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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의 발전사

인류가 물 위를 건너기 위해 선박이라는 물건을 만들어서 띄운 지는 수천 년이 됐다. 심지어 그걸로 바다 위에서 전쟁도 치렀다.
하지만 그걸로 사람만 잔뜩 실어 나르는 장거리 전문 여객선이라는 게 등장한 건 역사가 의외로 짧다.

전근대 시절에는 평민들의 경제력과 교통 수요가 그런 걸 받쳐 주지 못했다. 거기에다 그 당시엔 선박 자체가 너무 위험하고 느리고 정시성을 장담 못 하는 물건이었다.
배 타고 망망대해로 나가는 것의 포스와 리스크가 요즘으로 치면 과장 보태서 무려 우주로 나가는 것에 맞먹었다. 보험 회사의 이름이 'oo 화재, xx 생명'뿐만 아니라 'xx 해상'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낭만적인 여행이 절대 아니고 모험 탐험이었다.

그 시절에 사람을 잔뜩 태운 배가 있다면 그건 지하에 노꾼이 잔뜩 탄 갤리선이거나, 아니면 아예 노예 무역선.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_-;; 사람을 살인적인 중노동을 시키거나, 아니면 용변도 제대로 못 볼 정도로 꼼짝달짝 묶어서 짐짝처럼 쌓아 놓거나.. 둘 중 하나였다.
(단, 노예이면서 동시에 노꾼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호흡 맞춰서 엉킴 없이 노 젓는 건 극심한 중노동일 뿐만 아니라 전문성도 필요했다. 일자무식에다 더 잃을 것도 없는 노예에게 믿고 맡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ㄲㄲㄲ 질 낮은 죄수를 호락호락 총 쥐어 주고 군인으로 부려먹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50미터 남짓한 길이에 엔진이 아니라 돛-_-이 달렸고 배수량도 200톤이 채 안 될 대항해시대 나무 범선 갖고 호화로운 장거리 여객선 영업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근데 그 시절에는 그 가냘프고 열악한 배에 남자들 수십 명이 낑겨 앉아서 신대륙을 개척하러 갔다는 거다. 이 정도면 교도소 복역이랑 선원 생활을 퉁쳐도 될 것 같은데 말이다.
지금 우리가 잠수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위험함, 갑갑함, 열악함 등등이 그때는 일반 수상 범선에 적용됐고 수위가 더 높았다.

선박을 굴려서 돈을 벌려면 그 비좁은 공간에 화물을 왕창 실어야 했다. 그러니 선원들 복지는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근대 시절에 선박은 화물 수송이 main이었고, 여객은 거기에 꼽사리로 낑겨 타는 정도였다.

자, 그러면 성경의 요나서도 어떤 배경인지가 완벽하게 이해가 될 것이다. 요나 역시 여느 상선 화물선에 낑겨 탔기 때문에, 편안한 좌석이나 선실이 아니라 어디 한구석에 짱박혀서 잠들었다. 그리고 배가 위험에 처하자 선원들이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무거운 화물들을 바다에 버린 것이다. 그건 승객 개인이 들고 다니던 더플빽이나 캐리어 같은 덩치의 짐이 아니었다.

참고로, 옛날 목선 범선에 대해 생각해 볼 거리를 좀 더 나열하자면 이렇다.

(1) 노아의 방주도 오늘날 기준에서는 그렇게까지 막 큰 배는 아니다. 길이 150미터 남짓한 목선이니 대항해시대 범선보다 좀 큰 정도이고, 20세기에 등장한 여객선이나 군함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 크기와 부피이면 배수량은 여러 자료로 추정하건대 1만 톤 안팎쯤 됐을 거라고 여겨진다.
참고로, 현대의 조선공학 관점에서는 목선은 길이가 100미터, 배수량 2000톤 정도가 현실적인 한계로 여겨진댄다. 목재는 금속처럼 단단하지 못하고, 용접으로 이어붙이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2) 노아, 요나 이상으로 성경에서 바다 항해를 제일 진지하게 다루는 곳은 사도행전 27장이지 싶다. 바울이 죄수 호송선을 타고 이스라엘에서 이탈리아 로마로 가는 장면 말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뱃길로 약 2400km 거리라고 한다.
이건 부담 없는 단거리는 절대 아니고 2000여 년 전의 항해 기술로는 더욱 만만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 봤자 태평양이나 대서양도 아니고 기껏해야 지중해 횡단일 뿐인데 그걸 한 번에 못 가서 중간 정박을 하고 겨울을 나네 마네 논쟁이 오갔던 것이다.
게다가 배에 사람이 276명이나(행 27:37) 탔었다. 선내에 공간이 절대로 넉넉하지 않았을 것이고 승선 환경은 몹시 열악했을 것이다.

(2) 500여 년 전,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는 대장인 마젤란을 비롯해 250명에 달하는 선원을 잃고 배 세 척 중에 한 척만 겨우 귀환하는 개막장 거지꼴 패잔병 상태로 종결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배 한 척에 실린 외국 향신료만으로도 그들은 항해 비용을 다 뽑고 남는 흑자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향신료 가격이 지금의 마약 가격 정도라도 됐나 싶다. =_=;; 후추가 아니라 필로폰이었는지.. -_-;; 하긴, 그때는 화약 가격도 그렇게도 비쌌다니까 말이다.

암튼, 이런 열악한 상황은 증기 기관이 발명되면서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얘 덕분에 선박이 바람을 거스르는 정시 항해가 가능해지고, 해풍이 불지 않는 육지 한가운데 운하도 주행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배가 더 크고 무거워질 수 있게 됐다.
배의 재질이 나무 대신 철로 바뀌었고, 동력 전달 매체도 처음에 외륜이 쓰이다가 스크루 프로펠러로 바뀌었다. 엔진조차도 왕복이던 게 터빈으로.. 19세기 후반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좀 뭔가 호텔 같은 배가 등장할 수 있게 됐다. (해상 호텔이라, 옛날 범선 시절에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치.. ㄲㄲㄲㄲ) 민간이 아닌 군함은 훨씬 더 강하고 사정거리 긴 함포를 장착해서 적을 압도할 수 있게 됐다.
1906년경에 영국에서 만든 여객선 루시타니아 호, 그리고 드레드노트 전함이 민간과 군함 각 분야에서 최첨단 과학기술의 산물이었다.

그래서 민간에서는 대서양· 태평양을 건너는 장거리 대형 여객선이라는 게 운항을 시작하고, 군에서는 순양함을 넘어 전함이라는 등급이 등장했다. 19세기 말에 서 재필이니 이 승만이니 하는 우리나라 선각자들도 저런 배를 타고 미국을 다녀올 수 있었다. (비행기 1시간이 선박 1일에 맞먹으니, 편도로 2주 이상 걸렸을 듯.)
그 이름도 유명한 타이타닉이 이 바닥의 정점을 찍었다. 인류가 이런 배를 구경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1차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세계 열강들은 군함만 만들다가 등골 빠지고 공멸하지 말고, 군함을 일정 배수량 이상은 다같이 만들지 말자고 군축 조약을 맺었을 정도였다. 그때는 전함을 더 만들지 말자는 게 지금으로 치면 핵무기를 다같이 만들지 말자고 약속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개념이었다.

그 뒤 선박은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 디젤 기관으로 바뀌면서 리즈 시절을 찍었지만, 비행기가 발명되면서 추세가 또 바뀌었다. 비행기는 터빈을 기반으로 한 제트 엔진이 도입되면서 세계의 하늘을 석권하게 됐다.
오늘날 배가 거대한 건 항공모함이나 초대형 유조선/화물선 정도이고, 인명을 태우는 건 말 그대로 해상 호텔인 관광 크루즈선만이 남았다. 100년 전과 같은 ocean liner(대륙 횡단 정기 여객선)라는 개념은 없어졌다.

거함거포주의는 항공모함 때문에 논파됐고, 지금은 미사일 때문에 더욱 확인사살됐다.
요즘은 해군보다도 해병대에서 상륙작전을 벌일 때 정도에나.. 뒤에서 펑펑 쏴 주는 전함의 함포를 그리워하는 지경이 됐다. 포탄이 그래도 비행기나 미사일보다는 화력 대비 훨씬 더 저렴하기도 하지.

20세기 초-중에는 여객선과 비행선이 대륙을 횡단했다. 그러나 20세기 중-후부터는 여객기와 미사일이 대륙을 횡단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_=;;
우리나라 기준으로 여객선으로는 부산에서 일본, 인천에서 중국, 동해안에서 러시아 정도만 갈 수 있다. 즉, 아주 단거리 한정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3/17 08:35 2024/03/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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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옛날 아폴로 계획 시절의 새턴 V 로켓, (2) F-22 전투기, (3) KTX-산천 열차.
분야가 서로 완전히 다른 교통수단이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맨 앞에 무슨 총검처럼 길쭉하게 삐죽 튀어나온 부위가 있다.
이건 각각..

1. 로켓: 비상 탈출용 로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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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 초기에 이상이 발생했을 경우, 승무원이 탄 캡슐을 로켓 본체로부터 사출· 생환시킬 용도로 장착되었다. 승무원들의 탑승 공간을 통째로 사출시키니.. 이건 경비행기에 장착되는 비상 탈출용 낙하산이라든가, 전투기에 장착되는 사출 좌석보다 더 강화된 버전인 셈이다.
단, 2단 엔진까지 무난하게 분리됐을 때쯤이면 이제 고도와 속도가 너무 올라갔고 비상 탈출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탈출용 로켓도 같이 분리되고 버려진다.

아폴로 계획 전체를 통틀어서 이 로켓이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었다. 1969년 말의 12호 때.. 로켓이 발사되자마자 벼락을 맞는 바람에 이걸로 승무원들을 비상 탈출시키고 임무를 실패 처리시킬까 사령실에서 고민하긴 했었다. 하지만 그리하지 않았고, 임무도 다행히 성공했다.

2. 전투기: 피토 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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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체 주변의 맞바람의 세기를 측정해서 이 기체의 비행 속도를 구하는 아주 중요한 장비이다. 레이더나 GPS 같은 기술이 개발되기 전엔 비행 속도를 측정하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자동차처럼 바퀴의 회전수로 속도를 산출할 수가 없으니까..
정비 불량으로 인해 피토 관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아서 계기판 바늘이 엉뚱하게 폭주하고, 이 때문에 조종사가 조종을 잘못해서 비행기가 추락까지 한 사고도 역사적으로 있었다.

다만, 피토 관이 꼭 저렇게 앞에 돌출된 형태로 장착될 필요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여객기의 피토 관은 옆구리나 꼬리날개 쪽에 훨씬 작게 장착되기도 한다. 자동차에 안테나가 옛날에 길쭉한 삼단봉 형태이다가 지금은 작은 상어 지느러미 모양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3. 그리고 열차: 이 쇠막대기 빨대의 정체는 무려.. 독일제 최첨단 차량 연결기의 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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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제베 기반의 1세대 KTX의 이후에 국내에 도입된 고속철 차량들은 무지막지한 20량 1편성이 아니라, 10량 1편성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 시 중련· 연결 운행이 가능하게 만들어졌다.
열차의 연결과 분리를 간편 신속하게, 한편으로 견고하게 하는 건 나름 엄청난 기술이다. 양 차량을 물리적으로 붙들거나 놓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전기· 통신 배선 같은 것도 바로 연결이나 분리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두 차량이 합체할 일이 있으면 저 삐져나온 빨대가 먼저 상대 차량 연결기를 쑥 접촉하고, 나머지 부위도 찰칵 연결된다. 항공우주 업계에서는 우주 비행체의 합체를 도킹(docking)이라고 하는 반면, 철도에서는 이런 연결을 커플링(coupling)이라고 부른다. 오옷~!
참고로 우리나라의 철도 차량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연결기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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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는 동력원뿐만 아니라 선로 분기기나 신호 시스템, 그리고 전철의 집전 방식(가공전차선=_=)까지 하나하나가 다 첨단 기술이다.
달리는 증기 기관차를 배경으로 하는 옛날 서부물을 보면 아주 흔히 등장하는 장면이 둘 있다. (1) 말 타고 달려가서 열차를 따라잡고 탑승하는 거(현대라면 오토바이-_-), (2) 그리고 열차 안에서 무슨 작업을 하고 나서는 뭔가를 조작해서 객차와 기관차를 분리시키는 것..

아마 영화적 허용이 많이 들어갔겠지만, 옛날 열차는 연결기도 구조가 더 허술해서 차량을 분리시키는 게 더 쉬웠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4/03/15 08:35 2024/03/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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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 한 가지 장점

세상에는 단점이 많고 정말 불편하고 너무 비효율적이어 보이지만.. 여전히 쓰지 않을 수 없는 물건, 기계, 방법론 따위가 있다. 장점이 단점들을 다 씹어먹는 수준이고 다른 대안이 현실적으로 도저히 없기 때문이다.

(1) 교류 전기: 전기공학 이론의 난이도를 한 100배쯤 더 끌어올린 주범이다=_=. 직류보다 취급하기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전자기기들에서는 어차피 직류로 변환도 해야 된다.
하지만 발전과 변압이 간편하고, 덕분에 대용량 전기의 초장거리 송전이 용이하다는 거.. 이 독보적인 장점 하나가 다른 모든 단점을 씹어먹었다. 건전지나 깨작거리는 수준으로는 오늘날 같은 눈부신, 찬란한 전기 문명이 절대 이뤄질 수 없었다.

(2) 헬리콥터: 고정익기보다 느리고 연비 안 좋고 대량 수송도 안 되고 너무 시끄럽고..;; 온통 단점뿐이지만 활주로 없이 수직 이착륙 가능하고 공중에서 정지할 방법이 이것 말고 더 있으리..??
(로켓도 양력이 아니라 추력만으로 공중에 뜨니 헬기 같은 기동이 이론적으로 가능은 하다. 하지만 걔는 헬기보다도 연비가 훨씬 더 안 좋다. -_- 로켓은 동체 대부분이 연료로 꽉 차 있으면서도 자동차나 비행기와 달리 엔진을 겨우 '분 단위'로밖에 가동을 못 한다.)

(3) 주사기: 아프고 공포스러운 데다 감염 위험도 있다. 하지만 먹거나 바르는 약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 좋으면서, 대놓고 배를 가르는 수술보다는 훨씬 더 간편하고 안전하다. 이 독보적인 장점을 대체할 다른 수단이 없다.

과학기술 분야는 전혀 아니지만, 복음 전하는 방법으로 거리 설교도 이와 비슷한 부류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교인들조차도 상당수가 부정적인 편견과 안 좋은 인식을 갖고 있다. "저래 갖고 누가 듣나", "광신자라고 욕 먹고 신고나 당하지", "그냥 어려운 주변 이웃 도우면서 이미지 제고나 하는 게 낫다" 등등..

근데 저 방법 말고 세상 사람들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메시지를 듣고 경고를 받고 복음을 들을 통로가 뭐가 있겠나? 그 사람들이 제 발로 기독교 방송을 듣겠나 스스로 성경을 찾아 읽겠나? 거부, 거절, 부정적인 피드백은 당연한 것이니 제대로 전한 것만으로 씨앗을 뿌린 것이다. 저건 주사기만큼이나 더 나은 다른 대안이 없다.

다시 과학기술 얘기로 돌아오면..
저 사례들과는 정반대로, 언뜻 보기에 많은 장점이 있어 보이지만 치명적인 단점 한두 가지가 해결이 안 되어 주류가 못 되고 묻혀 버린 기술도 있다.
무탄피총이라든가 비행선, 반켈 엔진 같은 거 말이다.

2. 세분화, 전문화

대학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고 인간이 이룩한 온갖 과학기술, 특히 공학의 세계를 맛보기나마 접하면서 느끼는 점 중 하나는..
이 바닥은 정말 깊게 세분화돼 있어서 한 사람이 모든 걸 다 알기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기계도 하나만으로 이것저것 다 대응 가능하게 만들지는 않는/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스타크래프트 테란과 달리, 단일 차체로 곡사 자주포와 장갑차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탱크를 만들지 못한다.
미사일 하나만 해도 대공이냐 대잠이냐 대전차냐.. 전투기가 발사하냐 잠수함에서 발사하냐에 따라 미사일의 형태와 폭약과 추진제의 구조가 다 달라진다. 하나 만드는 정밀 기술로 다른 분야를 커버할 수 없다.

물에서 항해도 가능하고 공중 비행도 가능한 비행정은 비행기의 태동 초기에 잠깐 쓰이다가 말았다. 물 저항을 적게 받는 디자인과 공기 양력을 잘 받는 디자인에 서로 교집합이 없기 때문이다.
항해도 가능하고 지상 주행도 가능한 호버크래프트/수륙양용차 같은 건 해병대 상륙 작전용으로나 쓰이지, 여객용..?? 아니올시다. 가성비가 맞지 않는다.
로터를 기울여서 헬리콥터도 되고 프로펠러기도 되는 비행기조차도 성능이 어정쩡하고 비싸서 널리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리고.. 비행체 엔진만 해도 지상에서 뜰 때, 아음속 비행, 초음속 비행, 심지어 우주 기동에 적합한 엔진의 형태가 다 다르다.
단일 엔진 단일 기체만으로 단 분리 없이 대기권과 우주를 모두 비행..??? 현재 인간의 기술로는 불가능하다.
이러니 SF물만 많이 봤던 사람들이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선'을 보면 깜짝 놀라는 것이다. 유체역학적인 디자인이 전혀 아니기 때문에.

  • 이거 뭐 첫 이륙과 출발 때는 터보 팬이나 터보 제트를 썼다가 극초음속에서는 램 제트..?? 변속기를 넣어서 자동차처럼 기어비를 바꿀 게 아니라 아예 속도별로 엔진을 바꿔 끼워야 할 지경이다. 기술적으로 당연히 불가. ㄲㄲㄲㄲㄲㄲㄲ
  • F1 레이싱용 자동차들은 정말 서킷 전용으로 극도로 특수하게 만들어진 놈들이다. 시내를 달리는 일반 자동차들처럼 신호 받으면서 저속으로 가고 서다 하다가는 다 퍼지고 고장날 거라고 한다.
  • 시속 200짜리 기록 도전용으로 만들어지는 특수한 자전거도 마찬가지. 기어비를 극단적으로 높게 맞춘 채로, 공기 저항을 몸빵해 주는 자동차를 졸졸 뒤쫓아가는 것에만 특화돼 있다. 이 자전거를 사람이 정지 상태에서 페달 밟아서 시속 200까지 몽땅 가속시키는 건 아니며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_-;;;

동력 기관 말고 안전 장치만 해도, 총알을 막아 주는 방탄유리가 교통사고 때 쉽게 깨지지 않는 안전유리의 역할까지 동시에 수행하지는 못한다.
오토바이 헬멧이랑 공사장 헬멧도 역할이 다르며, 방검조끼와 방탄조끼 역시 한쪽이 다른쪽 영역까지 동시에 보호해 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하긴, 굳이 물건뿐만 아니라 사람의 전문성도 마찬가지이다.
미친 난이도를 자랑하는 리스트의 클래식 피아노를 치는 전공자라도 재즈 반주를 보면 벙 쩔 수 있다. 영역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공기총 스포츠 사격 금메달이랑, 군대 육군 소총수의 특등사수 사격, 그리고 특전사 저격수의 사격은 다들 영역이 다르고 잘 호환되지 않는다. 한쪽을 잘하는 사람이 다른 분야까지 전문가를 겸하지 못하며, 그나마 원래 전문인 분야도 며칠만 연습· 훈련을 게을리하면 금세 감이 무더져 버린다.

그러니 사람뿐만 아니라 총기도 용도별로 특성이 모두 다른 건 당연지사다.
저격수 정도로 극도로 민감하고 전문적인 분야로 오면 총도 무슨 악기마냥 전용 케이스에 넣어서 고이 간직해야 하고, 수시로 닦아 주고 손질해야 한다.
유효 사정거리를 겨우 100~200m로 잡는 일반 쫄병들이야 훈련용 총 따로, 실전용 총이 따로이고 소총과 함께 진흙탕에 막 뛰고 뒹굴기도 한다만.. 그런 건 저격수한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3. 한 10년 전부터, 앞으로 2~30년 안으로 없어질 거라고 난리였던 것들

(1) Java, C# 같은 가상 머신 언어가 주류가 되고, 구닥다리 C/C++ 프로그래밍은 한물 갈 거다
그럴 리가.. C++이 2010년대 이후부터 얼마나 괴물 같은 문법과 기능들이 마구 추가되고 상상을 초월하게 바뀌었는지를 알면.. 저건 이불킥 수준의 단견임이 느껴질 거다.
아 물론 MFC 같은 일부 프레임워크는 한물 간 거 맞다. 기존 프로젝트들을 유지보수 하는 용도로만 쓰이지 신규 제품 프로젝트를 저걸 써서 진행하는 경우는 거의.. (간단한 내부 툴, 데모, 쌤플 정도나 만드는 경우 말고) 전멸이다.

(2) Windows NT 커널이 없어질 거다
마소에서 차세대 Windows를 표방하며 한때 개발했던 Midori니, Windows 10X 같은 건 전부 망했다. 만들려다 말았고 개발 중단됐다. NT 커널이 없어진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마치 인텔에서 x86 말고 다른 계열 CPU를 만들려다가 만 것과 비슷한 취급이다. 과거의 Itanium이라든가 i860, i960 같은 거.

(3) 폰트에서 힌팅이란 게 없어질 거다
요즘 서브픽셀 안티앨리어싱 기술이 많이 발달했고, 어지간한 디스플레이 해상도가 30~40년 전의 도트 프린터에 근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은 본문 글씨에서 힌팅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유의미한 걸요?? 힌팅 없으면 획이 뿌옇고 뭉개지는 게 여전히 티가 난다.
맑은 고딕도 언뜻 보기엔 100% ClearType빨인 것 같지만.. 똠 뷁처럼.. 2350자 밖의 비완성형 글자를 작게 찍어 보시라. 힌팅이 적용된 일반 2350자 글자보다 훨씬 못생겨진다.

물론 옛날처럼 한땀 한땀 쑤제로 정교하게 힌팅을 할 필요는 없고, 심지어 대부분의 절차가 자동화, AI화는 될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지지는 못할 거다. 마치 비행기 유인기 vs 무인기의 역할 분담과 비슷한 관계가 될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24/03/12 19:35 2024/03/1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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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행렬의 기본연산

우리는 학교에서 방정식을 푸는 방법에 대해 배울 때, 등식에 대해 너무 당연해 보이는 원리를 배운다.
등식의 양변에 같은 수를 더하거나 빼거나 곱하거나, 나누더라도(비영) 등식은 성립한다는 거.

이건 사실 너무 당연한 얘기이다. 이미 값이 같은 두 수에다가 동일한 수로 동일한 연산을 하면 그 결과도 서로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당연한 이치만 이용해서 복잡한 방정식을 푸는 게 수학의 묘미이다.
등식의 좌변과 우변을 마법 같이 변형하고 복잡한 항을 옮기거나 없애고, 궁극적으로 좌변에 x 하나만 남기니까 말이다.

그런데 행렬을 다루는 선형대수학으로 가면 이와 비슷한 방법론이 또 등장한다. 이른바 행렬을 줄 단위로 변형하는 기본 연산 말이다.
저 줄이라는 게 가로줄(row 행)인지 세로줄(col 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행렬에서 임의의 두 줄을 뽑아서 한 줄의 숫자를 그대로 또는 스칼라(상수)배 한 뒤, 다른 줄에다가 그대로 더해 준다. 두 벡터 A, B에 대해서 A = A + n*B 같은 셈이다.

행렬이라는 건 그냥 방정식이 아니라 변수도 여러 개, 식도 여러 개인 연립방정식을 풀기 위해 도입된 물건이다.
연립방정식을 풀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일은 식에서 변수를 하나씩 소거하는 것이다.
어떤 식은 x y z 변수가 모두 등장하지만 다음 식은 x를 소거하여 y z만 남기고, 마지막 식은 z만 남기고..
그러면 그 z를 y-z 식에다가 대입해서 y를 구하고, 이걸 x-y-z 식에다가 대입해서 x까지 모두 구하면 된다.

이 과정이 행렬로 치면 '삼각화'이다. 행렬이 나타내는 방정식의 특성(= 근)을 변형하지 않으면서 0이 아닌 숫자를 행렬의 반쪽에다가만 남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삼각화하는 수단이 바로 저 줄 단위 기본연산이다. 없애고 싶은 칸의 숫자를 스칼라배를 통해 동기화시키고 나서 빼 주면 그 칸은 0이 되어 소거된다.

행렬의 기본연산의 묘미는 바로..
한 줄 내용의 상수 배를 딴 줄에다가 아무리 더해 주더라도 행렬 내지 방정식의 전체 특성이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그 행렬의 행렬식의 값이 변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상수 배 했을 때만 행렬식 값에도 그 배율이 반영된다.

왜? xyz축을 각각 가리키는 단위 벡터들을 생각해 보자. z축을 1만치 향하는 벡터에다가 완전히 다른 방향인 x, y축을 가리키는 벡터를 제아무리 더해 줘도 z축 방향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커버하는 벡터 공간이 정육면체이던 것이 찌그러진 평행육면체가 될지언정, 그 육면체의 부피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오로지 z축 자체의 크기를 키워야만 육면체의 부피가 바뀔 것이다.

이 기본연산으로부터 유도 가능한 재미있는 특성이 또 있다.
행렬에서 서로 다른 임의의 두 줄을 맞바꾸는, 다시 말해 교환하는 것을 저 기본연산들의 조합으로 구현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교환을 하면 행렬식 값이 부호가 바뀐다.

  • 임의의 두 줄 (A,B)가 있는데 먼저 A줄에다가 B줄 내용을 빼서 (A-B,B)를 만든다.
  • 그 뒤 B에다가 지금 A줄의 값이 돼 있는 A-B를 더해 주면 B가 소거되어 (A-B,A)가 되고..
  • A-B가 돼 있는 A줄에다가 지금 B줄의 값인 A를 빼면 (-B,A)가 된다.
  • 이제 -B에다가 -1을 곱하면 (A,B)가 (B,A)로 교환이 완료되고.. 이때 행렬식의 부호도 -1이 곱해지면서 바뀐다. 이런 원리 때문이다. =_=;;

이 바닥에서는 피연산자의 순서가 바뀌면 결과의 부호가 달라지는 연산을 심심찮게 보는 것 같다. 벡터곱(외적)이라든가, 사원수 i,j,k끼리의 곱 같은 거 말이다. 행렬의 줄 교환 기본연산도 그런 축에 드는 셈이다.

2. 두 변수 교환

그리고 위의 저 로직은 컴퓨터 코딩깨나 하는 분들에게는 꽤 낯익을 것이다.
임시 변수를 사용하지 않고 두 변수 값을 맞바꾸는 swap 알고리즘과 개념적으로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즉, C 코드로 치면 아래 식을 적용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ㄲㄲㄲㄲㄲㄲㄲ

a -= b, b += a, a -= b; a=-a;

물론, 코딩을 할 때는 꼭 합성 대입 연산자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으니, 피연산자의 배치 순서를 바꿔서 부호 전환을 축약시키곤 한다.

a += b, b = a-b, a = a-b;

덧셈과 뺄셈 대신, 곱셈과 나눗셈을 써도 되기는 한다. 그러나 이건 실용성이 최악이다.
그렇잖아도 임시 변수 안 쓰는 swap 자체가 실무에서는 딱히 쓰이지는 않고 "이런 테크닉도 있다" 수준으로 짚고 넘어가는 잉여이다. 근데 하물며 swap을 위해서 덧셈-뺄셈보다도 더 무거운 곱셈과 나눗셈이라고??
오버플로 가능성, 피연산자에 0이 있을 때의 문제, 부동소수점인 경우에는 오차 문제..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사실, 컴퓨터의 입장에서 이런 맞교환 용도로 덧셈· 뺄셈보다도 더 낫고 최고 적합한 연산자는 바로 비트 xor이다. 얘는 같은 피연산자를 두 번 적용하면 도로 원래 숫자로 돌아온다는 마법 같은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A ^ B)^B = A 다시 말해 xor은 항등원이 0이고 역원은 걍 자기 자신.. 그래서 프로그래머라면 잘 아시다시피

a ^= b, b ^= a, a ^= b;

정말 매끄럽고 단순한 합성 대입 연산자 3방으로 swap이 바로 구현된다. 컴퓨터의 입장에서 xor은 산술 연산보다 속도도 더 빠르며, overflow 문제도 전무하니.. 가히 최적이다.

다만, 다시 얘기하지만 임시 변수 안 쓰는 swap은 실용성이 별로 없다.
연산이 병렬화 이념과 맞지 않으며, 실수로 a와 b에다 같거나 겹치는 메모리 주소를 줘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하이고, swap 때 변수 하나 줄여 갖고 메모리 얼마나 절약했고 얼마나 팔짜 폈나? ㅋㅋㅋ" 이런 비아냥이 나올 만도 하다.

임시 변수 안 쓰는 swap의 자매품으로는..
O(1)을 초과하는 추가 메모리를 쓰지 않는 n log n 정렬 알고리즘(heap 정렬)이라든가 parent node가 없는 트리 자료구조를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안정성 있는(stable) n log n인 merge sort라든가, 아예 n^2이지만 아주 가벼운 insert sort가 소규모 한정으로 선호된다. heap sort가 막 메리트가 있다고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

그리고 parent node 없이 스스로 균형잡는 tree 자료구조의 삽입· 삭제를 구현하는 것 자체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C++에서 제공하는 set, map 부류의 컨테이너들은 가벼운 포인터 기반의 iterator로 원소 순회 기능을 제공하다 보니.. 어차피 다들 node에다가 parent 포인터를 갖추고 있다.

이게 없으면 iterator가 자체적으로 스택을 가진(= 현 순회 상태를 저장) 복잡한 클래스가 돼야만 트리 내부를 순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노드 하나당 8바이트짜리 포인터 오버헤드가 추가됐다고 해서 요즘 세상에 컴퓨터가 메모리가 부족하다고 징징대지는 않는다. ^^

3. 여담

(1) 행렬 얘기를 하다가 프로그래밍 얘기가 너무 길어졌군..;;
아무튼 선형대수학에서 행렬을 다루는 기법을 보면 원소들을 쭉쭉 옮겨서 행렬을 \ 모양의 삼각형 형태로 가공하는 게 많다. 삼각형 모양이 된 행렬은 그 대각선상에 있는 원소만 쭈룩 곱하면 행렬식을 구할 수 있고 여러 모로 취급이 편하기 때문이다.

행렬식이나 역행렬을 구할 때는 행렬에다가 앞서 언급했던 기본연산을 적용하면서 행렬을 삼각화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서 원본 행렬을 아예 하삼각행렬과 상삼각행렬의 곱으로 일종의 분해를 할 수 있다. 단, 앞서 등장하는 하삼각행렬은 주대각 성분이 모두 1... 이걸 LU 분해라고 부른다.

(2) LU 분해 말고 PD(P^-1)이라는 세 형태로 행렬을 분해하는 더 어려운 기법도 나중에 다뤄진다. 이건 행렬의 고유값/고유벡터와 관계 있는 더 어려운 개념이어서 나중에 다뤄지는데.. 행렬식이 아니라 행렬의 거듭제곱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게 해 주는 아주 강력한 도구이다.

(a+b) 기호의 다항식을 n승 하면 항이 더덕더덕 늘어나는데, 이는 행렬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주대각성분에만 값이 붙어 있는 대각행렬은 n승 해도 항이 늘어나지 않고 마치 스칼라값처럼 자기 자신의 지수만 늘어난다.
PD(P^-1)은 행렬을 대각행렬 D를 포함한 형태로 분해하는 기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추가로 글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3) 임의의 a,b,c...꼴의 원소에 대해서 행렬의 곱셈뿐만 아니라 행렬식이나 역행렬을 구하는 일반적인 공식도 유도할 수는 있다. 그러나 행렬식 하나만 생각해 보면, n 크기 정사각행렬의 행렬식은 계수가 n인 항이 2n이나 n^2, 심지어 2^n개도 아니고 n!개씩 달라붙는다.;; 아시다시피 그 행렬식은 이전 n-1크기 행렬식들을 n개만치 더하고 쪼개는 걸 반복하는 형태로 재귀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큰 행렬을 다룰 때 실무에서는 일반적인 공식은 사실상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냥 행렬에다 기본연산을 열나 적용한 뒤에 주대각 성분을 곱하고 말지. 이러면 O(n^3) 정도의 복잡도가 나온다. 얘들은 중간 계산 결과들이 저 복잡한 항의 개수를 줄여 주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FM대로 재귀적으로 행렬식을 구하더라도 다이나믹 기법으로 이전 계산 결과를 적절히 저장하면 시간 복잡도를 팩토리얼에서 다항함수로 바꿀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쪼개진 sub행렬을 기술하는 게 생각보다 빡세고 쉽지 않다.;;; (직접 생각해 보면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거임. ㄲㄲㄲㄲㄲ) 크기가 다양한 행렬들의 곱셈 횟수를 최소화하는 문제와는 상황이 좀 다르다. 그러니 이러나 저러나 FM은 실용성이 떨어진다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8 08:35 2024/02/2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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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번역: 킹 제임스 성경에만 나오는 가르침

(1) 마 28:19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마태복음의 결말부에 나오는 great commission은 흔히 make disciple(제자 삼다)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 용덕 작곡 "가서 제자 삼으라"(갈릴리 마을 그 숲속에서)라는 복음성가가 쌍팔년도 시절에 유명했다.

그러나 킹 제임스 성경은 그냥 간단하게 '가르치다' teach라고만 돼 있다. 이건 뭐 변개라기보다는 번역 표현의 차이인 것 같다. 제우스(그리스)냐 주피터(로마)냐 하는 차이점과 비슷한 건지도?
저 복음성가 역시 후렴 가사가 "가서 제자 삼으라, 나의 길을 가르치라"라고 그게 결국 그 말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2) 삿 8:16 "그 도시의 장로들을 붙잡은 뒤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가르치고"
이건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무슨 삽자루 선생이라든가 일제 시대 칼 찬 선생처럼 흉기를 폼으로만 들고 열혈 강의나 교육(...)을 한 게 아니다.;; 진짜로 흉기를 휘둘러서 처절한 피의 보복을 했다는 얘기이다. 7절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라고 경고 내지 예고한 걸 그대로 행한 것이다.

위급할 때 주변에 좀 도와 달라고 요청했는데 듣보잡 취급받고 인격 모독과 함께 무시 당하는 건 사람을 정말 최고로 빡돌게 만든다. 그 위기를 이 악물고 극복하고 나서는 당연히 그들에게 보복하고 싶어진다.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당한 거랑.. 나중에 다윗이 나발에게 당한 게 서로 거의 판박이인 것 같다. (삼상 25)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서 KJV 외의 타 성경들은 저 구절을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을 '징벌했다, 응징했다' punish"라고 번역한 편이었다.
그러나 KJV는 저 행동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존만아, ㅆㅂ 누구든지 작은 기드온을 건드리면 X되는 거예요" 시쳇말로 표현하자면 참교육인 것이다. 매우 흥미롭다. -_-;

성경은 체벌을 적극 지지하는 논조이고, 심지어 잠 26:3 "어리석은 자의 등에는 매가 약" 같은 말씀마저 있는 걸 생각하면 일면 수긍이 간다.
그나저나 말보회 한킹은 이 구절의 teach를 '일깨워 줬다'라고 꽤 특이하게 번역했다.

2. 성경 해석: 잠 25:12 숯불 쌓기

성경이 인간의 행실과 관련하여 요구하는 전반적인 논조는 "악을 악으로 되받아치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라, 원수를 사랑하라, 남의 잘못을 용서하라"이다.
그러나 이는 죄에 대한 자각과 회개, 뉘우침이 없는 악인들한테 무한한 호의와 관용을 베풀면서 호구 취급받으라는 말이 절대 절대 아니다. 북괴한테 무한정 퍼 주라거나,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한테 뜬금없이 현금 쥐어 주라는 말도 아니다.

내 가족을 죽인 흉악범이 죽이고 싶도록 밉고 보복하고 싶어하는 거.. 그 자체는 부당한 피해를 입은 인간이 충분히 가질 만한 심정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도피성이라는 걸 괜히 만드셨겠는가.
성경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 자체는 절대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확하게 당한 만큼만 되돌려 줘라. 되로 받은 걸 말로 보복하지 마라"라고 권고할 뿐이다! 이 와중에 인간의 입장에서 용서니 사랑이니 아량이니는 보복을 대신 집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근거로 삼아야만 할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잠 25:21-22를 보자. 그리고 이를 인용하고 있는 신약의 롬 12:19-21도 보자.
내용을 요약하자면 "니 원수가 곤경에 처하게 되면 물과 음식까지 주면서 선대해라. 그거야말로 원수의 머리 위에다 숯불을 얹는 것 같은 효과를 낼 것이다. 하나님이 대신 보복을 해 주실 것이다"이다. 아까 저 기드온과 다윗이 받았던 취급의 완전 정반대를 하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지금 당장 손해를 감수하면 하나님이 나중에 더(이자까지 쳐서??) 갚아 주신다~~" 이 패턴이야 구약 율법에서 이삭 줍기나 종 제도 등 곳곳에서 발견되니까 익숙할 것이다. 그게 원수· 보복과 관련해서도 적용된다고 보면 된다.

여기서 많은 오해가 나도는 건 '원수의 머리 위에 숯불'이라는 표현이다. 이건 무슨 심상이며 무엇을 의미할까?
어려울 것 없다. 결론부터, 답부터 말하자면.. 이건 문자 그대로 아주 잔인하고 처참한 보복을 의미한다. 오죽했으면 휴버대 고문 소믈리에 에피소드 중에도 아주 적절한 묘사가 있더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머리 위에 숯불은 딱 이걸 의미한다. -_-;;;;
"죽이고 싶은 니 부모의 원수, 니 자녀의 원수가 마침 쫄딱 망해서 길거리에서 헐벗은 상태이네? 원수를 제일 완벽하게 압도하고 제일 가학적으로 보복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바로 그때 그 원수놈을 신앙의 힘에 의지해서 반대로 먹이고 입히고 도와 줘 봐라. 그러면 그놈은 머리에 숯불이 얹혀서 쪄 죽는 것 같은 급의 보복을 당할 것이다." 이런 말인 것이다. 아멘?

(1) 머리에다 숯불을 얹는 것은 원수가 "뜻하지 않은 선대를 받아서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이 후끈후끈 빨개지는 걸 의미한다" 이렇게 해석하고, 심지어 이 구절의 번역을 그런 쪽으로 한 역본이 있다. 휴~ 이건 인본주의적인 뇌피셜을 너무 발휘한 것 같다. 성경에는 죄인이 회개하는 건 있어도 그렇게 반응하는 모습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아니면.. (2) 이건 원수한테도 불씨를 빌려주는 선행을 의미한다..? 옛날옛적에 성냥이나 가스레인지가 없었고 아무리 불씨가 귀했다지만, 이 얘기도 전혀 아니다. 그리고 세상에 어느 고깃집에서 겁대가리 상실한 종업원이 불 붙은 조개탄이나 숯을 머리에 이고 다니던가? 그러다가 엎어지고 자빠지면 어쩌자고? =_=;;;

성경에서 단서를 전혀 찾을 수 없는 내용이라면 때로는 원어나 그 당시 역사 고증 따위를 참고해서 문제를 해결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창세기 6장 고펠나무의 정체 같은 거라면야..  하지만 이 숯불은 그렇지 않다.
이건 그냥 시 140:10에서 말하는 그 숯불이다. 유황불과 다를 바 없는 부정적인 심판 맥락이다. 이 숯불은 인간이 얹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복 차원에서 얹는 불이다. 이 정도면 "머리 위 숯불 선행설"은 설 자리를 완전히 잃을 것이다.

요즘 어떤 성경 역본은 잠 25:22를 보니.. '조건문'을 만든 게 있었다. "니가 그의 머리에 불타는 숯을 쌓으면 주께서 보답해 주실 거다" ...;;; 안타깝지만 이건 영어· 원어에 충실한 번역도 아니고 숯불의 성경적인 심상도 모른 채 '숯불 선행설'을 전제로 깔고서 번역을 아주 잘못한 것 같다. 여기서 숯을 쌓는 건 비유적인 심상일 뿐이다. 하다못해 구닥다리 개역성경이 원래 의미에 더 근접하게 번역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3 19:36 2024/02/23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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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뒷북이긴 하다만.. 본인은 요 근래에 <건국전쟁>을 보면서 국뽕을 한 사발 잘~~ 흡입하고 왔다.
제목이 뭔가 낯익어 보이던데? 10여 년 전 옛날에 정반대 성향의 진영에서 만들었던 좌빨 다큐 영화는 <백년전쟁>이었구나. 그걸 의식해서 저 영화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게 아닐까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울나라는 딴 게 국뽕이 아니라 리 승만 보유국이었다는 거, 초대 국부가 할배 같은 사람이었다는 게 너무 과분한 국뽕이었다.
SNS에서는 애국우파 네티즌들이 자기도 이 영화를 봤다면서 티켓 인증샷을 막 올리더라만.. 난 그런 릴레이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내용 요약 내지 영화를 보면서 떠올랐던 관련 생각을 올리련다. ㄲㄲㄲㄲㄲ

1. 패턴

  • 조선은 말기에 일본까지 끌어들여서 동학을 진압하고 나서는 그 일본한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겼다.
  •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은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일본을 항복시켰다. 그러나 이게 훗날 한반도 남북 분단의 화근이 됐다.

미국은 저 끈질긴 쪽발이 일본놈한테 학을 떼 버려서 진짜 될 대로 돼라~ 핵도 터뜨리고 "소련까지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전쟁을 끝내고 싶어했다. 제3자가 보기에 그 심정이 솔직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리 할배는 아무리 그래도 소련은 끌어들이지 말고 한반도에 미국이 단독 진출해야 한다고 그렇게도 당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이것 때문에 미국도 두고두고 고생하게 됐다.
하긴, 미국은 일본이 쳐들어올 거라고 경고했던 할배의 선견지명도 업신여겼다가 된통 당했었다. ㄲㄲㄲㄲ

  • 박 정희는 기업을 육성하려고 민간 사채를 싸그리 정리하려다 보니(1972년 8 3 사채 동결 조치) 시간이 부족해서 유신 독재를 감행했다.
  • 그것처럼 리 승만은 재일 교포 북송을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일본으로 공작원도 보내고(1959년).. 이걸 결판 내려는 욕심이 이듬해에 무리해서까지 4선 출마를 강행하는 데 영향을 줬던 것으로 보인다.

오~~ 둘이 요렇게 연결된다니 신기하다.

2. 할배의 업적

  • 혁명적이었던 농촌 토지 개혁 -- 단군의 후손들을 단순히 나라 있는 백성으로만 만든 게 아니라, 자기 땅도 있는 백성으로 만들었다.
  • 그 가난하고 못살던 시절에도 교육에 투자하고 쓸데없이 민주주의 정신을 너무 많이 함양시킴
  • 반공 포로 석방과 한미 상호 방위 조약. 50여 년 전에 조선이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걸 겪었으니.. 울나라는 이젠 두 번 다시 미국에게 버림받지 않으려고 외교 역사상 최고의 일방적으로 유리한 조약을 맺어 버렸다.

3. 누명

(1) 한강 다리 폭파 관련 거짓 날조 누명은 이제는 최초로 거짓말이 유포된 배후를 추적해서 학술적으로 다 까발려야 하지 않나 싶다.
건국전쟁 영화를 싫어하고 내용을 반박한 사람들 글을 검색해 보니 맹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 봉암, 최 능진.. 이런 사람들 사형 당한 것만 거론할 뿐, 이 런승만 날조의 반박에 대해 또 재반박을 하지는 않더라.

(2) 말단의 군경 간부라면 모를까, 우리나라 초대 내각은 친일파 반민족주의자 출신이 개뿔 절대 아니었다. 이 시영 가문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이고, 애산 이 인??
이 사람은 독립운동가 변호하고 한글학회에 재산 엄청 기부했던 애국자 법조인이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이런 식의 친일파 단죄는 비현실적이고 무리라고 생각해서 반민특위의 해체에도 앞장섰었다!

(3) 리 승만 할배는 4 19 시국을 뒤늦게 파악하고는 "내가 맞아야 했을 총을 우리 젊은 친구들이 맞았구나" 그러면서 4 19 시위 부상자들을 위문하러 갔다.
선뜻 하야하겠다고 그러자 오히려 시위대며 시민들도 도로 같이 울었고 "리 박사님,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랬다. 세상에 참 이상한 바보같은 독재자다.
오히려 그 시절 언론 기레기들이 할배와 시민 사이를 마구 이간질했다. 그리고 전직 대통령의 짤막한 여행을 무슨 죄 짓고 도피 망명이라도 가는 양 부풀려서 조작 보도를 했다.

4. 어처구니없는 현실

(1) 김 구는 단순히 남북 분단을 반대하고 남북 간 오해를 풀러 북한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쏘련으로부터 지원을 받아서 조만간 남조선에 쳐들어갈 거고, 그러면 쟤들은 꼼짝없이 함락당할 것이다" 그는 이런 소리까지 뻔히 들어서 아는 상태였다. 그런데도 남한에 돌아와서는 "북한은 절대 쳐들어오지 않습니다~ 미군 없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거짓말을 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김 구는 우리가 아는 그 애국자 김 구라고 볼 수 없다. 이런 사람을 10만원 지폐 도안에 넣겠다고..?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 주미 한국 대사관에는 할배가 아니라 서 재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딴 나라들은 간디 등 정상적인 자기 국부들 동상)

(3) 하와이에서 리 승만의 날 기념일을 제정하려고 했는데 본토 조선인들이 하도 분노하고 반발· 반대하는 바람에 시도가 무산됐다고.. 허 참 기가 막힌 일이 많았다.

건국전쟁은 정말 국뽕 충만하면서 울컥하면서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다큐 영화였다.
영화가 다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오고 상영관 불이 켜지자..  누가 시작했는지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기립이었는지 착석이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곧장 상영관을 빠져나가는 사람이 없이 거의 5초~10초는 박수를 치고는 나갔다.
할배가 1953년인가 54년인가 미국 상원 연설을 해서 열혈 기립박수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나는 박수 정도가 아니라 중간 중간에 몇 번이나 “옳소!” “아멘!” 이럴 뻔했다. 말은 차마 못 하고 그냥 고개를 크게 끄덕이는 걸로 격한 공감을 대신 표현했다.

왜, "세상을 바꿔 놓은 책" 킹 제임스 성경 400주년 다큐와도 오버랩됐다.
그 위대한 성경의 번역을 지시한 왕은 정작 유해라고 해야 하나 정말 보잘것없이 어디 쳐박혀 있던데..
우리나라 국부도 저렇게 존재감 없는 취급을 받고 있구나..

이 조선? 한국이라는 나라는 중국처럼 쪽수 많은 대국도 아니고, 일본처럼 일찌감치 근대화 잘해서 열강 반열에 든 나라도 아니었다.
얼마든지 식민지가 되든 공산화가 되든 이상할 게 없었고, 필리핀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같은 국력의 나라로 남는대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그 듣보잡 한구석에 미국을 너무 잘 알고 미국의 이념을 적극 따르는 지도자를 둔 ‘깨어 있는 나라’가 있으니 “미국 니들도 여기를 다시는 무시하거나 저버리지 마라~~ 니들 체제를 지키기 위해서는 이 나라도 신경 쓰지 않으면 안 될 거다”이걸 각인시켜 놓은 주역이 바로 그 할배다. 이 능력을 겨우 킬구 아재랑 비교하냐? 허 참~~~

이런 영화 보는 것엔 돈 아깝지 않다. 다들 보고 그냥 파일 소장해라. 누구든지 꼭 봐라 두 번 봐라.
그야말로 할배가 잘한 것을 논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고 불편해하는 거.. 진짜 정신병이다.
외국 나가서 교양과 상식 있는 사람들 앞에서 할배를 비하하고 부정하면 그냥 남한이라는 나라 품격 자체가 그냥 통째로 폄하되고 깎일 것이다.

크리스천인 가수 나얼이 이 영화 포스터를 개인 SNS에 올렸는데 그걸 갖고도 미친놈들이 욕하고 악플 달고 난리를 쳤었다. 기도 안 차서 원..
하지만 그 대신, 나얼이 누군지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니던 사람들 중에서도 "나얼? 저 사람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애국자군. 음반을 구매해야겠다" 이러는 사람이 생겼다. =_=;;; 팩트만 늘어놓은 다큐가 도대체 왜 정치색 논쟁이 돼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건국전쟁 같은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할 게 아니라 공중파 방송국에서 매년 국경일에 틀어 줘야 한다.
실제로 옛날에(2015~2016년) KBS TV에서는 주 기철 목사의 일대기를 다룬 '일사각오' 다큐를 무려 전국구로 방영한 뒤에 이듬해에 증보판(?) 영화까지 만들었던 적이 있었다. 영화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 안 이숙 여사 얘기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난 그때 솔직히 놀랐다. 어떻게 KBS에서 CBS 같은 성향의 다큐를 저렇게 방영할 수 있었지?

아무리 일제에 의해 투옥과 고문을 당했다지만, 주 목사는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항일 독립운동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에 더 가깝다.
우리나라가 국교가 있는 나라가 아니거늘, 광고 없는 국· 공영방송 급이라면 솔직히 주 목사 얘기보다는 리 박사 할배 얘기를 더 우선적으로 방영해야 할 것이다!

게다가 일사각오와 비슷한 시기에(2016) 울산 MBC에서는 '마지막 간수'라는 안 중근 다큐를 독자적으로 만들어서 방영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으로 방송사에서 마음만 먹으면 할배에 대한 진실을 전하는 애국 다큐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텐데. 방송사 관계자들의 마음과 의지가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21 08:35 2024/02/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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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언 또는 예언

'킹제임스 흠정역'은 prophe-로 시작하는 단어들(-sy, -cy, -t)을 한 치의 예외 없이 모두 '대언-'이라고 옮긴 것이 특징이다. 선지자, 예언(자) 대신 전부 '대언(자)'이다. 이건 우리말 성경 중에 안티오크 권위역에서 처음으로 시도했고 그게 오늘날 흠정역에까지 남아 있는 흔적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서 대신 전하기, 또는 그렇게 전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 '대언'이 틀린 말은 아니다. 출 7:1-2 같은 용례도 있다.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속성은 미래 예언이다. 성경이 인간의 개똥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감받은 말씀인 증거 중 하나도 바로 예언이 확률적으로 절대 불가능할 정도로 문자적으로 많이 적중했다는 것에 있다.

쉽게 말해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긴 한데, 그 대언 중에 미래 "예언"도 있다는 것이다. 관계가 이렇게 정리된다.
성경 중에서 요한계시록은 prophesy에 속하는 책이라고 분류되는데, 이건 당연히 예언을 말한다. 후자까지 몽땅 대언이라고 싸잡아 풀이해 버리면 문제가 생긴다. 요한계시록이 성경 중에서도 어떤 특성을 갖는지를 알 수 없어진다.

흠정역이 아쉬운 점은 성경에서 예언이라는 키워드를 완전히 없애 버렸다는 것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예언이라고 하면 자꾸 은사주의 점쟁이 예언 기도... 가령, "너는 몇 월 몇 일 몇 시에 무슨 일이 터질 것이고.. 이 번호의 로또를 사면 당첨될 것이다" 이런 걸 떠올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고린도전서 14장에다가 '예언'이라는 단어를 넣는 걸 너무 부담스러워한 것이다.

하지만 시한부 종말 갖고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휴거나 종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건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언 갖고 이상한 뻘짓 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해서 성경에 예언이라는 개념이 없는 건 아닐 것이다.

꼭 초자연적인 점쟁이급 예언이 아니더라도.. "너는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구원받지 못한 채 죄 가운데 죽는다면 지옥에 가게 된다" 같은 원론적인 얘기만으로도 이미 미래에 대한 예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 말씀을 대언한 것이다. 예언과 대언은 서로 대립하고 상충하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같은 단어가 어디서는 예언에 더 가깝고 어디서는 그냥 대언에 더 가까운지를 판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원칙을 갖고 번역하더라도 호불호가 갈리고 논란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래도 예언을 단 하나도 없이 깡그리 없애 버린 건.. 마치 구약의 사자음어를 몽땅 LORD라고 번역하느라 '여호와'라는 단어를 아예 깡그리 없애 버린 것과 비슷한 면모로 보인다.

이건 흠정역을 사용하는 교회에서도 목사님들이 지적하며 아쉽게 생각하는 면모이다.
말씀 보존 학회에서는 흠정역을 20여 년째 아주 부정적으로 까내리고 비방하는 편인데.. "우리 한킹을 도둑질한 짝퉁" 같은 영양가 없는 저질 네거티브 말고 "예언이 없는 성경" 이런 식으로 흠정역의 진짜 약점에 대한 공략은 왜 안 하는지 모르겠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인데.. 계 19:10 "... testimony of Jesus is the spirit of prophecy"의 경우, 옛날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대언'이었다가 나중에 나온 개역개정에서는 '예언'으로 바뀌었다~!
이는 킹 제임스 계열이 아닌 성경을 만드는 진영에서도 prophecy의 번역이 쉽지 않은 고민거리라는 걸 시사한다. "예수 믿는 증거는 말씀 선포/대언" vs "예수님이 하나님인 증거는 미래 예언 능력" 이렇게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2. 회개, 축복

영어의 동사 중에는 repent나 bless처럼.. 사람과 하나님이 모두 주체가 될 수 있는데 동일하게 번역했다가는 난감해지는 단어가 있다.
기계적으로 한 단어로만 번역하면 하나님이 잘못을 저질러서 후회· 회개(!!)를 하고, 남에게 복을 빌게 될 수 있다..!! 당연히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 (돌이킨다, 슬퍼하신다 / 복을 '주신다')

prophesy도 이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겠지만 하나님이 자기 말을 또 대언(?)하는 것일 리는 만무하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역시 예언이 되어야만 타당하겠다. 이 역시 생각할 점이다.

3. 전치사

(1) 예전에 한번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흠정역은 OF를 중의적으로 직역해서 갈 2:16 faith of Jesus Christ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라고 옮긴 성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 11:9 knowledge of the LORD는 '{주}를 아는 지식'이라고 번역했다.
말보회 한킹은 그 반대다. 갈 2:16은 예수님 믿는 믿음이라고 풀이를 했지만 후자는 그냥 '{주}의 지식'이라고 옮겼다. 영어에서 of는 정말 독보적으로 중의적인 전치사임이 틀림없다.

(2) FOR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 싶다. '-를 위한'(목적)과 '-로 인한'(이유)의 의미가 모두 있다. for sinner, for sin이 모두 가능한데 우리말로는 번역 표현이 갈린다.
한킹은 for the remission of sins를 "죄사함을 위한"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인한"이라고 따박따박 번역했다. 하지만 흠정역은 요일 2:2를 "죄로 인한 화목제(화해 헌물)"라고 옮겼다.

(3) IN은 기본적으로는 '-안'이라는 뜻이지만 rejoice in, believe in처럼 그냥 '-를'이라고 타동사처럼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때가 있다. 하다못해 미국 지폐에 쓰여 있는 In god we trust도 말이다. ㄲㄲㄲㄲㄲ 생각보다 까다롭다.
요일 4:3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한 최초의 역본은 안티오크 권위역이고, 그 뒤 흠정역도 이를 따르고 있다. 한킹은 그냥 '육체로..'이다.

4. 조동사

영어의 can, may, will, must 같은 조동사는 우리가 중학교 수준에서 배우는 아주 쉽고 기초적인 단어이다.
그런데 이 조동사들은 뭐랄까, 손에 잡으려 해도 잘 잡히지 않는 굉장히 므흣한 단어이기도 하다.
의미가 마치 to 부정사처럼 예정-의지-가정 속에서 막 유동적으로 변하기도 하고, 과거형은 단순히 시제만 과거인 게 아니라 뜻이 또 변하기도 한다. 과거형이 좀 더 완곡하고 공손한 표현이 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shall은.. 1인칭이 포함돼서 "이렇게 할까?"라는 제안으로 의미가 굳어져 버렸고, 과거형 should만이 과거가 아닌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킹 제임스 성경 영어에서 몇몇 조동사들이 쓰인 걸 보면 다음과 같은 패턴이 있다.

  • shall: 할 것이다(미래), 할지어다, 제안, 게다가 명령까지 붙어 있다. (thou shalt not kill) be 동사가 is, are 등으로 굴절되지 않고 뜬금없이 be 원형으로 등장한다면.. 그 문장은 십중팔구 should가 생략된 형태여서 그렇다.;

  • will/would: 역시 shall처럼 미래의 뜻이 있는데... shall과 달리 명령 뉘앙스가 아니라 want와 거의 같은 급으로 '원하다'라는 뜻이 덧붙어 있다. 딤전 2:4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will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용례 때문에 '유언'도 testament뿐만 아니라 요즘은 will이라고 표현한다.

  • want: 그럼.. 현대 영어에서 '원하다'라고 즐겨 쓰이는 이 녀석은 킹 제임스 영어에서는 lack/need와 비슷한 뜻의 자동사로 쓰인다. 시 23:1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가 I shall not want이다. 현대 영어로 I will not be in need 정도의 뜻이 저렇게 표현된 것이다.

군대의 야전교범이란 게 "이런 상황에서는 이렇게 하면 된다"라는 지침뿐만 아니라 "그때는 이렇게 하라"라는 명령도 된다. 그렇다면 이런 교보재의 문장은 옛날 같았으면 다 shall이라고 쓰면 됐을 것이다. ㄲㄲㄲㄲㄲ

5. wine

이것도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지 싶은데, 흠정역은 우리말 성경 중에 wine을 최대한 알코올 없는 '포도즙'이라고 옮긴 역본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감히 술을 만드는 이적을 행하셨을 리는 없으니, 요한복음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음료도 '포도즙'이다. 이건 의외로 권위역이 아닌 흠정역의 독자적인 관행이다.

그 정도면 괜찮지만.. 그래도 옆에 '독주'가 나란히 나오고 부정적인 문맥이 명백해 보이는 곳에서까지 무리하게 포도즙이라고 워딩 할 필요가 있나 싶은 구절도 있다.
"모조리 포도즙"도 "예언 대신에 몽땅 다 대언"와 비슷한 흠정역 번역 정책인 것 같다.

물론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술 취해서 자빠진 장면, 잠언에서 술을 극딜하는 장면에서는 흠정역도 당연히 '포도주'이다. wine이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용례가 술인 만큼, wine은 그 뒤로도 가능한 한 '포도주' 쪽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6. virgin

끝으로.. 계 14:4의 '처녀'는 흠정역 마제스티판에서 고쳐졌나 모르겠다. "여자와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은 처녀"라니.. =_=;;;
하필 공교롭게도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저 딱 한 구절.. 성경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virgin은 여자가 아니라 그냥 동정남을 가리킨다. 곧이곧대로 한 단어만으로 옮겨서는 안 되는 지뢰 같은 단어가 성경에 의외로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흠정역은.. 창 19:5의 man은 그냥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남자'라고 옮겨야 된다는 지론을 초창기 거의 20년 전부터 고집하고 자랑해 왔다. 왜? 이건 소돔 놈들이 남색을 저지르는 문맥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건 흠정역만의 독특한 특징이며, 그건 번역 방침을 존중한다.

그런데, 그런 성별을 철저하게 챙겼으면서 계 14:4 virgin을 숫총각 동정이라고 안 하고 처녀...;;;
소돔만큼이나 남자라는 단서가 버젓이 붙어 있는데.. 이건 일관성이 심각하게 결여되는 아쉬운 조치로 보인다.

처녀 virgin를 그냥 젊은 여자(기혼 여부는...??)라고 의역 변개하면 예수님의 탄생의 특성이 희석돼 버린다.
그런데 어느 동네의 워딩처럼 동정녀...라고 하면.. 엄마가 평생 남편과의 자식을 안 낳았다는 뉘앙스가 들어가 버리니 문제인데..
계시록에서는 애초에 여자가 아닌 virgin이라는 게 함정이다.;;

7. kill

'죽이다'를 뜻하는 kill은 중학교 수준의 아주 쉬운 기초 단어로, 사람이건 동물이건 모두 목적으로 받을 수 있다. 한국어는 '죽이다' 말고 '살해하다'는 사람에게만 쓰고, '잡다'는 짐승에게만 쓴다.

십계명 제6계명 Thou shalt not kill은 우리말로 '살인하지 말지니라'라고 적절하게 번역되어 있다. 이건 일체의 살생을 하지 말라는 얘기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히려 영어권에서 이건 '살생'이 아니라 '살인'이니까 murder가 더 나은 워딩이 아니냐는 제안이 있을 정도이다. 실제로 KJV 이후의 현대 역본들 중 일부는 murder로 말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십계명의 주변 계명들을 보시라. 부모 공경, 간음, 도둑질... 오로지 신 아니면 인간만을 다루는 저 문맥에서 등장한 kill은 당연히 살인이지, 갑자기 동물 보호 따위가 튀어나올 여지는 전~~혀 없다. 혼동될 일이 없기 때문에 그냥 음절수 더 적고 간결한 단어를 쓰는 게 더 낫다.

ere - before / foe - enemy / list - desire / let - allow ... 이런 식으로..
KJV의 영어 단어를 살펴보면.. 옛날 고어 단어가 더 짤막하고 운율과 암송에 더 유리한 경우가 적지 않다.

참, kill 말고 slay - slew(과거) - slain(과거분사)도 kill과 거의 같은 뜻이지만 더 문어적인 느낌의 '죽이다'이다. 특별한 차이 없이 그냥 섞여 쓰인 게 아닌가 추측된다. see / behold와 비슷한 관계인 걸까..??
카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창 4:8에서도 이 단어가 쓰였고.. 짐승을 잡아서 고기를 먹겠다는 얘기에서는 아예 목적어 없는 자동사로 slay가 창 43:16에 나온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본 짐승 환상이라는 같은 장면에서 두 단어가 일부러 동시에 쓰이기도 했다. (행 10:13, 행 11:7) 표준역은 둘을 서로 달리 번역했다. (잡아먹으라, 도살하여 먹으라)

Posted by 사무엘

2024/02/18 08:35 2024/02/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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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에 계층간 갈등이라는 게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게 과거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과격한 형태로 표출된 건 아무래도 산업 혁명 이후 19세기에 공산주의라는 게 생긴 뒤부터인 것 같다. 구호부터가 “만국의 로동자여 단결하라~~ 기존 체제를 다 뒤집어엎고 브루주아들을 다 타도하고 혁명 과업 완수하자” 이랬으니 말이다.

과거에는 왕부터 시작해서 귀족, 지주/영주 같은 계급만 떵떵거리며 살았다. 나머지 대다수 평민들은 농업 같은 1차 산업에 종사하면서 비슷하게 평등하게 못 살았다. 자기 신분과 출신이 원래 그렇고, 이웃들도 처지가 대동소이하니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여지가 별로 없었다.

농사가 풍년이어도 세금이나 소작료 명목으로 소출의 대부분을 삥뜯기는 게 참 뼈아팠다. 옛날에 노동력이 부족하고 백성들의 진짜 소득을 정확하게 측정할 행정력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 머릿수에만 비례해서 너무 단순무식하게 세금이 부과된다면 어떨까? 출산이 진정한 재앙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게 싫다고 인간이 법과 공권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무법지대에 혼자 떠나서 모든 걸 자급자족 하면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게 진정한 딜레마였다.

사실, 중앙 정부에서 법으로 정한 세금 자체는 그렇게까지 살인적인 수준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론과 이상은 그러하지만 물자를 수송하는 과정에서 날리고 잃는 걸 감안해서 여분으로 더 걷는 것, 그리고 세리 같은 중간 관리들이 횡령· 착복하는 게 장난이 아니니 최하위 납세자들의 고통이 극심해졌다. 하청에 하청을 거치면서 실제 작업자에게 지급되는 보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과 완전히 같은 이치이다.

물론 세금 착취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못 버틸 지경이 되면 죽창 들고 민란이 발생하고 '의적'이라는 게 나타나기도 했다. 로빈 후드, 임 꺽정, 홍 길동, 윌리엄 텔.. 이런 거 말이다.
그래도 이건 국가 체제 전복을 의도하는 건 아니었으며 그럴 재량도 없었다. 단순히 탐관오리를 벌하는 것까지가 끝이었다.

그랬는데.. 산업 혁명 물류 혁명이 일어난 뒤부터는 상황이 약간 달라졌다.
기계와 인간의 생산성 격차가 아득히 벌어졌고, 또 브루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격차도 정말 아득히 벌어졌다. 이거 덕분에 2차와 3차 산업이라는 것도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농산물과 공산품이 싸게 많이 보급되면서 인간의 ‘평균적인’ 삶은 크게 올라가긴 했지만.. 이건 다른 방면에서 큰 부작용도 야기했다.

산업화 초기에 영국 같은 나라에서 공장 근로자들의 근무 환경과 조건이 얼마나 열악하고 복지가 참혹했는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사람들은 흑인 노예도 아니고 나름 자국민이었는데도 말이다.
시골에서 농업 대부분에 가내수공업 약간이나 하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공장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단순노동자로 처지가 바뀌었는데.. 삶의 질이 크게 좋아질 리가 없었다.

뭐 영국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나라도 산업화 초기엔 그랬다.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빈부격차는.. 과거의 통상적인 왕족 귀족과 평민 사이의 빈부격차와는 성격이 좀 다른 부류였다.
그리고 이런 초창기의 경제 시스템은 그야말로 '신자유주의' 시장 만능 방임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극치였다. 오늘날과 같은 인권 관념이라든가 취약 계층 복지 같은 건 없었다. 돌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살벌했겠는지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쪼기 서양은 문화 배경이 배경이다 보니, 돈 많은 상류층들 중에도 교회 댕기는 신자가 대다수 주류였다. 그러나 이때 유럽의 기독교회들은 뭐 해외로 선교를 하기도 했지만 제국주의의 첨병 역할도 많이 했다. 그리고 자국 사회에서 하나님 사랑 다음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제대로 충실하지 못했다. 보다못해 영국에서 자선 냄비 이러면서 "구세군"이라는 교파가 괜히 생긴 게 아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의 문학 작품들을 보면 이런 인간성 상실 동심파괴 시대상이 적지 않게 반영돼 있다.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안데르센의 <성냥팔이 소녀>, 작가는 기억이 안 난다만 <플랜더스의 개> 말이다.
스크루지 꼰대가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롤>은 뭔가 옹고집전의 외국판 같기도 하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명작 소설도 이런 시국에서 교회가 사회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에서 만들어졌다. 저 때 자기 생일과 크리스마스를 극혐한 빈곤층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니 결국은 참다못해 마음 독하게 먹고 악한 쪽으로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 부자는 한없이 자기 배만 불리면서 더 부자가 되고, 로동자들은 평생 뼈빠지게 일해도 가난을 절대로 탈출하지 못하면서 부자들의 노예로 대대로 비참하게 살다 갈 거라고 말이다.

이런 현실은 로동자들끼리 단결해서 악에는 악으로 대응하고 싸우고 투쟁해야 바꿀 수 있댄다. 그래서 노조에 파업, 사보타주, 붉은 머리띠, 꽹과리 등 살벌한 구호와 방법론이 등장했다. 그러면서 “자본가들을 타도해서 부를 다같이 강제 분배하자, 사람이 먼저이고 로동자가 주인인 세상을 만들자, 능력만큼 벌고 필요한 만큼 쓰는 체제를 만들자” 같은 구호를 외쳤다.

공산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저런 걸 부추기고 추진하는 정치 단체를 흔히 '공산당'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근본 모순과 고뇌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년에 가까운 옛날에 기록된 성경의 전도서에도 나와 있고, 비슷한 시기에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도 똑같이 고민했었다. 싯다르타는 번뇌를 떨치고 혼자 열심히 수련해서 해탈이라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던 반면, 공산주의자는 계급 투쟁과 혁명을 통해 좀 더 현실적인(?) 돌파구를 뚫은 듯하다.

마르크스인지 레닌인지 이런 아저씨들이 이 바닥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이론적 근간(?)을 마련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미 인터내셔널가라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공산당 선언이라는 것도 만들어졌다.
현실 역사에서야 공산 혁명이 성공한 구소련과 그 주변 중국과 동유럽이 공산 진영으로 여겨지지만, 더 과거인 1871년엔 프랑스에서도 단 70일 남짓이지만 공산 혁명 정부가 집권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가 뭔가 혁명, 저항 이런 쪽으로 영국· 독일보다 더 쎈 정서가 있기 때문에 그렇지 싶다.;;

이 사람들은 모든 게 과격했다. 자본가 프롤레타리아들이 고수하던 삶의 방식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적폐로 몰아 척결하고 뜯어고치고 지워 버리려 했다.
종교색은 말할 것도 없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 심지어 1주일의 길이도 7일은 종교색이 느껴진다면서 바꿔 버렸다. 파리 코뮌은 10진법을 존중해서 한 주의 길이를 아예 10일로 바꿨고, 나중에 소련은 약수가 더 많은 8일로 바꾸려 했던 걸로 기억한다. =_=;; 이런 반골 기질이 있으니 나중에 중공은 그 보수적인 정서법을 다 뜯어고치고 간체자와 한어병음을 과감히 도입했다.

일본은 나라가 잘 살고 철저하게 자유 진영을 롤모델로 삼으면서 서구화 근대화를 잘 해서 그런지, 대놓고 공산화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은 반사회 혁명분자야 당연히 있었고, 그건 심지어 한반도니 만주니 하는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최 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1925)가 딱 그런 분위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공산주의 진영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거의 반세기 가까이 리즈 시절을 찍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이라는 악역이 패망해서 고꾸라졌고, 소련은 엄연히 전승국으로 예우받으며 국제 위상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이 영향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해방 직후에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 같은 소련 주변의 동유럽 국가들도 많이 공산화됐다.

그리고 소련의 반대편에서는 어쩌다 보니 미국.. 20세기에 서유럽을 제치고 승전국에다 세계 최강국으로 등극한 이 나라가 공산주의에 맞서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게 됐다. 2차 대전 추축국을 상대로는 총 쏘고 포 쏘면서 대놓고 싸웠는데, 공산 진영과는 대놓고 싸우지는 않는 대신 고삐 풀린 듯이 군비 경쟁 우주 개발 전쟁만 했다. 역사학자들은 이를 두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말을 만들어 붙였다.

아프리카라든가, 오세아니아, 남아메리카 같은 남반구 지역은 너무 멀어서 그런지 공산주의와의 직접적인 접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곳을 제3세계라고 부르나??
하지만 쿠바가 무슨 계기가 있는지 골수 반미 국가였고(카스트로??), 그 아래 중남미도 몇몇 친미 노선 국가를 제외하면 '체 게바라'가 어떻고 해방신학에 종속 이론이 어떻고 하는 게 반미는 물론이고 공산혁명 냄새가 좀 난다. 그쪽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그렇게 느껴진다.

아 물론 미국이 다 잘했다는 말은 아니다. 걔들도 분명 자기 국익대로 몰래 비열한 짓 삽질 X신짓을 한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남아메리카가 그 넓은 땅에 그 많은 농산물에 풍부한 자원이라는 잠재성 대비 그다지 잘살지 못하는 건.. 모든 걸 미국 탓만으로 돌릴 수는 없어 보인다. 뭔가 통치 체제나 이념, 개인의 가치관 세계관에 문제가 있긴 했다.

체 게바라는 골수 반미 반자본주의 혁명가였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 자본주의자들에 의해 공산주의 슈퍼스타처럼 이미지가 조작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엄청난 고인드립이 아닐 수 없다. =_=;; 마치 니콜라 테슬라가 아주 뛰어난 과학자 공학자였지만 훗날 음모론 오컬트계의 교주뻘 인물로 이미지가 조작된 것처럼 말이다.;;
저 장사꾼들은 돈만 된다면 정말 뭐든지 만들어 팔긴 하는가 보다. 하긴, 반미 시위 때 불태우는 용도의 성조기 내지, 성조기가 그려진 속옷· 걸레조차 다 미국에서 만들어서 판다고 하지 않는가? =_=;

우리나라, 남한, 대한민국이야 처음부터 할배의 영도력 덕분에 골수 미국 편에 붙어서 자유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그 반면, 우리나라를 대적하고 무너뜨리려 한 저 악의 무리들이 처음에 소련 편 공산주의를 밀었으니..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뼛속까지 반공을 밀어붙일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미국이나 일본에서 과격 좌익 시위를 단속하는 정도하고는 레벨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상이다. 세계사나 인문학 따위 알못인 본인이 그냥 주워 들은 기억만 주섬주섬 늘어놓아 보았다. =_=;;
글쎄, 계급 갈등 투쟁 덕분에 진짜 적폐를 청산하고, 근로자의 인권과 복지가 크게 향상된 긍정적인 결과물도 없지는 않았다. 그 이념이 '수정 자본주의'에 많이 반영되어 들어갔다. 이게 양심적인 업주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이뤄진 게 아니라 투쟁을 통해 이뤄졌다는 건 그쪽 편에 선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는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라”뿐만 아니라 야고보서에 “착취되고 빼돌려진 근로자 인건비가 울부짖는다, 부자들에게 화 있을지어다”도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기능은 약간 조금이 끝이었다. 이 혁명가 운동꾼들은 오로지 광기와 선동만 있을 뿐, 이성이 없었다. 본질적으로 그저 음해하고 까내리고 부수고 죽이고 파괴할 줄만 알지, 어려운 걸 만들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건 몰랐다.
걸핏하면 자기들끼리도 비판하고 '총괄'하고 '타도'하고.. 어제의 동지도 바로 스파이로 몰아서 고발하고 죽여 버리고..;; 총체적인 무질서와 팀킬에 빠졌다. 한 구악을 청산했다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대안은 내놓지 못하고 똑같은 짓을 하거나, 예전만도 못한 더 큰 신악을 만들어낼 뿐이었다.

저런 사고방식의 열매가 바로 소련의 대숙청, 중공 문화대혁명 홍위병과 대약진운동, 캄보디아 킬링필드 같은 것들이다.
쟤들은 옛날 문화재도 엄청 많이 때려부수고 박살내 버렸다. 중국의 경우, 오히려 장 제스가 타이완으로 도망가면서 싹싹 긁어간 문화재들이 문혁의 피바람을 피해서 살아남았을 정도이다. 인류가 20세기의 이런 참극으로부터 뭔가 교훈을 얻고, 다시는 저런 짓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나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추잡한 성추행이라든가 프락치 오인 린치 같은 사건이 당연히 있었다. 보고 배우고 하는 짓이 저런 것밖에 없는 애들이 도덕적으로 자신들의 타도 대상보다 우월할 리는 절대 만무했기 때문이다.
더 심각한 건 내로남불 위선이다. 남에게는 땀흘려 일해야 노동의 가치를 안다느니 헛소리를 지껄였지만, 공산당 고위 간부들은 절~~대로 자기 부를 남에게 분배하면서 자기 이념을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공산주의 사상'과 '공산주의자의 수법'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소신을 오래 전부터 갖고 있다.
가령,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것처럼 초대 교회 때 교인들이 모든 재산을 공유했던 것은 결과만 보자면 공산주의대로 행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체제 전복 선동을 한 건 아니었다.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공산주의자들이 동원하는 수법은 초대 교회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온통 비인간적이고 비열하고 추악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자들이 빨갱이 소리를 들어 온 주 이유이다.

물론, 공산주의자들만 그런 수법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군국주의 1당 독재, 통치자 우상화, 전체주의, 닥치고 숙청 같은 건 공산주의와 무관했던 구 일본 제국이나 나치 독일도 동원했었다. 프랑스 혁명 공포 정치도 통치자 1인 우상화만 없을 뿐, 조금 저런 분위기였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저런 군국주의 전체주의는 없어지고 최소한 주류에서는 완전히 밀려났으니 이제 저런 공산혁명 어쩌구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저런 짓을 하지 않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련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990년대 이후엔 북괴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공산권 국가들이 무너지거나 최소한 경제만은 개방했다. 세계는 다시는 저런 미친 혁명 실험을 하지 않고, 그냥 지금 같은 시장 경제에다가 세금으로 복지 보정만 하는 체제로 다들 수렴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경제를 개방했고 민주주의를 흉내만 낼 뿐, 중국과 러시아 같은 나라는 한국·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국과 일본도.. 저런 숨막히는 나라보다는 상황이 낫지만 20세기까지만 해도 과거의 상명하복 똥군기 문화의 여파로 인해 사회 분위기가 여전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게 많았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미국은 단순히 크고 땅 넓고 자원만 많은 나라가 아니라, 세계에 정교분리, 삼권분립, 자유 민주주의와 현대적인 인권 이념을 퍼뜨린 정말 위대한 나라인 것 같다. 캐나다나 호주 같은 평범한 영연방 국가로 그치지 않고, 덕분에 인구도 그런 나라보다 훨~씬 더 많아져 있다.

아무쪼록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고, 경제나 정치 쪽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감각을 가져야 할 것 같다. 산업혁명 초기에야 진짜로 근로자들의 처지가 너무 가혹했지만, 지금은 진짜 내로남불 귀족 노조를 더 비판해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부와 세금에는 똑같이 낙수효과가 있다는 걸 인지하고, 멀쩡한 역할 분담을 쓸데없는 계급 갈등으로 비화하는 이간질과 반기업 프레임 따위에 속지 말고.. 옛날에 실패가 진작에 입증된 실험을 또 하겠다고 덤비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징어 게임 '혁명적인 개X끼'가 얼마나 끔찍한 욕설인지가  얼추 이해가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4/02/09 08:35 2024/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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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천사

성경에 따르면 천사라는 존재가 있으며, 그 중 이름이 알려진 특정 천사로는 가브리엘과 미카엘이 있다.
가브리엘은 다니엘서 9장이라든가 누가복음 1장의 예를 볼 때, 진짜로 소식통 심부름꾼 역할인 듯하다. 그 반면, 미카엘은 유다서라든가 계시록 12장을 보아하니 전투를 하는 것 같다.
아~ 성경에도 동그라미 진행요원과 세모 진행요원이 구분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모는..?? 모르겠다. ^^

히 1:14에 따르면 천사는 인간을 섬기고 써빙하는 게 주 임무이다. 당연히 구원받은 인간 한정으로.
물론 시 8:5에 따르면 인간이 피지컬이나 스킬은 천사보다 약간 낮게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남녀 성별이 나뉘어 있고 번식 능력도 있는 반면.. 그건 천사에게는 없는 특성으로 보인다.
뭐, 그렇다고 해서 천사가 중성이나 아기, 소년인 건 아니다. 걔들은 그냥 젊은 청년, 남자 장정 형태이다.

  짐승 인간 천사
암수구분, 번식 O O (훗날 X로) X
각 개체의 불멸 X O O
구원 대상 X O X

근데 시편 8:5 인간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이 구절에 히브리어 원어가 원래는 하나님과 동일한 '엘로힘'이라고 한다. 헐.. 엘로힘은 신도 되고 하나님도 되고 심지어 천사도 되는 귀걸이 코걸이 같은 단어였단 말인가? 히브리어는 참 알 수 없는 언어인 것 같다.

2.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

성경엔 이름 차원에서 특별히 '하나님+사랑'이라는 의미가 들어간 사람이 좀 있다. 우리말로 치면 '신애'.. 좀 여자 이름처럼 되네?

  • 여디디야(삼하 12:25): 솔로몬 왕의 별칭으로, '여호와께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랜다.
  • 데오빌로(눅 1:3, 행 1:1): '누가'가 기록한 저 두 책의 서신자이다. theo+필레오..이니 어원을 분석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저 사람이 누군지, 실존하긴 했던 인물인지 참 의아하다.

그 밖에, 창세기 5장에서는 에녹이 갑자기 뜬금없이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게 나오고..
역대기상에서는 4:9-10의 뜬금없는 구절로 인해 '야베스의 축복'이라는 게 기독교계의 유행어처럼 등극했다.
야곱의 축복도 아니고 야베스는 무슨 인물이었는지, 성경에서는 무슨 의도로 그 사건이 기록되었는지 궁금해진다. 지난 10여 년 동안 본인은 교회에서 이와 관련된 설교나 강해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3. 성경에 나오는 목재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아니라 목재 내지 나무 그 자체 관점에서 성경에서 등장하는 나무로는 본인은 이런 걸 기억하고 있다.

  • 고펠나무: 노아의 방주를 만드는 데 쓰였다는 나무인데.. 거기서 딱 한 번만 등장하고 끝이다. 정확한 정체가 무엇인지 다른 단서가 없다.
  • 시팀나무: 출애굽기의 성막과 언약궤를 만들 때 쓰였다고 거듭 등장한다.
  • 레바논의 백향목: 얘가 그렇게도 품질 좋은 나무라고 명성이 자자했다. 솔로몬의 성전을 지을 때 쓰였다.
  • 로뎀나무: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도피할 때 묵었던 황야의 나무이다. 이 명칭은 히브리어 명칭이고, KJV 영어를 직역하면 향나무(juniper)이다. 비킹 계열에서는 싸리나무(broom)라고 옮겨져 있는 편이다.

4. 나는 곧 나예요

출 3:14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I am that I am이라는 계시를 내리신 것이 기록돼 있다. 함축적이고 번역하기 난해한 표현이다 보니 우리말 성경은 킹 계열도(흠정역) 개역성경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번역을 그대로 따르는 편이었고, 말보회 한킹이 그나마 "나는 곧 나, 나이신 분"이라는 번역을 새로 시도한 것 같다.
저기서 I AM이 그대로 명사로 쓰인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도 "내가 있느니라"라는 뜻으로 I am이 쓰였다. 그러니 이게 성경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표현인데..

한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느 허언 망상 사기꾼 범죄자의 “I am 신뢰예요” 개드립이 유행어로 나돌았다. 이에 대해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예수님의 칭호 I am을 사칭· 참칭했다면서 고까워하곤 했다.
I am은 예수님 칭호 참칭이고, I will은 사탄 마귀 루시퍼(사 14:12-14)의 결의와 연결된다는 게 흥미롭다. I가 들어가는 게 그다지 좋은 심상이 아니다.

5. 의인 시편

시편 37편은 그야말로 뼛속까지 권선징악 심상인 의인장이다. 악당들이 당장 잘나가는 걸 보고 시기하고 초조해하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선한 사람의 걸음을 정하고 그의 길을 기뻐해 주신다. 그런 사람은 넘어져도 완전히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평생을 지켜봤는데 의인의 자녀가 거지꼴로 사는 걸 본 적이 없다” 이런 얘기들로 가득하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잔뜩 보고 나서는 이 시편을 다시 보면서 머리속을 정화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런데, 37에서 숫자 배치를 뒤바꾼 시편 73편은 악인의 번영을 보고 너무 마음이 불편해지고 시험 들 뻔했다는 내용이다. 특히 73:2에서 “내 발은 거의 실족할 뻔했고 걸음이 미끄러질 뻔했다”는 말은 37:23-24 “의인의 걸음을 정한다, 그가 넘어져도 쓰러지지 않는다”와 딱 대응하는 것 같다. 37편과 73편이 개념적으로 상호 보완적이다.

6.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성경은 기적이 많이 기록돼 있다는 특성상, 요즘 시쳇말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에 해당하는 사건이 많이 들어있다. 특히 그 중에서 웃픈 사례가 뭐냐 하면.. 자기가 열씸히 기도해 놓고는 그 기도가 진짜로 덥석 응답된 걸 당사자가 파악하거나 믿지 못한 상황이다.

누가복음 1장 사가랴는 이것 때문에 일시적으로나마 말을 못 하게 되는 경징계(?)를 받았다. 사도행전 12장에서는 교회가 베드로를 위해서 열씸히 기도하고 있었는데 정작 “우와! 베드로 형제님 목소리예요!”라는 말에는 “너 미쳤구나”라고 반응했다.;;; 물론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우리라고 해서 그때 그 사람들의 믿음을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지는 않다.

7. 우상 숭배와 탐욕의 관계

구약 성경에서는 사무엘이 불순종 똥고집이 우상 숭배+마법과 같다고 말한 바 있다(삼상 15:23). 거기에다 신약에서는 탐욕이 우상 숭배라는 말도 있다(골 3:5).

유일신 사상이 가득한 성경의 관점에서 우상 숭배라는 건 아주 부정적인 심상이며 나쁜짓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그래도 탐욕이랑 우상 숭배가 영역 자체가 같지는 않아 보인다. 당장 십계명을 봐도 전자는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에 속하는 반면, 후자는 정반대 첫째나 둘째에 해당되니까 말이다.

허나, 그렇다고 탐욕과 우상 숭배가 완전 별개이냐 하면 또 그렇지만은 않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이방 우상 숭배자들을 보시라. 그들은 정말 진지하게 그리스/로마의 제우스/주피터를 일편단심으로 섬기고 그런 신을 예수 믿듯이 흠모하고 경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행 16:16 점 치는 소녀를 이용해서 돈 많이 벌던 아재들.
행 19:24 우상 형상을 팔아서 돈을 많이 벌던 은 세공업자.
이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건 자기 밥줄이 끊겼기 때문이지, 딱히 자기 종교 신앙이 부정당했기 때문이 아니다. 쟤들은 굳이 다이아나 상이 아니어도 예수 상이건 마리아 상이건.. 돈만 되면 뭐든지 만들었을 사람들이다.

즉, 그들의 진정한 신은 주피터 제우스 다이아나 따위가 아니라 그냥 돈이었다는 거다. 이는 동성애 게이들이 평생 한 남자하고만 사는 사람이 절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동성과의 아름다운 사랑은 무슨 개뿔..
물론 유대교 이슬람 골수 중에는 진짜로 돈이 아니라 특정 이념이나 종교에만 목숨 건 광신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세속적인 사람들에게는 탐욕이 우상 숭배인 게 아니라 역으로 우상 숭배도 얼마든지 탐욕과 접점이 있을 수 있어 보인다.

이는 신앙 생활 관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딤전 6:5가 말하는 이익이랑 경건(godliness) 사이의 관계가 헷갈려서는 더욱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8. 잘못된 양쪽 극단

요일 2:27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다 (기름 부음이 너희를 가르칠 꺼니까)"는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목사 무용론, 성경 교사 무용론 같은 황당한 낭설의 근거로 악용되는 구절이다. 그 말이 아니라니까.. -_-;;
그런데 반대로 목사 편에서도..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에 의해 마 10:19 "현장에서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지 말라~ 내가 그때 실시간으로 알려 주겠다" 라는 구절이 악용되는가 보다.

진지하게 성경 연구와 설교 준비를 하지 않고 강단에 올라가서 의식의 흐름대로 제멋대로 지껄여도 하나님 말씀이 선포된다고 말이다. 그 구절은 그 용도가 아니라는 거 알 만한 분이 왜 이러시나.. -_-;;
신자 쪽이나 목사 쪽이나 다 방종을 조장하는 잘못된 양 극단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그나저나 또 하나 생각나는 거. "놀아도 교회에서 노는 게 아예 나이트/빠에 가서 노는 게 낫다"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있다.
지나친 형식주의 율법주의 교조주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취지를 잊어버린 채 형식 지키는 것에만 목숨 거는..)
갈 곳 없이 방황하는 다음 세대 젊은이들의 눈높이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요지인 건 알겠다.

완전 100% 나쁘고 악한 생각은 아니라는 것에 동감한다. 하지만 이런 사고방식은 오남용되기도 아주 쉬우니, 매우 주의해서 신중하게 적용해야 할 것 같다. 저렇다고 해서 교회를 나이트/빠 같은 곳으로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이다. =_=

9. 열정 있는 마음

눅 24:18-24에서 소개된 "예루살렘 사람 중에 이거 모르는 놈은 간첩" 소식통은 말이다. 무슨 관공서 보고서나 뉴스 자료, 가십거리 신문 기사로는 정말 손색이 없다. 단 한 치의 거짓이나 왜곡이 없이 사건 팩트를 있는 그대로, 육하원칙대로 잘 정리했지 않은가?
하지만 바로 다음 25절, 주님으로부터 돌아온 반응은 꽤 심한 갈굼이었다. 왜 그랬을까? 예수님은 무슨 신문사 편집장이나 뉴스 보도국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니가 그 사건을 얼마나 잘 요약 정리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없어.
'이제 3일째가 됐는데 과연 어찌 될지..'라니? 말 하는 태도가 그게 뭐냐?
예수님의 부활을 왜 너와 무관한 남의 일인 것처럼 쓸데없이 객관적으로 이웃집 불구경 하듯이 서술하고 자빠졌냐? 성경 말씀에 대한 니 믿음은 도대체 어디 갔냐?"

이게 25와 26절에 담긴 주님의 심정이었지 싶다. 종의 병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백부장과는 반대 상황인 거다.

예수님이 부활 후에 엠마호 행 제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게..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고 나서 한참을 형들 눈물 콧물 다 빼고 나서 자신을 드러낸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우리는 정욕 때문에 불타는 게 아니라(고전 7:9) 말씀 읽는 감격으로 인해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으면 좋겠다. (눅 24:32)

Posted by 사무엘

2024/02/06 08:36 2024/02/06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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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관련이 없는 아이템들이긴 하지만, 그냥 한 글에다 한데 엮었다. ㄲㄲㄲㄲㄲㄲ

1. 사다리

성경의 창 28:12에 나오는 야곱의 꿈 말이다. 하늘에서 아래로 사다리가 하나 내려와서 천사들이 그걸 딛고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걸 묘사한 성화도 역사적으로 아주 많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과거에서 현대로 갈수록 “사다리가 아니고 계단이지 않을까?”로 바뀌어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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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490년경에 프랑스에서 그려졌다는 이 옛날 그림을 보자. 천사들이 손까지 기둥을 붙잡아야 할 정도로 (1) 직각에 가까운 경사의 사다리를 타고 오른다. 진짜 문자적인 사다리.. 무슨 성벽 타는 공성전을 치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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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중에는 손까지 붙잡지는 않고, 다락방 계단 같이 아주 가파른 (2) 계단 반 사다리 반이 등장한다.
더 나중에는 보다시피.. (3) 아예 희고 단단하고 경사도 훨씬 더 완만한 돌계단으로 바뀐다.
야곱이 꿈 속에서 실제로 본 장면은 (1)~(3) 중 어디에 가장 근접해 있을까?

이건.. 흔히 말하는 본문 계보에 따른 변개 이슈가 아니다. 그냥 옛날 성경과 현대 성경의 차이일 뿐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개역성경이고 킹 제임스고 뭐고 다 똑같이 사다리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중후반부터 창 28:12의 번역이 대놓고 ‘계단’이라고 바뀌기 시작했다.
ladder는 성경에서 저기 딱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구절의 용례를 비교해 볼 수 없다. 고펠나무가 노아의 홍수에서 딱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말에서는 사닥다리와 사다리 모두 표준어이다. 특히 개역성경이 이 구절에서 ‘사닥다리’를 썼고 개역개정에서도 같은 워딩을 유지하고 있다.
개역성경은 이것만 사닥다리이고, 에스겔서 등에서 운제(공정전용 이동형 사다리), 보루 같은 건 사다리라고 나름 구분을 해 놨다.

그나저나 저 1490년 그림은 사다리 주변에 아무 후광이 비치는 게 없어서 별로 간지도 안 나고, 결정적으로 사다리 꼭대기가 너무 낮다.. ㅡ,.ㅡ;; 그림을 너무 대충 그린 것 같다. ㅠㅠㅠㅠ
그래도 히브리어 원어로도 설마 계단과 사다리가 같은 단어는 아니겠지.. 계단이 아니니 처음에 옛날 번역도 사다리로 시작했던 게 아닐까 싶다.

야곱은 밤에 딱딱한 땅바닥에서 돌을 베고 자연 속 노숙을 했다. 나도 야곱처럼 살고 싶다~!!
이 창세기 28장의 야곱 이야기가 가사에 담겨 있는 드문 찬송가 중 하나가 바로..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다..! 1절이 아니라 2절과 그 이후의 가사이기 때문에 존재감이 좀 덜 느껴질 것이다. ^^

2. 물이 와인으로 변환된 기적

요한복음 2장에 기록된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 혹은 예수님이 물을 와인으로 변환하신 기적 말이다.
그때 기적적으로 자동 생성된 와인의 양은 얼마 정도였을까?

6절을 보면, KJV에 따르면 2~3 firkin 분량인 항아리가 6개가 현장에 있었다고 한다.
firkin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여기서 단 한 번밖에 나오지 않는 생소한 단어인데.. 1 firkin은 10갤런에 대응한댄다. 그래서 KJV 이후의 통상적인 영어 성경들은 20~30 갤런짜리 항아리 6개라고 표현하였다.

1 firkin, 10갤런은 38리터에 달하는 용량이다. 생수 담는 그 말통의 두 배가량인데..
한글 개역성경은 거리의 단위 mile은 5리라고 토착화 단위를 붙였으면서 저기서는 4~6말이라고 토착화를 하지 않은 것 같다. 마 5:41의 mile도 성경에서 단 한 번밖에 안 나오는데 말이다.

요 2:6에서는 firkin을 물통에다 대응시켰는지, ‘두세 통’이라고 번역했고 이걸 후대의 우리말 성경들이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같다. ‘통’을 단위로 보고, “2~3통짜리 항아리 6개”라고 번역하는 게 관행이 됐다.

말보회의 한글 킹 제임스는 의외로 이 관행을 깨고.. firkin의 원어를 밝혔다. “2~3메트레타짜리 물통 6개.” 즉, ‘통’은 원래 뜻인 용기, 그릇으로 사용했다. 국내의 우리말 성경 중에 요 2:6을 저렇게 번역한 성경은 한킹이 유일하다.
furlong을 ‘스타디온’이라고 원어를 밝혀 번역한 것과 동일한 정책을 취한 것이다. (계 21:16 등~) 흠정역은 furlong은 스타디온이지만 firkin은 원어를 밝히지 않았다.

요즘 말 많고 논란도 많은 표준역은?? 그쪽은 워낙 영어 직역만 고집했기 때문에 펄킨, 펄롱에다 파운드, 마일까지 몽땅 영어 도량형을 그대로 썼다. ㄲㄲㄲㄲㄲㄲ 제일 파격적이고 과격하다.

뭐, 한국어 토착화든 영어든 그리스 원어든.. 저 계산에 따르면, 가나의 혼인 잔치에 나오는 저 석재 물항아리 하나의 용량은 거의 100리터에 달한다.
예수님은 그 항아리 6개에 가득 담겼던 물을 몽땅 와인으로 변환하셨다.

600리터를.. 생각보다 양이 많다! 겨우 와인잔이나 유리병 몇 개 수준이 아니다!! 도대체 하객을 몇 명이나 초청해서 잔치를 얼마 동안이나 진행한 걸까? 오병이어처럼 수천 명은 아니더라도 100수십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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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서양 해적 영화에 나오는 허리 불룩한 나무 배럴이 용량이 개당 150~160리터였다고 한다. 그거 4개 분량이다.
그리고 요즘 석유 담는 용도로 쓰이는 철제 드럼통 용량이 개당 200리터에 가깝다고 한다. 그거 3개 분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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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의 혼인 잔치를 묘사한 옛 성화들 중에는 항아리가 너무 작게 묘사된 게 여럿 눈에 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고증을 무시한 결과물인 것 같다. =_=;;
오히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 끝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어째 구겨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항아리를 생각해야 하지 싶다.

  •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은 인간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다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요 2:5)
  • 그러고 보니 배럴(barrel)도 처음에는 150~160리터짜리 나무 술통이라는 뜻이었는데.. 지금은 200리터짜리 드럼통의 단위 명칭으로 슬며시 바뀌었다. (석유 10만 배럴..) 우리말 성경 요 2:6에 나오는 '통'도 그런 의미 확장을 의도한 건지는 모르겠다. ^^

3. 동방박사

마태복음에 따르면, 먼 옛날 예수님이 탄생하던 당시에 일명 '동방박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별을 보고는 예수님이 태어난 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성경에는 그 동방박사의 인원수나 이름 같은 건 전혀 안 나온다. 오히려 10수 명 이상 무리를 지어서 왔을 가능성이 높은데 굳이 3명에 이름까지 거론된 건 아무래도 다른 종교적인 전통이나 설화가 첨가됐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동방박사들이 바친 예물이 세 종류이긴 했다. 그것 때문에 인원수까지 3이었을 거라는 편견이 생긴 것이지 싶다.

그리고.. 우리말 성경이 ‘박사’라고 해 놓으니 본문을 읽는 독자들은 저 사람들이 꼭.. 무슨 학위를 소지한 학자 글쟁이였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아니고.. 저기서는 지식보다는 지혜.. wise men 지혜자가 더 정확한 뉘앙스이다.
시쳇말 ‘현타’라고 할 때 떠올리는 그 ‘현자’.. 딱 그걸 생각하면 된다. 현자타임!!!
나중에 예수님이 어린 시절에 회당에서 진짜 율법 ‘박사’들과 논쟁하고 키배를 떴었다. 눅 2:46을 같이 보시길 바란다. ㅋ

Posted by 사무엘

2024/02/03 19:35 2024/02/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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