로 전달되는 반면, Windows는 전통적으로 키보드 포커스를 받고 있는 윈도우로 전달되곤 했다.

그랬는데.. Windows 10에서는 휠 메시지 전달을 어느 방식으로 할지를 지정할 수 있다. 내가 본 기억이 맞다면, 제어판의 마우스 카테고리엔 없고, '설정'이라는 메트로 앱으로 가야 한다.
콤보 박스에서 drop list는 열지 않고 키보드 포커스만 갖다 놓은 뒤 휠을 굴렸는데 콤보 박스의 selection이 바뀌지 않아서 마우스에 문제가 생겼나 의아해했는데 사실은 이렇게 동작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둘을 절충해서 일단 마우스 포인터가 놓인 창부터 먼저 고려하되, 그 창에 스크롤 바 같은 게 없어서 휠에 반응할 여지가 없으면 그 다음 순위로 키보드 포커스가 있는 창을 스크롤 시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4. 두벌식/세벌식 전환

세벌식 자판 사용자에게는 참 난감한 일이지만, Windows라는 운영체제는 기본 한글 IME에서 두벌식/세벌식을 전환하는 절차가 버전업을 거칠수록 더욱 복잡해져 왔다.

  • 98/2000/ME: 이때가 제일 나았음. 한영 상태 버튼을 우클릭했을 때 나오는 메뉴에서 글자판을 바로 고를 수 있었다.
  • 95: 한영 상태 버튼 우클릭 메뉴에서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꺼낼 수 있었고, 거기서 글자판을 고르면 됐다.
  • Windows XP/Vista/7: 우클릭 메뉴에서 "텍스트 서비스 및 입력 언어" 대화상자를 꺼낸 뒤, 거기서 한 단계 거쳐야 MS 한글 IME의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열 수 있다. 즉, 예전보다 한 단계 더 거쳐야 글자판을 바꿀 수 있다.
  • Windows 8 ~ 10: IME 브랜드 아이콘을 클릭 후 맨 아래의 '설정'을 고른 뒤, '한국어'를 골라야 MS 한글 IME를 찾을 수 있고, 거기서 또 '옵션'을 클릭하면 환경설정 대화상자를 열 수 있다. 이제는 두 단계를 거쳐야 된다.

요약하자면 XP 시절에 TSF라는 체계가 추가되면서 글자판 전환 절차가 급 까다로워졌으며, 8~10에서는 더 번거로워졌다.
사실 이건 TSF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MS 한글 IME가 옛날과는 달리 자체적으로 글쇠배열을 간편하게 전환하는 버튼이나 메뉴를 제공하지 않는 바람에, 운영체제 제어판 애플릿을 일일이 꺼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 근본 원인이다. 마소에서는 두벌식/세벌식 전환을 꼭 그렇게까지 기능을 노출해 줄 필요가 있을 정도로 자주 행해지는 동작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Windows 10 시절에도 본인의 세벌식 파워업 프로그램에 대한 수요는 없어지지 않고 있다.
사용자 차원에서 글쇠배열 전환 절차는 복잡한 편이지만, 그래도 Windows Vista 이래로 마소에서는 내부적인 두세벌 정보 저장 방식은 쓸데없이 이랬다 저랬다 바꾸지 않고 있다. 그 덕분에 거의 10여 년간 세벌식 파워업 프로그램도 핵심적인 동작 알고리즘이 크게 바뀔 필요는 없었다.

5. 프로그램 외형

Windows 10은 데스크톱 앱의 창 껍데기가 알다시피 전반적으로 하얗게 밝은 회색 계열로 바뀌었다. 8 시절에는 non-client 영역의 두꺼운 테두리가 배경 그림의 분위기에 맞춰 형형색색으로 바뀌곤 했는데 그건 없어졌다.
Visual Studio와 Office도 최신 버전이 다 그런 색으로 바뀐 걸 보면 이게 2010년대 마소의 디자인 트렌드인 듯하다. 다만, 활성화된 창과 비활성화된 창이 껍데기나 제목 표시줄에 배경색의 차이가 서로 전혀 없고 글자색만 살짝 달라지는 건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 상태를 분간하기 어려워서다.

어쩌면 저 디자인이 마소가 데스크톱 앱에다 선보이는 마지막 디자인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마소는 운영체제와 VS, 오피스 공히, 메이저 버전이 바뀔 때마다 프로그램 비주얼과 아이콘을 왕창 뜯어고치는 게 유행이었다. 맥OS 진영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그런데 그 관행이 이제 약발이 다해 가나 보다.
VS 2013과 2015, 오피스 2013과 2015는 웬일로 비주얼이 큰 차이가 없고 프로그램들 아이콘도 바뀌지 않았다. 마소 제품들에서 전반적으로 발견되는 추세이다.
심지어 미플이라든가 IE는 잘 알다시피 개발을 중단하고 유사 기능의 메트로 앱으로 대체한다는 선언까지 된 상태이다. 진작에 개발이 중단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 Html Help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또 2010년대 후반이나 2020년대로 가면 프로그램 외형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미래를 개척한다는 것 참 힘든 일이다.

6. 도움말

Windows 10은 로컬 도움말이란 게 사실상 완전히 없어졌는가 보다.
메모장 같은 기본 제공 프로그램에서 F1을 누르면 HTML 도움말이 뜨지도 않고 자기네들이 또 따로 만든 도움말 창이 뜨지도 않고 그냥 Edge 브라우저로 웹사이트 기반 도움말만이 달랑 뜬다.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으면 도움말을 열람할 수 없다. 도움말이 일체의 전용 프로그램이 없이 아예 이런 형태로 싹 바뀌어 버린 건 10이 처음인 듯하다.

덕분에 C:\Windows\Help 디렉터리를 보면 XP까지만 해도 예전엔 chm 파일들이 즐비했으며 웹페이지/플래시 기반의 신제품 데모 같은 볼거리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죄다 옛날 추억이 됐다.
PC 사용자들의 평균적인 컴퓨터 실력이 충분히 향상됐으니, 어차피 읽지도 않을 구질구질한 도움말들을 다 삭제한 건지는 모르겠다. 허나 Vista/7 때는 아예 '에니악'까지 소개하면서 컴맹을 대상으로 컴퓨터 기초를 일일이 소개하는 로컬 도움말이 있었는데 이건 너무 과격한 변화가 아닌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10 08:32 2016/09/1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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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답사기: 천장산, 낙산

컴퓨터도 더 작은 모바일로 바뀌고, 철도도 더 작은 경전철로 바뀌는 게 트렌드인지..
지금까지 산책삼아 다녀 온 작은 언덕들의 주요 탐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도록 하겠다.

1. 천장산

서쪽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연구소들이 가득하고 남쪽에도 산림 과학원, 카이스트 경영 대학원 등이 있어서 왠지 지적인 느낌이 드는 산이다. 그런 쪽 말고도 동남쪽에는 경희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의릉과 한국 예술 종합 학교(일명 한예종)이 있다.
게다가 산의 이름부터가 '하늘 아래 명당'이라는 뜻인데 이런 산을 오르는 느낌은 어떨지 궁금해서 지하철 6호선 상월곡 역에서 내려서 산책로를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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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아파트도, 교수 아파트도 아닌 과학자 아파트다. ㄷㄷㄷ 하긴, 과학자들은 국가를 먹여 살리는 기간 인력이지.
그런데 지금 '과학자 아파트'라는 단어로 구글링을 하면 온통 북한 소식만 검색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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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이렇게 빽빽한 나무들로 가득해서 산림욕을 즐기기 좋았다.
단, 천장산은 앞서 말했듯이 산기슭에 여러 연구소와 심지어 문화재까지 있는 관계로 접근이 통제된 곳이 아주 많았다. 사방팔방 등산로가 뚫려 있는 봉화산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다.
일단 국립 산림 과학원이 관리하는 '홍릉숲' 영역은 전부 펜스가 쳐져서 막혀 있었다. 서쪽의 연구소 방면도 접근 불가이며 거기 있는 건물들을 구경도 할 수 없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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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41m짜리 낮은 산이니 정상에는 아주 금방 도달한다. 그런데 홍릉숲 말고 맞은편 쪽도 전부 펜스가 둘러져서 막혀 있다. 펜스 건너편은 '의릉' 쪽에서 올라와야만 갈 수 있다.
즉, 그냥 동네 뒷산 오르듯이 오르면 천장산은 거의 셰어웨어 데모 수준만 구경할 수 있었다. 갈 수 있는 경로가 단 한 곳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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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는 북서쪽을 바라보는 딱 한 곳에만 있었다. 북부 간선 도로를 넘어 가까이 있는 언덕은 북서울 꿈의 숲 내지 오패산이고, 저 멀리 보이는 높은 산은 그냥 북한산이다.
여기를 지난 뒤부터는 선택의 여지가 없이 그냥 계단을 따라 꼭대기에서 하산하며, 산기슭 둘레길을 따라 계속 걸으면 한예종의 입구에 도달하게 되었다. 의릉을 가려면 한예종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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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릉은 서울 동대문구· 성북구 주민, 제복 입은 현역 군인, 한복 착용자 등등이 무료 입장 가능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입장료 1000원을 내야 들어갈 수 있었다. 풀밭이 참 깔끔하게 닦여 있던데.. 본인은 여기서 천장산을 다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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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제 산의 진짜 꼭대기에 도달했다. 위의 사진에서 연두색 펜스 왼쪽이 처음 들렀던 곳이고, 지금은 의릉 쪽에서 산을 다시 올라 있다. 의릉 쪽 등산로는 정상까지 나무 판자 내지 시멘트로 마치 협궤 철길 같은 등산로가 닦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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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의릉 방면에서 산을 한 바퀴 도는 쪽으로 하산했다. 저 멀리 경희 대학교 평화의 전당이 보였지만 길이 봉인돼 있어서 그쪽으로 직접 갈 수는 없었다. 여기는 통제 구역이 많아서 산을 종단할 수 없으며, 들어왔던 의릉 입구로 되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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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나무들에 둘러싸인 초록색 지붕의 건물이 무엇인가 궁금했는데, 나중에 지도와 대조해 보니 저건 한예종 미술원 건물이었다. 본캠 건물과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다.

한예종이 있던 이곳에는 잘 알다시피 안기부 청사가 있기도 했다. 남산 청사와 더불어 이렇게 천장산 청사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다 합쳐져서 내곡동으로 간 것이다. (의릉 근처에 있던 것이 지금은 헌릉 근처로 바뀌었다는 게 흥미롭다.) 사실 아까 그 미술원 건물도 과거에는 안기부 건물의 일부였다고 함. 그러니 그 시절엔 민간인이 이렇게 천장산에 자유롭게 접근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안기부 강당 건물은 리모델링되거나 철거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하나 남아 있었다. 별로 볼 건 없이 썰렁해서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그 강당에서 지난 1972년에 남북 7· 4 공동 선언이 발표됐다고 한다.

이렇게 의릉과 천장산 구경을 한 뒤, 본인은 무작정 한예종 캠퍼스를 지나서 큰길을 찾아 쪽문 밖으로 나갔다. 초행길이었지만 이렇게 나가는 게 맞았다. 아파트 단지를 지나자 이내 버스가 다니는 길이 나오고, 상월곡 역의 다음 역인 돌곶이 역이 나왔다. 이렇게 여행을 마쳤다.

2. 낙산

낙산은 안습한 높이 때문에 온통 아파트와 건물로 뒤덮인지라, 항공 사진을 봐도 산 같아 보이지가 않을 정도이다. 그래도 지형상 엄연히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는 산이며, 꼭대기에 도달하고 나면 서울의 중심부에서 번화한 대학로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다. 산이라고 하면 보통 2차원 공간이 연상되지만 낙산에서 공원에 속하는 영역은 한양 도성을 따라 길쭉한 '길'이라는 1차원적인 성격이 강하다.

동대문(흥인지문)이 있는 교차로에서 북쪽을 보면 한양 도성이 시작되고 땅의 고도가 높아진다. 평소에 여기를 종종 자동차를 몰며 지나가기도 하는데, 저 성곽 공원에는 무엇이 있을지 언젠가 한번 땅밟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지난번에 남산에서 한양 도성 구간을 지나면서 더욱 강해졌다.
그래서 지하철 동대문 역에서 내린 뒤, 실제로 성곽을 따라 북쪽으로 계속 낙산을 올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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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대문은 너무 외진 곳에 있어서 존재감이 없었고, 동대문과 남대문은 왕년에 임진왜란 때 왜군이 통과하기도 한 뜻깊은(?) 곳이어서 존치. 그 반면 서대문은 다른 명분이 없어서 일제 강점기 당시에 노면 전차 복선화를 구실로 헐림...;; 뭐 이런 말이 있던데.
어쨌든 동대문은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동대문의 양 옆으로는 동소문(혜화문), 그리고 남소문(광희문)이 있다. 비록 성곽은 동소문 방면 것만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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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오르막을 오르자 주택은 뜸해지고 고급 카페와 전망대가 보이기 시작했다. 주거지 대신 공원 티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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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너머 건너편도 굉장한 고지대인 것 같은데 저기에도 집들이 빽빽하다. 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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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니 정상까지 시내버스도 다니고 있었다.
예전에 교회 친구들과도 낙산 공원에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남쪽의 동대문 쪽에서 안 오고 서쪽의 대학로 쪽에서 오르느라 성곽이 있는 이곳까지 올라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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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밖으로 나가니 한성 대학교가 바로 내려다 보였고, 그 밖에 경치는 대략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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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인가 제3 전망광장까지 가니 성곽이 잠시 끊어졌고, 본인은 여기서 산을 내려갔다. 요런 계단을 내려가니 또 빽빽한 빌라촌이 나왔고, 거기를 지나자 각종 극장들이 보였다. 방통대 건물이 멀리 보이길래 거기와는 90도 수직인 방향으로 이동하여 큰길을 찾았고, 이내 지하철 혜화 역에 도달하여 산책을 마쳤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7 08:33 2016/09/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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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도시들의 경전철

서울시는 지난 2009년에 첫 개통한 지하철 9호선을 마지막으로, 중전철 형태로 건설하는 도시철도 지하철은 이제 없을 예정이다. 요즘 서울 주변에 중전철로 건설되는 도시철도들은 엄밀히 말하면 다 광역전철로, 건설 주체가 서울시가 아니다. (성남여주, 원시소사, 신분당, 신안산 등)

한편, 서울 바깥의 사정을 살펴보면, 2005년에 개통한 부산 지하철 3호선은 건설될 때부터 모든 역들에 스크린도어가 같이 설치된 최초의 지하철이다. (스크린도어 없이 완공된 마지막 지하철은 2004년의 광주 지하철) 대구 지하철 2호선은 같은 2005년에 부산보다 아주 약간 일찍 개통했지만 스크린도어 규격이 갖춰지지는 않았다.

그 이듬해인 2006년에 대전 지하철 1호선이 개통했다. 2005년을 전후하여 비슷한 시기에 개통한 부산3, 대전, 광주 지하철은 모두 한국형 표준 중(重)전철의 '중(中)형 전동차' 모델을 그대로 도입한 형태의 차량을 운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량의 외형이 다들 비슷하다. (서울은 대형 전동차)

자,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중형 전동차 기반의 중전철이 개통한 것은 현재로서는 2006년 대전 지하철 1호선이 마지막이며, 이거 이후로 우리나라에 그런 체급의 지하철 내지 도시철도가 개통한 건 지금까지 없다(기존 노선의 연장은 제외). 2000년대 후반부터 개통하고 있는 전철들은 다 '경전철'이다. 통상적인 중전철보다 체급이 더 작고 수송력이 더 적고 건설· 운용 비용도 덜 드는 물건이다.

중전철은 1435mm 표준궤 쇠바퀴에다가 전기 규격도 직류는 1500V, 교류는 25000V로 딱 통일이 돼 있지만 경전철은 그런 표준이 정해진 게 없어서 규격의 파편화가 굉장히 심했다. 그나마 오늘날은 "철제 차륜은 1435mm 표준궤, 고무 차륜은 1700mm 광궤" 정도의 규격은 통일이 됐다.

참고로 경전철이라고 해서 무슨 협궤를 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옛날 수인선 협궤 디젤 동차는 열차 덩치나 수송량으로 보면 영락없는 경전철 급이지만 걔는 애초에 동력원부터가 전철이 아니었고.. 오늘날의 우리나라 철도는 협궤하고는 어떤 형태로든 인연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제 인천 지하철까지 2호선이 개통했으니 오늘은 전국의 경전철들에 대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쭉 정리해 보겠다.

1. 개통 시기
한때는 수도권에서 의정부 경전철과 용인 경전철이 국내 최초의 경전철이 될 뻔했다. 하지만 다 수익성과 관련된 어른들의 사정이 너무 복잡해서 연기에 연기를 거듭했으며, 이 때문에 경전철 최초 개통의 영광은 수도권이 아닌 부산이 뺏어 가 버렸다. 한때 3호선의 지선으로 계획했던 4호선, 그리고 김해 경전철이 모두 2011년 봄과 가을에 차례로 개통했기 때문이다.
그 뒤 의정부 경전철이 2012년 7월에 부랴부랴 개통했고 용인 경전철은 2013년 4월이 돼서야 개통했다. 대구 3호선과 인천 2호선은 각각 2015년 4월과 2016년 7월에 뒤를 이었다.

2. 궤간
철차륜을 쓰는 용인, 김해, 인천 2호선은 표준궤를 쓰고 있다. 부산 4호선은 고무차륜인 관계로 1700mm 광궤 기반. 의정부 경전철은 고무차륜인데, 1700 표준이 제정되기 전에 건설된 관계로 1620mm 궤간을 혼자 쓰는 처지가 되었다. 고무차륜 경전철은 레일도 철이 아니라 콘크리트이다.
대구 3호선은 잘 알다시피 국내 경전철 중 최초로 도입된 모노레일이다. (궤조가 아래 중앙에..) 모노레일이지만 차체의 폭은 중전철 중형 전동차에 뒤지지 않는다.

3. 전원
경전철답게 중전철 직류의 절반인 직류 750V를 쓰며, 전부 제3궤조 집전식이다. 즉, 모든 경전철들은 중전철과는 달리, 공중에 전차선이 주렁주렁 달린 게 없으며 직교류 겸용 전동차 같은 것도 없다. 기존 일반 전기철도와 직통 운행하는 것은 물론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다만, 대구 3호선 모노레일은 어찌 된 일인지 전기 규격이 중전철 지하철과 같은 규모인 직류 1500V라고 한다.

4. 영업거리
다들 10~20km대이다. 하지만 김해 경전철(23.4km)은 부산과 김해를 연결하고 공항까지 연계하는 만큼 거리가 제법 되며, 대구 3호선(23.9km)과 인천 2호선(29.2km)도 상당히 긴 편이다.

5. 지상/지하 분포
모든 경전철이 반드시 지상으로만 다니는 건 아니다. 부산 4호선과 인천 2호선은 지상과 지하 구간이 공존한다. 인천 2호선의 경우, 종점 부근과 인천 아라뱃길을 횡단하는 구간만 지상이고 나머지는 다 지하이다. 지상에서 지하를 오르내리는 선로의 경사가 일반 중전철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급한 걸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노선을 제외한 나머지 경전철들은 전구간 지상 고가이다. 하지만 서울에 건설되는 경전철들 중에는 전구간 지하도 있을 예정이다. 자세한 것은 후술 예정.

6. 차량 편성
"표준궤 철차륜 2량 1편성" 요게 뭔가 표준 레퍼런스인 것 같다. 김해와 인천 2호선이 이를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의정부는 고무차륜 2량이며, 대구 3호선 모노레일은 3량이다.
좀 특이한 예외는 용인 경전철로, 무슨 버스처럼 1량 1편성인데 폭은 오히려 중전철 대형 전동차보다도 더 크다. 경전철 도입 초기에 혼자 독자적인 선형 유도 모터 기반의 봄바르디에 차량을 수입해서 쓰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산 4호선도 예외적인데, 3호선(4량)보다도 더 많은 6량 1편성을 하고 있어서 경전철 중에 차량 편성이 가장 길다.

7. 운전 형태
2인 승무 이런 건 경전철 세계에서는 완전 사치일 뿐이다.
중전철에서는 현재 신분당선만이 무인 운전을 하고 있지만 경전철들은 전부 무인 운전이 기본이다. 차량 안에서 전방과 후방을 볼 수 있다.
김해와 대구 3호선 같은 일부 노선에서는 그나마 안전 요원이 동승하긴 하지만, 신분당선처럼 전기 철도 운전 면허가 있는 정식 기관사가 아니라 그냥 알바 수준의 저렴한 인력이라고 한다.
용인 경전철의 경우 승강장에 스크린도어조차도 없다. 누가 선로에 떨어지면 즉시 비상 정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굳이 또 돈 들여서 마련하지 않은 거라고 한다.

이렇듯, 경전철과 중전철은 외형이나 내부 규격이 많이 다르다. 다만, 이 두 철도 시스템을 법적으로 가르는 근본 기준은 전기 규격이나 궤간 같은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무게, 즉, 축중 하중이라고 한다.

참고로, 서울시도 중전철 지하철만이 건설을 마쳤을 뿐이지 내부에 경전철을 또 만들고 있다.
신설동-우이동선은 서울 지하철 12호선의 후신이기도 한데, 인구 대비 지하철이 4호선밖에 안 지나는 그쪽 동네의 교통난 해소에 도움이 되리라 예상된다. 2량 1편성에 표준궤로, 전구간 지하이고 차량 기지까지도 지하에 있다. 차량 덩치만 작은 평범한 지하철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그 복잡한 서울에서 지상/고가 도시철도를 만든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이니까.
왕십리까지 갔으면 좋겠지만 거기가 이미 철도 노선이 4개나 지나고 지상과 지하 구조가 너무 복잡한 동네여서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만들어지고 있는 곳은 남부의 일명 신림선인데, 얘는 의외로 규격이 3량 1편성짜리 고무차륜으로, 규격이 우이동선과는 다르다. 아무쪼록 서울시에서 경전철을 구경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들을 종합하면, 서울-부산-대구의 순으로 개통해 온 기존 중전철 지하철과는 달리, 경전철은 어째 부산-수도권-서울의 순으로 역순으로 개통해 왔다.
그래도 코레일이 운영할 예정인 부산-울산 동해선 광역전철은 경전철이 아니며, 수도권과 마찬가지로 중전철에 그것도 대형 전동차이다. 수도권에 광역전철이 개통한 게 1970년대인데.. 무려 40년이 넘도록 지방에서는 뭘 하고 있었나 모르겠다. 시기가 너무 늦은 감이 있다.

그리고 경전철의 규격에 대해서는 "750V 제3궤조, 무인 운전, 철 또는 고무 차륜, 2량 또는 이에 준하는 수의 편성"을 생각하고 있되, 종류에 따라서는 바리에이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면 되겠다. 비록 개통은 선수를 빼앗겼지만 아주 초창기에 추진을 했던 의정부와 용인은 규격면에서 혼자 독특한 면모가 좀 있었다. 허나, 그 뒤에 만들어진 경전철들은 차츰 획일화가 진행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4 08:29 2016/09/0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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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 기간 정산

1. 폭염과 열대야의 악몽

여름은 참 최악의 계절이다. 끝이 안 보이는 미친 날씨 때문에 차박(내 인생의 큰 낙), 등산(운동..;;), 거리설교(교회), 자전거 출퇴근(회사)은 오래 전부터 몽땅 올스톱 됐다. (그런데 이런 날씨에도 끝까지 근성으로 교회에서 매주 거리설교 나가시는 분들은 완전 존경을..)

어떻게 자정~새벽 2시 한밤중에 기온이 이렇게 높을 수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아침 8~9시 무렵이면 이미 오후 2~3시처럼 덥다. 그나마 새벽 4~6시 사이가 가장 인간적인 생활이 가능한 시간대인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괴로운 건 시간대를 불문하고 지하철 승강장이 너무 덥다는 것이다. 일단 차를 타고 나면 차 안은 시원하긴 하지만, 지하철을 기다리는 단 몇 분 동안에 이미 옷이 땀으로 흠뻑 젖곤 했다.

여름이 겨울보다 좋은 건 정전기 없고 손이 시렵지 않고(밖에서 놋붉 꺼내서 코딩할 때..), 아침에 피부가 트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 말고는 전부 단점뿐이다. 다만, 워낙 더워서 그런지 8월부터는 그래도 모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고 적(바다)· 녹조(강) 소식이 예전만치 심하게 들리지 않았으며 차 송풍기의 냄새가 싹 사라진 건 일말의 다행스러운 점이다.

변변한 태풍 하나 없을 정도로 무더위와 가뭄이 심각했건만, 옛날처럼 언론에서 가뭄이다, 절수, 제한급수 이러면서 호들갑을 안 떤 것부터가 4대강 같은 전국적인 치수 사업을 잘한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여름은 절대로 그냥 못 지나갔을 텐데 말이다.

어디 지형적으로 유속이 느려지는 곳은 여전히 녹조가 생기긴 하지만 그건 4대강 때문이 아니라 4대강 덕분에 그것밖에 안 생긴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물 관리를 안 했으면 뭐 녹조가 없긴 했을 것이다. 그냥 바짝 마르고 쩍쩍 갈라진 강바닥만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화력 발전을 안 한 덕분인지, 고등어를 없애 버린 덕분인지 언제부턴가 미세먼지 얘기도 쏙 들어갔다.

이럴 땐 그래도 산기슭에 있고 중앙 냉방도 나오는 학교 연구실이 시원하고 좋다. 하지만 이제 수업 학점은 다 채웠고 학위논문 지도를 받을 때까지는 당분간 휴학을 하게 되는데, 이제부터는 학교에 차를 가져갈 수 없어서 접근성 메리트가 크게 떨어진다. 등록을 해야만 정기주차 신청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학 기간엔 회사를 더 자주 나가고 특히 이번 방학 동안에는 한마음 미션에서 성경 강의도 뛰느라 학교엔 사실상 더욱 갈 여유가 없었다.
그 대신 집 근처 카페(낮과 저녁)와 패스트푸드점(심야)에 피서 가서 코딩을 하는 신풍조가 생겼다. 집에 혼자 있는 것보다도 거기가 생각보다 집중 잘 되고 능률이 좋더라. 음료수값 정도 투자할 가치는 있어 보인다.

올해가 가기 전에 서해, 동해, 남해를 다 구경하고 오고 싶다. 시원하고 차 세울 수 있는 공터가 넘쳐나는 외지에서 차박을 실컷 하고 싶다. 자동차는 훌륭한 이동식 텐트이다.
가을 이후부터는 등산도 다시 계속할 것이다. 가야 하는 산들이 몇 개 더 남아 있다.
그리고 내년에는 여권의 유효기간이 1년 남짓 남는 관계로, 마지막으로 여권에 도장을 하나 더 남기고 올 예정이다. 사증란이 아직 한참 남아 있는데.. -_-;; 어디로 갈지는 아직 미정이다.

그나저나 자가용을 굴리고 나니 개인적인 철덕 기질과는 별개로 예전보다 열차를 확실히 덜 타게 된다.
예전 같았으면 진작에 답사 다녀 왔을 수인선과 서울 9호선 연장 구간, 신분당선 이런 것들도 아직 못 가 봤다. 내가 사는 곳에서 너무 멀기도 하다만.

2. 코딩 드립

진실로 수확할 것은 많되 일꾼들이 적도다.
진실로 코딩할 것은 많되 체력과 머리가 따라주지 못하는도다.

코딩하고 싶은데 코딩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콤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가 아니라 철덕은 코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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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이야, 이거 재미있어.. 그래, 코딩이!
이전에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던 기능들이 새로 구현된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게 재미가 없을 리가 있나.
그래서 내가 코레일에도 안/못 들어가고 이 짓 하고 있는 거 아니겠는가?

예전에도 말을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프로그램 짜는 거 자체보다도, 그 전에 제한된 시간과 지능 하에서 코딩을 무엇부터 어떻게 할지, 프로그램 짜는 절차를 먼저 프로그래밍하는 것도 굉장히 치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그래야 손발이 덜 고생하기 때문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 8.6 (다음 버전)은 대박 예감을 하고 있다.
아, 굳이 많은 사용자를 확보한다거나 수익을 많이 낸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내 기준과 논리 체계 하에서 구조적인 대박이 확실시된다는 뜻이다.

3. 여러가지 사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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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한번 시원스레 잘 내린다. 한창 학교에 틀어박혀서 종합 시험(논문 제출 자격 시험) 공부를 하던 때의 풍경이다. 학교에서 외박을 했다.
7월 초까지만 해도 아직 장마철이어서 종종 비도 오고, 이른 아침엔 그렇게까지 덥지는 않았었는데 얼마 못 가 날씨가 불지옥 급으로 바뀌었다.
참고로 본인이 이 사진을 찍고 있던 동안 여기서 400m쯤 떨어진 곳에 있던 중앙 도서관은 지하가 침수돼서 매스컴까지 타고 난리가 났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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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근처에는 인위적으로 조성된 공원 말고도 '매봉산'이라는 아주 작은 언덕이 있다. 사실 이게 다른 공원들보다 지하철역에서도 더 가까이 있다. 얘는 높이나 면적이 강남구의 매봉-도곡 역 근처에 있는 또 다른 '매봉산'과도 비슷해 보인다. 둘 다 산책용 근린 공원이 조성돼 있다.

단, 응암동 매봉산은 도곡동 매봉산에는 없는 시설이 있다. 바로 유류 저장고.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6년엔 매봉산 기슭에 석유 비축 시설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1978년엔 여기 근처에 난지도가 만들어졌다. 그 시절에 여기는 인서울이 아니며 민간인 거주를 의도하지 않은 완전 외곽 변두리로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난지도도 폐쇄되고 월드컵 경기장이 건설되자 여기는 민간인 친화적인 곳으로 탈바꿈했다. 석유 비축 시설은 다른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제는 더 쓰이지 않는 동그란 석유 탱크는 녹슨 채로 매봉산 등산객들을 맞이하는 중이다. 이제는 더 쓰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탱크들은 지금도 여전히 민간 지도의 항공 사진에 표시되어 보이지 않는다. 현재는 탱크를 완전히 철거하고 거기 일대를 리모델링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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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5호선의 종점인 마천 역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쭉 걸어가면 군부대가 나오고 남한산성 방면의 청량산 등산로가 이어진다.
그런데 거기서 북쪽으로 쭉 걸어가면 '천마산'이라고 봉화산보다도 더 아담한 언덕과 함께 근린공원이 조성돼 있다. 이 산의 건너편은 하남시.
지형이 흥미로운 것 같아서 여기도 한번 원정 산책을 갔다 왔다. 주차 공간도 있어서 접근성이 나쁘지 않았다.

4. 비행기 조종

교회 어르신 중에 공군 관계자가 계셔서..;; 올여름엔 난생 처음으로 비행기 조종이라는 진귀한 경험을 한번 해 봤다.
씨러스 SR22 경비행기로 사천 공항에서 청주 국제공항 중간 기착 후, 김포 국제공항까지 날아가 봤다. 물론 시뮬레이터로. (세종 대학교 모의 비행 훈련 센터)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항공 시뮬 게임을 해 본 거라고는 초딩 시절에 1990년도 LHX (공격 헬기)가 전부였다. 그 흔한 플심 같은 것도 전혀 안 해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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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승 경비행기인지라 순항 속도 자체는 KTX와 별로 차이가 안 났지만 (1) 중간 정차 안 하고 (2) 지형 안 타고 직선으로 쭉 가고 (3) 가감속이 훨씬 더 민첩하기 때문에 정말 금방 이동했다. 우리나라가 땅이 얼마나 좁은지 알 수 있다. 지금 같은 경제력과 구매력으로 일본처럼 인구 1억에 국토 길이가 1천 km는 돼야 그나마 비행기가 국내선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하철 전동차의 마스콘은 내가 있는 쪽으로 당겨서 가속을 하고 앞으로 밀어서 감속을 한다. 이게 자동차의 액셀과 브레이크 페달 역할을 한다.
철도 차량과는 달리, 비행기의 엔진(스로틀) 레버는 앞으로 밀어서 출력을 올린다. 특별히 글라이더처럼 활강을 하는 게 아니라면 엔진은 자동차로 치면 오르막을 오를 때처럼 늘 켜져 있으며, 마치 송풍기 풍량을 조절하듯이 출력 강약을 조절할 뿐이다. 변속이나 엔진 브레이크(연료 공급이 아니라 바퀴 회전 관성 의해 엔진도 역으로 회전수가 덩달아 유지되는 것) 같은 건 없다.

비행기는 가만히 놔두면 내 예상 이상으로 뒤집히거나 자세가 불안정해지기가 쉬운가 보다. 시뮬레이터만으로도 그게 느껴졌다. 조종간 잡는 거, 그리고 착륙할 때 고도와 속도, 위치 잡는 거 꽤 힘들었다. 물론 착륙 테크닉은 기계화 자동화도 돼 있을 것이고, 자동차로 치면 마치 주차 테크닉처럼 많이 해서 경험이 쌓이면 실력이 금방 늘겠지만 아무래도 속도감이 잘 안 느껴지는 공간에서 기체의 위치를 원하는 대로 맞추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정말 안 움직인다 싶은데 좀 한눈 팔다 다시 아래를 보면 풍경이 싹 바뀌어 있다. 비행기 타는 경험이 그렇다.
시뮬레이터의 가격만 해도 시뮬 대상인 비행기 자체의 가격과 비슷한 어마어마한 고가이다. 단지, 한번 도입한 뒤에 유지비가 비행기 실물을 띄우는 것보다 압도적으로 더 저렴할 뿐이다.

조종간, 브레이크, 플랩, 스로틀 레버 정도를 만져 봤고 나머지 계기는 정신이 없어서 머리에 경험을 못 담았다.
가이드를 해 주신 교관님은 밑에 지형을 척 보더니 여기는 어디쯤이고 저 멀리 있는 산은 무슨 산이고.. 남한 땅 지형 지리 정보가 머리에 다 입력돼 있으신 듯했다.
그야말로 자기 손바닥 안처럼 다 파악하고 계셨다. 20년 가까이를 전투기 몰고 전국의 하늘을 날아다니신 짬이 어디 간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비행기 얘기· 군사 안보 얘기, 교회 얘기 등등도 많이 나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01 08:32 2016/09/0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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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형차가 대형차를 추돌

요즘 자동차들은 안전 장치들이 워낙 발달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차가 폐차 수준으로 박살 날 충돌· 전복 등의 사고가 나도, 탑승자는 벨트만 잘 매고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경상 수준을 넘지 않고 잘 살아남는다.
하지만 이런 발전하는 기술에도 불구하고, 소형차가 대형차를 들이받으면 여전히 십중팔구 중상· 사망 급의 사고가 난다. 당연히 소형차에서.

물론 차량의 덩치와 무게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양 차체의 높이 차이로 인해 소형차가 범퍼와 엔진룸부터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 앞유리와 A필러를 직통으로 거쳐(;;) 캐빈(탑승 공간)이 곧바로 박살나기 때문인 게 무척 크게 작용한다.
영화 <테이큰>에서도 공사장 차량 추격씬에서 이게 잘 묘사돼 있다. 브라이언을 쫓던 마지막 악당이 불도저의 블레이드 부분과 정면충돌하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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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앞이 꽉 막힌 담벼락을 꼬라박는 것보다도 이런 유형이 더 치명적인 사고인 것이다. 저 악당은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가로등도 안 켜진 깜깜한 길가에 그것도 커브길에 불법주차된 대형 트럭을 뒤늦게 발견하고 들이받는 바람에 승용차 운전자가 골로 간 사고 사례가 종종 전해지곤 한다. 링크를 거는 이 사고에서도 탑승자 2명이 모두 숨졌다.

이런 유형의 사고의 극단적인 사례로는 지난 2014년 10월 28일, 호남 고속도로 상행선에서 발생한 교통사고가 있다. 군 입대를 하는 친구를 배웅하러 애들이 5명이서 승용차를 렌트해서 달렸는데.. 과속 상태로 커브를 틀다가 균형을 잃고 갓길에 서 있던 4.5톤 트럭(도로 보수 차량) 후미를 들이받았다.
차가 트럭의 밑으로 말려 들어가면서 딱딱한 트럭 짐받이가 딱 저렇게 캐빈을 강타했으며, 이 때문에 차는 그야말로 박살이 났다. 그리고 입대 당사자를 포함한 탑승자 5명은 전원 사망하고 말았다.;;; 당사자의 지인뿐만 아니라 여친까지 다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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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자동차 회사들은 범퍼뿐만 아니라 앞유리와 A필러(앞유리+앞좌석 사이의 지지대)도 최대한 튼튼하게 만든다.
먼저 앞유리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다.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금만 쩍쩍 갈 뿐 '와장창' 깨지지 않게 유리에다 온갖 첨가물을 섞어서 특수한 방법으로 제조된다.

다음으로 A필러도 단순한 금속 기둥이 아니며, 여기에도 자동차 회사들의 기술이 집약된다. 그래야 (1) 차량이 전복되거나 (2) 차량 위로 위험물이 떨어지거나, (3) 저렇게 차체가 높은 장애물과 충돌하더라도 차의 형체가 '최대한' 유지되고 캐빈 내부가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 때문이다. (1)과 (3)은 그렇다 치더라도 (2)도 적재 불량 화물차에서 뭔가가 떨어질 때 내지, 도로에 떨어진 이물질을 앞차가 밟으면서 튕겨 올라가서 뒷차를 강타할 때처럼 생각보다 발생 가능성이 높은 돌발상황이다.
물론 이렇게 하고도 탑승자가 사망 혹은 중상으로 귀결되기 십상이지만 이것도 그나마 옛날 자동차보다는 생명을 많이 구한 결과이다.

평상시에야 A필러는 차량이 모퉁이에서 회전할 때 운전자에게 측면 사각지대를 만들어서 회전축 안에 있는 장애물이나 사람을 못 보고 부딪치게 만드는 위험 요소이다. 그러나 이게 사고 시에는 자동차 내부의 탑승 공간을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꽤 중요한 안전 장치 역할을 한다. 이렇듯, <테이큰> 영화 한 장면으로부터도 자동차 안전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을 할 수 있었다.

2. 대형차가 소형차를 추돌

위의 경우와는 반대로 대형차가 소형차의 뒤를 추돌하면..
이것도 역시 상황이 별로 다르지 않을 듯하다. 소형차는 다 박살이 날 것이다. 특히 대형차가 엄청난 운동량을 이기지 못해 소형차를 깔고 올라타는 지경에 도달하면 제아무리 단단하게 만든 A필러라 해도 다 짓이겨질 것이고 탑승자는 전원 사망 확정이라고 봐야 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2009년 4월 23일의 서울 수유동 대형 관광버스 교통사고이다. 관광버스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모두 하차시켜 주고 공차 회송 상태였다. 버스 기사는 모든 업무를 마쳤으며, 이제 차를 회사에다 세워 놓고 퇴근하는 일만 남은 상태였다. 그런데 하필 이때 날벼락이 떨어졌다. 평소에도 정비 불량으로 인해 맛이 갈 기미를 보이던 브레이크가 4· 19 묘지 인근의 어느 내리막길에서 드디어 말을 전혀 듣지 않기 시작했다.

급발진 수준은 아니었겠지만 내리막이니 차량은 점점 속도가 붙었으며, 가로수와 승용차 몇 대를 들이받고도 멈추지 않았다. 결국 신호 대기 중이던 승용차 한 대를 추돌한 걸로도 모자라 그 차를 밑에 깔고서 160미터 가까이를 밀고 갔으며, 더 앞의 승용차 7대를 추가로 들이받고 전신주를 들이받고서야 멈췄다. 승객이 탄 것도 아니고 빈 버스인데도 속도가 붙자 엄청난 파괴력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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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게 깔린 채로 끌려간 승용차에는 계모임을 마치고 찻집으로 이동하던 학교 교직원들이 하필 7명이나 구겨서 타고 있었는데.. 아무도 차에서 살아서 나오지 못했다. 그 어떤 알량한 안전장치라도 이 정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이렇게 끝나게 될 거라고는 전혀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투신 자살하는 사람한테 깔려 죽는 것만큼이나 정말 운 한번 더럽게 없다.
듣기로는 2차를 가지 않고 먼저 귀가한 계 멤버 딱 한 명만 화를 피해서 살아 남았다고 전해진다. =_=;;;

이 사고로 버스 운전사, 버스 회사 사장, 버스의 정비 업체까지 줄줄이 경찰에 소환되었다. 너무 큰 피해가 났기 때문에 버스 운전사는 징역 2년 6월형을 받았다. (참고로 2010년 7월 3일, 인천대교에서 고장난 마티즈 CVT를 피하려다가 교각 아래로 추락해서 14명의 사망자를 낸 공항 리무진 운전자는 금고 3년형이 선고됐다. 1차 원인 제공자인 김여사는 금고 1년.) 그만큼 무거운 대형차 운전자는 사고가 났을 때의 책임이 막중하다.

그리고 또 안타까운 사고가 더 있었다. 2013년 12월 14일, 경부 고속도로 하행선의 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방면에서는 승용차 간의 접촉사고 때문에 후속 차량들의 정체가 시작됐는데, 이걸 뒤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또 4중 추돌 사고가 났다.
문제른 부딪친 차량들의 배열 순서였다. 맨 앞은 그랜저였고 그 뒤는 25톤 탱크로리. 그 뒤엔 벽돌을 가득 실은 25톤 화물차였는데.. 양 25톤짜리 대형차의 사이에는 승용차가 한 대 있었다.

25톤 화물차는 운동량을 주체하지 못하여 앞의 승용차를 그대로 짓눌렀고, 승용차는 양 대형차 사이에서 완전히 으스러졌다. 승용차에는 두 집에서 제각기 남편만 빼고 아내와 자녀 두 명이 타서 총 6명이 타고 있었는데.. 이 사고로 모두 끔살 당했다. 두 집의 가장들은 하루아침에 처자식을 모두 잃는 날벼락을 맞은 것이다.

이런 사고는 올해에도 계속됐다. 지난 5월 16일엔 남해 고속도로의 터널에서 대열 운행을 하던 관광버스들이 정체 구간 급정거로 인한 9중 연쇄 추돌 사고를 냈는데, 전후의 관광버스 사이에 끼여 있던 모닝 승용차가 다 짜부러지는 바람에 거기서만 탑승자 4명이 모두 숨졌다. 그리고 이걸로도 모자라서 7월 17일엔 영동 고속도로 봉평 터널 인근에서 관광버스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앞차를 네댓 댄가 연달아 들이받고 특히 바로 앞의 K5 승용차를 완전히 짓뭉갰다.

영동 고속도로의 사고는 대열 운행도 없었고 브레이크 고장도 아니었고 순수하게 운전 기사가 졸다가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낸 것이었다. 앞차엔 강원도로 피서 여행을 다녀 오던 20대 여대생 4명이 차를 꽉 채워 타고 있었는데 모두 남해 고속도로 사고처럼 비명 한 마디 못 지르고 전원 즉사했다. 운전자 남성 한 명만 중상.
이 글에서는 사진 첨부는 생략하지만 이들 역시 잔해의 모습이 위에서 소개한 것들 만만찮게 처참했다. 소형차는 대형차의 곁을 달려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확인하게 된다.

그럼, 이런 충돌 사고가 났을 때 꼭 대형차의 탑승자만 생존에 무조건 유리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2013년 8월 7일, 중부 고속도로에서는 운전 중 시비가 붙어서 한 승용차 운전자가 고속도로 위에서 차를 고의로 급정거하는 미친 짓을 했다. 시비가 붙은 차와 추가로 뒷차 3대까지는 급정거를 했지만, 다섯 번째로 달려오던 5톤 트럭은 제대로 정지하지 못하고 앞차를 모조리 들이받았다.

그런데 이 사고에서는 가장 큰 차를 몰고 가장 뒤에서 추돌한 트럭 운전자 한 명만 숨졌다. 트럭은 승용차와는 달리 전방에 엔진룸이 없어서 전방을 들이받으면 운전석이 곧장 충격을 받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고와 비극을 야기한 고의 급정거 운전자는 징역 7년 구형에 3년 6월형이 확정되는 엄벌을 받았다. 앞서 거론된 버스들의 사고보다 사상자 수는 적지만 죄질이 워낙 나쁘기 때문이다. 부디 길을 틀어막고 만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보복· 위협운전이 근절되기를.

3. 음주운전자가 낸 후방 추돌 교통사고

지금까지 차량 대파와 인명 사고를 야기하는 교통사고를 후방 추돌 위주로 살펴봤다.
후방 추돌은 정면 충돌보다야 충격량이 작을지 모르지만, 승용차의 경우 연료 탱크가 뒤에 있기 때문에 이걸로도 화재가 발생할 수 있어서 더욱 위험하다.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멀쩡히 잘 가고 있는 앞차를 뒷차가 대놓고 들이받는 경우는 잘 없다. 시내 도로 교차로라면 신호 대기 중인 차를 뒤늦게 발견해서이고,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는 갑자기 정체 구간 또는 사고 현장이 나타난 걸 대처를 못 해서 사고가 나는 편이다. 대처를 못 하는 원인으로는 (1) 브레이크 고장 같은 대형차의 기술적인 사정뿐만 아니라 (2) 무리한 떼빙(좁은 간격으로 대열 운전), (3) 과로로 인한 졸음 운전이 있다.

이것보다 좀 더 어처구니없는 원인은 (4) 운전 중 스마트폰/DMB 조작하다 전방 주시 태만이 있다. 제일 죄질이 나쁜 건 두 말할 나위 없이 (5) 음주운전 되시겠다. 그래도 음주운전은 개인의 승용차 레벨에서 발생하지, 트럭 운전이 생계인 대형차 기사가 대놓고 겁대가리 상실하고 음주운전을 하지는 않는다.

지난 6월엔 이 지선 씨가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안면이 다 타고 일그러지는 중화상을 그 쌩고생을 해서 치료하고 피부 이식을 해서 복원한 게 겨우 저 모양이다. 16년 전인 2000년 7월경에 음주운전자가 낸 7중 추돌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그분의 인생이 저렇게 달라진 것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그렇게 다 불타는 와중에 렌즈까지 끼고 있던 눈은 다치지 않아서 시력을 전혀 잃지 않은 건 기적적인 천만다행이었다. (그분 수기에 언급돼 있음)

2012년 6월 11일 새벽, 인천 공항 고속도로에서 음주운전 차량이 앞에 멀쩡히 가던 승용차를 거의 전속력으로 추돌했다. 이 때문에 피해 차량에서는 불이 났으며, 공항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가장을 포함해 일가족 4명이 기절한 채로 불타는 차에서 모두 몰살을 당했다.

그런데 인간은 어째 역사로부터 배우는 게 없나 모르겠다. 2015년 2월 3일 새벽에는 고속도로가 아닌 구미 시내에서 만취 음주운전자가 외제차로 앞의 경차를 추돌했다. 아까와 똑같이 경차에서는 불이 났고, 운전자인 학원 선생과 여고생 3명, 탑승자 4명이 모두 숨졌다. 이것도 시속 100이 훨씬 넘게 밟으면서 급발진 급의 추돌 사고를 낸 것이니 차와 탑승자가 멀쩡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2016년 6월 10일 밤, 인천 청라 국제도시에서는 또 음주운전자가 신호 대기 중이던 승용차를 들이받아서 이번엔 불은 안 났지만 일가족 3명이 숨졌다. 전~부 후방 추돌이다. 그리고 피해자는 탑승자 전원이 몰살이지만 가해자는 경상에 그치고 살아 있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더욱 분통 터진다.

음주운전자가 추돌 사고를 낼 거면 아까처럼 세워져 있는 대형차나 들이받아서 자기 혼자나 죽을 것이지, 꼭 왜 저런 식으로 남까지 죽이는 사고를 내나 모르겠다. 글쎄, 가해자도 죽은 사고도 있긴 했지만 이미 죽은 사람은 따로 음주 측정을 안 해서 안 알려진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음주운전자가 가로수를 들이받거나 고가에서 추락해서 그나마 민폐는 덜 끼치고 자기 혼자만 다친 사고 사례도 있긴 하다.

2014년 7월 20일 새벽에 대전에서는 (1) 한 음주운전자가 신호 대기 정차 중에 퍼질러 자 버려서 파란불이 됐는데도 출발 안 함. (2) 그 차량을 다른 음주운전자가 추돌해서 사고를 냈고, 덕분에 경찰 조사 과정에서 (3) 두 운전자가 모두 혈중 알코올 농도 0.1% 초과급의 음주운전이 적발되어 둘 다 사이좋게 면허 취소됨.. 요렇게 음주운전자끼리 병맛스러운 팀킬을 벌인 일이 있었다. 경찰의 입장에서는 한 번 단속으로 일석이조 실적을 올렸다.

그리고 2016년 1월 26일, 청주에서는 눈에 뵈는 게 없던 한 음주운전자가 경찰서의 순찰차 주차 구역에다가 제 발로 차를 몰고 와서 차를 당당하게 세우는 바람에 곧바로 경찰에 현행범으로 검거되기도 했다. "거기는 일반 주차 구역이 아니에요. 아저씨, 차 빼 주세요. → 어라? 아저씨 좀 술냄새가 심하게 나네요?"처럼 된 셈. 이건 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차라리 귀여운 사례이다.
아무튼 술 마신 뒤에는 제발 운전대 좀 잡지 말자.

* 여담

교통사고에 대해서만 글을 잔뜩 썼다가 또 얘기가 부득이하게 옆길로 새게 됐다만.. 말이 나왔으니 이 지선 씨와 관련된 여담도 좀 늘어놓자면 이렇다.

- 정확한 시기와 발표 주체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이분의 개인 홈페이지는 2000년대 중반경에 어디선가 조사한 국내 개인 홈페이지들 중에 전체 트래픽/방문자수 2등을 차지할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참고로 1등은..? 시스템 클럽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_=;; )

- 교통사고 화재 현장의 화상뿐만 아니라 화공 약품 테러로 인한 화상도 끔찍한 사고 내지 사건이다. 앞서 이 지선 씨는 그래도 눈은 멀쩡히 남았지만, 1999년 5월 20일.. 입에 담기조차 끔찍한 대구 어린이 황산 테러 사건의 피해자인 김 태완 군은 전신 3도 화상에다가 실명까지 한 채로 7주간을 깜깜한 사경을 헤매다가 결국 패혈증으로 숨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밝혀지지 못한 채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

- 2009년에 겨우 20대 중반의 나이로 회사에 체납 임금 청구 소송을 벌였는데 악덕 업주로부터 황산 테러를 당한 모 여직원도.. 지금은 그나마 많이 회복됐고 이 지선 씨와 마찬가지로 사회 복지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대외적으로는 마치 과거의 지존파 피해 여성처럼 가명이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건 실명은 아니다. 어쩌다가 저런 블랙 기업에서 첫 발을 잘못 디디는 바람에 이런 불행을 겪었는지가 안타깝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29 08:21 2016/08/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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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영화)

영화 인천 상륙 작전, 혹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6· 25 전쟁의 휴전이 타결된 날인 7월 27일에 개봉했다.
보는 내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사상이 본인의 내면과 잘 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좌빨 매체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궤변 늘어놓으면서 이 영화를 왜 저렇게 못 물어뜯어서 야단인지가 적극 이해되었다. 북괴 치하에서 벌어지던 잔학한 공포통치, 세뇌, 인민재판, 숙청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그려 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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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막론하고 전쟁은 그저 참혹한 거고(그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 누군데?), 공산당도 알고 보면 사실 착한놈이고 미군 국군도 민간인 왕창 학살했어(민간인 위장해서 치사하고 비열하게 도발한 놈 얘기는 절~대로 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 모두 책임이네 식의 메시지를 본인은 거의 부모 모독 패드립과 같은 급으로 정말 온몸으로 혐오한다. 저건 정말 천하에 듣기 싫은 불순하고 사악하고 마귀적인 사상이다.

이 영화는 요즘 각종 다른 매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미 다 검증돼 있는 선악 구도를 괜히 비비 꼬고 비틀고 재해석(?)하고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하는 식의 전개가 없다. 그래서 참 건전하다.
스토리의 표현이나 묘사가 옛날 영화처럼 좀 진부한 건 일단 사상이 건전한 것에 비해서야 그리 큰 흠이 아니라고 본다.

특공대가 기차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건 김 재현 기관사(미군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다룬 <미카 129>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1950년 7월에 있었던 일이니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 작전보다 2개월 전, 이제 막 대전을 빼앗겼던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엔 열차 객차들이 다들 저렇게 목재에 직각 의자로 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대원들이 흩어지기 직전에 서로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래야 시간 약속에 맞춰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소형화된 손목시계는 굉장한 사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해방 직후에 소련군이 들어와서는 민간인에게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별히 약탈한 손목시계들을 한 팔목에다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시라.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윤 봉길 의사가 김 구와 교환한 시계는 손목시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회중시계였다는 점도 같이 생각해 보자.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는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리암 니슨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완전 반해 버린 그 아저씨가 '군산, 원산, 인천' 등 한국의 지명을 발음하면서 맥아더 연기를 하다니 무진장 기쁘고 고맙다. 잘생겼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호의적이고 개인적인 품행과 사상이 건전한 배우인 것 같아 더욱 믿음직스럽고 호감이 간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역사물 영화를 만든대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저렴한 출연료만 받고 선뜻 출연해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화통 붙들고 김 일성과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철수하지 않으면 난 군대를 보내서 널 찾아내고 널 죽여 버릴 것이다." / "풋~ 잘해 보라우" 설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영화엔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었을 때, 그리고 선발대로부터 조명탄이 성공적으로 발사됐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쫙~ 비친다. 맥아더도 이걸 보고는 감격한다. 작전 성공을 이렇게 묘사한 게 단순히 적진을 다 때리부순 장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성경에서도 빛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이고 어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나쁜 심상이다.

  • 어머니를 지켜 주고 싶어 군대에 자원한 이 정재 vs 이념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 범수
  • 부하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이 정재 vs 홧김에 부하를 쏴 죽이는 이 범수
  • 대통령 하고 싶어서 인천 상륙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반대 세력 vs 나라를 지킬 총과 탄약을 더 달라는 소년병의 군인정신에 감동해 반드시 이 전쟁을 이기겠다고 다짐한 군인 맥아더
  • 인민군 내부에서조차 림 계진과 박 남철은 서로 감시 vs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는 맥아더와 장 학수

어느 게 선이고 어느 게 악인지,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어둠인지를 이 영화는 단순하게 잘 대조해서 보여 줬다.
또한 러시아어를 읊조리는 북한군 애들은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기나 해?" 이러지만 맥아더 포함 미군 장성들은 수시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러는 것 역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간호사로 출연한 진 세연은 여기서도 항거 대상이 일제에서 북괴로 바뀌었을 뿐, 각시탈의 오목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결말부로 가면 드디어 인천 시내에 시뻘건 저주받을 선전 구호들이 철거되고 시내가 태극기 물결로 바뀐다. 이건 그야말로 8· 15 해방과 동급의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아미타불로 바꾼 원흉이 중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제 분단 식민지로 들어갈 게 아니라 김 구와 함께 김 일성 밑에서 무혈 통일 이뤄서 우리 민족끼리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요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지 불편할 내용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괜히 표현이 식상하고 진부하네 이런 거 불평하기에 앞서 난 이런 역사를 다룬 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맙고 기쁘다.

이 영화에서는 일명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소년병" 씬이 흑백 과거 회상 형태로 잠깐 들어갔다. 이건 문헌에 따라서 날짜와 대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6월 27일 or 29일, 서울 영등포 or 흑석동.. 어쨌든 개전 초기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 또는 직후에 서울 한강 이남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통역 장교를 대동하여 어느 앳된 병사와 실제로 나눈 대화이다.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입니다."
"원하는 건.. 딴 건 필요 없고 단지 총과 실탄을 좀 더 주십시오."


본인은 저 일화를 먼 옛날 시스템클럽 글을 통해서 진작부터 접했었다. 거기 운영자분이 맥아더를 굉장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훗날 박 정희 대통령이 무슨 미국 무기 회사 임원과 청와대에서 몰래 거래를 하면서 "님이 내게 준 개인 비자금 100만 달러를 도로 님에게 줄 테니 이 가격만치 M16 소총을 더 주시오" 뭐 이랬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건 솔직히 출처와 정확도를 확신을 못 하겠다. 그것과는 달리 맥아더 + 소년병 일화는 국내외 여러 군 관계자의 회고록에도 수록돼 있으며, 주작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자. 비록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짓으로 보여도, 계속 항쟁과 의거가 벌어지니까 외국에서도 "조선은 정말로 일제와 한 뿌리가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윤 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을 때 장 제스가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니 1940년대의 국제 여론은 구한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 보장이 명시되는 감격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그것처럼.. 당장 자국민부터가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확연한 의지를 드러내니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맥아더 장군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를 바꾸게 됐다.

개전 초기에 국군은 전열이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황폐화되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허둥대다 1개월쯤 뒤부터는 희대의 막장 조치인 즉결처분조차 시행할 정도로 암울한 지경에 도달했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상관의 '까라면 까' 명령에 불응하는 부하를 현장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 허용..;; 부하란 굳이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들도 포함이다. license to kill -_-)
게다가 맥아더는 채 병덕 같은 남한의 X맨 급인 무능한 수뇌부에 이골이 나 있기도 했다. (유 재흥은 전투 패배 후에 밴 플리트 장군에게 까였고, 채 병덕은 개전 초기부터 맥아더에게..)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마침 저런 모범 병사를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포레스트 검프에서 "이런 씨발.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귀관은 IQ가 한 160쯤 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거의 이런 급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66년 전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소년병 당사자(고 신 동수 옹. 2013년에 작고)의 부인 되시는 분<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관람하고는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분의 인터뷰가 보도되고 나자 주연 배우인 이 정재 씨가 직접 비디오 테이프와 꽃다발을 들고 그분을 찾아뵈었으며, 리암 니슨도 직접 이분을 칭송하고 격려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상륙 작전은 평론가 평점 3점대 테러나 당할 작품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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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시 2:2-4라든가 계시록에서 여러 민족들이 한데 뭉쳐서 특정 한 민족을 대적하는 사건을 언급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명백하게 좋은 현상이 아니며, 사실은 UN조차도 앞으로 그런 악역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이 한데 뭉쳐 한 나라를 도왔던 6· 25 전쟁은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이고 예외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미국이 개입했던 전쟁들 중 정당성 명분이 톱급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뭐 괜히 쓸데없이 김치, 된장, 한복 이런 것보다야 차라리 한글이라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엄친아 괴수요 국제 정세의 달인인 어느 할배에 의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건국됐고,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나 좀 자부심 가졌으면 좋겠다. 과장 보태면 그런 건 좀 국뽕에 취해도 되겠구만, 왜 저런 정말 중요한 아이템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6· 25 개전 초기에 남한 정부의 우왕좌왕 실책과 병크가 나온 것을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국내 관료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그 할배의 선견지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였다면 애초에 그 전쟁 자체가 벌어지지 않고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김 구는 '그 할배' 같은 선악 관념이 없이, 남북 분단을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어떻게든 중재하고 막으려 했다. 이 사람이 덜컥 암살 당해 버리는 바람에 중재자가 없어졌고 남북 관계는 더욱 싸늘하게 식으면서 전쟁이 났다는 식의 해석도 있는데.. 그건 김 일성을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본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 구는 암살 당하지 않았고 계속 살았다면 최악의 경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적화통일 꼭둑각시로 이용당하면서 이 승만의 4· 19 부정선거 하야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더 추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해 봐야 그냥 전쟁 타이밍의 시간만 약간 더 버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악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견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이런 북한이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좋게 평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남 종북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랄하게 디스했다. 지난 7월 29일자 보도를 보면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27일 그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시사회 놀음을 벌리였다.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작전이니,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니 뭐니 하는 희떠운(분에 넘치며 버릇이 없는) 수작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나에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새 기능을 코딩할 자유를 지킨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잠시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6/08/23 08:33 2016/08/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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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두리

GUI 프로그램에서 대화상자를 만들다 보면 단순히 글과 그림, 목록, 버튼 같은 것만 집어넣는 게 아니라 그 컨트롤들을 성격별로 분류하는 구획 경계선, 테두리 같은 걸 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런 게 필요하면 static 컨트롤을 쓰면 된다. Visual C++의 리소스 에디터 상으로는 Static text와 Picture control이 서로 다른 항목으로 나뉘어 있지만, 둘 다 운영체제의 윈도우 클래스 이름은 동일하게 "Static"이다.

Picture 컨트롤을 삽입한 뒤 속성에서 Type을 Etched Vert으로 고르면 세로줄이 만들어지며, Etched Horz를 고르면 가로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Type을 Frame으로 지정하고 Color를 Etched로 지정하면 사각형 테두리를 만들 수 있다.
선을 단순히 단색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음각으로 파인 듯이 3D 입체 효과(?)가 나게 그리기 때문에 etched라는 단어가 자꾸 나온다.

그런데 Picture 컨트롤만 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잘 아는 Group box라는 컨트롤도 있어서 사각형 테두리를 친다는 점에서는 Picture하고 거의 같은 역할을 한다.
단, Group box는 테두리의 좌측 상단에 간단한 텍스트를 찍을 수 있다. 그래서 이 테두리 안에 속한 컨트롤들의 전체 제목이나 카테고리 이름을 넣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유용하다.

또한, 이런 이유로 인해 Group box는 테두리의 윗변은 무작정 맨 위쪽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중앙 라인에 맞춰서 그어진다. 아래 그림을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를 알 수 있다. (크기가 서로 동일한 Group box와 Picture frame이 화면에 실제로 보이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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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up box는 말 그대로 한 그룹에 속하는 컨트롤들(특히 라디오/체크 박스)의 가로· 세로 경계선과 제목 텍스트까지 한큐에 표시해 주기 때문에 굉장히 유용하다. 그런데 프로그램들에 따라서는 static text 옆에다가 가로줄 하나만 추가해 넣어서 Group box의 간소화 버전인 일종의 Group line을 넣기도 한다. 이 역시 위의 그림에 형태가 묘사되어 있으며, 독자 여러분도 이런 GUI를 많이 보신 적이 있을 것이다.

본인은 새로운 대화상자를 디자인할 때 Group box를 쓸지 Group line을 쓸지를 종종 고민하곤 한다. 가끔은 line이 box보다 더 깔끔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line은 추가적인 좌우 여백을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활용면에서도 좋다.

하지만 line은 group과는 달리, 텍스트와 가로줄을 서로 폭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그려 주는 컨트롤이 없기 때문에 만들기가 불편하다. static text 따로, 가로줄 따로 두 컨트롤을 일일이 만들어야 한다. 텍스트의 글꼴이나 내용이 바뀌면 가로줄의 위치와 길이도 프로그램이 수동으로 업데이트해야 하니 번거롭다.

개인적인 생각은 (1) 길쭉하게 만들어 놓은 static 컨트롤에다가 텍스트를 찍은 뒤 나머지 오른쪽 여백에다가는 글자 크기 기준으로 중앙에 etched 가로줄을 자동으로 그려 주는 옵션을 추가하거나, (2) 기존 group box 컨트롤에 사각형 테두리가 아니라 가로줄만 찍는 옵션이 좀 있어야 한다고 본다. group box를 크기를 줄인다고 해서 group line로 만들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것도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마소에서 만드는 프로그램들도 대화상자를 Spy++로 들여다보면 Group line은 별 수 없이 텍스트+가로줄로 수동으로 구현돼 있다. 아쉬운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MS Office 제품 중에서 운영체제의 대화상자를 사용하지 않고 자체 GUI를 사용하는(너무 역사가 길어서) Word와 Excel은 서식 대화상자 같은 걸 보면 group line이 상대적으로 많이 쓰였고, PowerPoint, Access, Publisher처럼 상대적으로 늦게 개발된 프로그램들은 group box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내 심증은.. Word와 Excel은 한 개체만으로 간단하게 제목과 가로줄까지 group line을 표시해 주는 GUI 컨트롤/위젯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는 Excel과 PowerPoint의 '화면 확대 배율' 대화상자 스크린샷이다. PowerPoint는 진짜 운영체제의 static 컨트롤 가로줄이지만 Excel은 그게 아니기 때문에 가로줄의 색깔이 두 프로그램이 서로 다른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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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제품 안에도 프로그램끼리 이렇게 미묘하게 일관성이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 뿐만이 아니다. 고전 테마에서는 group box의 선 모양과 static 컨트롤의 etched 선이 저렇게 똑같지만, 다른 테마가 적용되고 나면 둘의 선 모양이 달라진다. XP 시절의 Luna 테마든, 그 뒤의 Aero든.. 마찬가지다. 어느 것이든 group box의 선이 통상적인 etched 선보다 더 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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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놀라운 사실은 따로 있다. 사실 group box는 윈도우 클래스가 Static이 아니라 Button이다. 이 정도로 Static 컨트롤과는 애초부터 기술적인 연결 고리가 없었다.
check나 radio 버튼은 비록 push 버튼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그래도 BN_CLICKED라는 이벤트를 날려 준다는 공통점이 있으니 같은 버튼이라는 게 이해가 된다만.. group box는 포커스도 안 받고 이벤트도 없고.. 버튼과는 하등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static 장식품에 불과한데 도대체 왜 얘까지 Static이 아닌 버튼 소속인 걸까?

(더구나 라디오 버튼의 소속을 분류하는 것도 그 컨트롤들이 자체적으로 갖고 있는 WS_GROUP 스타일로 하지, 딱히 group box가 기여하는 건 없다. group box 안 만들어도 "1~3 중 택일, 4~7 중 택일" 같은 라디오 버튼들의 선택 영역 구분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Windows에서는 같은 버튼이라는 클래스인데 스타일을 무엇을 주느냐에 따라서(BS_GROUPBOX) 외형과 동작이 완전히 다른 윈도우가 되는 것이다. 먼 옛날 1.0 시절에는 리소스가 하도 부족해서 기본 윈도우 클래스를 새로 등록하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서 가능한 한 같은 클래스에다가 여러 기능을 구겨넣기라도 해야만 했는가 보다. 하지만 group box가 왜 버튼 출신이며 기존 etched 선과 괴리가 생겼는지는 여전히 내 머릿속에 이해되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2. 버튼

말이 나왔으니 다음으로 버튼 얘기를 더 계속해 보도록 하자.
아래 그림은 평범한 라디오/체크/푸시 버튼과 탭 컨트롤을 고전 테마 기준으로 집어넣어 표시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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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라디오와 체크 버튼은 Button 출신답게 자기 자신도 버튼처럼 표시되게 하는 옵션이 있다. 바로 BS_PUSHLIKE 스타일. (BS_PUSHBUTTON은 윈도우의 동작 자체를 푸시 버튼으로 결정하는 스타일이니 혼동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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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하니 라디오/체크도 푸시 버튼과 외형이 거의 똑같아진다. 그래도 키보드 포커스를 받았을 때 라디오/체크 버튼은 푸시 버튼처럼 테두리가 굵어진다거나 하지는 않기 때문에 실제로 조작해 보면 푸시 버튼과는 뭔가 다른 게 느껴진다.
라디오와 체크 버튼은 자신이 클릭된 경우 자신이 눌러지고 선택된(체크된) 상태로 바뀌는 반면, 진짜 푸시 버튼은 선택된 상태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눌러도 다시 도로 튀어 올라온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편, 위의 그림에서 나오듯, 사실은 탭 컨트롤도 경계선 없이 각각의 탭의 이름만을 버튼처럼 표시하는 옵션이 있다(TCS_BUTTONS).
탭 버튼은 라디오 버튼과 비슷하지만 키보드로 조작할 경우, 화살표 키만 누른다고 해서 선택이 바로 이동하지 않는다. Space를 눌러서 선택을 확인해 줘야만 바뀐다는 차이가 있다.

도대체 이런 기능이 왜 존재하나 싶겠지만, 이 물건은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다. 먼 옛날, Windows 95의 작업 표시줄이 바로 탭 컨트롤에다가 이 스타일을 써서 구현돼 있었다. 물론 지금이야 작업 표시줄은 독자적인 비주얼과 기능이 너무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진작에 자체 구현으로 바뀌었다.

이로써, 푸시 버튼처럼 생긴 놈이 푸시 버튼 자체뿐만 아니라 최소한 세 종류가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인데..
얘들도 테마를 변경하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Button들은 테마가 적용되어 버튼이 알록달록하게 바뀌지만 탭 컨트롤의 버튼들은 변화가 없다. 작업 표시줄 말고는 딱히 쓸 일이 없어져서 그런 듯하다. 글쎄, MDI 에디터 같은 데서 문서 탭을 나타낼 때 쓸 수도 있지 않으려나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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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버튼이 전혀 아니지만 클래스가 Button인 놈(group box), 버튼처럼 생겼지만 버튼이 아닌 놈(탭 버튼)을 모두 살펴보았다.
Windows XP~7이라는 과도기를 거쳐 8~10까지 나온 마당에 이제 운영체제에서 고전 테마는 더욱 보기 어려워지고 마치 XP Luna만큼이나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봐도 고전 테마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철저한 원칙 하에 세심하게 디자인된 것 같다. 화면에 표시만 하는 놈은 회색, 사용자와 interation을 하는 부분은 흰색에다가 두꺼운 입체 테두리, 포커스를 받은 아이템은 점선, 실제로 선택된 아이템은 highlight 색 등등..

그렇게도 사용자 감성, 인터페이스를 중요시한다면서 애플 맥 진영은 옛날에 GUI가 어떠했나 모르겠다. 안 그래도 마소가 애플의 GUI를 베꼈다고 험담이 많이 나돌던데.
그렇게 고전 테마 때 일관되게 형성되었던 GUI 가이드라인이 오히려 테마가 적용되면서, 당장 겉으로 드러나는 비주얼은 더 화려해졌을지 모르나, 그런 질서가 좀 무너진 듯한 것도 보여서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고전 테마를 처음 만들던 때와 지금, 개발자가 세대 교체가 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그나저나 group line은 세대를 초월하여 진짜로 운영체제 차원에서 기능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8/20 08:38 2016/08/20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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