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알고 있으며 당신과 그분과의 관계는 현재 어떠한가?
성경의 인물들과 비교해 보면 판단에 도움이 될 것이다.
1.
성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가장 친밀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단연 다윗임이 틀림없다. 그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랑하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심지어 어리광을 부리고 망가지는(?) 것까지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삼하 6:14, 21-22).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최대한 비천하고 불쌍하게 보이면 하나님도 결국 자신을 동정해 주실 거라고 생각했다(삼하 16:12).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을 때도 사람의 손에 떨어지는 것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직통으로 징계를 받는 것을 택했다(삼하 24:14).
이 정도로 하나님과 친밀했으니 그가 시편의 대부분을 기록하게 되고, 하나님 역시 그를 ‘내(하나님) 마음에 맞는 사람’(행 13:22)이라고 일컬으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2.
백부장은 놀라운 믿음으로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한 대단한 사람이다(마 8:6-13). 그는 병에 걸린 부하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찾아온 선한 군인일 뿐만 아니라, 군인 정신에 입각하여 놀라운 신앙관을 갖고 있었다. 자기도 부하를 거느리고 명령 권한이 있는 장교인데, 하물며 예수님이라면 말만 하면 병이 뚝 떨어질 것이니 구태여 자기 집에 감히 찾아올 필요조차 없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거 생각해 보아라, 엄청나지 않은가? 덕분에 그는 원격 진료 즉각 완치(?)라는 기적을 그 믿음대로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능을 주시고 자유 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놀라게 할 수 있다(긍정적인 쪽, 기쁜 쪽으로!). 심지어 천장을 뜯어서 병 걸린 친구를 예수님 앞에 내려다 놓은 친구들처럼 돌발행동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머리를 써서 무엇이 더 합리적인지를 하나님과 reasoning을 하고(사 1:18), 그걸 끈기 있게 밀어붙여 보도록 하자. 이건 교만이나 하극상이 아니며, 가나안 여인의 명대답(마 15:27)이라든가 히스기야의 항변(왕하 20:3), 불의한 재판관 비유(눅 18:1-5) 같은 좋은 예가 있다.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인 군대식 “까라면 까”가 아니다.
3.
욥은 의인이었다. 너무 흠잡을 데 없는 스펙이기 때문에 뭔가 특이한 계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체험하는 기회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특별히 잘못한 게 없는데도 너무 어처구니없는 고난을 당했다.
욥은 그때도 딱히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탓하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아주 잘한 행동이다. 그는 끝까지 자기 결백을 주장하면서 자기 인생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냈고, 하나님이 계신다면 많이는 안 바랄 테니 이 상황에 대해서 잘잘못이나 한번 같이 공정하게 따져 보고 싶다고 거듭 호소했다. 이것도 논리적으로는 지극히 정당한 대응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이 나타나셨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기가 너무 선하게 살아서 잘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진면모를 알고 그 앞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그 어떤 일을 벌여 놓으실 수도 있고, 그 어떤 일을 벌여 놓더라도 선하고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세상의 악함을 한탄한 시편 73편 기자나 대언자 하박국도 비슷한 체험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참고: 2번의 reasoning과 3번의 reasoning은 상황과 문맥이 약간 다르므로 적용할 때 올바른 나누기가 필요하다.)
4.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일수록 자기 기도만 하는 게 아니라 남 기도에 대한 비중이 늘어나고, 더욱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남으로부터 연보를 받아서 고맙고 기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자신에게 연보를 함으로써 그가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보상이 추가된 걸 생각하니 기쁘다고 성경에다 쓴 적이 있다(빌 4:17) 그리고 에베소서 1장에 기록된 그의 기도 제목은 “우리에게 물질적인 복 좀 달라”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풍부한 영적 복을 이미 받았는지부터 좀 깨닫게 해 달라”이다.
바둑으로 치면 수읽기의 수준이 평범한 신자들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은가?
금송아지 사건 때의 모세의 중보 기도(출 32:11-13)도 단순히 자기 동족의 영달을 구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좋은 기도였다. 이런 기도일수록 응답률은 크게 올라가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한 사람은 기도 자체도 이런 식으로만 하게 된다. 그러면서 선순환...;;
그럼, 이제부터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부정적인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자.
5.
최초의 여성 이브는 남편 아담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제대로 귀담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조치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나 쓴뿌리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창 2:16-17과 창 3:3을 비교했을 때, '만지지도 말라' 같은 극단적인 말이 불쑥 추가되기까지 하기는 어렵다.
“에이, 기왕이면 다 먹게 해 주지 하나만 저렇게 제약을 거는 이유가 뭐야? 치사하다.” 정도?
6.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악하고 게으른 종은 자기 주인에 대해서, 아주 까칠하고 엄격하고 인색하고, 종들을 불가능· 부당한 요구로 착취만 하는 악덕 고용주로 알고 있었다.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도, 눅 15:29로부터 미뤄볼 때 아버지에 대해 평소에 꽤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혹시 여러분은 악한 현 세상 안에서 신앙생활을 육신의 깡으로만 버티면서 하다가, 제풀에 지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해서 저런 오해에 빠지는 경우는 있지 아니한가?
주인이 맡겨 놓은 1달란트를 있는 그대로 잘 간수해서 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그 종은 주인에게서 심한 꾸지람을 듣고 벌까지 받는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잘 생각해 보자.
7.
예후는 아합 왕족을 개발살내고 바알 숭배자들을 학살하는 일은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하였으며, 이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하나님을 그렇게 신실하게 잘 따랐다고 보기 힘들다. (왕하 9-10)
잘못된 것, 이단 교리를 정죄하고 파괴하는 일에만 앞장설 뿐, 그 대안인 바른 것을 세우고 보급하는 경지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성도가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8.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세상적으로는 정말 괜찮고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다. 키 크고 인상 좋고, 초기엔 성격도 아주 겸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카인 같은 '적당히 자기 식'이라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다. 불완전한 순종(세상적으로 보기엔 그리 큰 잘못도 아닌데!)과 변명 일색은, 기본부터 글러먹어서 하나님께서 굉장히 싫어하시는 방식이었다.
다윗 같은 급의 큼직한 살인· 간음죄도 없건만 하나님은 이런 사울에게서는 일찌감치 정이 떨어졌고 손을 떼고 말았다.
사울은 다윗과는 달리, 성경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분의 사고방식이 어떠한지를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그게 그의 가장 큰 문제였으며, 그는 말년에는 정 안 되니까 무당을 찾을 정도로 영적 상태가 막장으로 치달았다.
9.
성경에는 카인, 아합, 이세벨, 가룟 유다 등 여러 악역(?)이 등장한다. 그러나 성경 66권을 통틀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악질적인 악역은 아마 발람일 것이다. 돈을 따라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한 양다리 회색분자일 뿐만 아니라, 그는 영악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이용해 잔머리까지 굴린 사람이다.
민수기 24장과 25장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각색하자면 이렇다.
“이스라엘 민족은 참 신인 여호와 하나님이 보호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평범한 군사력만으로는 우리가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나 기쁨조 미인계를 동원해서 쟤네들을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타락시키면 하나님이 제 발로 자기 민족을 징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OK?”
이스라엘을 직접 저주하지는 못한 대신, 발람이 요런 천기를 누설해 준 것이다.
그래서 비록 이스라엘은 이 작전에 말려서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으나, 성경은 이 원수 발람도 결국은 제 명에 못 살고 뒈졌다고 민 31:8에서 친절히 써 놓았다. 그리고 신약 성경에서까지 발람의 길, 발람의 교리 등으로 두고두고 그를 디스한다. 신약에서 나쁘게 등장하는 구약 인물은 죽어서 지옥 가 있다고 간주하면 정확하다.
※ 맺는 말
내가 느낀 건데, 영적 성장에는 영재· 천재가 없다.
초등학생 나이 때 미적분을 술술 풀고 성경 100구절 이상을 암송하고 토플 만점을 받는 애는 있어도,
초등학생 나이 때 부모님의 마음을 다 이해하고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때리면서 훈계할 필요가 없어서 잠 22:15의 예외에 해당하는 애는 없다. 이래서 성경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자동차 운전은 그야말로 개나 소나 다 할 정도로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자동차 설명서와 도로 교통 법규를 다 외우고 있다 해도 그런 어린아이에게 운전을 맡기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 역시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쪼록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가 있으니, 위에서 열거한 예에 따라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바람직한 예를 벤치마킹하고 이를 따라가도록 노력해야겠다.
한동안 미친 듯이 컴퓨터나 철도, 교통수단 쪽 글을 썼지만 성경의 사색과 묵상의 결과도 틈틈이 메모해 놓은 게 있다.
필요악에 대해서, 그리고 모세에 이어 요셉에 대해서도 아이디어만 적어 놨는데 본격적으로 집필을 할 시간이 없다.
아 끝으로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믿음 행사를 위한 위법 행위의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 내가 내린 결론은 그냥 “case by case”이다. 위법 행위가 뭔질 물으신다면 라합 내지 이집트 산파의 거짓말 같은 걸 가리킨다. 미래에 기회가 되면 이런 경우에 대한 분석도 다루고 싶다.
여백이 부족하니 오늘은 여기까지 쓰련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