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엔.. "조선/대한제국이 일제에게 망하지 않고 왕정인지 입헌군주제인지가 20세기 후반까지 유지됐다면?" 같은 낭만적인 상상을 배경으로 소설이나 드라마가 만들어진 게 좀 있다.
뭐, 현실에서는 조선이 그때 일제한테 안 먹혔으면 러시안스키들한테 먹혔겠지.. 이게 훨씬 더 가능성이 높았고 상황이 여전히 암울했겠지만 말이다. 러시아 제국은 한반도에 그렇게까지 큰 욕심이 없었던 것 같지만 후신인 소련 공산당은 자비심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됐으면 이 위종이나 홍 범도 같은 애국자 독립투사가 소련으로 귀화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친일 성향의 구한말 개화파들의 노선이 1900년대 이후까지 더 오래 지속됐을 것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솔직히 "만약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고 일본이 졌다면?" 이건 현실적으로도 굉~~장히 설득력 있고 그럴싸한 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재로 한 대체역사물이 있다는 얘기는 난 딱히 못 들었다.
주 타겟이던 한반도가 세계적으로 별로 존재감이 없고 별로 장사가 안 되는 소재이기 때문이지 싶다. 그리고 그 당시엔 러시아가 이기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일본이 이기는 게 훨씬 더 극적이고 이례적인 일이었다. 즉, 현실이 픽션보다 더 픽션 같았으니 굳이 대체역사물이 또 나오지 않는 게 아닐까?
2차 세계 대전도 마찬가지이다. 현실에서 워낙 드라마틱한 전투 승리 내지 초인적인 인간 승리 스토리가 많이 만들어졌다. 덕분에 스토리에 창작 각색이 거의 들어가지 않은 전기/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전쟁 영화도 지금까지 한두 편 만들어진 게 아니다. 가령, 미드웨이 해전이나 진주만 같은 건, 진작에 영화가 만들어졌다가 후대에 각종 CG를 곁들여서 리메이크작이 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일반인이 뻔히 다 아는 스토리만 곧이곧대로 차용해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특히 2차 세계 대전은 밀덕 역덕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소재가 워낙 많기 때문에 "만약 역사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면? 조금만 핀트가 어긋났다면?" 이렇게 생각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만약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전땅크 대통령이 제 시각에 도착하는 바람에 그때 현장에 있었다면? 그때 폭발에 휘말려 순직해 버렸다면 세상이 지금과는 어떻게 달라지게 됐을까..??" 이런 것 말이다.
그래서.. 발상을 달리하여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 대신 추축국 진영이 승리했다면? 혹은 추축국이 일부라도 그렇게 흑화하지 않고 연합국과 잘 지냈다면?"을 상상한 대체역사물이 좀 있다. 이 글에서는 대표적인 것 일부만을 소개한다.
1. 비명(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찾아서 (1987) 복 거일 .. 독일만 망함
영어 공용화 논란 및 우파 진영 논객으로 유명세를 탔던 복 거일 씨가 소싯적에 발표한 소설이다. 나름 국내에서 만들어진 고퀄의 대체역사물이다. 얘랑 비슷한 스토리 전개로 예전에 "2009 로스트 메모리즈"라는 대체역사물 영화가 한일 공동 제작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었다.
이 작품에서는 안 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실패"해서.. 이토 상은 부상만 입을 뿐, 1920년대까지 생존하며 장기 집권한다. 덕분에 일제 식민 통치나 대외 외교가 좀 더 젠틀하게 나간다.
정말 상상이 안 되지만 일본은 미국· 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동북 아시아를 무난히 접수한다. 2차 세계대전은 유럽 서부 전선 위주로만 벌어졌으며, 핵폭탄은 일본이 아니라 독일에 떨어진다. =_=;; (브레멘 & 드레스덴 ㄷㄷㄷㄷㄷ)
이로 인해 무려 국제연맹이 20세기 후반까지 존속하며, 한반도 역시 영원히 독립되지 못하고 대만이나 류쿠, 오키나와 같은 일본 식민지로 남는다.
일본은 미국, 소련에 이은 세계 최강국으로 군림하고.. 한반도에서 태어난 어느 2등 신민 조선인이 출생의 비밀을 뒤늦게 알게 되고서 어찌어찌 한다는 게 이 소설의 줄거리이다.
2. 높은 성의 사나이 (1962) 필립 K. 딕 .. 추축국이 몽땅 승리 (☞ 영화 소개)
이 장르의 거의 원조인 것 같은데.. 얘는 제일 비관적인 설정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 프랭크 루스벨트 대통령이 암살 당해서 대통령이 못 되고, 뉴딜 정책이 시행되지 않고, 무기 대여법이 시행되지 않아서 2차 대전 유럽 연합국들이 빌빌대고.. 진주만 공습 때 미국의 함대가 몽땅 박살 난다.
결국 영국이 항복하고 미국도 독일· 일본의 합동 공격을 버티다 못해 조건부로 항복한다. 소련도 미국의 지원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독소 전쟁에서 패배해서 중세 시대로 되돌아간다.
유럽은 나치 독일 천지가 되고, 미국조차 서부는 일본, 동부는 독일이 접수하고 중부는 무법천지인 막장 상태로 전락한다.
전세계에 종교는 금지되고 히틀러 숭배만 허용된다. 독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이이이이이이이이일!!! 이 현실이 된다.
독일과 일본이 세계를 지배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둘도 사이가 마냥 좋지는 않은 견제 관계가 된다. 마치 현실에서 중공 VS 소련처럼..??
3. 당신들의 조국 (1992) 로버트 해리스 .. 일본만 망함 (☞ 영화 소개)
이 작품에서는 나치 독일이 우연한 계기로 에니그마 암호의 해독 체계를 바꿔 버리며, 이 때문에 연합국이 더는 맵핵을 쓰지 못하게 된다. 독일은 유보트로 세계의 제해권을 장악한 뒤 영국과 소련을 봉쇄시키고, 미국에 V2니 V3이니 로켓까지 날려보낸다.
결국 미국이 독일과는 강화 조약을 맺고, 독일은 세계 최강 패권국이 된다. 이 세계관에서는 일본만 핵폭탄을 맞고 그대로 항복한다.
뭐 이런 설정 말고는 얘는 30년 전 전의 "높은 성의 사나이"와의 변별성을 잘 모르겠다.
아, 참고로, 2번 "높은 성의 사나이"의 경우 굉장히 참신한 게.. 이 소설 내부에 또 가상의 소설이 있다고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이 "세상이 이렇게 되지 않고 만약 연합국이 승리했다면..??" 이렇게 뇌피셜을 펼치는데,
여기서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무사히 집권한 뒤 3선 이상 연임을 하지 않고 물러나며, 히틀러는 패전 후 자살에 실패하고 체포되어 전범 재판을 받고 처형된다.
그 뒤, 미국과 소련이 전쟁을 벌여서 소련이 작살나고 영· 미에 의해 분할된다. 그런데 그 뒤엔 영국과 미국도 서로 대립하게 된다. 흠..
흥미롭지 않은가? 대체역사물도 이런 식으로 상상하고 만들기 나름인 것 같다.
옛날 독일 영화인 '롤라 런'을 보면, 주인공이 집을 뛰쳐나갈 때 누구랑 부딪히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이 나비 효과마냥 완전 극과 극으로 달라진다.
하물며 나라의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전쟁터라면 그런 간발의 타이밍 차이로 전황이 달라진 사례가 한둘이 아니었지 싶다. 그러니 이미 다 지난 일이긴 하지만 그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났다면..?? 이런 걸 소재로 영화나 소설을 만드는 건 충분히 흥미로운 시도라고 볼 수 있겠다.
현실에서 벌어졌던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과 한반도 광복은.. 그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이고 굳이 또 픽션으로 각색할 필요가 없는 기적적인 사건에 가깝다.
옛날에 어지간한 지식인들이 괜히 변절했던 게 아니다. 이제 항일 독립 운동이란 씨가 말라 버렸으며 일체의 희망이란 없고, 이놈의 일제가 망할 가능성이란 없다고 다들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 상태로 세대가 바뀌게 생겼으니 신세대들은 태극기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지경이고.. "일제가 이렇게 갑자기 망할 줄 몰랐으니까"는 절대로 궁색한 변명이 아니었다. 이렇게 일제 시대가 1950년대 이후까지 계속됐으면, 독립 운동 대신 그냥 2등 신민 조선인의 차별 철폐, 인권 개선, 참정권 보장 따위를 요구하는 투쟁이나 벌어지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한테는 정서적으로 참 꺼림칙하겠지만, "조선이 영원히 해방되지 못했다면?" 이런 대체역사물이 "조선이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에 왕정이 계속 유지됐다면?"보다는 당연히 훨씬 더 더 현실적인 대체역사물인 셈이다.
심 훈의 "그날이 오면"은 우리 민족의 염원을 표현한 시일 뿐, 무슨 대체역사 소설은 아니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