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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下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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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 선생 묘소의 비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닳아 있었는데 이곳이 허 준의 묘지라는 것은 꽤 어려운 계기를 통해서 알려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이 출간된 게 1611년이라고 하니 KJV 신자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에서 흠정역 성경이 나온 동안 조선에서는 의학 서적이 만들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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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의 언덕은 전원적이고 경치가 좋았다. 물론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지뢰밭?)이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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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주 적성면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였다. 주변엔 공원도 있어서 산책하고 쉬기에 좋았다.
미국의 인지도에 밀려서 그렇지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도왔던 국가이다.

특별히 이 전적비는 1951년 4월 22~25일 동안 이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하고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번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 자신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652명 가운데 겨우 67명만 살아남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제일 먼저 여기 가서 참배부터 한 뒤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육해공 참모총장과 김 관진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화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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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글자가 좀 작긴 하지만, 임진강 역과 일대의 임진각 관광지는 지도에서 4번이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가 3번, 제3 땅굴은 2번이다. 땅굴을 견학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지하로나마 DMZ 구간에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동그란 점선은 민통선이고, 더 이북으로 길쭉한 점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허 준 선생 묘지는 24번이요, 영국군 전적비는 22번 근처에 있다. 이 지도 자체가 영국군 전적비 입구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초청자분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왕 적성면까지 자차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적군 묘지도 좀 들를까 했다.
국도 37호선을 타면서 근처를 분명 지나긴 했을 터이나 발견은 못 했다.

하긴, 이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진짜 최소한의 예우만 해서 매장해 놓은 묘지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묘비에 이름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결정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종북 간첩 불순분자 정치인도 여기 가서 참배를 했다거나, 이곳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병신짓을 한 적도 없다. (뭐, 적군 묘지를 띄워 줄 수는 없으니, 반대로 국립 현충원 참배가 부당한 강요라고 희대의 개드립을 날린 빨갱이 정치인은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게 되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과 종북 좌빨의 spirit은 역시 절대로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민통선 안에 들어가서 제한적으로나마 사진 찍고 실시간으로 SNS와 카톡으로 자기 근황까지 알리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게 무엇 덕분이고 누구 덕분일까?
또한 공무원· 관료가 아니라 엔지니어· 발명가가 대접받고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 구조 덕분에 컴퓨터가 발명되고 인터넷이 뚫리고 페이스북,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레알 넘사벽급 선진국이 맞다.)

그에 반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전국을 드나드는 게 우리가 지금 민통선을 드나드는 것과 비슷한 절차이다. 평양 시민이 아니면 일반 평민들은 출입증 없이는 시· 도도 못 빠져나간다.

우리나라는 군대 현역 복무가 2년가량이고 예비군까지 합쳐야 10년 남짓이지만, 북한은 남자들의 현역 복무가 10년이어서 20대 중· 후반까지를 전부 군대에서 날린다. 예비군 소속은 사실상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60대) 평생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전국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경찰도?)을 무진장 많이 뽑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생산을 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군대를 돌아가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진장 착취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근본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북한의 비효율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야기되는 게 아니다. 겨우 이념만이 문제였다면 북한도 중국이나 소련처럼 경제 시스템을 개방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냥 무력 군사 도발에 분노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북한 수뇌부의 시스템과 대처 매뉴얼, 알고리즘이 본질적으로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선이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는 점도 말이다. 이걸 놔 두고 무슨 미국이 경제 봉쇄를 해서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니,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니 하는 건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악한 국가가 6·25 시절처럼 정상적인 무력 기습으로는 우리나라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유를 악용하여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족 자주 통일 드립을 치면서 안보관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띄울 건 없으니 반대로 남한을 비하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통선 패스를 갖고 계신 어르신은 역시 안보관과 사상에 관한 한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 더하시더라. 정말 울분을 터뜨리면서 지난 종북 정권이 저지른 반역 행위를 비판하셨다. 개성 공단은 10년 공들인 탑이 아니라 10년간 앓던 충치에 더 가깝다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도 잘한 것만 있는 게 아니며 역사적으로 자신의 병크를 북풍으로 합리화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안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한 이슈로, 무슨 국내 치안처럼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처럼 신사적으로만 진행해서는 곤란한 면모도 있다. 간첩 한 명만 칼같이 가려내고 단 한 명도 억울하지 않게 공권력을 집행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 아라크넹 님은 “원전을 없애자고 할 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필요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몇 배로 오른 기름값과 전기료를 감수하면서 무턱대고 원전을 없앨 참인가? 현실적인 변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무작정 원전을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부 수사 기관이 종북 수사를 병신같이 한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종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더 시급한 때임이 틀림없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전툴루, 전땅크 각하는 잘 알다시피 퇴임 후에도 25년이 넘게 장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강의 호강을 누리는 중이다. 돈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세금 추징금도 안 내고, 훈장도 반납 안 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는 다 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 건강도 아직 좋고 팔팔하다.

리즈 시절에 제3 땅굴을 발견한 것 좋으며,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형 집행을 시원스럽게 잘 해 준 것도 분명 잘한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의 모습은 좀 좋은 간증(?)이 못 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놈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전땅크 각하에게 공개적으로 제안 드린다.
아예 대놓고 국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 줬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지고서 이왕 구겨진 이미지를 확실히 완전히 구기란 얘기다. -_-;;
저 사람이 그 배짱으로 광주 5.18 피해자들한테 사죄(?)를 할 리는 없으니, 사죄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우익 쪽에 힘을 실어 주는 소신 발언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서”라고 말할 배짱이 있으면, 차라리 그때 명령을 따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고, 팀킬 오발 사고 때문에 몇몇 광주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희생된 건 애석한 일이라고... 심지어 5.18 때 북한 특수군이 쳐들어온 게 사실이기라도 하면 그것도 언급하라.
그게 사실이고 그 시절 자기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면 그 소신이라도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란 말이다. 지 만원 박사 같은 사람이 기를 쓰고 주장하는 내용을 당사자가 직접 입증해 보아라.

전직 대통령이니 얼마나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겠는가? 그런 말 아무리 해도 신변에 위협을 받을 일도 절대 없을 테고!
그것이 전땅크 각하가 그나마 마지막에 세금값 하는 인물로 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난 광주 5.18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성향으로든 남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꿔 놓을 정도의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뭐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경의선 쪽을 갔으니 다음 안보 관광은 철원 경원선 라인으로 갈 예정이다. 제2 땅굴, 노동당 청사, 백마고지/월정리 역, 금강산선 옛 철교 흔적 등 말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6/11 08:39 2013/06/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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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中

다음은 임진각 전망대에서 북쪽 도라산 역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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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 건너편은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며 북한 땅은 더욱 아니다. 건너편은 그저 민통선 안쪽일 뿐이다.
과거의 경의선 철교와 지금의 경의선 철교의 위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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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에서 평화 공원으로 가는 길엔 이렇게 6·25 참전국 기념비가 있고, 아웅산 폭탄 테러 순직자의 위령비도 있다.
6·2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전쟁이다. 6·25만치 선악 이념이 분명했던 전쟁은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UN이 창설 이래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딱 한쪽 편을 들어서--당연히 대한민국 편-- 반대편을 적극적으로 퇴치하는 군사 활동을 했으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국가들이 오로지 한 자그마한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불법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을 생각해 보아라. 미군이 개입했던 전쟁 중에 6·25만치 참전 명분이 깔끔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굳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제3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6·25는 여타 전쟁들과는 달리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지도가 매우 저조하다. 아예 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구도가 너무 명확하다 보니, 딱히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하거나 삐딱하게 풍자· 비판을 할 껀덕지가 없어서 잊혀졌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이라크, 베트남 등에 비해, 6·25는 전쟁을 겪은 당사자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뜬히 이뤄 내고 G20 급의 선진국이 되어 있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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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원래 부통령이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DR)가 급사한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 양반이다.
그가 6·25 때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북한· 중공군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다”와 “한반도에서 또 핵이 떨어지고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뻔했던 상황을 예방했다”라는 두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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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화 공원을 살펴본 뒤, 우리 일행은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도라산 행 열차를 탔다. 문산-도라산도 아니고 임진강-도라산 겨우 한 정거장 거리만을 이용한 것이다.

개인이 도라산 역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왕복 승차권 구입과 더불어 연계 안보 관광 패키지 신청도 같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역 주변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정책이 또 바뀐 것 같다.
이 지대의 관광 상품은 도라 전망대, 제3 땅굴, 통일촌 견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4시간 정도 걸린다.

역 주변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역시 보안 시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통제하는 헌병이어서 그런지, 다들 키 크고 체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20대 초반 나이일 텐데 말이다.

도라산 역의 옛날 사진을 보니 역명판의 서체가 목판체 계열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코레일체도, HY울릉도도 아니라 윤 디자인에서 만든 월드컵체이다. 철도역에서 월드컵체를 볼 일이란 원래 전혀에 가깝게 없을 텐데 뜻밖이다.
역이 개통한 시기와 저 서체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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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은 출· 입구 관리 사무소와 세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물론 현재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시설) 내부가 꽤 크고 넓다. 승강장 역시 KTX 한 편성 정도는 너끈히 세울 수 있어 보이는 규모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없이 한동안 설명만 좀 늘어놓겠다.
역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른 뒤, 도라 전망대로 향했다. 여기는 민간 관광객에게 개방되긴 해도 엄연히 일종의 GOP이며 군사 시설이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이 전망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가 보였다. 기정동 쪽은 깃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료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펄럭이지 않을 뿐 인공기도 꽂힌 게 보였다. 게다가 북한 쪽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서 있는 북한군 병사까지 보였다! 김일성 백성들도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호모 사피엔스이긴 했다.

이게 내가 브라운관이나 LCD 같은 전자 기기가 아닌 매체로 북한 관련 시설물을 본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 쪽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광객도 굉장히 많았다. 미국인이야 그렇다 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도라 전망대 다음으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을 견학했다.
옛날에는 관광객들이 건물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를 걸어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지만, 지금은 승강 열차가 생겨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다.

주요 소지품들은 사물함에다 맡기고, 헬멧을 지급받은 뒤 몇백 m 정도 거리를 산보하듯 다녀 왔다. 땅굴 입구 자체가 거의 DMZ 경계선 근처에 있고, 땅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한계는 지상에서 군사 분계선이 200m도 채 안 남은 지점이 끝이다. 그 이상은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 굳게 잠긴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땅굴은 키가 170cm가 넘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안 들키게 병력 수송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만 굴착을 한 셈이다. 땅굴을 파는 게 좀 힘드나.. 지하철이라는 게 처음 등장하고 전기 철도가 도입되었을 때 제3궤조 집전식이 괜히 쓰였던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터널의 단면적이 작아도 되기 때문이다.

육로를 통한 남침 방법이 완전 원천 봉쇄되고 차단되자, 비열한 김 일성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땅굴을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악한 통치자 밑에서 영혼이 완전히 황폐화된 채 사는 북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한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땅굴은 여러 개 팠으면서, 북한은 정작 평양 지하철을 만들던 중에는 대동강 아래를 관통하는 하저 터널 건설에 실패했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제3 땅굴은 1978년에 전땅크가 육군 제1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박 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탐사 작업을 통솔하다가 끝내 발견했다. (...) 이 양반, 그래도 리즈 시절에 나라를 구하는 과업을 한 건 이뤘다.

우리가 주로 관광한 것은 이 둘이었고, 그 뒤엔 통일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좀 놀다가 다시 도라산 역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내부는 온통 농경지나 황무지, 군부대이고, 민통선 내부이다 보니 사람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가 아닌 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지뢰 매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도라산 연계 관광을 마친 뒤에는 초청자를 따라 개인 명의로 두 곳을 더 돌아다녔다. 일단, 허 준 선생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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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내비 화면 인증이다(텅 빈 지도!). 파주시는 임진강 건너편은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 준 묘지는 아무나 곧장 갈 수 없다. 도라산 안보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인된 여행사를 통한 단체 관광으로만 갈 수 있으며, 개인 자격 방문은 민통선 내부 출입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행을 얼마나 인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고 오는 차량의 대수가 늘어나면 절차가 그에 비례해서 더 까다로워진다.

민통선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조상 대대로 그 지대에 땅을 갖고 있었거나 그 지대의 땅을 산 지주는 국가로부터 출입증을 교부받는다고 한다. 물론, 출입 가능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 그 출입증만 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민통선 지대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민통선 출입이 일반 커피라면 대성동 출입은 가히 TOP이다. 거긴 민통선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까지 넘은 최고로 위험한 DMZ(비무장지대) 안이고, 레알 군사 분계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거길 드나들려면 당일 신분증 제시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하 두 주 이상 전에 방문 신청을 해서 신원 조회를 받아야 하며, 마을에 들어간 뒤엔 신분증을 아예 맡겨야 된다. 승용차에는 하늘색 천을 달아서 펄럭이게 하고, 유엔 사령부 소속의 군인으로부터 완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이동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8 19:34 2013/06/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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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上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시는 모 자매님은 고향이 파주 적성면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인 형제님과 결혼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북단 거주자와 최남단 거주자가 만난 셈.)
이분은 성장 배경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파주 북부의 지리에 아주 밝고, 또 부모님이 민통선 출입증까지 갖고 계셨다.

본인은 이분과 같이 교제를 하던 중에 어째 이 주제로 얘기가 나왔고, 덕분에 하루는 이분의 가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주 경의선 라인 쪽으로 거창한 안보 관광을 같이 가게 됐다.
작년 여름에 갔던 평택 해군 기지 이후로 바이블 빌리버와 함께 하는 안보 관광 제 2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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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승용차를 몰고 임진강 역으로 향했다.
강변북로와 서쪽에서 직결되는 자유로는 무려 10차선에 달하는 정말 넓은 도로였다.
과연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더불어 폭주족들이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에 난리를 부릴 만도 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딱 한 번, 지점이 아니라 구간식 속도 단속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즉, 특정 지점 한 군데에서만 제한 속도를 넘는지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작점부터 끝점에서 차량 번호와 진입 시각을 두 번 파악하는 단속 방식 말이다. 그 구간 사이를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리면 단속에 걸리니, 차들은 강제로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차선 수도 덩달아 줄었다.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느 샌가 짙은 안개로 확 뒤덮였으며, 차의 유리에도 성에가 꼈다. 좌우 주변의 경치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뭐 날이 밝자 안개는 곧 걷히고, 다행히도 하루 종일 아주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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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은 바로 옆에 관리인이 없는 무료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도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나 나중에 낮이 됐을 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워 둔 차들로 인해 그 공간이 꽉 차고 빈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 경의선에는 문산 역까지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문산은 1906년에 경의선이 처음 개통할 때부터 있었던 역이며 남북이 분단된 뒤부터는 수십 년간 경의선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문산 다음에는 곧바로 장단 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대중 정권 시절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북한과 선로가 연결까지 되면서 21세기에 문산 이북으로 3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2001년에 가장 먼저 임진강 역이 생겼고, 2002년에는 드디어 민통선 안에 도라산 역까지 생겼다. 운천 역은 더 나중인 2004년에 문산과 임진강 사이에 생긴 임시승강장이다. 지역 주민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역이지만 어차피 전철이 문산까지밖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임진강 역 근처에는 임진각, 평화 공원 등 여러 볼거리가 많다.
위의 사진에서 교각만 놓인 옛 다리는 6·25 때 파괴된 원래 경의선 철교의 흔적이고, 그 옆에 놓인 새 다리가 바로 다시 놓인 경의선 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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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평화 공원에는 '평화 열차'라 하여, 관광용 협궤 증기 기관차가 다닌다. 물론 생김새만 증기처럼 생겼고, 실제로는 기름으로 달린다.
나의 관심사는 (1) 이 선로의 궤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2) 남이섬에 있는 '유니세프 나눔 열차'와는 동일한 규격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평화 열차의 선로는 수인선 협궤(762)보다는 약간 더 작은 듯했고, 한 우진 님께서 남이섬 열차의 궤간도 640쯤 되는 듯하다고 추측하신 걸로 보아, 둘이 거의 동일한 규격이 아닌가 싶다.
눈짐작으로 이런 궤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철덕에게 필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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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중단점은 경원선 신탄리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사실, 상술했듯이 경의선도 시설이나마 연결된 지는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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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미카' 형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의왕의 철도 박물관과 더불어 임진각에도 한 량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6·25 때 순직한 김 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도 이것과 같은 차종으로, 그 실물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객차까지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미카'는 emperor를 뜻하는 일본어 '미카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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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증기 기관차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분 되시겠다.
'마터' 형 화물용 증기 기관차. 이름부터가 mountain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산악+화물 컨셉으로 제작된 고출력 기관차이며, 1940년대에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에 제조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생김새가 전통적인 미카, 파시 같은 열차보다 좀 이질적이다.

이 열차는 1950년 12월에 영문도 모른 채 북한 쪽으로 달리다가 경의선 장단 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열차와 수송 물자를 적군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청야 전술에 의해 아군의 사격을 받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쇳덩어리가 수백 발의 총알을 맞아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밖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그게 목적이라면 열차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것이다. 허나 증기 기관차는 무슨 전후대칭 전동차 같은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차대가 없는 역에서는 진행 방향을 그렇게 전환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열차를 운행 불능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장단 역은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 기관차도 핏빛에 가깝게 새빨갛게 녹이 슨 상태로 무려 수십 년 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분단, 안보 관련 서적에는 이 기관차의 사진이 꼭 등재되곤 했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이 기관차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으로 가져와서 녹 벗기고 광 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2009년부터 임진강 역 주변 평화 공원에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이제 갈색으로 바뀌었다. 단,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은색 도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이 열차를 당시에 운행했던 기관사는 한 준기(1927-2011) 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 이거 안보 관광으로 시작했는데 철도 얘기만 자꾸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 (거 봐, 철도와 안보 의식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6 08:40 2013/06/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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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철도의 집전 장치

전기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은 아니고, 훌륭한 동력 공급원이며 매력적인 에너지이다. 그러나 생산과 동시에 광속으로 흘러가 버린다는 특성상, 전기는 여느 물리적인 연료와는 달리 저장과 축적이 어렵다는 게 난감한 점이다. 획기적인 장거리 무선 송전 기술이라도 개발되지 않는 한, 전기로 움직이는 교통수단에다 전력을 공급하는 방식은 다음 세 시나리오 중 하나로 귀착될 것이다.

  1. 자기가 전력을 직접 생산해서 쓴다: 이건 뭐 원자력 잠수함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제낀다. 디젤 전기 기관차 같은 경우도 응당 논외로 하고.
  2. 전적으로 배터리로부터 공급받는다: 무겁고 비싼 배터리의 충전 용량과 충전 시간, 그리고 수명 같은 여러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다. 게다가 배터리는 충· 방전을 거듭할수록 용량이 하락하기 때문에 교체가 필요한 소모품이다. 그래서 순수 배터리 기반 전기 자동차는 단거리나 소형 교통수단에 머물러 있고, 하이브리드는 반대로 무게와 가격 문제 때문에 중형급 이상의 고급차에나 적용되고 있다.
  3. 전차선으로부터 공급받는다: 철도는 그나마 이게 가능해서 다행이다. 아니면 딱 전차선이 놓인 노선만 달리는 시내버스 정도나 말이다.

그래서 3번에 속하는 전기 철도 차량의 경우, 차량의 일정 부분이 전차선과 접촉하면서 끊임없이 전기를 공급받아야 한다. 가장 무난한 방식은 전차선을 선로의 위에다 달고, 열차는 천장에 달린 팬터그래프가 그 전차선과 접촉하여 전기를 받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어떤 철도가 전철화되면 선로 주변엔 일정 간격으로 어마어마한 개수의 전봇대가 세워지고 빨랫줄마냥 전깃줄이 선로를 따라 주렁주렁 달린다. 전철화는 아무래도 주변 미관에는 좋은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 없다. 무슨 지중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전철화 작업에는 초기에 굉장히 많은 시설 부설 비용이 들기 때문에, 초기 투자 비용을 능가하는 이익이 날 거라는 확신이 설 정도로 장사가 잘 되는 노선만을 선별하여 전철화를 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이 최초로 쓰인 것은 아니다. 전차선을 열차의 위에다 설치하는 게 아니라 아래의 선로에다 같이 설치하는 방식이 먼저 쓰였다. 일명 제3궤조 집전식.

여기서 용어 설명을 좀 하겠다.
'궤조'란, 열차 하나가 다닐 수 있는 철길을 구성하는 길다란 선 모양의 쇳덩어리 하나를 가리킨다.
이 궤조가 특정 궤간을 유지하여 평행하게 둘 깔리면 '궤도'가 된다. 열차가 궤도를 벗어나는 사고를 일으키면 탈선했다고 표현한다. 그리고 모노레일은 궤도가 단 하나의 궤조로만 구성된 교통수단이다.
끝으로, 노반이 다져지고 침목도 깔리고 열차가 실제로 달릴 수 있는 형태로 궤도가 놓인 철도 시설 전체를 '선로'라고 부른다.

따라서 제3궤조라 함은, 한 궤도에 양 바퀴를 올려놓는 두 개의 궤조뿐만 아니라 전력을 공급하는 제3의 궤조가 하나 또 놓인다는 걸 일컫는다. 전기 철도라고 해서 무조건 치렁치렁 전차선과 전봇대가 달려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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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유명한 사진이다. 이것은 독일의 베르너 폰 지멘스가 발명한 세계 최초의 전기 기관차로, 1879년에 베를린 박람회에 출품하여 선보인 모습이다.
좌우로 총 6명의 승객이 앉은 객차가 3개(= 총 18명) 편성되었으니, 영락없는 놀이공원용 꼬마열차 크기이다. 궤간은 겨우 490mm로 일본 케이프 궤간의 절반, 표준궤의 1/3 규모에 불과하다. 박람회장 내부에 설치된 시험선은 300m 남짓한 길이였다고 한다.

규모가 워낙 작기 때문에 혹시 그냥 배터리로 달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건 아니고, 그 작은 선로의 중앙에 직류 150V짜리 제3궤조가 있었다. (오늘날 지하철이 사용하는 1500V가 아님! 0이 하나 빠졌다. 그냥 가정용 전기 콘센트와 비슷한 규모의 전압.)
기관차는 3마력짜리 전동기로 그냥 사람이 살짝 빨리 걷는 속도인 시속 6km를 냈다고 한다. 단, 객차를 끌지 않고 기관차만 혼자 달릴 때는 그 두 배의 속도도 가능했다고.

제3궤조 집전식은 선로 주변의 미관을 해치지 않으며 시설 부설 비용이 저렴하다. 차량의 위에 치렁치렁거리는 주변 시설이 없으니 특히 지하철의 경우, 딱 열차 하나만 간신히 지나갈 만치 터널을 작게 뚫어도 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건설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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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극단적으로 작은 터널은,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을 기준으로 건설된 지하철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위의 사진은 세계에서 최초로 건설된 지하철인 런던 지하철이다. 런던이야 제3으로도 모자라서 제4궤조라는 특이한 집전 방식까지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쓰는 동네이다만, 얘네들뿐만 아니라 고무 타이어로 유명한 파리 지하철도 제3궤조요, 일본 도쿄의 지하철도 초창기에 개통한 두 노선인 '긴자'(1927) 선과 '마루노우치'(1954) 선은 직류 600V 제3궤조 집전식이다. 그러니 이들 지하철이 다니는 곳은 선로 주변에 전차선이 보이지 않는다.

전차선을 차량 아래의 선로에다 또 하나의 궤조 형태로 설치하는 방식은 저렴하고 미관에 좋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단점도 만만찮아서 선로에 사람이나 이물질이 떨어지면 안전이 굉장히 위협받게 된다. 또한 선로 분기나 교차가 발생하는 지점에서 전력을 공급해 주기 어려우며, 건널목 같은 데는 아예 절연을 시켜 줘야 한다. 선로가 침수되거나 결빙됐을 때도 골치가 더 아파지는 건 덤이다. (작년 겨울에 의정부 경전철이 운행 멈춘 것 기억하시는지?)

물론, 바닥에 놓인 전차선의 위에다 덮개를 씌워서 제3궤조를 사람이 밟는 것 정도로는 감전이 되지 않게 하는 최소한의 안전 장치는 다 있다. 하지만 그 경우 열차의 입장에서 집전 설비가 더 복잡해지고 유지 비용이 증가하는 건 불가피하며, 이런 한계로 인해 제3궤조 방식 전철은 고속화가 좀 어렵다. 영국에서 있는 수단 없는 방법을 다 동원하여 시속 160~170km 정도까지 달려 본 게 최고 한계라고 한다.

게다가 제3궤조로는 직류 수백 V, 혹은 정말 많아야 1000몇백 V 정도까지는 보내도, 이런 방식으로 수만 V에 달하는 교류 전기를 보내는 건 아무래도 위험하고 무리이다. 장거리 철도로 쓰기에는 전력 손실이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3궤조 집전 방식은 고속철 내지 장거리 간선용으로는 쓰이지 않으며, 끽해야 광역전철이고 지하철, 혹은 아예 저비용 경전철용으로 용도가 굳어져 가는 추세이다.
롯데월드에 가 보니 범퍼카가 천장을 향하는 집전봉이 달려 있지 않고 바닥으로부터 전기를 공급받는다는데, 이게 개념적으로는 제3궤조식으로 바뀐 셈이다. 하루 종일 눈 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하는 카에 배터리가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공중에다 전차선을 따로 부설하는 방식도 사실 역사가 길며, 우리나라만 해도 그 기원을 찾자면 서울에 노면전차가 다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에는 전차선으로부터 전기를 끌어 오기 위해 '집전봉'(trolley pole)이라는 막대가 쓰였다. 이건 점과 점을 일치시켜 접촉해야 했기 때문에 전차선이 레일과 조금만 어긋나 있어도 전기 공급이 끊어지기 쉬웠으며, 특히 한 상태로 차량이 전진과 후진을 동시에 할 수 없었고 고속 주행도 당연히 어려웠다.

그래서 접촉면을 점이 아니라 전차선과 수직 방향인 선으로 바꿔, 선의 아무 지점에나 전차선이 닿아도 집전이 가능하게 한 뷔겔(bow collector)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것도 전차선의 높이 변화라든가 주행 방향에 유동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문제점이 있어서 스프링이 달린 팬터그래프 집전 방식이 발명되었으며, 이것으로 오늘날의 신칸센이나 KTX 같은 고속열차가 달리고 있다.

뷔겔과 팬터그래프의 차이는 간단하다. 전자는 열차 지붕에서 전차선까지 닿는 데 꺾이지 않는 막대기 하나가 쓰이지만, 후자는 사람의 팔처럼 한 번 꺾이는 막대기가 쓰인다.

앞으로 전기 철도를 구경할 일이 있으면 집전 장치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도록 하자.

Posted by 사무엘

2013/06/03 08:37 2013/06/03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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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에 살으리랏다

1. 철도 기도문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민족을 사랑하셔서 대한민국에 철도라는 아름다운 문명의 이기를 교통수단으로 주시고 특별히 새마을호와 KTX 같은 열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행길에 지나가는 은빛 레일을 성결(sanctify)하게 하시고, 이 철도 여행이 영을 소생시키고 강건하게 하는 시간이 되게 하며, 열차 운전을 위해 수고하는 기관사와 승무원들에게도 힘과 지혜를 허락해 주시길 원합니다.

더 나아가 철도를 통해 이 나라가 복을 받고 부강해지며, Looking for you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는 열차 객실 안에서 다시 울려 퍼져 듣는 이들에게 희열과 감동을 주고, 모두 철도 사랑 국토 사랑 정신으로 무장한 철덕후로 변화되는 놀라운 역사를 허락해 주시옵소서.
열차 탑승을 앞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드리며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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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 다니던 시절, 철덕 초창기에 찍었던 사진이다. 지금은 볼 수 없어진 열차가 대전 역 플랫폼에 들어오고 있다.

철도는 고품격 웰빙 교통수단이다. 승객의 시간을 벌어 주고 국가 경쟁력과 생산성을 제고하는 기반 인프라이다. 그래서 난 오늘도 디젤 엔진 소리와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운 VVVF 구동음 음향을 들으며 사색에 잠긴다.

철도는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도로 정체, 소음과 진동, 급정거· 급커브 스트레스, 차멀미, 차냄새로부터는 구원할 수 있다.

2. 나의 꿈과 상상력을 이끌어 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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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다 집어넣어 버리고 싶다.. ㅠㅠㅠㅠㅠ

사법고시나 교원 임용 시험이 이런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난 고시생 모드도 할 만할 것 같고 법조인이나 교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하지만 현실은 그러하지 않으며, 난 더 먼저 시작한 오덕질과 생업이 따로 있으니 이건 취미로만..ㅠㅠㅠㅠㅠㅠ.

3.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꿈

얼마 전의 주말엔 주중에 쌓인 피로를 감당치 못해서 낮잠을 좀 잔 적이 있었다.
이제는 나이가 나이여서 그런지 본인은 10여 년 전처럼 밤샘은 절대로 못 하겠고, 꼬박꼬박 최하 6시간 반 이상 자지 않으면 낮에 반드시 그 시간만치 채워서 자야만 하는 수면 시간 보존의 법칙이 성립하는 중이다.

그리고 본인은 “불면증이 뭐야? 먹는 거야?” 체질이다. 눈 한번 감았다 뜨면 최하 2시간이 그냥 앞으로(뒤로는 아니고ㅎㅎ) 워프되어 있고 아주 개운하다. 꿈도 거의 안 꾼다.
그런데... 그 날은 하필 꽤 진지한 개꿈을 꿨다.

꿈이 뭔고 하니..
서울시에서 공휴일에 하루 종일 지하철의 운행을 멈추고 터널을 시민들한테 무료 개방했다. -_-;;
그래서 나는 친구/지인들을 데리고 선로 곳곳을 누비면서 지하철 배선 구조를 그들에게 설명하고, 특히 선로와 선로 사이가 연결된 지점들을 답사했다.
(가령, 충무로 역에는 승객만 3, 4호선을 환승하는 게 아니라 전동차도 3, 4호선을 상호 건널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존재한다)

꿈 꾸는 중에는 머리가 온전히 돌아가지 않고 사리 판단을 100% 온전히 할 수 없으니, 지하철이 올스톱했을 때 서울 시민들의 멘탈이 얼마나 붕괴되는지에 대한 고려는 없었다.
허나, 그 와중에도 나는 신설동 역 지하 3층의 봉인된 승강장을 기억하고 찾아갈 생각을 할 정도의 지각이 있었다.

아마 용인 경전철을 시승했던 경험이 꿈에 그런 식으로 나타난 것 같다.
이거 마치 요셉이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황당한 꿈 이야기를 하는 심정이다. 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3/06/01 08:29 2013/06/0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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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선의 역사

금강산선에 이어서 이번 기회에 우리나라의 산악 철도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즐거운 한국 철도 역사 탐방 -- 태백선 편이다.

태백선은 중앙선(제천)과 영동선(동백산) 사이에 있으며, 우리가 서울에서 강릉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거치는 노선이다. 고속철이나 대도시 광역전철이 아니면서 대한민국에 2013년 현재 마지막으로 건설된 지방 대 지방 ‘신규 간선 철도’로도 잘 알려져 있다.

태백선이 없던 시절엔 서울에서 강릉을 갈 때 무려 경상북도 영주까지 내려가서 영동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했으니, 이는 어마어마한 우회와 낭비가 아닐 수 없었다.

태백선은 경부선처럼 처음부터 서울-부산 같은 식으로 전구간이 작정하고 한 번에 확 구상되고 건설된 게 아니다. 서로 다른 여러 소규모 철도들이 독립적으로 찔끔찔끔 건설되고 연장되어 왔는데 그것들을 통합하면서 최종적으로 태백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다.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다.

위키백과의 다음 그림이 태백선의 복잡한 내력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철도 동호계에서 유명한 ‘조사부장’이라는 분이 만든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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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일제 강점기 때 건설되었다가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새로 치면 마치 멸종한 '모아'(moa)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태백선은 해방 이후에 전적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주도 하에 건설되었다.
생각을 해 보시라. 예전에 한반도에는 탄광과 공장이 거의 다 북부 지방에 몰려 있었는데 그게 이제 전부 북한 차지가 되어 버렸다. 남한으로서는 목숨을 걸고 자기네 지역에 있는 탄광이라도 개발해야 하지 않겠는가. 산업선 철도의 건설은 국가의 생존이 걸린 과업이나 마찬가지였다.

1955년에 처음으로 제천-영월(약 34.1km) 구간이 건설된 것이 영월선으로, 이것이 태백선의 전신 되시겠다. 그 후 이 철도는 연장되어 함백 역까지 이어졌으며 함백선이라고 이름이 바뀌었다.

그런데 함백 역에서 동쪽으로 더 연장을 하기가 어려웠다. 지형의 특성상 급커브와 급경사가 불가피했다.
그래서 함백이 아니라 전역인 예미에서 새 선로를 뻗어서 조동, 증산, 정선을 이었으며, 제천에서 정선까지를 통틀어 정선선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함백선은 예미에서 함백까지 가는 구선로만을 가리키는 지선이 되었다.

그럼 함백은 막다른 종착역(terminal)으로 전락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가는 선로는 1975년에 추가로 건설되어 함백선에 편입되었다. 단, 저 그림에서 볼 수 있듯, 급경사를 감안하여 동그란 똬리를 그리면서 우회하는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2013년 현재 대한민국 철도에 등장하는 4개의 똬리굴 중 하나이다. (중앙선에 두 곳, 영동선에 스위치백을 대신하여 건설된 솔안 터널, 그리고 저것)

결국 예미에서 조동으로 가는 길은 곧은 길과 함백을 경유하여 우회하는 길 두 갈래가 존재하게 됐다. 요약하자면 함백으로 가는 길이 가장 먼저 생겼지만, 그 뒤에 함백을 거치지 않고 바로 조동으로 가는 지름길이 나중에 생겼고, 함백에서도 조동으로 똬리를 틀며 가는 길이 가장 늦게 생겼다.

지선인 함백선과 태백선 본선은 지리적으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혹시 태백선의 부분복선 구간으로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으며 이들은 서로 독립적인 단선이 둘 존재하는 형태일 뿐이다. 양 선로에서 상행과 하행이 모두 오간다.

다만, 똬리굴이 없는 지름길은 우회가 없는 대신, 법적인 설계 한계에 육박할 정도의 급경사를 자랑한다(30퍼밀). 2도가 채 안 되는 오르막도 철도 차량에게는 굉장한 부담이다.
그래서 무거운 화물 열차들은 상· 하행을 막론하고 함백선을 거쳐 가는 편이었다. 여객 열차는 맞은편에서 오는 열차와 원활히 교행하기 위해 함백선으로 진입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는데 요즘은 그쪽으로 지나는 열차가 없다고 그런다.

태백선과 함백선의 관계는 이 정도로 충분히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새로 건설된 예미-조동 지름길 선로(현재의 태백선 본선)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라멘(독일어 Rahmen) 식 교량 위에 놓여 있다. 일명 라멘교. 열차가 여기를 지날 때 창 밖으로 아래를 보면 함백선이 응당 내려다 보인다. (이 시점에서 FSM교의 'RAmen!' 구호라든가, 면발과 국물과 김치의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라면교가 떠오른다면 지는 거다 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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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960년대에 조동-예미 구간이 개량되고 정선선이 건설되고 있던 동안, 증산(현재의 민둥산)에서는 정선뿐만 아니라 고한으로 가는 철도도 건설되었으며, 동쪽에서도 황지(현재의 태백)에서 백산까지 현재의 영동선으로 치면 지선에 해당하는 철도가 건설되어 있었다. 이제 슬슬 두 철도가 동서로 한데 이어져야겠다는 스멜이 스물스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73년에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가장 마지막으로 고한과 황지가 연결됨으로써 중앙선과 영동선을 한데 잇는 철도가 완성되어 최종적으로 태백선이 완성되었고, 정선선은 함백선과 마찬가지로 태백선의 지선이 되었다. 서울 방면에서 강릉으로 바로 올라가는 용도로 쓰이는 태백삼각선은 함백선의 똬리굴과 마찬가지로 1975년에 건설되었으며, 이 시기에 중앙선과 태백선, 영동선 구간은 전철화까지 완료되었다.

하지만 자동차 도로 교통이 발달하고 석탄 산업이 망하면서 이들 산업선의 지위 역시 오늘날 매우 쇠락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뭐, 화물 수요가 꾸준히 있고 사북-고한 구간은 강원랜드-_- 때문에 여객 수요가 있으니, 완전히 망한 수준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평창 동계 올림픽에 맞춰서 제천도 아니고 아예 원주에서 분기하는 강원도 행 철도가 복선 전철로 깔끔하게 건설된다면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릉에 빨리 갈 수 있게 될 테고, 기존 태백선의 여객 수요는 크게 감소하는 게 불가피하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9 08:40 2013/05/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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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최초의 전기 철도, 금강산선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는 금강산선이라는 철도가 있었다. 경원선 철원 역에서 분기하여 국토의 딱 중부를 동서로 횡단한 뒤 금강산 근처의 내금강 역까지 가는 116.6km 길이의 철도이다. 처음에는 일본 내륙 철도 스타일의 협궤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표준궤로 형태가 변경되어 전구간 개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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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선은 3·1 운동으로 인해 전국이 떠들썩하던 1919년 3월 말에 건설이 논의되어 1924년에 부분 개통하고 1931년이 돼서야 전구간 개통했다. 건설 도중에 현장이 극심한 수해를 입기도 하고 일본 본토로부터 납품받을 예정이던 열차 부품이 그 유명한 관동(간토) 대지진 때 소실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금강산선은 한국의 철도 역사에서 무척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바로 한반도에 건설된 역사상 최초이자 일제 강점기 시절을 통틀어 유일했던 전기 철도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의 기존 글들을 뒤져 보면 전철이라는 금강산선의 위상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많이 강조하지만, '유일'이라는 점은 상대적으로 덜 부각시키는 편인 듯.

전기 기관차는 매연을 뿜지 않으며, 물이나 석탄을 보충할 필요가 없이 전차선으로부터 에너지를 곧장 공급받아 아주 조용하고 우아하게 나아간다. 칙칙폭폭 같은 소리도 안 난다. 열차라고는 증기 기관차밖에 없던 그 시절에 전기로 달리는 열차가 있었다니 참으로 획기적인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일제 강점기는 디젤 기관차조차 없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디젤 기관차가 도입된 때는 6·25 중이던 1951년이다. 금강산선을 달리던 전기 기관차가 시대를 얼마나 앞서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금강산선에 전기를 공급하던 원천은 인근의 산악 지대에 건설된 수력 발전소였다. 지금은 대한민국의 기관차의 차종들을 2000호대부터 8000호대까지 번호를 붙여서 식별하지만, 그때는 기관차마다 이름이 붙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전기 기관차는 '데로'라고 불렸다.

전기 규격은 팬터그래프를 이용한 직류 1500V. 그러니 요즘 어지간한 지하철과 동일한 규격이 되겠다. 100km가 넘는 간선이면 교류를 써서 더 고압의 전기를 보내는 게 효율이 더 좋을 법도 해 보이나, 그 당시엔 더 정교한 변압 시설을 갖출 여건이 안 됐던 것 같다.

금강산선은 기업이 영리를 위해 건설한 사철이었으며, 거리당 임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용도는 대도시 통근을 위한 광역전철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하자원 수송을 위한 산업선도 아니었으며 건설 목적은 다름아닌 여가· 관광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웰빙 열차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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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은 예나 지금이나 천혜의 경치를 자랑하는 관광지로 명성이 자자했기 때문에 금강산선을 타고 금강산을 구경 가러 일본과 중국에서도 관광객이 왔으며 학교에서는 수학여행 코스로도 애용되었다. 서울에서 경원선과 금강산선을 직결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금강산선은 장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고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열차는 하루에 7번 정도 다녔다고.

이게 왜 전철로 건설되었느냐 하면, 노선의 성격상 스위치백까지 있을 정도로 험준한 오르막을 오르는 산악 철도이기 때문이다. 증기 기관차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힘 좋은 전철을 투입하고도 정차를 가장 적게 하는 최고속 열차로 금강산선 전구간을 편도로 완주하는 데 4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표정 속도는 오늘날의 지하철보다도 살짝 느린 시속 30km대에 불과했다. 복선은 아니고 물론 단선 전철이다.

이렇듯, 금강산선은 우리나라 최초+유일한 전철 겸 관광 컨셉 노선으로서 잘 굴러가고 있었으나, 그 영광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44년에는 일제가 '전쟁 물자 공출' 명목으로 금강산 종점 부근의 선로를 무려 49km나 뜯어내는 병크를 저질러서 금강산선은 금강산까지 갈 수 없는 노선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38선 시절에는 전구간이 북한으로 넘어가 버렸다. 6·25까지 터진 뒤부터는.. 그저 묵념.

앞의 지도에도 나와 있듯, 금강산선은 전반적인 선형이 오늘날의 군사 분계선과 묘하게 비슷하다. 경원선이나 경의선은 북쪽으로 향하는 종축 노선인 반면, 금강산선은 횡축 노선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철원 일부 지역은 대한민국이 수복했기 때문에 정말 극소수 일부 구간에 존재하는 금강산선의 옛 흔적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북한에 속한 일부 구간은 북한이 2003년에 금강산 댐을 건설하면서 아예 수몰되기도 했다. 철덕으로서 아쉬움이 교차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점은, 강원도는 남한과 북한 공히 양국에서 가장 낙후한(...) 지역이라는 점이다. 방향만 다를지언정 양국의 입장에서는 최전방 지역인 데다 지형도 험준한 산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통일되더라도 이제는 서울에서 금강산까지는 그냥 관광버스가 다니지 과연 철도가 다시 건설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금강산선은 재건되더라도 예전과 같은 선형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금강산선 이후로 대한민국에 전기 철도가 다시 등장한 건 무려 1970년대 초에 태백선과 중앙선이 산악 철도 산업선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전철화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때 국가의 표준 전철 규격은 60Hz짜리 교류 25000V로 정해졌으며, 그 이름도 유명한 알스톰 사의 8000호대 전기 기관차가 도입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직류 1500V짜리 서울 지하철이 개통하기도 했다.

사실, 중앙선· 태백선 일대는 그 시절부터 만성적인 수송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는 전구간을 복선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러자니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리고 선로 말고도 열차의 소통을 심각하게 저해하던 병목 중 하나가 바로 디젤 기관차의 열악한 출력이었다고 하니, 당시 전철화가 얼마나 시급했는지 짐작이 간다.

전기 기관차는 가감속 좋고, 한 기관차에 어마어마한 양의 객차/화차를 연결할 수 있으니, 복선화가 아니라 전철화만으로 수송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환경 이슈 같은 건 논의 대상조차 아니었다.

한편, 북한은 장거리 간선에 직류 3000V와 평양 지하철에 직류 750V를 쓰고 있어서 우리나라와는 전기 규격이 일치하지 않는다. 더구나 북한은 지하철은 팬터그래프가 아니라 제3궤조 방식으로 집전한다. 전철화 비율 자체는 한동안 북한이 남한보다 더 높았다고 하나, 전기 공급 자체가 원활하지 못해서 말짱 황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6 08:39 2013/05/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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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적인 철도 드립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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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12. 31.
2000. 11. 14.
1981. 12. 23.
1984. 1. 1.

당신은 이런 날짜들만 봐도 가슴이 설레고, 우리나라 역사 속의 순간들이 곧장 떠오르는가?

내가 거의 9~10년 가까이 철도를 빨면서 느낀 건데, 철도는 혼의 구원만 빼고 인간 정서에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긍정적인 효과를 줄 수 있다.
학창 시절에 국사 과목을 지지리도 싫어했던 나 같은 사람도 연표 암기를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이 할 수 있게 해 준 존재가 바로 철도이다. 정말 Looking for you를 3천 번 정도 들어 보면 사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

내 아이가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고 역사와 지리에 애착을 갖고 매사에 감사할 줄 알고 문과· 이과· 예체능을 골고루 갖춘 인재가 되길 원하는가? 그럼 어릴 때부터 온몸으로 철도를 경험시키고, 철길 주변에서 아이를 키워라. 난 대학 졸업할 때가 다 돼서야 철도를 접한 완전 늦깎이여서 그렇게 못 자란 게 한이다.

2000년대 초에 아직 코레일이 출범하기 전에 우리나라의 철도청은 정부 기관이었으며 승무원은 죄다 ‘공무원’이었다. 그리고 철도는 국영, 독점이라는 수식어를 받는 가장 경직되고 사회주의적인 교통수단이었다. 적자가 나도 그냥 세금으로 메우면 되고, 마케팅· 시장 경쟁 같은 건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런 체계 하에서도 최고급 열차인 새마을호에서는 운행 직전과 종료 직전에 Looking for you라는 희대의 충격적인 음악이 흘러나왔다니!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으나 가히 신묘불측의 영역이요 주최 측의 농간이며, 치밀하게 계획된 음모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이 4분 20초짜리 음악 한 곡 때문에 당시 한 20대 초반의 대학생이 trance를 경험하고 완전히 철덕의 길로 빠져 버렸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을 Looking for you의 멜로디와 박자에 맡기자, 온갖 철도 지식과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음악, 과학 등에 대한 향학열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의 인생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버린 철도청 내지 그 후신 코레일은 날 빨랑 책임져라.. (엉? ㅋㅋ)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
“오직 사랑 안에서 철도를 논하며”
“너희 속에 있는 철도 안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지금까지 내게 주어진 적이 있는 과분한 칭호들

철도 매니아, 진정한 의미의 오타쿠
철도교 교주
철도교 광신자
철도의 요정 (!!!)
천국에서도 철도를 만들 사람

“MALTA는 이 홈페이지 보면 상 줘야 된다” (Looking for you 음악의 작곡자!)
“철도청에서 너한테 상 줘야 된다”
“형제가 철도청 못 들어가면 그건 국가적인 손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24 08:22 2013/05/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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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컴퓨터의 인터넷 접근성이 워낙 좋아져서 응용 프로그램의 도움말은 그냥 개발사의 웹페이지에 기재된 문서 링크를 여는 걸로 대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용자의 컴퓨터에 직접 저장되어 있는 형태의 도움말 시스템도 여전히 필요하며 수요가 있다.

Windows가 98 시절부터 도입한 CHM, 즉 HTML 도움말은 여러 HTML 문서와 그림들을 한 파일로 묶어서 단일 컬렉션 파일을 만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프트웨어의 도움말뿐만이 아니라 웹 문서 아카이브로도 활용할 수 있고 대단히 유용하다. 그 잠재적 유용성에 비해서 MS가 이 기술을 너무 홀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에야 HtmlHelp 함수를 호출할 때 부모 윈도우의 핸들로 내 창을 넘겨 주면 알아서 도움말 창이 잘 생성된다. 그런데 내 프로그램은 별도로 창을 만들지 않으면서 HTML 도움말만 띄우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가령, 프로그램을 /?라는 인자를 주고 실행하면 옵션 사용법 도움말만 HTML 도움말 형태로 나온 뒤 프로그램을 바로 종료하게 하고 싶을 때 말이다.

일단, 운영체제는 HH.EXE라고 간단히 HTML 도움말을 띄워 주는 껍데기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CHM 확장자는 기본적으로 이 프로그램에 연결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ShellExecute 함수로 내 도움말 파일을 "open" 구동을 하면 도움말이 바로 뜨긴 한다.

그러나 이 방식은 도움말을 띄우는 것 자체 말고는 도움말 창에 대해서 그 어떤 제어도 할 수 없다. 가령, index.htm 같은 기본 시작 화면이 아니라 도움말 파일 내부에 있는 특정 문서를 바로 열게 하고 싶으면 도움말을 열지 말고 HH.EXE를 열고, 옵션에다가 xxxx.chm::/yyyy.htm 같은 식으로, chm 파일과 내부의 문서 파일을 이어서 특이하게 줘야 한다.

또한, HH.EXE의 실행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른 후속 처리를 하게 하려면 이 프로세스의 핸들을 얻어야 할 텐데, 그러려면 ShellExecute보다 사용하기가 훨씬 더 까다로운 CreateProcess를 써야 할 것이다.

사실, WinHlp32.exe로 구동되던 과거의 HLP 도움말과는 달리, HTML 도움말은 hhctrl.ocx라는 DLL을 통해 in-process로 구동된다는 큰 차이가 있다. 이 특성을 살려, 굳이 외부 껍데기 프로세스인 HH.EXE를 호출하지 않고 내 프로세스가 직접 HTML 도움말 창 하나만 띄웠다가 곱게 종료할 수는 없을까?

부모 윈도우에다가 NULL을 주고 그냥 HtmlHelp 함수만 호출한 뒤 프로그램을 종료해 버리면, 도움말 창이 한 0.1초가량 눈에 비쳤다가 곧바로 사라져 버린다.
이 함수는 도움말 창을 띄워 주는 CreateWindowEx 함수와 개념상 거의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함수도 생성된 도움말 창의 핸들값을 되돌리며, 창을 만든 뒤에는 그 창을 실제로 동작하게 하는 message loop을 돌려 줘야 한다.

HWND hMyWnd=::HtmlHelp(NULL, _T("xxxx.chm"), 0, 0);
ASSERT(hMyWnd!=NULL);

MSG m;
while(::GetMessage(&m,NULL,0,0)>0) {
    ::TranslateMessage(&m); ::DispatchMessage(&m);
}

이렇게 하면 도움말 창이 나타나긴 하나..
이번엔 도움말 창을 닫아도 프로그램이 종료되지 않고 '작업 관리자'에 내 프로세스가 언제까지나 표시되어 보인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내가 직접 창을 띄우고 윈도우 클래스를 등록하고 윈도우 프로시저를 구현하였다면, WM_DESTROY 메시지에서 응당 PostQuitMessage 함수를 호출해 줘서 GetMessage가 while문을 종료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움말 창은 일반적으로 닫는다고 해서 응용 프로그램을 종료시키는 용도로 쓰는 물건이 아니다. 그래서 도움말 창만 단독으로 띄울 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HTML 도움말 창이 없어질 때 프로그램도 정상적으로 종료되게 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도움말 창이 WM_DESTROY 메시지를 받는 시점을 우리 프로그램이 잡아내어 그때 인위로 PostQuitMessage 함수를 호출하는 것이다. 훅킹(SetWindowsHookEx) 또는 서브클래싱(SetWindowLongPtr)을 생각할 수 있는데, 훅킹까지 쓰는 건 너무 오버인 것 같고, 내 경험상 이럴 때는 WM_DESTROY에 대해서 추가 처리만 살짝 해 주는 서브클래싱이 무난하다.

일반적으로 서브클래싱은 대화상자 안에 있는 각종 자식 컨트롤들의 동작을 미묘하게 바꾸기 위해서 하는데, 이렇게 큼직한 프레임 윈도우도 서브클래싱이 가능하다. 뭐, 서브클래싱을 쓰든 훅킹을 쓰든 어쨌든 콜백 함수를 정의해 줘야 하고 콜백 함수에게 context를 제공하기 위한 전역 변수나 TLS 슬롯이 필요하니 일이 여러 모로 복잡해진다.

다음 둘째는 첫째보다 더 정석적인 방법이다.
사실은 HTML 도움말 시스템 자체에, 도움말 창이 종료될 때 WM_QUIT 메시지를 보내게 하는 옵션이 있다. 딱 한 번만 옵션을 지정해 주고 나면 뒤끝 없이 OK이고 훅킹이고 뭐고 같은 지저분한 루틴이 없으니 아주 좋다. 그러나 옵션을 지정해 주는 방법이 생각보다 굉장히 지저분하다. API가 좀 구리게 설계되었다.

HH_WINTYPE hwt, *pwt=NULL;
::HtmlHelp(NULL, _T("xxxx.chm>main"), HH_GET_WIN_TYPE, (DWORD_PTR)&pwt);
if(pwt) {
    hwt=*pwt;
    hwt.fsValidMembers=HHWIN_PARAM_PROPERTIES;
    hwt.fsWinProperties=pwt->fsWinProperties|HHWIN_PROP_POST_QUIT;
    ::HtmlHelp(NULL, NULL, HH_SET_WIN_TYPE, (DWORD_PTR)&hwt);
}

이미 도움말 창이 떠 있는 상태에서 HtmlHelp 함수를 또 호출한다. 그런데, 도움말 창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창 핸들을 넘기는 게 아니라 또 도움말 파일을 길게 지정하고(중복 과잉 정보 공급), 그 뒤에 창의 내부 이름을 지정해 줘야 한다. 창의 내부 이름은 그 도움말 파일을 만든 사람이 지정해 준 명칭이다(저 예에서는 main).

핵심은 property에다가 HHWIN_PROP_POST_QUIT라는 속성을 추가로 지정해 주는 것이다. 이 상수는 불행히도 MSDN에 제대로 문서화도 돼 있지 않은 완전 잉여이다. 덕분에 이 명칭으로 구글링을 해도 수 페이지에 걸쳐서 이 이름의 값이 선언된 헤더 파일만 잔뜩 걸려 나올 뿐, 더 자세한 설명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HTML 도움말을 이런 식으로 깊숙하게(?) 다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없을 테고 말이다.

나도 htmlhelp.h 파일을 뒤지다가 이걸 정말 우연히 발견했다. 그래도 이걸 써 주니 도움말 창을 닫을 때 프로그램이 바로 종료되게 할 수 있었다. Windows 98부터 8까지 다 잘 동작한다. HTML 도움말을 만든 개발팀에서 이 도움말 창만 단독으로 뜨는 상황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었던 것이다.

공용 컨트롤을 다루면서 LVITEM 같은 구조체를 다룬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저건 API 설계가 좀 특이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보통은 구조체를 선언하고, 구조체의 크기(t.cbSize=sizeof(t))와 얻고 싶은 정보를 나타내는 비트 플래그를 지정한 뒤, 구조체의 주소를(&t) get 함수에다 넘겨 준다.

그런데 HtmlHelp의 GetWinType는 아예 내부 포인터를 받게 돼 있다.
그리고 내가 지정하는 값은 property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set을 할 때 일단은 구조체의 모든 멤버들의 값을 넘겨 줘야 한다(hwt=*pwt). 안 그러니까 프로그램이 에러가 나더라. 여러 모로 형태가 이상하다.

사실, HTML 도움말에는 저런 옵션을 지정할 필요가 없이 부모 윈도우에다가 여러 이벤트를 알려 주는 기능이 있다. 도움말 창이 처음으로 뜰 때(HHN_WINDOW_CREATE), 각종 페이지 이동 버튼을 누를 때(HHN_TRACK), 어떤 페이지를 성공적으로 열었을 때(HHN_NAVCOMPLETE) 이렇게 세 개가 정의되어 있는데, 사용자가 X 버튼을 눌러서 도움말 창이 소멸하는 시점을 알려 주는 기능이 없는 것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뜻밖이다. 왜 정작 필요한 이벤트는 없는 걸까? 본인이 개인적으로 가장 직관적으로 생각한 형태는 이런 것이었는데 말이다. 물론, 메시지를 받으려면 나도 윈도우를 하나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E의 형태로 독립적으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이 아니라 DLL 형태인 IME들도 도움말을 표시하는 기능이 있다. 그러나 IME들은 안정성이나 키보드 포커스 같은 이유로 인해, 또 다른 DLL을 주입시키는 HtmlHelp 함수를 호출하는 게 아니라 앞서 소개했던 HH.EXE 프로세스를 수동으로 띄우는 원시적인 방식을 사용한다.
그래서 도움말 명령을 여러 번 내리면 도움말 창이 한도 끝도 없이 여러 개 생기며, IME를 사용하는 응용 프로그램을 종료하더라도 도움말 창은 같이 없어지지 않는다. Microsoft가 제공하는 기본 한중일 3개 국어 IME들이 모두 그렇게 동작하며, <날개셋> 한글 입력기 역시 외부 모듈은 그 관행을 따르고 있다.

본인을 포함해 HTML 도움말을 사용하는 많은 개발자들이 잊고 사는 사항인데, HTML 도움말도 원래는 사용 전에 초기화가 필요하다. HH_INITIALIZE 및 HH_UNINITIALIZE를 해 줘야 하고, 심지어는 message loop에다가도 원래는 HH_PRETRANSLATEMESSAGE를 해 줘야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는 프로그램은 거의 없다. in-process 형태인 대신에 WinHelp 시절보다 번거로운 게 많아졌으며, IME의 경우 그런 것을 응용 프로그램에서 다 기대할 수 없으니 도움말을 외부 프로세스 형태로 실행해 주는 게 실제로 더 안전할지도 모르겠다.

HTML 도움말은 다형성을 지닌 인자에다가 typecasting을 하면서 여러 명령을 전달한다는 점, 초기화 및 해제가 필요하고 state를 지닌 변수가 존재한다는 점 등으로 인해 나름 클래스 라이브러리로 만들기에 적절한 면모가 있다. 물론 이 클래스의 인스턴스는 딱 단일체(singleton) 형태로만 존재해도 충분할 테고. 앞서 언급했던 자체 message loop을 도는 기능 역시 이 클래스의 멤버 함수로 추가해서 제공하는 것도 디자인 차원에서 생각해 볼 만하다.
이 글에서는 어쩌다 보니 HTML 도움말 하나만으로 일반적인 Windows 프로그래밍 이슈를 비롯해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5/21 08:30 2013/05/2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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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모태신앙일 뿐만 아니라 모태솔로-_-인 본인더러, 연애 하는 걸 좀 배우라고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 지인이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1년 전 영화를 찾아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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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다.

1. 1990년대도 벌써 20여 년 전의 추억이 돼 가는구나.

2. 내가 보기에도 남자가 정말 미치도록 숙맥이긴 하다. ㅎㅎ 스토리가 참 서정적이고, 흥행 성공했다는 게 수긍이 간다. 기존 소설을 영화화한 게 아니라니 의외.
나도 철도 얘기, 정치 얘기, 프로그래밍 얘기 같은 거 집어치우고, 이성하고 같이 순수하게 저렇게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하긴 할까?

3. 건축학개론의 스토리 설정은.. 뭐랄까, 황 순원의 <소나기>에다가 옛날 하이텔에 pctools(김 현국) 님이 지은 <소나기 그 15년 후>-_-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저 15년 뒤 패러디판을 아는 분이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계시려나.. 물론 영화는 그 패러디물만 한 막장 스토리는 아니며, 여자 쪽이 죽는 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4. 그리고 결정적으로, 극중에 나오는 수업 내용은 건축공학하고는 아무 관계 없고 지리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내가 연세대 건축공학과의 수강 편람까지 다 찾아봤는데,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제목은 좀 낚시 같다.

지도 펼쳐서 길과 건물 살피고 여행 가는 건 철도에만 미치고 나면 알아서 다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 짜 놓은 “철도학 개론” 커리큘럼을 참고하시라. 건축학 개론 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만들어 놓은 자료이지만, 저거야말로 음대생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영화의 성격과 훨씬 더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수업이다

철도를 배경으로 사랑이 맺어지는 스토리의 영화가 나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영화 장면 중에는 중앙선 구둔 역도 나오더구만.

자, 그런 의미에서 “코레일-광역전철 길라잡이-구석구석 상상여행” 코너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KTX 촬영 명당인 반월 저수지 인근 야산도 아예 반월 역과 함께 공식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단, 이곳은 저 사이트에서 소개된 바와는 달리, 반월보다는 대야미 역에서 접근하는 게 거리가 약간 더 짧고, 찾아가기도 훨씬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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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오늘도 기승전철 달성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9 08:26 2013/05/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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