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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철거

건물은 잘 짓는 것뿐만 아니라 잘 부숴서 없애는 것도(철거~!) 고도의 기술과 비용이 필요한 일이다.
지하철 건설에서 제일 저렴하고 무난한 방법이 땅 파헤치고 위에다 철판으로 덮어서 공사하는 개착식이듯, 철거 방식 중에 제일 저렴하고 무난한 방법은 중장비를 동원해 건물을 직접 들쑤시거나 때려 부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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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일이 때려부수기에는 너무 큰 건물이라면 발파 해체를 생각하게 된다. 화약/폭약은 강력한 대신 매우 위험하므로 잘 통제된 환경에서 적절하게 사용해야 한다.
터널 건설 내지 건물 철거 현장에서 폭약을 터뜨리는 걸 들어 보면.. 영화에서 수류탄 터뜨리거나 게임에서 로켓 런처 쏘는 것 같은 경쾌한(?) 쾅~ 쿵~ 소리가 나는 게 아니다. 그냥 총 쏘는 것 같은 따다닥~ 빡~ 소리만 연달아 들린다. 사실은 총도 화약을 터뜨리는 것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이들 폭약은 전쟁에서 쓰이는 폭탄· 포탄 같은 물건이 아니다. 파편을 날려서 건물을 송두리째 산산조각 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 건물을 지탱하는 기둥 몇 곳만 뎅겅 날려서, 건물이 자기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폭삭 주저앉게 하는 것이 발파 해체의 핵심이다.
건물의 급소를 찾아서 최소한의 폭약만 설치하고 터뜨림으로써 건물 전체를 무너뜨리는 건 뭔가 예술의 경지에 가까운 작업이다. 이를 위해 폭약 기술자들이 적지 않은 고민을 한다.

건물뿐만 아니라 배도 마찬가지다. 하부에 어뢰를 제대로 맞으면 거대한 선박도 피격 부위에 구멍이 뚫리고 용골이 휘어지는데, 대미지가 이게 전부가 아니다. 폭압 때문에 위로 붕~ 떴다가 다시 수면으로 떨어지는 과정에서 선체가 더욱 찌그러지고 치명적인 손상을 입는다.
이는 건물이 철거되는 원리와 같다. 어뢰의 위력은 수백~수만 톤에 달하는 배를 수면에서 잠시 뜨게 만들 정도로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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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1994년 김 영삼 시절에 남산 외인 아파트의 발파 해체가 유명한 철거 사례로 사람들 기억에 남아 있다.
다만, 조선총독부 청사는 근처 경복궁이 받을 여파를 우려해서 폭파 대신 그냥 전통적인 방법으로 부수고 철거했다.
그리고 삼풍 백화점은 발파 해체를 하지도 않았는데도, 건물이 워낙 상상을 초월하게 부실하게 지어진 바람에 꼭대기 층부터 시작해 차곡차곡 주저앉아서 마치 발파 해체처럼 붕괴됐다. -_-;;;

9 11 테러 때 여객기가 날아와서 충돌했던 세계 무역 센터(WTC) 건물 두 채는 각각 한두 시간 남짓 버티다가 그대로 폭삭 주저앉고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스타에서 테란 건물은 2/3 이상 파괴된 빨피 상태가 되면 스스로 체력이 떨어지다가 펑~ 부서지는데, 쟤도 그런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단지, 현실에서는 그런 높은 건물의 대미지를 수리할 만능 SCV가 없었던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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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서 여러 음모론이 나돈다. 하지만 항공유가 잔뜩 들어있는 중형 여객기가 불타면서 장시간의 엄청난 고열 때문에 건물을 지탱하던 철근이 물러지고 약해졌다는 것으로 일단 공학적인 설명이 된다. 저게 폭약 발파 해체와 동급의 역할을 한 셈이다.

그리고 어느 건물이든 한번 무게 균형이 깨져서 주저앉기 시작하면.. 그 뒤부터는 차곡차곡 도미노이며, 다 무너지는 건 시간 문제이다.
세계 무역 센터 건물의 붕괴는 최소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에 맞먹을 정도로 괴이하고 설명이 안 되는 미스터리는 아니라는 것이다.

건물이 붕괴되면 먼지가 어쩜 저렇게 많이 나는지..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에서는 그런 부작용 없이 아주 조용하고 가늘고 길게 티 안 나게 건물을 철거하는 방법도 쓰이고 있다. Tecorep이라고 불리는 공법이 있다.

대표적인 예는 일본의 아카사카 프린스 호텔이다.
우리나라 영친왕(일제 시대의 구 조선 황실 사람..)과 관련된 역사적 사연이 많은 곳이었는데, 신관 건물은 노후화로 인해 2011년에 영업을 중단하고 2012년 가을부터 이듬해 상반기까지 무려 7개월에 걸쳐 천천히 건물 높이가 조금씩 낮아지는 식으로 해체되고 철거되었다. 이건 당시에 언론으로부터 주목도 많이 받았는데, 발파 해체와는 반대편 극단에 선 공법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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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0/09/20 08:35 2020/09/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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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철도의 변화 추이

1. 수인분당선

지난 9월 12일에는 우리나라 철도 역사에 길이 기록될 이벤트가 하나 발생했다. 바로 수인선이 전구간 복선 전철(시설)로 완공되었으며, 곧장 분당선과 연결되어 수인분당선이라는 이름의 수도권 광역전철(운행 계통) 형태로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는 경의중앙선의 사례와 비슷하다.
원래 용산-성북 국철이라고 불리던 1호선 짜끄레기 지선(?)이 중앙선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색깔이 옥색으로 바뀌고 덕소, 팔당, 국수.. 지금은 양평을 넘어 용문까지 정말 엄청나게 길어졌는데.. 그게 2009년부터 DMC/서울 역까지만 개통해 있던 경의선과도 연결됐기 때문이다. 2014년에 용산선 구간이 모두 지하로 재개통한 덕분이다.
그래서 경의중앙선은 문산(임진강)-용문(지평)이라는 어마어마한 길이를 자랑하는 옥색 광역전철이 되었다.

그러면 수인분당선은 어땠는가?
1994년 9월, 철도 불모지이던 서울 동남부에 수서-오리 분당선이 개통했다. 얘는 색깔도 확 튀는 노란색인 데다, 철도청이 건설하는 철도 중에는 그 당시에 기존 철도와 만나는 게 전혀 없이 단절돼 있던 유일한 철도였다. 2009년 용인-서울 고속도로(171)가 건설 당시에 기존 고속도로와 만나는 분기점이 전혀 없이 단절된 고속도로였던 것처럼 말이다.

그랬는데 분당선은 남북으로 쭉쭉 길어져서 왕십리와 수원을 잇는 거대한 전철 노선이 됐고.. 급기야는 이제 수인선과 연결돼 버렸다. 그래서 역 수가 60개가 넘는 왕십리-(수원 경유)-인천이라는 초월적인 노선으로 거듭났다. (참고로 1호선의 무려 소요산-천안이 역 수가 얼추 60개;; )

다만, 수인-분당선은 구간별로 성격과 수요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상당수의 열차는 여전히 과거의 분당선 아니면 오이도 이북의(시흥-인천) 수인선 구간만 다닐 예정이다. 여느 방사형 노선들은 서울로부터 멀어지는 말단 외곽이 수요가 적지만.. 수인선은 반대로 양 말단인 인천과 분당· 서울 쪽이 수요가 많고 중간의 화성· 안산 쪽은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기존 안산선 구간인 오이도-한대앞을 포함해서 이번에 새로 개통한 사리-야목-고색 등의 구간을 다니는 열차는 왕십리부터 인천까지 전구간 풀코스를 다니는 열차만으로 국한된다. 이런 열차는 1시간에 2~3대꼴로만 운행된다.

그러므로 오이도 역은 동쪽에서는 4호선의 종착역이기도 하면서, 서쪽에서는 수인선의 중간 종착역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하게 된다.
사실은 한대앞-오이도는 애초에 안산선이 기존 수인선의 선형을 따라 건설된 것이었다. 그걸 수인선 복선전철이 나중에 되찾았을 뿐.. 여기는 2복선 같은 것 없이 한 선로에서 안산선과 수인선 열차가 모두 오가게 된다. 같은 선형이지만 선로는 복층으로 다른 경의선 & 공항 철도의 서울 시내 용산선 구간과는 상황이 다르다.

이 수인선이 개통하면서, 과거에 분당선 수원 행에 대응하던 운행 계통은 종점이 수원이 아니라 서쪽으로 한 정거장 더 진행한 고색으로 바뀌었다.
과거에 1호선 수원 행 계통이 2003년부터 병점으로 바뀐 것과 비슷한 현상 같다. 어쩐지 그래서 고색 역은 시종착역 역할을 하기 위해 지하에서 이례적으로 쌍섬식으로 건설돼 있었다.

그래서 수원 역은 1호선도, 수인분당선도 모두 중간 종착역 역할을 하지 않게 됐는데, 이것은 두 노선의 중간 종착역 역할을 꾸역꾸역 수행하고 있는 오이도 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본인은 9월 12일이 낀 주말에 답사 여행도 다녀왔다. 여행기는 글과 사진을 정리하는 대로 이 블로그에다 공개할 예정이다.

아울러, 이렇게 철도에 거대한 수도권 순환선이 추가된 2020년 9월부터.. 고속도로에서는 서울 외곽순환 고속도로(100)의 명칭이 수도권 제1순환 고속도로라고 개명되었다. 뭔가 의미심장한 변화인 것 같다.
저 동네가 서울 외곽 변두리 짜끄레기라는 부정적인 어감을 걷어내고, 또 더 큰 제2순환선(400)이 생기기도 한다는 것을 반영한 개명이다.

2. 급행 전동차의 변화

지난 2019년 말~2020년 초 사이에 수도권 전철 1호선의 경부선 급행열차 체계가 꽤 파격적으로 바뀌었다.
용산-구로 사이의 급행 선로는 동인천 급행만이 사용하는 경인선 전용 선로로 바뀌었고, 천안 급행은 내선(급행 및 일반열차 선로)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 군포와 의왕 같은 몇몇 역에다가 대피선 추가)

이 때문에 경부선 급행은 안양-수원 구간에서 내선을 주행하던 과거에 비해 속도빨이 조금 감소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경부선 급행을 더 많이 투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용산에서 끊어지는 게 아니라 서울 지하철 1호선 청량리까지 더 길게 운행 가능해졌다. 환승역인 금정 역에 정차할 수 있게 된 건 덤이다.

어째 운영 시스템을 이렇게 개편할 생각을 했는지?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나 모르겠다.
이런 조치 덕분에 이제는 서울 지하철 9호선뿐만 아니라 1호선의 지하철 구간에서도 이따금씩 ‘천안 급행’이라는 어색한 열차 행선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코레일에서는 요런 완행 기반의 경부선 급행을 늘린 대신에, 하루 세 번 있는 기존의 서울-천안 급행을 슬쩍 폐지했는데.. 그건 승객들의 반발에 부딪혀 곧 무산됐다.
이제 하루 세 번 있는 이 열차만이 안양-수원에서 일반열차 선로를 주행하는 유일한 전동차이다. 누리로도, 급행 체계 대개편도 1981년 경부선 서울-수원 복복선 개통과 함께 등장한 이 40년 짬밥의 전동차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했다.

3. 고속버스(고속도로) 대비 철도의 변화

우리나라에 좌석에 종아리 받침대가 있는 고급 육상 교통수단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이다.
1991년인가 92년 사이에 등장한 우등 고속버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등장한 새마을호 장대형 객차.
열차와 버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의 영향을 받은 건 분명한데.. 어느 게 어느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지는 본인도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예전에 언급한 적이 있다.

좌석 자체가 더 두툼 큼직하고 푹신한 것은 우등 고속버스이다. 특히 팔걸이의 폭 말이다. 하지만 앞뒤 간격이 훨씬 더 넉넉하고 전반적인 승차감이 더 좋은 것은 열차이다.

그리고 저 때 이후 2010년대부터 고속버스와 열차는 서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고속버스는 기존 우등보다도 더 비싸고 좌석이 더 안락한 프리미엄 우등이란 게 나와서 일부 노선에서 운행 중이다.
그러나 열차의 경우, 저 새마을호가 한국 철도 120년 역사상 전무후무한 가장 크고 안락한 좌석을 보유한 차량이었고 그것으로 끝났다. 지금은 KTX 특실 좌석에도 종아리 받침대 따윈 없다.

그렇게 된 이유는?
열차는 인테리어만 한없이 더 고급화하는 게 아니라, 속도가 더 빨라지는 쪽으로 일면 바람직하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요즘 제트 여객기가 과거의 비행선이나 대륙 횡단 여객선처럼 내장재를 신경쓰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우리나라도 KTX가 없고 열차의 증속에 한계가 있던 시절엔, 내장재와 정차역만으로 상위 등급 열차를 운용해야 했다. 새마을호의 크고 안락한 좌석은 그 시절이 만들어 냈던 유물인 것이다.

물론 기존 인프라만 갖고 노오력을 쥐어 짜내서 서울-부산을 4시간 10분까지 단축시켰으며(1985년), 더 장기적으로 3시간 반 정도까지 단축시키려는 계획은 있었다. 하지만 그거 갖고 철도가 갈수록 늘어나는 고속도로와 자가용, 고속버스의 경쟁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고속철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나라에 훨씬 더 절실히 필요했던 사업이었다. 김포 공항을 대체하는 인천 공항만큼이나 말이다.

같은 논리를 적용해 보면 고속버스가.. 우등이라고 해서 카레이서 출신의 엘리트 기사가 대형 버스로 고속도로를 시속 150~200으로 밟으면서 '초고속버스' 같은 운전을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장재만 고급화한 버스를 운용하는 것이다.

서울-부산을 1시간 만에 가는 여객기, 2시간 반 만에 가는 열차가 있는 와중에.. 도로 교통수단이 시간 메리트가 없다면, 고속 와이파이는 물론, 최소한 좌석마다 개별 영상 서비스와 콘센트가 달린 버스 정도는 요즘 세상에 정말로 나와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4. 서빙 카트

오늘날 승무원이 먹을것을 실은 카트를 끌고 복도를 왕래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교통수단은 열차와 여객기 정도인 듯하다.

참고로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던 1960~80년대 먼 옛날에는 안내양이 버스 안에서 스튜어디스와 비슷한 일을 했다. 탑승 전 검표, 안전벨트 착용 안내뿐만 아니라 무슨 관광버스처럼 지금 차량이 지나고 있는 지역의 특산물 소개 같은 방송도 하고 주기적으로 음료 서빙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런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시대의 변화 때문이겠지만 인건비의 급격한 상승도 안내양이 없어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고 한다.

여객기나 과거의 고속버스 같은 건 승차권 가격에 포함된 정식 서비스를 모든 승객에게 동등하게 제공하기 위해서 승무원이 카트를 끌고 다니는 것이다. 하지만 열차는 별도로 판매되는 간식류들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카트의 성격이 좀 다르다. 다른 교통수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오~

철도청 시절에는 이런 일을 홍익회라는 유착(?) 법인에서 전담했지만 공사화 이후에는 이런 풍경을 거의 볼 수 없어졌다. 그나마 KTX 같은 고급 고속열차에서는 코레일네트웍스 같은 자회사 소속 직원이 카트를 끌고 다닐 뿐.. 수익이 적은 새마을/무궁화호 열차를 시발역에서 타면 "우리 열차는 차내 영업사원이 탑승하지 않습니다. 식사는 탑승 전에 해결하시거나 차내 카페객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가 자주 나왔었다.

5. 토목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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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장소는 서울 지하철 9호선 고속터미널(일명 고텀) 역의 환승 통로이며, 9호선 승강장의 위층에 있는 거대한 공터이다. 직접 본 적이 있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높은 천장을 뚫고 딱 15cm만 위로 올라가면 지하철 3호선 선로가 나온다.
9호선 고텀 역은 그 무거운 전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 3호선과 7호선의 바로 위와 옆으로 아슬아슬 아찔하게 첨단 기술을 동원하여 만들어졌다. 이들 역이 동시에 건설된 것도 아님을 주목하라. 신기하지 않은가?

불과 30년 남짓 전에 2호선이 처음 건설됐던 시절엔.. 복잡한 영등포 역 아래를 그렇게 뚫고 내려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선로 밑으로 땅 잘못 파면 선로가 내려앉아서 1993년의 구포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 같은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는 한적한 곳까지 비껴 가서 신도림역을 환승용으로 따로 만들어야 했다.

이를 생각하면 참으로 격세지감이다.
고텀 역의 경우, 옛날 3호선은 그냥 개착식, 7호선은 NATM(발파..), 9호선은 CAM(cellular arch) 공법으로.. 적용 알고리즘이 모두 다르다.

우리나라의 '삼부토건'이라는 건설사는 자기 회사를 소개할 때 서울 지하철 5호선 마포-여의나루 한강 하저 터널을 건설했던 이력을 반드시 자랑으로 내세운다. 그건 1990년대 초에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했던 장거리 하저 터널이기 때문이다.
광나루-천호도 하저 터널이지만, 그건 댐을 쌓아서 강물을 다 걷어내고 개착식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크게 새롭지는 않다.

서울 지하철 7호선 남성-숭실대입구역 구간의 경우, 시공사는 기억이 안 난다만 아무튼 중간에 길을 벗어나서 관악 현대 아파트의 아래를 대놓고 관통한다.
물론 공사는 20여 년 전에 그 위에서 살았던 아파트 입주민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스텔스로 잘 끝났다.

이런 게 21세기 토목 기술의 힘이다. 이미 부산 시내를 몽땅 지하로 관통하는 경부고속선이 완공됐고, 이제는 서울에서 평택까지 전부 지하로 가는 SRT, 그리고 고심도 광역 급행 전철까지 만들어지는 중이다.

참고로 지하 시설이라는 건 공간만 냈다고 장땡이 아니다. 내부에 계속해서 환기를 해 줘야 하며, 지형에 따라서는 지하수를 빼내는 펌프를 24시간 내내 가동해야 한다. 안 그러면 햇볕도 안 들어오는 탁한 지하 공간에서 사람이 지낼 수가 없어진다.
이런 최소한의 토목 디테일을 알면 북괴의 초장거리(?) 남침 땅굴 굴착설 같은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괴담임을 간파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7 08:34 2020/09/1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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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 역

1959년작 명작 영화 '벤허'에서 벤허 역을 맡은 주연 배우는 찰턴 헤스턴(2008년 작고)이라고 아주 잘 알려져 있다. 이 사람이 '십계'에서 모세 역을 맡기도 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벤허에서 뒷모습만 나오는 예수님 모습은 누가 연기했을까..??

벤허에서 특히 압권인 건 죄수 노예들을 호송하던 로마 군인이 "어이, 거기 민간인! 누가 저 죄수(벤허)에게 물 주랬어?" 호통과 함께 예수님을 째려봤는데.. 거의 20초 가까이 벙찌고 있다가 예수님과의 기싸움에 압도 당하고, 급 시무룩해져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자, 휴식 끝. 출발한다. 가자!" 이러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정말 인상적인 연출이었다. 요한복음 8장의 "죄 없는 자부터 먼저 돌을 던져라 → 급 시무룩"에서 모티브를 따기라도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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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나 어느 날 꿈속을 헤매며>의 "그 동정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부드러운 그 모습을" 가사가 자동 재생되는 것 같다.
예수쟁이라면 성경 구절뿐만 아니라 찬송가도 많이 알아 두면 살면서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도움이 된다.

예수님을 연기한 배우는 당시 영화의 credit에는 등재되지 않고 비밀로 부쳐졌다.
하지만 나중에 어떤 계기를 통해 클로드 히터(1927~)라는 배우라는 것이 알려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을 안 해 봤는데 신기한 노릇이고.. 또 에어컨과 히터 할 때 그 히터 Heater가 사람의 성씨인 게 특이하다.
하긴, 에어컨의 발명자는 성씨가 캐리어였지.. 프로토스 캐리어와 같은 단어다..;;

2. 하나님의 음성

한편, 1998년에 개봉했던 '이집트의 왕자'는 애니메이션인 관계로 출연진이 배우가 아니라 성우인데.. 이때도 하나님 목소리 역은 credit에 공개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모세 역 성우가 음성변조로 하나님까지 1인 2역을 했었다.

"너는 이제 파라오에게 돌아가서 도탄에 빠진 네 동족을 구해낼지어다." / "헉, 저는 말이 둔해서 그럴 수 없사옵니다" 대사를 동일 성우가 다 말했다는 뜻이다.

이런 예가 그 업계에서는 드물지 않다.
월트 디즈니 포카혼타스에서도 랫클리프 총독과 위긴스 비서는 서로 음색이 완전히 다르며, 상대방 말을 끊으면서 대화하는 장면까지 있는데도 성우가 동일 인물이다.
스타크에서도 마린, 고스트, 배틀크루저 등 상상하기 어려운 유닛들 목소리가 다 동일 인물(크리스 멧젠..)이다.

3. All Dogs Go To Heaven

본인은 수십 년 전 먼 옛날에 영어 회화 학원에서 All Dogs Go To Heaven (1989)이라는 만화영화를 비디오로 본 적이 있다.
너무 어린 시절의 너무 오래된 경험인 관계로, 지금은 거의 모든 장면과 스토리를 까먹어 버렸고 "oh Charlie, you can never come back~" (찰리 씨, 그랬다간 여기에 다시는 못 돌아와요~~ ㅠㅠㅠ)라고 천사 암캐(?)가 경고하는 말밖에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얘는 사후 세계를 다뤘다는 점에서 "신과함께"와 살짝 비슷한 장르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제목부터가 심상이 전 3:21이나 계 22:15와는 완전 상극이다. 반성경 반기독교(anti-)까지는 아니어도 "비"(non-)성경적인 설정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뭐, 계 22:15의 경우, 진짜 동물 개를 가리키는 건 아니지만...)

왜냐하면 성경에 따르면 오직 인간만이 하늘(천당) 아니면 지옥이라는 사후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 안 믿고도 특례로 구원받고 천당 갈 수 있는 존재는.. 스스로 선과 악을 분별할 능력이 없고 예수 믿거나 거부할 능력 자체가 없는 영· 유아, 정신지체 장애아뿐이다. all dogs go to heaven이 아니라 all babies go to heaven인 것이다.

동물은? 평생 우리에 갇혀 살다가 도축되어 멍멍탕으로 잡아먹힌 개든, 인간을 대신해서 지뢰를 밟고 산화한 군견이든.. 죽으면 그대로 완전히 소멸되고 사라진다. 무지개 다리를 건너간다거나 하는 건 없다.
사후 세계에도 다른 동식물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동물은 현 세상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갖고 인간과 교감했던 그 동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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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나름 성경으로 치면 개에 대한 "book of life"(계 20:12)를 묘사해 놓은 모습이다. 물론 저 장면은 성경의 실제 백보좌 심판하고는 백만 광년 억만 광년 떨어진 묘사이다.;;;

허나, 게임을 현실 고증에만 너무 충실하게 만들면 재미가 나질 않고 이말년 씨리즈의 두덕리 온라인 꼴 나며.. 성경 고증에만 너무 충실하면 우주 SF물은 전혀 만들어질 수 없고 동물의 의인화도 전혀 할 수 없으니.. 영화는 그런 사항을 배제하고 만들어진다.
(사실 성경까지 갈 것도 없이 항공 우주역학과 기초 기계공학 고증에만 충실해도 이족보행 합체 로보트라든가 우주 SF물은 성립이 전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작품 얘기로 돌아오면.. 주인공 찰리는 멀쩡히 천당· 낙원에 들어가서 편히 쉴 수 있는데도 자기는 억울하게 살해당했기 때문에 이대로 죽을 수 없댄다. 복수를 해야 된다며 자기 수명 시계의 태엽을 무단으로 거꾸로 돌려 놓고는 다시 현 세상으로 도망친다. 헐~~ ㅠㅠ 쿵 퓨리에서는 해킹으로 시간을 워프 시키고 죽은 사람도 살려 내고 총상을 치료하더라만...

저기서도 온도 단위 드립이 나오는 게 흥미롭다. "이곳 천당은 온도가 73도로 유지되는 아주 안락 쾌적한 곳이랍니다. 화씨로요."
하긴, 섭씨로 73도인 곳이 천당일 수는 없을 거다. 다만, 그 정도 온도만으로 아예 반대편 지옥이라고 불리기는 좀 부족하고, 거긴 그냥 사우나 정도일 것이다.

결말부에서는 찰리의 수명 시계가 완전히 멈춰 버리고.. 찰리 역시 "난 깽판을 너무 많이 쳤으니 이제 지옥으로 가는 거죠?"라고 자포자기 하지만.. 저 천사 암캐가 "아니요, 당신은 목숨을 바쳐 의로운 선행을 했기 때문에 여전히 돌아올 수 있어요" 그러면서 해피엔딩이 나오긴 한다.

신과함께도 그렇고, 성경 교리 없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매체들은 그냥 평범한 권선징악 코드로 귀착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런 매체에서 십자가에서 구원받은 강도(눅 23:42-43) 얘기 같은 게 등장할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5 08:34 2020/09/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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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 쪽의 여러 생각들

1. '필요만큼 분배'의 허구성

예전에 한번 얘기했던 것이지 싶은데..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만큼 분배한다" 이건 보면 볼수록 절대 실현 불가능하고 잘못됐고 섬뜩한 거짓 선동 구호라는 생각이 절실히 든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의 완벽한 예시 중 하나이다.

저런 문맥에서 '필요'라는 단어는 "하나님은 님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님에게 필요한 걸 응답해 주신다" (빌 4:19)이럴 때에나 쓰인다. 마치 '복수/보복'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신의 전담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것처럼 말이다. (법과 공권력에 의한 형벌 집행은 제외)
인간이 무슨 하나님인가? 인간이 인간의 필요를 하나님만치 정확하게 알고 하나님만치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나??

하나님이 지금까지 너에게 필요한 것만치 먹을 것과 입을 것 공급해 주신 것(딤전 6:8..;; )에도 지금까지 만족해 본 적이 전혀에 가깝게 없었을 인간들이 어디 필요에 따른 아름다운 분배 운운하고 있는가?

인간이 자기 소유에 대한 책임감이 없이 남의 소유를 지 꼴리는 필요에 따라 분배했다간 무슨 꼴 나는지는.. 대학교 조별과제 해 보거나 각종 공공물품을 자율 비치해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목욕탕 여탕의 수건과 비누, 비행기 기내의 담요, 양심 자전거..) 필패가 입증된 실험을 굳이 또 해 볼 필요가 없다.
마치 인류 최고의 부자 겸 천재였던 솔로몬이 "헛되고 헛되다"라고 결론을 내린 그 실험을 또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성경 신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지 않은가?

저건 "사람이 먼저"만큼이나 불순한 무리들의 유명한 기출 문제이다. 그러니 우리는 두고두고 잊지 말고 곱씹으면서 다음에는 쟤들이 또 무슨 문제를 낼지를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2. 감언이설

  •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세금 도둑이 많은 거다:
    그런데 보통은 그런 말을 하는 놈이야말로 진짜 세금 도둑, 아니 좀도둑을 넘어 세금 대도에 나라 등골 브레이커이다.
  • 성적보다 인성이 더 중요하다:
    부분적으로는 일리가 있는 구석도 있긴 하지만, 이걸 무슨 자랑인양 대놓고 떠벌리는 놈들은 대체로 성적과 인성 둘 다 엉망이고, 특히 인성은 더 쓰레기인 경우가 허다하다.

수천 년 유구한 짬밥을 자랑하는 인간의 죄성이란 걸.. 같은 죄인인 일개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 순식간에 쉽게 척결 가능할 거라고는 절대 기대하지 마시길. 기대했다간 반드시 실망하고 좌절하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나는 것만 더 어려워진 게 아니라, 방망이 깎던 노인 타입의 외곬수 장인도 앞으로는 더욱 자취를 감추고 찾아볼 수 없어질 것이다.

3. 파벌? 중립?

"나는 정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오로지 예수파다" 이러는 사람치고 진짜 중도인 사람을 나는 평생 거의, 전혀 본 적 없다.
저건 "능력만치 벌어서 필요한 만치 분배한다"처럼 그냥 아무한테나 적당히 듣기 좋으면서 현실성 없고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궤변으로 오· 남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덕길에서 자기 혼자만 N으로 해 놓고 브레이크 하나 안 밟고 있으면서 "난 어디로도 치우치거나 끌려가지 않는 중립" 이러는 것과 같다.
고전 1:12 같은 일갈은 어중이떠중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4. 그들의 진짜 관심사

"사회/공산주의자들은 사실 가난한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 그냥 부자와 잘난 사람들을 증오할 뿐이다."

우와 정말 최고의 팩트폭격 명언인 것 같다.
환경 단체는 사실 환경에 관심이 있는 게 전혀 아니고..
여성 단체는 사실 진짜 여성 인권에 관심 있는 게 절~대 아닌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

똑같이 환경을 파괴하거나 똑같이 여성을 유린해도 그 주체가 누구 편이냐에 따라서 반응이 극과 극으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북한 vs 일본/미국? 여당 야당?

단적으로 말해 그 어떤 골수 페미나 여성 인권 단체도, 위안부 할머니 타령 늘어놓는 그 어떤 박애주의자도, 민주당 정치인이 저지른 성추행이나 중국 국경에서 처참하게 착취당하는 북한 불쌍한 여성들에 대해 목소리를 낸 적이 있던가..?? 전혀 절대 없다.

맨날 분배니 평등이니 외치는 공산주의자들은 실제로는 부의 독식을 추구하는 계급주의자일 뿐이다.
그냥 평범하게(?) 혼자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기만 한 자본가 기업가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나쁜놈이다.
내가 대외 이미지 깎이는 것까지 감수하고서 가장 좋은 빨갱이는 죽은 빨갱이라는 극언까지 괜히 공개적으로 하는 게 아니다.

5. 남한과 북한

북한은 자유와 개방과 사유재산과 올바른 통치 체제가 훨씬 더 먼저 절실히 필요하지, 그에 비하면 통일은 0이 몇 개쯤 더 붙을 정도로 덜 중요한 후순위의 문제이다.

마치 옛날에 남한이 북괴의 침략을 막아내고 가난을 떨쳐내는 게 억만 배 이상 더 중요했지, 그에 비하면 대통령 직선제나 민간인 출신 대통령 같은 건 훨~~~~씬 덜 중요한 후순위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것만 이뤄지면 민주화 따위는 꼭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되면 좋지만 굳이 안 돼도 상관없는 옵션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건국 초창기의 할배 시절이건, 군사정권 시절이건 북한에게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사유재산, 신앙의 자유 같은 기본적인 건 애초에 진작부터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절대적으로 명심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관과 이념 논쟁에서 쓸데없는 소리에 '어 그런가 보다' 하고 끌려가지 않을 수 있다.
애초에 통일이라는 것은 당연히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없다면 통일 따위 전혀 할 필요 없으며, 꼭 남북 통일을 해야만 북한을 저렇게 개선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6. 전제조건

좌빨들의 선동은 대체로

  • 북한은 아주 평범하고 정상적인 체계이며, 지도자가 백성들을 먹여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는데도 불가항적으로 불가피하게 못살고 있다
  • 자본가가 근로자들을 강제 감금하고, 때려치우고 나가려는 사람까지 해코지 하면서 부려먹고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 (진짜 그러고 있는 곳은 따로 있는데??)

이 두 전제조건이 성립해야 말이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저건 전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 선동들도 그냥 bullshit이다.

종북 무리들이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그냥 거기 가서 살아라"라는 말을 절대 듣지 않는 것처럼,
악성노조들은 "악덕업주가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그 직장이 그렇게 싫으면 당장 사표 쓰고 때려치우고 나와라"라는 말도 절대로 듣지 않는다. 삼성은 싫지만 삼성이 주는 월급은 좋기 때문이다.

7. 정상적인 외국부터 돼야..

5번의 연장선인 얘기인데.. 남한이 북한과 통일을 하고 싶거들랑 북한을 정상적인 외국으로 만들 생각부터 해야 한다. 정상적인 외국조차 아닌 나라/집단하고 제대로 통일해서 정상적인 한 나라 한 체제를 만든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이 생각을 어떤 논객은 "통일의 지름길은 영구분단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일본이나 중국에 갈 때와 동일하게 북한도 외국으로서 자유롭게 왕래가 가능해야 한다. 인터넷도 되고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도 돼야 한다. 다시 말해 북한은 켕기는 게 없이 개방돼야 한다.
"민간에서는 북한하고 이미 할 거 다 하고 있고 불편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굳이 수뇌부를 합쳐서 정치적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나?" 정도가 되면 그때야말로 그놈의 우리 민족끼리 명분으로 슬슬 통일을 논의해도 괜찮다.

개방은 하나도 된 것 없이 북괴 체제는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면서 그냥 북에다 퍼주자, 무조건 오냐오냐..
이건 순도 99.99%의 간첩 역적 매국노 빨갱이이니 저러는 놈들은 몽땅 다 쳐죽여야 된다.

8. 같은 잣대

지금 사회 공산주의 친종북 정치인 패거리들이..

(1) 북한에게 무한 관용과 아량을 베풀듯이 어디 한번 "같은 민족"인 탈북자라든가 이명밝근혜 및 그 지지자들도 동일하게 대해 봤으면 좋겠다. 안 그럴 거면 민족드립 좀 집어치우든가..

(2) 맨날 재벌들 삥뜯어서 분배하자고 떠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지들도 자기 사재 한번 1%라도 기증· 기부 하는 꼴 좀 봤으면 좋겠다.
니들도 왕창 부자인 거 다 알고 있다. 남의 돈을 갖고는 무슨 생색을 못 내겠냐?
자기 돈으로 분배하는 건 선거법 위반이고, 세금으로 분배하는 건 합법인 식인 거...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인다.

9. 대북 전단

대북 전단이 아직도 굉장히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으며, 북괴 수뇌부에서 아주 무서워하고 골치아파 하고 있다는 걸 남쪽 빨갱이 정치인들의 저 히스테리한 반응을 보니 간접적으로나마 확신할 수 있다.
연체동물에다가 소금 뿌렸을 때 같은 본능적인 거부 반응 말이다.

그 전에는 솔직히 나조차도 “아이고 저래 가지고 북한으로 제대로 날아가긴 하냐? 보는 사람이 있긴 하냐?”
회의적이었는데.. 정신이 번쩍 든다. 진짜로 가고, 보는 사람이 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구나.
거리설교 때 나눠주는 전도지 이상으로 효과가 있다.

물론 정치인 말고 접경지역 주민들은.. 조금만 더 애국심이 있었다면 “우리 걱정은 말고 마음껏 뿌려라. 어차피 저놈들도 재래식 병력은 와해된 지경이고 우리 위협 못 한다. 지금 좀 불편 불안을 감내하더라도 저 북괴 정권을 빨리 끝장내야지.”

그랬겠지만.. 호의를 권리로 요구할 수는 없는 법이고, 현실에서는 안 중근 아들 같은 변절자를 마냥 비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건 넘어가자.

일제 시대 때도 권총이나 폭탄 의거 한 건 터지면 그거 보복으로 인근 주민들이 엄청난 불편을 겪었고.. 심지어 독립투사를 숨기고 있다는 누명을 쓰고 마을이 통째로 순삭 몰살당하기도 했다. 그 시절엔 독립투사들도 인근 주민에게 민폐 많이 끼쳤다, 그지?

10. 5 18

생일은 부모님께 감사하는 날이고
5 18은 나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분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11. 일관된 판단

본인은 다음 pair들이 논리적으로 완벽하고 정확하게 동치라고 생각한다.

(1) 교리 일치 없는 종교 통합 에큐메니컬 운동
vs 이념 일치 없는 불순한 남북 화해(?) 협력 짓거리, 퍼주기

(2) 킹 제임스 성경이 소위 original보다 더 낫고 더 우수한 이유 (전자는 실물이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 없음)
vs 친중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쁜 이유 (전자는 실물 존재, 후자는 현재 실물이 사실상 없음)

(3) 사탄 마귀 같은 건 없다. 지옥은 없다.
vs 종북 간첩 같은 건 없다.

(4)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일 3:18)
vs 아가리와 주둥이로만 자기도 김 xx 싫어하고 북한 체제 싫어한다고 말하지 말라. 정말 싫다면 저놈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지 말고 반일반미 친중종북 거짓 선동에 끌려가지도 마라.


아이템이 또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일단 여기까지.
예수밖에 구원의 길이 없다고 말하는 종교를 믿는데.. 그 교리를 텍스트로 명시하는 성경도 단 한 종류만 맞고 나머지는 틀렸다고 믿는 게 이치에 맞다. 그리고...

  • 예수님께 그냥 무릎을 꿇느냐 아니면 "경배"를 하느냐, (마 8:2 등 복음서에서 여러 곳)
  • 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이냐 "아이"이냐, (행 4:27)
  • 사탄의 왕좌냐, 아니면 그냥 "자리"이냐 (계 2:13)

이것처럼,

  • "자유 민주주의"냐 그냥 민주주의냐(혹시 인민 민주주의??),
  • "건국"이냐 정부 수립이냐,
  • "북한 공산 괴뢰"냐 조선 민주주의 공화국이냐

본인은 성경의 변개를 관찰했던 양심과 판단력을 완전히 일관되게 동일하게 적용했을 때, 오늘날 역사 교과서의 변개도 동급의 매우 불순하고 악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저 문맥에서 기어이 '자유'를 뺐다고라..
골 1:14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를 삭제한 것과 같은 급의 변개가 아닌가?
6· 25 사변 때 수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뭘 지키려고 그렇게 많은 피를 흘렸는데?

난 늘 강조하지만, 이 바닥은 동일한 방법론을 재귀적으로 일관되게 적용하여 판단한다. 참고로 성경과 역사를 합친 '교회사'도 진영과 관점에 따라 왜곡이 아주 심한 분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12 08:35 2020/09/12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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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 관순 열사의 모습

유 관순은 겨우 100여 년 남짓 전의 근현대 사람이고 초등학교 위인전에서도 언급되는 톱 네임드급 위인인 것치고는.. 검증되지 않은 myth와 알 수 없는 mystery가 의외로 많은 인물이다.
그래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추가적인 사료 발굴을 통해 정정된 사항들이 적지 않다. 오랫동안 1904년생으로 알려졌다가 1902년생으로 정정되고, 징역 7년형이던 게 5년으로 바뀌고, 형무소에서의 정확한 사인도 2013년에야 기록을 통해 밝혀졌지 않던가?

그 뿐만이 아니다. 이분은 멀쩡히 서울에서 순국했음에도 불구하고 유해가 남아 있지 않고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도 극히 드물다.
의열단 내지 한인애국단 소속의 독립투사들이 거사를 벌이기 전에 근사하게 혹은 비장하게 포즈를 취한 사진을 남기곤 했지만(안 중근, 윤 봉길, 이 봉창..) 유 관순은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는 학생이었고, 만세 운동 자체를 "난 오늘만 산다" 급으로 무조건 죽을 각오를 하고 벌인 건 아니었다. 애초에 "난 오늘만 산다" 같은 항일 투쟁 패러다임 자체가 3· 1 운동이 실패하고 이런 만세 시위만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겠다 싶으니까 등장한 것이다. 또한 그때는 경제력 없는 어린 학생이 사진을 쉽게 남길 수 있는 시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 1 운동 전날 밤에 유 관순이 자기가 직접 그린 태극기 하나 들고 동지나 친구들하고 포즈를 취한 인증샷 하나 없는 것은 일면 아쉬운(?) 점이다.
오죽했으면, 얼마나 사진이 없었으면 유 관순의 공신력 있는 독사진--단체로 같이 찍힌 것 말고--이랍시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것은 일제가 찍은 죄수 머그샷밖에 없다! 이게 유일하다. 신기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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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맹목적인 국뽕 반일 종족주의를 배격하고 조선 시대를 극혐하고 식민지 근대화론을 옹호하는 모 진영에서는 이 사진에 대해서 이렇게 의혹을 제기했다.
그 시절에는 미혼 소녀는 댕기머리이고 기혼 여성은 비녀+쪽머리가 보편적이었는데, 미혼인 유 관순이 왜 유부녀 헤어스타일이냐는 것이다.

유 관순은 안 그래도 저렇게 온통 의혹투성이인 인물인데 저 사진은 애초에 이화학당 학생 유 관순이 아니라 아예 다른 유부녀 동명이인 아줌마가 아니냐는 극단적인 의문까지 제기한다..;; 헐..
황당해 보이지만 완전 터무니없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아닌 것 같다.

다음은 유 관순의 형무소 동기이던 임 명애 열사의 머그샷이다. 이분은 1886년생으로 유 관순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더 많았고 진짜 유부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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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명애와 비슷한 연배의 유부녀인 어 윤희 열사도 머그샷이 이와 비슷한 풍이다.
그 반면, 1919년 말과 이듬해에 만세 시위 시즌 2를 일으켰다가 경찰서 정모를 했던 비슷한 연배의 여학생들 사진을 보자. 박 양순, 박 신삼은 명백하게 댕기머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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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경화라는 학생은 댕기를 머리 위로 감아올린 것을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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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10대 학생들은 얼굴이 명백하게 앳되어 보이는 반면, 오늘날 전해지는 유 관순의 얼굴은 꽤 노안이다. 내가 보기엔 인상으로나 헤어스타일로나 학생보다는 아줌마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_=;; 물론 우리는 그 이유가 고문과 구타를 너무 많이 당해서 얼굴이 부어 터졌기 때문이라고 배워 왔다.

그럼 학생과 아줌마의 중간에 속하는 이 사람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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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순경 열사는 1902년생으로 유 관순과 동갑이다. 다만, 투옥되었던 당시에 학생은 아니었고, 학교를 졸업해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딱 1920년 당시에 이분이 벌써 결혼까지 한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아니었던 것 같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구체적인 개인사가 전해지지는 않으나, 이분의 장녀라는 사람이 1920년대 중후반생으로 추정된다. 그 시절의 결혼 생활이 아이 없이 신혼만 5~6년씩 지속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 순경의 헤어스타일은 유 관순과 비슷한 쪽머리이다. 이 정도라면 저 시절 머그샷 사진의 헤어스타일과 당사자의 결혼 여부에 딱 유의미한 상관관계는 없을 수도 있다. 그리고 겨우 그 정도 의심스러운 정황만으로 유 관순 사진 자체가 가짜라는 결론을 내리는 건 좀 무리일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때는 윤 봉길의 체포 장면 사진을 갖고도 저건 진짜 윤 봉길 사진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가 재반박되고.. 그 정도 합리적인 의심과 의혹 제기 및 검증은 건전한 학문 발전을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특히 유 관순은 10대 소녀라는 특이한 프로필로 인해 지금까지 잘못 알려진 게 너무 많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최근에 추가로 발견되었다는 유 관순의 이화학당 입학 초기 사진을 첨부하며 이 주제의 이야기를 마치겠다. 이 얼굴이랑 불과 몇 년 뒤의 형무소 머그샷이 동일 인물이라 간주할 수 있겠는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이거 무슨 광수 얼굴 찾기 게임 같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주 기철 목사의 일화

예전부터 여러 번 언급한 적 있는 사항들을 다시 정리하자면..
본인은 예수쟁이 신자로서 주 기철 목사를 매우 존경한다. “다섯 가지 나의 소원”이라는 그의 설교문은 오래 전부터 내 타자연습 프로그램의 연습글로도 들어가 있었을 정도이다. 다만,

(1) 저 사람이 대단한 거지, 그 당시에 가족을 동반한 집요한 협박에 못 이겨서 신사참배에 타협한 다른 사람들을 ‘도를 넘게’ 욕하거나 매도하지는 않는다.
그 시절에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서 윤 봉길 의사를 비난하는 보도를 냈던 국내 언론사들을 친일매국(?) 어용언론이라고 욕하는 게 아무 쓰잘데기없는 어리석은 짓인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2) 전설처럼 따라다니는 ‘맨발로 못 위를 걸은 일화’는 도대체 언제 어느 형무소(의성? 평양?)에서 벌어진 일이고 출처가 누구의 증언이며, 신빙성이 있는 사건인지 내 노력으로는 분별과 검증을 더 못 하겠다.
일본으로부터 저 정도로 비슷한 레벨의 끔찍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어떤 분야의 지조를 지킨 건 신라 박 제상 이래로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3) 한국의 기독교 수난사 순교사가 오로지 일제 말기밖에 없었던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생각한다.
1950년 가을~겨울에 전국 각지에서 온갖 냉병기로 두들겨맞고 머리에 총알 박혀 순교한 더 많은 순교자들을 언급하는 건 무슨 정치 발언으로 매도돼 가니.. 정말 어이가 없다. 정상적이고 건전한 분별력을 지닌 상태가 아니다. 3· 1 운동 당시에 유 관순 말고 다른 여성 독립 운동가들도 재조명되어야 하듯, 이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3. 신념형 친일파 박 중양

세상에 유 관순이나 주 기철 같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다. 구한말부터 일제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인 중에는 아무 사심 없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 가깝게 지내기를 원했던 친일파도 있었고, 돈과 벼슬까지 받으면서 나라를 팔아먹은 나쁜놈, 마냥 생계형 부역이라고 실드 치기에는 도를 넘은 부역자 등 여러 종류의 친일파가 존재했다.

특히 세월이 흐르면서 1930년대쯤부터는 일본은 절대 망할 일이 없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회복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다는 인식이 짙어졌다. 그건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니 인정하고, 일본 내에서 2등 신민인 조선인의 인권과 권익을 향상시키는 운동을 하는 게 순리이겠다고 노선이 바뀌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박 중양(1872-1959)이라는 인물은.. 부귀영화와 개인 영달 기회주의형이 아니라 그냥 조선을 자기 신념상 너무 혐오해서 충성의 대상을 일본 정부로 바꾼 좀 이례적인 사람이었다. 김 옥균 같은 친일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개화파들이 잔혹하기 그지없게 가족까지 몽땅 숙청되는 걸 보고는 이놈의 X같은 야만적인 나라는 답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서지는 않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고 괴롭힌 것도 아니고.. 일제 시대 때 일본으로부터 월급 받는 관료로서는 아주 강직 청렴하게 처신했다고 한다. 다른 일본인들을 부하로 부릴 정도로 높은 등급의 관료가 됐으니 원... 윤 치호와 비슷한 위치 같은데.. 그 사람보다는 한 타이밍 더 일찍 신념이 저렇게 바뀐 셈이다.

해방 후에 반민특위에 회부됐을 때도 이 사람은 "일제가 그렇게 폭삭 망할지 몰랐어~! 그래도 처자식 먹여 살려야 했잖아!" 같은 구차한 변명 따위 없었다. "조선인들은 더 고매한 일본인의 통치를 받는 게 객관적으로 더 이익이다"라는 자기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저 팩트가 마음에 안 들어서 굳이 날 죽여야겠다면 죽여라. 난 아무 미련 없다. 하지만 나 말고 일제 시대 유능한 인재들을 친일파로 몰아서 해코지하지 말고 오히려 잘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해라. 그리고 애국자의 탈을 쓴 다른 위선자들에게 속지 마라."라고 당당하게 덧붙였다..;;

그러니 이 양반은 돈과 권력을 좇는 여느 기회주의형 악랄 친일파는 아니라는 것에 조사관들의 견해가 일치했다. 그리고 그들이 내린 결론은 "저 양반은 투옥과 처벌이 아니라 정신 감정이 필요하다"였다.

뭐, 조선 정부에서(고종과 민 씨 일가..) 개화파를 완전히 박살을 내는 현실을 똑같이 보고서 박 중양은 신념형 친일로 돌아섰다. 윤 치호도 자국민의 국민성에 절망한 나머지 변절해 버렸다. 하지만 구한말 때 직접 죽을 위기를 겪었던 이 승만은 그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솔직히 할배에 대해서는 그의 독선을 욕할 게 아니라 무슨 뚝심과 근자감으로 조선이 망한 후에도 외국에서 무국적자로 살면서 줄곧 독립 운동을 했는지.. 그걸 더 대단하게 여겨야 하지 싶다.

4. 이 승만 정권 때 처형 당한 최 능진, 조 봉암

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첫 헌정 체제이던 이 승만 1공화국은 군사정권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단과 6· 25 전쟁을 직접 겪었던 만큼 반공 성향이 매우 강했으며, 나라 분위기가 그쪽으로는 극도로 민감하고 경직돼 있었다. 통일이라는 건 당연히 북진 멸공 통일을 해야지, 감히 화해와 평화 통일 운운하는 것만으로도 빨갱이로 몰리고 잡혀갈 수 있었다.

난 개인적인 신념으로는 그게 이해가 되며 일면 옳다고도 생각한다. 김 일성 같은 사악한 저질 집단은 애초에 대화고 화해 따위가 가능한 상대가 아니다. 놈들의 개수작에 속지 말고, 힘으로 완전히 없애 버릴 수 없다면 단호하게 분리와 격리라도 하는 게 백 번 옳다. 통째로 적화통일이 될 뻔했던 것을 온갖 개지랄 발광 발악을 한 끝에 겨우 반반으로 퉁친 것이다.

다만, 모든 애국자나 독립운동가들이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할배와 같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와 공산주의자에 대한 정확한 분별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저것들은 지금 나라의 여건상 친일 부역자 출신 군경을 동원해서라도 몽땅 제거해야 한다는 것까지 생각이 일치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최 능진의 경우 경찰 고위 간부로서는 아주 이례적으로 친일 부역자 청산을 부르짖었고, 이 때문에 이 승만뿐만 아니라 조 병옥과도 크게 대립하여 갈등을 빚었다. 최 능진은 과거의 일제 시절부터도 안 창호 라인이었고 독불장군인 이 승만을 싫어했다.

결국 이 사람은 이 승만 정권의 눈밖에 나고 종종 체포되고 투옥되다가.. 결국 6· 25 전쟁 중에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빨갱이 부역 혐의로 처형당했다.
훗날 비슷한 연배의 조 봉암(1898-1959)이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들은 통일도 대화와 평화 노선을 주장했다.

자, 지금 할배를 정치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은 이 승만의 국제연맹 위임 통치 청원을 보고도 나라를 팔아먹네 뭐네 매국노네 하면서 날뛴다. 그렇지 않은가?
1950년에 조 봉암이 제안했던 "UN 감시 하의 총선거를 통한 평화 통일"은 그들이 국제연맹 위임 청원을 싫어하는 것만큼이나 빨갱이로 몰리기 딱 좋은 혐오 발언이었다. 두 케이스 다 발언 당사자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며 오해가 있었다.

솔직히 이 승만이 외교 노선을 아무리 펴봤자 국제 연맹 시절의 강대국들이 일본의 합법적인 식민지이던 조선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그와 완전 동급이다. 저런 민족주의자 애국자들도,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인물이었지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북괴가 공산 적화 흉계를 내려놓을 리는 만무했으며 남북 평화 통일 따위는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다.

우리 끼리 친일 청산도 다 하고 공산화도 되지 않은 깨끗한 나라..? 도대체 무슨 수로 가능하다는 건가? 이렇게 국민성 더럽고 국력은 쥐뿔도 없던 헬조선 반도 땅에서? 이 승만 없이 김 구나 여 운형만 대통령 됐으면? 광복군이 제대로 참전만 했으면? 그러면 김 일성도 이렇게 흑화하지 않고 개과천선했을까? 허 참.. 난 내 사고실험의 결과를 봐서는 전혀 상상이나 동의가 되지 않는다.

세상에는 이렇게 다양한 관점에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나라가 앞으로는 7, 80년 전 같은 무지와 야만의 시대를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반쯤 불가피, 반쯤 지나친 오바). 그리고 빨갱이 자체가 없어진다면 억울하게 빨갱이로 몰려서 고생하는 사람도 없어질 테니 이 나라의 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9 08:33 2020/09/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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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 이후부터 세계는 제국주의와 왕정이 몰락했으며, UN을 비롯한 온갖 국제기구들이 생기고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지금과 얼추 비슷해졌다.
그런데 그때로부터 대략 반세기쯤 전이던 1800년대 말~1900년대 초 사이는 상황이 어땠을까?

우리나라야 아직 한양 시내 길바닥에 똥덩어리가 굴러다녔고 어설픈 친일 성향 개화파들은 고종과 민씨 일가에게 작살이 났던 때이다.
그러자 일본은 각성하여 민비를 살해하고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에서 경쟁자들을 쳐발랐으며, 조선을 군대 해산, 외교권 박탈 등의 순으로 차근차근 차 떼고 포 떼서 식민지로 만들어 나갔다.

김 구가 암살 당하는 바람에 남북 사이의 온건 중재자가 없어져서 북한이 더욱 폭주하고 6 25 개전이 앞당겨졌다고 보는 주장이 있는데.. 난 그에 대한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논리라면 조선이 김 옥균에게 행한 야만적인 짓거리가 일제를 자극하고 조선을 더욱 강경하고 폭압적으로 대하게 만들었다는 견해도 동등하게 성립할 것이다.

그렇게 조선이 망해 가던 동안 바깥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꽤 의미심장한 일들이 있었다. 특히 철도와, 자동차와 증기선, 전화의 발명 덕분에 나라와 나라들이 서로 손잡고 가까워지려는 시도가 있었다.

(1) 제네바 협약이 2차까지(1864, 1906) 맺어지면서 "전쟁을 해도 최소한의 룰은 지키면서 하자. 전투력을 상실한 포로나 부상병에게는 최소한의 인도주의적인 대우를 하자" 이런 규칙이 제정됐다. 만국 우편 연합(1874)이라는 국제 기관도 생겼다.

(2) 더 나아가 만국 평화 회의라는 게 1899년과 1907년에 두 번 개최되었다. 장소는 모두 네덜란드 헤이그.. 그렇다. 2차의 경우 우리나라도 참석하려 했지만 일제의 방해 때문에 그러지 못한 바로 그 회의이다.
이 시절의 명칭에는 요즘은 잘 쓰이지 않는 '만국'이라는 단어가 유독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다. 세계(world)가 저렇게 번역된 건데, 이것도 일본에서 만든 용어인 것 같다.

(3) IPA라고 불리는 국제 음성 기호(1888)가 처음으로 등장했으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인공어 에스페란토(1887)도 공표되었다. 즉, 언어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가 있었다.

(4) 근대 올림픽 경기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1896, 그리스 아테네)

(5) 유대인들 사이에서 이제 우리 땅에 돌아가서 모여 살아야겠다는 '시온주의'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국제 시오니스트 총회는 1897년부터 1901년까지 총 5회 개최되었다. 그 전에 프랑스에서 벌어졌던 반유대주의 드레퓌스 누명 사건이 상당한 기폭제로 작용했다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이다.

(6) 한편, 인류 역사상 최초로 빨갱이라는 것이 이때쯤 생겼다. 공산당 선언(1848, 1870~)과 인터내셔널가(1870~1880)의 유래를 생각해 보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1859), 그리고 웨스트코트와 호르트의 성경 개정..을 가장한 변개(1881)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변화이다.

(7) 암울했던 조선 구한말과 달리, 이 시기는 유럽에서는 '벨 에포크'라고 불리는 과학 기술 황금기였다. 물론 거기 자국민도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건 식민지와 별 차이 없었겠지만, 나라 자체는 부강해지는 중이었다. 유럽 내부에서는 별다른 전쟁도 없이 평온하고, 각종 낭만주의 낙관주의가 싹트고 있었다.

"15소년 표류기, 우주 전쟁, 80일간의 세계 일주"처럼 미지의 신세계를 갈망하는 소설이 나왔으며, 거대한 대포를 쏴서 우주로 나가는 상상도 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유럽 스타일로 근대화를 잘한 덕분에 저 때가 나름 잘나가던 리즈 시절이었다. "나디아"가 괜히 저 시기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리고 20세기 초엔 아직 제국주의와 우생학이 있었다. 최첨단 과학 기술을 이룩한 백인은 우월한 반면, 유색 인종들은(일본은 제외..;;) 진화가 덜 됐고 미개하다. 그 때문에 백인들이 가서 적당히 부려먹고 산업화시키고, 기독교로 개종도 덤으로 시켜 주는 게 걔네들한테도 좋다는 생각이 만연해 있었다.

아직 핵무기는 없었지만 기관총만으로도 충분히 인류 최강의 병기로 여겨졌으며 미개인들을 제압하는 데 충분했다.
(기관총 발명 이전 시절의 식민지 개척이나 노예 반출은 적극적인 침략과 납치보다는.. 원주민들 내부에서 이미 노예였던 사람들을 사 온 게 더 많았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나중에 나치즘도 20세기 초 사람들의 관심사와 트렌드가 축적된 것들이 약간만 변조되고 응용되어 만들어졌지, 아무 뜬금없이 툭 튀어나온 건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관총이 처음에는 유럽인이 미개인들을 제압할 때 쓰였지만 나중에 1차 대전 때는 결국 같은 유럽인들을 참호에 처박아 넣고 죽일 때도 쓰이게 됐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다..;;

본인은 한때는 초보 역덕들의 성지인 2차 대전 시절 역사만 흥미진진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반세기쯤 더 전의 20세기 초 역사에도 관심이 간다. 러일 전쟁처럼..
내가 철도에 입문했을 때도 처음에는 오로지 지하철, 새마을호 일색이다가 증기 기관차에까지 관심이 확장된 건 나중의 일이었다. 그것처럼 이쪽 덕력이 느니까 더 옛날까지 관심이 확장된 것 같다. -_-;;

자고로 역사라는 건 (1) 지금과 별 관계도 없는 너무 먼 고대사보다는 근현대사를 더 비중 있게 봐야 하고, (2) 국사와 세계사를 같이 연계해서 봐야 한다는 게 본인 생각이다. 유럽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역사도 말이다.
그래야 어떤 형태로든 역사왜곡 국뽕을 차단할 수 있고, 약간의 따끔한 동심파괴 팩트폭격 대신 역사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 지금이 무슨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국뽕이나 투여하면서 정신승리 대리만족을 해야 하는 암울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본· 독일이 과거의 반인륜 전쟁 범죄를 반성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이 나라 역시 조선 말기가 얼마나 개막장으로 형편없고 병신같았는지를 두고두고 곱씹으면서 130여 년 전의 삽질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 한다.
그걸 알고 나면 반대급부로 한민족 역사상 현재 맨 마지막으로 세워진 국가 대한민국이 얼마나 대단한지도 저절로 체득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7 08:31 2020/09/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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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옥천-대전-청주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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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경부 고속도로 구도로에 있는 옥천 터널 중에 현재 완전히 쓰이지 않게 된 '상행선' 구간이다. 작년에는 상행선 터널의 답사가 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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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선 터널은 의외로 식물 공장을 운영하는 '넥스트온'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 전세를 내서 쓰고 있었다! 대표이사는 반도체 기술자 출신이고.. 이게 꽤 획기적인 사업 아이템이었는지 CNN에서 소개된 적도 있다고 한다.
이번 여행을 통해 그냥 공원 형태로 개방(구 왜관), 와인 관광지로 개방(구 남성현)에 이어 식물 공장으로 마개조된 폐터널까지 구경하게 됐다.

경부 고속도로 옥천 터널은 처음에 만들 때는 조국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없는 자본과 부족한 기술로 그렇게도 힘들게 어렵게 고생해서 뚫었는데.. 약 30년 동안 현역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은퇴 후 용도가 저렇게 바뀌었다. 사람이 젊은 시절에 개같이 일하고 돈 벌다가, 늙어서 은퇴한 뒤에는 시골 가서 농사 짓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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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은 경부 고속도로 쪽에만 구도로 폐터널이 있느냐? 그렇지 않다. 철도 분야에도 유명한 레거시가 있다.
2004년, 경부 고속철도가 1차 개통만 했을 때는 대구에서 대전 방면으로 가는 고속선이 무려 옥천에서 끊어졌다. 거기서 대전까지는 짧지 않은 거리이지만 KTX도 얄짤없이 기존선으로 달렸다. 그때 경부선 기존선과 고속선을 잇는 연결선은 '대전남연걸선'이라고 불렸다.

그러다가 무려 10여 년 뒤, 대전과 대구에도 더 깊숙한 고속철 도심 통과 구간이 개통하면서 이 연결선은 쓰이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김천구미 역이 개통한 뒤부터는 대전-대구 사이에 기존선을 달리는 KTX는 전혀 존재하지 않게 됐기 때문에 연결선이 더욱 필요가 없어졌다.
대전-서울 사이에서는 수원 정차 때문에, 그리고 대구-부산 사이에서는 구포· 밀양 정차 때문에 아직도 기존선 주행 KTX가 있다. 그러나 대구-대전 사이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인근의 옥천 주민들은 옳다구나 하고 대전남연결선을 하루속히 철거해 주길 바라고 있지만.. 연결선도 고가 교각 형태인 구간이 많고 다 철거하는 데 몇백 억의 예산이 필요한 실정이다.
옥천군에서는 철거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일부 구간을 레일바이크 같은 관광지로 재활용할 길을 찾고 있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고 시간만 하염없이 가는 중이라고 한다.

작년의 옥천 여행 때는 철도 답사가 전무했으니, 이번 기회에 옥천-대전을 고속도로 대신 국도 4호선으로 달려 보았다. 그러면서 과거의 영광만을 간직한 채 열차 운행이 끊긴 대전남연결선 선로를 구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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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에서 세천, 판암, 대전 역 쪽으로 가려면 서남쪽으로 진행해야 한다. 국도와 경부선 철도의 선형도 그렇게 돼 있다. 본인 역시 국도를 계속 따라가며 거기를 답사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고, 세천삼거리에서 지방도 571로 갈아탔다. 고속도로 건너편의 '신상로'라는 길로 진입했다.

이 길도 딱 보면 알 수 있듯, 과거 경부 고속도로의 폐도 구간이다. 구도로가 옥천뿐만 아니라 대전 외곽에도 이렇게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비룡 JC가 근처에 있기도 한데, 여기는 통영-대전 고속도로(35)가 개통한 1990년대 중반에 선형이 개량되었지 싶다.
이 길을 통해서 본인이 최종적으로 진입한 곳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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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를 따라 지나가는 꼬불꼬불 산길이었다.
이 길을 이 기회에 한번 지나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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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동 전망대라고 불리는 곳 주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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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로가 침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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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산길과 시골 마을이 계속 이어졌다.
여기도 행정구역상 대전이라니~! 게다가 중간에 동구에서 대덕구로 구가 바뀌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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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을 따라 계속 북상하다가 금강을 만나고, 말로만 듣던 대청댐에 도달했다.
수도권에 팔당이 있다면 충청권에는 대청이 있는 셈이다. 이건 댐 근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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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여차여차 하다가 꼬불꼬불 산을 타고 올라가 대청댐 전망대에도 도달했다. 마침 날씨가 맑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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댐 아래는 아직도 흙탕물이고 수위가 평소보다 높은 게 느껴진다. 바다는 쓰나미와 만조 때문에, 그리고 강물은 비와 댐 방류 때문에 수위가 오른다는 흥미로운 차이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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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사진이다.
동락 전투 기념 공원에서 시작해서 대청댐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리니.. 여행을 다닌 대부분의 지역은 경상도이지만, 여행의 시작과 끝은 어째 충북에서 인증하게 됐다.

청남대도 근처에 있고 이정표도 봤지만, 거기는 시간 관계상 가지 않았다. 창원에서 청해대를 보고 여기서 청남대까지 봤으면 그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 됐겠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이제 여기서 중부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문의 IC 진입). 고속도로는 딱히 정체 구간은 없었지만, 느린 대형차가 자기보다 더 느린 다른 대형차를 느릿느릿 추월하기 위해 1차로로 들어오는 일이 굉장히 잦았다. 이게 뒷차들의 원활한 고속 주행에 큰 지장을 줬다.

이렇게 3박 4일 동안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좋은 추억을 만들었다. 총 1200km를 넘게 주행하면서 경북 6· 25 접전지, 박 정희 대통령 관련 공원, 새마을호 열차, 경부선 구터널, 경부 고속도로 구도로와 구터널을 들렀다. 그러면서 산과 강과 바다도 덤으로 구경했다. 비 내리는 날씨도 땡볕 뙤약볕보다는 나은 경험이었다.

내년에는 서해안과 서남쪽을 답사할 것이고, 내후년에는 강원도 북부 전방을 다시 가 보는 것으로 일단 계획은 잡아 놨다. 이런 식으로 휴가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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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4 08:33 2020/09/0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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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창원 관광

이튿날 눈을 떠 보니 근처의 청도천은 여전히 수위가 높고 흙탕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하늘은 완전히 맑고 파래졌다.
이제 본인은 더 남쪽 창원으로 향했다. 이 날은 일요일인 관계로, 창원 진해에 있는 등대 성서 침례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했다. 담임 목사님과는 예전에 신앙 서적을 같이 번역하기도 하면서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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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길에 국도 25호선인 시골 들판길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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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드린 뒤엔 목사님, 그리고 몇몇 교회 분들과 같이 점심 식사를 했다. 그 뒤엔 목사님과 본인만 근처 관광을 다니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지금까지 말로만 듣던 진해선 경화 역 공원이었다.
벚꽃이 잔뜩 피는 진해 군항제 때 관광객이 제일 몰리는 곳이긴 하지만.. 본인의 관심사는 벚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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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역에 동차형 새마을호가 있다면, 여기엔 기관차-객차형 새마을호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 역시 이런 게 있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찾아갔다.
단, 여기는 객실 내부가 다른 용도로 건물처럼 완전히 개조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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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찬재 목사님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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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구시가지와 진해를 가로막는 언덕 중 하나인 안민 고개에서 남해와 진해 시내를 쪽을 내려다 본 모습이다. 이때는 날씨가 다시 흐려지는 중이었다. 사실, 이때가 여행 기간 전체를 통틀어서 날씨가 제일 변덕스럽게 널뛰기 하듯이 변했었다.

창원에는 현대로템 공장이 있고 진해에도 해군 기지, 해군 사관학교, 육군 종합 정비창 등 보안 시설이 무척 많다.
그래서 여기는 위성/항공 사진 지도에서 산이라고 표시된 곳이 진짜 산인지 아니면 보안상 가려진 곳인지 헷갈리는 곳이 많으며, 인천과 마찬가지로 본토와 인접한 남해안 바닷가에 딱히 해수욕장이 있지는 않다.

자연 해변 관광을 즐기려면 거제도 같은 남쪽이나 전라도 같은 서쪽으로 더 가야 한다.
그에 비해, 엄청난 대도시이면서 본토의 해변에 해수욕장도 남아 있는 부산이 이례적인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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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기지 근처에는 여기가 영화 "연평해전"의 촬영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더라.
사건의 실제 배경은 평택 기지이지만, 그 영화가 촬영된 곳은 평택보다 더 한산한 후방의 진해 기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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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희생자를 잠수 수색하다가 과로로 순직한 한 주호 준위의 동상이다.
잊지 말아야 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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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는 진해 해양 공원을 다니면서 철도나 안보, 역사 같은 다른 의미는 없이, 경치 구경만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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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무인도들이 콕콕 박혀 있는 건 동해나 황해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하롱 베이의 한국판 같았다.
나도 자그마한 보트를 장만해서 매일 이 섬 저 섬 돌아다니면서 텐트 치고 캠핑을 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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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해수욕장은 아니지만 이 정도 모래사장도 주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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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은 이 정도까지 했다.
주 기철 목사 기념관이 여기 근처에 있었지만 못 갔다. 주일성수 정신이 너무 투철한지, 저기는 여느 기념관답지 않게 월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휴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해대'라고 불리는 이 승만 별장도 있다고 들었지만 해군 기지 내부에 있어서 보안과 코로나 창궐의 이유로 인해 못 갔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연이 있는 곳을 못 간 대신, 자연 경치 구경을 더 오래 하면서 힐링을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진해와 마산은 모두 창원시에 흡수· 통합되어서 지금은 창원 내부의 구 이름 정도로나 남아 있다. 경상북도에서 점촌이 문경에 통합된 것처럼 말이다.
옛날에는 '구마 고속도로'라는 것도 있었고(현재는 45 내지 451번 고속도로로 변경), 마산이라고 하면 김 주열 열사라든가 부마 항쟁처럼 뭔가 항쟁의 지역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오늘날은 마산이라는 이름이 싹 없어져 있다.

이제 아쉽지만 서울로 돌아갈 때가 됐다.
목사님과 작별인사를 한 뒤 서울로 돌아갔는데.. 작년에 갔던 옥천의 경부 고속도로 폐구간을 다시 찾아갔다.
시간도 마침 자정이 됐으니.. 거기서 마지막 캠핑을 한 뒤, 이튿날 아침엔 거기 일대 답사를 추가로 진행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9/01 19:35 2020/09/0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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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청도 관광

짧은 시간 동안 이곳 저곳을 우산 들고 돌아다니느라 꽤 힘들었는데.. 곧장 또 청도로 이동했다. 칠곡에서 대구까지는 경부 고속도로(1), 대구에서 청도까지는 대구-부산 고속도로(55)로 답이 딱 나왔다.
경부는 차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니는 차도 그 이상으로 많고 비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전만치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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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와인 터널은 남성현 역에서부터 길 안내가 잘 돼 있어서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길 곳곳에 토사와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어서 분위기가 심상찮더니, 역시 폭우로 인해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래서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주변 경치 사진만 몇 장 찍었다.

왜관에 이어서 청도까지 경부선 폐터널을 연달아 감상하는 것을 노렸는데.. 아쉽다. 어쩐지 주변에 주차된 차들이 너무 없어 보이긴 했다.
허탕 치고 돌아가는 관광객들에게 주변 상인들이 복숭아라도 팔려고 들이밀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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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람 이름인지 단순 사자성어인지 알 수 없는 이 한자 문구는 경부선을 건설하던 당시에 일본인이 새겨 놓은 것인데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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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 터널에 못 들어간 대신,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빗길을 뚫고 대신 찾아간 곳은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과 내부의 기념관이었다. 청도에 이런 역사적 사연이 있었구나~!
단, 놀랍게도 포항에도 기계면에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이 있으며, 두 지역이 서로 자기가 새마을 운동의 원조라고 주장하며 싸우는 중이라고 한다..! 이름도 참 새마을스럽게 '기계'네..;;;

다만, 두 곳의 자료를 대조해 보면, 시기적으로 원조 발상지는 청도가 맞는 듯하다. 포항 저 동네는 새마을 운동이 전국적으로 시작되고 나서 첫 성과가 가장 탁월해서 대통령에게 직접 칭찬을 들은 마을이다. 관계가 그렇게 정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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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우리나라 농촌은 저런 대대적인 마개조 사업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개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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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기념관은 단순히 원조가카의 치적을 자랑하는 보수 성향의 성지가 아님을 주의하라. 1957년은 아직 1공화국이지, 박통이 집권하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박통의 집권 전부터 이 마을에서 자체적으로 몇몇 지도자들이 스스로 "잘 살아 보세"를 외치면서 힘을 합쳐서 길을 닦고 주민들 의식 개조 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우리 마을 코앞에 경부선 철길이 지나는데 여기다가 열차도 세워 달라고 철도청에다 투서를 찔러 넣고 돈 모아서 철도역까지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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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1969년 여름, 경상도의 수해 현장 순시를 마친 박통의 눈에 이곳 신도리 마을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이곳의 내력이 보고되었다.
이것을 보고 박통은 feel이 꽂혀서 그 해 11월에 농촌 근대화 촉진법을 발표했다고 한다..;; 류 태영 박사 같은 참모의 도움으로 "근면 자조 협동"을 내세우며 대대적인 "우리는 할 수 있다 / 잘 살아 보세" 의식 개조 농촌 근대화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의외로 1960년대 3공 시절에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이런 것만 있었지 국가 차원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아직 없었다.
그러니 그 시절부터 자체적으로 근대화 운동(?)을 하고 있던 마을이라면 새마을 운동의 발상지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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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새마을 운동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최고 등급 열차 이름도 새마을호가 되고... 박통의 따님은 '새마음(!!!)의 길'이라고 20대 중반의 나이로 책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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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마을 운동은 우리나라가 K팝, 한류, K방역-_- 같은 것보다 더 선하고 건전한 문물을 세계에 전한 것이었다.
이웃의 중공이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같은 뻘짓을 하면서 자폭하던 동안, 한국은 그나마 제정신 박힌 건전한 운동을 하며 중흥을 이룩한 것에 그 후손들은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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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카는 대통령이 되기 1년 남짓 전에 여기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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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더 이상의 기념관 내부 사진 소개는 생략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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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엔 공원도 넓게 잘 꾸며져 있었다. 날씨가 맑을 때 왔으면 경치가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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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에 이어 여기서도 박 정희 대통령 동상을 보게 되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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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거 역은 실제 역사는 수십 년 전에 철거되고 없지만, 이 공원 내부에 레플리카가 지어져 있었다. 마치 중앙선 구 능내 역, 영동선 양원 역, 함백선 함백 역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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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원은 이런 풍경의 마을 내지 펜션촌으로도 이어졌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개천은 역시 흙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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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공원처럼 여기도 이렇게 산의 측면에다가 자기 이름을 새겨 놓은 구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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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이 철거되고 역명판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 마치 옛날 군함 백두산함이 스크랩되고 현재 마스트만 남아 있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 발상지 기념 공원을 답사한 뒤 오늘,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청도 역이었다. 왜냐하면 거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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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역한 지 벌써 7년이 넘은.. 과거 한국 철도계의 왕자 새마을호 전후동력형 디젤 동차 한 편성이 전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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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대해 말은 오래 전에 들었지만 성지 순례를 이제야 하게 됐다.
새마을호 디젤 동차 실물을 만난 기쁨도 잠시.. 열차의 보존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표면 곳곳에 부식이 진행되고 있고, 열차로 올라가는 사다리에는 거미줄이 쳐져 있어서 몹시 아쉬웠다. 심지어 거미줄에 큼직한 거미가 붙어 있기까지 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관리를 안 하고 신경을 쓰고 지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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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내부에는 새마을호 열차뿐만 아니라 아주 자그맣게 토속 공원이 꾸며져 있기도 하다. 예전에 중앙 고속도로 단양 휴게소 부산 방향의 테마 공원의 하위 호환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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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이것으로 둘째 날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었다.
해가 진 뒤에야 허기를 달랜 뒤, 잠은 교외의 어느 으슥한 공원 정자에다 텐트 치고 잤다. 환상적이었다. 비는 저녁쯤에 그친 듯했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9 19:36 2020/08/29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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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낙동강 일대 관광

칠곡 관광의 제1부는 전적 기념관 구경이었고, 제2부는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에서 낙동강을 따라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있는 "왜관 소방서 앞 사거리" 일대 답사 형태로 진행됐다.
여기는 경부선 철길이 단선이던 시절에 쓰였던 구 철교(지금 "호국의 다리")와 구 터널이 남아 있으며, 이것 말고도 아기자기한 의미를 지닌 공원들이 가까이 밀집해 있었다. 주차 걱정도 전혀 없어서 더욱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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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구 경부선 왜관 터널의 입구이다. 경부선이 단선이던 시절, 1905년부터 적어도 1930년대 말까지 약 30년 동안은 철길이 여기를 지났다는 뜻이다. 지금은 터널 바로 옆에 식당 건물이 들어섰다.
이런 폐터널은 사유지의 창고로 개조되어 방치되는 편이다만.. 얘는 등록문화재로 정식으로 등재되고 터널의 양방향이 뚫려서 공원으로도 이어지게 개조되었다. 지방 정부 차원에서 보존을 위해 나름 노력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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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나 터널 안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 바닥에는 일부 빗물이 떨어지고 고인 곳도 있었다.
터널의 유래를 설명한 표지판 그림도 옆에 같이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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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널은 근처의 "왜관 소공원"이라는 아담한 공원으로 이어졌다. 공원은 여기 저기에 공터와 정자가 있어서 경치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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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과 같은 열매가 열린 가로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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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 소공원의 길 건너편에는 '애국 동산'이라고 칠곡 출신의 독립운동가 10여 명이 으리으리한 묘비와 함께 소개돼 있는 묘지 언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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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병철(1903-1945). 유 관순과 거의 동갑내기로 10대 중반의 나이로 칠곡에서 3· 1 운동에 참여했다가 경찰서 정모 한번 했고..
그 뒤로 임시정부와 신간회에 후원, 야학 교사, 그리고 이미 다 와해되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독립군(?) 군자금 모집까지 다양한 분야 계열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한 분이다. 이 때문에 3· 1 운동으로부터 거의 20년 가까이 뒤인 1938년에 한번 더 경찰서 정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 정도 이력만으로 그는 일제 말기에 불령선인으로 찍히기에 충분했다. 감시를 받으며 지내던 와중에 1945년 여름, 사실상 마지막 의거인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터지자 또 어거지 같은 꼬투리를 잡혀 왜경에게 체포되었다.
그래서 아마 호송 열차를 타고 대구로 끌려가는 길이었지 싶은데.. 그는 열차가 낙동강 철교를 달리고 있을 때.. 비록 손은 결박 당했겠지만 경찰들을 몸으로 뿌리치고 확 뛰쳐나가서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가 순국한 때는 8월 7일.. 경부선이 전구간 복선화가 완료되어 새로운 낙동강 철교가 개통한 지 겨우 1년 남짓 된 시절이었고, 저 때는 무엇보다도 히로시마에 작은 꼬마가 떨어진 바로 다음날이었다.
1주일~열흘 남짓 동안 조금만 수모를 참고 버텼으면 조국의 광복을 보고 석방돼 나왔을 텐데 안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그런 바깥 소식, 게다가 일제에게 불리한 소식을 접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총칼 폭탄으로 일본인을 죽인 것도 아니고, 저 정도 행적은 사형 당할 정도의 죄도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런 시기에 또 잡혀 들어가면 무슨 꼬투리를 잡혀서든 살아서 나오기 힘들 거라고 예상했던 것 같다. (영원히 행방불명된 김 익상 의사의 최후와 비슷..)
아니면 고문 당하면서 동지들의 신변까지 실토하게 될 것을 염려했거나..

내가 여러 번 강조하지만 일제가 원폭 맞아서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빠져나온 것은 미국에게나 우리에게나 매우 엄청난 행운이었다.
자국민한테도 1억 옥쇄 X랄하던 미친놈들이 시간이 충분했으면 나가더라도 감옥에 갇혀 있던 항일 애국지사들을 다 죽이고 증겨 인멸하고 파괴하고 나갔을 것이다.

동남아에서 도망칠 때도 위안부들 다 죽이고 나갔던 것처럼. 히틀러가 패전을 앞두고 파리를 몽땅 불지르려고 했던 것처럼..
도 병철 같은 사람이 체포되던 중에 괜히 자결을 한 게 아니었다. "1주일만 참았으면 됐을 텐데" 같은 아쉬움도.. 결말을 다 아는 후손들이나 할 수 있는 얘기이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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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념비의 뒷면에는 여기에 무덤은 없지만 어쨌든 칠곡 출신의 애국지사들 수십 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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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언덕의 꼭대기에는 UN이라는 글자가 크게 새겨진 왜관 지구 전승비가 놓여 있었다. 여기는 정식 현충원은 아니지만 참 독특한 보훈 시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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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터널, 소공원, 애국 동산 다음으로 경부선 구교량이라 할 수 있는 '호국의 다리'를 반쯤 건너 보는 것으로 칠곡 관광을 마무리했다.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강물은 온통 흙탕물이고 풍경은 뭐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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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강변 공원도 금방이라도 침수될 듯 물바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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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도 중앙선의 옛 시내 관통 구간이 교량(장군교)에서 폐터널로 바로 이어지는 구간이 있는데.. 마치 그런 걸 보는 것 같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0/08/27 08:35 2020/08/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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