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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서 잘잘못과 선악 구도를 평가할 때 어지간해서는 병크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감안되고 "그 상황에서는 너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얘도 사실 알고 보면 착한 놈이다 / 시대적인 한계였다" 같은 실드가 작용한다. 하지만 정말 도저히 실드가 안 쳐지고 절대적인 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쁜놈들도 드물게 있다.

과거 20세기 중반까지는 양대 추축국이던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그리고 현재는 북한 정권과 IS가 이 정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섰다고 해서 다 북한처럼 된 건 아니었는데 왜 저 동네만 저렇게 최악에 최악의 막장으로 곪았을까? 김 일성은 처음에는 소련의 꼭둑각시로 시작했다가 어떤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정치 라이벌들을 몽땅 숙청하고 김씨 왕조를 이뤄 냈을까?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잘 숙지해야 종북 좌빨들이 벌이는 역사 왜곡 싸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총통 같은 절대권력에 이를 수 있는 처지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야당들을 야금야금 몰아내고, 천부적인 웅변술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특히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대중 공포심을 조장하여... 누구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방법의 약점만 최대한 요리조리 파헤쳐서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꼼수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런다.
북한과 나치에 비해 IS나 일제는 생성 과정이 상대적으로 덜 궁금한 편이다. 이 글에서는 나치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키워 준 꼴이 되어 오늘날 독일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은 못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뒤 국민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야금야금 통제하고 학교와 유치원까지 작은 병영처럼 꾸며서 자라나는 애들을 히틀러의 홍위병 총알받이로 키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유대인 학살에 장애인 말살 등 끔찍한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짓의 원흉인 히틀러가 열성적인 동물 보호론자였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동물 학대를 처벌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물 학대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반하며, 그걸 저지르는 사람은 사람까지도 학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동물 보호론자와 인간 백정 성질을 모두 지닌 캐릭터는 저런 통념(?)으로는 존재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치 음란물과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접한 사람이 실제로 유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지 상관 관계만큼이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나치 당 + 히틀러의 재임 기간은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거의 동일하다(1933-1945, 약 12년).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다 끝내 놓고 좋은 세상이 오기 직전에 히틀러보다 불과 몇 달 일찍 병사했다.
히틀러의 휘하에서 독일이 미쳐 가는 와중에, 나치의 지배를 받는 외국 국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 자국민들은 그저 총칼 위협에 굴복하여 침묵만 했을까?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히틀러가 하는 광기 어린 인간 숙청과 정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조만 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장미단'(White Rose)이라고 청년이 주축이 된 소규모 비정치 비폭력 저항 단체가 있었다.
백장미단은 백색 테러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 없고 정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스타일로 움직였다. 주된 활동 방식은 공공장소에서 몰래 '삐라'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를 비판하고 나치의 비인간적 만행을 폭로하고 "우리나라는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치는 얼마 못 가 패망한다. 정부의 선전선동에 속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는 세계 인류 앞에, 역사 앞에서 죄인으로 기록되지 말자." 이런 메시지가 담긴 논리정연한 글을 배부했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겨우 20대 초중반 나이인 '한스 숄'과 '소피 숄'(1921-1943)이라는 이름의 남매였다. 독일어에서는 음절 초의 s는 z로 발음되기 때문에 여동생의 이름은 '조피'가 더 정확한 표기이지만, 국내에서는 영어 스타일의 '소피'라는 표기가 더 유명한 듯하다. 이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남매가 모두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을 정도로 똑똑했고, 한편으로는 집안도 남매의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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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대학생인 게 얼마나 큰 특권이냐 하면, 대학교 재학생은 국가적인 엘리트이기 때문에 군대 징집이 면제되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친 군국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전시에 얼마나 큰 혜택을 줬는지 상상이 되는가? 대학은 개나 소나 다 가는 필수가 됐고 군대 휴학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지금의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남매도 어린 시절엔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에 열심히 동참했으며, 히 총통에게 충성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면서 남과 다른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몰개성 세뇌 교육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됐으며, 자기 나라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침략 전쟁과 장애인과 유대인 학살까지 접하면서 저항하는 쪽으로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오빠가 먼저 백장미단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에 동생도 동참하고 일부 대학 교수 등 동지가 조금씩 더 붙었다.

글로써 싸운다는 건 같은 나라에서 수백 년 전에 있었던 마틴 루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도 인쇄술의 대중화로 인한 성경과 여타 책, 유인물의 대량 보급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40년대는 아직 컴퓨터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루터에게는 없었던 타자기와 등사기가 있는 덕분에 글로 싸우는 것이 좀 더 수월했다. 단,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해서 종이가 지금만치 싸고 풍부하게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방 정환의 경우 3· 1 운동 때에 <독립 신문>이라는 반일 성향의 소식지를 몰래 인쇄해서 배부했는데, 이게 발각되어 집이 형사들에게 몽땅 포위당했다. 그는 인쇄된 신문과 등사기를 몽땅 우물 속에다 던져 버리고 시치미 뚝 뗀 덕분에, 1주간 구금을 당하긴 했지만 혐의를 겨우 피했다. 오염된 우물의 뒷수습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겠지..;; 그에 비해 오늘날의 변기는 종이를 아주 잘게 쪼개서 버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막히는 거 걱정을 해야 하며, 등사기까지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 정환의 경우 등사기만 갖고 있었지 타자기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고를 그냥 손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니 동양 한자 문화권의 선각자들은 서양 사람들의 획기적인 문자 기계를 보고 좌절했으며, 자국 문자도 타자기로 만들 수 있는 형태로 과감하게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흠, 갑자기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가 좀 길어졌다만..
백장미단의 활동은 불행히도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차례 불온삐라가 발견되자 정부 역시 통제와 단속을 강화했다. 운명의 그 날, 그들은 낮에 과감하게 뮌헨 대학교 강의동에 들어가서 유인물을 몰래 뿌리고 오기로 했는데.. 한번 뿌리고 나왔다가, 아직 유인물이 더 남아 있는 걸 보고 또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상한 행적이 나치 끄나풀이던 건물 경비에게 눈에 띄고.. 이들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가 1943년 2월 18일이었다.

남매는 서로 격리된 채로 "넌 정체가 뭐냐? 이 유인물 어디서 났냐? 누가 작성했냐? 누가 이 일을 시켰냐? 배후에 또 누가 있냐? 뭐, 우리가 전쟁에서 진다고라? 등등등등~~" 게슈타포로부터 끝없는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은 혐의가 인정되어 구속됐다. 그리고 단심으로 진행된 형식적인 인민 재판에서 무려 내란· 반역· 이적행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전원 사형이 선고됐다.

이 재판은 북한의 인민 재판과 별 다를 바 없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답은, 아니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백장미단을 재판한 사람은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악질 판사였는데... "대학까지 간 애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해서 군대에도 안 보내고 공부를 더 시켜 줬더니만 이노무 자슥들이 은혜를 모르고 이딴 짓거리나 해?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새퀴들 같으니!" 식으로 판사가 검사보다도 더 피고를 더 몰아세우면서 고래고래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는 사법 권한을 이용하여 흉악범이나 간첩뿐만 아니라 반나치 인사들도 대거 사형으로 숙청했기 때문에 엄연한 나치 전범이다. 전후에는 판사복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다시 섰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 길 잃은 포탄의 포격을 받고 죽어 버리는 바람에 험한 꼴을 용케 피해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숄 남매와 유인물 가담자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체포에서 사형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나흘(2월 22일!)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은 총살도, 교수형도 아니고 무려 단두대 참수였다. 자기 정책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여자까지 낀 20대 대학생을 반역죄로 몰아 목을 베어서 죽인 것이다. 그것도 1940년대에, 피지배 식민지 주민도 아니고 자국민을 상대로..;; 나치가 얼마나 잔혹한 집단인지를 알 수 있다. 단두대는 프랑스 대혁명 때에만 쓰인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 중에서는 여자인 소피가 가장 먼저 집행되었다. 이거 집행 순서도 은근히 중요하다. 남이 죽는 걸 다 보고서야 제일 나중에 집행되는 게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제일 무섭고 끔찍하니까. 사형과 정반대인 시상식에서도 1등상을 제일 나중에 주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나치는 악질적인 죄인을 단두대로 처형할 때는 죄수를 엎드리게 한 게 아니라, 눕혀서 칼날이 떨어지는 걸 보게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겠지..) 조선 시대에 정 약용의 형 정 약종도 천주교를 믿다 순교할 때, 하늘을 보면서 죽겠다고 하면서 비슷한 자세를 자처하며 참수를 당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숄 남매를 비롯해 백장미단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나치가 패망한 뒤 그들은 독일 내부에서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각종 길거리의 명칭에 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의 일대기는 책과 영화로도 응당 나왔다. 영화로는 <백장미>(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6). 전자는 활동 중심이고 후자는 활동보다는 체포 후의 길고 지린 심문과 재판 과정을 더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 당시에 단두대를 가동한 사형 집행관들은 흔한 제복이나 작업복이 아니라, 무슨 마술사처럼 검은 연미복에 실크햇, 나비넥타이 정장 차림이었던 게 인상적이다. 나름 자신들의 직업 의식을 표현하고 사형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잘 묘사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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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나치 시절까지 단두대 처형(백장단 단원까지 포함해)을 전문으로 맡았던 실존 인물인 '요한 라이히하르트(1893-1972)'의 근무 복장이다. 영화가 정말로 사실 고증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야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형 집행을 한 죄밖에 없으니 딱히 전범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연합국 측에 재고용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나치 전범들을 교수대에 매다는-_-;;; 일에도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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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실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 영화를 싫어하듯, 사형 집행관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이다 보니 그쪽 방면으로 극도의 트라우마와 거부 반응이 있다. 옛날에 성 바돌로매 대학살(1572) 때도 다른 시민들은 광기에 휩쓸려서 크리스천들을 마구 죽였지만, 이때 오히려 사형 집행관 망나니들은 그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 이야기는 됐고... 백장미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유족들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1978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거 한때는 운동권에서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국내 정치에 한해서는 종북 좌경화 역사 날조라는 변수 때문에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 성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수만 없으면 난 얼마든지 성장과 분배, 진보와 보수의 장단점을 골고루 인정하고 중도를 갈 의향이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 자체를 좌파 빨갱이 식으로 몰아갈 생각은 물론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관점과, 비정치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관점 정도는 서로 구분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무슨 북한 정권이나 나치와 똑같다는 식의 매도에도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 비판이나 북한 관련 병크만 빼면 나머지 국민의 자유는 별로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인종 학살을 저지른 건 더욱 아니고. 차라리 '진보 좌파'들이 반정부 투쟁을 안 벌이고 염전 노예라든가 형제 복지원처럼 그 당시 사회의 구석에서 벌어지는 비정치 분야의 인권 유린 같은 것만 폭로하고 비판했으면 그런 건 본인도 얼마든지 인정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글이 길어지니 백장미단 인물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인물들 열전은 다음 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1 08:35 2016/03/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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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에 대한 논의 외

*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항이니 다시 정리하겠다.

1. 언어의 기원

기원을 알기가 제일 난감한 분야이다. 화석이고 뭐고 물리적인 형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문자 기록으로는 음운 계층에서의 통시적인 변화만을 추적할 수 있을 뿐, 그 문자의 저변이 되는 그 시절의 실제 음성 기록을 100% 정확하게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시절에 녹음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중세 국어에서 옛한글 자모의 음가조차도 여러 학자들의 추정만이 존재할 뿐 실제 발음이 딱 부러지게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음운뿐만이 아니라 형태· 어휘· 문법 쪽으로 간다 해도, 동물적인 꽥꽥 끼릭끼릭 의성 의태어로부터 추상적인 개념에다 복잡하고 재귀적인(안은 문장, 이어진 문장) 문법이 저절로 등장한다는 건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실현 불가능이다. 그건 아메바로부터 원숭이를 거쳐서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이다.

고대까지는 몰라도 중세급의 과거 언어는 현대의 언어보다 더 음운이 다양하고 복잡하면 복잡했지, 오늘날보다 더 단순한 구조는 아니었다는 게 통론이다. 한국어만 해도 과거에는 '여덟'에서 ㅂ이 실제로 발음되었고 받침 ㅎ도 발음되었고 자음이 두 개, 세 개씩 있는 등 지금보다 스케일이 더 컸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저것 탈락하고 생략되고 중화되고 제약이 생기는 쪽으로 변하는데 그럼 처음에 그 복잡한 시스템은 언제 어떻게 갖춰질 수 있었겠는가? 통상적인 진화론과는 정반대 경향이 아닐 수 없다.

언어야말로 걍 GG 치고 신수설을 주장한대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가장 난감한 분야이다. 그냥 신앙· 신념의 영역일 뿐이다. 언어에서 기원은 언어학계에서도 불가지론으로 간주되며 더 구체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연구할 거리 자체가 없다.

2. 생명의 기원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스스로 유전자 차원에서 더 고등한 종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이건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자.
유기물· 단백질처럼 생명을 담는 껍데기 그릇을 일부 겨우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거기에 생명이 생기는 것 역시 아니다. 다른 무생물 기계는 부품들의 상호 연결이 끊어지면 곧바로 작동이 멈춰 버리는 반면, 생명은 세포 단위로 쪼개도 각각의 단위들이 다 생명이 있어서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한다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 중 이런 고증을 반영한 것이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와 테란의 대미지 컨트롤 능력이 아닌가 한다. 저그는 건물과 유닛 공히 체력이 1만 남아도 아주 천천히라도 자동 회복되는 반면, 테란은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 서플라이가 없는 건물은 체력을 2/3 이상 잃은 뒤부터는 스스로 파괴돼 버리기까지 한다.

이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겠는가? 지구 안에서는 빛도 산소도 없고 도저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척박한 수천 m 아래 초고압 해저에도 심해어가 존재하지만, 반대로 지구 밖의 광활한 우주에는 생명이란 게 일단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이건 뭔가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다음으로 연대기 문제로 넘어가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를 거듭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에서 딱 끝난다고 일단 본인은 믿는다. 세속 역사에서도 인간의 문명이라는 건 천 자리 범위를 넘어서는 연도의 과거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단, 그 전의 엄청 옛날, 이전 세상에서도 생명체가 있긴 했다. 그러다 이전 세상이 멸망한 뒤 대부분의 품종은 원래 있던 종류대로 다시 창조되긴 했는데(after his kind), 다만 고래나 인간 같은 일부 종은 예전에 없었다가 6천 여 년 전에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이전 세상의 멸망은 지질 시대에서 다루는 '대멸종'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3. 지구의 기원

방사성 원소· 탄소 원소 측정법 등 다양하게 교차 검증되는 방법을 통해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간이 달에 실제로 간 적이 없다고 믿는 아폴로 계획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 미션이 오로지 아폴로 11호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이 오로지 한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루는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해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데 이상하게 실험 진행이 잘 안 돼서 원인을 찾다 보니, 공기 중에 납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이게 자동차의 배기가스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이런 과정에서 20세기 후반에 무연휘발유가 발명될 수 있었다. 납은 인체에 몹시 해로운 중금속이기 때문이다. 연대 측정법이라는 게 저런 사소한 변인까지도 찾아낼 정도로 정밀하니, 창조 과학회의 주장만치 그렇게 호락호락 허술한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류 이전에도 죽음 자체는 지구상에 존재했다. 이전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지만, 그 시절의 흔적은 화석이나 지층에 남아 있다고 본인은 믿는다. 노아의 홍수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로 말이다.

4. 우주의 기원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우주의 기원은 화석이나 지층 같은 '흔적'만으로 추론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닥은 수십억 년 전에 출발하여 수십억 광년 거리를 달려서 우리 눈에 도달하여 2차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는 빛을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하면서 현상을 해석한다! 방법론이 다른 기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관측 가능한 우주"라는 개념이 있으며 대폭발설 내지 130억 년~200억 년 같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전산학에서 계산 가능한 문제, 과학에서 재연 가능한 현상, 철학에서 반증 가능한 명제처럼..)

이 연구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부정되려면 (1) 예전에는 우주의 본질 자체가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빛의 속도 자체가 지금과는 넘사벽급으로 달라질 수가 있어야 하거나, (2) 아니면 저 옛날 별빛의 모습이 실제 별빛이 아닌 페이크 가짜여야 한다. 허나 (1)은 과학적으로 가능성이 없으며, 과거라 해도 광속의 변화는 무시할 수 있는 아주 미미한 수준일 뿐이다.
그리고 (2)는 과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 계시를 설마 그렇게까지 속임수를 동원해서 남기셨을까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리 아담도 성년으로 창조됐고 닭과 달걀 중에 닭이 먼저라 해도, 저건 성년 창조설이라는 명목으로 실드 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여겨진다.

덧붙이는 말

0.
기원과 관련된 기독교계와 세속 과학계의 논쟁은 가장 먼저 잘 알다시피 "2.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되었다. 언어의 기원은 양쪽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 보니 별로 이슈가 되지도 않는 것 같고(걍 서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말자), 생명에 비해서는 지구나 우주의 기원은 비록 서로 전혀 무관한 건 아니지만 일단 부가적인 문제이다.
각각의 기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건, 일단 언어, 생명, 지구, 우주의 기원은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르고 연구하는 방법론이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듯하다.

창조 과학회는 진화론만 반박하다가 "젊은 우주"를 주장하면서 생명 영역뿐만 아니라 지구와 우주 영역에까지 주변에 온통 적을 만들었다. 자기 학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이비 유사과학 취급을 받는 게 온통 진리를 일부러 거부하는 부패한 무신론자 학계의 음모 때문이라는데... 진실은? 과연 글쎄다.

이들은 6천 년 전 문자적인 24시간 6일을 사수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성경과 과학에서 모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병크로 인해서 오류를 저지른 것도 적지 않다. 결국은 이전 세상과 현 세상을 구분하고 6천 년 전 문자적인 6일 창조도 인정하되, 창 1:1-2 사이에 간극을 설정하는 것이 성경 교리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사수하고(특히 물과 어둠, 사탄 마귀의 기원) 세속 과학의 관찰과도 조화를 이루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젊은 생물(현 세상의), 오래 된 지구"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1.
성인 형태로 어제 갓 창조된 따끈한(?) 아담을 생각해 보자. 그는 덩치와 지능, 떡대만이 30대 청년이지 피부 표면은 가히 갓난아기처럼 뽀송뽀송하고 노화의 징조는 통상적인 30대 성인 수준으로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활성 산소나 각종 해로운 찌꺼기 같은 것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응가를 해도 우리와 같은 끔찍한 악취 없이 태변과 비슷한 분비물이 나왔을 것이다. (동안· 꽃미남· 미소년 이런 것과는 별개의 얘기임!) 그러니 생물학적 나이라는 것도 무슨 관점에서의 나이인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30대 성년의 형태로 갓 창조됐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겪지도 않은 유년기, 10· 20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거짓으로 주입해 넣으셨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요 성품 중 하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딛 1:2).

비록 기술적으로야 가능은 하겠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저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를 하셨겠지"라고 기원에 대해 넘겨짚기 전에 이런 면모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장에서 갓 생산된 따끈한 새 자동차에 적산거리계만 한 10만~20만 km로 조작해 놨다고 해서 그 차가 진짜 오래 된 차인 것처럼 보일까?

2.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거기에 나름 우주를 논하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심바· 품바· 티몬 일행이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한 뒤 풀밭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데, 품바가 티몬에게 "야, 넌 저 밤하늘에 빛나는 점(별)들이 정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냐?" 라고 묻는다.
티몬은 자기는 답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다고 의기양양하면서, 저것들은 시꺼먼 표면에 달라붙은 반딧불이라고 얘기한다. 휴.. 시골에서 반딧불이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품바는 "아 그래? 난 저것들은 수십억 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가스 불덩어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렇게 얘기함.
품바의 말이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티몬은 "ㄲㄲㄲ 넌 그냥 모든 게 가스인 것처럼 보이지?" 이렇게 면박을 준다. 이전의 하쿠나 마타타 씬을 보면 품바는 배 속에 가스가 가득찬 지독한 방귀쟁이여서 어린 시절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나오니까..;;

이 대화에서 심바는 어린 시절에 부친에게서 언뜻 들은 종교 주술적인 대답을 했는데(돌아가신 선왕들이 별이 돼서 우리를 지켜본다) 이건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폭풍처럼 까인다.
그런데 영화 전체를 보면, 티몬의 말은 실제로 맞아서 적중한 게 별로 없었다. 오버와 허세가 좀 쩌는 듯..

  • 처음에 사막 한복판에서 쓰러진 심바를 발견했을 때 "사자를 키우면 위험하니 얘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 → 심바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으며 품바· 티몬 일행과 잘만 친한 사이가 됨
  • "저 별들은 반딧불이다" → 네버.
  • 극중에서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노래가 끝나고 결말부. "심바와 날라가 서로 상봉했으니 우리 우정은 이제 끝장났다" 엉엉 ㅠㅠ → 그 뒤에도 전혀 끝장나지 않음.

콜?

Posted by 사무엘

2016/02/24 08:36 2016/02/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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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산주의 유머

구소련의 사회/정치 관행을 풍자한 공산주의 유머 중에는 이런 게 있다.

(1)
소련의 한 작은 마을에 살던 이반이 시베리아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그나마 살아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은 한데 모여서 그에게 수용소 생활이 어땠는지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거기 일상은 물자가 좀 열악하고 따분한 노동의 연속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고 털어 놓았다. 이에 어떤 마을 사람이 이렇게 반문했다.

"놀랍군, 이반. 하지만 얼마 전에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다가 다시 끌려간 미하일의 말은 정반대였는데? 열악한 환경에서 끔찍한 인권 유린, 살인적인 중노동이 밤낮으로 이어졌다고 말야."

그러자 이반은 담배를 깊게 빨고는 한 마디 했다.
"아, 그 친구? 말을 그딴 식으로 했으니 당연히 또 끌려갈 수밖에 없지."

... 마을 사람들은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며 흩어졌다.

(2)
러시아에 사는 한 유대인 부부가 이스라엘로 이주하려고 애썼는데, 행정상의 잘못으로 인해 서로 헤어지게 되었다. 남편인 아브라함을 제외한 그의 아내와 아이들만 소련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었다.

가족이 찢어지게 되었고 당분간 서신 왕래만 가능할 텐데, 부부는 소련 당국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 간단한 규칙을 정했다. 편지에서 남편이 검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사실이므로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되고, 붉은색 잉크로 쓴 글자는 전부 거짓이니 반대로 이해하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이스라엘에 도착한 지 일주일 후,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검은색 글씨로 "여긴 모든 게 괜찮다. 여건이 더 좋아지고 있고 먹을 것도 풍부하고 사람들은 표현의 자유를 누리기 시작했다." 등 온통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내용이었는데...
편지는 끝까지 읽어 봐야 했다. 추신엔 이런 문장이 있었다.

"그런데 말이오, 한 가지 문제가 있소. 아무리 해도 붉은색 잉크를 도무지 구할 수 없구려."


이걸 보면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왜 표현의 자유를 허용할 수 없는지, 남한과 북한끼리는 제대로 된 이산가족 상봉은커녕 서신 왕래와 전화 통화조차 왜 절대로 성사되지 못하는지 그 본질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조금이라도 정보 왕래의 통로가 뚫리면 사람들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기상천외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의사소통을 하려 애쓰기 때문이다. 가령, 빽빽한 텍스트에서 세로드립은 고전적인 테크닉 중 하나일 뿐이다.

범죄자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간의 의사소통은 북한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반대로 소수의 간첩· 불온세력간의 의사소통은 불행히도 남한의 안보를 저해하는 용도로 악용된다. 그러니 서로 왕래를 절대로 할 수 없게 막아 놓는다.

2. 일본의 재일 교포 북송 사업

저 공산주의 유머에서 1은 그렇다 치더라도 2의 경우 실제로 비슷한 사례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되고 나자, 일본은 그 뒤에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일본으로 정식 귀화하지도 않고서 자기네 나라에서 계속 정착해 있는 조선인 집단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이거 뭐 과거의 식민지 시절처럼 정부 차원에서 대놓고 차별하고 착취하거나 잡아 가둘 수도 없고..;;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은 모두 공식적으로 일본과는 서로 생까는 미수교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본토 사정도 워낙 가난하고 혼란스러웠으니 재일 교포들을 일일이 다 받아 주고 챙길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6·25 전쟁을 한바탕 치른 뒤 1950년대 말엔 북한이 일본 내부의 조총련을 주축으로 하여 재일 한국인들을 대대적으로 북한으로 데려 오려는 공작을 벌였다. 북한은 노동 인력을 확보하고 자기 체제를 어필하고 싶었으며, 일본은 재일 교포들을 빨랑 워이~ 내보내고 싶었으니..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서 거래가 성사되었다. 물론 일본이 대놓고 공산주의 국가와 손잡는 건 국제 정세상 보기가 안 좋기 때문에 적십자라는 민간 단체를 거쳐서 일을 진행했다.

북한 당국과 일본 적십자사는 우리로 치면 마치 월북 권유 불온삐라처럼, "북한은 공산권 국가로부터 원조를 직통으로 받으면서 한창 발전 중임. 아직도 전쟁 폐허에 거지들이 우글거리는 헬게이트 남조선과는 차원이 다름! 무상 의료 무상 복지! 지금 이 기회에 북한으로 가면 정착 지원이 얼마이고 혜택이 어쩌구" 하면서 온갖 감언이설로 재일 교포들을 현혹했다.

그리고 이 말을 믿고 실제로 북한으로 가는 사람들이 몇백 명 정도 생겼다. 교류가 완전히 끊어져 버린 남한/북한과는 달리, 북한/일본은 그 당시 아직 일말의 서신 교류는 가능했던 모양이다. '만경봉호'라고 불린 북송선을 먼저 타기로 한 어떤 교포는 후발대에게 편지로 연락을 주기로 약속했는데.. 여기서는 저 서양 유머 버전처럼 변별 요소가 잉크 색깔이 아니었다. CJK 문화권답게 "내가 편지를 세로쓰기로 보내면, 저 소문이 사실이란 뜻이오. 이북이 정말 살기 좋은 곳이니 너도 후속 북송선을 타고 빨랑 오시오. 하지만 가로로 써서 보내면 저거 다 거짓말이라는 뜻이니 오지 마시오."라고 규칙을 정했다.

결과가 어땠을까? 후발대에게 도착한 편지들은 검열을 의식하여 겉보기로 내용은 온통 지상락원 드립에 위대한 김 일성 장군님 칭송이었다. 그러나 텍스트가 배열된 형태는 한 치의 예외 없는 가로쓰기였다! 그래서 그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기겁을 하고 월북(?)을 포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영락없이 저 공산주의 유머의 실화 버전이지 않은가?
심지어 "여기는 일본의 ○○○만치 풍요로워요!"라는 문장도 있었는데, 북한 관리가 일본 문화를 몰라서 검열을 통과했을 뿐, ○○○는 실제로는 '달동네, 꽃동네' 급의 일본의 극빈민가 명칭이었다. 영락없는 반어법이 된 셈.

일본에서 재일들은 다소 차별 받으며 2등 인민 취급을 받아 왔다고 하지만, 북한에서의 실제 대접은 2등도 못 되는 삼류 이하 적대계층이었고 여건이 훨씬 더 나빴던 것이다. 차라리 일본에서 계속 지내는 게 나았다. 그들은 감언이설에 속은 것이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 2등 인민이라지만 일단 자유 진영 바깥 문물을 맛보다가 저 미끼에나 달랑 낚여서 들어온 사람들을 북한 당국이 호의적으로 대접해 줄 하등의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감시하고 착취하고 부려먹기나 하겠지.

3. 검열의 과거 실제 사례

하긴 옛날에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때 참호전이 워낙 참혹한 생지옥이다 보니, 병사들이 고향으로 편지를 보낼 때 현장 묘사를 대놓고 하지 말라고 불가피하게 검열을 했다. 전시에 이 정도로 표현의 자유를 좀 통제하는 건 심지어 미국도 괜히 반전 여론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슬금슬금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 정도면 낫지, 나치 독일의 유대인 강제 수용소로 가 보자. 입구에는 보통 "ARBEIT MACHT FREI(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한다)"라는 표어가 마치 군부대 입구의 표어처럼 만들어져 있는데, 어떤 수용소의 것은 ARBEIT의 B에서 윗부분의 D 모양이 아랫부분의 D보다 살짝 크게 글자 모양이 좀 왜곡돼 있었다. 보통은 둘 다 완전히 동일하거나, 아랫부분이 윗부분보다 더 크지 않던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혀 자유롭지 않은 참혹한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저딴 표어까지 강제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아~주 소극적이고 깨알같은 저항으로 역설을 표현한 것이었다. 삐딱한 B의 의미는 "자유 같은 소리 하고 쳐자빠졌네.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였다.
노동 정신을 크게 왜곡한 저 역사적 사례로 인해, 말 자체는 별로 문제될 게 없던 저 표어는 오늘날 그쪽 바닥에서는 나치식 경례만큼이나 절대금기 표어가 되어 버렸다. 뭐, ARBEIT 자체는 알바/아르바이트 덕분에 한국어에서 가장 잘 알려진 독일어 단어가 돼 있긴 하다만..;;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손 기정 마라토너는 일장기와 관련하여 가슴아픈 사례가 과거에 있었다.
3등을 한 남 승룡 선수는 손 기정에 대해... 1등을 해서 금메달을 받고 히틀러와 악수까지 한 건 별로 안 부럽고, 진짜 부러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우승자인 덕분에 월계수 화분을 득템했으며, 그걸로 복부의 일장기를 그럭저럭 가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허나, 시상대의 측면에서 찍은 사진은 손 기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다시피 일장기가 여전히 노출되는 형태로 찍혔으며, 일본의 언론은 이를 그대로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그 사진을 인용하면서 마치 인쇄 실수나 기술 한계인~~ 척 일장기 부분을 하얗게 덧칠하여 슬쩍 지우고 얼룩으로 가려서 사진을 내보냈으나, 포토샵이 없던 시절이어서 그런지 이건 조선 총독부 검열에서 고의적인 덧칠 삭제라는 게 탄로났다. 그래서 해당 신문사는 기자와 화가가 콩밥을 먹고 사장이 경질되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서 신문 자체가 정간 처분까지 받는 보복을 당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였으니까 저런 행동이 항일 독립 운동의 일환이라고 칭송받지, 순수하게 언론의 자세로만 따지자면 저런 식의 사진 변개는 아무리 일본이 원쑤라고 해도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절대로 져서는 안 되는 축구 한일전이라 해도, 한국 선수가 반칙을 한 건 한국인 심판이라도 지적할 수 있어야 하며, 언론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은 일단은 있는 그대로 보도해야 하지 않는가? 책에서도 번역자는 번역만 해야지 제멋대로 원문을 해석하고 고쳐서는 안 되듯 말이다.

물론, 지금의 배부른 기준을 갖고 그 시절을 제멋대로 판단할 생각은 없다. 애초에 일제가 동아일보를 저 정도로 해코지한 이유도 "일장기라는 최고조넘에 대한 모독 때문"이지, 팩트를 있는 "그대로 보도하지 않고 사진을 왜곡했기 때문" 자체가 아니니까 말이다.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손 기정 본인도 동아일보 이상으로 표현의 자유 제약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우승 소감 인터뷰를 녹음할 때 말이다. "저 언덕에서 일장기가 나를 반겨 주더군요. (...) 이 승리는 내 개인의 승리가 아니라 전 일본 국민의 승리입네다" 이런 영혼이 없는 말을 강제로 각본대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낯뜨거운 대목에서 손 기정의 말투가 오그라들자 옆에서 누군가가 '크게 말해!' 면박을 주는 장면까지 살짝 녹음되어 들어갔다. 그게 그 시절의 아픈 모습이었다.

4. 일본 적십자 센터 폭파 미수 사건

주변 잡설이 또 길어졌으니 다시 재일 교포 북송 얘기로 돌아오겠다.
이렇게 일본과 북한이 서로 짜고 재일 교포들을 북송하는 것에 대해, 남한을 접수하고 있던 이 승만 정권은 굉장한 불쾌함과 거부감을 표시했다. 비록 우리 남한도 너무 가난해서 이들을 다 포용하고 먹이고 재우고 일자리를 줄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이들도 같은 동포인데 북한으로 그것도 거짓말로 꾀어서 보내는 건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뭐, 남북 체제 경쟁에서 뒤쳐진다는 압박감도 덤으로 있었겠지만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중국과 불거져 있는 탈북자 북송 문제와 비슷하다.
목숨 걸고 탈북을 시도한 사람들을 다시 생지옥으로 돌려보내는 건 인간적으로는 정말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짓이다. 하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저 탈북자들은 자국 땅에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고, 또 북한과 맺은 약속도 있고 하니 저렇게 미지근하게 대응하는 것이다. 일본이 재일 한국인이라는 '난민'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도 이와 같지는 않지만 비슷했다. 저놈들이 북한 가서 어찌 될지는 내 알 바 아니고, 일단은 골치 아픈 사람들이 우리 땅에서 나가 주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다.

게다가 그 당시에 이 승만은 평화선을 선포해 놓고, 독도 일대에서 깝죽거리는 일본 어선을 해군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하게 쫓아내고 나포하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쓰시마 섬까지 한국 땅이니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가 찬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편지나 소포가 왔는데 우표가 울릉도· 독도가 그려진 것이면, 그 우표에서 독도 부분을 뜯어내고 물건은 그대로 반송을 해 버릴 정도였다...;; 그런 쪼잔한 저항이 통용될 정도로 한국과 일본은 안 그래도 미수교인 데다 앙숙이 돼 가고 있었다. 이런 일본이 재일 교포 북송 문제에 대해서 대한민국의 고집불통 대통령의 말을 들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있었겠는가? 도대체 무슨 이쁜 구석이 있다고?

이 승만은 어렸을 때 조선이 외교전에서 밀려서 미국으로부터 버림받고 서서히 일제에게 먹혀 망하는 걸 똑똑히 지켜본 대통령이었다. 그게 평생 남는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먼 훗날 대통령이 된 뒤엔, 비록 내치에서는 부하를 잘못 뽑고 병크도 많이 저질렀지만 외교는 정말 한 치의 양보가 없는 초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그는 그 시절 세계 각국의 정상들 중에 최강의 고학력자였으며, 이 바닥은 똘끼 충만한 고수 100단이 돼 있었다. 이 꼰대 영감쟁이가 뭔 똥고집을 부리다 무슨 사고를 칠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대표적인 예로 그는 전쟁 중에 북한 송환을 원치 않던 거제도 반공 포로를 무단으로 석방해 버린 전력도 있다. "자유를 원하는 개인에게 자유를 선사해 주는 게, 그들을 인질로 잡고서 외교 거래를 하는 것보다 더 올바른 일이다. (그러니 이 자유를 지키는 전쟁을 무작정 정치 논리대로 어중간하게 휴전해 버려서도 안 된다!)"를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그와 같은 맥락으로, 재일 교포의 북송은 비록 남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판사판인데 무슨 북파 공작원마냥 공작원을 "일본에다" 보내, 북송 주선 기관인 일본 적십자사 본사에다 테러를 가하려 했다.

실미도 북파 공작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군사 정권이 아닌 이 승만 때 우리나라가 북한도 아닌 일본에다가 공작원을 보낸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무슨 항일 독립 운동가도 아니고! 이게 1959년의 일이다. 게다가 그 공작원 중에 김 구의 암살범인 안 두희까지 있었다는 건..;; 어지간한 소설과 영화를 능가하는 기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첫 시도가 그만 검문에 의해 발각되어 버렸으며, 추가적인 양성과 투입이 있기 전에 4·19로 인해 이 승만이 하야하면서 이 일은 없었던 것으로 묻히게 됐다.

곧이어 박 정희 군사 정권이 들어섰다. 이들은 쿠데타 이력를 무마하고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공 + 경제 개발을 적극 실천해야 했다. 그래서 1965년에는 그 당시에 매국질이라고, 일제 강점기 피해를 푼돈에 졸속으로 퉁쳤다는 욕을 잔뜩 쳐먹으면서 결국 일본과 재수교를 하게 된다. 경제 개발을 할 자금 밑천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이 승만 시절에는 일본이 아직 전범 낙인이 단단히 찍혀 있던지라, 뼛속까지 반일 대통령이 비록 허세뿐이나마 일본을 상대로 갑질을 막 해댔다. 그러나 박통 때는 우리가 급전이 필요한 관계로 일본에게 상대적으로 저자세로 굽히고 들어가야 했다. 평화선도 이때 폐지되었다.

과거에 재일 교포 북송에 관여하던 조총련은 나중에 박통 때엔 육 영수 여사 피살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이미지를 더욱 나쁘게 구겼다. 이때는 책임 소재 규명에 미온적인 일본이 괘씸하다면서 박통의 입에서도 "(우리라고) 동경 폭격 못 할 줄 알아?"라고,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에 버금가는 강한 말이 나왔다.
하긴, 일본은 역사적으로 핵폭탄뿐만 아니라 도쿄 소이탄 대공습의 끔찍한 트라우마가 있는 동네인데 저 소리 들으면 굉장히 발끈하긴 했겠다. 박통도 언제나 일본에 무조건 굽신굽신 하지는 않았다.

박 정희가 나라에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끼친 영향이 워낙 너무 엄청나기 때문에, 이 승만 시절의 배고프던 남한은 남한의 역사인 것 같지가 않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 정도로 이질감이 크다. 화폐 단위만 해도 1962년 이래로 현행 시스템이 유지되고 있으니 딱 박 정희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이 승만은 '박 근혜' 같은 직계 후손도 없어서 더욱 단절감이 크다. 조선과 일제 강점기를 모두 경험하고서, 이 나라를 올바른 방향으로 세워만 놓고 건국 초기의 시행착오 병크로 인한 뭇매는 다 맞은 뒤 혜성처럼 사라져 버린 그리운 영웅이다. 기적을 통해 민족 해방을 경험하고, 나중에 타지에서 죽은 건 성경의 모세를 닮았다.

끝으로, 재일뿐만 아니라 먼 옛날에 쿠바에 이민 간 교민들도 남한과 북한 모두에게서 환영받지 못하고 사생아뻘 되는 지위로 전락해 있다고 들었다. 쿠바도 우리나라와는 아직까지 미수교 상태이다. 이 역시 슬픈 20세기 한반도 역사의 단면인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18 08:30 2016/02/1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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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0월 26일은 안 중근 의사가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린 날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딱 70년 뒤, 1979년 10월 26일은 박 정희 대통령이 부하인 중앙정보부장 김 재규의 권총에 맞고 절명한 날이다. 10.26 사태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우리나라의 이후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사건이었다.

박통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1961년부터 시작된 18년간의 군사 독재가 이제 좀 끝이 나는가 싶었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가 우리 힘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된 게 아니었던 것만큼이나 이것도 시민의 힘으로 직접 독재 정권을 끌어내린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박 정희가 남긴 뒷자리는 그의 심복이던 전 두환이 냉큼, 날름, 덥석 차지하게 됐다. 어차피 사람만 바뀌었지 또 다른 군사 독재인 건 마찬가지다. 오늘은 그 얘기를 좀 더 늘어놓아 보겠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통은 삽교천 준공식을 마치고서 서울로 돌아와서 피로도 풀 겸 궁정동 안가에서 회식을 했다. 최측근 참모들과 더불어 20대 중반의 어여쁜 여대생, 그리고 비슷한 연배의 잘나가던 여자 가수까지 데려 와서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회식은 누가 박통에 대해 험담하는 것처럼 그 정도로 사치스럽고 음란방탕한 자리는 아니었다. (저걸 갖고 험담하는 사람들은.. 반대로 여자와 관해서 일체의 난잡한 면모가 없었고, 극도로 근검절약 검소했으며 회식 자리에 기생이 아니라 각자 자기 부인을 데려 오게 한 전직 대통령을 좋아하느냐 하면, 그것도 어차피 아니다.)

박통은 알다시피 수 년 전에 영부인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뒤부터 멘탈이 많이 피폐해졌다. 곁에서 쓴소리 조언을 해 주는 사람이 없어지면서 자제력을 잃고 예전보다 점점 더 과격 고집불통 폭주끼도 보이기 시작한 건 사실이어 보인다. 박통은 육 영수 여사를 두고 "지금 내 옆에 제일 상대하기 까다로운 골수 야당 총수가 있소" 이런 농을 치기도 한 바 있다.

이 와중에 암살 가해자인 김 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경호실장이던 차 지철과 박통에 대해서 쌓인 앙금이 많은 상태였다. 그러다 무슨 자극을 받았는지 이 패거리들을 오늘 회식 자리에서 해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안 그래도 권총까지 챙겨 가서 죽일 기회만 노리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회식 자리에서 차 지철과 박통은 합심해서 김 재규를 코너로 몰아 넣었다. "야당이며 반대파들이 이렇게 정권에 대항하면서 날뛰고 있는데 중정은 지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좀 더 강하게 짓밟아 버리지 못해?" 이렇게 갈구고 있으니 김 재규가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을까?

결국 김 재규는 차 지철과 박통을 권총으로 쏘고 말았다. 그에게서 지시를 미리 받은 그의 부하들은(박 선호, 박 흥주 등) 총소리를 듣고서 주변의 경호원들을 사살해서 궁정동 안가를 완전히 무력화시켰다.
김 재규는 사살 계획 자체는 이렇게 치밀하게 준비해서 결국은 성공했다. 그러나 일을 저지른 뒤에는 정말 놀라울 정도로 멘붕· 당황· 우왕좌왕 하고 패닉에 빠져 버렸다.

그는 차 지철이 하극상을 벌여서 원조각하를 살해했으며, 자기는 이를 저지하다가 정당방위 차원에서 그를 사살했을 뿐이라고 얼~~마든지 의심 안 사고 조작과 은폐를 할 수 있었다. 그는 위장과 조작의 달인인 중앙정보부의 최고 수장이었으니 말이다. 왜 저렇게 하지 않았는지는 정말 제1의 미스터리이다.

그리고 더 따지고 보면, 박통은 암살 안 당했으면 대통령을 도대체 언제까지 해 먹었을지도 궁금해진다. 이건 제2의 미스터리이다. 할 거 다 하고, 1990년대에 수도 이전과 올림픽 유치까지 다 해 놓은 뒤, 7· 80대 나이쯤 됐을 때 물러나겠다고 증언한 기록도 있다고 하는데 출처는 지금 기억이 안 난다. 뭐 어쨌든..

김 재규는 일을 저지른 뒤 상황을 자기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조작하기 위해서는 자기 휘하의 남산 중정으로 갔어야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보안을 위해서는 군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중정 대신 육본으로 가는 일생일대의 패착을 뒀다. (정확히는 현장에 같이 초청했던 정 승화 육군 참모총장의 제안을 별 생각 없이 따른 것)
그는 누가 각하를 죽였는지 대놓고 거짓말은 차마 못 한 채, 어영부영 나라가 위기에 빠졌다고 계엄드립만 늘어놓다가 군 수뇌부 앞에서 탈탈 털렸다.

원조각하의 죽음이 확인되고 더구나 이게 북한이 아닌 내부 소행임이 확실시되자, 군 내부에서는 평소에도 월권과 하극상을 일삼던 차 지철의 도발을 먼저 의심했다. 그리고 혹시 군 내부에 다른 차 지철 파 쿠데타 세력이 있는지 의심했다. 그러나 입막음을 당부받았던 김 계원 비서실장이 양심의 가책을 견디다 못해 김 재규의 단독 범행(= 중정 말고 군 내부에 다른 배후 세력은 없는)을 정 승화 장군에게 몰래 실토하는 바람에, 김 재규는 그대로 인생 운지하고 말았다.

김 재규의 패착은 북한에서 6·25 전쟁을 조장했던 박 헌영의 패착과 거의 동급 수준이었다.
사건을 제대로 은폐하지 못한 채 저런 허술한 행동에 뜬금없는 기승전 계엄 얘기만 한 걸로 미뤄 보면, 그는 대통령을 살해한 와중에도 일말의 국가 안보 걱정은 최우선으로 한 듯하다. 다만, 무슨 민주화를 위해서 각하를 쐈다는 말은.. 글쎄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사건 당일엔 차 지철에 대한 증오심이 더 컸지, 그런 거창한 이념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을 것 같다.

갑자기 철권 독재 대통령이 없어지고 경호실장과 정보부장까지 없어지니 나라에는 엄청난 통치 공백이 생겼다.
이 와중에 최 규하는 우리나라 역사상 제일 존재감 없는-_- 대통령으로 기록됐지만, 한편으로 정당 활동이 없이 학자와 관료 테크만 거쳐서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대통령에 오른 유일한 사람이다. 덩치 크고 엄청난 학식과 인품의 소유자이고.. 그는 스펙은 참 훌륭했지만 국가 지도자로서는 지지 기반이 너무 없고 우왕좌왕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김 재규의 요청대로 전국에 계엄이 선포됐다. 그리고 10.26 사태의 수사권을 쥔 군부가 사실상 권력의 실세가 됐다. 미우나 고우나 군부 말고 다른 대안이 없으니...
정 승화가 계엄 사령관이 됐고, 그 밑에 육사 동기들 중에 제일 잘나가던 전땅크가 10.26 수사본부장이 됐는데... 그는 이 엄청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적절히 활용하여 뒤통수를 쳤다.

"어? 정 승화 저 사람도 그때 현장 근처에 있었다면서 왜 김 재규를 적극적으로 저지하거나 신고하지 않았을까? 혹시 이 사람도 쿠데타 가담 세력 아냐? 김 재규에 대한 체포 명령을 내린 당사자라지만 좀 냄새가 나는데?"
이렇게 어거지를 씌운 게 12.12 군사반란의 본질이다. 군대 인사 발령이 끝나고 10·26 사건에 대한 수사도 끝나 가던 12월 12일이 사고 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였다. 이후 스토리는 다들 아시는 대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주범이 다른 멀쩡한 사람을 도리어 쿠데타범으로 몰아 가다니.. 역사적으로 정치판 싸움은 이런 식의 암투로 진행된 듯하다. 선배고 후배고, 내 부대 네 부대 구분 따위도 없었다.
제5 공화국 드라마의 명대사인 "야 이 반란군놈의 새X야! ... 내 지금 전차를 몰고 가서 네놈들 머리통을 다 날려 버리겠어!"(장 태완 장군)도 정 승화 참모총장이 반란군에게 억류 당해 있을 때 나온 대사이다.

전대갈· 전땅크, 29만원 아저씨는 독재(?)를 했다지만 전임인 이통, 박통에 비해서야 존재감이 덜하며 우파로부터도 그 전임들만치 긍정적인 평판은 못 받는 전직 대통령이다. 군대를 장악한 뒤에 정권도 장악하고(5· 17 쿠데타) 최 규하 대통령까지 완전히 사임시키기까지는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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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6년 1월 현재 일단 생존 중인 최고 오래 된 전직 대통령이다. 몸 관리 잘한 군인들이 대체로 그런 것처럼(1920년대생인 백 선엽 장군도 아직 살아 있다!) 그는 역시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전한 저택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천수를 누리다 갈 것으로 예상된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 말이야" 드립을 칠 정도의 여유와 멘탈갑 센스-_-도 갖추신 지 오래다.. 저 기백과 배짱을 보라. 그러니 하야· 암살과는 차원이 다른 가성비를 얻었다.

전땅크에 대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아저씨는 권좌에 앉기 위해서 쿠데타를 일으켰지, 일단 대통령이 된 뒤에는 7년 단임만 하고 진짜로 물러났다는 점이다. 집권 도중에 장기 통치하려고 헌법을 뜯어고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1987년의 6월 항쟁도 개헌을 통해 '5년 단임 직선제'라는.. “후임 대통령의 선출 방식”을 민주화하기 위한 시위였지, 전땅크의 장기 집권 자체를 규탄하는 시위가 아니었다.

독재자 타이틀이 있는 전임들의 행적과 비교하면 이렇다.

  • 이 승만: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 자체는 적법하게 됐지만, 2대· 3대에 4대까지 연임하는 과정에서 사사오입 개헌에다 야당 정치인 탄압 등 지저분한 짓거리가 끼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12년 동안 1~3대 대통령을 역임했으며, 이 시기를 헌정 시스템 기수로는 제1 공화국이라고 부른다. 이 사람은 하야 후 명목상 노환으로 자연사하긴 했지만 타지에서 최후를 맞이했으며, 귀국이 좌절되면서 더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박 정희: 정말 통 크게 해 먹었다. 집권 때도 그 당시에는 혁명이라고 불린 5· 16 쿠데타를 일으켰고, 집권 중엔 유신 헌법 버프를 자가발동하여 총 무려 18년 가까이 집권했다. 5~9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제3과 제4 공화국을 새로 썼다. 대한민국의 헌정 역사상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년엔 잘 알다시피 부하에게 피격 당했다.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 그리고 전땅크: 이 승만과는 반대로 집권 과정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으며, 집권 중에는 다른 뻘짓 없이 임기를 채우고 물러났다. 아주 해피하게 살다가 갈 것으로 예상. (쿠데타 , 장기 집권 목적 개헌 ×)

(어느 나라건 독립 운동가 출신 초대 대통령은 독재자로 흑화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어떻게 해서 이룬 독립이고 어떻게 해서 세운 나라인데, 불안해서 선뜻 후임에게 놔 주고 싶지 않은 심정을 본인도 나이가 드니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처음부터 2선만 딱 하고 물러난 미국의 조지 워싱턴 대통령이 참 이례적인 대인배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저렇게 XO, OO, OX를 거친 뒤에야 현재의 대통령들은 일관되게 XX가 유지되고 있다.
뭐, 전땅크는 명목상 11, 12대 대통령이지만, 중간에 연임을 해서 두 대가 커버된 건 아니다. 집권 초기에 헌정 시스템이 바뀌었기 때문에 대수가 올라간 것이다. 5공이라고 불리는 이 사람의 실질적인 통치 기간은 12대가 전부인 게 맞다.

박통에서 전땅크로 넘어간 과정을 살펴본 본인의 생각은 이러하다.
10.26 사태는 남한 내부에 정말 심각한 수준의 권력 공백과 혼란을 그것도 너무나 갑작스럽게 야기했다. 이 승만이 하야하던 시절보다도 상황이 훨씬 더 심각하다. Windows API에다 비유하자면 ExitProcess와 TerminateProcess의 차이와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틈을 노려 북한이 도발을 하지 않은 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또한 정치 불안으로 인해 상황이 얼마든지 더 나빠지고 혼세마왕 강림 급의 헬게이트가 열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나마 피해가 저 정도밖에 발생하지 않은 쿠데타(?)로 그럭저럭 내부 수습과 권력 이양이 된 것도 무척 다행이다.

이 시절에 벌어졌던, 일부 반공을 빙자한 인권 유린은 당연히 욕 쳐먹어야 하고 두고두고 까여야 함이 마땅하다. 그 중 최악의 흑역사는 영화를 능가하는 병맛을 자랑하는 수지 킴 간첩 조작 사건이 아닐까 한다. 어휴..;; 성경에서 다윗이 아무리 성군이었다 해도 우리야의 유족에게는 석고대죄해야 할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전땅크 정권도 특정 개인에게 씻을 수 없는 큰 잘못을 저지른 게 있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땅크를 비롯해 5공 주역들이 일차적으로 근본적으로, 민생을 생각하고 여전히 경제를 일으키는 독재를 했다는 건 감사할 점이다. 5공 시절의 물가 안정과 경제 호황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나라가 뭐 언제부터 그렇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시행해 왔다고.. 군부 말고 무슨 탄탄한 대안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들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뭐 잘했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반대로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민주주의를 치명적으로 유린했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도 않는다. (난 개인적으로 신앙의 자유가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정치 체계는 높으신 분들이 뭐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든 별 상관 안 한다. 일단 독재자의 개막장 자기우상화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뜻이므로.).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옛날에는 지금처럼 대통령을 5년마다 한 번씩 뽑는 게 아니었다. 군사 독재가 횡행했다. 반공을 빌미로 억울한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서 고초를 겪었다." 이런 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위생이 안 좋아서 집집마다 머릿니를 잡고 쥐를 잡아서 꼬리를 할당량 채워서 학교에다 제출해야 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텔레비전도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결핵이나 천연두, 콜레라 같은 후진국형 질병이 횡행했다. 서민이 해외 여행을 하기도 훨씬 더 어려웠다. 사회· 조직 문화가 지금보다 훨씬 더 험악하고 폭력적이었다." 이런 말하고 하등 전혀 다를 바 없다.

과학 기술 없고 돈 없고 못 살던 시절에 무슨 일인들 없었겠는가? CCTV도 유전자 감식도 없고, 공산주의자의 흉악한 이간질에 서로 믿을 수가 없고, 한두 사람의 잘못이나 악행 때문에 집단 전체가 망하게 생겼는데 언제까지나 신사적이고 인간적으로만 사람을 대할 수가 있었겠나? 그땐 어쩔 수 없이 그랬고 일부 부작용도 있었지, 그 시절의 정치 행태가 그~렇게까지 이를 물고 비관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게 본인의 지론이다. 원래부터 현실이 시궁창이었지, 뭔가 잘되려는 걸 누가 망쳐 놓은 게 아니라는 거다. "김 구만 대통령 됐으면, 장 준하만 대통령 됐으면 민주주의가 뭐 어떻고, 친일 척결만 잘했으면.." 이런 식으로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라는 건 정치 제도이고, 정치 제도는 생각보다 아주 상대적인 개념이다. 까놓고 말해 세종대왕 급의 아주 유능한 1인 독재자가 있으면 굳이 n년 주기로 대통령을 힘들게 새로 뽑아야 할 필요가 있겠나.. =_=;; 하다못해 지금도 이 사회 시스템으로는 답이 없으니, 확 다 갈아엎고 강력한 독재자가 좀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하물며 그 못살던 시절에는 어떠했겠는가.
대통령 직선제라는 건, 뭐 이뤄낸 건 잘한 일이다만, 이게 무슨 북괴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거나 5천 년 가난을 물리친 것만치 그렇게까지 위대하고 훌륭한 일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일면 독재 미화 발언처럼 들릴지 모르는 말이나, 세계 역사에서 '진짜 악의 악질적인 독재자'가 하는 짓거리를 객관적으로 관찰해 보면 저건 절대로 근거 없는 실드가 아니다. 정말 작정하고 몇천~몇만 명 이상 짓밟아 버리면 민중 항쟁, 시위? 그런 건 애초에 일어나지도 못한다. 북한과 캄보디아를 생각해 보아라. 우리나라가 저 상황에서도 예외적으로 복 받은 거 맞다. 함부로 여기나 북한이나 똑같다는 소리 하지 마라.

10여 년 전에 MBC에서 방영했던 제5 공화국 드라마는 지금 다시 봐도 굉장히 고퀄로 잘 만들어지긴 했다. 실제로는 5공보다 여전히 4공 시절 이야기가 더 많긴 하다만..
또한, 논조가 그냥 일방적으로 전땅크와 신군부를 병크 저지른 것, 잘못한 것만 부각시키는 게 목적이라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정말 객관적으로 그 시절의 역사를 다룰 의도라면 최소한 1983년의 아웅산 테러라든가 이 윤상 군 유괴 사건도 다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유괴범은 듣거라. 아이가 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라는 대사를 이 덕화 씨가 읊었으면 재미있지 않았겠는가?
그럼 다음 잡설들을 추가로 늘어놓으면서 글을 맺도록 하겠다.

(1) 난 박통의 최종 계급이 투스타인 걸로 지금까지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전역 직전에 명목상 포스타로 쾌속 진급을 한 뒤에 전역했다. 이건 전땅크, 심지어 후임 노 태우도 마찬가지. 다 예비역 대장이다.
이러니 김 영삼이 자기 정권 코드 네임을 '문민정부'라고 지었겠다 싶다. 군인 출신이 아니라 순수 민간 정치인이 정권다운 정권을 역사상 처음으로 잡았다고 말이다.

몇 달 전에 고인이 된 김 영삼 전대통령은 교회 장로여서 그런지 이 승만에 대해서는 좋게 말한 반면, 직접적으로 자기를 탄압했던 박 정희에 대해서는 늘그막까지도 혹평과 악담 스탠스를 바꾸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박통 말기에 이 정권은 얼마 못 가 무너질 것이고,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무너질 거라고 저주를 내리기도 했다.
보통은 둘 다 좋아하거나 둘 다 싫어하고, 하나만 고르라면 차라리 박 정희를 이 승만보다 더 선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 영삼과 같은 성향은 좀 흔치 않아 보인다.

(2) 이 승만, 장 면, 윤 보선, 최 규하, 노 태우는 다 영어를 작살나게 잘한 정치인이었다. 학구파 기질이 있었다. 거기에다 지금 레이디 가카도 영어를 포함해 외국어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고.
그에 반해 전땅크는 공부 타입은 아니고 체력, 리더십, 인맥 연줄, 사회성처럼 사업가나 정치인에게 어쩌면 더 필요한 아날로그스러운 자질이 충만했던 타입이다.

(3) 전땅크는.. 좀 얄미운 구석은 있다만, 그래도 대통령으로서 인사 배치와 리더십은 나쁘지 않았다. 군인이던 시절엔 1.21 사태 때 큰 전공 세우고 나중에 그의 주도하에 제3 땅굴까지 발견했다. 그리고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집권 중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을 잘 해결하고 사형 집행 잘해서 사회 정의를 실현한 것도 잘한 점이다.
잘한 건 잘한 거다만.. 돈 많은 거 알고 있다, 선고받은 뇌물 추징금은 빨랑 뱉어라. -_-;;

Posted by 사무엘

2016/01/29 08:44 2016/01/2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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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연혁은 since 1919일까, 1948일까?
이건 안 중근은 의사인가 장군(중장!)인가, 한글은 총 몇 자인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은 백두산인가 한라산인가.. 뭐 그런 급으로 관점에 따라 답이 달라지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질문이다.

건국절 드립을 치면서 1948을 미는 분들은 잘 알다시피 이 승만 대통령의 건국 공로를 띄워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정작 이 승만 정권은 그 당시의 각종 관보에서 since 1919를 적극 밀면서 건국 29주년, 30몇 주년 그런 표기를 썼었다. 이건 뭐 문헌상으로 확인 가능한 팩트이며, 건국절 드립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제시하곤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왜 1919를 강조한 걸까?
그렇게 함으로써 남한, 대한민국만이 임시정부의 이념을 온전히 계승했고 한반도의 유일하게(one and only) 합법적인 UN 승인 정권임을 강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 승만 자신도 한때 임시정부의 대통령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 와중에 북한 따위는? 라이벌은 고사하고 아예 존재감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없는 놈 취급하고 무시했다. 마치, 일본에서 아무리 X랄을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나라에서 독도에다 군대가 아닌 경찰을 배치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니 북한은 1919를 뺏긴 대신, 타이타닉 호가 침몰하고 수령님이 탄생하신 해에다가 억지로 정통성을 연결하여 주체 원년이라고 갖다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역사에서 유 관순이니 삼일 운동, 임시정부 따위는 아오안이 됐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1948년의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은 막 그렇게까지 대단하게 유세를 떨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승만 정부는 오히려 날짜조차도 티를 안 내려고, 의도적으로 8월 15일 광복절과 동일하게 날짜를 맞췄다! 더 일찍 선포를 하고 하루라도 더 빨리 미군정을 졸업할 수도 있었지만 광복절로 미룬 것이다. 1948년 스타트를 너무 강조하는 건, 남한의 격을 비슷한 시기에 새로 정부를 수립한 북괴의 격과 동등하게 격하할 수도 있다고 봤던 듯하다.

그럼 1919에 비해 1948이 아무 의미가 없느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다.
1919년 건국은 지금 실질적인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냉정하게 비춰 보자면, 명목상 상징에 가까운 선언일 뿐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인 1945년 이전에, 상하이 망명 신세이던 임시정부가 한반도에 실질적인 통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영토나 국민은 그렇다 치더라도 주권이 여전히 없음은 명백하지 않은가.

마치 안 중근이 위대한 일을 했으며 만약 어느 주권 국가의 정규군에서 장교로 복무했다면 장군감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긴 하지만, 현실에서 그가 실제로 정식 군 장성은 아니었던 것과 같은 이치다. 또한 남극이나 달· 화성에다 영토 선언을 해 놨지만 당장 그 땅에서 할 수 있는 건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다가도 비유할 수 있다.

비록 해방 자체는 우리 힘이 아니라 국제 정세에 의해 얻은 것이라 치지만,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을 막고 공산주의와는 단호한 분리를 감행하고, 자유 민주주의 이념으로 당당히 UN 승인 독립 국가 간판을 내건 1948년 레알 스타트도 이제 와서는 존재감이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심판의 선고와 실제 집행의 차이랄까? 특히 요즘은 국가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하하는 온갖 악독하고 해로운 역사관들이 사람 심성을 망쳐 놓는 시기이니 말이다.

비록 그 스타트의 주역들은 겸손해서, 혹은 전략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걸 막 내세우지 않고 숨기고 광복절과 오버랩까지 시켰지만, 지금은 그 '건국'의 순간도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뉴라이트네 수꼴이네 일베충이네 하는 별 희한한 비방이 두려워서 진실을 말하는 걸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요컨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싶으면 1919를 부각시키면 되고, '정체성'을 강조하고 싶으면 1948을 밀면 될 것이다. 이 정도면 애초에 서로 싸울 필요 없이 선호하는 연대를 '취존'(?)해 주면 될 것으로 여겨진다. 덧붙이자면, 그 옛날 3·1 운동 당시에도, 구호의 명칭이 '조선 독립 만세'가 아니라 대한 제국에서 모티브를 딴 '대한 독립 만세'였다는 점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검색을 해 보니 본인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 분이 이미 꽤 오래 전에 신문에 칼럼을 기고해 둔 게 있다. 그거 링크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맺겠다. 저기서는 정체성 대신 정당성이라는 용어를 썼다.

Posted by 사무엘

2016/01/24 08:31 2016/01/2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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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을 검색해 보니 5년도 더 전, 굉장히 옛날에 한번 텔레비전 방송 사고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는 말 그대로 출연자가 저지른 실수 위주로 유명한 국내 사건들을 나열했었다.
이번에는 그것보다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분류를 해 보고자 한다. 이유와 원인이야 어쨌든 최종 시청자들이 방송사에서 의도하지 않은 화면을 보게 된 일체의 사건들을 일컫는다.

다음 카테고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갈수록 현실성이 떨어지며, 사건의 심각성도 그에 비례해서 더 커진다. 실수가 아니라 범죄에 더 가까워진다.

1. 출연자의 실수

생방송 중에 갑자기 돌발상황이 발생하여 출연자들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터져 버리는 귀여운 유형이 많다. "나라의 경제를 얘기하고 있는데 파리가 앉았습니다"(2001)가 이 카테고리의 대표적인 예다. 한번 웃음병이 도져 버리면 마치 비행기가 실속에 빠져 버린 것처럼 출연자들이 헤어나오기가 어려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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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를 수습하려고 MC가 나름 재치와 센스를 발휘해서 애드립을 구사한 것이었을 텐데, 오히려 그게 게스트 출연자의 웃음 고문을 더욱 가속해 버렸다. =_=;

다만, 외국에서는 생방송 중에 뉴스 기자가 현장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심지어 살해당하는 방송사고도 있었다. 이건 재미있는 사고라고 볼 수는 없다.
출연자의 실수로 인한 방송 사고는 관계자가 자기 방송사 내부에서 징계를 당하는 결과는 야기할 수 있는 반면, 그래도 대외적으로 누가 경찰서 정모를 한다거나 공권력의 철퇴를 받지는 않는다. 사안이 제일 가볍다.

2. 출연자의 고의 난동

국내에서는 카우치 성기 노출(2005)이 이 카테고리에서는 아마 제일 충격적인 사례에 속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인디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몇 년 동안 방송에 나오지도 못하고 고생 많이 해야 했다. 그리고 쇼 프로는 무조건 생방송이 아니라 최소한의 사전 검열은 가능하게 5분 지연 전송을 하게 제도가 바뀌었다.
이건 스샷을 올리기가 좀 민망하니 그냥 링크로 대체하겠다. 오죽했으면 이 장면을 북한 방송 화면에다 합성하여 "천하의 개쌍놈들" 짤방이 만들어졌다.

그나저나 또 외국에서는 생방송 중에 리포터가 갑자기 권총 자살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건 실수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3. 외부인의 난입

여기서부터는 일단 해당 TV 프로의 제작과 출연에 관여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다. 방송 중 외부인의 난입은 비행기 사고로 치면 버드 스트라이크(조류 충돌)와 비슷한 격이다.
이 분야에서 지존으로 꼽히는 국내 방송 사고는 두 건이 있다. 먼저 "귓속에 도청장치" 사건(1988). 이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엽기적인 사고인지라 외국에서도 소개되었다. 어떻게 겁대가리를 상실하고서 생방송 중인 뉴스 스튜디오로 침입을..? 하지만 그래도 심하게 악의적이지는 않은 정신병자의 난동일 뿐이었다는 게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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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을 보면 화들짝 놀란 스탭이 괴청년을 제압하여 바닥에 철퍼덕! 패대기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또한, 괴청년은 끌려 나가서 화면 밖으로 사라진 뒤에도.. 다시 한 번 "도청장~~!@#!@"이라고 단말마의 비명을 처절하게 외친다.

이 사건과는 달리, 만민 중앙 교회 MBC 침입 난동(1999)은 사안이 더 심각하다. 일개 종교 집단의 시위로 인해 공중파 방송국이 털리고 정규 방송이 중단되는 초유의 해프닝이 발생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외부인의 물리적인 난입보다 더 ㅎㄷㄷ한 단계가 있으니 바로 그것은..

4. 전파 납치

컴퓨터에 해킹이나 패킷 스니핑이 있듯이, 이건.. 방송국이 멀쩡하게 송신해 준 신호를 가로채서 다른 것으로 대체해 버리는 무지막지한 테크닉이다. 이것은 방송계의 위조지폐 내지 비행기 하이잭이나 마찬가지이며, 통상적인 방송 사고를 아득히 초월하는 범죄 행위이다. 특히 북한과 대처 중인 우리나라에서는 전파를 갖고 장난 치는 짓을 더욱 무겁고 심각하게 다룰 수밖에 없다.

단순히 기존 신호를 교란시키고 수신을 방해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다른 신호로 대체하는 것은 값비싼 장비가 필요하고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어렵기 때문에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음성은 그렇다 쳐도 영상은 바꿔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그래서 그런지 전파 납치는 국내에서는 보고된 적이 없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례는 미국에서 벌어진 '맥스 헤드룸' 전파 납치 사건(1987)이다. 영화가 방영되던 텔레비전에서 몇 분 동안 갑자기 기괴한 배경에 가면을 쓴 웬 정신병자의 기괴한 엽기 퍼포먼스가 흘러나왔으니 시청자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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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괴전파가 대략 어느 지역에서 발신되었는지 정도만이 어렴풋이 파악됐을 뿐, 누가 왜 저질렀는지 범인은 끝내 잡히지 못하고 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저 정체 모를 아저씨는 방송국에 가지 않고, 방송국 기자를 만나지 않고도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를 그럭저럭 실현했다. 하지만 어렵게 기껏 집어넣은 화면엔 동요 가사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따위는 없었다. 가면을 쓴 얼굴에 알아듣기 힘든 기괴한 음성, 그리고 끝에는 웬 SM스러운 스팽킹+신음 장면만이 고스란히 전파를 탔을 뿐이다.

이 글을 쓰면서 느낀 건데..
방송· 통신 내지 전파 공학이라고 해야 하나.. 저런 것도 특히 처음 개발되고 등장하던 당시엔 슈퍼 울트라 하이테크이긴 했겠다. 난 저런 건 진짜 새까맣게 모른다. 하나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근원을 파헤치려면 물리학의 전자기파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지만.. 이건 뉴턴 고전 역학도 아니고 손에 잡히지 않는 물질 세계의 특성에 대해 난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어서 GG를 쳐 버렸다.

라디오에 FM과 AM이 왜 존재하고 어떤 특성이 있는지, 중파· 단파 방송은 무엇이고 케이블 TV, 위성 TV, DMB는 무엇인지, 옛날에 무전기는 어떤 원리로 동작했고 지금의 휴대전화와는 기술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그리고 지금의 와이파이 무선 인터넷과는 차이가 무엇인지, UHF/VHF는 무엇인지...
터널 안에서도 음성· 영상 신호가 끊어지지 않으려면 뭘 해야 하는지(자동차 내비는 터널 주행 중일 때 보정을 어떻게 하나?) 그러고 보니 옛날에 무전기는 송· 수신을 동시에 할 수 없어서(시뮬레이션 게임으로 치면 실시간이 아니라 철저하게 턴 방식!) 말을 하는 쪽이 내 말이 끝났음을 알리기 위해 '오버'라고 해 줘야 했다. 그거랑 지금 무선 전화의 기술적인 차이는 무엇인지 등등등..;;

그래도 이런 분야에도 괴수 천재는 분명 있을 것이다. 옛날엔 정말 전파를 갖고 노는 사람은 자동차 기술자만큼이나 가히 마술사라고 불리기도 했을 것 같다.
신호 상태가 안 좋거나 수신되는 신호가 아예 없을 때는 옛날에는 수상기를 통해 그저 랜덤한 아날로그 white noise와 치지지직 소리만을 접할 수 있었던 반면, 요즘은 JPG artifact를 본다. 과연 디지털 시대를  실감한다.

* 이미 다들 아시겠지만, 본인은 11년쯤 전에 공중파 텔레비전에 출연한 적 있음. ^^;;

Posted by 사무엘

2016/01/18 08:25 2016/01/1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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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한말의 매국노

옛날에 나라를 일본에다 팔아먹은 을사오적 매국노 중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 완용을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사실 송 병준도 만만찮은 악질이고 후손들이 하는 짓까지 쌍으로 우주 쓰레기급임에도 불구하고 이 완용만 너무 유명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정당한 자업자득 인과응보이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완용의 행적은 흔히 얘기가 나오는 것처럼 "저 사람이 아니었어도/없었어도 어차피 조선은 망할 처지였다, 매국은 한 개인만으로 가능한 악행이 아니다" 같은 실드를 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우파 진영에서 괜히 그런 말을 해서 친일 수꼴이라고 안 먹어도 될 욕과 오해, 거짓 고소를 쳐먹을 필요가 없다.

저 사람은 김 옥균처럼 애국을 생각하고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결과가 안 좋게 된 그런 성향의 친일을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럼 일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일빠 오덕후 매니아였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무능하고 부패하고 개 썩어 빠진 미개한 조선 정부보다는 선진국 일본에게 통치를 맡기는 게 근대화를 제대로 이룰 수 있고 장기적으로는 조선 백성에게 더 좋을 거라는.. 그런 순진한 의도로 매국을 한 것도 아니다.

단적인 예로 이 완용은 일본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사람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나라를 팔아먹는 얘기를 나눌 때도 통역을 쓰거나, 아니면 간단한 담소쯤은 영어로 나눴다. 둘 다 똑똑하고 영어는 잘했으니까. =_=;; 이 완용은 죽기 전에 아들한테 유언으로 "앞으로는 또 미국이 뜰 거 같으니 그쪽으로 잘 보여라" 이런 말을 했다고 하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사실이라면 정말 꺼삐딴 리의 실사판이다.

그는 성경으로 치면 발람처럼 그냥 자기 가족의 영달을 위한 기회주의자일 뿐이었다. 자기는 일본어를 할 줄 모르면서 조선 땅의 학교에다가는 일본어 시간을 잔뜩 늘리고, 3·1 운동 가담자에게는 불순분자 선동에 넘어가서 뻘짓 하지 말고 곱게 찌그러져 있으라는 공갈 담화문이나 신문에 게재했었다.

만에 하나 시대의 대세가 도저히 어쩔 수 없어서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관여했다 해도, 그 뒤의 태도가 어떻느냐에 따라서 실드와 평생까임권이 갈릴 수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이 완용은 평생 일말의 반성이 없었으며 이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실드와 동정의 여지가 없다. 그 사람도 한반도에 무슨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하고 마냥 나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식의 말도 있나 본데, 그런 식이면 김 일성조차도 왕년에는 눈꼽만치 항일 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건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지금의 북한 치하보다야 차라리 일제 강점기가 훨씬 더 낫다. 일제 말기로 갈수록 '훨씬'이라는 단서는 설득력을 잃겠지만.)

물론, 일제 강점기 때도 근대화가 이뤄지고 식량 생산이 늘고 인구가 느는 등, 말기의 전쟁만 아니었으면 일말의 긍정적인 면모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 얘기 자체를 무조건적으로 금기시하지는 않아도 된다. 굳이 일제만을 욕하기 위해 조선의 탐관오리들을 미화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허나, 그렇게 식민지 근대화론을 최대한 감안한다 해도, 이 완용은 그와 무관하게 요리 보고 조리 봐도 완벽한 개새끼가 맞다(글자를 XX 따위로 가리는 처리를 일부러 하지 않았다). 단군의 후손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한 영원무궁토록 욕과 저주를 먹을 것이며, 족보에서 이름이 파이고 후손들이 부끄러워서 혹은 무서워서 전부 외국으로 이민 가도 그건 어쩔 수 없는 귀결이다.

사실, 이 완용의 후손들은(송 병준의 후손도 마찬가지) 다 재산 잘 챙겨서 잠적하거나 외국으로 도피해 있지, 누구 말마따나 겨우 조무래기 경찰이나 군 간부로 가 있지는 않다. 그리고 숨어서 자기 재산 되찾는 소송이나 걸지 그런 사람들이 미쳤다고 시사· 정치 발언이나 하면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광역 어그로를 끌겠는가? 얘들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친일파 이 완용의 대조군이 될 만한 사람은 두 명 정도가 있다.
이 봉창 의사는 이 완용과는 달리, 일본어를 일본 토박이와 분간을 못 할 정도로 능숙하게 구사했으며 일본인 지인과 인맥도 많았다. 독립 운동을 하겠다고 김 구를 찾아갔을 때에도 김 구는 쟤가 혹시 일제의 첩자가 아닌가 오랫동안 의심했을 정도였다. 대화를 많이 나눠 보면서 이 봉창의 레알 진심을 확인한 뒤에야 의심을 풀었다.

그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인맥과 접근성 덕분에 덴노가 있는 곳까지 가까이 가서 폭탄을 던질 수 있었다. 의거를 치르러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일본인 친구들은 그가 어디 여행이나 다녀 오는 줄 알고 배웅을 했다. 그때 히로히토 덴노가 죽거나 중상을 입었으면 역사가 또 크게 바뀌었지 싶다. 사람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는 언행만 봐서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음을 느낀다.

그 다음으로, 외국인 대한 독립 유공자인 호머 헐버트가 있다. 그는 한국과 한국인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국어를 독학으로 마스터 하여 유창하게 구사했다. 그리고 한글 같은 대단한 문자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 지금까지 왜 안 썼냐고 본토 사람들에게 반문을 했을 정도였다. 구한말 때부터 이미 헤이그 특사들을 같이 도와 주고, 이 완용이 디스했던 3·1 운동을 지지한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2. 아베 노부유키의 괴예언

그럼 다음으로, 구한말이 아니라 일제 말기에 마지막(제9대) 조선 총독이었던 아베 노부유키와 관련된 얘기를 좀 하겠다.
이 사람은 전범이며,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실드의 여지가 없는 악행을 많이 저지른 사람이다. 전쟁이 더 길어지고 일제가 일찍 항복해서 물러나지 않았으면 정말 가관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도 이런 저주에 가까운 말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왔다.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세뇌라..;; 그래서 저 말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고 친일파에 대한 피해의식이 많은 사람들에 의해 꽤 자주 언급되고 인용되는 편이었다.

우리는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한 것이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민이 제정신을 차리고 위대했던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무서운 식민 교육을 심어 놓았기 때문에 이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의 삶을 살 것이다.
보라,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그 식민 교육의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아베 노부유키는 조센징 노예들을 우습게 여긴 아주 나쁜놈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본인은 이 사실과는 별개로, 저 말이 그에게서 직접 유래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저 말이 내용면에서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서로를 이간질하는 노예적 삶'이라고 했는데..
한반도에 서로를 믿지 못하고 감시하고 이간질하는 노예적 삶을 조장한 진짜 주범은 소련과 그쪽을 추종한 공산주의자이다! 공산주의는 사람의 악한 본성을 최대한으로 뽕을 뽑아서 시너지 효과를 내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모든 인민을 평등한 거지로, 입에 풀칠하기에 바쁜 바보 노예로 만들지 않으면 유지가 되지 않는 저주받을 체제이다.

UN의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위원회를 발족시킨 것부터(1946년 2월) 시작하여 단독 국기와 애국가 제정(1947년), 분단과 단독 정부 수립도 북한이 먼저 시작한 거다! 아직도 이 승만이 분단의 원흉이네 정읍 발언(1946년 6월)이 민족 반역질이네 이 따위 헛소리가 내 눈에 띄는 거 난 용납 못 한다. 정읍 발언은 이미 다 발생해 있는 원인으로 인한 "대응의 결과"일 뿐, 그 자체가 원인이 아니다.

일제는 단군의 후손들에게 많은 불행을 끼쳤지만, 그래도 이념 갈등과 남북 분단에까지 관여하지는 않았다. 공산주의는 일제의 입장에서 보기에도 그저 탄압과 박멸의 대상일 뿐이었으니 말이다.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지고 러시아가 이겼다면 조선은 일제 식민지가 되지 않는 대신에, 러시아의 식민지가 돼서 훗날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가 됐을 거라는 전망도 있지 않은가.

남한은 나라가 잘 세워진 덕분에 공산주의의 직접적인 마수는 천만다행으로 피해 갔다. 하지만 그래도 북한의 방해 공작 때문에 민주주의 내지 시민의 자유를 불가피하게 더욱 제약하게 됐고, 더 강력한 공권력이 필요해진 관계로 친일 군경 간부 청산도 제대로 하기 어려워지는 등 여러 간접적인 피해를 입었다.

둘째, '옛 조선의 영광'이라고?
일제는 조선을 아주 비하하면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였다는 세뇌를 일삼아 왔다. 그 예 중 하나가 바로, 멀쩡한 지리학자인 김 정호가 병신 같은 조선 정부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옥사한 거라고 조작한 것이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비하를 하거나, 아니면 일본과 조선은 정체성이 하나라고 내선일체를 주장했다.

이런 와중에 일제 식민 지배의 수뇌부라는 양반이 갑자기 웬 뜬금없는 '옛 조선의 영광' 드립을 공개적으로 친단 말인가? 논리적으로 앞뒤가 전혀 안 맞는다. 이 어설픈 립서비스만 없었어도 예언(?)의 신뢰성과 사실성이 크게 올라갔을지도 모르는데... 저건 이순신 장군을 존경한다는 무슨 일본 해군 제독 얘기보다도 현실성이 더 떨어진다.
일본이 부러워할 정도로 조선이 리즈 시절이었던 때를 굳이 생각해 보자면, 아마 세종대왕 시절 정도밖에 없을 게다. 그리고 그건 아베 같은 사람이 그 상황에서 갑자기 거론할 이유가 없는 너무 먼 옛날이다.

마지막으로, '옛 조선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를 생각해 보자. 이거 어디서 많이 들은 표현이다.
바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했다는 말 중에도 '100년 드립'이 존재한다. 6· 25 전쟁 중이던가 후던가..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은 처참한 폐허를 보고는 "한국은 이거 다 복구· 재건하려면 한 100년은 더 걸리겠다"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그런데 맥아더의 저 말도 아베 노부유키의 말과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출처 검증이(언제 어디서 한 말?) 되지 않아서 아쉬움이 남는다.

허나, 맥아더의 말은 설령 사실이 아니라 주작이라 하더라도, 저주· 악담이 아니라 그냥 주관적인 전망일 뿐이었으며 결정적으로 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비록 영토가 반토막 나고 병크와 비리도 많고 문제도 없는 건 아니지만, 세계 10위권의 찬란한 선진국이 된 대한민국이 여전히 한낱 '옛 조선의 영광'만도 못한 상태인 걸까?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두 '100년 드립'은 모두 적중하지 않았다.

아베의 괴예언은 "그때 나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라는 병맛나는 허세로 끝나는데.. 이것조차도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에서 후퇴하면서 직전에 남긴 말 "I shall return.."을 묘하게 닮아 있다. 물론 맥아더는 나중에 진짜로 돌아와서 마치 프로토스 드라군의 생산 대사처럼 "I have returned"까지 당당하게 찍은 반면, 아베 노부유키는 그런 거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실상 있지도 않은(유효 오차 범위 이내) 친일 망령보다는, 당장 현실적으로 훨씬 더 큰 위협인 이런 망령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까 주의하고 경계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처사라 생각된다.

폴 포트는 죽었지만 그는 언제고 시공을 초월해서 다시 나타날 수 있다.
성공한 자들을 무조건 부정한 무리로 몰아붙이고
자신의 불행한 처지가 무조건 사회 부조리 때문이라 몰아붙이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선동가들의 장난에 놀아날 때
폴 포트는 언제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1/15 08:32 2016/01/15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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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도와 금식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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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마 17:21 흠정역.

벌써 9년이 훌쩍 넘은 옛날 일이 되긴 했다만.. 저건 2006년 5월 13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에스더 코리아라는 단체의 금식 기도회 광고이다.
평소에는 개역성경을 보지만 자기 행사의 성경적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부득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인용한 센스가 참 웃프다.

성경에서 저기 문맥은 이러하다.
예수님이 핵심 제자 세 명(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산에 올라가서 변모하신 뒤, 돌아와 보니 다른 제자들은 그 동안 부정한 영이 들린 어느 소년을 고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상태였다. 허나 그들은 스승만치 실력이 뛰어나지 못해서 고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예수님은 아직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꽤 실망하신 듯.. "어휴.. 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터치를 해 줘야 하냐? 아이를 데리고 와 봐라." 하신 뒤 아이를 바로 고쳐 내셨다.
제자들이 나중에 "우리는 왜 부정한 영을 내쫓지 못했습니까?"라고 슬쩍 묻자 이때 예수님은 "일차적으로는 너희의 불신 때문이다. 그러나 저번 건 좀 쉽지 않은 일이고 간절한 금식과 기도로 약발을 올릴 필요가 있다"는 요지로 대답을 하셨다. 그리고 이 '금식과 기도'를 언급한 마 17:21이 KJV 이외의 다른 역본들에서는 '없음' 삭제된 것이다.

다만, 이와 동일한 '금식과 기도' 말씀이 막 9:29에도 있는데 굳이 '흠정역'이라는 단어까지 거론하면서 마 17:21을 인용한 이유는 본인으로서는 알 길이 없다. 더구나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말은 '킹제임스 흠정역'이나 '한글 킹제임스' 같은 기존 한국어 역본을 있는 그대로 인용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창작한 문장이다.

뭐, 마가복음 9장이면 29절 '금식과 기도'는 남아 있지만, 그 뒤의 46과 48절에서 "거기서는 그들의 벌레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지옥 경고문이 무단으로 삭제되었다는 점을 참고로 알아 두도록 하자.

2. sky와 heaven

한국어로는 이 두 단어가 별 구분 없이 똑같이 '하늘'로 번역되어서 차이가 잘 와 닿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둘이 신학· 성경 용어로서 중대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완전 반성경 반기독교적인 옛날 팝송인 Imagine의 첫 부분 가사를 통해서, 의외로 금방 실감할 수 있다.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heaven이고 hell 그딴 건 없고 우리 머리 위로는 오로지 sky만 있는 세상을 상상해 보아요)


이걸 생각하니 개인적으로 정신이 번쩍 드는 게 느껴졌다.
바로 저런 사고방식으로 인해 오늘날은 성경 역본들조차도 heaven과 hell이라는 단어가 본문에서 갈수록 줄어들고 sky로, 그리고 반의어는 grave, hades, sheol 등 이상한 단어로 대체되고 있다.
크리스천이 주변에 복음을 전할 때 예수 안 믿으면 죽어서 지옥에 간다고 얘기하지, 하데스나 스올이나 저승에 간다고 얘기하던가? 이런 단어의 변개는 그야말로 기독교의 근본 교리와 정체성을 공격하는 짓이 아닐 수 없다.

3. 그분의 피로 우리의 죄들을 씻으시고

먼 옛날에 본인은 <카타콤의 순교자>라는 기독교 역사 소설을 만화 형태로 각색한 책을 우연히 접한 적이 있었다.
로마 제국 시절에 끔찍한 박해를 피해서 크리스천들은 지하 무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무슨 도사처럼 생긴 백발 노인이 성경 두루마리를 펼쳐서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고전 15:55) 같은 난해하지만 감격스러운 말씀을 낭독했다. 그리고 예수쟁이라는 인간들이 믿는 해괴망측한 교리가 도대체 뭔지 알고나 싶어서 어느 로마 군인이 모임에 몰래 합류하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그러나 첩자 내지 배신자의 밀고로 붙잡힌 신자들은 콜로세움에서 인간 횃불이나 사자밥이 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 순교 컷의 하단에는 많고 많은 관련 성경 구절들 중에 계 1:5-6이 자막으로 적혀 있었던 걸로 본인은 기억한다.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들에서 우리를 씻으시고 하나님 곧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께 즉 그분께 영광과 통치가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계 1:5는 성경 전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죄를 씻어 주셨다고 wash라는 단어까지 써서 문자적으로 말하는 유일한 구절이다. 그러나 킹 제임스 이외의 다른 모든 성경 역본들은 wash가 loose 내지 free로 바뀌어서 '죄들에서 해방시켰다'라고 되어 있다. 루시퍼나 이스터나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라'(벧전 2:2)만치 유명한 변개 구절은 아니지만 굉장히 충격적인 차이가 아닐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다음 영문 사이트의 내용을 참고하시라.

'죄를 씻었다'라는 표현이 없으면 당장 찬송가 가사부터가 근거 구절을 잃는 직격탄을 받을 것이다.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그대는 씻기어 있는가>를 찬송가에서 찾아 보면, 참고 구절은 다들 요일 1:7을 제시한다. 이건 그나마 계시록과 동일하게 사도 요한이 기록한 책이고, 꿩 대신 닭이라고 cleanse를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라는 의미 자체는 통한다. 그러나 깨끗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에 속하는 wash와 정확하게 같지는 않다.

그 카타콤의 순교자 책에서도 '해방하시고' 대신에 '씻으시고'라고 적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 순교자

내가 앞에서 성경 변개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카타콤이니 순교자 같은 이야기를 많이 꺼낸 이유는.. '순교자'(martyr)라는 엄청난 단어가 존재하는 성경 자체도 킹 제임스뿐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자였다고 인증하였고(행 22:20), 주님은 계시록에서 안디바라는 어느 성도가 순교자였다고(계 2:13) 증언하셨다. 끝으로, 음녀 바빌론이 바로 순교자들의 피에 만취했다고 나온다(계 17:6).

킹 제임스를 제외한 다른 모든 역본들은 순교자 대신 그냥 '증인'이다. 증인은 킹 제임스 성경에도 얼마든지 쓰인 단어인데? 계시록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을 비롯해서 고난의 증인(벧전 5:1), 신실한 증인(계 1:5) 등..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무수히 많은 순교자를 만들어 낸 바로 그 악의 무리들은 '순교자'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성경을 절대로 좋아할 리가 없을 거라는 점이다. 가령, 로마 가톨릭의 과거 만행을 은유적으로 폭로하는 계 17:6 같은 경우는 그냥 증인이라고 썼을 때는 표현의 수위가 상당수 희석될 수밖에 없다.

5. 예수님은 은근히 낮추고 사탄을 높임

그 뿐만이 아니다. 계 2:13은 순교자/증인 말고도 충격적인 차이점이 더 있다. 킹 제임스는 간단하게 '사탄의 자리'(seat, 좌석)라고 번역한 반면, 다른 역본들은 대적인 사탄을 지위를 대놓고 높여서 '사탄의 왕좌'(throne)라고 번역한 것이다! 이건 마치 우리로 치면 '일왕· 덴노/김 정일' vs '천황/김 정일 국방위원장' 정도와 비슷한 차이가 아니겠는가?

복음서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그분께 먼저 경배(worship)를 한 뒤에 애원과 간청을 했는데, non-KJV들은 그 부분을 상당수 그냥 무릎을 꿇었거나 절했다고만(bow / kneel down) 표현했다. 그러나 그런 역본들도 계시록 13장에서 사람들이 짐승 적그리스도에게 홀딱 반하는 장면에서는 곧이곧대로 경배했다고 번역했다.
이 정도면 그냥 막가자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KJV에도 그냥 무릎을 꿇었다는 표현은 따로 있다. 막 15:19만 봐도 두 표현이 병렬로 모두 등장하는 곳도 있기 때문에 이들은 단순히 상호 혼용 가능한 관계가 아니다.

6. 보혜사 vs 위로자

본인은 예전에 <신이 보낸 사람>이라는 영화를 소개했고, 거기 엔딩 크레딧 중엔 어느 북한 지하 교회 할머니의 기도를 몰래 녹취한 음성이 흘러나온다고도 얘기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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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여, 복원하시고 역사하시는 주의 보혜사가 나타나심을 (나는)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엔 '보혜사'(redeemer)라는 단어를 보고도 왜 나의 직업병이 발동하지 못했던 걸까?
보혜사는 요한복음 14~16장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성령님을 가리키며 등장하는 단어이다. 허나 저 무명의 어르신이 킹 제임스 성경을 봤다면 기도에도 막연한 보혜사가 아니라 '위로자'(comforter)라는 단어가 쓰였을 것이다.

병맛 개그 차원에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가정이 황폐화되는 현실"이 아니라, 저기는 순전히 끔찍한 박해 때문에 교회가 문자 그대로 무너지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다 피흘려 순교한 너무 처절하고 절박한 상황인데.. 위로자가 없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학대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말씀하는 전 4:1과 동일하게 연결되는 단어인 것이다.

7. 사람이 구원받는 장면에서의 변개

십자가에 매달렸던 한 강도가 구원받는 누가복음 장면에서(눅 23:42).. 강도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서 구원받았지(롬 10:13, 행 2:21), 변개된 성경에서처럼 '예수여~, 예수 씨' 이러지 않았다. 이건 마치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게 대단하지, '그 사람/그분'이 육신을 입고 온 것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인 것과 동일한 이치이다(딤전 3:16).

선천성 맹인이 시력을 얻고 구원받는 장면에서(요 9:35)도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물었지 "네가 사람의 아들을 믿느냐?"라고 하시지 않았다.

또한, 행 8:37이 변개된 성경에서 모조리 삭제된 것은 매우 유명하다. 이것은 이디오피아 내시가 구원받는 장면에서 적절한 신앙 고백의 필요성과 물침례의 조건을 명시한 구절인데 이게 없어짐으로써 비성경적인 유아 세례가 횡행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다 커서 스스로 믿음을 고백할 줄 아는 신자에게만 침례를 주는 교회가 오히려 유별난 교파인양 '침례교'라고 따로 불리게 되었다. 그게 성경적으로 당연하고 그것만 유일하게 맞는데도 말이다.

교회사에서 진짜 기독교회들은 노바티안, 왈덴시스 등 모임 인도자의 이름을 딴 이상한 듣보잡 집단으로 명명되고 정작 '기독교회'라는 이름은 이상한 집단이 도둑질해 간 것과 비슷한 역설이다.

이런 것 말고도 뭐..;;
이스터, 루시퍼, 갈보리, 총 13군데에 달하는 '없음' 구절 같은 건 더 말하면 입만 아프니 또 거론하지 않겠다.
예전에 본인이 쓴 <음란한 성경은 가라>라는 글은 이런 차이점들 중에서 특별히 제목이 암시하는 분야에서의 차이점을 다루었다.

게다가 성경의 맨 첫 구절인 창 1:1도 다르고(KJV는 heaven, 나머지는 heavens 복수), 맨 마지막 구절인 계 22:21도 다르다(non-KJV는 '주 예수'만 있고 '그리스도' 빠짐). 이런 팩트 속에서 KJV는 그저 개역성경의 영문판 같은 성경이라 말할 수 있겠으며, 어떻게 시중에 나온 성경들이 그냥 다 똑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신앙에서 교과서, 계약서, 법전 이상인 크리티컬하고 중요한 그 텍스트가 말이다.

애초에 기독교는 예수 유일주의를 주장하는 곳인데, 그런 교리를 내세우는 근간인 텍스트 또한 하나만 옳고 그 하나와 일치하지 않는 다른 것들은 다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논리적으로 지극히 타당하지 않겠는가? 성경 역본 문제는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면 바로 답이 보인다.

개독안티들이야 하나님의 말씀 보존 약속을 믿을 리 없으며 말씀이 보존되어 있으면 "안 되는" 처지이기 때문에 KJV를 얼마든지, 기를 쓰고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믿는다는 사람이 그런 논리에 끌려가면 이건 뭐 이적행위인지 팀킬인지 참 곤란한 상황이 된다. 본인은 특정 집단의 이익은 개뿔, 내 신앙의 근간과 정체성을 방어하기 위해서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를 옹호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31 08:35 2015/12/3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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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 25 개전 초기의 승전 기록

우리는 6· 25 전쟁에 대해서 초기엔 기습적인 남침에 허를 제대로 찔린 나머지 서울을 사흘 만에 뺏기고 한동안 졸전과 패전, 후퇴만을 거듭하다가 낙동강 일대까지 밀렸다고 알고 있다.
그건 물론 거시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개전 초기에도 다음과 같은 일부 국지전에서는 국군이 승리하기도 했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좋겠다.

(1) 춘천-홍천 전투
6월 25일부터 30일까지 한반도의 중· 동부 지역인 춘천 일대에서 북한군이 진격해 오는 것을 국군 제6보병사단이 성공적으로 차단한 전투이다.

물론 서울을 빼앗긴 상황인 데다 북한군의 엄청난 물량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아군도 7월 1일에 춘천을 내어주고 후퇴하게 되었지만, 이때 제6보병사단이 벌어 준 며칠간의 시간은 정말 결정적인 금쪽같은 시간이었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고서 남진이 사흘 정도 지연되었으며, 그 동안 우리 쪽에서는 전열을 가다듬고 UN군의 파병을 논의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정말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서 나라를 구했다. 당시 이 사단의 최고 지휘관은 김 종오 장군이었다.

(2) 대한해협 해전
본토의 휴전선 인근에서 저런 난리가 벌어지는 동안 바다, 그것도 후방도 그저 조용하지만은 않았다. 북한군은 육로뿐만 아니라 배를 타고 동해를 따라 부산으로도 곧장 후방 침투용 공작원을 보냈기 때문이다. 누가 주장하는 것처럼 1980년 5월에 광주에 공작원 600명이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1950년 6월에 부산에 공작원 600여 명이 괴선박 한 척을 타고 침투되고 있던 건 사실이었다.

손 원일 제독이 도입한 백두산함은  6월 25일 당일 밤에 북한군이 탄 괴선박을 발견하고 "귀함은 언제 어디서 출항하여 어디로 가고 있는가? 소속 국가가 어디인가? 정지하라.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한다"라고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응답이 없고 나포도 되지 않자 결국 함포를 발사했다.
괴선함도 무장이 달린 군함이었기 때문에 몇 차례 교전이 오갔으나.. 결과는 남한의 승리였다. 아군은 몇 명이 전사· 부상하고 군함이 경미한 손상을 입은 반면, 괴선박은 완전히 침몰했으며 그 안에 있던 수백 명의 북한군 병사들은 부산에 상륙하지 못하고 수장됐다. 대한민국 최초의 6· 25 전투 승전은 바로 이 해전이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다뤄졌던 흥남 철수는 이로부터 거의 정확히 반 년 뒤 크리스마스 직전에 있었던 일이다. 중공군의 개입 때문에 서울까지 도로 빼앗긴 1· 4 후퇴가 있기 열흘 남짓 전이기도 하다. 이때 수많은 피난민들이 탔던 미군 군함은 다행히 적군의 공격을 받지 않고 부산에 무사히, 기적적으로 잘 도착했다.

6· 25 하니까 나는 생각이다. 리암 니슨이 맥아더 역을 맡아서 인천 상륙 작전을 배경으로 하는 6· 25 영화가 내년에 나온다고 하는데.. 기대된다. <오! 인천>이나 <클레멘타인>(스티븐 시걸..) 꼴 나지 말고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UN군이 널 찾아 내서 널 죽여 버릴 거야." / "잘해 보라우" 이런 대사가 나오려나 모르겠다.
딸을 구출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에펠 탑이라도 폭파할 기세였으니, 북괴군을 섬멸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평양에 핵이라도 떨어뜨릴 생각 정도는 충분히 하고도 남겠다. ㄲㄲㄲ

2. 일제 강점기 때의 독특한 인권 변호사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의 독립에 기여하여 건국 훈장을 받은 인물 중에는 프랭크 스코필드 같은 외국인이 있다는 건 다들 아실 것이다. 그런데 유럽/미국인, 혹은 중국인이 아니라 적국인 일본인 중에도 이런 훈장이 추서된 사람이 딱 한 명 있다.
무다구치 렌야처럼 캐 무능 병신 졸장 일본군 고위 인사를 빈정대면서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감이라고 얘기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만, 여기서 말하는 건 그게 아니라 진짜로 진지하게 훈장을 받은 사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주인공은 바로 '후세 다쓰지'(1880-1953)라는 변호사이다. 임진왜란 때에도 김 충선 같은 항왜 귀순 장수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저 사람은 애초에 군인이 아니고 메이지 대학 출신의 법조인이다. 훈장이 추서된 건 다소 늦은 2004년으로, 당연히 당사자의 후손이 훈장을 대신 받았다. 외국인인 관계로, 훈장만 줄 뿐 연금 같은 다른 혜택은 없다.
사실은 더 일찍부터 이 사람에게 훈장을 추서하려는 논의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태생이 일본 국적이라는 점 때문에 논의가 미뤄지곤 했다고 한다.

그가 일본의 법조인으로서 조선인에게 잘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뭐 안 봐도 비디오다.
이 사람은 정말 인권 변호사였다. 일본 자국 내에서 차별과 설움을 받는 부라쿠민 소수 민족들, 그리고 자기 나라의 식민 지배를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적극 변호를 해 줬다. 그리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심지어 자국의 조선 침탈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일본 정부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찍혔으며, 굳이 조선 편들기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진보 좌파스러운(일본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봤을 때) 다른 판결들 때문에 급기야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물론 종전 후에는 복권됐다.

그는 1919년에 3· 1 운동 이전에 일본의 조선 유학생들이 벌였던 2· 8 독립 선언의 주동자들을 변호하고 이들은 일본 내란죄 혐의에 대해 무죄라고 주장했다. 관동 대지진 때 벌어진 조선인 학살에 대한 사죄문을 신문에 기고하고, 정부의 폭동 묵인과 날조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정도면 굳이 한국 편 일본 편을 떠나서 정말 일본 안의 살아 있는 양심 급이 아닌가 싶다.

3.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일본군 패잔병

잘 알다시피 일본은 1930년대 말에 중일 전쟁부터 일으켰다가 미국을 상대로 태평양 전쟁까지 일으키고, 동남아 일대 나라들을 무단 침략하고 점령하면서 세계를 상대로 그야말로 온갖 깽판을 부렸다. 그러다가 핵을 두 방이나 맞는 험한 꼴까지 당하고 전쟁에서 완벽하게 참패했다.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했으며, 그 대가로 단순히 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가 아니라 20세기 이래로 자기가 차지했던 식민지들을 몽땅 뱉어 내게 됐다. 우리나라 역시 이때 덤으로 일제로부터 해방됐다.

이에, 지금까지 점령지에 있던 일본군들은 무장을 해제당하고 그대로 본국으로 귀환하게 됐다. 그런데 연합군과 직접 교전하다가 항복하고 포로가 된 게 아닌 일부 군인들은 그 당시의 교통· 통신 사정을 감안했을 때 패전과 항복 소식을 제때 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도가 지나쳐서 종전 후 수~수십 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동남아 밀림 속에서 문명을 거부하고 혼자 일본군 행세를 하며 산 독특한 패잔병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노다 히로'라는 일본군 소위인데.. 무려 1974년까지 필리핀의 루반 섬에서, 본국으로부터 아무런 보급도 명령도 안 받으면서 자칭 일본군 행세를 하며 지냈다고 한다. 필리핀 민간인을 약탈· 살상하면서 말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이제 그만 투항하라고 필리핀 정부, 동료 병사, 심지어 일본에 있는 가족까지도 애걸복걸을 했지만 그는 싹 다 귀축영미의 거짓 선전쯤으로 치부하고 믿지 않았다.

머리가 없는 좀비도 아니고..
우리 부모님이 죽지 않았다고 믿으면서 시신 옆에서 먹고 자며 지내던 누구처럼..
도대체 일본군 내부에서 정신 교육 세뇌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런 인지부조화 망상에 젖어 지낼 수 있었을까?
6· 25 때는 우리나라에도 "후퇴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끝까지 고지를 지킬 것이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움에 임하겠습니다"란 FM 답변으로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병사가 있긴 했지만, 저 아저씨는 좀 심하게 오버했다. =_=;;
게다가 6· 25 때 남한은 침략자로부터 자국 영토를 지키는 입장이었던 반면, 저기서 일본은 대놓고 남의 나라에 쳐들어간 침략자였으니 동일선상에 있는 비교 상대도 안 된다.

그는 그렇게 근성으로 살다가 결국, 한참 전에 예편한 옛 직속상관으로부터 명목상 투항 명령서를 정식으로 전달받은 뒤에야 투항했다. ㅋㅋㅋ
무슨 도마냐..;; 내 눈과 손으로 못자국과 창자국을 직접 보고 만지지 않는 한 절대로 믿지 않겠다고.. (요 20:25)
이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는지 사도 요한은 훗날 요일 1:1에서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보았을 뿐만 아니라(look, see) 만지기까지 했다(handle)는 표현을 특별히 넣었다.

4. 6·25 때 일본군이 몰래 참전했는가?

우리나라는 건국 당시에 주변에 적이 참 많았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과 소련이 전부 공산화가 된 와중에, 남조선만 친미 자유 진영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비록 붉게 물든 나라는 아니지만 바로 얼마 전까지 식민 통치를 했던 철천지 웬쑤이니 역시 수교를 할 리가 없었고, 서로 소 닭 보듯 애써 외면하면서 없는 사람 취급하는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우리나라는 6·25 전쟁의 포화에 휘말렸다. 이에 UN군이 북한을 저지하러 참전했다. 일본은 아직 UN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전범국이었으며, 헌법 차원에서 무장을 영구적으로 해제 당한 상태였다. 이념에 따라 남북 어디를 군사적으로 편들 필요가 없고 애초에 편을 들 수조차 없으며, 그저 이웃집 불 구경만 하면 되는 중립 옵저버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에서는 몰래 무슨 군대를 파견해서 원산 앞바다에서 기뢰 제거 같은 전투 행위를 슬그머니 했다고도 한다. 이건 마치 196~70년대에 휴전선을 몰래 넘어 북한 영토로 가서 북한군 몇십 명을 때려잡았다는 북파공작원의 얘기를 듣는 듯한 느낌이다. 비록 일본이 북한을 편든 건 아니었지만, 저것도 결국은 다~ 군사 무장 명분이라는 자기 이익을 노리는 수작이기 때문에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6·25 당시에 참전한 남한 아군 중에는 재일 학도 의용군도 있었다. 이들은 UN군의 신분으로 참전했는데, 일본어는 잘하지만 한국어는 못하곤 했다. 이 승만 대통령은 전선 시찰 중에 이걸 우연히 발견하고는 일본이 전쟁에 슬그머니 개입한 줄로 생각했다. 그 연륜과 성깔이라면, 그 순간 그는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구한말 동학 농민 운동의 트라우마가 떠올랐지 싶다.

당장 급하다고 외세를 끌어들여서 내란을 진압했다간 내란이 끝난 뒤에 나라가 무슨 꼴이 나는지? 게다가 일본은 지금 이 상태로도 미국의 병참 기지가 된 덕분에 얼마나 대박 재미를 보고 있는데, 하물며 진짜 병력까지 한반도에 개입한다면?
이 사람이 젊은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의 양대 산맥이 바로 저 일본이랑, 미국(가쯔라 태프트 밀약 때문에 버림받은 것)이었으며, 이로 인한 강박관념 성향은 그가 훗날 대통령이 된 뒤 초강경 외교 노선으로 고스란히 표현됐다.

이에 이 승만은 거침이 없었다. "미국이 일본까지 슬그머니 끼워서 전쟁에 참가시키려는가 본데, 만약 왜놈들이 한반도에 온다면 우린 왜놈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을 쏘겠다" 이런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요즘으로 치면 "전쟁 나면 간부들부터 죽이고 나서 북한군 쏘겠다" 거의 이런 급의 극단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아, 쟤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교포입니다"라는 해명으로 오해는 곧 풀렸다.

'정읍 발언'이 아니라 '왜관 발언'이라고 검색해 보면 이때 대통령의 행적을 알 수 있다.
전자는 이 승만이 남북 분단의 원흉이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 선동질을 할 목적으로 종종 언급되는 반면, 후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승만의 독도 수호 궁극의 반일 노선의 결과물인 평화선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게 팩트를 모르니까 6· 25 때 이 승만이 일본으로 도망칠 계획을 잡고 있었네 하는 이상한 위사가 나오면 그런 떡밥은 좌우 문맥 따지지도 않고 좌좀들이 옳다구나 잘도 물고 낚이는 것이다. 이 승만은 오히려 이때에도 권총샷 드립을 구사하면서 자신은 한국 땅에서 뼈를 묻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혔다.
"우리나라가 전쟁에서 져서 북한군이 내 앞에까지 쳐들어오게 된다면 난 이 권총으로 적을 쏘고 다음에 아내를 쏜 뒤, 마지막 총알로는 자결할 것이다."

5. 구국의 영웅에서 쳐죽일 나치 부역 반역자로 -- 프랑스의 앙리 필리프 페탱 장군(1856-1951)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아닌 프랑스 얘기를 좀 하고 글을 맺겠다.
저 사람은 보병 장교 출신의 군인이다. 1차 세계 대전 때 베르됭 전투에서 독일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면서 가히 구국의 영웅으로 등극했으며, 종전 후에는 프랑스의 역사상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드문 원수 계급에 추대되었다.

저기 연도가 보이시는지? 저 사람은 1856년생이다. 1차 세계 대전 타이밍 때만 해도 이미 50대 나이가 꺾인 노장이었으니, 저 전쟁을 끝으로 완전히 은퇴만 해 버렸으면 그는 평생 부와 명예를 거머쥐면서 행복한 노후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처음엔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급박한 시대 정세가 "구관이 명관" 운운하면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또 프랑스가 전쟁에 휘말리자 그는 총리 자리에 올랐는데, 여기서 그는 자기의 영광스러운 과거 커리어를 모조리 말아먹는 실책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에게 그냥 항복해 버렸고, 그 대가로 '비시 프랑스'라는 괴뢰 정부의 수립을 보장받은 것이다. 그는 강대국인 나치 독일에 저항해 봐야 국민적으로 얻을 게 없으며, 이렇게 정권을 유지하는 게 국민에게 더 이익이고 그리 치욕스러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또한 히틀러가 그렇게까지 인간 악마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모조리 빗나갔다. 나치가 패망하고 전쟁이 끝나자 그는 졸지에 매국노 반역자가 되었다. 고국으로 돌아오자 부하 군인들은 아무도 페탱 장군에게 경례를 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사형시키라는 여론까지 들끓었다. 90세에 육박하는 고령이 된 그는 최종적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며, 마치 나폴레옹처럼 대서양 연안의 섬으로 유배를 당하고 거기서 세상을 떠났다.

이 사람은 뭔가 중국에 조공을 바치던 조선의 사대주의를 추구한 것 같기도 하고, 김 옥균처럼 악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오판을 저지른 구한말의 친일파 같기도 하다. 리즈 시절 이후에 다른 분야에서 삽질을 하다가 예전 커리어를 다 말아먹었다는 점에서는 심 형래나 홍 명보, 그리고 프리츠 하버(시대를 잘못 타고나고 잘못된 줄을 선 과학자)와도 비슷해 보인다. 일생일대의 패착을 저질러서 쳐죽일 반역자가 된 건 박 헌영과도 비슷하지만, 박 헌영은 리즈 시절의 업적도 별로 없으니 페탱과 같은 급이 아니다.

사실,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 문제를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청산 문제와 같은 잣대로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마치 성경에서 벧후 3:6-7을 노아의 홍수하고 비교하는 것만큼이나 바른 비교가 아니어 보인다. 겨우 몇 년 적군에게 점령당했던 것하고, 아예 한 세대가 바뀔 정도로 긴 시간을 지배당한 것을 어떻게 똑같이 비교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6· 25 때 북한군 부역자 청산 문제와 비교하는 것이 체급이 더 맞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봐도 이전의 독립 운동 경력을 나중의 변절 내지 좌익 공산주의 활동으로 다 말아먹었다던가, 반대로 이전의 친일 경력을 나중의 반공 활동 경력으로 상쇄한 입체적인 인물이 적지 않다. 자기 개인 블로그나 SNS에다가 개인적인 인물 취향과 호불호만을 밝히는 것이야 상관 없겠지만, 남과 논쟁을 하고 남을 설득까지 하려면 공과 과를 따로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어야겠다.
다만, 기회주의자는 분명 아닌데 당시 판단력의 한계로 줄을 잘못 서서 평판을 망친 사람이라면 참 안타까운 예가 아닐 수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0 08:39 2015/12/20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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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 살펴봤듯, 북한에서는 자유를 찾아 귀순한 공군 파일럿이 역사적으로 쭉 있어 왔다. 하지만 월북을 한 남한 파일럿은... 있을 리가. -_-;;
물론, 육군에서는 최 덕신 같은 최고위층의 월북 흑역사가 있었고, 1984년에는 사회에서도 이미 문제가 좀 있던(..) 22사단 소속의 조 준희 일병이 동료와 상관을 사살한 후 월북해 버리는 일도 있었으나.. 그래도 남한에서 공군 전투기 파일럿이 미제 F-xx 전투기를 갖다 바치면서 월북한 정신나간 경우는.. 없다.

단,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남한의 항공기가 북으로 납치 당한 일은 먼 과거에 있었다. 다시 말하지만, 폭탄을 터뜨려서 너 죽고 나 죽는 테러 말고, 납북 말이다.

1. 창랑호 납북 (1958. 2. 16.)

지난번 글에서는 김포 공항의 역사를 얘기하느라 글이 길어졌는데, 이번에는 대한 항공의 전신인  "대한 국민 항공"이라는 회사의 얘기를 좀 많이 하겠다.

저 시절은 김포 공항이 개항한 지 한 달이 채 안 됐다. 또한 나라가 몹시 가난하고 항공사도 가난해서 더글러스 사(훗날 타사와 합병되어 맥도넬 더글러스가 된)의 중소형 프로펠러 여객기인 DC-3 세 대를 굴리며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각각의 비행기 기체에도 마치 배처럼 우남호, 만송호, 창랑호라고 이름이 붙어 있었다. 비행기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항공 시스템의 많은 용어와 관행이 배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감안하면 이건 그리 이상한 모습이 아니다. 그리고 사실은 열차도 다 저렇게 차량별 이름을 따로 썼으니까 말이다.

그때는 경부 고속도로 따윈 없고 도로가 죄다 비포장이니, 자동차로는 차가 아무리 성능이 좋아도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월아 네월아 10몇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나마 가장 빠른 경부선 열차를 타도 해방자호가 9시간이었고, 1955년 광복절에 등장한 통일호 특급열차가 7시간 이랬으니(훗날 1960년, 무궁화호가 6시간 40분으로 단축), 이 당시 교통 사정이 어떠했는지가 이해가 되시겠는가?
비행기는 육상 교통수단보다야 넘사벽급으로 빠르겠지만 당연히 외국인, 정부 고위 관료, 극소수 유학생 같은 사람들밖에 못 탔지, 서민들은 국제선이 아닌 그냥 서울-부산 국내선이라 해도 비싼 가격 때문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어쨌든.. 저 날 창랑호는 승무원 포함 34명의 승객을 태우고 부산을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하지만 승객 중에 북한 공작원이 타고 있었고, 비행기는 평택 부근의 상공에서 하이재킹을 당했다. 비행기는 기수를 북으로 돌려서 그 당시 북한에서도 지은 지 얼마 안 되었던 평양 순안 공항에 착륙했다.
탑승 전에 짐 검사 같은 건 안 하다시피했는지, 공작원은 반항하는 승객을 둔기로 제압하고 기장을 위협하여 얼마든지 자기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북한은 뻔뻔하게도 창랑호의 승무원과 승객들이 위대한 수령님을 앙망하여 자진 월북했다고 의기양양하게 거짓 발표를 했다. 남한은 이에 맞서 당연히 규탄 성명을 발표했으며 승객들의 송환을 요구했다. 비행기와 함께 이미 북으로 가 버린 공작원들은 어쩔 수 없으니, 승객들의 신원과 주변 인물들을 조회하여 공작원들을 지원한 것으로 의심되는 간첩 몇 명만을 뒤늦게 잡아들여 벌을 줬다.

승객 중에는 미국인이나 독일인 같은 외국인도 적지 않게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다국적 외교 문제로 불거졌다. 압박을 견디다 못해 북한은 자기네 공작원을 제외한 나머지 피랍 승객· 승무원 26명은 3월 6일에 판문점을 통해 전원 돌려보냈다. 북에 있는 동안 공산당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던 사람은 좀 가혹행위를 당했다는 증언이 전해진다.

그러나.. 북한은 비행기는 돌려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비행기 3대 중 한 대를 그냥 잃은 대한 국민 항공사는 심각한 경영난에 직면해야 했다. 게다가 사실은 만송호도 1957년 7월 7일에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중에 추락해서(2013년 아시아나 214 사고처럼?) 비록 인명 피해는 없지만 기체를 다 날린 상황이었는데 창랑호까지 잃었으니..=_=;;

회사의 창업주인 신 용욱은 자신부터가 일제 강점기 때부터 항공 덕후에 유능한 비행기 조종사였고 이 불모지에서 항공 사업까지 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이 승만이 대통령이 된 뒤에도 대통령 각하보다는 박사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듯이, 저 사람도 사업가가 된 뒤에도 사장님보다 기장님이라는 호칭을 더 좋아했을 정도.

단, 이 사람은 업종과 행적이 그렇다 보니 과거에 대동아 전쟁을 위한 일본군 항공 수송과 비행기 헌납 같은 빼도 박도 못 할 친일 논란이 있기도 하다. 동갑내기 파일럿인 안 창남과 같은 인생을 살지는 않은 게 아쉽지만, 그래도 한편으론 그 시절에 일제한테 그 정도 협조를 안 하고서야 고자본 전문직인 항공 사업을 조선인이 어떻게 그것도 한반도 본토에서 경영할 수 있었겠나 싶기도 하다.

게다가 해방 후에 그가 비행기에다 붙인 우남· 만송· 창랑이라는 이름들 역시 이 승만, 이 기붕, 장 택상... 당대 정치인들의 호였다. 다소 정치적이고 권력 지향적인 작명이었다. 막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돈이 많이 깨지는 항덕의 꿈을 사업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배후 권력이 무엇이 되건 적절히 잘 이용하고 기름칠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허나 그 당시에 대한민국은 항공업으로 막 재미를 보기에는 근본적으로 너무 국력이 부족하고 서민들이 가난한 나라였다.
각 비행기들은 사장이 사업 밑천 마련을 위해 미국에 로비를 하고 집 팔고 빚 내면서 정말 힘들게 어렵게 구입한 것이었다. 그 가난하던 시절에 비행기를 구입할 정도의 엄청난 외화 유출을 감수하려면 구두쇠 대통령으로부터 승인도 필요했다.
그랬는데 광복 후에는 북한으로 인한 악재, 늘어 가는 적자, 경영난, 회사 빚을 감당치 못하고 사장은 환갑을 갓 넘긴 1961년에 결국 한강 투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대표까지 세상을 뜨자 대한 국민 항공사는 상황이 막장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한 나라에 항공사가 없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이걸 국가가 인수하여 국영 기업을 만들었다(1962. 9.). 허나, 이것이 영 실적이 좋지 않아서 한진 그룹 산하로 민영화해 버린 것이 오늘날의 대한 항공이다(since 1968. 11.). 박통이 조 회장에게 "시궁창이 된 이 회사를 임자가 책임지고 좀 살려 보게나" 이렇게 구슬리면서 떠넘겼다고 한다.

그 시절의 옛날 비행기 중 유일하게 우남호만이 내구연한이 경과할 때까지 잘 날다가 만기 퇴역했으며, 요건 인하 대학교 본관 1호관 옆의 잔디밭에 정태보존돼 있다. 항공 사진 지도로도 확인 가능하다. 옆의 인하공전 안에 교육용으로 비치되어 있는 보잉 727하고는 다르므로 혼동하지 말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우남호의 모델인 DC-3은 나름 1940년대를 풍미하며 전세계적으로 많이 생산되었던 명품 비행기이다. 그런데 평평한 지면에 정지해 있을 때는 기체의 전방이 위를 향하게 경사가 져 있다. 비행기가 엔진 성능이 지금만치 좋지 못하던 시절에 최대한 양력을 많이 받아서 잘 뜨게 하려고 일부러 저렇게 설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비행 중에는 물론 평평한 상태로 움직인다.

그리고 보잉 727은 DC-10 같은 삼발기이고 엔진이 날개 아래가 아니라 동체 뒤에 있다. 보잉 사가 개발한 여객기 중 유일하게 삼발기라고 한다. 당연히 엔진이 있으리라 여겨지는 날개 밑에 엔진이 없다니, 전동차로 치면 팬터그래프가 없는 제3궤조 집전 차량이요, 헬리콥터로 치면 꼬리날개가 없는 동축 반전 로터 같은 변종을 보는 것 같다.

두 비행기 모두 오늘날의 전형적인 비행기들과 비교했을 때 독특한 점이 하나씩은 다 있었다. 우남호는 몰라도 보잉 727 정도 되는 비행기를 분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옮겨 오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얘는 1991년에 조종사의 부주의로 동체 착륙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수리 불가 비행 불능 판정을 받고 퇴역하여 학교에 전시되는 운명이 되었다. 그래도 삼발기여서 엔진의 위치가 높은 덕분에, 바닥이 쫘악 긁히는 와중에도 엔진이 터지거나 연료가 새어서 화재가 나는 일은 다행히 벌어지지 않았다.

한때는 인하공전 말고도 전라남도 강진의 '성화 대학'도 항공 특성화 전문대를 표방하면서 캠퍼스 안에 보잉 727을 비치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 학교는 몇 년 전에 망하고 폐교했다.

끝으로, 비행기와는 관계 없는 여담이지만, 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 후엔 북한은 좌초한 자기네 잠수함을 돌려 달라는 개소리를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정부는 무장공비들의 시신만 돌려 주고 저 무례한 요구는 당연히 씹었다.

2. 대한 항공 (1969. 12. 11.)

창랑호 납북 사건으로부터 10여 년 뒤, 그리고 한진 그룹 산하의 대한 항공이 출범한 지 1년 남짓 뒤에 북한에 의한 비행기 하이재킹 사건이 또 발생했다. 강릉에서 출발하여 서울 김포 공항으로 가던 대한 항공 여객기인데, 지금 같은 운행편 번호는 모르겠고 비행기 기체가 일제 YS-11이었다는 것만 전해진다.

이번에도 뻔하다.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던 북한 공작원 내지 간첩이 승무원을 위협하는 바람에 비행기는 원산의 선덕 비행장에 착륙하게 됐다. 북한은 역시 남조선 인민의 자진 입북이라고 선전했으나 그런 거짓말이 통할 리가..
결국 북한은 사건 이후 2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지난 이듬해 2월 14일에야 승객 50명 중 39명은 돌려보냈으나 11명(승객 7, 승무원 4)은 여전히 그리하지 않았으며, 그 뒤에도 이들의 생사조차도 알려 주지 않았다. 참고로 1969년은 김 신조 사건, 강릉· 삼척 무장공비 등 북한이 온통 무력 도발을 벌였던 살벌한 1968년의 바로 이듬해이다.

돌아오지 못한 승객은.. 듣자하니 대체로 1년 전의 이 승복처럼 북한에서 투철한 반공 정신을 너무 발휘해서 세뇌 교육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북한 사람들에게 밉보인 나머지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 듯하다. 다만, 전부 싸그리 처형 당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간 것까지는 아니고 지방 어디선가 정착해서 살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더러는 지난 이산가족 상봉 행사 때 가족이 잠깐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뭐, 어떤 경우든 6· 25 전쟁으로도 모자라서 하루아침에 멀쩡한 가정을 찢어 놓고 이산가족을 또 만든 북한은 천하의 개쌍놈이 맞다. 이 사건 역시 북한이 비행기를 돌려 줬을 리는 만무하고..

요즘 항공 업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관행이 정착해 있다.

  • X선을 동원한 정밀한 짐 검사: 두 말할 나위가 없음. 이런 첨단 기술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존재했다면 굳이 비행기가 아니어도 안 중근, 윤 봉길 등 여러 항일 의사들의 거사들 역시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 기내에서 절대 금연: 일부 승무원이 간접흡연으로 폐암에 걸린 뒤에야 정착했다. 화재의 위험도 있는데 과거엔 비행기 내에서 액체 연료 라이터까지 반입해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 수하물과 탑승객이 일치하지 않을 때는 절대로 출발하지 않음: 수하물을 가장한 폭탄 테러를 몇 번 겪은 뒤부터 도입됐다. 마치 사격 훈련 후에 모든 탄피를 반드시 수거해서 개수를 확인하는 것과 비슷한 격의 안전 조치이다.
  •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음: 9· 11 테러를 겪은 뒤. 단, 테러범이 아니라 반대로 파일럿이 혼자 미치거나 맛이 간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외부에서 그를 전혀 제압할 수가 없는지라 최근에(2015. 3. 24.) 저먼윙스 9525편 고의 추락 사고 같은 일도 발생했다.
  • 나이프는 기내식의 스테이크를 써는 플라스틱제조차도 기내에 반입하지 않고 액체 역시 기내 반입을 제한함: 이것도 9· 11 테러를 겪고서 미국이 신경이 바싹 곤두서서 내린 조치이다.

한국은 북한의 테러에 이골이 나 있는 관계로, 비행 중에 조종실을 절대로 개방하지 않는 건 진작부터 시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조치로도 하이잭이 아닌 1987년의 대한 항공 858 폭탄 테러를 막지 못한 건 안타까운 점이다. 승객과 짐이 다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건 이미 그때 다 정착돼 있지 않았나?

북한은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방해할 목적으로 비행기도 폭파하고 1986년 9월엔 김포 공항에서 외국인을 사주하여 폭탄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번에도 명불허전 천하의 개쌍놈 북괴 인증이다.

본인은 건국 초기에 우리나라의 친일 청산과 민주화를 제일 방해하고 가로막은 원흉도 결국 따지고 보면 북괴라는 지론이 예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이 없다. 걔네들 때문에 결국 보안을 빌미로 국민의 자유를 제약하는 복잡한 법이 필요하고 강한 공권력이 필요하고, 일제에 부역했던 형사와 경찰들에게 또 일자리를 줘야 하게 됐다.
요런 절대악에 대한 배경 설명을 쏙 빼고 필요악이 좀 한계를 지녔고 일부 잘못하고 병크 저지른 것만을 편파적으로 부각시키면서 남을 속이고 역사 왜곡하고 선동질 하는... 입에 들어가는 쌀이 아까운 인간들에게 절대로 속지 말라.

일제 강점기 때는 그나마 우리가 힘이 없어서 나라를 빼앗겼으니 실력을 양성해서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일말의 건전한 구호라도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북한엔 도대체 무슨 선한 것이 있고 우리가 뭘 배울 게 있단 말인가? 그저 걔네들의 교묘한 간첩질과, 종북 세력들의 이적 행위만을 잘 감시하고 잡아내면 될 뿐이다.

우리가 중동에 노동자를 보내서 달러를 벌어 온 동안 쟤들은 위조지폐와 마약으로 외화를 벌었다. 살아 온 게 늘 그런 식이다. 민족? 통일? 꿈 깨라. 김돼지 왕조나 그에 준하는 막장 통치 체제가 살아 있는 한,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쟤들은 비교하는 것조차 수치스러운 악의 무리들이다. 민족이 일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추구하는 이념과 가치관이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어떤 경우든지 남한이나 북한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고 똑같다는 말은 내가 정말 극혐한다. 인간이라면 뚫린 입이라고 말을 그 따위로 지껄이지 말라.
우리나라 진보, 중도라고 하는 진영이 종북 빨갱이라는 오명을 만년 벗지 못하는 이유는,
북한이 아주 정상적으로 외교를 하는 국가이고 인민들을 정상적으로 먹여 살리고 있는데도.. 아주 불가피하게 가난하고 못사는 줄로 그쪽 동네를 거짓으로 미화하기 때문이다. (왜 안 도와 주느냐, 왜 대화를 안 하느냐, 왜 안 퍼 주느냐, 쟤들이 막나간다고 우리까지 막나가면 우리도 쟤들하고 똑같게 되는 거다)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으며 그저 힘에 굴복할 줄밖에 모르는 놈들은 힘으로 제압해 줘야 할 뿐이다.

철도야 국토 분단과 함께 곧장 찢어졌으며, 장단 역 기관차, 김 재현 기관사, 월정리 역 등 안보 주제와 관련해서 할 얘기가 넘쳐난다.
그러나 철도뿐만 아니라 비행기· 항공에다가도 뭔가 색다른 분위기로 이런 현대사와 안보 주제를 연결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17 08:30 2015/12/1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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