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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짜 뉴스

인터넷과 SNS라는 게 온갖 날조 주작 가짜 뉴스의 온상이라는 비판과 성토가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절반 이하만 맞는 말인 듯하다.
"한국은 UN 지정 물 부족 국가", "일제가 석굴암을 훼손했다", 일제가 박은 쇠말뚝, 아베 노부유키의 유언(???), "선풍기 틀어 놓고 자면 죽는다", "김 민지 조폐공사 사장 딸 이야기" 등등등..

인터넷과 SNS가 없던 시절.. 통신 불편하고, "서울 간 놈과 서울 안 간 놈이 싸우면 안 간 놈이 이길" 확률이 더 높던 시절이야말로 가짜 뉴스, 루머, 낭설, 괴담, 유언비어, 도시전설들이 더 많이 나돌았다. 검증을 하기가 극도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터넷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게 아니다. 이건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닌 것과 거의 같은 맥락이다.
인터넷은 가짜 뉴스 주작이 빠르게 퍼지긴 하지만 그래도 반박되고 바로잡히는 것도 금방 되는 편이다. 그 대신 굉장히 저렴하고 간편하게, 공평하게 인류의 집단지성에 접근할 수도 있다. 정보력만 뛰어나다면 말이다.

"예수님 부활이 사실인가?" 이런 걸 위키나 네이버 지식인에서 찾는 건 좀 난감할 것이다. 그러나 "아폴로 우주선 달 착륙이 사실인가"를 확인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다.

2. 사진과 영상의 화질

옛날에는 뿌연 흑백 사진과 흑백 영상이 더 옛날 기록의 특징이었는데.. 이제는 시퍼런 컬러 사진과 컬러 영상도 3, 40년 가까이 전의 옛날 기록이 되어 간다. 이게 정말 어색하게 느껴지고 문화 충격으로 다가온다.
단지, 옛날 껀 해상도가 낮고 jpeg artifact가 존재하며, 특히 영상은 종횡비가 지금 같은 와이드가 아니었을 뿐이다.

차라리 아주 옛날 영화 필름은 복원을 잘 하면 1980년대의 것도 2K니 4K급으로 리마스터링이 된다. 하지만 화질이 제일 안 좋은 채로 굳어져 버린 건 1990년대의 '비디오' 영상인 것 같다. 이건 정량적인 방법으로 리마스터링이 불가능하다.;; 아날로그 스타일의 노이즈와 화질 열화는 요즘 세대가 알지 못하는 정말 인상적인 현상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AI가 출동하면 어떨까..??
옛날에는 "실종된 이 아동이 만약 지금 살아 있다면 이런 외모일 것" 이런 기술이 가끔 무슨 대학원 연구소나 스타트업 기업에서 깜짝쇼로나 선보이던 수준이었다. 신 윤복 화가의 풍속화를 '애니메이션'화해서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도 1990년대 최첨단 CG 기술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더 나아가서 개나 소나 옛날 흑백 영상을 컬러화하고 저화질 영상을 거뜬히 리마스터링하고 있다. 이건 소실된 정보를 복원한 게 아니라, AI를 토대로 재구성 각색해서 넣은 것이다. 기술적으로 단순히 고종/순종 어차를 복원해서 때 빼고 광 낸 수준이 아니라, 시발 자동차의 레플리카를 새로 만든 것에 가깝다.
이런 게 쌍팔년도를 거쳐서 2020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기술의 혜택이라 하겠다.

자동차 안, 건물 안, 길거리 곳곳에서 고화질 올컬러 CCTV와 블랙박스 카메라가 넘쳐나는 이 시국에...
난 집 현관 비디오폰의 영상이 컬러인 것 실물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다.. >_< 새로 지어진 집으로 거주지가 크게 바뀔 기회가 별로 없었던 듯..

3. 스마트폰

(1) 스마트폰 때문에 공중전화는 말할 것도 없고 재래식 건물 유선전화도 갈수록 없어지고 회선이 줄어들고 있다.
그래도 송수화기에 꼬불꼬불 케이블 달린 재래식 전화기의 외형 자체가 깡그리 없어진 건 아니다. 기업 내부에서 쓰는 인터폰에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게 호락호락 없어지지는 않을 듯하다. CCTV가 폐쇄회로 영상이라면 인터폰은 폐쇄회로 통신에 대응할 것이다.

(2) 진짜로 영영 없어진 건.. 인류 역사상 전화기의 평균 싸이즈가 가장 작았던 시절.. 2000년대 초중반의 피처폰/폴더폰이지 싶다.
그땐 기기마다 충전 단자가 호환이 안 돼서 불편하긴 했다만.. 그래도 배터리도 왕창 오래 갔다. 한번 충전하면 2~3일은 아무 걱정 없었다. 통화 안 하고 그냥 대기만 시켜 놓으면.. 본인의 경험 기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가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_-;;

(3) 아 그런데, 요즘은 삼성에서 접어서 크기를 더 줄일 수 있는 엄청난 스마트폰을 내놓으면서 앞의 (2)와 같은 편견도 어느 정도 뒤바꿔 놓았다.
그 반면, 펜이 달려 있는 '노트' 계열 스마트폰은 유행이 지났는지 단종되었다.

(4) 3년 반 가까이 사용해 온 아이폰이 언제부턴가 짹을 연결해도 충전이 도무지 되지 않아서 수리를 받았는데.. 세상에나, 단자 안에 먼지가 한 웅큼 껴 있었다. 그걸 청소하니 인식이 다시 거짓말처럼 잘 되기 시작했다.
전자 기기의 먼지 청소는 옛날 볼 마우스 내부의 먼지 청소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먼지가 이렇게 문제이면 짹은 뚜껑 같은 게 둬서 충전기를 꽂지 않았을 때는 밀봉해서 먼지가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배터리는 완전히 밀봉해서 함부로 분리를 못 하게 만들어 놓고는 이건 참.

(5) 스마트폰을 쓰다 보면.. 카톡, SNS, 은행 앱, 갤러리 등.. 즐겨 쓰는 앱이 정해져 있다. 깔려 있는 모든 앱을 골고루 쓰는 게 아니다.
그러니 실제로 쓰는 앱만 빈도에 따라 한 화면에 자동으로 분류해 주는 기능이 좀 있으면 좋겠다.
옛날에 Windows XP 시절에 잠깐 있었던 '바탕 화면 정리' 마법사와 개념적으로 비슷한 기능인데.. 일단 내가 써 본 폰에서 이런 걸 자동으로 해 주는 건 딱히 못 봤다. 그냥 수동으로 앱들을 한 화면에다 정리를..;;
더구나 스마트폰은 PC 화면과 달리 별도의 메뉴 같은 게 없이 그냥 바탕 화면을 찍는 것만으로 앱을 실행하니, 바탕 화면이 좀 더 능동적으로 optimize가 됐으면 좋겠다.

(6) 그리고 스마트폰은 PC와 달리 영문의 입력도 IME가 개입하는 게 가능하며, 실제로 온갖 자동 완성과 자동 교정 기능들이 개입한다. 그런데 가끔은 오타가 아니고 진짜로 내가 입력하는 단어나 이니셜을 그대로 입력하고 싶은데 입력기가 선택할 여지를 안 주고 오교정한 단어를 그대로 내보내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PC라면 Ctrl+Z를 눌러서 MS Word 같은 앱의 각종 자동 고침 동작을 취소할 수 있는데 폰은 그렇지 않고 오교정을 철회하는 게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게 불편하다.

4. 그 밖에

(1) 개인적으로는 무선 키보드(+ 무선 마우스)가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싫고 마음에 안 든다. 건전지를 번거롭게 교체해야 하는 데다, 오동작 반복 입력 현상이 너무 잦다. 이것도 무슨 전자파인지 간섭 현상 때문에 발생하는 거라고 하는데, 해결됐으면 좋겠다.

(2) 옛날에는 신용카드가 더 딱딱하고 번호도 양각으로 툭 튀어나게 새겨져 있었는데, 요즘 발급되는 카드는 다 매끈한 평면 재질이다. 그런데 내 경험상 이런 카드는 단말기에서 인식이 잘 안 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꽂아서 인식이 안 돼서 옛날처럼 다시 긁어야 한다. 이런 건 왜 발생하는 차이점인지 모르겠다.
하긴, USB 메모리도 단자 부분이 튼튼한 금속인 게 있고, 그렇지 않고 가녀린 플라스틱인 게 있는데.. 전자가 훨씬 더 튼튼하고 오래 가고 인식이 더 잘 된다. 후자는 좀 싸구려인 것 같다.

(3) 요즘은 매일 아침 11시 반에 우한 폐렴 확진자이든 자연재해이든, 폭염 주의이든, 실종자 안내이든 뭐든 무조건 오는 것 같다. 재난 문자는 지진이나 화산 폭발, 전쟁, 사변, 공습경보처럼 진짜로 심각한 상황에만 좀 왔으면 좋겠다.
국내에서 이런 게 최초로 오기 시작한 계기가 지난 2016년쯤인가 경주 지진이었지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13 19:35 2023/02/1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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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실수한 이유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라 일컬어지던 베드로의 인생일대 흑역사가 기록돼 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나 베드로는 주님을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님하와 같이 죽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해 놓고는..
정작 예수님이 배반당하고 붙잡히시던 타이밍엔 갑자기 사람이 바뀌었는지,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해 버린 사건 말이다.

게다가 부인할 때 심지어 저주하며 맹세했다고.. “아 ㅆㅂ, 내가 저 사람을 본 적이라도 있다면 손에 장을 지지겠다니까? 성을 간다! 내가 할복이라도 해야 내 말 믿어 줄 거야?” 급의 극언까지 불사했다고 성경은 진술한다.

이건 인간의 멘탈의 한계를 너무나 강렬하게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는 저렇게 될 수 있다. 그러니 "꼴 좋다 졸장부 찌질이 등신"이라는 비난보다는 동정과 공감의 시각이 더 강한 편이다.
"평소에 허세 똥군기만 잔뜩 부리던 녀석일수록 정작 실전에서는 총소리만 나도 혼비백산해서 달아날 거다. 천하의 베드로조차 저랬는데 하물며 너 같은 쪼렙 X밥은?"과 같은 패턴으로 아주 즐겨 거론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설득력 있는 다른 시각도 있다. 베드로는 천성이 저돌적이며, 저 정도로 찌질한 겁쟁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호언장담 맹세 자체는 빈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적 진영의 똘마니에게 용감하게 검을 휘둘러서 귀 한쪽을 절단하기까지 했다. (요 18:10)
예수님이 베드로를 저지하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로마 병정들을 그렇게 온몸으로 저지하다가 혼자 또는 동지 몇 명과 함께 장렬히 산화하여 열사의 길을 갈 수도 있었다..!

허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선의의 대응에 전혀 호응하지 않고 오히려 그를 뜯어말리셨다. “야, 내가 어디 무력이 부족해서 잡혀 가는 줄 아니? 지금은 성경 기록이 성취되고 있는 순간 아니냐? 너나 정신 바짝 차리고 처신 잘 하라고..”
그리고 그분은 베드로를 말리는 걸로도 모자라서 공격을 받아 귀가 짤린 그 똘마니를 도로 치료까지 해 주셨다! (눅 22:51)

이러니 베드로는 예수님의 언행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급 ‘시무룩~’ 무기력 모드가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는 모세의 소싯적 일화가 떠오른다. 자기는 나름 동족을 위한답시고 어느 노예 감독을 몰래 죽여서 없애 줬는데, 동족은 그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다음날 “허 참, 당신은 노예 감독 다음으로는 우리도 때려죽일 거야?”라고 모세에게 따진 것이다. 그러니 모세는 급 당황하고 멘붕하여 이집트를 떠나서 도망치게 된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최악의 취약 상태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당부처럼 딱히 믿음의 강건을 기도하며 간구하지 않았다. 그러면 안전한 곳으로 멀리 멀리 도망이라도 쳤느냐 하면 그리하지도 않고, 위험한 적진 내부를 혼자 계속 맴돌면서 염탐을 했다.

그러던 와중에 “어? 저 작자도 예수랑 한 패였어요! 내가 분명히 봤어요!” 이런 말이 들리니 허를 완벽하게 제대로 찔린 것이다. 갑자기 겁에 사로잡혔는지, 멘탈이 나갔는지, 아니면 고의로 삐딱서니를 타고 싶었는지.. 이때 베드로는 평소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태도로 돌변하여 예수님을 거듭해서 부인하게 됐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여 본인이 베드로의 심경 변화 과정을 추측해 보자면 이렇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그 정도로 단순무식하게 비겁한 허세 겁쟁이는 아니었을 수 있다.
설마.. 의기탱천해 있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괜히 쿠사리를 먹여서 의욕을 꺾는 바람에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겠는가?? 당연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보기에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제대로 믿지도 못한 채, 내면의 두려움을 그저 알량한 혈과 육과 객기로 찍어누르고만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그분은 베드로의 본질적인 상태를 간파하고서 그러지 말라고, 영에 속한 싸움에 대비하라고 당부하셨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기에서 실패하고 넘어진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 용감하게 물 위를 걷기 시작했는데 '어어..' 딴 생각을 하다가 불안해지고 물에 빠져 버렸던 것처럼 말이다.

요 11의 "예수께서 우시니라"는 단순히 인간적인 감정이나 동정심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 것이다(창 50에서 요셉이 운 이유도 같이 참고를..).
그것처럼 베드로의 흑역사에도 당장 눈에 보이는 예수님의 정적들에 대한 두려움만이 기여한 것이 아니었다. 이는 인간이 어디에서 무너질 수 있는지, 신앙생활이 단순 사회 운동이나 정치적인 투쟁과는 무엇이 다른지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남을 죽이는 의사 투사든, 자기를 죽이는 열사든 무엇이건 말이다.

그나저나 예수님이 체포되던 당시에 제자들이 모두 성경을 잘 알고 성령 충만하게 FM대로 대처했다면 어찌 됐을까?
“스승님을 잡아갈 거면 우리도 다같이 잡아 가시오! / 우리부터 먼저 죽이시오~” 이렇게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양 옆에 들러리 도적 대신에 베드로와 요한 같은 제자가 같이 달리게 됐을 수도 있다.

혹은 악의 무리들이 예수님만 잡아들이고 제자들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체포됐을 때처럼 골방에서 열심히 기도라도 했을 것이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꾸지람을 듣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지 싶다.
뭐, 다~ '만약에 그랬다면?' 같은 낭설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고 보니 베드로뿐만 아니라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실컷 배반하고 나서는 어떤 계기로 마음이 또 바뀐 걸까? 뭔 바람이 들어서 뒤늦게 돈을 반환하고 난리를 치다가 자살을 했겠는지도 적지 않게 의문이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23/02/09 08:35 2023/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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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은사주의에 대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 형태와 위상이 비교적 명확한 아버지와 아들 말고 성령(..!!)은 존재감이 제일 없고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가 까다로운 분이다. 그래서 번역도 성령 이전의 초창기엔 성신, 성숨(..!!) 등 난립하는 편이었다.

'신'자가 들어간 번역은 옛날 한글 개역성경에 ‘하나님의 신, 신령과 진정’ 같은 표현에서 남아 있다. 개역개정에서는 바뀌었지만..
성경에서 '신들'(gods)은 하나님 자신은 아니면서 인간보다는 능력이 우월한 천사, 그룹 등 다른 영적 존재에 대한 총칭으로도 쓰인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가리키는 명칭에 '신'자가 또 들어기는 좀 난감해지는 구석이 있다. ㄲㄲㄲㄲ

다음으로 '숨'은 웬 말인가 싶은데 Spirit 말고 Holy Ghost의 번역을 말한다. 영어 성경에서 ghost는 '숨지다/숨을 거두다'를 뜻하는 yield/give up the ghost 아니면 Holy Ghost.. 딱 두 용례에서밖에 쓰이지 않았다. 그러니 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마치 testament를 '유언'이라고 번역하는 것 같은 실험적인 시도인 셈이다.

물 위를 걸어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이 겁에 떨며 한 말은 "앗.. 영이다(spirit)!! ㄷㄷㄷ"였다. 그걸 보고 흐물흐물 동양 귀신이나 서양 유령(ghost??)을 떠올렸다는 워딩은 현대에 와서야 등장한 것이다.

일부 이단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듯이 성령님은 인격적인 존재라고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냥 무슨 기, 에너지, 버프 아이템인 것처럼 생각한다.
물론 성경에 그런 것 같은 묘사가 있긴 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자 사울이나 삼손 같은 사람이 초인으로 바뀌었다. 신약에서야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자 온갖 이적이 터졌다. 하지만 그게 그림의 전부가 아니다.

본인이 아는 성령은 이 시대엔 예수 믿고 구원받은 신자에게 임한다. 그걸 성경 용어로는 '성령 침례'(요 1:33, 행 1:5)라고 부른다. 침례 시술사(!!) 요한이 마르고 닳도록 강조한 게 이것이었다. "나는 맛보기로 이렇게 물을 끼얹는 침례를 주는데, 나 뒤에 오실 분은 니들을 성령으로 침례를 주거나 불로 침례를 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건 아주 좋은 일이다. (눅 11:13, 요 20:22)

한번 거주한 성령님은 우리를 아주 버리고 떠나시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양심을 통해 느껴지는 성령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제멋대로 죄 짓고 육신적으로 살면 약해지고 식고 역사하지 못하게 된다.
구원받은 신자는 성령 강림을 매번 간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령 충만은 수시로 간구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건 성경 교리 논란까지 일으키는 주제이긴 하다만..
성령님은 초대 교회가 태동한 직후에 잠시 예외적으로 허락하셨던 초자연적 이적을 지금까지 매번 또 주시지는 않는다. 그래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기적이 그렇게 끊임없이 흔하게 발생한다면 그건 기적이라고 불릴 수 없을 것이다.

그때야 교회라는 게 갓 태어났고 신약 성경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사도들이 유대인들 앞에서 한번 더 예수님을 증언하고 믿을 기회를 주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표적이 필요했다. 하나님이 바벨 탑 앞에서 인간들의 언어를 헤집어 놓으셨던 것과 반대로, 복음이 세계로 퍼져 나가라고 언어 장벽을 잠시 없애 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기적이 필요한 예외적인 사유가 없어지고 나면 하나님 역시 기적을 중단하시고 사람들을 평범한 일반적인 여건에다 두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뒤부터 만나의 공급이 끝났듯이 말이다.
그 뒤에는 기적적인 병 고침이나 직통 계시 같은 건.. 정말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 처한 예외적인 사람 또는 아주 특수한 기도 응답이 아니면 일반적으로는 없다. 가능성이 0은 아니지만, 있더라도 개인의 간증 수준일 뿐,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난다는 보장이 없다. 교리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사도들의 이적 표적을 재현한다는 사람들은 재현을 정확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남이 알아듣는 외국어를 구사하는 것도 아니고, 막 16:17-18이 말하는 것처럼 독극물(poison)을 먹거나 독사(venom)에게 물려도 괜찮다거나 하지도 않다.

진짜로 옛날 사도들처럼 병 고치는 기적이 행해진다면, 지금 우리처럼 병원 치료와 기도를 병행한다거나.. 하나님께서 기도를 거절로 응답하셔도 감사.. 이렇게 어정쩡한(?) 케바케 같은 게 없는 게 정상이다. 특히 환자가 믿음이 부족해서 병이 안 고쳐지네 같은 개소리 구라 야바위 따위 없다!!

환자가 신자건 불신자건, 사도가 손만 얹으면 테란 메딕 실사판처럼 heal이나 restore가 짠~ 일어났다.
그러니 나더러 성령님의 사역을 감히 부정하네, 성령을 모독/훼방하네 그런 식으로 따지고 대들 필요 없다. 일단 성령님의 사역대로, 계약서대로 100% 똑같이 하기는 하고서 내게 태클 거시길.. 마가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이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고 고마운지 모른다.

지금 이 시대에 사도들의 표적을 재현하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일반인들이 그렇게 직싸게 고생하며 공부해서 의대를 갈 필요가 없고, 대학 병원 중환자실이나 암 병동 따위가 없어도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진짜 있으면 전국의 병원부터 순회해야 되지, 무슨 부흥회 따위를 하고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_- 아무튼..

기독교계에서 "우리도 뜨겁던 초대 교회 정신으로 돌아가자~!" 이런 거 강조하다가 "성령님이여 오소서, 불 같이 뜨겁게 임하소서"가 와전되어 "불 받아라~!!"가 된 걸까..?? 이런 트렌드가 언제 무슨 계기로 들어온 건지 잘 모르겠다.

부흥회(?)라는 건 내 경험에 비춰 풀이하자면, 일반적인 설교나 성경 공부 모임보다 새신자 초청 복음 전도나 성령 간구(?)의 비중이 더 큰 집회이다.
그런 곳에서 더 즐겨 불리는 찬송가도 있다. 외국곡인 "불길 같은 주 성령" (...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이라든가,
국산곡인 "참참참 피 흘리신" ... (성령의 불길 성령불이야)

아~ 참 2~30년 전 추억 돋는다. 템포 올려 가면서 여러 번 반복해서 박수 치며 부르면 분위기가 진짜 뜨거워진다. =_=;; ㅋㅋㅋ
그리고 고 형원 "부흥"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도.. 얘는 뽕짝 느낌은 위의 곡들보다 좀 덜한 것 같다.

이런 곡들의 가사에는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묘사가 있다. 불에 그렇게도 집착한다는 거.. 그 근거가 무엇일까?
일단 행 2:3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묘사가 원조가 아닐까 한다. "또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들이 그들에게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앉더라." (흠정역) 개역성경 계열의 워딩도 이와 그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흔한 통념과 달리, 그래서 정확하게 무슨 물체가 임했다는 건지 이 구절의 묘사는 의외로 분명하지가 않다.
오히려 통사 구조상으로는 불꽃처럼 낼름 갈라진 '혀', 단순히 '혀'에 가깝다. 불은 그저 비유 대상일 뿐이다. cloven tongues like as of fire.. 꽃처럼 아름답다는 말이 니가 진짜 문자적으로 식물 꽃이라는 얘기가 아니듯이 말이다.

이 장면을 게임 아이템이나 쿵 퓨리 각성 모습을 떠올리면서 최대한 불에 가깝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번갯불 같은 게 번쩍 하더니 버프 효과가 남았다.."이다. 본인은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믿지 않지만, 저 혀가 곱게 머리 위에 앉은 거야말로 세례에 가까운 묘사인 것 같다.
저 행 2:3만 읽어서는 무슨 거대한 화염이 사람을 삼키고 감싸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구약 엘리야의 갈멜 산 대결이나 불 병거 승천과 헷갈린 것으로 보인다. -_-;; 아니면 페르시아의 왕자 2에서 불 먹은 왕자 모습을 떠올렸거나..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순절 구절이 아니면, 설마 복음서에 나오는 "성령 침례와 불 침례"를 짬뽕 시킨 걸까? 그건 제발 아니기를 개인적으로 바란다.
성령 침례와 불 침례는.. 생명의 부활과 정죄의 부활만큼이나 서로 극과 극으로 다르다. 불 침례는 형벌이며, 받아서는 절대로 안 되는 침례이다. 바로 다음 구절에서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리라" (마 3:12) 처럼 대구 대조를 하고 있지 않는가?

겨자씨만 한 믿음이 긍정적인 심상이라고 해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돼서 공중의 새들이 앉았다"가 긍정적인 심상일 수는 없다. 그것처럼 "불의 혀처럼 갈라진 것이 싹 앉았다" 이런 간접적인 묘사가 어쩌다가 "성령의 불 받아라~!"로 바뀌었는지 나로서는 성경만으로는 상상이 잘 안 된다.

아, 뜨거운 체험과 기분 각성이 가끔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 생활에서 그게 '주 main'이 돼서는 안 될 것이다.
뜨거운 체험을 하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그냥 사우나에 들어가면 된다. 방언 받고 희열을 체험하고 싶으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철도교를 믿어도 된다. 겨우 그런 것만 하기 위해서 무려 성경을 믿고 예수 믿을 필요까지는 없다.

진짜 성령이 임해서 충만해지면 무슨 병 고침 쪽의 기적 이적보다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처럼 평범한 자기 자아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나오고 예수님의 성품이 나오지 싶다. 이런 게 이적이다.
"나를 강하게 하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도 1차적인 의미는 저런 걸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반면, 그렇게 불타는 체험을 하고 입이 자동으로 움직이고 직통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바탕 눈물 콧물 빼고 나서
길거리에서 신들린 듯이 전도지 뿌리고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는가? 감정적으로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했는가?
갑자기 예수님의 성품이 행동으로 나오기 시작했는가? 세상적인 유흥과 쾌락을 탐닉하던 습성이 바뀌고 진짜 성령 충만해졌는가...???
내가 아는 한, 아무것도 없다..;;;;; 열매로 그들을 알 수 있다. 저런 건 진짜 성령으로부터 유래된 표적이 아니다.

아무쪼록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진짜로 성령 충만한 게 뭔지를 많이 잘 보여야 할 것이다.
결정적으로 성령 충만을 간구하는 찬송가는 너무 뽕짝보다는 "빈 들에 마른 풀 같이", "내가 매일 기쁘게 순례의 길 행함은" 같은 정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나 싶다.

그런데 실로암은 딱히 성령 장르의 가사가 아니고 곡이 뽕짝 스타일도 아닌데 어째 어지간한 은사주의 부흥회 이상으로 군대 교회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는지.. 얘는 멜로디에 무슨 마성이 들어있는지 이 역시 개인적인 미스터리이다. "왼발! 왼발! GOP! 훈련은 전투다 각개전투!" 아마 작곡자가 보면 까무러치지 싶다.;;

말이 나왔으니.. 찬송가 중에서 부르기가 좀 조심스러워지는 장르들을 좀 정리하고 글을 맺겠다.

  • 성탄: 아기 예수 묘사는 교리적으로 큰 영양가가 없음. 휴..
  • 성령: 성령의 불로 우리를 태우소서ㅠㅠㅠㅠㅠ
  • 열심과 헌신: 행위 구원이 들어갈 수 있음
  • 선교: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 나라 이뤄 간다ㄲㄲㄲㄲㄲ

이들 장르 자체가 잘못된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라. 하지만 이런 장르는 가사에 누룩이 들어있을 가능성이 내 경험상 높다. 더구나 영어 원래 가사는 그렇지 않았는데 번역이 이상하게 되는 편이다.

성령이야 이 글에서 많이 다뤘으니 더 언급을 생략하겠다. 그런데 다음으로 후천년· 무천년주의에 입각한 선교 이념도 참 난감하다. 하나님 나라 이루고 확장해 간다고 좋은 뜻으로 말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는가..?? =_=;;
하긴, 성경도 다 소실되고 훼손된 걸 학자들이 '불쌍한 하나님을 위해서' 열~~심히 복원하고 복구하고 있는데, 인간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복음화하고 하나님 나라 확장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하나님 나라 확장한다는 발상과 제일 비슷하게 세계에 복음이 확 전파됐던 때가..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였다.
뭐, 그 덕분에 한반도에도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건 "일면" 고마운 일이지만.. 이때는 여전히 우생학이니 인종차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주의의 끝은 세계대전 생지옥이었고 말이다. 하나님 나라는 개뿔..

복음 전파가 잘못됐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서 하나님 왕국이 이뤄지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두 눈을 직시하고 역사를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30 08:35 2023/01/3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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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일찬송가, 새찬송가, 복음찬송가, 영광을 주께 등...
뭔가 보편적인 방식으로 선곡하고 편찬된 찬송가라면 아무 거나 가져와도 작사자 색인을 보면 '패니 크로스비'(1820-1915)라는 사람의 곡이 최상위급으로 많이 수록돼 있다.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blessed assurance), "예수께로 가면 나는 기뻐요" 등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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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패니 크로스비는 인류 역사상 찬송시를 제일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여겨진다. 무려 8000개에 달하며, 문헌에 따라서는 9000개에 달한다고도  한다.
참고로, 2등은 6500여 편 남짓인 찰스 웨슬리(만 입이 내게 있으면, 주 보혈로 날 구해 준...)이다.. ㄲㄲㄲㄲㄲ
그리고 솔로몬의 문학 업적이 잠언 3000개, 노래 1005편이었다고 성경에 쓰여 있음을 생각해 보자. (왕상 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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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해야 평생에 걸쳐 동일한 주제만으로 시를 8000개가 넘게 쓸 수 있을까?
그냥 1년 365일 24시간 맨날 예수 생각만 하면서 요즘으로 치면.. 트위터/페북에 뻘글 올리는 그 빈도로 찬송시를 썼다고 생각하면 된다.

저분은 우리 같은 사람과는 세상을 인지하고 인생을 사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맨날 아침에 일어나고 하늘을 보면서도, 비구름을 보면서도, 정원의 호박밭 호박꽃을 보면서도 1순위로 늘 창조주 하나님 예수님 생각을 하고 지냈다는 뜻이다. 아~~ 아니지 저 사람은 맹인이었잖아;;; ㅠㅠㅠ

저분은 각종 찬송가나 시집에 자기 이름만 너무 많이 뜨는 게 부담스러워서 거의 100개에 달하는 가명 필명을 돌려가며 쓰면서 찬송시를 많이 발표했다고 한다.
가령, "참 즐거운 노래를 늘 높이 불러서"(원제: 노래하라, 즐거운 순례자여)는 작사자가 오랫동안 C. M. Wilson이라고 기재되었지만, 현재는 이것도 이분의 가사라는 것이 다 알려져 있다.

3.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사자인 존 뉴턴은 에서 "한때 내가 눈 멀었지만 지금은 본다 was blind, but now I see"라고 가사를 썼다. 이건 뭐 영적인 안목 얘기겠지..

그런데 패니 크로스비는.. 레알 맹인이었다.
선천성 기형이 아니라 의료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생후 몇 주 만에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었다. 그래서 평생 앞을 못 보는 맹인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는 어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눈 멀었어도 행복하고, 오히려 눈 멀어서 더 행복하다. 앞으로 하늘나라 가서 눈을 뜨면 사랑하는 예수님 얼굴을 제일 먼저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무슨 자학개그로 "안 본 눈 삽니다" 개드립이 유행인데, 이분은 제일 결정적인 순간을 위해 "아무것도 안/못 본 눈"을 천성적으로 보유한 셈이다.
영문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저 말은 크로스비 여사가 아직 살아 있던 1900년에 미국에서 출판된 주일학교 교재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영화 <아저씨> 중에 나오는 대사 "걔(소미)가 천당으로 엄마 찾으러 갔어. 근데, 눈깔이 없어서 못 찾아."는 성경 교리의 관점에서는 사실이 아니다.

4.
패니 크로스비는 영국의 간호사 겸 보건 행정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과 완전 동갑 동시대 인물이었다. 이건 매우 인상적인 공통점인 것 같다. 둘 다 1820년생이고, 둘 다 90+세까지 장수한 여인이기도 했다. (각각 1915년, 1910년 사망)
앨버트 슈바이처와 우리나라 리 승만 할배가 생년과 몰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동갑인 것처럼 말이다.

5.
끝으로.. 이분의 묘지에는 "이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She hath done what she could라고 당당히 새겨져 있다~! 이건 아무 문구가 아니라 예수님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행적을 언급한 막 14:8 구절인데.. 싱크로율이 매우 높게 느껴진다.
이분은 앞 못 보는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환경과 처지 비관을 일체 하지 않고 그 여건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만 성실히 수행했으니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떤 일을 거창하게 벌이려 하지 말고 제일 기본적인 것 본질적인 것부터, 당장 니 여건에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생활화해라~~ better late than never 이런 사고방식 말이다.
상당히 일리가 있고 성경적인 구석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어서..

(1)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싶으면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삼라만상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주 여호와 하나님이여,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죄인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니 참으로 캄~~사하무니다.." 찬양과 감사와 회개와 간구의 순으로 FM대로 하라느니 말라느니..;;
아이고 이딴 복잡한 거 생각하기 전에, "주님, 제가 뭘 기도해야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할 말이 없네요, 오늘은 좀 기도하고 싶지 않네요" 이런 말부터 기도로 표현하라는 것이다.

(2)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아 씨X 이게 영어로 뭐더라? 말이 퍼뜩 안 떠오르네.. 영어가 술술 튀어나오지 않아서 답답하네" 이런 말부터 영어로 표현할 생각을 해라. -_-;;
(신앙과 관련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으면 영어 찬송 → 영어 성경 → 영어 기도...의 순으로 난이도를 올리면 될 듯하다.;;)

(3) 기우제를 지내서 진짜로 비가 내릴 거라고 믿는다면.. "비가 반드시 온다"에 손모가지를 걸지는 않더라도, 기우제 지내러 나갈 때 최소한 우산이라도 챙겨서 나가는 걸로 니 믿음을 행위로 입증해 보여라.

(4) 저출산이 그렇게도 심각한 문제이면.. 자꾸 새로운 애들 만들라고 독촉하고 삽질하기 전에, 이미 낳은 애들이나 잘 지켜 주고 자살 안 하게 하고 범죄자놈들은 반 쥑여 놓아라~~

* 이런 게 그다지 비논리 비합리적인 생각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래서 찬송가 중에도 Brighten the corner where you are (거창하게 큰 일 벌일 생각 하지 말고 니 주변부터나 빛을 비춰라) 라는 곡이 있다. 다만 이건 크로스비 여사가 지은 가사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안 창호 선생뿐만 아니라 저분의 인생에서도 이런 "작은 것부터" 정신이 있었다는 것도 무척 흥미롭게 느껴진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20 08:35 2023/0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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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기와 전지

세상에 전기라는 에너지는 발전기 아니면 전지로부터 얻어진다.
먼저, 발전기는 전자기 유도 원리를 이용해서 각종 동력 기관의 원운동으로부터 교류 전기를 생산하는 물건이다. 빨리 돌릴수록 전기가 많이 나오고 전력 생산량을 사용자가 원하는 대로 즉각 가장 쉽게 조절할 수 있다.

현대 전기 공학의 주요 산물은 (1) 전자석, 그 다음으로 (2) 모터(전동기)와 (3) 발전기, (4) 변압기의 순인 듯하다. 전자석과 모터는 직류의 성격이 강하지만, 그래도 교류 전동기니 유도 전동기니 하는 물건도 없는 건 아니다. 브러시가 어떻고 정류자가 어떻고.. 흠~
그리고 발전기와 변압기는 빼박 교류 전기의 산물이다. 변압기는 영락없이 지레의 전자기 버전이며, '영구자석 : 도체'와 '전자석 : 반도체'는 비슷한 관계인 듯하다.

과학에서 전기 쪽이 단순 V=IR 수준을 벗어나서 패러데이와 맥스웰, 테슬라가 나오고 본격적으로 엄청나게 어려워지는 건 아무래도 전기와 자기가 결합하고 이런 교류 전기가 등장하는 시점부터일 것이다.
하지만 교류가 온갖 난해한 특성과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전기의 주된 취급 형태가 된 건..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교류가 장거리 송전을 위한 변압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발전기로 생산하고 변압기로 가공하기가 직류보다 훨씬 더 용이하다.

즉, 얘는 전기의 안정된 대량 생산에 가장 유리하다. 얘들 덕분에 인간이 다루는 전자기 관련 장비가 영구자석 나부랭이에서 전자석으로 업글 되고, 화학 건전지 나부랭이에서 초고압 대용량 교류 전기로 확장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메이저급 발전소들은 모두 발전기 기반이다. 발전기를 돌리는 동력원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화력이나 원자력, 수력 따위로 나뉠 뿐이다. 이런 추세는 획기적인 직류 장거리 송전/변압이나 무선 송전 기술이 개발되지 않는 한, 예측 가능한 미래에 변화가 없을 것이다.

교류 전기는 그 특성상 직류에는 존재하지 않는 상변화 주파수라는 개념이 있다. 이게 나라마다 완전히 일치하는 게 아니어서 50hz 내지 60hz 같은 차이가 있다. 심지어 일본은 동부와 서부가 이 규격이 서로 다르다.
전압이 일치하더라도 이 주파수가 호환되지 않는 전자기기를 꽂아서 가동하면 기기의 출력이나 성능 따위가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나올 수 있다.

교류 전기의 주파수는 발전기가 돌아가는 회전수(rpm)로부터 결정된다는 게 흥미로운 점이다. 좀 낡은 멀티탭에다 전원을 연결하고 스위치를 켜면.. ON된 스위치에 불빛이 들어오긴 하는데 불빛이 좀 깜빡거리는 편이다. 그 깜빡거리는 것도 교류 전기의 주기와 동일하게 꺼졌다가 켜지기를 1초에 수십 번 반복하는 것이다.

과거 전자 공학이란 게 처음 태동했던 아날로그 시절엔, 컴퓨터 모니터의 주사율, 그리고 텔레비전 영상 신호의 프레임 수도 이 교류 전기의 주파수와 맞물려서 자연스럽게 결정되는 값이었다.
영화 필름의 24프레임은 약수가 많아서 분할하기 쉬우면서 인간이 충분히 부드럽다고 느끼는 최소한의 수를 따라 정해진 것이다. 그 반면, 텔레비전 신호 30프레임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술이 더 발달한 디지털 시대가 돼서야 그런 기기들도 전기 종류에 종속되어 동작하지 않게 됐을 뿐이다.
그래도 모니터 주사율은 75hz 정도는 돼야 하고, 유튜브도 60fps짜리 고화질 동영상을 보면 화면이 확연히 부드러운 게 느껴지고 눈이 편하고 좋다.

아무튼.. 교류에는 이런 배경이 있는데.
이런 거 말고.. 전선이 연결돼 있지 않고 발전기를 돌리는 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을 수도 없는 환경에서 전기· 전자 기기들을 가동하려면? 전지라는 게 필요하다. 특히 산소가 없어서 내연기관을 돌릴 수 없는 우주 월면차나 잠수함 같은 건 선택의 여지 없이 전지로 전기 모터를 돌려서 움직여야 한다. 대형 잠수함은 배터리로 도저히 감당이 안 되니 아예 원자로를 집어넣기도 했지만 말이다.

전지는 좁은 의미에서는 전기 에너지를 화학적으로 축적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 그 에너지를 화학 반응을 통해 직류 형태로 방출하며 방전되는 물건이다. 방전 후에 재충전이 가능하면 이차 전지 내지 배터리라고도 불린다. 배터리 중에서도 자동차용 황산-납 배터리와 나머지 리튬이온 배터리는 특성이 서로 많이 다르다.

하지만 이런 것 말고 넓은 의미의 전지는 터빈으로 발전기를 돌리는 게 아닌 다른 원천으로부터 전력을 생성하는 모든 물건을 뜻한다. 수소 같은 연료 전지도 이런 범주에 들며, 원자력 전지나 태양광 전지는 화학보다는 그래도 물리에 가까운 전지이다.

전지는 직류 기반답게 연결할 때 + - 극 구분이 존재한다.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력 전지, 그리고 우주왕복선의 액체수소 엔진과 수소 연료전지 엔진은 구동 방식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개인적으로 해 온 생각인데.. 발전기는 정렬 알고리즘 중에서 비교 연산을 기반으로 동작하는 범용적인 놈이고, 나머지 전지들은 비교 연산을 하지 않는 특수한 놈과 비슷한 심상인 것 같다.

요즘은 10여 년 전의 우려와 달리 배터리 기술도 많이 발전하긴 한 것 같다. 하지만 배터리 전기차가 초대형 트레일러, 건설 기계, 군용차나 건설 기계까지 꿰차고 들어올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그리고 리튬이온이건 수소 연료전지건, 이런 전지들은 사고로 파손되고 충격을 받았을 때 화재가 그리도 잘 발생하는가 보다. 게다가 이런 불은 기름 화재가 차라리 낫다 싶을 정도로 끄기도 굉장히 난감하다고 하는데.. 이런 안전 문제가 해결돼야 할 것 같다. 컴퓨터뿐만 아니라 배터리도 너무 밀도가 높아지고 불안한 유리몸이 되긴 했다.

그리고 요즘은 세월이 많이 지났으니 배터리의 '메모리 효과'와 관련된 낡은 낭설들이 많이 불식됐지 싶다.
끝까지 완방 완충을 하면서 쓰는 게 좋다는 얘기 말이다. 이건 과거의 니켈 카드뮴 배터리를 기준으로는 맞는 말이었지만 요즘 배터리를 기준으로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 배터리를 끝까지 소모하지 말고, 조금만 썼더라도 곧바로 도로 충전하는 게 배터리의 수명에 더 낫다.
요즘 배터리가 완방 완충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요즘 자동차가 시동 직후에 수 분 이상 길게 공회전 웜업/예열을 할 필요가 없는 것과 비슷하다. 기술이 더 발전했기 때문이다.

재충전이 불가능한 단순한 건전지가 통용되는 곳은 정말 가늘고 단순하고 오래 쓰는 기기들 한정인 것 같다. 벽시계, 도어락, 가스레인지, 무선 키보드-마우스 같은 곳..?? 손전등은 LED가 등장하면서 배터리 기반으로 가는 듯하고..
글쎄, 제아무리 핸드폰 시계니 스마트 워치니 하지만 고개만 돌리면 간편하게 볼 수 있는 벽시계나 종이 달력도 여전히 필요하긴 한 것 같다.

끝으로.. 전지는 어떤 방식으로 동작하는 것이든 대개 아무렇게나 폐기해서는 안 되는 물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함부로 부수거나 분쇄· 분해하면 유독성 화학 물질이 누출될 수 있고, 소각하면 폭발 위험이 있다. 그리고 전지에는 각종 특수한 희소 원소가 들어가곤 하기 때문에 이런 걸 최대한 재활용할 필요도 있다.

이런 여러 이유로 인해, 전지는 쓰레기 처리의 관점에서 볼 때 진작부터 특별 취급의 대상으로 분류되어 왔다. 재충전이 되지 않아서 더 쓸 수 없는 놈은 알루미늄이나 종이류처럼 반드시 별도로 수거해서 폐기하게 돼 있다.

하긴, 옛날에는 카드뮴이나 수은이 들어간 건전지도 있었지만 2000년대에는 다들 사용과 유통이 금지되고 퇴출됐다. 공교롭게도 카드뮴과 수은은 각각 20세기 중반에 일본의 유명 공해병이었던 이타이 이타이 병과 미나마타 병의 원인으로 작용한 바 있다.

반도체니 트랜지스터 이런 건 전기라기보다는 전자의 영역 같고..
충전기, 배터리 같은 건 화학/재료공학의 성격이 강해진다. 이런 건 나로서는 진짜 아오안이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서 공부하던 것의 큰 그림을 먼저 펼쳐 보고 세부적으로 들어갔으면 도움이 됐을 텐데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12 08:35 2023/01/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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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파의 특성

인간이 자연에서 전자기파라는 것의 존재를 예상하고 발견하고 그 특성을 규명하고, 이걸 이용해서 각종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게 된 것은 19세기 말 이후의 정말 위대하고 경이로운 발명· 발견이다. 이 기술 덕분에 무선 통신과 방송이라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학 기술은..

  • 질량을 가진 물질 입자를 광속으로 이동시키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순간이동 텔레포트는 SF물 내지 게임에서나 존재한다. 광속이 아니라 음속(공기 중 기준)만 비행기로 아주 어렵게 제한적으로 초월했을 뿐이다.
  • 시간을 거스르는 여행도 못 한다. 타임머신 역시 SF에서나 가능하다.
  • 실용적인 수준의 장거리 무선 송전도 요원하다. 즉, 질량이 없더라도 동력· 에너지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전하지는 못한다. (일개 구름에서 천둥 번개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지도 글쎄...)

신호, 정보를 광속으로 주고 보내서 통신하는 것만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이거 하나만으로도 20세기 이후 인류의 생활 양상은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전자기파는 진폭과 파장이라는 속성을 갖는데, 단순 강도를 나타내는 진폭보다는 파장이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속도야 다 똑같이 광속이지만, 퍼져 나가는 방식이나 강도의 변화 양상 같은 건 파장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파장은 정의상 그 전파의 단위 시간당 진동수 내지 주파수와 정확히 반비례하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고주파'와 '단파'는 완전히 동치이며, 반대로 '저주파'와 '장파'도 동치인 개념이다. 앞에 '극/초' 같은 접두어가 똑같이 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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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기파 중에서 그나마 주파수가 낮아서 파장이 긴 '원초적인' 영역의 물건을 우리는 전파라고 부른다. 무선 통신과 방송 용도로 이 영역의 전자기파가 쓰인다는 것이다.
이것보다 파장이 짧아지면 맨 먼저 적외선이 나오고 그 다음으로 가시광선, 그 다음에 자외선이 이어진다.
자외선보다도 파장이 짧은 놈은 X선이니 감마 선이니 하는 방사선의 영역으로 간다. 방사선은 전리와 비전리로 나뉘기도 하고.. (에너지가 있어서 인체에도 해로울 수 있는 녀석이 '전리 방사선')

그리고 주파수라는 개념은 사실상 전파의 범주에서만 쓰인다. 적외선 이상으로 가면 파장의 길이가 나노미터 이하 급으로 짧아지며, 그에 반비례하는 주파수는 숫자가 테라헤르츠 급을 넘어서 너무 커지기 때문이다. 한쪽은 헤르츠이고 다른 한쪽은 미터이지만 둘 다 본질적으로 동일한 속성을 측정한 결과라는 걸 다시 밝힌다.

기술적으로야 파장이 긴 저주파를 주고 받는 게 더 간단하고 쉽다. 그러니 인간은 이런 쉬운 전파부터 먼저 활용해 왔다. 저주파(장파)는 특성이 대체로 '가늘고 긴' 반면, 고주파(단파)로 갈수록 '짧고 굵은' 성향이 강해진다.

파장이 긴 전파는 장애물의 영향을 덜 받고 멀리 널리 잘 퍼져 나간다. 그리고 지구의 전리층에 반사되기도 하기 때문에 둥근 지구에서도 자연스럽게 수평선 너머 장거리 통신을 할 수 있다.
파장이 굉장히 긴 장파(3~300KHz)는 심지어 수중에서도 전파가 되기 때문에 심해에서 잠수함 간의 통신에 쓰인다. (음파와 별개로!) 공중과 해저에서 모두 장점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장파는 진동수가 낮고 대역폭도 낮기 때문에 안에다 정보를 많이 담을 수 없다.
실시간 음성이나 영상 따위는 감당이 안 되며, 모스 부호 같은 극도로 가볍고 단순한 메시지나 주고 받을 수 있다. 아니면 각지에 퍼져 있는 시계들을 동기화시키는 신호를 보내는 것도 장파로 처리하기에 적절하다.

넓고 지형이 평탄한 나라(몽골, 러시아..??)에서는 장파 라디오 방송이라는 걸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건 말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이지, 음질 안 좋고 잡음에 취약한 것을 감안해야 한다. 장파를 수신하려면 안테나가 더 크기도 해야 한다고 그런다.

장파보다 파장이 더 짧아진 중파(300~3000KHz) 정도가 AM 라디오에서 사용되는 주파수 대역이다. 실용적으로는 500~1600kHz 부근이다. 여기가 음질과 송· 수신 난이도, 기기의 구조적인 복잡도를 감안했을 때 가성비가 가장 좋은 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중파보다 파장이 더 짧아진 단파(3~30MHz)는 이제 주파수 단위가 킬로에서 메가로 바뀐다. 얘는 수신하는 기술적 난이도가 중파보다 좀 더 높으며, 지구 전리층에 반사되는 장거리 전파의 거의 마지노 선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얘는 20세기 초중반부터 국경과 대륙을 넘어 외국의 소식을 접하는 통로로 즐겨 쓰였으며, 현재도 소수나마 단파 라디오 방송국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간첩이 난수표 같은 지령을 받는 용도로도 당연히 쓰였다. 이 때문에 이 동네는 쌍팔년도 시절까지 허가 받은 사람 외에 단파 라디오의 소지가 금지였으며, 간첩 식별 요령으로도 "이불 뒤집어쓰고 라디오 같은 걸 청취하는 사람"이 설정돼 있을 정도였다. HAM인가? 아마추어 무선도 이 영역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다음으로 30~300MHz 대역은 초단파/초고주파/VHF로 분류된다. 여기부터는 전파의 특성과 용도가 위의 것들과는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전파는 파장이 왕창 짧아질수록 '짧고 굵은' 모 아니면 도 성향이 강해진다. 지형과 장애물에 취약해지고 사정거리도 짧아질지언정, 그 사정거리 안에서는 멀쩡히 날아가다가 스스로 퍼지고 약해지지 않는다. 직진성이 강해진다.

그리고 처음에 고출력으로 아주 쎄게 쏴 주면 지구의 전리층에 반사되지 않고 오히려 우주로도 전파를 날릴 수 있게 된다. 우주와 지구의 통신은 이렇게 지구 전리층에 튕기지 않는 초단파 이상의 고주파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심지어 그 뜨겁고 두꺼운 대기를 자랑하는 금성에 착륙한 소련 탐사선도 지구와 잠시나마 성공적으로 교신을 한 바 있다.

이런 고주파는 대역폭이 커서 저주파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 과거의 유물인 삐삐, 그리고 음성을 넘어 영상 신호를 담고 있는 텔레비전도 다 이 대역의 주파수를 사용한다.
아날로그 라디오는 기존의 진폭 변조(AM)가 아닌 주파수 변조(FM) 방식을 채택해서 훨씬 더 좋은 음질에다 스테레오 채널까지 얹을 수 있다. (대략 87MHz ~ 108MHz) 변조 방식의 차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도록 하겠다.
당연한 말이지만 '초단파'는 '초음파'와는 전혀 무관하고 다른 개념이니 혼동하지 마시라.;;;

끝으로, VHF보다도 더한 고주파는 300~3000MHz 대역인 극초단파/극초고주파/UHF라고 불린다.
드디어 컴퓨터의 클럭 속도 같은 기가헤르츠라는 단위가 등장하는데, 얘 정도의 대역폭은 돼야 휴대전화에다 요즘 같은 HD급 텔레비전에 초고속 무선 인터넷 와이파이까지 감당 가능하다.

사실은 아날로그 TV 시절에도 VHF를 넘어 UHF 수신 기능까지 추가해서 지상파의 채널 수를 늘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쌍팔년도 시절 엄청 옛날 텔레비전은 채널 다이얼이 VHF/UHF용으로 두 개 있어서 VHF는 2부터 13까지밖에 없는 반면, UHF 다이얼은 14부터 거의 70까지인가 눈금이 아주 조밀하게 달렸었다. 개인적으로 VHF/UHF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접한 것도 이런 텔레비전에서였다.

라디오에 AM/FM(중/초단) 구분이 있다면 텔레비전엔 VHF/UHF(초단/극초단)의 구분이 있는 셈이다. 텔레비전은 이산적인 채널 번호가 존재하는 반면, 라디오는 주파수 영역이 쌩으로 그대로 통용됐다는 차이도 있다.
VHF 텔레비전의 음성과 FM 라디오는 구성 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그 당시 일부 라디오는 텔레비전의 작은 채널 번호의 음성을 수신하는 기능이 있기도 했다. 이건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NTSC 규격이 컬러 영상도 재래식 흑백 수상기와의 하위 호환이 됐던 것과 비슷한 면모이다.

VHF를 넘어 UHF 급으로 극도로 조밀한 전파는 멀리까지 보내기가 어렵기 때문에 기지국이 많이 필요하다.
까놓고 말해, 삐삐 기지국보다 휴대전화 기지국이 훨씬 더 촘촘하게 많이 필요한 이유도 취급하는 전파의 주파수와 특성 차이 때문이다. 휴대전화 기지국은 나무 같은 걸로 위장한 형태로 우리 생각보다 여기저기 많이 숨어 있다. 휴대전화나 와이파이의 전파를 무슨 라디오 전파처럼 쉽게 간편하게 널리 쏠 수 있지는 않다..!

이상이다. 무선 통신의 세계는 심오하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광속 같은 전자기파의 물리적인 특성이 달라졌을 리는 없는데 컴터 무선 네트워크의 데이터 전송 속도가 기막히게 빨라지고 텔레비전의 화질이 기겁할 정도로 좋아진 이유는.. 인류가 전파의 주파수를 더 열나게 달구고 짜내는(..!!) 기술을 개발하고 그걸 사방팔방 쏘는 인프라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ㄲㄲㄲㄲ 이게 컴퓨터 반도체의 집적도를 올리는 것과 대등한 효과를 낸 셈이다.

그런데 라디오는 지하에서도 수신되는 것 같은데 고속버스 위성 텔레비전은 차가 터널 안에만 들어가도 먹통이 되는 이유..
와이파이는 AP로부터 수십 미터만 떨어지면 신호가 간당간당해지는 이유, 그 반면 우주로도 전파를 쏴서 탐사선과 교신을 할 수 있는 이유 등등.. 이런 것도 전부 전파의 특성을 알아야 답을 할 수 있다.
지하철 안에서 휴대전화가 되는 건 선로를 따라 몽땅 다 기지국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환기 시설이나 지하수 배수 시설과 마찬가지로 그냥 공짜로 되는 게 절대 아니다.

전파라는 게 워낙 신기한 물건이기 때문에 옛날에는 이게 무슨 방사선마냥 사람 건강에 해로울 거라는 낭설이 많이 나돌았다. 컴퓨터 모니터에다 보안경을 씌우고, 모니터를 아래로 매립한 컴퓨터 전용 책상을 비치하기도 하고, 근처에 선인장이나 동전을 쌓아 놓기도 하고..;;
이거 기계 버전은.. 비행기 이착륙 중에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하는 관행이었지 싶다. (전자파가 기계에 혼선을 초래..) 마치 열차 정차 중에 화장실 사용 금지처럼 말이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요즘은 전화기건 라디오건 텔레비전이건.. 길쭉한 안테나를 무슨 삼단봉처럼 꺼냈다가 집어넣는 비주얼이 없어진 게 참 인상적이다. 심지어 자동차의 안테나도 말이다.
텔레비전 역시 곤충 더듬이처럼 작대기 한 쌍이 삐져나오곤 했었지만.. 요즘은 그런 거 없다. 이렇게 된 데에도 눈부신 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단파나 장파 라디오는 기기나 안테나가 이 정도로 소형화가 안 되나 보다.

그리고.. 통신이라는 건 교통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개나 소나 누구나 아무렇게나 전파를 주고 받을 수 있으면 혼선을 감당할 수 없어지고 아무도 통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신호등 없이 사방팔방 교차로에서 차들이 밀려드는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자동차에 번호판을 달지 않고 공도를 주행할 수 없듯, 민간인이 특정 대역의 주파수로 무선 통신을 하려면 자격을 갖추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중앙 전파 관리소'라는 기관이 이런 전파 대역을 관리하며, 전파와 관련된 테러가 벌어지는 것을 감시한다.

1. 추가 정보: AM과 FM

전파에다가 강약 기복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초창기에는 진폭 변조, 즉 AM 방식이 먼저 개발되어 쓰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파수를 변조하는 FM 방식이 개발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M이 기술적으로 더 단순하고 쉽고 저렴하다. AM 라디오 기술이 이미 19세기 말에 발명된 반면, FM은 1930년대가 돼서야 발명되었다.
FM은 표현 가능한 가장 강한 신호를 기준으로 주파수를 산정해야 하는 특성상, 단파· 중파 정도로는 어림도 없고 못해도 초단파 급의 전파를 쏴야 송신 가능하며, 취급하는 회로도 더 복잡하고 고가였다. FM은 보기보다 AM보다 훨씬 더 발달된 기술의 산물인 것이다.

FM의 난관은 기술 발전과 부품 대량 생산으로 인해 극복됐다. FM은 AM보다 잡음에 더 강하고 음질이 훨씬 더 좋았기 때문에 음악 방송의 주류로 등극했다. 잡음은 주파수보다는 진폭을 건드리는 게 더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주파의 특성상 FM은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더 타면서 난청 가능성이 AM보다 더 높다.

2. 자매품: 적외선 통신

한때..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옛날 노트북이나 피처폰급 휴대전화에는 '적외선 통신'이라는 기능이 있었다.
와이파이나 블루투스 같은 극초단파 기반의 통신 규격이 제정되기 전에.. 전파보다 파장이 더 짧은 적외선을 전용 다이오드 반도체로 쏴서 초단거리에서 일종의 무선 광통신을 한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전파 통신과는 기술적인 성격이 좀 다른데, 그 구체적인 내역은 내가 잘 모르겠다.;;
고주파의 특성상 대역폭이 넉넉하며 통상적인 전파 규제도 없는 반면.. 사정거리가 겨우 수 m대로 극도로 짧다. 그리고 그 짧은 신호가 잘 퍼지지도 않기 때문에 송신기와 수신기는 서로 방향 조준도 잘 해야 한다.

적외선 통신은 지금도 각종 리모콘, 자동문 센서, 스마트키나 하이패스 단말기 같은 소형· 단거리 전자기기의 통신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현역이다. 리모콘은 방향을 돌려 놓으면 제대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경험상 알고 있다. =_=;;

Posted by 사무엘

2023/01/09 08:35 2023/01/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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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태우 대통령이 서거한 지도 벌써 1년이 넘게 지났구나. 이 글에서는 노 태우 시절에 잠깐 생산됐던 추억의 자동차 얘기나 좀 꺼내 보고자 한다.

대우 임페리얼... 1989년 초에 대우 자동차에서 야심차게 개발한 최고급 기함급 승용차였다.
로얄 시리즈의 약발이 다해 가고 적진에서는 그랜저라는 걸출한 고급차까지 내놓으며 인기몰이를 하니, 대우 진영에서도 그에 대응하는 카운터를 내놓은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얘는 그 당시 국산 승용차 중에서는 최초· 최대였던 6기통 3000cc 배기량을 자랑했다. 이땐 그랜저도 아직 2400cc 모델까지만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는 임페리얼에 대항하기 위해 6기통 3000cc 모델을 1989년 말에 내놓게 됐다.

(2) 그리고 임페리얼은 국산 승용차로서는 매우 드물게 V형이 아니라 선형(inline) 직렬 6기통 형태였다.
다른 피치 못할 이유나 사정이 없다면.. 왕복 엔진의 실린더야 자동차의 주행 방향과 수직인 일렬로 단순하게 쭉 늘어놓는 게 제일 무난하다. 하지만 실린더가 6개씩이나 되면 늘어놓는 길이가 자동차의 폭 대비 너무 길어져서 직렬 배치가 좀 난감해진다.

게다가 안 그래도 부족한 엔진룸 공간을 더 부족하게 만드는 건 전륜구동 되시겠다. 전륜구동이 여러 장점이 많긴 하지만, 객실의 하부를 관통하는 구동축이 없는 대신에 엔진룸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여건 하에서 제한된 엔진룸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실린더를 1*6이 아니라 2*3으로, 그리고 I자가 아니라 V자 모양으로 지그재그로 배치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이를 V형 엔진이라고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V1, V2 이러는 건 보통 버전과 관계 있지만 자동차에서 V6, V8 이러는 것은 실린더 개수가 그 정도인 V형 엔진임을 뜻한다.

V형 엔진은 엔진 공간의 이용 효율을 얻은 대신, 같은 배기량일 때 전체 부피가 더 크고 내부 구조가 더 복잡해진다는 단점이 있다. 엔진음이나 진동, 승차감 쪽도 직렬 엔진보다는 미묘하게 못한 구석이 있다. 그걸 상쇄하려면 기술이 더 발달해야 하니 엔진 제조 비용도 더 올라간다.

과거에 현대에서는 10여 년 전에 2000cc 배기량을 갖고도 V6 엔진을 얹어서 '그라나다 V6' 같은 차를 면허 생산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겨우 그 배기량에 6기통씩이나 얹는 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그리하지 않는다.

고급차들이 V6 이러니까 V형 엔진 자체가 아주 고급차의 상징인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그냥 어쩌다 보니 고급차에 V형 엔진이 장착될 뿐이다.
그리고 후륜구동도 V6 이상으로 여전히 고배기량 대형 승용차의 상징 관행으로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임페리얼은 V형 6기통이 아니라 직렬 6기통 엔진에 후륜구동이었으니 그랜저와는 특성이 상극이다.

임페리얼의 제원상 최대 출력은 174마력으로, 그랜저 V6 3000cc SOHC 모델의 161마력보다도 더 높았다.
하지만 4단까지밖에 안 되는 자동 변속기의 기어비가 비효율적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기술적인 한계가 있었는지, 고속도로에서 끝까지 밟았을 때의 최고 속도는 195가량이 한계였다고 한다. 200을 넘기지는 못했다.

임페리얼이 우리나라 승용차 역사상 전무후무한 직렬 6기통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더라. GM대우 시절의 토스카와 매그너스도 직렬 6기통 엔진을 얹긴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차들은 정말 존재감이 없이 잊혀져 있다.

(3) 그리고 임페리얼은 ABS가 장착되어 나온 최초의 국산차였다. 아래의 사진을 보면 유리창에까지 ABS 글씨를 써 놓은 게 보일 것이다.
지금은 이게 의무 필수 사양이 돼서 일개 경차에도 무조건 달려 나오지만, 저 때는 ABS가 완전 신기술 첨단 안전 장치 자랑거리였던 것이다.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임페리얼의 다음으로 그랜저 V6도 응당 그 뒤를 이어 ABS를 장착했다.
그리고 ABS의 다음으로 에어백이 최초로 장착된 최초의 국산 양산차는 1992년에 출시된 뉴 그랜저였다. 초창기 원시적인 SRS 방식으로 말이다.

(4) 그 밖에 국산차 중에 임페리얼만의 전무후무했던 특징은 뒤의 C필러에 둘러진 가죽 외장.. 미국의 고급차를 흉내 낸 건데, 옛날에 고속버스 타이어에 장착됐던 휠캡만큼이나 정말 상징적인 외형이었다. 출시 직후부터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1990년형 후기형부터 적용된 것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임페리얼은 기계판이 100% 디지털이어서 주행 속도가 10진수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됐다. 그리고 얼마나 쓸모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헤드라이트에도 와이퍼가 달려 있었다.;;
이런 건 그랜저에는 존재했던 적이 없으며, 주류가 되지도 못하고 유행이 지나 사라진 기능이다. 하지만 대우에서 임페리얼 이전의 최고급 모델이었던 슈퍼 살롱(1987)에는 이미 적용되어 있었다.

이렇듯, 임페리얼은 여러 분야에서 그랜저에도 없던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고급차였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서 들여온 외국산 부품들을 한국 사정에 맞게 현지화를 제대로 못 했으며, 컴터 소프트웨어로 치면 버그도 너무 많이 들어갔다.

주행 중에 엔진이 과열이 너무 잘 되고 잘 퍼져서 소비자로부터 외면받았다. 최고급 기함급이라는 승용차가 품질 관리가 안 되면 어쩌라고.. ㅠㅠㅠㅠㅠ
결국 얘는 전국적으로 1000대도 채 못 팔고 국산 고급 승용차의 주도권은 그랜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됐다.

본인은 초딩 꼬마 시절에 이 차 현물을 봤던 기억이 있다. 1990년대 고향 시골에서 임페리얼이 굴러가는 걸 본 건, 2020년대 서울 시내에서 롤스로이스나 유명 외제 스포츠카가 굴러가는 걸 보는 것과 비슷한 경험이었다.

  • 대우에서는 고급스러움을 표방하면서 1980년대까지 차 이름을 로얄, 프린스, 듀크, 임페리얼처럼 뭔가 왕족· 귀족 명칭으로 짓는 편이었다. 그러니 나중에 레간자, 누비라 같은 이름은 상대적으로 간지가 덜(?) 나 보일 정도이다.

  • 임페리얼이 수립한 최초 최대 배기량 3000cc 기록은 5년쯤 뒤, 1994년에 출시된 뉴 그랜저 3500cc 모델에 의해 깨졌다. 그랜저 다음은 1999년에 출시된 에쿠스..

  • 에쿠스 1세대는 국산 승용차에서 최초로 무려 8기통 4500cc 배기량을 선보였다. 하지만 현대 진영의 차들은 그랜저는 물론이고 얘조차도 대형 승용차로서 이례적으로 여전히 전륜구동이었으며, 2008~9년 사이, 제네시스와 에쿠스 2세대가 돼서야 후륜구동으로 바뀌었다.

음, 표로 정리할 걸 그랬나..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23/01/03 19:35 2023/01/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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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대의 신여성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중에서 그나마 제일 희망적이고 살 만했던 시기는 1920년대였다.
3· 1 운동 덕분에 일제도 너무 놀라서 표면적인 억압을 좀 풀어 주고 '문화 통치'를 했을 때 말이다. 사실은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나라들도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 1920년대가 전반적으로 호황이고 살기 좋던 시절이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이때 '신여성'이라는 게 나타났다. 이건 MZ세대, X세대처럼 특정 시기의 특정 트렌드에 속하는 사람 집단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여자도 대학교나 그에 준하는 고등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나타나고,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 파일럿, 의사, 기자 같은 직업도 얻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인물로는 일단 여자 말고 남자.. 김 우진(1897-1926)이라고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희곡 작가가 있다. 희곡 쪽으로 유 치진보다도 더 선배격인 사람인데.. 보다시피 너무 일찍 요절했기 때문에 대표작은 <산돼지> 정도밖에 없다. 하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최초로 현대적인 형태의 희곡 작품을 남겼으며, 일본 유학파에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는 병사한 건 아니었다. 그는 동갑의 신여성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성악가(소프라노!!)였던 (1) 윤 심덕과 같이 배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감쪽같이 사라지고 실종되었다. 시체도 못 찾았다.
그런데 문제는 김 우진은 당시에 이미 처자식 딸린 유부남이었다는 것.. 그래서 그 당시엔 언론에서 저 지식인 유명인사 커플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서 나란히 대한해협 망망대해로 투신 자살한 거라고 대서특필했었다.;;

하지만 현재는 두 사람이 당시에 동반 자살을 할 이유가 사실상 없었으며, 애초에 두 사람이 불륜 커플이기라도 했는지부터 의심스럽다는 쪽으로 기존 통념이 반박되는 추세이다. 단순히 고인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미화하고 덮고 넘어가는 게 아니라 증거가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동반 자살이 아닐 뿐, 그럼 저 두 사람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알려진 건 아니다. 이건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우진이 남긴 외아들 김 방한(1925-2001)은 그래도 홀어머니 밑에서 잘 커서 비교언어학의 권위자가 되었고, 서울대 언어학과 교수가 되었다. 천재적인 언어 기질을 아버지에게서 그대로 물려받은 것 같다. 이거 무슨 강 재구 소령의 외아들, 김 득구 선수의 외아들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여성 현대 소설가로 일컬어지는 (2) 김 명순(1896-1951)도 흥미롭게도 저 사람들과 거의 같은 연배인 신여성이었다.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탁월한 글빨, 여러 외국어 구사까지.. 머리가 비상했다.

그러나 그녀는 혼자 너무 똑똑했던 데다 자유 연애를 추구한 것, 기생의 딸인 것, 왕년에 성폭행을 당한 이력이 있는 것이 합쳐져서 주변의 다른 유교 꼰대 성향의 남자 문인들로부터 온갖 시샘과 모함과 중상모략을 당했다. 행실이 방탕한 썅년 취급을 받으면서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심지어 소설가 김 동인이라든가 소파 방 정환 같은 유명인사들도 김 명순을 헛소문까지 퍼뜨리며 집요하게 비방했다. (어린이에게 그렇게도 파격 진보적이었던 소파 선생조차도 여성에 대한 인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었던 듯..)

"남편을 다섯 번이나 갈아치우고도 요조숙녀 행세하는 년.." 이건 뭐.. 성경의 요 4:18에서 모티브를 딴 걸까..?
또, 문학 글쟁이가 어떤 사람을 저격하고 골로 보내는 방법은 간단했다. 싫어하는 사람을 암시하는 주인공을 설정해서 그 주인공이 망가지거나 흑역사가 폭로되는 소설/희곡 따위를 써서 공개하면 됐다. (햄릿에도 비슷한 사례가 나오네..??)
김 동인의 <김연실전>이 바로 김 명순을 악의적으로 저격하는 소설이었다.

김 명순은 이런 저열한 인격살인에 시달리다가 몇 번이나 자살 기도도 하고, 끝내는 완전히 탈조선을 해서 일본에 정착해 버렸다. 해방 이후에도 돌아올 엄두를 못 냈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미혼 글쟁이 여성이 미수교 적성국가 패전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녀는 가난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건강 악화로 타지에서 객사하고 말았다.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현재 무덤도 없다.

그녀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동족 남자 문인들이 내게 저지른 악행을 열거해 봤자 황무지에서 잡초 몇 포기 뽑은 정도밖에 안 될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조선아... 이 다음에 나 같은 사람이 나더라도 할 수만 있는 대로 또 학대해 보아라~ 이 사나운 곳아, 사나운 곳아” 이걸 유언이라고 남겼다. 사나운 곳.. 좀 더 쉽게 표현하자면 '잔인한 곳' 정도 되겠다.

이런 와중에도.. 그녀는 혼자 굶으면 굶었지, 그래도 반민족 친일 행위에는 생계형으로라도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 능력이 아까웠던 너무 안타까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어째 이 작품은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전해질 수 있었는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얘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데, 김 명순과 굉장히 비슷한 유형의 지식인 여성으로 (3) 나 혜석(1896-1948)이 있었다.
이 사람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대졸에 준하는 고학력자였는데, 전공은 미술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림만 그린 게 아니라 시와 소설을 쓰고 여성 인권 내지 여성 해방.. 요즘 용어로 표현하자면 '페미니즘' 운동을 그 시절에 공개적으로 벌였다.

명절이 오로지 여자만 죽어라고 일을 하는 고통스러운 날이라고 지적을.. 무려 1930년대에 했다니 믿어지는가?
남편이 도를 넘게 술주정과 폭력을 일삼는다면 혼자 한없이 꾹 참으면서 골병 들지 말고 여자 쪽에서 과감히 이혼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오오~

1920년대는 세계가 전반적으로 여유롭고 사상의 자유도 누리던 시절이었다. 방 정환이 일본 유학을 다녀오면서 아동에 대해 진보적인 생각을 갖게 됐다면, 나 혜석 역시 일본 유학을 계기로 여성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됐다.
다만, 김 명순은 평생 독신이었던 반면, 나 혜석은 부모의 강권 때문에 결혼 자체는 한 유부녀였다. 그래도 남편도 아주 부유한 능력자였던 덕분에 이들 부부는 1927~1928년 사이에 무려 세계 일주에 가까운 외국 여행을 즐기고 마침 역시 외국 여행 중이던 영친왕(!!!)을 알현도 했는데.. 그녀는 그만 외국에서 다른 조선인과 불륜 바람이 나 버렸다.

이 때문에 나 혜석은 이혼 당하고 사회적 평판이 정말 많이 깎이고, 빼도 박도 못한 썅년으로 낙인 찍히면서 인생이 불행해졌다. 자녀의 양육권도 뺏긴 채 불명예스러운 돌싱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 혜석을 저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불륜남은 그 뒤엔 그녀를 버렸는가 보다.

나 혜석은 대인기피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가족 없이 영양실조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래도 김 명순과 달리 한국 땅에서 잠들었다. 이 사람 역시 파란만장한 개인사와 대조적으로, 친일 노선으로 변절한 내력은 전혀 없었다.

나 혜석 다음으로 (4) 김 일엽(1896-1971)..;; 이 사람도 일본 유학파에다 미술이 주업이고 문학을 부업으로 활동한 동갑내기 신여성이었다. 본명은 김 원주라는데.. 그녀는 결혼과 이혼을 두 번이나 한 뒤 종교를 개신교에서 불교로 바꾸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 사람은 비록 나 혜석이니 김 명순이니 하는 위의 인물보다는 덜 유명하고 작품의 존재감도 훨씬 더 낮다. 하지만 남자들과 대등하게 예술 작품 활동을 하면서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의는 여전히 지닌 인물인 셈이다. 이 사람은 종교에 귀의해서 그런지, 50대 나이에 객사하지는 않고 좀 더 오래 살기도 했다.

이상이다.
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서유럽 국가들도 산업화 근대화로 인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여성도 고등 교육을 받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늘어난 시기가 있었다. 가사 노동의 부담을 덜어 준 냉장고나 세탁기나 가스레인지까지 갈 것도 없이, 공중 화장실이 설치된 것만으로도 여성의 실외 활동과 사회 진출이 늘어났을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그 시기가 우리나라는 1920년대였던 셈이다. 그때의 각 분야별 신여성들의 행적이 어땠는지 더 알고 싶다.
그 다음 1930년대는 대공황에 전쟁 준비 때문에 세계적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시작됐으며, 한반도에서도 신여성 얘기는 쏙 들어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1/01 08:35 2023/01/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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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으로도 못 가요 + 울어도 못 하네

위 두 곡은 내 행위나 스펙, 재물 따위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기초적인 복음을 전하는 찬양 내지 영적 노래이다.
작사· 작곡자는 서로 다르지만 가사 비슷하고 조와 박자가 비슷해서 한데 이어서 부르기 아주 좋다.

2.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 주님 품에 새 생활

영어로 life라는 건 생물학적인 생명도 되고, 그냥 인생· 생활· 삶이라는 뜻도 된다. 이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찬송이 개인적으로는 위의 저 두 곡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과 "주님 품에 새 생활하네"(Ron Hamilton)이라고 생각한다.

구원받아서 새 생명을 얻었으면 새 생활을 해야 한다.. 굉장히 적절한 메시지인 것 같은데..
허나, 위의 두 곡은 3박자 계열이긴 하지만 각각 3/4와 6/8이라는 차이가 있고 음악적인 느낌과 구조는 많이 달라서 바로 연결하기에는 어색해 보인다. 가사는 정말 딱인데 일단 내가 생각하기에는 좀 아쉽다.

3. 삼위일체 메들리

찬송가 중에는 1,2,3 각 절이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하는 형태인 게 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가 대표적인 예이다. (예수님 찬양 받으소서, 위로의 성령님이시여) 마치 군가 '멸공의 횃불'이 각 절마다 육해공군을 언급하듯이 말이다.
이런 곡들만 모아서 메들리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공교롭게도 이런 곡들은 박자도 3박자 계열(3/4)인 편이다.

그렇다고 분위기가 상극인 곡을 아무렇게나 연결할 수는 없으니..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정 종원)"와 "아버지 큰 사랑 감사해요(Father, I thank you)"을 묶는 걸 생각해 봤다. 특히 선발곡은 솔로로 선창하고, 그 다음에 후발곡을 합창으로 부르는 식으로 한 절을 다 부르고, 2절과 3절을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 앞뒤에 적절한 도입· 결말부를 더 생각해 봐야 한다.

4. 기도 관련

기도와 관련해서 한데 이어 부르기 좋은 찬양 세트는 셋 정도 있다. 공교롭게도 각 세트들이 다들 국산곡과 외국곡으로 편성돼 있다.

(1) 주님의 시간에(in his time)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선발곡은 다 주님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조용하고 수동적인(?) 심상인 반면, 후속곡은 요일 5:14에 근거해서 주님 뜻대로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좀 능동적인(?) 심상이다.
같은 C장조이고 이어서 부르기 좋다.

(2)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첫 마디의 계이름 “미~미 파미레도”가 일치하고 박자도 아주 비슷하다.
선발곡에서 “아무 염려 하지 말라”산상설교 내용을 묵상한 뒤, 후속곡에서 “기도했나요 용서했나요”를 권면하는 구조가 된다.
물론 후속곡을 이어서 부르기 위해서는 선발곡에서 조가 올라가고 마무리를 짓는 클라이막스 부분은 건너뛰어야 한다.

(3)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김 문영 사/최 덕신 곡) +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못갖춘마디의 3/4박자 곡이고 우울할 때 부르기 좋은 비슷한 가사이다.
단, 선발곡은 이럴 때 나도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다짐이고, 후속곡은 너를 위해 중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는 일종의 위로이다. 굳이 따지자면 선발곡의 가사가 영적으로 수준이 더 높다.

5.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우선, 앞곡은 쌍팔년도를 풍미했던 찬양집 “찬미예수 시리즈”의 편저자가 지은 명곡이다. 가사가 내 진심을 담아 차마 부를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심오하다.
“욕심도 없이 어둔 세상 비추어 온전히 남을 위해 살듯이.. 주의 사랑은 베푸는 사랑, 값없이 그저 주는 사랑” 이거 부르다가.. 예배당 밖에서는

“서울 시내 아파트 값이 어떻고 삼성 전자 주식이 어떻고, 비트코인 뭐가 어떻고 금리가 어떻고..” 이러면 완전 현타가 작렬할 것 같다. ㅋㅋㅋㅋㅋㅋ
요즘은 유혹과 박해라는 게 무식하게 빼앗고 죽이는 형태가 아니라, 너 혼자 뒤쳐지고 박탈감 느끼게 하는 식으로 임한다.

그리고 이 곡은 “예수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로 끝나니,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와 가사 내용과 분위기, 박자가 아주 비슷하다. 같이 이어서 부르면 잘 어울리겠다.

6.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작사· 작곡자가 서로 완전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조(Ab)에 같은 박자(3/4), 동일한 길이의 못갖춘마디이다.
앞곡은 미래의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고 사모한다는 내용이고 후속곡은 그보다 좀 더 현실적으로 지금 내 앞길을 인도해 달라는 간구이다.

서로 연계하기 굉장히 좋은 조합인 것 같다. 앞곡을 부르다가 간주 없이 곧장 뒷곡으로 넘어간 뒤, 다시 간주 후에 앞곡으로 돌아와서 끌내는 형태도 괜찮을 것 같다.

7. 내가 하늘에 들어가 (I saw Jesus in you / When I enter heaven's glory)

Ron Hamilton이 작사· 작곡한 이 찬양은.. 자기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을 때 다른 구원받은 지체들을 만나서는 “아.. 당신이 살아 생전에 예수님의 모습을 잘 보여줘서 그게 저한테도 선한 영향을 끼쳤어요” 이렇게 회고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굉장히 고차원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게다가 저건 1절 내용이고, 2절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한테서 그런 칭찬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사람과 예수님이 후렴에서 동일하게 I saw Jesus in you라고 말한다는 게 핵심이다.

일반 기성 교회보다는 침례교 계열에서 더 유명하지 싶다. 이 곡을 모르시는 분은 유튜브에서 먼저 들어 보시라. (☞ 링크)
(화면에서 볼 수 있듯, 이 아저씨는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 어쨌든 애꾸이다. 이 특성을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일부러 해적 코스프레도 종종 하는 것임..)

얘는 뭐.. 다른 곡을 짜깁기 하거나 메들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 가사에 화자가 딱 정확하게 나, 다른 사람, 예수님으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메들리나 합창이 아니라 그냥 뮤지컬을 만들면 된다. 유튜브를 뒤져 봐도 이 곡을 이런 형태로 부른 영상은 딱히 없는 것 같다. ㅡ,.ㅡ;;

아 참.. 이거 가사가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간 뒤의 시점을 다루고 있으니.. 프리퀄 격으로!!
하늘나라를 간절히 사모하는 내용이면서 박자나 멜로디가 이 곡과 그리 차이 나지 않는 적절한 찬송을 미리 부르면 효과가 더욱 커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천국, 소망'카테고리의 찬송가들은 내 인생이 끝난 관점 버전이랑 이 세상 전체가 끝난 관점 버전을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이 곡은 명백하게 인생 종말 버전이라고 볼 수 있다. 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22/12/23 19:35 2022/12/2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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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력) 가속도

인간의 신체는 지구의 중력 가속도인 9.8m/s^2가 발 쪽으로 향하는 것에 아주 적응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게 어긋나도 생각보다 탈이 많이 난다.
이 지구의 중력 가속도를 흔히 1G라고 부른다. SI 단위가 아니지만 공기 중에서의 음속인 마하 1이나, 지구-태양의 평균 거리인 1AU(천문 단위), 연주 시에 따른 거리 1파섹처럼 뭔가 지구 중심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에 통용되곤 한다.

이 가속도는 상당히 큰 값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만 높은 데서 떨어져도 물건이 깨지고 사람이 다치기 쉬우며, 사람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추락에 대해 겁과 공포심이라는 게 각인된다.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번지 점프를 할 때 엄청난 아찔함과 스릴을 느끼는 건 이 때문이다.

중력 가속도와 대기압은 둘 다 사람을 움직이기 힘들게 압박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작용하는 방식과 성질이 서로 크게 다르다. 태양계의 다른 천체들을 지구와 비교해 보면 이렇다.

  • 달은 대기압이 없고 중력 가속도는 지구의 1/6 수준이다.
  • 금성은 중력 가속도는 지구보다 약간만 작은 수준이지만(91%), 대기압이 지구보다 훨씬 더 높다(지표면 기준, 95배 -_-). 빈 깡통쯤은 바로 콱 찌그러진다.
  • 화성은 대기압은 지구의 거의 1%, 중력 가속도는 지구의 거의 40% 수준이다.
  • 태양계 전체를 통틀어서 지구보다 중력 가속도가 50% 이상 확실하게 더 큰 행성은 목성밖에 없다(약 2.5G).

중력 가속도는 한쪽으로만 일방적으로 작용하는 힘인 반면, 대기압은 사방팔방 모든 방향으로부터 고르게 작용한다.
추력이나 부력이 아니라 양력을 이용해서 비행기가 이륙하고 뜨려면.. 주변에 일정 수준 이상의 압력을 갖춘 대기가 있어야 한다.

  • 달은 저렇게 공기 저항 없고 중력도 작으니, 그 작은 달 탐사선 로켓이 간단하게 뿅 가속하는 것만으로도 모선으로 합류해서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달의 상공에서 날개 달린 비행기를 띄우는 건 불가능하며, 공중에 떠서 이동하는 방법은 오로지 로켓밖에 없다.

  • 화성은 그나마 2020년대가 돼서야 소형 드론의 양력 비행이 가까스로 성공했다. 하지만 회전익이 아닌 고정익 비행기가 뜨려면 지구보다 훨씬 더 긴 활주로에서 비행기가 훨씬 더 빠르게 달려야 할 것이다.

  • 금성은 아마 자전거 주행 속도로 활주하는 것만으로도 비행기가 뜰 수 있을 것이다. 살인적인 대기압이 야기하는 강한 공기 저항을 뚫고 그런 속도를 내는 게 가능만 하다면 말이다. 또한, 이런 저속으로도 지표면에서 발을 떼고 사뿐히 이륙하는 건 금방이지만, 그 상태로 지구에서처럼 엄청 높이 올라가고 빨리 이동하는 건 여전히 애로사항이 가득할 것이다.

뭐, 금성에서는 수백 도에 달하는 고열 때문에 인간의 과학 기술로 만든 기계들은 애초에 동작을 못 하고 죄다 고장 날 것이다. 저런 사치스러운 뇌피셜 상상을 하는 것이 애초에 무의미하다.

그나저나.. 같은 압력이라 해도 공기 1G와 물 1G는 동등한 환경 여건이 아니다.
가령, 수면에서만 찰랑찰랑 물놀이를 하면 수압은 공기 중과 차이가 없겠지만, 그렇다고 물 속에서 육지와 동등한 방법으로 동등한 속도로 이동 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니 금성 표면의 95기압을 무작정 지구의 수심 950m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건 어폐가 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금성의 표면에서 총을 쏘면 총알이 어떻게 나갈까..??? 지구 내지 우주, 달과 어떤 차이가 있을지 궁금하다.

중력 때문에 인간이 지구를 벗어나는 게 엄청나게 어렵고 까다로운 게 사실이다.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게 우주에서 달이나 다른 행성으로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러나 이게 인간에게 해로운 것보다는 이익인 면모가 더 많다. 일상생활에서 잡초나 먼지 같은 게 전혀 없으면 안 되고(흙을 붙들기, 비를 만드는 작용 등..), 마찰과 공기 저항이라는 것도 인간의 생활에 이로운 경우가 더 많은 것처럼 말이다.

중력이 없으면 가루나 액체, 기체, 가루, 부스러기 같은 물질을 실수로 흘렸을 때 도저히 수습하기 힘든 난국이 벌어진다.
그리고 신체도 다리가 힘을 쓸 일이 없어서 가늘어지고 얼굴은 피가 쏠려서 굳고.. 이거 뭐 지구가 갑자기 자전을 멈추면 원심력 때문에 적도로 가 있던 바닷물이 육지로 몰려와서 난리가 나는 것을 연상케 하는 부작용이 발생한다. 뼈와 근육이 약해지고 영양소가 빠지는 건 덤.. 건강에 절대로 좋지 않다.

  • 우주 정거장은 동력 비행을 하는 게 아니라,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와 완전히 동급으로 지구를 향해 한없이 추락하는 상태이다. 대기와의 마찰로 인해 고도를 조금씩 잃는 것만 가끔씩 엔진 동력으로 보정할 뿐.. 그러니 여기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무중력을 경험한다.

  • 너무 당연한 얘기이지만 진공과 무중력은 다른 개념이다. 우주 정거장이나 달 탐사선 내부는 사람이 살 정도의 공기가 있지만 중력 가속도가 저 지경이다. 반대로 지구에서도 진공을 만들면 그 안에서 쇠구슬과 깃털이 같은 속도로 툭 떨어질 수 있다.

  • 추락하는 엘리베이터에서 제일 안전하게 목숨 부지하는 방법은.. 착지 타이밍에 맞춰서 점프-_- 하는 게 아니라, 머리를 감싼 채 누워서 온몸으로 충격을 고르게 받는 것이라고 한다.

  • 전투기 조종사야 5~7G에 달하는 엄청난 가속도를 버티는 훈련을 받으니, 바이킹이나 롤러코스터 따위는 그냥 애들 장난도 아닐 것이다. 피가 머리에 너무 쏠리거나 반대로 너무 빠져나가서 기절하기 십상인 환경을 버텨야 한다. 새턴 V 로켓이 한창 가속될 때는 4G 정도 나온다고 한다.

  • 하긴, 순환계가 약한 사람이나 노약자는 추운 날 누워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기만 해도 머리로 피가 잘 안 가서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심지어 기절할 수도 있다. 그 반면, 전류가 흐르는 데 주변의 가속도의 영향 따위를 받지는 않을 테니.. 가속도도 인체가 기계보다 취약한 면모임인 게 실감이 난다.

  • 물구나무를 서는 것은 인체의 입장에서는 중력 가속도가 -1G인 걸로 간주된다. 수 초 남짓 잠깐이 아니라 그렇게 몇 시간째 있는 것은 인체 건강에 아주 좋지 않으며, 그렇게 방치되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고 한다. 머리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보다 머리로 피가 쏠리는 게 더 해롭다.

4. 고온 (+저온)

그럼 마지막으로, 진공 얘기가 나올 때 같이 다뤘던 온도에 대해서 얘기를 좀 더 한 뒤 글을 맺도록 하겠다.
신체 내부는 온도에 매우 민감하며, 온도의 변화에 생각보다 취약하다. 왜냐하면 물질대사를 일으키고 생명 활동에 기여하는 각종 단백질 효소들은 잘 활동하는 온도 영역이 엄청 좁기 때문이다. 끽해야 35~40도대?

얘들은 분자 구조가 엄청나게 복잡해서 그런지 금속 기반인 기계보다 열에 너무 약하다. 40도 이상에서는 그냥 비가역적으로 변성돼 버리며.. 그렇게 되면 당사자는 열사병에 걸려 죽거나 장애인이 된다. 생각보다 굉장히 낮은 온도에도 오래 노출되면 이렇게 된다. 꼭 손이 닿자마자 "앗 뜨거!" 하면서 화상을 입는 온도여야 할 필요가 없다.

물론 우리 인체는 땀을 흘리고 헥헥거리면서 열을 조절하려고 노력을 엄청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온도에 진입하자마자 바로 칼같이 탈이 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 버티는 것엔 한계가 있다.

(1) 70도짜리 물에 손을 넣으면 당연히 바로 화상을 입지만, 70도짜리 사우나에 들어가면 그래도 몇 분간은 버틸 수 있다. 그것처럼 아예 진공인 우주는 온도가 훨씬 더 높아도 그 여파가 공기 중보다도 훨씬 더 천천히 전해진다. 비열의 차이가 잽이 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열전도율은 비열과 일단 독립적인 별개의 개념이다. 비열이 낮은 물질이 열전도율도 높은 경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비열이 거의 같은 금속끼리도 열전도율이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2) 우리는 더우면 옷을 벗지만, 그래도 극단적인 고온에서는 오히려 옷을 입는 게 조금이라도 더 오래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옷이 외부의 열 대미지를 좀 줄이고 지연시켜 주는 게, 신체의 열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물에서 수영을 할 때는 몸에 걸친 옷은 정말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벗어야 된다. 오죽했으면 해군은 배에서 근무할 때 신발도 끈 달린 운동화가 아니라 비상시에 곧장 쉽게 벗을 수 있는 슬리퍼 같은 신발을 신는다고 하던데..
그럼 물이 뜨거워져 버리면 이건 뭐 정말 답이 없을 것 같다.

(3)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은 무슨 말라 비틀어진 건초나 통나무 같은 가연성 물질이 아니다. 생체에는 내부에 수분이 굉장히 많다.
그렇기 때문에 기름을 같이 끼얹지 않으면 호락호락 불이 붙지 않는다. 산 채로 화형을 당해도 그냥 삶아져서 죽거나, 그 전에 연기에 질식해서 죽는다. 반대편 극단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굳이 체액이 몽땅 꽁꽁 얼어붙지 않아도 훨씬 전에 저체온증으로 동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람 시체를 완전히 화장해서 완전히 숯덩이에 뼛가루로 바꿔 버리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최소한 몇 분 만에 간편하게 끝나는 일은 아니다.
이러니 옛날에 히틀러도 자살 후에 자기를 아무도 알아볼 수 없게 시체를 훼손해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지만.. 전쟁통에 제대로 그리 되지 못해서 시체의 신원이 파악되었으며, 그의 죽음이 공식 확인될 수 있었다.

(4) 쌍팔년도 옛날 미스터리/공포물에서는 어떤 사람이 집에서 의자에 앉아 있다가 혼자 홀연히.. 불이 붙어서 죽어 버렸다는 실제 사례가 소개되곤 했다. 그것도 자기만 혼자 열받아서 불에 탔지, 주변에는 불이 옮겨 붙어서 화재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과학적으로 가능하지 않으며 일단은 검증이 안 되는 도시전설이다. 다른 사고나 살인 사건이 미스터리로 각색된 걸로 여겨진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살아 있는 인체는 가연성 물질이 아니다.

(5) 옛날에는 한여름에 에어컨을 너무 세게 틀어 놓고 지내다가 갑자기 더운 곳으로 나가면 신체가 적응을 못 해서 웬 '냉방병'에 걸린다는 낭설이 나돌았다. 그러나 이 역시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도시전설이다. 압력 변화로 인한 잠수병은 있지만, 이 정도 온도 변화가 무슨 면역력 저하 같은 병을 따로 일으키는 건 아니다.
만약 이런 병이 있다면 반대로 겨울에도 난방병이란 게 있어야 할 것이다. 그때도 실외와 실내를 넘나들면 -10도에서 영상 10도대로 온도 변화는 한여름 이상으로 들쭉날쭉할 텐데 말이다.

(6) 뭐, 고온뿐만 아니라 저온도 해롭다. 저온은 무슨 피부가 익는 등 단백질의 변성과는 관계가 없지만 역시나 물질대사의 효율을 떨어뜨리고 인체의 면역력을 떨어뜨린다. 운동 대신 추위에 벌벌 떨어서 에너지 소비를 촉진하겠다는 다이어트는.. 부작용이 너무 클 것이다.;;
자고로 입을 것이 먹을 것과 동급으로 괜히 중요하게 다뤄진 게 아니다. 성경의 구약 율법도 이불· 담요는 채무 담보로라도 빼앗지 말고 밤에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돌려주라고 말한다. 이건 사람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12/04 08:35 2022/12/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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