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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여지가 있는 발명

1990년대까지만 해도 휘발유로 달리는 어지간한 승용차의 연류 주입구에는 이런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UNLEADED FUEL ONLY”
lead는 ‘지도하다, 거느리다, 지휘’ 같은 뜻이 있지만, 동음이의어로 ‘납’이라는 뜻도 있다. 발음도 [liːd]가 아닌 [led]로 다르다.

그래서 위의 문구는 ‘납이 첨가되지 않은 연료만 쓰세요’, 즉 이 차는 무연휘발유 차량이라는 뜻이다.
영어가 동음이의어인 것처럼 한국어도 좀 혼동의 여지가 있는데 ‘무연’이란 납 성분이 없다는 뜻이지(無鉛), 배기가스가 전혀 안 나온다는(無煙) 뜻은 아니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웬 납? 자동차 연료에 납을 왜 집어넣는 걸까?

'테트라에틸'이라는 납 성분 첨가제는 내연기관의 노킹(knocking) 현상을 없애기 위해 발명되었다.
4행정 엔진이라면 흡입-압축-폭발-배기가 원활하게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폭발 때 연료가 모두 완전히 타서 없어지지 않고 실린더 벽에 일부가 잔류하다가, 예기치 않은 다른 사이클 때 작은 폭발을 일으키며 엔진을 푸덜덜~ 털털거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엔진의 효율을 떨어뜨림은 물론이고 자동차의 내구성과 안전까지 위협했다.

유연휘발유는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함으로써 자동차 기술의 발달에 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마법과 같던 이 발명은 얼마 못 가 환경 문제로 인해 치명적인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납이 인체에 얼마나 해롭던가? 그런데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그런 게 섞여 나왔으니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건강이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유연휘발유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일한 노동자들부터가 얼마 못 가 손발이 오그라들고마비되고 이상한 병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다.

오늘날 무연휘발유에는 납 대신 다른 대체 첨가제가 들어가 있다. 그리고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유연휘발유는 이미 옛날에 유통이 중단되고 퇴출되었다. 한 2, 30년쯤 전에는 우리나라도 주유소에 ‘휘발유 vs 무연휘발유’가 따로 있었지만, 오늘날은 무연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이 휘발유가 곧 무조건 무연휘발유이다. 요즘 컴퓨터계에서 IBM PC 호환 기종이라는 말을 안 쓰는 것과 같은 맥락임(IBM PC 호환이 아닌 PC가 없으므로.).

디젤 엔진에서 쓰이는 경유가 매연이 심하다고 하여 요즘은 유황의 함량을 줄이고(그 이름도 유명한 아황산가스의 주범!), 매연 저감 장치를 부착하고 시내버스를 천연가스 차량으로 대체하려고 국가에서 노력하듯, 휘발유에 대해서도 훨씬 전에 이런 식의 환경 개선을 위한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디젤 엔진에도 노킹 현상 같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휘발유 엔진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엔진 구조가 서로 완전히 다른 휘발유-경유 사이에 혼유 사고가 났다간 차 엔진이 다 망가지고 차가 개발살이 나지만, 같은 휘발유 사이에도 무연과 유연은 엔진이 서로 호환되지 않았기 때문에 한쪽에 최적화된 엔진에 별도의 변환 장치 없이 다른 쪽 휘발유를 넣어서도 역시 안 됐었다.

인류에게 거의 수천 년 만에 최초로 말보다 더 빠른 이동 수단을 선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우리가 너무나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는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사실은 완전 공해덩어리 물질로 이뤄져 있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컴퓨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잊을 법하면 무슨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가 백혈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이 나오는 것일 테고.

유연휘발유처럼 발명 당시에는 인류 과학 기술의 총아요 마법의 물질이라고 추앙받았지만, 오늘날은 환경 문제 때문에 완전히 천덕꾸러기가 된 대표적인 다른 물질로, 역시나 그 이름도 유명한 프레온 가스라는 상표명으로 잘 알려진 CFC (chlorofluorocarbon)가 있다.

암모니아 냉매에 비해 독성 없고 폭발 안 하고 안전하고 순환식 냉매로서의 성능도 좋고 게다가 가격도 저렴하고... 오존층 파괴만 안 하면 정말 인간이 20세기에 발명해 낸 가장 완벽하고 훌륭한 꿈의 물질로 두고두고 칭송받았을 텐데! 참 안타까운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오죽했으면, CFC를 소개하는 기자회견을 할 때, 프레온 가스를 사람이 훅 빨아들인 뒤 그 입김을 다시 훅 불어서 양초를 끄는 시범을 보였을 정도이니까. 안전성과 불연성을 모두 입증한 셈이다. 만약 그 물질이 가연· 폭발성 유독가스였다면 흠..;;;

오늘날도 비록 CFC가 오존층 파괴의 주범이라고 까일지언정, 냉장고 자체가 마치 자동차의 연료 탱크 마냥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된다거나 냉매의 폭발이나 유출 사고로 인해서 일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혀 없지 않은가. 이게 CFC 덕분이다.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CFC 대체 물질이 오랫동안 연구되어 왔고 국제적으로도 이 물질을 앞으로 완전히 퇴출시키기로 몬트리올 의정서까지 발효되어 있긴 한데, 이제 연구가 어디까지 진척됐나 모르겠다. 대체 물질은 CFC 원판이 내던 그 탁월한 성능까지 재연하기란 쉽지 않았지 싶다.

그런데 정말 기막힌 사실은, 유연휘발유와 CFC를 발명한 사람은 동일 인물이라는 것! 이를 발명한 토머스 미즐리(1889-1944)는 코넬 대학을 나온 미국의 과학자 겸 공학자· 발명가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철저한 환경오염 규제 기준 같은 게 없었다. 오늘날 줄기세포가 어떻고 DNA가 어떻고 하면서 생명공학이 각광을 받듯이 물리와 화학 분야에서 인류의 생활을 바꿔 놓은 발명이 이제 막 터져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때 듀폰 같은 회사의 명성이 어땠던가? 나일론 같은 합성 섬유, 에어컨, 형광등도 20세기의 발명품이다.

미즐리 역시 19~20세기를 움직인 과학 학문인 물리와 화학에 정통하고, 전자공학보다는 기계공학 쪽으로 세계를 움직인 공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러나 대표작 발명품들이 죄다 환경을 치명적으로 해치는 걸로 밝혀져 이것들이 그의 사후 오점이 되었다.

그는 말년에 건강이 안 좋아져서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이를 아마 유연휘발유로 인한 납 중독 때문으로 추정한다. 그는 이때도 공돌이 기질을 발휘하여, 자신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걸 보조해 주는 기계를 만들어서 자기 침대에다 장착했다. 그런데 1944년의 어느 날 밤, 신체에 연결된 그 기계가 오동작하는 바람에, 자고 있던 그의 목을 감은 채 압박했고... 그 후 이하 생략. 그는 그렇게 50대 중반의 나이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ㄷㄷㄷ;;

그의 죽음은, 배에서 실종된 후 변사체가 바다에 떠오른 루돌프 디젤만큼이나 허무하고(디젤 엔진의 발명자),
황열병을 연구하다가 자신이 그 병에 걸려 죽은 노구치 히데요만큼이나 어찌 보면 장렬하다.

Trivia:

1. 킹제임스 흠정역의 주번역자는 CFC 대체 물질을 연구하는 공대 교수인 걸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으로는 목회를 하고 성경을 만드느라 온 정신을 쏟고 있으면서 또 한편으로 동일 기간의 논문 출판 실적을 보면 정말 덜덜덜;;;.

2. 이타이 이타이 병은 카드뮴 중독 때문이고, 미나마타 병은 수은 중독 때문인데... 납 중독과 관련하여 생긴 병명은 모르겠다.

3. 죽은 후에 자기 연구가 디스당한 다른 유명한 사례로는,
명왕성: 1930년대에 미국인인 클라이드 톰보가 발견했기 때문에 미국에서 유난히 애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발견자가 1997년에 사망하자마자 천문학계에서는 이 행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했고, 2006년에 명왕성은 결국 행성에서 제외되고 왜행성급으로 강등됨. 자기 궤도에서 다른 천체를 완전히 몰아낼 정도로 충분히 중력이 크지 못하다는 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까 전에 언급된 노구치 히데요가 있다. 전자 현미경으로나 관찰할 수 있는 미세한 세균을 그게 발명되기도 전에 자기가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고 논문으로 발표했는데, 그게 나중에 오류로 드러나 죄다 부정되었다. 악의가 없는 오류에 불과한 건지, 아니면 고의적인 논문 조작인지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사후 위신이 크게 추락하고 말았다.

Posted by 사무엘

2011/12/21 19:15 2011/12/2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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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7호선을 공부하는 철덕이라면, 청담-뚝섬유원지 구간을 특별히 주목하게 될 것이다. 먼저 청담 역. 거기는 경기 고등학교가 있는 곳이고, 영동 대교와도 가깝기 때문에 자동차로는 그 경로를 타고 금방 갈 수 있다.

이 역이 굉장히 특이하다는 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시종착이 아닌 중간역으로서 보기 드문 2폼 3섬식 승강장인 데다, 비환승역으로서 역의 길이가 무려 650m에 달하는 걸로도 잘 알려져 있다. 600여 m 간격으로 역을 일일이 만든 저속철 분당선과는 달리, 역 수 대신 단일역의 역세권 길이를 늘린 현명한 결단을 크게 환영하는 바이다.

강 건너편에 있는 뚝섬유원지 역은 7호선 중간 구간의 유일한 지상역이며, 강북에서 한강 유람 시설에 쉽게 닿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역이다. 여기까지가 7호선 2차 개통 구간이다.
그리고 이 7호선이 한강을 건너는 경로가 바로 청담 대교.
1999년에 개통된 서울의 17째 한강 다리라고 한다.

원래는 이 교량도 5호선처럼 하저 터널로 건설할까 논의되기도 하였으나, 여차여차 끝에 지상 교량으로 건설되었다. 어차피 이 도로 덕분에 분당-수서 고속화도로의 생명력이 확 살아나기도 했고, 이게 철도만의 하저 터널로 건설되었다면 지금 같은 위치에 뚝섬유원지 역이 생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지하철 7호선이 강을 건너느라 지상으로 나오는 덕분에 인근의 건대입구 역은 필연적으로 굉장히 얕아졌다. 2호선 건대입구 역도 지상 고가임을 감안하면, 이는 두 역의 수직 환승 거리를 조금이나마 줄여 주는 긍정적인 효과도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얕은 지하철은 땅을 파헤치는 개착식으로 건설되었을 것이고, 지하철이 건설되던 동안 안 그렇도 좁아 터진 능동로 도로 일대는 극심한 정체로 몸살을 앓지 않았겠는지도 생각해 본다.
철도 덕후라면 철도와 도로, 도시 개발 역사까지 다 통달해서 이런 수읽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

청담 대교는 한강 다리들 중 유일하게 복층 교량이다. 즉, 기존의 2~4호선 다리들과는 달리 전동차 선로는 아래층에 있고 자동차 도로는 위층에 있다. 그래서 한 교통수단을 탄 사람이 다른 교통수단을 볼 일이 없다.

서울 지하철이 기존 철도들의 관행인 좌측통행을 버리고 돌연히 우측통행으로 건설된 유력한 이유 중 하나가 “열차와 자동차가 교량에서 나란히 달릴 때 통행 방향이 상이하여 사람들이 혼동하는 일이 없게 하자. 그래서 지하철의 통행 방향도 자동차의 그것과 일치시키자”였다는 걸 생각하면 복층 교량은 무척 참신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동호 대교(3호선)과 동작 대교(4호선)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자동차가 다니는 청담 대교 북단을 보면 굉장히 재미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거기에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똬리굴’처럼 생긴 구조물이 있다. 그것도, 터널이 아니라 지상에 마치 롤러코스터 선로처럼 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건대입구 쪽에서 청담 대교를 타고 남쪽으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이 길은 지하철 7호선처럼 수직으로 직진하며 내려가는 형태로 되어 있지가 않다. 마치 Q 모양처럼 360도 돌아서 매듭을 한 바퀴 만든 뒤에 다리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회전하는 게 아닌 직진인데 왜 그럴까?

청담 대교 북단에 있는 하행 진입로는, 건대입구 방면의 서울 시내(능동로)가 아니라 강변 북로 영동 대교 방면(서쪽)으로부터 오는 차량의 소통에 더 유리하게 만들어져 있다. 그 차들이 분당으로 더 편하게 가라고 말이다. 저 지도에서도 보이지만, 강변 북로에서 청담 대교 방면으로 꺾는 차선은 중앙선에서 가까운 1, 2차로쪽인 반면, 동쪽 잠실 대교 방면으로 계속 가는 차들은 우측의 3, 4차로로 가야 한다. 이 구조도 사실은 특이하다. 우회전하는 차가 중앙으로 가고, 계속 직진하는 차가 우측 차로로 가야 하다니?

그래서 강변 북로 서쪽으로부터 청담 대교로는 자연스럽게 직결되고 차선수도 더 많은 반면, 능동로에서 청담 대교로 갈 때는 한 바퀴 뺑 돌아야 하고 길도 더 좁다. 강변 북로와, 강변 북로→청담 대교 진입로를 모두 타넘었다가 다시 고도를 낮추기 위해서이다.
철도에서나 존재하는 것 같던 똬리굴이 청담 대교에 저렇게 존재하는 셈이다.

다만, 청담 대교 상행은 그렇지 않아서 능동로로 진입하는 건 뺑뺑이 없이 곧장 된다. 강변 북로만 타넘으면 되니까 하행만치 더 높아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

그리고 강변 북로의 동쪽에서 청담 대교로 진입하는 길은 없다. 더 서쪽에 있는 서울 강남 방면으로 갈 거라면 그냥 인근의 영동 대교를 이용하면 되고, 분당 쪽으로 가려면 굳이 청담 대교로 우회할 필요 없이 그냥 국도 3호선과 성남 대로를 타면 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청담 대교는 지하철과 자동차 모두의 관점에서 재미있는 특성이 존재하는 교량이다. 나중에 이용할 일이 있을 때 더욱 눈여겨보도록 하자.

Posted by 사무엘

2011/12/14 19:44 2011/12/14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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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주요 국도

※ 1호선

북쪽으로는 통일로(자유로와 혼동하지 말 것)를 경유한다고 하는데 그건 잘 모르겠고,
은평구에 있는 서울 지하철 6호선의 연신내-DMC 구간을 따라 지나는 도로가 바로 국도 1호선의 일부이다. 옆에 작은 하천이 있는 바로 그 길 말이다.

그 후 월드컵 경기장을 빙 둘러싼 후 성산 대교로 한강을 건너고, 안양천을 따라 쭈욱~ 남하한다. 일명 서부 간선 도로 되겠다.
그렇게 남쪽으로 가다가 금천 IC를 지나면 서해안 고속도로로 이어지는데, 거기서 국도 1호선은 오른쪽으로 쏙 빠져서 안양부터 수원까지는 '경수 대로'를 경유하게 된다.

대전까지는 철도 경부선과 선형이 유사한 편이며 특히 세류-오산대 역 사이는 철도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하다. 다만, 대전은 서쪽 외곽(유성구)만 살짝 비껴 가고, 공주 쪽에 예상보다 더 가깝다.
논산 육군 훈련소 입소 대대가 있는 바로 그 도로를 지나며, 남쪽으로는 목포까지 간다. 경부선+호남선을 합쳐 놓은 선형인 듯.

※ 3호선

서울· 수도권의 동쪽을 세로로 관통하는 도로이다. 북쪽은 경원선과 굉장히 비슷한 선형이어서 소요산 역을 빠져나가면 있는 도로가 바로 국도 3호선이다(녹양, 망월사, 도봉산 등도 포함). 그러다 도봉 역에서 꺾어서 수락산부터 중화까지는 서울 지하철 7호선 라인.
그 후엔 지하철이 상봉 역 방향으로 지상 도로와 무관하게 선형을 이탈하기 때문에, 국도 3호선은 이번엔 동부 간선 도로와 바싹 붙어서 나란히 지나게 된다.

그렇게 한없이 직진하여 남하하면 영동 대교와 마주칠 텐데, 거기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건 남부 순환 도로로까지 빠지는 국도 47호선 구간이기 때문. 3호선은 천호 대로에서 아차산 역까지 가서 꺾은 뒤, 잠실 대교를 타고 강을 건너며, 잠실에서부터 복정까지 서울 지하철 8호선의 선형을 탄다. 여기는 일명 송파 대로 되시겠다. 복정부터는 모란 역까지는 분당선 선형을 타며, 도로 이름은 그 이름도 유명한 성남 대로.

이렇듯 국도 3호선은 1, 7, 8, 분당 같은 유명한 종축 전철 노선을 골고루 거치나, 성남에서부터는 광주, 곤지암, 이천 쪽으로 가기 때문에 철도와는 전혀 무관한 길을 가게 된다.

※ 4호선

본인은 고향이 경주이기 때문에 이 길이 아주 친숙하다.
경주 시내의 동쪽으로는 경주 월드와 각종 꼬불꼬불한 산길을 거쳐서 감포 해수욕장까지 간다. (단, 반대편으로 보문 관광 단지의 각종 호텔과 컨트리클럽들을 경유하는 그 길은 국도 4호선이 아님.)

경주의 서쪽으로는 대구와 대전을 거쳐서 군산까지 간다. KTX 신경주 역은 이 국도에서 지방도 904호선으로 빠져나가면 갈 수 있으며, 경주 외곽에서부터는 중앙 분리대와 입체 교차로가 갖춰진 고속도로 뺨치는 수준의 좋은 길이 잘 만들어져 있다.

이 국도는 경주에서 대구까지는 경부 고속도로, 철도(중앙선+대구선)과 더불어 이 국도가 선형이 굉장히 비슷하며, 대구 지하철 1호선도 동쪽의 용계-안심 사이는 이 길을 따라 생겨 있다. 사실은 대구까지가 아니라 대전까지 이 국도, 고속도로, 철도는 삼형제라고 봐도 좋을 것 같다.

※ 6호선

인천에서 시작해서 강릉에서 끝났다는 점은 영동 고속도로(고속국도 50호선)와 비슷하다. 서울의 최고 도심이며 지하철 1호선의 선형이기도 한 종로n가를 포함한다는 점, 그리고 서울과 양평을 잇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는 점에서 서울 사람에게 아주 중요한 도로이다.

인천에서는 경인 고속도로(고속국도 120호선)와 비슷한 길을 가다가 김포 공항을 남쪽으로 감싼 후, 서울 지하철 5호선 마곡 역 부근에서 공항로와 합류한다. 서울 시내에서는 양화 대교로 한강을 건너고 합정~충정로(서울 지하철 2호선 선형. 중간의 고가 도로 포함), 충정로~서대문을 찍은 후 종로로 들어간다.

서울 동쪽을 관통한 뒤 구리 시내부터는 중앙선 철도와 비슷한 선형으로 양평까지 가는데, 강을 따라 펼쳐지는 경치가 아주 아름답다. 길도 4차선+중앙 분리대가 갖춰졌고 나름 잘 닦여 있다. 양평 이후부터는 정보 없음.

※ 7호선

부산에서 강릉까지, 고속국도 65호선(동해 고속도로 및 울산-부산 민자 고속도로)에 딱 대응하는 길이다.
울산 공항부터 경주 역까지는 동해남부선 철도와 매우 유사한 선형이며, 경주 역과 효자-포항 역 근처에 있는 큰길도 이 국도의 일부이다. 그 이북은 영득, 울진, 삼척. 드라이브를 하면서 동해 바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 39호선

안산, 부천, 서울 강서구를 지나서 의정부까지 가는 좀 어정쩡한 선형의 국도인데, 경기도 북부를 지나는 구간에서는 일부 선형이 서울 교외선 철도와 일치한다. 벽제, 장흥, 온릉, 송추 쪽을 참고하면 된다.

※ 46호선

국도 6호선과 마찬가지로 인천에서 시작해서 강원도까지 간다.
경인선과 매우 비슷한 선형으로 경인 대로를 포함하며(영등포 역 북쪽 도로가 바로 이 구간의 일부!), 여의도와 마포 대교를 찍고 천호 대로까지는 강변 북로를 경유한다.
진리 침례 교회와 사랑 침례 교회는 모두 바로 이 국도 근처에 있으며, 본인 역시 자가용으로 교회에 갈 때는 대부분의 경로가 이 국도에 있다.

지금까지 보았듯, 국도라는 건 그냥 선 긋기 나름이지 시설이나 운영과는 전혀 무관한 개념이다.
도중에 자동차 전용 도로가 있을 수도 있고 그냥 일반 시내의 큰 도로가 있을 수도 있다.
꼬불꼬불한 2차선 도로일 수도 있고, 크고 아름다운 8차선 고가 도로일 수도 있다.
옛날엔 어디 여행 가려면 전국 도로 지도 책자가 거의 필수품이었는데 지금은 내비가 있으니 운전하기는 정말 편해졌다.

Posted by 사무엘

2011/12/12 19:37 2011/12/1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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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철도를 한 5년만 더 일찍 알았으면 학창 시절에 지리와 물리 공부를 훨씬 더 열심히 했을 것이고, 지금의 국어 정보학 대신 아예 이 진로를 선택했지 싶다. =_=;; 하지만, 그 경우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태어나진 못했겠지. (한숨)

글을 쓰고 보니 비행기 쪽 얘기가 너무 길어지긴 했다만..

1. 달리는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에서 설명이 가능하다. 돌고 있는 팽이가 쓰러지지 않는 이유와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회전하는 모든 물체에는 잘 알다시피 원심력이 발생한다. 팽이는 좌우로 원심력이 발생하고, 돌고 있는 자전거의 바퀴도 상하로(=지면과 수직으로) 원심력이 응당 발생한다. 이는 바퀴 자체나 팽이가 크거나 무거울수록, 그리고 회전 속도가 빠를수록 더욱 커지며, 이 상태가 관성에 의해 유지되다 보니, 자전거의 안정적인 주행이 가능해진다. 이따금씩 발생하는 바퀴 좌우의 무게 불균형이 상하 원심력으로 극복 가능하고, 균형 보정을 위한 핸들 조작이 가해지는 한 자전거는 쓰러지지 않는다.

자전거는 고효율· 친환경 교통수단으로서 인간의 매우 유익한 발명 중의 하나이다.
여담이다만, 꼭 원심력 때문은 아니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이런 식으로 의문을 품을 법한 현상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 자전거 페달로는 전진만 가능하고 후진이 되지 않는 이유는?
- 고압선 위에 앉은 새가 감전되지 않는 이유는?
- 종이 그릇으로 물을 끓였는데 종이가 타지 않는 이유는?

2. 철로 만들어진 집채만 한 배가 어떻게 물에 뜰까?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부력(buoyancy) 덕분이다.
물은 공기와는 달리 그렇게 가벼운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 물질이나 호락호락 가라앉히지 않는다. 아니, 질량을 가진 모든 유체(fluid)엔 원래 그런 특성이 있다. “너만 중력이 있냐? 나도 있다” 그래서 유체 속의 물체를 밀어낸다. 그 이름도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 되시겠다.

쇠로 만들어진 배가 물에 뜨는 것은, 그 배의 무게에 해당하는 물의 부피만치 배의 아랫부분이 이미 물에 잠겨서 힘의 평형이 상하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물의 밀도도 만만찮으며, 배도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물속에 가려져 있다.

물체 전체의 부피만 한 물의 무게로도 물체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야만 물체가 물 밑으로 한없이 가라앉을 것이다. 그래서 내부에 공기가 많은 깡통은 물에 뜨지만 찌그러진 깡통은 곧장 가라앉는다. 물이 새기 시작한 배가 침몰하는 건, 당연한 말이지만 물이 공기보다 훨씬 더 무겁기 때문.

물에 여러 물질을 녹여서 밀도를 키우면 부력도 응당 증가한다. 그래서 맹물에서는 가라앉을 물체가 소금물에서 뜨며, 최강의 소금 농도를 자랑하는 사해 바닷물은 사람까지 둥둥 띄우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배가 물에 뜨는 것은 어디서나 재연 가능한 과학 법칙일 뿐, 물 위를 걸은 예수님의 기적(마 14:25-26) 같은 현상은 결코 아님을 알 수 있다. ^^;;

3. 공기보다 무거운 비행기는 어떻게 하늘로 뜰 수 있을까?

이건 위의 질문보다 더욱 어렵다. 하긴, 18~19세기엔 저명한 물리학자들조차도 가능하다고 믿지 않았던 것이니 말이다. 비행기의 발명은 가히 어마어마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A4 용지를 준비해서 직사각형의 네 변 중 짧은(21cm짜리) 변을 이루는 두 꼭짓점을 손으로 잡고 입가로 가져간다. 잡고 있지 않은 맞은편 두 꼭짓점은 아래로 축 늘어질 것이다.
이 상태로 종이의 윗부분(아랫부분 말고)을 힘껏 훅~ 불어서 바람을 만들면...;; 놀랍게도 늘어졌던 종이가 벌떡 위로 펴질 뿐만 아니라 더욱 위로 올라가려 하면서 펄럭거리기까지 할 것이다.

종이의 아랫부분을 훅 불면, 아래로 쳐져 있던 종이가 바람을 직접 받아서 위로 펴지는 게 이해가 되겠다만, 종이가 닿지 않는 윗부분에 바람이 부는데 왜 아래의 종이가 붕 뜨게 될까??

바로 이것이 오늘날 고정익 항공기가 하늘로 뜨는 이론적 배경이라고 한다. 베르누이의 원리라고 불리는데, 비행기의 날개는 폼으로 있는 게 아니라 주변 공기의 흐름을 교묘하게 바꿔 압력차를 만듦으로써, 아까 저 종이와 같은 양력(lift)을 만들어서 비행기를 띄우기 위해 존재한다. (잘 이해는 안 되지만, 뭔가.. 냉장고와 에어컨의 동작 원리만큼이나 신기하다) 날개 표면이 이물질로 인해 조금만 울퉁불퉁해지기만 해도, 생성되는 양력이 크게 떨어지므로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공기의 흐름부터 만들어야 이로부터 양력이고 자시고가 생길 것이므로 이를 위해서는 비행기 자체가 무진장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이것이 바로 비행기의 엔진이 하는 일이다. 비행기의 엔진은 공기를 뒤로 뿜음으로써 추력을 만들지, 자동차의 엔진처럼 피스톤을 회전시키는 방식은 아니다. 이 메커니즘 때문에 고정익 항공기는 이륙을 위해 긴 활주로가 필요하며, 반대로 사뿐히 내려앉기 위해서도 활주로가 필요하다.
자동차의 고급 옵션 중 하나인 ABS 브레이크가 원래는 이런 비행기에서 쓰이던 기술이 자동차에도 덩달아 도입된 걸로 잘 알려져 있다.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주변의 컨테이너나 소형 승용차마저 팬에 빨려들어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괴력으로 주변 공기를 빨아들인다. 그래서 비행기가 이륙할 때는 ‘웽~’하는 엔진 내지 팬 소리보다도 ‘쿠르르릉!’하는 박진감 넘치는 바람 가르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이다.

그럼, 고정익 항공기 말고 다른 비행체는 어떨까?

- 헬리콥터: 가벼운 바람개비를 빠르게 돌려 놓고 손에서 떼면, 이것도 잠시나마 하늘에 살짝 떴다가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 고정익 항공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발상으로 만들어진 이런 부류의 회전익 항공기는 비록 수송력과 경제성은 크게 떨어지지만, 한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초고속 이동을 해야만 양력이 유지된다는 한계에 매여 있지 않다. 그래서 긴 활주로 없이도 손쉽게 이· 착륙을 할 수 있으며, 공중에서 3차원 여섯 방향으로 자유롭게 이동하고 공중에서 정지해 있을 수도 있다.

헬리콥터의 로터는 개념상 날개이지 프로펠러가 아니다. 회전익 항공기라는 개념은 수백 년 전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상상을 했을 정도이지만, 이것이 실제로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로터를 회전시킬 수 있는 가벼우면서도 출력이 굉장히 좋은 고성능 엔진이 먼저 발명되어야만 했다.

- 비행선: 물에 적용되는 배, 아니 어찌 보면 잠수함의 원리를 공기에다가 접목-_-한 것이다. 비행체의 밀도가 공기보다도 가벼워지도록 어마어마하게 큰 부피의 수소나 헬륨을 적재한다. 고도 조절은 잠수함이 심도를 조절하는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하며, 엔진은 방향과 속도 조절용으로만 쓴다. 매우 저렴한 동력비로 하늘에 조용하고 우아하게 뜰 수가 있고 심지어 엔진이 꺼져도 곧바로 추락하지는 않으나..... 역시 수송력이 열악하고 주행 속도가 매우 느리며(빨라 봤자 100~150km/h대. 자동차급밖에 안 됨), 비행 고도도 오늘날의 항공기보다 훨씬 낮은 데다가 덩치까지 엄청 크다 보니 보안에도 매우 취약한 게 흠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비행선은 양력이 아니라 부력-_-으로 뜨기 때문에 날개는 없다.
그런데, 공기보다 밀도를 낮추기 위해 비행선이 얼마나 덩치가 커야 했냐 하면.. 위의 그림과 같은 정도이다. 우주에서 가장 가벼운 원소인 수소를 집어넣었는데도! (그림은 과거의 수소 비행선 힌덴부르크 호, 보잉 747, 그리고 여객선 타이타닉 호) 그래 봤자 저 비행선의 승객 정원은 초음속 여객기 콩코드와 비슷한 겨우 100여 명 안팎으로, 무려 450명 가까이나 탈 수 있는 747의 1/4 수준도 안 됐다.

- 로켓: 다른 항공기들은 하늘로 떠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 목적인 반면, 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하늘 위로 최대한 높이 뜨는 것 자체만이 목적이다. 유체고 나발이고 없이 오로지 작용· 반작용의 법칙만을 이용해서 나아가므로, 날개도 필요 없고 오히려 유체의 저항이 없는 진공이 유리할 것이다. 연료 소모가 매우 심하고 유인 로켓의 승무원은 발사 직후에 어마어마한 압력에 짓눌려야 하지만, 지구의 육중한 중력 가속도를 뚫고 수백 km 이상의 고도로 우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이것만이 현실적으로 유일한 방법이다.

지구 중력의 탈출 속도는 초속 11.2km가량 된다. 지표면에서 이 정도 속도로 공을 던지면 지구로 되돌아오지 않을 경지에 이른다는 뜻. 하지만 이 속도는 음속의 무려 30배를 상회할 뿐만 아니라, 공기와의 저항과 마찰, 그리고 엔진 기술의 한계 때문에 지표면에서 결코 낼 수 없는 속도이다. 성층권에서 겨우 마하 2.x 정도로 비행한 콩코드만 해도 소닉 붐 같은 충격파에, 공기 마찰 때문에 열받아서 수백 도로 벌겋게 달아오른 기체의 유지 보수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로켓은 그 탈출 속도보다는 당연히 훨씬 느리게 뜬다. 하지만 발사 후에도 연료 배기 가스를 뿜어서 동력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기 때문에 그 밑천으로 지구 대기권을 빠져나가는 것이다.

- 새들-_-: 비행기를 연구하고 설계한 사람들이 새의 날갯짓을 매우 세밀히 관찰하고 벤치마킹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새들은 인간이 만든 비행기처럼 주변 공기를 다 빨아들이지도 않으며, 헬리콥터처럼 날개에 이물질이 닿는다고 해서 바로 박살이 나지도 않는다. 항공계의 영원한 골칫거리인 조류 충돌(bird strike)이나 연료 폭발 같은 건 더욱 없다. 새의 놀라운 비행 원리에 대해 이런 거야말로 진화의 산물로는 결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지적 설계와 창조의 증거라고 특히 창조 과학 좋아하는 분들이 많이 주장을 하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1/11/27 08:26 2011/11/27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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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대라 하면, 흔히 주류 대중 교통수단과는 완전히 소외되어 있는 오지만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역세권을 넘어서 아예 전철역의 코앞에 닿아 있는 군부대도 있다. 보안상, 그게 지도에 표기되어 있지가 않을 뿐. 다음 예를 살펴보자.

1. 세류(1호선)

공군 부대가 바로 옆에 붙어 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수원 비행장이 바로 이것임. 민간용 위성 지도로 보면 역 서쪽이 온통 논밭뿐이지만 이는 훼이크이다. 지상에서 위장(?)도 잘 해 놨는지 열차 차창 밖만 봐서는 주변에 군부대나 비행장이 있다는 걸 거의 눈치챌 수 없다. 나도 몰랐으니까.

세류는 전철의 시종착역 중 하나인 병점과, 일반열차를 취급하는 수원 사이에 낀 마이너 콩라인 역이긴 하나 군부대로 인한 고정 수요가 있는 중요한 역이다. 면회 가는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으며, 이곳에 항공유를 수송하여 공급하는 수단 역시 응당 철도이다. 부대 내부로 이어지는 선로가 있음.
이곳엔 미군 부대도 있기 때문에 국군 공군 장병뿐만 아니라 카투사 역시 이쪽으로 발령 가는 경우가 있다.

2. 녹사평(6호선)

민간 지도에서 녹사평 역 주변으로 아무것도 없는 방대한 공간(위성 지도에서는 다 숲으로 땜질-_-)을 차지하고 있는 건 잘 알다시피 미군 부대이다. 서울 용산구의 금싸라기 땅이라니, 아마 대한민국에서 땅값 가장 비싼 곳에 있는 자신만의 신세계일 것이다.

녹사평은 군부대 근처에 있는 역치고는 너무 으리으리하고 화려하게 지어진 감이 없지 않다. 내가 예전 글에서도 썼듯, 서울 지하철 11호선과의 환승에다 서울 시청 신청사 이전을 염두에 두고 화려하게 만들어졌지만, 지금은 둘 다 계획이 흐지부지되었으니 역만 저런 신세가 됐다. 마치, 통합 글꼴 HFT가 제정되었지만 오늘날까지 그걸 쓰는 건 결국 아래아한글밖에 안 남았고 아래아한글 전용 글꼴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 것처럼 말이다. ㄲㄲㄲ

3. 남태령(4호선)

서초구와 관악구의 경계인 동작 대로에 자리잡은 이 역은 역세권 수요 때문도, 환승 때문도 아니요 그냥 서울 지하철 4호선과 과천선의 직결 사업의 산물이다. 동쪽의 서초구 방면으로는 방배2동 전원 마을이 있는데 산으로 뒤덮인 서쪽에 있는 것은... 무려 그 이름도 유명한 수도 방위 사령부이다. 참고로 국가 정보원과 거의 같은 위도상에 있다.

전원 마을은 진짜 말 그대로 단독 주택 일색이며, 3층 이상의 건물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서울 안에 있는 시골 마을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코앞의 군부대로 인한 고도 제한+개발 제한 크리 때문. 다만 여느 그린벨트 지대와 크게 다른 건, 코앞에 전철역도 있다는 점 되겠다. 마을 어귀에 나 있는 남태령 역 1번 출구의 모습은 짤방으로도 알려져 있다. 상업 시설이 아닌 한가한 주택가에 덩그러니 놓인 지하철 출입구는 역시나 이색적이다.

참고로 남태령 역은 서울의 최남단 역은 아니다. 1호선의 금천구청 역이 최남단이었는데, 이 기록을 신분당선의 청계산입구 역이 또 갱신했다.
남태령 역은 깊은 섬식 승강장이며 에스컬레이터 형태를 포함해 전반적인 구조가 이대 역을 쏙 빼닮았다. 이쪽 구간은 1기 지하철로서는 드물게 개착식이 아닌 터널식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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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질문: 수방사와 미군 본거지는 저쪽에 있는데, 그렇다면 육본은 어디 있을까?
대전의 위성 도시이면서 국방 도시로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한 충남 계룡시에 있다(원래는 논산시 영역이었음).
그리고 여기에 육본뿐만 아니라 육해공 3군의 본부가 모두 자리잡아 있다.
이래저래 논산을 비롯해 이쪽 일대는 육군 훈련소도 있고, 군사 이미지가 굉장히 강한 듯.

계룡 역의 예전 명칭은 두계 역이었다. 무궁화호 중에도 무정차 통과 열차가 있을 정도로 태생이 마이너한 작은 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중요성 덕분에 현재는 일부 호남선 KTX가 정차하는 이색적인 위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육본이 그 역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는 건 아니다. 거기서 북서쪽으로 직선 거리로 4km남짓 더 가야 된다.

육본, 아니 3군 본부가 있는 곳은 그 호남선 개태사-신도 R400짜리 드리프트가 있는 곳과 상당히 가깝다. 즉, 계룡보다도 과거의 신도 역에서 더 가까웠지만 현재 그 역은 폐역되었음.
군 본부는 민간 지도에는 당연히 표기되어 있지 않으므로 지도에서 찾을 생각은 하지 말라.

Posted by 사무엘

2011/11/25 08:28 2011/11/2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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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크리스천이라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심보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나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황금 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covet-ous-ness (동-형-명사)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고, lust도 그 자체가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단어이다.

살인· 간음보다야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종종 간과될 뿐이지, 탐욕도 살인· 간음만큼이나 십계명의 마지막 10째 계명으로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금기 사항이다.
아니, 저걸 충족하기 위해서 살인(6)· 간음(7)· 도둑질(8)이 저질러지며, 그걸 합법의 이름으로 위장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9)이 저질러지는 게 태반이니, 알고 보면 탐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잠시 첨언하자면, 본인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죄들이 죄라는 n차원의 벡터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여러 점· 선· 면이라고 했을 때, 십계명의 각 계명이 커버하는(금지/정죄하는) 영역은 그 벡터 공간의 기저 벡터들이 아닐까?
물론 기저 벡터이니 각 계명들은 벡터 공간 안에서 서로 선형적으로 독립(linearly independent)일 것이다.

아놔 갑자기 웬 선형대수학 드립이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마치 삼원색의 각 색을 여타 색깔의 혼합으로 얻을 수 없듯이, 탐욕은 여타 다른 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천이라는 것.
살인과 도둑질은 몸으로 짓는 죄요, 간음은 몸'에다' 짓는 죄요, 거짓 증언은 입으로 짓는 죄라면,1) 탐욕은 마음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이다.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성경은 구약 율법 시절에서부터 지도자의 요건으로 탐욕을 미워하는 성품을 제시하고 있으며(출 18:2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기 드립 범죄 역시 그 원인이 탐욕이었다고 거듭해서 말한다(민 11:4, 시 106:14). 아간은 또 어땠던가(수 7:21)?
성경 66권을 통틀어 최악의 양다리 회색분자요 잔머리 굴리기의 달인으로 기록된 발람을 보라. 성경은 그도 탐욕이 문제였다고 지적하면서 신약에서까지 그를 두고두고 깐다(벧후 2:15, 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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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싫은 녀석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출처는 개그 만화 일화 종말편.

이 탐욕 앞에서는 그 대인배인 사도 바울마저 GG를 쳤다! (롬 7:7) 이거 내가 보기엔 꽤 심각한 사실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ㄲㄲㄲㄲ 타! 암! 욕!

그렇게도 육신의 스펙이 완벽한 엄친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충분했다고 생각한 바울도, 그 계명으로 인해 고꾸라지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한 것이다.
뒤이어 유명한 골 3:5는 탐욕이 우상숭배와 같다고 선언하며, 딤전 6:10은 돈을 사랑함이 그야말로 모든 악의 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지간(약 4:4)이며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도 없다(마 6:24, 눅 16:13).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이, 돌부처 앞에서 절하고 조상신 숭배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각종 무례한 짓(병크라고 부르는-_-)을 저질러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난 그 친구들이 지능안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쉴드를 치고 싶다만, 뭐 지능안티가 아니라 해도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러는 당신도 하나님을 들러리 삼아서 돈님을 더 섬기고, 예수 믿어서 삼박자 축복 받고 팔자 펴고 예수 이름으로 주식 대박이나 나고 로또가 당첨되고 벼락부자 되길 바라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 상태도 그런 돌부처 섬기는 미개한(?) 부류들과 똑같다. 동일한 목적인데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 극과 극은 통한다! 이것이 성경의 판결이다. 아시겠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나도 더 열심히 살고 분발해야겠다고 단순히 긍정적으로 다짐하는 걸 넘어...!
자신의 정당한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며 자기 신세 비관하고, 남이 잘 되는 걸 배아파하고 그게 미움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탐욕이며 죄악이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심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 말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라)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ㅆㅂ” 라고 한탄하는가?
당신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정확히 위반했다. 근거는 출 20:17을 찾아보면 다 나온다.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하면서 부럽고 갖고 싶고 배가 아픈가?
약간 transform을 하자면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저촉이다.
자기도 유부남인데 친구나 친인척의 배우자가 너무 예뻐 보이고 같이 자고 싶은가? 이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보기엔 요즘 TV 광고, 인터넷이 전-_-부 저걸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칼 들고 강도짓 하는 걸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은 저런 것도 금지하신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교과서적으로 훈계조로 “그러니 넌 무조건 닥치고 꾹 참고, 욕심이라곤 부릴 생각도 하지 마”로만 결론을 낼 거라면 내가 이런 글을 길게 쓸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어디까지가 인간의 정당한 욕구 충족이며 어디부터가 죄악인 걸까?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도 일부 아주 완전 막장 인생이 아닌 이상, 자기도 욕심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건 아니다.
이렇게 안 하면 이 험악한 세상에 눈 뜬 채로 코 베이고 바보 신세 되고, 뒤쳐지고 도태하는 것 같으니까 치열하게(?) 산다.

게다가 사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을 잘 되게 해 주려고 나쁜짓 하는 사람도 많다. 성경에도 마 7:11과 눅 11:11-13에서 이런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케이스들 때문에, 직업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안 품으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아예 안 꾸리고 평생 동정-_-으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천주교나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까지 있다. 음, 그럼 사랑의 열매를 허락해 준 하나님이 나빴던 것이군. -_-

인간이 말세에 자동차와 컴퓨터 같은 눈부신 기계 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나타나고 있는 분명한 추세가 있다. 인간의 심성 내지 양심을 이젠 도저히 믿을 수 없고(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 대신 눈에 보이고 분명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위주로 사회 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과 심성은 눈에 절대 보이지 않고 측정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제도를 개혁해도 입시 병폐는 없어질 수가 없으며, 이렇게 땅 좁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콩라인인 우리나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그런 형태로라도 애들 교육을 빡세게 안 시킬 수가 없다. 정말 측정해야 하는 걸 인간의 기술로 측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 구조에서 그나마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건 돈뿐이니, 영적 조명이 없이는 세상은 결국 황금 만능주의와 양극화로 당연히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고삐 풀린 탐욕은 바이러스의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욕 얻어먹어도,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나도 안 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이제 세상은 적당히 먹고 살 만하게 지내는 중산층이라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잠 30:8의 기도 제목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의식주' 중에 주(집!)조차도 빠진 채, “생명이 붙어 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걸로 만족하라”는 성경 말씀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이고 지킬 수 없는 명령인 것 같아 보인다. (딤전 6:8)

누구는 손 하나 안 더럽히고 돈으로 돈을 벌고 지내는 반면,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가난 구제는 나랏님이라도 못 한다”란 속담은 신 15:11로부터 미뤄 봤을 때 굉장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명언이다.3)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삭 줍기 같은 복지 제도는,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함과 동시에 수혜자도 직접 나가서 활동을 함으로써 생존할 만큼만 식량을 모으는 등, 여러가지 바람직한 면모를 갖추고 있긴 한데... 지금은 그조차도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악해졌으니 문제이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 구조라고 해서 그 대안이, 정부에서 부자들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눠 주는 것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교도소 인권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사고 한번 치고 빵에나 갔다 와야지”가 될 정도로 좋아져서는 안 되고,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신체 멀쩡한 인간이 “연금만 받으면 되니 이제 일할 필요가 없네”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정말 망조가 단단히 든 미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도 탐욕이지만, 사악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를 만든 것도 탐욕이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식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기는 복지 포퓰리즘을 혐오 수준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를 무슨 유럽의 복지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이상하게 열등감과 피해의식 조장하는 글 내지 통계도 싫어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 자리에선 언급을 생략함.

이제 슬슬 글을 맺겠다.
지금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특히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조차도 빚이 억소리 나는 수준이라고 하니, 이 세상에 그럼 도대체 진짜 채권자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극소수 석유· 에너지 재벌? 돈놀이를 세계적으로 잘 하는 은행? 도대체 누굴까?

결혼을 위해 집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누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분수껏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의 신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돈 돌아가는 통로 어디선가 지뢰가 빵! 터지기라도 하면, 전세계 경제가 가까운 미래에 수습 불가능의 막장 패닉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았으나, 그 처방은 영적 전투를 야기하며 결국은 역시 개인의 믿음과 영적 상태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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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다고 탐욕이라는 번뇌가 극복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ㄲㄲㄲㄲㄲ

Notes:

1) 성경은 당연히 거짓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사탄 마귀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말한다.
하지만 십계명의 제9계명은 쉽게 말해, 돈이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 부당한 이익을 위해 거짓말--특히 법정에서 위증--을 하지 말라는 문맥이다. 일체의 거짓말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려고-_-, 데이트 분위기를 매끄럽게 유지하려고 당장 마음에 없는 말을 좀 한 걸 갖고 나중에 하나님이 “너 임마, 그때 왜 거짓말 했어?” 라고 책망을 설마 하시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고 deterministic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ㄲㄲ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white lie가 성경적으로 다 바람직하기만 한 건 또 아닌데.. 대표적인 예로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려 주는 게 좋겠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열하자면 글이 또 길어지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쓰자.

2) 발람의 길, 발람의 잘못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

3) 천년왕국은 절대로 공산주의의 이상향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사유 재산 제도는 건재하며, 가난한 사람과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 사유 재산은 마치 부부간의 사생활만큼이나, 그리고 보호 모드 운영체제에서 각 프로세스의 메모리 공간만큼이나 철저하게 개인별로 보장된다.
구약 성경에 '네 포도원', '네 우물'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Posted by 사무엘

2011/11/10 19:21 2011/11/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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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함수와 회전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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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림이 고등학교 수학 II에서 배우는 진정한 묘미 중 하나입니다.

(0, 0), (x, 0), (0, y)의 직각삼각형을 원점을 축으로 θ만큼 돌리니까 원점은 그대로고 밑변은 (x cosθ, x sinθ)가 됩니다.
그런데 밑변보다 y만치 위로 떠 있던 점은, 회전 과정에서 가로로는 높이 y의 sin값만치 “감소”(왼쪽으로)하고, 세로로는 cos값만치 증가합니다.

그러니 (x cosθ - y sinθ, x sinθ + y cosθ)의 형태가 되는데, 이는 원래 점인 x, y에 대한 일차변환으로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결국

(cosθ, -sinθ)
(sinθ,  cosθ)


가 됩니다. “꼬마신 신꼬”라고 외우는 그 유명한 회전변환 행렬입니다.
이걸 모르면 특히 컴퓨터그래픽에서 현란한 벡터 조작이나 3차원 그래픽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행렬식의 값은 1 (임의의 각도의 cos 제곱과 sin 제곱의 합은?), 따라서 이렇게 도형을 일차변환 시키더라도 원래 도형의 넓이를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역행렬은 sin 쪽 부호만 맞바꾸면 됩니다. 기하학적으로, 상식적으로, 역행렬 공식에 맞춰 생각해도 전부 명확합니다.

공통수학에서는 삼각함수란 게 있다는 것, 그리고 한 삼각형의 세 변과 세 각이 주어졌을 때 삼각함수가 이런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기하학인지 대수학인지 감을 못 잡는 이 괴상한 함수는 흥미보다는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암기를 강요하면서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수학 II로 오면서 단순히 삼각형과 관련된 것이 아닌 삼각함수 자체의 특성을 더 깊게 공부하게 됩니다. 이 회전행렬은 삼각함수의 덧셈 정리를 유도시킵니다.
특히, 저 행렬에다가 회전 행렬과 같은 각인 (cosθ, sinθ) 열벡터를 뒤에 곱해 주면 cosθ와 sinθ 값으로부터 cos 2θ, sin 2θ의 값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값으로는 아예 cos²θ, sin²θ의 값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cos 2θ = cos²θ - sin²θ,  cos²θ = (cos 2θ + 1)/2
  sin 2θ = 2 cosθ sinθ

공을 공중을 향해 몇 도로 던져야 가장 멀리 날아가는지를 삼각함수를 계수로 하는 이차방정식으로 풀어 보면, 결국 cosθ sinθ 값(곱)을 최대로 하는 θ 값을 구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이는 sin 2θ의 값을 최대화하는 것과 같으므로 θ는 45도임이 명확해집니다.

sin과는 달리 cos은 양 함수의 제곱의 합으로 바뀐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2θ보다 더 일반적인 α와 β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데요, 덧셈 대신 두 각의 차이를 나타내는 뺄셈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cos(α-β) = cosα cosβ + sinα sinβ
  sin(α-β) = sinα cosβ - cosα sinβ

cos을 보면 이는 정확하게 벡터 내적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x, y 성분인 벡터를 거리와 각도로 바꿔서 표현해 보면, Ax·Bx + Ay·By가 왜 |A||B| cosθ인지가 명확해집니다. 공통수학 때 배운 코사인 제 2법칙과도 이미 관련이 있고요.
cos은 90도일 때 0이 되기 때문에 두 벡터가 기하학적으로 직각인지 판단할 때 유용히 쓰일 수 있습니다. 부호가 갈리는 기점이 직각이죠. 시계에서 3시를 향하고 있는 벡터가 있다면, 5시나 1시를 향하는 벡터와는 양수이고, 7시나 11시 벡터와는 음수가 되는 셈입니다.

그럼 sin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sin은 90도가 아닌 0도를 기점으로 부호가 바뀝니다. 3시를 향하는 벡터 기준으로 5시나 7시를 향하는 벡터의 부호가 서로 같고, 1시, 11시 벡터와는 서로 다릅니다.
정보 올림피아드 대비하여 기하 알고리즘 공부할 때, 특히 convex hull 같은 거 구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게 세 점이 시계 방향인지 반시계 방향인지 판단하는 공식인데요, 그게 바로 sin과 관련이 있습니다. Bx·Ay - By·Ax입니다. 이 식은 두 벡터가 일직선상에 있을 때 값이 0이 됩니다.

그러나 cos 계열인 벡터의 내적은 sin과는 달리 3차원 이상에서도 일관되게 구하는 공식이 있고 임의의 차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계 방향 여부는 2차원 평면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sin과 관련이 있는 벡터의 외적 역시 3차원 공간에서만 정의됩니다.

이렇게 한바탕 수학 II 초· 중반에서 홍역을 치른 삼각함수는 나중에 아예 sin(x)/x의 0 극한을 구하고 삼각함수를 미· 적분함으로써 더욱 해석학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수학 교육 테크트리에서 맨 마지막으로 지어지는 최고급 건물 내지 유닛은 단연 미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1/11/02 19:31 2011/11/0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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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下

첫째, 하나님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자비심이 없다. 지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정서가 좀 이상하고 사법 체계도 그런 관행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나쁜짓을 저질러도 가해자 역시 죽었다거나,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거나, 우울증 때문이라거나,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면 굉장히 동정· 미화와 정상 참작을 잘 한다. 싸움을 중재하는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며 시빗거리가 정당한 것인지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 처지가 더 딱한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누가 더 많이 얻어맞고 다쳤는지를 더 감안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냥 눈에 보이는 결과로, 객관적인 증거 확보가 용이한 쪽으로만. -_-)

하나님은 이런 사고방식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지옥엔 히틀러, 유 영철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너무 착해서 구원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비참하게 살다 불쌍하게 죽은 사람도 엄청 많이 가 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죄는 철저히 미워하고 회개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로 인해 민망해하고 가슴 아파하고 죄의 결과를 수습하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죄를 무슨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인 것처럼 여기고 동정하는 것, 죄 지어서 당연하게 받은 벌을 무슨 의인이 받는 시련과 영적 전쟁처럼 미화하는 것, 그 사람도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감싸는 것...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에 대해 아주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종교의 탈을 쓰고 부추기는 위선자들에게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용공 사상만 불온 사상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에는 무한 관대하다.

제아무리 인간의 죄가 무겁고 심각하다 한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명예 살인이란 건 없다. 자해나 자결로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과 서양 문화권 사이에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서로 극과 극으로 갈라 놓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진짜로 죽어야 할 때에도 동물을 대신 죽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혈이 대가로 치러졌는데 그 무슨 죄인들 회개하면 사해지지 않겠으며, 과거에 어떤 나쁜짓을 한 사람이라도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는가? 죄에 대한 찔림부터 있은 후에 그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복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법칙이다. 예수님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성도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넌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도 없다. 너처럼 우리 교회를 배반하고 내 명예에 먹칠을 한 녀석은, 부끄러운 줄 알면 나가서 곱게 할복해라" 그러시지 않는다!

셋째, 박해 상황만 아니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와 대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양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심도 믿음도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발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다. 크리스천은 불신자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말도 안 되고 보편적인 이성과 양심에 위배되는 사항을 믿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모습은 불신자에게 어떤 형태로 비쳐져야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사람에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래서 성경엔 굳이 야고보서 말씀을 차치하고라도 요 13:35, 요일 4:11-12 같은 준엄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사람하고부터 먼저 화해하라고 말한다(마 5:23).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가 절대 아니다. 대인 관계와 대신(對神) 관계는 별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더라도, 죄의 결과로 인해 야기된 잘못과 허물은 사람 간에 서로 고백하라고 성경이 명령한 것이다. (약 5:16)

- 하나님께 자백(소스 코드 차원에서): 돈을 사랑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을 구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죄는 결국, 선하신 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 그분 말씀을 믿지 않은 잘못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됐다 등등..

- 사람에게 자백(실행 결과 차원에서): 오늘도 내 성질대로 욱하고 말았는데 이건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내가 좀더 당신 입장에서 생각을 못 했다, 이 사고는 내가 잘못된 지시를 내려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뭘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 내가 몰래 슬쩍 했다 등등...

명확하지 않은가? 그 후 회개의 열매는 당연히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완전 정반대로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수습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임재하고 죄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진 사람이라면, 저렇게 안 하는 게 비정상이다.

남이 받아들이든 말든 내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면 사과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그럼 평생 나쁜 짓 해 놓고서 주둥이로 예수 믿고 회개만 달랑 하면 천당 가냐?” 뭐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나올 일이 없게 하나님은 다 배려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라도 그런 식의 실족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던 상황에서는 온갖 나쁜 짓 다 하다가, 죄가 탄로나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 싹 씻듯이, 잘못을 일단 인정하는 게 전략상으로 더 나으니까 '죄송~' 이러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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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 말이다. ㄲㄲㄲㄲㄲㄲㄲ 개그 만화 일화 3기 4화 요가 교실 편 -_-;;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또한, 몇 년 전엔 우리나라에서 어느 사형수가 그저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안절부절 못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마치 가룟 유다의 도피성 자살을 연상케 하는 이런 행위도 회개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며,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냥 속 시원하게 사형 집행 해 주는 게 당사자와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해서 훨씬 나을 텐데!

본인은 보지는 않았지만, 수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여러 스토리 중, 이런 장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 놈(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어?” 정말 가슴아프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한 저 두 사람은 “피해자 여러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길 원합니다” 같은 말이 입에 발린 위선으로 비치지 않도록, 더는 실족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어느 사역자보다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회개의 열매를 보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구원과는 완전 별개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개념이 있음을 첨언하고 글을 맺겠다. (요일 5:16-17) 이 사망이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도를 극단적으로 데려가시는 경우라든가 사회의 형벌을 의미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연쇄 살인 흉악범이 회개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형수이다.
기독교 만화 전도지를 보면, 안티들이 그렇게도 조롱하듯이 흉악범이 감옥에서 예수 믿어서 사형 당한 뒤 천당 가고, 그 반면 자기 의에 가득차서 예수님을 거부한 형사 내지 교도관은 죽어서 지옥 가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그 흉악범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는 지옥 가고 가해자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마저도 가능하다. 교리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 하나 최후의 보루. 성경은 사형수에게도 인격이 있네 같은 인권 드립-_-이나 치면서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사형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아서 천당 가더라도, 사형은 당하고서 그 뒤에 간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논리 체계이다. 지금도 사형 반대 외치면서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 위선적인 종교인들 역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다시 공부하면서 자기의 오류에 대해 깊이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CASE STUDY:

1980년엔 5공 시절을 떠들썩하게 한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이 있었다.
원조 교제로 여고생을 임신시키기도 하고 도박빚에 시달리기도 하던 어느 불량한 체육 교사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던 제자인 이 군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려 했는데, 가혹한 환경에서 감금당해 있던 이 군이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 군이 수 개월째 행방불명이고 수사가 벌어지던 동안엔 전통이 이 군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유괴범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살려 주면 당신도 살고(정상 참작-_-), 아이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이례적으로 전두환스럽게 강경한 대국민 담화를 손수 발표할 정도였다.

범인은 결국 잡혔고, 전통은 약속을 지켰다. 살해범인 주 영형이 수차례 항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2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83년,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떠났다.
제아무리 29만원, 빛나리, 전통이라 해도, 저 순간만큼은 정말 사회 정의를 실현해 냈다. 멋있다. -_-;;;

돈 때문에 제자를 유괴· 살해한 천하의 개쌍놈인 주 영형도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 군과 그의 유족에게 사죄하는 말을 남겼으며, 나름 두 눈과 콩팥을 기증하고 죽었다. 오늘날도 사회 구조가 최소한 이런 결말이라도 만들 수 있는 형태라면 유가족들에게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Posted by 사무엘

2011/10/31 08:41 2011/10/3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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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上

우리나라에는, 전국민이 알 정도로 시끄러운 사고를 쳐서 20세기에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21세기의 여생을 이 분야의 사역에 바치겠다고 공언한 사람이 최소한 둘 있다. 이들의 발언은 매스컴에도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하면......;;
하나는 삼풍 백화점 사장이던 이 한상 씨이다(회장이던 이 준 씨의 아들). 몽골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알다시피 고문 기술자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한때 악명을 떨쳤던 이 근안 씨이다. 요 몇 년 전에 아예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야말로 저주의 이름으로 전락한 삼풍 백화점!
당시 경영진은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전세계의 건축 전문가들을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비리와 편법을 동원하여 백화점 건물을 혹사시켰다. 그러다 결국 1995년 6월, 거대한 백화점 한 동을 지진이나 외부 폭격도 없이 제 발로 와르르 무너뜨리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렸다. 4층 기준으로 설계된 건물을 5층으로 무단 증축하고, 미관을 위해 기둥 수를 줄이고 있던 기둥도 굵기를 줄이고, 윗층에는 무거운 온돌을 얹고, 옥상에는 규정 하중의 몇 배나 더 무거운 에어컨까지 얹고... 전문가들은 그 상태로 건물이 어떻게 6년씩이나 버텼는지를 더 신기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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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죄질이 더욱 나쁜 이유는, 건물이 붕괴할 걸 알고도 자기네만 쏙 피하고 영업은 계속 강행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귀중품을 지하로 옮기고 고위 임원들은 미리 대피하고서 말이다. 이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기 혼자 마스터 키를 빼들고 전동차를 탈출해서 달아나 버린 기관사와는 차원이 다른 악행이다.

이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던 1천 명이 넘는 종업원과 쇼핑객은 건물과 함께 그대로 폭삭..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불과 8개월 남짓 만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평시에 최다 사상자를 낸 최악의 참사를 일으키고 국제 망신까지 초래했다.

한편, 이 근안의 과거 행적도 충격과 공포이다. 심문 전에 기선 제압용으로 한주먹으로 사과를 으스러뜨리는 퍼포먼스부터 시작해 물 고문, 전기 고문, 통닭 고문, 잠 안 재우기 등등.. 말이야 쉽지 당해 보면 정말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는 말했다. “내가 손대기만 하면 누구라도 불게 돼 있어.”

고문 출장까지 갔던 그가 돌연히 목회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흉악범이 회개하여 목사가 된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왕년에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회심한 것과도 성격이 다르다.

고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반인권적이고 사악한 행위이다. 성경의 그 엄한 구약 율법조차 사형은 백 번 인정할지언정, 고문은 절대 없다.
다만, 이 근안을 까는 글은 인터넷에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본인은 for the sake of completeness 차원에서, 일부러 좀 다른 관점에서 논리를 잠시 펴도록 하겠다. 오죽했으면 인류 역사에 고문이란 게 존재했을지도 잠시 생각해 보자.

뻔히 드러나 있는 혐의를 일단 부인부터 하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거짓말로 태연하게 잡아떼기만 하던--그래 봤자, 밑져야 본전이므로-- 인면수심 흉악범 김 길태를 보고 열불이 안 났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고문이란 저런 신발샛길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게 본인의 육신적인 심정이었다. -_-;;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은 전북 대학교 이 윤희 씨 실종 사건을 기억하는가? 딸을 잃은 아버지는, 강력한 용의자이자--그러나 무능한 수사로 말미암아 증거 확보와 유죄 입증엔 실패-- 딸의 스토커이던 뻔뻔한 남학생으로 하여금 읽으라고 쓴 공개 성명서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이 사건을 맡은 수사관이라면 누구라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정도 사건은, 30년 전만 해도 물고문에 고춧가루 한방이면 일도 아니었을 거라고 말이다. 네놈 선배들이 피땀 흘려 이뤄낸 민주화의 열매를 네놈 같은 녀석이 악용하는 게 통탄스럽다.” (☞ 원문이 있는 곳 클릭)

요즘 같은 첨단 과학 수사 기법과 심리 프로파일링 같은 기술도 없던 시절에 흉악 범죄에 맞서서 치안은 유지해야겠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간첩 불순분자도 우글거리던 시절,
비열하고 부작용의 우려도 만만찮으나 저비용으로 성과를 제일 간단하게 내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겠냐 말이다.

고문을 옹호나 정당화할 의도는 절대 없으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단지 전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그의 과거 행적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그저 뚝 떨어진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더 잃을 게 없으니 배째라 하는 악질을 다스리는 제일 쉬운 방법은, 그 녀석들에게도 “더 잃을 게 있다는 걸” 일깨우고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 인간이 이열치열로 만들어 낸 차선책 중 하나가 고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두 사람은 동일하게 징역 7년이라는 죄값을 치렀다. 가정 전체가 풍비박산 났고 가족들까지 밖에 얼굴을 들고 다니질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상의 집안은 피해자 배상금 명목으로 전재산을 압류 당했으며, 이 근안의 자녀 중엔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지자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몽골로 떠난 후 언론으로부터 수 년째 별다른 소식 없이 잠적해 있는 이 한상과는 달리, 이 근안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하면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것 같다. 그런데 발언의 수위가 다소 우려스럽다.

그래, 만에 하나 그는 왕년에 정말로 국가 명령에만 충성한 사람일 수 있으며, 고문도 상부 기관의 명령 내지 묵인하에 실적 쌓으려고,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수행한 것일 수도 있다. 무고한 사람 잡은 것보다는 그래도 진짜 흉악범이나 간첩을 잡은 공이 더 클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도 아닌데, 당대 상황을 감안하지도 않고 어제의 충신이 무작정 오늘의 역적으로 뒤죽박죽 평가 잣대가 바뀌는 언론 플레이도 본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목사 타이틀을 갓 얻은 그의 지금 처지에서 할 말이 아니다. 그런 변명은 그가 회개의 열매부터 충분히 보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이 근안 목사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옹호하는 발언을 자발적으로 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직도 그로 인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사람, 파탄 난 가정이 즐비한 현 시국에서 그의 자기방어 변명성 발언은 더욱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고 복음을 비방할 빌미만을 불신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죄와 벌, 회개 같은 것은 민감한 주제이다.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오늘날 사람들이 반드시 정확하게 갖추고 있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라든가 복음에 대해 요즘 나돌고 있는 무수한 오해들도 불식시킬 수 있으며, 불신자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전한다든가 교회 내부에서 죄로 인해 간증을 잃은 사람을 다루는 과정도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저런 개념을 재정립을 한 번쯤 할 필요를 느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 중 하나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굳이 종교라고 풀이하자면,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규정하며, 그 죄를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해결하고 내세의 구원까지 얻으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 교리는 인간의 머리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자연인들 보기에는 완전 황당무계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거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시스템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교리로 인해 복음이 초기에 비방 받고 조롱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성경은 그것 자체만으로 두려워하거나 쫄 필요는 절대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주신 간증도 무수히 많으며, 그 어리석음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원칙은 변함이 없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1/10/29 08:40 2011/10/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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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찬송 몇 곡

Wonderful Grace of Jesus

가사 보기

‘세상에 이렇게 선율이 아름다운 찬양도 있구나!’ 생각이 곧장 들어서 자료를 검색해 봤다.
작사· 작곡자는 Haldor Lillenas. 사실 그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평생 수천 편의 찬송시를 지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며, 저 Wonderful Grace of Jesus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왜 우리나라의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저 곡이 발표된 때는 1918년. 유럽에서는 독가스와 탱크가 첫 등장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가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무단 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이 곡을 모르는 분이라면 한번 들어 보기 바란다. 후렴을 돌림노래 비슷하게 편성한 것도 그렇고, 너무 우아하고 멋있지 않나..?
증오심으로 가득한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 짤과는 정반대로, 구원받아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감격이 느껴진다.
곡 전체를 통틀어 당김음 하나 없는데도 전혀 단조롭지 않다.

Sing On, Ye Joyful Pilgr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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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Grace of Jesus에 필적하는 미려한 선율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참 즐거운 노래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도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멸의 명작이지 않던가.

한국어 가사도 아름답지만, 영어 원문 가사는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떠돌되 방랑자가 아닌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심상이 더욱 잘 드러나 있다.
그 곡의 작사자는 Carrie M. Wilson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는 필명일 뿐, 그 이름도 유명한 Fanny J. Crosby 여사의 작품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Meekness and Maj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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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세 곡보다는 훨씬 더 나중에 발표되었고 어찌 보면 CCM에 가깝다.
영국의 그 유명한 Graham Kendrick의 곡으로, 저분 하면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 <God Is Good>, <Heaven Is In My Heart> 등이 바로 떠오를 것이다.
좀 더 매니악한 분이라면, 주찬양 선교단 8집 <Hosanna! 이 땅을 고치소서>의 타이틀곡의 뒷부분에 이어지는 <Lord Have Mercy On Us>가 저분의 곡이라는 것도 아실 테고.

허나, 본인은 Meekness and Majesty을 그분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일품으로 친다.
예수님을 너무 사실적이고도 서정적으로 잘 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rhyme을 봐라. -ty, -ce, -le 등을 포함해서 단어 선택을 정말 절묘하게 했다.
화음도 특히 후렴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느낌을 잘 살리려면 꽤 어려운 chord를 넣어서 연주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1/10/23 19:21 2011/10/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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