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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中

다음은 임진각 전망대에서 북쪽 도라산 역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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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 건너편은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며 북한 땅은 더욱 아니다. 건너편은 그저 민통선 안쪽일 뿐이다.
과거의 경의선 철교와 지금의 경의선 철교의 위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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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에서 평화 공원으로 가는 길엔 이렇게 6·25 참전국 기념비가 있고, 아웅산 폭탄 테러 순직자의 위령비도 있다.
6·2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전쟁이다. 6·25만치 선악 이념이 분명했던 전쟁은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UN이 창설 이래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딱 한쪽 편을 들어서--당연히 대한민국 편-- 반대편을 적극적으로 퇴치하는 군사 활동을 했으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국가들이 오로지 한 자그마한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불법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을 생각해 보아라. 미군이 개입했던 전쟁 중에 6·25만치 참전 명분이 깔끔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굳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제3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6·25는 여타 전쟁들과는 달리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지도가 매우 저조하다. 아예 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구도가 너무 명확하다 보니, 딱히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하거나 삐딱하게 풍자· 비판을 할 껀덕지가 없어서 잊혀졌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이라크, 베트남 등에 비해, 6·25는 전쟁을 겪은 당사자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뜬히 이뤄 내고 G20 급의 선진국이 되어 있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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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원래 부통령이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DR)가 급사한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 양반이다.
그가 6·25 때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북한· 중공군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다”와 “한반도에서 또 핵이 떨어지고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뻔했던 상황을 예방했다”라는 두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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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화 공원을 살펴본 뒤, 우리 일행은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도라산 행 열차를 탔다. 문산-도라산도 아니고 임진강-도라산 겨우 한 정거장 거리만을 이용한 것이다.

개인이 도라산 역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왕복 승차권 구입과 더불어 연계 안보 관광 패키지 신청도 같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역 주변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정책이 또 바뀐 것 같다.
이 지대의 관광 상품은 도라 전망대, 제3 땅굴, 통일촌 견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4시간 정도 걸린다.

역 주변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역시 보안 시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통제하는 헌병이어서 그런지, 다들 키 크고 체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20대 초반 나이일 텐데 말이다.

도라산 역의 옛날 사진을 보니 역명판의 서체가 목판체 계열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코레일체도, HY울릉도도 아니라 윤 디자인에서 만든 월드컵체이다. 철도역에서 월드컵체를 볼 일이란 원래 전혀에 가깝게 없을 텐데 뜻밖이다.
역이 개통한 시기와 저 서체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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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은 출· 입구 관리 사무소와 세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물론 현재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시설) 내부가 꽤 크고 넓다. 승강장 역시 KTX 한 편성 정도는 너끈히 세울 수 있어 보이는 규모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없이 한동안 설명만 좀 늘어놓겠다.
역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른 뒤, 도라 전망대로 향했다. 여기는 민간 관광객에게 개방되긴 해도 엄연히 일종의 GOP이며 군사 시설이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이 전망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가 보였다. 기정동 쪽은 깃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료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펄럭이지 않을 뿐 인공기도 꽂힌 게 보였다. 게다가 북한 쪽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서 있는 북한군 병사까지 보였다! 김일성 백성들도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호모 사피엔스이긴 했다.

이게 내가 브라운관이나 LCD 같은 전자 기기가 아닌 매체로 북한 관련 시설물을 본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 쪽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광객도 굉장히 많았다. 미국인이야 그렇다 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도라 전망대 다음으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을 견학했다.
옛날에는 관광객들이 건물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를 걸어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지만, 지금은 승강 열차가 생겨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다.

주요 소지품들은 사물함에다 맡기고, 헬멧을 지급받은 뒤 몇백 m 정도 거리를 산보하듯 다녀 왔다. 땅굴 입구 자체가 거의 DMZ 경계선 근처에 있고, 땅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한계는 지상에서 군사 분계선이 200m도 채 안 남은 지점이 끝이다. 그 이상은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 굳게 잠긴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땅굴은 키가 170cm가 넘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안 들키게 병력 수송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만 굴착을 한 셈이다. 땅굴을 파는 게 좀 힘드나.. 지하철이라는 게 처음 등장하고 전기 철도가 도입되었을 때 제3궤조 집전식이 괜히 쓰였던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터널의 단면적이 작아도 되기 때문이다.

육로를 통한 남침 방법이 완전 원천 봉쇄되고 차단되자, 비열한 김 일성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땅굴을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악한 통치자 밑에서 영혼이 완전히 황폐화된 채 사는 북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한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땅굴은 여러 개 팠으면서, 북한은 정작 평양 지하철을 만들던 중에는 대동강 아래를 관통하는 하저 터널 건설에 실패했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제3 땅굴은 1978년에 전땅크가 육군 제1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박 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탐사 작업을 통솔하다가 끝내 발견했다. (...) 이 양반, 그래도 리즈 시절에 나라를 구하는 과업을 한 건 이뤘다.

우리가 주로 관광한 것은 이 둘이었고, 그 뒤엔 통일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좀 놀다가 다시 도라산 역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내부는 온통 농경지나 황무지, 군부대이고, 민통선 내부이다 보니 사람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가 아닌 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지뢰 매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도라산 연계 관광을 마친 뒤에는 초청자를 따라 개인 명의로 두 곳을 더 돌아다녔다. 일단, 허 준 선생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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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내비 화면 인증이다(텅 빈 지도!). 파주시는 임진강 건너편은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 준 묘지는 아무나 곧장 갈 수 없다. 도라산 안보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인된 여행사를 통한 단체 관광으로만 갈 수 있으며, 개인 자격 방문은 민통선 내부 출입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행을 얼마나 인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고 오는 차량의 대수가 늘어나면 절차가 그에 비례해서 더 까다로워진다.

민통선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조상 대대로 그 지대에 땅을 갖고 있었거나 그 지대의 땅을 산 지주는 국가로부터 출입증을 교부받는다고 한다. 물론, 출입 가능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 그 출입증만 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민통선 지대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민통선 출입이 일반 커피라면 대성동 출입은 가히 TOP이다. 거긴 민통선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까지 넘은 최고로 위험한 DMZ(비무장지대) 안이고, 레알 군사 분계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거길 드나들려면 당일 신분증 제시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하 두 주 이상 전에 방문 신청을 해서 신원 조회를 받아야 하며, 마을에 들어간 뒤엔 신분증을 아예 맡겨야 된다. 승용차에는 하늘색 천을 달아서 펄럭이게 하고, 유엔 사령부 소속의 군인으로부터 완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이동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8 19:34 2013/06/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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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上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시는 모 자매님은 고향이 파주 적성면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인 형제님과 결혼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북단 거주자와 최남단 거주자가 만난 셈.)
이분은 성장 배경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파주 북부의 지리에 아주 밝고, 또 부모님이 민통선 출입증까지 갖고 계셨다.

본인은 이분과 같이 교제를 하던 중에 어째 이 주제로 얘기가 나왔고, 덕분에 하루는 이분의 가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주 경의선 라인 쪽으로 거창한 안보 관광을 같이 가게 됐다.
작년 여름에 갔던 평택 해군 기지 이후로 바이블 빌리버와 함께 하는 안보 관광 제 2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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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승용차를 몰고 임진강 역으로 향했다.
강변북로와 서쪽에서 직결되는 자유로는 무려 10차선에 달하는 정말 넓은 도로였다.
과연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더불어 폭주족들이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에 난리를 부릴 만도 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딱 한 번, 지점이 아니라 구간식 속도 단속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즉, 특정 지점 한 군데에서만 제한 속도를 넘는지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작점부터 끝점에서 차량 번호와 진입 시각을 두 번 파악하는 단속 방식 말이다. 그 구간 사이를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리면 단속에 걸리니, 차들은 강제로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차선 수도 덩달아 줄었다.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느 샌가 짙은 안개로 확 뒤덮였으며, 차의 유리에도 성에가 꼈다. 좌우 주변의 경치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뭐 날이 밝자 안개는 곧 걷히고, 다행히도 하루 종일 아주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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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은 바로 옆에 관리인이 없는 무료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도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나 나중에 낮이 됐을 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워 둔 차들로 인해 그 공간이 꽉 차고 빈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 경의선에는 문산 역까지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문산은 1906년에 경의선이 처음 개통할 때부터 있었던 역이며 남북이 분단된 뒤부터는 수십 년간 경의선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문산 다음에는 곧바로 장단 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대중 정권 시절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북한과 선로가 연결까지 되면서 21세기에 문산 이북으로 3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2001년에 가장 먼저 임진강 역이 생겼고, 2002년에는 드디어 민통선 안에 도라산 역까지 생겼다. 운천 역은 더 나중인 2004년에 문산과 임진강 사이에 생긴 임시승강장이다. 지역 주민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역이지만 어차피 전철이 문산까지밖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임진강 역 근처에는 임진각, 평화 공원 등 여러 볼거리가 많다.
위의 사진에서 교각만 놓인 옛 다리는 6·25 때 파괴된 원래 경의선 철교의 흔적이고, 그 옆에 놓인 새 다리가 바로 다시 놓인 경의선 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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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평화 공원에는 '평화 열차'라 하여, 관광용 협궤 증기 기관차가 다닌다. 물론 생김새만 증기처럼 생겼고, 실제로는 기름으로 달린다.
나의 관심사는 (1) 이 선로의 궤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2) 남이섬에 있는 '유니세프 나눔 열차'와는 동일한 규격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평화 열차의 선로는 수인선 협궤(762)보다는 약간 더 작은 듯했고, 한 우진 님께서 남이섬 열차의 궤간도 640쯤 되는 듯하다고 추측하신 걸로 보아, 둘이 거의 동일한 규격이 아닌가 싶다.
눈짐작으로 이런 궤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철덕에게 필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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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중단점은 경원선 신탄리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사실, 상술했듯이 경의선도 시설이나마 연결된 지는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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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미카' 형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의왕의 철도 박물관과 더불어 임진각에도 한 량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6·25 때 순직한 김 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도 이것과 같은 차종으로, 그 실물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객차까지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미카'는 emperor를 뜻하는 일본어 '미카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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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증기 기관차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분 되시겠다.
'마터' 형 화물용 증기 기관차. 이름부터가 mountain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산악+화물 컨셉으로 제작된 고출력 기관차이며, 1940년대에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에 제조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생김새가 전통적인 미카, 파시 같은 열차보다 좀 이질적이다.

이 열차는 1950년 12월에 영문도 모른 채 북한 쪽으로 달리다가 경의선 장단 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열차와 수송 물자를 적군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청야 전술에 의해 아군의 사격을 받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쇳덩어리가 수백 발의 총알을 맞아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밖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그게 목적이라면 열차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것이다. 허나 증기 기관차는 무슨 전후대칭 전동차 같은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차대가 없는 역에서는 진행 방향을 그렇게 전환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열차를 운행 불능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장단 역은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 기관차도 핏빛에 가깝게 새빨갛게 녹이 슨 상태로 무려 수십 년 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분단, 안보 관련 서적에는 이 기관차의 사진이 꼭 등재되곤 했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이 기관차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으로 가져와서 녹 벗기고 광 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2009년부터 임진강 역 주변 평화 공원에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이제 갈색으로 바뀌었다. 단,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은색 도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이 열차를 당시에 운행했던 기관사는 한 준기(1927-2011) 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 이거 안보 관광으로 시작했는데 철도 얘기만 자꾸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 (거 봐, 철도와 안보 의식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6 08:40 2013/06/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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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모태신앙일 뿐만 아니라 모태솔로-_-인 본인더러, 연애 하는 걸 좀 배우라고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 지인이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1년 전 영화를 찾아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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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다.

1. 1990년대도 벌써 20여 년 전의 추억이 돼 가는구나.

2. 내가 보기에도 남자가 정말 미치도록 숙맥이긴 하다. ㅎㅎ 스토리가 참 서정적이고, 흥행 성공했다는 게 수긍이 간다. 기존 소설을 영화화한 게 아니라니 의외.
나도 철도 얘기, 정치 얘기, 프로그래밍 얘기 같은 거 집어치우고, 이성하고 같이 순수하게 저렇게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하긴 할까?

3. 건축학개론의 스토리 설정은.. 뭐랄까, 황 순원의 <소나기>에다가 옛날 하이텔에 pctools(김 현국) 님이 지은 <소나기 그 15년 후>-_-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저 15년 뒤 패러디판을 아는 분이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계시려나.. 물론 영화는 그 패러디물만 한 막장 스토리는 아니며, 여자 쪽이 죽는 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4. 그리고 결정적으로, 극중에 나오는 수업 내용은 건축공학하고는 아무 관계 없고 지리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내가 연세대 건축공학과의 수강 편람까지 다 찾아봤는데,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제목은 좀 낚시 같다.

지도 펼쳐서 길과 건물 살피고 여행 가는 건 철도에만 미치고 나면 알아서 다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 짜 놓은 “철도학 개론” 커리큘럼을 참고하시라. 건축학 개론 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만들어 놓은 자료이지만, 저거야말로 음대생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영화의 성격과 훨씬 더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수업이다

철도를 배경으로 사랑이 맺어지는 스토리의 영화가 나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영화 장면 중에는 중앙선 구둔 역도 나오더구만.

자, 그런 의미에서 “코레일-광역전철 길라잡이-구석구석 상상여행” 코너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KTX 촬영 명당인 반월 저수지 인근 야산도 아예 반월 역과 함께 공식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단, 이곳은 저 사이트에서 소개된 바와는 달리, 반월보다는 대야미 역에서 접근하는 게 거리가 약간 더 짧고, 찾아가기도 훨씬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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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오늘도 기승전철 달성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9 08:26 2013/05/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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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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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저수지 답사를 마친 뒤 다음으로 본인이 간 곳은 또 다른 철도 성지였다.

2. 철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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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이제 내가 여기를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방문하는 날도 찾아오는구나! 그렇잖아도 의왕 역에서 철도 박물관까지 가려면 수백 m 이상 걸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주차는 공간이 아주 넉넉하고 요금 걱정도 없고 아무 문제 없었다.

예전에 철도 박물관은 겨우 몇백원 대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저렴한 입장료를 징수했으며 그나마도 철도 회원은 동반 1인까지 아예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가 보니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언제부턴가 없어져 있었다. 일반인은 입장료 2천원을 내야 하며, 철도 회원 혜택 같은 거 없다.

물론 난 철덕으로서 예전에도 여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를 또 찾아간 이유는, 여기가 반월 저수지로부터 10k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겸사겸사 또 찾아갈 만한 명분이 성립하고,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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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경부선 선로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것도 철도 박물관으로서 장점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의 KTX 촬영지와 마찬가지로, 이 박물관의 근처에도 저수지가 있다는 점이다.

철도 박물관에서 본인은 부족했던 박물관 관련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문 기념으로 구내 서점에서 다음 아이템들을 질렀다. (정 용태 님, 보고 계신지? 레일러 14호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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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판매하던 철도 박물관 도록은 이제 절판되고 없었다. 있을 때 사 놓길 잘했다. 그 대신 동인지 <레일러>를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직원을 불러서 새마을호의 역사와 관련된 날짜가 두 군데 잘못 소개되어 있는 걸 고쳐 달라고 건의를 했다.
차량실에 새마을호 PP 디젤 동차가 1987년 7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고 소개되어 있는 걸 7월 6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로 새마을호 PP가 최초로 서울-부산 4시간 10분 운행을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그건 PP가 등장하기 전에 1985년 11월 16일부터 달성된 것이니까 말이다.

3. 오봉 역

철도 박물관 다음으로 승용차로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철도 명소로는 오봉 역을 빼놓을 수 없다.
얘는 경부선에서 분기하는 지선인 남부 화물기지선의 끝에 있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객 영업 없이 화물만 취급하는 역이다.
먼 옛날에는 경부선 전철 의왕 역의 이름은 '부곡'이고 오봉 역이 '의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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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박물관과 오봉 역의 거리는 4km도 채 되지 않는다.
입구에 경비실이나 차량 진입 차단기 같은 건 없는지라, 별 부담 없이 차를 끌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단, “직원 차량 외 주차 금지”라는 압박을 주는 표지판이 있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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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은 이렇게 생겼다.
철덕들 중에는 아예 승강장 내부로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한 사람도 있는 듯하던데 난 차마 그렇게는 안 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나갔다. 그 대신 이런 근처의 선로 사진을 좀 남겼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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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부산 일대도 면적이 무척 넓고 철도 배선이 의외로 복잡하며, 항구나 공업 단지로 빠지는 지선 철도가 많기 때문에 승용차를 끌고 답사할 만한 곳이 무척 많을 것이다.

4. 김포 공항 근처

수도권 남부의 “반월 저수지-철도 박물관-오봉 역” 3대 명소를 아우르는 테마 여행을 이렇게 잘 마쳤다.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이제 집에 갈까 생각했는데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고, 철도를 출사한 날 비행기도 같이 출사하여 둘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을 생각도 포기하고, 국도 1호선을 타고 서울 서부로 간 뒤 곧장 다시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말이다.

반월 저수지가 KTX 촬영의 명당이라면, 오쇠 삼거리는 비행기 출사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 공교롭게도 여기도 전철 김포공항 역으로부터는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다만, 여기는 버스가 수시로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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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주변의 흔한 보안 경고문.
여기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이지만, 엄연히 국유지이기 때문에 민간인이 무단으로 이곳 땅을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처음 와 봤을 때에 비해서는 주변에 이것저것 공사도 많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덕분에 주차는 샛길 인근에 아무데나 얼마든지 해도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여담이지만 이 공항 주변의 황무지 일대에는 군부대인지 예비군 훈련장인지 어쨌든 군사 시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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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지금 비행기가 놓인 저 활주로 말고, 왼쪽에도 활주로가 하나 더 있었으며 공항 내부의 비행기는 그 왼쪽 활주로에서 이륙을 하는 편이었다.
김포 공항에서는 아까 KTX보다도 더욱 자주, 수 분 간격으로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가 이착륙했다.

이륙은 본인이 서 있는 공항 남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 한 관계로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착륙은 다행히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UFO처럼 아주 멀리서 불빛만 어렴풋이 보이던 비행기들이, 형체와 비행 소음이 갈수록 커지더니 공항 담장 너머로 사뿐이 착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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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덕들은 비행기 한 대만 보면 보잉 7xx 같은 기종은 물론이고 소속 항공사 같은 것도 곧바로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의외로 여객기 말고도 소속이 어딘지 모를 터보프롭 경비행기 같은 것도 착륙하는 게 종종 목격되곤 했다.
그런 작은 비행기라면 모를까 중형 여객기 이상 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마찰로 인한 연기가 튀는 게 이 멀리서까지 보였다.

이곳에 공개하지 않은 다른 사진과 동영상도 많이 찍었다. 소기의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선 지점은 여전히 공항 담장으로부터 500m에 가깝게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비행기의 착륙 경로와 일직선상에 있고, 지대가 살짝 높은 덕분에 보다시피 공항 활주로까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다음에 또 촬영할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장소도 탐색해 봐야겠다.

동영상들을 보니, 보잉 737급의 여객기가 내 머리를 지난 뒤, 활주로에 착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3~25초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활주로의 착륙 지점까지의 거리는 정황상 거의 1km는 된다. 담장에서 활주로 사이에도 수백 m에 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착륙 직전 상태인 비행기의 주행 속도는 대략 시속 140~150km대는 된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퇴근 시간대가 되어 귀가하는 길이 도로 정체로 애로사항이 꽃폈을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난 정체 시간대를 피해서 그냥 밖에서 저녁을 먹고, 차에서 한두 시간 좀 자면서 아예 밤 9시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귀가하려 했다. 난 어차피 차에서 야영을 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서울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만 좀 막혔을 뿐, 서울 시내에서의 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은 그다지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사히 잘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07 08:31 2013/05/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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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용차가 있으니까 좋긴 참 좋다. 차는 회사나 교회를 왕래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이동뿐만 아니라 레저/취미 활동의 영역에서도 예전에 불가능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줬다.

나한테 차가 생기면 철도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줄어들 거라고 도대체 누가 말했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차가 생기기 전에는 신규 개통 철도 노선의 첫 차를 시승하기 위해서 전날 노숙을 해야 했지만, 지금은 새벽에 차를 끌고 가서 차에서 자다가 첫 차를 타는 선택의 여지가 생겼다.
예전에는 차를 이용해서 잠깐이나마 서울교외선 답사를 가 본 적도 있다. 자동차는 철도 덕질을 위한 훌륭한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 3월 말의 어느 날, 본인은 짬을 내서 과감하게 차를 몰고 서울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당일치기 철도 테마 여행을 즐겼다.
나름 출근 시간을 넘긴 오전 10~11시 시간대를 선택했지만, 이때도 자동차 전용 도로들은 넘쳐나는 차들 때문에 대단히 혼잡했다. 그래도 서울을 벗어나고 한적한 교외로 들어서니 자동차의 탁월한 이동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먼저 간 곳은 바로..

1. 주행 중인 KTX 촬영의 명당, 반월 저수지 인근 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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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곳이다.
호수 옆에 비교적 높지 않은 고가 위로 KTX가 달린다. 경부 고속선을 통틀어 보기 드문 낭만적인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여기는 광명 역을 지난 KTX가 무려 10km가 넘는 긴 거리를 지하로 달린 뒤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지상 구간이기도 하다. 서울 외곽 순환 고속도로와 서해안 고속도로가 교차하는 조남 분기점의 바로 아래 지하로 KTX가 달린다는 걸 생각해 보라. 그 KTX가 여기로 나온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전철역은 4호선(안산선) 대야미 역이다. 북쪽 방면인 2번 출구로 나간 뒤, 왼쪽으로 꺾어서 나오는 한적한 도로를 쭉 가면 된다. 역에서 3.2km 남짓 떨어져 있기 때문에 걸어서 가기는 좀 힘들다. 그리고 저기는 인적이 드물어서 버스로 쉽게 찾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그러니 자가용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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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로 진입하는 야산 코앞에서 차를 세웠다. 선로 근처는 역시나 외부인의 접근을 금지하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철도 선로에 무단으로 침입해 시설물과 전선류를 손괴하거나 절취하면 감전사고의 위험이 있으며, 철도 안전운행을 저해하게 되어 철도 안전법에 따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집니다.” - CCTV 실시간 감시 중 -


우리는 당연히 철조망을 월담하지는 않는다. 그저 철조망을 따라 언덕을 쭉 오르면 된다.
이로써 본인 역시 수많은 철덕들이 나보다 앞서 개척한 천혜의 철도 출사 성지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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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일명 하늘다리라고 불리며, 경부 고속선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사진 촬영을 할 수 있는 극히 드문 구간!
선로는 한 치의 커브도 없는 직선이고, 앞에 저쪽 끝에도 산 속으로 들어가는 터널이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지상 선로는 인터넷 지도로 길이를 측정해 보면 길이가 거의 6k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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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서 있는 곳의 앞은 응당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으며, 삼엄한 접근 금지 경고문도 붙어 있다.
이곳에서 촬영된 KTX 사진들은 다 철망 안으로 카메라를 집어넣고 zoom도 굉장히 많이 당겨서 촬영된 것들이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 집어넣기 좋으라고, 선로 중앙의 철망의 일부가 동그랗게 훼손되어 있다.
하지만 철망 너머로 웬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서 시야를 가리는 관계로, 이것을 피하느라 좋은 구도의 사진을 만들기가 상당히 어려워져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 수풀이 온통 초록색일 때 왔으면 주변 경치가 더 좋았을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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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X 산천이 하나 카메라에 잡혔다. 저 열차의 진행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는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한다.
멀리서 오는 놈은 쉽게 감지가 되지만, 우리 밑을 지나가는 놈은 출현하기 몇 초쯤 전에 갑자기 주행 소음을 일으키더니 쌩 지나간다. 그래도 디젤 기관차처럼 천지를 진동하는 소음과 진동 수준은 아니다.

경부 고속선에 KTX는 상· 하행을 모두 감안했을 때 평균 대략 10분당 한 번꼴로는 드나드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 빈도는 몹시 불규칙하여 편차가 큰 편이다.
그리고 아침 11시에서 12시 사이는 전차선 점검을 명목으로 서울과 부산 양 시발역에서 모두 KTX가 출발하지 않는다. 즉, 이 시간대에는 평소보다 열차의 운행이 몹시 뜸해지므로, KTX 출사를 하려면 시간대를 잘못 선택해서 낭패를 보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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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산천 말고 떼제베 기반 재래식 KTX가 지나가는 모습이다. 재래식 KTX는 한 편성의 길이가 거의 380m에 달한다는 걸 생각하자.
광명 역을 출발한 KTX는 지하 터널을 한참 달린 뒤 이 구간으로 나올 무렵쯤이면, 이미 충분히 가속이 되어 주행 속도가 250km/h을 넘고, 속도가 객실내 모니터에 표시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언덕 위에서 KTX가 달려오는 걸 보면 생각만치 빨라 보이지가 않는다. 그냥 새마을호가 시속 140대로 슬금슬금(?) 지나가는 것 같다. 과연 그럴까?

하지만 동영상 분석을 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길이 380m짜리 열차의 맨 앞이 한 전신주 지점을 통과하고, 다음으로 열차의 맨 끝이 그 전신주를 통과할 때까지 걸린 시간이 5.5초가 좀 안 됐다.
이로부터 열차의 속도를 구해 보면 딱 정확하게 시속 250km에 근접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산을 내려온 뒤, 장소를 떠나기 전에 호수 주변의 경치를 좀 더 카메라에 담았다. 가히 철도 성지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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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경부 고속선은 안산선 반월-상록수 구간의 중간을 위로 통과한다. 반월-상록수 사이는 역간거리가 3km가 넘고, 중간에 영동 고속도로도 지나는 일종의 교통 요지이다. 한적한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안산선과 경부 고속선의 궤적을 계속 추적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으나, 본인은 이 먼 거리를 차를 몰고 온 김에 다른 의미 있는 일을 발견했기 때문에 동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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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앞에 있는 열차 승강장은 반월 역이다. 이 역은 전철역이라기보다는 완전 시골 간이역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선로와 역무실은 평지이고 지하도를 이용하여 승강장으로 가는 형태도 그렇거니와, 출입구도 남쪽으로 1번만 있지, 논밭을 향하고 있는 북쪽(본인이 서 있는 방향)으로는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04 08:33 2013/05/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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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운전 관련 이야기

※ 자차를 굴리면서 예전에 겪은 에피소드들을 한데 엮었다. SNS에다가는 꽤 옛날에 올렸음. 본격 사무엘 님 차덕 인증글. ㄲㄲ

1.

동부 간선 도로는 의정부에서 시작하여 중랑천을 따라 서울 지하철 7호선과 비슷한 선형으로 쭉 내려가다가 한양대 근처에서 강변북로와 합류하는 걸로 끝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잠시 강변북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청담 대교로 빠지는 곳부터 다시 동부 간선 도로가 계속된다. 이 길은 잘 알다시피 분당-수서 고속화도로와 직결되어 성남, 분당, 판교 방면으로 간다.

동부 간선 도로(서울)와 분당-수서 고속화도로(경기도 성남)는 딱히 구분 없이 동일한 길인 것 같지만 주변을 잘 관찰해 보면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딱 복정 교차로를 지나고부터 행정구역이 서울에서 성남으로 바뀐다. 그리고 서울 구간은 최대 시속이 80km이던 것이 성남부터는 90km로 상향 조정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밤에 몰아 보면 두 도로는 가로등의 색깔도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서울 구간은 불빛이 흰색 계통인 반면, 경기도 구간은 노란(혹은 오렌지색) 나트륨등이다. 그리고 밝기도 서울 구간이 더 밝아서 지역이 바뀌면 도로 주변의 분위기까지 달라지는 느낌이다.

흰색 불빛이 노란색 불빛으로 바뀌는 경험이 웬지 낯익고 익숙한 것 같아서 기억을 더듬어 보니, 잠재의식 속에 서울 지하철 5호선이 떠올랐다. 일반 지하철 터널 내부엔 흰 형광등이 있지만 하저 터널(마포-여의나루, 광나루-천호) 내부엔 노란 나트륨등이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운전하면서도 이런 것을 보니 광경이 꽤 낯익고 친숙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에도 철도는 언제나 나의 기억을 지배하고 있다!

2.

그건 그렇고 난 올겨울은 차에서 자는 데 재미 붙이며 보냈다. 운전하는 것 자체만큼이나 이것도 좋다.
밖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지만, 차 안에서 옷 껴 입고 이불 뒤집어쓰고 뒷좌석에 누우면 따스함과 아늑함 그 자체이다. 날씨가 추울수록 더욱 차에서 지내고 싶어진다.

게다가 요즘은 차에서 지내도 땀으로 흠뻑 젖을 걱정, 모기에 물릴 걱정을 안 해도 되니 얼마나 고맙고 좋은지 모른다.
차는 내 이동식 텐트(장막??)이고 아지트이고 내 사무실이기도 하다. 독서와 프로그래밍, 웹서핑도 차에서..

3.

작년 말엔 주유를 한 뒤 한 달 동안 소비한 기름의 양과 차가 달린 거리를 토대로, 내 차의 평균 연비를 한번 계산해 봤다.
일주일에 한두 번 운전하는 꼴이고, 37리터를 주유해서 370km를 좀 덜 갔기 때문에, 어림잡아도 리터 당 거의 9.5~10km 가까이가 나왔다.
이것은 차가 도로 정체 때문에 제대로 못 가고 삽질한 것, 주차장에서 뺑뺑이 친 것, 골목길을 헤매던 것 등 말 그대로 차가 겪었던 모든 상황을 감안한 전체 연비이다.

그런데 경차급이 아닌 크기의 휘발유 차로 전체 연비가 그만치 나왔다고 내가 얘기하자, 회사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너 정말 곱게 몰고 천천히 가고, 정속 주행만 했나 보구나?”라고 내게 물었다.

내가 차를 몰고 가는 목적지는 대부분 교회나 회사이다. 이때는 대부분의 구간을 강변북로와 분당-수서 고속화도로라는 자동차 전용 도로에서 정체 시간대를 최대한 피해서 딱 시속 80~90km을 유지하며 쌩쌩 달린다. 평균 이상의 연비는 이런 데서 다 나왔음이 틀림없다.

물론 나도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 뻗지, 민폐 끼치면서까지 무작정 천천히만 가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대한 급가속· 급제동을 안 하고 부드럽게 출발하고, 언제든 관성을 이용하려 애쓴다. 어지간해서는 엔진 rpm을 2000을 안 넘기려 한다.
아무튼, 내 운전 습관이 좋았다는 걸 연비를 통해 입증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4.

그리고 차를 몰면서 피할 수 없는 주차 문제.
하루는 회사에서 퇴근하면서, 구청 직원이 불법 주차 단속을 하는 장면을 처음으로 직접 목격했다.
저녁 7시 무렵이었는데 이 시간대에도 실제로 이렇게 불시에 단속을 하는구나.

유니폼도 안 입고 겉으로는 전혀 티가 안 나는 중년 남자 두 명이 PDA를 두드리고 휴대용 프린터로 과태료 고지서를 즉석에서 인쇄하더니, 차 와이퍼에다 끼워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디카로 위반 장면 인증샷을 찍어 갔다.
길가에 세워져 있던 10여 대의 차들이 모조리 다 과태료크리를 맞았다. 승용차는 4만원. 하지만 빨리 내면 20%가 감경되어 3만 2천원.

나도 지하 주차장에 들어가기 귀찮아서 차를 한번 길가에다 한 3시간쯤 댔는데 결국 과태료를 먹은 적이 있었던지라 한편으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교차로나 횡단보도, 버스 정류장이야 가중 처벌을 해도 시원찮을 주차 금지 구역이지만, 한적하고 어차피 주변 차량 통행에 지장 안 주는 곳은 좀 봐 주면 안 되나 싶기도 하고.. -_-;;;

그런데 내가 과태료를 먹었던 위치에는 나중에 가 보면 또 다른 차들이 세워져 있고 또 어김없이 단속을 당해 과태료 고지서가 끼워져 있곤 했다. 다른 차들이 쭈욱 세워져 있는 걸 보고는, 나도 되는 줄 알고 세웠다가 싹 다 큰코다치는 일이 반복된다. 한 운전자의 경험이 다른 운전자에게 전수가 안 되니, 이게 국가 세수의 증가에는 도움이 되는구나.

그래도 과태료만으로 끝나는 게 일반 커피라면, 아예 견인까지 당하는 건 TOP이다.. -_- 차량 보관소까지 찾아가는 데 드는 교통비와 시간, 견인비, 보관료 등등.. 마치 집행유예 기간에 또 범죄를 저지르다 걸려서 형량이 늘듯이, 깨지는 돈과 스트레스와 멘탈 붕괴 정도가 왕창 뻥튀기되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06 08:21 2013/02/0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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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타이포그라피 학교 수강

1. 한글 운동꾼

평생을 '한글 운동'에만 몸바친 어르신이 한 분 계신다.
한글 운동이 뭐냐고? 일상생활이나 대외적으로(도로 표지판, 간판, 출판물 등) 최대한 한글을 많이 쓰게 하고 드러나게 하고, 세종대왕을 밀고, 덤으로 바른 한글 맞춤법과 순우리말을 가능한 한 미는 일체의 활동을 일컫는다. 한국어와 한글은 서로 다르지만, 그렇다고 완전 무관한 별개도 아니니...

일부 운동은 국문과 전공자가 보기에도 좀 과격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고, 시대에 뒤떨어지는(?) 국수주의· 전투종족스러운 인상이 느껴지기도 할 정도이다. 허나 이런 분들의 헌신 덕분에 CJK 중 한국만이 한자를 일상생활에서 사실상 완전히 떼어 낸 편리한 자국 문자 전용을 이뤄 냈고, 끈질긴 전투 기질 덕분에 한글날을 빨간날로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그 열정과 노력을 폄하하지 말지어다. 이거 그냥 된 게 아니다. 문자 습관이라는 건 인간 문화에서 굉장히 보수적이고 안 변하는 분야 중 하나이다.

내가 그분에 대해서 놀라는 면모는 인맥 네트워크이다. 한글 운동계에서 연륜과 짬밥에 관한 한,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만렙이다 보니, 언어학, 공학, 역사학 등 갖가지 분야에 종사하고 있다가 뭔가 깨달은 게 있어 한글 덕후가 된 후학들은 알아서 이분을 제 발로 찾아가서 무릎 꿇고 “선생님, 한 수 가르쳐 주십쇼”를 한다. 자기 전공에서는 자신이 그 선생님과 비교가 안 되는 더 전문가인데도, 자기가 쓴 책이나 논문을 그분께 알아서 “드.. 드리겠습니다!”도 한다. 나 자신도 그분께 그랬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 역시 내가 종종 봤다.

이쯤 되면 그분이 누구신지 눈치 채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본인의 아버지보다도 연세가 더 많으신 그 운동꾼 선생님께서 쓰시는 글이나 주장은 내용이 거의 한글교 교리 수준이다. 내가 내 스스로 철도교 신자라고 하는 것만큼이나, 비하나 비꼬는 의미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길.

그분은 늘 강조하셨다. “한글에 희망이 있다. 한글을 잘 활용하여 이 나라를 일으키고 잘 살아 보자. 한글 속에 (심지어) 돈벌이 아이템도 있다.”
과연 그럴까?

한글은 어린 시절부터 나의 오덕질 장난감이었다.
내가 비록 언어학이나 세계 문자학의 권위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주변의 메이저 문자들을 살펴봐도 세상에 조형적으로 이렇게 오묘한 문자는 없다. 단군의 후손들이 세계에 가장 강렬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기 정체성이자 고유 아이템은 아무리 봐도 한글밖에는 없는 게 분명해 보였다.
게다가 이런 문자가 그 정도의 수난사를 겪고 변모해 왔다니 피끓는 젊은 청춘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수준이지 않은가?

2. 나의 적성과 진로 고민

그 원동력으로 본인은 지난 13년간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만들었다.
이 분야와 관련된 완전 독자적인 노하우와 기술만 빼면 나는 그렇게까지 뛰어난 프로그래머가 아니며, 어쩌면 IT쪽 체질 자체가 아닌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10년쯤 뒤에 난 철도로 업종을 바꿔 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남들은 다 대기업, 공무원, 의사 등등을 노리는데 난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바라고서, 사용자가 1억도 안 되는 자국 문자를 위해 이런 일을 한 걸까?
난 지인들로부터 내 능력에 비해 내가 다닌 대학원이나 지금 다니는 회사의 수준은 아깝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 사람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허나, 예전에도 이미 내 심경에 대해 토로한 바 있듯, 내가 지금과 같은 처지에 있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것보다 더 수준 높은 대학원이나 연봉 캡숑 많이 주는 회사에서 하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런 게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평양 감사도 자기가 싫으면 그만이다. 내가 박사 진학에 괜히 실패했겠나?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만드는 것 말고 다른 스마트폰용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거나, 더 빠른 컴퓨터를 만들거나, 대박 내는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일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건 나보다 더 똑똑한 공돌이들이 알아서 실컷 발전시켜 줄 분야들이다.
그렇다고 초창기 몇 년만 좀 허세 부리며 편하게 살자고 나의 피와 땀이 담긴 날개셋 핵심 기술을 대기업에다 홀랑 다 넘긴 뒤, 나중에 토사구팽 당하는 건 더욱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현실과 이상을 나름 가장 잘 절충한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있게 된 것이다.

덕업일치를 바라지 않을 거면 차라리 나도 애초에 IT와 무관하면서 적당히 편하게 칼퇴근이 보장되는 공무원 사무직 같은 거나 구한 뒤, 퇴근 후의 개인 시간에 오덕질을 실컷 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한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공무원 사무직이 무슨 동네 개 이름처럼 쉽게 구해지는 직업도 아닐 뿐더러, 그랬으면 또 그거 준비하느라 잃었을 기회비용도 만만찮고, <날개셋> 버전 자체가 애초에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 거저 되는 쉬운 일은 없다.

3. 글꼴 공부 시작

그래서.. 나도 나이가 있고 사회적인 책임이 있으며, 언제까지나 돈 안 되는 오덕질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든 내가 하는 일로 부와 명성을 쌓고 싶다. 나도 결혼도 하고 가정도 좀 꾸려야지 이제? -_-;;;

한글을 변형해서 무슨 외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만들고 보급..? 그런 건 지금까지 시행착오를 하도 많이 봐 왔고 이젠 바라지도 않는다.
무슨 맹목적인 한글 쇼비니즘 따위도 허상과 오류를 지금까지 이골이 날 정도로 경험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scope을 한국/한국어로 한정한다 해도 정말 뛰어나고 멋진 문자이다. 그냥 관습상 쓰던 것처럼만 활용하는 건 너무 아깝다.
한글로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에 선보일 만한 아이템이 '아직까지는' 있으며, 남이 먼저 발견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걸 발굴하면 아까 그 운동가 선생님께서 부르짖으신 메시지가 실현될 가능성이 단 몇 퍼센트라도 더 높아지지 않을까?

그래서 한글 입력기로 시작한 연구를 출력에 해당하는 한글 글꼴로 끝낼 계획이다. 그래서 한글 공학의 종지부를 찍고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박사 과정에 진학을 못 한 대신 자그마한 학원을 다니면서 수업을 듣고, 멘토 교수님과 종종 만나면서 연구를 할 생각이다.
2013년은 본인에게 한글 글꼴 연구의 원년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21 08:28 2013/01/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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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지역에 시내버스가 다니는데 정시성, 속도, 편의성 어느 것 하나 승객을 만족시켜 주는 게 없다. 그래서 출퇴근 시간에 주민들은 콩나물 시루 같은 만원 버스 안에서 매일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며, 참다못해 너도 나도 다들 자가용을 끌고 나오는 바람에 도로는 아침과 저녁마다 체증으로 몸살을 앓게 되었다고 치자.

그러니 시민들은 관공서를 상대로 끊임없이 버스 증차를 요구하며, 정치인들 역시 이를 공약으로 즐겨 내세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증차라는 건 만만하게 선뜻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버스를 한 대 구입하는 데는 1억이 넘는 비용이 필요하며, 기사를 추가로 고용해야 하므로 인건비까지 증가한다. 게다가 기껏 추가한 차량은 교통량이 적은 낮 시간엔 그저 놀고만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정이 이러하니, 버스 회사는 지금도 적자 때문에 정부 보조금으로 연명하는 형편인데 버스를 늘릴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버스 증차보다 교통 공학적으로 월등히 더 좋은 접근 방식은 바로 버스 ‘증속’이다. 속도를 올림으로써 동일 대수의 차량으로 더 높은 회전율을 내는 것이다.

버스 한 대가 20km짜리 노선을 시속 20km로 완주하면, 그 노선의 버스 배차간격은 1시간이 된다. 여기에다가 동일 속도의 버스를 한 대 더 추가하면 배차 간격을 30분으로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버스의 속도를 40km/h로 올리면 버스 한 대의 운영 비용만으로도 30분 배차를 달성할 수 있다. 더구나 승객은 예전에 비해 절반의 시간만으로도 목적지에 갈 수 있으며, 승객이 빠른 버스로 몰리는 덕분에 자가용이 줄어든다면 가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하겠다.

결국 버스가 빨라지면 대중교통의 경쟁력이 올라가고 운임 인상 요인이 줄어들며, 대중교통이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하는 게 아니라 흑자 경영의 토대가 마련되는 효과가 생긴다. 대도시 간선 도로에 버스 전용 차선이 바로 이 효과를 의도하고 만들어져 있다.
(한 우진의 교통 평론 http://blog.naver.com/ianhan/120005191675 참고)

2.

흔히,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라고 그런다. 물고기를 그냥 주는 것보다도,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좋은 일이라고 그런다. 그런 것처럼, 경제에서도 사실 가장 좋은 복지는 성장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마치 지금 사형 제도가 오· 남용될 가능성이 전혀 없어져 있듯, 지금은 무슨 산업혁명 초창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기업주들은 공산주의자들이 선동하는 것 같은 그런 악마가 아니다. 자기가 먹고 살 만하고 사업을 마음껏 해서 돈 많이 벌 수 있겠다 싶으면 투자와 고용에 '복지'까지도 저절로 이뤄지게 돼 있다. (노동자와 기업주 사이의 균형 있는 시각을 원한다면 송 현 선생님의 이 글도 일독을 권한다.)

또한, 복지라는 건 도덕 해이를 야기할 정도로 그냥 공짜로 퍼 주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복지 수혜자라도 여건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일을 하고, 그들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쪽으로 복지가 이뤄져야 한다. 기회의 평등일 뿐이지, 결과물의 일방적인 평등이어서는 안 된다. 성경도 율법을 보면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를 그렇게도 강조하면서도, 신체 멀쩡한 사람에게 공짜 퍼주기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허용 안 한다.

정부는 국민으로부터 먼저 돈을 빼앗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조직이다. 그저 표나 더 얻으려고, 어차피 내 돈이 아닌 쌈짓돈이니까, 뒤의 결과를 생각도 안 하고 밑 빠진 독 메우듯이 세금을 탕진하는 정치인에게 정부를 맡겨서는 안 된다. 자기가 더 잃을 게 없는 처지라고, “에라이 이 더러운 세상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포퓰리즘 정책을 지지하는 것..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이다. 그랬다간 안 그래도 더러운 세상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더 망가지게 된다.

도대체 무슨 돈으로 시행할지 대책을 알 수 없는 일방적인 무료 급식, 반값 등록금, 그리고 앞서 말한 ‘버스 증차’ 같은 것보다는.. 차라리 굳이 고학력이 필요 없는 직종에는 무리하게 대학을 안 간 사람도 충분히 대우받게 사회 구조를 조정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그리고 버스 회사의 적자만 한없이 세금으로 때울 바에야, 차라리 과감하게 혼잡한 도로의 차선 하나를 버스 전용 차선으로 떼어내서 버스 회사가 스스로 버스의 경쟁력을 올리고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필요하다. 심지어 당장은 자가용 운전자들로부터 반발과 욕 얻어먹는 것까지 감수하고라도 말이다. 어느 분야든 이런 일을 추진해 줄 지도자는 없는 걸까?

3.

솔직히 모든 사람이 이유를 막론하고 똑같은 부자가 되는 건 불가능하며 성경적으로도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오히려 저런 불가능한 일을 선동하면서 사회 계급을 갈아엎으려다 다같이 쫄딱 망해서 똑같이 가난해지기는 아주 쉽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가 실패했듯이 말이다. 공산주의의 폐해는 대학교에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 팀플(조별 과제) 하나만 해 봐도 실감할 수 있다고 그런다.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 쓴다”가 얼마나 순진하고 어리석은 발상인지를 말이다.

그러니, 파이의 절대적인 크기를 어떻게든 키워서 가난한 사람은 부자가 되고, 부자는 훨씬 더 큰 부자가 되게 하는 접근 방식이 현실에서는 그나마 더 나은 발상인 것이다. 오늘날 다뤄지는 수정 자본주의라는 것은 그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의 비례상수 정도만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자, 이제 결론을 말하겠다.나는 그야말로 자타가 공인하는 철도 덕후이다. 그런데, 나의 성장 과정에도 이와 비슷한 원리가 적용되었다. 철도에만 완전 미치고 빠져 있느라 나의 자폐 외곬 기질이 강해졌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건 아주 큰 오해이다.

오히려 철도 덕분에 나는 자폐(?) 기질이 그나마 해소되었고, 다른 분야에 대한 관심과 식견까지 전무후무한 정도로 올라갔다. 내가 늘 말하지만 대표적으로 음악부터 시작해서 과학, 공학, 역사, 지리 등~ 심지어 신앙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경제에다 비유하자면 철도는 김 용묵이라는 국가 안에 존재하는 공룡 대기업이다. 그런데 철도에 100만큼 몰두하는 덕분에 다른 인문계, 이공계, 예체능 등까지 최대 20~30 정도는 혜택을 입었다는 뜻이다. 철도가 엄청난 부자가 되었지만, 철도가 창출한 각종 고용과 투자 덕분에 다른 분야도 부자가 되었다.

철도마저도 없었으면 이런 효과는 있을 수 없었다. 당장 겉으로 보이는 빈부격차 양극화를 해결한답시고, 철도 오덕질 해 대는 게 보기 안 좋다고 철도에다가만 각종 규제를 넣고 세금을 때리는 식으로 문제를 접근했다면, 철도는 물론 그나마 좀 살아나던 여타 분야 관심사까지 죽게 됐을 것이다.

흔히 박 정희 좋아하는 사람들은 40여 년 전에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하면서 우리나라 경제의 대동맥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옛날을 회상하는데, 나의 경제의 대동맥은 바로 Looking for you의 리듬과 박자에 맞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나는 철도가 내 인생에 지금까지 끼친 선한 간증을 언제든지 누구에게라도 증언할 수 있다..

1부터 3까지 서로 비슷하면서도 문맥이 다른 여러 비유들을 동원하여 글을 썼다. 요컨대 어느 분야든, 즉 개인이든 국가든, 발전을 위해서는 인위적인 규제나 일방적인 퍼주기가 아니라, 스스로 잘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시너지 효과와 선순환을 유도하는 시스템을 설계할 줄 아는 사람이 경영을 해야 함을 느낀다.

덧붙이는 말)

어떤 유명인사는 “대통령 마음껏 욕해도 되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지금도 우리나라의 표현의 자유는 아주 충분하며 그 사람 역시 그 자유를 이용해, 지금까지 신변의 위협 없이 대통령 욕을 실컷 해 왔을 텐데, 도대체 또 뭐가 부족해서 겨우 그런 소박한 소원과 목표를 갖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와 대조적으로, 투스타 출신의 유명한 모 전직 대통령의 동상과 사진 앞에서는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노인들이 아예 합장과 분향까지 하면서 “님은 우리 곁에 영원히 살아 계십니다” 이러기까지 한단다. 물론, 정치 성향이 그와 다른 젊은이들은 아주 꼴깝이라고 그런 모습을 보기를 역겨워한다.

난 똑같이 찌질하게, 반대편의 '슨상님'이나 거론하면서 네거티브로 나가지는 않겠다. 오히려 반대로 긍정적으로 진취적으로 결론을 내려 보고자 한다.

우리나라가 무슨 북한도 아니고, 그 대통령을 숭배(?)하지 않으면 체포, 구금, 고문하는 나라가 절대로 아니다. 그런데도 자발적으로 저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그 옛날을 살았던 사람들은 북한의 무력 도발과 악행에 얼마나 이골이 나 있었고 얼마나 뼈저린 가난에 한이 사무쳐 있었을까? 난 “인간이 배가 고프면 인간성이고 이념이고 나발이고 그런 거 없다.”를 아주 굳게 지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난 이렇게 선언한다. “대통령 마음껏 욕해도 되는 세상”을 바랄 바에야 차라리, “저 투스타보다 더 존경받고 빠돌이 빠순이가 더 많은 대통령”이 좀 나왔으면 좋겠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의로운 훌륭한 통치자가 반드시 인기가 많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내 말은, 문제의 말단 결과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이 나라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애쓰는 지도자, 재임 중이 아니라 재임 후에 정말 진심으로 우호적인 평가가 나오는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그런 지도자라면 장기 집권 내지 독재 좀 해도 된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겨우 5년 단임 만에 쇼부를 볼 수 있겠는가. 사실, 지금의 1987년 헌법 자체도 20년이 넘게 장수했고 좀 업데이트 할 때가 되기도 했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12 08:32 2012/12/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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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소식, 내 계획 짬뽕

1.

2012년이 다 저물어 가고 있다.
일단, 올해 하반기에는 문화· 정치적으로 모처럼 아주 기쁜 소식이 있었으니 그것부터 먼저 회고하고 넘어가야겠다.
바로 한글날이 22년 만에 다시 빨간날로 회복된 것! 그것도 미우나 고우나 이 명박 정권 때 이뤄졌다.
결정이 하도 지지부진하니 내년 달력을 만드는 업자들이 “이거 한글날은 빨간날로 해야 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빨리 결정해 주세요!” 라고 독촉을 할 정도였다고 하는데.. 결국은 통과됐다.

알다시피 한글날은 원래 과거의 식목일처럼 공휴일인 기념일이었다. 그랬는데 노 태우 정권 때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근처의 '철도의 날', '학생의 날'처럼 안 쉬는 여러 기념일 중 하나로 전락했다.
노 무현 정권 때는 국경일로 승격됐으나, 제헌절처럼 “안 쉬는 국경일”이라는 희대의 이상한 어정쩡한 날이 되었다.

그래서 한글 학회, 한글 문화 연대 같은 순수주의 어문 운동 단체에서는 수 년째 정부를 상대로 청원을 넣고 시민 계몽을 하고, 올해는 특히 온갖 기자 회견과 퍼포먼스를 연 끝에 드디어 승리를 쟁취해 냈다.
너무 무리하게 말을 순화하자는 식으로 약간 극단적인 주장에 모두 공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 단체들이 정말 훌륭한 일을 해 냈다. 잘한 건 잘한 것으로 인정하고 이들의 열정을 칭송해 주자.

한글날 공휴일 지정을 가로막아 온 최종 보스는 역시나 경제 단체였다.
경제 단체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산업 기능 요원 제도도 병무청이 단호하게 못 없앴다는 점을 감안하면, 얘들이 하는 짓이 다 병크는 아니다. 허나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논리로 한글날 공휴일화를 반대하는 건 이미 안 통하는 논리이다. 안 그래도 우리나라는 노동자들의 근로 시간이 이미 세계 최상위를 다툴 정도로 길며, 우리나라는 대체 공휴일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날짜수만 평균 이상이지 실질적인 노는 날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설령 공휴일이 정말 너무 많다면, 성탄절과 석가탄신일부터 칼질을 하는 게 순리일 것이다. 종교 공휴일 때 노는 나라는 주변의 CJK 중에서도 K밖에 없다. 이것도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국민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바인데 왜 국민들 뜻대로 선뜻 안 되는 걸까?

“국경일 중에 삼일절 같은 날은 중요한 날이긴 하지만, 딱히 기쁜 날은 아니다. 그러나 한글날은 해당 국가의 정치나 종교와 관련이 없으면서 오로지 문화적으로 레알, 진정으로 경축할 가치가 있는 기쁜 날이다.” 이 점을 기억하자.
한글날도 공휴일이 됐는데 이제 사형 집행만 좀 부활하면 정말 잃어버려진 과거 회복이고 기쁜 일이 될 텐데...

2.

자, 그리고 비주얼 스튜디오 2012를 드디어 회사에서 깔아서 써 봤다.

외형이 또 심하게 달라졌다. 아무리 버전업이 돼도 3.x나 6.x나 아이콘 하나 안 바뀌고 외형이 심하게 변화가 없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 비하면 MS의 변화를 위한 변화 저력은 정말 대단한 수준이 아닐 수 없다.
2012는 우중충한 군청+보라 배색이던 2010과는 달리, 은색· 회색· 흰색 배색으로 확 바뀌었으며, 2010과는 달리 non-client 영역에 일반적인 thick frame조차도 없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옛날의 아래아한글 97급으로 외형이 독자적인 형태가 됐다는 뜻이다.

16컬러풍으로 회귀한 아이콘 디자인, 그러데이션에서 단색(solid color)으로, 동그란 모서리에서 각진 사각형으로 회귀한 건 영락없이 10여 년 전의 VS .NET 첫 버전을 떠올리게 하는 외형이다. 아니, 윈도우 8 자체가 전반적으로 복고풍이다.
물론, 배색만 단순해졌을 뿐, 안티앨리어싱이 적용되어 아이콘의 색상 수 자체는 여전히 트루컬러급이다. 16컬러 “풍”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진짜 16컬러로 후퇴한 건 아님. ㅎㅎ

외형뿐만 아니라 2012는 기능도 무척 강화되어, IDE 에디터에서는 사용자가 선언한 명칭이 청록색으로 따로 표시되고, 굳이 Ctrl+Space를 누르지 않아도 첫 타부터 인텔리센스 자동 완성이 슝슝 튀어나온다. 오오~~

그리고 성능 분석과 프로파일링 기능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소스 코드 정적 분석 기능이 드디어 추가되어 고품질 코드를 만드는 데 더욱 기여하게 되었다. 정적 분석 기능은 이전 버전의 VS에서도 있긴 했으나, 제일 비싼 엔터프라이즈급 버전에만 있었기 때문에 개인 인디 개발자가 접하기는 어려웠다.

<날개셋> 당장 다음 버전은 여전히 VS 2010으로 빌드할 예정이나, 이 버전의 사용 기간은 의외로 짧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정적 분석을 돌려서 소수나마 코드에 존재하는 몇몇 논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3.

지난 12년간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통해 얻은 것은

  • 수능, 내신 다 씹어먹고 대학 진학 성공
  • 한글 연구 진영에서는 절대부동의 인지도 확보. 병역특례 TO도 사실상 그것 덕분에 얻은 거나 마찬가지
  • 인디 소프트웨어 개발자(개인 개발자) 커뮤니티에서의 인지도 확보
  • 보수적으로 잡았을 때 국내외에 몇천 명 정도로 추정되는 사용자와 잠재적 지지자. 국내는 물론이고, 생각지도 못했던 나라의 현지인이나 교포에게서 한글 로마자 입력 방식, 신세벌식, 세벌식 무한 낱자 수정 등등을 고맙게 잘 쓰고 있다는 연락 받았을 때 굉장한 보람 느꼈음.
  • 몇 차례의 대회/소프트웨어 공모전 입상을 통한 통산 몇백만 원 정도의 상금 수입
  • 거기 들어간 기술의 일부를 떼어 주는 개인 개발 용역으로 통산 1천몇백 만원 정도의 수입 (그리 큰 액수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덕업일치를 이루면서 번 돈이라는 게 중요)
  • 학부 시절, 졸업/개별연구 명목으로 5학점 정도의 전공 학점 기여. 학술지 논문 1회 게재
  • 석사 논문 주제와 학위

그리고 무엇보다, 한글을 내가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도 입력하고 다룰 수 있으면서도 마치 기계식 타자기를 컴퓨터로 옮겨 놓은 듯한 한글 오덕질용 작고 가벼운 에디터. 그리고 Windows 운영체제에서는 거의 만렙을 찍은 한글 IME가 내 컴퓨터에 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정신적 만족감. 그걸 내가 혼자 다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성취감. 이로부터 파생되는 한글에 대한 자부심, 애국심 등등이다.

다음으로 잃었거나 어쨌든 줄어든 것은..

  • 적절한 대학 GPA (ㅋㅋㅋㅋㅋ)
  • 의대, 공무원, 대기업, 공기업 등에 들어가기 위한 스펙 쌓을 기회 (정말 하나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 여타 분야나 IT 기술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익힐 여유
  • 연애와 결혼 기회 (...)

이 정도면 수지 맞는 장사이려나..? ㅋ

4.

내가 개인적으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한국어 공학'에 비해서 '한글 공학'의 위상이 굳건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한국어 공학과 한글 공학은 목표는 비슷하지만 다루는 대상과 방법은 상당히 다르다.
그리고 내 관심분야는 '한국어 공학'이 아니라 '한글 공학' 쪽이다.

한글 자체만으로 오덕질을 할 거리가 전혀 없고, 더 발전할 거리가 보이지 않았다면 나도 그냥 사전학, 코퍼스 언어학, 자연 언어 처리 같은 데 관심을 뒀을 수도 있다.
아니, 언어학 쪽에 관심을 둘 필요조차 없이 그냥 자동차나 컴퓨터, 심지어 철도만 연구하는 평범한 공돌이의 길을 갔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문자가 저렇게 있는 걸 보니, 그걸 연구하지 않고서는 다른 분야는 도저히 못 파겠다..

물론, 지금 분위기를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지금이 옛날 같은 타자기나 XT/286 컴 시대도 아니고 문자 기계화 자체만으로 뭘 더 연구할 게 있는지 의아해할 만도 하다.

그래서 '한글 공학'은 문과 계열보다 오히려 언어학을 전공하지 않은 여타 분야 이공계(특히 입력기 쪽)나 디자인 분야(당연히.. 글꼴 쪽) 종사자들이 더 연구하는데.. 그쪽에서는 반대로 언어학 기반이 없으니 연구의 깊이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한글은 주변의 한자나 라틴 알파벳이나 일본 가나와는 구조가 확연히 다른 문자이고, 그 조합 원리 자체만을 이용해 얼마든지 오덕질을 하고 입출력 기능을 더 다양하게 확장할 수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한글은 두벌식으로만 입력하기에는 너무 아깝고 천편일률적인 정사각형 네모꼴로만 쓰기에도 너무 아까운 문자이다. 그래서 그런 학문 경계들을 허물고, 한글 입력과 출력 모두에서 새로운 솔루션을 만드는 게 꿈이긴 하나...

대학원의 박사 진학은 일단 좌절되었다.
나는 정말 이 분야를 가고 싶고 특정 교수의 학풍을 계승하고 싶은데 실력이 부족해서 떨어진 것이라면, 몇 번이고 입시에 재도전을 했겠지만, 나는 그런 경우가 아니니 내 연구 주제를 감당이나 지도를 못 하겠다고 교수님들이 날 받아 주지 않았다.

내 연구 주제는 특정 단과에 맞아 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딱 석사를 마쳤던 대학원에서 박사를 안 받아 주면 나는 딱히 다른 대학원을 갈 데도 없다. 그러니 난 최종 학력은 그냥 석사로 만족해야 할 듯하다.
논문 쓰는 게 힘든 한편으로 재미있었고 이런 걸 또 쓰라면 쓰겠는데, 그걸 하지 말라니 어쩔 수 없지. 이해를 하며, 원망은 안 한다.

한편으로는 이게 밥벌이가 돼야 할 텐데 하는 우려도 좀 든다. 당장 내가 몇 달 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

  • 날개셋 마이너 업데이트 (6.7x. 다음 달 초-중순쯤 나올 예정)
  •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 놓은 것들에 대한 문서를 재정비. 홈페이지와 프로그램 도움말 주요 내용을 영작
  • 날개셋 메이저 업데이트 (6.9? 7.0? 윈도우 8용 IME 온전히 완성)

정도. 이미 내가 벌여 놓았고 관성 때문에 계속 진행해야 하는 일들은 이 정도에서 몇 개월 안으로 슬슬 끝을 볼 생각이다.
그 다음으로는 공부가 너무 소홀했던 IT 여타 분야 기술과 지식도 좀 독학하고, 무엇보다도 글꼴로 체제 변환을 하여 비밀 프로젝트를 몇 년간 진행할 예정이다.

그 결과물을 학계와 업계에 발표했는데도 이와 관련된 다른 일자리나 추가 수입이나 반향이 없다면..
2015년쯤 이후부터는 본인도 한글 관련 연구는 다 접고, 그냥 회사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돌아가거나 심지어 철도 업종으로 전업을 하거나, 공무원/고시 준비생-_-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

뭐, 그 정도의 최악의 상황까지도 각오는 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20대와 30대 초반을 정말 건전하고 뜻있는 일을 하는 데 정열을 바쳤다는 사실에는 어떤 경우든 후회가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29 08:29 2012/11/29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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