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교회와 작은 교회

1. 작은 교회: 회중 찬송

본인은 하루는 창립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서울 교외의 자그마한 교회에 초대받아 가서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여기는 인원이 30~40명 될까말까한 정도였는데.. 우와~ 본인이 2000년대부터 거쳤던 교회들 중에서 인원수 대비 찬송 부르는 소리가 제일 크고 우렁찼었다.
그러니 나까지 기분이 좋았다. 여긴 너무 작아서 성가대가 따로 있지도 않은 곳인데..!!

분위기가 좋으니 나는 오랫동안 봉인됐던 옛날 버릇이 저절로 나오기 시작했다. 1절만 익숙한 멜로디 파트로 부른 뒤, 2절부터 n절까지는 테너 파트로 선로를 갈아타서 화음을 넣었다. 멜로디는 남들이 충분히 크게 잘 부르고 있으니까..
즉석 화음을 도대체 얼마 만에 넣어 보는지? ^^

이전에 다녔던 교회에서는 내가 직접 강단에 서서 찬양 인도를 했다. 내 마음대로 화음을 넣을 수 없고 언제나 주선율 파트만 불러야 했다.
그 반면, 대형 교회는.. 찬송가 책 따위 없고 가사만 대형 스크린에다 띄워 준다. 게다가 찬양팀의 악기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니, 개인의 화음 따위는 반대편 극단의 이유로 인해 아오안이고 묻혀 버린다.

내가 화음을 넣자 뒷자리의 어떤 자매님도 테너 파트를 부르기 시작해서 저절로 2성부가 형성됐다.
이런 분위기가 참 정겹고 좋았다. 여기 목사님도 아주 흡족한 표정이셨다.
심지어 내가 강단에서 직접 찬양 인도를 했던 이전 교회도 내 경험상 이 정도로 훈훈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회중 찬송이 일상적으로 박력이 있는 곳이야말로 작지만 강하고 본질에 충실한 교회이지 싶다. 제식 군기가 확 잡혀 있는 사기 충만한 군대와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은 옛날 같은 무지막지한 거리 두기나 백신 패스 따위가 없어지고 실내 마스크 외에는 일상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교회는 한번 무너졌던 주일학교와 성가대 인프라가 다시 회복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2. 큰 교회: 찬양

물론, 대형 교회는 교회 음악/찬양 인프라가 아무래도 작은 교회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 목사 1명이 아는 찬양의 범위와, 전문 음악 사역자가 아는 찬양의 범위가 어찌 쨉이 되겠는가..;;
청년부 예배 때는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생소한 신세대 곡들을 불러 댄다. 요즘은 CCM이라는 바닥을 누가 주도하고 있고 누가 신곡을 만들고 번역하는지..?? 본인은 HTML 지식과 CCM 배경 지식이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에서 멈춰 있어서 그게 궁금하다. -_-;;

대형 교회는 예배를 연령대별로 다양한 시간대에 나눠서 시행하는 게 가능하다. =_=;; 이게 바람직한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오전 9~11시 사이엔 여기도 의외로 클래식한 찬송가와 1980~90년대 비교적 오래된 CCM을 부르는 편이더라.

한번은 여친 교회의 오전 예배에서 최 덕신의 "세상의 유혹 시험이 내게 몰려 올 때에.."(주를 찬양)와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기도)가 흘러나와서 굉장히 반가웠었다. 이런 곡을 내가 공예배 때 소리 내어 부른 건 아마 평생 처음이거나 최소한 21세기 이래로는 처음이지 싶다.

본인은 이걸 중3이나 고1 사이에 다녔던 교회의 중고등부 선생님에게서 맨 처음으로 소개받았고, 그 뒤에 최 덕신/주찬양 음반을 통해서 음원도 접했다. 그야말로 마르고 닳도록 들었기 때문에 머릿속에 반주와 전체 가사가 자동 완성된다.
다행히 교회에서도 3절에서 조가 올라가는 것까지 음반과 똑같이 부르더라. 나도 신바람 나서 힘차게 같이 불렀다.

다만, 일반 기성교회에서는 반대로 내가 전에 다녔던 교회에서 즐겨 부르는 곡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가령, 론 해밀턴 아저씨 곡들 대부분이라든가(“전능하신 우리 주 하나님 Rejoice in the Lord” 정도만이 고작?)
Wonderful grace of Jesus(놀라운 주의 은혜)라든가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같은 곡은 모르는 건지..? 이런 건 침례교에서만 알려져 있는 건가 싶다.

그리고 회중 찬양 대신 성가대만 지나치게 현란 화려하고, 심지어 불신자 음악인을 섭외해서 성가대를 운영하는 건 아무래도 본질을 벗어난 처사이고 잘못된 것 같다. 예배가 겉만 번드르한 공연, 쇼로 전락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3. 큰 교회: 주차 요원

자기 땅과 건물이 있는 큰 교회는 필연적으로 방문하는 성도들의 주차 문제를 자체적으로 신경 쓰게 된다.
그런데.. 교회 입구에서 주차 안내 및 차량 통제 봉사를 하는 분은 정말 엄청난 인내와 섬김과 헌신을 실천하는 것 같다. 이건 예배당 청소와 대등한 레벨이지 싶다.
혼자 교회에 남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밖에서 재미없고 골치아픈 궂은일을 해야 하고 예배 시간도 앞부분을 일부 깨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거 무슨 백화점이나 마트 주차장에서 최저 시급 받으면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회를 섬긴 것을 주님께서 기억해서 남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보상해 주신다~~ 라는 관념이 없이는 이런 일을 오래 지속적으로 할 수 없을 것이다.

하루는 여친이 다니는 모 대형 교회의 주차장에 들어가려는 중이었는데.. 주차 안내 요원이 각 차들을 “여기서 방향 바꿔서 후진으로 들어오셔서 저 XXXX 차 앞에 세워 주세요” 이런 식으로 일일이 통제하고 있었다.
본인은 후딱 차를 돌려서 그 말대로 잽싸게 주차를 한 뒤, 안내 요원에게도 수고 많고 고맙다고 축복 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안내 요원은 뜻밖에도 내게도 운전 잘한다고.. 말귀를 바로 알아듣고 그 공간에서 바로 차를 쏙 신속하게 잘 집어넣어 주시니, 통제하기 편해서 좋았다고 칭찬을 했다. ㅠㅠㅠ
여성 운전자는 그렇게 말하면 제대로 못 알아듣고, 좁은 공간에서 여러 차들이 엉켜서 애먹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이다. 아~ 이런 것도 주차 안내 요원의 고충이겠구나 싶었다.

주차 요원 말고도, 큰 교회는 예배 마치고 나서 사람들이 예배당을 빠져나갈 때, 장로급 어르신들이 출입문이나 계단 한켠에 미리 줄지어 서서 사람들에게 매번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게 있다. 이것도 깨알같은 수고가 필요한 섬김일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9/16 08:35 2022/09/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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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회중 찬양 인도 회고

* 본인은 다니는 교회에서 10년 넘게 예배 전의 회중 찬송 인도를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한 폐렴 때문에 무기한 중단된 지 1년이 넘었지만, 그래도 청년부 특송의 선곡과 지도도 6년 가까이 해 왔다.

1. 현충일 주일

올해는 2010년 이후로 11년 만에 현충일이 일요일(주일)과 겹치게 됐다. (그 전에는 2016년이 윤년이어서 토요일 다음에 일요일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월요일로 이동함.. ㄲㄲㄲ)
그래서 난 이 날은 준비찬송 곡에다가도 조기를 달았다. 바로.. 곡을 몽땅 단조로만 편성했다.

찬송가라는 업계에서 단조는 굉장히 드물다. 이름부터가 괜히 ‘마이너’가 아니다..

  • 중세 엄근진 스타일: “우리 주(여호와) 하나님”이 이 카테고리에서 거의 유일 독점에 가까운 인지도를 자랑한다.
  • 단조이지만 좀 경쾌한 느낌이 드는 CCM: “온 땅이여 주를 찬양” 같은 거..
  • 히브리 민요 스타일: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내가 의도한 건 물론 중세 엄근진이다. 분투와 승리가 아니면 고난, 십자가 장르가 이런 날 어울릴 것이다.
(1) “우리 주 하나님” 다음으로 (2) “온 인류의 구주께서”(behold the savior of mankind)라는 신곡을 발견해서 넣었다. 악보를 읽어보니 “우리 주 하나님”과 거의 같은 중세 엄근진 스타일에 가사도 괜찮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3) “어느 민족 누구게나” 이건 뭐.. 분투와 승리 장르에 있는 절대지존의 단조곡이기 때문에 현충일 주일에 0순위로 광속으로 선택됐다.

끝으로, (4) “밝은 빛을 따라서”는 이스라엘 국가 Hatikvah(희망)와 같은 멜로디이다.
예전에 악보를 처음으로 읽어 보니, 첫 시작이 동요 “썰매” (모두 모두 달려라 달려라)하고 조가 같고 첫 마디가 완벽하게  일치하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레미파솔 라 라 / 시b …).
그래서 얘도 그 동요처럼 굉장히 경쾌하고 빠른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공식 연주 음원을 들어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훨~씬 느리고 진지한 분위기(?)의 곡이었다.

저런 것들로 곡이 편성됐다.
다만, 세상 음악은 단조라고 해서 마냥 장송곡 스타일만 있는 게 아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기는 좀 그렇지만 댄스곡들도 단조가 많으며, 또 요즘 애들이 단조 음악을 제일 많이 접하는 경로는 누가 뭐래도 게임 BGM이지 싶다. 게임 BGM이 장조이면 분위기가 너무 명랑 발랄하고 안정적으로 바뀌어서 몰입감과 긴장감이 떨어질 것이다.

  • 단조로 시작했다가 중간에 장조로 전환되는 곡으로는 “6 25 노래”(아아 잊으랴), 그리고 송 명희/최 덕신 “동참”(너 고통 당할 때) 정도가 기억 난다.
  • 기독교에는 “부활과 영생”이란 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예배는 분명히 누군가의 죽으심을 기림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세상 현충일 기념식과 같지는 않다. “무슨 장례식 온 듯이 깜장으로 조폭처럼 쫙 빼 입고” 마냥 옛날 순교자들을 꺼이꺼이 추모하고 성역화하고 묵념만 하는 게 아니다.
  • 과거에 주일이 9월 18일 철도의 날과 겹쳤을 때는 난 “구원 열차”(나는 구원 열차 올라타고서 ...) 내지 “다함께 천국행 기차를 탑시다”를 넣기도 했다. 이 얼마나 적절한 선곡인가! ^___^

2. 무반주 생목소리

요즘이야 울 교회가 인원이 늘어서 어지간한 집회(주일 예배, 여름 수련회 집회 등) 때 참석자 중에 피아노 반주가 가능한 사람이 전혀 없는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옛날에는 집회를 앞두고 준비 찬송을 불러야 하는데 반주자가 전혀 없을 때가 아주 가끔 있었다.
그럴 때는 부득이하게 인도자인 내가 그냥 무반주 생목소리로 찬송을 부르곤 했다.

그렇게 생목소리로 찬송을 부르는 중에 반주자가 뒤늦게 도착하기도 하는데..
반주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서 멀뚱멀뚱 기다리다가 다음 곡부터 반주를 하는 게 아니다.
지금 불러지고 있는 부분으로 바로 들어와서 반주를 시작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내가 무반주 생목소리로도 반주가 있을 때와 아무 차이 없이, 언제나 악보와 동일한 음높이로 찬송가를 부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주자가 악보대로 코드 넣고 반주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들어올 수 있다.
반주자가 직접 형제님하고는 아무 때나 이렇게 같이 호흡 맞출 수 있고 반주하기가 편하다고 얘기하는 걸 듣고서야.. 이 기질이 반주자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난 예나 지금이나 조가 반음이라도 올라가거나 내려간 곡은 다른 곡으로 인식한다. 뭔가 음식이 쉬어서 맛이 변한 것 같은 차이가 느껴진다.
음반에서 G장조로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곡을 Ab 같은 다른 조로 바꿔서 부르게 되면.. 음반을 들으면서 경험했던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색소폰 같은 이조악기를 배울 때도 굉장히 애먹었다.

3. 마구니

한번은 "이 세상의 모든 죄를"이라는 찬송가 3절을 부르던 중..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바른 길을 저버리고 여러가지 죄악으로 주홍같이 되었으니
물 같은 것 가지고는 씻을 수가 아주 없네, 주님 귀한 보배피로 날 정결케 하셨도다"

글자가 순간 "물 같은 것 끼얹어선"이라고 눈에 들어와서 피식 뿜을 뻔했다. 진짜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목소리는 방송 타고 퍼지고 있는데.. >_<
순간 아찔했다. 다행히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 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방송사고는 나지 않았다.
어떤 목사가 바둑에 빠져 버려서 기도 마무리를 아멘 대신 '아다리'라고 했네 그게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찬양인도자도 가끔은 마구니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기름이나 화학약품 화재는 물을 부어서 끌 수 없으며, 인간의 죄는 물 같은 걸로 씻을 수 없다.

4. 추억의 특송 편성

예전에도 몇 번 자랑한 적이 있었지만..
본인이 기획했던 역대 교회 청년부 특송 중에서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가장 공들였고 가장 창의적이고 훌륭했다고 생각하는 작품은 2017년 4월작이었다.

“맑고 밝은 날 /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 /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19세기 찬송가의 앞뒤로 짤막한 1970년대 CCM을 넣은 3곡 메들리이다. (☞ 듣기)

이건 특정 테마 없이 완전히 백지 상태에서 1100여 곡이 수록된 찬송가 책을 거의 2시간 가까이 뒤진 끝에.. 세 곡 조합을 자체적으로 발굴한 것이었다.
박자와 조가 동일하고(E장조 4/4박자), 멜로디와 가사가 모두 연달아 부르기 적합한 곡들 조합 말이다.

세 곡 모두 우리 교회에서 한 번도 불린 적 없었고 나도 모르던 신곡이었다. 처음 보는 곡의 악보를 머릿속으로 읽기만 하면서 “이 곡이 이렇게 끝나니, 다음엔 얘를 부르면 되겠다” 이렇게 시뮬레이션을 하며 곡을 골랐었다.
전주와 간주, 반복 같은 바리에이션도 다 내가 직접 구상했다.
내가 없는 멜로디를 새로 만들어 낼 능력은 없지만, 그래도 이미 있는 곡들을 최대한 활용하는 스킬은 이때 그럭저럭 발휘됐다.

  • “맑고 밝은 날”은 어린이 찬송 스타일의 분위기 띄우는 짤막하고 명랑 발랄한 첫곡.
  •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은 예수님이 우리의 본보기 예제이다, 우리는 그분을 따르겠다는 가사의 중간 주제곡. <예수 나를 오라 하네>와 후렴 가사가 거의 같다.
    • Where he leads I’ll follow, follow all the way (저거)
    • Where he leads me I’ll follow, I’ll go with him all the way (예수 나를 오라 하네)
  •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는 워십쏭 스타일의 조용하고 우아한 마무리 곡. 특히 조를 올려서 한번 더 반복한다.

지금 다시 보니.. 첫 곡의 마지막 소절 가사 “매일 주님 사랑 따라 말씀대로 살리라”의 원래 영어 가사는 Living each day by the PROMISES in God’s WORD 이다.
그런데 다음 곡 “변찮는 주님의 귀한 약속”은 1절 가사가 Sweet are the PROMISES, kind is the WORD이다.
우와~~! 대박인데? 영어로 불렀으면 똑같이 약속과 말씀이라는 단어가 나오면서 시너지 효과가 더욱 커졌겠다. 이어서 부르기 더욱 적절한 조합이었다.

교회에서 특송이 계속됐으면 나도 이런 것들 연구를 계속하고 더 많은 작품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만..
이게 중단된 지가 벌써 어언 1년 반이 돼 가니 아쉽고 안타깝다.
나야 이 타이밍에 맞춰 청년부 졸업 준비를 하니 그나마 타격이 덜하지만, 20대 시절, 대학 시절의 추억이 집콕과 마스크에 가려져 삭제된 세대는 좀 안습한 처지가 됐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5 08:35 2021/06/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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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침례교

기독교의 여러 교파 중 침례교는..

  • 딱히 종교 개혁에서 유래되지 않았고, 더 옛날부터 있었다고 여겨진다. 천주교는 물론이고 일부 개신교 교파로부터도 박해를 받았다.
  • 이름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세례가 아니라 침례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본다. 온몸이 물에 잠겼다가 나와야 된다.
  • 침례는 이미 구원받은 후의 신앙고백 인증일 뿐이지, 그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거나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 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건 할례나 안수 따위와 아무 상관 없는 관행이고, 대상과 방법이 모두 잘못됐다. 적어도 10대 정도의 나이가 됐고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하고 내 믿음을 자기 말로 고백할 능력이 돼야만 침례를 준다.

* 개인의 혼의 자유의지를 매우 존중하며 단호한 정교분리를 주장한다. 미국이 민간에서의 강한 기독교 배경에도 불구하고 독일처럼 국교가 있고 목사가 공무원인 나라가 되지 않은 것에는 침례교인들이 매우 큰 기여를 했다!
미국의 건국 모델은 후대에 세워진 세계 다른 나라들과 정부에도 선한 모범 참고 사례가 되었다.

* 침례를 받을 자격이 안 되는 너무 어린 아이,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는 아기 등은 죽으면 그냥 바로 천국으로 간다. 유아세례를 받았건 말건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다! 내가 이 개념에다가 개인적으로 붙인 명칭은 ‘특례 구원’이다. 이런 애들은 죄에 대한 책임이 부과되지 않는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은 자기 죄 가운데 죽었다면 지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낙태돼서 죽은 애들, 영 유아 때 병에 걸리거나 굶어 죽은 애들, 그리고 특별히 올해 초에 전국민에게 큰 슬픔과 분노를 안겼던 학대 피해자인 정인이 같은 애는 절대로 지옥에 가지 않는다.

사실, 천국에 가 보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은 사람보다, 저런 특례구원으로 온 사람이 인류 역사상 더 많을 거라는 게 내 추측이다.
(예수님 탄생 당시에 헤롯 왕에게 학살당한 2살 이하 동갑내기 아기들이 지옥에 가 있을 거라고는 전혀 여겨지지 않는다. 만약 그런 거라면 개독안티들이 이것 갖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온갖 신성모독적인 조롱을 늘어놔도 실드를 칠 수 없을 것이며, 사실 나조차 기독교 안 믿었을 것이다. 아니면 믿더라도 민망해서 혼자만 조용히 믿고 말지, 이렇게 당당하게 교리를 설파하고 불신자와 논쟁할 엄두는 못 냈을 것이다.)

그 대신 이렇게 어리고, 특례 구원 실드가 있는 애들에 대해서는 부모가 반드시 의로 양육해서 특례 실드가 끝난 이후의 일생에 대한 대비를 시켜 줘야 한다. 의로 양육한다는 건 필요한 경우 체벌도 불사한다는 뜻이다. 어머니의 회초리를 무서워할 줄 알아야 나중에 지옥 형벌도 무서워할 줄 알게 된다.

난 침례의 대상과 방법에 대한 의미, 개인의 자유의지와 정교 분리, 아기의 구원 여부에 대해 침례교에서 말하는 것만치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원칙과 체계가 있는 교리를 지금까지 접하지 못했다.
난 그래서 이 교리를 믿고 지지한다. 이 정도 완성도는 되니까 주위에 복음도 전할 수 있고 기독교 관련 글을 쓰고 논쟁도 할 수 있게 됐다.

이 주제에 대해서 본인과 생각이 다른 분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성품과 예정 vs 자유의지에 대해 저것보다도 논리적으로 더 잘 분간하는 교리를 믿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물론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 삼분법(영 혼 몸 구분), 하나님 왕국과 하늘의 왕국 구분(하나님 ≠ 하느님이듯이!), 창 1:1-2 간극, 문자적인 천년왕국과 세대주의 같은 건 침례교 내부에서도 똑같이 가르치지는 않는 교리들이다.

2. 종교 개혁의 유산

옛 종교개혁자들이 후세의 크리스천들에게 남겨준 것,
혹은 원래 있었다가 모종의 이유로 봉인됐던 것을 성경을 통해 재발굴 재조명해 준 것은..

(1) 이신칭의

  • a. 마음의 회개 없는 거짓 구원, 그저 "울 교회 오세요, 그럼 님하에게 이득입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고 잘 삽니다" 거의 종교 영업사원 수준의 easy believism
  • b. 혹은 반대로 아예 행실의 회개와 변화가 없는 건 구원받은 것도 아님. 예수님을 단순 구원자뿐만 아니라 니 행실의 '주권자'로도 반드시 받아들여야 된다 lordship salvation

둘 다 매우 잘못된 극단이다.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b가 자주 저지르는 오류가 뭐냐 하면 꼭 나쁜 행실만 죄인 줄 안다는 것이다. 예수 안 믿은 거 자체부터가 엄청난 죄였고 거기서 돌이키는 게 진짜 구원을 가져다주는 회개인 걸 좀 헷갈린다.

"저는 앞으로 술 담배 끊고 모든 악한 행실을 끊고 예수님처럼 경건하게 살기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니 저를 구원해 주십시오" 영접 기도를 이딴 식으로 해서는 절대로 구원 못 받는다! 절대로~!! 알겠는가?
a야 너무 수준 낮고 더 논할 가치도 없으니 제낀다.

(2) 만인 제사장

  • a. 목사님은 거~룩한 주의 종님임. 목사의 축도를 안 받으면 예배가 끝난 게 아님. 차 살 때, 가게 개업 했을 때는 영험한 목사님 초빙해서 안수 기도라도 좀 받아야 됨.
  • b. 아예 목사 직분 자체가 니골라 당의 잘못된 교리이다. 예배와 친교의 구분이 없다.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설교한다.;; (헐~)

이 역시 둘 다 잘못된 극단이다.
직분과 역할의 차이를 전부 우열 계급 투쟁으로 프레임 씌우고 체제를 전복시키는 거.. 보통 빨갱이들의 수법이다.

(3)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 본문 그 자체
내가 보는 성경은..

  • 헤롯 왕이 지목한 베드로 처형 시점이 유월절이 아니라 이스터라고 돼 있고(행 12:4),
  • 루시퍼와 갈보리라는 명칭이 있으며,
  • 계시록에 증인이 아니라 순교자라는 단어가 존재한다.
  •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피', '지옥' 이런 단어가 여타 성경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
  • '이사야+말라기 = 대언자들'이지.. 이거 무슨 1+1=1도 아니고, 말라기의 예언까지 이사야라고 몽땅 퉁치는 오류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막 1:1-3)

뭐 등등..
에라스무스로부터 시작해서 루터는 바른 본문에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했고, 칼빈은 제네바에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이 나올 수 있게 해 줬다.

(4) 그 밖에 루터는 너무 엄근진스럽거나 몽환적이기만 하던 교회 음악도 진입장벽을 낮추려 애썼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2/19 08:36 2021/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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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린이날 특집

올해 5월은 참 공교롭게도 어린이날과 석가탄신일이 모두 주일과 겹쳤다. 어린이날은 대체 공휴일이라도 있었지만 후자는 그렇지 않으니 "부처님, 실망이에요"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ㅡ,.ㅡ;;

그래서 본인은 지난 5월 5일엔 이에 맞춰서 회중 찬송곡을 골랐다.
가사에 "어린아이 같은/처럼" 비유가 들어있는 것, 명랑한 분위기에 화자의 관점이 동심인 것들을 주로 골랐다.

오전에는 "예수께로 가면"(If I come to Jesus), "주와 같이 길 가는 것"(2절 어린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이 우선 선택됐다.
그 밖에 "나 주의 믿음 갖고"도 평소라면 오후에나 불렀을 곡이지만 이번에는 오전에 선택했다.

오후에는 "어린아이처럼 오라 하시네"(다시 살리라)를 골랐으며,
회중 찬송보다는 특송용에 더 가깝다만 실험적으로 "나는 비록 미약하나"(I may not be all that you are)를 불러 봤다.

한국어 가사는 "주는 나의 목자이시니" 이러면서 굉장히 점잖게 번역됐지만, 원래의 영어 가사는 "내가 겉으로는 보잘것없어도 난 주님의 자녀이다. 날 놀리거나 무시하거나 뒷담화 하지 마셈~"(Don't tease me or mistreat me. Don't abuse me. You can even talk about me but I'm still His child)..
보기보다 굉장히 애같은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이다.

어린이 찬송 "나는 진군하는 보병이나 ... 나는 주님의 군병"와 비슷한 구성이긴 한데, 레알 어린이 찬송을 고르는 것과는 양상이 약간 다르다. 진짜 어린이용 동화냐 성인용 동화냐의 차이와 비슷하다.
성경에서 어린아이 심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 건 복음서의 묘사가 아주 유명하고, (마 18:3-5 등)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사랑장이 잘 알려져 있다. (고전 13:11) 심지어 사탄의 인형 3 영화에서도 군사학교에 입학한 앤디한테 교장이 저 구절을 인용했을 정도이다.

그 밖에도..

  • 새해에 "아침 해가 돋을 때 만물 신선하여라"
  • 석가탄신일과 겹쳤던 주일엔 "나는 인생의 산과 들 방황하며"
  • 야유회? 수련회?를 가서는 좀 더 자연을 묘사하고 있는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 교회 대청소를 앞두고는 가사에 "힘써 일하세"가 있는 열심과 헌신 카테고리의 곡
  • 간증 집회 전에는 "지금까지 지내 온 것", "날 구원하신 것 감사"..
  • 세월호 참사 때는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작사자도 가족을 선박 사고로 잃고서 이 가사를 지었음)
  • 현충일, 광복절, 6·25 같은 이벤트와 가까울 때는 "어느 민족 누구게나"

요런 매뉴얼이 구축되어 있다.
본인은 전문적인 연주자나 작곡자가 아니지만, 이미 있는 곡을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골라 내는 것만으로도 맡은 직분에 대한 자긍심을 느낀다. 이런 고정된 이벤트 말고도 그 날 주보에 기재된 성경 암송 구절이나 읽어보세요 묵상 내용과 관계가 있는 곡을 발굴해 낸 적도 있었다.

2. 특송

교회 예배 때 온 회중이 즉석에서 제창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게 게임의 초당 수십 프레임 급 실시간 렌더링이라면,
한 곡을 집중적으로 연습해서 부르는 찬양대 '특송/합창'은 1프레임 당 긴 시간이 걸리는 영화 CG의 오프라인 렌더링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다. 서로 영역이 다르다.

특송을 부를 때는 회중 찬송 수준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화음 성부, 돌림노래 같은 것을 모두 반영해서 더 공을 들여서 찬송을 부를 수 있다.
교회에 비치된 찬송가에는 없는 곡을 준비해서 부를 수도 있으며, 책에 있더라도 단선악보뿐이라면 중창/합창용 악보를 따로 구해서 부를 수도 있다.

즉, 특송은 '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다음과 같이 특별한 실험을 시행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특송곡은 다음 중 한 출처를 통해 결정된다.

  • 책에 없는 신곡 도입
  • 책에 있지만 불린 적 없는 신곡 개척
  • 책에 있는 친숙한 곡이지만 부르는 방식을 강화· 개량

전주· 간주까지 다 갖추고 있고 그냥 악보에 있는 대로만 부르면 되는 합창곡이 아니라 단순한 곡이라면 다음과 같은 강화· 개량을 한다.

  • 가사나 박자· 멜로디가 비슷한 관련곡들 메들리 편성
  • 간주 중에 가사와 관련된 성경 구절 낭송 삽입
  • 여건이 되면 피아노 외의 다른 보조 악기 동원 (플루트, 바이올린, 색소폰, 기타..)
  • 단선악보라면 악보를 읽어보고 자체적으로 화음 넣기

그리고 1년에 한 번 정도는 이런 것도 시도한다.

  • 전원 무악보 암송: 그 대신 이때는 다른 음악적인 난이도는 최대한 낮춘다.
  • 반주자도 같이: 반주자에게도 강단에 설 기회를 준다. 다른 임시 반주자를 섭외하거나 아예 무반주 아카펠라를 해서.

청년부 특송 지휘를 몇 년 해 보니 운영 원칙이랄까 매뉴얼이 얼추 이렇게 정리된다.
난 교회 찬양대라고 해서 틀이 박힌 듯이 몽환적인 반주에다 변성기 안 지난 미소년들이 하얀 까운 걸치고 노래 부르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냥 평범한 방법론으로 어떤 찬송가 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최대한 뽕을 뽑는 특송을 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는 한편으로, 듣는 성도들에게는 관련 성경 말씀과 교리를 기억에 각인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면 훌륭한 특송이라고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돈으로도 못 가요, 하나님 나라"처럼 노래를 지어서 교리를 가르치는 건 아주 좋은 방법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9/06/02 08:32 2019/06/0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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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의 왕국 kingdom of heaven
미래에 이 지구상에 물리적으로 문자적으로 실현될 정교일치 통치 체제. 하드웨어.

계시록 20장이 말하는 일명 천년왕국이 이것이다. 창세기 1장의 6일이 문자적인 6일인 것과 동일하게 계시록 20장의 천 년은 다 문자적인 1000년이다.

예수님의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분을 영접했으면 교회 시대 없이 세상 경륜이 곧바로 이렇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음으로써 도래 시기는 교회 시대+대환란+예수님 지상 재림 이후로 미뤄졌다.
구원받고 몸이 변화된 사람들은 이 왕국에서 지배 계층이 되고, 그렇지 않고 대환란 때 단순히 생존만 한 사람들은 여기서 수명만 늘어난 피지배 계층이 된다.

안 그래도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뭐가 이리 죄악이 만연하고 착한 사람들이 못 살고 이렇게 불평하는 사람들이 많다. 신은 당연히 이 세상을 언제까지나 그렇게 방치하지 않는다. 성경의 주제는 왕국이며, 예수님은 공의가 철철 넘치는 세상을 이 땅에 실제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때 피지배 계층은 최상의 환경에서 믿음에다가 마 5-7 산상설교를 지키는 급의 엄청난 행위를 쌓아서 구원받아야 한다. 예수님이 시퍼렇게 물리적으로 철권통치를 하고 있으니 그 존재 자체가 지금 같은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드웨어적인 왕국 하에서는 구원의 조건도 믿음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것뿐만 아니라 하드웨어적인 방법이 가미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된다.

2. 하나님의 왕국 kingdom of God
구원받은 성도의 신분 내지 영적 상태 관점. 소프트웨어.

이것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사람이 영적으로 명목상 소속되는 왕국이다. translate의 용례 중 하나인 골 1:13도 이것을 말하며, '소프트웨어, 영적' 이런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왕국은 마음 상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롬 14:17, 고전 4:20, 고전 15:50).

단, 이 때문에 1과 3 같은 다른 왕국까지도 문자적으로 실존하는 장소가 아니라고 오해를 받기도 한다. (눅 17:21 등)
그리고 예수님의 초림 당시에는 1과 2의 구분이 뚜렷이 계시되지 않았던 관계로, 성경에는 둘이 섞여 쓰인 듯한 용례도 있다. (마 19:23-24)  어차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중 하나라도 없는 컴퓨터는 성립할 수가 없을 테고, 두 왕국 다 통치자는 동일하니까 그 시절의 계시 수준으로는 한데 뭉뚱그려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 이때는 하나님의 왕국이 그 특성상 보편적인 '교회'와 비슷한 용례로 쓰이기도 한다.

다만, '하늘의 왕국'이라는 용어는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등장한다. 그리고 덩치는 커지지만 본질이 변질된다는 식으로(겨자가 나무가 되어 새들이 앉는 것, 부푼 누룩 등.. 긍정적인 얘기 아님.) 부정적인 비유로 등장하는 대상 역시 하나님의 왕국이 아니라 하늘의 왕국이다.

3. 하늘 왕국 heavenly kingdom
성도의 내세 관점. 하이브리드웨어??

저기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죽어서 가는 곳이다. 옛날 용어로는 '천당'이라고도 불렀다. 딤후 4:18에서 딱 한 번 나온다. ('천국'이라고 하면 이거랑 1 kingdom of heaven이 혼동될 여지가 좀 있음.)

이곳은 셋째 하늘(고후 12:2)이요, 지옥의 반의어이다. 왜 셋째냐 하면 지구 대기권의 창공(1 sky)과 그냥 어두컴컴한 우주(2 space/universe)의 다음 계층이기 때문이다. heaven은 한편으로는 세 종류의 하늘들을 모두 포함하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제3계층을 주로 지칭하는 용어인 것이다.

한국어는 sky와 heaven에 대한 구분이 기본적으로 없으며, 사실 영어에서도 너무 구닥다리이고 종교색이 짙은(?) heaven을 기피하는 추세이다. "Imagine there's no heaven.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이런 가사처럼 말이다. 신자들은 그런 건 하늘에 대한 소망을 부정하려는 수작이라고 생각하고 적절히 대처하면 된다.

이곳은 내세의 장소이지만 무작정 '비가시적/영적'이기만 한 게 아니며, 일단 물리적으로도 실존한다고 여겨진다. 지옥이 지구 내부의 실존 장소인 것과 같은 맥락에서다. 지옥이 지구 안의 극단적으로 깊은 곳에 있다면, 저 heaven은 과학에서 말하는 소위 '관측 가능한 우주'의 영역 밖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까마득히 먼 곳에 있는 heaven과, 지구 바로 아래에 있는 hell은 마치 해와 달이 서로 다른 것만큼이나 다르다고 생각하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와 달은 지구에서 언뜻 보기에는 비슷하게 생긴 두 광체이지만 물리적인 특성--크기, 지구에서의 거리, 주성분과 내부 구조..--은 서로 완전히 극과 극으로 다르니 말이다.

종합하자면, 하나님의 왕국에 먼저 소속된 사람이 훗날 하늘 왕국으로도 가는 셈이다. 그러니 이 둘은 지옥-불못만큼이나 서로 연계가 된다. 단지, 하늘의 왕국을 경험하는 건 그 사람이 먼저 죽느냐, 아니면 죽음을 경험하지 않느냐에 따라 순서가 달라진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에 관심을 두고 이를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매우 정치적인 책이다. 이것에 비해서 겨우 인류의 구원(?)은 사전 준비 작업에 가까우며 너무 원초적이고 지엽적인 주제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실질적인 의미를 혼동한 나머지 세상 정부 자체를 싹 거부하고 집총까지 거부하고 있다. 반대로 성경에 쓰여 있는 문자적인 왕국을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반대편 극단도 있다.

하나님의 경륜에서 교회의 등장은 예전에 구분할 필요가 없던 여러 개념들을 세분화시키면서 성경 해석을 꽤 다채롭게 만들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라는 일체형 기계 하나만 생각하면 되던 것이 나중에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구분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과정에서 유대인과 교회를 제대로 구분 못 한 이상한 이단들도 많이 생겨 있다.

사실, 이 두 그룹은 설령 지옥에 가지 않고 똑같이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해피엔딩을 맞이하여 영원을 보내는 장소조차도 서로 다르다(새 하늘과 새 땅 vs 새 예루살렘).
왜 new라는 수식어가 붙었는가 하면, 저건 현재 있는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땅과 각종 물질들이 미래에 싹 다 불로 심판받고 멸망한 뒤에 다시 창조되어 등장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베드로후서 3장을 참고할 것. '물의 넘침으로 멸망' 문맥이 겨우 노아의 홍수라고 생각해서는 저런 개념을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새 하늘은 기존 셋째 하늘과 통합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heaven에 계층 구분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음으로 계시록 21장~22장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거듭해서 신랑 신부에다 비유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구원받은 교회 성도들을 위해 아주 특별히 만들어진 삐까번쩍한 도시이다. 단순한 자연 환경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능가하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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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y, z축이 모두 12000 스타디온이라고 구체적인 크기까지 나와 있는데, 이는 오늘날의 단위로 환산하면 2200~2300km 정도 된다. 이 정도면 명왕성과 비스무리한 크기이다. (지구의 지름은 약 12700km) 단, 새 예루살렘은 여느 천체와는 달리 구가 아니라 정육면체 또는 사각뿔 형태이며, 사람들은 겉의 표면에서 사는 게 아니라 속을 꽉꽉 채우며 살게 된다. 중력에 대한 개념이 우리가 아는 통상적인 자연계와는 다르다.

이 크기의 공간에 역대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이 들어가서 사는 게 가능할까? 마치 방주의 크기와 비슷한 떡밥이다(동물들이 몽땅 들어가는 게 가능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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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8/08/12 08:35 2018/08/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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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신이 보낸 사람>

난 아시다시피 개인 엔터테인먼트 분야가 철도에게 완전히 점령당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연예, 스포츠, 드라마, 영화 같은 건 거의 관심 없으며 안 보고 지낸다.
그 흥행 대박이라는 겨울왕국조차도 안 봤다. 난 솔직히 월트 디즈니 스타일을 싫어하는 사람도 아니고 여유가 아주 많으면 저것도 보기 싶긴 한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엔 꼭 봐야 하는 영화를 발견했다. 그래서 불금 시간을 쪼개서 야밤에 혼자 차까지 몰고 영화관 갔다.
내가 본 영화는 바로 이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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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는 영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영화를 깔끔한 상태에서 편견 없이 직접 감상하고 싶으신 분은 이 글을 읽지 말 것.

- 탈북자로부터 코치를 받았는지, "-했지비", "-하라우" 글로만 봤던 이런 북한 사투리를 실제로 들을 수 있다.
- 김 일성· 김 정일 사진이 벽에 걸린 집 책상 위에 놓인 성경책... 정말 살떨린다.
- 북한 주민의 실상이라 하면 마약도 빠질 수가 없을 텐데, 역시 그것까지 놓치지 않고 화면에 담았다. 훌륭하다.

1. '카타콤'이 고대 로마 제국 시절에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지금 바로 이북 윗동네에 있다. 물론, 나처럼 이미 북한 사정에 대해서 어지간한 거 다 찾아보고 이미 아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 영화에서 크리스천은 한결같이 광신자, 위선자, 나약한 찌질이로만 묘사되고 그나마 좋게 나오는 건 죄다 천주교 쪽뿐인데, 미화는 바라지도 않고 최소한 중립적으로 묘사된 영화가 있어서 보기에 심리적으로 편했다.

2. 영화에서 지하 교회 신도들이 "나 예수쟁이요"라고 자기 명을 재촉하면서 티내는 방법은 물고기나 십자가 형상 같은 게 아니라 오로지 찬송가 흥얼거림과 성구 암송이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얼마나 큰일을 냈는지가 영화 중에 나온다.

남조선에서 자유롭게 교회 다니고 계신 분들은, 앞으로 주일 예배 때 기쁜 마음으로 자기 최고의 성량과 음감을 동원해서 예배당이 떠나갈 정도로 씩씩하게 회중 찬송에 동참하시기 바란다. 이건 설교 만만찮게 예배에서 매우 중요한 절차이며, 저쪽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목숨 걸고 하고 있다.

3. (스포일러) 극중에 기적은 없었다.
주인공은 너무 확신에 차서 내 손으로 우리 주민들을 다 탈출시키겠다고 그랬지만.. 때마침 김 정일이 죽으면서 국경의 경계가 매우 강화되고, 뇌물이 안 통하는 냉혈한 군 간부가 부임한다. 주민들의 신뢰와 팀웍도 와해되고 지하교회는 일망타진되어 주민들은 하나씩 잡혀 가고 죽는다. 그리고 주인공도 총살당하고, 마지막에 살아남는 교회 멤버는 어느 꼬마 소녀 한 명뿐이다.

4. 사실, 주인공은 분명 지하 교회에 소속돼 있고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긴 하지만, 그래도 아내만치 독실하지는 않고 마음 상태가 종종 동요도 하는 일종의 입체적인 인물이다. 주연 배우인 김 인권 씨가 대본을 보고는 “난 저런 주인공을 연기하기엔 너무 신앙이 부족하다”라고 말했다곤 하지만, 주인공이 그렇게까지 초인적인 인물은 아니다.

마약도 하고, 또 모든 게 끝장 난 결말부에서는 “아.. 혹시나 했지만 역시 신은 우리를 돌봐주지 않았다. / 아예 믿지 말자는 것도 아니고, 딱 한 번만 시치미 떼고 예수 부인하면 살 수도 있었는데 왜 내 아내는 저런 고지식한 길을 고집했을까?” 같은 인간적인 심정의 말도 한다.
기독교 신앙보다는 그냥 아내의 죽음에 감명을 받아서 마을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든 탈북시켜야겠다는 인도주의적인 신념이 더 부각되어 그려진다.

5. 설정상 주인공의 출신과 배경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혼자 저렇게 트럭을 몰래 얻어타고 평양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건 현실에서는 그리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
평양 교회에 도움을 받으러 원정 가 봤는데, 거기는 알다시피 북한 정권의 하수인인 어용교회일 뿐임. “우리나라에 종교 박해 같은 건 없다” 대외적으로 이 개드립을 치던 아저씨는 잠시 후 주인공에게 분노의 린치를 당해서 피떡이 된다. 저 사람은 주인공과 원래 아는 사이였는데 뭔 일을 겪으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변절한 듯.

6. 교회 동지 중 어떤 남자 하나는 도강하다가 들켜서 군인으로부터 무참한 구타와 성희롱을 당하는데.. 그 뒤 완전히 멘붕하여 미치광이로 변한다. 몰래 숨겨 둔 예수 얼굴 그림에다 눈 모양만 뚫어서 가면을 만들어 쓰고, 집 지붕 위에 올라가서 남들 보는 앞에서 헬렐레 하다가 갑자기 분신 자살한다.
이것은 극적 효과를 내기 위해 탈북자의 증언과도 관계 없이 집어넣은 창작이고 허구인 듯하다.

7.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중엔 북한에서 찍혔다는 각종 탈북자 심문· 구타 동영상과 북한 지하 교회 녹취 동영상, 육성 녹음이 흘러나온다. 이것도 지금 내가 목숨이 붙어 있는지 내 목을 손으로 만져보게 될 정도로 소름 끼치고 엄청나게 섬뜩하다.

참고용 동영상이다. 2분 40초대 이후부터..
“아버지여! 교회가 다 무너졌습니다. 살얼음 같은 이 땅에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순교가 발생했는지요! ...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를 보내 주옵소서” (문장 보정)

북한의 지하 교회는 가장 연약하면서도, 북한의 저 미친 체제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악질 반동분자들의 모임이다! (아래 그림 중 하나는 조선 혁명 박물관과 만수대 언덕 근처에 있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김씨 부자 동상이고, 다른 하나는 금수산 기념 궁전 내부의 은은한 배경으로 새겨져 있는 부자 석상임.)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8. (쓴소리) 끝으로, 내가 이런 자리에서 또 험악한 말은 가능한 한 하고 싶지 않다만...
여기에까지 신천지 갖다붙이는 애들은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하다. 지난번 대선 시즌 때 새누리당이 신천지하고 커넥션 있다고 괴담 퍼뜨린 놈들하고 혹시 같은 배후 아닌가?

그래, 만에 하나 신천지와 커넥션이 있다고 치자. 그래도 신천지가 과연 종북 빨갱이보다 더 사악하고 해로운 인간들일까 싶다. 신천지는 교회에나 해를 끼치지만 쟤들은 아예 나라 전체를 무너뜨리고 좀먹는 놈들인데. ㅡ,.ㅡ;;

Posted by 사무엘

2014/02/21 08:32 2014/02/21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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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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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자가진단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크게 작용한 요인들
  • 세상 그 어느 종교도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가르치지 않으며, 교주가 부활했다고 가르치지 않고, 또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방대한 증거와 증인들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 인간이 자기 노력과 근성으로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찾아주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다고 가르치므로
  • 없어졌으면 애시당초 진작에 씨가 말라 버렸을 정도로 황당하고 믿어지지 않는 교리를 갖고 있는데, 아직까지 당당히 존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최소한 무시할 수는 없고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으므로
  • 이 정도로 무수히 많은 이단들이 압도적으로 집착할 정도이면, 웬지 이 바닥에 분명 진리가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
  • 성경은 그 논조와 내용을 볼 때 인간이 쓸 만한 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들어서 (가령, 정치적으로 치우침이 없음. 인간 자신에게 절대 이롭지 않은 내용이 지나치게 장황하게-_- 많이 들어있음)
  • 그래도 몇몇 증명 불가능하고 이해가 안 되는 사항들만 일단 믿고 나면, 이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각종 교리와 윤리관은 아주 논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인간에게 건전하다는 게 너무 분명하게 확 느껴져서
  • 죄 문제라는 인간에 대한 상태 진단과, 그 해결책에 너무나 공감이 가서. 최소한 줘도 못 먹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지?
  •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라는 절대적인 의의 기준이 온갖 상대주의· 다원주의보다는 훨씬 더 명확하고 깔끔하고 건전하고 뒤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다 사회 구조 탓이다, 그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다 등등)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참고할 것.

※ 나는 왜 예수님을 믿는가 -- 조금 작용한 요인들

  • 개독안티들의 무례하고 표독스러운 말투에, 사실 여부를 떠나 괜히 반발심과 환멸을 느껴서 (다른 건 몰라도 저놈들 말은 절대로 듣지 말아야겠다는 식)
  •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과오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수가 기독교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사실은 크리스천들도 오히려 피해자라는 걸 알게 되어서
  •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수준의 간단한 변증론. 가령,
    “지금 예수 믿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없는 게, 지금 안 믿었는데 진짜로 지옥이 있어서 낭패 보는 것보다 더 안전하고 리스크가 적다.”
    “신이 없다고 단정짓기엔 인간의 지식은 너무 좁고 빈약하다” 같은 식.
  • 내세와 심판이 있을 거라는 양심의 자극. 죽음에 대한 두려움
  • 성경이 과학적으로도 옳다는 걸 뒷받침하는 몇몇 자료들
  • 이 정도 교리면, 정말 만에 하나 성경의 내용이 다 거짓이고 허구이고 설령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다 해도, 크게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되어서. 성경은 최소한 날 골탕먹이려고가 아니라 날 '위해서' 기록된 책이라는 느낌이 와서

※ 내 신앙관에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은 것들

  • 좋든  싫든, 주변 교회 사람들의 행동과 평판
  • 잘한 것이든 못한 것이든, 해당 종교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언행 (그 사람들이랑 나랑 도대체 무슨 상관이냐? 나는 베르테르 효과 같은 것과는 담을 쌓고 지냄)
  • 세상 불신자들로부터의 평판, 매스미디어에 묘사된 이미지
  • 육신을 들뜨게 하거나 흥분시키거나 만족시키는 종교심. 나는 그런 부류의 종교심은 이미 철도교로 다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종교에다 내 영원을 걸지는 않는다.
  • 기복신앙

하지만 현실에서는 저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나가거나 종교를 선택하는 사람들이 무진장 많다. ㅜㅜ

※ 지금은 발현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 깊은 시험에 들고 신앙 면역 체계가 무너졌을 때 큰 위험이 될 수 있는 잠재적인 암적 요소들

  • 성경에서 여전히 잘 이해되지 않고 해결이 안 된 의문이나 논리적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 몇 군데. 목사님에게 여쭈거나 주석서를 봐도 알 수 없는 것들
  • 성경이 밥 먹여 주냐... 같은 부류의 유치하지만, 좁은 길을 가는 성도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시험. 현실의 염려 (눅 8:14)
  • 신앙생활이 매너리즘으로 변질돼 가는 것
  • 하나님의 뜻을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안 하면 도대체 뭘 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들이닥치는 것

Posted by 사무엘

2012/05/21 19:28 2012/05/21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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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영성 등급

A.
부모가 모두 한 교회를 안정되게 오래 다닌 타입. 아버지가 아예 목사이거나 어느 직분 하나는 맡고 있다. (단, 교회 일에 몰두하느라 가정 내팽개치는 타입이 절대 아님) 부모가 가정 예배를 꼬박꼬박 챙기고 자녀에게 기도하고 성경 읽는 모습을 늘 보여 준다. 요컨대 가정 전체가 한 교회에 안정되게 출석하고 있고, 가장이 식사 기도 같은 사소한 것까지 포함해서 가정의 영적 건강을 잘 책임지는 중이라면, 그 가정의 영성 등급은 A이다. 집에서도 출석 교회에서와 동일한 분위기로 가족과 함께 거리낌없이 찬송, 기도, 성경 읽기가 가능하고 부모에게서 신앙 상담을 받을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나라에 A등급 가정은 정말 드물다.

그런데 이런 가정에서는 부모보다도, 저런 걸 당연하게 보면서 커 온 자녀들이 이 신앙이 값지고 귀한 줄 모르고 오히려 별 관심이 없는 경우가 있다. 혹은 교회와 가정에서 부모가 보이는 모순-_-된 모습이라든가 교회 사람들의 위선 때문에 상처를 받고 자녀가 믿음을 잃기도 한다. A라는 환경 여건이 무조건적으로 자녀에게 좋게 작용만 하는 건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B.
개인적인 교회 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 가족 중 일부가 불신자이거나 혹은 교회 출석을 중단할 정도로 신앙이 식음. 어쨌든 가정에서 뭔가 영적인 결정을 내리려 할 때 딴지를 걸 사람이 가족 중에 존재
- 교리 차이 내지 어른들의 사정으로 인해 부모가 서로 다른 교회에 다님
- 혹은, 부모가 한 교회에는 다니고 있지만 구원 받았는지도 모르는 단순 church goer이고, 평상시의 언행도 불신자와 별 차이가 없기 때문에 자녀에게 영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함

이런 정도라면 B등급이다. 이렇게만 돼도 부모의 믿음이 자녀에게로 그대로 전수되기는 굉장히 어려워진다. 자녀가 알아서 자기 신앙에 대해서 공부하고 각성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C.
가족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자녀 한둘밖에 없는 한편으로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방관자이거나,
- "그래, 심성 수련을 위해 종교 하나 갖는 거 나쁘지는 않지. 다만, 너무 중독되고 빠지지는 마라."
- "예수쟁이 돼서 뭐 하냐?" (살짝 시니컬)
중의 한 반응이지만...
최소한 적극적으로 교회 가는 걸 막고 박해하지는 않는 경우이다.

아래의 D보다는 여건이 낫지만, 그래도 교회만 빠져나오면 맨날 집에서 불신자와(영적으로 아무 도움을 주지 않는) 부대껴야 하기 때문에 영적으로 지치기 쉽다. 가족 구원을 위한 기도가 절실해진다.

D.
가족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자녀 하나밖에 없고 그 자녀가 그것 때문에 가족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조롱과 박해를 받으며, 교회 출석 중단을 요구받고 있는 상태. 부모 몰래 교회를 가거나, 교회에서의 내 행적을 부모에게 떳떳하게 말도 꺼낼 수 없다. 이런 D급 가정에 소속된 구원받은 사람은 가정 여건 때문에 안정된 교회 출석이나 장시간 교제, 교회 직분 수행이 곤란하다.

나머지 가족은 무신론자 기독 안티일 수도 있고, 천주교나 불교나 심지어 이슬람 같은 타 종교 골수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KJV를 싫어하는 기성교회 소속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게 차라리 깔끔한 무교보다 더 무서운 경우도 있다.
A가 드문 것만큼이나 D만치 독한 가정도 흔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런 D급 가정에서 정말 독실하게 신앙 생활을 처절하게 열심히 하는 형제 자매도 있다. D급 가정을 혼자 힘으로 선한 간증을 남겨서 C를 거쳐 B나 A로 바꿔 놓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영적 전투에서 가히 최고의 승리를 거둔 사례라 하겠다.

참고로, 본인은 B급 가정 출신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28 13:44 2010/08/28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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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회복>

※ 요약
 
1월 17일 오전 예배 때 우리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소개 받은 독립영화 <회복>(김종철 감독)을 그 날 저녁에 청년부 명의로 단체 관람을 했다. (뭐 그래 봤자 본인 포함해 총 5인이었지만..)
 
정말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은 내용이었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런 기독교 컨텐츠가 외국물 번역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말 믿어지지 않으며 대단하고 자랑스럽다.
일제 강점기 교회 수난사라든가 북한/조선족 지하 교회 이야기처럼 민족주의 정서(?)가 전혀 없이도 이렇게 감명 깊은 영상물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이스라엘의 문자적 회복을 믿고 예수님의 전천년 재림을 사모하는 바이블 빌리버라면 누구라도 볼 가치가 있음을 본인의 이름을 걸고 추천하는 바이다.
 
이 정도의 감격은, 본인이 KJV 초창기에 읽은 바 있는 <에큐메니즘의 이상과 우상>(구영재 저) 이래로 처음인 것 같다. 이것도 번역서가 아닌 국내 저서라는 게 믿기 어려운 수준인 책인데, 그 책이 다루는 분야는 유럽의 종교 역사 내지 국제 정세인 반면, 저 영화는 이스라엘이라는 점이 차이이다.
 
※ 첫인상
 
목사님께서 처음에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셨을 때 본인은,
뭐 또 할리우드에서 쉰들러리스트라든가 아니면 비슷한 급의 시사/다큐멘터리 영화가 나왔나.. 유대인 관련 음모론은 다루나.. 그 정도로 짐작만 했을 뿐, 정보가 없었다.
 
제목이 '회복'이라고 하기에, 주찬양 선교단 극렬 매니아인 본인의 머리에 바로 뜨는 인덱싱 결과는, 그저 10집 앨범 <회복>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고, 이 <회복>은 놀랍게도 국내에서 제작된 독립영화이다. 감독은 수십 회의 이스라엘 방문 경력을 지닌 이스라엘 전문가였다.
관람하는 사람들은 거의가 크리스천들이고 교회에서 추천을 받아서 보거나 아니면 아예 단체 관람을 하는 경우였다.
할리우드 영화를 볼 때면 영화 상영 전에 거의 10~15분은 온갖 광고들이 나오는데 역시 독립 영화이다 보니 그런 게 전혀 없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본인은 예전엔 영화관의 내부 모습이 철도역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항과 더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영화 상영 도중에 일부 사람들이 나가거나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것(정차역). 들어갈 때 사람이 표를 검사한다는 것, 처음에 비상시 대처 요령이 방송된다는 것 등이 공항 내지 비행기 여행과 매우 비슷하다. ^^ 역시 경험이 안목을 키우는 것 같다.
 
※ 영화 내용
 
예수님을 믿는 어느 유대인 가정이 괴한으로부터 폭탄 테러를 당하는 얘기를 소개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런 짓은 90% 이상 이스라엘을 싫어하는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치부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그렇지 않았다.
폭발 현장을 분석한 결과 이것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군대를 전역한 사람의 소행으로 판명된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사방이 적국으로 둘러싸여 있다. 여자까지 군대로 징집해야 할 정도로 국방이 위태롭다.
그런데 서로 그렇게도 사이가 나쁜 이스라엘과 인근 팔레스타인 국가들은 그래도 일말의 공통분모를 공유하는 게 있다. 바로 예수님을 안 믿으며, 기독교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진정한 우군인 크리스천들에 대해서 온갖 나쁜 감정을 갖고 있고 오히려 적군과 그런 사이라니!
마치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원수였다가 예수님으로 인해 친구가 되었듯이(눅 23:12), 이들 사이의 불의한 동맹은 적그리스도에게 낚여서 그를 메시야로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대다수의 불신자들이 천주교와 기독교를 분간할 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천주교니 개신교 나부랭이 따위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저 구교 신교 할 것 없이 자신들을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정죄하고 괴롭히고, 십자가 내밀면서 못살게 군 코쟁이 원수일 뿐이다. 까놓고 말해 그들은 히틀러도 기독교의 교리대로 유대인들을 학살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기독교 얼마나 싫어하겠는가?
 
이스라엘 내부에서 정통 유대교는 국교로 강제된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렇게 메시야를 기다리면서 정통 율법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들 중 일부가 그렇다는 거지, 이스라엘 내부에도 무신론자, 불가지론자, 자유주의자 등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나라 법에 의해서 박해 내지 벌을 받는 건 아니다. 단지 왕따가 되고 그런 유대교 신봉자들로부터 사회적 배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배척하는 짓이 너무 오버이다 싶으면 이스라엘 경찰이 출동해서 제지도 하긴 하지만.. 그들도 이런 일에서는 좀 손 떼고 싶어한다.
 
배척을 어느 정도 받는가 하면, 마을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 얼굴을 사진 찍어 간 후 전단지를 마을에다 뿌린다. 이 사람은 요주의 인물이고 '당신들을 설득하여 거의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불순분자이니 조심하라는 내용으로 말이다. 그리고 크리스천의 집 앞에서 농성도 하고,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을 숭배하는 우상 숭배자", "당신네 종교 때문에 히틀러는 지금도 외롭지 않을 거다" 같은 폭언 악담도 한다.
심지어는 교회 앞에서 죽치고 앉아 농성을 하거나 예배 진행을 못 하게 난동을 부리고, 예배당을 드나드는 사람에게 위압감을 주려고 1인 시위, 침묵 시위 별 걸 다 하더라. 그 중에 엄청 과격한 사람들은 아까처럼 폭탄 배달까지..
 
사람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하는 종교 하나에 심취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느꼈다.
새까만 정장과 모자에 긴 턱수염을 한 랍비 아저씨가 평소에는 그래도 일말의 멋이 있어 보였는데.. 저러는 모습을 보니까 싸이코처럼 보였다. -_-;;
유대교 회당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는데, 거기는 오히려 천주교 성당과 분위기가 비슷해 보였다. 기도문 암송하고, 남녀 할 것 없이 머리에 면사포 뒤집어쓰고..
 
그들은 진짜로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냥 2천 년 전에 죽은 사람 내지, 기존 유대교 체계에 반발하여 새로운 종교를 만든 이단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자기네 나름대로 메시야의 조건을 규정해 놓고 있는데, 지금까지 몇몇 랍비는 그 조건 중의 일부만을 충족한 경우가 있으나 완전한 메시야는 아직 안 왔다는 식이다.
신약 성경도 내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았다. 유대인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도구는 구약 성경뿐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독교와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유대교 환경에서, 그것도 2, 30년 전만 해도 전국에서 정말 몇백 명에 불과하던 "메시야닉 쥬" -- 예수님을 영접한 유대인 -- 가 지금은 1만 4천여 명 수준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로마서 11장 내용이 진짜 자기네 이야기라는 것을 아는 유대인의 인터뷰를 보게 될 줄이야! 이런 사람들의 영향으로 대환란 때 14만 4천 명의 유대인 환란 성도가 준비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은 길거리에서 전도지 나눠 주고, 도로변에 현수막을 펼치면서 정말 과감하게 복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방해도 많이 받았다. 예수님의 승천 후, 복음은 지금까지 세계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온 거라 한다.
유럽은 이제 교회에 노인들밖에 안 남았고 오히려 아시아에서 역선교를 해 온다. 동방의 예루살렘이라던 한국도 100년 전의 평양 대부흥은 이제 안드로메다로 갔고, 크리스천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는 중에 정작 예수님을 배척했던 이스라엘이 꿈틀꿈틀 각성 중이다. 정말 이제 이방인 경륜은 끝이 얼마 안 남았다!
 
유대인의 실족과 실패만으로도 이방인들에게 얼마나 큰 유익을 끼쳤는데, 하물며 이들이 나서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분으로부터 받은 복을 세상으로 나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밝아지고 그들은 일등 선민 노릇을 하게 될까? (롬 11:12)
메시야닉 쥬들은.. 자기 동족이 지금까지 이방인들로부터 당한 설움을 이제 자기들한테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을 미워하지 않으며 동족을 위해 기도한다. 그들은 자기를 박해하는 게 신명기 13장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는 신명기 13장이 아니라 신명기 18:15가 적용된다는 걸 증명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역시 유대인들은 지금도 표적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 민족인가 보다. 예수님을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꿈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체험으로 표적을 보고 곧장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사람들의 인터뷰가 영화 중에 줄을 잇는다. 영화 앞부분에서 폭탄 테러를 당한 그 사람도 정말 기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
물론 이들이 다 바르게 믿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영화에서 언급되지는 않지만,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는데 아직 교리적으로 정확하게 알지 못해서 여전히 사도행전 15장처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님을 배출하였으나 수천 년을 예수님 없이 지내 온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새로운 흐름!
모세오경을 골수로 암기하면서 자란 그들이 스스로 홍해가 갈라진 기적이나 여리고 성이 무너진 기적보다 더 대단한 일이라고 평가한다.
유대인의 덕을 본 이방인 중 하나로서, 본인에게 큰 도전과 유익이 되는 다큐멘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국민 대다수가 영어 무진장 잘 한다는 건 엄청 부러웠다. 예수님이 어떻게 하나님이냐 하는 말싸움까지 유창한 영어로... =_=;;
영화 중에는 예루살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데, 원래 오리지널 구절은 이렇다.

예루살렘의 화평을 위하여 기도하라. 너를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시 122:6)

이상 이것으로 리뷰를 마치고자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20 09:44 2010/01/20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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