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6호선 하면 2기 지하철 중에서 전구간이 가장 늦게, 21세기가 돼서야 개통한 지하철인 동시에 전대미문의 튀는 전동차 구동음으로 유명한 노선이다. 2000년대 초· 중반에 서울 지하철 5, 6호선의 신비로운 구동음은 내 삶의 낙이었다. 5, 6호선 모두 현대 정공이 차량을 제작했는데 어째 인버터 부품은 서로 다른 회사 것이다(5: 스웨덴 ABB, 6호선: 일본 미쓰비시). 그래서 구동음도 제각각임.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철도 차량의 핵심 기술은 일본, 유럽 등 외제 기술의 각축장이었다. 현대는 일본과 거래하고 대우는 유럽과 거래하는 식으로.. 차체 정도야 우리나라 기술로 만들기 시작했지만, 차량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전동기라든가 동력비 조절 인버터는 여전히 외제. 마치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의 차이처럼 말이다.
그런 와중에 전동차의 인버터를 국산화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시범적으로 탑재된 차량이 바로 서울 지하철 6호선의 609 편성이었다. 제작사는 현대 정공(로템 법인 출범 전). 이 연구는 한국형 고속철 개발과도 관련이 있을 텐데 뭔가 협동 연구가 이뤄지지는 않았나 모르겠다.
국산 VVVF-GTO 소자를 탑재한 이 609 편성은 6호선 초기 전동차 중 하나로 바로 도입되어 시범 운행을 시작했다. 승객 수가 적고 배차가 길어서 만만했는지 6호선이 시범적으로 선택된 듯하다. (6호선은 역당 승차 인원으로 치면 그 짧은 8호선보다도 이용객 수가 적다.)
그러나 609 편성은 이내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기술 미숙 때문이었는지 인버터의 회생 제동 효율이 시원찮고 고장도 잦았다.
그래서 현업에서의 운행 빈도는 차츰 낮아졌으며, 결국 2005년에는 완전히 퇴역하고 인버터가 다시 다른 6호선 전동차와 동일한 외제 VVVF-IGBT로 교체되어 버렸다.
그 당시에 선구자적인 철도 동호인이 레어템인 609 편성 전동차의 구동음을 녹음해 놓은 덕분에 그 자료가 오늘날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철도 음향 분석의 전문가인 사무엘 님은 자체 감정을 한 결과, 이 609 편성의 구동음과 가장 유사한 구동음을 내는 지하철은 대전 지하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구동음의 음높이가 둘이 굉장히 비슷하다. F#~G 사이인데 G에 더 가깝다.
http://blog.naver.com/sj10913/50072280911
http://blog.naver.com/sj10913/50014134335
이 블로그 운영자도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음향 연구에 관심이 있는 분 같다. 위의 음향에서는 두 전동차 구동음의 음높이가 좀 차이가 있어서 609의 음높이가 살짝 더 높지만, 본인이 다른 경로로 입수한 609 구동음 중에는 음높이가 대전 지하철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도 있다.
둘의 음향은 굉장히 비슷하게 들리지만 둘은 기술적인 디테일도 다르고 제작사도 서로 다르다. 그래서 더욱 신기하다.
이런 609 편성의 흑역사를 간직하고 있어서였을까?
서울 도시철도 공사(SMRT)는 서울에서는 제일 어리고 파릇파릇한 지하철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회사와는 달리 전동차 부품의 국산화와 심지어 전동차 자체 개발에 남다른 관심과 의욕을 보여 왔다.
한때는 여러 병크들 때문에 도철의 음 사장님이 굉장히 많이 까였으나, 병크가 해소되고 또 스크린도어 기술의 국산화를 잘 이끌어 내면서 나름 능력도 인정받았다.
작년 12월 말에는 SMRT에서 드디어 코드명 SR-001이라는 자체 전동차 시제품을 선보이기까지 했는데(한국형 고속철의 코드명이 HSR-350이었던 것처럼), 사장이 직접 나서서 열정적으로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http://blog.naver.com/ianhan/120121006513
마침 서울 지하철 7호선의 연장을 앞두고 전동차가 더 필요해지기도 한지라, 양산형 차량은 7호선 3차 도입분 차량으로 곧바로 투입될 것이다.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번에는 6호선이 아닌 7호선이 혜택을 입을 예정.
역사가 워낙 짧아서 21세기 이래로 단 한 번도 신형 차량이 들어온 적이 없었고 전동차의 내구연한 연장으로 인해 더욱 그럴 가능성이 낮아진 서울 2기 지하철에, 새로운 바람이 예상된다. 사실 큼직한 통유리에 조용한 VVVF-IGBT 소자라는 오늘날 신형 전동차의 큰 트렌드는 서울 지하철 7·8호선 2차 도입분 전동차에서야 드디어 정착한 셈이다.
아니나다를까 저 행사가 열렸던 장암 차량 기지 한켠에는 SR-001과 나란히 과거의 609 편성 전동차도 함께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과거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보인다.
경부 고속철의 경우, 2차 개통을 계기로 일단 KTX가 예전보다 워낙 증편되다 보니 신형 차량인 KTX 산천도 더욱 많이 투입되었다. 산천은 잘 알다시피 프랑스 떼제베가 아닌 국산화 차량인데, 시설은 좋은 반면 아직도 이따금씩 고장을 심심찮게 일으킨다고 들었다.
기술이 살 길이다. 과거 나로 호의 실패도 그렇고 첫술에 배부를 수가 없다. 이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한국 철도 기술도 점차 성숙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이 나라에 이공계 엔지니어가 더욱 대접받는 풍토가 마련돼야 할 것이다. -_-;;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