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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지난 5년 동안 설 명절에 고향에 가서 이렇게 지냈다.

  • 2014년: 동방, 모량, 나원, 불국사, 건천 등 여기 일대의 간이역들을 일일이 답사했다.
  • 2016년: 오랜만에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분황사, 포석정 등을 (다시) 구경했다.
  • 2018년: 중앙선 구 선로 이설 흔적과, 옛 서경주 역 폐건물 주변을 답사했다.

참고로 2015년 설에는 동남아 여행을 갔다. 2017년에는 가족과 함께 강화도 정도만 다녀오고 막 멀리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본인은 올해 설 연휴에는.. 고향에서 그야말로 산과 함께 보냈다! 2016~17년 사이에 서울· 수도권 근교의 산을 오르다가 활동이 좀 뜸해졌는데, 그 다음으로 오랜만에 고향의 산들을 답사했다.

서울-수도권에서는 북한산· 도봉산 일대만 국립공원인 반면, 이 동네는 영락없는 동네 뒷산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듣보잡 언덕도 온통 국립공원인 게 인상적이었다. 경주 둘레길.. 그런 브랜드 따위 없고, 그냥 간지 나는 '국립공원' 타이틀이 깡패다.

1. 경주 남산 (금오봉, 468m)

남산은 기슭에 삼릉과 포석정이 있고, 그 외에도 산 속 곳곳에 불상과 탑, 절터가 수십 군데 이상 놓여 있다. 막 높은 산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네 뒷산 언덕 급의 만만한 산도 아니다.

등산로가 사방으로 굉장히 많이 있다. 그러니 동서 횡단 정도는 해야 하겠지만 본인은 차를 가져온 관계로 그러지 못했다. 산의 서쪽 삼불사 방면에서 올라서 바둑바위를 거쳐 금오봉 정상까지 오른 뒤, 하산은 삼릉 방면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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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오른 뒤부터는 하늘과 주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나타났다. 남산은 불상과 탑의 재료를 조달하기에 충분할 정도인 돌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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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아래 주변은 교외이다 보니 온통 논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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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길을 계속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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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불사에서 정상까지는 1시간 반 정도가 걸렸다. 가족과 같이 올랐고 눈과 빙판도 있어서 진행이 더뎠던 것을 감안하고도 이 정도가 걸렸다.
정상은 그냥 공터였으며, 표지석과 길 안내 표지판 말고 다른 벤치나 헬리페드 같은 인공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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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 방면 등산로는 삼불사 방면 등산로보다 길이 더 넓고, 주변에 문화재들도 훨씬 더 많이 있었다. 여러 불상들이 있었으며 심지어 머리가 날아가고 없는 부처 좌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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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을 마치고 삼릉숲 구간에 들어오니 여기는 온통 소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라 왕릉은 후대의 조선 왕릉과 달리 무덤 주변에 무슨 기와집 건물이나 시뻘건 입구 문 같은 게 없다.

2. 큰갓산, 송화산 (옥녀봉, 276m)

다음으로 동국 대학교 경주 캠퍼스와 주변의 석장동을 ㄷ자 모양으로 감싸고 있는 '그 산'을 드디어 올랐다. 성남시 금곡동을 감싸고 있는 태봉산과 크기와 형태가 얼추 비슷하다.
동국대 부속 유치원 근처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등산과 하산 지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차를 가져가지 않고 버스를 타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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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정말 바위라고는 없이 이런 흙길에다 가끔씩 주인을 알 수 없는 무덤, 그리고 가파른 계단만이 쭈욱 이어졌다.
중간에 길을 잘못 들면 동국대 기숙사 쪽으로 내려가면서 산이 끝나 버린다. 그러지 말고 큰갓산 방면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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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운동 기구와 평상도 나타났는데, 평상 위에다 돗자리 깔고 텐트 치고 누워서 한숨 자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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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국립공원 '화랑 지구'라는 곳에 진입했다. 아마 큰갓산은 아니고 송화산만 국립공원인 듯했다.
여기 일대는 산의 높이 자체는 그리 높지 않지만, 여러 산봉우리를 올랐다가 내리기를 반복해야 해서 움직이기 힘들었다. 다만, 능선으로 피해 가는 산책로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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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마을이라고 뭘 열심히 만들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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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걸은 끝에, 송화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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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유신 장군 묘도 여기에서 굉장히 가까이 있다던데.. 본인은 여래사 방면으로 하산했다.
여기는 공교롭게도 작년에 중앙선 폐터널을 답사했던 곳과 동일한 지점이었다. 그때는 요런 등산로가 있다는 것을 발견까지는 했지만, 더 올라가면 뭐가 나오는지는 모르는 채로 돌아갔는데 그 의문을 드디어 풀게 됐다.

3. 선도산 (390m)

선도산은 송화산의 남쪽에 있는 산으로, 남동쪽 기슭에 무열왕릉을 비롯해 왕릉이 몇 개 더 있다. 다만, 무열왕릉만 뭔가 울타리가 쳐져 있으며, 나머지 왕릉은 단촐한 형태여서 등산로에서 쉽게 접근 가능하다.
왕릉 주변에는 서당 같은 한옥 건물들이 잔뜩 지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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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지금까지 국사 시간에 말로만 들었던 진흥왕의 무덤이라고 한다. 바로 옆에는 진지왕의 무덤도 있다.
등산로는 처음에는 왕릉답게 소나무 숲길로 시작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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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내부에서 길을 잘못(?) 선택했는지 어쨌는지.. 나무와 숲으로 둘러싸인 등산로 대신, 이렇게 하늘이 뻥 뚫려 있고 자동차나 ATV 정도는 지나갈 수 있을 법한 비포장 흙길이 나와 버렸다. 본인은 이 길을 한참을 올라가야 했다.
인터넷 지도로 로드뷰를 보면, 초록색 선이 그어진 정규 등산로 말고, 오른쪽에 그래도 희미하게 길 같은 흰 선이 그어진 게 보일 것이다. 그 길을 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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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 길도 끝까지 가니까 다행히 정상으로 도달하긴 했다. 이건 정상 부근에 있는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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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을 지나서 정상 마지막 200m 동안은 길이 좁고 가파르고 험해졌는데, 거기를 오르니 이렇게 돌무더기가 두어 개 놓여 있고.. 공터라기보다는 그냥 길목에 가까운 산 정상이 나타났다.
1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이번에도 차 때문에 산을 반대편까지 횡단하지는 못하고 왔던 길로 그대로 내려왔다.

4. 소금강산 (176m)

소금강산은 경주시에서 동해남부선 철길 건너편의 용강동에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기슭에 근화여중· 여고가 있고, 백률사라는 절이 있다. 높이는 낮지만 세로로 길쭉한 편이며, 동쪽으로 더 크고 높은 산맥이 있다. 그 크고 높은 산맥이 북한산에다 비유한다면 저 소금강산은 북악산뻘 되는 것 같다.

소금강산을 제대로 경함하려면 산을 남북으로 끝까지 종단해야겠지만.. 시간 관계상 그리하지 못하고 일단 백률사에서 산 정상까지 오르는 걸로 마쳤다. 워낙 낮으니 이 산은 정상에도 산불 감시 초소와 운동 기구만 있을 뿐, 다른 거창한 표지석 같은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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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또 경주에서 등산을 할 일이 있으면 남산의 다른 등산로와 봉우리(특히 고위봉)부터 시작해 그 이름도 유명한 토함산, 그리고 현곡과 건천 방면의 구미산까지.. 갈 데가 많다.
이상이다. 설 연휴 동안 등산만 한 건 아니고 다른 경주 관광을 한 것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사진과 자료가 정리되면 소개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2/13 08:36 2019/02/13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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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해맞이

2019년이 시작됐다. 나도 나이가 30대 중반을 넘어 벌써 후반으로 들어섰다니 섬뜩하다.;;
부모님 세대는 이미 지하철의 무료 탑승이 가능한 지경이 됐으며, 삼촌뻘 연배도 이미 환갑에 근접하거나 진입했다. 언제까지나 청춘일 것 같던 교회의 귀여운 꼬꼬마들마저 20대 중후반이요, 일부는 한국 나이 기준 30대로 진입했다.
이런 식으로 세대가 슬슬 바뀌어 가는가 보다.

이 와중에 본인의 근황을 좀 얘기하자면..
가장 먼저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지난달의 9.61 이후로 더 고친 것이 없고 단기간에 뭘 만들 게 떠오르지는 않은 상태이다. 한글 입력 핵심 기능이 9.5에서 끝났고 추가적인 UI 개발도 9.61에서 진짜로 완료된 듯하다. 아아..

18년 동안 만들어 온 프로그램을 이렇게 마무리 짓고 고정시킨다니 기분이 묘하다. 할 게 없어도 습관적으로 Visual Studio를 띄워서 날개셋 소스 코드를 이것저것 들여다보게 되는데.. 내가 이 짬으로 언제까지나 이것만 붙들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게 고민거리이다.

졸업을 위해서 학술지 논문을 오랫동안 질질 끌다가 드디어 하나 더 투고했다(심사 통과와 게재까지는 또..). 그리고 최종 테크인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또 비밀 실험을 진행해야 하는데 올해는 제발 다 잘 마무리 됐으면 좋겠다. 심사 통과까지는 가능하지도 않고, 최소한 심사 받을 수 있는 완성도의 논문이라도 나왔으면 좋겠다. ㅠㅠ

학기 중에는 토요일에 교회 신학원 강의를 들어 왔는데, 지금은 방학 기간이니 신학원 수업이 없다. 그래서 토요일 낮에는 서울 역이나 시청 근처로 가서 태극기 집회도 종종 구경하곤 했다. 어르신들처럼 하루 종일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뭐 그건 그렇고, 본인은 2019년의 첫 날은 아차산 중턱과 정상에서 맞이했다. 새벽 산행을 할 바에야 전날 밤에 미리 산을 올랐다. 내가 요즘 안 그래도 등산과 야영에 재미를 붙였으니까.
고구려 정자와 해맞이 광장을 지나, 하늘과 한강이 보이는 어느 능선에서 텐트 치고 잤다. 사실, 산을 오르는 동안 나처럼 산에서 밤을 보낸 다른 등산객의 텐트도 두세 개 정도 봤다.

산을 오르는 동안은 더워서 땀이 날 정도였지만, 텐트 안에서 몇 시간 누워 보니 금세 추위가 느껴졌다. 날씨가 예전보다 덜 추운 듯하고 등산을 감안하여 짐 무게도 줄여야 하니, 사실 이번엔 두꺼운 침낭을 안 들고 갔다. 이 때문에 밤을 좀 춥게 보내게 됐다.

제일 큰 애로사항은 발이었다. 이러다가 발가락이 동상 걸려서 짤라내는 불상사라도 생길 것 같았다.
새벽에 깬 뒤에는 부득이하게 텐트를 걷고 산속으로 더 들어가서 결국 정상까지 갔다. 이렇게 움직이니까 몸이 따뜻해지고 발가락도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하지만 정상에서 1시간이 넘게 가만히 서 있자, 발은 다시 시리기 시작했다.;; 자는 동안 체온이 내려가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이때는 자지 않고 깨 있는 것만으로도 열 공급이 충분치 못했는가 보다.

새벽 5시 반쯤부터 사람들이 위치 좋은 곳에 옹기종기 모이기 시작했으며, 7시가 넘어가자 인파는 수십에서 백수십, 수백 수준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중· 장년 아재뿐만 아니라 앳된 고등학생, 대학생, 젊은 커플들도 적지 않게 보였다.
그리고 하늘도 조금씩 밝아졌다. 7시 10분쯤부터는 폰 카메라가 풍경 사진을 '자동' 모드로 찍을 때 긴 노출과 플래시를 동원하지 않고 직통으로 찍기 시작했다.

그 뒤에도 거의 2, 30분 동안, 하늘은 갈수록 희어지고 밝아졌으며 달도 어느 샌가 쏙 사라졌다. 하지만 수평선에는 붉은 노을만 보이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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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47분도 지났는데? 혹시 해가 떴는데 구름에 완전히 가려져 버린 게 아닌가 생각이 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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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53분에 드디어 건너편 산 위로 맹렬한 빛을 뿜는 금색 점이 돌출돼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못 가 구름에 가려지긴 했지만 해가 뜨는 게 분명히 관측되었다. 단순 노을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 뒤로 수백 명에 달하는 인파들도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어댔다.

이렇게 지구의 자전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개인적으로 떠오른 문구는..

  • "어둔 밤 지나서 동 튼다, 환한 빛 보아라 저 빛"
  •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정도였다. 작가부터가 자연 현상을 실제로 봤으니까 감격해서 저런 가사와 시조를 쓰지 않았겠는가?
물론 난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겔 8:16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집 뒷산 수준 말고 제법 규모를 갖춘 산중 야영은 2018년 가을의 남양주 갑산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였다.
텐트, 돗자리, 침구류 같은 짐이 많은데 또 주차 문제도 생각해야 하니.. 산에 갈 때는 그냥 택시를 탔다. 하산할 때야 사람들 뒤를 졸졸 따라가기만 해도 자동으로 광장동과 광나루 역 방면으로 가게 되니 아무 걱정할 것 없었다.

본인은 야영 중에 일체의 난방을 사용하지 않는다. 화재나 일산화탄소 중독 같은 안전 문제는 부가적인 이유이고, 근본적으로는 추위는 오로지 체온의 보온만으로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는 것이 본인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본인은 한겨울에 밖에서 침낭과 이불만으로 수십 번을 외박을 했지만 입 돌아가지도(..;;) 않고, 감기 같은 것도 전혀 안 걸리고 지금까지 잘 지내 왔다.

일부러 밖에 나가기까지 했는데 별도의 연료를 때는 것은.. 산을 그냥 헬리콥터로 오르는 것과 같으며 손발 무술 대신 그냥 총을 쓰는 것과 같고, 그림을 그리기 귀찮아서 그냥 사진을 찍는 것과 같다. 아무 의미가 없다.

아무튼, 이 블로그를 구독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리며, 2019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란다.
올해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왜곡하고 체제를 위협하고, 번영과 풍요를 갉아먹고 적에게 퍼주는 악의 무리들이 자기 꾀에 걸려 넘어지고 망하고 나라가 조금이라도 성장과 발전과 성숙을 향해 나아갔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9/01/04 08:35 2019/01/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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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초엔 하늘은 맑고 푸르고 산과 들은 단풍으로 물들어 가는 게..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날씨였다.
그래서 9월에 중순에 갔던 남양주를 다시 찾아갔다. 먼저, 와부읍 월문리에 소재한 먹치고개 쪽을 돌아다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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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이 드니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딱 1년 남짓 전에 남한산을 갔을 때도 풍경이 이랬었다.
"나뭇잎도 다들 적화... 어?? 아, 내가 종북좌빨들 때문에 망해 가는 나라를 보며 심성이 어지간히도 피폐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 일대는 한적한 시골답게 주차 걱정 없이 갑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울타리가 쳐지고 막혀 있었으며, 길이 아닌 곳엔 아예 전기 울타리가 둘러져 있기도 했다. 흐음..;;
그래서 그냥 경치 구경만 하다가 재작년에 올랐던 예봉산을 다시 올라 보기로 결심했다. 여기도 등산로 바로 코앞에다 차를 세워 놓을 수 있어서 차량 접근성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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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까지 가는 길에 이 정도로 하늘이 뚫린 공터가 나온 건 여기가 거의 유일한 듯했다.
그것 말고는 예봉산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볼 것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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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정상에 도착했다. 2년 전과 동일한 경로로 1시간 반쯤 걸렸는데.. 그 동안 운동을 게을리 해서 그런지 2년 전보다 더 힘들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 공사 때문에 일부 등산로가 우회 경로로 바뀌기도 했다.

주변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해서 뭔가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등산로를 새로 내거나 목재 데크라도 설치하는 게 아니었다.
여기 정상에도 마치 관악산 정상 근처처럼 동그란 관측 레이더가 설치될 거라고 한다..! 그때 만들던 길은 사람이 지나가는 길이 아니라 공사 자재를 실어나르기 위한 모노레일이었다.

하긴, 여기도 관악산과 비슷한 해발 650m대이고 얘가 관악산보다 더 높기까지 하다. 하지만 얘는 바위가 전혀 없는 흙산인 덕분에 등정 난이도는 관악산보다 훨씬 낮았다.

시간대가 시간대여서 그런지, 저 사진을 찍던 당시에 산 정상에는 본인 포함 총 여섯 명이나 있었다.
산에서 마주친 등산객 어르신들은 저 구조물 때문에 정상 경치가 많이 가려졌다며 아쉬워하셨다. 일행 중에는 아침 일찍 운길산부터 시작해서 하루 종일 산행을 진행하신 분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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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상에서 올려다볼 때보다는 하늘이 마냥 맑지 않고 뿌연 게 보였다.

차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야 하니, 더 멀리 나가지 못하고 하산은 등산의 정확히 역순 경로로 했다. 앞으로 기회가 되면 예봉산 근처의 예빈산, 운길산, 갑산, 적갑산 일대도 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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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주일 남짓 뒤, 나라 전체가 웬 미세먼지 테러를 당했다가 하루 종일 여름 장마 같은 비가 내리면서 공기가 맑아졌다. 본인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야영을 했다. 다만, 멀리 나가지는 못하고 그냥 동네 뒷산의 정자에다가 텐트를 쳤다. 비 소리 듣고 풀 냄새 맡으면서 나만의 공간에서 밤을 보내다니, 정말 꿀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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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을 마친 뒤엔 오랜만에 성남으로 가서 예전에 올랐던 망덕산을 올라 봤다. 작년 봄이니 지금으로부터 1년 반쯤 전이다.
서울 303과 9403번 버스의 종점인 동성 교통 차고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이배재 고개를 버스 대신 도보로 올랐으며, 고개 정상에서부터 등산로에 진입했다. (이배재 고개를 내 자가용으로 통과한 적은 없음)

나무들은 다들 잎이 떨어져서 가지만 앙상했으며, 길바닥은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온통 초록색이던 작년과는 분위기가 확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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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덕산 정상 표지판을 다시 지나쳐 갔다. 예봉산 등 여느 산과는 달리, 정상만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등산로 길목에 정상 표지판이 있다.

본인은 예전에는 검단산과 망덕산을 쭉 일주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조금 더 가다가 사기막골 방면으로 하산했다.
여기는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등산로도 좁고 험한 편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비가 온 덕분인지 언제부턴가 골짜기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오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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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남과 광주 사이의 산에서 물 흐르는 걸 구경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산을 계속할수록 물줄기는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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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는 대원사라는 절에 도착하는 걸로 산행이 끝났다.
사기막골은 성남시에서 손꼽히는 오지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막 시골 같지는 않았으며, 주변의 집들은 단독주택보다는 빌라 위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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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를 벗어나니 '사기막골 근린공원'이 나왔다. 여기는 난생 처음 가 봤다.
'사기막'에서 '사기'는 도자기 그릇을 뜻한다. 여기가 옛날에는 도자기 굽는 제조업으로 유명했던가 보다.
그래서 공원에는 민속촌처럼 한옥 마을이 꾸며져 있으며, 도자기 체험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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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에 이어 성남에서는 이런 걸 구경하면서 추억을 남겼다.
성남 구시가지 쪽은 정말 경사가 급한 동네라는 게 거듭 느껴졌다.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에는 이런 언덕도 다 들판과 숲이었지 싶다. 그나마 성남대로가 지나는 분당과 판교 쪽이 평지... 아, 그것도 아니고 가천대-태평 사이는 지상이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남양주와 성남은 둘 다 면적이 넓고, 지형에 따라 생활권이 많이 찢어져 있긴 하다. 하나도 개발 안 된 산기슭 오지가 있는가 하면, 전철이 지나고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잔뜩 지어진 곳도 있다. 또한, 성남과 광주 사이의 산맥처럼 남양주 동쪽의 산맥도 탐험하기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8/12/18 08:35 2018/1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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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의 개장을 기다리며

서울에서 신당동은 구미와 더불어 박 정희 대통령이 살았던 곳이다. 이처럼 종로구 이화동에는 이화장이라고 이 승만 대통령이 살았던 사저가 있다.

이화장은 근현대 문화재로 보존되어 있으며, 내부엔 자그맣게 이 승만 대통령 기념관도 있다. 하지만 여기는 언제부턴가(한 2010년대쯤?) 내부 수리를 이유로 수 년 이상 장기간, 거의 무기한에 가깝게 휴관한 채 방치되었으며 일반인이 들어가 보지 못하는 실정이다.
옛날엔 인터넷 지도에도 '2018년 개장 예정'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런 말도 없다.

그래서 본인은 올해 두어 차례 이화장을 찾아가 봤다.
지하철 4호선 혜화 역 2번 출구로 나가서 방통대 건물 모퉁에서 좌회전 한 뒤, 언덕을 오르며 대학로 파출소 방면으로 골목길을 쭉 걸어가면 된다.
지하철 출입구에서 목적지까지 직선 거리로는 600미터이지만 실제로는 언덕길 7~800미터 정도를 걷게 되니 남자의 걸음으로 10~15분 남짓 걸린다. 막 가깝지는 않지만 도저히 걷지 못할 먼 거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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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역 주변에는 방통대와 서울대 병원이 있고 이들은 전반적으로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어서 좀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그런데 거기서 이화장이 있는 동쪽은 한양도성과 낙산 공원 방면이다. 길이 좁아서 차들이 다니기는 불편하지만 대학로라는 명칭답게 이색적인 카페들과 극장도 있어서 신촌· 홍대 같은 분위기가 난다.
그러다가 이화장에 다다르면 요런 한옥과 담벼락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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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기가 정문 입구이다. 주변은 온통 공사를 위한 컨테이너 가건물이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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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는 아직 공사판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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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장에 대해 설명해 놓은 표지판은 컨테이너 가건물에 가려져서 접근하기도, 읽기도 어려워져 있었다.
이 정도가 끝.. 더 볼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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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승만 대통령 기념 사업회의 공식 홈페이지를 가 보면 휴관 사유가 저렇게 적혀 있는데.. 내가 보기엔 말이 안 된다.
지난 2011년엔 우면산에서 큰 산사태가 났지, 낙산에서 산사태가 났다는 소식은 난 들은 바 없다.

그리고, 설령 그때 피해를 입었다 해도 저 쬐끄만 건물이 무슨 놈의 복구가 7년이 넘게 걸리냐?
화재로 깡그리 소실됐던 숭례문이 복구에 5년이 걸렸고 그것도 예상 외로 굉장히 오래 걸린 축에 든다.

마치 레카를 죽을 때까지 그냥 무기한 구속시켜 저렇게 구치소에 쳐넣어 두는 것처럼.. (주 기철 목사도 정식으로 재판과 형량 선고도 없이 유치장-구치소만 나돌면서 고문 당하다가 죽었다)
유지보수를 핑계로 친일 공화국 분단의 원흉 독재자의 행적은 이렇게 방치함으로써 교묘하게 지우고 폐쇄하고 봉인시키는 게 아닐까? 독립기념관 바깥뜰에다가 조선총독부 건물 잔해를 방치해 놓았듯이 말이다. 괴담 음모론 같은 거 믿고 싶지는 않지만.. 지금 나라 꼬라지가 꼬라지이다 보니 저런 불길한 생각마저 들려 한다.

저 안에 있는 동상도.. 마음 같아서는 당장 무너뜨리고 박살 내고 싶어하는 들쥐들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 미개한 반도에 쌔고 널렸다. 완전 위험물이다.

정치 보복 한번 참 졸렬하고 치사하게 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타인도 다 포용? 즐쳐드시고 엿 먹으라고 해라. 레카도 바보같이 그렇게 어영부영 순진하게 관용 베풀다가 믿는 도끼 발등 찍히고 저 지경 됐다.

표현의 자유? 맨날 천날 광화문에서 "김 일성 만세" 외칠 자유 운운하는데.. 그럼 어디 광주 시내 한복판에서 누가 "전 두환 만세"라고 외쳐도 너그럽게 오냐 오냐 포용할 수 있다면 그럼 본인도 그 자유에 대해 동의해 주겠다.

종북좌좀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뼛속까지 오로지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입각해서 움직일 뿐이다. 난 이래서 그런 놈들이 너무 혐오스럽다. '김 정은 위원장님', '비록 친척을 죽였지만 예의바르고 훌륭한 지도자'와 동일한 잣대와 포용력으로 이 승만· 박 정희를 미화하고 과오를 실드 친다면.. 남한 대통령쯤은 거의 예수에 맞먹는 성군 도덕군자로 포장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들은 광우뻥 선동· 세월호 선동부터 시작해서 온갖 가짜 뉴스와 왜곡, 여론조작으로 세력을 키우고 집권한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가짜 뉴스를 근절하겠네 뭐네 수작인가?
그리고 2017년 이래로 지금까지 곳곳에서 드러난 채용 비리와 부적격 인사 임명, 기업의 후원 강요 사례들.. 그게 2013~2016년 사이에 폭로됐으면 광화문 촛불이 몇 번이고 터져 나오고 대통령이 몇 번은 갈아엎어졌을 것이다.

걔네들은 진짜로 부정부패 비리 척결, 친일 청산, 민주주의 등등을 원해서 그런 구호를 외치는 게 절대~ 전혀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반민주적이고 반대자를 악랄하게 탄압할 놈들이 야당이고 약자일 때는 인권 복지 민주 팔고 감성팔이 짓거리를 할 뿐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냐? 대학까지 나와 놓고는 이 사실을 아직도 못 깨달았다면 정말 학교 헛다닌 미개한 개 돼지란 소리 들어도 싸다. 지능과 양심 둘 중 하나 이상은 문제가 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서 좋은 말, 이성과 논리와 팩트로 산업화가 되지 않고 자꾸 나라 체제를 위협하는 이상한 사상에 끌려가고 있고, 격리와 분리도 안 되면.. 어쩌겠는가? 쌍욕 아니면 폭력밖에 처방이 남는 게 없다. 이게 그저 단순히 견해나 성향, 신념이 다르기만 한 문제이면 내가 이런 험악한 말을 절대로 쓰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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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말에 왔을 때는 "2017년도 보수 공사"(올해 7월 17일까지)가 진행 중이었고, 얼마 전에 왔을 때는 "2018년도 보수 공사"(내년 3월 5일까지)가 진행 중이었다.
도대체 이화장이 뭘 그렇게 다 뜯어고쳐야 되는지, 모든 공사가 언제 끝나서 언제 재개방을 할지 모르겠다.

과연 이화장이 제대로 개관을 하는 날이 올까? 나의 이 썰은 과연 다 쓸데없는 기우로 끝날까? 어디 한번 두고보련다. 나중에 딴소리가 나오면 이 글이 증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가 정말 불가피하게 약간 훼손된 건 그렇게도 악랄하게 물어뜯고 욕하면서, 그렇게 민주주의 자체의 근간을 마련한 공에 대한 말은 일언반구도 없는 배은망덕한 족속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진짜 친일 청산과 민주주의를 제일 방해한 원흉에 대해서는 절대 침묵하는 머저리들..
이 승만 대통령은 미개한 부류들에겐 너무 과분한 지도자였다.

Posted by 사무엘

2018/11/17 08:33 2018/11/1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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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

서울의 중심부에 속하는 광화문-시청-종각 일대는 어쩐 일인지 대형 서점이 두 개나 비교적 서로 가까운 거리(광화문 교보, 종각 영풍)에 입점해 있다. 그 덕분에 책을 사러 잠시 들르기 좋다.
본인은 여러 볼일을 보러 시내에 갔는데, 광화문 근처에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게 있다는 걸 근래에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거기도 짬을 내어 들렀다.

아래에서 위층으로 올라가면서 관람하는 형태이고, 2층은 그냥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3층은 이 승만 시절의 건국 초기, 4층은 산업화와 민주화 ~ 현대의 순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기억에 남는 전시물들 사진을 소개하면서 본인의 생각을 덧붙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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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일제 시대는 제끼고..
저건 1948년 5· 10 총선거를 앞두고, 역사상 처음으로 투표라는 걸 해 보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요령을 설명하는 포스터이다.
저 때는 지금 같은 주민 등록 번호나 신분증이 없었던 관계로 투표를 하려면 유권자 등록부터 먼저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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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는 한자는커녕 한글도 못 읽고 심지어 아라비아 숫자조차 못 읽는 사람이 있었나? 막대 표기라니 무슨 로마 숫자 같다.
당사자에게는 좀 잔인하고 미안한 얘기이지만, 이 정도로 무지· 무식한 사람들의 집단에서 무슨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지도자 선출과 민주주의 따위를 바랄 수 있었겠는지 본인으로서는 매우 비관적인 전망을 할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이 무슨 정책이나 이념이나 공약을 보고 자기 소신대로 투표를 하겠는가? 그냥 다른 사람이 시키는 대로, 향응을 주는 진영에서 부탁하는 대로, 혹은 빨갱이들이 지상락원 선동하는 대로 우루루 끌려갈 확률이 99.9%이지.. 이래 갖고는 나라 망한다.

세상 물정 모르고 학교에서 불철주야 애들만 상대하던 교사가 퇴직하고 나와서 어설프게 사업이라도 하겠다고 나서면.. 그 교사의 퇴직금은 반쯤 과장 보태면 그냥 먼저 맡은 놈(= 사기꾼)이 임자라고 한다. 심지어 현직 교사들조차도 자기들이 학교 밖 사회에서는 완전 호구 취급 받는다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할 정도이다.

오늘날 교사는 분명 아무나 될 수 없는 직업이고,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교사까지 된 사람은 일반인들 평균 이상의 지능과 체력과 리더십을 갖춘 인재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될 수가 있다. 하물며 무지몽매한 민중들의 투표권이 어떤 방식으로 오· 남· 악용될지 대해서야 뭐 안 봐도 비디오이다.

투표권이란 게 무슨 운전 면허에 준하는 급으로, 혹은 군복무 조건까지 요구할 정도로 까다롭게 주어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일정 수준 이상의 나이와 학력, 그리고 자기 소득으로 단돈 1원이라도 세금을 내는 최소한의 경제력 같은 조건 정도는 붙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소한 연령을 지금보다 더 낮춰서 무슨 중· 고등학생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하는 건.. 영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애들이 정치에 대해 뭘 안다고..

5월 총선거 이후 1948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실질적인 생일이니 박물관에서도 당시 경축 기념식을 하던 분위기 회고록과 할배 대통령의 축사 연설 육성 같은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단, 제헌 국회 때 애드립으로 드려졌던 기도문은 종교색 때문인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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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에서는 분단과 북괴 정권의 수립 과정, 1940년대에 좌익이 저지른 각종 반란과 혼란 공작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곧장 6· 25 전쟁 파트로 넘어갔다.
전쟁 당시에 북한의 절반인 10만 명에 불과하던 남한의 육군은 휴전 이후 1954년엔 70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 영상 자료가 소개하는 바와 같이 군사력이 증강된 것은 사실이다. 왜냐고? 이제 상시 징병제가 시행됐기 때문이다.

난 1950년대 이 승만 때는 원자력 연구소만 만들고 국방 과학 연구소는 순전히 1970년대 박통의 작품인 줄로만 알았는데..
저 때도 '국방부 과학 연구소'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연구 기관이 생기긴 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하긴, 저 때는 어떻게든 북괴의 남침 시즌 2를 원천 봉쇄하는 게 최대의 과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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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음으로 1960년대로 넘어간다. 저게 바로 그 시절에 국내에서 최초로 생산해 낸 자석식 전화기와 라디오이다. ㅠ.ㅠ
전화기는 다이얼조차 없이 수동 발전기로 최소한의 전기 신호를 전화선을 통해 보내는 기능만 있다. 그리고 라디오는 기능이 굉장히 빈약해 보이는데 크기는 꽤=_= 크다.
하긴, 저 때는 저렇게 전파를 통해 아날로그 신호를 수신하는 기계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최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지금으로부터 5년도 더 전에 아날로그 송출이 중단되고 디지털로 전환된 반면, 라디오는 그런 변화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운전자용 아니면 비상용으로 TV와는 용도가 확 다르니 예로부터 통용되는 단순한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충분한 듯하다.
그나저나 라디오 중에는 TV 채널의 음성 부분만 추출 가능한 물건도 있었는데, 그럼 이제 그건 불가능해진 건가 모르겠다. 라디오 방송국이 일부러 TV 방송을 들려주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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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교통 박물관에서 봤던 시발 자동차를 여기서도 보게 됐다. 색깔도 동일하다.
저 시절엔 자매품으로 시발 리무진과 시발 버스도 있었는데.. 그건 실물은 말할 것도 없고 레플리카가 만들어진 것도 없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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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공화국 시절, 박통의 원대한 국토 마개조 야망이 저 지도에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짧은 역사 동안 정말 박통 같은 위대한 지도자는 없었다. 옛날에 무슨 "인도와 마 광수를 바꾸지 않겠다" 이런 구호가 있었던가 본데, 저 시절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로 건전하고 불가피하고 선했던 경제 개발 반공 독재라면 어줍잖은 2공 의원내각이니 사분오열 당파싸움 민주주의 따위하고는 얼마든지 맞바꾸고도 남는 장사였다.

저 과업들을 다 일관되게 이루려 하다 보니 통상적인 임기만으로는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장기집권을 하게 된 거다.
그리고 그걸 추진하려면 돈이 왕창 많이 필요한데 돈이란 게 땅 판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국가고 국민이고 다들 가난했다.
초창기에는 삼성과 현대도 그냥 오늘 내일 직원 월급 주는 걸 걱정하는 아류 영세 기업일 뿐이었으며, 돈줄은 제도권 은행이 아니라 지하에서 민간 사채업자들이 잔뜩 쥐고 있었다. 그만치 나라 사정이 답이 없고 열악했다.

그러니 박통은 화폐 개혁을 감행하고, 기업들이 돈 걱정 없이 투자를 할 수 있게 사채의 전부나 일부를 국가가 초법적인 권한으로 강제로 탕감해 버리기도 하고, 국민들에게는 온통 저축을 강조하면서 경제 개발 자금이 은행으로 모이도록 독려했다. 일본과 수교하면서 받은 소위 일제 피해 배상금도 최소한 다른 이상한 짓거리로 탕진하지 않고, 경부 고속도로와 포항 제철의 건설에 썼다. 왜냐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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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게 더 낫기 때문이다. 국가가 잘살고 국민들이 다들 등 따시고 배 부른 중산층이 되어 자기 생업에만 종사하면서 가족과 오순도순 즐겁게 잘 살기만 한다면.. 골치 아픈 정치에 관심 가질 필요 따위 없고 반공은 저절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당장 자기가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으면 무슨 계급 갈등에 자본가들을 타도해야 되네 혁명 과업을 이뤄야 하네 식의 불순한 수작에 귀를 기울일 일이 없다.

그러니 위의 포스터는 그저 정치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어느 정도 사실이다. 실력으로 일본을 이기는 게 가장 훌륭한 극일 반일이듯이, 자유 시장 경제 하에서 북괴보다 잘사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수준 높은 반공이다.
오늘날의 좌익 종북 빨갱이 위정자들은 이와 정반대 짓거리를 하고 있다. 기업을 몽땅 망가뜨리고 서민 경제를 파탄 몰락시키는 게 대남적화에 어떤 형태로든 더 유리하다. (선동에 더 취약해지고 먹을것 앞에서 인간성이 더 쉽게 상실되는 등..) 이른바 경제 무장의 해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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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은 너무 많고 시간은 부족하고 야당의 쓸데없는 태클은 심해지고 기존 선거 방식대로는 계속 당선되기가 어려우니..
박통은 헌법을 뜯어고치는 초강수를 밀어붙였다. 우리나라 헌정 사상 전무후무한 10월 유신.. 이게 '우리식 사회주의'...가 아니고, '한국식 민주주의'이고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긍정적인 프로파간다 홍보를 죽어라고 해야 했다. 병신 같지만 왠지 멋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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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니는 뉴질랜드로 수출되었던 것을 역수입한 것이어서 포니로서는 아주 드물게 우핸들이다. 게다가 안을 들여다보니 자동 변속기이더라. 2도 아니고 1이 오토라니.. 정말 보기 드문 모델이다.
옛날에 무슨 영화 찍고 자동차 박물관에 전시하는 용도로 이집트에 수출되었던 포니를 하나 역수입했다고 그러던데, 그 시절에 포니가 참 세계 곳곳으로 퍼져나가긴 했었다.

이렇게 산업화 얘기부터 한 뒤에 한켠에 개발 부작용에 대한 한계, 민주화 열망 그런 얘기도 소개돼 있었다. 이념적으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는 듯했다.

이 승만은 건국 초기와 관련하여 육성과 사진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반면, 박통에 대해서는 경제 성장 성과만 저렇게 소개돼 있고 당사자의 족적은 박물관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이쪽으로 더 관심이 있으면 아무래도 상암동에 소재한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을 찾아가는 게 더 좋을 것이다.
또한 못살던 시절, 한창 산업화 하던 시절에 서민들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한 자료는 경희궁 근처의 "서울 역사 박물관"과도 영역이 일부 겹친다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이라는 타이틀이라면 차라리 구한말· 일제 시대를 빼 버리고, 서울 올림픽이나 대전 엑스포, IMF 극복 같은 역사 자료도 더 풍부하게 넣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그것도 벌써 2~30년 묵은 역사의 영역으로 옮겨져 가고 있으니 말이다.

관람을 다 마치고 내려가는 계단에서 정~~말 뜻하지 않게 본인이 다니는 교회의 청년부 동생과 마주쳤다. 서로 깜짝 놀라면서 좁은 세상을 실감했다. =_=;;;

※ 외솔 상 시상식

이 날 서점과 박물관을 방문한 뒤 본인이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서울 시청 근처 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었던 올해치 외솔 상 시상식이었다. 본인은 수상자와는 별 인연이 없지만, 거기에 참석했던 사람들 중에는 본인의 지인 분들이 여럿 있었다.

"재단법인 외솔회"라고 국어학자 외솔 최 현배 박사를 기념하는 단체가 있다. 거기서는 매년 고인의 탄신일(10월 19일)에 즈음해서 한국어· 한글과 관련해 문화· 학술 분야에서 1명, 계몽· 운동 분야에서 1명 이렇게 총 2명을 선정해서 상을 준다.
그렇게 시작된 시상식이 2018년 기준 벌써 40회를 맞이했다고 한다. 공 병우 박사도 외솔 상의 아주 초창기 수상자였다.

올해는 학술 분야는 서울대 국문과 교수 겸 국립 국어원 원장을 역임했던 권 재일 교수가, 운동 분야는 한글 문화 연대의 어느 간부가 받았다. 돌아가신 지 벌써 15년이 돼 가는 허 웅(한글 학회 회장) 박사가 외솔의 제자였고, 권 교수는 허 웅의 제자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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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장 입구에는 본인이 다니는 대학원의 총장과,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 명의로 화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외솔회는 재단법인이지만, 비슷한 업종(?)에 속하는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는 사단법인이라는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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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은 상만 씨크하게 주고 끝인 게 아니라 외솔 선생의 생전 육성 청취, 수상자의 소감 연설, 심지어 "한글이 목숨이다"를 가사로 뮤지컬 공연까지 생각보다 프로그램이 많았다. 게다가 뷔페 저녁 식사도 공짜로 줬다.

전공 분야와 관련해서 외솔의 사상과 행적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차례 다룬 바 있으니 그걸 참고하면 될 듯하다.
킹 제임스 성경 신자가 0.5초 만에 이해 가능하게 한데 요약하자면, 요일 5:7 구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 대신에 '말, 글, 얼'을 집어넣으면 씽크로율이 99%에 근접할 것이다.
이분은 말년에 기독교로 개종해서 개인적인 종교가 실제로 기독교였다고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런 신앙보다는 그냥 방망이 깎던 노인 스타일의 대쪽 강직한 고집쟁이 원칙주의자 "한글이 목숨" 언어학자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1970년 봄, 아폴로 13호의 발사를 세 주 남짓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이분이 그 근성으로 성경· 신학 쪽도 진지하게 파고들었다면 이 분야 순우리말 용어에도 분명 관심을 가졌을 것이며 혼과 영 대신에 넋과 얼을 제안도 분명 했으리라고 본인은 추측해 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8 08:33 2018/10/2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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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재작년(2016)에 이어 올해 열린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대회(제30회)에 논문을 투고하고 발표했다.
재작년에는 현재 날개셋 한글 입력기에 '복합 낱자 입력 로직 생성기'라고 깔끔하게 구현된(8.8~9.0) 기능의 개념과 필요성에 대해서 썼다.

그 뒤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세벌식 글쇠배열에서 구현 가능한 모아치기, 동시치기 등의 개념을 정립했으며 이와 관련된 연구, 날개셋 9.5에서 새로 구현된 기능의 핵심 아이디어, 그리고 간단한 관련 실험 결과를 짧은 분량에 최대한 요약해서 소개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파이널 버전에서 최종 테크 명목으로 연구된 (1) 세벌식 응용 기능을 발표한 자리이니 본인으로서는 뜻깊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특이한 점은 장소이다.
재작년에는 학술대회가 부산 동아 대학교에서 열렸다. 서울과 굉장히 먼 대도시라는 특성상, 차를 가져가지 않고 커다란 캐리어만 끌고 다니며 여행을 다녀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소가 서울 고려 대학교이고, (2) 차나 숙박이 전혀 필요 없이 집에서 간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학회를 다녀 오는 분위기가 완전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적당히 경기도 외곽이나 강원도 지방에 자가용을 몰고 내려가고 주변에 좀 놀러도 다니고, 밤에는 차에서 자면서 추억을 만드는 학회를 생각했는데.. 이건 결국 본인의 대학원 재학 중에는 이뤄지지 않게 됐다.
그래도 해수욕을 하고 여관방과 카페에서 잔 학회와, 교통과 숙박 걱정이 전무한 인서울 학회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의미가 있었다. 극단적으로 먼 곳과 극단적으로 가까운 곳의 차이이다.

그리고 (3) 다른 학교가 아니라 고려대라니.. 여기는 본인이 대학 학부 시절에 최초로 논문을 투고하고 참가했던 먼 옛날 2003년 제15회 대회 때와도 동일한 장소였다. 거기를 15년 만에 다시 찾아가다니.. 참 좁은 세상이다. (그땐 본인이 아직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거주지가 없던 시절인 관계로, 숙박은 서울 친척 집에서 함)

올해는 딱 30회 기념에다 인서울 버프까지 받아서 그런지, 재작년은 물론이고 예년 평균의 2배를 상회하는 많은 논문이 투고되었다.
재작년엔 4개의 세션에서 토요일 오후 12시 반쯤에 모든 논문 발표가 마무리 되었던 반면, 올해는 5개의 세션에서 무려 오후 5시까지 끊임없이 논문 발표 스케줄이 배당되어 있었다.

재작년에는 학회에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했던 반면, 올해에는 우리 학교의 김 한샘 교수님이 발표 세션 중 한 곳에서 좌장을 맡으시고 우리 학교 언어 정보 연구원에서도 논문을 투고했다. Universal Dependency라고.. 언어들의 구문 분석 태그 세트도 전세계 공통 통합 체계를 만들려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는 걸 난생 처음 들었는데, 저 세션은 바로 그 UD 관련 발표 세션이었다.

또한 (4) 본인처럼 한글 코드와 글자판 같은 기초/마이너 분야의 연구를 하는 분을 몇몇 뵐 수도 있었다.
변 정용 교수님은 재작년에는 특강만 하시더니 올해는 논문도 투고하셨고, 내 논문까지 포함해서 아예 이 분야만을 위한 별도의 발표 세션도 배당되었다. 이것도 좋았다. 재작년에 냈던 내 논문은 인지과학 세션으로 분류됐었다.

그러니 이번 학술대회는 개인적으로 느낀 분위기가 재작년 대회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런 데다가 정말 고맙게도 본인은 2년 전에 이어 올해에도 우수 논문상을 받았다. 재작년과는 달리 아예 대회 시작 전에 미리 알려 주더라.
뭐, NLP처럼 많은 연구자들이 몰리는 주류 연구 주제에서 두각을 보였다기보다는, 워낙 독특하고 마이너한 분야를 파고 있고 그게 학술적으로 무가치한 건 아니니, 그 연구 성과를 인정받은 것에 대한 비중이 더 컸을 것이다.

본인이 여기에 논문을 하나 더 낸 이유는 다른 동기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학교 졸업 이수요건 충족을 위해서이다. 그런데 학계에서 논문이라는 건 크게 학위논문(대학원 졸업용), 학술지(저널) 논문, 그리고 학술대회 발표 논문(프로시딩)으로 크게 나뉜다.
본인은 발표 논문만으로 이수요건이 충족되는 줄 알고 있었으나 그렇지는 않더라. 사실 프로시딩은 투고하고 게재되는 절차가 제일 신속 간편하고 격도 제일 낮다. 학계 이 바닥의 최신 동향을 모니터링하고 자기 연구 성과를 정말 짤막하게 신속하게 광고하는 수단에 가깝다.

결국 학술지 논문 두 편 이상인데, 하나는 KCI 등재 또는 등재후보 등급 이상의 학술지에 실어야 한다. 그건 본인이 이미 작년에 하나 해냈다. 나머지 하나 더는 이론적으로는 정말 아무 학술지에나 실어도 되고 더 부담 없이 해도 된다.
하지만 논문이란 건 한번 투고하면 영원히 기록이 남고 특히 박사들에게는 취업 스펙이나 마찬가지인 아이템인데, 너무 대충 아무렇게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발표 논문도 학술지 논문으로 발전시켜서 실으려면 내용을 추가 보완하는 두벌일을 하게 됐다.

그래도 이런 학술대회에서 우수 논문 추천을 받으면 관련 학술지에다가 발표 논문의 파생 논문을 싣는 것도 한결 더 수월해진다. 본인의 이전 학술지 논문도 이런 절차를 거쳐서 실을 수 있었다.
한글 및 한국어 정보처리 학술대회는 본인과 이런 관계가 있는 자리였다. 올해 대회에 참가하여 추억을 만들고 온 기록을 내 블로그에다가도 남기고자 한다.

※ 장소와 분위기

고려대는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이 많은 게 인상적이었다.
교내로 들어온 차량은 지하로 쏙 보내 버리고 지상에는 보행자와 이륜차 정도만 지나가는 넓은 광장을 두는 게 요즘 대학교 캠퍼스들의 디자인 트렌드인 것 같다. 라이벌인 연세대만 해도 2010년대 초중반에 '백양로 재창조' 리모델링을 하면서 캠퍼스를 그렇게 뜯어고쳤으니 말이다.

요런 학회는 첫째 날엔 참가자들이 몽땅 한 자리에 모이니 커다란 강당이 필요하고, 다음날 실제 학회가 진행될 때는 발표 세션들이 있을 강의실 네댓 개와 포스터가 전시될 광장이 필요하다.
두 공간이 성격이 좀 다르다 보니 이번에는 첫째 날 모이는 장소(인촌 기념관)와 둘째 날 모이는 장소(현대자동차 경영관)가 학교 정문의 서쪽과 동쪽으로 서로 완전히 달라졌다. 동일하거나 인접한 건물에서 층만 달라지는 정도가 아니었다.

올해 학술대회는 논문이 많이 투고된 것에 비해 첫째 날의 프로그램이 의외로 어느 때보다도 적었다. 특강 딱 세 개 이후에 경과 보고와 시상식만 하고 끝이었다.
보통 저녁 7시가 넘어서야 간신히 저녁 먹으러 나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5시 반에 칼같이 첫째 날 일정이 종료됐다. 새내기 박사 졸업자들의 자기 학위 논문 발표라든가 후원사 홍보 세션 같은 것도 없고..

그리고 만찬도 예전에는 뷔페라든가, 앉아서 먹는 한식 정도가 나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그냥 교내 학생 식당에서 각자 알아서 배식 받아 먹는 것으로 끝이었다. 이번 학회가 참가자가 이례적으로 굉장히 많아서 이렇게 결정한 것 같긴 하나.. 이렇게 하니 모르는 사람과 안면을 틀 기회가 없어서 일면 아쉬웠다.

※ 특강(초청 강연): 검색엔진

특강 세 편 중에서 (1) 네이버에서 근무 중인 어느 언어공학 박사가 한 강의가 제일 유익했고 머리에 제일 많이 남았다.

  • 오늘날 전세계에 유의미하게 남아 있는 검색엔진은 구글, 마소 Bing, ..., 러시아 XXX, 중국 바이두, 한국 네이버 등 딱 7개 남짓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폐쇄적이거나, 기술 배경이 특이하게 고립된(갈라파고스화..) 곳 말고는 그나마 구글이 사실상 전부 다 먹었다. 우리(네이버)는 이런 상황에서 뒤쳐지고 도태하지 않게 위기의식을 갖고 피말리는 노력을 하고 있다.
  • 웹사이트 검색과 블로그/뉴스 검색은 성격이 매우 다르다.
  • 검색엔진들이 웹 문서들을 평가하고 노출 순위를 매기는 세부 기준들은 전적으로 개발사들의 권한· 재량인 동시에 중대한 영업기밀이다. 교사들의 시험 문제 출제와도 같다. 그게 유출되면 당연히 오· 남용 악용되고(시험지 유출처럼..!!) 그걸 막으려고 피차 또 왕창 피곤해진다. 아무리 오픈소스네 개방이네 해도 개방되는 건 중립적인 기술과 알고리즘일 뿐, 그런 주관적인 잣대는 국회의원 같은 높으신 분이 요청한다 하더라도 넘겨줄 수 없다.
  • 뭔가 얼토당토않은 사이트가 상위로 랭크된 듯한 게 있으면 그건 기술적인 문제나 한계, 버그 때문일 뿐이다. 노출 우선순위는 전적으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상상을 초월하게 방대하고 복잡한!) 결정될 뿐, 그게 내부인의 농간에 의해 호락호락 조작 가능한 게 아니다. 관련 괴담이나 음모론들은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 굳이 AI나 기계 학습 관련 알고리즘을 다 이해하고 있고 직접 코딩 구현까지 했다고 해서 엔지니어 채용 시에 크게 가산점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 기술을 이용해서 실제 언어 데이터를 상대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창의적인 실험을 해 봤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강연 내용들은 본인의 개인적인 견해일 뿐, 내 직장의 공식적인 입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옛날에, 1990년대 25년쯤 전에 검색엔진이라는 건 수많은 웹사이트들을 사람이 손으로 도서 분류하듯이 카테고리화해서 안내하는 길잡이, 아니면 msdn의 검색(search) 기능처럼 그냥 기계적으로 특정 주제어가 존재하는 웹페이지들을 정확도와 빈도 순으로 보여주는 메타사이트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검색엔진은 웹메일, 뉴스 기사 등 온갖 서비스들을 같이 제공하는 포털 사이트를 겸하게 되어 덩치가 커졌으며, 검색 기능에도 온갖 자연어 처리 기술이 접목되었다.
2002년쯤에 네이버에 지식인이라는 게 도입되면서 이변이 일어났다. 검색엔진은 그냥 기계적인 검색만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고 그 사람이 원하는 정보를 즉각 대령하는 경지에 다다르게 됐다.

그리고 나라 밖에서는 구글이라는 신흥 강자가 세계의 웹을 정복했다. 야후, 심마니, 엠파스 등.. 1세대 검색엔진들은 싹 도태해 버리고 물갈이 됐다. 과거에 워드 프로세서를 두고 마소 vs 한컴이던 게 지금은 검색엔진을 갖고 구글 vs 네이버 구도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아무튼..

(2) 그 다음, 젊어 보이는 어느 고려대 '영문과' 교수님은 맥북 Keynote를 써서 발표하면서(예능· 디자인?), null space가 어떻고 야코비안 행렬이니 벡터 편미분이니 나열하며 반쯤 선형대수학 강의를 하시는 게 아주 인상적이었다. 요즘은 정말 학문에 경계란 게 없는가 보다.
하긴 언어 응용 중에 음성 처리 쪽은 기술 집약적이고 굉장히 이과스러운 분야이기도 하니까..

※ 특강: 한글 코드

(3) 그리고 마지막으로 변 정용 교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자음· 모음을 이중 삼중으로 임의로 집어넣은 한글을 구현하려고 애쓰고 계셨다.
지금 유니코드에서는 한글을 글자 단위로 완성형으로 쓰지는 않는다. 단지, 낱자 레벨에서는 완성형인 게 사실이다. 초성의 자음 집합과 종성의 자음 집합이 일치하지 않는다. ㅄ이라는 낱자 번호로부터 ㅂ과 ㅅ을 자연스럽게 추출할 수 없으며, 초성 ㅂ으로부터 종성 ㅂ의 코드값을 얻을 수 없다. 다 테이블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변 교수님의 주장은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지금의 160여 만 자 옛한글조차도 한글을 컴퓨터에서 제대로 구현한 게 아니라고 한다. 원래 훈민정음의 원리대로 한글 자모를 뭉쳐 넣고 조합하면 399억 종류, 32비트 정수 범위를 초과하는 가짓수의 글자를 만들어 낼 수 있다고..
그냥 영어의 strike, school라든가, 중국의 xian, yao 등등.. 세계 모든 언어에서 1음절로 표현되는 음운은 몽땅 한글 한 글자로 묶어서 표현하겠다는 포부이다.;;

프로그래밍 언어 분야에도 극단적인 순수주의자(purist)가 있듯이, 한글의 표현 방식에 대해서 이런 최고 수준의 추상화와 순수주의 이념을 추구하는 분이 계시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다. 24자인지 28자인지 최소한의 낱자만 문자 코드에 배당해 놓고, 얘를 쭈루룩~~ 늘어놓는 것만으로 모아쓰기 글자가 생성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단지 그렇기 하기에는 제반 글꼴 기술이라든가 음절 경계 구분 쪽의 부담이 대책 없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낱자는 그냥 코드 차원에서 완성형으로 퉁친 것이다. 심지어 현대 한글은 글자마디 11172자를 다 집어넣기도 했다.
뭐, 유니코드 5.2가 등장하기 전에는 심지어 마소에서도 1.1 자모를 최대 3개까지 한데 묶어서 최대 9개의 코드 포인트를 차지하는 옛한글을 편법으로 구현한 적이 있다. 그러니 변 교수님의 지론도 기술적으로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조합 가짓수가 비현실적으로 너무 많긴 하다.

변 교수님이야 무려 1980년대부터 한글 코드 역사의 산 증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니, 학회에서도 이분에 대한 courtesy 차원에서 특강에 논문 발표 기회까지 잔뜩 마련해 줬다. 하지만 "한글을 굳이 저렇게 이상한 형태로 활용할 필요가 있나, 그게 무슨 돈이 되고 실용적인 의미가 있나? 멀쩡한 IPA 부호를 냅두고 굳이 저런 한글 변형을 쓸 사람이 있겠나" 같은 이의 제기도 물론 있다. 이건 요즘처럼 AI네 빅데이터네 머신러닝이네 떠들어대는 시절에 신세대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인기 분야라고는 할 수 없다. =_=;;

발표 자료 중에는 북한에서 유니코드 위원회에다 '한글' 대신 '조선글'이라는 명칭을 써 달라 뭐 이렇게 영어로 이의 제기 메일을 보냈던 것의 캡처 화면이 잠시 지나갔다. 북한은 국가· 민족 정체성과 관련하여 한(韓)이라는 글자를 아주 싫어하니까..
물론 북괴는 그래 봤자 회비도 잔뜩 체납된 상태에서 발언권이고 영향력이고 아무것도 없었다. "한글 배열 순서를 북한 식으로 해 달라, 최고존엄(김 일성 김 정일) 전용 문자 코드를 배당해 달라" 이런 요청 따위도 몽땅 씹혔으며, 유니코드에서 한글은 오로지 100% 남한의 관행대로만 배당되었다.

북한이 작성한 이메일을 쭉 훑어보니 byte를 bite로 잘못 써 놓은 게 보였다. ㅡ,.ㅡ;;
하긴, '자전거'도 bycicle이라고 쓰기 쉬운 와중에 I와 Y를 헷갈리는 거 이해는 된다.
게다가 4비트 nibble도 '야금야금 물어뜯어 갉아먹다'라는 뜻이 있으니, 그 다음 byte 역시 bite와 전혀 무관한 명칭은 아니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22 08:31 2018/10/22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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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섬은 한국으로 치면 울릉도뻘 되는 일본의 시골 오지이다. 인구도 35000명에 불과하니 1억이 넘는 일본 전체 인구에 비하면 극소수이다.
제주도에 중국 애들이 많다면, 쓰시마 섬엔 한국 애들이 엄청 많이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상점과 공공장소에는 곳곳에 한국어로도 안내가 다 돼 있었다.

쓰시마 섬은 넓이가 거제도의 두 배 정도이고 제주도의 38% 정도여서 막 작지는 않다. 하지만 땅 대부분이 산이어서 사람이 살 만한 곳은 얼마 없으며 길도 전반적으로 좁고 꼬불꼬불한 산길뿐이었다.
4차선 이상 도로를 거의 못 본 걸로 기억한다. 평소에 교통량이 적어서 그런지, 삼거리 교차로에서도 건너편 좌우 횡단보도와 차량 신호가 동시에 파란불이 되면서 비보호 좌우 회전을 하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길이 좁은 것치고는 시가지나 골목에서 일방통행인 곳도 없었다.

여기는 철도는 없다. 한국이나 일본 본토와 연결이라도 하지 않는 한, 내부에 단독으로 철도 같은 게 생길 일은 없다. 공항은 있지만 일본 국내선 전용이다.
한편,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 여기 휘발유 값은 리터 당 154엔이었으니, 한국보다 가격이 약간 더 저렴했다.

일본 정도는 요즘 개나 소나 아무나 다녀오는 세상인데 혼자 설명충 행세를 너무 오랫동안 많이 한 것 같다. =_=;; 이제부터는 슬슬 주요 풍경 사진들을 투척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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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카츠 항에 도착한 뒤에 곧장 들른 첫 목적지는 미우다 해수욕장이었다. 아담한 크기인데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이런 곳은 한여름에 직접 찾아가서 시간 제약 없이 물놀이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요 몇 년 전부터 바다에 꽂혀 버려서 말이다.
친구들끼리 놀러 오기라도 했는지, 비슷한 옷 코스프레를 한 처자들 일행이 모래밭 여기저기서 셀카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웃통 벗고 과감하게 입수해서 물놀이를 하는 젊은 남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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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한국 전망대(일본 명칭은 한국 전망 '소'所)에 도달했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일각에서는  평평한 지구 논쟁이 불거져(ㅠㅠ) 있다. 특히 신자들 중에 "성경을 보니 지구 모양은 원반형 평면이래!"라고 NASA 음모론까지 결부지어서 진지하게 믿기 시작하신 분이 몇몇 있다. 올해 지난 3월에는 한국에서 평평한 지구 국제 컨퍼런스까지 열렸었다. (...)

본인은 관련 자료를 찾아 보다가 쓰시마 섬의 한국 전망대에서 보는 부산 시내와 광안대교의 모습을 주목하게 되었다. 지구의 둥근 곡률로 인해 배는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면서 사라지고, 50km 남짓 떨어진 부산 시내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봐야 밑동이 짤린 채로 간신히 보이는 것 말이다.

그 한국 전망대를 실제로 가 보게 됐다. 하지만 본인이 방문하던 당시에는 아쉽지만 하늘이 흐려서 부산 시내를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
차라리 밤에 갔으면 광안대교를 자체 조명을 통해 윤곽을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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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가 있는 곳은 아래가 이런 모양으로 보일 정도로 제법 고지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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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전망대의 바로 옆에는 옛날에 일본을 방문하던 어느 조선 통신사 일행의 위령비가 있었다. 일본을 방문하던 중에 폭풍 때문에 배가 파선하여 몽땅 불귀의 객이 됐다고 한다.
한국어로 적힌 설명문도 있었지만 한문 혼용체여서 제대로 읽기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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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보시타케 전망대. 쓰시마 섬에 이런 곳이 있다고 어렴풋이 듣긴 했던 것 같은데 역시 실물을 보게 됐다.
높이 수십 m 남짓한 언덕을 운동 삼아 오르고 나면 이런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다.
베트남 하롱 베이를 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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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일본의 신사도 처음으로 실물을 봤다. 쓰시마 섬 관광 때 꼭 들르는 곳은 '와타즈미 신사'라고 바다의 신을 모셔 놓았다는 곳이다.
일본 영토 전역에 있는 신사의 수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곳만 무려 8만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리고 모든 신사에는 이런 고유한 모양을 한 입구가 놓여 있다.

우리나라도 조상신이니 무당이니 하는 토속 샤머니즘 종교가 있어서 불교· 유교와 교묘히 짬뽕 되긴 했다만, 일본의 토속 종교라 불리는 일명 '신토'는 더 특이한 것 같다.

굳이 조상신에만 국한되지 않고 무슨 그리스· 로마 신화처럼 별별 것에다가 신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건 범신론 같다. 뭔가 유일신 절대자를 믿고, 현생에서 바르게 살아서 내세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통상적인 종교 패러다임 자체가 전혀 갖춰져 있지 않다. 거기에다 과거 군국주의 시절에는 이런 신토에다가 덴노(천황) 숭배가 이상하게 끼어 들어가기도 했었다. 그 체계를 알 수가 없다..;;

바가지를 들고 양손을 번갈아 가며 손을 씻고 입도 헹군다. 신사에서 씻는 용도로 흘러나오는 물은 마시는 용도가 아니라고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설명이 친절하게 돼 있더라.
'신사 참배'라고 하길래 본인은 오랫동안 무슨 형상 앞에서 큰절이라도 하는 걸 떠올렸는데, 알고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손뼉도 짝짝 두 번 치고.. 절차가 더 특이했다.
본인이 관광 가 있던 동안 일본인 아주머니가 진지하게 FM대로 신사 참배를 하는 걸 보기도 했다.

일제 시대 때는 저런 신사가 당연히 한국 땅에도, 당장 서울 남산에도 잔뜩 만들어졌다.
일본이 옛날에 뻘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으면 신사가 지금까지도 그냥 특이한 외국 토속 종교 정도의 인상으로만 남았을 텐데, 그걸 다른 민족에게도 강요하고 안 따르는 사람들을 가두고 괴롭히고 죽인 적도 있으니 신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도 사람들의 뇌리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해방 이후에는 그 많던 신사들은 일본인들이 알아서 스스로 싹 해체하고 철거했다.

아, 일본도 신사 말고 불교 사찰이 전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에 비해서는 인구나 면적 대비 개수가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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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한 유래는 기억이 안 난다만, 옛날 '에도 막부' 시절에 쓰였던 항구 부두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작은 배들을 세워 두는 곳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중요한 곳 관광은 사실 첫째 날에 모두 했다. 다음 날은 오전에 시내 도보 관광과, 오후에 다시 히타카츠 항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몇 숲길 산책 위주만 진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관광을 했던 첫째 날은 하늘이 잔뜩 흐렸고, 정작 그 다음 날이 하늘이 푸르고 맑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관광 일정을 마친 뒤엔 숙소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주변에서 면세 쇼핑을 잔뜩 했다.

가게에서 한국인 관광객이 합계 5천 엔 이상을 구매하면 점원이 면세로 구입할 것인지 알아서 묻는다. 관광객이 동의하면 이것들은 8%가량 가격이 할인되는 대신, 면세품 전용 봉투에 밀봉된다. (저기서 5천 엔은 물론 면세 전 원래 가격 기준) 그리고 일본을 떠나기 전에는 이 봉투를 뜯어서 물건을 사용할 수 없다는 제약이 붙는다. 미리 뜯어 버린 것이 세관에서 발견되면 면제되었던 세금이 재부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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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섬은 바다와 자연스럽게 연결된 형태로 수로 내지 호수가 꾸며져 있는 게 경치가 좋았다.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 하치만궁 신사에도 들르긴 했는데 사진은 생략하고 넘어가겠다.

본인은 주로 풍경 사진만 찍었지만 가족 사진을 찍는 건 본인의 누나가 전담했다.
원래는 셀카봉을 펼친 상태에서 가까운 셀카봉의 버튼만으로 폰에다가 사진 찍기 명령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셀카봉이 고장이 나는 바람에 누나가 폰을 눌러서 타이머를 발동시킨 뒤, 그 사이에 재빨리 셀카봉을 펼치고 자세를 잡고 사진을 찍어야 했다. 즉, 사진을 찍는 게 매우 불편해졌다.

이게 총기로 비유하면 후장식 총기이던 것이 일일이 총구에다가 총알을 집어넣어야 하는 전장식 총기로 후퇴한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준과 연사가 얼마나 불편한가? 반대로 후장식이 총기의 역사에서 얼마나 획기적인 발명인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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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시마 섬의 중앙에다 뱃길을 낸 만제키 운하이다. 군함을 더 수월하게 통과시켜서 일본의 반도+대륙 진출을 더 용이하게 하기 위해 취한 조치이다.
이 사진은 그 위에 놓인 '만관교'라는 다리 위에서 찍은 것이다. 참고로 다리 위로 바닷바람이 굉장히 강하게 불었다.

귀국 거의 직전에 산책했던 휴양림(?) 숲길은 모처럼 바닷물이 아닌 산에서 흘러내린 민물이 졸졸 흐르고 경치가 무척 아름답긴 했는데, 이 역시 사진은 생략하겠다.
이 정도로 1박 2일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10 08:36 2018/10/10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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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외국 여행 이력

올해 본인은 지난 추석 때 가족과 함께 쓰시마 섬 패키지 관광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본을 가 봤으며, 한반도를 통틀어서 가장 가까운 외국을 다녀오게 됐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행기 대신 배를 타고 외국으로 나가기도 했으니, 본인의 여행 이력과 관련해 여러 분야에서 신기록이 세워졌다.

그런데 본인은 외국 여행을 갈 때마다 뭔가 아귀가 공교롭게 안 맞아서 필요 이상의 손해와 삽질을 감수하곤 했다.
10년 전에 군필 기념으로 미국 여행을 갔을 때는 국내의 휘발유 1리터 가격이 지금과 비슷한 1600원 초중반이었는데, 1$의 환율은 1400원을 훌쩍 넘어 있었다. 그때 이후로 달러 환율은 현재까지 다시는 그만치 오른 적이 없었고 말이다.

게다가 거의 130$ 가까이 주고 비자 신청 인터뷰까지 또 해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안 가 2009년쯤부터는 단기 관광 비자가 면제되었다. 그러니 2008년 가을에 미국 다녀온 건 최악의 바가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제주도보다도 가까운 곳을 다녀 오지만 그래도 외국이니까 여권이 필요한데.. 병특 만료 기념으로 10년 전에 만들었던 여권은 딱 올해 추석 연휴 기간에 맞춰서 기한 만료 예정이었다. 뭐, 유효 기간이 6개월 이내로 줄어든 여권은 신규 출국용으로는 사실상 못 쓰는 여권이긴 하다만..

이것만 아니면 본인은 앞으로 수 년간 외국 나갈 일이 없을 사람이다. 여권이 무슨 면허 갱신도 아니고 몇 년간 여권 없이 살아도 되는 처지인데 결국은 단절 기간 없이 또 새 여권을 만들게 됐다.
요즘은 출입국 때 일일이 도장을 찍지도 않고 사증란이 소모될 일이 더욱 없으니, 본인은 면수가 절반인 알뜰 여권을 신청했다. 다만, 그래 봤자 할인되는 금액은 3000원 남짓으로, 5만 원에 가까운 전체 발급 수수료에 비해서 그렇게 많이 저렴해지는 건 아니었다.

2. 고속도로

외국 여행을 가는데 인천 공항이 아니라 반대편의 부산항으로 가는 게 무척 이색적이었다. 부산에도 서울로 치면 내부순환로 같은 고가 형태의 시내 고속화도로가 응당 있다. 그러니 부산 중에서도 최남단인 부산항까지 가는 게 생각만치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거기를 달리는 재미가 쏠쏠했다.

또한, 본인은 서울-부산을 왕복하는 동안 차의 성능 테스트도 같이 진행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50~160km씩은 흔히 밟았으며, 차 없고 탁 트인 곳에서는 잠시나마 180~185까지도 밟는 데 성공함으로써 과속의 신기록을 수립했다.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방아쇠를 당긴... 건 아니고,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끝까지 꽉~ 밟았다.

내 경험상 속도가 100~110을 넘어가면 계기판의 초록색 경제 운전 ECO 표시등이 꺼졌다. 이 이상 속도부터는 차도 점점 힘이 부치고 연비가 떨어지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래도 120~140 정도의 속도는 페달을 약간만 밟아도 어렵지 않게 나오는데.. 150 이상이 자동차의 내부 상태가 확 달라지는 경계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는 가속 페달을 이전보다 훨씬 더 세게 밟아야 했다. 차가 힘들어하는 게 느껴지고 가속이 눈에 띄게 잘 안 되기 시작했다. 이게 100마일의 장벽이기라도 한지 모르겠다.
그래도 1년에 많아야 두세 번 장거리 고속도로를 뛸 때가 아니면 저 페달을 자전거 페달 밟듯이 힘 줘서 밟을 일이 언제 있겠으며, 엔진 회전수 타코미터가 4~5000까지 치솟는 걸 언제 보겠는가? KTX는 200을 넘어서 300도 가는데, 승용차로 이 정도는 밟아 봐야지..

뭐, 본인 역시 추월을 하기만 한 게 아니라 추월을 당하기도 했다. 나 같으면 어지간해서는 저기서 이 좁은 틈으로 끼어들지는 않았을 텐데, 나보다 더 위험한 칼치기를 감행하며 추월하는 간 큰 차들도 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치기를 하는 차보다는 엄연히 추월 차로인 1차로에서 분위기 파악 못 하고 저속으로 세월아 네월아, 그것도 2차로의 차와 거의 나란히 가고 있는 차들이 훨씬 더 민폐라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그리고 앞에 장애물이 없다시피하고 지금 속도로도 얼마든지 커브를 틀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것도 뒷차 운전자를 긴장시키고 유령 정체를 유발하는 주범이다. 애써 얻은 속도를 헛되이 허공으로 날리는 짓이니 차의 연비에 안 좋은 건 두 말할 나위도 없다.

3. 부산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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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고 외국으로 가는 건 아무래도 인천항에서 황해를 횡단하여 중국으로 가는 게 개인적으로 더 쉽게 떠오른다. <아저씨>, <공모자들> 같은 범죄 영화를 너무 강렬하게 봐서 그런 것 같다.
하지만 인천뿐만 아니라 부산도 항구 도시로서 아주 중요하며, 일본은 대륙 진출을 위해 무려 110년 전부터 경부선 열차와(부산 역) 부산항이 서로 딱 연계되게 만들어 놨다.

비행기가 아니라 배이니 캐리어를 따로 부치지 않아도 되고 무게 제약이 없는 건 약간 좋았다. 물론 망망대해로 나가는 만큼 기본적인 짐 검사를 하지만, 비행기처럼 액체 반입까지 제한할 정도로 빡세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여객기는 출발 후 활주로로 갈 때는 견인차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반면, 배는 비행기보다 훨씬 커도 자력 택싱이 가능할 것이다.

기체 내지 선체의 왼쪽에서 탑승하는 건 비행기와 배가 공통인 것 같다. 비행기가 배의 관행을 물려받았겠지..
하지만 각각의 교통수단에 '-호'라는 고유한 명칭이 붙어 있는 건 비행기에는 없는 선박만의 관행이다. 비행기는 그냥 운행편 번호가 있고, 똑같이 찍어 낸 기체 자체의 모델명(보잉 747, 에어버스 380..)만이 있을 뿐이다.

장거리를 좀 오랫동안 가는 여객선이라면 선실이 반쯤 호텔 방처럼 꾸며져 있고 승객이 누울 곳도 있다. 하지만 쓰시마 섬을 오가는 배는 운행에 한두 시간밖에 안 걸리고 주행 속도도 제법 빠른(시속 6~70km!) 고속정이다 보니, 내부가 좀 더 버스나 비행기에 가깝게 꾸며져 있었다. 승객은 고정된 자기 좌석에만 앉아 있어야 하며, 항해 중엔 바깥 갑판으로 나갈 수도 없다. 좌석엔 심지어 안전벨트까지 있었다.

옆에 시모노세키로 가는 성희호 여객선을 보니 크기도 우리 배(니나호)보다 더 크고 뭔가 내가 생각하는 그런 주거성을 갖춘 배처럼 보였다. 더 장거리를 다녀서 그런 듯한데, 저런 큰 배를 굴릴 정도로 수요가 나오는지 의문이 들었다.

이런 여러 차이점들을 생각하며 일본을 다녀왔다. 갈 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돌아올 때는 2m가 넘는 높은 대한 해협의 파도로 인해 평생 겪어 보지 못한 배멀미를 경험하게 됐다.
배가 그야말로 사방으로 들썩이며 요동쳤으며, 파도를 타고 내려갈 때는 쿵쿵 진동까지 느껴졌다. 그냥 놀이기구 탄 듯이 들썩거리는 걸 즐기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지 않았다. 어느 샌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흠뻑 젖고, 평소에 그렇게도 뜨끈뜨끈하던 손발은 힘과 열기가 쫙 빠졌으며, 얼굴이 노래지고 속이 어지러워졌다. 이 와중에도 남을 챙기기까지 해야 하는 승무원은 어떻게 배에서 근무를 할 수 있나 대단하게 느껴졌다.

부산항에서 쓰시마 섬 히타카츠(히타카쓰) 항까지 갈 때는 80분 남짓 걸렸지만, 돌아올 때는 파도 때문에 2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자동차로 치면 고속도로에서 비포장 오프로드로 바뀐 거나 마찬가지다.
선박은 고속버스와 마찬가지로 탑승권에 도착 예정 시각이 공식적으로 기재되지 않는 교통수단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도로 사정이 아니라 바다 사정의 불확실성 때문일 것이다. 항해를 절반이나 2/3 정도 한 뒤에야 선장이 예상 도착 시각을 방송으로 얘기했다.

4. 일본 - 작다!

과연 일본은 (거의) 모든 게 작고 아기자기하고 아담하더라. 이 말부터 해야겠다. 좋게 말하면 알뜰 검소하고 실속 있고, 나쁘게 말하면 답답하고 짠돌이스럽다.

(1) 먼저 음식 얘기부터.. 음식값이 환율을 감안해도 한국과 비슷해 보이길래.. 그리 비싸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한국 같은 양과 서비스로 그 가격인 건 아니다. ㄲㄲ 양이 뭐 이렇게 적은지? 음식물 쓰레기가 나올 수가 없다. 과일과 생선회를 이렇게 작은 덩어리로 썰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한국 음식은 한없이 기름진 중국 음식보다는 일본 음식에 더 가까운지라 전반적인 입맛은 한일 양국이 서로 비슷하다. 하지만 일본 음식에 한국 같은 벌건 김치가 곁들여 나오지는 않는다. 또한 회는 언제나 고추냉이 넣은 간장에 찍어 먹지, 한국 같은 고추장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 한국 같은 소금과 참기름에 구운 김도 일본에는 없다.

(2) 다음으로 숙소를 살펴보면.. 우리가 그리 비싼 호텔에서 투숙하지 않은 건 감안하더라도.. 한국이라면 지방의 그냥 허름한 여관에도 있을 법한 냉장고와 침대가 없더라. 객실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는 어찌나 아담한지 건물 화장실이 아니라 유아용 내지 교통수단 안의 화장실 같았다.

(3) 일본의 서민들은 살아서도 이렇게 작게 사는데, 하물며 죽은 뒤에는 더 얄짤없다. 황족 말고는 누구든 매장 자체를 못 하며, 무조건 화장 후 납골당 행이라고 한다. 하긴, 후손들이 일일이 다 관리하지도 못하는 묘지만 자꾸 늘어 가는 건 바람직한 일이 아닐 것이고 모든 시신을 저렇게 처리하는 건 일면 합리적이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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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끝으로, 일본 하면 역시 경차다. 미국은 깡촌 시골에 온통 SUV급의 커다란 다용도 픽업 트럭이 다닌다지만 일본은 차들이 온통 작다. 베트남 같은 나라이면 얄짤없이 툭툭이 삼륜차였을 텐데, 그래도 일본 정도의 기술 있고 잘 사는 나라이니까 경차인 것이다.

5. 일본 - 차량과 교통

(1) 그래도 택시까지 경차는 아니더라. 그 대신, 딱 1990년대 디자인의 옛날 차들이 많이 다녔다. 일본이 아무리 자동차를 튼튼하게 잘 만든다 해도, 자가용도 아닌 영업용 자동차를 내구연한 없이 설마 20년이 넘게 굴릴 정도로 지독한 구두쇠인가 궁금했는데.. 그건 아니다. '도요타 크라운'의 택시 전용 모델이 1995년부터 2017년까지 외형 변경 없이 그대로 생산된 거라고 한다.

국내 현대차의 경우, YF 쏘나타가 생산되던 동안에도 직전의 NF 쏘나타가 택시용으로는 생산됐다. (LF가 나오면서 단종) NF가 워낙 인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쏘나타의 전신인 1980년대의 완전 옛날 중형차인 스텔라도 택시는 무려 1997년까지 생산됐었다.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저 도요타 크라운 택시는 정말 오래된 것 같다. 과거의 살아 있는 화석이던 미쓰비시 데보네어 초기형(1960~1980년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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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 일행이 패키지 관광을 다니면서 탑승한 차량은 요런 25인승 크기의 마이크로버스였다. 한국이라면 그런 버스는 현대 카운티 같은 "전방 엔진+중간문" 형태만 있을 텐데, 크기가 저렇게 작으면서 대형 버스처럼 "후방 엔진+앞문"인 물건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신기했다.

(3) 차들이 좌측통행인 것이야 익히 들었고, 지구상에 좌측통행 우핸들인 나라가 일본만 있는 게 아니니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중앙선이 흰색 실선으로 그어져 있는 것이 개인적으로 더 신기했다. 그리고 일부 구간은 황색 실선 중앙선도 있긴 하던데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6. 일본 - 그 밖에

  • 일본은 한국과 시간대가 동일한 드문 외국 중 하나이다. 시차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게 은근히 좋았다.
  • 생뚱맞은 오지에 공중전화도 아니고 음료수 자판기가 눈에 자주 띄었다. 지진 같은 재난에 대비해서 일정 간격으로 의무적으로 배치한 것이며, 불가피한 비상 상황일 때는 자판기를 부수고 물품을 털어서(!) 연명하는 것도 허용된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도 별별 물건을 파는 자판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 자판기까지는 일본에서밖에 못 봤다.
  • 전압이 110볼트이고 옛날 스타일 플러그가 필요하다는 점은 의외로 미국과 비슷한 면모이다.
  • 일본이 집과 차는 작고 음식은 적지만, 지폐는 한국 지폐보다 세로가 약간 더 크다. 1000엔에는 그 이름도 유명한 노구치 히데요가 그려져 있는 걸 봤다. 우리나라 지폐에는 아직까지도 먼 옛날 조선 시대 사람밖에 없는데 나름 근현대의 인물, 그것도 정치인이 아닌 자국의 과학자가 그려져 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비록 노구치 히데요 자체는 행적에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이긴 하지만 말이다.
  • 쓰레기 분리 배출/수거를 한국만치 꼼꼼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마트에서 물건을 산 뒤에 봉지를 1~2엔 가격에 따로 판다거나 하지도 않았다. 이런 쪽으로는 한국보다 미묘하게 더 관대하고 후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8/10/07 08:37 2018/10/0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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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2018년 9월은 본인에게 의미심장한 전환점에 속하는 시기였다. 거의 50일 동안 날 괴롭히던 지긋지긋한 무더위가 드디어 물러가고 계절이 바뀌었다.
그리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파이널 9.5 버전을 완성했다. 홀가분하고 기뻤지만 그 뒤에도 사소하게나마 프로그램에 수정 작업이 야금야금 진행되었으며, 더 나아가 동시치기 기능도 이게 다가 아닌데 정확도를 더 개선할 수 없을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한글 입력기 말고 글꼴 쪽 연구도 하면서 학위논문 쓸 걸 준비해야 하는데.. 뭔가 오랜 독재 정권이 갑자기 무너진 뒤에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러 밀린 숙제들 중 무엇부터 진행하는 게 좋을까?
아.. 그 와중에 재작년에 했던 것처럼 자그마한 발표 논문을 하나 준비해서 투고했다. 이것도 여러 모로 스트레스 받는 작업이었다.

힘든 나날이 계속되었는데 날씨는 너무 좋았다. 낮엔 하늘이 완전 파랗다가 밤에는 싸늘해지고... 도저히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추석을 열흘 남짓 남기고 논문 투고까지 마친 타이밍 때.. 본인은 이 억눌린 욕망을 발산하기 위해 남양주의 시골 마을로 차를 몰고 달려갔다. 짤막한 힐링 여행을 떠났다.

남양주는 생각보다 넓기 때문에 북쪽의 경춘선+북한강+가평 방면도 남양주이고, 남쪽의 중앙선+남한강+양평 방면도 남양주이다. 둘을 분리해서 생각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본인이 주목한 곳은 남쪽인 와부읍 일대였다. 그래서 미사대교를 건너서 덕소삼패 IC로 진출했다.

남양주는 도농 복합 도시인 관계로 조금만 교외로 나가면 아주 전원적이고 강과 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보안 시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군부대뿐만 아니라 상수도 취수· 정화 시설도 있다.
이런 것들 말고 또 남양주의 명물로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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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거의 세계 유일의 보잉 747 초기 퇴역분 기체가 곁들어진 건물이다. 월문교 사거리 근처에 있다.
열차나 선박을 개조한 건물과 달리 비행기를.. 그것도 그냥 전투기 같은 크기의 물건을 전시만 한 게 아니라 거대한 여객기를 건물 형태로 꾸며 놓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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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주날개와 엔진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총으로 치면 마치 sawed-off 샷건처럼 뒷부분도 짤려서 뭉툭해졌다는 점이다. 날개가 없으니 기체가 일면 선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긴, 옛날에는 기체가 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긴 했다. 하지만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어 칠이 벗겨지고 온통 녹슬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관리에 부담 되는 부분이 짤려 나가긴 했지만 그래도 무려 그 육중한 747기가 깡그리 고철로 스크랩 되지 않고, 이렇게라도 형체가 남았다는 점에 위안을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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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주가 기체 내부를 개조해서 뭔가 활용을 할 의향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안은 아직까지 굳게 잠겨 있고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었다.
위의 사진은 기체의 창문 안을 찍은 것이다. 내부가 어서 카페나 박물관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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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 답사를 마친 뒤, 본인은 거기보다 살짝 더 북쪽에 있는 보안 시설을 찾아가 봤다. 알고 보니 한쪽으로는 군부대가 있고 다른 한쪽으로는 '서울 아리수 와부 정수장'의 진입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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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은 이런 한적한 시골길이었다.
그리고 군인 아파트는 전국 어딜 가나 이런 투박한 모양인 듯하다.

참고로 여기 말고 또 다른 정수장으로 추정되는 보안 시설도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전자가 서울시 상수도 사업 본부 소속인 반면, 후자는 한국 수자원 공사 소속이다. 사진은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지만, 담장의 쇠창살 모양이 팔당댐 근처의 정수장에서 본 것과 동일하긴 했다.

뭐, 이렇게 흥미로운 답사를 했다. 여기 주변은 온통 식당들이 널렸기 때문에 본인은 식사도 했다. 오늘의 마지막 끼니가 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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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본인은 시골 농로를 달려서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향해 다가갔다.
지도와 내비상으로는 '어룡지'라고 저수지가 근처에 있는 듯했으나, 본인은 딱히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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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여기. 30분마다 한 대씩 다닌다는 99-2라는 마을 버스가 서는 곳이 등산로의 입구이다. 하지만 이 등산로에는 차도도 있기 때문에 더 깊숙한 곳까지 차로 진입할 수 있었다.
포장 도로가 끝나고 차가 더 들어갈 수 없는 곳에는 차를 세 대 정도 세울 수 있는 주차 공간이 있었다. 이제 여기서부터 본인은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굉장히 오랜만에 등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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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는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한 주 내내 날씨가 왕창 좋다가 하필 본인이 여행을 떠난 날에만 하늘이 허옇고 잔뜩 흐려진 게 아쉬웠지만, 이런 날씨도 차분한 분위기가 느껴지고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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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은 울타리와 깔개, 계단 같은 게 만들어져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ATV나 산악 자전거가 지나갈 수는 있을 정도로 폭이 확보되어 있었다. 일부 구간은 의외로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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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지나서 산 속에서 하늘이 보이는 공터를 발견하면 뭔가 느낌이 굉장히 새롭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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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등산로도 무슨 누리길 누비길처럼 시에서 이름을 붙여 놓은 게 있었다. '큰사랑 산길'.
길은 꼬불꼬불 가팔라지기까지 하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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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능선에 도달했다. 주변엔 쉬어 가라고 벤치와 평상이 놓여 있었다.
알고 보니 여기는 '새재고개'라고 한다. 성남-광주 사이에는 '이배재, 태재고개'가 있더니만..
성남과 광주 사이에 산들이 잔뜩 늘어서 있듯, 남양주 동부와 양평 사이에도 갑산, 예봉산, 예빈산 같은 산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능선을 타는 길을 '천마지맥 누리길'이라고 부르더라.

본인은 그쪽으로 등산은 예봉산 한 번밖에 못 가 봤지만 여기도 기회가 되는 대로 차차 개척해 나가고 싶다.
하지만 오늘은 산을 하나 골라서 꼭대기까지 오른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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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새재고개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했다. 산등성이에서 혼자 단잠을 잤다. 바닷가와 강가에서 텐트를 치고 자 봤으니 언젠가 꼭 산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싶었는데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
마침 평상이 하나 있던 덕분에, 그 위에다 텐트를 치니 완전 딱이었다.

노트북 PC가 든 백팩뿐만 아니라 텐트와 돗자리까지 들고 산을 오르느라 몹시 힘들었다. 그러니 좁고 험한 길은 가지 못하고 처음부터 이런 큰길(?) 위주로, 그리고 산 중턱까지 최대한 차로 접근 가능한 등산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사실, 여기 주변의 샛길로 빠져서 적갑산이나 갑산의 정상으로 갈 수도 있지만 본인은 그러지 못했다. 짐 때문에 산에서의 이동성을 일부 희생한 대신, 산 속에서 극한의 주거성을 얻었다.

두어 시간 남짓 만에 해가 졌다. 인적이 완전히 끊기고 주변은 칠흑같은 어둠으로 뒤덮혔는데.. 텐트 안에만 있으면 비바람과 추위를 다 피할 수 있고 아늑하고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거기에다 침낭까지 뒤집어쓰면 밖이 영하의 혹한이어도 아무 걱정 없을 것 같았다. 난 이런 상태에 있는 게 노무노무 좋았다.

산 속 야영과 관련해서 혹시 법적인 문제는 없냐고 문의하는 분이 계신다.
해가 지면 모두 나가야 하고 야영을 해서는 안 되는 곳은 국립공원, 아니면 청와대 뒷산 정도이다. 그리고 서울 시내의 한강· 청계천 공원 같은 곳도 공식적으로 야영 금지이다.
하지만 그냥 저런 평범한 산들은 (1) 쓰레기 안 버리고 (2) 불을 피우지만 않으면 산 속에 짱박혀서 뭘 하든 문제될 것 없다.

이튿날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뜬 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서 집으로 귀환했다. 공공시설인 평상을 너무 오랫동안 혼자 전세 내면 안 되니까..
산에서 야영을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밖에 안 한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날씨가 더 추워지면 또 오지에 있는 다른 산에서 야영을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8/09/23 08:29 2018/09/2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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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추억의 산소 드립

먼저 심각한 시사· 정치 분야가 아닌 재미있는 분야부터 생각해 보자.
2007년 12월, 디씨 미연시 갤러리에서 H2O가 뭐냐는 질문이 올라왔다.
미연시란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게임 장르 명칭의 준말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굉장히 하앍하앍 오타쿠스러운 명칭이다.

그리고 H2O는 사실 얼마 전인 2006년에 출시된 어느 미연시 게임의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H2O - Footprints in the sand이라고..
질문자가 의도한 정답은 저것이었다. 허나, 어느 눈치 없거나 장난기 발동한 네티즌이 ‘물이잖아?’이라고 동문서답 또는 개드립을 쳤다..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바로 그 와중에 어느 용자께서 너무 당당하게
“병시나 산소
문과 출신인 나도 알고 있음”

이라고 확인사살을 해 버렸다.
그냥 산소라고 평범하게 실수를 한 것도 아니고, “그것도 모르냐 이 ㅂㅅ아”라는 면박 뉘앙스를 팍팍 담아서, 자신의 학력과 전공을 당당히 인증까지 하면서..
자기 무덤 속으로, 물 안 담긴 풀장 아래로 장렬하게 자폭 다이빙을 해 버렸다..ㅠㅠㅠ

그럼 그렇지. 무슨 오비탈이 어떻고 공유결합 수소결합, 반 데르 발스 힘 이런 건 문과 출신이 알 수 없겠지만,
H2O가 무슨 물질인지쯤은 문과 출신도 당연히 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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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는 곧 실수를 깨닫고 몇 분 후 글을 황급히 지웠으나, 겨우 그 짧은 시간 동안 캡처 화면은 이미 전국으로 퍼졌다. 쌀은 쏟고 주워도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을 수 없으며, 이런 댓글도 도로 거둬갈 수 없었다.

H2O 산소 드립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회자되고 있다. 저 당사자 분은 저 사건을 정말 일생일대의 흑역사로 치부하면서 “아 이제 제발 좀 그만..” 뭐 그런다고 들었다.
본인 역시 그 용자분을 비웃거나 명예 훼손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쁜짓 한 것도 아닌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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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병시나 산소” 덕분에 나도 이 각박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빵터질 수 있었고 심히 즐거울 수가 있었다. 오히려 이름도, 누군지도 모르는 그분에게 감사하고 싶다.

2. 잘못된 근자감

"난민들은 위험하지 않으며 그들이 오히려 위험에 처해 있어요~"라고 주장하면서 난민 인권 운동을 해 온 독일의 한 20대 여성(소피아 뢰슈)이 얼마 전 6월 21일, 역설적으로 무슬림 이민자에게 살해당하여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 관련 링크)
이 사건 때문에 온 유럽이 충격에 빠졌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일인데 뭐가 그렇게 충격적인지 모르겠다.

더 옛날에 스웨덴에 '엘린 크란츠'(Elin Krantz)라고 "우리는 다문화 다양성을 좋아해요", "제3세계 난민들이 우리나라와 북유럽 일대로 이민 오시는 거 쌍수 들고 환영해요 ♡" 이러는 운동을 하던 20대 아가씨가 있었다.
그러나 2010년 9월 26일, 그녀는 밤에 노면 전차(버스라는 말도 있음)에서 내려서 귀가하던 중, 음욕을 품고 같이 따라 내린 어느 에티오피아 난민 출신의 불량 청년에게 무참히 성폭행 당한 뒤 살해 당했다. (☞ 자세한 정보)

게다가 2008년경엔 이런 일도 있었다.
"인간은 착하다며 돈 한푼 없이 여행 떠난 여성의 최후" (☞ 자세한 정보)
Pippa Bacca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좀 낸시 랭 같은 인상이 풀풀 풍기는 이탈리아 처자가 겁도 없이 치안 안 좋은 곳에서 혼자 히치하이킹을 시도하다가 결국은 쥐도 새도 모르게 성폭행+살해당했다.
(출처를 완전히 까먹어 버린 상태였는데, '여자 터키 살해'라고만 검색하니까 명예살인 관련 자료 다음으로 2순위로 곧장 걸려 나옴..! 구글 너무 대단하다 ㄷㄷ ㅠㅠ)

이런 사례들은 냉정하게 말하면 거의 다윈 상 좀 줘야 하지 않나 싶다.
분야만 다르지, 오토바이 헬멧 강제 착용 법규에 항의하려고 헬멧 없이 질주하다가 넘어져서 죽어 버린..-_-;; 미국의 2011년 다윈 상 수상자랑 다를 게 무엇인가?

인종· 민족에 대한 편견이란 게 큰 그림에서는 나쁜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나쁘게 '변질되고 타락할 위험성'이 높다. 마치 정치에서 독재처럼 말이다. 악을 악으로 맞서는 방법론들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이다.

구약 성경은 줄곧 "너희(이스라엘 백성)는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이방인 나그네였다. 그러니 너네 나라 세운 뒤에도 이방인· 나그네 취약 계층에게 자비와 아량을 베풀어 줘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어린 학생들이 베트남이던가 노동자들 비하하며 수군거리자, 고집불통 아재 꼰대 영감쟁이인 주인공 덕수가.. "나도 옛날에 한때는 억만 리 타지에서 외국인 노동자였었는데(독일 사람 입장에서) 어딜 감히!" 이러면서 빡치는 장면이 나온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질 나쁜 종자들에 대해서는 편견이라는 게 마냥 아무 근거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그걸 무시하고서 그냥 다양성, 아량? 그것도 중동 이슬람 애를 상대로?
원자력 발전 박살내고 있는 것만큼이나 나라를 그냥 고의로 말아먹겠다는 수작이다. 성경은 인간에 대해 성선설을 결코 지지하지 않으며 필요악을 적극 인정한다.

3. 호의를 권리로, 당연한 것으로 아는 어리석음

여름철에 물과 관련해서 한 20~25년쯤 전의 환경 여건을 회상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인이 옛날 글에서 간간이 언급한 적이 있긴 했을 것이다.

(1) 1990년대 중반쯤에 한번 대차게 가뭄이 들었었다. 그러고 나서는 전국적으로 제한급수를 하네 마네 말이 많았다. 온통 "물을 아껴 씁시다" 캠페인을 했다.

특히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게, 이때 공중목욕탕의 샤워기들이 다 '절수형'으로 바뀌었다. 물이 한없이 계속해서 나오지 않고 중간에 멈추는 거. 한창 씻고 헹구고 있는데 물이 툭 끊어졌으며, 불편하게 버튼을 또 눌러 줘야 물이 나왔다.
절수형 샤워기가 몇 년 동안 쓰이다가 2000년대에 와서 언제부턴가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 1990년대 중반까지는 한번 장마나 태풍, 홍수가 지났다 하면 TV에서 뉴스 끝나고서 맨날 내보내던 게 이재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과 전국 수재의연금 성금 모금 내역이었다.
수천만 단위로 제일 많이 낸 모 회장님은 영화 엔딩 credits에서 A급 주연 배우가 나오듯이 큰 글씨에 단독 화면으로 나왔다. 그 뒤로 천~만 단위로 낸 사람들은 이름만 목록으로 주욱 떴다.

그에 반해 요즘은? 모금 자체는 알음알음 하는 것 같지만 옛날처럼 대놓고 기부 독려와 홍보를 하지는 않는다.
요즘은 2~30년 전에 비해 기상이변 천재지변이 더 늘면 늘었지 날씨가 더 유순해졌을 리는 없을 것이고.. 그럼 남는 가능성은 하나다.
우리나라는 치수를 잘한 덕분에 알게 모르게 옛날보다 환경 여건이 굉장히 더 개선된 것이다.

신토불이 국산품 애용, 양담배 추방, 외화 유출하는 타이타닉 안 보기 운동 이러던 게 2~30년 전 일인데.. 지금은 외국 문물을 물 쓰듯이 이용해도 경제가 멀쩡히 돌아가는 것 역시 그냥 공짜로 된 일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솔직히 너무 흔해 빠져 넘치는 커피만 해도.. 커피가 무슨 쌀이나 담배처럼 국내 재배되는 작물이기라도 한 것 같다.. ㅠㅠ)

너무 당연한 듯이 풍부하게 풍요롭게 누려 왔던 것들..
지킬 수 있을 때 지키거나 유지하지 못하고 몽땅 빼앗기거나 비용이 폭등하고 나면, 그제서야 아쉬워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4. 말을 뱉어내는 입의 무서운 파괴력

이 글은 언뜻 보기엔 기독교/성경 카테고리에 들어갈 내용이지만, 마침 산소드립도 언급되고 했으니 그냥 여기에다 마저 적도록 하겠다.

"또한 배들을 보라. 그것들이 그렇게 커도 사나운 바람에 밀려가되 사공이 매우 작은 키 하나로 자기가 가고자 하는 대로 그것들을 돌리느니라."
Behold also the ships, which though they be so great, and are driven of fierce winds, yet are they turned about with a very small helm, whithersoever the governor listeth. (약 3:4)


성경에서 바다 냄새가 많이 나고 선박 항해가 나오는 걸로 손꼽히는 책은 요나서, 그리고 사도행전 후반부 정도이다.
그런데 야고보서에서도 배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는 문장이 있다. 다만,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문맥에서다.

제아무리 엄청나게 많은 사람과 화물을 실은 거대한 배라 해도 조타수 한 명이 키를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서 가는 방향이 확 좌지우지된다.
타이타닉 호를 생각해 보라. 빙산을 뒤늦게 발견하고 조타를 잘못하는 바람에 빙산과 측면 충돌을 하고 침몰해 버려서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인명· 재산 피해가 나지 않았던가?

말을 쏟아내는 '입'이 사람이라는 배에서 조타 장치와도 같은.. 크리티컬한 존재라는 것이다. 성경은 어째 이렇게 비유를 할 생각을 했는지 참 경이로움이 느껴진다.
이걸 잘못 내뱉으면 산소드립이야 그냥 귀여운 병맛으로 유명해지는 정도이지만, 완전 패가망신하고 심지어 전쟁까지 날 수 있다.

한국어는 동물 말과 언어 말이 동음이의어이다.
그런데 약 3:2에서는 '말에서 실족하지 아니하면'(word)이 나오고, 바로 다음 3절에서는.. 동물 말을 통제하기 위해서 입에 재갈을 물리듯이 사람도 입을 자물쇠를 잘 채우고 잘 관리해야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절묘하다.

그리고 끝으로.. 내가 약 3:4의 영어 구절을 굳이 소개한 이유는.. 뒷부분 ... whithersoever the governor listeth라는 표현이 무척 친근하게 느껴져서이다.
저기서 list는 wish, desire과 비슷한 뜻의 고어이다. "원하는 대로 어디든 간다"라는 문맥에서 이 단어를 쓴 것은 요 3:8 "The wind bloweth where it listeth"와 짝을 이루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8/09/05 08:34 2018/09/0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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