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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도를 광적으로 좋아하며, 이것의 영향을 받아서 교통수단의 전반에 대해서 관심이 많다. 그래서 비록 기계 공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교통수단의 내부 원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이다. 오히려, 내가 겉으로는 전산을 전공한 프로그래머 및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먹고 살고 있지만,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로 가자면, 컴퓨터 쪽의 논리 회로 같은 내부 구조보다는 교통수단들의 내부 구조에서 '신기함과 호기심'은 더 느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동차 엔진의 원리에 대해서 몇 차례 블로그에다 글을 쓴 적이 있었는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자동차의 제원을 나타내는 각종 숫자들의 의미를 좀 더 몸에 와 닿게 느끼는 방법은 없을까?
더 구체적으로는... 자동차 엔진의 힘과,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내 발의 힘을 서로 비교해 보면 어떨까?

물론 이건 중· 고등학교 시절의 물리 지식만 적용해서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을 구할 수 있다.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물리는 고전 역학만 생각해 봐도 정말 고도의 사고의 추상화를 요구하는 고차원적이고 어려운 학문이다. 특히 미적분이 없이는 이 학문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에 겉으로 드러나는 힘을 결정하는 수많은 요소들을 다 계층별로 분류하고 나눠서 각 계층만을 따로 생각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힘, 일, 에너지 등의 개념과, 단위의 차원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만 감을 잡아도 물리는 반은 먹고 들어간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정작 학창 시절에는 그런 고민을 할 기회가 없이 그저 입시를 위한 계산 테크닉 암기만 했야 했던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본론으로 들어간다.
요즘 4기통 2000cc급 가솔린 엔진 중형차의 최대 토크가 20kg·m/4600rpm 정도 된다고 한다. 이때 /는 per이라는 뜻이 아니라 at이라는 뜻이다. 'rpm 당 얼마'가 아니라, '이 rpm에서 얼마'라는 뜻. (그리고 kg는 정확히는 kgf 즉, 질량이 아닌 중력의 단위이다)
어지간한 가솔린 엔진의 출력 그래프를 보면 최소 회전수에 가까운 1000~2000rpm대라도 최대 토크의 60%정도는 보통 나오니, 12kg쯤 된다고 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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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품은 의문은, 저 숫자의 의미가 정확히 무얼까 하는 것이었다.
토크는 말 그대로 비트는 힘, 회전력이며 팔씨름에서 이기기 위해 커야 하는 값이다. 그 자체는 하나도 어려울 것 없는 개념이다.

그런데 저게 너무 작은 값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전거로 오르막을 오를 때만 해도 힘들어서, 일어나 한쪽 페달에다가 내 체중을 다 힘주어 싣는다. 그것만 해도 100kg에 가까운 힘은 족히 걸릴 텐데? 이 힘이 만만찮기 때문에, 요즘 한창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제발 걷거나 뛰지 말라고 캠페인을 하고 있지 않은가.

1톤이 넘는 무게를 끌면서 백수십 마력짜리 출력을 자랑하는 자동차의 최대 토크가 겨우 10~20kg대라고? 쌀 한 가마니 무게가 채 안 될 텐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안 드시는가?
하지만 이것이 단견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단위에서 명시된 회전력에서 회전축의 길이이다. 사람이 발로 돌리는 성인용 자전거의 크랭크암은 길이가 겨우 17cm이고 넉넉잡아도 20cm가 채 되지 않는다. 그에 반해 자동차의 토크는 이것의 무려 5배가 넘는 1m짜리 회전 반경을 가정하고 명시된 수치이다. kg·m에서 m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이다. 회전력은 회전 반경의 길이에 정비례한다는 건 시소를 타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테고.

똑같이 자전거의 페달에다 체중을 실어도 17cm짜리 크랭크암에다 싣는 것과 1m짜리 크랭크암에다 싣는 것의 차이는 어떨까? 다시 말해 자동차는 공회전 수준에서도 10kg·m 이상급의 토크가 나오니, 이는 자전거의 크랭크암 길이 기준으로는 5배 이상의 50~60kg급의 힘이 기본으로 나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둘째, 사람과 기계가 넘사벽급의 차이를 보이는 변수는 역시 회전수이다.
사람이 크랭크를 돌리는 회전수는 죽을 힘을 다 해 전속력으로 최고 빨리 달릴 때라 해도 100수십rpm이 될까말까이고, 전속력 질주가 아니라면 평소에는 겨우 수십 rpm에 불과하다. 체중을 다 싣는 페달링은 몇 번만 하고 나면 지쳐서 더 못 한다.

그에 반해 자동차 엔진의 회전수는 기본 단위가 1000이다! 시동 유지를 위한 최소 회전수가 이미 수백에서 시작하며, 사람이 체중을 다 실어서 끙끙거리며 공급하는 힘을 자동차는 단위 시간당 적게는 수십 배, 많게는 수백 배나 더 많이 끊임없이 뿜어낸다. 그 힘이 쌓이고 축적되어서(=적분) 차를 굴리는 일을 한다.

즉, 사람이 페달을 체중으로 내리치는 순간적인 충격량이 몇 번 좀 커 봤자, 그건 전기로 치면 순간적인 전압이 좀 높은 정전기에 불과하다. 그것만으로는 사람을 잠깐 찌릿하게는 해도 감전시킨다거나 다른 일은 못 한다. 진짜 승부는 그게 지속적으로 흐르는 척도인 전류에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500ml 우유팩 1개짜리 부피의 엔진 실린더 4개에서 휘발유를 분사하고 폭발시켜서 나오는 힘의 실체이다. 하긴, 가스나 석유가 적은 양이라도 좋지 않은 곳에서 한꺼번에 폭발하는 사고라도 났다간 주변이 어떻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 괴력이 놀랄 일은 아닐 것이다.
1톤짜리 쇳덩이에다 자전거 체인을 연결해서 사람이 페달을 밟아서 가는 것하고, 1톤짜리 자동차에다 시동 걸어서 액셀러레이터 밟아서 가는 것의 차이가 여기서 유래된다.

끝으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변속기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자동차 엔진도, 1톤이 넘는 쇳덩어리를 지탱하고 있는 바퀴에다 곧바로 엔진의 크랭크축을 연결하고서 동일한 회전수를 유지하게 할 수는 없다.
엔진 자체의 힘은 본질적으로 비록 사람보다야 강하다 해도 생각만치 강하지는 않다. 앞의 계산에서 보았듯, 5배 좀 해 봤자 토크가 수백 kg 이상으로 뻥튀기된 건 아니다. 그 대신 속도가 훨씬 더 빠르다(높은 회전수).

그래서 높은 회전수로부터 토크를 더욱 뻥튀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변속기이다.
요즘 승용차는 최저단인 1단의 기어비가 3.7에서 4.0 사이이고, 고속인 4단 정도는 돼야 크랭크축의 회전수와 바퀴의 회전수가 1.0x대로 비슷한 직결이다. 5단 이상이 초고속 주행에 속하는 오버드라이브.
정지 상태에서 4단에서 바로 출발이 가능한 자동차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정도로 동력을 제어해 준 뒤에야 자동차는 비로소 나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자전거에도 고급 차종에는 변속기가 있다. 그러나 자동차의 변속기와 자전거의 변속기는 성격이 무척 다르다.
외형적으로는 자동차의 변속기는 수동 기준으로 기어와 기어가 곧바로 맞물리는 반면, 자전거의 변속기는 체인을 거치는 형태이니 그렇지 않다.
하는 역할도 다르다. 자동차는 높은 회전수로부터 더 큰 힘을 얻는 게 주목적이기 때문에 최고단의 한두 단계만이 오버드라이브이다.

그 반면, 사람이 페달로 자전거의 크랭크축을 회전시키는 속도는 근본적으로 몹시 느리다. 그래서 자전거의 변속기에는 자동차보다 더 다양한 단수가 존재하며, 언덕을 오를 때나 쓰는 몇몇 저단 기어를 제외하면 나머지 단계는 모두 크랭크축보다 바퀴를 더 많이, 최고 2~3배까지도 돌릴 수 있는 오버드라이브이다. 정말 가볍게 잘 밟아지지만 답답할 정도로 안 나아가는 자전거의 최저단이 자동차의 변속기로 치면 3~4단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차이로 인해 자동차에는 변속기가 닥치고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인데 비해, 자전거에는 변속기가 언덕 오르는 걸 편하게 해 주거나 좀 더 고속 주행을 위해 쓰이는 고급 사양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동차의 변속기는 힘을 뻥튀기시키지만, 자전거의 변속기는 힘 버프보다는 속도 버프의 목적이 더 크다. 그리고 속도 버프는 전문적인 자전거 라이더 외의 계층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물론, 좋은 변속기를 적절히 잘 활용하면 자전거 운전이 정말 편리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자전거의 변속기는 비싸고 정교한 부품이며(자동차의 부품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조심스럽게 안 다루면 고장도 잘 나는 편이다.

이렇게 물리적인 디테일을 생각해 보니 자동차가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또한, 연소나 폭발 없이도 결코 작지 않은 크기의 힘을 순간적으로나마 낼 수 있는 포유류의 근육에 대해서도 생물학적으로 경이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자전거용 자동 변속기가 있다면, 언덕을 오를 때도 비록 속도가 느려질지언정 평지일 때와 동일한 부담이 페달에 걸릴 것이고, 그러면서 평지에서는 알아서 고속 주행도 알아서 되니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아무래도 무게, 가격 등의 수지가 안 맞을 것이다.. ^^;;

끝으로, 자동차가 사용하는 내연 기관이야 저렇게 회전수별로 경제 운전이 가능한 대역과 최대 토크가 나오는 대역이 따로 존재하고 기복이 있는 반면, 전기 모터는 회전수에 관계없이 비교적 균일한 토크가 나온다고 한다. 내가 그쪽 디테일은 잘 모르지만 말이다.
수백~수천 톤에 달하는 KTX가 정지 상태에서 출발할 때는 얼마나 큰 회전력이 필요할 것이며, 그걸로 시속 300까지 내려면 또 얼마나 높은 회전수가 필요할까? 당연히 톱니바퀴로는 이 정도 스케일의 동력비 변환은 절대 불가능이다.

물론 일반 도로 위를 고무 타이어로 달리는 게 아니라 레일 위를 쇠바퀴로 달리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 마찰력이 작은 것이 고속화에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철도는 전차선을 설치하여 동력비 변환이 유리한 전기로 달리는 게 가능하니 철도는 여러 모로 효율이 좋은 육상 교통수단이라 할 수 있다. 자전거와 자동차 얘기만 하려고 했는데 또 글을 철도로 맺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ㅋㅋㅋㅋ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3/01/29 08:30 2013/01/2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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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 고속도로에는 서울-부산 전구간을 통틀어서 수 km 이상 곧은 직선이 그것도 지리적으로 정확하게 남북 수직으로 뻗은 곳이 딱 두 군데 있다.
바로 죽전 휴게소에서 신갈 IC까지의 용인 시내 구간과, 좀 더 아래의 천안 북부 일대의 성환 활주로 구간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이들 구간은 유사시에 고속도로가 아니라 전투기의 활주로로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졌다는 아주 중요한 특징이 있다.
활주로 공용 구간은 여기 말고도 김천 아포 역-대신 역 사이의 경부선-경부 고속도로 평행 구간과, 울산-부산 사이에 더 있기도 한 것 같은데, 저 성환 활주로와 용인 구간은 100% 확실하고 아주 유명한 구간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이들 구간은 무엇보다도 고정된 형태의 중앙분리대가 없었으며(있더라도 쉽게 걷어낼 수 있는 임시 가공물 형태),
아스팔트 대신 시멘트 포장이 유지됐고 도로 주변에 가로수나 가로등도 없이 황량한 벌판이었으며, 인근에는 군 초소와 보급소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전에야 유사시를 대비해 경부 고속도로의 활주로 공용 구간을 틀어막고 진짜로 비행기를 띄우고 내리는 훈련을 하기도 했다지만, 지금은 그러기에는 고속도로에서의 자동차 통행량이 너무 늘었고 대체 활주로 시설도 마련된 관계로, 그런 용도는 최소한 20세기 말부터 진작에 폐기되었다. 지금은 그 구간도 모두 고정된 중앙분리대가 생기고 아스팔트 포장으로 바뀌어서 다른 구간과의 차이가 없어졌다.

게다가 용인-서울 구간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도로 주변에 다른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버렸고, 천안 쪽도 북천안 IC가 추가되면서 육교 형태의 장애물이 중간에 하나 생겼다. 활주로 공용의 흔적은 이렇게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하긴, 활주로 공용 구간 인근의 부지는 개발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하는 교통사고가 나기도 더 쉽기 때문에 민간인의 입장에서는 좋을 게 별로 없다.

다른 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독일의 아우토반은 활주로 겸용을 염두에 두고 고속도로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덕분에 포장도 필요 이상으로 아주 두껍고 튼튼하게 돼 있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들이 집집마다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 남는 도로 용량도 활용하고 그게 일석이조의 좋은 방법이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아우토반을 처음으로 이걸 계획하고 만든 주체가 전쟁광 나치 독일이기도 했고.

미국 같은 땅 넓은 나라는 굳이 도로를 빌리지 않더라도 공항 짓고 활주로로 쓸 땅은 넘쳐난다. 그리고 미국의 자동차 전용 도로는 중앙분리대 정도가 아니라 상· 하행이 아예 가로수로 가로막힌 채 도로가 따로 건설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광활한 사막을 넘나드는 interstate highway 중에는 진짜 허허벌판에 끝없는 직선만 펼쳐진 도로도 있는데 이런 곳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지 못하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북한의 고속도로는 역시 두 말할 나위가 없다. 김 일성의 집권 말기인 1992년에 완공된 평양-개성 고속도로는 북한의 고속도로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선형이 매우 곧다. 지나가는 차 없지, 도로폭 넓지(6차선), 선군정치이지, 당연히 활주로 활용을 염두에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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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고속도로와 관련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남아메리카에는 모아이 석상으로 유명한 이스터 섬이 있다. 이 코딱지만 한 섬에 있을 건 다 있어서 공항도 있다. 가장 가까운 대륙 영토인 칠레까지가 직선으로 3000km에 달하기 때문에 배만으로는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공항은 활주로가 이용객에 비해 대단히 크고 길다. 그 이유는 이 공항이 우주 왕복선의 비상 착륙 활주로로도 공용할 수 있게 NASA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기 때문이다. 자동차+비행기가 아니라 비행기+우주 왕복선 구도가 된 셈.

Posted by 사무엘

2013/01/26 08:33 2013/01/2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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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때문에 달라지는 한국인의 정치 성향 스펙트럼을 분류해 보았다.
기본적으로 5단계인데 좌빨, 수꼴이라는 양 극단을 추가하여 총 7단계가 나왔다.
용어는 내 마음대로 정한 것이다. 용어 명명 방식이 안 드는 분들은 그냥 레벨 숫자만 보시라.

## 좌빨: 월북을 하고 싶어 안달 났거나 광화문에서 인공기 흔들고 위수김동 외치고 싶어하는 부류. 법정에서 민족의 태양인 김씨 부자를 찬양한 걸로 매스컴 탄다. 바로 뒤에 나올 1이 본심이 드러난 형태이겠다. 그냥 답이 없는 부류.

1(종북): 이념을 초월하여 누가 봐도 레알 빨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유일한 등급. 대놓고 김일성교 신자 행세는 안 하지만, 북한 체제를 궤변으로 옹호한다. 북한이 핵 개발한 것은 미국을 견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김씨 부자는 지금까지 북한을 잘 다스려 왔는데 탈북자들이 변절자 죽일놈이며 오로지 미 제국주의만이 나쁜놈이다.
여기가 대한민국인지 남한 정부인지 남조선인지 헷갈리고 6·25가 누가 먼저 저지른 전쟁인지가 헷갈린다. 지난 대선 때 이 정희에게 표를 주려고(사퇴 안 했다면) 진지하게 생각했다.

2(진보?): 북한 체제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그들이나 그들의 추종 세력이 오늘날 우리나라에 그리 큰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환상이 있는 반면, 그게 전적으로 수꼴 기득권층과 안보 장사꾼들과 외세 때문에 안 되고 있는 거라고 여긴다. 우리나라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큰 편이고, 더 나아가 근현대사에도 불만스러운 게 많다. 가령, 친일 얘기만 나오면 분노 게이지 급상승.
북한의 정권과 남한의 군사 독재 정권을 비슷하거나 같은 급으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오로지 비판과 청산의 대상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사 심리로 진보 성향 정권을 아주 좋게 평가한다.

3(중도): 2만치 한쪽으로만 일방적으로 편파적이지는 않다. 북한이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명백하게 군사적인 위협이라는 것과, 햇볕정책이 아무 효과가 없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은 그런 정서를 감안하지 않고 오로지 비현실적인 평화· 공존만 얘기하는 자충수 때문에 노인들로부터 표를 빼앗겼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걸 인정한다고 해서 보수 정권만 좋아하고 진보 정권을 폄하하는 건 아니며, 이들이 균형이 잡히지 못한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진보 성향 진영이나 정권도 최소한 악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북한이 물리적인 군사 위협 이상으로 남한에 정신적인 위협이라고는 여전히 생각하지 않는다.

4(보수?): 2~3보다 입장이 더욱 단호해진다. 우리나라 현대사의 모든 일을 망쳐 놓은 주범은 전적으로 북한이다. 종북을 논하지 않고서 친일· 독재를 논할 수는 없다. 통일도 외세 때문이 아니라 쟤들이 주민들을 통제하고 있어서 못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제 옛날 같은 남침을 할 수 없으니, 남한을 상대로 종북주의자, 좌파를 심어서 체제를 부정하는 정신적 선동, 방해 공작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다고 여긴다.
국가 체제에 피해의식이 없다. 우리나라 역대 정권들은 그래도 저 악독한 북한을 마주한 상황에서 자유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을 잘 이뤄 냈으며, 잘못한 것보다 잘한 게 훨씬 더 많다. 이 승만· 박 정희에 대한 평가가 후해지고, 민족 문제 연구소를 보는 시선이 불편해진다. 탈북자나 북한 정치범 수용소 인권 문제에 관심이 크게 늘어난다.

5(극우): 4에다가 북한, 심지어 진보 세력들까지 더욱 악하게 보는 음모론이 가미된다. 지금까지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불법으로 북으로 갔으며, 김 대중뿐만 아니라 노 무현까지도 “북한하고만 잘 되면 나머지는 다 깽판 쳐도 괜찮다”고 말한 간첩, 반역자, 빨갱이이다. 그에 반해 박 정희는 재임 중의 경제 개발뿐만 아니라, 쿠데타를 일으킨 것조차도 결과론적으로 김 일성의 2차 남침을 막은 애국 행위로 정당화된다.
1980년 광주엔 북한 특수부대가 실제로 가서 군경과 시민들을 이간질했으며, 지금도 온라인 여론을 선동하는 간첩이 한 1만 명은 있다. 시스템클럽에서 전하는 내용을 다 받아들이면 이 정도.

## 수꼴: 말이 통하질 않고 그저 단편적인 빨갱이 사고방식밖에 없다. 정치와 종교를 구분하질 못하거나, 5를 애국이 아닌 자기 영달과 기득권, 감정 표출을 위해서 비상식적이고 과격한 방법으로 드러내는 등, 상태가 막장으로 치달으면 수꼴이다.

각자 자기는 어느 수준 정도인지 생각해 보시길. 성경에는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가이드라인이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어떤 권력이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니 너는 권력에 순종하고 세금이나 잘 내라는 식의 원론적인 권면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중도랍시고 오로지 3만이 무조건 성경적으로 가장 권장된다거나 바람직하기만 한 건 아니다. 영적이지 않은 육신· 정치 문제도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주제이며, 그건 반역이 아닌 한 그냥 사람마다 양심껏 소신껏 판단하길 바랄 수밖에. (그런데 수꼴은 그냥 과격하기만 한 걸로 끝인 반면, 종북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역인 것 같은데? ㄲㄲㄲㄲ)

Posted by 사무엘

2013/01/23 08:20 2013/01/23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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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은 대로 거둔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읽으면서 우리가 일관되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성경의 하나님은 철저하게, 너무 재미없고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정도로 세상에 공짜란 없다. 심은 대로 거둔다. (사람에게) 자유 의지는 철저히 존중하고 보장하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f(x) → y식의 인과응보 사고방식의 신봉자라는 것이다. 오로지 복음과 구원만이 공짜이다.

물론 인간이 만든 세상 제도는 합리적이지 못하며 부정부패와 비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이 이를 일시적으로 허락도 하시기 때문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법칙이 언뜻 보기에 잠시 통용되지 않는 것 같은 면모가 보이기도 한다(전 9:11). 그러나 하나님의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결국 인과응보가 성립하게 된다.

(1) 속지 말라.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또한 그것을 거두리라. (갈 6:7)

하나님께서 결코 조롱 당하지 않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면,
“아, 성경을 보니 A를 하지 말라고? 그럼 B에 대한 언급은 없으니 A 대신 B처럼 하면 되겠네?”라든가,
“지금까지 나쁜짓을 좀 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 보니,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이렇게 해 먹어도 되겠군? ㅋㅋ”

같은 패턴으로 요리조리 잔머리를 굴리는 게 하나님 앞에서 안 통할 거라는 말이다. 성경을 어떻게든 삐딱하게 해석하고 자기 식대로 갖다 붙이려 하는 불순분자의 심리와 의도를 하나님이 모르실 리 없으니 말이다.
그리고 문장 뒷부분의 의미는 말 그대로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단순하면서도 굉장히 성경적이고 합리적인 속담이다.

(2)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 (살후 3:10)

성경은 단호하다. 일을 해서 스스로 돈을 벌지 않을려거들랑 밥도 먹지 말라고 그런다. 성경적인 사고방식으로는, 이유야 어쨌든 다 큰 성인이 백수나 니트족으로 있다거나, 정상적인 근로 의욕마저 상실시킬 정도로 이상하게 돌아가는 퍼 주기식 '무상' 복지 포퓰리즘 같은 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삭 줍기를 생각하면 알 수 있듯, 성경이 말하는 복지는 복지 수혜자라 해도 최대한 일은 하고서 먹을 것을 얻는 구도이다.

그리고 성경은 그런 건전한 근로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사람마다 사유 재산과 빈부 격차를 명백히 인정하는 논조이며, 통념과는 달리 심지어 돈으로 돈을 버는 것조차도 전면 금기시하지는 않는다. 탐욕을 그렇게도 정죄하고 싫어하는 성경이 한편으로 그런 자유주의 경제관도 지지한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성경적인 사고방식과 공산주의가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신자'들더러 읽으라고 쓰여진 성경에 '불신자만도 못한 자'라는 표현이 있을까, 없을까? 성경에서 쓰이기에는 다소 강하고 자극적인 비하 표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성경에 나온다. 출처는 바로 딤전 5:8. 성경이 규정한 책망 대상이란 바로 '자기 힘으로 일해서 돈 벌어서 가정을 부양하지 않는 자'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단,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성경의 모든 법칙에는 예외도 있다. 저건 다치거나 아파서 정말 타당한 이유 때문에 일을 못 하는 사람들까지 쫄쫄 굶으라는 소리는 물론 아니다.
또한, 잘못된 사회 제도 때문에 뼈 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있다. 성경은 공산주의가 생길 빌미를 제공한 악덕 자본가나 기업주, 지주, 탐관오리들을 야고보서 5장에서 신랄하게 디스해 주고 있다. 그러니 성경의 논조가 특정 이념 편향적이라는 오해는 없기 바란다.

(3)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출 21:24; 레 24:20; 신 19:21)

갈수록 점점 더 중요하고 진지한 주제가 나온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조는 함무라비 법전이 아니라 성경(모세 율법)이다!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 구약에 무려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그리고 이 표현에 대해서 안타깝지만 오해가 엄청 많다.

하나님이 세우신 준엄한 원칙은, 뭔가 사고가 발생하고 안 좋은 결과가 야기되었다면 그 일을 저지른 사람이 상황을 모조리 수습하고 원래대로 복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거 아닌가?) 가끔은 위자료까지 추가해서 말이다.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힌 사람이 배상을 n배로 해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 그렇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형법은 현대의 법보다 처벌이 전반적으로 훨씬 더 엄하다.

그리고, 뭔가 영구적인 손해를 입혀서 복구가 불가능하다면? 그러면 그 피해를 가해자도 똑같이 당해야 한다. 사형 제도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 대표적인 법규이다! 고의성이 있었는지 같은 변수가 참작되긴 하지만, 대원칙은 이러하다. 이런 법에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수준의 높은 공의만이 담겨 있을 뿐, 오늘날 같이 죄인의 무슨 교화 가능성이 어떻고, 가해자의 불우한 성장 배경 운운하는 배부른 변수 따윈 없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노릇인지 오늘날은 이게 완전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법칙으로 인식되어 있다. 도대체 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이슬람권 국가에는 여자 얼굴에다 염산을 끼얹은 남자에게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으라는 판결이 이따금씩 나는가 보다. 이슬람 국가들이 다른 데서는 좀 꼴통 같은 짓을 하지만, 저런 일부 윤리 규범은 성경의 사고방식을 이어받아서 아주 바람직하게 잘하고 있다.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여자의 인생을 이것 말고 무슨 방법으로 아쉽게나마 보상하냐 말이다.

그리고 사실은 인간에게 내재된 보복 심리에 비해서 성경의 원칙이 오히려 훨씬 더 자비롭다고 볼 수 있다. 정확히 당한 만큼만 갚으라고 명령하니까 말이다.

원래 인간이란 나쁜 일을 되로 받으면 말로 돌려주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북한이 우리나라를 상대로 깽판 칠 때 공갈을 어떻게 하던가? “도발 시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겠다”고 절대로 안 그런다. “천 배, 만 배로 보복하겠다”고 그런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행했다가는 지구는 헬게이트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국민을 대표해 보복이라는 걸 딱 당한 만큼만 집행해 주는 공권력을 제정하신 것이다.

아, 물론 성경에는 마 5:38-39처럼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듯이(?) 보이는 명령도 있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돌려대라는 구절도 있다. 그런데 그건 구원받은 예수쟁이라 해도 정말 성령 충만한 상태가 아니면 지킬 엄두를 못 내는 엄청난 명령이다.

진짜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친아들을 흉악범에게 잃고 나서는 그 흉악범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을 자신 있겠는가?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이 세상에서 왼뺨 맞고 나서는 오른뺨 돌려대고, 강도가 웃옷을 요구하면 속옷까지 내어 줄 참인가? 그건 그저 적당한 연기, 가식, 위선 떠는 구실로 인용하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세상의 법이라는 건 그런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을 기준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worst를 기준으로 삼고 만들어야 한다.

구약 율법이 뉴턴 고전 역학이라면, 천년왕국 헌법 내지 신약 계명은 상대성 이론 정도의 위치에 대응한다 하겠다. 시간이 가는 속도가 차이가 생기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로 바뀔 수 있다고 말하는 상대성 이론은, 고전 역학보다 더 고차원적인 자연 법칙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고전 역학을 바탕으로 아주 극단적인 문맥에서 물리학의 영역을 확장한 것일 뿐, 기존 고전 역학의 영역을 정면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또한 어지간한 현실 세계를 재현하는 게임 물리 엔진 정도를 만드는 데 상대성 이론이 동원되지는 않는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4) 그런즉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완료되면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우리 속담 중에서는 “꼬리가 길면 밟힌다”가 성경 말씀과 정확히 같은 문맥은 아니지만, 그래도 비슷한 심상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 준엄한 말씀이 정확히 적용되어 패가망신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았을까?
심은 대로 거둔다고 하는데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고 죄의 결실은 사망이니, 연역법에 따라 사람은 누구나 죽고 더 나아가 지옥에서 멸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5) 오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들이 무슨 쓸데없는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그것에 대하여 회계 보고를 하리라. (마 12:36)

(6)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을 집행하사 그들 가운데 경건치 아니한 모든 자들이 경건치 아니하게 범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행위와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들이 그분을 대적하여 말한 모든 거친 발언에 대하여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유 15)

위의 두 구절은 우리의 말과 관련하여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심은 대로 거둔다”를 설파하는 무서운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이 세상의 저명한 개독안티들이 남긴 신성모독 발언과 독설들.. 다 자기가 했던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날이 온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신자라도 마찬가지이다. 육신적인 동기로 남긴 실언이나 폭언, 남에게 덕이 되지 않는 말이나 심지어 음담패설 같은 것은 결국 자기에게 올무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우리는 혀를 상대로 심하게 디스를 거는 야고보서 3장을 묵상할 필요가 있다.

만약 걸리는 게 있다면 지금 당장 기도로 '온라인'으로 회개하여 하나님과 미리 정산하는 게 좋다. 마치 경찰서 정모를 당하듯 훗날 하나님을 오프라인으로 대면하여 정산을 하게 되면 굉장히 민망하고 부끄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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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신구약 성경에서 동일하게 발견되는 “심은 대로 거둔다” 원칙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것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철저하게 가르쳐야 하는 원칙이라 생각된다.

사람들은 죄를 죄라고 생각하지 않고 죄를 짓는 것은 좋아하지만, 참혹한 죄의 결과물을 거두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심상에 대한 대리 만족을 시켜 주는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에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고, 형벌도 가능하면 곧이곧대로 엄하게 집행하지 않고 어지간한 결과 수습은 그냥 세금으로 다 때우려 한다.

이렇게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안일한 사고방식의 후유증은 결국은 사회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세금으로 도저히 감당을 못 할 정도로 교도소 운영 비용이 증가하고 있으며(지금 미국처럼), 흉악 범죄는 갈수록 증가한다. 법을 무서워하지 않고, 교도소나 가고 싶어서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까지 생긴다. 그 반면, 흉악 범죄 피해자의 인권은 아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다.

난 구체적인 물증이 없기 때문에 논쟁까지 할 생각은 없지만, 사형 집행이 흉악 범죄 예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폭력적인 영화나 게임이 범죄율 증가와 무관하다는 식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나는 이런 식으로 “성경적으로 단순한 원론적인 인과응보” 사고방식을 좋아한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하자면,

  • 무단횡단을 하다가 누가 차에 치였다면, 지금 현행법보다 보행자의 과실을 훨씬 더 높게 잡아야 한다.
  • 정당방위도 지금보다 훨씬 더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
  • 젊은 여자가 만취 상태로 심야에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기사로부터 성추행/성폭행을 당했다면, 물론 기사는 크게 처벌 받아야 마땅하지만 여자도 잘한 게 없으며 어느 정도 지탄받아야 한다.

이런 식.
물론,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 저런 원칙을 곧이곧대로 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고 법학자나 그쪽 계층에서 변명을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능력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성경대로 행하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한 주제만 더 다루고 글을 맺겠다.
여러분은 노예 제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성경이 노예 제도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가?

노예의 정의와 범위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대동소이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보통은 어떤 사람이나 국가 백성이 평생 벌어도 갚지 못할 빚을 지게 됐을 때, 죽지 않는 대신 신분을 박탈당하여 노동으로 빚을 갚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런 제도가 생겼다. 개인적으로는 집안이 쫄딱 망했거나, 아니면 국가적으로는 국가가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의 백성들이 천문학적인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나눠 갚아야 할 때 말이다.

노예를 상대로 발생하는 가혹한 인권 유린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게 몸으로라도 안 때우면 그 빚은 누가 상환하며, 전쟁 때문에 국가가 쑥대밭이 된 건 누가 복구하고 수습하는가? 노예 제도가 있기에 앞서 죄가 있었고 그로부터 파생된 전쟁 같은 참혹한 행위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 역시 “심은 대로 거둔다”로 귀착될 뿐이다. 또한 모든 인간은 구원받기 전까지는 어차피 영적으로 죄의 노예이기도 하고. 성경이 과거의 그런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구시대적이고 반인권적이라고 딴지를 거는 건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개드립이다.

또한 구약의 이스라엘 율법은 노예를 영원무궁토록 부려먹지 말고(정확히는 노예도 아니고 그냥 종 servant이지만), 주기적으로 풀어 주라고 명시한다. 게다가 거의 반세기 간격으로 국가 경제와 국민 신분을 아예 전부 reset시키는 아주 파격적인 제도를 통해, 부의 세습과 지나친 양극화를 막고 있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1/12 08:39 2013/01/12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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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세상의 악과 부조리를 보고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사람의 믿음을 세우는 데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죄를 짓고 타락한 이래로, 이 세상에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무참히 망가뜨리고 죽이는 흉악 범죄가 양지나 음지에서 무수히 저질러져 왔다. 그 중에도 죄질이 특히 나쁜 축에 드는 것은,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연약한 미성년자 내지 자신을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지적 장애인을 납치· 감금하여 여럿이서 학대하고 괴롭히고 심지어 고문까지 하다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짓이다. 영어로는 torture murder이라는 비공식 용어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25년쯤 전엔 일본에서는 일명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 사건'이라 하여, 제목부터가 섬뜩한데 정말 인류 역사상 이 정도로 흉악하고 인간의 마귀적인 본성이 그대로 표출된 사건이 있었을까 싶은 torture murder가 벌어진 적이 있다. 이 글에서 구체적인 사건 내역을 자세히 소개하지는 않겠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가까이 전인 1965년엔 미국에서도 실비아 라이컨스(Sylvia Likens)라는 소녀가 부모 사정으로 인해 타지에서 맡겨져 키워지던 중에, 집주인 아주머니와 주변 아이들로부터 입에 담을 수 없는 수준의 학대와 왕따, 고문을 당한 끝에 겨우 10대 중반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은 채 경찰에 발견되는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돌이켜 해 아래에서 이루어진 모든 학대를 깊이 살펴보았노니, 보라, 학대받는 자들의 눈물이라.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편에는 권세가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었도다. (전 4:1)

후자의 경우 미국 인디애나 주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범죄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법정 증언을 바탕으로 2007년엔 엘렌 페이지가 주연으로 나오는 An American Crime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물론, 일본의 콘크리트 살인 사건도 자국 내부에서 영화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건 그냥 AV 배우를 동원해서 선정적인 고어물 성인물 영화로 돈이나 벌려는 의도에 가까웠다. 그 반면, 미국의 영화는 다른 나라도 아니고 꿈과 희망이 있는 자유와 기회의 땅이라 불리며 소위 기독교 정신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아메리카라는 나라에서까지, 옛날에 이런 끔찍한 범죄가 저질러졌었다는 분노와 자성의 뉘앙스가 제목에 담긴 것 같다. 감독이 제목을 하필 왜 저렇게 뽑았겠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난 An American Crime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지하게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영화를 본 사람들의 반응은.. 보다가 열받아서 차마 끝까지 못 본다고.. 모니터를 때려부수고 악역 배우를 죽여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고 그런다. 아무 죄책감 없이 군중 심리로 피해자를 심심풀이 하듯 때리고 괴롭히고 굶기고 배에다가 불에 달군 바늘로 글씨를 새기고는... 나중에 법정에 가서는 “몰라요. 기억 안 나요. / 남들이 다 하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심한 잘못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이렇게 발뺌을 하는 뻔뻔한 인간 종자를 보노라면, 누구라도 짜증과 살인 충동이 하늘로 피어오르지 않겠는가.

게다가 저 영화는 일본 영화와는 달리 그렇게 선정적이지도 않다. 실제로 실비아가 당한 가혹행위에 비해 영화의 묘사는 정말 정말 많이 희석되고 절제되고 수위가 완화된 것이다.

처참했던 실제 사건의 결말에 비해, 영화는 감독의 희망 사항 내지 관객의 해석이 필요한 여지를 결말에다 두리뭉실하게 남겼다. 실비아가 죽지 않고 거투르드 아줌마의 집을 탈출하여, 부모의 품에 안기는 설정이 들어간다. 그런데 다시 거투르드의 집으로 돌아가니 자기의 몸은 죽어 있고, 그와 함께 탈출한 줄 알았던 실비아도 싹 사라지고 다시 고향의 회전목마가 있는 곳으로 돌아간다.
(실제로 실비아는 극도의 영양실조에다 구타로 인해 발생한 뇌와 내장의 출혈이 도지면서, 목욕 도중에 사망했다.)

우울한 실화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답게,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흘러나오는 음악도 단조풍의 굉장히 구슬픈 여성 아카펠라 노래이다.

이 영화는 세상에서의 고통과 아픔, 슬픔으로부터 벗어난(상징적으로나마) 실비아가 혼자 회전목마에 탄 채, 다음과 같은 독백 대사를 읊는 것으로 쓸쓸하게 끝난다.

And me? I returned to the carnival. The only place I always felt save.
Reverend Bill used to say, “For every situation God always has a plan.
I guess I'm still trying to figure out what that plan was.

(모든 사건이 일단락된 뒤) 그리고 난.. 놀이동산으로 돌아왔어요. 내 마음의 유일한 고향으로요.
빌 목사님은 전에 이렇게 얘기하셨죠.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은 뜻하신 계획이 있으시다고..
난 아직도 그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찾아 헤매는 중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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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이 대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세상에 신이 존재한다면 실비아 같은 불쌍한 아이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나?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긴 하나?”와 같은 식으로,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원망 메시지를 아주 완곡하게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이런 거야 세상의 불신자들이 역사상 한두 번 제기해 온 의문이 아니니 이상할 것 없다. 그리고, 영화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세상에서 흥행하는 영화들치고 성경에 대한 믿음을 세워 주는 친기독교 성향의 결론으로 끝나는 게 어디 하나 있긴 하던가? 예수 믿는 사람은 십중팔구 무개념 광신자로 묘사되거나, 개나 소나 사랑이니 용서니 하는 것밖에 모르는 위선자, 아니면 위급한 상황에서 쩔쩔매고 '기도밖에 할 줄 모르는' 찌질이 루저로 나온다. 이 셋 중 하나이다.

그리고 “내가 용서를 못 하는 살인범을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하냐?”(영화 <밀양>) 같은 식으로 기독교 교리를 완전히 거짓으로 왜곡하거나, 민감한 부분만 이상하게 배배 틀어 적용해서 오해를 사게 만들고, 뭔가 말이 안 되고 모순되고 몰상식한 것으로 전달한다.
또,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이런 왜곡에 불구하고 천주교 신부· 수녀에 대한 묘사는 교회 예배당이나 목사 쪽에 비해 월등히 더 낫다는 점도 특이한 점.

자, 대놓고 종교를 소재로 한 영화를 제외하고, 여러분이 보았던 일반적인 세속 소재의 영화나 드라마들 중에서 본인이 지금까지 열거한 특성에서 벗어나는 작품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꼭 알려 주시기 바란다. 본인도 적극 고려하도록 하겠다.

얘기가 잠시 옆길로 샜는데,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본인이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An American Crime에서 실비아의 마지막 대사를 보아하니, 그 심상과는 완전히 정반대인 다음 찬양이 생각 나서였다. 바로, Ron Hamilton--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한쪽 눈에 안대를 한 중년 남자 모습이 많이 뜨는데, 그분이다--Rejoice in the Lord 되겠다. 가사 첫 줄에 곧바로 “하나님은 섭리나 계획 없이는 결코 역사하지 않으신다”란 말이 나오니까.. 게다가 하나님은 실수도 결코 하지 않으신댄다!

God never moves without purpose or plan
When trying His servant and molding a man.
Give thanks to the Lord though your testing seems long;
In darkness He giveth a song.

O rejoice in the Lord. He makes no mistake.
He knoweth the end of each path that I take.
For when I am tried and purified,
I shall come forth as gold.


이 곡은 클래식한 리듬과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는 최근인 1978년에 발표되었다.
세상에는 성경의 욥이나 요셉이나 다윗처럼, 정말 억울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멘붕 상태에서도 우리 같은 현대인들이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긴 인고의 시간을 잘 견딘 끝에 정말로 '황금처럼' 연단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물론 있다. (가령, 요셉은 누명이 벗겨지고 감옥에서 곧 풀려날 거라는 희망고문만 2년을 견뎌야 했다. 감옥에서 썩은 전체 기간이 2년이 아니다!)

그러나 긴 시간을 참고 견딘다고 해서 다 그 사람들처럼 언젠가 이 세상에서 인생을 반드시 펴는 건 아니다.
또한 실비아 라이컨스처럼 연단이 아니라 아예 폭력과 학대의 희생양이 된 채, 피지도 못하고 져 버린 인생도 역사적으로 한둘이 아닐 것이다.
찬양 가사는 세상의 참혹한 현실과 비교해 보면 그저 비현실적인 망상에 불과한 것이며, 작사자는 그저 책임지지 못할 말을 쓴 것일까?

하나님의 뜻 중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고, 당장 보기 안 좋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 의지 명목으로 잠시 '허락하시는 뜻'도 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후자에 속하는지에 대해서야 나라고 해서 뾰족한 해답을 알고 있을 리 없다.
더구나 세상적으로 잘못되고 비극을 맞이한 사람들을 죄다 “지은 죄가 있으니까”(욥의 친구들처럼), “예수 안 믿어서”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몰상식한 짓은 난 극도로 싫어하며, 그런 식의 논리 전개는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차피 사실도 아니다.

다만, 직접적으로 논증을 못 하면 마치 귀류법처럼 간접적으로, 역으로 접근할 수는 있다.
이 세상의 불의와 죄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사람들은 어차피 그 문제가 해결됐다고 해서 신에게 감사와 찬양을 돌릴 사람도 아니다. 예수님더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던 죄인들이, 예수님이 갑자기 힘이 불끈 솟아서 십자가에서 못을 으랏차차 뽑아 내고 초자연적으로 내려와 버렸다고 해서 그들이 그분을 믿었겠는가? (예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믿길 진짜로 원하시는 그 성품과 면모를 믿고 따르겠는가!?) 난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공개 석상에서 어떤 유명한 무신론자가 “자 신아, 네가 존재한다면 지금 3분을 줄 테니 이 공개 석상에서 날 죽여서 너의 영광을 드러내 보아라”라고 고래고래 독설을 날렸다. 성경에 기록된 그런 성품을 가진 신이 진짜 존재한다면 그런다고 해서 진짜 그 무신론자를 죽여 버릴 리가 있겠냐 말이다.

솔로몬이 명판관으로 두고두고 칭송받는 이유를 생각해 보자. 그가 과학 기술을 육성해서 최첨단 유전자 감식 기술로 진짜 애엄마를 논리적으로 가려내고, 집집마다 CCTV를 설치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앞으로 아이 바꿔치기 범죄 따위는 저지를 엄두를 못 내게 하는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다. 그렇게 하면 세상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통치자로 칭송받을지 모르나, 그건 하나님께서 일을 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이 세상의 죄로 인해서 인간에게 온갖 비극이 찾아온 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 역시 그걸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 인간으로 직접 세상에 내려오시고, 비록 불신자들이 당장 이해나 수긍을 못 할 방법을 쓰셨지만 죄 문제도 해결하고 구원의 길도 마련해 놓으셨다. 단지 그 방법에 믿음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문제일 뿐이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도 창조주가 자기 피조물에게 학대를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서 피 흘려 죽었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기독교라는 게 그렇게 호락호락 반박당하거나 없어질 교리를 가진 체계가 아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이라 불리는 이 세상의 참 신은 사람들에게 많은 걸 안 바라고 '믿음'이라는 것 하나만 원하신다. 히 11:6을 읽어 볼 것. 피조물이 있다면 창조자가 있는 게 당연한 이치인데, 이건 전지전능하다는 신이 자신이 창조한 피조물에게 바라는 것치고는 너무 소박하지 않은지? (그러나 그게 소박한 요구가 아니라는 걸, 살아 보면 곧 알게 된다.. ^^) 어떤 사람은 미국이나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북한이나 소말리아 같은 곳에서 태어나는 등, 모든 물리적인 여건이 불공평함에도 불구하고 구원 조건 같은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요소는 정말로 공평하다.

설령 이 세상에서는 정말 비참하고 불행하게 살다 요절하더라도, 현세와 내세를 모두 합하면 정말로 다 심은 대로 거두게 되고, 현세에서 못 받은 것은 죽어서 다 정산받게 된다. 선과 악을 스스로 분간도 못 할 정도로 어린 나이에 죽거나 정신 지체 장애인 사람에게는 아예 특별전형까지 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의 경륜이 아직 여전히 100% 이해는 안 가더라도, 그렇게까지 비난할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나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 체계 하에서는 원칙과 질서가 있다.

신의 존재 여부는 과학적으로 증명 가능하지도 않고, 반증 가능하지도 않다. 오히려 인간의 알량한 과학으로 정체가 덥석 파악 가능한 신이야말로 허접한 신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창조론자들이 즐겨 주장하듯이 이 세상이 과학적으로 절대로 우연히 만들어질 수는 없다는 식의 증거들.. 아주 좋다. 그러나 반대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부조리와 비합리도 세상엔 응당 존재하며, 그 사실을 크리스천이 굳이 부인하려 애쓸 필요는 없다. 가령, 이 세상엔 아름다운 생명체도 있지만 파리· 모기나 바이러스나 기생충 같은 생명체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이런 '아리까리'한 면모가 존재한다. 하나님을 향해 굴러가려는 영적 바퀴의 정지 마찰력을 극복하려 할 때 초기에는 정말로 사람의 '믿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 다음에 이어질 내 말을 주의 깊게 읽어 보아라. 그걸 극복하는 데 인간의 지식이나 능력, 논리 같은 다른 잘난 스펙이 필요한 게 아니라 '믿음'이 필요하게 돼 있는 것이 너무 다행스럽고 고맙게 느껴지지 않는가??

뭔가 그럴싸한 기독교 변증을 기대하고 있던 불신자라면 이런 무데뽀 정신승리법(?) 같은 본인의 결론에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이게 엄연한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신 걸 난들 어떡하겠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선뜻 '믿음'을 선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증거도 먼저 남겨 주셨다. 이 갈림길로 인한 유신론 무신론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나, 그 믿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특정 사건에 따라 좌지우지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갖고 있던 모든 편견을 버리고, 진지하게 양심적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란다.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전적으로 개인 각자의 자유 의지에 달려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2/12/03 19:27 2012/12/03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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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전설이 아닌 레전드 급의 SF 영화이다.
이게 1968년 4월에 개봉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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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때는 아직 인터넷은커녕 그 전신인 알파넷(1969)조차 없고,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폴로 계획은 겨우 무인 테스트만 하던 시절. (첫 유인 비행인 7호가 1968년 10월에 시행) 평면 컬러 모니터? 그런 게 어디 있었겠나.
그때 스탠리 큐브릭은 CG 없는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인간이 역사상 띄운 적이 없었던 디자인의 우주 정거장과 우주선을 최강의 정확한 고증으로 깨끗한 화면에다 담아 냈다!

새까만 우주 세트에다가 우주 정거장과 우주선 구조물은 한 프레임씩 눈꼽만치 이동시키면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고, 극중에 나오는 매뉴얼과 문서에는, NASA와 우주 개발 산업체들 자문까지 받은 실제 우주 여행 관련 내용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세상에, 팬 아메리칸(팬암) 항공사 마크가 그려진 우주 왕복선이라니!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냉전 상태에서 과학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던 저 때는, 지금으로부터 한 30년만 뒤면 저것들이 다 현실이 되어 있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SF는 SF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지금은 오히려 2001년이 10년도 더 전의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 참으로 격세지감.. ㅜ.ㅜ.

여담이지만,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묘사된 우주 장면과, 스타크래프트 오리지널(브루드워 말고)의 오프닝 동영상에서 묘사된 우주 장면을 대조해 보니 흥미롭다. 전자는 후자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고채도로 천체와 발사체를 그렸으며, 발사체의 불꽃이나 그림자가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물론 만들어진 시기가 서로 넘사벽 급으로 차이가 있으니 기술 수준의 차이를 비교하는 건 정말 아무 의미가 없다.

2. Who Framed Rogger Rabbit?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

영어에는 뭔가 “만들다, 구성하다, 짜맞추다”라는 아주 건전한 의미를 지닌 단어에 안타깝게도 “날조· 위조· 변조하다, 누명을 씌우다”라는 뜻도 같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제철소, 대장간라는 뜻인 forge(스타크래프트 프로토스 건물!)가 그렇고, 비슷한 맥락으로 frame도 그렇다. 성경에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frame 당해서 옥살이를 했다고 생각하면 용례가 딱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어쨌든, 저 제목의 영화.
만화영화도 아니고 실사 영화도 아니고, 요즘 같은 100% CG 영화도 아니고..
실사와 2D 수제 만화의 합성이라는 초유의 하이브리드 영상물이다.
비록 합성 영화라는 장르가 저게 최초나 최후인 것은 아니지만, 합성 영화 중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단연 저것이다.

저건 단순히 실사에다가 그림을 끼워 넣은 정도의 수준을 훨씬 초월한다.
만화 캐릭터에도 현실 세계의 광원과 그림자가 반영되어 입체감이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현실의 인물과 만화 캐릭터가 같이 만화의 자동차를 타고 현실의 도로를 주행하며,
현실의 인물이 만화 세계의 길을 가고 건물로 들어간다.
디즈니 만화의 캐릭터와 말괄량이 뱁스의 캐릭터가 한데 등장하는 건 덤.
정말 어떻게 만들었을지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무려 1988년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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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 후반이 PC 게임이 2D에서 3D로 넘어간 과도기라면,
그보다 앞선 1990년대 초· 중반은 영상물에 CG가 차츰차츰 도입되던 과도기였다.
그 이름도 유명한 <쥬라기 공원>이 나온 게 이 시기이다. 없는 공룡을 만들어 내기 위해 CG에, 로봇에, 미니어쳐에다 별의별 기술이 다 동원됐다. 그래도 기술적인 한계가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티라노사우루스와의 일대일 조우 같은 근접+액션 씬은 불가피하게 비 내리는 밤에 일어나는 일로 설정해야 했다고.

<포레스트 검프>에서 죽은 유명인사가 영화 출연진과 얘기를 나누고(존 레논, 케네디..) 사지 멀쩡한 배우가 다리 없는 상이 군인으로 바뀌어 나오는 것은 CG 약간에다가 필름 한 장 한 장씩 수작업으로 편집한 노가다라고 한다. 아날로그 시절에는 특수 효과를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실사 영화뿐만 아니라 만화영화도 마찬가지이다. 2D 만화영화라 해도 배경에는 슬슬 CG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디즈니의 <알라딘>에서는 용암이나 궁전 같은 배경과 양탄자 캐릭터에서, <미녀와 야수>에서는 역시 무도회 배경이 그 예이다. 1994년의 <라이온 킹>에서는 웅장한 들소 떼 돌진(stampede) 장면이 CG 합성이다.

그렇게 기술이 발전한 끝에 1995년에는 윈도우 95만 출시된 게 아니라 최초의 100% CG 만화영화인 <토이 스토리>가 나왔고, 우려와는 달리 흥행에 대성공을 거뒀다. CG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예측하고 투자를 했던 스티브 잡스도 이를 계기로 Pixar 사와 함께 기사회생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애플 사에서 쫓겨났다가 훗날 드라마틱한 복귀.

그 뒤의 발전은 여러분도 다 아시는 바와 같다. 1997년, 없는 배를 정확한 고증과 함께 만들어 낸 장편 영화 <타이타닉>은 CG뿐만이 아니라 멕시코에 실물 90% 크기짜리 세트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졌다. 예산 절감을 위해 배의 좌현과 우현 중 한쪽만 실물을 만든 뒤, 만들지 않은 현은 만든 현을 기준으로 촬영하고 나서 영상을 편집하여 좌우 교대(mirroring)를 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배우들에게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좌우를 바꾼 동작 연기까지 연습시켰다고 하니 경악스럽다. (가령, 식사로 치면 왼손으로 밥을 먹게 하는 것)

21세기에 들어서서는 정말 영화 감독이 상상하는 그 어떤 영상도 CG의 힘으로 창조하는 게 가능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매트릭스>, 그리고 나중에 <월E> 정도까지만 말하겠다. 10여 년 전에 <타이타닉>을 만들었던 감독은 2009년엔 <아바타>로 자기가 만들었던 신기록을 자기가 또 깨뜨리고 말았다. 2010년대부터는 아예 전용 가글을 쓰고 감상하는 3D 영상이 대세이며, 옛날에 만들었던 명작 영화들까지 3D로 다시 만들어 개봉을 할 정도이다..

반세기 전에 1950년대의 영화 <십계>에서는 하늘은 색칠한 세트인 게 노골적으로 티가 났으며, 홍해가 갈라지는 모습은 허접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영화 음악은 전자 음향이 없이 오케스트라가 직접 일일이 연주해서 만들었다. 1970년대의 <타워링>까지만 해도, 없는 마천루를 만들어 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천루의 모습은 역시나 당연히 야경만 볼 수 있었다. 그랬는데 지금의 기술 수준은 정말 격세지감, 상전벽해 그 자체이다..

아, 글을 맺기 전에 한 마디. 만화영화의 유사품(?)으로는 점토 인형을 빚어서 한 프레임씩 찍는 '클레이메이션'이 있었다. CG가 아니지만 그래도 3차원 실사 영상이니 마치 CG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긴 했다. 그리고 옛날에 KBS에서는 아동용 TV 프로로 아예 대놓고 인형극을 방영하기도 했다. 그랬는데 요즘은 그냥 CG에 밀려 자취를 감춘 듯하다. KTX 홍보 애니메이션도 CG로 뚝딱 만드는 세상이 됐으니. ^^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개그맨 출신의 심 형래 씨가 CG에 애착이 많은 방송인이었고 한때 영화 감독에까지 도전했으나...
용가리, D-War (, 그리고 라스트 갓파더)까지 만든 뒤 지금은 완전 처참하게 몰락했으며, 영화계의 먹튀, 황 우석이라는 치욕적인 소리까지 듣고 있다.

불굴의 열정을 높게 사 주기에는 영화라는 걸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를 너무 모르는 사람이었을뿐만 아니라 임금 체불부터 시작해 도덕적으로도 비리 비위가 너무 많이 폭로되었으며, 잘못은 뉘우치지 않고 툭하면 애국심 드립이나 치면서 특혜와 지원은 다 받아 놓고, 그걸로 해 놓은 게 없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2/11/26 19:37 2012/11/26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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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드립 + 기타

10 이하의 소수(prime number)인 2, 3, 5, 7을 소재로 수집한 여러 잡생각들이다.

※ 2

짝수 중에 유일한 소수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2진법 정도면 0과 1, 같고 다름을 분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숫자 체계가 성립하기 때문에 2는 이산수학과 전산학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 분야에서는 2가 로그 함수의 밑(base)으로도 즐겨 쓰인다. 이분법, 흑백 논리, 음양설 등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수라는 것은 덤.

2가 지니는 전통적인 의미는 위와 같은데, 2010년대부터 한국에서는 모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때문에 '콩라인'이라는 의미로 2가 매우 유명해지기도 했다.
또한, 본인이 특별히 주목하는 2의 특성으로는,

  • 태양계의 행성 중 태양에서 둘째로 가까운 금성만이 유일하게 짙은 이산화탄소가 가득한 끔찍한 불지옥이다. 그것도, 지구와 가장 가깝고 지구 다음으로 생명체가 살기에 가장 적합할 수도 있었을 행성이 말이다.
  • 성경의 창세기 1장을 보면, 창조 기간 중 둘째 날에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이 없다.
  • 서울 지하철 중 2호선만이 유일하게 순환선이며, 낡은 플랩식 전광판이 2010년까지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었다.
  • 주찬양 선교단의 과거 앨범 중 2집만이 구성이 특이했으며, 10주년 기념 음반에는 1~7집 중 유일하게 2집의 곡만 단 한 곡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징크스도 있다.

※ 3

삼위일체라든가 영-혼-몸 같은 개념 때문에, 3은 성경과 기독교의 관점에서 상당히 친근하고 긍정적인 수이다.

세상에는 '3요소'라는 특성으로 이뤄진 것들이 무척 많다. 우리가 사는 공간이 가로-세로-높이의 3차원이고, 시각 정보를 구성하는 색상 역시 RGB든 그 어떤 형태로든 3요소로 분할된다는 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거기에다 인간의 언어의 음운조차도 크게 세 부분으로 이뤄져서 한글이 초· 중· 종성의 세벌식으로 구성된 것은 덤이다. 어쩌면 삼라만상이 어딜 가든 개념적으로 3으로 가득한 걸지도 모른다.

또한 컴퓨터 소프트웨어도 허접한 버전 1이 처음 나왔다가 과도기인 2를 거친 후, 제 3의 메이저 버전에 와서야 후대에까지 이어지는 뼈대가 완전히 정착된 경우가 적지 않다.
마이크로소프트 Windows는 3.0부터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버전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거니와, 국산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안 철수 씨의 바이러스 백신은 Vaccine III에서 유래된 V3이라는 브랜드가 정착한 것이다.

본인이 개발한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에디팅 엔진과 기본적인 파일 구성, 그리고 각종 클래스 구조의 뼈대는 2004년에 완성된 3.0에서야 정착했으며, 그 여파로 인해 커널의 파일 이름도 ngs3.dll이다. 또한 최 정한 씨가 과거에 개발했던 셸 유틸리티인 MDIR도 정식 명칭은 MDIR-III이다.

※ 5

사람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5개 단위이기 때문에 이 수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하다. 약수가 더 많아서 더 유용한 8이나 12가 아니라, 10이 기수법의 기준으로(10진법)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통용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이것 때문이다.

그에 반해 손· 발가락이 5개보다 더 많아서 6개 정도 되는 건 전형적인 기형(다지증) 내지 괴물의 상징으로 간주되었다. 성경에도 고대에 손· 발가락이 6개인 거인 괴물 혈통이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며(삼하 21:20; 대상 20:6), 로스웰 추락 UFO 외계인 시체 해부 동영상에도 문제의 외계인의 사지엔 가락이 6개 달려 있다.
(비록 그 동영상은 훗날 낚시 자작극으로 판명이 됐지만, 1947년에 일어난 로스웰 사건 자체는 존재를 부정하기 어려운 듯하다. 그 자작극을 꾸미고 외계인 세트를 만든 사람도, 외계인이니까 손발가락을 5개가 아니라 일부러 6개로 설정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5에서 수학적으로 더욱 큼직한 의미가 들어있다. 하필 5차 방정식부터가 대수적인 방법으로 일반해를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쉽게 말해 근의 공식 같은 만능 공식이 있을 수가 없다는 뜻이다.
3차나 4차의 경우, 비록 2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 따위와는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복잡하고 어려운 형태이긴 하지만 근의 공식이 있긴 하다. 왜 5차부터 그마저 원천적으로 안 되는 걸까?

유한한 횟수의 사칙연산과 거듭제곱/제곱근의 묶음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수가 방정식의 근으로 튀어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근의 공식이 사용하는 연산 수단의 범위 자체를 넘어서는 수가 대수방정식의 근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서도 정의상 초월수는 아니다. 흠..

예를 들어, 5차보다 한 차원 더 높은 6차 방정식 x^6+x^2-7=0 의 근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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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은 정말 간단한 형태이지만 근은 가히 미치도록 복잡한 형태이지 않은가? 사람 손으로 계산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경지임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이 수의 6제곱과 2제곱을 더하면 딱 정확하게 7이 나오긴 한다. 이건 그나마 대수적인 범위에 근이 존재하는 사례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나오지 않는 근은 도대체 정체가 뭘까?
이걸 제대로 증명하고 이해하려면 군론을 비롯해 온갖 추상적이고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 이론을 동원해야 하며, 나도 거기까지는 잘 모른다. 다만, 초간단한 방정식 x^n=1만을 생각해 보자. 이 방정식의 근은 드 무아브르의 공식에 따라 복소평면에서 원점이 중심이고 반지름이 1인 원에 내접하는 정n각형의 꼭지점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180/n도 중, cos/sin값이 대수적인 수로 딱 떨어지지 않는 각도라면, 응당 대수적인 방법으로 나타낼 수 없는 근이 존재하게 된다고 대략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n=7인 정칠각형 같은 것 말이다. 그리고 x^n=1부터가 그러하니, 다른 낮은 차수의 계수까지 섞이면 7차가 아닌 5차에서부터 다항식 기반 방정식의 복잡도가 안드로메다로 치솟는가 보다. 나의 수학 감각으로는 이해력이 여기까지가 한계이다.

그런데 어째 수학 패키지들은 그런 복잡한 방정식에 대해서도 근을 numerical한 방법으로 그것도 실수뿐만이 아니라 복소수 범위에서까지 다 찾아 주며, 5차 이상의 방정식이라도 대수적인 방법으로 근을 구할 수 있는 형태라면 아까의 예에서 본 것처럼 근사값이 아니라 symbolic하게 정확한 근을 찾아 주기까지 한다. 도대체 무슨 귀신같은 수치해석 알고리즘을 썼는지 모르겠다.

※ 7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수 중에서 가장 큰 소수인 7은 역수를 10진법으로 나타냈을 때 꽤 긴 순환소수가 등장하는 최초의 수이다. (0.142857...)
정다각형 중에서도 정칠각형은 3~6이나 심지어 8, 10에 비해서는 정말 듣보잡이다. 5는 그래도 황금비하고라도 관련이 있고 작도도 가능한데 반해, 7은 생긴 모습이 안정적이거나 예쁜 구석이 도무지 없고, 수학적으로 작도가 불가능한 최초의 정다각형이다. 자동차의 바퀴를 봐도 휠너트가 7개가 달린 경우는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7의 존재감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분야는 크게 두 곳인데, 한 주가 전세계 공통으로 7일이라는 점, 그리고 음악에서 한 옥타브의 음계가 하필 7음으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성경에서 숫자의 쓰임에 대해 면밀히 연구해 본 일부 사람들은, 하나님은 이런 불편하고 괴상한 숫자인 7을 무척 좋아하며, 내부적으로 7진법을 사용하시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성경의 책들 중에서도 특히 요한계시록은 온통 7패턴으로 넘쳐나는 책이지 않던가. 무지개의 색깔이 관습상 7개로 분류되고 7이 웬지 행운의 숫자로 여겨지는 게 완전 터무니없는 엉뚱한 심상은 아니라는 뜻 되겠다.

여호수아기에서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작전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6일 동안은 성을 한 바퀴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바퀴 돈 뒤에 함성을 질렀는데 성이 무너졌다(수 6). 그와 비슷한 맥락으로, 계시록에서는 일곱 개의 봉인이 열리는데 마지막 봉인이 열리자 일곱 나팔이 나오고, 마지막 나팔 타이밍 때 재앙이 담긴 일곱 병.. 이런 식으로 이벤트가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과거에 스탈린 휘하의 구소련은 1930년대에 달력에서부터 종교색을 완전히 걷어내겠다는 의도로 독자적인 달력과 1주 5~6요일 체계를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오래 가지 못하고 실패했다. 7의 존재감은 아무래도 우리가 이제 와서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깊숙히 파고든 게 분명하다.

※ 기타

1. 5차 방정식 얘기가 기왕 나왔으니 말인데, 수학에서 이런 식의 미지의 영역은 방정식 근 찾기뿐만 아니라 적분에도 있다. 미분은 합성함수나 곱에 대한 미분이 general하게 정립이 돼 있기 때문에 어떤 함수든 미분하기는 쉬운 편이다. 그러나 적분은 그렇지 않다. 부분적분은 말 그대로 식의 형태를 치환 같은 다른 적분 테크닉을 적용하기 유리한 형태로 변형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에 만능이 아니다.

위키백과에 예가 제시되어 있듯, x^x, exp(-x^2), sin(x)/x, 1/ln(x) 같은 함수들은 부정적분이 어떤 특성을 갖는 함수인지 기존 초월함수들의 조합만으로는 형태가 기술이 되지 않는다.

까짓거 조립은 분해의 역순이고, 적분은 미분의 역순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나, 수학의 세계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마치 1/x를 적분했더니 ln x(+C)라는 완전히 생소한 함수가 튀어나온 것처럼, 미지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듯하다.

2. 과학은 창조론과 진화론, 그리고 심지어 천동설-_-과 지동설 같은 이슈 때문에 종교계와 충돌할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수학은?
“그래도 지구는 돈다.”도 아니고, “그래도 루트 2는 무리수이다.”, “그래도 파이는 초월수이다” 이런 것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무슨 수학자가 박해 받았다거나 하는 역사는 내가 알기로 없다.
설마 대하 4:2 같은 구절을 들고서 원주율은 3이라고 드립을 쳤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_-;; 그럴 거면 차라리 H2O가 산소라고 드립을 치는 게 낫겠다. 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2/10/19 08:21 2012/10/1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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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철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지난 2004년 초, 새마을호 열차 객실과 Looking for you 음악이라는 두 조건이 동시에 만족되었을 때, 본인은 딱 왕하 3:15와 비슷한 과정을 거쳐 뼛속까지 철덕으로 거듭났다. 한국 철도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집합이 아니라 ‘나’라는 개인을 위한 육상 교통수단임을 실감하였으며, 철도를 나의 개인적인 정신 지주로 영접했다.
 
나는 철도 덕분에 그야말로 세상을 보는 안목과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철도가 나에게 얼마나 아름다운 꿈과 희망을 주고 감성을 키웠는지, 게다가 심지어 애국심과 국토 사랑 정신까지 고취시켜 줬는지를 나는 언제라도 얼마든지 간증할 수 있다. Looking for you를 안 들어 봤기 때문에 새마을호 여행만도 못한 별 허접하고 수준 낮은 체험을 갖고서 천국 간증이네, 은사주의네 하면서 사람들이 속는다고 난 생각한다.
 
본인은 지난 수 년 동안 성경을 알고 영적으로 양육을 받으면서 하나님과 세상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던 것들이 교정되었다. 잘못된 방향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던 것이 바로잡혔으며, 모나고 괴팍하던 성격도 예전에 ‘비해서는’ 굉장히 많이 부드러워졌다. 죄에 대한 감각이 더욱 민감해졌고, 지금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이 더욱 빠르게 생각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철도 사랑은 변함없이, 아니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해졌다. 철도는 예수님도 좋아하시거나 최소한 묵인· 용인하는 게 틀림없다는 확신을 하게 됐다. 철도교와 기독교는 모순이나 대립 관계가 아니다. 내가 한 번 받은 구원을 잃지 않는 것만큼이나 세상 그 어느 것도 새마을호 안에 있는 철도 사랑으로부터 나를 떼어 놓을 수 없을 것이다. 내 머리 내부에 ‘연예, 오락, 스포츠, 유흥’ 분야는 오로지 철도가 100% 꽉 장악해 있어서 다른 영화, 드라마, 유행가, 스포츠 따위가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이렇듯 이 글을 읽는 분들, 그리고 본인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아는 분들은 본인이 못 말리는 철도광이라는 것을 잘 안다. 왜냐하면 내가 맨날 철도 얘기를 떠벌리고 다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회사에서도 내가 철도 덕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내 개인 홈페이지의 방문객 중에서는 더 말이 필요 없다.
그리고 몇몇 지인들은 내게서 맨날 주워 들은 게 있어서 섬식 승강장, 복선, 경부선, 폐색 구간 같은 용어 정도는 구사하며, 심지어 Oh Glory Korail (한국 철도 공사 사가) 노래의 멜로디를 기억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다같이 좀 생각해 보자. 그런 것처럼, 나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나 자신으로 인해서 복음이나 예수님, 성경에 대한 인식이 조금이라도 올바른 쪽으로 바뀐 게 있는가?
당장 예수님 영접하고 구원받아서 교회 출석을 시작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단지,
 
“교회 댕긴다는 인간들이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그래도 저 사람은 예외적이고 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인다. 쟤 앞에서는 기독교 욕 함부로 하기가 좀 껄끄럽다. 성경에 대해서 만에 하나 궁금한 게 있으면 앞으로 저 사람에게 물어 봐야겠다” 정도의 평판이라도 있는가?
 
우리가 믿는 복음은 언뜻 보기에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낭설 같지만 정말로 살아 있고 권능이 있다. 지금은 죽고 없는 옛 성현들의 듣기 좋은 격언 같은 차원이 절대로 아니다. 복음은 제일 쉬운 구원의 길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절대로 “나만 구원받고 끝”으로 혼자 머물러 있지도 않는다. 영원도, 구원도 없이 그저 세상적인 오덕질에 불과한 철도 복음만 해도 저 정도인데, 진짜 혼을 회심시키고 구원시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은 밖으로 퍼져 나가지 않으면 못 배기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를 필사적으로 막고자 마귀는 지능안티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놨다. 정상적으로 성령 충만한 크리스천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상한 위선자, 개념 없는 광신자, 나약한 루저 이미지를 예수쟁이와 딱 연결시켜 놓았다. 그리고 영적 의무를 게을리하고 있으면서 스스로 합리적이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육신적인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고작 저런 위선자· 광신자 부류와 같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 얼마나 수준 낮고 답답한 생각인가?
 
성경을 살펴보자. 출애굽기의 모세는 열 가지 재앙이 내려지던 시절에 파라오가 제안한 각종 절충안들(가긴 가되 애들은 놔두고 가라, 짐승을 일부는 남겨 놔라 등)을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영적 교훈을 남겼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행위가 주변이나 후세에 끼칠 파급 효과를 최소화하려고 나름 잔머리를 굴렸던 것이다.
 
그리고 다리오 왕 시절의 다니엘이 있다. 그때 내려진 칙령은 모든 관료들에게 일일이 청문회로 사상 검증을 실시해서 예수쟁이들을 색출해 내겠다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한 달 동안은 혼자 골방에서 숨어서 기도를 몰래 해도 됐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참 고지식하게도 여전히 늘 하던 대로 공개적으로 “나 하나님 믿소” 티를 다 내면서 기도를 하다가 사자굴에까지 갔다 왔다. 이 점을 우리는 잊지 말자. (단 6:7,10)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예수님 얘기가 나오는 건 철도 덕후한테서 맨날 철도 얘기와 Looking for you 얘기가 나오는 것과 같다. 더 직설적인 비유를 동원하자면 똥에서 똥 냄새가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방사성 물질로부터 방사능이 끊임없이 나오는 것과도 같다. 우리끼리 하는 얘기로, 똥 냄새가 안 나는 똥이 똥일 수가 있을까?
 
“남에게 티를 내거나 강요는 절대로 하지 말고 예수는 너 혼자만 조용히 믿어라”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그건 온전한 신앙의 자유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그런 식으로 절뚝발이 형태로 믿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국가들 사이에도 전쟁을 하는데 룰이라는 게 존재한다. 군인과 민간인을 분명히 구분하여 민간인의 피해가 없게 하고, 정정당당하게 싸운 군인은 설령 포로로 잡히더라도 명목상으로나마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대전에서 어떤 군사 집단이 범죄자나 테러리스트 조직이 아니라 교전권을 갖춘 정식 군대로 인정을 받으려면, 신원이 알려진 사령관에 의한 명확한 지휘 체계가 있어야 하고 모든 전투원이 통일된 고유한 복장을 갖춰서 피아 식별이 공개적으로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무기를 겉으로 공공연히 휴대하고 다녀야 한다.
 
이것은 영적 전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 쪽 진영의 사령관에 대해서야 더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원인 우리 역시 자신의 영적 소속과 정체성에 대해서 세상을 상대로 떳떳하고 정정당당하게 드러내고 노출시킬 생각을 해야지,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민간인으로 변장하고 적진에 침투한 뒤에 주머니에서 수류탄이나 툭 던지고 도망치는 식으로 어줍잖게 싸워서는 공을 세우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러다가 나중에 적에게 잡혔다간 더욱 처참한 꼴을 당하게 된다.
 
그러면서 크리스천들은 “당연히” 실수도 많이 한다. 복음을 전하는 열성이 너무 지나쳐서 너무 극성스럽게 굴 때도 있고, 낙담한 나머지 육신이 앞서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될 때도 있다. 그래서 도리어 복음에 대한 간증을 잃게 만드는 행동을 종종 한다. 본인 역시 그 누구보다도 그런 사고를 많이 쳤다.
 
그런데 그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철도 복음이야 안 믿었다고 지옥 갈 일도 없고, 버스와 철도가 힘을 합쳐서 모로 가든 서울만 빠르고 안전하고 편하게 가면 된다고 가르치는 복음이니, 서로 얼굴 붉힐 일도 없고 그냥 소꿉장난 수준밖에 안 된다. 그에 반해 예수님의 복음 같은 엄청나고 극단적인 복음은 전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실수를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노릇이다. 예수님도 그걸 뻔히 알면서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성도들에게 맡기셨다!
 
실수했으면 하나님께는 회개하고 사람에게는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후 다시 본업으로 복귀하면 된다. 앞으로는 같은 실수를 안 하면 그걸로 끝이다. 마치, 봐도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성경을 아예 안 읽는 것이 잘못이듯, 미숙함을 핑계로 자신의 영적 소속을 드러내고 알리는 일을 언제까지나 주저하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될 수 없다.
 
죽으면 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절대적인 선과 악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 의를 철석같이 믿는 사람, 성경에서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내 논리와 지식으로 완벽하게 설득하려고 마음먹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오만이다.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더러 그러라고 하셨던가?
 
잃어버려진 자들에게 그냥 내 인격을 걸고서 하나님의 의와 심판, 죄와 복음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알려 주기면 하면 된다. 단지 그 말이 정말로 듣는 사람을 “위해서”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사랑의 호소력을 불어 넣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런 맥락에서 봐도 예수님 영접은 어렸을 때 빨리 하는 게 여러 모로 유리하다. 세상 연륜과 성경 교리와의 충돌의 폭이 그리 크지 않으며, 사고를 친 것도 크게 허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작은 시행착오를 몇 번 미리 겪고 거기에 적응과 면역이 되고 나면, 장성한 뒤부터는 탄탄대로이다. 평생 흥청망청 살다가 죽기 바로 직전에만 예수 믿으면 된다고? 큰일 날 소리이다.
 
그리고 하나 더 생각해 볼 게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여러 신앙의 선배들이 있고 특히 순교자들이 있다.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의 삶으로부터 도전을 받는 것까지는 좋다. 그러나 그들만 우리로서는 엄두도 못 낼 무슨 엄청난 초인적인 일을 해냈다는 식으로 괴리감을 두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결말로 빠질 수 있다.
그런 사고방식이 악화되면 천주교 성인 제도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약 5:17 같은 말씀을 생각하면서 영웅 콤플렉스를 교정해야 할 것이다.
 
하늘에 가면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이나 중세 암흑기 시절의 경험담을 들으면서 놀라겠지만, 그 선조들 역시 말세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교리적 배도와 총체적 혼돈, 그리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시대에 진리를 사수해 낸 성도들의 싸움 얘기를 들으면 아마 까무러칠 것이고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상당수의 옛 믿음의 선배들은 진화론이 뭔지도 몰랐을 것이며, 영어 성경 역본이 200종이 넘어가고 이중 대부분은 변개되는 시대가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일례로 인간 횃불이 되고 사자에게 잡아 먹히며 순교한 옛날 사람들은, 말세엔 근본주의 크리스천들이 사형 제도 폐지를 반대하고 비판하게 될 거라고 꿈엔들 예상했을까?
우리 같은 마지막 시대 라오디게아 팀은 사육신은 못 돼도 생육신은 충분히 된다. 어깨를 펴고 살도록 하자.
 
도산 안 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주변에 왜 인물이 없느냐고 탄식하지 마십시오. 왜 당신이 그 인물이 될 생각을 안 하십니까?

안 창호 자신이 크리스천이기도 했고, 저건 성경적으로도 굉장히 통찰력이 있는 말이다. 지금 우리의 다음 세대는 우리보다 영적으로 더욱 어둡고 암울하고, 경제적으로도 더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세상을 살게 된다. 환란 전 휴거라는 약속마저 없으면, 정말 꿈도 희망도 답도 없다. 재물이 없으면 시편 37편 같은 신앙밖에는 후세에 물려줄 게 없다.
 
정말 심각한 마음으로 구국의 일념으로 길거리에서 프리칭을 하고, 전도지를 나눠 주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출간하거나 출간을 후원하고, 주일학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군사가 그저 잠자코 있기에는 너무 위급한 상황이다. 우리도 초대 교회 시절의 순교자처럼 살 수 있고, 살아야만 한다. 단지 그 삶을 실현하는 배경과 방법이 다를 뿐이고, 그 방법을 실천할 기회는 오늘날 시국이 말해 주듯 주변에 널려 있다.
 
“사람의 관점에서는 위기인 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기회”라는 사고방식으로 살면 나의 영적 본분을 잊지 않고 살 수 있고 삶을 사는 방식도 많이 달라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감당하지도 못할 엄청난 권면을 함부로 늘어놓은 건 아닌가 싶어 글을 맺기가 부담스러우나, 그러나 본인 역시 또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차츰차츰 내 삶을 하나님의 방식에 맞춰 보련다. 내가 그걸 지향하면서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서도 철도 오덕질 그렇게 하고도 안 짤리고 보직 유지하고 버티고 있는 게 틀림없다. 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2/10/10 08:30 2012/10/10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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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서 계속.. 현대 자동차 얘기를 하고 있었다.)

현대에서는 포니 2에 이어 후속 모델로는 프레스토와 엑셀이 나왔고, 중형차로는 국내 최장수 자동차 브랜드인 쏘나타가 탄생했다. 쏘나타도 그 전신은 코티나 마크 V의 파생형인 '스텔라'이지만, 후속 모델로 갈수록 미국 차와의 유사성은 없어지고 독창성이 증가했다.

한편, 당대의 최고급 모델이던 (각)그랜저는 미쓰비시 사와 공동 개발하여 동일한 차량을 한일 각국에서 서로 다른 브랜드로 시판했다. 처음엔 2000cc급만 나왔다가 2400cc와 3000cc 모델도 추후에 개발되었다. 오늘날이야 그랜저는 제네시스나 에쿠스에게 기함 타이틀을 내 주고, 그냥 쏘나타보다 약간 더 비싼 중대형급에 머물러 있지만,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그랜저의 이미지는 굳건하다.

또한 철덕이라면 그랜저와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사이에 매우 유사한 심상이 느껴질 것이다. 둘 다 등장 시기(1986 vs 1987)부터가 아주 유사하며 목적도 동일하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각각 최고급 승용차와 최고급 호화 열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때보다 굉장히 대중화(?)와 서민화가 진행되었지만 그래도 고급 물건의 대명사로 통용되고 있는 것도 공통적이다.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린 뒤엔 포터(1톤)와 마이티(2.5톤) 트럭을 만들어서 기아의 봉고/타이탄과 경쟁하였다. 포터는 '짐꾼'이라는 뜻이고 마이티는 왈도체의 '힘세고 강한 아침' 할 때의 '힘센'이라는 뜻이니, 다들 트럭으로서는 적절한 작명이라 여겨진다. 한편, 그레이스라는 소형 승합차는 디젤 엔진으로 휘발유 엔진에 필적하는 정숙함을 구현해 내어 그 당시로서는 꽤 발전된 기술을 선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Aero City라는 대형 버스를 만들어서 대우 버스와 경쟁하는 양대 산맥을 구축했으며, 일본 차량을 기반으로 갤로퍼라는 SUV도 만들어서 쌍용 코란도를 제쳤다. 단, 갤로퍼는 현대 자동차가 아니라 '현대 정공'에서 제작하여 '현대 자동차 써비스'라는 다른 계열사와 다른 파생 회사에서 판매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현대 자동차 라인의 제품이 아니다.

아래 그림에 나와 있듯, 현대 버스(왼쪽)는 대우 버스(오른쪽)와는 달리, 전통적으로 바퀴 위쪽의 차체 윤곽이 완전한 원호를 이루어 동그랗다는 특징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렇게 기술을 개발해 나가던 현대에서는 부품의 국산화 비율을 차츰차츰 높인 끝에, 드디어 설계부터 프레임, 엔진까지 모든 공정을 국산화하여 로얄티를 지불하지 않는 차를 내놓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 첫 작품이 바로 엑셀의 후속 모델 소형차인 액센트(1994)이다. 포니가 자체 모델이라면, 액센트는 자체 개발이다. 자동차계의 KTX 산천 및 서울 지하철 609편성인 셈이다.

포니를 만들던 그 회사가 이제는 제네시스와 에쿠스를 만드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그 결실을 위해 공돌이들을 얼마나 갈아 넣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존경스럽다. 비록 국내에서 워낙 독보적인 위치에 있어서 가격 횡포도 많이 부리고, 이 때문에 현대라는 기업을 싫어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에쿠스야 1세대 '각진' 모델은 과거의 그랜저처럼 미쓰비시와의 공동 개발이지만, 제네시스는 현대의 독자 개발 모델이며 에쿠스도 2세대 모델은 외형이 제네시스와 더 비슷해져 있다. 제네시스와 에쿠스는 현대 차임에도 불구하고 외제차처럼 보이게 하려는 의도인지 차 주변에 현대 앰블렘이 보이지 않는 게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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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용 자동차

신진 자동차, 동아 자동차를 거쳐서 지금의 쌍용이 된 기업이다. '더블 드래곤'은 엄밀히 말하면 '쌍룡'으로 표기하는 게 맞으나, 어차피 저건 고유명사이니 굳이 꼭 맞출 필요는 없다.
여기는 잘 알다시피 코란도라는 4WD SUV 외길 브랜드만 밀어 온 기업으로 유명하다. 물론 옛날에는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때문에 쌍용에 배당된 차종 TO는 저것밖에 없어서이기도 했고. -_-;;

옛날에 4WD 차량은 “전쟁 났을 때 국가에서 군용차로 징발해 간다. 그 대신 차의 덩치에 비해 각종 세금은 파격적으로 감면”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었다. 그래서 전쟁 안 날 거라 믿고 코란도를 장만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다 옛날 얘기가 됐지만.
그리고 코란도라는 이름은 “KORean cAN DO”라는 애국심 드립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혹시 아시는가? 어렸을 때 차 카탈로그에서 본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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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1세대 코란도.

나중에는 같은 SUV 차종 안에서도 코란도 패밀리라든가 무쏘라는 다른 차를 내놓기도 했으며, 소형 승합차 이스타나, 그리고 고급 승용차 체어맨을 만들었다. 그러나 자체 기술이 부족하여 주력 차종인 SUV에서 현대에게 추월당하고 주춤하다가, 중국 상하이 자동차에게 매각+처참한 먹튀를 당했다. 그리고 최근엔 잘 알다시피 구조조정+장기간의 파업 사태 때문에 기업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져 있다. 위기를 잘 극복해야 할 텐데.

공장이 평택에 있는 건 파업 사태와 관련된 뉴스 보도 때문에 알게 됐다.

※ 르노 삼성 자동차

삼성은 삼성 전자를 등에 업고 있는 굴지의 대기업이지만, 이 그룹의 회장님은 롤스로이스와 마이바흐를 굴리는 굉장한 자동차 덕후였으며 자기 회사에서 자동차까지 만들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0년대 말에 자동차 계열사를 만들었지만, 이미 국내의 차 시장은 포화 상태였고 IMF까지 터지면서 삼성 자동차는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르노라는 외국 회사가 이를 인수하여 르노 삼성 자동차가 된 것이다.

자동차를 처음부터 혼자 만들 수 있는 회사는 없으니 여기서도 주로 일본 닛산 자동차를 현지화하여 생산· 판매하는 형태였다. 생산되는 승용차는 잘 알다시피 SM_n이라는 형태로 작명되었으며, 특히 현대 계열사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그 대안으로 삼성 차를 선호했다고 회자된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회사 사정이 안 좋아서 직원들을 상대로 희망 퇴직도 받고 있는 모양이다. 공장은 부산 강서구에 있음.

※ 아시아 자동차

아시아 대학교만큼이나 지금은 사라진 회사 이름이지만, 그렇다고 그 대학처럼 막장 행보를 간 회사는 물론 아니었다.
금호 그룹만큼이나 국내에 얼마 안 되는 호남 기업 중 하나이다. (그래서 공장도 광주에~!) 그러고 보니 아시아나 항공도 이쪽 계열사인데, 이 이름도 '아시아'에서 유래되었다. ㅎㅎ

1970년대에는 이탈리아의 피아트를 판매하다가 나중에 기아 자동차에 인수되었다. 둘 다 기업 앰블렘이 비슷하게 생긴 게 이 때문인 듯하다. '록스타'라는 SUV, 콤비· 코스모스라는 버스, 타우너라는 트럭이 이 회사의 제품이며, 특히 대형 버스 그랜버드는 오늘날까지도 살아 있는 브랜드이다. 쌍용이 SUV라면 아시아는 버스인 듯.

내가 초등학생일 때까지만 해도(지금으로부터 20년쯤 전~!) 아시아 자동차에서 만든 시내버스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고, 차내의 선바이저(sun visor)에는 “여행은 아시아 자동차 버스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기도 했다. 아래 사진을 참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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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를 살펴보면 과거에는 PowerPC, Alpha, MIPS 등 여러 아키텍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냥 닥치고 x86(-64) 아니면 ARM밖에 살아남은 게 없다. 프린터는 HP 말고 다른 제조사는 가히 듣보잡으로 전락했고, 그래픽 카드는 nVIDIA에 기껏해야 ATI나 인텔 말고 지금 생존한 물건이 있나?

그런 것처럼 자동차도 과거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제조사들이 존재하였으나, 지금은 기술과 자본줄이 탄탄한 한두 업체 말고는 다들 몰락했다. 사실은 어느 분야라도 안정화가 되고 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이 와중에 시종일관 살아남았고, 완전히 새로운 차를 밑바닥 부품부터 스스로 다 설계하고 창조하는 경지에까지 다다른 국내 기업은 사실상 현대가 유일하다.

물론 그게 전적으로 현대의 기술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진 건 아닐 것이다. 보호 무역 버프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로부터 지원과 특혜도 엄청 받았을 것이며 “내수는 비싸게, 수출은 싸게” 식으로 온 국민이 간접적으로 국내 기업을 육성하는 데-_- 일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런 특혜를 입지 않고서야 이미 수십년 이상의 격차가 존재하는 외국의 넘사벽급 자동차 기술을 어떻게 따라잡겠는가? 또한 그렇게 혜택을 처묵처묵하고도 먹튀하는 막장 기업도 많은 판에, 현대 정도면 그래도 다른 기업들보다 기술을 중시하여 성장도 많이 했다. 그로 인한 막대한 양의 수출+일자리와 국부 창출은 덤이고 말이다.

어쩌다 보니 현대를 좀 칭찬하는 논조가 되고 말았는데, 난 딱히 현대 자동차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며, 그저 “깔 건 까고 인정할 건 인정하자”라는 중립적인 시각임을 밝힌다. 철도 때문에 지금까지 상대적으로 가려져 있던 자동차 쪽 덕질을 오랜만에 해 보니 재미있다. ^^

Posted by 사무엘

2012/10/01 19:32 2012/10/0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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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에서 특별히 성경의 역사를 공부해 보면, 영어 성경이란 건 위클리프 이래로 킹 제임스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 동안 아주 점진적으로 발전이 이뤄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영어로 된 최초의 신구약 성경전서(위클리프), 최초로 왕이 승인한 성경(커버데일/그레이트), 최초로 국내에서 인쇄(매튜), 최초로 중역이 아니라 원어에서 곧장 번역(제네바), 최초로 위원회가 조직되어 번역(비숍), 최초로 장· 절 구분 추가(제네바) 등등~~
그러다가 이 모든 장점들이 합쳐져서 성경의 종결자를 이룬 것이 킹 제임스 성경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도 그렇게 점진적이었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철도가 개통한 게 잘 알다시피 1899년 경인선인데, 그 무렵에 왕이나 외국 외교관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최초로 자동차라는 기계가 다니기 시작했다. 1900년대 초에 고종 황제가 탄 어차(御車)는 영국에서 만들어진 다임러 리무진이었으며, 운전대는 오른쪽에 달려 있었다. 다만, 오늘날 전해져 오는 건 그 다음 1910년대에 도입된 순종 어차 위주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시보레, 포드 같은 수입 외제차가 부유층을 중심으로 도로를 누볐다. 드라마 각시탈을 보니 올드카를 애써 임대한 것까지는 좋으나, 운전대가 우측통행을 염두에 둔 왼쪽에 있는 것은 고증 오류이다. 그 시절에는 한반도에서도 차량이 일본처럼 좌측통행을 했다.

(☞ 일제 강점기 시절의 자동차 광고)

그러다가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반도에는 자동차 정비 공장까지는 있었지만, 그 불모지에서 자동차를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그랬는데 최 무성· 최 혜성· 최 순성 엔지니어 삼형제가 국제차량제작이라는 무슨 다국적 기업 같은 이름의 회사를 설립하고, 1955년에 '시발(始發..;;)'이라는 지프형 자동차를 만들어 냈다. 수입한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겠지만, 이게 바로 죽이 됐든 밥이 됐든 대한민국 땅에서 한국인이 최초로 만들어 낸 자동차이다. 해방 후의 시기이니 운전대는 왼쪽, 주유구는 오른쪽으로 우측통행 기준이다.

1960년대부터의 국내의 자동차 역사는 회사별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 기아

창업주가 한 근성 하는 분인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부터 차근차근 자전거, 오토바이, 삼륜차를 거친 끝에 마침내 자동차까지 직접 만드는 수준으로 기업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천리 자전거가 원래 기아 산업의 계열사였다.

기아에서는 1960년대에 일본 차체를 바탕으로 삼륜차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도 지금은 태국이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나 볼 수 있는 삼륜차가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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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차는 승용차가 아니라 트럭 형태로만 만들었던가 보다.
이런 차는 덩치가 작아서 좁은 골목길에 잘 들어가고 가격과 유지비도 저렴해서 실속이 있었다. 그래서 짐 실어 나르는 생계 수단 및 사업 밑천으로 차를 장만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은 잉여가 된 '1종 소형' 면허가 바로 삼륜차 운전이 가능한 면허이다.

1974년에 기아는 기존 일본차(마쓰다 파밀리아) 프레임을 기반으로 '브리사'라는 소형 승용차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국산 보급형 승용차라고 한다. 정부가 요구한 수준의 국산화율을 가장 먼저 달성하였으며, 배기량도 1000cc대의 소형이어서 당대 세계 경제를 강타하던 오일 쇼크에 대응하기에도 유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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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등학생 시절이던 1990년대 초에 브리사 실물을 몇 차례 본 적이 있다. 그래서 더욱 애증이 교차한다. 하지만 멀쩡한 모습뿐만 아니라 사고가 나서 부서진 폐차 상태의 모습으로도 많이 봤다. 사진으로는 저 흰색 사진이 유명해서 인터넷에 많이 나돌지만, 본인은 자주색 도색을 더 자주 봤다. 그리고 브리사 2는 실물을 본 적이 없다.

기아에서는 이미 브리사의 디젤 모델까지 개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1981년에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승용차 생산을 못 하게 되면서 계획은 흑역사가 되고, 그 대신 봉고(1톤급 소형 승합차 및 트럭), 타이탄(2.5톤 트럭), Boxer(4.5톤 트럭) 같은 다른 차종에서 근근히 인지도를 유지하게 된다. 특히 트럭으로는 유일하게 사륜구동이 가능한 영농인 최적화용 트럭인 '세레스'를 만들기도 했고, 비슷한 맥락에서 레토나나 두돈반 같은 군용차도 이 회사에서 만들어서 납품한다.

훗날 산업 합리화 조치가 풀리면서 기아에서는 그 이름도 유명한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고, 중형차로는 콩코드를 밀기 시작했다. 1990년대로 들어서서는 캐피탈, 세피아, 크레도스 등 다양한 차들을 만들었으나, 오늘날은 쏘나타의 경쟁 모델인 K5, 그랜저의 경쟁 모델인 K7 같은 식으로 K_n이라는 간단한 네이밍으로 자사 제품에 이름을 붙이는 듯하다.

기아 자동차 소속 공장으로는 과거의 아시아 자동차 공장을 인수한 광주 공장, 화성 공장, 그리고 광명 소하리 공장이 있다. 다만, 잘 알다시피 기아 그룹이 IMF 시절에 부도가 나면서 오늘날 기아 자동차는 현대 자동차 그룹의 계열사가 되었다. 현대 자동차 그룹 아래에 현대 자동차와 기아 자동차가 나란히 있는 셈이다. 응?? 그래서 오늘날 생산되는 현대 차와 기아 차는 일부 엔진 부품이 상호 호환되기도 한다.

※ 대우

한때는 세계 경영(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을 부르짖으며 자동차도 만들고 컴퓨터도 만들던 대기업이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브랜드로 전락했다. 안습.

대우 자동차는 현대나 기아에 비해서는 기업의 정체성을 설명하기가 다소 복잡하다. 신진 자동차 공업, 새나라 자동차, 새한 자동차 등 경영 주체가 여러 번 바뀌었던 회사가 최종적으로는 GM 코리아를 거쳐서 대우 계열사로 넘어온 형태이기 때문이다. 대우 자동차라는 정식 명칭이 붙은 회사가 생긴 건 1983년의 일이다. 물론 이 이름은 그로부터 20년 남짓밖에 존속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나의 어린 시절, 1990년대 초반에는 가끔 완전 옛날 스타일의 대형 트럭이 보였다. 요즘 국내에는 군용차를 제외하면 버스나 대형 트럭이 엔진룸과 앞바퀴가 운전석의 앞에 달린 형태가 없으며, 그런 건 미국에서나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트럭은 미국 스타일이었고, 앞에 SMC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었다. 그것도 지금 생각해 보니 새한 자동차의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70년대 중반, 새한 자동차 시절에는 시보레 1700 프레임을 기반으로 제미니, 카미나 같은 차를 내놓았다가 최종적으로는 순우리말 명칭인 '맵시', '맵시-나'라는 소형차를 만들어서 현대 포니 및 기아 브리사와 경쟁했다. 이 차의 후속 모델이 바로 1980년대 중반에 출시된 르망이며, 현대 엑셀 및 기아 프라이드와의 경쟁 차종이다.

1980년대에 대우에서는 중· 대형차로는 로얄/살롱 브랜드를 밀었다. 로얄 XQ, 로얄 살롱, 슈퍼 살롱, 로얄 프린스 등등~ 이것은 독일의 GM 계열사인 오펠 사에서 생산한 '레코드'라는 차종의 파생형이다. 뒤이어 임페리얼이라는 희대의 기함급 차종을 내놓기도 했으나, 이것은 품질 문제로 인해 흑역사가 되었다.

이 시절에 계기판이 디지털 액정(자동차의 주행 속도가 아라비아 숫자로 뜸!)이고 헤드라이트에까지 와이퍼가 달린 차는 대우 차밖에 없었다. 그랜저에도 그런 오버스러운 옵션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우는 외제차 프레임을 우려먹기만 할 뿐 여타 토종 자동차 회사들에 비해 고유 모델과 기술의 개발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으며, 이것이 훗날 회사의 발목을 잡는 요인이 되었다.

대우에서는 대우 국민차라고 대우 조선(대우 자동차가 아님!) 산하의 다른 계열사를 통해, 그 이름도 유명한 '티코'라는 경차를 만들기도 했다. '다마스'와 '라보'라고 경차형 승합차와 트럭도 만들었고 심지어 지금도 종종 굴러다니는 게 보이지만, 역시 티코의 인지도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한때 대우가 쌍용 자동차를 인수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번복되었고, 대우 그룹의 경영 악화로 인해 오히려 자기가 GM으로 다시 인수되었다. 2011년부터는 잘 알다시피 GM대우라는 이름에서 '대우'라는 단어가 아예 빠지고 그냥 '한국GM'이 되었다. 그렇게 자동차 제조사로서 대우라는 브랜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까지도 버스에서는 대우라는 브랜드가 압도 다수의 인지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대우 버스'는 지금의 한국GM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다른 기업이다.

※ 현대

현대 그룹의 창업주이고 일명 '왕 회장'이라고도 불리는 그분이 자동차 정비업에 만족하지 않고 자동차 제조업에까지 손을 뻗침으로써, 1967년부터 현대 자동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공장은 울산과 아산에 있는 걸로 아주 잘 알려져 있고..

물론 현대라고 해서 용 빼는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맨땅에서 자동차를 스스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래서 처음엔 미국 포드 사로부터 기술 협력을 받아 미국 차인 코티나(Ford Cortina)를 국내에서 면허 생산했다. 그러나 포드와는 곧 결별하고 일본 미쓰비시 사와 제휴를 했는데, 현대 차들이 이례적으로 연료 주입구가 대우 차들과는 달리 오른쪽에 아닌 왼쪽에 달려 있는 게 이 때문일 것으로 추정된다.

승용차 '포니'를 빼고서 현대 자동차의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포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 승용차이다. 비록 여전히 일제 부품으로 엔진을 만들었고 설계도 한국인이 아닌 이탈리아의 '쥬지아로'라는 디자이너가 했지만, 어쨌든 현대 자동차는 1976년 이전엔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모양의 자동차를 한국 땅에서 생산해 냈고 수출까지 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HD를 형상화한 현대 자동차의 옛 앰블렘이 참 인상적이다.
당장은 이득이 없는 것 같은 무모한 도전을 통해 경험과 기술이 쌓일 수 있었고, 그것이 오늘날의 현대 자동차를 있게 한 밑거름이 되었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2/09/29 08:27 2012/09/2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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