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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지름

난 초등학교 때 컴퓨터를 처음으로 접했고,
중학교 때 PC 통신,
고등학교 때 인터넷과 이메일,
대학교 때 휴대전화와 개인 홈페이지를 순서대로 접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순서가 아주 점진적이고 자연스럽고 좋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마트폰은 무려 대학원 석사를 졸업한 뒤, 2012년 11월에야 장만하게 되었다. 대수로는 제5대째이다.
물론 이것은 어지간한 여타 사람들에 비해서는 시기적으로 굉~장히 엄청나게 늦게 도입한 것이다.

지금까지 스마트폰을 안 쓴 이유는 딱히 없었다.
이게 일부 분야에서 매우 편리한 물건인 건 사실이지만, 난 이미 PC로 필요한 정보 처리와 프로그래밍은 다 하고 있으며 이미 쓰는 전화기를 만족스럽게 쓰고 있고, 스마트폰이 그저 남들이 다 쓴다는 군중 심리만으로 그 가격을 투자하면서까지 쓸 가치가 있는 새로운 물건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다른 기기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또한 스마트폰은 기존 PC와 본질적으로 거의 동일한 기능이 좀 더 작은 기계에서 돌아간다는 차이만 존재할 뿐, 과거에 컴의 성능이 16비트에서 32비트로, 단색에서 트루컬러로 바뀌던 것처럼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정도의 신기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글자를 빨리 못 입력하는 게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일찌감치 컴퓨터를 썼던 경험이, 지금은 오히려 유행에 대한 반응을 둔감하게 만든 셈이다.

그러다가 기존 전화기가 고장이 나면서 스마트폰을 도입하게 됐다. 시대가 시대인데 피처폰을 굳이 수리까지 하면서 쓸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스마트폰이 특별히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면모는 다음과 같다.

  • SNS 앱 연동
  • 지도 + 길/장소 찾기
  • 어디서나 부담없는 크기와 무게의 기기로 무선 인터넷 접속. 노트북은 WIFI에 붙는 것만 가능하지만 폰은 자기가 직접 연결을 할 수 있다.
  • 유용성뿐만 아니라 그와는 별개로 일단 품위와 간지

태생적인 한계이겠으나, 피처폰이든 스마트폰이든 모바일 기기는 문자 입력이 제일 불편한 건 변함없다. 제조사의 특성상 입력 방식이 천지인밖에 없다. 골수 나랏글 유저인 본인에게 천지인은 직관적이지 않아 너무 불편하고, 두벌식 쿼티는 각각의 버튼이 너무 작아서 오타가 잘 난다.

쿼티라 해도 그 작은 기기에서 열 손가락을 다 동원하는 타자 따위는 기대할 수 없으며, 검지-엄지의 독수리 타법의 부활이다. 역시 문자 입력은 PC를 따를 기기가 없음을 느낀다.
카카오톡을 깔고 나니 “오오, 사무엘 님 드디어 카톡 들어오셨어요?” 인사가 막 들어오는데.. 타자가 불편해서 카톡질은 오래 못 하겠다. 카톡이 있으니 PC뿐만 아니라 폰으로도 인스턴트 메신저가 하나 더 생긴 거나 다름없는 반면,. 나의 폰타는 PC에서의 세벌식 타속에 비해 고작 1/4~1/3밖에 안 된다. ㄲㄲ

또한, 쿼티 배열을 쓴다 하더라도 나오는 배열은 1~3단으로 국한이지 4단은 없다. 그래서 모바일에서는 숫자와 기호를 섞어 쓰는 것조차도 매우 심하게 불편해진다. 인터넷 URL 내부에 무심코 들어있는 숫자가 유난히도 입력하기 귀찮고 성가시게 느껴지는 건 PC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경험이다.

내가 예전에도 잠시 글로 썼듯이, 스마트폰에서는 두벌식 세벌식 논쟁도 PC에서와 같은 의미는 사실상 없다. 마치 유니코드 앞에서 조합형 완성형 논쟁이 김이 확 빠지고 의미가 없어진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어차피 열 손가락으로 제대로 된 타자를 할 수가 없고 장타도, 모아치기도 필요 없으며, 세벌식은커녕 두벌식을 집어넣기에도 화면이 부족한 공간에서 굳이 세벌식에 연연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모바일은 두벌식이고 세벌식이고를 떠나서, 두벌 세벌 논쟁의 주 무대이던 타자기 식 글쇠배열 패러다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어떻게든 글쇠를 구겨 넣어서 스마트폰에서도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원론에 충실한 한글 입력 방식이 좀 있긴 해야 할 것 같다. 신세벌식 같은 글쇠 중첩은 확실히 이런 데서 좋은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직업병이다 보니 문자 입력 얘기가 또 길어져 버렸다.
피처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갈아타면서 굉장히 아쉬워진 것 중 하나는 역시나 배터리 용량이다. 하루를 놔 두니까 진짜 배터리의 절반이 싹 소모되어 버린다. 매일 충전 안 하면 못 견딜 것 같다.

과거의 피처폰은 송· 수신 안 하고 가만히 놔 두면 이틀을 놔 둬도 세 칸이 그대로 유지되었었다.
지난 가을에 회사 야유회로 제주도로 놀러 갔을 때, 본인은 전화기를 완전히 충전시켜 놓은 채로 그대로 가져서 2박 3일을 잘 버티고 돌아왔다. 별도의 충전기를 챙겨 가지 않았다. 제주도까지 가서 딱히 전화질을 할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쓰는 다른 사람들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숙소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틈만 나면 자기 전화기를 충전하려고 방의 콘센트마다 난리가 났었다. 멀티탭을 챙겨 다녀야 할 지경이다. 그리고 이제 나도 스마트폰 세상에 끼어든 이상 이 대열에 합류하게 됐다.

난 휴대전화는 모름지기 통화 품질 좋고 배터리 오래 가고, 충격에 강하고 튼튼하면 장땡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은 통화 품질은 모르겠지만 고가의 컴퓨터와 디스플레이와 네트워크 장비를 내장하느라 내구성은 오히려 떨어지고 배터리 많이 먹는 방향으로 변화한 게 틀림없으며, 그건 나로서는 아쉬운 점이다.

아무튼, 난생 처음으로 써 보는 스마트폰은 내 삶의 양상도 앞으로 적지 않게 바꿔 놓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앱을 본격적으로 만드는 날이 과연 올지는 모르겠다. 현실은 PC에서 윈도우 8 메트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

내가 비록 PC는 맥북을 갖고 있지만 스마트폰은 안드로이드 계열이 선택되었다. 요즘 IT 트렌드를 잘은 모르겠지만, 스티브 잡스 옹의 별세 이후 애플이 잡스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중이라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지인 중에는 아이폰 쓰다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안드로이드로 갈아타는 사람까지 있다.
차라리 애플 계열의 모바일 제품은 더 나중에 아이패드를 써 볼까 싶은데, 이건 언제쯤 지르게 될지 아마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ㅎㅎ

그나저나, 스마트폰을 장만한 뒤에도 KT를 사칭하는 스마트폰 교체 광고 전화는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온다.
재고 단말기들을 처분 못 해서 이 인간들이 정말 난리인가 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24 08:35 2012/11/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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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답사를 마치자 슬슬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밖은 여전히 대단히 추웠고, 비는 그칠 기미가 안 보였다. 내가 춥다고 느낄 정도면 정말 추운 거다.
일단 7호선 시승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을 자축하면서 차 안에서 아침 식사용 스낵류를 꺼내 먹었다. 그 뒤, 서울과 부천의 경계이며 김포 공항 이착륙 비행기 출사의 명당인 오쇠삼거리로 향했다. 온수에서는 차로 15분 남짓이면 가는 거리이니, 기왕 멀리 여기까지 왔는데 비행기 구경도 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는가.

김포 공항의 담장은 철조망이 겹겹이 쳐져 있고, 주변의 황무지(wilderness)들은 '개발 제한 구역' 정도를 넘어서 아예 국유지이기 때문에 무단 접근 및 개발 엄금이라고 경고문이 곳곳에 붙어 있었다. 그린벨트는 사유지에 대한 재산권 행사를 제한하는 제도인 반면, 저기는 아예 개인의 부동산 권리고 나발이고가 애당초 없는 국유지라는 뜻.

어차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드는 비행기의 소음 때문에 여기는 거주하기가 어려울 것이고, 항공 보안상의 이유로도 공항 바로 옆의 땅은 불가피하게 그렇게 놀려야 할 듯하다. 그나마 김포 공항은 군사 보안이 필요하지는 않은 순수 민간 공항인데도 제약이 이 정도이다.

여기는 도로 폭이 좁기 때문에 도로변에 차를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황무지 안쪽으로 차를 세워 둘 곳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주차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단지 교차로에서 얼마나 가까이, 비행기를 얼마나 잘 볼 수 있는 곳에다 세우는지가 문제이다.

747급의 대형 기종은 아니지만, 비행기는 수 분 간격으로 정말 자주 다녔다. 경부선 3복선 구간 만만찮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전부 이륙만 할 뿐, 착륙을 하는 놈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비바람을 감안하여, 김포 공항에서 비행기의 이착륙 진행 방향을 내가 원하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지시한 모양이다. 내가 최근에 제주도 행 비행기를 탔을 때는 북쪽이었는데 말이다. 착륙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는 놈보다 더 고도가 낮으며, 육지에서 비행기를 더 가까이서 큼직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동일 공항 착발이라 해도, 비행기가 활주로를 이착륙하는 방향은 공항의 사정에 따라 수시로 바뀌며, 해당 비행기의 항로에도 영향을 꽤 끼치는 요소이다. 그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비행기가 방향을 바꾸려면 회전 반경이 얼마나 커야 하겠는가? 이러니 배가 밤에 등대가 필요하고 대형 선박의 경우 도선사까지 필요하듯이, 비행기에는 관제탑의 안내란 게 반드시 필요하다. 바람이 많이 부는 제주도의 제주 공항은 필요에 따라 취사 선택하라고 활주로가 십자까지는 아니지만 X자 모양으로 둘 있기도 하다.

여기서 비행기를 구경하면서 차에서 또 잠시 자기도 했다. 오쇠삼거리 근처에서 두어 시간 정도 머물다가 상암동 박 정희 기념 도서관/박물관으로 갔다.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었는데 위치가 지하철역에서 영 멀었던 관계로 선뜻 못 가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차가 있는 김에 거기까지... 게다가 안 중근의 거사 날짜뿐만 아니라 박 정희 전대통령이 부하의 총격으로 세상을 떠난 날도 10월 26일이니 오늘은 그 다음날이라는 의미도 있다.

건물은 크고 넓었다. 주차 공간도 지상의 마당에 아주 넉넉히 있어서 걱정할 것 없었다. 건물은 3층은 도서관 열람실이고, 2층과 1층이 박물관 내지 기념관인데 2층에서 관람을 시작하여 1층으로 나오는 구조이다.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내가 굳이 더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난 성경의 용어를 동원하자면 박 정희가 역대기하 26장과 가장 비슷한 업적을 남긴 통치자라고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치수와 산림 녹화를 하고 농경 선진화를 이루고(대하 26:10), 이공계를 육성하고(대하 26:15) 국방을 강화했다(대하 26:14). 게다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자”라는 모토는 느 4:13-18을 꼭 빼닮은 심상이지 않은가? 뭐, 박통이 교만 때문에 파멸에 이른 것까지 똑같은지에 대해서는(대하 26:16 이후) 독자들의 상상과 판단에 맡기겠다.

다른 건 몰라도 전기 얘기는 좀 해야겠다.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조금이라도 흔들었다가는 훅 가 버릴 정도로 정말 혼란스럽고 위태롭게 시작했다. 그랬는데 정부 수립을 앞두고 북한으로부터의 송전 중단은(1948) 당시 나라를 멘붕 상태로 몰아넣었음에 틀림없다.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된 전력 공급 인프라의 8~90%가 지하자원이 더 풍부한 이북 땅에 몰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가 좀 나라답게 돌아가는 거 같았다가 1950년대 이후에 갑자기 호롱불을 켜는 조선시대 시절로 손발퇴갤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가 바로, 전쟁의 상흔도 있지만 또한 전력 부족 때문이다. (웬지 영화 테이큰에서 리암 니슨의 전기 고문 장면이 갑자기 생각나는 건 기분 탓.)

그래서 박통 이전의 이 승만 때부터 필사적으로 전력 공급 안정화를 위해 강원도 산업선 철도를 우선적으로 건설했으며, 무엇보다도 원자력 발전소를 유치하려 애썼다. 그리고 원전 건설은 박통이 실제로 이뤄 냈다. 그 결과 제한 송전 소치는 거의 20년 뒤인 1968년에야 해제됐다.

박물관의 방명록을 보아하니, 박 정희 싫어하는 사람의 눈에는 거의 박통교 신자처럼 보일 내용으로 글을 남긴 사람도 있었다. 포항에서 일부러 찾아와서 관람을 한 일행도 있고, “박 대통령님은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란 요지로 찬사를 남긴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정치색을 떠나서 우리나라의 이런 객관적인 역사는 후세에 널리 알릴 필요가 있다는 요지로 방명록에 글을 남겼고, 내 이름과 홈페이지 주소도 적어 놓고 왔다.

우리나라는 그 어렵고 열악한 여건 속에서 더구나 북한 같은 악마의 위협 속에서도, 일부 흑역사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 왔으며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단기간에 정말 잘 이뤄 냈다. 정말 하나(느)님이 보우하셨다. 솔직히 말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을 개인적으로 착복한 게 아니라, 그걸로 그래도 고속도로를 건설하고 제철소를 만든 대통령이 있다는 걸 크게 감사해야 하지 않는가?

박통에 대한 까임거리는 크게 친일, 인권, 도덕성(?) 같은 분야로 요약되는 듯한데, 결론만 말하면 내가 보기엔 거의 전부가 되도 않은 소리들이거나 당시 어쩔 수 없었던 것들, 지금도 어차피 피장파장인 것들, 아니면 그래도 업적에 비해 미미한 실책들이다.
나라가 없던 시절에 일본군 장교 경력이 좀 있는 것보다, 솔직히 더 기가 막히는 이력을 가진 인간이 대통령 되려고 난리인 게 훨씬 더 문제이고... 특히 인권은 요즘 사형 집행 안 하고, 흉악범에게 너무 가벼운 처벌을 내려서 유린하는 게 옛날보다 훨~씬 더 많다.

이런 식으로 논리를 적용하니, 나는 박통에 대해서 잘못한 건 면죄부가 적용되어 별로 안 보이며, 잘한 게 더 부각되어 보인다. 그래서 난 어쩌다 보니, 전쟁을 겪으신 어르신 및 부모 세대와 비슷한 정치관과 역사관을 갖게 됐다. (교회에서도 김 용묵 형제가 민감한 정치 얘기까지 자신과 잘 통한다는 걸 아는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은, 내게 수시로 그 주제로 얘기를 먼저 꺼내실 정도로..;;)

단, 박통 박물관에도 유품 명목으로 타자기가 하나 전시돼 있는데,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네벌식이다. 세벌식 사용자로서 그건 박통 정권의 어쩔 수 없는 흑역사이다. 박통 및 박물관 얘기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다시 강변북로를 탔다. 차를 갖고 나갈 때부터 이미 각오했듯, 낮이 되니 역시 도로가 미치도록 막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 경험상 강변북로는 경부 고속도로와 마주치는 한남 대교를 중심으로 동쪽은 서쪽 방면 도로가 엄청 막히고, 서쪽은 동쪽 방면 도로가 엄청 막힌다.

그래도 자동차 전용 도로니까 거북이 걸음으로라도 계속 가기라도 하지, 신호까지 받는 일반 시내 도로는 답이 없다. 이는 철도로 치면 복선과 단선의 차이만큼이나 크다.
자동차 전용 도로가 막힐 정도이면 전방에 사고가 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디서 진짜 사고가 나긴 했는지 구급차와 견인차가 사이렌을 울리고 지나갔다.

사실, 어제나 오늘 차로 장거리 여행을 하는 도중에 내비게이션 업데이트도 덩달아 하려고 했다. 혼자 차를 몰면서 약 50분 동안 엔진 시동이 걸려 있어야 할 때 그 미션까지 덩달아 완수하면 정말 보람찬 여행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몇몇 문제 때문에 그건 못 했다. 결정적으로, 작년에 내비를 업데이트 할 때는 실행 파일이 윈도우 CE용 바이너리였는데 이번에는 내가 어디서 파일을 잘못 받았는지 실행 파일이 ELF로 시작하는 리눅스용이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슬금슬금 강변북로를 주행하고 있었는데 앞엔 한강 철교가 보였다. 새마을호 전후동력형(push-pull) 디젤 동차가 다음 달이면 퇴역인데, 어차피 도로 정체가 심하면 이거나 좀 구경하고 가려고 핸들을 돌려 한강 고수부지로 차를 뺐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미션이 설정되었다.

날씨가 춥고 비까지 내리니 고수부지엔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드디어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어 점심을 먹었으며, 그러면서 한강 철교 근처에서 약 1시간 동안 열차들을 구경했다. 심지어 컴퓨터를 꺼내 인터넷도 했다. 이 황량한 고수부지에도 사용자 신원과 컴퓨터 Mac 주소 확인 후 인터넷을 쏴 주는 무료 WIFI 신호가 미약하게나마 잡혔다.

새마을호 PP가 요즘 고장이 너무 잘 나서 아예 객실 전기만 공급해 주고 기관차가 견인한다는 루머가 나도는 듯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여전히 PP가 스스로 잘 다니고 있는 걸 확인했다. KTX나 일반 기관차 견인형 열차는 워낙 흔하기 때문에 아무 때나 나가서 몇 분만 기다리면 구경할 수 있는 반면, 새마을호 PP는 최하 40분~1시간 이상 간격으로 다니기 때문에 열차 시각표를 보고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오늘은 비행기와 철도를 모두 구경하고 왔다. 서울 지하철 7호선 연장 구간 시승에다가, 여러 의미를 갖는 이벤트들을 한데 엮어서 수행하니 무척 즐거웠다. 여담인데, 동일 장소에서 비행기와 열차를 모두 볼 수 있는 곳은 IT 단지들이 입주해 있는 구로구-금천구의 경부선 철길 일대이다. 거기가 김포 공항 착륙 비행기의 항로와도 비슷한 선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 주민들은 열차와 비행기의 소음 때문에 그리 유쾌하게 지내지는 못할 것 같다.

말 못 하는 기계이지만, 빗줄기를 뚫고 먼 길을 안전하게 잘 달리고 아늑한 야영 텐트 역할까지 해 준 애마에 감사의 뜻을 전한다. ^^

Posted by 사무엘

2012/11/03 08:33 2012/11/0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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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 해양 대학교는 상선(무역선 포함) 승무원 및 관련 간부를 양성하는 게 주 목적인 국립 준특수 대학교이다. 상선사관은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기간 인력이며, 군 복무도 상선 근무로 전부 대체된다. 사관학교나 경찰대 정도로 학비 완전 무료에 완전 폐쇄적인 학풍을 지닌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선원 생활이란 것도 편할 리가 없는 고된 업무인 만큼 그 바닥에도 나름 군기가 존재하며, 이 학교의 학비는 교육대 수준으로 아주 저렴한 걸로 본인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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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바로 코앞에 있는 해양 대학교. 다시 말해, 부지의 해발 고도가 저만치 낮다는 뜻이다.

교통수단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참고로 비행기 버전인 한국 항공 대학교는 원래는 국립이었다가 현재 사립이 돼 있다. 마치 대한 항공이 원래 국영이다가 민영이 된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사립 학교가 되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철도 대학은 원래는 전문대 수준이다가 지금은 충주 대학교와 통합되어 교통 대학교가 되었고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국립인 건 물론 변함없다.

2.
다음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 당시의 작품 전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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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성능이 열악하고 한국어는커녕 한글을 기계에다 구현하는 것 자체가 아주 challenging하던 시절에는 한국어 공학보다 '한글 공학'이 더 시급한 연구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글/한국어 정보 처리 학술대회의 초창기 시절이던 1990년대 초에는 하드웨어를 제어하여 컴에다가 한글을 찍는 방법, 두벌식이나 세벌식 사이의 기발한 절충 입력 방식 같은 게 PC 잡지뿐만이 아니라 그런 학술지에도 실리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글꼴, 코드 쪽 연구도 많았다.

그랬는데 글꼴이나 코드 같은 원론적인 문제는 컴퓨터와 운영체제 기술의 발달로 인해 장벽이 다 해소되고 한국어 말뭉치까지 구축된 뒤부터는 '한글 공학'은 이제 뭐 더 연구할 게 없는 듯한 영역이 되었고, 학회의 초점은 급속히 '한국어 공학'으로 기운 듯하다. 내가 석사 논문을 쓰느라 옛날 연구 트렌드들을 뒤져 보니 확실히 추세가 그렇다. 그러다가 지금 다시 한글 입력 쪽이 논의되고 있는 건 모바일 쪽 한정이다. 그 반면 내 논문은 한글 공학의 fundamental한 부분을 다시 다루고 있다.

3.
자, 부산까지 갔다 왔으니 또 부산 지하철 얘기를 해야 직성이 풀리겠다.

부산도 이제 지하철 승강장에 슬슬 스크린도어가 설치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자갈 노반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 서울 지하철에서는 자갈 노반이 완전히 사라진 게 못해도 아마 4~5년은 됐을 것이다. 그리고 2012년 현재까지 전국의 지하철 노선에서 VVVF 전동차가 전혀 없는 곳은 부산 지하철 1호선이 유일하다.
옛날에 부산 지하철은 한 1970년대 티가 나는 아주 못생긴 서체를 쓰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냥 일반적인 고딕체로 다 바뀌었다. 아마 역명에서 '동(洞)'을 모두 삭제하기로 결정하면서 같이 바꾼 모양이다.

부산 지하철 1호선은 대부분의 역들이 상대식 승강장이며, 심도도 낮다 보니 대부분의 역들이 반대편 승강장을 할 수 없는 게 특징이다. 그래서 “대합실을 통해 반대편 승강장 횡단이 가능한 역”과, “동일 승강장에서 반대편 열차를 바로 탈 수 있는 역(쉽게 말해 섬식 승강장인 역)”이 다른 색깔로 노선도에 특별하게 표기가 되어 있다. 아래의 노선도 사진에서 동그라미 테두리의 색깔을 주목할 것.
드물게 등장하는 섬식 승강장 역에서는 평소에 열리지 않던 왼쪽 문이 열리기 때문에 이 문에 기대고 있는 승객은 조심하라고 따로 방송 멘트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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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노선도를 보면, 서울 지하철에서는 역시 4년이 넘게 전에 버린 옛날 notation을 아직까지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일반역은 흰 동그라미, 환승역은 태극 무늬 동그라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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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지금 서울/수도권 노선도는 역이 너무 많고 노선도가 복잡해진 관계로, 일반역은 그냥 사선 모양의 홈만 파고, 환승역이 흰 동그라미이다.
이 디자인을 처음으로 시도한 곳은 바로 서울 도시철도 공사이며, 이걸 나중에 코레일과 서울 메트로까지 도입하였다.
비록 '얼씨구야' 환승음은 서울 메트로가 제일 먼저 도입해서 그걸 나중에 코레일과 도철까지 따라 했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0/29 08:36 2012/10/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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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체육 관광부와 국립 국어원에서 2009년부터 해마다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라는 걸 개최하여 올해로 4회째를 맞이했는데, 올해는 예전의 인서울 관행을 깨고 부산 영도에 있는 한국 해양 대학교에서 개최되었다. 개최 일자는 지난 10월 12일. 공교롭게도 한글 운동 단체들에서 열심히 밀고 있는 조선어 학회 수난 70주년 추모 행사와 겹치는 날짜였다. 그건 서울 경복궁에서 열렸고 저 경진대회는 부산에서 열렸다.

말은 경진대회이지만 사실 참가자들이 동일한 조건에서 시험을 치면서 기량을 겨룬다거나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공모전'이 더 정확한 명칭이다. 일차적인 개최 목적은 21세기 세종 계획(1998~2007) 때 구축된 세종 말뭉치를 이용하여 한국어 분석과 관련된 의미 있는 데이터 처리를 하는 싸제 프로그램의 개발을 독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한국어와 한글의 기계화 및 교육과 관련된 유용한 소프트웨어라면 무엇이든 괜찮다. 본인은 독자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작년(3회) 대회 때 <날개셋> 한글 입력기 6.3을 출품하여 은상을 받았다.

주최 측에서는 이 대회를 꽤 의욕 있게 밀고 있다.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대회를 주최할 것이라는 의지를 밝힌 바 있으며, 작년부턴가 기존의 <한글/한국어 정보 처리 학술대회>와 이 경진대회를 아예 병행해서 개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에는 심사에 앞서 오전에 부스를 만들어서 일반인과 심사위원이 모두 참관 가능한 작품 전시(데모) 세션을 추가했으며, 게다가 작년 대회 입상자 중에도 원하는 분은 올해 대회의 데모 세션에 같이 참여해 달라고 초청장을 보냈다.

내 프로그램을 홍보할 기회가 왔으니 나는 초청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지난 10월 12일엔 회사에 휴가까지 내어 오랜만에 부산에 좀 갔다 왔다.
경부선 막차인 밤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한 건 새벽 4시 반이 덜 돼서였다. 미리 봐 놓은 지하철과 시내버스 경로로 대회 장소엔 예정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다만, 세월이 세월인지 밤샘은 이미 엄두를 못 내는 지경이 됐고 밤차도 더는 피곤해서 못 탈 것 같다. 피곤이 밀려오기 시작한지라 책상에 엎드려서 자면서 시간을 보냈다. 밤차는 교통비(굳이 비싼 고속 교통수단을 쓸 필요 없음)와 숙박비(차에서 잠을...)를 아낄 수 있는 저렴한 방법이지만, 제일 피곤한 방법이기도 하다.

부스 개방 시각이 다가오자 대회 주최 측에서 직원이 와서 각종 장비들을 세팅해 줬다. 나는 간단히 준비해 온 유인물과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로 부스를 꾸몄다. 작년 대회 입상자가 나 포함 3명이 온다고 했는데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대로 대상, 금상, 은상 수상자가 나란히 왔다. 울산대 팀은 그렇잖아도 최고 등급인 대상을 받은 데다 부산은 지리적으로 거리도 별로 안 멀고, 이 대회만 작정을 하고 미는 연구실이 있으니 이런 자리엔 거의 확실히 오리라고 예상했다.

한편, 작년에 금상을 받은 최 시영 선생님은 1인 기업 사장이랄까 프리랜서랄까, 어쨌든 조직에 매여 있지 않은 분이기 때문에 이런 데에 가는 데 제도적인 제약이 없는 분이다. 최근엔 data-p라는 프로그래밍 언어도 하나 고안해서 대외적으로 뭔가 알려야 할 게 많은 처지이기도 하다(실제로 나중에 컴퓨터공학 교수들 앞에서 data-p 얘기 많이를 늘어놓으셨다). 그러니 올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오셔서 나하고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말동무가 하나 늘었다.

저분은 프로필을 보아하니 서울대 법대 출신의 엄청난 엄친아인데 독특한 웹 기반 세종 말뭉치 검색 도구를 만들어서 이런 대회의 상위권에 입상하고, 최근에는 전산학에까지 관심을 뻗치고 계신다. 뭘 하시는 분인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에 반해, 대학원이나 일반이 아닌 학부생들은 아무래도 이런 좁고 전문적인 분야의 대회에서 상위권에 입상하는 작품을 만들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이며, 입상하더라도 또 중간고사를 앞두고 먼 길을 가서 이런 대회의 데모 세션에 참여할 처지는 못 될 것이다. 이런 나의 모든 예상은 적중했다.. ^^

공식적인 데모 세션은 2시간이었다. 나야 ISEF에 참가하던 고딩 시절 이래로 이런 건 한두 번 하는 게 아니긴 하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에게 내 프로그램의 본질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란 참 쉽지 않았다. 세벌식, 무한 낱자 수정, 오토마타, Bksp 없이 오타 고치기, 텍스트 필터, 에디터와 IME 등등등... 무슨 얘기부터 할까? 이런 것들이 어느 하나만 알아서는 context를 이해할 수 없는 유기체를 구성하고 있다. C밖에 모르는 사람에게 어느 세월에 C++의 클래스, 상속, 오버로딩, 가상 함수 개념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서 템플릿이라든가 람다 함수에 이르기까지 그 필요성과 장점을 가르쳐 줄 수 있겠는가?

확실히 한국어 공학에 비해서 “한글 공학”은 인지도가 미미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사회 문화 분위기가 한국어와 한글의 구분이 상당히 모호하고 오락가락 하는 건 사실이지만, 결국 어차피 그 말이 그 말이고 반드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 병적으로 둘은 완전히 독립적이고 무관한 개념이라고 집작하고 몰고 가는 것도 또한 보기 좋지 않은 모습인 듯.
비록 내 프로그램은 올해의 대회 출품작이 아니기 때문에 심사 대상도 아니지만, 심사위원 중 한 분은 “님 프로그램은 우리 대회보다 규모가 더 큰 일반적인 소프트웨어 공모전에도 출품해 보셈”이라고도 말씀하셨다.

데모 세션이 끝날 무렵에 웬 반가운 손님이 한 명 왔다. 올해에 본인의 석사 졸업 대학원 학과에 석사로 새로 입학한 파릇파릇한 석사 후배. 학교에서 내 얘기를 이미 들었는지 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대학원 재학 시절에 석사 신입생이라고는 좀체 구경을 못 했다(한두 명 합격한 지원자는 있었으나, 등록을 안 하고 그걸로 끝). 그러다 겨우 논문 학기가 다 돼서야 여학생 후배 두 명을 본 게 전부인데, 남자 후배라니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말동무가 셋으로 늘었다.

부스 전시는 정오 무렵까지 그럭저럭 잘 했다. 이제 느긋하게 앉아서 올해 입상작들의 발표와 심사 장면 구경만 하면 된다.
주최 측에서는 데모에 참여한 작년 입상자들을 예우 차원에서 경진대회 관객으로 자동 등록을 시켜 줬으며, 점심과 저녁 식사는 물론, 생각도 안 했던 여비까지 챙겨 줬다.

출품된 프로그램들은 로컬, 웹, 앱을 골고루 커버하는 다양한 형태였다. 로컬 프로그램 중엔 정통 MFC 기반 프로그램은 없었고, 모두 닷넷 프레임워크 기반이었던지라 세대 차이를 실감했다. 하긴, 업무용 프로그램이야 어떤 형태로든 RAD가 지원되는 툴로 만드는 게 능률과 생산성 면에서 나을 테니 말이다.
말뭉치가 어떻고 태깅이 어떻고 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나도 그것만 전문적으로 판 게 아니니 잘 모르겠다. 발표 중간엔 다시 몰려오는 잠의 쓰나미를 주체할 수 없어서 잠시 졸았다.

올해는 KAIST 전산학과에서 NLP 연구의 선두주자이신 최 기선 교수님 연구실에서 작품을 출품하여 대상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나름 한글 입력기를 연구한다면서 학부 시절에 '한국어'와 관계가 있는 연구를 하는 교수님은 한 번도 안 마주치고 졸업을 해 버렸으니 이것도 기이한 일이다. 저분을 포함해 박 종철 교수, 시 정곤 교수(이분은 전산학과가 아닌 인문사회과학부 소속) 같은 분들 말이다. 박 교수님은 이번 대회 행사에서 개회사를 하셨는데, 국어의 위상을 화폐 단위의 위상에다 빗대어 말씀하시는 걸 들어 보니 생각보다 국어 사랑 정신이 투철한 전산학자이시라는 게 느껴졌다.

서울을 벗어난 장소에서 올해는 작년 입상작 개발자까지 초청하여 데모 세션을 연 것은 바람직한 시도라고 느껴져서 기분이 좋다. 사실, 옛날에 정보 올림피아드도 그런 식으로 공모 부문 입상자끼리의 교류와 전시 행사가 좀 있으면 좋겠다고 난 예전부터 생각해 왔었다. 참가 작품수가 늘어나고 대회의 권위와 위상이 더 올라가면, 심사와 시상 기준을 다음과 같이 더욱 세분화도 해야 할 텐데 이런 욕심까지 부리는 건 아직은 좀 이른지도 모르겠다.

- 분야: 말뭉치 도구, 교육용 소프트웨어, 또는 기타 유틸
- 부문: 대학 학부, 대학원, 개인 인디 개발자, 또는 기업
- 내력: 첫 개발인가, 아니면 동일 아이디어 하에서 예전 출품/입상작의 꾸준한 개선 내지 리메이크인가

그런데 이 대회를 앞으로 적극 육성하겠다면서 올해는 뽑는 입상작 수가 더 줄었다. 작년에 9명이던 것이 올해는 7명. 게다가 이미 작년도 재작년에 비해서는 지급되는 상금의 총액이 좀 줄어든 것이었다. 이것부터 좀 개선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

작년과 마찬가지로 올해도 주최 측에서 참석자 전원에게 저녁까지 쏘는 대인배 대접을 했다. 나도 늦게까지 얘기를 나누면서 교제할 사람이 주변에 여럿 있었지만 나는 선약을 잡은 상태였던지라 눈물을 머금고 먼저 자리를 떴다. 완전히 풀코스를 뛰었으면 영도를 완전히 빠져나가는 시각은 밤 8~9시 사이가 됐을 것이고, 남의 차를 얻어 타고 부전이나 부산 역까지 도착하는 시각은 그보다 더 늦어졌을 터이니, 진짜 부산에서 진한 하루를 보내게 됐을 것이다.

자가용을 가져갔으면 시간과 장소 제약이 없이 인근의 태종대 같은 부산 구경을 더욱 자유롭게 하고 돌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나 이 경우 주차나 유류비 같은 다른 문제 때문에 골치가 아프게 됐을 수도 있다. 게다가 난 그렇잖아도 대중교통만 이용하고도 피곤해서 이 고생을 했는데, 운전까지 해야 했으면 어찌 됐겠는가?

어쨌든 부산에서 기억에 남는 즐겁고 유익한 추억을 남겼다.  이 글에서 다 못 한 주변 이야기는 다음에 올라올 부록에서 이어질 예정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0/26 19:33 2012/10/26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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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 (2012/9/20-22)

회사 창립 n주년 기념으로 올해는 야유회를 2박 3일 제주도 여행으로 꽤 거창하게 갔다.
본인이 제주도를 방문하는 건 14년 만에 처음이었고, (1998년,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김포 공항에서 비행기 타는 건 13년 만에 처음인지라 (1999년, 대회 참가차 미국 갈 때)
개인적으로 굉장히 뜻깊은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번에 간 곳은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간 곳과는 중복이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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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도는 파란 하늘과 넓은 들판, 야자수 등이 4년 전의 미국 여행과 꽤 비슷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 저가 항공사는 공항에서도 부스와 탑승구가 역시 완전 한쪽 끝에서 끝까지 구석 외곽으로 밀려나 있다.
  • 마라도는 남이섬과 상당히 비슷한 모양과 크기인데, 그래도 남이섬이 아주 약간 더 크다.
  • 해산물 판매와 숙박업으로만 먹고 살던 마라도에 웬 짜장면 중국집들이 잔뜩 들어선 이유는... 10여 년 전의 모 CF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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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전망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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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로 가는 길목에서 본 제주도 산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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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초원에서 한컷 더. 윈도우 XP Luna의 배경인 초원과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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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보너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눈에 내려다 본 관악산 기슭의 서울대 캠퍼스이다.
제주에서 김포로 가는 비행기가 웬 경부 고속도로 서울 톨게이트, 외곽순환 고속도로 청계 톨게이트, 과천 경마장, 서울대를 거치다니, 착륙 방향을 맞추기 위해 동쪽 내륙 방향으로 상당히 우회하는 것 같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2/10/22 08:32 2012/10/2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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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 수여식 (201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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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를 졸업한 지 어언 7년이 지난 뒤에야 후드가 걸쳐진 졸업 가운이라는 걸 입게 됐다. 주황색은 공학을 뜻한다. (학사용 졸업 가운은 후드가 없음.)

학사는 성적이 중요하니 최우등/우등 졸업이라는 게 있다. 박사는 시험 점수 따위를 초월하여 개개인이 이제 자기 분야에서 프로 연구자이니, 졸업자들이 모두 호명되고 학위 논문의 제목까지 유인물에 다 기재된다.
그 반면, 석사는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콩라인이다.

태풍 직후, 날씨가 최강 좋았다. 맑고 파란 하늘 덕분에 사진 찍기는 최고의 날씨였다.
괜히 Y대 아니랄까봐, 학위수여식은 찬송가 제창과 성경 봉독으로 시작해서 축도로 끝났다.
혼자 예상한 것보다 좀 더 오버하듯이 씨익~ 웃어야 사진이 더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 나온다는 걸 느꼈다.

내가 전형적인 내 학부 학교 출신들이 가지 않는 학교와 과로 대학원 진학을 하고, 남들은 박사까지 다 마칠 나이에 이제 겨우 석사를 마친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남들이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에 없는 진로를 만들면서 가고 있어서..;;

Posted by 사무엘

2012/09/03 19:20 2012/09/03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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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대내의 박물관 관람 → (2) 천안함 잔해 구경 → (3) 초청자가 현재 근무하고 있는 군함 구경 → (4) 초청자의 관사에서 식사 대접 받으며 교제 순의 코스였다. 옆에 같이 간 사람들은 모두 교회 사람들. 단순 안보 관광인 (1), (2)를 넘어 (3), (4)는 군 관계자 인맥이 없으면 경험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 나의 “천하의 개쌍놈 북한” 관념이 이 견학을 계기로 더욱 투철해졌다. 정정당당한 교전으로는 남한을 이길 수 없어지니 치밀하게 비열한 복수극을 계획한 나쁜 놈들. 늘 민족 동족 운운하면서 뒤로는 일본 이상으로 나쁜짓을 해 온 녀석들이다.

- 제2 연평해전 당시에 교전 수칙 때문에 대통령이 많이 까였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내가 더 이해를 할 수 없는 건 당시 제1 연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인 박 정선 제독을 나라에서는 (사실상) 좌천 발령시키고 이내 전역시켜버렸다는 사실. 100번 까여야 마땅하다. 어디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이건 북한의 요구대로 한 게 정말 사실인가?

- 제2 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이던가 그때 대통령이 안 온 것에 대해서, 기지 견학을 시켜 준 해군 관계자는 아직까지도 꽤 유감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 제주 해군 기지 건설에도 배후에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 육군은 닥치고 쪽수이고, 공군은 1인 1비행기인 전투기 파일럿만 빼면 대부분이 비전투 병과인 반면, 해군은 배가 생활 공간 겸 그대로 전장이다 보니 그 중간에 속하는 군대 문화를 갖추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출에 목숨 걸어야 하고 바다 없이는 못 사는 나라인 주제에, 해군에 대한 지원이 너무 열악하다고 한다.

- 군함에는 내연기관과 제트엔진이 모두 달려 있다고 한다. 이것도 자동차와 비행기의 중간인 셈인데, 제트엔진을 가동하면 무척 빨리 움직일 수 있지만 극심한 소음과 연료 소모를 감수해야 한다고. 그런데 둘은 사용하는 연료부터가 서로 다르지 않나? (중유 vs 등유)

- 평택 시내의 경부 고속선 고가를 달리는 KTX를 보니 정말 감격스러웠다.

- 우리나라 철도를 공부하면서 단련된 나의 우리나라 역사, 지리, 안보 지식은 군 관계자와 얘기를 나누면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철도님, 사랑합니다.

- 이런 곳에 신실한 KJV 빌리버 크리스천이 계셔서 성경 교제와 안보 관광을 동시에 하고 올 줄이야. 친절하게 군 시설을 안내하고 융숭한 대접을 해 주신 해군 관계자들께 감사드린다.

Posted by 사무엘

2012/09/01 19:34 2012/09/0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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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졸업

1. 석사 논문 통과

한글 입력· 편집기의 통합적 설계와 구현에 관한 연구
김 용묵 (연세 대학교 대학원 언어정보학 협동과정 언어공학 전공)

석사 학위 논문이 본심까지 통과했고 난 무난히 대학원 졸업을 앞두게 됐다. 현재 나의 진학 구분은 '재학'에서 '졸업 예정'으로 바뀌었다. 당연히 기쁘다. 대선 후보가 이제 대통령 당선인이 된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내 논문의 지도 교수(논문 주심)는 연세대 국어국문과의 한 영균 선생님. 국문과에서 이공계 감각이 가장 뛰어나고 세벌식이 뭔지, 국어 정보학 쪽이 뭔지 아시는 분이다.

나의 논문 주제는 뻔하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이론 배경과 의의, 주요 기능 명세에 대해서 썼다.
이건 뭐 1, 2년 연구해 온 게 아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석사 지망생들과는 어차피 출발선의 위치가 다른 것도 사실이었다.

논문 심사 중에는 “너 2003년에 투고했던 김 용묵· 김 진형 논문 때에 비해서 지금 달라진 게 뭐냐?”란 질문을 받곤 했다.
생각 같아서는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당연히 넘사벽 급으로 달라졌지.. ㅜㅜ;;”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2003년 논문은 <날개셋> 엔진 버전이 겨우 2.x이던 시절인데.. 지금은 그때 없던 개념이 수두룩하며, 오토마타만 해도 옛날엔 지금 같은 수식도 아니고 진짜 흑역사 수준의 유치한 장난감으로 기술했었는데 지금 것하고는 비교 자체가 실례이다. =_=;;

한글 입력과 관련된 수많은 연구들은 통상적으로 그저 글쇠 배열이 어떻고 손가락 움직임이 어떻고 하는 쪽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나의 관심사는 그보다 훨씬 더 fundamental한 것이다.

그 어떤 한글 입력 방식을 만들더라도 결국은 한글 조합 로직이 있어야 한다.
내 프로그램의 내부 구조와 이념을 아는 분이라면 잘 아시겠지만, 다양한 한글 입력 로직을 '기술'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래서 한 프로그램에서 무슨 입력 방식을 불러와서 쓰고, 편집하고 저장할 수 있게 했다. 그게 2장의 내용이다.

“한글 입력 오토마타야 이미 1980년대에 이론이 다 정립됐고 지금은 누구나 당연히 그저 그러려니 하고 쓰는 시스템인데, 그것만 전문적으로 또 연구할 게 있냐?”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나는 그것만을 소재로 연구를 많이 해 냈다.

다음 3장은 내가 개인적으로 이 논문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이다.
2장에서 제시한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컴포넌트들을 응용하여 이런 저런 입력 방식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글자판 종류별로” 분류하여 제시했다. 바로 두벌식, 두벌식과 세벌식 사이의 절충 방식, 그리고 pure 세벌식 이렇게 세 종류.

두벌식에 대해서는, 세벌식 입력 방식을 설계할 때는 거의 필요하지 않은데 두벌식이기 때문에 음절 구분과 관련해서 추가로 필요한 구성요소들을 소개했다. 초+종성 공유 낱자 결합 규칙이라든가 특수 도깨비불 규칙, 조합 종료 타이머가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절충 방식에서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범용적인 기능을 활용하여 복벌식이라든가 신세벌식 같은 입력 방식을 구현할 수 있음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pure 세벌식은 초· 중· 종성이 모두 구분되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모아치기부터 시작해 무한 낱자 수정, 특정 낱자 바로 지우기 등이 모두 가능함을 보였다.

이런 식으로 세 개의 케이스를 나눠서 논리를 전개하는 방식을 이번 논문 학기 때 최초로 생각해 냈는데, 개인적으로 굉장히 마음에 든다.
지금 프로그램의 도움말도 그 논문 스타일로 개편할 예정이다.

4장은 한글 입력기가 글자 입력 자체의 범위를 넘어서서 자연스럽게 연계할 수 있는 텍스트 변환이나 검색 기능을 다뤘다. 잘 알다시피 낱자 재결합이라든가 한글-영타 변환 같은 것 말이다. 한글을 입력하면서 활용 가능한 알고리즘은, 이미 입력된 한글에 대해서도 일괄 적용이 가능해야 한다는 게 지론이다.

5장은 구현체 소개로, 잘 알다시피 동일 엔진에서 편집기와 IME 모듈, 입력 패드라고 Windows 플랫폼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프런트 엔드가 다뤄졌다.

요컨대 논문은 앞으로 그 어떤 한글 입력 방식을 만들더라도 공통적으로 적용될 기술 기반을 닦아 놓았다는 데 의의가 있다. 그리고 지금처럼 논문을 구성한 것은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내 자신에게 떳떳하고 정말 체계적으로 잘 구성했다.

마지막으로 감사의 글에는...

  • 너님은 학부 출신만으로 재능을 썩히기엔 너무 아깝다며 대학원 꼭 가라고 내게 독려를 해 주신 분.
  • 수많은 태클과 딴지를 통해 나의 학문적 방어력을 키워 주시고, 프로그램 매뉴얼을 일말의 논문처럼 보이게 기여해 주신 논문 지도교수님
  • 야간도 아니고 일반 대학원에 불쑥 입학해 버렸는데도 괘씸하다고 날 짜르지 않고, 학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고 직위를 유지시켜 주신 회사 관계자
  • 2년간 동고동락했던 학교 입학 동기와 과 선배, 친구들

이 들어갔다. 위에 언급된 분들은 정말로 감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문단에는

“끝으로, 한글 기계화의 선구자로서 우리 겨레의 은인이며, 특별히 제게는 책과 글을 통해 10대 시절부터 세벌식 한글 사랑 정신으로 큰 감화를 주신 고 공 병우 박사님의 영전에 이 논문을 바칩니다.”


라고 써 넣었다. 뭉클~~ 이 논문의 이념과 성향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글쎄, 이것도 학교나 과에 따라서는 분위기가 다소 차이가 나는 모양이다. 박사도 아니고 석사 나부랭이 주제에 뭔 학문 업적을 이룬 게 있다고, 세상사를 다 달관한 듯이 벌써부터 감사의 글을 논문에다 넣냐고 의아하게 보는 곳도 있다고 함. 하지만 우리 학교 우리 과는 안 그렇기 때문에... ㅎㅎ

논문 작성 과정이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작품은 이미 다 나와 있는데 그걸 글로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어찌나 힘들었는지, 온갖 스트레스에 머리를 쥐어짜면서 날밤 새기도 했다. (물론 논문 학기 중에도 코딩이 전혀 없었던 것도 또 아님)
하물며 연구 주제도 못 잡은 채 덜컥 논문 학기를 맞이한 학생은 얼마나 고생이 심할까?

이쪽은 문과 기반인 협동과정이기 때문에 이공계 대학원처럼 연구실에 틀어박혀 사는 게 아니다. 석사 때부터 교수의 push를 받아 가며 공동 프로젝트 진행하고 학술지 논문 게재하면서 자연스럽게 학위 논문 주제까지 정하는 형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돈은 랩비가 아니라 따로 취업을 해서 일하면서 벌고, 개인 사정 때문에 논문 준비를 못 하면 졸업이 n학기 수준으로 한없이 늦어지게 된다.
그래도 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다만, 창작의 고통보다 더한 걱정은...
교수님이 생각하시는 차후의 연구 방향과 내가 하고 싶어하는 연구 방향이 미묘하게 어긋난다는 점이다.
디테일한 사항을 이 자리에서 얘기하지는 않겠으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지금 석사 졸업은 시켜 주지만, 앞으로도 그렇게 나랑 코드가 안 맞을 거면 넌 내 밑에서 박사는 계속 못 한다” 처럼 좀 됐다. ㅜㅜ 어이쿠..

뭐, 말은 그렇게 하셔도 설마 제자를 그렇게 내쫓지는 않으시겠지... 나중에 입시철이 됐을 때 선생님 찾아가서 또 데꿀멍 좀 하면.. =_=;;
코스웍 이수하면서야 뭘 공부할 수도 있고 선생님이 원하시는 무슨 과제나 프로젝트를 하고 무슨 학술지 논문을 쓸 수도 있지만,

다음 학위 과정에서의 최종 학위 논문은 한글 글꼴을 주제로 쓸 것이다.
입력으로 시작해서 글꼴로 공부를 끝내겠다는 마스터 플랜은 사실 대학원 석사 지원하기 전부터 분명하게 생각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건 타협이나 양보를 할 수 없다.

2. 나의 적성과 정체성

많은 사람들이 나보고 “넌 정말 천재다”, “네 능력에 겨우 지금 회사에서 그 연봉은 너무 아깝다”, “넌 공부 더 해야 된다.”, “대학원 꼭 가라. 유학 가라. 두 번 가라”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현재 겉보기 역량에 비해서 훨씬 작은 사회적 지위밖에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역량들이 기성 사회 조직에서는 거의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나의 스펙을 보고는 내가 모든 것을 뭐든지 잘하는 천재인 줄로 무척 오해를 하셨다. 카이스트 출신이니까,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혼자서 다 만들었을 정도니까 시험만 쳤다 하면 100점 받겠지, 이런 것 개발도 잘하겠지, 뭘 잘하겠지 등등...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나는 실제로는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밖에 잘하는 게 없고 그것 말고는 안중에 없다. ^^;;;;;

고집과 외곬수도 못 말릴 정도로 아주 강하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기존 학교나 대학(원), 회사에서 정상적으로 소속되어 일하는 사람이 상상하거나 기대하거나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겠는가? 그건 애초에 1.0부터가 고3 때 수능 공부 다 때려치우고 만들어진 건데 말이다.

이런 집념에 비해서 나는 지금보다 더 빠른 컴퓨터를 만든다거나 SNS 데이터를 분석해서 의미 있는 동향을 뽑아 낸다거나, 수학적으로 더 엄밀한 소프트웨어 개발 환경을 만든다거나 기가 막힌 웹 표준 기술을 만든다거나, 심지어 스마트폰용으로 기가 막힌 게임 앱을 개발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난 전산학과 대학원에는 가지 않은 것이다. 평양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다.

그리고 그런 진로의 특수성 고민 때문에
나의 다른 과학고/카이스트 동기들은 패스트 석· 박 통합 코스를 밟아서 지금의 내 나이가 되기도 전에 박사까지 다 마친 반면,
나는 인제 겨우 석사를 마친 수준인 것이다.

난 공무원, 대기업, 공기업 같은 조직에 못 있는다. 의사, 변호사 같은 거 못 한다.
난 오로지 내가 붙들고 있는 아이디어를 다 작품으로 옮기기 전에는 단언하건대 다른 일은 죽어도 못 할 것 같다. 오로지 이것만 미는 수밖에 없다.;;

3. 소감 & 이후의 계획

- 대학원에 있으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역시 국어 '운동꾼' 말고 실제 '학자'들이 한국어와 한글에 대해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그럭저럭 배울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일부는 내가 너무 편견에 빠져 있었고, 그렇게 특수하지 않은 현상에 너무 의미를 두고 집착하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아직 학부의 사고방식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던 입학 초기엔, “어? 한 학기에 최대 12학점밖에 못 들어? 대학원은 안 그래도 등록금도 학부보다 더 비싼데 이거 너무 적은 거 아냐?“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이야 그런 생각 따위는 개나 줘 버린 지 오래이다. 한번 12학점씩 들어 본 뒤로는 다시는(앞으로 박사 마칠 때까지도!) 12학점씩이나 듣지는 않을 것이다. -_-;;

- 사전학, 텍스트 마이닝 등 언어학의 응용 분야는 역시 여러 학문 분야의 복합 성향이 짙다는 걸 느꼈다. 나의 관심 분야인 글꼴 쪽도 그럴 거라고 생각한다.

- 첫 학기 때 기본기 보충 차원에서 국문과 학부 수업을 청강했던 '국어 통사론' 과목은 나 같은 공대 출신 비전공자 입장에서 큰 도움이 됐다. 언어정보학 했다는 사람이 한국어 문법에 대해서 그래도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 그 외에 국문과 대학원 수업은 그럭저럭 강의 듣고 리포트도 안 뒤쳐질 만큼은 써 냈지만, 그릇의 크기의 부족으로 인해 내가 제대로 못 받아들인 내용도 적지 않았다.

- 우리 과에서 자체적으로 개설한 수업은 내용이 다채롭고 좋은 편이지만, 학생들이 워낙 출신이 다양하고 배경 지식 및 관심 연구 분야가 제각각이다 보니 국문과면 국문과, 전산학과면 전산학과 같은 단과 대학원 수업에 비해서 내용의 깊이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건 불가피해 보였다. 이것은 협동과정의 단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코스웍과는 별개로 나처럼 똘끼 충만한 학제간 연구 주제를 이미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는, 협동과정이 장점과 기회로 작용할 수 있겠다. ㄲㄲㄲ

- 원래는 사전 연구실에서 시작해서 전산 언어학, 말뭉치 언어학, 사전학 쪽을 표방하던 이 과가 이공계 협력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요즘은 점점 한국어 교육 쪽 비중만 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늘 느끼는 것이지만, 대한민국이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떵떵거리며 잘 살고, 다른 나라들에게 꿈과 희망과 롤모델을 제시해 줄 수 있어야 한국어 수요도 계속 있을 것이고 한국어 교사들도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 그래도 나는 이런 여건에 아무리 못 하더라도, 최하 마지노선으로 석사 학위는 있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 앞으로 뭘 더 하든지간에 지난 2년간의 투자는 아깝지 않다. 이제 나는 개인적으로 한글 입력 소프트웨어에 대해 연구한 걸 대학원 세계에서도 당당히 어필할 수 있게 되었다.

- 올해 하반기엔 일단 회사로 전업 복귀한다. 이번 논문 학기 동안 심신이 다소 피폐해졌다. 어서 컨디션을 추스리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다음 버전(일단 6.7)을 올해 중에 내놓을 생각이다. 어서 이거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한 7.0 정도까지 만든 뒤에는 본격적으로 글꼴 연구 모드이다..

- 아니 그보다도, 앞으로 논문이 조만간 완전한 책 형태로 인쇄돼 나오면, 온갖 지인들한테 나눠 주면서 인사 드리고 만나서 노는 게 우선이다. 최하 50부 정도는 뽑아 둬야 할 듯.

Posted by 사무엘

2012/06/27 08:27 2012/06/2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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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날 특집 포스트 (스압 주의)

1. 어버이날과 부모님에 대해서

내가 분류해 보니,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각종 특별한 명절, 기념일 등의 명칭은 크게 다음과 같은 다섯 갈래로 나뉜다.

  • ‘절’로 끝나는 한자어: 제헌절, 삼일절, 광복절, 개천절, 성탄절
  • ‘일’로 끝나는 한자어: 석가탄신일, 식목일, 현충일
  • 완전히 독립적인 한자어: 추석, 단오
  • ‘날’로 끝나는 고유어: 한글날, 어버이날, 어린이날, 설날
  • ‘-의 날’로 끝나는 고유어: 철도의 날, 스승의 날

이런 조어 원리는 그다지 규칙성이 없고 전적으로 그냥 어감을 고려한 case by case인 걸로 보인다.
똑같이 종교 공휴일일 뿐인데 성탄절과 석가탄신일의 조어 원리가 서로 다른 이유라든가, 어린이날이 ‘아동의 날’이 되지 않고 굳이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딱 떨어지는 규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자, 5월 5일 어린이날 다음으로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다. 어린이날이야 아동 문학가 소파 방 정환이 제정한 굉장히 한국적인 근거를 지닌 날인 반면, 어버이날은 명목상의 근거는 미국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나 확실치 않다. 외국엔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는 곳도 많고, 또 한국의 어버이날이 어린이날보다 나중인 것이 윤리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요즘은 철없는 막장 부모도 많아서 참 문제이긴 하다만, 그래도 ‘일반적인’ 경우로 볼 때, 인생의 참으로 막대한 부분을 희생하여 우리를 이 정도까지 키운 부모님의 은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성경도 예외가 아님. 십계명에서 종교적인 규범에 속하는 1~4를 제끼고 곧바로 등장하는 인륜 규범 1타는 “부모를 공경하라(honour)”이다. 이것은 단순히 부모 명령에 무조건 ‘까라면 까’라는 식의 발상이라기보다는, 그보다도 일단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기쁘게 하고 남들 보는 데서 부모님 품위를 존중하고 명예를 높여 주라는 뜻이다.

부모의 사상과 가치관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녀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대체로 부모가 너님들 먹여 살릴 여건을 만들고 체통 세우느라 사고방식이 최대한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방향만을 추구하게 돼서 그런 거다. 부모 세대라고 해서 쿨하고 개방적인 걸 몰라서 그렇게 고리타분하게 산 게 절대 아니다. 그러니 동의는 못 하더라도 부모님 마음을 이해는 할 필요가 있다.

제아무리 가난하고 못 배운 부모라 해도, 너님을 낳아서 키울 필요가 없었다면 그 연세에 이르기까지 신세 못 펴고 그 모양 그 꼴로 살 필요는 없는 사람이다. 정말이다.

물론, 부모가 예수 믿지 말고 네 신앙을 부인하라고 한다거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교리 노선을 추구하는 교회에 강제로 다니라고 한다면 그런 데에까지 맹목적으로 순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품위와 명예를 존중해 주면서 불순종할 수는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할지는 먼저 구원받고 먼저 바른 신앙을 물려받은 자녀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면서 방법을 생각해야 할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소한의 윤리와 기강을 갖춘 문명 사회에서는 효도를 강조하고 패륜은 엄벌로 다스렸다. 구약 율법은 부모를 저주하거나 때리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으며, 심지어 신명기에는 고집 세고 식탐이 심하고 부모의 교정만으로 씨가 안 먹히는 싹수 노란 자식은 아예 마을 차원에서 린치를 가해서 죽여 버리라는 섬뜩한 추가 지시까지 있다(신 21:18-21). 하나님은 그 정도로 패륜을 싫어하신다. 특히 “아 ㅆㅂ, 내가 어쩌다가 이런 집/곳에서 태어나게 됐어” 부류의 패드립 말이다(사 29:16, 45:9) .

이 명령이 특히 무시무시한 이유는, 부모의 말이 사실인지 이웃 주민이나 자식 당사자로부터 최후 변론을 듣는 절차도 전혀 없이 완전 비민주 인민재판 즉결처분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배도 행위가 발견되었을 때는 ‘부지런히’ 진상 파악부터 하라고 돼 하지만(신 13:12-16, 17:2-7) 저건 그렇지 않다. 사실, 자식 새끼를 제발 좀 어찌해 달라고 친부모가 제 발로 찾아올 정도면 자식이 얼마나 막장인지 더 말을 들을 필요도 없었을 터이다. 이 명령이 실제로 얼마나 시행되었는지는 모르겠다.

2. 가정과 성에 대해서

5월이고 하니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을 좀 다시 해 보게 된다.

오늘날 이 정도라도 사회가 유지되고 돌아간 데엔 가정의 공이 절대적이었을 것이고, 특히 여성의 희생과 헌신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옛날에 지금 같은 여성 인권 단체가 있었고 사람들이 좀 힘들다고 덥석 집 나가고 이혼을 해 버렸다면, 파탄 나는 집안과 인생 망치고 자살이나 범죄로 빠지는 애들이 넘쳐나게 됐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송 현 선생님이 예전에 글로 아주 통렬하게 표현하신 적이 있다. (☞ 링크 클릭)

옛날에 가혹한 여성 인권 유린이라 불릴 정도로 엄한 성 억압(?) 관습이 왜 있었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민망하니, 구체적인 예를 거론하진 않겠다) 마치 고문처럼 그것도 물론 나쁜 관습이고 부조리이다. 언제까지나 여성만 일방적으로 당하고 살 수는 없는 것 역시 본인은 안다. 단지 옛날에 죄의 결과 때문에 그런 게 왜 있을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간다는 뜻이다.

성이라는 건 정말로 생판 모르던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해서 가정을 유지시키는 근간으로만 ‘은밀하게’ 쓰여야 하는 선물이요 비밀 병기이다. 부부 사생활은 하나님도 전혀 간섭 안 하고, 서로 같이 뭘 하며 즐기든 존중해 주는 절대적인 영역이다(히 13:4. honour과 동일한 어근인 honourable).

그러나 반대로 성이라는 게 다른 용도로 오· 남용되는 것을 하나님은 구역질을 할 정도로 가증스럽게 여기며 미워하고 정죄한다. 결혼한 부부가 사생활에 문제가 있어서 성 교육이나 상담을 받는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미혼 청소년이나 청년에겐 피임법을 가르칠 게 아니라 잠언 6장이나 딤후 2:22를 숙지시켜야 한다. 이걸 몰라서 인생 망친 안타까운 예가 허다하다. 옛날에 서 부희 씨도 그랬고.

도대체 성을 왜 남의 것하고 비교를 하는가? 그게 공공연한 개방과 비교의 대상이 되고 금전 거래의 대상이 되고 개나 소나 다른 용도로 문란하게 쓰이기 시작하면, 그때야말로 진짜로 옛날에 어떤 아저씨의 절규처럼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헬게이트가 시작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경에서 창세기 1~2장은 전반적으로 작가 관찰자 시점으로 천지 창조에 대한 과정을 묘사하는 내용인데, 끝부분에 유일하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아예 독자에게 코멘트를 남긴 구절이 있다. 바로 창 2:24로, 그게 그 이름도 유명한 “남자가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될지니라”라는 결혼 제도 구절이다. 기독교식 결혼식의 목사 주례에서 단골로 듣는 구절이다.

3. 출산과 자녀 교육에 대해서

성경의 사고방식은 결혼과 출산에 아주 옹호적이다. 성경에는 “다산하고 번성하라”라는 명령만 있을 뿐 맬서스 같은 사고방식은 결코 찾을 수 없다. 소위 가족 계획이란 건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도 간섭 안 하는 영역을 공권력이 나서서 자기 편한 대로 제어하겠다고 하는 굉장히 무모한 생각이다.

흔히 중국 하면 자녀를 한 명씩밖에 못 낳는 나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과거에 마오 쩌둥은 한때 굉장한 산아 장려책을 폈으며 20세기 중반에만 해도 6억 남짓이던 중국 인구를 10억이 넘게 불려 놓았다. 중국이 처음부터 지금만치 인구가 많은 게 아니었다는 게 충격적이다.

마 주석은 쪽수가 국력이라고 여겼으며 어느 문헌에 따르면, “아이는 전투기에서 투하하는 폭탄과 같다”고 교시할 정도였다. 그런데 어라? 무신론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답지 않게 저 말의 표현 자체는 묘하게 성경적이다. (시 127:3-5) 무기에다 비유한 게 일치한다. 비록 그러다 얼마 못 가서 중국은 다시 산아 제한으로 돌아섰지만 말이다.

단, 성경이 말하는 다자녀 예찬은 자녀들을 성경대로 잘 양육했을 때에나 가능한 시나리오이다. 안 그러면 뼈 빠지게 자식 키워 봤자 미래에 부모는 휴거되는데 자녀는 못 되고 땅에 남아서 오히려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온갖 재앙을 당하거나, 그것도 모자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군대에 징집되어 계 19:18-21의 악역에 동참하는 비참한 신세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종말이 지금으로부터 가까운 시간에 발생한다면 말이다.

성경은 자녀 양육에 대해 절대적으로 각 가정의 부모에게 권한을 위임하고 있다. 그리고 체벌에도 아주 옹호적이다. 잠언에 애들 때리면서 키우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모른다. 나도 부모님에게 맞으면서 컸지만, 그거 정말 공감한다. 안 그랬으면 내가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실감을 못 했을 것이다.

사랑의 체벌은 가정 폭력 및 아동 학대하고는 가히 종이 한 장 차이인 걸지도 모르겠다. 이게 인생에서 정말 미묘한 점이고, 어찌 보면 세상이 참으로 공평한 면모이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 없이 돈만 쏟아 붓는다고 절대로 저절로 바르게 크지는 않으니 말이다. 내 말이 안 믿어지면, 한번 실제로 저렇게 해 봐라.

부모가 세상적으로 잘났기 때문에 애를 때리고 자녀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게 아니다. 비록 부모도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고, 그렇게 안 하면 애가 정말로 바르게 클 수가 없으며 자녀에게 그 정도까지의 악역을 눈물을 머금고라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부모밖에 없기 때문이다.

허나, 오늘날 사회는 부모의 권위가 실종되고, 애들을 부모로부터 점점 떼어 놓으려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매우 큰 심각한 문제이다. 아이들에게 바른 크리스천 신앙을 전수해 줄 수 있는 건 올바른 가정 교육밖에 없는데 요즘은 이런 현상까지 있는 듯하다.

http://cbck.org/bbs/board.html?board_table=com&write_id=1715#c_1744
대부분의 가정에서 지원을 안 받으면 손해라고 여기고 한창 부모와 상호작용할 나이의 어린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등 교육기관에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http://systemclub.co.kr/board/bbs/board.php?bo_table=board01&wr_id=4546
능력 있는 국민들까지 공짜로 내모는 정부 때문에 엄마 정신이 병들고 애기도 파괴됩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 씨바, 결혼은커녕 여친 사귄 적도 전혀 없는 주제에 벌써부터 너무 애늙은이 같은 글을 써 버렸다. ㅋㅋㅋㅋㅋ 하지만 이 글은 어버이날 기념 특집이니 양해 바란다.

4. 철도 성령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부모님의 은혜와 관련하여 가장 감화를 받았던 때는 2007년 봄의 어느 날이었다. 병특 복무 중이었고, 그러고 보니 훈련소에 들어가기 얼마 전이었다.

대전에 볼일이 있어서 경부선 새마을호 특실을 탔다. 그때 본인은 새마을호 특실의 음악 채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들의 샘플을 채널별로 15분씩 녹음해 놓으려고 컴퓨터와 양방향 잭을 챙긴 상태였다. 특실에는 마치 비행기 객실처럼 다음과 같은 6개의 채널이 있다. (지금은 없어졌음)

  1. 자연의 소리 (이지리스닝 instrumental)
  2. 한국 가요
  3. 가곡
  4. 재즈
  5. 클래식
  6. 객실에서 방영되는 TV 방송

일반실은 이어폰을 꽂으면 6번만 들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랬는데 1번과 2번 채널 다음으로 3번 가곡 채널을 듣고 있으니 얼마 후 <어머니의 마음>이 흘러나왔다. 양 주동 박사가 작사한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그 곡 말이다.

그 곡은 가사가 잘 알다시피 정말 애절하고 감동적으로 지어져 있다. 국문학 박사가 쓴 가사답게 예스러운 표현도 제법 들어가서 품위 있어 보인다. 100을 의미하는 ‘온’, 그리고 일부러 음운을 탈락시킨 ‘따(땅) 위에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그지없다’ 등. 3절 가사를 보시라. 눈물 없이는 못 듣는다.

사람의 마음 속에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 속엔 오직 한 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리요 어머님의 사랑은 그지없어라


3절이 흘러나올 때, 철도 성령님으로부터 계시가 내려왔다. 아아, 어머니께서 나를 낳아서 키워 주신 덕분에 내가 지금 이런 지상천국 열차를 타면서 한없는 행복에 젖을 수 있구나!

그 깨달음으로 인해 행복과 감격과 감동이 교차하면서 콧등이 찡해졌고, 나는 옆자리 승객이 보건 말건 엉엉 흐느껴 울음을 터뜨렸다. 남들은 군대에 가서 유격 훈련 때 PT 체조 8번을 하면서 <어머니의 마음>이 <스승의 은혜>로 바뀌는 체험을 한다지만 나는 그걸 열차 안에서 체험했다.

세상에 지구상의 어느 교통수단에서 이런 체험을 할 수 있었겠는가?
비성경적인 은사주의는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알면 퇴치되지만, 사실 철도만으로도 충분히 퇴치 가능하다. 철도 성령만도 못한 이상한 흥분이나 쾌락 따위엔 관심조차 안 가게 된다.

철도가 나의 삶을 얼마나 엄청나게 변화시켰고 음침하고 어둡던 나의 가치관을 건전하게 바꿨으며, 심지어 신앙에도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이 자리에서 다 간증하기에는 시간과 지면이 부족하다. 이 땅에 성경과 복음과 더불어 이런 철도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그저 감사드릴 뿐이며, 우리나라에 철도 덕후들이 많이 많이 배출되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5/08 08:21 2012/05/08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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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북 프로 지름

지난 3월 24일, 맥북 프로 13인치형 모델이 본인의 제 5대 개인용 노트북 PC로 취임했다.
본인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노트북 PC를 사용한 이래로 14년 만에 애플 계열 컴퓨터를 개인용 컴퓨터로 장만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사용하던 제4대 노트북은 2008년 5월에 도입되었고 윈도우 비스타 + 코어2 Duo 기종이었다. 오늘날의 PC 기준으로는 완전히 구닥다리로 전락한 셈.
좀 나중에 석사 졸업 기념으로 컴을 바꿀 생각이었지만, 마침 고향에서 부모님께서 새 컴퓨터가 필요하다고 하여 지금 내가 쓰던 걸 고향으로 보내고 나는 새 컴을 예정보다 더 일찍 장만하게 됐다.

초대 노트북은 분실, 2~3대 노트북은 고장 폐기였던 것에 비해, 4대 노트북은 약 4년에 가까운 임기를 마친 후 비교적 명예롭게, 그리고 예상보다 살짝 더 일찍 은퇴했다. 빠진 키캡 정리와 하드디스크 정리, 사소한 접촉 불량 수리 같은 정비를 받은 후, 고향으로 갔다.

지금까지 정말 유용하게 잘 사용해 왔고 키보드와 터치패드의 모든 감도가 손에 착 익은 정든 놈이긴 하지만, 이제 성능이 너무 뒤쳐졌고 액정 화면도 슬슬 누렇게 뜨는 등 노후화의 기미는 피해 갈 수 없었다. 물론 이것도 고향에 있는 컴퓨터보다는 훨씬 더 좋은 기종이다. 지금까지 부모님께서 쓰시던 컴은 이제 정말로 갖다 버릴 때가 됐고.. ㅜㅜ

구입한 새 노트북에 대해 스펙 차원에서 좀 아쉬움을 감수한 것은,
운영체제를 두 개나(윈도우와 맥 모두) 쓰는 것치고는 좀 부족한 감이 있는 하드디스크 용량.
그리고 지금 노트북보다 화면 해상도 픽셀수가 가로와 세로 모두 떨어진다는 점이다.
게다가 4:3이 아닌 요즘 대세인 와이드 화면을 쓰는 만큼, 이제 task bar를 가로가 아닌 세로로 배열해야겠다.
이질적인 키보드· 마우스 사용법은 덤.

Windows 운영체제는 내가 알아서 장만이라도 해서 깔아야 하는지 우려됐는데(OS 자체의 설치는 그렇다 치더라도 각종 드라이버들은 어떻게 잡으라고!!), 다행히 웃돈만 주면 판매처에서 아예 알아서 설치까지 한 채로 제품을 준다고 해서 안심을 했다.

Windows에다가는 단골 18번지 프로그램들을 설치해서 내가 늘 하던 일만 쭉 하고, 오픈소스 크로스 플랫폼 형태로 존재하는 프로그램들은 가능한 한 맥용으로 설치하는 방법으로 맥OS에 차츰 적응을 해 나갈 생각이다. 물론, 단골 18번지 프로그램들이 다들 단순 취향을 넘어서 내 생업과 관련된 일들을 하기 때문에, 나는 Windows를 아주 떠나서 살 수는 없다.

당장 개발툴만 예로 들어 보면, Windows에다가는 비주얼 스튜디오를, 맥에다가는 xcode와 Eclipse를 설치했다. 이클립스를 굳이 윈도우에다가 설치할 필요는 없으니까. 나도 드디어 윈도우 7 + 비주얼 스튜디오 2010으로 완전히 갈아탔다. 거기에다 호환성 차원에서 2003도 여전히 설치.

나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혼자서 만들었을 정도로 Windows 환경 개발에 정통한 것에 '비해서'는 여타 운영체제를 너무 안 다뤄 봤고 너무 모른다. 가령, 그 정도 기술 수준의 프로그램을 만들 줄 알면서 유닉스 명령을 나 정도로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 싶다.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으니까. 오로지 Windows 독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 맥북 장만은 약간 risk도 감안하면서 내린 결정이긴 하다만, 15년에 가까운 나의 Windows 독점 풍토에 뭔가 새로운 바람을 수혈해 넣을 거라는 기대를 해 본다.
비록 나는 이제 예전에 맨대가리 헤딩으로 프로그래밍에만 매달려서 윈도우 API를 공부했듯이 맥OS API를 새로 처음부터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 미래라는 건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같은 데스크톱급 PC로도 모자라서 스마트폰은...;; 글쎄다. 이것도 언젠가는 안드로이드든 아이폰이든 써 보면 좋을 것 같지만, 딱히 길 안내 기능 말고는 그 돈까지 주면서 일부러 앞장서서 사서 쓸 매력을 느끼지는 않는다. PC에서 벌여 놓은 일이 너무 많아서 이것저것 다 쫓아가다간 다 놓친다. pruning이 필요함.

컴퓨터를 새로 세팅하다 보니, 이제 운영체제와 각종 소프트웨어들을 온통 업데이트해 줘야 하고, 맥 기반 개발툴들도 다 인터넷을 통해서 구해야 한다. 고로 수백~수 GB에 달하는 트래픽이 예상되는데, 언제 날잡아서 안정적인 유선 네퉉으로 해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3/31 08:22 2012/03/31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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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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