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25에 대한 팩트들

1. 옛날에는 6· 25사변, 동란이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요즘은 그런 단어를 접하기 힘들다. 그리고 옛날에는 적군을 북한군 대신 괴뢰군, 공산군이라고도 많이 불렀다.

2. 6· 25는 선악 구도가 매우 분명한 전쟁이었다. UN이 창립 이래로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한 진영의 편을 들어서 반대편 진영을 군사력으로 퇴치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나라들이 한 작은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없었다. 그러나 미래에 성경이 말하는 아마겟돈 전쟁 때는 많은 나라들이 똘똘 뭉쳐서 오로지 한 나라를 대적하게 될 것이다. 그게 어느 나라인지는 이 자리에서 설명하지 않겠다.

3. 일요일 새벽에 감행된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민국은 당시 제대로 허를 찔렸다. 모든 것이 열세였고 겨우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허무하게 빼앗겼으며, 정부의 대처도 우왕좌왕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개전 직후에 타이밍이 어긋난 대국민 안내방송과 한강 다리 폭파는 정말 뼈아픈 실책으로 기록되었다.

4. 그러나 다소 출혈을 감수하고라도 나라에서 정말 혹독하게 군 내부의 숙군 작업을 진행하고 빨치산들을 토벌해 둔 것은, 추후에 더 끔찍한 비극을 예방한 매우 다행스러운 선견지명 조치였다. 국군 내부에서조차 빨갱이가 우글거렸다면 얘들은 전쟁 났을 때 맞서 싸우기는커녕 지시를 어기고 적에게 모조리 항복하거나 이적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다.

내가 대통령이었다 해도 그런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에선, 사상만 올바른 게 확실하다면 친일 경력 군경이라도 적극 채용해서 안 쓸 수가 없었겠다. 내가 늘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을 방해하고 원천 봉쇄한 건 북한이며 북한 역시 내부적으로 군경 한 명이 아쉬운 마당에 친일 청산 안 한 건 마찬가지였다.

5. 중공군은 우리나라에 1· 4 후퇴를 안기고 멸공 북진 통일의 절호의 기회를 영원히 박탈해 버린 원흉이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열받고 통탄할 일인데, 우리가 당한 악행에 '비해서'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반중 정서는 그만치 크지 않다.
1· 4 후퇴 당시에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한강이 자동차가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꽁꽁 얼었다고 한다. 그래서 강 앞에 피난민들의 발이 묶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때 이산가족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6. 1951년 3월경에 남한이 서울을 재탈환한 뒤부터 전쟁은 휴전 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계속 38선 부근에서 국지전만 진행되었다. 38선이 지금의 휴전선으로 바뀌면서 영토 자체는 대한민국이 과거보다 더 많이 수복했다. 그러나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졌고 서해 NLL의 군사 긴장도가 더 높아졌다.
 
7. 흔히 '종북 좌파'라고 불리는 정권 시절에 <독도는 우리 땅>과 <6· 25 노래>가 금지곡이 됐다는 말이 떠돈다. 허나 검색을 해 보면 도대체 무슨 금지 조치를 당해서 언제 다시 풀렸는지가 분명치 않고 출처가 불분명하며, 이건 그냥 루머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마치 “이 승만이 시민들한테는 피난 가지 말라고 속이고는 자기 고의로 혼자 튀었다” 같은 급의 거짓 중상모략이 될 수도 있으니 난 그 점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겠다.

하지만, 가사가 희석되고 변개된 심 재방 작사의 <신 6· 25 노래>는 정서상 절대 용납할 수 없으며, 그거야말로 개사의 저의를 의심하는 바이다.

오리지널이 무엇이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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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단조로 시작해서 장조로 끝나는 이 노래이다.
갓 태어난 가난한 신생 독립국이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지구상에서 사라질 뻔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를 정말 숨 막히고 섬뜩하고 처절한 가사로 표현했다. 6· 25를 직접 겪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가사이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를 불순한 의도로 변개한 놈들이 있다.
가해자의 정체와 전쟁의 근본 원인을 쏙 감춰서 “원수들이 내 조국을 짓밟던 날”을 “국토가 두동강 나고 동족끼리 총부리를 들이댄 날”로.. 오로지 결과만 부각되어 보이게 바꾼 新 6·25 노래가 만들어져 한때 보급되었었다.

이건 일본이 자기네 전쟁 범죄는 입 싹 씻고 사과도 제대로 안 하고 그저 “다시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로 얼버무리기만 하고, 자기들도 원폭 피해자일 뿐이라고 궤변을 늘어놓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진짜 똑같다.

잘 들어라. 난 분명하고 단호하게 내 이름과 명예를 걸고 선언한다.
6·25 노래에서 북한의 정체성과 그들의 범죄 행위를 제거하는 것은
성경에서 지옥에 대한 묘사를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없애고 동성애를 정죄하는 표현을 희석시키는 식으로 말씀을 변개하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맥락이다!

난 이런 짓을 조장하는 진영을 매우 싫어한다.
성경이 말하는 근본주의 교리를 믿고 절대적인 선과 악 관념과 내세관을 갖춘 신자라면 종북 좌빨의 영하고는 도저히 같이 상종을 할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25 19:23 2013/07/2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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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한글 서체

북한에서 만든 한글 서체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
ㅌ을 E 모양이 아니라 ㅡ+ㄷ 모양으로 쓰는 걸 선호한다! 즉, 위의 가로줄을 아래의 몸통과 분리해서 따로 적는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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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북한 서체 중에도 E자 모양인 물건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일단 북한의 굴림-바탕-돋움-궁서에 해당하는 4대 기본 글꼴인 천리마-청봉-광명-붓글이 모두 ㅌ이 ㅡ+ㄷ모양이니, 북한에서는 이걸 ㅌ의 공식적인 기본형으로 간주하는 듯하다.

남한에서 쓰는 글꼴 중에는 ㅌ이 그렇게 돼 있는 물건은 진짜 궁서체밖에 없지 싶다.
북한이야 원래 문화가 196, 70년대-_-의 복고풍을 추구하고 서체도 순명조 내지 붓글씨 계열을 쓰는 걸 좋아하는 동네이긴 하지만, 명조 계열 서체까지 ㅌ을 그렇게 적는 관행은 남한에서는 좀체 찾아볼 수 없다.

북한과 한글 서체라는 두 분야에 모두 평균 이상으로 관심이 많은 나조차 이걸 눈치채는 데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린 이유는, 역시 ㅌ이 자주 쓰이는 자음이 아니기 때문이어서인 것 같다.

두음법칙만큼이나 한글의 자형의 미세한 차이도 남북의 문화 차이를 나타낼 수 있는 잣대가 된 듯하다.
원래 ㅌ의 모양은 ㅡ+ㄷ이 맞다는 설명도 옛날에 본 것 같으나, 그 근거를 모르겠다. 당장 훈민정음해례 같은 엄청 옛날 문헌을 봐도 ㅌ은 E 모양으로 그려져 있는데?

Posted by 사무엘

2013/07/23 08:36 2013/07/2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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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알려져 있는 북한의 남침용 땅굴은 총 4개이다. 그리고 이들은 발견 순서대로 1(1974년)부터 4(1990년)까지 번호가 매겨져 있다.

북한이 남침 땅굴을 판 사상적 근거로는 1971년 9월 25일 “하나의 갱도는 10개의 핵 폭탄보다 더 효과적이다”라는 김 일성의 교시가 제시되곤 한다. 뭘 하는지 알 길이 없는 비밀 스텔스 폐쇄국가인 북한이 땅 속을 두더지처럼 헤집으면서 한반도에 나이더스 캐널 네트워크를 깔아 놓는다면 무섭긴 할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정보 기관들은 북한이 땅굴 발파 기계를 대량 수입했다는 첩보 하나만으로도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종북들의 눈엔 한반도에 땅굴이란 공식적으로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땅굴처럼 생긴 건 다 자연 동굴일 뿐인가 보다. =_=;;
그러나 반대로 '땅굴 덕후' 기질이 있는 안보 연구가들은 우리나라에 이것보다 땅굴이 훨씬 더 많이 깔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대외 인지도와 신뢰도는 예수회/프리메이슨 세계 정복설이나 광주 5·18 북한군 개입설 급의 후덜덜한 수준이다.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그냥 흠좀무스럽고 엄청나다는 뜻임.)

그런데, 오늘날 같은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에 '비해서' 남침 땅굴과 관련된 정보는 구글과 네이버를 총동원해도 이상할 정도로 잘 안 찾아진다. 내 느낌으로는 그렇다. 각종 위키나 백과사전에 등재된 설명도 너무 부실하다. 땅굴의 발견 경위, 작전에 참여한 부대의 신상 정보, 발견 과정에서 벌어진 위험 상황 등을 한데 열람하기가 너무 어렵다. 사람들의 관심이 적은 걸까?

단적인 예로, 한국어 위키백과에 '제n땅굴'이라고 땅굴마다 독립된 표제어조차 개설되어 있지 않은 걸 보고 본인은 정말 굉장히 놀랐다. (내가 써 넣을까ㅋㅋㅋ)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6·25 발발일을 기념하여, 평양 시내까지 훤히 들여다볼 수 있는 구글 어스를 이용하여 4개의 땅굴들의 입구를 찾아 보았다.

1. 제3땅굴(1978): 도라산 역과 도라 전망대보다 살짝 북서쪽으로

앞서 글을 쓴 적이 있듯이 이 땅굴은 서울 및 판문점에서 가장 가까이 있던 위협적인 놈이며 길이도 가장 짧다. 그리고 첩보를 바탕으로 의심 지대을 탐사하던 중에 발견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DMZ 내부의 의심 지대 곳곳에다 구멍을 뚫어서 시추봉을 집어넣고 동향을 살폈는데, 한 시추봉이 지하의 발파 충격으로 인해 튀어오르고 물이 솟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인 것이다.

관광객은 도라산 역, 도라 전망대, 통일촌 일대의 안보 관광의 일환으로 이 땅굴을 방문할 수 있다. 출입구는 승강 전동차를 타고 가거나 그냥 도보로 왕래할 수 있는데, 전동차를 타면 요금이 몇천 원 더 비싸진다. 도보 출입구와 전동차 출입구는 서로 다른 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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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본인이 직접 갔다 와 본 적이 있기 때문에 구글어스에서 위치를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남방 한계선(좌측 하단의 선)이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리고 땅굴을 이용하면 군사 분계선의 거의  200m 앞까지 지하로 도달한다고 한다.

2. 제2땅굴(1975): 토교 저수지보다 북동쪽으로 수 km

제1과 제2땅굴은 모두 DMZ를 경비하던 병사가 지표면에서의 이상 현상을 발견하고 신고하여 조기에 발견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초창기이다 보니 심도가 이후의 땅굴보다는 얕았던 편. 하지만 2땅굴은 1땅굴에 비해 터널 단면적이 더욱 커지고 대담해져 있었다.

2땅굴이 있는 곳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이길리이다. (우리나라는 DMZ나 민통선 내부도 독립된 행정구역이 할당되어 있다) 이곳은 최근에 경원선 북쪽 끝에 생긴 역의 이름이 '백마고지'일 정도로 6·25 당시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며, 결국 우리나라가 수복해 낸 38선 이북 지역이다. 백마고지 역이라든가 38선 시절에 북한이 사용하던 로동당 청사 정도는 그래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월정리 역과 제2 땅굴까지 가는 건 패키지 관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곳은 본인이 아직 직접 가 보지는 않았기 때문에 땅굴 입구의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토교 저수지'를 먼저 찾은 뒤에 거기서 쭉 올라가 보면, 도로 위에 검은 아스팔트 덧칠이 덕지덕지 되어 있는 이 지역을 찾을 수 있다. 지상 사진은 내가 참조 목적으로 구글링을 통해 임의로 긁어 온 것임. 땅굴 입구 역시 여기 근처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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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땅굴은 탐사와 발견 과정에서 국군 장병의 인명 피해(사망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비극의 땅굴이기도 하다. 입구에는 희생자 위령탑이 만들어져 있다.

3. 제4땅굴(1990):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이현리

예전의 세 땅굴과는 다소 다른 위치와 시기에 발견되었다. 이로써 강원도 동부도 땅굴 안심 지대가 아님이 입증되었다.
지상의 이상 징후만으로 조기에 발견된 1, 2나, 첩보에 따른 수색에 의해 발견된 3과는 달리, 이 땅굴은 교본대로 평범하게 땅굴 탐사를 하던 중에 산지 아래의 지하 140m의 굉장히 깊은 곳에서 꽤 어렵게 발견되었다. 그래서 이 땅굴은 발견 당시 남방 한계선 이남으로 이미 1km가 넘게 진행되어 있던 상태였다.

양구군 이현리를 찾은 뒤 북쪽으로 울창한 숲이 있는 곳으로 가 보면 땅굴이 있는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도로 이름도 '땅굴로'이다. 땅굴 근처에는 '남침 분쇄'라고 적힌 기념탑이 세워진 광장이 있다. 이곳 역시 각종 전망대, 전쟁 기념관 같은 연계 관광 상품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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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땅굴은 길어서 그런지, 땅굴들 중 유일하게 땅굴 내부를 전동차를 타고 구경할 수 있다. (3땅굴은 출입구의 경사로에만 전동차가 다님) 제3궤조 집전식이라거나 한 건 아니고, 전동차가 자체적으로 배터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운행 후엔 충전 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땅굴은 탐사 과정에서 '헌트'라는 이름의 군견이 희생되었다. 화약 냄새를 맡고 지뢰를 찾도록 훈련받은 독일산 셰퍼드였는데, 물에 잠겨 있던 목함 지뢰를 밟고 그만 장렬히 산화했다. 그 대신, 10여 명의 분대원들이 당했을지도 모를 희생을 몸으로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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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못 하는 짐승이라지만 이것은 너무나 숭고하고 값진 희생이었다. 그래서 헌트에게는 소위 계급과 인헌 무공 훈장이 추서되었으며, 땅굴 입구에 '충견지묘'라고 적힌 무덤과 동상이 세워졌다. 누가 일계급 특진을 한다고 소위가 되지는 않으니, 소위는 영예로운 죽음을 맞이한 군견에게 적절한 계급 포상인 것 같다. (고 한 주호 준위에게 소위 계급이 추서되지는 않았잖아?)

4. 제1땅굴(1974):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포춘리

가장 먼저 발견된 제1땅굴을 가장 나중에 소개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이건 땅굴들 중 유일하게 입구가 남방 한계선 이북의 DMZ 내부에 있으며, 일반인에게 개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초창기의 땅굴인 만큼 얘는 다른 땅굴들보다 훨씬 얕고 작고 소심한 규모이다. 사람이 서서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터널 단면적이 작다. 단면이 아랫변이 더 긴 사다리꼴 형태이다.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 봐도, 이 땅굴의 주변에 대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이게 유일하다. 어느 언론사 기자가 남방 한계선 철책 근처에서 줌을 당겨서 촬영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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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바탕으로 본인은 저게 아마 제1 땅굴의 입구가 아닌가 추정한다. 지상 사진과 좀 비슷해 보이지 않는가? 땅굴 입구의 위쪽 언덕은 나무가 없이 풀만 나 있는 것도 그렇고 말이다. 주변에 이것 말고 다른 대안이 될 만한 인공물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 시청으로부터는 직선 거리로 약 60km가량 떨어져 있다.

우측 하단에 있는 경계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그리고 땅굴 근처의 서쪽 상단에 있는 수직선은 군사 분계선은 아니며, 아마 GP 초소를 드나드는 길이지 싶다. GP는 아무래도 북한 땅을 내려다봐야 하는 곳이니, 언덕 위의 높은 지대에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이를 보면, 그저 학교 교과서나 언론 보도를 통해서만 존재에 대해 들었던 남침 땅굴이 더욱 현실성 있게 느껴질 것이다. 또한 땅굴들도 다 같은 땅굴이 아니라 제각기 특징과 개성이 존재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본인이 캡처한 4장의 구글어스 사진들은 모두 같은 배율로 맞춰져 있다. 그리고 지도 화면에 남방 한계선이 같이 찍힌 땅굴은 1과 3 이렇게 둘이다. 1은 입구가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5~600m 정도 떨어져 있고, 3은 그야말로 코앞임을 알 수 있다.

비록 땅굴을 의식하여 그 주변으로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들이 배치되는 건 사실이긴 하지만, 땅굴 자체는 우리나라의 군사 시설이 아니라 오히려 북한 애들이 직접 만든 물건이다. 이 정도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위치에 대한 힌트와 항공 사진을 노출하는 건, 설령 이북 간첩들이 본다 하더라도 새로운 정보를 주는 게 아니며 안보면에서 그리 문제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3/06/25 08:29 2013/06/25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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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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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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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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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1906-1990).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미국의 군 장성이다. 군사, 세계사, 현대 전쟁사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이름을 들어서 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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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양반 정말 골때리면서도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는 정말 뼛속까지 군인 타입으로, 닥치고 폭격기 화력 덕후였으며 그의 주특기는 쑥밭 만들기였다.
하긴, 그 당시 미국은 워낙 물자가 풍족하게 넘쳐나는 부자 나라였으니 그의 전투 이념은 나름 적절했다.

게다가 그는 '석기 시대'를 굉장히 좋아한 매니아였다. ㅋㅋㅋㅋㅋ
미국 앞에서 깝치는 적국들은 본진을 폭격으로 다 쑥밭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고, 모조리 '죽탕치는(?)' 것도 아니고,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는 으름장을 공석에서 입버릇처럼 뇌까렸다. 영어로는 Stone Age.
호전적이고 입이 험악한 걸로 악명 높은 북한도 공식 석상에서 석기 시대 공갈을 친 적은 없는 것 같다.

오죽했으면 르메이 장군에 대해서 이런 패러디짤이 나돌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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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지휘 하에 일본 도쿄는 2차 세계 대전 말기에 그 이름도 유명한 '도쿄 대공습'을 당했다. 미군 폭격기가 우박처럼 떨어뜨리는 소이탄에 시내 전체가 말 그대로 시뻘건 불바다가 되어 버렸다. 사진에서 보듯, 목조 건물은 형체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없어졌고, 일부 석조/콘크리트 건물도 새까맣게 탄 흉측한 몰골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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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폭격으로 인해 죽은 사람은 10만여 명에 달해서 사실은 히로시마 원자 폭탄 투하로 죽은 사람보다도 수가 더 많았다고 한다. 도쿄를 그런 석기 시대로 되돌리는 데는 겨우 3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원폭을 성층권 고도에서 투하하는 식이 아니라 상당한 저공에서 위험한 자세로 소이탄을 떨어뜨리다 보니, 미군도 폭격기가 총 12기나 일본의 대공포로부터 반격을 받아 격추되고, 42기는 피탄 당하는 손해를 입었다. 이에 몇몇 미군 파일럿들은 권총을 들고 르메이를 직접 찾아가서 이렇게 따졌다.

“왜 이런 무모한 저공 비행 폭격 명령을 내렸는가? 귀관 때문에 우리가 전우를 얼마나 많이 잃었는지 아는가?”

하지만 르메이는 그 말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제군들은 단 하루 만에 일본 제국의 수도를 잿더미로 만들고 놈들을 최소 10만 명이나 없앴다! (사실, 미군 전사자는 많아 봤자 수십~수백 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늘 작전은 대성공이다. 이런 식으로 내일은 나고야, 모레는 오사카, 그 다음은 고베.. 1주일 동안 일본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모두들 오늘의 성공을 자축하도록!

전쟁을 치르면서 전사자가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작전 자체는 르메이의 말대로 미군의 승리이긴 하지만... 저건 좀.. ^^;; 정말 그의 머리에 든 건 오로지 폭격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맞고 나서 일찌감치 항복을 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르메이가 생각한 작전들이 모두 시행되었다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진짜로 지도에서 없어지고 일본 열도는 석기 시대로 퇴화했을지도 모른다.

이 양반의 무자비한 작전은 훗날 6·25 때도 계속되었다. 북한 중에서도 평양 시내는 그야말로 형체가 남은 건물이 손에 꼽을 정도였을 정도로 그냥 말 그대로 모조리 잿더미가 되었다. 오로지 미국이니까 가능한 돈지랄로 폭탄을 그냥 때려 박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때문에 그 당시 북한의 내부에서는, 평양을 재건할 게 아니라 아예 이 기회에 수도를 다른 데로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는 논의도 오갔다고 한다. 비록 그렇게 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때의 공습과 폭격의 악몽 때문에 지금 평양 시내는 이에 대비하느라 지하 방공망이 굉장히 깊고 정교하게 구축되어 있다. 평양 지하철이 무지막지하게 깊게 건설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그 뒤에도 르메이의 버릇은 어디 가지 않았다.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있었던 월남전 땐 베트남도, 그리고 쿠바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베트남이건 쿠바건 다 폭격해서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 대통령 각하는 명령만 내려 달라”는 식으로 일관되게 나섰다.
마치 게임 해설자 김 태형 씨가 캐리어를 좋아하듯 그는 석기 시대가 자기 상징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의 정치인들도 그의 말투를 따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미국은 걸프전 때 이라크를 석기 시대로 되돌리겠다고 공갈을 쳤고, 나중에 9· 11이 터졌을 때는 파키스탄을 상대로도 대테러전에 협조하지 않으면 너네 나라를 석기 시대로 되돌려 놓겠다고 그랬다. 뭐, 반미 성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협박 멘트에 심기가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르메이 같은 사람도 미군에 있는데 맥아더 장군은 차라리 양반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맥아더가 훌륭하고 존경스러운 군인이라지만 그도 인간이고 신은 아니기에, 맨날 인천 상륙 작전 같은 성공만 한 게 아니며 실수도 저질렀다. 처음엔 북한과 중공군을 얕잡아보다가 1· 4 후퇴를 당하고 호되게 데인 뒤에야, “이 자식들 안 되겠어.”라고 하면서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강경책을 쓰려 했다.

어떻게든 빨갱이들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도 자체는 좋지만, 그렇다고 한반도에다 핵을 또 터뜨린다거나, 전쟁을 아예 3차 세계 대전 급의 대규모 장기전으로 키우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식이었으니... 이런 강경한 생각이 화근이 되어 맥아더가 트루먼 대통령과의 사이가 틀어진 건 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르메이도 그 당시 “이 좋은 핵무기를 왜 안 써?” 급의 생각을 하고 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맥아더보다 더하면 더한 꼴통이지 못하지는 않았다.
미국 대통령이 이런 호전적인 군 장성 양반들의 근성을 이성적으로 잘 통제하지 않았다면, 과거에 소련과의 냉전이 냉전으로 끝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굳이 한반도가 아니어도 어디에서 핵이 한두 발 터지는 바람에 특정 국가가 지도에서 사라지거나 진짜 석기 시대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아인슈타인도 “3차 세계 대전 때 인간이 무슨 신무기를 쓰고 있을지는 난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면, 그때 인간은 새총(slingshot) 같은 냉병기를 쓰고 있겠죠?”라고 얘기했겠는가. 성문 종합 영어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지문이다. 아인슈타인 역시 영락없이 석기 시대 회귀-_-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뜻이다.

석기 시대 드립 말고 르메이 장군이 자신의 호전성을 또 드러낸 유명한 어록으로는 “세상에 무고한 민간인이란 없다”(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이다.
사실, 도쿄 대공습 같은 경우 미국이 연합국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니 망정이지, 저렇게 대놓고 시내를 폭격하여 비전투 민간인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건 전쟁 범죄로 간주될 수 있는 짓이었다.
대놓고 말해, 나치 독일이 영국이나 미국의 본토 도심지를 소이탄 폭격으로 다 불태워서 민간인을 대량 학살했다면 그 후폭풍이 어찌 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메이는 작전을 강행했다.

일례로,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하는 작전에 참여했던 폴 티베트 대령은 훗날 다음과 같은 요지로 회고한 바 있다.
“난 그 당시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다. 그리고 원폭은 전쟁을 더 일찍 종결시키고 더 많은 인명의 희생을 막은 차선이며 필요악이었다고 생각한다. 군인으로서 나의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이나 후회는 없다.”

허나, 르메이는 한 술 더 떠서 민간인의 죽음에 대해 아예 그 정도의 책임이나 죄책감마저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식이었으니, 더 할 말이 없다. ^^
“사실 저 밑에 곤도네는 군용 볼트를, 옆집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고해 보인다고 저 민간인들을 안 죽이면, 그게 다 우리를 죽이는 병력이 되어 돌아온다. 그러니 마음껏 폭격하고 닥치는 대로 죽이고 불태워 버려라.)”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르메이의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시 구조가 민간인 거주지와 군수 업체 영역의 구분이 그다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생전 어록으로는 이 외에도
“전쟁이란 총알 많은 쪽이 많이 죽이면 이기는 것이다.”
“충분히 많이 죽이면 다시는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처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좀 우악스럽고 꼴통 같은 방면으로 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때, 천조국 미국 소속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는 최소한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고, 그러다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일본인은 원래 초식동물이니 가다가 길가에 난 풀을 뜯어먹으며 진격하라.

같은 이런 진짜 미친 개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저건 잘 알다시피 '무다구치 렌야'라고 일본 역사상 최악의 무능한 장군이 남긴 훈시.. -_-
그도 그럴 것이 물량이 풍족한 곳에서 그냥 물량으로 밀면 된다는 교리가, 없는 여건 속에서 닥치고 근성과 정신력만으로 돌격하라는 교리보다는 훨씬 나은 게 자명하지 않은가?
그는 스타크래프트를 했으면 무한 맵에서 저그 가디언 굴리는 걸 좋아했을 것 같다. (대공 유닛으로 대지상 폭격 -_-)

뭐, 르메이 장군은 맥아더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으로서는 미워할 구석이 없는 인물이다.
우방국의 장군답게 일본, 북한 등 대한민국의 적들하고만 싸웠으니 말이다.
(아 하긴, 무다구치 렌야도 자기 군대를 말아먹은 행적이 가히 대한 독립 유공자 급이니, 우리가 딱히 미워할 구석이 없는 건 마찬가지이고.. -_-;;;)

그는 그런 호전적인 기질답지 않게 미군의 전술 체계 수립에 큰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심지어 적국인 일본으로부터도 훗날 자위대의 재건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괜히 장성까지 진급한 게 아니다.

다만, 그 막강한 화력으로 미국이 전투는 이겼을지 몰라도 한국전과 베트남전은 적군을 완전히 몰아내는 깔끔한 '전쟁 승리'를 이루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그리고 도쿄 대공습 때는 재일 동포도 많이 희생된 게 사실이다. 비록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글을 맺으면서 마지막 한 마디.
이 사람의 상징은 잘 알다시피 '석기 시대'이다. 허나 아담 이래로 6천 년 인류 역사를 믿는 크리스천은 인류에게 딱히 석기 시대라 불릴 만한 긴 원시 시대가 존재했다고 믿지 않는다.
문명의 이기가 존재하지 않는 시절로의 퇴보를 언급하려 한다면, 차라리 노아의 홍수 직후 상태로 되돌리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될 텐데.. 아무래도 '석기 시대'보다는 우악스러움이 덜하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3/07 19:26 2013/03/07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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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진실
지 만원 지은 <제주 4·3 반란 사건>을 읽고

난 어린 시절부터 근대로 갈수록 우리나라 역사를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로 우리 민족이 뭔가를 발명하고 정복하고 성공하고 백성들이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식의 좋은 기록을 거의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학정에 줄곧 고통받았으며 개혁은 한계에 부딪혀 실패하기만 했다. 나중에는 좋든 나쁘든 한 나라의 왕비라는 사람이 외국 침입자에게 살해당하는 희대의 치욕을 당하기까지 하고, 궁극적으로 주권이 외세에 완전히 빼앗기는 것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끝난다. 빼앗긴 주권을 훗날 극적으로 되찾기는 하지만 이것도 우리 힘으로 스스로 이룬 것이 아니며, 덕분에 이념 대립과 국토 분단, 동족상잔 같은 또 다른 비극이 이어진다.

그래도 알고 보니 우리나라 역사에는 비극만 있는 게 아니었고 지도자 복이 없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정말 하늘이 내려 준 은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지도자가 그 가난하고 열악하고 위험하던 여건 속에서 한반도의 공산화를 반쪽만이라도 필사적으로 막고 올바른 이념으로 국가를 세웠으며, 미국을 든든한 우방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 기반 위에서 우리 민족은 기적적인 경제 성장까지 이뤘다. 이 정도면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기네 나라의 내력에 충분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있는 그대로 가르쳐지고 대대로 전수되어야 할 대한민국의 역사는 불행히도 심한 공격을 당하고 있다. 공이 과를 객관적으로 월등히 압도하는 지도자가, 역사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후세에 의해 저열한 중상모략과 부관참시를 당하는 꼴을 본인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피아식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민간인 오폭이 조직적인 민간인 학살로 와전되고, 반역자가 소위 민주화 투사로 둔갑하는 것을 보니, 이건 정치색을 떠나서 정말 뭔가 한참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과거 일제의 만행에 그렇게도 분노하던 사람들이 북한이 더 최근에 저지른 잔학한 테러, 무력 도발, 민간인 학살을 왜 그토록 쉽게 잊어버리는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도덕과 정신을 무참히 파괴하는 사악한 북한의 사회 시스템을 왜 그리도 만만하게 생각하는가? 우리가 이렇게 편하게 인터넷을 하면서 북한 김 정은 정권을 비웃을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이고 무엇 덕분인지 혹시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정녕 없는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우리 국민들이 사상이 글러먹어서 북한 정권을 직접 지지하기 때문이 결코 아닐 것이다. 단지, 가슴으로만 애국을 할 뿐 머리와 시스템적인 안목으로 애국을 못 해서 극소수 불순분자가 벌이는 역사 왜곡과 선전 선동, 시체 장사에 속아 넘어갔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을 예전처럼 무력으로는 도무지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에 남한의 정신 기강부터 먼저 무너뜨리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발달된 인터넷 인프라를 이용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우리 사회의 치부만을 편파적으로 들추고, 정부과 국민 사이에 극심한 불신풍조를 조장한다. 국가에 몸바쳐 충성한 애국자를 수구꼴통으로, 반역자를 민주투사로 바꾸는 역사 왜곡은 덤이다. 이것은 남을 교묘하게 쓰러뜨리려는 모든 '악의 무리'들이 분야를 불문하고 공통적으로 취해 온 전략이다.

제주 4·3 사건도 그런 예에 속한다.
책의 저자는 이 사건을 조명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한반도가 분단된 과정은 두 말할 나위도 없고 아예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 공산주의 사상이 처음으로 들어온 배경부터 면밀히 파헤쳤다. 그 내역을 보노라면 한반도가 공산화되느니 차라리 일제 치하에 있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왕 먹힐 거면 소련이 아니라 일본에게 먹힌 게 오히려 축복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미국· 일본 등 그 당시에 나름 선진국 축에 들던 나라들은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던 소련 발 공산주의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우는 프로파간다는 마치 이단 종교 교리처럼 무지한 사람들을 현혹하고 선동하기 매우 좋은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적인 배경을 모른 채 오늘날의 북한은 공산주의하고는 무관하다는 식으로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임을 이 책은 알려 준다.

한반도 본토에서 떨어져 있던 제주도를 공산주의 체제로 뒤엎으려는 계획은 일제 강점기 때부터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본인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또한 박 헌영은 6·25를 사주한 것 이상으로 4·3 사건에 대해서도 대한민국에 씻을 수 없는 반역죄를 저질렀음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 사건이 좌익과 우익이 모두 연루된 처절한 피의 비극으로 끝난 데는 일차적으로는 '빨갱이'들의 교묘한 위장 전술과 잔학성, 피아식별의 어려움, 그리고 다음으로 상대편 진영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증오, 보복 심리라는 요인이 작용했다.

이 사건은 친북 세력이 일으킨 반란임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그 어떤 좌편향 인사라도 감히 북한 쪽을 일방적으로 두둔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 성향의 정권 때 반란의 주동자가 명예가 회복되고 훈장이 추서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사건의 피해자인 당시의 제주도민들조차도 이것은 불순분자가 일으킨 무장 반란일 뿐 남북 북단을 반대하는 항쟁(?)이라고는 여기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사건이 그렇게 왜곡되어 재해석되고 있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덮으면서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이것이다. 이런 불편한 진실을 파헤치는 책을 왜 현업에 종사하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응용수학을 공부한 시스템공학 박사가 썼을까? 이 책을 쓰기 위해 막대한 기회비용을 감수하면서 얼마나 많은 문헌들을 읽고 공부해야 했을까?

희극인지 비극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다른 분야에도 이런 예가 종종 있어 왔다. 세벌식 한글 타자기를 발명한 천재인 공 병우 박사는 안과 의사였고, 오늘날 흠정역이라고 성서 공회 성경보다 더 나은 우리말 성경을 만들어 보급하고 있는 분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공대 교수이다. 머리가 시대를 앞서 가는 선각자들이 맑은 영혼과 양심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좁은 길을 먼저 간 덕분에, 다른 국민들도 더 똑똑해지고 삶이 더 윤택해져 왔다. 어느 분야든 그 맥이 부디 끊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비정상적인 국가인 북한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이 더욱 궁금해졌다.
숙주가 완전히 죽어 버리면 바이러스 자신도 죽는데, 북한은 왜 하필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조차 가지 않은 최악의 길만 골라서 가 있을까? 북한도 처음에는 그래도 여러 당이 존재하고 주민들을 먹여 살릴 최소한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주민은커녕 군인들마저 못 먹여 살릴 정도로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북한 수뇌부들은 지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렇게도 남한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많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의 저자는 정치색이 굉장히 강한 논객으로 세상에 알려져 있고, 사람마다 사상적인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 분이다. 그러나 저자의 일부 극단적인 평론이나 주장에 공감하지 못하여 선뜻 받아들이지는 않을 수 있어도, 친일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프로필을 가진 멀쩡한 군사 평론가를 친일파로 몰고 가는 것은 여론 조작과 선동의 결과로 풀이할 수밖에 없다.

또한 북한의 비열하고 집요한 대남 도발사는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만큼이나 객관적으로 입증되어 있다. 이것이 정면으로 뒤집히고 반박될 일이란 나라가 망하지 않는 한 없을 터이며 4·3 사건에 대한 기록도 그러할 것이다. 팩트가 정치색으로 매도되지 않으면 좋겠고, 저자에 대한 편견 하나 때문에 진실까지 가려지는 일도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 만에 하나 이 책이 정치색을 띠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색은 무슨 불확실한 음모나 들추고 국가에 대한 피해의식과 불신을 조장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감사와 애국심을 북돋우는 건전한 정치색일 것이다.

우리나라에 아직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는 것은 과거에 조선이 러시아 대신 일제에게 먹힌 것보다는 훨씬 더 큰 축복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역사만 제대로 알아도 자부심은 충분히 생기며, 환단고기 같은 위서로 대리 만족을 얻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런 책이 널리 읽혀서 전쟁을 겪은 적이 없는 세대에게 공산주의의 해악이 알려지고 자유와 안보의 소중함이 전파되고, 북한의 대남 도발사가 있는 그대로 폭로되며 내 조국은 이런 위태로운 와중에도 오뚝이처럼 굳게 일어선 나라라는 사실이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13 19:26 2013/02/13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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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국토 분단과 관련된 몇 가지 용어에 대해 살펴보자.

1. 우선, 38선과 오늘날의 휴전선은 다르다.
38선은 일제의 패망 이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나눠서 지배하기 위해,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지리적인 위도 38도를 기준으로 땅을 수평 분할한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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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오늘날 남한과 북한 사이의 실질적인 국경 역할을 하고 있는 휴전선은 6· 25가 휴전/정전으로 끝나면서 나중에 생겼다. 꼬불꼬불한 곡선 형태로 38선 시절에 비해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반면, 강원도 쪽 영토는 남한이 훨씬 더 많이 수복하여 속초와 고성이 남한 땅이 되었다.

휴전선은 일명 군사 분계선(MDL)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미터법이 대세인 우리나라에서 그 길이가 유독 마일이라는 단위로 일컬어지는 흔치 않은 존재이다. (155마일)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2. 흔히 휴전선 하면 이런 모습을 떠올리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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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전방 GOP라 불리는 곳에서 근무하는 국군 병사들이 곁에 바싹 붙어서 순찰하고 정비하는 그 철조망은.. 한반도를 딱 반으로 가르는 그 '휴전선'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민족 대표 33인이 서울에서 벌인 3· 1 만세 운동과, 그 후에 유 관순이 음력 3월 1일에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벌인 만세 운동만큼이나 서로 혼동하기 쉬운 개념이다.

국군 병사들이 지키는 철조망은 휴전선 이남의 '남방 한계선'을 나타내는 철조망이다. 물론 북한 쪽에는 '북방 한계선'이 있다. 이것은 실제 휴전선과는 명목상 2km정도 떨어져 있으나, 그게 칼같이 지켜지는 건 아니어서 2km보다 더 가까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남과 북의 군인이 동일한 단일 철조망을 공유하면서 진짜 코앞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에는 피차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각자 자기 진영의 철조망을 갖고서 서로 거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 휴전선을 포함하여 남북 양쪽의 한계선 사이의 공간이 바로 천연 자연의 보고라고 불리는 그 이름도 유명한 비무장지대(DMZ)이다. 금강초롱과 끈끈이주걱까지 서식한다고 하나, 거기는 지뢰도 엄청 많이 묻혀 있는 위험한 지대이다. -_-

동쪽 강원도 쪽으로 갈수록 DMZ는 첩첩산중 지형이 되지만 서쪽 경기도는 DMZ가 평지이다. 판문점이 있는 공동 경비 구역(JSA)은 DMZ에 속하며, 대성동 마을도 이례적으로 JSA 인근 DMZ 내부에 있는 마을이다. 그리고 DMZ는 마치 뉴욕 한가운데의 UN 본사처럼 UN의 관할에 있는 땅이니, UN 본사를 판문점으로 옮기겠다는 허 경영의 공약(?)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발상은 아닌 듯하다. -_-;;

남방 한계선과는 달리, 진짜 오리지널 휴전선(군사 분계선)은 극소수 육로로 월북이나 귀순을 하는 용자 말고는 접근하는 사람이 없다시피하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진짜 60여 년 전 휴전 당시에 만들어진 철조망이 시뻘겋게 녹슨 형태로 방치돼 있거나, 아예 애초에 철조망도 없이 낡은 표지판만이 남아서 여기가 군사 분계선임을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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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남북의 군인들이 전방에서 매일 철통같이 순찰하고 정비하는 철조망은 휴전선이 아니라 거기에서 파생된 남방 한계선임을 기억하자. DMZ 내부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JSA에서 근무하는 권총 든 헌병이라든가 GOP보다도 안의 GP 순찰병 정도밖에 없다.
이런 위험한 곳에까지 들어가는 병사는 체력 좋고 사상이 확실하게 건전한 사람만을 엄격하게 가려서 뽑는다.

3. 끝으로, 민간인은 남방 한계선까지라도 선뜻 갈 수 있는 게 당연히 아니다. 남방 한계선보다 더 수 km 남쪽으로는 드디어 민통선이라고 불리는 민간인 통제선이 있다. 민통선은 무슨 남방 한계선처럼 전구간이 살벌한 철조망이 둘러져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자동차 도로는 마치 청와대 근처처럼 헌병 초소로 가로막혀 있으며, 아무나 드나들 수 없다.

민통선 내부 구간을 방문하려면 사전에 방문 신청을 하고 군인들로부터 신원 확인을 받는 등 여러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하다. 도라산, 제진, 월정리 역은 바로 민통선 내부에 있는 철도역이다. 그래도 여기는 DMZ와는 달리, UN 관할이 아닌 엄연히 대한민국 영토인 건 맞다. 휴전 직후에는 민통선 구간이 남방 한계선으로부터 무려 10~20km가까이나 떨어져 있기도 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다시 북쪽으로 많이 올라갔다. 통제가 완화되었다는 뜻이다.

※ 별첨

우리나라에는 현충원 같은 묘지만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적군 묘지'도 있다. 스펀지 같은 데에 소개될 만한 아이템이 아닌가 싶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 55에 소재한 적군 묘지에는 6·25 이래로 우리나라에서 죽은 북한군, 중공군, 무장공비, 테러범들이 묻혀 있다. 찾아와 줄 유족이 있을 리 없는데도!
1968년 김 신조 무장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공비들, 1987년 대한항공 여객기 폭파범 김 현희의 파트너(자살)까지 다 묻혀 있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자세한 건 링크 참고.

제아무리 제네바 협약 같은 게 있다지만, 적군에게까지 이런 예를 갖추는 우리나라는 정말 인심 좋은 나라이다.
하긴, 해방 직후에 일본 민간인들이 권력을 잃고 본토로 쫓겨날 때도, 한국인들이 폭동· 약탈 하나 없이 고이 보내 줘서 걔네들이 무척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지는데.. (그런데 저 나쁜놈들은 우키시마 호 폭침 사건으로 은혜를 끝까지 원수로 갚았고..)

그런데 더욱 경악할 만한 안타까운 사실이 있다. 저 적군들은 그래도 북한의 입장에서는 나름 자기네 나라로부터 명령을 수행하다가 순직/순국한 호국영령들이다. 미국의 경우, 자국 군인이 죽으면 지구 끝까지 추적해서라도 유해를 찾아 오는 걸로 익히 유명하며, 한국도 나름 그 원칙을 수행하려 노력 중이다.

허나 북한은 한 번도 우리나라에 자국 병사의 유해 인도를 요청하거나 제의한 적이 없다. 특히 각종 지저분한 테러 공작의 경우, 공작원의 시신 인도를 요청했다간 그 행위를 자기가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니 절대로 안 한다.

인권이고 예우고 뭐시고 없는 북한 정권은, 이용 가치가 끝난 병사나 공작원은 자기네 인력이라도 철저히 무시하고 토사구팽하는가 보다. 남과 북이 사이가 좋던 시절에 판문점을 통해 쌀과 소와 관광객이 오고 가긴 했어도, 북한군 유해가 갔다는 소식은 여러분도 지금까지 들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1996년의 강릉 잠수함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때 사살된 북한군의 유해는 북한으로 송환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는 북한이 자기들이 벌인 만행에 대해서 “유감 표명”까지 했을 정도로 예외적인 경우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2/03 08:18 2013/02/03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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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때문에 달라지는 한국인의 정치 성향 스펙트럼을 분류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5단계인데 좌빨, 수꼴이라는 양 극단을 추가하여 총 7단계가 나왔다.
용어는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용어 명명 방식이 안 드는 분들은 그냥 레벨 숫자만 보시라.

## 좌빨: 월북을 하고 싶어 안달 났거나 광화문에서 인공기 흔들고 위수김동 외치고 싶어하는 부류. 법정에서 민족의 태양인 김씨 부자를 찬양한 걸로 매스컴 탄다. 바로 뒤에 나올 1이 본심이 드러난 형태이겠다. 그냥 답이 없는 부류.

1(종북): 이념을 초월하여 누가 봐도 레알 빨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등급. 대놓고 김일성교 신자 행세는 안 하지만, 북한 체제를 궤변으로 옹호한다. 북한이 핵 개발한 것은 미국을 견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씨 부자는 지금까지 북한을 잘 다스려 왔는데 탈북자들이 변절자 죽일놈이며 오로지 미 제국주의만이 나쁜놈이다.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남한 정부인지 남조선인지 헷갈리고 6·25가 누가 먼저 저지른 전쟁인지가 헷갈린다. 지난 대선 때 이 정희에게 표를 주려고(사퇴 안 했다면) 진지하게 생각했다.

2(진보?):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나 그들의 추종 세력이 오늘날 우리나라에 그리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이 있는 반면, 그게 전적으로 수꼴 기득권층과 안보 장사꾼들과 외세 때문에 안 되고 있는 거라고 여긴다. 우리나라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큰 편이고, 더 나아가 근현대사에도 불만스러운 게 많다. 가령, 친일 얘기만 나오면 분노 게이지 급상승.
북한의 정권과 남한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슷하거나 같은 급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오로지 비판과 청산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사 심리로 진보 성향 정권을 아주 좋게 평가한다.

3(중도): 2만치 한쪽으로만 일방적으로 편파적이지는 않다. 북한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것과, 햇볕정책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은 그런 정서를 감안하지 않고 오로지 비현실적인 평화· 공존만 얘기하는 자충수 때문에 노인들로부터 표를 빼앗겼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보수 정권만 좋아하고 진보 정권을 폄하하는 건 아니며, 이들이 균형이 잡히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진보 성향 진영이나 정권도 최소한 악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물리적인 군사 위협 이상으로 남한에 정신적인 위협이라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는다.

4(보수?): 2~3보다 입장이 더욱 단호해진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든 일을 망쳐 놓은 주범은 전적으로 북한이다. 종북을 논하지 않고서 친일· 독재를 논할 수는 없다. 통일도 외세 때문이 아니라 쟤들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어서 못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제 옛날 같은 남침을 할 수 없으니, 남한을 상대로 종북주의자, 좌파를 심어서 체제를 부정하는 정신적 선동, 방해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고 여긴다.
국가 체제에 피해의식이 없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은 그래도 저 악독한 북한을 마주한 상황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잘 이뤄 냈으며,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게 훨씬 더 많다. 이 승만· 박 정희에 대한 평가가 후해지고, 민족 문제 연구소를 보는 시선이 불편해진다. 탈북자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 인권 문제에 관심이 크게 늘어난다.

5(극우): 4에다가 북한, 심지어 진보 세력들까지 더욱 악하게 보는 음모론이 가미된다. 지금까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불법으로 북으로 갔으며, 김 대중뿐만 아니라 노 무현까지도 “북한하고만 잘 되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말한 간첩, 반역자, 빨갱이이다. 그에 반해 박 정희는 재임 중의 경제 개발뿐만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조차도 결과론적으로 김 일성의 2차 남침을 막은 애국 행위로 정당화된다.
1980년 광주엔 북한 특수부대가 실제로 가서 군경과 시민들을 이간질했으며, 지금도 온라인 여론을 선동하는 간첩이 한 1만 명은 있다. 시스템클럽에서 전하는 내용을 다 받아들이면 이 정도.

## 수꼴: 말이 통하질 않고 그저 단편적인 빨갱이 사고방식밖에 없다.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질 못하거나, 5를 애국이 아닌 자기 영달과 기득권, 감정 표출을 위해서 비상식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드러내는 등, 상태가 막장으로 치달으면 수꼴이다.

각자 자기는 어느 수준 정도인지 생각해 보시길. 성경에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어떤 권력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 너는 권력에 순종하고 세금이나 잘 내라는 식의 원론적인 권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도랍시고 오로지 3만이 무조건 성경적으로 가장 권장된다거나 바람직하기만 한 건 아니다. 영적이지 않은 육신· 정치 문제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주제이며, 그건 반역이 아닌 한 그냥 사람마다 양심껏 소신껏 판단하길 바랄 수밖에. (그런데 수꼴은 그냥 과격하기만 한 걸로 끝인 반면, 종북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인 것 같은데? 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13/01/23 08:20 2013/01/2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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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선과 경원선은 서울에서 시작하여 한반도의 북쪽으로 뻗어 나가는 양대 철도이며, 국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철도이기도 하다.
전자는 개성과 평양을 경유하여 중국 국경을 접하고 있는 평안북도의 신의주까지 가고, 후자는 6· 25 당시의 원산 폭격으로 유명한 동해 항구 도시인 함경남도 원산까지 간다.

분단 이후 이들 노선의 대한민국 관할 구간은 잘 알다시피 장거리 일반열차를 운행하는 게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너무 짧아졌다. 서울-인천보다는 길지만 서울-춘천보다는 짧은 어중간한 거리가 됐다.

그래서 이곳은 전통적으로 통근형 디젤 동차가 강세이다. 세월이 흘러서 전국 각지의 디젤 동차들은 죄다 무궁화호 RDC 내지 기관차-객차형 무궁화호로 바뀌거나 심지어 전동차로 바뀌었지만, 경의선과 경원선만은 우리나라에서 최후까지 CDC(통근형 디젤 동차)가 남아 있는 노선이다. 그래서 CDC를 시승하고 안보 관광까지 덤으로 하려는 철덕들에게 좋은 여행 코스를 제공하고 있다. 통근열차가 통근용이 아니라 옛 명칭인 '통일호'나 다름없게 된 셈.

지난 2006년 말엔 의정부까지만 가던 수도권 전철 1호선이 무려 동두천과 소요산까지로 연장됐고, 2009년에는 회송 열차 트래픽으로 인해 금기의 영역이던 경의선에도 수도권 전철화의 손길이 뻗쳤다. 그래서 디젤 동차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대부분의 구간이 전철화가 되어 버린 경의선의 CDC는 문산-도라산 사이의 4개역만 다니는 15분짜리 셔틀 열차로 전락했다. 마치 서울 지하철 2호선 용답-신설동 지선 열차처럼 됐다.

그 반면, 경원선은 비전철 구간이 경의선보다 더 길기 때문에, CDC가 다니는 역이 아직 9개이고 전구간 완주 시간도 46분가량이다. 동두천-소요산은 단선 전철로, CDC와 전동차가 공유하는 구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경의선과 경원선의 지리적 여건에 대해서 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휴전선은 한반도의 서쪽으로 갈수록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고, 동쪽으로 갈수록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는 선형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서쪽이 북한과 더 가까우며, 이런 이유로 인해 경의선이 경원선보다 더 짧다. 경원선의 연천군 구간은 경의선으로 치면 이미 북한 관할로 넘어간 개성과 장단 구간이다. 38선 시절에는 남한 관할이었지만, 6· 25 때는 북으로 빼앗겼기 때문.

경의선은 북한과 더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김 대중 정권 시절에 철도가 연결되었으며 임진강 역 이북의 민통선 내부에 도라산 역이 생겼다. 덕분에 통일만 되면 경의선 열차를 타고 당장 북한으로 갈 수 있다. 전기 규격이 남과 북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서로 같은 게 없으니, 비록 전철은 직통 운행을 못 하겠지만 말이다. 당대의 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한 다른 행적이야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단 철도가 연결됐다는 건 정치색을 배제하고 철덕의 순수한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경의선과 관련한 유물로는, 장단 역에 있던 증기 기관차 한 량이 6· 25 때 폭격을 당해서 총알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버려진 것이 잘 알다시피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서쪽에 경의선이 있다면 동쪽에는 동해북부선(강원도 고성군. 속초보다도 더욱 북쪽 완전 끝에 소재)이 옛날에 남북 관계가 좋던 시절에 연결되었다. 경의선의 도라산에 해당하는 동해북부선의 역이 바로 제진 역이다. 하지만 거기는 연계되는 간선 철도가 없으니 인지도와 효용성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너무 멀기도 하고 말이다.

일제가 포항 이북으로 건설하려다 말았던 동해중부선이 계획대로 완공되었다면, 포항, 영덕, 울진, 삼척이 철도로 연결되고 지금 영동선의 지선으로 간주되는 삼척선이 당당히 동해선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이 공사는 일제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한반도에서 물러나면서 중단되었다. 일제가 한반도에 건설하던 최후의 철도인 셈이다.

이러한 경의선이나 심지어 동해북부선과는 달리, 경원선은 남북 철도 복원 같은 논의가 없었다. 그래서 철원이나 월정리처럼 위치가 영 좋지 않던 역은 그렇잖아도 전쟁 때 역사와 선로가 파괴되기도 했는데 일찌감치 시설이 철거되었으며 철도가 끊어졌다. 도라산이나 제진 같은 민통선 허브역이 이 노선에는 없다.

이 부근에서 군생활을 한 분이라면 절대 잊어버리시지 않겠지만, 경의선에 임진강이 있다면 경원선에는 한탄강이 있다.
경원선의 종점인 신탄리 역의 이북에는 그 유명한 '철도 중단점 -- 철마는 달리고 싶다' 기념비가 있었다. 그러나 코레일에서 신탄리보다도 더 북쪽에 '철마고지'라는 옛 철원 역과 비슷한 위상의 역을 신설하면서 그 기념비는 철거된 상태이다.

경의선과 경원선의 잔여 비전철 구간에는 1시간에 1대꼴로 CDC가 다닌다. 전철을 타다가 털털거리는 트럭 엔진 소리가 나는 CDC를 타 보면, 전철이 얼마나 조용하고 우아하게 달리는 아름다운 육상 교통수단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배차 간격이 저런 이유는 수요가 없어서라기보다도, 단선 철도에서 근본적으로 1시간에 1대보다 열차를 더 자주 투입하기란 도저히 무리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당 지금 같은 운임으로 별도의 디젤 동차를 굴려서 코레일의 입장에서 이윤이 남는 건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밑지는 장사를 일부러 공익 차원에서 해 주는 것이다. 분단 같은 국가적인 사정만 아니었으면 이런 열차는 진작에 없어졌거나 전철 형태로 마저 바뀌었을 것이다.

CDC의 운임은 수도권 통합 요금과 연동되지 않는다. 적자를 감수하고 운행하는 걸 아니 환승 할인은 안 해 줘도 좋은데, 티머니 교통 카드로 운임 지불이라도 좀 가능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한 우진 님 같은 분이 그걸 건의하신 적도 있다.

21세기가 되면서 우리나라의 철도는 KTX의 개통과 함께 새로운 트렌드가 시작되었다. 기존의 새마을-무궁화-통일호 구도가 흔들리고 있다. 콩라인 새마을호는 2010년대 중반까지 차량이 모조리 퇴역하여 차종 자체가 사라질 예정이고, 통일호는 명칭 자체는 진작에 없어져서 통근열차로 대체되었으며 이마저도 사라지는 중이다. 그 대신 기존 열차의 통념을 깨는 전동차들이 여럿 도입되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북한을 향하고 있는 경의선과 경원선의 비전철 구간은 전동차, 코레일체 유리궁전 등 21세기의 모든 철도 트렌드에서 소외된 채 시간이 정지된 상태로 국토 분단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비록 지금까지 나쁜 불순분자들에 의해 본디 의도가 극도로 더렵혀지고 왜곡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은 궁극적으로 되어야 하고 필요한 것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그래도 한국어와 한글을 쓰는 사람끼리라도 최대한 뭉쳐야 살지 않겠냐 말이다.

금강산도 백두산도 보고 싶고 개마 고원에도 가고 싶고 압록강과 대동강과 두만강도 구경 가고 싶지 않은가? 의정부 역은 북쪽의 수원 역 같은 역이 되어야 할 것이고 수색과 성북 역은 서울 북부의 영등포 같은 큰 역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의선과 경원선도 서울 시내 구간은 그야말로 2복선, 3복선급으로 확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민족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인 김씨 왕조에 대한 잔재를 지우고 우리나라의 체제와 정체성을 유지한 통일(흠, 그럼 흡수 통일이네-_-)이 이뤄져, 철마가 북녘 '미수복 영토'까지 마음껏 달리는 날이 주님 다시 오시기 전까지 이뤄지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28 08:32 2012/12/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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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지하철 소개

예전에 올린 글들을 보면 알 수 있듯, 본인은 반공-_- 성향이 강하며 정치적으로 북한 정권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공산주의고 나발이고 간에 우리나라를 삥뜯고 시종일관 민폐만 끼쳐 왔으며, 눈엣가시 같은 짓만 골라서 해 온 놈들이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해서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만큼이나 쟤들도 사과를 하고 개과천선한 적이라고는 없다. 대남 적화 야욕은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바뀐 게 없다.

그들은 국제 사회로부터 주어진 개방과 회생의 기회는 죄다 제 발로 거절하고 세계 최악의 생지옥 국가를 만들었다. 지도자라는 작자는 국민들을 먹여 살릴 돈과 물자로 핵 무기나 만들고 개인적인 향락만 즐겼다. 자기들이 잘못해 놓고는 기근이 미국의 경제 봉쇄 때문이라고 남 탓만 한다. 그러니 아량과 자비를 베풀고 예쁘게 봐 줄 구석이 어찌 눈꼽만큼이라도 있으리요?

사실, 극소수의 정신줄 놓은 좌빨 종북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북한 정권을 좋아하는 사람 자체가 있을 리 없겠지만(스톡홀름 증후군?), 그 극소수의 인간들이 국가에 끼치는 손해가 워낙 막심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법은 그런 부류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부득이 다소 원시적이고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약간 있는 것도 사실이다.

다만, 본인은 그런 정치관과는 별개로, 북한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과 호기심도 많은 편이다. 같은 한국어와 한글을 쓰는 동족이 지도자 잘못 만난 죄로 어떻게 저 정도로 맛이 가고 흑화해 갔는지... 이 21세기에 서울에서 100km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한반도 북부에 어떻게 절대로 가 볼 수 없는 위험한 지역이 존재할 수 있는지가 솔직히 신기하고 궁금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요즘은 ㄱㄱㅇㅅ라는 충격과 공포의 물건이 있어서 전에는 일반인이 보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던 장소들까지 다 들여다볼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특히 지리덕에게!) DMZ와 판문점도 보이고 예전에 국기 높게 달기 경쟁을 하던 대성동· 기정동 마을까지 항공 사진으로 다 볼 수 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도 볼 수 있고 평양 시내도 들여다볼 수 있다.

자, 북한에도 관심이 많고 한국 철도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북한의 철도 체계, 그리고 더 세부적으로는 평양의 지하철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게 된다. 오늘은 이 주제에 대해서 얘기를 좀 하겠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북한은 지하철이 다니는 나라치고는 상당히 가난한 나라이다.
그래도 북한이 최초의 지하철을 만들기는 남한보다 1년 더 먼저 만들었다.

평양 지하철은 노선이 딱 두 개이다. 1973년에 첫 개통한 천리마선과, 1975년에 개통한 혁신선. 노선별로 역이 10여 개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주 소규모이다.
다음은 평양 지하철의 역명과 주변의 역세권을 나열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천리마선 (종축)

붉은별: 장경동, 2인민병원
전우: 혁신선 전승 역과의 환승. (역명이 서로 다름)
개선문: 말 그대로 개선문이 인근에 있음
통일: 칠성문, 모란봉 야외극장
승리: 김일성 광장
봉화: 해방산 려관
(영광): 평양 역, 김책 공업 전문 대학, 고려 호텔
(부흥): 화력 발전소

서울에 한강이 있다면 평양에는 대동강이 있다. 봉화 역 이남으로는 하저 터널을 뚫고 평양의 강남과 강북을 지하철로 연결하겠다는 게 북한의 당초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1971년, 하저 터널 건설 중에 터널이 붕괴되어 10여 명의 인부들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난 뒤 그 계획은 철회되었다. 사실, 한강 하저 터널은 남한도 삼부 토건이 서울 지하철 5호선을 건설하면서 1990년대에 와서야 NATM 공법으로 해낸 어려운 과업이다.

북한은 하저 터널 대신 강을 따라 서쪽으로 평양 역과 화력 발전소, 그리고 김 일성의 생가 쪽으로 노선을 연장하는 쪽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이것이 1987년에 개통한 만경대선인데, 사실상 천리마선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마치 서울 지하철 3호선과 일산선의 관계와 비슷한 셈. 영광과 부흥 역은 만경대선 구간이다.

* 혁신선 (횡축)

광복: 광복 다리
건국: 평남선 보통강 역
황금벌: 경흥관
건설: 류경 호텔
혁신: 서평양 려관
전승: 천리마선 전우 역과의 환승. 전우동. 지하철도 건설 박물관, 2· 8 문화회관
삼흥: 김일성 종합 대학
광명: 금수산 기념 궁전. 김 일성이 죽은 후 이 역은 열차가 무정차 통과.
락원: 대성산 유원지

북한의 어지간한 유명 시설들이 망라되어 있다.
류경 호텔이 '건설' 역의 역세권에 있는 것은 적절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_-;;;

자, 북한은 지하철 노선이나 역에다 이름을 붙일 때도 지명 같은 건 갖다 버리고, 이념적인 보통명사를 선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부역명으로 주변에 있는 기관이나 시설명을 병기해 주기는 하지만, 인근에 철도역이 있는데도 이를 싹 무시하고 전혀 다른 이름을 부여하는 건 뜻밖이다.

환승역이 어차피 하나밖에 없긴 하지만, 환승 통로라는 자비 같은 건 없다. 완전히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가야 하며, 노원 역을 능가하는 막장환승을 자랑한다. 북한 지하철은 무진장 깊기도 하고 말이다.

우리나라는 '지하'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고 간주하여, 공식적으로는 지하철이라는 용어를 버리고 '도시철도' 내지 '광역전철' 같은 포괄적인 용어를 선호한다. 그에 반해 북한은 철저하게 지하를 강조하여 로고타입에도 선명하게 '(지)'자가 적혀 있다.
평양 시내에는 노면 전차가 따로 있지, 지하철이 지상 구간을 달린다거나 하는 건 없다.

그럼 얘들은 차량 기지는 어디 있는지 궁금해진다. 다 지하에 있어서 안 보이나? 하긴, 북한은 워낙 비밀이 많은 스텔스 국가인지라 저 지하철 노선 이상으로 지하 철도가 많이 있을 거라 추정되기도 한다. 심지어 평양 시내에서 한참 떨어진 평양 순안 국제 공항까지도 사실 철도가 존재할지 누가 알겠는가?

지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대동강은 중간에 섬이 여럿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능라도이다. 평양의 여의도 같은 섬인데, 여기에는 10만 명이 넘는 관중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 최대의 스타디움인 5· 1 경기장이 있다. (북한에는 삼일절만큼이나 기념일 날짜를 그대로 이름으로 붙인 시설명이 종종 있다) 북한 특유의 매스게임, 카드 섹션 같은 게 공연되는 장소가 바로 여기이다. 하지만 평양의 지하철은 강을 건너는 노선이 없는 관계로 이 경기장은 지하철 역세권이 아니다.

평양 지하철은 표준궤에 3량 내지 4량 1편성이고, 제3궤조(우리나라처럼 공중에 팬터그래프가 달린 형태가 아님) 직류 750V 전기를 쓰니 남한의 직류 1500V와는 전압이 절반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좌측통행인지 우측통행인지는 딱히 동영상을 못 봐서 잘 모르겠다. 역의 인테리어가 러시아 식의 유리궁전이라는 것, 그리고 요즘은 전력난이 심해서 전동차 운행을 제대로 못 한다는 것 정도는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상으로 평양 지하철에 대해서 본인이 아는 내용을 최대한 나열해 보았다.
무려 9호선까지 있고 세계 5위권의 방대한 전철망을 구축한 우리 서울과는 달리 평양의 지하철은 인프라의 성장이 20세기 이후로 사실상 완전히 멈췄고, 그야말로 초라하기 그지없다. 솔직히 지금 경제력으로는 있는 지하철을 굴릴 여력도 없으니 말이다.

모 우익 논객의 말마따나 평양 주석궁에 탱크가 진격하기에 앞서-_-, 남과 북의 철도가 평화적으로 연결되면 좋겠다. 먼저 북녘 동포들에게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 말씀인 흠정역 성경이 들어가고, 덤으로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이념을 초월하여 한글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2/09/24 19:28 2012/09/24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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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이제 애호박, 단호박, 늙은호박 이 셋은 항상 있으나, 그 중에 제일은 늙은호박이니라.

-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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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무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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