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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기서 생각, 교회 생각

1.
말라기서는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책이다. '말라기'는 이 책을 기록한 대언자의 이름이다.

구약의 예언/선지서들은 분위가 다 비슷하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신랄하게 깐다. 좀 우파스러운 원론적이고 영적인 죄뿐만이 아니라, 당대 상류층들의 부정부패를 까발리면서 민생 안정과 사회 개혁을 촉구하는 좌파스러운 책망도 골고루 균형있게 나온다.

그런데 결론은 기승전철..은 아니고 기승전'회'로 동일하다. 저런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타임라인에서 궁극적으로 최후의 승자는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회복되며 옳다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힌 놈들은 다 작살이 나고 씨도 안 남는다. 이러니 오늘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음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와 반기독교 성향은 바늘과 실처럼 따라다니는 것이다. 단적인 예로, 천주교 교황이 전세계를 돌면서 예수님 재림과 이스라엘 회복을 말한 적이 있던가? (말한다면 그건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며, 그 종교는 이미 천주교가 아닐 게다)

그래도 성경 말씀은 기록된 대로 이루어질 것이고 구약 예언서들이 일관되게 말하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은 임할 것이다. 단지 구약 대언자들은 산봉우리 너머의 재림만을 보았을 뿐, 예언의 골짜기에 속하는 신약 교회에 대한 계시가 없었으며 초림과 재림의 구분에 대한 개념도 아직 몰랐다는 차이가 존재한다. 물론 실질적으로 초림과 재림 구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수님 거부 이후부터 생겼겠지만 말이다.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말라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귀환까지 하고 나서 거의 100여 년 뒤에 구약 중에서 혼자만 굉장히 늦게 기록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후, 우상 숭배라는 죄 하나는 완전히 떨쳐 냈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바알 숭배만 안 할 뿐이지 영적 상태는 여전히 정상이 아니었다.

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막장급의 매너리즘에 빠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못 먹는 거니까 흠 왕창 많고 병들고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없는 가축을 헌물로 바쳤다. 출애굽기 이후로 모세오경에 without blemish이라는 단서가 얼마나 지겹도록 많이 나오는데.. 저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십일조 헌금을 안 바치니까 레위 지파 성직자들은 먹고 살 수가 없어서 생업을 따로 구해서 투잡을 뛰어야 할 정도였다. 요즘으로 치면 밤에 대리운전?? =_=;;;

말라기서는 전반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두려움이 완전히 상실되고 “뭐 대충 이렇게 해도 괜찮겠지”, “어차피 다 소용없어”, “우린 아마 안 될 거야” 등, 하나님에 대한 온갖 잘못된 생각들에 대해 하나님이 친히 반박을 하고 책망하는 논리로 진행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성경에서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관을 먼저 제시하고서는 그걸 반박하는 형태로 진행되는 텍스트가 신구약을 통틀어 여럿 있다. 로마서의 “그럼 ...하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God forbid)”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예이고. 개인적으로는 성경을 통틀어 이런 예들만 한데 모아도 주일 예배 설교 한 편 분량은 충분히 나올 것 같다.

말라기도 기본적으로 그런 논조이니 유쾌한 분위기는 절대 아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자꾸 동물 헌물을 그딴 식으로 바칠 거면, 그 동물들의 똥을 꼴도 보기 싫은 성직자 네놈들 얼굴에다 덕지덕지 쳐발라 버리겠다는 노골적인 책망까지 하셨을 정도이다. (말 2:3)
헌물 말고도 이 책은 '의의 태양', 침례인 요한 예언도 나오고 십일조에 결혼 문제 등 생각보다 다양한 주제를 이것저것 부랴부랴 다룬다.

그런데 지금 내게 굉장히 절실히 와 닿는 구절은 말 3:14-17이다.
“교회 다니고 하나님 섬기는 거 다 무가치한 헛일일 뿐이다. 어차피 세상에는 자기를 내세우고 적당히 줄 잘 서고 죄도 잘 짓는 사람들이 사회성이 뛰어나고 잘 되고 성공한다..”는 식의 생각.. 역시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는 2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허나 16절을 보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자주 성경을 강론하고 서로 믿음을 북돋우는 교제를 나누면..
그 사건은 하나님이 친히 귀를 기울여 듣고, 정말 기쁘고 기특하다면서 그걸 책으로 기록으로 남기신댄다.
그리고 다음 17절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은 보석만큼이나, 친아들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무진장 귀중히 여겨고 보상할 것이라는 약속이 나온다.

성경에서 역사· 교리적으로 유대인 얘기를 하고 있는 곳에다가 교회가 유대인 사칭을 하는 건 병크이지만.. 저것만큼은 정말로 오늘날 교회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휴거와 재림만큼이나 위로의 명분이 성립하는 게 틀림없다.
스바냐서에서 “하나님께서 너로 인해 기뻐하고 노래까지 부르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구절이 의외로 소선지서 한구석에서 발견되곤 한다.

이렇게 본인은 길고 길던 구약 통독을 드디어 끝냈다.

2.
난 예나 지금이나 아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것도 안 믿고 무신론자 회의론자로만 산다면 모를까,
내세와 영원을 논하는 '종교'관을 판단하는데 겨우 그 종교에 속한 사람의 외적 행실, 또는 대외 이미지, 유명인사의 의견을 높은 가중치에 두는 건 아주 굉장히 대단히 매우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걸 전혀 볼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며 물론 신자들은 좋은 행실로 좋은 간증을 남기고 가능한 한 세상과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병싯같은 짓으로 불신자에게 쓸데없이 실족거리를 줘서는 안 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어차피 구도자의 입장에서도 그런 외형적인 것들은 주된 판단 근거가 돼서는 안 된다.

본인은 몇 차례 글을 썼듯이, 무슨 하나님 믿고 예수는 믿지만 교회는 안 믿는다는 식의 생각을 굉장히 싫어한다.
예수님이 무슨 좋은 덕담이나 남긴 4대 성인 도인 슈퍼스타이고 자신의 상식과 교양 한 줄 정도나 기여하는 아이템인 줄로 아는가 본데, 그 예수가 당신이 싫어하는 교회의 창립자이고 교회의 머리이다. 뭘 좀 알고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불신자들하고 어울려서 대형 교회 욕이나 하고 다니는 헛똑똑이 겉멋 든 좌독 성향도 완전 혐오.
경제 쪽으로 대기업에 대한 생각하고 완전히 똑같은 논리이다.
대기업을 엿먹이고 싶고 중소기업을 살리고 싶으면, 나 자신부터 중소기업 제품을 애용하면 되듯이
한국 교회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대형 교회가 한국 교계의 레알 비성경적인 악의 축이라고 생각한다면.. 나 자신부터 아주 보수· 근본주의적이고 신앙의 양심을 충족하는 작은 교회를 찾아서 다니면 된다.

대형 교회가 당신의 개인의 양심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빼앗지 않았고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피해의식 갖고 미워하지는 않아도 된다. 그리고 작은 교회에는 사람간의 트러블, 부조리가 어디 없을 줄 아는가? 대안 없는 비판, 일관성 없는 판단은 이제 좀 그칠지어다.

세상의 모든 대중교통들은 운송 약관을 보면 "만취자, 중환자 또는 신변이 불결한 자에 대해서는 당사가 승차를 거부할 수 있음"이 명시돼 있다. 무조건이든 단독 승차에 한해서든.

그러나 다른 곳은 몰라도 목욕탕이.. 만취자는 몰라도 신변이 불결한 자를 입장 거부한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리이겠는가?
병원이.. 중환자를 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교회가 바로 그런 곳이다.
교회 성도들보다 자신이 너무 똑똑하고 의롭고 질이 높아서 차마 예수는 믿어도 교회는 못 믿겠다(다니겠다) 이러는 분들.. 정말 구원이라도 받은 사람이라면 그 불평을 나중에 예수님 앞에서 자신 있게 털어놓고 예수님을 논쟁에서 이길 수 있기를 난 바라마지 않겠다.

나는 행실이 너무 막장 저질이었는데 나 같은 사람을 구원하고 일꾼으로 써 주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맙고, 가끔 교회에서 이상한 사람과 싸우더라도 교회의 정체성과 본분을 잊지는 않을 것이다. 100% 완벽한 성도로만 구성된 교회에 내가 등록하는 순간부터 그 교회는 완전성이 깨진다는 생각을 하며 다닐 것이다.

* 나는 늘 공언한다. 누군가가.. 있지도 않은 신을 숭배하고 교회 다니느라 인생을 낭비하는 나같은 중생을 너무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서.. 무신론을 전하기 위해 나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렸다가 나중에 부활했다면 나는 그 정도 표적에는 기꺼이 반응하여 지금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무신론자가 되겠다. 이 정도면 내가 왜 교회를 다니는지 논리가 설명이 되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22 08:25 2015/02/2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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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개발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항공· 우주덕, 역덕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사고는 아폴로 1호나 13호, 그리고 챌린저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처럼 유인 우주선에서 발생한 인사사고 위주이다. 그게 임팩트가 크다.

하지만 컴퓨터공학 관련 수업에서 종종 언급되는 우주 사고는 저런 것들보다는 덜 알려진 무인 우주선의 오동작· 자폭 사고 두 건이다. 바로 (1) 1999년에 미국이 발사한 화성 기후 탐사 인공위성의 추락 사고와, (2) 1996년 유럽 우주국에서 발사한 정지 궤도 진입용 아리안 5호 로켓의 자폭 사고이다. 이것들은 다른 기계 구조적인 실수· 결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발사체 포함 로켓을 제어하는 소프트웨어의 버그로 인해 발생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서로 다른 팀의 엔지니어들이 같은 물리량에 대한 단위계를 제각각 다르게 가정하고 코딩을 하는 바람에, 계산 결과의 scale이 산으로 가 버려서 위성이 추락한 정말 안습한 사례이다. 흔히 길이(미터 vs 인치)의 착오라고 알려져 있는데, 더 자세한 문헌을 찾아 보니 사실은 단위 시간당 힘(킬로그램힘 vs 파운드)의 착오이다. 뭐 어느 것이든 표준 단위계와 비표준 단위계의 착오인 건 마찬가지이고 우리나라로 치면 제곱미터와 평, 킬로그램과 근 같은 게 헷갈린 것과 동일하다.

이 때문에 무려 9개월간의 긴 여행을 마치고 기껏 화성까지 잘 가서 궤도에 진입하려던 위성은 예상보다 고도가 급격히 낮아졌으며, 화성의 뒷면으로 들어가는 예상 시각보다 더 일찍 통신이 끊어졌다가 다시는 통신이 회복되지 못했다. 화성의 대기권에까지 들어가 버린 위성은 대기와의 마찰열로 인해 파괴되고 추락했다.

지구로부터 수천만 km나 떨어져 있는 다른 행성에서 벌어진 사고이다 보니, 사고 장면도 전해지는 게 없다.
사고의 원인이 어처구니없는 실수 때문이었음이 밝혀지자 미국 내부에서도 “우리도 미터법의 국내 도입이 시급합니다”라는 여론이 당연히 일었다. 그러나 오랜 관행을 바꾸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한편, 후자의 사고도 사연이 만만찮게 안습하다.
로켓을 제어하는 프로그램의 내부에는 64비트 float 부동소수점을 16비트 int로 형변환을 하는 루틴이 있었다. 알다시피 이건 양 자료형의 표현 범위의 차이가 엄청나다. 단순히 소수점이 잘리는 것 이상으로 수의 표현 가능한 범위 자체가 잘릴 위험이 높다.

다만, 이전의 아리안 4호에서 이게 별 문제가 된 적이 없었던 관계로 이 부분을 맡은 엔지니어는 앞으로도 오버/언더플로우가 발생할 일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성능 향상을 위해 범위 검사를 하는 옵션을 제외하고 프로그램을 빌드해서 우주선에다 탑재했다.

그런데 아리안 4호와 5호는 로켓의 규격이 서로 달랐으며, 일어나지 않으리라 예상했던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완전히 엉뚱하게 형변환된 정수 숫자가 예외 처리도 없이 계산식에 들어가면서 프로그램의 내부 상태는 엉망이 되었으며, 사태 극복을 할 수 없던 컴퓨터 프로그램은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설정되어 있던 자폭 모드로 진입했다. 그래서 아리안 5호 로켓은 발사된 지 겨우 37초 만에 기수를 아래로 숙이면서 추락했다.

중앙 통제실은 싸늘한 초상집 분위기로 변함. 망연자실한 직원들..;; (☞ 동영상 링크)
무인 우주선인 관계로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둘 모두 수억 달러급의 손실을 초래했다. 나로 호의 발사 실패하고도 급이 다른 게, 아리안 5호만 해도 나로 호보다 5배 이상 더 무거운(= 크기도 더 큰) 로켓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고스란히 폭죽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학부 시절에 소프트웨어공학 수업 시간 때 들은 얘기를 먼 훗날 대학원에서 프로그래밍 언어 수업에서 다른 교수로부터 또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전자 시간에는 체계적인 소프트웨어의 테스트/검증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후자 시간에는 프로그래밍 언어 차원에서 타입 검증과 예외 처리의 필요성을 얘기하면서 저것들이 타산지석 사례로 소개되었다.

그나저나 아리안 5호에 들어가는 프로그램도 Ada로 작성되었다고 한다.
Ada에는 배열 첨자 범위라든가 형변환 overflow 예외를 감지하는 기능이 있고, 그걸 끄는 옵션도 별도로 존재한다.
C/C++처럼 무작정 프로그래머에게 모든 걸 맡기기보다는 적당히 언어 시스템이 개입해서 안전을 추구하는 것도 많다 보니 Ada가 프로그래밍 언어계에서는 꽤 noble한 대접을 받는가 보다. 하지만 배열 첨자를 마치 함수 호출처럼 ()로 하고, 명칭에 대소문자 구분이 없는 것은 좀 Basic스럽고 요즘 언어가 아닌 구시대 언어 같은 느낌이 든다.

참고로 Ada는 명칭 자체가 여자 이름인 반면, 코볼은 주 설계자가 수학자 출신의 여성 해군 장성이다(그레이스 호퍼).

Posted by 사무엘

2015/02/19 08:36 2015/02/1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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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발명한 교통수단은 그 형태가 자동차(육상-도로), 열차(육상-철도), 비행기(하늘), 그리고 배(물)라는 네 종류로 크게 나뉜다. 각 교통수단은 일반적으로 자기가 다닐 수 있는 형태의 길 위에서만 다닐 수 있는데..
군사 같은 특수한 용도를 목적으로 두 분야의 성격을 동시에 갖는 하이브리드 교통수단도 드물게나마 있다.

1. 자동차+열차

도로도 달릴 수 있고 레일 위도 달릴 수 있는 차량이다.
바퀴에다가 밖으로 툭 튀어나온 채 레일에 닿는 특수한 휠캡을 끼우는 방법이 있고, 아예 레일 주행용 대차를 타이어의 전후에 따로 갖추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내리는 방법도 있다. 전자는 사람이 휠캡을 착탈하는 게 골치아픈 일이겠으며, 후자는 엔진 구동축 자체가 도로 바퀴용과 철도 바퀴용이 둘 존재해야 하니 기술적으로 구현하기가 더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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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철도 겸용 차량은 군용 내지 선로 시설 보수용 차량으로 일부 존재한다. 우리나라 군용 트럭들은 특수한 휠캡을 끼워서 유사시에 레일 주행이 가능하다는 얘기를 어디에선가 들었는데, 그게 사실인지 확인은 못 해 봤다.
하긴, 과거에는 굳이 동력 엔진이 없는 인력거나 마차조차도 열차 버전이 없지는 않았다. 오늘날도 관광· 레저용으로 레일바이크가 있고 말이다.

2. 열차+열차

사실은 철도는 길에 대한 제약이 가장 심하기 때문에 도로가 아니라 같은 철도끼리라 해도 궤간이 다르면 차량이 못 다닌다. 우리나라야 육로로 인접하는 나라가 사실상 없는 지형에다가 표준궤 단일 궤간이 잘 정착하여 궤간 혼란이 존재하지 않지만, 당장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만 해도 표준궤가 아닌 광궤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한 선로에다가 궤간이 다른 궤조를 동시에 여럿 설치하는 것이다. 전차선이 아니라 협궤/광궤용 제3궤조가 생기는 셈이다. 이건 이것대로 몹시 힘든 일이며, 선로가 분기라도 하는 곳에서는 작업 난이도가 답이 없는 수준으로 치솟는 걸 감안해야 한다.

궤간 문제를 선로가 아닌 차량을 바꿔서 해결하는 방법은 가변궤간 대차를 설치하는 것이다. 틸팅열차가 대차 위의 객실의 기울기를 조절해서 원심력을 상쇄한다면, 가변궤간 대차는 양 바퀴 사이의 간격을 궤간 변경 구간 사이에서 조정한다.
튼튼하게 꽉 고정되어 있어야 하는 부품의 유격이 유동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가변궤간 대차는 일반적인 고정형 대차보다 수명이 짧고, 정비불량이 발생할 위험도 있다.

이것도 마치 앞의 도로+철도 겸용 차량처럼 그냥 A궤간용 바퀴와 B궤간용 바퀴를 둘 다 들고 다니면서 필요한 것을 들었다 놓았다만 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둘 다 들고 다니기엔 철도 차량의 대차 부품들은 너무 무겁다는 게 흠일 것이다. 일반적인 화차나 객차를 다 그렇게 만들기에는 경제적이지 못하다.

3. 자동차+비행기

사실, 자동차와 비행기는 한 물건에 다 구겨넣기에는 엔진 구조가 서로 너무 다르고 차체/기체의 외형도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 이런 이유로 인해 flying car 같은 물건은 SF 창작물에서나 볼 수 있는 상상의 산물로 치부돼 왔다.
하지만 엔진 출력이나 차의 덩치, 연비 같은 실용적인 제약이 없다고 치면.. 고정익기와 회전익기 중 어떤 형태가 자동차와의 융합에 더 어울리는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정익기 겸용 자동차가 있다면 미국처럼 땅 넓은 데서 원래부터 자가용 비행기를 굴리고 살던 부자들이 아주 좋아할 것이다. 한 기계만으로 하늘과 땅에서 모두 장거리 주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차량은 도로를 달릴 때는 날개를 잘 접어 두는 기능이 있어야 할 것이고 완전한 고정익 비행기처럼 연료를 날개 안에다 집어넣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착륙을 위해서는 온전한 형태의 활주로가 필요하며 타이어 역시 도로 주행뿐만 아니라 랜딩기어 역할도 할 수 있게 아주 튼튼한 고가의 제품을 써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비행이라는 게.. 단순히 보조용을 더 원한다면.. 다시 말해 차가 꽉 막히고 있을 때 정체 구간이나 사고 지점만 폴짝 뛰어 넘어갈 수 있고 주차장에서도 옆 차를 밀 필요 없이 원하는 지점에 쏙 드나들 수 있는 걸 원한다면.. 헬리콥터 같은 회전익기 형태의 비행 겸용 차량이 더 유용할 것이다. 고정익기는 뜨고 내리기 위해 활주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런 역할은 할 수 없다.

아니면 아예 자동차용 제트팩이라도? =_=;;
평소에는 제트 가스를 후방으로 분출해서 가속력을 얻는 데 쓰지만 그걸 아래로 분출하면 차를 뜨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특수한 용도로 쓰이는 초음속 자동차 같은 건 조금만 개조하면 비행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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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비행기+비행기

비행기 중에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고정익기의 프로펠러로도 쓸 수 있고, 회전익기의 로터처럼도 쓸 수 있게 한 '틸트로터' 형태의 하이브리드가 있다. 바람개비가 향하는 각도를 바꾸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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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헬리콥터처럼 수직 이착륙이 가능하면서도 헬리콥터보다 더 많은 중량을 더 빠르게 수송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구현하기가 어렵고 전반적인 가성비는 어느 한쪽에 특화된 비행기보다 열악하다는 단점도 있어서 널리 쓰이지는 않고 있다.

5. 자동차+배

다음으로 배 이야기를 해 보자.
자동차와 선박 사이의 교배는 '수륙양용'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친숙한 개념이다. 물론 십중팔구 군용차 형태로 말이다. (1) 물에 뜨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방수 처리가 되기 때문에 차체의 대부분이 물에 잠긴 상태에서도 운행 가능한 차, 아니면 아예 (2) 물에서도 뜬 채로 달릴 수 있는 차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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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가 민수용 자가용으로 양산되면 일단 낚시꾼들이 무진장 좋아하겠다. 저 차의 이름은 Python이라고 한다. 전산업계에서는 '파이썬'이라고 명칭이 통일되다시피했는데, 다른 업계에서는 '톤', '손' 등 여러 표기가 혼재하는 듯.)

6. 열차+배/비행기

철도 차량은 그 배타성으로 인해 육지가 아닌 다른 교통수단과의 하이브리드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배는 제끼고 랜딩기어가 철도 차량 형태인 비행기가 있어서 활주로가 철길 형태인 상황만을 한번 가정해 보자.

쇠는 고무보다는 착륙 충격과 마찰열에 더 강하겠지만, 그래도 일반 철길도 매일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 판에 레일 활주로가 maintanance-free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고, 활주로 이탈 사고를 크게 예방해 주는 것도 아니고 딱히 유리한 게 없다. 오히려 쇠로 만들어진 바퀴와 대차는 아무래도 중량면에서 불리할 것이고 착륙 후 제동을 거는 데도 큰 악재로 작용할 것이다.

음, 그나저나 하늘을 날 수 있는 열차라니 은하철도 999 생각도 나고 철덕으로서 이색적인 느낌이 든다.

7. 비행기+배

사실, 20세기 이래로 하이브리드가 가장 잘 발달한 조합은 비행기와 배끼리이다.
지금과 같은 잘 닦인 공항과 활주로가 없던 시절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강, 호수, 바다에서 쉽게 뜨고 내릴 수 있는 비행기가 있는 게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옛날에는 엔진 기술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던 관계로, 장거리 비행기는 비행 중에 엔진이 퍼져서 망망대해로 떨어질 위험이 높았다. 그러니 이걸 감안해서라도 물에 뜨고 내리는 비행기는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었다.

먼저, 다리에 바퀴 대신 뗏목이나 스키처럼 생긴 플로트가 달려서 물에 뜰 수 있는 자그마한 수상기(floatplane)라는 게 있다.
그리고 이것보다는 규모가 크고, 동체 자체가 하부가 둥그렇게 생겨서 물에 뜰 수 있는 비행정(flying boat)이 있다.
A380이나 심지어 An-225보다도 더 커서 역사상 가장 거대한 비행기로 간주되는 휴즈 H-4 허큘리스도 비행정이다. (참고로 '휴즈'의 철자가 Hughes인데.. gh는 알다시피 영어에서 발음이 가장 기괴하게 다양한 걸로 악명 높은 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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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행기 기술이 발달하고 육지에도 공항과 활주로 시설이 구축되면서 배의 기능을 겸하는 비행기는 인기를 잃게 됐다.
가장 큰 이유는 수상기든 비행정이든, 물에 뜨는 데 쓰이는 장비들이 일단 기체가 하늘로 뜬 뒤부터는 항공역학적으로 아무 도움이 되지 않고 무게만 차지하는 잉여가 되어 비행 가성비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또한 물에 착륙(응? 륙?)하면 활주로나 랜딩기어 타이어의 정비는 필요 없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착수 충격도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이로 인한 기체의 정비가 여전히 불가피했다. 바닷물이라면 염분 부식 문제도 있고 말이다.

오히려 비행 원리가 적용되어 수면을 수~수십m 남짓 떠서 매우 빠르게 달리는 선박으로는 호버크래프트나 위그선 같은 부류가 있다.
고정익기는 "공기를 거슬러 빨리 달린다 → 날개에 양력이 생긴다"의 순인데 이런 선박의 원리를 설명할 때는 "뜬다 → 물의 저항이 없어서 빨리 달린다"로 순서가 바뀌는 것 같다.
성능면에서 장점이 있지만, 조종을 위해 선박과 항공기 면허가 모두 필요하고 안전 같은 문제가 있어서 이쪽 역시 생각만치 실용화는 못 돼 있다.

* 교통수단간의 이종교배 하나만 생각했는데 글 쓸 것, 생각할 거리가 무척 많고 재미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16 08:25 2015/02/16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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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호등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보행자용 신호등, 자동차용 신호등, 심지어 철도 차량용 신호등이 다 있다. 신호등은 처음 등장한 건 19세기 말이고, 지금과 같은 전기식 신호등에 지금과 같은 색깔 관행이 정착한 건 20세기 초쯤이다. 처음에는 정지 신호가 빨강이 아니던 시절도 있었는데, 철도던가 자동차던가 어디서 한번 신호 오인 때문에 대판 사고가 난 뒤에 빨강으로 변경됐다는 걸 읽은 기억이 있다.

다른 신호등은 그냥 별 특징 없는 색깔등에 불과하지만 보행자용 신호등은 색깔뿐만 아니라 사람이 선 모양과 걷는 모양이 추가적으로 그려져 있다. 모든 나라에서 그렇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우리나라는 그렇다. 색깔뿐만 아니라 정말 motion으로도 이때는 건너도 되거나 반드시 서야 한다는 걸 표시하고 싶었나 보다. 그래서 단순히 X나 O 모양도 아니고 굳이 사람 모양을 그렸다.

그런데 이것 아시는지? 우리나라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처음에는 색깔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고 사람 형상은 검정 고정이었다. 그랬는데 나중에 신호등이 쫙 교체되면서 검은 배경에 사람 형상이 빨강 내지 초록인 형태로 바뀌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건 특별한 이유는 없고, 신호등이 단순한 전등에서 전기를 덜 잡아먹는 LED 소자 기반으로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전구 하나를 켜는 게 아니라 사람 그림 모양의 픽셀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신호등의 점등 모양도 지금처럼 바뀌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보행자 신호등에는 남은 시간도 게이지 내지 숫자로 표시되게 UI가 개선되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신호등을 보기가 쉽지 않았는데 어느 샌가 다 교체되었다.

신호등은 전국의 교차로와 횡단보도에 이거 뭐 한두 개가 있는 게 아니며, 마치 냉장고처럼 사실상 24시간 반영구적으로 가동되는 물건이다 보니 거시적으로 볼 때 전력 소모가 엄청나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전기를 덜 먹는 방식으로 교체하면 투자 비용을 생각보다 짧은 시간 만에 회수할 수 있다.
백열등도 효율이 너무 안 좋다고 국가에서 나서서 퇴출시키는 마당에 하물며 신호등이겠는가. (그나저나 처음 켤 때 깜빡거리는 형광등도 마지막으로 본 지 굉장히 오래 됐다. 세상 참 많이 변했다)

보행자에 이어 자동차용 신호등에도 빨간불이나 파란불에 남은 시간이 표시된다면 어떨까?
악명 높은 노란불 딜레마를 예측하고 대처하는 데 유리해지는 면이 분명 있겠지만, 운전자들이 저걸 보고는 더 조급해져서 사고가 날 가능성도 더 커질 것이다. 그래서 차라리 모르고 있으라고 도입을 안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경상북도 봉화군은 얼마나 차량 통행이 없고 한적했으면, 대부분의 도로 교차로가 그냥 황색 점멸일 뿐이라고 한다. 그 지경이라면 차라리 로터리를 만들면 신호등을 운영할 필요가 없고 좋을 텐데. 단, 로터리는 공간 소모가 더 크다는 단점이 있다.

빠른 교통수단은 단위 시간 동안 더 긴 거리를 이동하며 더 많은 공간을 점유한다. 그렇기 때문에 얘가 차지하는 트래픽 때문에 느린 교통수단은 신호 대기 때문에 표정속도가 더 떨어지는 효과가 난다. 이것도 일종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인지는 모르겠다.
자동차 신호 때문에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는 보행자는 교차로에서의 신호 대기 때문에 동일 구간에서의 통행 소요 시간이 더 길어진다.

철도만 해도 KTX 때문에 기존선 구간에서는 일반열차들의 통행 시간이 더 길어진다. 영등포 역에서 KTX를 먼저 보내 주고 출발하느라 하위 열차들은 몇 분간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통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현상이다.

2. 자동차의 국제화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국제화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각 나라의 언어마다 달라지는 GUI 요소들을 별도의 파일로 분리하곤 한다. 소스 코드를 고쳐서 재빌드를 하지 않고도 이 데이터만 추가하거나 교체하면 새로운 언어에 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할 수 있게 말이다. 그나마 문자 코드 하나는 유니코드 덕분에 천하통일이 이뤄진 관계로 일이 예전보다 많이 수월해졌다.

그런데 자동차에도 이렇게 각 국가별로 따로 세팅을 해야 하는 요소가 있다. 물론 자동차 내부에서 동작하는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 같은 건 프로그램 차원에서 다국어 UI를 갖춰야겠지만, 그런 것 말고 대시보드나 계기판에 있는 간단한 표현들은 그냥 영어 원어 표현을 냅두지 그런 걸 일일이 다 현지 언어로 바꾸지는 않는다.
그것보다 더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1) 운전대의 위치와 (2) 속도계 숫자의 단위이다.

세계적으로는 자동차가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가 대부분이긴 하지만 좌측통행을 하는 소수의 나라들이 영국과 영연방, 과거에 영국 식민지였던 나라, 그리고 영국식으로 근대화를 한 일본처럼... 존재감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나라들이다. 그러니 좌측통행용 우핸들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이건 마치 글자를 쓰는 방향이 L2R이냐 R2L이냐 하는 문제 같다. 아랍권에서는 프로그램의 세로 스크롤 막대가 창의 오른쪽 구석이 아니라 왼쪽 구석에 있다.

요즘 자동차 중에는 운전석 쪽 대시보드와 조수석 쪽 대시보드의 외형이 대칭이 되게 해서 좌핸들과 우핸들을 동일 생산 라인에서 최대한 저렴하게 동시 처리 가능하게 설계된 경우가 있다. 이건 마치 양손잡이용 가위 내지 마우스 같은 컨셉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가 더 오래 지속되고 일제 치하에서 도로 시설이 확충되고 자동차가 대중화됐다면, 한반도까지 좌측통행 지역으로 굳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해방 당시까지 한반도에는 등록된 자동차 수가 1만 대가 채 되지 않았으며, 서울을 제외하면 압도다수의 길이 여전히 차선이고 신호등이고 뭐고 없는 비포장이다 보니 여전히 자동차의 통행 방향은 그냥 정하기 나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미군정이 들어선 지 얼마 안 되었던 1946년 4월에 한반도에서 자동차의 통행 방향은 우측으로 개정되었다. 그래야 우측통행을 하는 미국에서 들여온 좌핸들 차량들이 별다른 불편 없이 한반도에서 곧장 다닐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 철도는 사정이 어떨까? 철도야 조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운전대가 어디에 있든지 별 의미가 없다. 국내에는 수도권 전철 4호선처럼 한 전동차가 좌측통행 구간(국철 과천· 안산선)과 우측통행 구간(서울 지하철 4호선)을 아예 직통 운행까지 한다. 자동차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또한 해방 당시엔 통행 방향의 구분이 필요한 복선 철도 자체가 경부· 경의선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 마음만 먹고 좀 매몰비용을 감수했다면 철도의 통행 방향도 우측으로 과감하게 확 뜯어고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철도는 여전히 좌측통행으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자동차처럼 차량의 운전대 방향을 꼭 맞춰야 할 필요가 없었고, 또 기존 철도역들의 시설을 고치는 게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또한 이건 정말로 그냥 하나로 정하기 나름일 뿐, 무슨 협궤-표준궤 개궤라든가 100-220V 승압처럼 미래를 내다보고 꼭 바꿔야 할 과업까지는 아니기도 하니까.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근대화· 산업화가 한 박자 늦었던 대신, 그래도 전압이나 철도 궤간 같은 건 깔끔하게 통일이 잘 됐고 승압 같은 것도 너무 늦어지기 전에 잘 해냈으니 이건 다행스러운 점이다.

좌측 우측 얘기가 길어졌고, 다음으로 속도계 단위이다. 이건 잘 알다시피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미터법을 안/못 받아들이고 있는 나라가 세계 최강대국이다 보니.. 빼도 박도 못하고 생긴 고려 사항이다.
미국의 자동차 속도계를 보면 바깥에 큰 숫자로 마일이 적혀 있고, 안쪽에 작은 숫자로 킬로미터가 적혀 있다. 미국 이외의 나라에서 다니는 자동차에다가는 굳이 그렇게 안 해 줘도 된다. 미국의 프리웨이는 속도 제한도 시속 55~65마일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게 얼추 시속 100km에 대응한다.

3. 차선의 색깔, 가변 차로 등

외국의 자동차 주행 동영상을 보면서 본인이 굉장히 놀란 점이 있는데..
중앙선 차선이 우리나라처럼 황색 실선이 아니라 그냥 흰색 실선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북한도 그랬던 것 같다. (물론 거기는 아예 차선이 안 그려지고 길만 덩그러니 놓여 있거나, 그냥 중앙분리대가 따로 있는 경우가 더 많지만)

흰색 실선은 같은 방향인데 차선 변경을 할 수는 없는 터널 같은 구간에서 쓰는 게 아닌가?
하나만 그은 것과 두 줄을 그은 것으로 구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나 같은 사람은 좀 혼동할 것 같다.
실제로 이것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차를 외국으로 수출할 때, 고급차에 들어가는 중앙선 침범 감지 장치의 알고리즘까지 고쳐야 한 사례가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중앙선이 아니라 도로의 가장자리에 그어진 황색 실선은 이 도로가 주· 정차 금지 구간임을 뜻하고, 황색 점선은 잠시 정차만 가능하다는 걸 뜻한다. 흰색 선이거나 가장자리에 선이 없으면 그런 제약이 없다는 뜻이고.
차선 색깔의 구분이 없으면 그런 것도 표현을 못 할 텐데 말이다.

다음으로 생각할 만한 사항은 가변차로이다.
가변차로는 양쪽의 방향이 같은 것이 있고 다른 것이 있다. 전자는 고속도로에서 시간대별로 갓길과 차로를 병행하는 구간으로, 점선이든 실선이든 흰색 선이 그어져 있다. 예전에 고속도로에 간간이 있었던 버스 정류장 부지가 지금은 진짜 갓길 내지 졸음 쉼터로 재활용되는 추세이다. 갓길이 차로 모드가 아니라 갓길 모드일 때 무단으로 통행했다가는 나중에 피본다.

한편, 후자는 시간대별로 상· 하행의 교통량의 편차가 큰 시내 구간에서 중앙의 몇 개 차선을 방향별로 가변적으로 운행하는 구간이다. 차선으로는 황색 점선이 그어져 있다. 전체 차선 수가 애매하게 홀수 개가 됐다거나 할 때도 가변차로를 검토할 만하다.

후자 가변차로는 일상생활에서 많이 볼 수 있지는 않다. 서울에서 대표적인 곳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당-상왕십리-왕십리 구간의 지상 도로 정도이다.
여기는 운전자가 헷갈리면 차선을 잘못 진입해서 자동차끼리 정면충돌 사고가 날 수 있어 88 올림픽 고속도로 뺨치게 대단히 위험하다. 위에 지금 진입 가능 방향과 금지 방향이 전광판으로 표시되어 있으니 그걸 잘 봐야 한다. 오거리· 육거리에서 어느 신호등이 우리 방향 것인지를 헷갈려서 잘못 진입하는 식의 실수를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가변차로라고 해서 대책 없는 막장으로만 운영되는 건 아닌지라, 한 차로의 통행 방향이 바뀔 예정이라면 그로부터 한참 전부터(거의 10분 가까이) 완충 타이밍을 둔다. 모든 방향으로부터 차들의 통행을 금지시키 시작하여, 해당 구간 전체가 텅 비었을 때 비로소 방향을 반대로 바꾼다. 재미있지 않은가?

지하철만 해도 승강장이 섬식이면 한 승강장을 양방향 승객이 모두 공유하는 관계로, 출퇴근 때처럼 방향별 이용객 수의 편차가 클 때 공간 활용 효율이 더 올라간다. 그리고 선로가 단순히 복선이 아니라 3선이라면, 한 선로를 무정차 회송 선로로 활용하여 몰리는 방향의 열차를 반대 방향 열차보다 더 자주 투입시키는 게 가능하다.

가변차로는 자동차의 통행에서 비슷한 효과를 노린 발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시설을 구축하는 데 든 노력에 비해 효과가 크지 않고 심리적으로 위험하다고 느껴지는지라 요즘은 더 만들지 않고 기피되는 추세이다. 마치 옛날에 산업화· 근대화의 상징이었던 서울 시내 고가도로들이 요즘은 반대로 철거되는 추세이듯이 말이다.

아이고, 차선 하나만 갖고도 색깔부터 시작해서 할 얘기가 굉장히 많았다.
자동차가 어느 정도 신호 대기 없이 쭉쭉 달리는 곳이라면 어지간한 4차선짜리 국도에도 요즘은 단순 중앙선 대신 중앙분리대가 설치되곤 한다.

졸음운전 내지 빗길에 미끄러진 차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멈춰선 경우가 지금까지 한둘이었던가. 중앙분리대는 중앙선 침범 정면충돌 교통사고를 예방해 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는 걸 알 수 있다.
또한 중앙분리대는 밤에 반대 방향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을 가려 주는 역할도 해서 더욱 좋다.
양방향 사이에 화단을 조성하거나 아예 방향별로 도로를 따로 만든 경우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흔치 않다.

실선 차선 구간이라 하더라도 자동차 운전 중에 차선을 변경하려면 C/C++에서 서로 다른 타입의 포인터끼리 대입할 때처럼 깜빡이라는 형변환 연산자를 꼭 넣어 줘야 할 것이다. 안 하면 최소한 쌍라이트+쌍욕+경적이라는 warning과, 최악의 경우 사고라는 에러가 날 가능성이 커진다.

Posted by 사무엘

2015/02/08 08:25 2015/02/0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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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이야기

신약 성경의 사복음서 중에서 개성이 없는 책이 있겠느냐만, 그 중 누가복음은 사도행전과 직통 라인이라는 점, '데오빌로'라는 개인적인 수신자를 설정하고 있는 점부터가 심상찮으며 이것 말고도 자신만의 아주 독특한 면모를 여럿 지닌 책이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온전한 인간적인 면모를 조명하였으며, 주체가 아닌 객체의 관점에서도 그분이 비단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자라는 점을 내세웠다.
그러면서도 요한복음처럼 뭔가 형이상학적이고 철학적이고 심오한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긴다. 정치 용어를 동원해서 비유하자면 '좌파'스럽다. 사복음서 중 민중, 인권, 여성 해방 같은 분위기가 압도적으로 가장 진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 책엔 정치인 디스가 심심찮게 나온다. 단순히 헤롯이 침례인 요한을 잡아 가뒀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헤롯이 안 그래도 나쁜짓을 저질렀데 그것도 모자라서 이를 책망하는 요한을 잡아 가두기까지 했으니 추가로 까임권을 획득한 것이라고 코멘트를 한다. (눅 3:19-20) 이런 코멘트는 다른 복음서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중에는 예수님도 그 헤롯을 보고 여우라고 살짝 디스를 하셨다(눅 13:32).

그리고 지금으로 치면 삼풍 백화점이나 세월호 같은 재난· 대형 사고 시국에 적용할 만한 구절도 누가복음 13장에 나온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다 이처럼 멸망하리라."
이런 맥락에서, "세리들은 법에서 규정된 것 이상으로 세금을 부당 징수 착취하지 말라. 군인들은 권력을 남용하여 민폐 끼치지 말고 나라에서 주는 급여만으로 만족하라" 같은 사회 정의를 추구하는 침례인 요한의 권면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눅 3:12-14)

마태복음의 설교에서 언급되는 "영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눅에서는 그냥 물리적으로 "배가 고픈 자"로 단순화되어 나오고,
동일한 사건도 마태복음이 scope가 대체로 "유대인 only"라면, 누가복음은 "모든 사람, 너희" 같은 global scope으로 바뀐다. 여러 모로 인간적이다. 그런데 정작 교회라는 단어 자체는 마태복음에만 직접적으로 나오니 이것도 상호 보완적인 집필 방식인 듯하다.

뭐 그렇다고 해서 성경 자체가 이념에 치우친 책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아야겠다. 누가복음 역시 뭐 민중신학, 해방신학처럼 부자들 재산을 빼앗고 기득권층 뒤집어엎어서 정치적 해방을 이루자 그런 짓을 결코 조장하지 않는다. 누가복음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진정한 신본주의야말로 역설적으로 진정한 인본주의를 실현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있는 뭔가 인간적으로 훈훈한 이야기로는 선한 사마리아인 내지 돌아온 탕자가 있다. 이것들은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시던 중에 나온 얘기이며, 실제 사건이나 실존 인물 얘기는 아니다.
그러나, 어떤 선행이나 종교적인 행위 없이 예수님만을 믿어서 죄사함/구원을 이루는 예로 누가복음에만 나오는 다음 두 에피소드들은 실화이다. (1)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 그리고 (2) 어느 죄인인 여인.

먼저 (1)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정에 없던 예수 십자가형 졸속 집행으로 인해, 주변의 어느 두 죄수도 완전 날벼락이 따로 없는 십자가형을 같이 당했다. 이들은 당연히 완전 멘붕에 빠졌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같이 예수님을 욕했다. 그러나 한 명은 몇 시간 동안 매달려 있던 과정에서 나중에 회개했다. (눅 23:39-43)

그는 살아 생전에 무슨 나쁜 짓을 해서 이런 비참한 최후를 맞이게 됐는지 모르겠다. 허나, 그는 막판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함으로써 로또 1등을 능가하는 인생역전을 성취했다. 저 사람이 무슨 평생 종교 행위를 했나, 고해성사를 했나, 도대체 무슨 예쁜 짓을 했단 말인가?

(2) 눅 7장에 나오는 무슨 죄인이라는 여인도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무진장 음란 방탕하게 살기라도 했는지?) 이를 악물고 죄를 단호하게 끊겠다고 결심하지도 않았고 뭐 무슨 성사, 고행, 기도문 암송 그딴 거 없었다.
그저 예수님을 보고는 감화되어서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보이고, 그 애통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그저 울면서 그분 발에 향유를 뿌리고 발에다 키스를 하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분 발을 닦았을 뿐이다.

그랬더니 이게 웬일, 예수님은 그 마음을 받으시고 그 여인의 죄가 용서됐다고 선언하셨다.

이런 일이 가능한 근본 이유는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사할 권한이 있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병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기적을 그분이 자꾸 행하신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는 기적이 가능하듯이 동급의 NP-hard나 마찬가지인 죄사함, 즉 눈에 안 보이는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걸 보이기 위해서였다. 이거도 내 추론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마 9:4-6, 막 2:5-10, 눅 5:20-24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며 등장!)  둘이 서로 다항시간 환산이 가능한 문제이기라도 한 듯. ㅋㅋ

그런데 저 여인이나 강도가 예수님께 잘 보여서 그저 뽀록이 난 것에 불과하고 예수님은 무슨 기분파마냥 이랬다 저랬다 제멋대로 죄 사면권을 남발하는 분이었던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크리스천은 없으리라 생각한다.
이 사고방식을 이해를 못 하면.. 당신은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이게 뭔 삽질이야?" 하고 분개했던 가룟 유다의 후예가 되는 거다. (요 12:3-5. 단, 이건 눅7과 동일 사건은 아님)

"평생 나쁘게 살다가 끝에 죽기 직전에 예수 믿기만 하면 끝이냐? ㅋㅋ" 이런 개독안티의 조롱은... 본질적으로 정확하게 맞는 말이다. 그게 기독교다. 단지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언제 죽을지가 예측이 전혀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의 정지 문제만큼이나. 구원은 오로지 예수님에게 있으며, what you do가 아니라 what you are에 달려 있다.

맨날 선행, 선행만 강조하는데 물질· 물리적인 선행에 앞서 그 동기와 이유가 무엇인가? 그 선행을 할 여건이나 환경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건가?
그러니 그런 상대적이고 불완전한 잣대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부터 사랑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모든 지혜와 지식의 시작이고 진짜 선행의 시작인 것이다. 예수님께 허비하는 건 궁극적으로 허비가 아니고 낭비도 아니다. 성경은 이런 사실을 알려 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서 펑펑 울고 온 눅 7장의 여인은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여인처럼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요한복음의 그 여인도 과거가 그리 깨끗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 주례 때 요 4:18과 요일 4:18을 절대로 뒤바꿔서 인용해서는 안 되게 됐다. =_=;; (이거 대표적인 기독교 개그인데.. 뭔 말인지 모르시는 분은 성경을 직접 찾아 보시길.)

요한복음과의 연계 하니까 생각나는데.. 누가복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논조로 보자면, 사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 얘기도 요한복음보다는 누가복음에 더 어울리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의 생각을 다 알 수는 없으니 감히 성경 변개를 주도하지는 않겠다.

자, 정치인 디스가 나왔고 제일 중요한 훈훈한 구원 이야기가 나왔고.. 끝으로, 침례인 요한 얘기 하나만 더 하겠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언급한 책이 반(마, 눅)이고 그리하지 않은 책이 반(막, 요)이다. 그런데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뿐만이 아니라 유일하게 침례인 요한의 드라마틱한 탄생 과정도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다른 책에서는 요한은 그저 성경 예언에 근거하여 곧바로 갑툭튀한 인물일 뿐이니 말이다.

예수님을 임신한 마리아가 방문하자 엘리사벳의 배에 있던 침례인 요한이 기뻐서 흥분했다니.. 이런 성경의 사고방식에서는 낙태 같은 건 정말 꿈에도 상상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태신앙'이라고 하면 그냥 충분히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니고 예수님을 믿어서 딱히 불신자의 사고방식으로 산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일컫지, 그 애가 진짜 태어나기도 전부터 특례 구원이 아닌 진짜 자기 믿음으로 구원 받았다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한의 경우는 레알 모태신앙이었던 것 같다. 눅 1:15를 보시라. "... 심지어 자기 어머니 태에서부터 [성령님]으로 충만하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요한이 예수님처럼 죄성이 아예 없이 태어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겠지만(시 51:5), 성경은 요한이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중에서 가장 큰(위대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마 11:11)
그런데 한편으로는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요한보다 더 크다고도 성경은 말한다. 이것은 요한이 예수님을 진짜로 보게 된 사람이라는 점에서 옛 사람들보다 매우 복을 받았지만, 한편으로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같은 영광은 못 보고 먼저 죽기 때문에 신약 크리스천만치 복이 있지는 못하다는 걸 의미한다.

단, 엘리야의 영을 받고 위대한 일을 한 요한도 나중에 투옥된 상태에서는 제자들을 보내서 그 예수님보고 "너 정말 메시야 맞니? 아니면 우리가 다른 사람을 계속 기다려야 할까?"라고 인증 질문을 하니, 이것은 성경을 처음 읽는 독자들을 의아하게 한다.
성경에서 복음서를 두 파트로 요약하면, 분량상 침례인 요한의 죽음과 곧이어 나오는 오병이어 기적이 딱 중앙에 자리잡게 된다.

이제 글을 슬슬 맺도록 하겠다.
누가복음은 '인간 예수'를 조명하다 보니,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한 단서가 짤막하게나마 언급되어 있는 유일한 책이다. 어린 시절이라고 해서 예수님이 무슨 척 노리스-_-라도 됐던 것처럼 희한하게 묘사한 수많은 위경들이 아니라 이게 진짜 믿을 만한 책이다.
또한 불의한 재판관 비유를 통해 끊임없는 간구 근성을 호소하며, "예수님 당신을 낳은 태와 당신이 어릴적에 빨았던 엄마 젖가슴이 참 복이 있습니다!" 같은 시시콜콜한 군중 애드립 에피소드(눅 11:27)가 기록된 책, 불의한 청지기 비유 같은 독특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책이 누가복음이다.

이런 이야기들이 적혀 있는 누가복음의 1:1-4 서문을 보시라. 여기에 기록된 모든 이야기들은 증인이 한두 명이 아닌 신뢰도 100%의 확실한 팩트라고 한다. 저자 역시 그 사건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정확하게 이해한 상태에서, 내가 진심으로 친애하는 '데오빌로'라는 독자로 하여금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꼭 모두 숙지하기를 바라면서 진심을 담아 기록을 남겨 전한다고 적혀 있다.
비단 누가복음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그렇게 고귀하게 기록되고 전해져 왔다.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을 읽고 상고하는 오늘날의 '데오빌로'의 후예에게도 반드시 복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20 08:31 2015/01/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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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국산화

1975년 12월에 현대 자동차에서 최초로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만들어 낸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우리나라에서 자동차 말고 가전 분야에서 이에 필적하는 발전을 선도하던 기업은 바로 지금 LG 전자의 전신인 금성사였다.
라디오를 생산해 낸 노하우를 바탕으로 1966년 8월에 최초로 흑백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개발· 생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상당수의 부품을 국산화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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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TV 한 대가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의 물가로 6만 원이었다. 이건 자료를 찾아 보면 엥겔 지수 자체가 더 높던 그 시절에 쌀 무려 20여 가마니의 가치를 상회하는 엄청난 가격이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 당시의 서민 경제력으로는 TV를 집집마다 장만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마을 이장님 집에서나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TV를 시청했다는 걸.. 개개인이 전화기와 DMB를 들고 다니는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것이다.

참고로 금성사는 그로부터 11년 뒤인 1977년에야 컬러 TV를 만들어 냈다. 그 당시에 국내 최고의 전자공학 공돌이들이 머리를 짜내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컬러 TV가 대세가 된 뒤에도 휴대용 소형 텔레비전이나 아파트 현관 인터폰 같은 CCTV는 가격이나 기술 문제 때문인지 여전히 흑백이 많이 쓰이곤 했다.

한 점에서 평면 화면을 표현하는 것이 쉬울 리가 없으니 초창기의 텔레비전은 아주 그냥 동그란 구면이었다. 컬러화를 이루고 채널 다이얼을 버튼으로 바꾸고 리모콘도 추가하고.. 이 모든 것 이상으로 텔레비전 관련 기술자들이 당면한 최대 과제는 당연히 이 면을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1990년대 중후반엔 완전평면 슈퍼플랫 브라운관 어쩌구 하는 경지에 도달했다. 크기도 30~40인치까지 커졌다. 한편, 컴퓨터 모니터는 큰 게 20몇 인치대.

하지만 공간 복잡도가 무려 O(n^3)에 달하는 크고 무거운 브라운관으로는 그 이상 대형화는 도저히 무리였다. 아울러 재래식 아날로그 TV 규격의 해상도만으로는 화질도 대형 화면에 적합하지 않았을 테고.
오늘날의 스마트폰 같은 초소형 컴퓨터가 출현 가능해진 데엔 단순히 집적도가 높은 고성능 CPU뿐만이 아니라 얇은 디스플레이 소자도 큰 기여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거 발전을 예상을 못 했기 때문에 옛날에 21세기를 상상했던 공상 과학 매체를 보면, 사람들이 첨단 기술이랍시고 텔레비전 전화로 상대방 얼굴을 보면서 통화를 하는데, 화면은 둥~그런 브라운관 화면인... 지금으로서는 참 웃지 못할 장면이 남아 있는 것이다. ㅎㅎ

이제 전세계에서 브라운관 모니터의 생산 중단이 임박했다.
브라운관 모니터에 떠 있는 운영체제로 어울리는 물건은 Windows XP 정도가 마지막이지, 2000년대 중반인 Vista와 그 이후부터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플로피 디스크도 새로 만들어지는 PC에서는 이때쯤부터 완전히 자취를 감췄고 말이다.

이와 더불어 한때 한창 유행했던 컴퓨터 모니터의 '보안경', 그리고 전원을 켜면 화면이 서서히 fade in으로 화면이 나타나던 장면 따위도 과거의 아련한 추억이 돼 간다.
그리고 컴퓨터에서는 VGA D-sub 단자도 점점 쓸 일이 없어지는 중이다. 한때는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영상 신호를 디지털 대신 아날로그 방식으로 보냈지만 지금은 다시 DVI 같은 디지털 규격으로 회귀한 지 오래이다. LCD는 브라운관보다 근본적으로 더 디지털 친화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2. 테스트 패턴

옛날엔 그래픽 모드로 진입하는 도스용 프로그램들은 실행 전에 비디오 모드를 묻거나 "이 글자가 잘 보이면 F5를 누르세요" 요청을 하는 게 있었다.
그리고 옛날에 아날로그 영상물에서 이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던 물건은 바로 테스트 패턴이다. 현재 텔레비전이 신호를 잘 잡았고 색상을 옳게 표시하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나타내는 색깔띠들이다. 흑백 명암과 RGB 각 축의 극단에 해당하는 고채도 색상들 조합이 쭈욱 나열돼 있다. 이것들도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게 아니라 다 규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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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과 같은 단순한 색깔띠는 텔레비전보다는 비디오 테이프를 틀었을 때 맨 앞부분에서 잠깐 보였을 것이다. SMPTE Color bar (Society of Motion Picture and Television Engineers)라고 불린다.

오른쪽의 좀 더 복잡한 형태의 색깔띠는 필립스 전자에서 만들었는지 PM5544라는 코드명이라고 불린다. 옛날에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정규 방송을 시작하기 15~20분쯤 전부터 '화면 조정'이라는 명목으로 송출하곤 했다. 배경 위로는 현재 시각과 금일 방송 순서 같은 것도 떴다.
화면 조정 중일 때는 BGM이 흘러나오는 편이지만, 정규 방송이 끝난 뒤에는 그냥 무음이나 단순 싸인파 소리만 들어있기도 했다.

디지털 통신에 온갖 복잡한 규격과 프로토콜이 존재하고, 아날로그 비디오 테이프에도 VHS나 베타맥스 같은 상반된 규격이 있었듯이..
아날로그 영상 신호 송신 방식도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크게 NTSC와 PAL이라는 방식이 있다. 우리나라는 NTSC를 쓰지만 북한은 우리와 다른 PAL을 사용하며, 이는 아마 의도적으로 일부러 다르게 정한 게 아닌가 싶다.

처음에 흑백 TV를 기준으로 신호 체계를 만들었다가 나중에 컬러 방식이 개발되었을 때는.. 기존의 흑백 TV는 여전히 자기가 인식하는 흑백 신호만 수신이 가능하게.. 즉 하위 호환성이 유지되게 흑백 TV가 사용하지 않는 주파수대에 컬러 신호가 교묘하게 추가되었다고 한다.
컬러 TV의 입장에서는 걍 RGB가 더 직관적이겠지만, 흑백 신호의 strict superset을 구성할 수 있는 HSL 방식으로 색을 표현하기도 하고 말이다. 어, 그러고 보니 JPG 압축 과정에도 색깔을 RGB에서 HSL로 바꾸는 게 있었지 싶은데?

뭐, 본인은 전자공학 쪽은 문외한에 가까우며 지금은 구닥다리 아날로그 TV 송신이 진작에 중단됐을 정도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이런 쪽 이야기가 은근히 흥미롭게 들린다. 디지털 고화질 TV의 등장과 함께 화면의 종횡비가 와이드로 바뀌었다. 아울러 컴퓨터 모니터도 이 추세를 따랐는지 16:9 와이드가 대세가 된 지 오래이다.

3. 옛날 방송과 지금 방송의 차이

지금은 TV 뉴스에서 볼 일이 없어진 코너가 최소한 둘 있는데, 하나는 아침 7시 뉴스를 하기 전에 나오던 편인 "세계 뉴스"이고 다른 하나는 저녁에 나오는 편이던 "주식 시세"이다. 이유는 당연히 정보의 바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인해 공중파 텔레비전 방송에서 굳이 그걸 선별해서 틀어 줄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날씨처럼 범국민적인 정보라면 모를까, 그런 건 그냥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찾는 게 더 빠르다.

온갖 기업들의 주식 시세와 함께 상하 ▲▼ 삼각형들이 뜨고 있을 때는 꽤 다양한 고퀄의 BGM들이 많이 흘러나왔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밤 9시 뉴스를 하기 전에 흘러나오던 시보도 정말 드라마틱하게 변해 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옛날에는 파란 배경의 추레한 아날로그 시계 CG에다가 PC 스피커 스타일의 기계음 일색이었다.
당장 "귓속에 도청장치가 있습니다" 방송사고 동영상을 찾아 보시기 바란다. 그 시절에 9시 시보가 어떠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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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시계 그림은 점점 휘황찬란한 보석 CG로 바뀌었고, 광고의 비중이 커졌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그냥 아날로그 시계 그림과 긴 차임벨 음향 자체가 삭제되었다. 영상 컨텐츠의 90% 이상은 광고이고.. 딱 정각 3초 전에 시각이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형태가 됐다. 이것이 시보 영상의 변천사이다.

4. 대기업에서 옛날에 개발한 소프트웨어

이제 좀 더 보편적인 옛날 이야기를 해 보자면..
옛날에는 금성과 삼성(!!)뿐만 아니라 대우와 현대도 자동차뿐만 아니라 '전자 제품'을 생산했고 심지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금성사의 경우 '하나'라는 텍스트 모드 워드 프로세서를 만들어서 한때 관공서 표준으로 쓰이기도 했고 '하나 스프레드시트'를 만든 적도 있다. 나중에 Windows용으로는 '윈워드'라는 워드 프로세서를 만들었지만 그건 망한 듯하고.

전자 제품도 함께 만드는 대기업에서 운용하는 소프트웨어 팀에서는 요즘 뭘 만드는지 모르겠다. 쟤들은 일단은 그래도 하드웨어에 같이 들어가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지, 독립적인 패키지 프로그램이나 온라인 게임 같은 걸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분야는 이미 시장이 다 포화했으며, 대기업이라고 해서 기성 IT 특화 업체들을 이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나마 삼성 전자의 훈민정음만이 좀 오래 간 정도이다.

5. 옛날의 경제 구도

끝으로, 우리나라의 옛날 상황에 대해서 단순히 못 살고 못 먹던 시대라는 막연한 편견 이상으로 진지하게 고려할 점이 하나 있다.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경제 구조가 지금보다 훨씬 더 폐쇄적이었다. 돈 되는 건 뭐든지 닥치고 수출하고, 그렇게 어렵게 번 외화를 아끼려고 국가적으로 완전 목숨을 걸고 있었다.

자동차 산업을 육성은 해야 하지만 국내에 석유 소비(=외화 유출)가 너무 늘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동차의 내수 보급을 어느 정도 통제를 해야 했다. 듣보잡 신생 자동차 브랜드이다 보니 외국으로 수출은 아주 싸게 하고 반대로 손해분을 비싼 내수 가격으로 때우는 전략은 우리 같은 서민에게야 불리하지만 그 시절에 국가적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전략이었다. 국제적으로 석유 파동이 벌어지니 저걸로도 모자라서 국가에서 자동차 산업 합리화라는 극단적인 조치까지 취해야 했으니,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을 대상으로도 인위적인 규제가 있는 셈이었다.

또한 전에도 말했지만 겨우 신혼여행이나 배낭여행 명목으로 외국 나가는 건 가능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유로는 자기 사비가 아무리 많다 해도 나라에서 여권을 만들어 주질 않았다. 양담배 추방하고 과소비 추방하고 국산품 애용하자는 캠페인을 잔뜩 벌였으며, 기업에서의 외제품 수입은 정말로 연구 개발에 도움이 되는 것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기업들은 자동차나 전자 기기를 만들 때 국가에서 밀어붙인 "x년 안으로 국산화율 y% 이상 진입" 같은 할당량을 반드시 달성하며 연구 개발을 해야 했다. 하물며 다른 외제품도 아니고 외제차에다가는.. 당연히 세금 왕창 때렸다.

지금이야 우리가 그렇게 폐쇄적으로 나갈 필요가 없다. OECD와 WTO 회원까지 된 주제에 그래서는 안 된다. 기술· 경제 방면에서 외국과 대등한 경쟁력이 있다면야 다 개방하면 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는 여전히 불가피한 시장 왜곡과 보호도 해야 했다.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외국에 나가고 외래 문물을 마음껏 누리면서도 나라가 유지되는 것은 정말 우리나라가 그만큼 잘살고 세계적인 경제력을 갖춘 덕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1/08 08:32 2015/01/0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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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체 연료와 액체 연료

우리 주변에서 연료를 태워 열 내지 에너지를 만드는 도구, 기계들을 생각해 보자.
하긴, 옛날에는 불을 최초로 피우는 것조차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집집마다 한번 만들어 놓은 불씨를 잘 간수해야 했으며, 옛날까지 갈 것도 없이 무인도 같은 오지· 험지에 홀로 내던져졌다면 불을 피우는 게 매우 중요한 생존 기술 중 하나로 변모한다. 성냥, 양초 같은 물건도 주류에서 밀려난 구시대 유물일지언정 완전히 없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연소나 폭발을 취급하는 물건들은 어떤 형태의 연료를 쓰는지에 따라 설계 방식이나 동작의 특성이 달라진다.
연료라는 건 크게 고체 아니면 액체로 나뉜다. 고체는 나무나 석탄, 혹은 다른 고체 폭약 같은 것이고, 액체는 잘 알다시피 석유나 액화 천연가스가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액체 연료를 다루는 기계적 메커니즘이 고체 연료보다 더 복잡하고 까다롭다.
그러나 액체 연료가 그만큼 연료를 아주 찔끔찔끔 균일하게 공급하면서 화력을 조절하기가 더 쉽다. 그리고 연소 후의 부산물도 액체 연료가 훨씬 더 깔끔하며 처리하기가 더 편하다.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연탄/화목 보일러나 난로는 불에 탈 수만 있다면 통나무건 종이 뭉치건 아무 덩어리나 집어넣어도 되니 기계 구조가 간단하고 당장 열을 만들어 내는 건 쉽다. 하지만 그 뒤부터는 여러 모로 불편한 점과 애로사항이 꽃핀다.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나며, 일단 불이 붙은 연료를 통제하기가 어렵다. 점화나 소화를 스위치 하나로 간편하게 할 수가 없다.

연탄은 크기와 모양이 규격화돼 있는 고체 연료라는 점은 그나마 낫지만, 여전히 점화와 소화가 불편하며 연료를 배달하기가 매우 번거롭다. 매번 연탄재를 처리하는 것도 큰일이고 말이다.
양초는 고체 연료인 것치고는 심지를 통해 연소가 균일하게 잘 일어나는 편이지만, 역시나 강약 조절을 할 수 있지는 않다.

옛날에 증기선이나 증기 기관차에는 보일러에다 석탄을 삽으로 퍼 넣는 화부가 탑승해야 했으며 즉각적인 동력 조절이 되지 않았다. 고체 연료 화통의 화력은 공기를 불어넣는 양 정도로나 조절 가능했다. 성경의 다니엘서에서 풀무불을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하는 건 과연 기술적으로 어떻게 실현했을까? (단 3:19)

이것은 발사체인 고체 연료 로켓도 고스란히 갖는 한계이다. 한번 점화가 된 뒤에는 연료의 연소를 일시적으로 중단하거나 동력 조절을 할 수 없으며, 가능하다 해도 그 과정은 몹시 어렵다.

이런 이유로 인해 요즘은 관광용 증기 기관차도 물을 끓여서 나아갈지언정, 물을 데우는 건 석탄이 아닌 석유로 한다.
그리고 로켓에는 액체 연료 로켓이 연구되었으며, 이 바닥의 선구자는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고다드이다. 우리말 표기로는 '더'와 '다'가 공존하면서 혼란스러운 이름인데...

공기가 없는 우주에서도 움직이는 액체 로켓은 연료 자체뿐만이 아니라 산화제까지 액체여야 하기 때문에 고체 로켓보다 만들기가 더욱 어려웠다. 증발이나 부식 같은 문제 때문에, 산화제와 연료를 주입한 채로 로켓을 장시간 발사대에 놔 둘 수 없다는 점도 대단히 번거로운 점이다. 로켓의 발사가 연기된다거나 하면 그것들을 도로 빼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체 연료 발사체 기술 덕분에 인간이 우주로 나갈 수도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통제 가능한 발사체가 만들어질 수 있게 되었다.
라이트 형제가 동력 비행을 성공한 지 30년이 채 되지 않아 미국의 학계에서는 로켓의 이론적 근간이 연구되고 “달까지 가는 진지한 방법” 같은 게 논문으로 발표되고 있었다니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때는 그랬는데 미국이 어쩌다가 스푸트니크 멘붕을 당할 정도로 잠시 주춤했는지?)

단, 고다드의 연구는 시대를 너무 앞서 있었으며, 그 당사자 역시 언플이나 사교력이 뛰어난 공돌이는 아니었던 관계로... 그의 연구는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딱히 인정을 못 받았다. 1920년대에 뉴욕 타임스 신문은 고다드가 불가능한 목표를 두고 아무 쓰잘데기 없는 황당한 뻘짓을 한다고 막 조롱하고 디스하고 망신 주는 사설을 게재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고 고다드의 연구를 토대로 새턴 로켓이 발사되고 아폴로 우주선이 달까지 간 뒤에야 뉴욕 타임스는 자기네 옛날 사설을 취소하고 고인에게 사죄를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님의 연구 덕분에 후손들이 달에 진짜로 갈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짧았습니다.”라는 요지로.

이건 20세기의 우주 개발 역사에서 매우 유명한 일화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나 독재 정권에 아부하던 메이저 언론이 나중에 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죄한 것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비슷한 격인데, 우리나라 언론에서는 찾기 힘든 모습인 것 같다. =_=;;

이것저것 얘기가 많이 나왔는데..
여러 분야를 막론하고 액체 연료는 고체 연료에 비해 점화· 소화와 화력 제어가 용이하고 연소 결과가 깨끗하다는 많은 장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제는 친구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으러 갈 때도 고체 연료(숯)를 쓰는 식당과 액체 연료(도시 가스)를 쓰는 식당의 구조적인 공통점과 차이점을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고기를 굽는 데는 '연기와 향'이라는 변수가 추가되기 때문에 굳이 경제적으로는 더 불편한 고체 연료가 선호되기도 한다. ^^;;;

Posted by 사무엘

2014/12/17 08:35 2014/12/1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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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러가지 교통 관련 썰을 좀 풀어 나가도록 하겠다.

1.
지난 추석 때, 고향을 왕래하는 고속버스 차창 밖으로.. "고속국도 제1호선 언양-영천간 확장 공사" 라고 표지판이 붙고 터가 닦여 있는 걸 봤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 이래로 지난 40여 년간 최후까지 오리지널 4차선 그대로 남아 있었던 마지막 구간까지도 드디어 확장된다니 감회가 새롭다.
이 고속도로에 대해서는 3년 남짓 전에도 글을 한번 쓴 적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경부 고속도로의 옛날 사진을 보면 중앙 분리대가 화단 형태로 된 모습이 있어서 무척 신기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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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옛날에는 일부 직선 구간(성환, 신갈)은 아예 물통 같은 임시 중앙 분리대만 만들어 놓고 유사시에 활주로로 쓸 수 있게 해 놓기도 했다. 그리고 실제로 해당 구간을 잠시 폐쇄하고서 전투기 이착륙 훈련을 한 적도 있다.
아래 사진은 신갈 활주로에서 실제로 훈련을 하던 모습이다. 신갈 일대 고속도로 좌우 모습이 저랬을 정도이면, 아니 경부 고속도로의 수도권 구간을 폐쇄하는 게 가능했을 정도이면 지금으로부터 엄청, 굉장히 먼 옛날의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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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형태든 임시 형태든.. 경부 고속도로의 중앙 분리대가 모습이 저랬다는 것은 오늘날로서는 참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경부 고속도로는 처음에는 전구간 4차선으로 건설되었다.
지금이야 88 올림픽만이 전국 유일의 겨우 2차선짜리 고속도로라고 까이지만, 옛날에는 반대로 경인과 경부 정도만이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다차선이었다. 2차선 고속도로는 여럿 있었다. 당장 호남이나 영동 등.
그런데 옛날에야 그렇다 치더라도 1990년대까지만 해도 높으신 분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고속도로를 마치 88 올림픽처럼 겨우 2차선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중앙 고속도로인데.. 이건 마치 21세기에 개통 예정인 철도를 표준궤가 아닌 협궤 크기로 만드는 것만큼이나 막장 행위였다. 이것은 다행히 감사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끝에 뒤늦게 4차선으로 허겁지겁 개조되었다.

감사원? 철도에서 일산선 건설도 서울 지하철 3호선처럼 우측 직류 규격으로 임의로 바꿔서 과천-안산선처럼 꽈배기굴 시즌 2가 생길 뻔한 것을 막은 그 기관 말이다. 철도뿐만 아니라 고속도로를 만들 때도 그나마 세금값을 했다.

2.
철도 경부선은 영업거리표 상으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공식 거리가 441.7km이다.
옛날처럼 지금의 서울 역(그 당시엔 남대문) 이북으로 레알 서울 역이 있고, 지금의 부산 역(그 당시엔 초량) 이남으로 진짜 부산 역이 또 있었다면 거리는 지금보다 2km 남짓 더 길어졌을 것이다.
한편, 경부선 철도에 상응하는 경부 고속도로의 전체 거리는 416.4km이다. 개통 당시엔 428km가량이다가 선형 개량을 통해 더 짧아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경부 고속도로는 경주와 울산을 거쳐서 크게 우회하는데 어떻게 유사 노선의 철도보다 거리가 이렇게 짧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경부선도 서울 구간에서는 서쪽 영등포 방면으로 우회를 좀 해서 동선이 안 좋지만, 그래도 고속도로에 비할 바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답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바로 시내 구간의 포함 여부이다.
철도는 서울 역이라는 서울 도심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부산 역도 부산 시내를 다 관통한 후 완전 최남단에 있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양재 IC라는 서울 남쪽 외곽에서 끝나고, 부산도 시점인 구서 IC는 부산의 북쪽 끝자락이다.
양재IC - 서울 역 내지 구서-부산 역만 쳐도 각각 직선 거리만 거의 15km에 달한다.

이걸 퉁쳐 주면 고속도로나 철도나 거리는 서로 비슷해진다.
경부선 기존선이 아니라 서울-대구 구간을 고속선으로 달리는 KTX는 서울-부산 전체 주행 거리가 408km대로 크게 감소한다. 경부고속선이 기존 선로의 구불구불하던 주름을 얼마나 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대구 이남 구간은 고속선이 경주와 울산을 경유하기 때문에 KTX의 거리는 423.8km로 15km 남짓 증가한다.

3.
교통· 운수 업계에서는 경사로의 기울기나 차량의 등판능력을 말할 때 각도가 아니라 언제나 기울기(탄젠트)를 쓴다. 고정된 X축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높이 Y가 바뀌는 비율인 것이다.
요즘은 자동차 제원표에서 찾아보기 힘들지만 보통 등판능력이 0.3xx가 나오는데, 그것도 탄젠트이기 때문에 실제 각도는 10몇 도 정도이다. 도로 표지판에서 볼 수 있는 5% 경사, 10% 경사 이런 것도 당연히 탄젠트 값임.

우리나라 K2 전차의 홍보 영상을 보니 무슨 60도 경사를 오른다고 자랑을 하던데.. 이건 오류이다.
45도보다도 높은 60도 경사를 오른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이고, 사실은 탄젠트 0.6에 해당하는 거의 30도대의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는 뜻이다. 그 무거운 쇳덩어리가 그 정도 경사를 오르려면.. 엔진 힘뿐만이 아니라 무한궤도를 이용한 접지력이 정말 살인적인 수준이어야 할 것이다.

철도 차량은 일반 육상 차량보다 등판능력이 훨씬 뒤떨어지기 때문에 백분율도 아니고 천분율을 써서 '퍼밀' 단위로 표기한다. 각도로는 2도가 채 안 되는 30 퍼밀 정도의 경사도 철도 차량에게는 우리나라의 태백선 같은 산악 철도에서나 볼 수 있는 굉장한 급경사이다. 견인 중량이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데다 쇠 바퀴와 쇠 선로는 마찰도 작으니 등판능력이 쥐약일 수밖에 없다.

육상 교통수단뿐만 아니라 비행기의 상승/하강률도 기울기로 표기된다. 1000m를 이동하는 동안 고도가 몇 m 바뀌는지가 기준이다. 우주왕복선은 엔진이 없이 글라이더 활강을 하기 때문에 일반 여객기보다 하강률이 훨씬 더 높다. 정확한 숫자를 본 적이 있었는데 또 찾기는 귀찮..;;

이렇게 업계에서 각도 대신 탄젠트가 즐겨 쓰이는 이유는, 일상생활에서는 고저차를 무시한 이동 거리가 더 중요하게 다뤄지며, 또 경사각이 올라갈수록 차량에게 필요해지는 동력 같은 각종 물리량도 각도가 아니라 탄젠트에 비례해서 급격히 올라가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탄젠트가 현실적인 의미가 더 크고 유용하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12/11 08:29 2014/12/1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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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뒷부분을 읽으면서 먼 옛날, 예수님이 배반 당하고 악의 무리들에게 체포되고 '답정너' 어거지 재판을 받은 후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곰곰이 묵상해 보았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이 십자가 사건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상하고 기괴한 이벤트만 골라서 벌어진 끝에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예수님이 가끔은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발언 때문에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일단은 기적 때문에 대중적으로 최소한의 인기와 지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백성들 눈치를 보는 '높으신 분'들은 예수님께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명절에는 체포와 처형을 더욱 피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현실에서는 최악의 상황만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가룟 유다를 보고는 예수님께서 “니가 이제 뭘 하려는지 난 뻔히 알고 있지만, 이건 짜고 치는 고스톱이니 니 할 일 하러 가라”와 다름없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유다를 밖으로 보내 주셨다. 적들과 내통하러 나가는 건데도 어찌나 곱게 보내 줬으면, 그때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다른 돈이나 물건을 챙기는 심부름을 하러 나가는 줄 알았을 정도였다.
그 뒤, 군중이 붙어 있지 않은 한밤중에 예수님이 거의 “옜다, 나 잡아 가슈” 급으로 일부러 한적한 바깥에 나가서 낚여 줬다. 그 덕분에 체포가 가능했다.

제아무리 악의 무리라 해도 예수님이 선한 일을 한 것.. 즉, 병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 걸 트집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어설픈 거짓 증언들은 같은 상황에 대해서 자기들끼리도 진술이 일치하지 않아서 법적 효력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나마 트집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성전 사흘 재건' 떡밥인데... 이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원래는 요 2:19이지만 '카더라' 명목으로 마 26:61에서 먼저 미리 등장한다.
솔로몬이 기도를 한 내용이 있기도 하니 유대인들은 물리적인 성전 건물에 대한 애착이 굉장히 컸던가 보다. 그런데 그 엄청난 성전을 걸고 저런 충격적인 말을 예수님이 하셨으니 그게 예수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모양이다.

물론 앞뒤 문맥 행간 다 짤라먹고 사람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는 찌라시 기레기들의 수법은 지금이나 그 시절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예수, 성전 폭파 발언 충격 일파만파”처럼 말이다.

예수님은 다른 그 어떤 거짓 고소 개드립에도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않아서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에는 즉각 대답하셨다. 대제사장 앞에서든(마 26:63-64), 빌라도 앞에서든(마 27:11) 말이다. 그것이 당장 자기 신변을 불리하게 만드는 답변이더라도 말이다.
예전부터도 예수님은 시종일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 16:15)

다른 사람들은 마태복음 22장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 종교, 시사 등 온갖 주제로 예수님께 질문을 했지만 예수님은 그냥 즉문즉답이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한 주제가 아니니 제끼고, 그분이 카운터어택으로 딱 하나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셨던 것은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인데 왜 선조인 다윗이 자기 후손을 보고 주님이라고 불렀을까?” 정체성 질문 하나뿐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떡실신했다.

그러니 이런 패턴을 아는 예수님의 적들이 트집을 잡은 방법은 역시나 100% 걸려들 수밖에 없는 종교라는 형이상학적인 영역을 악용하는 것이었다. 다니엘을 모함한 대신들이 다니엘을 행실로는 트집 잡을 수 없으니 기도라는 종교 관습으로 올가미에 넣었듯이 말이다. 다니엘도 그냥 그 30일 동안은 그냥 문 닫고 골방에서 몰래 기도할 수도 있었지만, 일면 고지식한 바보 같이 일부러 흉계에 걸려들었다.

이처럼 예수님도 자기 정체성만은 당당하게 드러내셨다. 대제사장은 드디어 명목상 신성모독이라는 중대한 껀수를 하나 잡았으니 이렇게 기쁠 데가. 하지만 겉으로는 옷을 찢고 오버하면서 “oh my god!! ㅠ.ㅠ 어머나 세상에 제 입으로 제 발로 하나님을 사칭하는 놈이 있다니 이런 참람할 데가! 이 이상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하단 말이냐? 이 새퀴는 뒈져야 마땅하다”라고 짜여진 각본대로 아주 생지X(비속어 죄송~~)을 해 댔다. 옛날에 악의 무리들이 나봇을 신성모독죄 누명을 씌워 인민재판을 벌이고 죽였을 때처럼 말이다.

이것은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그 창조주가 현신했는데 피조물들로부터 따귀를 맞고 침뱉음, 조롱, 학대를 당한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 피조물 인간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때문에 제자들은 실족하고 멘붕에 빠지고 도망쳤다. 5천 명의 군중을 먹이고, 물 위를 걷고, 중병을 고치고 마귀들을 내쫓고 죽은 사람까지 살렸던 자기 스승이 언제부턴가 고난, 죽음 얘기를 하면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더니.. 왜 이렇게 너무 나약하게 험한 꼴을 당하는 걸까?

베드로는 의욕이 넘쳐서 처음엔 예수님의 적들을 향하여 용감하게 칼까지 휘두를 정도였지만.. 예수님이 자기 기대와는 너무 딴판으로 행동하자 제풀에 기가 죽었고.. 결국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위급한 상황에서 그분을 세 번 부인하는 인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반역죄 신성모독죄로 몰아서 죽이고 싶었지만, 자기들도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판에 자체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은 그분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적 원수인 외세까지 끌어들이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나중에는 “우리에게는 카이사르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러기까지 한다. 일제 강점기로 치면 조센징들이 “우리에게는 덴노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이런 짓을 한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걸로도 모자라서 자기 무덤을 스스로 파 버린 확인사살 크리티컬은 “저 사람의 피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아올지어다”이고 말이다.

하지만 빌라도도, 헤롯도 예수님을 찬찬히 살펴보니 저 사람은 딱히 사형을 당할 만한 중죄인이 절대 아니었다. 헤롯은 예수님을 그냥 해롭지 않은 미치광이 정도로 치부한 듯하나 빌라도는 예수님이 보통사람이 아니란 걸 직감했다. 목숨을 전혀 구걸하지 않고 태연한 그분의 포스에 자신이 오히려 압도당하고 초조해졌다. “다.. 당신은 왜 아무 말도 없느냐? 주변에서 온통 당신을 고소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 나에게는 너를 처벌하거나 풀어 줄 권한이 있는데 왜..? 으응..??” 같은 식.

빌라도는 예수님을 풀어 주고 싶었지만 이미 민심은 광기로 치닫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선동을 당했는지, 아니면 무기력한 예수님의 모습에 실망했는지 백성들조차 폭도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요구하고 예수님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흉악범에게나 집행되는 십자가형을 요구했다. 그리고 빌라도는 자기 정치 생명 보존을 위해 이를 허락해 버렸다. 그것도 명절 기간에..;; 이때 같이 들러리로 끌려나와 갑자기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 두 명은 날벼락이 따로 없었을 것이다.

온갖 기적을 베풀며 당장이라도 자기 민족을 로마 제국으로부터 해방시킬 것 같던 슈퍼스타 예수가 하루아침에 너무도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십자가형을 당하자.. 무지한 군중들은 그분에게 온갖 야유를 퍼부었다. '성전 사흘 재건' 떡밥도 다시 나온다. (마 27:40)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더니 당신 꼴 좋다~!”
“중이 제 머리는 못 깎는다더니 저 사람은 자기 자신은 못 구하네? ㅋㅋㅋㅋㅋ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 & 유대인의 왕이라면 한번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시지? ㅋㅋㅋㅋ”

그러나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정말 비장하고 숙연하기 그지없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눅 23:34)
십자가에 같이 매달린 두 강도들도 처음에는 같이 예수님을 조롱하고 욕했었다. 제 코가 석 자인 주제에.
그러나 누가복음의 진술에 따르면 둘 중 하나는 나중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정말 드라마틱하고 놀라운 회심을 했다. (눅 23:42)

그 뒤의 결말은 여기서 굳이 길게 각색해서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당한 여느 죄수들과는 달리 불과 몇 시간 만에 일찍 숨이 끊어졌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피한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생명을 내어놓은 거라고 한다. 십자가형은 참수나 화형과는 달리 죽을 때까지 죄수를 내버려 두는 형벌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저런 행적이 나올 수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되고 묻힌 지 사흘 만에 부활했으며, 이를 본 제자들은 그야말로 가슴이 터질 듯 기쁨으로 용기백배하여 담대한 복음 전도자로 바뀌었다. 그 어떤 난관이나 심지어 죽음과 순교도 이들의 증언을 꺾지는 못했다. 그래서 기독교가 태동할 수 있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종교들 중 신이 인간을 먼저 사랑했고 인간을 위해 고난을 당하고 피흘려 죽었지만 부활까지 했다고 가르치는 유일한 종교이다!

국내에는 송 명희 시인이 예수님의 고난을 뭔가 인간적인 애틋한 심상으로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얼마나 아프실까>, <우리의 어두운 눈이 그를>, <누구 때문에> 같은 찬양 말이다. 물론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단순히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지사나 여느 순교자 같은 성격은 아니다. 또한 무슨 도살장에서 도축 당하는 짐승을 불쌍해하듯이 인간의 입장에서 무작정 동정할 만한 성격도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은 뭐랄까 정말 엄청나고 대단한 일인 건 틀림없다.

예수님이 부활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봉인까지 아무 문제 없이 뚫고 무덤을 탈출하자, 기존 악의 무리들은 보초병들을 매수하여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 보초병들이 조는 사이에 제자들이 무덤에 침입해서 예수 시체를 훔쳐 갔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는 걸로 대응했다.
그 시절에 로마 군인이 근무 중에 졸다가 적발되었다? 이건 중대 군기 문란죄이며 당사자는 그야말로 끔살을 면치 못했다. 또한 죄수 같은 걸 놓쳤다면 지키던 간수가 자기 목숨을 대신하여 책임을 져야 했다. (행 12:19 베드로를 놓친 감옥 간수들의 최후. 행 16:27 감옥이 지진으로 파괴되자 간수는 곧장 자결하려 함)

아무리 유대교 종교인들이 돈을 많이 주고, 또 졸았던 것에 대해서 자신들이 적극 변호하고 실드를 쳐 주겠다고 약속은 했어도... 졸다가 예수 시체를 도둑맞았다는 소문을 로마 군인이 퍼뜨린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자충수에 가까운 짓이었을 텐데 싶은 생각이 든다. 뭐, 고의성이 있든 없든 예수님 시신을 놓친 군인들은 어떤 경우든 신변이 좀 걱정되는 처지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종교 지도자들의 앞뒤가 안 맞는 행적을 좀 더 살펴볼 수 있다.
자기가 내리는 결정에 대해서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게 아니라, 백성들 눈치를 보고 그들의 예상 반응을 시뮬레이션하고, 서로 의논을 하면서 잔머리를 굴린다.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에 대한 대답도..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하면 될 것을 그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마 21:25-27)

또한 온갖 율법을 어기면서 예수님을 거짓 고소하고 추악한 짓은 다 했으면서... 가룟 유다로부터 반환받은 돈은 제 딴에 더러운 돈이라고 성전의 보고에다 안 넣고 율법 따지면서 종교적인 행세를 한다(마 27:6).

그들의 또 다른 위선적인 면모는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라고 그들을 맹렬하게 책망하시는 23장에 기록되어 있다. 마 23:29-33을 보면.. 한 마디로 이런 내용이다. “우리 선조들은 참 병신 같아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 대언자들을 핍박하고 죽였어요. 우리가 그 시대를 살았다면 안 그랬을 겁니다.”
허나, 이들이 얼마 안 있어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걸 생각한다면 피식 웃음이 나오지 않는가?

물론, 우리라고 해서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다면 과연 예수님의 진면모를 영적으로 파악하고 그분의 길을 따랐을지.. 아니면 역시나 육신적인 선동에 혹해서 그분을 정죄하는 일에 동참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성경은 인간이라면 바다가 갈라지고 홍해 중앙을 멀쩡히 건너는 넘사벽 기적 체험을 하고도 딱 사흘 뒤엔 목 말라 죽겠다고, 이딴 식으로 고생하면 뺑이 칠 거면 걍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 영웅 예수님이 입성하는 걸 흥분해서 환영하던 인파들도 며칠 뒤에 태도가 180도 돌변하여 “폭도 바라바를 풀어 주고 예수라는 저 무능한 꼰대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인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변덕이 심하고 간사하다고 말하는 책이다. 당신이라고 해서 안 그럴 것 같은가? “천만에”다.

바리새인들은 나름대로 바빌론 포로 귀환 이래로 이제 절대로 우상 숭배 안 하고 최소한 구약 성경 유일신만 믿기로 작정을 한 종교 꼴통들이다. 그리고 서기관들은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보존해 온 종교 전문직 종사자들이다.

이들이 비록 예수님 당대에 전반적으로 영적으로 좀 맛이 가 있긴 했어도 이들만이 마치 악의 축인 양 싸잡아 정죄하는 것은 성경 독자로서 옳지 못한 태도이다. 세상에는 바리새인만도 못한 인간들 역시 엄청 많다는 걸 알아야 하며, 특히 예수님을 죽인 민족이라고 크리스천이라는 사람이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반유대주의 풍조에 동조하는 건 절대로 성경적인 자세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결국 글이 굉장히 길어져 버렸는데.. 맺기 전에 하나만 더, 빌라도와 가룟 유다에 대해서 좀 생각을 해 보겠다.
먼저 빌라도. 그는 현장에서 저렇게 우유부단하고 고뇌하던 모습으로 인해, 그저 운 나쁘게 저 현장에 있었을 뿐이고 악의적이는 않았던 나약한 보신주의자라는 식으로 실드 치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빌라도를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쨌거나 그는 이 사건을 계기로 헤롯하고도 다시 친해졌을 정도로(눅 23:12) 결국 예수님의 대적들 편에 확실하게 섰기 때문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 이건 진지한 구도적인 질문이 아니라,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그냥 한 마디 툭 던진 립서비스일 뿐이었다. “ㅉㅉ 이 상황에서 뭔 놈의 얼어죽을 진리 타령이냐?”에 가깝다.

원쑤지간이던 빌라도와 헤롯이 과연 무엇을 매개체로 화해했을지도 생각해 보면 뻔한 노릇이다. 까놓고 말해 술자리에서 술안주로 예수님을 같이 씹으면서 친해진 게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내가 보니 그 사람 완전 바보 싸이코더구만! ㅋㅋㅋ” “그러게? ㅋㅋㅋ 사실은 나도 똑같이 생각했지!” 그는 예수님을 대면하면서 양심이 좀 찔리던 기억은 이런 식으로 잊어버리고 훌훌 털어내 버렸다.

그리고 유다는 인간적으로는 예수님의 제자였다가 한 순간에 대실수를 저지르고 그걸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수습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 정도로 여겨진다. 하도 부정적으로만 평가되다 보니 마치 원 균을 재평가하듯이 유다도 최대한 개인 상황을 감안하여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신학 해석도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유다는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동정의 여지가 없이 성육신한 마귀라는 해석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마귀이니라” (요 6:70)가 비유가 아니라 평이한 사실 진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행 1:25에서도 베드로가 유다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라 자기 처소로 돌아갔다고 얘기하는 게 뭔가 저 사람 정체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성육신하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마귀 역시 짝퉁 성육신해서 훗날 예수님의 제자로 위장해 들어갔다는 뜻이 되는데.. 사실이라면 많이 무섭다. 성경에는 유다 자체가 마귀라는 말뿐만 아니라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눅 22:3), “사탄이 유다에게 이상한 생각을 넣었다”(요 13:27) 같은 상이한 진술이 모두 들어있다.
이것은 마치 다윗의 잘못된 인구 조사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는지에 대해서 성경이 상이하게 진술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삼하 24:1, 대상 21:1).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조명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다가 나중에 목을 매어 자살했는데, 이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사도행전의 증언을 보면 그는 내장이 튀어나오며 상당히 끔찍하게 죽은 것 같다. (행 1:18)
단, 사도행전 1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과, 마태복음 27장에서 언급되는 피 밭은 개념상 서로 다른 장소이다.
전자는 유다가 개인적으로 비축해 둔 돈으로 산 자기 땅이다. 그러나 후자는 따로 토기장이의 땅을 사서 조성한 공동묘지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10 08:30 2014/11/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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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세기 초· 중반이 배경으로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찍는다면 그 당시 길거리를 달리던 옛날 자동차들도 재연되어야 한다. 이런 '올드카'들은 상업적인 임대 수요가 있으며, 이를 대여해 주는 업체도 응당 존재한다.
하지만 국내에서 원하는 올드카를 못 구하면, 외국으로 진작에 수출된 옛날 국산차를 다시 역수입해 와서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작에 처분된 차들이 외국에서는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이전의 옛날 자동차는 지금의 자동차하고는 당장 연료가 호환되지 않을 텐데 그런 건 어떻게 극복했나 모르겠다. 당장 휘발유만 해도 유연과 무연의 차이가 존재하며 경유 역시 유황 성분이 더 줄어들고 이것저것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는.. 어차피 화면에는 올드카의 외형만 비치면 되니까 엔진은 요즘 차량의 것으로 싹 갈아 버릴 수도 있다.
요즘 관광용으로 일부러 도입해서 굴리는 증기 기관차는 겉모양만 증기이지 석탄이 아닌 석유로 물을 끓인다거나, under the hood는 아예 내연 기관이 달린 디젤 기관차인 경우가 대부분이듯이 말이다.
하지만 자동차의 경우 엔진 교체는 쉽게 가능한 일이 아니며, 엔진이 다른 것으로 교체되어 버리면 엔진음은 옛날 차의 것이 그대로 재연되지 못할 것이다.

본인은 지난 올해 상반기 중에 서울 시내에서 포니 2를 한 대 구경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 차를 20년, 30년씩 굴린 차주들은 당연히.. 주변에서 “그랜저를 줄 테니, 그 포니를 내게 파시오.” 식으로 제안하면 절대로 응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머리카락이나 손톱을 엄청나게 길게 길러서 기네스북급의 기록을 갖고 있는 사람들만 해도 돈을 아무리 많이 준다 해도 그걸 안 자른다. 하물며 자기 인생을 함께한 올드카 애마를 돈 몇 푼에 처분하겠는가?

우리나라의 올드카 수집가로 유명한 사람은 이걸로 아예 직업을 삼은 금호 상사의 대표 백 중기 씨이다. 금호 렌터카와 혼동하지 말도록. 이미 1970년대부터 길거리에서 소리없이 사라져 가는 올드카에 대한 경각심을 느끼고 시발 자동차 택시, 기아 삼륜차, 이 승만· 박 정희 대통령의 관용차 등 까마득한 올드카들을 수집해 왔다고 한다.

단종되고 제조사로부터 A/S가 더 없고 부품을 정상적인 통로로 구할 수 없는 자동차는 소프트웨어로 치면 지원이 완전히 종료된 abandonware나 마찬가지이다. 저분은 수백여 대의 올드카를 보유하고 있다는데 단순 정태보존인지, 아니면 운전이 가능한 동태보존의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세금· 보험료 같은 굴레 없이 수집이 가능했는지도 궁금하다.
거기에다 평상시에 보존· 유지를 위해 물리적으로 깨지는 비용을 생각하면 올드카 임대를 통해 그렇게까지 많이 수지 맞는 장사를 해 온 건 아니라고 함. 아무튼 덕업일치에 좋은 일을 해 온 대단한 분이다.

2.
그리고 올드카 얘기 하나 더.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새한 자동차 시절의 구닥다리 8.5톤 덤프 트럭을 소개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한 자동차계의 노인학대가 존재한다는 정보를 엔하위키를 통해 전격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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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에서 생산한 바퀴 10개짜리 카고트럭.
무려 1940년대 중반에 생산된 군용차인데, 현역에서는 1970년대에 물러나고 민수용으로 풀린다.
그런데 그런 차가 충북 내지 강원도의 오지에서 적어도 2000년대 중후반까지 혹사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 차의 애칭은 '제무시 트럭'이다. GMC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지-에무-씨'가 되는데 그걸 줄여서 '제무시'라는 기괴한 명칭이 된 것.
군용차는 무겁고 완전 기름 먹는 하마 급의 연비를 자랑하지만, 그만큼 어마어마하게 튼튼하며 어지간한 트럭이 지나갈 엄두를 못 내는 험지나 오르막도 거뜬히 오른다.
시간이 정지한 듯한 이 트럭의 활약기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3.
세워진 자동차에 주차료가 부과되는 것만큼이나 공항에 세워져 있는 비행기에는 시간에 비례하여 주기료가 부과된다. 이거 생각보다 꽤 비싸다. 인천 공항에 보잉 747 여객기를 세워 놓는 비용은 하루 기준으로 거의 100만원이 조금 넘는다. (지금은 더 올랐을지도 모름)

물론 보잉 747은 어마어마하게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거대한 물건이긴 하나, 어쨌든 금액의 스케일이 10분당 1천원 꼴로 주차료를 받는 서울 시내의 좀 비싼 유료 주차장의 임률도 아득히 초월하는 셈이다. 게다가 인천 공항 정도면 주기료가 합리적이지, 공항 이용 비용이 악랄하게 비싼 축에 드는 공항도 아니다.
비행기는 하늘을 날면서 승객과 화물을 나를 때는 돈을 벌어다 주지만, 그렇지 못할 때에는 돈 먹는 하마로 전락하고 만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런데 수 년 전엔 인천 공항의 주기장 한쪽 구석에는 태국, 이란 등 운영이 제대로 못 되고 있다가 사실상 망한 항공사의 여객기가 최대 4대 무단 방치된 적이 있었다. 2년 넘게 방치된 비행기는 당장 운용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기료도 수억원 대가 넘게 밀렸을 텐데... 2010년대 이후로는 뉴스 기사가 더 보도되지 않는 걸로 보아 지금쯤은 인천 공항 측에서 그런 흉물을 임의로 압류· 매각을 해서 처리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도 남북 관계가 안 좋아져서 개성 공단이 가동이 몇 달 중단된 동안 기계들이 다 망가졌다고 공장주들이 울상이었다. 자동차만 해도 한 달 정도만 안 몰고 있으면 상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데 기계라는 게 참 그런 특성을 가진 물건인 것 같다. 장기간 가동을 안 할 거면 연료를 빼내고 장기 보존 가능한 특수한 처리라도 해야 할 터.

4.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모하비 사막에는 '모하비 공항'이라는 생소한 공항이 있다. 얘는 세관· 검역 시설을 갖춘 국제공항도 아니고 정기 운항 비행기도 없이 사막에 덩그러니 놓인 듣보잡 공항일 뿐인 것처럼 보이나, 다른 공항에는 없는 특별한 속성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식 타이틀이 단순 airport가 아니라 air and space port라는 것. 즉, 여기는 단순 항공기뿐만 아니라 민간 우주선(Spaceship One 같은)이 이착륙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는 바로 민항기의 양로원 내지 무덤이다. 건조하고 땅값 저렴한 사막이다 보니 전세계에서 퇴역한 항공기, 혹은 망한 항공사로부터 매각된 항공기들이 여기에 수두룩하게 쌓인다. 아직 현역으로 구를 만해서 다른 항공사로 저렴한 중고로 팔려간다면 다행이지만, 상품성을 상실할 만큼 심하게 노후한 항공기는 여기서 폐기되어 부품이 뜯겨 나간다.

5.
그리고 캘리포니아 주 근처(근처..래 봤자 수백~천수백 km 떨어져 있지만)에 있는 아리조나 주의 데이비스 몽선(Davis-Monthan) 공군 기지 인근에는 '노후 전투기 보관소'가 있어서 수천 대에 달하는 퇴역 군용기들이 보존되어 있다. 미 해군, 공군, 해병대가 쓰다가 퇴역시킨 군용기들은 거의 다 여기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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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남아 있는 항공기들은 대략 70%가량은 약간의 수리를 거친 뒤 다시 비행이 가능한 정도라고 한다.
모하비 공항은 인근에 에드워즈 공군 기지가 있긴 하지만 공항 자체는 민간 공항이다. 하지만 여기는 주 보존 대상도 군용기들이고 엄연한 공군 시설 내부이다.

이 보관소의 항공 사진을 보노라면 “전투기는 많지만 조종사가 없습니다(부족합니다)!”라고 하는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의 대사가 고증에 굉장히 충실하게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여러 조종사가 한 비행기를 굴리가면서 타는 게 일반적이지, 전투기가 조종사보다 더 많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과연 show me the money 국가인 미국이니까 가능한 스케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4/11/07 08:27 2014/11/07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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