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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야 맹수가 전멸했고 생태계가 단순하다 보니, 야생 동물 때문에 인간이 골머리를 썩는 게 고라니나 멧돼지 정도에 불과하다. 지리산 반달곰..?? 이건 뭐 등산객에게나 해당될 것이고 실제로 잘 지내는지도 난 잘 모르겠다.

그런데 일본의 북부 홋카이도 지방에서는 호랑이도 아니고 곰에게, 사람이 봉변 당하는 일이 좀 있었던 것 같다. 근현대가 돼서야 본격적으로 개척되면서 인간의 거주지와 기존 동물의 서식지가 충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농작물이나 가축만 털리는 정도가 아니라 사람이 공격 받아서 죽거나 다치고, 심지어 곰에게 잡아먹히기까지 한 건 정말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내 블로그가 전문적인 잡학 위키는 아니니 모든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언급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건들 중 1915년 말에 벌어진 (1)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일본 역사상 단일 맹수에 의해 발생한 가장 끔찍한 재앙이었다. (☞ 링크)

불곰 한 마리가 몇 번 사람들에게 쫓겨나더니 그 다음엔 작정하고 흑화해서 주변 사람들을 몇 차례 공격한 것이다. 그래서 총 6명 + 태아 1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쳤다.
이 곰은 이전에도 살인에 심지어 식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었다. 그래도 사건 현장을 계속해서 집착해서 맴도는 습성 덕분에 엽사에게 금방 발견되어 사살도 됐다.

훗날 이 지역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한 모형과 피해자 위령비를 세웠는데, 흥미롭게도 가해자인 곰에 대해서도 위령비를 만들어 줬다. 곰도 인간의 무분별한 개척 때문에 서식지를 빼앗긴 피해자라는 정황을 참작했기 때문이다.

2005년 4월에 발생한 후쿠치야마 선 전철 탈선 사고를 생각해 보자. 이때도 사고를 낸 서투른 기관사가 같이 사망했지만, 1주기 행사 때는 기관사를 제외한 승객 사망자 106명만 공식적으로 추모했던 게 같이 떠오른다.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의 집단주의 국민 정서상, 가해자를 추모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에는 그 사고는 기관사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지나치게 빡빡한 스케줄과 가혹한 벌칙, 징벌적 똥군기를 강요했던 JR 서일본 조직의 총체적인 문제 때문이라고 법적 판단이 바뀌었다. 그러니 지금 관점에서는 이 사고 역시 기관사도 실드와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나저나 저 때 불곰이 실내에 쳐들어왔을 때, 어떤 남자는 넘어진 자기 부인을 밟고 천장 근처 대들보로 양상군자-_- 마냥 올라가서 곰을 피했던 모양이다. 아이고~~
다행히 남자도 살고 부인도 살았지만.. 그 뒤로 이들 부부 관계는 당연히 완전 파탄 나 버렸다고 한다. 무슨 대놓고 불륜 바람이 아닌 범위에서 가히 최악의 대형 사고이지 않은지?

산케베츠 불곰 사건은 피해 규모가 큰 사건이었고, 그 다음으로 본인이 하나 더,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은 사례는 (2) 1970년 7월 말에 벌어졌던 “후쿠오카 대학 반더포겔(자연인 내지 산악활동) 동아리 불곰 습격 사건”이다. 이건 사건의 진행 과정이 굉장히 처절하고 임팩트가 크다. (☞ 링크)

일본 혼슈의 완전 남서쪽 끝인 후쿠오카 대학에 다니던 혈기왕성한 20살 남짓 남자 대학생들 5명이 홋카이도까지 원정 가서 산맥 횡단 등산을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산 중턱 공터에서 텐트를 치고 자연을 즐기며 한가롭게 쉬기 시작했는데.. 이때 문제의 야생 불곰(암컷)과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 곰은 처음에는 사람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고 텐트 밖에 놓여 있던 배낭들을 뒤적이면서 짐 속의 음식만 털어 가려 했던 것 같다.
허나, 곰알못이던 대학생들이 어설프게 라디오 틀고 금속류를 부딪히고 모닥불을 피우면서 그 곰을 쫓아냈다. 그리고 곰이 보는 앞에서 배낭을 도로 회수했다.

그 곰은 처음에는 순순히 물러가는 듯했지만.. 해가 떨어진 당일 밤 9시쯤 다시 나타나서 텐트의 한쪽 벽면을 앞발로 툭 쳐서 구멍을 내고는 “돌아갔다.”
그리고는 이튿날 새벽 4시 반쯤에 “또” 나타나서 텐트를 잡아당기고 안으로 들어가려 들었다. 결국 이 애들은 텐트를 버리고 반대쪽으로 도망가야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대놓고 사람을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한번 시작된 그 곰의 집착과 찝적거림과 뒤끝은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큰 야생동물의 근처에 있으면 콧김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리거나 느껴지는가 보다. “멧돼지가 쿵쿵 호박이 둥둥” 동화에도 묘사돼 있음..)

이 사람들은 일단 곰으로부터 무사히 도망치고 산에서 아침을 맞이하긴 했다. 이때 짐이고 산 정상이고 다 포기하고 깔끔하게 하산했으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게다가 이때는 다른 대학 산악팀 일행과 마주칠 기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순히 개인 여행 가족 여행이 아니라 동아리의 활동 실적 홍보 경쟁 중이어서 등산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여러 대학생들이 오랫동안 알바 뛰며 돈 모아서 굉장히 고생해서 홋카이도까지 원정 갔으니 말이다.

그들은 다른 곳에 가서 텐트를 수리하고 이젠 상황이 완전히 종료됐다고 생각하고 둘째 날 야영을 시작했는데.. 어제 만났던 곰이 거기까지 또 따라와서는 이번엔 1시간씩이나 텐트 곁에서 죽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사라졌다.

이들은 그제서야 더는 안 되겠다는 걸 느끼고 밤길에 무리해서 하산을 시작했는데.. 어느 땐가 맨 뒤의 멤버가 등골이 오싹해져서 뒤를 돌아보니 이런 제기랄, 그놈의 불곰이 살금살금 쭐래쭐래 따라오고 있었다!

얘들은 혼비백산해서 줄행랑을 쳤지만, 곰에게 직접 쫓기게 된 1명, 그리고 근처의 다른 산악팀이 버리고 떠난 텐트로 홀로 도망친 1명. 총 2명이 대열에서 이탈하여 연락이 끊겼다.
이런 상태가 되니 나머지 3명도 마냥 하산할 수 없어져서 이젠 곰을 피해 근처 험준한 암벽에서 밤을 지새웠다.

셋째 날 아침엔 나머지 2명을 찾다가 포기하고 멘붕 상태에서 진짜 하산을 다시 시작했는데..
해가 떴지만 자욱한 안개 때문에 시야가 불량한 상태에서 이번엔 바로 코앞에서 또 그 곰과 마주쳐 버렸다. 꺄아악~!

1명은 곰에게 쫓기면서 아웃.. 결국 원래 멤버 5명 중 2명만이 근처의 댐 공사장에 간신히 도착해서 구조 요청을 했다.
각개격파 당하면서 곰에게 쫓긴 2명은 말할 것도 없고, 혼자 텐트에 숨어 있던 1명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다. 텐트 안에서 한숨 잠도 자고 이튿날 아침을 맞이하긴 했지만, 사람 냄새를 감지한 곰이 거기까지도 찾아간 것이다.

그는 텐트 안에서 나름 시간대별 일기도 남겼는데.. 곰이 거기 반경 수십 m를 떠날 생각을 안 하고 맴돌고 있어서 밖으로 나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얼마나 무서워서 와들와들 떨었으면, 일기의 끝부분은 글씨체도 완전 날림으로 일그러졌다. JAL123 추락 사고 때 승객이 여권 쪽지에다가 남긴 유언 같은 느낌이다.

그 곰은 대학생 생존자들이 하산한 뒤에도 거기서 계속 얼쩡거리고 있다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엽사에게 사살됐다. 곰의 사체를 부검해 보니 사망자들을 잡아먹지는 않았고 그냥 사지를 분지르고 공격만 한 것이었다. 이 정도면 공포 영화 소재로도 손색이 없어 보이는걸..;; ㅠㅠㅠ

저 대학생들이 새끼곰을 건드린 것도 아니었고, 곰이 배가 심하게 고픈 거나 대놓고 악한 성격인 것도 아니었다. 단지 곰의 습성을 모르는 채로 (1) 곰이 관심을 보이던 물건을 도로 회수해 간 것, (2) 곧바로 하산하지 않은 것, (3) 패닉에 빠져 등을 보이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친 것 같은 실수가 이 정도의 참극을 만들었다.

하다못해 프랑스에서 제보당의 괴수가 날뛰던 시절엔(1765년!!) 어떤 어린애들 여섯 명이 숲속에서 그 괴수와 마주쳤는데, 정말 침착하게 대처를 잘 해서 살아 돌아온 적이 있었던 걸 생각해 보자. 겁 먹고 울고불고 도망치다가 몰살 당한 게 아니라, 다같이 손을 한데 맞잡고 간격을 넓혀서 덩치를 부풀린 뒤 한꺼번에 괴수를 똑바로 째려봤던 것이다. 그러자 놈도 한참을 움찔 하다가 꽁무니를 뺐다~! 저 불곰 사건도 바로 이런 재치와 기지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고 하겠다..;;

맹수를 상대할 때는 기싸움에서 밀리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곰이 한번 집적대기 시작한 타겟은 인간이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 “곰을 만났을 때는 죽은척 하고 있으면 안전하다”가 아니라는 것은 정말 확실한 사실 같다. 등을 보이고 도망쳐서도 안 되고, 납작 엎드려서도 안 되고 참..ㅠㅠㅠ
이런 곰에 비하면 우리나라처럼 겨우 멧돼지 정도는 그냥 양반인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31 08:35 2022/05/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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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라는 건 어째 2차 세계 대전 전범국인 일본과 독일이 잘 만든다고 전통적으로 호평이 자자하다. 도요타, 벤츠, BMW 등..
하지만 세계 최강의 과학기술 선진국인 미국도 이들 만만찮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단지, 땅 넓고 물자가 풍족하고 내수 시장도 크다 보니, 오랫동안 한국 같은 외국의 사정에 맞는 차를 수출형으로 굳이 잘 만들지 않았을 뿐이다. 가령, 미국이 유럽 같은 급의 고효율 디젤 엔진은 그냥 '안' 만든 거지, 못 만든 건 아니라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캐딜락 엘도라도. 이런 큼직한 머슬카가 아메리칸 스타일 자가용의 상징이었다. 1950~60년대엔 저게 얼마나 하이테크 디자인의 최첨단 문명의 이기였을까..??? ㄲㄲ)

가만히 생각해 보니 미국 자동차는.. 제조사 이름과 자동차 브랜드 이름이 많이 헷갈리는 형태인 것 같다. 이는 그 브랜드의 자동차를 만들던 회사를 다른 회사가 인수 합병해서 그렇게 된 것도 있다.
미국의 3대 메이저 자동차 제조사는 GM, 포드, 크라이슬러이다. 나머지 캐딜락, 쉐보레, 링컨, 뷰익 같은 건 브랜드 이름이다.

그런데 이런 자동차 제조사들이 너무 거대해지면서, 시장을 독점하고 동일 업종의 경쟁 기업을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과거에 스탠다드 오일(정유)이라든가, 20세기 말의 마소 IE 웹브라우저 끼워 팔기처럼 말이다. 이런 게 드문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공룡 자동차 제조사, 그리고 어쩌면 공룡 정유 회사들까지 교묘하게 로비를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들 한다.

1.
노면전차를 없애 버렸댄다. 미국은 극소수의 대도시를 제외하면 1950년대 이후부터 대중교통이란 게 없는 나라가 돼 버렸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 작품은 그때 이후로는 더 나올 수 없다.
꼴랑 중학교 졸업하고는 면허를 따야 되고, 마트를 가거나 햄버거 가게 알바 출퇴근을 위해서라도 차가 없으면 안 되는 지경이 됐다. =_=

프리웨이의 중앙 카풀 전용 차로는.. 버스나 승합차 전용도 아니고 꼴랑 2인 이상만 타도 이용 가능하거늘.. 그 막히는 출퇴근 시간대에도 텅 비어 있다. 이런~~!! 전부 그 큰 차에 혼자 타고서 길바닥에다 기름을 뿌리고 있다.

2.
1990년대에 일찍이 친환경 전기차가 개발되고 있던 것도 잘근잘근 없애 버렸댄다. EV1이 대표적인 예다.
그래도 저기는 한국하고는 상황이 다르다 보니, 성능 좋은 유사휘발유가 개발되고 있는 것을 잘근잘근 없애 버린 사례는 없는가 보다. (차량에 악영향, 환경 문제, 세수 확보 애로사항)

3.
사실, 위의 1과 2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식의 근거 부족 음모론에 가깝다. 전기차나 노면전차는 그 시절 그 기술만으로는 대기업 로비가 아니었어도 다른 이유로 인해 어차피 몰락이 어느 정도 예상돼 있기도 했다.
하지만 기성 자동차 제조사가 과거에 '터커 모터스'라는 스타트업을 (사실상) 교묘하게 잘근잘근 밟아 없앤 것은 음모론이 아닌 것 같다.

설립자인 '프레스턴 터커'는 모터 스포츠부터 자동차 정비와 제조까지 정말 뼛속까지 자동차에 미친 덕후, 자동차밖에 모르는 바보 공돌이였다.
그때 기록에 따르면 1948년에 '터커 48 톨피도(어뢰)'라고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는지 기성 자동차들보다 성능과 연비가 훨씬 더 뛰어나고 안전벨트와 브레이크 같은 안전까지 지금 관점에서 10~20년은 시대를 앞섰던 마법 같은 승용차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투자를 더 받아서 이걸 대량생산해서 미친 가격으로 판매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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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도 헤드라이트가 달려 있어서 좌우 핸들을 틀면 불빛의 방향도 바뀌는 거.. 우와 완전 참신한걸..??????
비슷한 시기에 한국에서는 어느 자동차 덕후가 회사 차리고 미군 지프를 조립해서 시발 자동차를 겨우겨우 만들었는데, 천조국에서는 자동차 덕후가 포니 같은 고유 모델 승용차를 뚝딱 만들었다는 걸 생각해 보자..

그랬는데 '터커 48'이 매스컴을 탄 지 얼마 되부터, 은행에서는 장래가 촉망되는 이 회사에 갑자기 대출을 안 해 주기 시작했다. 오히려 빌려 간 사업 자금을 상환하라고 압박했다. 그리고 언론 보도도 싹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이 사람은 버티질 못하고 경제사범 사기꾼으로 몰려서 경찰서와 법원을 드나들게 됐다.
비록 무죄 판결을 받아 명예는 건졌지만, 그는 경제적으로는 완전히 몰락하고 말았다. 원대한 꿈을 다 펴지도 못한 채, 스트레스와 지병으로 인해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대놓고 드러나는 물증은 없지만, 이런 사건의 배후에는 자기들의 나와바리를 위협하는 강력한 라이벌인 터커 모터스를 교묘하게 말려 죽이려는.. 기성 자동차 회사들의 알력이 있었다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진다. '터커 48'은 겨우 수십 대밖에 생산되지 못했으며, 심지어 터커 모터스를 짓밟았던 포드 사에서 설립한 자동차 박물관에도 한 대 전시돼 있다. (☞ 링크)

하긴.. 공돌이의 천국인 천조국에서조차도 라이트 형제가 20세기 초에 비행기를 처음 발명했을 때는 기득권층들로부터 시기 질투와 음해를 왕창 받았다. 당사자들은 불필요한 고생을 잔뜩 해야 했고, 오죽했으면 비행기 양산 공장을 자국이 아닌 외국에 먼저 짓게 됐다. 그 과정에서 제조 기술이 외국으로 알음알음 유출되기까지 한 건 덤..

더 옛날 1700년대엔 미국에서 실용적인 증기선이 처음으로 발명됐다. 이를 만든 존 피치는 뼛속까지 공돌이에 불세출의 기계 천재였으며, 증기선 덕분에 발명가로서 불멸의 이름을 남기게 됐다. 하지만, 이 사람 역시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말년엔 아편 중독으로 인한 자살을 당하고 말았다. 어찌 보면 디젤 엔진 발명자의 최후와 비슷한 최후인 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에 다른 나라가 아니라 그나마 천조국이니까, 혹은 서양이니까 공돌이들이 그 옛날부터 저 정도라도 꿈을 실현했던 것 같다.
생각하는 방식이 뭔가 현실적이고 실용적이어서 개척자 정신· 기업가 정신이란 게 있고 기술자가 존경받았으니까. 그리고 과학기술 자체뿐만 아니라 상업 교류를 하고 경제 제도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비록 걔네들도 하는 짓이 다 선했던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 위대한 물리학자 아이작 뉴턴조차 남해 회사인가, 주식 투자 잘못해서 현재 시가 기준으로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재산을 말아먹은 적이 있었다. 그는 기가 차서 "내가 우주 천체의 운동을 기술하는 법칙도 발견했지만, 빌어먹을 사람의 심리와 돈의 흐름은 도저히 기술이나 예측을 못 하겠다" 라고 디스했다고 전해진다.

서양엔 겨우 1700년경, 조선에서 병자호란 끝나고 영조 탕평책 이러던 시절에 벌써 기업이란 게 있고 저런 경제 제도가 있었다는 게 핵심이다. 최소한 "기술이나 배운 쌍것들 에헴" 선비질을 하지는 않았다.

전에 얘기했던가..?? 조선은.. 상상을 초월하는 미주알고주알 기록덕후 관료제 국가였다.
조선왕조 실록이 나름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고, 수원화성도 지금 실물이야 1도 역사적 가치가 없지만 제작 과정이 너무 상세하게 잘 기록돼 있었던 덕분에 역시 세계 유산으로 등재됐다. 지금 실물도 오리지널과 동급의 가치가 있음이 인정된 것이다.

근데, 그런 나라에서 장 영실(기술), 김 정호(지도) 같은 한 분야 전문가 덕후가 생몰년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냐? 임진왜란 때 도자기 기술자들 잔뜩 유출시킨 건 어떻고..??
이게 관점이 글러먹었다는 거다. 미국처럼 기업들끼리 비열한 싸움이나 담합, 독점이 벌어진 걸 비판하는 단계로 갈 여지조차 없이 그 앞단계에서 막혔다~!!

* 여담

(1) 미국에서는 이미 19세기부터 철강왕 카네기, 석유왕 록펠러 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 우리나라에서 뭔가 기업다운 기업은 해방 후 박통 때 1960년대에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더 옛날 일제 시대에 한국인으로서 기업을 경영한 사람들은.. 참 존경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 일한 회장은 너무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다.

(2) 기업 얘기는 아니다만.. 저 1940년대 말, 터커 자동차가 있던 시절에.. 미국에서는 전쟁이 끝났으니 군대를 대폭 칼질하고 덩치를 줄이게 됐다.
태평양 전쟁 시절 같은 거대한 규모의 해군이 필요하지 않게 됐고, 이제 막 공군다운 공군이라는 게 태동해서 기존 육· 해군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바다에서는 전함 대신 항공모함을 띄워서 함재기끼리 싸우게 하면 되겠고..

이때가 뭔가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기였다. 그래서 군 수뇌부에서는 독립된 군종으로서 해군과 해병대를 통째로 없앨 생각까지 했었는데.. 이건 컴퓨터로 치면 마치 2000년대 중반에 IE6이 고인물 썩은물이 돼서 마소에서 브라우저 팀을 없애고 Windows 팀으로 통합하려는 생각을 했던 것, 2010년대 초반에 Windows 8에서 시작 메뉴를 앲앴던 것과 비슷한 발상인 것 같다.

20세기 중반에 미국에서 대중교통도 전멸하고 설마 해군도 전멸할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았으며, 미군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은 여전히 해군이다. 해군 해체설이 제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던 1950년대엔 대형 항공모함이나 잠수함의 동력원에 원자력이라는 치트키도 등장했다. 그렇게 기술은 발전해 왔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3 08:35 2022/05/2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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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관련 여러 이야기들

1. 천조국 군대의 기상

미군은 무슨 중국이나 북괴처럼 대규모 거위걸음 열병식이나 매스게임, 특수부대 차력쇼를 벌이면서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독립기념일이나 대통령 취임식 때 옛날 군대 코스프레 퍼레이드 정도나 하지..
이건 서울대나 육사가 "취업률 xx%" 이러면서 학교 홍보하고 지하철역 안에다가 광고를 붙이지는 않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이치이다.

지금이야 중공과 러시아가 많이 성장해서 미국 패권을 위협 중이긴 하다. 그러나 미국은 단순 국력 물량이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과 자유 민주주의 인권 이념을 바탕으로 세계를 석권하고 세계 질서를 확립한 나라이다. 저 사회주의 독재 국가--겉으로 법은 자유 민주주의 표방이지만, 여전히 옛날물이 많이 묻어 있는 경우도 포함--들이 미국의 이런 진정한 저력을 흉내 내지는 못할 것이다.

2. 한국과 일본과 미국의 과거

1980년대: 우리나라로서는 5공 시절이요, 일본은 쇼와 말기요,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시절이었다. 이때는 세계적으로 경제가 안정되고 오일 쇼크도 끝나고, 엄청난 호황기였다고 회자된다.
개인용 컴퓨터의 보급, 정보화 시대, 과학 기술에 대한 장밋빛 희망, 우주나 사이보그를 소재로 한 온갖 기발한 SF물들.. 우리나라의 경우 마이카 시대, 일본은 특유의 버블 경제.. 이런 걸 생각해 보자~!

1960년대: 한국은 이때 ‘경부’라는 간선 고속도로 하나를 겨우 간신히 만들었다.
일본은 이때 시속 200km짜리 고속철도 신칸센을 세계 최초로 자체 기술로 개발했다.
미국은 거의 같은 시기에 로켓을 쏴서 인간을 달로 보냈다.;;

(1940년대: 바로 다음에 올라올 글에서 이 시대를 좀 다룰 것이다. ㄲㄲㄲㄲ)

그런데 더 옛날,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전간기이던 1920년대도 이와 비슷하게 세계적으로 좋은 추억이 남겨진 시기였다.
우선 한반도는 3· 1 운동 이후에 문화 통치가 시작됐다. 이때는 그 전의 무단 통치나 그 이후의 민족 말살 통치에 비해서는 훨씬 더 살 만했던 때였다. 항일 독립 운동만 아니면 여러 다양한 사회 활동이 허용되고 온갖 신문물도 들어왔다.

본거지인 일본도 정치판의 분위기가 아직 군국주의로 폭주하기 전이었고 그나마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분위기가 살아 있었다.
하물며 천조국은..?? 라디오 방송과 할리우드 영화, 뉴욕에 초고층 마천루, 포드 T 자동차 마이카.. 전부 얼추 이 시기에 등장했다. 또 국제 연맹도 세계 곳곳에서 마이너한 국가들의 분쟁은 잘 중재하면서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좋은 시절은 대공황과 함께 완전히 끝났으며, 이를 계기로 1930년대부터는 세계는 다시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진다. 국제 연맹은 2차 세계 대전이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정확하게 이 험난한 기간 동안 통치했었다.

3. 미국 남북전쟁 당시의 징집 관련 일화

미국 남북전쟁은 밀덕의 관점에서 보면 최초로 철도를 통한 보급, 후장식 총기와 저격수, 초보적인 단계의 기관총과 철갑선, 잠수함이 등장한 첨단 과학 기술 전쟁이었다. (풍경 사진과 종군기자는 남북전쟁보다 미묘하게 전인 유럽의 크림 전쟁 때 최초로 등장했고..)

일개 내전 주제에 탱크와 비행기만 없는 1차 세계 대전 급으로 시대를 앞섰던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그런데.. 이 남북전쟁은 징집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지는 게 좀 있다. 둘 다 남군과 북군 중 어느 진영의 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어차피 그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1) 전사
나라가 전시 상황이 되니 모병이 아닌 징병제가 시행됐다. 그런데 이때 부유층들은 300달러라는 돈을 내고 다른 사람을 대신 입대시키는 것으로 징병 의무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는 대리 입대자도 어차피 징집 대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럼 어찌 되는 거지? 아무튼..

A라는 어떤 사람이 B라는 다른 사람을 대리 입대시켰는데, 그렇게 참전한 B는 전장에서 그만 전사하고 말았다. 문제는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A에게 징집 영장이 또 날아왔다는 것..
이때 그는 "나는 B라는 사람의 명의로 이미 전사하고 죽은 목숨이다. 이거 뭐 한군두도 아니고, 나는 또 징집되거나 또 국방세 내고 대리인을 내세워야 할 국방의 의무가 없다"라고 항변했다. 이 논리가 인정되어 그는 두 번 다시 징집되지 않았으며, 그게 판례로 정착했다고 한다.

이건 무슨 일사부재리의 원칙처럼 들리는데.. 예수님이 인간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 '대속'이라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기독교 쪽에서 복음 전할 때 종종 인용되는 예화라고 한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겠다만, 출처가 불분명하고 그렇게 막 도덕적으로 본이 될 만한 일화까지는 아닌 것이 아쉽다. 부자들은 돈으로 군대를 다 빠진다고 그 당시에도 원성이 자자했었기 때문이다. 전사자를 예우하는 연금도 당연히 A의 유족이 아니라 B의 유족에게 지급돼야 할 것이다.

(2) 포로
옛날에는 전쟁도 현재보다 명분과 체통과 원칙을 따지면서 훨씬 더 신사적이고 고지식하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
미국 남군과 북군이야 비록 지금은 총 들고 싸우지만 상대방이 같은 나라 같은 언어 같은 기독교 문화권인 사람이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화해해야 할 이웃이었다.

그래서 적군을 포로로 잡았는데 당장 포로를 번거롭게 관리할 여건이 안 되면..
포로를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무장만 해제하고는 풀어 주는 경우가 있었다. 단, 이런 각서를 쓰고 동의를 받게 하고 말이다.

"우리가 사정이 여의찮아서 너를 석방해 주지만 너는 여전히 법적으로 우리 측의 포로이다. 그러니 훗날 포로 교환이 이뤄질 때까지 너는 군사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장교가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이런 절차를 거쳐서 풀려났다. 고국으로 돌아온 그는 전선으로 곧장 복귀하고 전투를 지휘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그는 그 각서를 제시하면서 자기는 정식으로 포로 교환을 하기 전엔 군복무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군에서는 그 정황을 인정하고 그를 진짜로 내버려 뒀다고 한다.

이거 뭐, 감독 없이 시험을 쳐도 아무도 컨닝을 안 하고, 땅에다 금만 그어 놓고는 감옥이라고 해도 죄수가 거기 얌전히 앉아 있을 것 같은 샤방샤방 분위기이다.
저 때는 적이라도 약속을 지키기는 한다는 신뢰가 있으니 이런 '서류 상으로만 포로'가 가능했음이 틀림없다.

이런 분위기와 정반대였던 전쟁은 아무래도 80년 남짓 뒤의 태평양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일본이고 미국이고 모두 상대방을 인간이 아니라 악마 괴물로 취급했다. 극도의 스트레스에다 악이 받친 나머지, 한쪽에서는 적군 포로를 말 그대로 잡아먹었으며(식인).. 다른쪽에서는 적군 시체에서 두개골을 뽑아서 아이템으로 갖고 다니는 Savage 실사판 '인외마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20 19:34 2022/05/20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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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면 다 용서된다

1. 호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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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이었나? 이건 정말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추억의 병맛 광고가 아닐 수 없다.
점 치는 영에게 사로잡힌 소녀(행 16:16)의 후예는 21세기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있는 것 같다.
참고로 저분의 실물은 이렇다고 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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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직장인의 신분을 벗어나 새마을호에서 국철도령을 모시기까지~~" ㄲㄲㄲㄲㄲㄲㄲㄲㄲㄲ
나도 이런 거 해 볼까? 하지만 난 얼굴이 못생겨서 아마 저런 인기를 끌지는 못하지 싶다. ㅠㅠㅠ

2. 얼짱 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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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무속인은 자칭 미녀에 가깝지만, 이 아가씨는 강력 범죄 현상범(정확히는 공범..=_=)으로서는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상당한 미녀였다. 그래서 '얼짱 강도' 신드롬을 일으켰으며, 심지어 이웃 일본의 찌라시에서도 소개됐다. 대략 2004년 초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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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가씨는 자기가 인터넷에서 왕창 뜨고 팬카페까지 만들어진 줄은 꿈에도 몰랐다가 나중에 소식을 듣고는 경악했다.
얼굴이 팔리는 바람에 도피가 더 힘들어졌다. 어디 외출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마스크 쓰고 모자를 눌러 쓰고 다녔다.
하지만 가족에게 연락하는 정황이 경찰에게 포착되어 결국 검거됐다.

그녀는 남친을 잘못 만난 죄로 범죄 전과자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최종 선고는 집행유예가 나왔다. 벌써 20년 가까이 전의 일이니 지금쯤이면 남친과 헤어지고 성형도 하고서 언론 안 타고 평범하게 지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3. 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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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두 사람하고는 처지가 많이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올해 선출된 새 대통령의 영부인이 정말 예쁘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같다. 특히 전임의 영부인하고는 너무 심하게 비교된다. ㄲㄲㄲㄲㄲ

원판이 예쁘면 그냥 평범한 청바지 후드티만 걸쳐도 빛이 나는 것 같다.
이전의 그 아지매는 몇백 몇천 짜리 사치 명품을 걸쳐도 걍 뚱하고 못생겼던데.. ㅋㅋㅋㅋ
뭐, 다른 정치 이력 가지고 헐뜯으면 싸움이 끝도 없으니, 이 글에서는 그냥 깔끔하게 외모 하나만 비교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이상이다.
남자가 머리 길고 치마 입고 이목구비 예쁜 여자에게 끌리는 건 뭐.. 유전자 차원에서 생물학적으로 각인된 본능이다.. =_=;;
심지어 2차 성징이고 나발이고 없는 코흘리개 유치원생이라도 예쁜 여선생을 더 선호한다. 제아무리 이걸 차별이니 불공평이니 프레임 씌워 봐도, 사람에게 존재하는 이런 본질적인 성 역할과 차이를 부정하고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역사적으로 첩보 전략에도 미인계라는 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야 그런 고전적인 수법이 영화 같은 매체를 통해 너무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현업 종사자들은 다 대비를 한다. 그리고 양성평등이니 성희롱 성추행이니 성소수자니 이런 관념도 엄청 강해져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오늘날은 여자 외모가 대놓고 남자 VIP를 미혹시키고 낚고 사기 치는 데 동원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모로 사람 환심을 사는 메리트보다는, 얼굴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잘 각인되고 잡히기 쉬운 단점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엄청난 미녀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델을 하거나 연예계로 가면 더 편하게 돈을 많이 벌 텐데 굳이 이런 첩보 요원이 돼서 고생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하긴, 대한 항공 858편 폭파 공작원이었던 김 현희도 꽤 반들반들한 미인이긴 했다. 하지만 그 공작 과정에서 대놓고 미인계가 쓰인 건 아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07 08:35 2022/05/0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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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사도라 던컨 (1877-1927)

'이사도라 던컨(혹은 덩컨?)'은 그리스 여신 코스프레에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무용 세계를 개척한 전설적인 무용가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발레 일색이던 서양의 기존 무용계에 혁신을 일으켰다고 한다.
뭔가 우리나라 최 승희와 비슷한 위치의 사람인 것 같으나, 시간과 장소를 감안하자면 물론 그 반대의 관계가 맞을 것이다. 이사도라가 최 승희를 닮은 게 아니라, 최 승희가 이사도라를 닮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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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사도라는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돈을 많이 벌었지만, 개인적인 가정사는 기복이 심했으며 몹시 불행했다. 그게 금사빠 기질로 이어졌는지 훗날 러시아-소련 사람인 엄청난 연하의 시인과 결혼(정확히는 재혼)했는데.. 아무리 시인이라고 해도 그렇지, 이거 무슨 남자가 여자보다도 더 유리멘탈 감성파였던 것 같다.
급기야는 남자가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을 겪다가 겨우 30 남짓한 나이에 자살을 해 버렸다.

그녀는 최후를 맞이한 방식도 굉장히 특이했다.
그녀는 그 당시 잘 나가던 경주용 자동차인 '부가티 Type 35'를 자가용으로 굴렸다. 얘는 뚜껑이 없는 2인승 오픈카였다.
하루는 그녀는 차가 움직일 때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간지나게 뒤로 휙 날렸는데.. 그게 뒷바퀴에 말려 들어갔다!

이 때문에 목이 졸렸는지 몸이 통째로 차 밖으로 떨어졌는지.. 어쨌든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인해 50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죽은 방식을 보면 1970년대 이후의 비교적 최근 인물인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1972년이 아니라 1927년에 저런 형태의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게 가능하던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됐을까..???

저건 워낙 어처구니없는 사고인지라, 그녀의 행적과 마지막 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사고사인지 아니면 사고를 가장한 자살인지조차 헷갈릴 지경이라고 한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안녕, 여러분. 전 영광을 향해 갑니다"였다는데.. 이건 정말 영락없이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 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밈처럼 들린다. ㄲㄲㄲㄲㄲㄲ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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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어령 (1933~2022)

이 달 초에 돌아가신 유명인사이다.

  • 1950년대, 20대 나이에 ‘우상의 파괴’라는 명목으로 그 당시 기성 소설가와 시인들을 신랄하게 까는 평론을 씀.
  • 그냥 난해한 싸이코 취급이나 받던 이 상의 작품을 재조명함.
  • ‘갓길’이라는 말을 처음 만듦.
  • 1988년 서울 올림픽 개회식과 폐회식 컨텐츠를 기획함.

‘손에 손 잡고’ 노래의 가사야 김 문환 교수(2018년 작고)가 작사했지만, 거기에도 들어가는 캐치프레이즈인 ‘벽을 넘어서’는 이 어령이 고안했다. (식상한 ‘화합과 전진’ 이런 식의 문구가 아니라)

1990년, 초대 문화부 장관 역임.
문화바탕, 문화돋움 같은.. 우리나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중앙 정부에서 추진해서 개발한 한글 서체가 이 시절에 만들어졌다. (서울남산체/한강체 같은 건 지방 정부임)

다만, 딱 이 시절에 한글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되어 버렸다(1991). 이 어령 장관은 나름 제외를 반대하고 저지하려 ‘노력’은 했다지만, 자기 직위나 손모가지(..)까지 걸고 강하게 노력하지는 않은 듯. 그래서 한글 운동 단체들로부터 흑역사라고 두고두고 비판받고 있다.

2010년대쯤에는 갑자기 기독교에 공개적으로 귀의한 것 때문에 화제를 일으켰다. 장녀가 무려 미국 변호사를 역임하다가 목사가 됐는데.. 병 때문에 먼저 세상을 떠나기도 한 게 유명하다.
그래서 이분은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썼다. 20여 년 전에 핵 물리학자 정 근모 박사가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나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을 썼던 게 생각난다. 진짜 천재이긴 했던 분 같다.

3. 캐리 멀리스 (194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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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PCR -- 종합 효소 연쇄 반응이라는 캐사기급의 DNA 증폭 기술,
더 쉽게 말해 그 코 쑤시는 검사라는 걸 1983년에 최초로 발명한 생물학자이다. UC 버클리 박사(1973) 출신이고.. 이거 발명한 걸로 노벨 상을 받았다(1993, 화학).

전자공학에서는 아주 약한 신호를 깨끗하게 검출해서 증폭하는 게 획기적인 기술일 것이다.
그것처럼 생명공학에서는 검출을 원하는 유전 정보 물질만 원하는 대로 증폭하는 게 획기적인 기술이다.
1950년대에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발견된 뒤, 이 기술 덕분에 분자생물학이라든가 유전공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단, 이 사람은 우한 폐렴의 창궐로 인한 PCR 검사의 보편화를 목격하지 못하고, 1년쯤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사람은 게으른 천재 히피 성향이었는지..? 평생 학계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리즈 시절 이후엔 직업을 수시로 바꾸고, 이혼과 결혼도 여러 번 하고.. 진짜 자유로운 영혼에 충실하게 살았다.
하긴, 저 양반의 모교부터가 196, 70년대에 아주 리버럴한 성향을 자랑하는 곳이긴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기 컴공 쪽은 해커들의 요람이기도 했지 않던가?

압권인 건.. Cetus라는 기업에서 근무하던 중에.. LSD 빨면서 약에 취해 있다가 삘 받아서 PCR을 발명했다는 믿지 못할 일화까지 전해진다. 이건 음모론이나 가짜 뉴스가 아니라 자기 말과 동료들 증언이 일치하는 팩트이다.

LSD는 금단 증세는 타 마약보다 덜하지만, 일단 각성한 동안 나타나는 환각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도대체 뭘 경험하는 걸까??
흔히 말도 안 되는 최적화 기술을 개발한 건 농반진반으로 외계인을 고문했다고 그러고, 심하게 창의적이고 획기적인 아이디어가 나온 건 약 빨고 한 생각이라고 그러는데.. 현실에서 그 '약'의 범주에 그나마 가장 잘 부합하는 건 대마나 필로폰 따위가 아니라 LSD라고 한다.

사실, 그 시절에 저 사람 같은 약쟁이 공돌이· 예술가가 드문 케이스는 아니었다. 심지어 스티브 잡스조차 LSD가 자기 업무 생산성과 창의적인 영감에 직접적인 도움을 줬다고 회고했다. 비틀즈 같은 뮤지션들이야 두 말할 나위도 없고..;;
하지만, 인간들이 창작을 할 때만 약을 한 건 아니었다. 찰스 맨슨 같은 범죄자들이 죄책감 없이 흉악 범죄를 저지를 때도 LSD 빨고 몽롱한 상태에서 했다. (1969년에 여배우 샤론 테이트 등을 죽인 것 포함..) 마약이 괜히 금지되는 게 아니다. 아무튼..

PCR에 대해서 음모론, 불신풍조 낭설들이 나도는 게 있다. 다른 멀쩡한 물질 집어넣어도 개나 소나 양성 나온다고..
마치.. 갓 죽은 동물 시체나 아주 최근에 생긴 물질을 연대 측정(탄소 원소? 방사성?)을 했더니 말도 안 되는 오래된 연대가 나왔다~~~ 이런 말과 비슷하게 들린다. 창조과학 쪽에서 좋아하는 얘기..
얘기 자체가 가짜 뉴스가 아니라면, 실험에 좀 착오가 있었지 싶다. ㅎㅎ

4. 뤽 몽타니에 (1932-2022)

이 사람은 1983년에 파스퇴르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재직하던 중에 HIV, AIDS라고 불리는 그 병의 바이러스 원천을 최초로 정확하게 관측하고 발견해서 2008년에 노벨 상을 받은 위대한 생리학자/의학자이다.

그 전까지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끔찍한 괴질에 대해서 현업 의사들도 아는 게 없으니 극도의 공포에 떨고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이제 인류가 신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는가 보다”, “주로 게이들이 이런 병에 걸린다고? 신의 섭리를 어기다니 천벌을 받았군 이놈!!”... 그러니 20세기에도 무슨 중세 흑사병 시절 같은 원시적인 낭설이 나돌았다. 그러다가 얘도 최소한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다. (아 물론 동성애는 신의 섭리를 어기는 짓이라는 말 자체는 맞다. -_-)

그런데 그는 리즈 시절을 찍은 뒤, 늘그막인 2010년대부터는 행보가 점점 이상해지면서 주류 의학계로부터 외면받기 시작했다.
정확한 근거 없이 "항생제를 오랫동안 복용하면 자폐증을 치료할 수 있다", "DNA가 전자기복사를 방출한다" 등.. 무슨 소리과학자, 물은 해답을 알고 있다 같은 주장을 하기 시작하더니..

그 정점으로 "우한 폐렴은 (HIV를 변조해서) 실험실에서 인위로 만들어진 바이러스이다,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하면 변이 바이러스가 증가한다, (심지어) 부스터샷을 접종하면 HIV에 감염된다" 같은 말까지 하면서 물의를 빚은 것이다.
"뭐 근거가 부족하다고? 나 이래뵈어도 노벨 상 받은 남자야! 날 뭘로 보고??"가 끝이었다. 그러다가 2022년 2월경 사망..

이 사람은 이 어령 전 장관과 출생· 사망 시기가 거의 같은 동시대 사람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위대한 수학자 마이클 아티야(1929-2019)와도 수명이 정확하게 일치한다(생년 몰년이 딱 정확하게 3년 차이).
마이클 아티야는 왕년에 필즈 상에 아벨 상을 받은 천재 괴수였다. 1966년에 우리나라 홍 성대 씨가 20대 후~30대 초의 팔팔한 나이로 정석을 집필해서 떼돈을 벌었다면, 저 아저씨는 1966년에 필즈 상을 받았다. ㄲㄲㄲㄲㄲㄲㄲㄲㄲ

그런데 늘그막에 멘탈이 좀 나갔는지 그는 2018년 가을엔 리만 가설 증명 문제를 풀었다고 공개 기자 회견을 불쑥 열고는 얼렁뚱땅 횡설수설을 늘어놓으며 자폭하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몇 달 뒤에 사망..

수학계에서는 이 사건을 불문에 부치고 노코멘트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늘 같던 거장 대선배님께서 말년에 어쩌다 이렇게 되셨나~~ ㅠㅠㅠㅠㅠ 하루아침에 이렇게 망신 당해서는 절대 안 될 분인데..?? 이놈의 리만 가설이 또 멀쩡하던 사람 한 명을 골로 보냈구나.."

수학 쪽이야.. 리만 가설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도 많고 그게 자기 실생활에 끼치는 영향도 없으니 저렇게 조용히 넘어간다.
하지만 의학자는.. 당장 사람 건강이 걸려 있고 우한 폐렴과 걸린 연구를 하면 그 여파가 어마어마하니, 조금이라도 충격적인 주장이 나오면 온갖 음모론들에 힘이 실리게 된다.

참고로, 본인은 몽타니에 할배 쪽이든, 반대하는 백신 옹호(?) 학계 쪽이든 이 분야를 학술적으로 판단할 지식이나 경험이나 능력은 전혀 없음을 밝힌다.
단지 몽타니에가 단순히 우한 폐렴에 대해서 튀는 주장을 한 것 하나만으로 아싸가 된 게 아니고, 그 전부터 여러 방면에서 이상한 기미가 보이면서 논란을 일으켰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사람이 명철과 분별력이란 게 평생 가지는 못할 수 있는가 보다.

Posted by 사무엘

2022/05/04 08:35 2022/05/0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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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왕자와 황금도끼는 1989년에 처음으로 출시됐고 그 이듬해에 PC용도 나온 유명한 아케이드/액션 게임이다. 비슷한 시기에 출시됐고 본인도 30여 년 전의 초딩 시절에 재미있게 했던 게임이다.

전자는 미국산이지만 후자는 일본산이다.
전자는 뭔가 아크로바틱한 파쿠르 퍼즐 액션에다가 칼싸움이 보조로 가미된 정도이지만, 후자는 지형은 단순하면서 그냥 적들을 다양한 공격 기술로 죽여 없애는 전투 위주이다.

둘 다 굉장히 다양한 플랫폼으로 이식됐으며, 2편 같은 속편도 출시됐다.
그 당시의 흔한 관행이었겠지만, 둘 다 영화에서 리소스를 따 온 장면도 있다. (로빈 후드 칼싸움 / 악당들이 죽는 소리)
오늘은 이 두 게임을 나란히 비교해 보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1. 원작 제작자

(1) 페르시아의 왕자: 잘 알다시피 Jordan Mechner라는 미국 뉴요커이다(1964년생). 어느 엄친아 영화학도가 갑자기 컴퓨터에 꽂혀서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모티브를 따 이런 게임을 혼자 뚝딱 만든 것이다. 그리고 제품의 유통사를 찾다 보니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와 계약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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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주인공의 동작 모션을 자기 남동생한테 연기시킨 뒤, 그걸 촬영해서 한땀 한땀 도트 노가다로 입력했다는 것,
그리고 음악 작곡은 심리학자이던 아버지가 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이다. 그야말로 가족이 게임 개발에 참여한 셈이다.

(2) 황금도끼: SEGA에서 게임 개발자로 정식으로 근무하던 Uchida Makoto (마코토 우치다, 1955년생)라는 일본인이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대여섯 명 남짓한 팀을 이끌며 개발한 게임이다. 세계관이 '코난 더 바바리안'(1982)이라는 영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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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현재까지도 SEGA의 중역으로 근무하고 있는 모양이다. 닛산 자동차의 CEO라 하는 1966년생 동명이인과 혼동하지 말 것.

2. 원작의 개발 플랫폼

(1) 페르시아의 왕자: 잘 알다시피 8비트 Apple II였다. 열악한 8비트 컴터에서 뭘 바라겠는가..? 화면 해상도는 320*200이 채 되지 않았고, 색깔도 끽해야 최대 4색이었다. 1980년대 말이라는 당대 기준으로도 하드웨어 환경이 후져 있었다.
그러니 얘는 원판이 아니라 후대의 이식작에서 그래픽이 훨씬 더 개선되면서 인기를 끌게 되었다.

(2) 황금도끼: 페르시아의 왕자는 태생이 PC인 반면, 황금도끼는 태생이 오락실 오락기였다. SEGA System 16이라는 1985년작 오락기 전용 16비트 CPU를 기준으로 개발됐다.
8비트 대비 16비트라는 우월한 체급에다, 아마추어 프로그래머가 아닌 전문 개발자가 만들었지, 오락기 CPU는 PC보다 그래픽도 더 특화돼 있다 보니 황금도끼는 모든 여건이 페르시아..를 능가했다. 원작부터가 PC의 VGA를 능가하는 수백~수천 컬러 그래픽을 지원했다. 이식작들은 원판에 비하면 그래픽이 퇴보하면 퇴보했지, 더 나아진 경우는 별로 없었다.

페르시아의 왕자를 오락실에서 동전 넣고 플레이 했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ㅎㅎ
그게 오락실용이었으면 마릿수 잔기와 컨티뉴가 존재해서 죽을 때마다 press key to continue가 아니라 insert coin to continue가 됐을 것이고.. 애초에 "1시간 동안 무한대 잔기" 같은 시스템 자체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동전을 넣을 때마다 시간이 10분 더 추가된다거나..;;

3. PC (MS-DOS) 버전 포팅

(1) 페르시아의 왕자: Lance Groody라는 미국인 프로그래머가 작업했다. PC의 화려한 256색 VGA 그래픽은 게임의 가치를 한층 끌어올려 줬다.
타 플랫폼 중에서 SNES용은 게임 스케일이 리메이크· 마개조에 가깝게 커졌으며.. 매킨토시용은 색깔뿐만 아니라 그래픽의 해상도도 크게 향상되었다.

(2) 황금도끼: John & Ken Sanderson라는 미국인 친형제 프로그래머 2인이 작업했다. 하지만 그래픽이 단조로워진 건 그렇다 쳐도, 각종 공격 동작도 많이 삭제되고 단순화되어서 오락실 원판에 비해서 게임성과 재미가 많이 깎였다.
얘는 오락기 지향적이어서 그런지, 매킨토시용으로 포팅되지는 않았다.

한편, 저 사람들 모두 1980년대 8비트 어셈블리어 시절부터 현재의 모바일 시대에 이르기까지 3~40년째 컴터 프로그래머로 쌩쌩히 현역을 뛰고 있는 걸출한 엔지니어인 것 같다. 검색해서 사진을 보니 서로 좀 비슷하게 생겼다..;;

도스용 페르시아의 왕자는 실행 파일이 C 컴파일러로 만들어진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황금도끼는 내 기억이 맞다면 딱히 그런 정황이 없고 여전히 근성의 어셈블리어가 사용된 것 같다.
저 때는 16비트 컴만 해도 엄청 비싼 고급 기종이고 C 컴파일러조차 사치였으며, 메모리를 겨우 몇천~몇만 바이트를 할당하는 것에도 실패할 가능성을 따지면서 전전긍긍해야 했던 시절임을 기억하도록 하자.;;

4. 후속작

(1) 페르시아의 왕자: 2편이 나왔다. 원판 특유의 그 2D 방 기반의 진행 시스템은 2편이 마지막이었으며, 그 뒤부터는 3D로 바뀐 후속편이 더 만들어져 나왔다.

(2) 황금도끼: 2편과 3편이 나오고 3D 리메이크 및 대전 액션 에디션(duel)도 나왔다. 하지만 후속작들은 원판에 비해 그리 좋은 평을 못 들었다. 얘들은 PC와도 연을 끊었기 때문에 컴터로 즐기려면 MAME를 돌리는 수밖에 없다.

5. 여담: 페르시아의 왕자 제작자의 주변 인물들

조던 메크너가 이 게임을 만들던 당시에 그와 오랫동안 동업하면서 그에게 많은 영감을 준 지인 중 하나로는 Tomi Pierce (1953~2010)라는 일본계 미국인도 있었다. 여자이고, 조던 메크너보다 나이도 띠동갑에 가깝게 더 많았던 사람인데..
일례로, 이 누님이 그 당시 개발 중이던 페르시아의 왕자를 찬찬히 뜯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게임은 퍼즐만 있어서는 안 될 거 같아. 더 재미있어지려면 전투가 꼭 있어야겠다. 네가 예전에 만들었던 가라테카처럼 말이야.”
“헐?? 난 그 정도로 폭력적인 건 좀.. 게다가 이제 그런 기능을 집어넣기에는 애플2에 메모리도 얼마 안 남았는걸..”
“아 됐고, 꼭 명심해~ combat, combat, combat!! ^^

조던 메크너의 회고에 따르면, 토미 누님은 그야말로 combat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얼굴 마주칠 때마다 전투를 꼭 넣으라고 압박을 넣었다고 한다. (☞ 관련 동영상 링크 10분 45초 ~ 11분 사이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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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칼싸움은 원래 계획에 없다가 뒤늦게 추가된 것이었다. 이때는 동생도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션 촬영을 할 수 없었던지라, 로빈 후드 영화에 나오는 칼싸움 장면을 따서 스프라이트를 만들었다.
이런 일화가 있었고, 나중에 1996년경인가, 조던 메크너가 Last Express라는 대작 게임을 만들 때는 아예 저 누님과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그랬는데 Tomi Pierce 누님은 지병이 있었는지 어쨌는지.. 2010년, 50대 중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던 메크너의 개인 블로그를 보니.. 그 당시에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억누르며 정말 엄청난 장문의 추모글을 올렸었다. (☞ 링크)

고인은 그야말로 어린 시절부터 천재 엄친딸이었고 SAT 만점에 아이비리그 자유이용권을 끊었었는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느라 자유분방하게 살았고, 비록 문과 출신이지만 컴퓨터 게임 사업에 눈독을 들였고 어쩌구저쩌구..
투병 중에도 늘 쾌활하고 긍정적이고 유머와 위트와 센스가 넘쳤고, 나도 살아 생전에 이분과 더 오래 있으면서 지혜를 나눠 받지 못해서 아쉽다고.. 구구절절 애도의 글을 써 놨더라.

게다가 더 찾아보니 Tomi Pierce는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의 창립자인 더글러스 칼스턴(Douglas C. Carlston 1947~)이라는 사람과 결혼까지 한 사람이었다.

더글러스는 하버드 학부 출신에 모교의 로스쿨도 졸업한 수재였다. 빌 게이츠는 하버드 중퇴이지만 저 사람은 하버드 졸업생.. 그리고 조던 메크너는 예일대 졸업생..ㄷㄷㄷㄷ
그랬는데 컴퓨터라는 기계에 꽂혀서 안정된 진로를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고.. 혼자만 한 게 아니라 자기 남동생 Gary Carlston 및 여동생까지 끌어들여서 삼남매가 나란히 동업을 했다. 그래서 회사 이름도 band of brothers을 살짝 바꿔서 broderbund라고 지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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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런 식으로 연결되는구나.
참고로 Tomi Pierce의 여동생은 Naomi Pierce (1954~)인데.. 이 사람은 하버드 대학교의 동물학과 교수가 돼 있다.
우리나라의 옛날 석 주명 박사처럼 나비 연구 쪽으로 세계구급 전문가라고 한다.
그리고 Tomi건 Naomi건 저분들은 딱 정확하게 본인의 부모님 연배이다.. ㅎㅎ

이렇게 Tomi가 세상을 떠난 뒤, 조던 메크너는 2011인가 2012년쯤에 페르시아의 왕자 애플 2 소스를 공개했었다. 휴~
그 반면, 황금도끼는 개인이 아닌 상업용 게임 개발사의 프로젝트로 처음부터 진행돼서 그런지.. 이런 정도의 재미있는 개발 에피소드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소스가 공개된 적도 물론 없었다. 아케이드 원판의 롬 파일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할 듯..

그래도 페르시아의 왕자 게임을 만든 조던 메크너의 동생 데이비드 메크너.. 황금도끼의 도스판을 이식한 존과 켄 샌더슨.. 그리고 브로더번드 소프트웨어를 창립한 더글러스와 개리 칼스턴.
형제지간인 사람이 이 글에서 세 쌍이나 언급된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

Posted by 사무엘

2022/04/21 08:35 2022/04/2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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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킬도저 사건

세상에서 벌어지는 범죄들의 동기를 살펴보면 그냥 돈 때문에, 혹은 주변 누군가가 미워서, 그냥 나쁜짓 하는 것에 쾌락을 느끼게 돼서, 세상 살기 싫고 다 같이 죽여 버리고 동귀어진하고 싶어서 등 다양하다.
그런데 드물게 공권력에 의해 부당· 불공평한 침해를 당한 걸 받아들이지 못해서 화풀이하는 유형도 있다. 각종 행정 처분이라든가, 민사 재판에서의 패소 말이다. 물론 실제로는 부당한 침해가 아닌 자업자득일 뿐인데 당사자만 망상에 빠져 혼자 잘못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난 2008년 2월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숭례문 방화 사건을 기억하시는가? 어떤 정신 이상한 60대 후반의 노인네가 토지 보상 비용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짓이었다. 보상비가 너무 저렴해서 억울하다고 청와대에 민원을 넣고 언론에다 제보도 해 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여기에 앙심을 품고 2006년엔 창경궁에다 불을 지르다 걸려서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랬는데 집행유예 기간 중에 그 다음으로는 숭례문까지 불지르는 대형 사고를 쳤다.

5년 전, 노 무현 대통령의 취임 직전에는 어느 늙은 미치광이 때문에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벌어지더니, 공교롭게도 딱 5년 뒤에 이 명박 대통령의 취임 직전에는 저런 화재가 벌어진 것이다. 숭례문 방화범은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2012년 9월에는 진주시에서 주차 단속(... 설마 겨우 이것 때문..??)에 앙심을 품은 어느 40대 중장비 기사가 술 한 잔 거하게 마신 뒤, 포크레인을 몰고 파출소로 난입해서 거의 40분 가까이 난동을 부렸다. 자기 중장비로 건물 외벽과 주차장, 가로수, 가로등, 버스 정류장 등을 부쉈으며, 집게로 순찰차를 들었다가 지구대 입구로 내던지며 찌그러뜨렸다. 난동은 가해자가 경찰이 발사한 권총 실탄을 허벅지에 맞고 제압당한 뒤에야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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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이미 주폭 등의 전과 3범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인해 특수공무집행방해 혐의로 기소됐고, 징역 3년에다 6900만 원이 넘는 물피 배상을 청구받게 됐다. 굴삭기 몰고 난동이라니.. 이건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꽤 엽기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천조국은 이런 식의 분풀이 범죄도 스케일이 반도를 아득히 능가한다. 2004년 6월, 콜로라도 주에서는 일명 '킬도저' 사건이란 게 벌어졌다.

이 사건의 가해자는 자기 가게 인근에 입주할 예정인 시멘트 공장 때문에 자기 가게로 진입하는 경로가 막히고 자기 생계가 어려움에 처하게 된다고 공장장과 시청에게 여러 번 탄원 청원을 넣었다. 뭐 이런 형태의 분쟁 자체는 세계적으로 드문 게 아니다. 그런데 그 요청은 석연찮은 이유로 인해 줄곧 묵살됐으며, 이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자기 사유지에서 다른 사소한 법을 어긴 게 드러나서 과태료를 먹었다.

이 사람도 다 잘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포크레인 난동꾼보다는 빡치는 사유가 훨씬 더 정당했다.
수 년 간 노력했던 합법적이고 평화로운 방법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그는 개인의 권리가 국가에 의해 부당하게 침해당한 것에 앙심을 품게 됐다. 그렇잖아도 처자식 없는 미혼에다 부모님도 돌아가신 홀몸이다 보니, 오늘만 살고 더 잃을 게 없는 복수귀로 완전히 돌변해 버렸다.

그는 전재산을 털어 불도저를 한 대 구입하고는 불법 개조(?)를 시행했다. 오랜 시간을 들여 차체에다 총알을 방어하는 두꺼운 철판· 콘크리트 장갑을 둘렀다. 유리창 대신 자그마한 비디오 카메라를 달았으며, 카메라 렌즈 주변도 강화 투명 플라스틱을 씌워서 보호했다. 이 애마의 이름은 졸지에 불도저에서 킬도저(!!)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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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그는 2004년 6월 4일에 킬도저를 몰고 나가서 시멘트 공장 사장, 시청, 경찰서 서장, 판사 등 원한 관계인 사람들의 집을 들이받고 밀어 버렸다. 지방 경찰과 SWAT 특공대가 출동했지만 소총이나 수류탄 수준의 개인 화기로는 킬도저를 도저히 제압할 수 없었다. 난동은 거의 2시간이나 계속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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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은 우리나라 포크레인 난동꾼처럼 술 거하게 마시고 우발적으로 깽판 친 게 아니었다. 양덕후 공돌이 기질을 발휘하여 오랫동안 차근차근 진지하게 복수의 칼을 갈다가.. 훨씬 더 대규모로 사고를 친 것이었다.

하긴, 건설기계 중에서는 포크레인과 불도저가 무한궤도도 달려 있고 탱크와 가장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긴 하다. 전땅크 할배 같은 사람이 이런 걸 타고 다닌다면 어울릴 것 같다.. =_=;;
한편으로 기계 대신 대형 동물에다 비유하자면.. 1994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폭발해서 결국 사람을 죽이고 난동을 부리다가 사살된 코끼리 '타이크' 같은 생각도 든다.

물론 킬도저도 천하무적 만능은 아니었기 때문에 나중엔 반격을 받아서 라디에이터가 망가졌다. 냉각수가 증발해서 증기 기관차마냥 김이 모락모락 새어 나왔으며, 엔진도 방열이 안 되어 과열되기 시작했다. 그래도 킬도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깽판을 쳤다.
나중에는 어쩌다 삐끗해서 이동 능력을 상실하고 무장 경찰들에 포위되고 말았는데.. 그러자 킬도저를 운전하던 가해자 아재는 차내에서 권총 자살로 깨끗이 50대 중반의 인생을 마감했다.

킬도저는 한번 탑승하고 무장한 뒤에는 입구가 완전히 밀봉돼 버리는지라, 안에서 문을 열고 내릴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한다. 무슨 일본 카미카제도 아니고.. ㄷㄷㄷ
경찰이 떡장갑을 절단하고 가해자 시신을 꺼내는 데는 2시간도 아니고 무려 12시간이나 걸렸다고 전해진다.

이 난동 때문에 10여 채가 넘는 건물이 파괴되면서 700만 달러에 달하는 재산 피해가 났다. 하지만 이 사람은 아무 친지 없이, 재산도 킬도저를 제조하느라 대부분 탕진한 빈털터리 상태로 죽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해자나 가해자 유족을 족쳐서 피해 배상금을 뜯어낼 수도 없었다. 700만 달러이면 아까 그 7천여만 원의 거의 100배에 달하는 규모이지 않은가? -_-;;

그래도 이 사람은 완전히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는지, 원한이 없는 주변 주민들에게는 이 날 멀리 대피하라고 언질을 줬다. 덕분에 이 사건은 엄청난 피해 규모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인명 피해는 전무했다.
즉, 말만 '킬도저'이지 이 기계가 실제로 킬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이게 여느 총기 난사 사건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하지만 킬도저는 누군가에 의해 또 조립되어 사고를 치지 못하게 잘게 분할 해체되어 고철로 매각됐다.

이렇게 싸제 장갑차까지 만들어서 난동을 부리는 건 천조국 스케일이니까 가능한 것 같다. 그 경제력에다 그 개인주의 의식 덕분에 말이다. 하긴, 천조국은 옛날에 자기들끼리의 내전인 남북전쟁을 벌이던 시절부터 싸우는 스타일과 방식이 다른 나라들보다 앞서 있었다. (1860년대에 이미 철도에 저격수에 초보적인 잠수함까지 등장했을 정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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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이성적인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다" ㄷㄷㄷㄷ
이건 윤 봉길 의사, 그리고 나치 독일 시절에 히틀러 암살을 추진했던 그 상이 군인도 거의 똑같은 말을 했지 싶은데.

북한에서는 옛날에 이 웅평 씨가 바닷가에 떠내려 온 남조선 라면 봉지에 쓰여 있는 "유통 과정에서 변질된 제품은 구입처에서 무료로 교환해 드립니다" 이런 너무 당연한 권리 안내 문구만 보고도 큰 현타를 경험하고 탈북을 결심하게 됐다지 않는가..??
천조국은 그런 식으로 개인의 권익에 대한 관념, 그리고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같은 의식이 더욱 투철한 것 같다.

그러니 신념에 따라 저지른 범죄는 다른 범죄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물론 무식 멍청한 사람이 맹목적인 신념을 갖게 되면 엄청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지만 말이다.
저 사람은 신념에 따라 장갑 달린 불도저를 몰았지만.. 반대로 신념에 따라 불도저를 가로막고 서서 시위를 벌이다가 불도저에 치여 죽은 사람도 있었다. 2003년 3월, '레이첼 코리'라는 가녀린 인권 운동가.;;  2004년 기준으로는 얼마 되지도 않은 가까운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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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런 게 아니라 그저 "마스크 써라", "담배 피우지 마라" 이런 말 듣고 자기가 무시 당한다고 생각해서 남의 가게를 찾아가서 해코지 하고 멀쩡한 직원에게 행패 부리는 건.. 신념하고는 1도 관계 없으며 그냥 분노 조절 장애에 막돼먹은 짓일 뿐일 것이다.
킬도저 사건 하나 갖고도 인생사에 대해서 많은 걸 생각하게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22/04/12 08:35 2022/04/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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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블로그에 이제 슬슬 호박/농사 관련 카테고리를 추가해야 되나 고민된다. ㄲㄲㄲㄲㄲㄲㄲ

1. 실내에서 수확한 애호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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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약 8.5cm, 무게 260g짜리 단호박. 더 커지는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제일 먼저 땄다. 밖에서 구입한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쑬 때 같이 넣어서 먹었다. 단단하게 아주 잘 익었고 속에 씨도 많이 들어있었고 고구마 같은 맛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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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파릇파릇한 일반 호박의 풋호박/애호박이다. 껍질째 채썰어서 국수 고명을 만들어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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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1kg가량의 무게에 길이도 약 15cm에 도달한 약간 큰놈이다.
과육은 풋호박이지만 껍질은 이제 질겨서 먹기가 난감하고, 속은 제법 누렇게 늙은 호박처럼 숙성이 진행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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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위의 파릇파릇한 놈보다는 좀 더 삭았지만, 아래의 것보다는 그 정도가 덜한 애호박이다.;; 과육이 많고 탐스러워 보인다.
호박 열매의 내부 인테리어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런 식으로 바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호박은 속 중심부를 전부 다 파내 버리고 겉의 얕은 부분만 먹는데 어떻게 먹을 게 이렇게 많이 나오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하지만 부피는 길이의 3제곱임을 생각하면 좀 납득이 된다.

호박 한 덩이쯤이야 애건 늙은이건 단돈 몇천 원이면 바로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몇 달간 직접 심고 키워서 호박을 얻어 보니, 사기만 해서는 경험할 수 없는 큰 정신적 만족과 감화, 교훈(!!!)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
내가 심고 암· 수술 수분도 하며 "실내에서 키운 호박"에서 드디어 열매와 다음 세대 씨가 나와서 몹시 기쁘다.

2. 주변에서 본 호박 재배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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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지난 3월 말쯤에 집 근처 한적한 길가에서 본 풍경이다.
도로의 옆에 인도가 있고, 그 옆엔 가파른 비탈과 함께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 너머는 놀고 있는 듯한 사유지 공터.
그런데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담벼락 아래에다가 일정 간격으로 뭔가를 심었다. 그리고는 보온을 위해 비닐까지 씌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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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호박이려나?
이 장소의 작년과 재작년치 네이버 지도 로드뷰를 보니, 호박이 맞는 듯했다~! 땅 주인이 매년 이렇게 호박을 심은 것 같다.

서울 시내에서 이런 광경을 보니 정말 훈훈하고 흐뭇하다.
눈에 잘 띄지 않고 접근하기도 어려워서 몰래 뭔가를 심기에는 아주 적합해 보이더라~

자라는 식물 위에다 비닐을 씌우고 며칠 지나 보면, 식물의 증산작용이란 게 어떤 건지를 확연히 알 수 있다. 비닐 표면이 물기로 흥건히 젖는다.
저 비닐도 너무 뿌얘서 안에 무엇이 있는지 가까이에서도 전혀 알 수 없었다.

3. 식용 호박과 전시 진열 전용 호박

호박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열매를 맺을 뿐만 아니라, 같은 종 내부에서 열매의 모양과 색깔과 크기 바리에이션도 가장 다양한 정말 흥미로운 식물이라고 한다. (☞ 관련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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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부 같은 호박이라니 믿어지지 않는다.;; 늙은 호박, 애호박, 단호박이 전부가 절대 아니군..)

이 때문에 미국에서 호박은 먹는 게 아니라 비주얼만 감상하려고 장식· 전시용으로도 엄청나게 많이 재배된다고 한다.
일례로, 미국에서 pumpkin이라고 하면 주황을 넘어 거의 다홍색에 가까운 뻘건색에 주름 없이 동글동글한 그 특유의 호박이 가장 먼저 연상된다. 한국에서는 거의 구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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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호박 역시 식용이 아니며, 그냥 할로윈 재꼴랜턴 만드는 용도이다. 오로지 외형에만 최적화 품종개량됐기 때문에 쪼개 보면 과육은 그냥 멀겋고 맛이나 영양은 하나도 없댄다.
미국에서는 식용이 아닌 이런 “빛 좋은 개살구” 잉여 호박도 수요가 많기 때문에 매년 정말 겁나게 많이 생산된다고 한다. 하긴, 사격 과녁으로도 멀쩡한 수박을 부수지 말고, 어차피 식용이 아닌 이런 호박을 쓰면 될 것 같다.

반대로 죽이나 통조림을 만드는 식용 호박으로는 미국에서도 역시 쭈글쭈글하고 살색에 가까운 동양식 클래식 늙은 호박이 쓰인다. 영화에서 쓰이는 깨지는 유리창/유리병이랑 현실의 유리창/유리병이 동일한 재질이 절대 아닌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또한, F1 경주용 자동차를 정작 일반 도로에서 자가용으로는 거의 굴릴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4. 호박의 성장 동영상

역시 유튜브에 이런 게 없을 리가 없다. 호박이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가 생기는 과정을 거의 10만 배 이상의 속도로 초고속 재생한 영상 말이다. 3개월 분량의 변화를 1분으로 축약하려면 비율이 거의 저 정도가 된다. 감상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pumpkin time lapse라고 검색하면 된다.

  • 요건 호박 덩굴 하나를 굉장히 섬세하게 잘 관찰했다. 이 상태로 열매가 맺히고 자라는 모습까지 같이 나왔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건 없는 게 아쉽다.
  • 요건 야외에서 해가 떴다 지고 그림자의 방향이 달라지는 것까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열매가 부푸는 게 무슨 고무 풍선이 부푸는 것 같다.
  • 요건 호박밭과 특정 호박 개체를 번갈아가면서 다룬다. 단호박 열매가 부푸는 모습도 잠깐 나온다.
  • 요것도 한 덩굴 위주로 실내 촬영을 깔끔하게 잘 했는데.. 역시 열매가 자라는 모습이 없는 게 아쉽다.
  • 요건 야외 화단을 오랫동안 CCTV로 촬영한 것 같다. 덩굴이 급격히 불어나는 모습, 열매가 맺혀서 커지는 모습도 나오긴 하지만 특정 개체 클로즈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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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라는 속담은 호박씨를 심는 게 아니라 먹는 걸 뜻한다더라. ㄲㄲㄲㄲ
  • 호박 줄기의 일부 구간을 흙에 도로 파묻으면 거기서 뿌리가 돋는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인터넷 뒤지다가 처음 들었다. 오~ 그렇게 하면 물· 영양을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되긴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2/04/09 08:35 2022/04/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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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군 철수와 피난

작년 8월 여름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고, 나라 전체가 탈레반 집단에게 점령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를 두고 많은 사람들이 50여 년 전, 남베트남이 망할 때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저 나라는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해방된 뒤에도 역사가 참 파란만장했다. 한때는 여기에 웬 소련 공산당 빨갱이들이 들어와서 1980년 무렵엔 전쟁이 벌어졌었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등의 자유 진영에서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대거 보이콧 했던 이유가 이 전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나중엔 여기는 이슬람 꼴통들 천지로 전락했다.
1970년대에 나라가 잘 살고 여성도 자유로운 복장으로 길거리를 활보했는데, 2010년대가 되니 옛날에 건물이 있던 곳은 폐허가 되고 여성은 부르카인지 히잡인지를 뒤집어쓴 답답한 복장으로 바뀌어서 혼자 함부로 길거리를 다니지도 못하게 됐다. 둘을 비교한 사진을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이런 걸 생각하면.. 약소국 신생 독립국들이 2차 대전 이후로 무작정 강대국으로부터 해방만 되는 게 장땡이 아니었겠다 싶다. 그럼 이제 식민지 착취나 인종 차별 같은 건 없겠지만, 그 뒤로도 내전이 벌어져서 동족끼리 지지고 볶고 싸우고, 식민 통치보다 더 악랄한 싸이코 폭군이 등장해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가 태반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당장 이북이 저 지경이 돼 있다. 그 반면 우리나라의 건국과 역사 흐름은 감사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제아무리 천하의 미국 천조국이 쬐끄만 자유 진영 국가를 지원하고 도와준다 해도.. 그 지원 대상 국가가 도를 넘게 부패해 있고 자기들 스스로 자기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사가 없다면 아무 소용 없다. 무기를 지원해 봤자 그 무기가 빼돌려지거나 심지어 적에게 넘어간다면 미국이라도 미쳤다고 그 나라를 도와주겠는가.

이 패턴은 우리나라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6 25의 극초반에는 군기가 잔뜩 빠져서 허겁지겁 후퇴만 하는 오합지졸 국군을 보고는 미국의 반응은 “이 자식들 노답~~”이었다. 후퇴 금지 즉결처분이라든가 제주도 망명 정부 계획이 최후의 수단 차원에서 괜히 나왔던 게 아니었다.

그랬는데 서울 한강 이남에서는 어느 무명 용사가 “저는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이 자리를 절대 뜨지 않고 지킬 것입니다. 부디 탄약을 더 주십시오”라는 명대사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켰다. 다음으로 낙동강 전선에서는 무려 사단장이라는 백 선엽 장군이 야전에서 직접 “나를 따르라~! 내가 후퇴하면 너희들이 날 쏴 죽여도 좋다” 이런 모습을 보였으니 미국도 다시 적극적으로 한국을 도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고, 얘기가 또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아프가니스탄 얘기로 돌아오면..
알고 보니 저 나라는 영해라는 게 없는 내륙국이더라. 어쩐지 그래서 탈출하는 사람들이 배가 아니라 수송기를 타려고 난리를 쳤던 것이었다.

그런데 비행기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박보다 수송 능력이 훨씬 부족하다.
그런 데다, 비행기는 타 교통수단과 달리 외벽 같은 데에 껴서/붙어서/몰래 짱박혀서 탑승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이런 조건은 피난민에게는 굉장한 악재이다. 그래서 어디 못사는 나라에서는 어떻게 몰래 탔는지 “여객기의 랜딩기어 수납 공간에 어느 밀입국자가 숨진 채 발견” 이런 사건이 보도될 때가 있다.

그런데 하물며 비행기의 외벽에 끼어 탔다가 비행 중에 떨어져서 죽는 건.. 정말 희대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9 11 테러 때 창 밖으로 뛰어내린 희생자 이후로 거의 20년 만에 처음 봤다.

2. 아프가니스탄에서의 미국 화물기 추락 사고

지금 저 동네의 정치 시국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일이긴 하지만..
9년 전, 2013년 4월에는 무거운 미군 장갑차를 싣고 아프가니스탄 소재의 미 공군 기지를 이륙했던 보잉 747-400 개조 화물기가 갑자기 추락하는 대형 사고가 났었다. (내셔널 항공 102편 추락 사고) 원인은 화물 적재 불량이었다. (☞ 사고 영상)

육상 교통수단은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가다가 짐이 떨어지는 바람에 “주변 차”들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러나 비행기나 선박은 엄청 무거운 짐을 제대로 묶지 않으면 비행/항해 중에 짐이 한쪽으로 쏠리고 기울어져서 자기가 추락이나 침몰 같은 사고를 당할 수 있다.

저 사고의 경우, 비행기가 이륙해서 기수가 살짝 위로 들렸을 때.. 화물칸 장갑차의 결박이 풀려 버렸다.
15톤이 넘는 무거운 장갑차는 뒤로 굴러가서 벌크헤드를 쳐 버렸고, 이 때문에 비행기의 미익을 조종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무게중심이 기체의 뒤쪽으로 급격히 쏠리면서 기체의 받음각이 치솟고, 이로 인한 항력도 엔진의 출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올라갔다.
이 때문에 그 화물기는 이륙한 지 얼마 되지도 못해서 실속에 빠진 채 지상으로 힘없이 추락했다. 승무원 7인 전원 사망.

추락하지 않았더라도 조종을 못 하니 1985년의 JAL123편 같은 꼴 나서 언젠가는 자세가 어긋나고 추락했지 싶다.
에.. 자동차에다 비유하자면 몇십 톤짜리 강철 코일을 실은 트레일러가 겁도 없이 교차로에서 고속 급선회를 하다가 원심력을 이기지 못하고 강철 코일 따라 차량이 통째로 옆으로 뒤집힌(전도) 걸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자동차는 그냥 뒤집히는 걸로 끝나지만, 비행기는 양력을 잃고 추락한 것이다.
이제 앞으로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 군용기 또는 미군에서 외주 준 민항기가 뜰 일은 없어지는 건가..?? 문득 저 사고 생각이 났다.

3. 전투기의 호위

지난 2018년에는 6· 25 사변 장진호 전투 현장에서 발견된 국군 전사자들 유해를 하와이에까지 가져가서 신원 확인 후, 다시 우리나라로 송환한 일이 있었다.
유해를 실은 수송기가 우리나라 영공에 진입하자 우리나라에서는 그에 맞춰 전투기들을 무슨 보디가드처럼 출격시켜 수송기의 양쪽을 엄호했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수송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이렇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먼 길 거쳐 오시느라 대단히 수고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대한민국 공군이 안전하게 호위하겠습니다.” (☞ 영상)

이게 영화나 드라마의 대사가 아니라 현실이었다니..

태양의 후예에서 “성공한 인질 구출 작전에 무슨 책임을 지겠다는 말씀입니까? 정치와 외교는 제 책임입니다. 우리 국민을 무사히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사처럼 사이다이고..
현충원에 있는 할배 묘지에 새겨져 있는 헌시 “민족의 독립을 되찾아 우리를 나라 있는 백성 되게 하시고”처럼 감동적이다. 그리고 2013년 레카 시절 국군의 날 기념식 영상처럼 뭉클하다.

지난 8월에 모종의 계기로 홍 범도의 유해가 카자흐스탄에서 우리나라로 돌아올 때에도 전투기들이 똑같이 수송기를 호위했다. 이때는 3년 전에는 안 했던 섬광탄까지 폭죽처럼 쏴 줬다. (☞ 영상)
홍 범도는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그 뒤엔 소련 인민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헤이그 밀사 중 하나였던 이 위종처럼 말이다. 소련으로 가긴 했지만 딱히 한국에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이나 북한의 건국과 연루된 것은 없다.

우리나라는 이렇게 독립운동가나 6· 25 참전 용사의 유해가 귀환할 때 전투기 호위를 했는데, 지난 도쿄 올림픽 때 대만에서는 선수들이 귀국할 때 이런 이벤트를 시행했었다.
대륙을 꺾고 좋은 성적을 거둔 선수들이 너무 기특하다면서, 귀국하는 선수들이 탄 여객기의 주위에 미라주2000 전투기를 네 대 띄워서 호위해 준 것이다. 총통 각하가 특별 지시를 내린 거라고 한다. 공군이 이런 의전에도 동원될 때가 있는 셈이다.

4. 세계에서 제일 큰 비행기의 최후

인류가 만들어 낸 역대 가장 거대한 비행체야 나치 독일 시절의 힌덴부르크 비행선이다. 허나, 부력이 아닌 양력으로 날면서 가장 많은 payload를 싣고 이륙 가능한 세계 최대 비행기는 바로.. 구소련에서 지난 1988년에 개발했던 An-225였다. 여객기가 아니라 화물기 겸 군 수송기 용도로 만들어졌다.

얘는 그 큰 보잉 747은 말할 것도 없고, A380보다도 더 컸다. 요즘은 저런 4발(엔진 수) 비행기조차 경제성이 떨어진다고 단종되는 추세이지만 An-225는 무려 6발이었다. 그리고 예비용 자매기가 구소련의 붕괴 시국으로 인해 끝내 만들어지지 못한지라, 얘는 동형의 다른 기체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 유일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덕분에 부란 우주왕복선도 실어 나르고 다른 여객기의 벌크헤드 같은 대형 부품도 수송하고.. 우리나라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30년 넘은 낡은 비행기이다 보니 내부 기기들이 지금 관점에서는 낙후했으며, 조종을 위한 승무원이 좀 많이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세계의 항덕들이 주목해 온 이 역사적인 비행기가 그만 소실되었다. 다른 사고도 아니고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때 수리 불가능한 손상을 입고 대파 당했다. 비행 중 격추는 아니고, 공항 격납고에 가만히 주기 중이었는데 공습을 받아 같이 박살 난 것이다. 전쟁이 야기한 참으로 안타까운 비극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 우리나라 내부에서의 최대 항공 사고

그나저나.. 우리나라 국적의 여객기가 옛날에 겪었던 네임드급 사건· 사고로는 북괴가 저지른 대한항공 858편 폭파(1987), 소련에 의한 007편 격추(1983), 괌에서 801편 착륙 실패 추락(1997) 등 여럿 있다. 이것들은 사고 장소는 다들 외국이었다.
정작 대한민국 내부에서 벌어진 역대 최대 규모 항공 사고는.. 의외로 국적기의 사고가 아니어서 인지도가 별로 높지 않다. 바로 2002년 4월 15일에 악천후 속에서 부산 김해 공항에 착륙하려다 실패하고 인근 야산에 추락한 중국 국제항공 129편 사고이다.

이 사고로 승객 155+승무원 11명 중에 130명이 사망하고 36명만 살아남았다. 승객들은 대부분 한국인이었다.
이건 1993년에 발생한 아시아나 항공 733편 추락보다 더 큰 사고였다(68명 사망, 48명 생존).
이 두 사고는 지형 때문에 착륙 난이도가 높은 공항에다, 악천후와 조종사 과실까지.. 발생 원인이 서로 좀 비슷하다. 하지만 아시아나 733은 추락 후에 다행히 화재와 폭발이 없었던 반면, 저건 그렇지 않아서 더 처참한 사고가 되었다.

요컨대, 우리나라는 일본처럼 여객기 한 대의 추락만으로 무려 500명이 넘는 사람이 몰살 당했다거나..=_=, 천조국처럼 여객기가 납치 당해서 고층 건물과 충돌하는 엽기적인 일을 자국 내부에서 당한 적은 없다.
본인조차도 2002년 5월 25일, 대만의 중화항공 611편 공중분해 추락 사고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저 사고는 한참 뒤 나중에야 뒷북으로 접했다.

이 사고를 계기로 부산에서는 김해 공항을 대체할 더 크고 안전한 동남권 공항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대두되었다. 게다가 김해는 군 공용이기까지 한 관계로, 민항기의 운용에 제약이 더 크다.
굉장히 오랫동안 진통이 많았는데 결국은 가덕도에 신공항의 건설이 확정되었는가 보다.
서울에 공항이 여의도-김포-인천의 순으로 확장되었다면, 부산은 공항이 수영-김해-가덕도의 순으로 확장되는 모양새이다.

한편, 우리나라 국적기에서 사망자가 수십 명 이상 발생한 심각한 대형 사고는 저 801편 사고 이후로 현재까지 20년이 넘게 전무하다.
메롱 상태인 나라 말고, 세계를 통틀어 나름 선진국의 플래그십 항공사가 낸 '마지막' 대형 사고 기록은 현재로서는 2009년 에어 프랑스 447편 추락 사고가 차지하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16 08:35 2022/03/1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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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뢰와 올무

전쟁터에서 적군을 총포를 쏘거나 수류탄을 터뜨려서 죽일 수 있지만, 지뢰나 부비트랩 같은 걸로 더 교묘하게 죽일 수도 있다.
동물을 사냥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포수가 총을 쏴서 잡을 수 있지만, 지뢰의 사냥 버전격인 덫이나 올무, 함정도 있다.

지뢰의 경우, 비록 현실이 시궁창이긴 하지만 세계적으로 다같이 사용을 금지하려는 협약이 맺어지고 있다.
옛날에 전쟁도 낭만주의에 입각해서 하던 시절엔 잠수함이나 저격수조차 신사답지 못하고 치사하고 비열하다는-_- 볼멘소리가 나오긴 했지만.. 요즘은 그 정도는 아니다. 무장한 적군을 낚고 유인하고 속여서 죽이는 것이야 잔인하다느니 비인도적이라느니 따질 필요가 없다.

단지, 지뢰는 한번 설치하고 나면 설치한 쪽에서도 제대로 파악과 통제가 안 되고 훗날 적군뿐만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까지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게 문제이다. 그래서 금지할 뿐이다. 독가스를 금지하는 것과 좀 비슷한 이유랄까..??
아무나 밟았을 때 무작정 터지는 지뢰 말고, 아군이 보고 직접 격발시켜야 터지는 크레모아 같은 지뢰 바리에이션은 저런 규제 대상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동물 사냥 쪽을 살펴보면.. 우리나라는 유해조수라 하더라도 총 쏴서 바로 숨통을 끊든가, 포획틀을 설치해서 가두는 식으로 잡아야 한다. 올무로 발목만 묶어 놓고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게 방치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거 무슨 발목 지뢰도 아니고..

이건 동물 사냥용 올무가 사람도 해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동물의 입장에서 비인도적이고 잔인하기 때문에 금지이다. 지뢰가 금지인 이유하고는 관점이 살짝 다르다.
게다가 동물을 목을 조르거나 흉기로 때려서 잔인하게 죽이는 것, 같은 종의 동물이 보는 데서 죽이는 것도 법을 FM대로 적용하자면 다 동물학대죄이다. 현실에서 법이 얼마나 잘 지켜지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단, 쥐덫은 당연히 예외이다. 쟤들은 해를 끼치는 게 워낙 많은 데다, 애초에 산을 초월하여 실내까지 대놓고 침입한다. 그러니 이건 야생동물 사냥이라기보다는 해충 구제에 가까우며, 거의 파리 모기 바퀴벌레 잡듯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게 된다.
그리고 민통선 이북에서는 애초에 엽총을 반입해서 유해조수를 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올무를 설치하는 게 부득이하게 허용된다고 한다.

그러니 민통선 이북과 DMZ 안은 워낙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사냥용 올무가 허용일 뿐만 아니라 지뢰도 절대로 없어질 수가 없는 위험한 동네인 셈이다. 사람과 동물에게 모두 말이다. 비무장.. 총을 사용할 수 없게 해 놓으니 다른 꼼수가 발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동물과 사람, 그리고 동물 중에서도 일반적인 놈과 해로운 놈을 바라보는 법의 관점이 이렇게 차이가 있다.

2. 산탄총과 엽총

우리나라는 총검 같은 흉기에 대한 규제가 세계 평균 이상으로 까다롭고 심한 편이다. (이것 말고 또 규제가 심한 분야로 보이는 건 이륜차의 고속도로/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 금지..)
좁아 터진 동네에서 국력과 공권력이 약하고 과학 수사 기술이 부족하고 사회는 혼란스러우니, 그냥 명분과 이유를 불문하고 폭력 자체를 일체 못 쓰게 찍어 누르는 쪽으로 법과 행정 체계가 짜인 것 같다. 그게 사회를 제일 저렴하고 쉽게 통제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런 오랜 관행이 도가 지나쳐서 정당방위를 너무 인정하지 않는 게 비판받고 있다. 괴한이 자기를 칼로 찔러 죽이려 해서 필사적으로 저항하다 결국 돌로 쳐서 사망· 중상을 야기하고 간신히 빠져나오면 과잉방어다.

냉정하고 침착하게 맨손 격투만으로 칼을 빼앗아서 멀리 던져 버리기만 해야 정당방위라니.. 이건 말인지 방귀인지 무슨 참신한 개드립인가?
"차가 갑자기 급발진 폭주하면 냉정하게 브레이크 밟고 기어 N으로 바꾸고, 그래도 차도가 없으면 옆의 담장을 긁거나 앞차를 박아서라도 세웠어야지? 왜 요리조리 피하면서 차가 계속 속도가 붙게 놔 두다가 더 큰 사고를 냈냐? 그러니 너는 유죄" 이것보다 더한 어거지가 아닐 수 없다.

부당하게 먼저 선빵 날리고 피해를 끼친 놈이 큰 벌을 받는 게 아니라, 그냥 결과적으로 상대방을 더 많이 때린 놈이 더 큰 벌을 받는 것은 지나친 행정 편의주의이며 심각한 문제가 있다.
블랙박스가 없던 시절에 "바퀴가 굴러가는(= 운동 에너지가 존재하는) 차들끼리는 무슨 대놓고 중앙선 침범하고 배째라 한 게 아닌 한 100:0은 없다. 똥이라도 더러우니까 피했어야지 그러지 못했으니 너도 과실 쪼금~~" 이러던 미개한 관행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뭐 그건 그렇고..

우리나라는 총칼을 소지하려면 각 물건별로 신고를 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았더라도 그걸 길거리에서 공공연하게 드러내 보이며 다닐 수 없다. 특히 열병기인 총은 내돈내산인 물건마저도 평소에 경찰서에 영치해 놓아야 하며, 수렵 기간에만 극히 제한적으로 불출해서 사용할 수 있다.

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생각 같아서는 나라에서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모든 날붙이의 소지를 금지해 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러기란 당연히 절대 불가능하다. 일본도(刀) 진검이나 군용 대검이야 명백한 규제 대상인 반면, 문구류인 커터나 부엌 식칼은.. 몽땅 없앴다간 아예 일상생활을 진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해친 범죄자가 흉기를 미리 치밀하게 준비해서 챙겨 갔느냐, 아니면 범행 현장에서 눈에 띄는 것을 우연히 집어서 사용했느냐 하는 건 죄질을 측정하고 형량을 산정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
그렇기 때문에 집에서는 부엌칼이나 과도를 평소에 눈에 잘 띄지 않고 찾기 어려운 곳에 두는 게 좋다.

칼 다음으로 총도 마찬가지다. 군경이 아닌 민간용으로 규제가 그나마 가장 느슨한 총은 사냥용 산탄총이나 공기총 수준이다.
강선이 새겨진 군용 소총은 사정거리가 길고 위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안 되고, 권총은 작아서 불순한 목적으로 몰래 숨기고 다닐 수 있기 때문에 안 된다. 이런 건 제아무리 민간 총기에 관대한 미국 같은 나라라고 해도 절대로 호락호락 허가해 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이 무진장 넓은 나라에서 집을 도적이나 야생 맹수로부터 지키기 위해 최소한의 무장은 있어야 한다. 산탄총은 그 특성상, 정확하게 조준하지 않아도 얼추 잘 맞는 대신에 유효 사정거리가 수십 m급으로 짧다. 그리고 위력에 비해 몸체가 아주 큼직하기 때문에 몰래 숨기고 다닐 수도 없다. 군용 사격도, 스포츠 사격도 아닌 저런 특성을 갖춘 총이 수렵 내지 민간 무장 용도로 허용되는 것이다.

이렇게 크고 위력이 약한 총 말고, 위력이 강한 총은 군대의 전유물이다. 반대로 작은 권총은 경찰의 전유물인 게 흥미롭지 않은가? 평소에 국민에게 불필요한 위압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과거 일제 시대엔 국가에서 이런 배려는커녕 오히려 위압감을 더 주기 위해서.. 헌병과 순사가 총은 물론이고 길다란 일본도를 치렁치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자. 심지어 학교 선생까지도 그러고 다녔으니 말이다~!

한편, 미국에서는 산탄총의 길다란 총열을 일부 잘라내서(!!) 권총처럼 크기를 줄인 sawed-off shotgun이라는 물건도 돌아다니는 모양이다. 심지어 뒤의 개머리판도 좀 깎아내서 길이를 더 후려치는데.. 그러고 보니 이런 산탄총은 군용 소총과 달리, 총신이 목재인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니 톱질이 가능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은 총기의 정확도를 희생한 대신 은닉 휴대성을 얻은 불법 개조이다. 신고와 허가 없이 임의로 샷건을 길이를 줄여서 사용하는 것은 의외의 중범죄로, 걸리면 벌금· 징역 급의 무거운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범죄 조직에서 이런 짓을 많이 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Doom 2 게임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스타 무기인 슈퍼 샷건부터가 설정상 이런 sawed-off 샷건이다.;;

우리나라는 총기 규제는 왕창 엄격한 반면, 상시 징병제라는 병역 의무 때문에 성인 남성 대부분이 총을 다뤄 본 경험 자체는 있는 아이러니한 나라이다. 사격장에서 평범한 한국 남자들이 총을 능숙하게 다루는 것을 보고 일본이나 미국 사람들이 놀랄 정도라고..

민주화 이전, 군사 독재 하에 반쯤 병영국가이던 시절에 나라에서 가르친 그 군대 노하우가 어디로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난 1992년 미국 LA 폭동(일명 4· 29) 때, 일부 한인들은 신속하게 진지를 구축하고 자경단을 꾸려서 흑형들을 쫓아냈다. 실제로 무장하기도 했지만 장난감 기관총이나 탄피 비스무리한 걸 갖다놓으면서 외형상의 화력을 부풀리고 뻥카도 쳤다고 한다. 이건 기지를 발휘한 아주 적절한 대응이었다.

하물며 더 옛날인 1980년 광주 사태도, 시민들이 무장하고 탱크 몰고 다닌 것 자체는 꼭 북괴 공작원이니 북한군 개입이니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같은 맥락에서 수긍이 갈 것이다. 본인은 예전에 예전에 한번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옛날에 북괴나 일제는 우두머리를 우상화하고 떠받들기 위해서, 혹은 주변 나라를 침략해서 식민지를 확장하기 위해서 군국주의 짓거리를 했다지만, 우리나라는 그런 거 없었다. 그저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박멸하기 위해서, 바로 이웃 북괴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서..
지극히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목표 하나만을 위해서 온 나라가 그렇게 병영처럼 돌아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웃픈 일이지만, 그때는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2/03/10 08:35 2022/03/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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