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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indows 부팅

Windows 8 내지 10부터던가.. 요즘 Windows에서는 예전까지 오랫동안 쓰이던 통상적인 부팅 전 F8 메뉴가 사라졌다. 하긴, 메뉴가 여럿 있긴 했지만 고르는 건 안전 모드(F5) 또는 네트워크 되는 안전 모드 둘 중 하나밖에 없긴 했다.
그 대신, 부팅 후에 컴을 팩토리 리셋 초기화시키는 메뉴가 곧장 들어간 것은 일단 꽤 유용하며, F8을 눌러야 할 필요를 이걸로 상당수 대체하긴 했다.

하지만 뭐가 꼬여서 애초에 부팅이 안 되고 있을 때는 이 기능에 접근할 수 없어서 더 불편해졌다. 부팅 전의 OS 재설치 및 복구 UI는 사용자가 특정 글쇠를 눌렀을 때 바로 뜨는 게 아니라, 수차례 컴퓨터를 혹사시키면서 부팅이 실패한 것을 얘들이 인지했을 때에 그제서야 슬그머니 띄워 준다. 로직을 왜 이런 식으로 만들었나 모르겠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본인은 업데이트를 받은 뒤에 운영체제가 꼬이고 커널 패닉 뜨는 걸 몇 번 겪은 뒤부터는 진절머리가 나서 업데이트 받는 걸 레지스트리까지 조작해서 강제로 끊어 버렸다. 지금 네트워크는 유료 종량제이니 니 멋대로 함부로 업데이트 받아서 설치하지 말라고 말이다.

CPU와 메모리와 네트웍 트래픽 잡아먹고 하드디스크 용량 잡아먹고, 컴퓨터를 꺼야 할 때 바로 곧이곧대로 꺼지질 않고.. 민폐가 너무 심한 데다, 그런 민폐가 시도 때도 없이 너무 자주 발생하고.. 설치 후에도 뭐가 크게 달라지고 좋아지기는커녕 저런 부작용만 있으니 이 상황에서 누가 업데이트 꼬박꼬박 받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그거 안 하고도 내 컴은 악성 코드고 뭐고 지금까지 보안 문제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러다가 업데이트에 대해서조차도 현대 서양 의학 불신, 백신 불신 같은 이상한 풍조가 생기지는 않으려나 모르겠다만.. 브라우저를 선택할 권리 운운하면서 웹 표준 외치는 것만큼이나, 필요하지 않은 업데이트를 안 받거나 원하는 타이밍에만 받을 권리도 좀 보장됐으면 좋겠다.

2. 바이오스

뭐, 이건 운영체제 얘기였고 그 전에 롬에 탑재된 컴퓨터 고유의 소프트웨어 계층을 일명 BIOS라고 부른다. 이것도 2010년대에 와서는 UEFI라는 새로운 규격으로 바뀌었다.
운영체제 부팅 전에 BIOS 셋업(CMOS 셋업이라고도 불렀던 듯..)을 들어가려면 ESC, F2, F10, Del 이런 글쇠를 죽어라고 누르곤 했는데, 이 글쇠도 좀 Ctrl+Alt+Del 재부팅처럼 통일이 됐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바이오스는 어차피 만드는 업체도 피닉스나 아메리칸 메가트렌드 요렇게 아주 소수이지 않던가?

살면서 BIOS setup으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은 몇 년에 한 번꼴로 운영체제 변경· 재설치를 위해 부팅 매체 선택 순서를 변경할 때.. 혹은 하이퍼-V 가상화 같은 옵션을 켜고 끌 때 정도이지 싶다. 살다가 병원이나 법원, 경찰서, 주민센터 같은 델 들르는 빈도와 비슷한 격이다.

옛날에는 컴퓨터를 켠 직후에 숫자가 쫘르륵 올라가면서 주 메모리 테스트를 하는 게 관행이었는데 그 광경도 참 오래 전에 사라졌다. 램의 용량이 수백 MB 수준으로 넘어간 시기, 대략 21세기 초쯤부터 없어진 것 같다. 글쎄, 카운트만 안 보여줄 뿐, 내부적으로 여전히 테스트는 하는 걸 수도 있음.

그리고 요즘 컴퓨터는 바이오스 셋업 화면도 텍스트가 아닌 그래픽 모드로 바뀌었고 마우스가 지원된다. 저기는 한글화의 영원한 불모지라고 여겨졌는데 이젠 그것도 아니다. 마소처럼 11172자 완성형 글립을 다 때려박은 게 아니라 이야기체 같은 8*4*4 조합형 비트맵 글꼴을 쓴 것도 있어 더욱 반갑다.

바이오스 차원에서 하드디스크에 predefined type이 40몇 가지 정도 있던 시절도 있었는데.. 안 변하는 것 같아도 이 바닥도 하드웨어의 발전을 따라서 많이 변하고 있다.
그나저나 애플 제조 컴퓨터들은 바이오스 계층도 자체 개발인 거겠지? (켠 직후에 흰 화면에 빵~~! 소리, 그리고 alt 눌러서 부트캠프 동작..)

3. 글꼴

수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감지'는 했던 현상인데, 어떤 컴퓨터는 글꼴 대화상자를 열어 보면 황당하게도 Times New Roman이나 Courier New 같은 필수 기본 글꼴이 목록에서 빠져 있고 선택 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그 컴퓨터에 실제로는 해당 글꼴이 멀쩡하게 잘만 설치돼 있다.
게다가 더 황당하게도 MS Word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그 글꼴을 선택할 수 있었고 메모장이나 워드패드에서만 안 나왔다. 내 경험상 이건 컴퓨터마다 케바케로 발생하는 듯하고 Windows 7 이상 2010년대부터 종종 보였다.

처음엔 글꼴 목록에 영향을 끼치는 악성 코드가 있기라도 한지 의심을 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현상에 대한 해답이 따로 있었다.
"제어판-글꼴-글꼴 설정"으로 들어가서 "언어 설정에 따라 글꼴 숨기기" 옵션을 끄면 사라졌던 Times, Courier 같은 글꼴을 다시 선택할 수 있다. (Designed for your language settings)

Windows 7부터 등장한 옵션은 맞아 보인다. 그런데 멀쩡한 글꼴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드는 옵션은 대관절 도대체 왜 도입됐는지 모르겠다. 그런 옵션을 굳이 넣을 거면 글꼴 선택 대화상자 내부에다가 넣거나 show all 같은 버튼이라도 넣어야지 왜 제어판 깊숙한 곳에다가 짱박아 놓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4. PNG

한때 GIF라는 그림 파일 포맷이 있어서 웹에서 정말 많이 쓰였다. 압축률 좋고 투명색과 애니메이션, progressive 렌더링 같은 독보적인 장점 기능이 많았다. 그러나 GIF는 내부의 압축 알고리즘에 특허가 걸려 있어서 아무나 활용하기가 곤란했다.

물론 이미 만들어진 그림 파일을 보기만 하는 사용자 입장에서는 제약이 걸리는 게 전혀 없고, GIF 파일을 생성하거나 디코딩하는 프로그램을 상업용 제품에다 직접 얹는 제조사의 입장에서 로얄티 같은 게 들었던 것 같다. 휴대용 MP3이나 WMA 재생기를 만들 때처럼 말이다. 전자는 프라운호퍼 연구소에, 후자는 마소에 특허든 저작권이든 뭐든 걸려 있다.

그래도 이 특허는 저작권 자체의 보장 기간(70년)보다는 기간이 훨씬 짧았던 모양이다. 2005년경에 특허가 풀리긴 했다. 그러나 gif는 트루컬러를 지원하지 못한 채 256색에서 발전이 멈춰 버렸기 때문에, 오늘날은 대체제인 PNG에 밀려 서서히 사장되는 중이다. 웹에서 사진용 손실 압축은 JPG가, 그 밖의 범용적인 비손실 이미지는 PNG가 시장을 나란히 양분하는 중이다.

PNG는 GIF보다 압축률이 더 좋고 트루컬러도 지원하며, 단순 color key 기반 투명보다 더 발전한 알파채널도 지원한다. 심지어 고화질 아이콘을 저장하는 컨테이너로도 이용되고 있다.
그러니 GIF의 대체물이 되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알파 채널은 1990년대 PNG의 첫 버전과 동시에 등장한 게 아니라 나중에 추가된 확장 규격이기라도 한지, 제대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여전히 적어서 아쉽다.

또한 PNG도 애니메이션 기능은 없다. APNG라는 규격이 있기는 하지만 웹 표준이 아니기 때문에 파이어폭스 같은 극소수의 브라우저 말고는 지원하지 않는다. 플래시가 없어지고 브라우저 자체의 동영상 코덱 규격조차 표준화가 논의되고 있는 와중에 애니메이션용 이미지도 더 늦기 전에 표준이 마련되고 모든 브라우저들이 지원해 줘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하긴 옛날에는 동영상도 코덱 파편화가 무진장 심해서 '통합 코덱' 이러면서 혼란이 말도 아니긴 했었다.

5. high DPI 관련

Windows에서 high DPI 지원 정책은 한번 만들어 놓은 걸로 끝이 아니고 버전을 거듭할수록 마개조를 거듭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Windows 10에서도 새 업데이트에서는 새 기능이 들어갔다.

8.1에서인가 그때부터 per-monitor high DPI이라는 게 도입된 걸로도 모자라서 이제는 아예 스레드별로 high DPI-aware 여부를 지정하고 그걸 on-the-fly로 변경하는 기능까지 추가됐다.
DPI의 변경은 너무 파격적인 변화여서 원래는 재부팅이 필요했으며, Windows Vista 시절에는 믿어지지 않지만 관리자 권한까지 필요하던 작업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제대로 대비가 돼 있는 유연한 프로그램도 매우 드물기 때문에 변경이 권장되지 않기도 했다.

그랬는데 그게 그래픽 카드의 성능 발달 덕분에 실시간 변경이 가능한 기능으로 서서히 바뀌어 간다. 그래도 마소는 레거시 호환성에도 목숨을 거는 곳이니, DPI 변화의 대비가 안 돼 있는 레거시 프로그램은 그냥 가상화 샌드박스빨로 통째로 속이고 말이다. Windows의 역사상 동일 기능이 위상이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한 다른 예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원래 화면 해상도나 색깔수를 바꾸는 것조차 먼 옛날에 Windows 3.x 시절에는 재부팅이 필요한 작업이었지만 9x/NT부터는 실시간 변경이 가능해졌지 않던가? DPI 변경도 그렇게 바뀌었다.

그도 그럴 것이, high DPI라는 게 원래는 시력 나쁜 사람을 위한 장애인 접근성에 가까운 잉여 기능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모니터의 해상도가 급격히 올라가면서 이건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편의 기능이 됐다.

이 점에서 high DPI는 마치 자동차의 자동 변속기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원래 자동 변속기 전용 면허는 왼발용 페달, 오른손용 다기능 스위치, 시청각 장애인용 볼록 거울처럼 장애인의 운전을 위한 여러 면허 조건 중 하나였다. 자동 변속기가 운전하기가 훨씬 더 쉬우니 장애인에게도 더 유리하니까 말이다. 그랬는데 자동 변속기가 워낙 대중화되고 나니 자동 전용 면허만은 1997년부터 일반인도 취득 가능하게 바뀐 것이다.

원래 화면 확대 배율이 기본값인 동시에 최소값일 때의 DPI 값은 96이었다. 이건 사실상 하드코딩된 채 쓰여 온 값인데, 언제부턴가 Windows SDK 헤더 파일을 보니 요게 USER_DEFAULT_SCREEN_DPI 라는 상수 명칭으로 추가되었다. 마치 마우스 휠의 기준값인 WHEEL_DELTA (120)과 성격이 비슷해 보이는데, 아무튼 GetDeviceCaps(hDC, LOGPIXELSX)의 리턴값과 저 96의 비율을 계산하면 확대 배율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Windows가 존재하는 한 LOGPIXELSX와 LOGPIXELSY의 값이 서로 달라질 일은 설마 없겠지..?
모니터가 일부러 종횡비가 더 큰 와이드 화면으로(4:3 → 16:9) 바뀐 와중에, 논리적인 화면 종횡비를 또 보정해야 하는 건 옛날 CGA 640*200이나 허큘리스 720*348 해상도 시절 이래로 이제 없으리라 여겨진다.

옛날에는 멀티 모니터조차 예견을 못 하고 WM_CONTEXTMENU 메시지에서 마우스 클릭이 아닌 키보드 글쇠는 x, y 좌표가 모두 -1인 것으로 구분하게 스펙을 설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와 지금은 참 격세지감이다.
또한, 해상도 차이가 많이 나는 모니터를 둘 이상 연결해서 사용할 때를 대비해서, 이제는 두 모니터가 DPI 설정이 서로 다른 것까지 다 지원해야 한다. 그러니 high DPI를 제대로 지원하는 일이 더욱 복잡해진 것이다.

6. 네트워크가 안 될 때

집에서는 이런 현상이 없는데 회사에서는 가끔씩 멀쩡히 랜선이 꽂혀 있는데도 유선 인터넷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이때는 ipconfig /renew를 해 주면 문제가 해결되는 편이다.
때로는 /release도 해야 하고, 한번은 '설정'(제어판 말고)으로 들어가서 네트워크 관련 메뉴 맨 아래의 '전면 초기화'+재부팅까지 한 뒤에야 문제가 해결된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 무엇이 정확하게 문제였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아마 공유기 쪽 문제인 듯하다.

7. USB 메모리 관련

USB 메모리를 꽂아 쓰다 보면.. 분명히 작업을 마쳤고 관련 프로그램들을 다 종료한 뒤, 메모리를 빼려고 하는데 안전하게 분리가 안 된다고 운영체제가 꼬장을 부려서 난감해지는 경우가 있다.
Windows 2000 시절에만 해도 USB 메모리를 무단으로 뽑으면 경고 메시지가 나왔지만, 그게 그렇게까지 위험하지는 않고 괜히 사용자를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었는지 XP와 그 이후부터는 경고 메시지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단 분리가 전혀 위험하지 않다는 얘기는 아니다.

USB 메모리를 분리하는 명령은 시스템 트레이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의외로 해당 드라이브의 셸 우클릭 메뉴에도 존재한다. 마치 CD롬 드라이브의 우클릭 메뉴에 '디스크 꺼내기' 명령이 있는 것처럼 USB 메모리 드라이브도 우클릭하면 'eject'가 있으며, 이 명령을 이용해서 분리하면 트레이 메뉴 명령보다 성공률도 더 높다고 그런다.

경험상 macOS는 지금까지 쓰면서 USB 메모리 제거가 바로 안 되는 경우를 거의 못 본 거 같다.
그런데 pkg 파일을 열어서 설치하는데.. USB 메모리의 것을 바로 여니까.. insert the "(null)" disc to continue installation 이러면서 설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저건 %s 포맷 문자열에다가 null 포인터를 주기라도 했는지 메시지의 형태도 비정상일 뿐만 아니라, 배포 패키지 파일이 깨지고 문제가 있을 때에나 나타날 법한 메시지이다.

하지만 파일이 실제로 깨진 건 전혀 아니었으며, pkg 파일을 하드디스크에다 복사한 뒤에 설치하니까 아무 문제 없이 됐다.
왜 저런 현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8. USB가 없던 시절의 컴퓨터 단자

그러고 보니 먼 옛날에.. USB 포트가 없던 시절에는 컴퓨터에 주변기기를 인식시키는 용도로 직렬 포트와 병렬 포트라는 게 있었다.
정확하게 뭐가 직렬 내지 병렬이어서 이런 명칭이 붙었고 서로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라디오에 AM과 FM, 인터넷 프로토콜에 TCP와 UDP처럼 일장일단이 있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된다.

직렬 포트는 COMn 이런 이름이 붙어서 주로 마우스나 모뎀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병렬 포트는 LPTn 이런 이름과 함께 프린터나 스캐너 같은 기기가 연결되었으며, 과거에 쓰이던 하드웨어 방식 불법 복사 방지 장치 '락'도 대체로 병렬 포트에다 꽂는 형태였던 것 같다.

으음.. 그럼 외장 하드는 어디에다 꽂았지? 옛날에 하드 디스크끼리 꽂아서 데이터를 복사하는 건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꽂고 나서는 바이오스 설정을 들어가서 이게 무슨 기기인지 설정을 수동으로 해 줘야 했다. plug and play 그런 건 없었다. 코덱이 너무 난무해서 동영상 보는 데 애로사항이 꽃폈고, 유니코드가 없어서 문자 인코딩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알 수 없던 그런 열악하던 시절의 추억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1/09 08:37 2017/11/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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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견인차

다른 자동차를 끌거나 수송하는 자동차는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사다리차가 크게 (1) 이삿짐을 나를 때 혹은 (2) 불 끌 때로 용도가 나뉘듯, 견인차는 크게 (1) 사고· 고장 차량 견인과 (2) 불법· 부정 주차 차량 견인으로 용도가 둘로 나뉘는 것 같다.
그리고 (1)용 견인차는 유난히도 '현대 리베로' 개조 차량이 눈에 많이 띄는 듯하다. 국산차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엔진룸이 앞에 돌출돼 있는 그 트럭 말이다.

사고가 한번 나면 어디서 정보를 입수했는지 정말 광속으로 견인차들이 벌떼같이 달려온다고 한다. 하지만 견인료 바가지를 피하려면 반드시 자기 차의 관할 보험사가 운영하는 견인차를 이용하는 게 좋다. 그리고 고속도로에서 차가 퍼졌다면 도로 공사도 자체적으로 인근의 휴게소나 톨게이트 정도까지는 무료 견인을 제공한다고 한다.
승용차 말고 대형 트럭이나 버스를 견인하는 더 크고 아름다운 견인차도 있으나 이런 건 더 보기 어렵다.

한편 이들과는 달리, 공장에서 갓 출고된 신차(특히 승용차 같은 소형차)는 여러분도 모양을 기억하고 있을 거대한 트레일러에다 최하 대여섯 대씩 통째로 싣고 운반한다. 액션 영화에서는 달리는 신차 수송 트레일러를 주인공이 폼나게 탈취해서 거기 있는 차를 곧장 시동 걸어서 달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수리의 여지가 없는 폐차는? 차량을 한 치의 손상도 안 나게 곱게 수송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 생채기가 나건 말건 상관없이 차들을 같은 공간에라도 더 우겨넣어서 나르는 편이다.

자동차 다음으로 철도를 살펴보면.. 기관차는 애초에 동력이 없는 다른 객차들을 견인하라고 만들어진 물건이다. 특히 전기로 달리는 차량들은 디젤 차량보다 퍼질 확률이 상대적으로 더 높기 때문에 디젤 기관차가 '구원 운전'용으로 쓰인다. 또한, 본격적인 장거리 주행이 아니라 단순히 역이나 기지 내에서 차량의 분리· 결합, 선로 전환용으로 잠깐 잠깐 쓰이는 소형 기관차를 '입환기'라고 따로 부른다. 오늘날의 특대형 기관차가 아니라 옛날에 도입되었던 상대적으로 소· 중형, 저성능 기관차 중, 4400호대가 오늘날까지 이례적으로 입환용으로 쓰이는 중이다.

끝으로, 선박에도 견인이라는 게 물론 있다. 예인선이라는 선박도 있는데 있는데 이건 구조가 어찌 되나 잘 모르겠다. 오로지 비행기만이 한 기체나 다른 기체를 물리적으로 어찌할 방법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전투기를 동원해서 아예 격추시키는 것 말고) 다만, 고정익 비행기는 아직 공중에 뜨기 전에는 타 자동차의 견인을 받는 게 관행이다.

2. 비행기 tow car

고정익 비행기는 주변의 공기를 거세게 빨아들이고 내뿜으면서 움직인다는 특성상, 여객 터미널 주변에서는 자기 엔진으로 자력 이동을 하지 않는다. 특히 후진도 기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여러 여건상 무리라고 판단하여 그냥 봉인하고 지낸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타는 여객기들은 출발 직후에 주기장부터 활주로의 자력 주행 구간까지 잠시 동안은 별도의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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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활주로에서 납작한데 바퀴는 엄청 크게 생긴 이상하게 생긴 트랙터가 바로 비행기 견인차이다. 나름 비행기의 운행에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크기는 다양한 편이며, 보잉 747이나 A380 같은 크고 아름다운 여객기를 견인할 정도의 견인차는 최대 시속은 겨우 32.2km인 주제에 엔진은 무려 10400cc 배기량에 1000마력대를 자랑한다. 가격은 억~10억 원대.

비행기는 움직이지 않고 자기 바퀴만 헛도는 현상을 방지하려면 엔진 힘만 강한 게 아니라 자기도 엄청 무거워서 접지력이 좋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견인차의 자체 중량도 수십 톤에 달한다. 또한 철도 차량이 아닌 것이 이례적으로 후진 역시 전진과 거의 대등한 다양한 단수로 할 수 있게 돼 있다.
대형 비행기 견인차는 가격과 엔진 성능으로만 따지자면 이거 무슨 외제 슈퍼카 스포츠카와 별 다를 바 없다. 단지 제로백이나 속도만이 천지차이일 뿐..

3. 스페이스 셔틀의 셔틀

비록 오래 전에 퇴역해서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이 분야의 최고 특별한 사례로는 우주왕복선을 실어 날랐던 보잉 747 개조 화물기를 꼽을 수 있겠다.

이게 왜 필요하냐 하면.. 우주왕복선은 착륙은 여러 곳에서 할 수 있지만 발사는 반드시 한 곳(케네디 우주 센터. 플로리다 주 소재)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뭐, 착륙 지점도 여러 곳이라고 해 봤자 실제로는 두 곳뿐이긴 했다만(에드워즈 공군 기지 추가. 캘리포니아 주 소재).. 한때 NASA에서 남아메리카의 이스터 섬조차 우주왕복선의 착륙 공항으로 개척할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우주왕복선이 활발히 운용된다면 착륙 가능 공항이 더 생길 가능성이 있었다.

지구로 재진입하는 우주왕복선 사령선은 그냥 글라이더일 뿐, 동력 비행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니 발사 기지 외의 다른 곳에 착륙한 사령선은 재활용을 위해서는 누군가가 다시 발사 기지로 수송해 줘야 된다.
그런데 얘는 크기도 엄청 큰데 일일이 분해해서 육로 수송을 하기에는 기계의 신뢰성 차원에서 리스크가 너무 큰지라, 있는 그대로 항공 수송을 선택하게 됐다.

세상에서 가장 큰 단일 세포가 타조알이듯, 우주왕복선 사령선은 세상에서 가장 큰 단일 항공 화물이라고 기네스북에도 올랐다고 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화물기는 AN225이긴 하지만 우주왕복선은 그냥 보잉 747 개조기로 수송된다. 우주왕복선을 기체 안에 집어넣을 수는 없으니 저렇게 위에다가 특수한 방법으로 고정해 놓는다. 그리고 화물을 실은 뒤의 항공역학적인 최적화를 위해 이 비행기는 수직미익이 추가로 달려 있다.

우주왕복선을 위에다 얹는 작업도 특수한 크레인을 동원해서 며칠씩 걸리는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다. 고정을 잘못했다가 우주왕복선이 공중에서 비행기에서 굴러떨어지는 사고라도 나는 건 생각도 하기 싫은 악몽일 테니까.
게다가 이 비행기는 우주왕복선을 실은 상태에서는 미국 대륙 횡단조차 한 번에 못 하고 중간에 착륙해서 급유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굉장히 충격적이다. 747은 그냥 승객만 가득 실었을 때는 나름 한국· 일본에서 뉴욕까지도 직항이 가능하지 않던가?

물론 우주왕복선은 승객 400명보다 더 무거운 80톤에 달하는 무게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셔틀 수송기가 빌빌대는 더 큰 이유는 연료 탑재량, 엔진 출력 등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 저렇게 우주왕복선을 등짝에다 업은 외형으로는 오리지널 비행기와 같은 수준의 양력이 발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지널 747 여객기의 순항 고도보다 훨씬 낮은 고도에서 더 낮은 속도로 조심스럽게 비행해야 하며, 항속 거리도 몇 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한다고 한다.

그러니 수백만 달러가 깨지는 온갖 번거로운 두벌일을 안 하려면 우주왕복선은 어지간해서는 그냥 발사지인 케네디 우주 센터로 곧장 착륙하는 게 바람직했다. 그러나 하필 거기가 날씨가 안 좋고 폭풍이라도 분다면 이는 활강을 하는 우주왕복선에게 안전상의 악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에드워즈 공군 기지로 가야 했다.

사실, 자체 동력이 없는 우주 비행체를 잘 조종해서 특정 지점에 딱 맞춰 착륙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보통 우주에 다녀온 사람들은 자그마한 캡슐에 탄 채 대서양 망망대해에 낙하산 달고 퐁당 떨어진 뒤, 군함이 좌표를 받고 구조하러 오지 않던가? 그리고 우주왕복선은 이렇게 지구에서 수송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발사되는 과정도 모두 아주 경이로운 물건이다. 연료가 분출되어 기체가 나아가는 방향과 사령선이 달린 곳이 일직선이 아니기 때문에, 무게와 각도 배분이 아주 까다롭다..

4. 유니목/우니모크 -- 만능 자동차

메르데세스 벤츠에서 개발한 '우니모크'(Unimog)라고 바퀴가 굉장히 크고 범퍼와 차체가 높고, 길이는 짧아서 좀 특이하게 생긴 트럭이 있다. 그런데 이게 보통 물건이 아니다. 얘는 유연성, 확장성, 플러그 인 연계, 험지 주행 능력.. 이런 것들이 지구의 그 어떤 육상 교통수단의 추종도 불허하는 세계 최강의 다기능 다재다능 다용도 자동차이다. 뭔가.. 자동차계의 맥가이버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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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을 보면 서스펜션부터가 비범해 보이는데.. 어지간한 험지에서도 하부가 긁힐 걱정 따윈 안 해도 된다.
45도 경사를 오를 수 있으며, 기어도 최저단은 가속 페달을 밟고도 사람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이다. (자동차가 보통은 idle creeping조차도 사람 걷는 속도와 대등한데..)

휠을 교체하면 레일 위 주행쯤은 당연히 가능하고, 심지어 운전대도 작업 편의를 위해서라면 좌핸들과 우핸들 실시간 전환이 된다. 그리고 덤프 트럭, 타 차량이나 비행기 견인 등 온갖 파트를 붙여서 작업용 차량으로 개조 가능하다.
이런 차는 군대에서 최고로 환영받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100% 정답이다. 독일군 내부에서 당연히 제식용으로 쓰이고 있다.

5. 바거 288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에 이어, 지상에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자력 이동 가능(= 다른 교통수단으로부터 견인받지 않아도 되는) 기계는.. 이미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독일에서 제작한 초대형 광산 굴착기인 Bagger 288이다. 미국뿐만 아니라 독일 공돌이들의 발상과 능력에도 경의를 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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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법적으로는 교통수단이 아닌 건설기계일 테고, 너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일반 도로를 주행하기란 어차피 불가능하다. 과거에 나치에서 만들었던 열차포 따위와도 비교가 안 되는 규모이니까... 자력 이동은 광산 지대에서 이동하라고 넣은 기능이지, 도로를 달리라고 넣은 게 아니다.

굴삭기의 경우 바퀴식은 그냥 도로를 달려서 주행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타 자동차들보다는 주행 속도가 훨씬 느리기 때문에 일반 자동차들에게는 추월을 강요하는 약간의 민폐를 끼친다. 무한궤도식은 도로 파손을 방지하기 위해 평소에는 그냥 다른 대형 트럭에 실린 채 수송되기도 한다.

하지만 Bagger 288은 뭐 다른 교통수단에 싣거나 견인 받는 것 자체가 절대 불가능하고.. 자력 이동이 가능은 하지만, 주행 속도는 시속 1km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0.1~0.6km/h, 분당 2~10m) 그렇게 느리게 움직이지만 움직이는 기계에 다른 차가 부딪치면 그냥 통째로 뜯겨져 나가고, 사람은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7/11/06 08:32 2017/11/0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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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동안 본인은 등산은 너무 더워서 한동안 못 했다. 자전거로 한강 공원 정도나 다니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서울과 적당히 떨어져 있으면서 큰 강이나 호수를 보러 놀러 갈 만한 곳은 없는지 찾아보게 되었다.
그 결과 본인의 눈에 띈 곳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남양주와 양평 사이였다. 강 두 개가 만난다고 해서 지명부터가 '양수'리, '두물머리' 이런 식이었다.

그런데 거기 일대에는 웬 다산 정 약용 선생 유적지가 있고, 강가에는 숲과 풀밭이 잘 꾸며져 있었다. 놀다 오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토요일 아침에 곧장 차를 몰고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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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검단산을 올랐다가 하남시 배알미동 방면으로 하산하면서 팔당댐을 멀리서 본 적은 있다. 그런데 댐 위의 '공도교'를 건너는 건 이번이 난생 처음이었다.
여기는 국가 기간 시설인 댐 위이고 이게 딱히 교량 역할을 하라고 만들어진 시설물은 아니지만.. 강북의 국도 6호선과 팔당대교가 주말에 워낙 많이 막히는 관계로 주말에만 소형차에 한해서 공도교의 통행이 허용되고 있었다. 도로의 폭은 그냥 2차선에 불과하며 좌우로는 온통 철조망이 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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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유적지 겸 생태 공원 주변은 한가한 농촌 마을이었다. 이렇게 유적지 어귀에 공영 주차장이 있고, 카페나 생태 공원에 더 가까운 곳에도 주차장이 또 있었다.
아침 11시쯤에 왔을 때는 주차장이 널널한 편이었지만 오후 2~3시가 넘어가면서 여기는 차들로 온통 꽉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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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이 유적지의 주인공인 다산 정 약용 선생의 생가(복원된 레플리카), 기념관, 동상, 묘지가 한데 있는 단지를 들렀다. 이분은 경치 한번 참 좋은 곳에서 태어났구나.
묘지는 단지 안의 10몇 m 남짓한 높이의 언덕을 올라가면 볼 수 있는데, 이렇게 생가와 묘지가 같이 조성돼 있는 건 이 승복 어린이 기념관도 비슷한 형태였던 걸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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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약용은 '다산'이 아니라 '다작'이라는 호가 더 어울렸을 것 같다. 천재이고 생각보다 굉장히 대단한 인물이었다. 목민심서 말고 나머지 책들은 일반인에게는 다 듣보잡이긴 하다만... ㅠㅠ

이 사람은 평범한 유학자가 아니라 실학의 선구자라고 불린다. 윤리 도덕 분야 말고도 왕년엔 수원 화성을 쌓을 때 거중기를 고안해서 투입 인력과 공사 기간과 절감해 줬고, 과학과 추리를 이용한 사건 수사로 억울한 누명을 벗겨 주기도 했다. 손대는 분야마다 뭔가 비리를 척결하고 시스템을 개선하고 경영 효율을 올려 놨다. 그런 능력에다가 어진 인품까지 갖췄다는 게 매우 중요하다.

설령 김 성모 식으로 우려먹기 재탕을 거듭한다 하더라도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그것도 한문으로 저렇게 많은 책을 쓰기란 매우 어려울 텐데.. 물론 정 약용의 경우 17년 동안, 다시 말해 박 정희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맞먹는 긴 기간을 유배 생활을 하느라 저술 활동을 할 시간이 많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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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근처에 있는 실학 박물관을 찾아갔다. 다산 유원지의 다른 모든 시설은 무료이지만 이 박물관만은 입장료를 받았다.
여기는 말 그대로 정 약용에만 국한되지 않고 조선 후기에 실학이 등장한 배경, 그때 깨어 있던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배경, 조선 후기에 지리학과 천문학이 조금이나마 발전한 과정 같은 게 소개되어 있었다.

이런 실학의 이념은 훗날 국민 교육 헌장에도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며'라는 문구로 어느 정도 반영돼 들어간 셈이다.
참, 내가 갔을 때는 특별 전시회 명목으로 한글로 글을 남긴 조선 여성들의 실학 트렌드 이런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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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를 이 정도로 한 뒤, 그 다음부터 본인은 본격적으로 자연을 즐기러 나갔다.
실학 박물관을 나와서 강 쪽으로 가는 길에는 이렇게 분위기 좋은 풀밭이 꾸며진 카페들이 날 반겨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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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 멀리 강이 보이기 시작한다. 돗자리는 이런 나무 아래 풀밭에 아무 데나 펴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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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라기보다 호수나 저수지, 심지어 바다처럼 보이는 커다란 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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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여기는 엄연한 상수원 보호 구역이기 때문에 서울 시내의 한강 공원 따위와는 레벨이 다르다.
또한, 한강 종합 개발 사업 같은 게 없었으니 콘크리트 제방 같은 것도 없으며, 땅과 물의 경계는 그냥 흙· 뻘밭인 걸 알 수 있다.
이런 곳에서 물놀이를 할 수는 없다. 물에 들어가려면 바다나 산 속 계곡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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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면적이 워낙 크니 강바람도 바닷바람 만만찮게 느껴졌다. 시원하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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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이렇게 돗자리를 깔고 뒹굴뒹굴 하다가 잠시 눈을 붙이기도 하고 프로그래밍 작업도 했다.
그러다가 폰과 노트북의 배터리가 더 견디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엔 아까 봐 뒀던 카페에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음료수와 전기를 보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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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게 웬일? 내가 카페에 들어간 사이에 저녁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풀밭과 강가에 그 많던 인파와 돗자리족· 텐트족들은 어느새 쏙 들어가고 일부 우산을 들고 산책하는 사람만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차 안은 너무 더워서 도저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밖이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지내기엔 쌀쌀해지고, 차 안이 비바람을 피하는 아늑하고 포근하고 따뜻한 아지트가 됐다.

이렇게 더 있다가 완전히 해가 진 뒤에 돌아왔다. 이런 휴양지가 있었다니, 가 보길 정말 잘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7/11/03 08:30 2017/11/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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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창덕궁, 창경궁

서울에서 광화문과 경복궁이야 매우 유명한 역사 유물 겸 관광지이다. 그리고 그 근처의 종로3가에는 탑골공원이 있으며, 여기까지는 본인이 오래 전에 진작부터 가 봤다.
하지만 그보다 좀 더 옆에 종로3가와 4가 사이, 그리고 종로와 율곡로 사이에 서울 도심을 떡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유적지는 궁궐도 아닌 것이 도대체 정체가 뭔지 오래 전부터 굉장히 궁금했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으로 진입로를 어렴풋이 보긴 했지만 들를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서 책을 사 오면서 드디어 저기를 들르게 되었다.
서울 시내는 차를 몰고 돌아다닐 곳은 못 되고, 대중교통은 자기 경로를 벗어난 곳은 가지 않으며 단거리를 조금씩만 이동할 때도 기본요금이 깨지는 게 부담되니.. 찔끔 찔끔 돌아다닐 때는 정말 자전거가 최고였다.
덕분에 먼저 창덕궁과 창경궁을 구경한 뒤, 그 아래에 있는 종묘도 구경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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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은 안국 역 근처 현대 그룹 사옥의 옆에 있다.
원래는 종묘와 창덕궁이 경계 구분 없이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허나 훗날 일제가 교통 편의를 위해 둘 사이에 율곡로라는 도로를 닦으면서 둘은 담장을 두고 단절됐다. 율곡 이 이의 생가가 거기 일대에 있었대나 어쨌대나..
안에 들어가면 이렇게 넓은 공터와 드문드문 놓인 기와집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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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전'이라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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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기와, 담장, 벽면만 이렇게 사진을 찍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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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공터 구석에 혼자 짱박혀 있어도 힐링힐링 될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런 곳은 아무래도 내국인보다는 외국인 관광객이 더 많이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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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동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면 창경궁 쪽으로 갈 수도 있다. 이때는 입장료가 추가로 부과되나, 구매한 당일 동안은 창덕궁과 창경궁 구간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내부는 꽤 넓다. 북쪽으로는 저렇게 호수도 있고 식물원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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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과 그 근처에는 이런 건물과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현판들이 다 저런 스타일이었구나.
몇 년 전에 광화문 현판 때문에 여론이 분열되어 대판 싸움 벌어졌던 시절이 생각난다. (1) 역사와 고증에 충실하게 저런 한문 스타일로 복원하자는 쪽이 있었지만, (2) 광화문은 여느 유적과는 달리 차들이 씽씽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서 훤히 보이는 서울 중심부의 상징인데.. 기왕 한글 현판이 몇십 년 동안 있었다면(박통 친필..!) 새 현판도 우리 고유 문자로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영 역시 매우 강경하게 맞섰다.

한글을 사랑하는 그 마음은 본인 역시 적극 이해하지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이 문제는 독도가 어느 나라 영토이냐 같은 심각한 급이 아니다. 그냥 East Sea냐 Sea of Japan이냐 하는 문제와 비슷한 격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외국인이 무슨 명칭을 쓰건, 우리나라 동쪽 영해의 범위가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달라지는 건 전~혀 없으니,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된다. Korea라는 명칭이 엄연히 붙은 채로 정착한 '대한 해협'처럼 말이다.

광화문 현판도 마찬가지다. 광화문을 무슨 퓨전 사극 만들듯이 리메이크라도 하는 게 아니고 그저 옛날 스타일로 복원하는 거라면 굳이 기를 쓰고 한글을 고집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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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근처에 있는 이 건물은 벽면에 붉은색이 없이 배색이 좀 소박했으며 담장의 텍스처도 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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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랑 비교하면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럼 다음으로 종묘로 넘어간다. 이곳은 조선 시대 왕들의 묘지는 아니지만 이들의 위패 안장해 놓은 사당이다. 뭔가를 쓸데없이 높게 떠받드는 걸 빈정댈 때 '신줏단지 모시듯'이라는 말을 쓰는데, 이때의 '신주'(神主)가 바로 저 위패를 가리킨다.

태조 이 성계가 유교 이념으로 조선을 건국하면서 자기 궁궐보다도 종묘와 사직단을 먼저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의 종묘는 설계 크기가 지금보다 작았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모셔야 할 위패가 증가하면서 가로로 쭉쭉 몇 차례 증축되어 왔다.
그래서 종묘는 100미터가 넘는 긴 길이를 자랑하는 목조 건물이다. 그리고 '정전'이라는 본 건물만 있다가 나중에는 좀 더 작은 복제품(?) 격인 '영녕전'도 따로 만들어졌는데.. 궁금하신 분은 구글 등에서 검색해서 유래를 알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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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안은 간단하게만 묘사하면 "숲이 우거진 공원 산책로 + 넓은 돌바닥 마당이 깔린 집회 장소" 정도 된다. 산책로 안에는 자그마한 연못도 있다.
또한 나름 조상님들이 들어가라고 돌로 포장된 길이 있는데.. 내 눈에는 뭔가 철도의 전신을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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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이 건물과 터뿐만 아니라 조상신에게 제사 지내는 퍼포먼스까지 무형 문화재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1년에 다섯 번이나 임금님까지 친히 나서서 제사 행사가 있었으나 현재는 1년에 두 번만 재연 행사를 치른다고 한다.
공자 종주국인 중국에서는 이런 걸 진작에 버리고 전통과 단절해 버린 관계로.. 오히려 중국의 학자들이 한국에 와서 과거의 종묘 제도에 대해 연구한다고 그런다.

위의 건물은 음식을 요리하는 등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작업하고 거주하는 곳이라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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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은 정말 길쭉하고 마당이 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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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녕전은 중앙에 이렇게 돌출된 입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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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는 평일에는 1시간 간격으로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단위 입장만 가능하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취한 조치라고 그런다. 토요일(일요일 말고)이나 일부 특례가 적용되는 날에만 가이드 없이 개인 단위 자유 입장이 가능하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는 옛 종묘를 불질렀지만, 그때 이후로 재건된 지금의 종묘는 훗날 일제 강점기 때도 별다른 훼손 없이 잘 버텼으며, 심지어 6· 25 전쟁 때도 파괴되지 않았다.
종로라는 그 번화가 바로 근처에 이렇게 속세를 완전히 이탈한 듯한 관광지가 있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비록 조상신을 이런 식으로 떠받들고 제사를 지내는 건 내 개인적인 종교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행이다만.. 임금은 어느 문으로 들어와서 어느 문으로 나가고, 건물이 이렇게 돼 있고 이렇게 설명을 듣는 게 마치 성경의 출애굽기와 에스겔서에서 각각 성막과 성전의 규격에 대해 설명을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또한, 서울에서 조선 시대 역사 관광지들을 많이 봤으니, 나중에 고향 갈 일이 있으면 더 옛날 신라의 역사 관광지도 더 눈여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북한 지역까지 갈 수 있다면 고려 시대 역사 관광지도 볼 수 있겠지만, 그건 예측 가능한 미래에는 여전히 불가능 봉인의 영역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31 08:38 2017/10/3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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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초에 일본은 여느 아시아 국가들과는 달리 일찍 산업화 근대화를 이뤘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까지 함으로써 일단은 서구 열강과 대등한 급의 강대국이라는 인증까지 해냈다.
얘들은 제국 덩치를 키우기 위해서는 (1) 대륙으로 진출하는 위치가 좋고 (2) 덩치가 적당히 작아서 만만하고, 또 (3) 정치 경제 군사가 모두 개막장을 달리고 있어서 무력으로 제압하기도 편해 보이는 조선을 먹어서 일본으로 편입시켜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옛날에 더 멀리 떨어져 있던 섬나라인 류쿠를 일본이 먹었듯이 말이다. 일명 '정한론'이다.

얘들은 단순히 군사력만 키운 게 아니라 조선의 식민지화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 타 강대국들과도 외교 로비를 벌이면서 정말 치밀하게 노력했다. 전자뿐만 아니라 후자를 볼 줄 알아야 한다. 한반도 안에서 한일협약(내정간섭), 을사조약(외교권), 정미7조약(군대 해산) 등등이 벌어지는 동안 밖에서는 일본이 뭘 했는지를 말이다.

* 제2차 영일 동맹 (1905) 일부
영국은 일본이 한국에서 가지는 정치적·경제적·군사적 이익을 보장하며, 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및 국경지역에서의 이익을 옹호하는 조치를 취할 것.

* 가쓰라-태프트 밀약 (1905) 일부 ... 을사조약의 전신
일본이 군대를 동원해서 대한제국이 일본의 동의 없이는 외국과 조약을 맺지말 것을 요구하는 정도로 대한제국에 대한 종주권(suzerainty), 즉 외교권을 확보하는 것은 러일전쟁의 타당한 결과이며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 미국은 필리핀, 그리고 일본은 조선... 이렇게 각각 식민지를 나눠 갖고 서로 터치 안 하는 구도가 형성됐었다. 이렇게 입을 다 맞춰 놨는데 헤이그 밀사가 뒤늦게 나서 봤자 짜고 치는 고스톱 하에서 호소가 씨알이나 먹혔겠는가?
미국도 그때는 일본과 이미 먼저 맺은 약속이 있어서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를 방조 묵인했다. 이런 식민지 분배 중재를 잘한 공로로 어떤 미국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까지 받았다.

그런데.. (... and 간극)

* 카이로 선언(1943) 요지
연합국의 목적은 일본으로 하여금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이래로 폭력으로 약탈한 일체의 지역에서(만주, 태평양 섬들 등등) 철수하고 해당 지역을 원래 국가에 반환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앞의 3대국은 한국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주 독립시킬 결의를 한다.

이렇게 역사가 바뀌고 세상이 달라지기까지 무려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헤이그 밀사가 허무하게 실패한 이후로 일본은 1차 세계 대전 때는 연합국 승전국으로서 대접 받았고, 반대로 한반도의 독립 운동이라는 건 무력 노선이든 외교 노선이든 그야말로 꿈도 희망도 없고 아무도 안 알아 주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노답으로 흘러갔다.
이런 시류 속에서 세워진 국제 연맹이라는 조직은 조선의 독립에는 단 1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세대가 교체돼 버리면 단군의 후손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송두리째 사라질지도 몰랐다.

그러니 카이로 선언이라는 게 우리 입장에서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는 크게 두 가지 면모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아이러니하게도 영일 동맹의 당사자이던 영국, 그리고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당사자이던 미국이 이 선언문에서는 3대국의 구성원으로 언급되었다. (나머지 마지막 하나는 중국;;) 조선의 독립에 대해 전혀 아오안이던 그 강대국들이 드디어 일제의 국제적인 악행을 인지하고 반대급부로 대한 독립을 승인하는 주역으로 바뀐 것이다.

둘째, 더구나 카이로 선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일본이 1차 세계 대전 이후에 벌인 침략 행위에 대한 저지와 원상복귀, 단죄였다. 다시 말하지만 1차 대전 시절까지만 해도 일본은 전범국은커녕 연합국 전승국이었기 때문이다.
한일 합방은 1차 대전보다 미묘하게 전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조선은 계속해서 일제의 합법적인 식민지 멀티 기지로 여겨질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열강은 한반도를 예외적으로 추가로 일제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는 점에 합의를 보고 이를 명문화까지 하게 된 것이다. 아아..

이런 역사가 있기까지 이 승만 같은 <Japan Inside Out> + 외교 노선과, 의열단 임시정부 같은 무장항쟁 노선이 모두 기여했을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Japan Inside Out은 10만 부가 넘게 팔리면서 한국인이 쓴 책 중에 북미권에서 제일 많이 팔린 책 1위이고, 아직까지도 기록이 깨지지 않고 있다..!

물론, 인쇄된 책 말고도 지식과 정보, 소식을 얻을 통로가 왕창 많이 존재하는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책 판매 부수를 그 시절의 책 판매와 수평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태평양 건너려면 여객선 타고 몇 주를 기다려야 했던 그 시절에 저 정도의 책을 영어로 직통으로 저술하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겠는가?

일본의 내막을 폭로한다고 해서 무슨 찌라시성 음모론 제기라든가, 일부 사회 음지에서 벌어지는 조선인 학살 인권 유린 이런 수준이 아니다. 아예 국제 정세를 분석하고 결국 일본은 미국도 침략할 거라고 예측해서 적중까지 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실체도 잘 알고 있는 사상 건전한 사람이니, 미국에서 고집쟁이 정치병 영감쟁이가 아닌 외교 정치 전문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한국 독립도 덤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니 자기 정치 성향에 따라 외교나 무력 노선 중 자기가 지지하지 않는 노선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현실성만 따지자면 둘 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고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무모한 삽질이긴 마찬가지였다.

이 승만조차도 그 교통 통신 불편하던 시절에 국제 정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을 때는 국제 연맹에다가 젠틀하게 조선 독립을 호소했으며, 일제로부터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니들 통치를 받겠다고까지 요청했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냉담한 무시뿐이었다. (참고로, 이 승만의 저 탄원에 대해서도 좋게 말하면 오해이고, 삐딱하게 말하면 아주 쌩 헛소리 중상모략이 엄청 많이 나도는 중임..)
무장 투쟁 쪽도 뭐.. 언제까지 이렇게 젊은 투사들 희생시켜서 일제 요인들 암살하는 짓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그러나 그런 발버둥과 발악이 쌓이고 쌓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는 민족성이 다르고 일본과 싸잡아 전범국 취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과, 일제가 정말 나쁘고 쟤들이 정말로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국제 여론과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런 방향 제시 없이 미국이 핵만 터뜨려 준다고 조선이 독립 가능한 거 아니었다!

일본은 무슨 마약 먹었는지 미국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였지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결과는 처참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다 거덜나게 생겼지만 걔네들은 더욱 광기로 치달아서 전국민 옥쇄에 정신력 운운하며 난리를 쳤다. "귀축영미에게 항복하고 포로로 잡혀서 온갖 능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저항하다가 같이 죽자!"
주요 추축국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다 항복한 와중에도 일본은 끝까지 gg를 치지 않고 버텼다.

미국도 처음에는 치사하게 진주만 폭격을 벌인 일본을 상대로 그저 적개심과 증오심만 표출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쟤들은 도대체 뇌 구조가 어떻게 돼 있고 무슨 약을 빨고 저렇게 날뛰는지 황당해하고 신기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포츠담 선언에서는 지난번 카이로 선언 내용을 재확인하면서 "곱게 항복하고 식민지들 반환하고 전쟁만 끝내라. 우리는 너희가 항복하더라도 너희가 원래 갖고 있던 영토 주권 같은 건 결코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친절하게 다시 friendly warning을 해 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군부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선언 내용을 '묵살'로 대응했으며, 그 결과 1945년 8월에 핵폭탄을 맞고 말았다. 그것도 두 방이나 맞은 뒤에야 덴노가 번쩍 정신을 차렸으며, 전쟁에 미쳐 폭주하는 군부를 그대로 놔 뒀다가는 나라가 정말로 멸망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덴노로서는 이례적으로 자기 육성을 방송하여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것도 자기 잘못은 절대로 직접 시인하지 않고 일본의 높으신 분들 특유의 돌려 말하기 스타일로 아주 간접적으로 항복을 표현했다. "적들이 무시무시한 폭탄을 터뜨린 와중에 전쟁에 휘말려 고생하는 백성들이 너무 불쌍해서 전쟁을 이쯤에서 끝낼까 하노라"..;;; 아이고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겠다.

그런데 얼마나 세뇌를 당했으면 자국 덴노의 항복에도 동의할 수 없어서 '궁성사건'이나 '마츠에 소요' 같은 병맛스러운 항복 반대 쿠데타 및 항전 시도가 있었으며, 저 동남아 밀림에서는 자국의 항복을 믿지 않고 몇십 년째 혼자 군인 행세를 하고 다닌 소수의 미친놈도 있었다.

일본은 전쟁에서 항복함으로써 혹시 덴노의 신변에 위험이 생기거나(전범 재판에 회부), 덴노 제도 자체가 강제로 폐지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승전국인 미국 역시 이를 의식하고 쇼와 덴노 자체를 전범으로 기소하지는 않았다. 단지 맥아더 장군의 주도 하에 인간 선언을 시키고 덴노의 신적 권위를 불식시켰을 뿐이다. 만악의 근원이었던 신선놀음 하나만 중단시켰다. (미국도 감히 건드리지 않은 덴노 제도를 훗날 옴진리교가 무너뜨리려 했다는 것은 참 황당하기 그지없다.)

일본이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개겼으면 올림픽 작전, 몰락 작전 이런 게 몽땅 실행되었을 것이고 미국으로도 모자라서 소련까지 합세해서 일본 본토를 조졌을 것이다. 일본은 석기 시대로 돌아가거나 최악의 경우 지도에서 지워졌을 것이고, 한반도가 아니라 쟤들이 분단되고 여러 점령국들에 의해 조각조각 찢어졌을 것이다. 다만, 한반도는 전체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나온 사진 두 장을 이렇게 대조해 보는 건 굉장히 흥미롭다.
인간이 아니라 신인 덴노가 감히 자기 목소리로 방송을 한 것만으로도(옥음방송, 무조건 항복) 일본 황국신민들은 깜짝 놀라서 벌벌 떨었는데, 하물며 맥아더가 1945년 9월, "천황이라는 작자도 한낱 인간일 뿐이고 내 갑빠와 포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냐!" 요런 사진을 의도적으로 찍은 뒤 이걸 일본 언론를 통해 일부러 내보냈다.

저 모습을 본 일부 일본인들은 멘붕에 자살을 하고, 또 더러는 이제 맥아더를 신성시하면서 집에 신사를 만들고 경배(?)하기도 했다. 딱 행 14:11-15와 비슷한 유형이었다. 일본이 근대화 산업화는 동양에서 일찍 해냈어도 각 개인의 정신 세계는 딱 그러했다.

지금이야 일본은 국민성이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선진적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공중도덕 매너 쪽으로 굉장히 철두철미해서 남에게 민폐· 피해를 끼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는 것이 잘 알려져 있다.
이런 사람들이 불과 몇십 년 전엔 무슨 약을 잘못 먹어서 침략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웃 나라에 온갖 민폐와 피해를 끼쳤다는 것이 나로서는 정말 아이러니하게 들린다.

일본 사정은 그렇고..
그로부터 5년 남짓 뒤인 1950년 6월 말, 일본에 있다가 북괴의 남침 소식을 듣고 황급히 김포 비행장으로 달려온 맥아더는 씅만 리 할배하고는 저렇게 같이 얼싸안고 좋아서 난리가 났다. 히로히토하고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참고로 남조선은 일본 정도가 아니라 일본의 지배를 35년이나 받았으며, 미국 덕분에 해방된 지 그 당시 5년 남짓밖에 안 됐던.. 그야말로 한 주먹 쨉도 안 되는 듣보잡 약소국이었다. 그리고 맥아더는 성깔이 장난 아닌 완벽주의자였고 미국 안에서 같은 백인들끼리도 대인 관계가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런 포즈가 나올 수 있었을까?
맥아더와 할배 모두 천재에 과격파.. 하지만 사상은 지극히 건전하고 올바름.. 딱 내 취향 내 스타일이다. 존경스럽다.

물론 반대편에 있었던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정말 최악의 막장만 골라서 가면서 썩고 곪은 사례이다. 북괴가 그렇게 극단으로 치달은 것에는 그 아래의 남조선의 존재(그리고 동맹인 미국)로 인한 두려움과 부담도 분명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남북 대결이 없었고 아예 남조선이 6· 25 전쟁에서 져서 처음부터 전체 적화가 돼 버렸다면 오히려 북한이 지금의 북한 같은 흉악한 괴물이 되지는 않았고 1990년대에 무너지고 개방하고 변화가 생겼을 수는 있다. 그 가능성은 본인도 인정한다.

그러나 저것도 언제까지나 가정일 뿐이고, 설령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부정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미친놈은 없을 것이다. 여자가 야하게 입고 다녀서 누가 강간죄를 저질렀다면 그럼 여자 잘못인가? 은행에 돈이 많이 보관돼 있어서 은행 강도가 침입했다가 붙잡혔으면 그럼 돈을 많이 넣고 다닌 은행 잘못인가? 그거랑 완전 똑같은 논리이지 않은가? 예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북괴는 8월 종파 사건과 고난의 행군 이전부터 막나가는 미친 나라였고, 6· 25 이전부터 월남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일본이 전국민 옥쇄 운운하며 발악을 했던 것이 지금으로서는 북괴의 말로에 대한 좋은 예표이지 싶다. 쟤들 역시 절~대로 곱게 멸망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핵을 터뜨리고 반인륜 범죄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수용소 죄수들을 다 죽이고, 주민들을 인질 삼아서 별 미친 짓을 다 할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서 김씨 부자의 세뇌를 지우는 일은 어쩌면 일본 국민에게서 덴노에 대한 신격화를 제거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일본 대신 '북괴 정권', 한국민 대신 '북한 주민'이라고 바꿔서 카이로 선언의 북괴 타겟 버전이 국제적으로 발효되고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이행됐으면 좋겠다. 언제까지나 주민들이 저렇게 도탄에 빠져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도 어떤 전쟁이냐, 평화도 어떤 평화인지를 따지면서 옳고 그름을 논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8 08:35 2017/10/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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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기철, 손 양원 목사는 우리나라 교회사에서 손꼽히는 의인· 위인이요 순교자이다. 단순히 자기가 믿는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 바쳐 항거했을 뿐만 아니라, 평소의 행실도 정말 훌륭했고(남을 위해 헌신, 봉사..) 크리스천으로서 남에게 큰 귀감이 됐던 분이다.
이분들의 생전 "주요" 행적이야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됐고(각각 평양 경찰서 구속, 사랑의 원자탄 등등..), 이 글에서는 이분들의 순교 당시 배경에 대해서만 추가적으로 생각을 좀 해 보았다.

1. 손 양원

6· 25 사변 발발 당시에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은 똑같이 남부 지방이지만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영남은 나라 사정이 제일 위급했던 1950년 9월 무렵에도 낙동강 전선에서 대구, 칠곡, 영천 정도가 마지노 선이었고 거기보다 더 동남쪽은 그나마 북괴에게 함락· 점령당한 적이 없다. 6월 26일 새벽 대한해협 해전에서 대승도 거둔 덕분에 거기는 더욱 빨갱이 없는 청정지역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호남은 전지역이 북괴에게 점령당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한반도의 동남쪽으로는 일본이 있지만 서남쪽에는 중국이 있으니 이는 지리적으로, 군사 전략적으로 어쩔 수 없는 귀결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손 양원 목사는 부산보다도 위도가 더 낮은 최남단 후방인 여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빨갱이들에 의해 순교하게 됐다.

우리나라는 기독교인들의 순교가 일제 말기의 신사 참배 때보다도 6· 25 전쟁 중에 더 많았다.
신사 참배는 오히려 교단 차원에서 받아들이고 굴복했기 때문에 더 적었던 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그 교회들이 빨갱이들 앞에서는 호락호락 타협하고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체계적인 역사 교육이 필요하다. 이게 되면 적어도 크리스천 한정으로 반공 교육은 저절로 덤으로 이뤄지게 된다.

손 양원 목사가 여수에서 순교한 때는 1950년 9월 28일이었다.
겨우 사흘 뒤 10월 1일이 국군의 날인데 이게 뭘 기념해서 정해진 날짜인지 아는가? 38선 돌파 북진을 기념한 거다.
그때는 인천 상륙 작전이 이제 막 성공해서 북괴 공산군이 급 후퇴를 시작했으며 9월 28일은 1차 서울 수복일이기도 했다!

UN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전세를 뒤집을 획기적인 방법을 찾고 있었고, 결국 낙동강 전선의 전면돌파가 아니라 적군의 중간 보급로를 차단하는 특공대의 투입을 떠올리게 됐다.
인천은 극심한 조수 간만의 차이가 악재였다. 그도 그럴 것이 갯벌 뻘밭은 배로도, 차량으로도 다닐 수 없고 알보병들이 아무 엄폐물도 없이 적의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는 최악의 전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평택, 군산, 심지어 남포나 동해상의 항구 도시도 같이 고려 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남포는 평양과 매우 가까운 만큼 위험성이 너무 커서 배제되었으며, 나머지 지역도 비록 당장 상륙 난이도는 더 낮을지 몰라도 내륙에서 곧장 북괴의 보급로를 끊는 게 호락호락하지 않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그 당시에 보급로란 곧 경부선 철도를 의미했다.

그러니 최종적으로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인천이 당첨됐다. 일단 상륙에만 성공하면 인천 시내 시가전 정도만 거친 뒤 곧장 서울에 도달할 수 있고, 서울을 먹으면 서울 시내를 관통하는 경부선 철도의 장악도 금방이기 때문이다. 인천은 평택과 더불어 한반도 전체에서 서쪽 해안선이 내륙 쪽으로 가장 깊게 파인 지역이기도 하다.

이런 상륙 작전의 추진과 성공 덕분에 전세가 역전되었고 우리나라는 기사회생했다. 이 와중에 손 목사도 며칠만 더 버텼으면 살았을 텐데 인간적인 면에서는 아까운 죽음을 맞이했다.

국어학자인 최 현배 박사는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투옥 중에 1945년 8월 18일 처형 예정이었는데.. 사흘 일찍 아주 갑작스럽게 광복이 되는 바람에 극적으로 살아났었다.
하지만 손 목사에게는 그런 행운이 찾아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분은 안 그래도 그 전의 여순 반란 사건 때 아들을 잃었는데 전쟁 때는 당사자가 희생되어 정말 고난과 순교의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2. 주 기철 + 주 영진

1944년 주 목사의 죽음에 대해, 당시 주 목사와 가까이에서 수감되었던 안 이숙 여사는 일제가 주 목사를 약물을 주입해서 살해한 거라고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마치 윤 동주 시인의 죽음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건 해당 주장 외에 다른 교차검증 가능 요소가 없고, 또 그렇잖아도 고문 때문에 몸이 극도로 망가져 있던 사람을 일제가 일부러 교묘하게 죽이기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하는 점에서는 의구심이 든다. 더구나 그 당시 일제는 주 목사를 다 죽여 놓고는 면피를 위해서 오히려 보석 명목으로 풀어 주려 했는데, 오 정모 사모가 이 꼼수를 눈치채고 보석을 거부했었다.

윤 동주야 옥중에서 고문 당한 것 없고 건강한 상태로 멀쩡히 수감돼 있었는데, 이상한 주사를 여러 차례 맞으면서 점점 쇠약해지고 이내 죽고 말았다. 이건 동료 수감자들 사이에 여러 증언이 일치하며, 그 주사 맞다가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게다가 윤 동주는 반도도 아닌 일본 본토의 형무소에서 수감됐었다. 그러니 윤 동주는 생체실험 약물 주사로 인한 사망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반면, 주 기철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여겨진다.

주 목사를 다룬 이전 글에서 본인이 이미 지적했듯, 주 목사는 재판 받고 형을 정식으로 선고받은 기결수가 아니었다. 윤 동주는 말할 것도 없고 유 관순, 최 현배 같은 분들과도 사정이 다르다. 그냥 경찰이 제멋대로 "너 이 셰끼 왜 신사참배 안 해?" 식으로 주 목사를 불법 구금하고 괴롭힌 것에 가깝다.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가 있을 곳은 교도소는 절대 아니고 기껏 유치장 내지 구치소(정식으로 기소라도 했을 경우) 레벨밖에 안 됐다.

그리고 그 상태로 형이 확정되지도 않은 사람을 몇 년 씩이나(마지막 4차던가 5차 검속 기준) 가둬 놓는 건 말도 안 된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구속 기간은 법적으로 180일로 정해져 있고, 그때까지 기소할 껀덕지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피의자를 풀어 줘야 한다.

한 마디로 주 목사는 기독교 관점이 아니라 일제의 관점에서도 꽤 불법 막장 절차에 의해 구속당했던 것이다. 지금 박 근혜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언제는 태블릿이고 뭐고 증거가 넘쳐난다더니, 그 긴 기간 동안에 혐의 하나 입증을 못 하고 구속 기간만 억지로 질질 연장해서 가둬 놓고 있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시절에 일본의 법 체계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 같은 게 잘 적용되었을 것 같지는 않으며, 유치장· 구치소· 교도소가 엄밀한 구분 없이 그냥 '형무소'라는 시설 하나로 뒤죽박죽 통합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주 목사가 법적으로 기결수였는지 미결수였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었다. (☞ 평양 형무소 관련 자료)

끝으로 주 목사의 장남인 주 영진 장로 얘기를 하고 글을 맺겠다. 아버지에 이어 아들도 목회자의 길, 그것도 평범한 목회자의 길이 아니라 정말 엄청난 고난의 길을 가다가 끝내 순교했다.

일제의 박해가 끝나나 싶었는데 평양은 잘 알다시피 북괴 공산당의 소굴이 되었다. 이분은 뜻을 품고서 아예 월남하지도 않고 고난을 자처했으며, 거기서 종교인 반동분자로 단단히 찍혀 있다가 6· 25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이미 잡혀가서 순교한 것으로 추정된다. (☞ 관련 자료) 본인은 저분도 순교했다는 것까지는 이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예 월남하지도 않았다는 건 미처 몰랐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5 19:34 2017/10/25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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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평소에는 15년 넘게 개발하고 있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개발에 대부분의 역량이 집중되기 때문에 타 유명 프로그래머 고수들에 비해 타 플랫폼· 언어· 최신 프로그래밍 기술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은 덜한 편이다. 뭐, 자주 언급을 안 할 뿐이지 직장에서는 아무래도 갑님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니, 무엇이건 업무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맛보기 정도는 한다. 다만 그런 생소한 분야는 본인이 특장점이 없이 그냥 여느 평범한 프로그래머 A, B의 역량과 다를 바 없다.

먼 옛날에 Windows API와 MFC, Visual C++를 처음으로 공부할 때 그러했고, macOS나 안드로이드 개발을 처음으로 익힐 때도 마찬가지이다. 코드와 리소스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는지 감을 잡는 게 참 어려웠다. 이건 그야말로 프로그래밍 언어뿐만 아니라 각 플랫폼별 바이너리 실행 파일(DLL/EXE)의 구조, 개발툴의 기능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리소스(대표적으로 대화상자/화면 레이아웃)의 기술을 위해 XML을 쓰는 요즘 플랫폼에 비해, Win32 API의 rc 파일은 정말 구닥다리이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뭐, resource.h와 R.java처럼 개념상 일말의 공통점이 발견되는 것도 있다(개발툴이 자동으로 생성해 주는 리소스 ID 리스트).

또한 안드로이드의 경우, 굉장한 뒷북이긴 하다만 Eclair니 Froyo니 하던 시절과 비교했을 때 개발 환경이 몇 년 사이에 정말 엄청나게 달라져 있었다. 여전히 이클립스를 쓰는가 했더니 Android Studio라고 전용 개발툴로 진작에 갈아탔으며, 무엇보다 에뮬레이터도 x86과 arm이라는 엄청난 CPU 구조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는지 속도가 꽤 빨라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구글 내부에서 안드로이드 OS에만 달라붙어 있는 세계구급 날고 기는 프로그래머 엔지니어들이 도대체 얼마나 되며, 이들이 매일 생산하는 코드의 양은 또 얼마나 될까?

2010년대 이후에나 등장한 IDE가 copyright이 왜 엄청 옛날인 2000부터 시작하는지 궁금해서 검색을 해 봤더니.. 이건 그 옛날부터 개발되어 온 타 회사의 IDE를(이클립스 말고) Google이 인수해서 자체적으로 발전시킨 것이어서 그렇다고 한다. 으음..

이럴 때마다 늘 드는 생각인데, 새로운 문물이나 지식을 아주 빨리빨리 잘 익히고 남에게 가르치는 것까지 가능할 정도로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굉장히 부럽다. 난 굳이 말하자면 애초에 남이 안 하는 짓을 골라서 하는 일에 일가견이 있다. 그래서 정보 올림피아드도 공모 부문에서만 입상하고, 코딩과 논문으로 그럭저럭 지금까지 지내 왔다.
그게 아니라 남과 똑같은 조건에서 뭔가를 빨리 달달 외우고 응용하는 능력이라면 본인은 남들 평균보다 못하면 못하지 결코 뛰어나지는 않다.

컴퓨터 쪽에 우글거리는 수많은 고수 괴수들 중에.. 김 상형 님이라고 한때 winapi.co.kr 이라는 사이트를 운영했고 지금은 '소프트웨어 공학'을 일본어 스타일로 축약한 '소엔'이라는 사이트로 여러 유용한 프로그램 개발 정보를 무료로 공유 중인 대인배가 계신다.
사이트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 한때 이분의 전문 분야는 Windows API였다. 텍스트 에디터를 그냥 C++만으로 혼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었고, 그 테크닉을 소스까지 통째로 책을 출간한 바 있다..;;

한 분야의 기술만 통달하기에도 벅찬데 이분은 안드로이드, HTML, 자바스크립트 등 온갖 분야를 다 탐독해서 책을 쓰고 학원 강사로 뛰고 있다.
그냥 위에서 내려오는 회사 업무나 감당하기 위해서 여러 기술들을 찔끔찔끔 서바이벌 수준으로 익히는 게 아니다. 그야말로 남을 가르치고 책을 쓸 정도로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혼자서 도대체 공부를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한 걸까? 비결이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강의와 저술만으로 먹고 사는 데 지장 없는 분들은 굳이 회사 들어가서 조직에 매일 필요가 없다. 물론 프리랜서는 월급쟁이보다야 소득이 훨씬 불안정하고 복불복이 심하다. 보통은 자기 친구들에게도 "걍 회사에서 월급 받으며 지내는 게 짱이야, 아무리 엿같은 동료나 상사가 있더라도 어지간해서는 거기서 절대로 뛰쳐나올 생각 마라" 이렇게 권유를 할 정도라고는 하지만..
이것도 자기 하기 나름이다. 엄청난 능력자라면 을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업들을 상대로 갑질을 하면서 자유롭고 편하게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컴퓨터가 나왔으니 영어도 빠질 수 없다.
지금보다 자료 접근성이 훨씬 열악했던 옛날에 독학으로 이를 악물고 영어를 마스터해서 198, 90년대에 이미 유명 영어 교재의 저자로 등극한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최 은경 어린이 영어, 오 성식 생활 영어/pops English, 김 인환, 정 철 ... 그리고 최근에는 Arrow English로 유명한 최 재봉 이런 분들.

난 무슨 영문과 교수나 영어 교사, CNN 리포터-_-;; 이런 거 지향하는 게 아닌 이상, 국내에서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는.. "반도 토박이치고는 뭐 그럭저럭 하네" 딱 그 정도까지만 영어가 된다. 자막 없이 영화를 다 알아듣거나, 토익 만점 이런 경지는 아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나이는 자꾸 먹고 있는데 영어를 당장 쓸 일은 없으니 감이 점점 쇠퇴-_-하는 중이다.
도무지 들리지가 않는 것, 그리고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독해 속도를 도저히 더 올릴 수 없는 건 그냥 내 머리의 한계인 것 같다.

영어를 잘하려면 뭐 영어식 사고방식과 어순 감각을 익혀야 되고 무슨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하고.. 이런 것들은 그냥 기초가 없고 첫 단추부터 완전 잘못 끼운 생짜 영어 포기자한테는 꽤 유효한 조언일지 모른다. 영어 점수 2~30점을 6~70점으로 올리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90점을 95점으로 올리는 건 무리임. 저런 기초적인 문법과 어순 감각은 이미 다 갖춰져 있고, 거기서 상위권에서 최상위권으로 가려면 그냥 닥치고 영어라는 빅데이터에 수시로 많이 노출돼서 감을 유지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외국 어학 연수는 개나 소나 아무나 가는 게 아니라 딱 이 정도 기초가 갖춰진 애들이 가야지 효과가 높아진다.

그런데, 저런 여러 영어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영어 마스터 비결은.. 학창 시절에 영어 교과서 텍스트들을 몽땅 통째로 암송· 암기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언어에는 굉장히 무작위하고 arbitrary하고, 그냥 문맥이 곧 용례를 결정하는 그런 정보가 많다. 암송· 암기는 학습자에게 괴로운 과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거 효력은 확실한가 보다.
나도 테이큰의 전화 통화 대사 40초 분량은 통째로 줄줄 외우고 있긴 하다만.. -_- I don't know who you are ... I will find you. And I will kill you. 같은 거.. 그런데 영어를 잘하려면 그런 거 암기를 더 많이 해야 한다.

일본은 개개의 국민들이 다 영어를 못 하더라도 국가 차원에서 번역을 엄청 많이 잘 해 놨다고 그런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들이 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번역을 깔끔하게 잘한 것도 아니니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끝으로, 어려운 과목의 끝판왕인 수학이 있다. 수학은 영어와 달리 유행을 별로 안 탄다. 한편으로는 노력한 만큼 그대로 결과가 나오는 참 정직한 과목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타고난 머리 지능빨을 타니 불공평한 면모가 느껴지기도 하는 과목이다.
수학에는 '정석' 책 하나로 그야말로 억만장자가 되고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성공한 사람이 있다. 물론 이분 역시 머리가 공부벌레 괴수급이었으며, 굳이 책 안 쓰고 학원과 과외 강사료만으로도 그 옛날에, 겨우 20대 나이로도 왕창 잘나갔을 정도로.. 비범했다.

그런 정석의 저자가 말하는 수학 잘하는 비결은.. 수학은 처음에 느리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직접 계산해 보고 손으로 일일이 쓰면서 감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감이 생겨 있지 않은 사람이 눈으로만 보고 넘어가서는, 그리고 덥석 해설과 풀이를 봐서는 진짜배기 수학 실력이 절대 늘 수 없다고.. 참 너무 원론적이고 당연한 조언을 한다. 그건 게임으로 치면 그냥 무한 맵에 치트키 쓰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저 말을 프로그래밍에다가 적용하자면.. 일일이 직접 코딩해 보고 돌려 봐야 실력이 는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그 점은 본인 역시 적극 동의한다.
아무 감도 없는 사람이라면 노가다 코딩이라도 해 봐야 된다. 그런 경험을 많이 해 봐야 노가다 코딩을 왜 '노가다'라고 부르는지 그것부터 좀 알게 된다.

개발자, 프로그래머로 먹고 살려면 솔까말 트리 구조 순회 같은 재귀호출을 스택 배열로 직접 구현하기, 포인터 조작으로 연결 리스트의 원소 배열을 역순으로 바꿔치기 정도는 머릿속에서 로직이 어느 정도 암산이 돼야 하고, 굳이 컴퓨터가 없이 화이트보드 앞에서도 의사코드를 쓱쓱 적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사실, 유수의 IT 업체들이 학-석사 급의 엔지니어를 뽑을 때 코딩 면접도 딱 이 정도 수준의 난이도가 나온다. 무슨 "B+ 트리를 구현하시오, 동영상 압축 알고리즘의 모든 과정을 설명하시오"가 아니다. 그리고 크고 유명하고 재정 넉넉한 기업일수록 당장 현업에서 쓰이는 HTML5니 자바스크립트니 언어 문법 지식보다는 저런 미래의 잠재성과 응용력, 새로운 기술을 더 본다. 능력 함수에서 현재의 f(x) 값보다 도함수 f'(x)를 말이다.

다시 말해, 최신 자바스크립트나 HTML5 API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니까 당장 그런 걸 모르는 사람도 OK 하고 뽑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도 모르는 상태로 입사했더라도 현업에서 그런 것쯤은 30분 만에 즉석에서 공부하고 숙달될 능력이 있으니까 뽑는다는 뜻이다. 요구 사항이 훨씬 더 고차원적이다.

컴공과 수학의 관계는 어떨까? 물론 완벽하게 동치는 아니다. 기하 알고리즘을 구현하고 있는데 삼각형 넓이나 세 점의 방향을 구하는 공식, 3차원 공간에서 두 벡터에 대한 나머지 기저를 구하는 세부적인 외적 공식 같은 거야 당연히 까먹을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나면 당장 검색이라도 할 수 있으면 아무 문제될 것 없다.

단지, 수학은 그렇게 문제를 쓱쓱 풀어 나갔던 경험, 단 한 가지 경우라도 놓쳐서는 안 되고 논리적으로 완벽해야 한다는 그 관념이 나중에 프로그램을 짜는 데 낯설지 않은 정신적 자산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그런 관념이 오로지 반드시 학창 시절의 수학 문제 풀이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는 건 아니겠지만 말이다. 기본적인 머리가 있고 필요를 느끼면 결국은 나중에 다른 경로를 통해서라도 적응은 하게 돼 있다.

어휴.. 나도 말은 이렇게 써 놨지만.. 당장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어려운 문제를 대면하면 이게 도대체 지금까지 수업 시간에 배웠던 기본 수학 공식이나 법칙과 무슨 관계가 있고 무엇부터 적용해야 할지 막막한 게 많다. 맨날 이런 기억과 경험만 쌓이다 보면 그 누구라도 수학이 싫어질 수밖에 없고 수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_-;; 세상에는 나랑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던 시절에 그런 문제를 생각해 내고 '만든' 사람도 있구만.. 참 자괴감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22 19:35 2017/10/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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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국내 철도 동향

1. 경부선 ITX 청춘

한동안 열차 시각표를 안 보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최신판을 받아 보니 흥미로운 변화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잘 알다시피 2010년대부터는 생소한 동력분산식 전동차들이 잔뜩 도입되어 과거의 기관차-객차 패러다임을 뒤흔들어 왔다. 경부선에는 서울-수원/천안 급행 전동차의 상위 호환인 듯한 '누리로'가 무궁화호를 조금씩 대체하고 있다. 서울-부산 풀코스는 아니고 서울-신창처럼 반쯤 광역전철 같은 고유한 노선 위주로 달리는 중이지만, 명절 때는 누리로도 대전 정도까지는 간 적이 있으며, 호남· 전라선으로는 이미 풀코스를 뛰고 있다.

누리로가 경부선 전구간을 '누빌/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는 경부선 본선 말고 다른 노선이나 관광 열차로 뛰는 차량이 많은지라, 누리로의 서울-신창 편도 운행 횟수는 하루 2회꼴로 크게 감소해 있다. 이것도 완전히 폐지될 뻔한 것을 지역 주민들이 민원을 넣어서 2회라도 건진 거라고 한다.

한편, 누리로와는 달리 ITX-새마을은 이미 기존 새마을호를 완전히 대체했다. 2017년 현재, 과거의 새마을호는 장항선에서나 어제 오늘 하면서 연명하는 중이다. ITX-새마을은 도입 컨셉부터가 광역전철과는 딱히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런데 이 와중에 경부선의 용산-대전 구간에 한해서 ITX-청춘이 소수 편성되었다니, 굉장히 참신하게 다가온다. 경춘선의 전유물이던 2층 객차 열차가 경부선에도 납셨다니~! 게다가 얘는 영등포에 정차하지 않는 주제에 서울의 노량진과 신도림 역에도 정차한다. 노량진이라고 해서 지금 버려진 일반열차 플랫폼을 이용하는 건 아니고, 거기서는 애초에 그냥 전철 선로와 승강장을 사용하는가 보다. 그래야 신도림에 정차가 가능할 테니 말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경부선은 온갖 철도 차량들의 각축장이 됐다.
재래선이 이렇게 된 동안, 고속선은 잘 알다시피 기존 KTX와 수서 고속철 SRT가 섞이면서 한 선로에 둘 이상의 회사에 소속된 열차가 다니게 되었다.
지금까지 이런 운행 패턴은 서울 지하철과 코레일의 직통 구간에서만 볼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고속선이라든가 공항선 등 다양한 철도에서 흔히 보게 될 것이다. 일례로 공항선은 코레일 공항철도(기존 공철)뿐만 아니라 KTX가 다니고 있으며, 앞으로는 서울 지하철 9호선조차 직통 운행을 할지 모르는 상황이지 않던가?

그런데 SRT는 율현 터널 구간에 진동이 그렇게도 심한가 보다. 본인은 아직 거길 타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타 본 지인들의 증언이 일치하는 편이다. 승차감이 KTX 고속선과 비교했을 때 어떤지 어서 체험해 보고 싶다.

2. 중앙선 지평 역

수도권 전철에서 차가 극도로 안 다니는 최하위권 역 내지 노선을 꼽자면 경부선 천안 급행이나 경의선 신촌, 광명 셔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를 능가하는 역이 올해에(2017년 1월) 하나 더 생겼으니, 바로 중앙선 지평 역이다. 광역전철 역세권에서 아슬아슬하게 제외된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서 종점인 용문의 바로 다음 역에도 일부 전철을 운행시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수도권 전철 중앙선은 궁극적으로 무려 원주(...!)까지 연장 계획이 있으므로 미리 이렇게 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어차피 나쁠 것도 없다.

다만, 현재 지평 역은 열차가 하루에 편도 4회밖에 운행하지 않으니.. 서울-천안 급행과 비슷한 급의 레어템이다. 장암이나 옛 보정(분당선), 서동탄처럼 차량 기지 안에 임시로 만든 역도 아니고 위상이 조금 독특하다.

3. 기존 서울 지하철의 연장

경전철 말고 기존 서울 지하철(+수도권 전철)들도 생각보다 많은 노선들이 연장 공사가 진행 중이다.

  • 1호선: 지하철이나 도시철도가 아닌 광역전철의 영역이긴 하지만, 북쪽 경원선 구간이 소요산보다도 더 길어져서 연천까지 연장 예정이다. 단, 복선은 아니고 2~30분 간격으로 단선전철 형태로. 통근열차의 최후 구간까지 전동차가 쓱싹 해 버리고, 그보다 더 북쪽까지 가는 건 안보 관광 패키지 열차가 역할을 대신할 것이다.
  • 4호선: 당고개 이북으로 산을 뚫고 남양주 진접면까지 연장 예정이다. 이 기회에 창동 차량기지도 거기로 이전하게 된다.
  • 5호선: 상일동 지선의 종점이 동쪽으로 더 연장되어 하남시 미사 신도시와 검단산 기슭까지 간다.
  • 7호선: 부평구청보다 더 서쪽으로 인천 지하철 2호선 석남 역까지 연장 공사 중임.
  • 8호선: 암사 이북으로 남양주 별내까지 연장된다. 8호선도 드디어 강을, 그것도 하저터널로 건너는 지하철이 된다.
  • 9호선: 종합운동장보다 동쪽으로 더 나가서 보훈병원, 일자산 기슭까지 연장될 예정이다. 8호선과는 1990년대의 계획이던 몽촌토성이 아니라 석촌역에서 만나게 된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유일하게 여전히 '인서울' 연장이다.

이들과 달리 3호선은 2010년의 오금 연장 이후로 딱히 더 연장 공사 중인 게 없다. 그리고 6호선도 봉화산에서 조금만 더 가서 그냥 자기 차량기지 안에다가 신내 역을 만들어서 경춘선과 환승시키자는 떡밥이 있지만, 주민들의 적극적인 요구가 있지는 않고 진행이 지지부진하다.

말단이 광역전철과 연결되어 연장된 것을 제끼고, 서울 지하철이 지하철 명목으로 처음 계획되었던 구간보다 더 연장된 것은 현재 3호선(양재 이남으로 수서, 오금)과 7호선(온수 이남으로 부평구청)이 존재한다. 9호선은 신논현-종합운동장은 처음부터 계획된 게 완공된 것이고 이보다 더 동쪽이 추가 연장 구간이다. 앞으로 그런 연장 구간이 4, 5, 8, 9호선에도 생길 것이고, 7호선은 연장 구간이 더 길어질 것이다.

이건 3기 지하철이라고 보기에는 타이밍이 한 박자 좀 늦은 것 같고, 서울 경전철과 더불어 3.5나 제4기에 가까운 트렌드로 봐야 할 듯하다.
서울의 동쪽으로 철도 불모지이던 하남에도 드디어 저렇게 지하철이 들어오게 됐는데, 서쪽의 철도 불모지인 김포는 사정이 어떤가 모르겠다. 거기는 9호선과 연계되는 별도의 경전철이 건설 중이라고 들었다.

4. 서울 서쪽의 신규 종축 철도

1988년에 개통한 안산선은 금정에서 한대앞 역까지는 고유한 구간이지만, 한대앞에서 오이도까지는 기존 수인선과 선형이 동일한 구간이다. 다만, 처음에 개통은 금정에서 안산까지 하고, 안산에서 오이도는 추후 2000년에 개통했다.
이 안산선이 2010년대에는 드디어 수인선과 앞뒤로 수평 연결되었으며, 미래에는 수직으로 환승역이 하나도 아닌 둘이나 생길 예정이다.

하나는 한국 철도에서 코레일 타임 티스푼 공사의 전설이 아닌 레전드인 '신안산선'이다. 얘는 안산선 '중앙' 역과 환승되며, 목감· 광명 일대를 지나서 영등포와 여의도까지 갈 예정이다. 즉, 서울 방면이다. 과거에 계획되었던 서울 지하철 10호선의 대체 노선이며, 얘의 착공과 개통이 너무 늦어졌기 때문에 광명 역의 대중교통 연계가 안습해진 면이 있다.

다른 하나는 신안산선보다 더 서쪽으로 지나는 소사-원시선이다. 얘는 단순 광역철도 수준을 넘어서 장거리 간선 철도이며, 초지(구 공단) 역과 환승된다. 위로는 경인선 소사 역과 만나서 대곡까지 갈 예정이며, 밑으로는 안산시 단원구 저 끝의 원시동까지 간다. 얘 덕분에 시흥시의 교통도 더욱 편리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동해 방면으로는 경강선과 동서 고속화 철도, 동해선이 계획 중이라면, 서해 방면으로는 이런 철도가 계획되고 있다.

5. 한국 철도 차량의 등급과 유형별 도입과 퇴역 내력

끝으로, 이걸 정리해 보았다.
아래 표를 달달 외워서 머리에 다 집어넣고 의미를 이해한 분이라면 철덕의 기본적인 자질은 갖췄다고 볼 수 있겠다.

  동차형 기관차+객차형
새마을호 먼 과거 DEC: 1980년 도입되었다가 유선형 객차 도입과 함께 무궁화호로 격하, 2001년 퇴역.

가까운 과거 DHC: 1987. 7. 6. 대우중공업 제조 전후동력형 동차와 함께 도입. 동력집중+유압 변속
그 뒤 94년까지 현대· 한진중공업 차량이 추가 도입. 2013. 1. 5. 전량 퇴역함

현재 ITX-새마을 전동차
1974. 8. 15. 관광호의 후신으로 새마을호 차급 도입.
1985. 11. 16. 서울-부산 4시간 10분 증속.
1986. 7. 12. 현대정공 제조 7000호대 새마을호 견인 전용 봉고 기관차 + 유선형 객차 도입. 일부 객차는 훗날 무궁화호 특실로 격하됨.
2012. 11. 28. 봉고 기관차 천량 퇴역
2015. 4. 2. 경부선 정규 노선 퇴역. 모두 ITX-새마을 전동차로 대체되고, 재래식 객차형 새마을호는 이제 장항선에만 남아 있음.
무궁화호 먼 과거 EEC: 1980년 DEC와 함께 도입되었다가 1998. 12.부터 통일호로 격하. 2001년 퇴역.

가까운 과거 NDC: 1984년 도입되어서 시종일관 무궁화호 등급으로 운행함. 최후에는 경부선 경전선 영남 구간에서만 운행되다가 2010년 전량 퇴역. (차급 변경 없이 시종일관 무궁화호 유지)

현재 TEC 누리로: 단, 위상만 무궁화와 동급이지 기존 무궁화호를 대체하는 운행을 하지는 않고 있음
명칭 자체는 1960. 2. 21. 등장.
현재까지 비전철 구간을 다니고 있는 가장 만만하고 무난한 일반열차의 대명사.
통일호 CDC: 타 차급에서 옮겨온 것 말고 처음부터 통일호로 만들어진 동차는 이게 유일함. 1996~1999년 도입. 2008년부터 이들 차량은 RDC 무궁화호, 관광열차 등으로 개조됨.
현재 정규 노선은 '통근열차'라는 이름으로 경원선 소요산 이북 구간에만 남아 있고,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연천까지 연장되면 폐지 예정.
통일호만 유일하게 동차형이 객차형보다 더 오래 존속 중임.
명칭 자체는 1954. 8. 15. 등장.
차급 인플레로 인해 서서히 격이 낮아지다가 2004. 3. 31. 고속철 개통 바로 직전에 전량 퇴역.
최후에는 중앙선 근성열차와 경춘선에서 운행 중이었음.
비둘기호 제조사의 이름을 따 니가타/가와사키 디젤동차 등으로 불림. 경의선, 교외선 등을 다녔고, 수인선 협궤 동차도 등급상 비둘기호임.
1960년대 중후반에 두루 도입되었다가 8~90년대에 통일호 격상 등을 거친 뒤 폐차됨. 정확한 시기 불명.
여러 최하위 등급 완행열차들이 최초로 이 명칭으로 통합 정립된 것은 1984. 1. 1.
리즈 시절엔 전국을 누비기도 했으나 1998. 11. 30. 정선선만 남기고 모두 폐지.
정선선도 기관차+객차형이 다니다가 2000. 11. 14. 마지막 운행 후 폐지.

Posted by 사무엘

2017/10/19 19:36 2017/10/1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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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딩 시절에 어렴풋이 경험했던 옛날 컴퓨터 환경의 추억을 회상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16비트 환경은 베이직 이외에 C/C++ 같은 급의 언어로 프로그램을 직접 개발한 경험이 전무하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간다.
그래서 블로그에서 API 썽킹 얘기도 한번 했고, 1년 남짓 전에는 Windows 9x 시절에 악명 높던 리소스 퍼센티지를 32비트 프로그램에서 직접 구하는 방법까지 옛날 책을 뒤져가며 복습해 봤다. 이번에는 이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다룬 적이 없었던 다른 기술 얘기를 좀 해 보겠다.

시대를 풍미했던 Windows 9x는 왜 그리도 블루 스크린(BSOD)이 자주 뜨고 불안정했을까? 흔히 지저분한 16비트 코드 잔재 때문이라고들 그런다.
80386급 이상의 CPU에서 제공되는 보호 모드, 가상 메모리 같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굳이 그렇게 허접한 운영체제가 만들어질 일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단 하나.. CPU가 원론적으로 제공하는 기능들을 제대로 활용해서 이상적인 운영체제를 만들려면, 당시 서민들이 범접할 수 없던 엄청난 메모리와 속도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Windows 9x는 Windows NT와 같은 최신 32비트 선점형 멀티태스킹 환경뿐만 아니라 기존 16비트 도스/Windows 프로그램과의 호환성도 놓치지 말아야 하고, 이런 모든 미래와 과거 이념을 Windows 3.1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1990년대 중반의 서민들 컴에서 그럭저럭 구현해야 했다. 그러니 얘는 태생적으로 아주 기괴한 방향으로 개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파일 시스템이나 메모리처럼 반드시 32비트 덕을 봐야 하는 엔진 부분인 kernel은 32비트 코드 위주로 개발했지만, user나 gdi처럼 운영체제의 단순 외형과 관련된 부분은 16비트 코드를 그대로 답습했다. 이쪽 함수는 비록 32비트 프로그램에서 user32.dll, gdi32.dll을 통해 호출했다 하더라도 결국은 argument들을 thunk 해서 16비트 user.exe와 gdi.exe로 내려가서 기능이 수행된다는 뜻이다.

개량된 트루타입 글꼴 래스터라이저처럼 GDI 계층에도 32비트 코드로 다시 작성된 게 없지는 않지만 기본적인 틀은 여전히 16비트 기반이다.
Windows NT는 16비트 썽킹은커녕 훨씬 더 안정적인(하지만 속도는 좀 느려지는) 별개의 API layer가 있는 지경인데.. 9x와 NT가 서로 설계 이념과 처지가 얼마나 극과 극인지를 알 수 있다.

이런 설계 방식 때문에 Windows 9x는 16비트 heap 크기에 맞춰진 리소스 퍼센티지 한계가 여전히 걸려 있으며, GDI 좌표계도 기본적으로 32비트가 아닌 16비트 크기이다. 그래도 이런 건 그냥 한계와 제약일 뿐, 딱히 운영체제의 안정성과 관련된 문제는 아니다.
Windows 9x는 메모리 절약과 하위 호환성을 위해 (1) 16비트 코드를 많이 재활용했는데, 이걸 온전한 가상 머신 샌드박스 안에서 구동하는 게 아니라 (2) 32비트 코드와 동일한 주소 공간과 위상에서 동일한 권한으로 섞인 채 최대 성능으로 실행하는 것을 허용했다. 16비트 코드가 운영체제 차원에서 대놓고 돌아가는 부분도 있으니 저렇게 안 해 주면 안 된다.

그리고 이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Windows 9x는 NT와 같은 급의 (3) 엄격한 메모리 보호를 포기했다. 스레드 동기화나 가상 메모리 같은 현대적인 개념이 없이 쑤제 어셈블리어로 코딩된 레거시 코드가 한둘이 아니니, 걔네들이 있는 그대로 돌 수 있게 시스템의 안정성을 일부 희생하게 된 것이다.

32비트 프로세스가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최신식 private 메모리야 9x도 NT의 동작 방식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각 프로세스별로 동일하게 보호가 잘 된다.
그러나 9x에서는 32비트 프로세스라 해도 16비트 프로그램과의 호환을 위해 남겨놓고 있는 4MB 이내 주소대의 영역은 보호가 적용되지 않으며, 반대로 운영체제 시스템 DLL이 로딩되는 상위 영역도 성능 오버헤드 간소화를 위해 모든 프로그램들이 씨크하게 같은 주소로 공유된다. 보호 같은 거 없다.

나쁜 마음 먹은 프로그램이 이런 16비트 호환 영역이나 시스템 DLL 영역 주소를 0으로 덮어써 버린다거나 하면 운영체제를 BSOD와 함께 곧장 다운시킬 수 있다. Windows NT에서는 메모리 덮어쓰기만으로는 이런 사태가 절대로 발생하지 않고 문제의 프로그램만 강제 종료되고 운지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9x는 그 정도로 튼튼하지 못했다. 메모리 보호 강도가 반쪽짜리일 뿐이라는 뜻이다. 반쯤은 응용 프로그램이 선할 거라고 믿고 곧이곧대로 돌려 주는 셈이었다.

이렇게 메모리 보호 말고 Windows 9x가 안정성이 결정적으로 취약한 분야는 멀티스레드와 관련하여 또 있었다.
Windows 9x/NT는 3.1에서는 꿈도 꿀 수 없던 선점형 멀티태스킹이라는 것을 도입했다. 한 프로그램이 자발적으로 CPU 자원을 반납하지 않고 무한 뺑뺑이를 돌더라도 운영체제가 강제로 CPU 자원을 뺏어서 다른 프로그램에게 골고루 분배해 줄 수 있다. 또한 한 프로그램 안에서 UI 스레드 따로, 작업 스레드 따로 운용이 가능하다. 작업 스레드가 재귀호출까지 마음대로 하는 동안 사용자의 입력에도 매끄럽게 응답할 수 있다는 뜻이다.

즉, 가상 메모리가 메모리 주소를 잘못 건드리는 것만으로 타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를 뻗게 하지 않게 하는 공간 보호막이라면, 선점형 멀티태스킹은 한 프로그램이 CPU를 독식해서 시스템 전체의 동작을 먹통으로 만들지 않게 하는 일종의 시간 보호막이다.

선점형 멀티태스킹 환경에서는 내 스레드가 받고 있던 CPU 포커스가 싹 바뀌어서 타 스레드로 이동하는 게 정말 예고 없이 불시에 될 수 있다. 컴퓨터의 모든 코드가 자기 자신의 스택과 지역변수만 갖고 놀면서 고립된 채 돌아가는 게 아니며, 한 자원을 여러 스레드들이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코드에 둘 이상의 실행 주체가 동시에 진입했다간 프로그램 실행이 왕창 꼬여 버린다. 이건 마치 화장실에 문을 잠그는 기능이 없어서 누가 볼일이 아직 안 끝났는데 아무 예고 없이 문이 확 열리고 딴 사람이 들어오는 것과도 같다.

결국 스레드 사이에는 교통 정리 기법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크리티컬 섹션, 뮤텍스 등 다양한 커널 오브젝트들이 존재한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저 16비트 레거시 코드들도 선점형 멀티태스킹 통제의 대상이라는 것이며, 그 코드들은 레거시답게 멀티스레드 동기화 같은 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걸 고려할 필요가 없는 환경에서 개발되고 구현된 코드이니까 말이다.

이것도 메모리와 마찬가지로 16비트 코드를 완전히 자기 가상 머신에서 따로 돌게 하면 별 문제될 게 없으며, Windows NT는 실제로 ntvdm이라는 16비트 가상 머신을 돌렸다.
하지만 Windows 9x는 가상 머신을 돌릴 여력이 안 되는 PC를 대상으로 성능을 얻는 대신 안정성을 희생하는 방법을 택했다. 바로, 16비트 GUI 쪽 코드는 GetMessage, PeekMessage 같은 함수로 명시적으로 CPU 자원을 반납하지 않는 동안에는.. 전체를 동기화 오브젝트로 둘러싸서 어떤 경우에도 여러 스레드들의 동시 진입이 되지 않게 한 것이다. 이름하여 Win16Mutex라는 무시무시한 시스템 동기화 메커니즘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Windows 9x도 16비트 프로그램만 줄곧 돌린다면 과거의 Windows 3.x와 별 차이 없이 동작하게 된다는 뜻이다. 제 기능을 활용할 수 없다.
물론 32비트 코드도 16비트로 thunk하는 gdi/user 함수를 호출할 수 있다. 걔네들은 그 함수가 실행되는 동안에만 Win16Mutex 안에 잠시 들어갔다가 나온다. 그러나 16비트 프로그램은 Get/PeekMessage를 호출하지 않고 실행되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Win16Mutex를 붙들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동안 운영체제의 그 어떤 프로그램도 16비트 코드를 수행할 수 없으며, 앞 프로그램의 실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어떤 프로그램이 창을 띄웠다가 while(true) 같은 데라도 빠져서 응답이 멎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32비트 프로그램은 ctrl+alt+del을 누른 뒤 작업 목록에서 그럭저럭 강제 종료를 할 수 있었다. 이 기능 자체는 NT뿐만 아니라 9x 계열에서도 있었다.
하지만 옛날 기억을 꺼내 보면, 16비트 프로그램은 그렇게 깔끔하게 강제 종료가 잘 되지 않았다. 16비트 프로그램이 응답 불가 상태가 되면 운영체제 전체가 실행이 불안정해졌으며, 해당 프로그램을 강제 종료한 뒤에도 매우 높은 빈도로 블루 스크린이 계속되다가 운영체제가 뻗었다. 그 이유가 바로 (4) 16비트 코드는 애초에 선점형 멀티태스킹 대상이 아니며, 16비트 코드의 실행이 32비트 코드의 gdi/user계층 기능에까지 직통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이제야 퍼즐 조각이 끼워맞춰진다. 저건 메모리 보호와는 별개의 영역의 문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indows 95는 안정성이 더 헬게이트이던 Windows 3.x보다 많이 나아지지는 못해도 최소한 더 나쁘게 만든 건 없다. 그러니 제품으로 나와서 1990년대 중반의 PC 환경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었다.

물론 Windows 9x도 Windows API와 무관하게 완전히 분리된 환경인 도스용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그럭저럭 샌드박스를 지원하고 있었다. Windows NT의 ntvdm가 지원하지 못하는 더 다양한 도스용 프로그램을 직통으로 구동해 주면서도 말이다. Windows 3.x때부터 386 확장 모드가 도입되면서 Virtual 8086 모드를 이용해 도스창을 여러 개 동시에 여는 게 가능해졌다. 9x부터는 도스창을 강제 종료도 할 수 있게 됐다.

단지, 하드웨어를 너무 저수준으로 제어하는 도스용 프로그램이라면 대책 없으며, 16비트 Windows GUI 프로그램은 32비트 프로그램과 자원을 어중간하게 직통으로 공유하다 보니, 운영체제 전체에 여파가 끼치는 잠재적인 위험이 상존했던 것이다.

Windows NT, 9x, 그리고 더 과거의 win32s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Windows NT Windows 9x Windows 3.1 + Win32s
PE 방식의 32비트 EXE/DLL 실행, 32비트 메모리 접근 O O O
프로세스 별 고정되고 독립된 주소 공간 보장 O O X
DLL도 인스턴스별 독립된 공간 보장 O O X
선점형 멀티태스킹과 멀티스레드 O O X
레지스트리, 32비트 파일 시스템, 최신 TTF 래스터라이저 O O X
온전한 메모리 보호 O △ (private area만. 도스 호환 영역과 커널 영역은 보호되지 않음) X
유니코드 API O △ (코드 변환, 메시지, 기본적인 문자 찍기 정도만 한정) X
유니코드 기반 O X X
user, gdi 계층이 완벽하게 32비트. 리소스 제약 없음 O X X
16비트 프로그램 가상화 O (안정적임) X (도스용 프로그램만 가상화. 느리고 메모리 적은 컴 친화적) X
하드웨어 계층 추상화 O (이식성. 하지만 느림) X (x86 전용, 저사양에서 성능 최적화) X
NTFS 파일 시스템 O X X
시스템 요구사항 압도적으로 제일 높음 win32s보다 더 높지만, NT보다는 훨씬 낮음 제일 낮음

이상.
지금 생각해 보면 컴퓨터가 성능이 정말 열악하던 시절에 어째 저런 유리몸 Windows를 어떻게 쓰고 지냈나 싶다. 특히 9x 계열 중에서도 1호인 Windows 95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도 안정성이 굉장히 안습했으며, 지나치게 고성능인 컴퓨터를 감당(?)하지 못하는 물건이었다.

  • 잘 알다시피 디렉터리명에 CON 같은 예약어가 들어간 채로 파일 목록 조회 같은 요청을 하면 운영체제 전체가 뻗는다. 탐색기이든 dir 명령이든 마찬가지. 95/98에서는 별도의 버그 패치가 나왔고, ME에서야 버그가 처음부터 완전히 수정되었다.
  • 부팅 후에 밀리초 단위로 부호 없는 32비트 정수 범위를 초과하는 대략 7주(49.x일) 이상 계속 켜져 있으면 역시 뻗음. Windows 95는 알고 보면 7주짜리 시한폭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게 NT도 아니고, 무려 7주가 지나기 전에 십중팔구 어차피 다른 이유로 다운되고 재부팅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 문제가 별로 부각되지 않았을 뿐이다. 이 문제 역시 별도의 버그 패치가 추후 공개되었다.
  • 저사양 PC에서 가상 메모리를 관리하는 방식의 한계로 인해, 램이 512MB보다 더 많은 컴에서는.. 단순히 초과 잉여 영역이 인식되지 않고 무시되는 게 아니라 그냥 부팅되지 않고 뻗는다.
  • 클럭 속도가 대략 2.1GHz보다 더 높은 컴에서는 Network Driver Interface Specification라는 계층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뻗었다고 한다. 너무 빠른 컴퓨터에서 레거시 코드가 문제를 일으킨 유명한 다른 사례로는 볼랜드 파스칼의 crt 유닛이 266MHz보다 더 빠른 컴에서 오류를 일으켰던 것이 있다. 이런 것들은 대체로 내부적으로 시간 측정을 하다가 0으로 나누기 오류가 발생하는 형태인데, Windows의 저 문제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니 옛날부터 컴덕들은 OS/2나 Windows NT 같은 신세계를 갈망하긴 했지만, 그걸 돌리려면 흙수저 가정에서는 엄두를 못 낼 정도의 비싼 고성능 컴퓨터가 필요했다. 윈95가 나왔던 시절에는 램 16MB도 돈지랄 감지덕지이던 시절이고 32~64MB는 가히 꿈의 영역이라 여겨졌었으니 말이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에 가정용 보급형 PC들도 램 용량이 급증하여 100수십 MB급이 되었다. 그제서야 하드디스크 스와핑/thrashing을 볼 일이 없어졌으며, 마소의 입장에서는 NT와 별개로 굳이 헝그리한 9x 커널이 존재해야 할 명분이 사라졌다.

지금까지 옛날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았는데..
본인은 우리나라 역사 내지 이념을 Windows의 개발 내력에다 비유해서 설명하기도 한다. 매우 적절한 비유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이 승만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내각은 독립 운동가· 광복군 위주로 철저하게 깨끗하게 건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간과 말단의 군· 경 간부는 친일 부역자들도 불가피하게 그대로 재등용하여 운용되었다. 독립 운동가를 적극 무료 변론하다가 일제에게 찍혀서 면허 정지까지 당했던 애산 이 인 선생이 해방 후에 법무부 장관이 되고 나서는 오히려 반민특위의 해체에 앞장섰을 정도였다.

이게 Windows 95가 일단 겉으로는 32비트 코드 기반으로 개발되고 32비트 주소 공간과 선점형 멀티태스킹을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16비트 코드를 잔뜩 재등용하고 메모리 보호가 완전하지 못했던 이유, 수시로 파란 화면 뜨고 불안정했던 이유와 정확하게 일맥상통한다.

한 마디로 그 시절에 가정용 컴퓨터에서 Windows NT 같은 운영체제를 돌리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직 조선과 일제 강점기 사고방식에 쩔었고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던 사람이 태반이던 시절에.. 게다가 북괴의 위협과 비열한 공작까지 횡행하던 시절에, 일제 치하에서 행정 유경험자를 재등용하지 않고서 치안을 유지하고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FM대로 이상적으로 세우고 굴리는 것도 동급으로 절대 불가능했다.

Windows 95의 한계에 대해서 정리해 보니 이 생각이 더욱 굳건하게 확신이 든다. 그 시절의 운영체제든, 194~50년대의 우리나라 사정이든 흑역사와 한계는 불가피하게 발생했던 것이지 악의적으로 일부러 발생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아폴로 17호 이후로 인간이 달에 안/못 가고 있는 이유는 다른 악의적인 거짓이나 음모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재정이 부족하고 가성비가 안 맞기 때문인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쓸데없이 자국 비하를 조장하고 사람 정신건강을 해치고 일제보다 더 나쁜 악을 정당화하고 무마하는 이 악하고 해로운 생각은 보이는 족족 반박하고 뿌리뽑아야 하며, 거기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을 산업화하고 일깨워 줘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4 08:36 2017/10/1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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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sual Basic 6은 이제 개발사로부터 지원이 중단된 지 무려 10년이 돼 가는데(나온 지는 20년..!) 아직도 현업에서 쓰는 경우가 있는지 모르겠다. Visual C++ 6도 업계에서 도를 넘는 노인학대를 당해 온 물건이긴 하지만, 그래도 얘는 이제는 거의 은퇴한 듯하다. 그리고 VB6과 VB .NET은 VC6과 VC .NET하고는 처지가 완전히 딴판으로 다르다.

비주얼 베이직이 오늘날까지 인류에게 남긴 독보적인 GUI 유산은 바로 property grid이지 싶다. 이거 원조가 바로 VB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운영체제의 공용 컨트롤로 제공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닷넷에서는 자체 구현한 컴포넌트가 있는 듯하며, 네이티브 환경에서는 그냥 3rd-party GUI 툴킷에서 구현해 놓은 레플리카 내지 짝퉁이 쓰인다.

property grid는 오늘날까지 Visual Studio IDE에서 Alt+Enter 속성 창과 프로젝트 속성 대화상자에서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수십 개의 설정들이 추가되더라도 번거롭게 대화상자를 디자인할 필요 없이 설정을 뒤에다 추가만 하면 되니 참 편하다.
이에 비해 VC6의 옛날 속성 대화상자는 얼마나 추레하게 생겼는가?

단, 외형이 깔끔하긴 해도 너무 사무적이고 재미없게 생겨서 그런지, 개발툴이나 DBMS 말고 일반 사용자용 Office 제품 같은 데서는 property grid가 등장하는 걸 여전히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Visual Basic은 1991년 5월에 Windows용으로 1.0이 첫 출시됐다. 드래그 앤 드롭 방식으로 폼을 디자인하고 곧장 이벤트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코딩을 하는 굉장히 획기적인 개발툴이라고 찬사를 받았음이 틀림없다. Windows용의 호평에 힘입어 그 해 9월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도스용 비베도 1.0이 나와서 QuickBasic과 MS Basic PDS의 라인을 종결시켰다. 하지만 VB의 UI 엔진은 경쟁작이던 볼랜드 Turbo Vision 라이브러리에 비해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그 뒤 VB 2와 3은 16비트 Windows용으로 나와서 인기를 얻다가 95년에 나온 4.0은 16비트용과 32비트용이 나란히 동시에 출시되었다. 마소에서 제품을 이런 식으로 동일 버전을 16비트용과 32비트용으로 동시에 내놓는 건 극히 드물었고 아마 VB4가 거의 유일했다. Office나 VC++는 그냥 상위 버전에서 곧장 32비트용이 나오면서 16비트 지원을 중단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VB도 5부터는 당연히 32비트 전용으로 갈아탔다. VB6 이후의 .NET에 맞춘 언어 마개조의 역사는 굳이 여기서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델파이(네이티브 코드 지원 RAD), Java(압도적으로 넓은 플랫폼 지원, 인지도, 점유율)와 C#(닷넷 지원 킹왕짱) 같은 경쟁 솔루션이 너무 쟁쟁한테 비주얼 베이직 프로그래머 수요가 국내에 얼마나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ASP도 비베와 비슷한 문법인 걸로 아는데 그건 살아 있나?
또한 비베가 .NET 으로 바뀌면서, 기존 Office와 Visual Studio IDE에서 제공되던 VBA 매크로 언어까지 반쯤 낙동강 오리알 레거시로 전락한 것도 좀 아쉬운 점이다. 덕분에 Visual Studio 201x 최신 IDE는 지금도 제대로 된 키/스크립트 기반 매크로가 없는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이런 비주얼 베이직과 달리 C/C++ 컴파일러 라인은 원래 IDE 같은 게 없다 보니 도스/Windows 플랫폼은 그리 타지 않았다. C/C++은 베이직과는 완전히 다른 저수준 고성능 시스템 프로그래밍 언어이지 않던가? Windows는 NT 이전엔 애초에 자체적인 명령 프롬프트라는 게 없던 물건이었고, C 컴파일러는 도스 환경에서 스위치만 바꿔서 도스뿐만 아니라 Windows, 그리고 그 당시 중요한 플랫폼이던 OS/2용 프로그램을 크로스 컴파일했다.

그러다 1990년대 초에 이쪽은 C++ 언어 추가 → MFC 도입 → MS C/C++ 8.0 대신 Visual C++ 1.0으로 명칭 변경 같은 중요한 사건을 겪었으며, 리소스 편집기와 간단한 소스 코드 에디터가 16비트 Windows용으로 나왔다.
그리고 1993년, Windows NT가 출시되면서 NT용 32비트 Visual C++ 1.0이 별도로 나왔지만 이때는 NT는 시장 점유율이 아주 미미했으니 별 재미를 못 봤다.

그 뒤 1993~94년 사이에 Visual C++은 16비트와 32비트가 서로 약간 엇갈린 길을 갔다. 16비트용은 1.5 ~ 1.52c가 나온 뒤 지원이 중단됐고, 32비트용으로는 2.0이 나왔다. 하지만 아직 Windows 95도 없던 시절에 NT밖에 지원하지 않는 32비트용 VC++ 2는 정말 존재감이 없다. 이 32비트 바이너리를 Windows 3.1에서도 아쉬운 대로 돌릴 수 있게 하기 위해 Win32s라는 런타임이 이 시기에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얘 역시 본격적으로 이름이 부각된 건 Windows 95가 나온 뒤부터였다. 요컨대 Win32s는 95의 등장 이전부터 NT 3.1과 오리지널 3.1 사이의 gap을 메우기 위해 존재해 왔던 물건이다.

그 뒤, Windows 95가 나오고 1995년 말에 출시된 Visual C++ 4가 대박을 치면서 마소의 개발툴이 볼랜드 같은 타사 컴파일러를 슬슬 제치기 시작했다. Developer Studio라는 통합 IDE도 이때 처음으로 등장했다(텍스트 에디터, 리소스 에디터, 디버거, 빌드 툴, 도움말 레퍼런스 모두 한데 통합). VC4 시절에는 UI상으로 생뚱맞게도 맥용 크로스 컴파일이 있었던 모양이나, 본인이 직접 써 본 적은 없다.

이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인터넷 기반 제품 업데이트가 없다 보니 소숫점 첫째나 둘째 자리가 0이 아닌 제품 버전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Win32s는 Visual C++ 4.1까지 지원되다가 96년 가을에 출시된 4.2에서부터 지원이 중단됐다. 설치할 때부터 "이 버전부터는 Win32s를 지원하지 않으니 이걸 타겟으로 개발하려면 구버전을 쓰고 이건 설치하지 마세요"라고 확인 질문이 뜬다.

비베는 4.0에서야 32비트 에디션이 등장하고 16비트와 32비트가 공존했던 반면, C++은 진작부터 32비트가 존재했고 그 대신 Win32s라는 과도기를 거쳤다는 차이가 있다.
또한 비베는 21세기부터는 닷넷 기반 언어로 완전히 탈바꿈해 버린 반면, C++은 이전부터 위상이 위상이다 보니 닷넷의 공세에 영향을 받지 않있다. 차라리 C++/CLI 같은 파생형 확장이 나오면 나왔지, 네이티브 코드 개발 부분은 바뀐 게 없다.

비베는 5와 6에서 잠시 MS Office 97 기반 GUI 엔진을 사용했고, 닷넷 200x에서는 그 기반을 계승하여 Office XP 및 파생 변종 GUI를 사용했다. VC++의 4~6에서 쓰인 IDE는 MFC를 써서 Office와 비슷한 외형이 나오게 자체적으로 만든 GUI 엔진 기반이었다.
그러던 것이 Visual Studio 201x부터는 WPF 기반의 완전히 독자적인 고유한 GUI를 사용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매번 외형을 바꾸던 것도 이제는 지쳤는지(?) 2013 이후쯤부터는 안 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7/10/12 08:35 2017/10/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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