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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창군

지금으로부터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과거인 1940년대 말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 즉 국군이 창설되었다. 마치 성경의 천지창조에서 궁창 상하의 물이 나뉘듯이 국방 경비대인 육군에서 해군과 공군이 차례로 분리되어 나갔다(1946~49).

조선(또는 대한 제국)이 망해 가던 1907년엔 있던 정규군도 해산되고 군인들이 외세에 의해 강제로 무장 해제를 당했는데..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40년 뒤엔 단군의 후손들도 정규군을 가진 독립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이웃의 일본은 전범+패전의 대가로 명목상으로는 아예 군대를 가질 수 없는 나라가 됐으니, 그것과 비교해도 행로가 완전 극과 극이 됐다.

정상적이라면 대한민국 국군은 남동쪽의 바다 건너 일본을 견제하고 강 건너 중국과 소련을 마주 보면서 나라 지키는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괴뢰로 시작한 북괴의 존재는 안 그래도 좁은 국토를 반으로 분단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숨 돌리고 천천히 자연스럽게 발전할 틈도 주지 않았다. 상황을 너무 긴박하고 급격하게 바꿔 놓았다.

2. 즉결처분

6· 25 전쟁 시작 당시에 국군이 얼마나 허둥대고 당황했으며 싸움다운 싸움도 못 하고 전선이 붕괴했으면, 즉결처분이라는 극약 중의 극약 개막장 처방이 1년 남짓 시행되었을 정도였다. 적진에서 상관의 명령 없이 무단으로 후퇴하고 뒤로 내빼는 부하는 일벌백계 사기 진작 차원에서 상관 재량으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현장에서 바로 쏴 죽여 버릴 수 있게 한 것이다. 옛날 전열보병 전투 시절처럼 "적의 총탄에 장렬히 산화할 확률 90% vs 아군 지휘관에게 맞아 뒈질 확률 100%"를 만든 거다.

하지만 실제로는 읍참마속은 개뿔.. 장군님 훈시 하는 중에 졸거나 몸 움직였다고, 혹은 상관이 탄 차량 주변에서 얼쩡댄다고 부하를 쏴 죽이는 미친놈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황당하고 비현실적인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거부한다고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까지 상관의 기분대로 괘씸죄로 즉결처분 당했다.
이거 뭐 계급 없는 군대 내지, 린치가 허용되는 사회만큼이나 군대 꼬라지가 개판오분전이 따로 없었다.
즉결처분은 1950년 7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1년 남짓 시행되다가 결국 폐지되었다. 이런 야만적인 제도가 부활되는 일은 다시는 없어야 할 것이다.

3. 여군 병사

"여러분들은 해병 몇 기라고요?" / "1077기입니다." / "난 해병대 4기예요." / (ㅎㄷㄷㄷㄷㄷㄷ)
예전에 2010년 무렵이던가, 요런 TV 화면 캡처 짤방이 나도는 걸 보신 분이 있을 것이다.
해병대는 안 그래도 자기들끼리 선후배 기수놀이에 완전 목숨을 거는 집단인데, 그 당시에 저 말을 들은 현역병들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지 싶다. (내 밑으로 전부 대가리 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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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사기적인(!) 기수를 인증하신 저 어르신은 제주도에서 살다가 6· 25 전쟁 때 파릇파릇한 17세의 나이로 학도병 명목으로 참전했던 분이다. 그 당시 제주도는 4· 3 사태 같은 비극도 있고 해서 "난 빨갱이가 아니요" 누명 벗기 차원에서 해병대 같은 데에 자진입대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 때 일본계 미국인들이 애국심을 입증하기 위해 미군에 특별히 자진입대 많이 했듯이 말이다. (진주만 폭격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 '쪽발이'에 대한 인식이 최악 막장으로 치달았었기 때문)

그런데 문제는 저분은 할아버지가 아니라 할머니라는 점이다. 난 지금까지 이 점에 대해서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라고 해서 부사관급 이상의 간부로 입대한 게 아니고, 군 병원이나 군수공장에서 일한 것도 아니다. 미인계 차원에서 특별히 양성되어 몰래 침투된 스파이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여느 남자 학도병들과 마찬가지로 기초 군사훈련만 받고 나서는.. 정확한 병과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말단의 병 신분으로 투입되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우리나라는 총질까지 하는 여자 전투병이 모병 형태로나마 1970년대까지 있었다고 한다. 여군 훈련병만 입소하는 전용 훈련소도 있었다니, 여성 삼청교육대만큼이나 놀랍기 그지없다. 이스라엘군만 그랬던 게 아니구나!
단지, 전쟁이 끝나면서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몰렸던 시기도 끝나자 거기엔 아무도 안 가서 관련 규정은 유명무실한 사문으로 전락했다.

솔직히 여자가 병으로 입대하는 건 국가가 아닌 개인 당사자의 입장에서 봐도 아무 메리트가 없었다. 우리나라가 왕창 못살던 시절엔 당장 남자 장교들도 봉급이 쥐꼬리 수준이었다고 한다. 고학력자 고급 인력이 워낙 부족했던 관계로 진급 적체야 지금보다 덜했을지 모르지만, 그게 딱히 고소득과 우월한 복리후생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으니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니 하물며..;; 강제 징집 대상도 아닌 여자사람이 최말단의 병으로 가서 고생해 봐야 돈을 많이 모으겠나, 경력 커리어를 쌓겠나 도대체 뭐..?? 시골 깡촌에서 집이 찢어지게 가난하고 식구가 10명이 넘게 있어서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되는데, 배운 것 할 줄 아는 건 없지만 군대에 가면 최소한 공짜로 먹고 자면서 시간을 벌 수 있다.. 이 정도 막장 상황이 아니고서야 여자사람이 병으로 입대해야 할 이유와 동기는 하등 없었다.
결국 1974년 1월 1일부터 군인사법의 개정으로 인해 여군은 간부만 모집하게 바뀌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4. 6· 25의 여파로 남조선이 바뀐 것들

  • 개전 초기에 삽질했던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정말 강하게 남았다. 우리나라 수뇌부는 북괴의 추가적인 전쟁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군대의 덩치를 쪽수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나라는 상시(평시에도) 징병제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건국과 창군 직후 처음부터 이랬던 게 아니다.
  • 신 성모 같은 민간 출신 X맨이 너무 병신짓을 하면서 안 좋은 선례를 남기는 바람에 우리나라에 국방부 장관에 문민통제 같은 건 정서상 물 건너 갔다. 참모총장이 전역식 하고 나서 1시간 뒤에 곧장 국방부 장관으로 취임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이니 이건 사실상 무늬만 민간인일 뿐이다.
  • 장교(육군 기준)는 누구든지 반드시 야전 통솔 능력이 있어야겠다는 교훈을 받아, 출신과 병과를 불문하고 임관 직후에 소대장은 거의 무조건 일정 기간 하게 됐다.

5. 1. 21의 여파로 바뀐 것들

6· 25 이후로 이것에 준하거나 심지어 이를 능가할 정도로 남조선에 강렬한 트라우마를 남긴 사건은 바로 1968년의 1· 21 사태임. 순진한 건지 거 참 "내레 박 정희 목(혹은 멱?) 따러 왔수다"라는 인터뷰 내용은 그야말로 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 5분 대기조, 향토예비군
  • 군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주민등록번호 도입
  • 우리도 무작정 주석궁 침투와 김 일성 암살을 목표로 북파공작원을 양성함. (훗날 실미도 사건)
  • 군 복무 기간이 2년 반에서 단축될 예정이었는데 그 계획 완전 나가리 남. 병은 육해공 공통 3년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역대 최장 기간으로 늘었으며, 그게 무려 1984년까지 이어졌다. 울 아버지 세대가 이때 왕창 피 봤다.
  • 교련 왕창 강화. 학교까지 반쯤 "때려잡자 공산당" 병영화
  • 북악· 북한산 일대의 주요 등산로와 도로는 완전 통제 봉인 (21세기가 돼서야 해금)

물론 이런 살벌한 반공 분위기는 아무 근거 없이 조성된 건 아니었다. 1969년 한 해 동안만 해도 울진· 삼척 무장공비에, YS-11기 납북 등 북괴의 대남 도발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몇 년 뒤엔 땅굴도 발견됐고. 그러니 경각심이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6. 박 정희

앞에서 잠시 언급했듯,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직업 군인이라고 해서 딱히 풍족하게 산 게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그 당시 박 정희도 생계를 위해 무려 중령 계급으로도 몰래 투잡을 뛰어야 했을 정도이며, 장인인 육 영수의 부친은 영예로운 군인은 개뿔, 돈 못 버는 무능한 사위를 굉장히 싫어했다고 한다. (신부 쪽 집안이 당대로서는 꽤 잘사는 집안이었음)

박 정희의 장인은 1960년대 중반, 임종을 얼마 안 남기고서야 자기가 큰 인물을 지금까지 못 알아봤다고 사위에게 사과를 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사위가 혁명인지 쿠데타인지 어쨌든 나라를 통째로 뒤집어엎고 대통령이 된 뒤였으니...;;;; 박 정희는 일제 강점기 때 교사 하던 시절에 자기를 무시하던 일본인들에게도 나중에 '긴 칼 차고' 돌아와서 설욕하기도 했다. 정말 출세욕 야망이 있고, 뭔가 남에게서 무시당한 걸 되갚는 걸 잘한 듯하다.

육 영수 여사는 이름부터가 좀 남자 같고(=_=;) 키도 굉장히 커서 남편보다 더 컸다. 결혼식 때 주례가 "신랑 육 영수 군과 신부 박 정희 양"이라고 충~분히 실수할 만했으며, 게다가 저건 실화다.
기가 왕창 셌을 것 같고 부부싸움을 하면 진짜 '육박전'이 벌어졌을 법도 해 보이지만, 이분은 남편 내조를 잘 했고 인품이 매우 훌륭했다. 역대 대통령의 영부인들 중에서는 제일 많은 존경과 추앙을 받고 있다. 다른 영부인도 아니고 하필 이런 분이 테러리스트의 흉탄에 맞아 비명에 간 것은 대통령 개인에게나 국가적으로나 큰 불행이었다.

7. 야전군 편제 개편

군대 조직의 단위라는 건 분대부터 시작해서 소대, 중대, 대대, 연대로 쭉 올라가서 나중에는 사단, 군단, 야전군, 집단군으로까지 마치 셸 정렬의 묶음 단위처럼 규모가 커진다.
우리나라는 한동안 육군의 야전군 편제가 전방(제1)과 후방(제2)이라는 둘로만 나눠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1973년에는 전방이 서부 경기도 전선과 동부 강원도 전선으로 나뉘어서 그 중 서부 전선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포스타 대장이 맡는 보직이 하나 더 생겼다.

그로부터 거의 30년 뒤인 2007년엔 후방을 담당하는 제2야전군 사령부가 경영 효율 명목으로 '제2작전 사령부'로 격이 미묘하게 낮아졌다. 마치 화투에서 삼광이 비삼광으로 바뀐 듯한 느낌이다.
그리고 앞으로 10여 년 뒤 근미래 계획으로는 제1야전군과 제3야전군이 '지상작전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다시 통합될 예정이라 한다. 역사는 돌고 도는지 1973년 이전 체제로 다시 회귀하는 듯.

뭐, 저출산과 전문화 기계화 때문에 군의 규모 자체는 앞으로 계속 작아질 수밖에 없긴 하다. 무인운전과 기계화 전자화 때문에 철도나 항공 쪽도 기관사 조종사 채용이 계속 줄듯이 말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는 6· 25 트라우마 때문에 애시당초 몸집만 의도적으로 너무 부풀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징병제를 시행하니 옛날에는 징집 대상 인원이 군 TO를 능가하기도 했을 정도였기 때문에 병역 면제 조건도 지금보다 훨씬 더 널널했으며, 잉여 인원을 처리하기 위해 방위병 같은 것(오늘날 공익, 사회 복부 요원의 전신)도 있었다.

그나저나 사관학교도 3군 통합하고 임관식도 3군 연합으로 하겠다는 말은 한 10여 년 전부터 나돌았는데 그건 각 군 분위기 텃새 때문에 실현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3군의 상호 관계가 과거 일본군 육군 해군 급의 개막장인 것 역시 물론 아니니..

8. 계급 체계

국군 창군 당시에는 계급 체계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앞에서 6· 25 전쟁 얘기를 했는데, 그 시절에는 짬밥이 주먹밥으로 나왔었고 계급 체계도 지금과 같지 않았다. 병과 부사관의 계급 구분이 지금만치 분명하지 않았으며 병 신분의 계급은 사실상 두 종류밖에 없었다(하사, 이등중사?).

그러다가 상병· 병장 계급은 1962년에야 추가로 생겼다. 그러니 나중에 노 무현 대통령이 당시 월남전 때문에 진급 TO가 부족해서 병장이 아닌 상병 제대를 했네 하는 이야기의 배경이 성립하는 것이다.

지금이 군 복무 3년씩 하던 시절도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병의 계급 수가 복무 기간 대비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 병장 빼고 3계급 정도로만 바꿔도 되지 않을까?
그 반면, 부사관은 복무 기간 대비 계급 수가 부족한 감이 있다. 대부분이 중사이고 상사 약간이다. 하사는 너무 금방 끝나고 원사와 준위는 여전히 너무 적다. 현사인지 영사인지 추진하려다 파토 난 거 알고는 있지만, 거기야말로 계급이 하나 좀 더 있어도 되지 않을까 싶다.

9. 군인의 간지, 군인에 대한 예우

군인이라면 굳이 사관 생도가 아니라 최말단의 이등병 쫄병이라 해도 최소한의 '가오'와 체통· 위신이 요구되는 게 있다.
일례로, 군인은 상급자에게라도 넙죽 고개를 숙이지 않아야 한댄다. 이런 이유 때문에 군인은 민간인 스타일의 평범한 인사 대신에 그냥 손 끝을 이마로 가져가는 거수경례를 한다. 군인이 전투모 벗고 고개를 숙이는 건 아예 전사해 버린 전우 앞에서 슬픔을 표할 때에나 하며, 이것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경례로 대체된다.

또한 극형을 당할 만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도 여느 민간인은 교수형을 당하지만, 군인에게는 동급의 전쟁 무기를 동원한 총살형이 쓰인다. 심지어 과거에 일본과 나치 독일의 2차 세계 대전 전범들 중에도 어차피 자기를 사형에 처할 거면 군인답게(?) 총살형을 내려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가 있었다. 괜히 별 쓰잘데기없는 사소한 디테일에서 명예니 체통이니 따진다는 생각도 든다만, 이런 차이도 아무 이유 없이 존재하지는 않는 듯하다.

잠시 소재를 바꿔서, 태평양 건너 저 멀리 있는 미국, '아메리카', 일명 천조국이라는 나라를 생각해 보자.
참 대단한 게 많은 부러운 나라이다. 세계 최강의 과학 기술 강국· 군사 강국· 선진국에 땅 넓고 자원도 풍부하고, 무려 3억이 넘는 인구를 가졌으면서 국민 대부분이 집 있고 차 있고 총 가진 중산층이다. 이런 특이한 나라는 세계에서 미국이 유일하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 대도시를 이미 1900년대 초에 이뤘고 마이카 시대 같은 건 우리나라로 치면 일제 강점기 때 이미 시작됐다.

어떻게 지구상에 이런 나라가 존재 가능했을까? 기본이 잘 돼 있다.
얘들은 거짓말· 위증, 학문 부정행위에 자비심이 없다.
그리고 강력한 문민통제가 정착한 한편으로 군인에게는 그야말로 최고의 예우를 하고 있다. 그 사례는 인터넷 검색 조금만 하면 줄줄이 쏟아져 나오니 굳이 여기서 또 소개하지 않겠다. 이런 게 미국의 저력이 아닌가 싶다.
돈이 많아서 저렇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인드가 저러니까 그 시너지가 축적되어 저런 부자 나라가 된 거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또한, 우리나라는 겨우 이 좁아 터진 한국 땅에서 같은 민족끼리도 갈라져서 싸우느라 정신 없었는데 쟤들은 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미군은 그야말로 세계 각국에서 싸우기 때문에 국가 유공자라는 마인드에 담긴 심상부터가 domestic이 아닌 international이다. 뺑이 치는 쫄병 '군바리' 아니면 군사정권 이런 거나 떠오르는 우리나라와는 심상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뭐, 미국 칭찬하면서 글을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제복 입고 근무하는 사람들, 근무 중에 긴급피난이 허용되지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경찰, 군인, 소방관, 선장· 승무원)
예비군 훈련 따로 없이 전쟁 중에도 자기 직업이 그대로 유지되는 사람들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것과는 완전 상극인 직종에 종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21 08:31 2017/02/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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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체스터의 법칙

A와 B라는 두 집단이 서로 패싸움을 시작했다. A는 전투원이 5명이고 B는 4명이다. 그런데 양 진영의 모든 전투원들은 체력· 정신력· 무장 등등이 완전히 동일하며, 기습 가능성이라든가 지형적인 유불리, 엄폐물 같은 것도 없이 탁 트인 개활지에서 순수하게 힘과 힘만이 충돌하는 형태로 싸우게 됐다고 치자. 싸움은 둘 중 한 진영의 전투원들이 몽땅 죽거나 중상을 입어서 전투력을 상실할 때까지 계속된다. 그렇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어찌 될까?

마오 쩌둥이던가 스탈린이던가.. 인권 쌈싸먹은 독재자답게 "전쟁 나서 1억 인구가 죽는 것쯤은 별 일 아니다. 사람이야 또 낳으면 되니까. 적군이 병력이 1억이면 우리는 1억에다 한 명만 더 붙여서 이기면 된다" 그런 요지의 무지막지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정확하게 누가 언제 한 말인지 출처 확인이 잘 안 되네, 분명 본 기억은 있는데..

그런데 저건 병신 같지만 묘하게 설득력이 있는 말이다. 외적인 요인이 차이가 전혀 없고 완전히 동일하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쪽수가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집단이 필승하고 부족한 집단은 필패할 것이다.
위의 경우라면 B가 지고 A가 이기는 것 자체는 따 놓은 당상이다. 단지 문제는 A가 B를 얼마나 너끈히 이기느냐,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고 승리하느냐로 귀착된다.

그 답은 A와 B가 어떤 방식으로 싸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조폭들 패싸움처럼 기껏해야 일대일로 근접해서 냉병기를 사용하는 싸움이라든가, 총이라 해도 18세기 전열보병 전술처럼 비현실적일 정도로 너무 신사적으로 일대일 턴제로 싸우는 거라면 말 그대로 일대일로 상쇄하고 남은 병력만이 생존자가 된다. B는 전멸이요, A는 A-B에 해당하는 인원이 남는다. 고로 5:4의 싸움이라면 한 명만 남는 거다. 이것을 일명 란체스터 제1법칙이라고 한다.

그러나 점 vs 점이 아니라 면 vs 면 단위로 실시간으로 부딪치는 현실의 전투에서는 다구리가 더 대규모로 가능하며 병력의 작은 차이가 훨씬 더 큰 차이를 야기한다. 설정상 한 집단의 전투력은 병력에 비례해서 나오게 돼 있는데 그 전투력 자체가 병력의 손실로 인해서 차츰 감소한다. 두 변수가 같이 변화하면서 비선형적인 구도를 만든다는 뜻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병력과 전투력이 열세였던 집단은 그 감소폭이 더욱 커지면서 전멸에 이르지만, 우세 집단이 받는 대미지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작아진다. 전투력도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는다!

그래서 답부터 말하자면, 이런 현실의 싸움에서 A와 B가 붙으면 B가 전멸한 뒤 A는 한 명만 남는 게 아니라 이론적으로 3명이나 생존해 있게 된다. B는 자기 진영 4명이 전멸하는 동안 A를 2명밖에 못 죽인다는 것이다. 공식으로 표현하면 단순한 A-B가 아니라 sqrt(A^2 - B^2)이다.
마치 직각삼각형 세 변의 길이와 같은 구도가 된다. 그렇다면 5명 vs 4명이 아니라 13명 vs 12명이 붙으면, 12명 팀은 전멸하고 13명 팀은 8명만 죽어서 5명이 남는다.

이것은 란체스터 제2법칙이라고 명명되어 있다. 영국의 항공 공학 엔지니어가 1차 세계 대전의 양상에서 착안하여 고안했다.
스타크 같은 전략 시뮬 게임에서 드라군, 마린, 히드라 같은 원거리 공격 유닛들을 서로 마주보게 해서 어택 땅으로 싸움을 붙여 보면 이 법칙이 의외로 굉장히 잘 적중한다고 한다. 란체스터의 법칙에 대해 소개해 놓은 타 블로그 글들을 검색해 보면 전략 시뮬 게임으로 실험을 해 봤는데 높은 적중률을 보고 놀랐다는 말이 많이 나온다. 1억 명에다가 딱 한 명만 더 보태서 이기면 된다는 말이 그저 허세만은 아닌 셈이다.

란체스터 제2법칙이 어째서 성립하는지를 엄밀하게 논하려면 삼라만상의 변화량을 기술하는 끝판왕 도구인 미분방정식을 동원해야 한다.
시각 t에 대해서 A 진영의 병력을 나타내는 함수 f(t), B 진영의 병력을 나타내는 함수 g(t)를 정의하자.
위의 예에서는 전투 전의 초기 상태 t=0에 대해 f(0)=5, g(0)=4가 될 것이다. 뭐, 일반화해서 f(0)=a, g(0)=b라고 잡아도 된다.

전투의 진행으로 인해 f(t), g(t) 모두 병력이 감소할 것이다. 그런데 그 감소하는 변화량이 바로 상대방 함수의 함수값과 같다. d f(t) / dt = -g(t) 요, d g(t) / dt = -f(t)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f와 g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함수일까? 0보다 큰 t에 대해서 g(t)=0이 되고(B 진영의 전멸) 그 정의상 동시에 f'(t)=0도 되는 지점이 있을 것이다. 그 t가 얼마인지는 중요하지 않겠지만, 이때 f(t)의 값을 a와 b에 대해서 구하면 란체스터 제2법칙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f의 도함수가 -g이고 g의 도함수가 또 -f라니.. 일단 얘는 미분을 짝수 번 반복하면 도함수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뭔가 골때리는 함수 형태가 될 듯하다. 즉, 4배수 주기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삼각함수보다는.. cosh, sinh 같은 쌍곡선함수 형태가 될 것 같다. 걔들은 미분을 하면 cosh, sinh, cosh ... 이렇게 반복되는데, 문제의 저 함수는 f, -g, f, ... 이렇게 반복된다.

그래서 답을 구해 보면.. a>b여서 f가 더 우세한 진영을 나타낸다는 걸 염두에 뒀을 때
2*f(x) = (a+b)/e^x + (a-b)*e^x 요, 2*g(x) = (a+b)/e^x - (a-b)*e^x 가 된다. (2를 곱한 게 저런 것이므로 전체를 2로 나눠 줄 것)
e^x와 e^x의 역수를 절반씩 적절히 더하거나 빼는 cosh / sinh 함수를 상수배/평행이동만 한 형태인 걸 알 수 있다. f는 cosh에 대응하고 g는 그냥 sinh가 아니라 -sinh가 된다.

cosh는 현수선을 나타내는 함수이기도 하다. 그 말인즉슨 A와 B가 싸울 때 A의 피해 양상은 빨랫줄이나 쇠사슬이 아래로 축 늘어진 것과 비슷한 양상으로 스무스하게 감소할 거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런지 확인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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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것이 5명과 4명, 또는 엄밀히 말해 5:4 비율의 병력이 맞붙었을 때 란체스터 제2법칙에 따라 예상되는 병력의 변화 양상이다!
g(x)=0이 되는 시점은 x= ln( (a+b)/(a-b) )/2 가 되며, (a=5, b=4일 때는 저 값은 대략 1.1)
이때 f(x)를 구해 보면 (a+b)/sqrt( (a+b)/(a-b) )가 나오고 식을 정리하면 진짜로 sqrt(a^2 - b^2)가 나온다.
임계점 이후부터는 g는 음수가 나오고 f는 감소가 아니라 오히려 증가하기 시작하지만, 이건 현실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추세일 테니 제끼면 된다.

더 직관적인 비유로 설명하자면.. 5:4가 붙어서 곧이곧대로 1명만 남는 싸움, 즉 란체스터 제1법칙은 y=1이라는 상수 그래프를 떠올리면 된다. 여기서 x가 4부터 0까지 가는(B진영) 동일 면적(= 정적분)을 5에서부터(A진영) 시작한다면 1에 도달한다.

그러나 란체스터 제2법칙은 y=1이 아니라 y=x라는 가변적인 그래프에 대응한다. 여기서 x가 4부터 0까지 가는 B진영의 면적 8(밑변과 높이가 모두 4인 삼각형)을 5에서부터 시작한다면.. 1이 아니라 3에서 멈추게 된다. 윗변 3, 아랫변 5, 높이 2인 사다리꼴의 넓이가 8이 되니까 말이다.
이를 일반화하면, 0부터 B까지 y=x를 정적분한 값은 sqrt(A^2-B^2)에서부터 A까지 정적분한 값과 같다. 이렇게 이해해도 된다.

전쟁이라는 건 여기저기 가성비를 따지면서 지킬 것과 버릴 것을 가리고 작전을 잘 짜야 이길 수 있다. 즉, 경제· 경영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란체스터의 법칙은 군사학보다는 경제학 쪽에서도 기초 이론으로 더 중요하게 다뤄진다. 포병 장교에다 수학 박사 출신인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아마 이런 분야의 최고 전문가가 아닐까 싶다.
이 법칙은 스플래시 데미지나 사이오닉 스톰-_- 같은 변수가 있지 않은 한, 왜 일반적으로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가 성립하는지를 무식하게 시행착오 겪을 필요 없이 수식만으로도 잘 설명해 준다. 5:4로만 붙여도 저 그래프와 같은 처참한 결과가 나오지 않던가?

더 나아가서 어지간히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스타에서 유닛이 생성되는 족족 적진으로 찔끔찔끔 축차투입을 해서는 절대 안 되며 캐리어 같은 유닛도 반드시 일정 기수 이상 모아야 제 성능이 발휘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전쟁이 나면 전투 직전에야 양 진영이 모두 사기 진작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마지막 하나까지 결사항전" 운운하지만.. 대세를 도저히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승부가 너무 기울고 100% 개죽음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는 불가피하게 꼬리 내리고 항복도 하는 것이다.

이상. 란체스터 법칙 하나 갖고 미분방정식에, 쌍곡선함수에 별 얘기가 다 나왔다.
다만, 현실의 전장에서는 수학 숫자놀음 나부랭이보다 예측할 수 없는 외부 변수가 훨씬 더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란체스터 법칙이 절대적인 만능 장땡인 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병력 열세를 극복하고 B가 A를 이긴 사례도 역사엔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병사 수를 32000명에서 거의 1% 수준인 300명으로 일부러 줄여 버리고도 오히려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것이 대단한 이야기인 것이다(삿 7). 진짜 300의 원조는 무슨 영화에 나오는 스파르타 군대가 아니라 저 군대였던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7/02/18 08:32 2017/02/1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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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급발진

지난번 글에 이어서  이번에는 운전 중에 발생하는 위험 돌발 상황에 대해 좀 생각해 보겠다. 대표적으로 급발진이 있다.
난 안 겪어 봐서 모르겠지만 엔진이 폭주하고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는다면 기어를 N으로 바꾸면 큰 불은 끌 수 있지 않나? 그게 안 되면 시동이라도 끄거나 아니면 도로 옆 벽면을 긁으면서 세우는 걸로 개인적으로 매뉴얼을 구축하고 있다. 점점 더 강력하고 차의 엔진 내지 외형을 파괴하는 방법이라도 동원해서 차를 세운다. 머릿속 운전 프로그램이 try 블록 안에서 돌다가 catch(SUAException e)으로 침착하게 잘 분기해 줄지는 별개의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Sudden Unintended Acceleration)

시동을 끄는 것에 대해서는 핸들과 브레이크가 잠겨 버리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는 말도 있다. 하지만 당장 전방에 장애물이 있지는 않아서 몇백 m 정도는 더 나아갈 수 있고(특히 충돌을 피하려고 당장 비어 있는 중앙선을 넘어간 직후), 어떻게든 차가 속도가 붙는 것만을 막고 싶으면 상황에 따라서는 시동을 끄는 게 꼭 자충수만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더 큰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조금 위험한 방법이라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앞의 장애물을 어설프게 요리조리 피하면서 차가 속도가 붙는 걸 방치했다간... 도저히 더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됐을 때 더 끔찍한 꼴 나기 때문이다. 그때는 local maximum만 그리디 알고리즘으로 쫓아가서는 안 된다. 정말 극단적인 상황이라면 하다못해 핸들을 확 꺾어서 차를 전복이라도 시켜서 바퀴를 지면에서 떼어 놓는 것도 불사해야 하리라 여겨진다.

급발진을 규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마치 UFO를 연구하는 사람과 비슷한 처지인 것 같다. UFO와 급발진은 모두 기존 업계나 학계, 정부 기관에서는 공식적으로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극구 부인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급발진은 다 페달을 반대로 잘못 밟은 운전자의 과실일 뿐이고 UFO는 다 당사자들이 헛것을 본 것으로 몰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편에 선 사람들은 현대의 과학과 기술로 규명은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초자연적인(?) 현상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거 무슨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도 아니고 UFO의 증인, 급발진의 증인이라니 참 느낌이 므흣하다..;;
현직 택시 기사 중에 자기 생업과 관련된 개인 블로그를 운영하는 독특한 분이 있어서 좀 소개하도록 하겠다.

닉: 꿈돌이/택시불만제로/택시독립 (!)

택시 이용과 관련된 유익한 정보, 그리고 현업 택시 기사들의 고충 같은 글이 있어서 그럭저럭 볼 만하다. "고갱님들은 불법 승차거부에 절대로 호락호락 당하지 마세요. 승차거부를 안 하는 대다수의 선량한 택시 기사들을 생각해서라도 승객 여러분들이 신고를 불사하면서 강하게 대처해 주셔야 불법 행위가 근절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새겨들을 만하다.

가끔은 미스터리한 교통사고의 원인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추리와 평론을 하는데, 이분은 놀랍게도 여느 운전자들과는 달리 차량 급발진 같은 건 절대 없다는 게 일관된 지론이다. 옛날 글들 검색해 보시길. "처녀가 애를 낳았습니다 / 선풍기 틀고 자면 죽습니다"와 "멀쩡하던 택시가 갑자기 급발진 폭주를 일으켰습니다"를 동급으로 칠 정도이다. 너무 당당하고 단호하고 강경하게 주장하니 그런 글에는 "무슨 개소리를.. 너 혹시 현기차 알바냐" 이런 부류의 익명 악플들이 잔뜩 달려 있다. -_-;;

지난 2009년 5월에 발생한 한티 역 택시 역주행 사고에 대해서도 급발진은 택도 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택시가 갑자기 오르막을 시속 100이 넘는 속도로 폭주하다가 결국 장애물과 충돌하여 차체가 두 동강 나고, 탑승자인 기사+여성 승객2 세 명이 모두 즉사한 끔찍한 사고 말이다.

이에 대해 저분은 운전자가 1차 사고의 측면 충돌로 인해 머리에 큰 충격을 받고 졸도했으며, 겁에 질린 조수석 승객이 핸들만 요리조리 돌리면서 고속 주행을 하다가 사고가 난 것일 거라고 추리를 늘어놓았다. 다만, 내가 보기에도 그럼 기사가 어떻게 액셀을 꾸욱 밟고 있는 채로 의식을 잃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기관총 사수가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채로 전사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잊을 만하면 발생하는 급발진 추정 교통사고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결해야 하려나 모르겠다.
엔진 작동 내역과 관련된 결정적인 데이터를 갖고 있긴 하면서도(급발진이 순수하게 복불복 운빨 미스터리의 영역이 아닐 거라는 뜻) 영업 기밀 운운하면서 급발진에 대한 원인 규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다 운전자의 과실로만 떠넘기고 있는 자동차 제조사들이 미심쩍고 괘씸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기가 잘못해서 사고 내 놓고는 걸핏하면 급발진 핑계 대는 비양심 진상 운전자도 안타깝지만 있다. 진실은 과연 어느 극단 중에 있을지?

사무직 종사자들은 책상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와 씨름하는 게 일일 것이며 본인 같은 프로그래머도 이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택시· 버스· 트럭 운전사들은 근무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 하루 종일 운전석에 앉아서 핸들을 잡고 차를 굴리는 게 일이다. 근무 중에 각종 정보 통신 장비 같은 걸 들여다볼 여유는 없다. 영상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이 시대에도 이런 업종 때문에 라디오 방송이 안 망하고 버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택시 운전을 은퇴 후 용돈벌이 취미로 하는 게 아니라 full time 생계로 하는 거라면 그걸 하면서 블로그질까지 하기란 쉽지 않을 텐데.. 아무튼 저분은 최근까지도 블로그를 잘 운영하시는 듯하다. 뭐, 교통사고 분석에 대한 판단은 독자 여러분에게 맡긴다.

12. 피시테일

고속 주행 중에 전방에 갑자기 장애물이 나타났을 때, 혹은 갑자기 끼어드는 차가 있을 때... 보호본능으로 핸들을 확 꺾어서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때가 있다.
특히 비접촉 뺑소니 사고 블랙박스 영상들을 보면 더욱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가해 차량은 아무 탈 없이 유유히 사라져 버렸는데 자기만 놀라서 휘청거리다가 가로수를 들이받거나 전도· 전복되거나 심하면 옆의 비탈길로 추락하거나 한 거.

갑자기 옆에서 끼어드는 차량 정도면 "배째. 접촉사고 나 봐야 니 과실 100%야"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같이 부딪치는 게 나았을 것이다. 피하다가 혼자만 더 큰 사고를 당하고 덤탱이 쓸 바에야 말이다.
길바닥에 갑자기 튀어나온 장애물, 불법주차 차량, 무단횡단자, 심지어 야생동물을 피하느라 안타까운 사고가 나곤 한다. 핸들을 꺾더라도 차량의 제어가 가능하고 수습 가능한 한도 내에서 꺾어야 한다. 옆에 피할 자리가 있는지, 혹시 뒷차가 추돌하지 않겠는지도 총체적으로 따지고 말이다.

결국은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피하는 것 vs 차라리 부딪치는 것"의 가성비를 잘 따져야 할 텐데 물론 이런 요령과 경험도 운전자에게 금방 생기지는 않는 것 같다.
뭐, 저런 게 아니라 아예 정면에서 집채만 한 버스나 트럭이 역주행으로 폭주하고 있기라도 하면 그건.. 워낙 극단적인 상황이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닥치고 피하긴 해야겠다.

이렇게 급발진이 '가속으로 인한 위험'이라면, 반대로 '회피나 제동 기동으로 인한 위험'으로 피시테일 현상이 있다.
급핸들이나 급브레이크 조작을 한 뒤에 차가 갑자기 좌우로 요동치면서 비틀거리더니 전복· 전도되는 경우가 많다. 난 저런 상황까지 겪은 적은 없어서 "왜 저렇게 될까? 중심 잡기가 그렇게 힘든가? 핸들과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나? 딱히 타이어가 터지거나 한 것도 아니고 빗길이나 빙판길도 아닌데?" 이런 의문을 품곤 했다. 하긴, 핸들과 브레이크가 평소처럼 말을 듣질 않으니까 사고가 나는 거겠지.

고속 주행 중인 자동차가 무거운 엔진이 장착된 앞은 그럭저럭 중심을 잡았지만 상대적으로 가벼운 뒷부분이 중심을 잃고 출렁출렁 요동치는 것을 fish tail 현상이라고 한다. 전륜구동 FF 차량에서 발생하기 쉽다고 하지만 문제의 직접적인 원인이 구동축의 방향은 아닌 관계로, 다른 형태의 차량에서도 수틀리면 발생할 수 있다.

요즘은 차들이 ABS에 VDC(자세 제어 장치)까지 장착돼 있어서 고속 주행 중에도 묵직하고 안정성이 많이 향상됐다. 차체가 떠 버리지 않게 뒷부분에 스포일러를 장착하는 것도 피시테일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피시테일 현상이 발생하면 침착하게 차가 쏠리는 쪽의 반대쪽으로 조향을 반복하면서 중심을 잡긴 해야 하는데, 이때 브레이크는 절대 밟아서는 안 된다고 그런다. 그건 차가 한데 쏠리는 현상을 더욱 악화시킨다고.. 제동은 중심부터 잡은 뒤에 시도해야 한다.

13. 양발운전

이번엔 또 다른 현직 택시 기사의 블로그를 소개하겠다.

닉: 두발로

이번 주인공은 자기 애마를 번호판도 안 가리고 버젓이 인증샷 찍어서 올렸을 정도인 분인데, 앞의 분보다 더 독특한 주장을 하고 있다. 다름아닌... "차는 발을 옮겨 가면서 운전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이다.
이분은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는 양발운전의 신봉자이다. 블로그는 온통 양발운전의 유용성을 인정하지 않는 자동차 제조사와 자동차 공학 교수들에 대한 비판과 성토의 글로 가득하다. 글을 자주 올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근까지 정말 꾸준히 올리고는 있다.

본인은 예전에 밝혔듯이 한동안 양발 운전을 했다. 1종 보통 면허를 따긴 했지만 장롱 기간이 너무 길어지면서 수동을 몰던 감을 다 잊어버렸다. 그 뒤 자연스럽게(?) 왼발로 브레이크를 밟아 오다가 양발 운전에 대한 대외 이미지가 생각보다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자가교정을 해서 요즘은 일반적인 주행 상황에서는 언제나 한발 운전으로 습관을 고쳤다.

하지만 이건 운전 능률이나 안전 같은 실질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대외 평판 때문에 고친 것이다. 오르막에서 출발할 때나(밀림 방지), 전/후진을 반복하며 주차할 때(잦은 페달 조작)는 지금도 종종 옛날 버릇이 살아나서 예외적으로 왼발 브레이크를 쓴다. 요컨대 본인은 두 운전 방식을 모두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다.

자동차의 페달이 지금처럼 배치된 건 가장 근본적으로는 클러치 페달이 존재하던 수동 변속 차량과의 역사적 호환성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액셀과 브레이크는 서로 동시에 밟을 일이 전혀 없는 페달이니 꼭 별도의 발을 배당할 필요도 없고 기존 관행을 굳이 꼭 바꿀 필요가 없다. 비행기와 철도 차량 역시 가속과 감속은 한 손으로 조작하는 레버 하나로 간단히 끝내고 있지 않던가? 최소한 저 블로그에서 까는 것처럼 "사고 많이 내서 차 많이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왼발 브레이크를 채택하지 않았다, 이것은 치밀한 음모이다"까지는 아닐 것이다.

다만, 그런 수동 변속기 같은 legacy를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 처음부터 액셀 오른발, 브레이크 왼발로 만드는 것도 직관적이고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삐딱한 자세야 브레이크가 클러치처럼 왼발로 밟기 딱 좋은 위치에 달려 있으면 해결되는 문제이니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한발로 두 페달을 모두 밟는 지금 체계에서도 액셀과 브레이크를 헷갈려서 잘못 밟는 운전 미숙 사고는 얼마든지 난다. 그러니 왼발 브레이크만 유달리 혼동 위험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 대신 발을 옮기는 딜레이 없이 거의 곧장 브레이크와 액셀을 교대로 밟는 장점은 꽤 크다고 여겨진다.

요컨대 본인은 왼발 브레이크는, 수동+클러치를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다는 전제 하에서, 마치 숟가락을 집고 글씨를 쓰는 손의 방향이 왼손인 것만큼이나 취존 가능한 영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막연하게, 별 근거 없이 왼발 브레이크가 무작정, 떼빙(대열 운행)이나 우측 차로 추월만치 위험하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오른발 위치에 맞게 맞춰진 페달을 왼발로 무리해서 밟느라 운전 자세가 이상해지는 건 문제라고 본다. 평소에 언제나 왼발로 밟을 거면 편하게 밟을 수 있게 세팅이라도 해 놓고 써야 한다.

그러니 혼자 특이한 주장을 하면서 기득권 세력과 꿋꿋이 싸우는(?) 저분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닌데, 난 안 그래도 세벌식에 킹 제임스 성경 등 지금도 이미 마이너한 것들에 너무 많이 몰입해 있으니 가성비가 그리 안 맞는 마이너의 길을 굳이 더 가고 싶지는 않다. 한 발로 액셀과 브레이크를 모두 밟는 건 무슨 두벌식이고, 브레이크에다 별도의 발을 배당한 건 세벌식이기라도 하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는다. =_=;;

Posted by 사무엘

2017/01/23 08:39 2017/01/23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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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속도로 포함 자동차 전용 도로의 1차로는 상시 점유해서는 안 된다. 뒤에서 추월 차량이 오면 비켜 줘야 한다. (모든 차로가 막히는 정체 상황이라면 예외) 원활한 차량 흐름과 교통 안전을 위해서는 추월은 언제나 좌측으로 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시내 도로 맨 구석의 직· 우 겸용 차선이라면, 내가 직진이어서 빨간불 때 멈춰 섰고 뒤에서 우회전 차량이 지나가려고 빵빵거린다 해도 미안해하거나 일부러 비켜 줄 필요가 전혀 없다. 뒷차가 무슨 출동 중인 구급차· 소방차가 아닌 한.

이것은 반드시 비켜 줘야 하는 경우와 그럴 필요가 없는 경우의 대표적인 예인데, 이 둘을 반대로 잘못 아는 운전자도 있는가 보다.

2.
한적한 도로에서 건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횡단보도가 파란불이 되고 차도는 빨간불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인간적인 심정에서야 경찰이나 단속 카메라만 없다면 이런 신호는 무시하고 눈치껏 그냥 가 버리고 싶다.

주변에 다른 차가 없다면 나 혼자서야 종종 재량껏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앞차가 신호를 지키기 위해서 비록 무의미하게나마 횡단보도 앞에 정지했는데 뒷차가 앞차를 향해 그냥 무시하고 가라고 빵빵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건 좀 심하게 몰상식하고 개념 없는 짓이 아닐 수 없다. "호의(횡단보도 신호 무시를 묵인)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와 같은 급이다. 무시하더라도 원래는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서 무시해야 한다. 남한테까지 자기 습관을 강요하지는 말아야지?

바쁜데 에스컬레이터의 왼쪽 레인의 전방에서 혼자 떡 멈춰 서서 길막 하는 사람이 있으면(오른쪽 레인은 사람들로 이미 꽉 찼고) 나라도 답답해서 그 사람 바로 뒤에서 헛기침 하면서 눈치 주고, 심하면 "실례합니다" 이러면서 비집고 걸어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빈 횡단보도에서 빨간불 때문에 서 있는 앞차에게 신호위반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둘은 서로 상황이 완전히 다르니까 말이다.

3.
견인차는 제아무리 싸제 사이렌을 울리고 불빛을 요란하게 반짝여서 소방차 코스프레를 해 봤자 법적으로 긴급자동차가 전혀 아니다. 저 아저씨들도 먹고 살기 빠듯한 걸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교통법규를 위반하는 것을 받아 주고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다. 무리해서(특히 신호 위반/정지선 위반 같은 걸 감수까지 하면서) 비켜 준다거나 할 필요 따윈 전혀 없다.

4.
전방의 교차로의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노란불로 바뀌었을 때.. 정작 앞차는 서려고 마음먹었는데 뒷차는 "이 정도 타이밍이면 앞차도 그냥 건너가겠지"라고 생각하고 가속을 하는 바람에 뒷차가 앞차를 들이받는 사고가 가끔 나곤 한다. 그럼 물론 뒷차의 100% 과실로 찍힌다. 한 차선에 양쪽의 차가 동시에 진입하려다가 서로 상대방을 피하느라 휘청대다 사고 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그건 좌우 버전이고, 저건 앞뒤 버전 되겠다.

이런 사고는 비록 과실 판정을 받지 않더라도 앞차의 입장에서도 좋을 게 없다. 이런 사고를 예방하려면, 노란불 때 급히 정지를 할 것 같으면 비상등을 잠시 깜빡여서 "난 설 거다"라고 뒷차에게 알려 주는 게 좋을 것이다. 단순히 브레이크 경고등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속도로에서 전방에 갑자기 정체 구간이 나타날 때 비상등을 켜 주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이것도 완전 지뢰임..).

정말, 비행기가 이륙을 중단할 수 없는 속도만큼이나, 자동차에도 이 정도로 가속이 됐고 교차로와 가까워졌다면 이제 노란불이 되더라도 교차로에서 설 게 아니라 빨리 통과해야 한다는.. 무슨 한계 속도 같은 개념이 있어야 할 것 같다. 자동차에 내비게이션과 연계하여 그런 걸 안내하는 시스템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이건 무인 운전 시스템을 구현할 때도 필요한 알고리즘이어 보이는데?

5.
좌회전 신호가 거의 끝나 갈 때, 아니면 비보호 좌회전인 곳에서 앞차만 믿고 따라 좌회전을 하다가 맞은편의 직진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가 종종 난다. 이런 건 좌회전한 쪽이 신호 위반에 준하는 굉장히 불리한 판정이 나므로 조심하는 수밖에 없겠다.

그 밖에, 파란불이 돼서 직진을 하는데, 내 옆에는 탑차 같은 큰 차가 있어서 딱히 시야가 확보돼 있지 않다. 그런데.. 무단횡단자나 꼬리물기 차량이 쌩 가로질러 지나가서 옆의 차는 멈췄는데, 나는 그런 게 있는 줄 모르고 계속 직진하다가 그 무단횡단자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도 난다.
이런 건 정말 운이 나빴다고밖에 볼 수 없겠다. 과실이야 부딪친 놈에게 더 크게 잡히겠지만, 무단횡단자는 그저 답이 없다.

6.
예전에도 한번 글로 쓴 적이 있듯이, <블랙박스로 본 세상> 동영상들을 쭈욱 보고 있으면 교통사고라는 게 어쩌다가 나는지 유형, 공통점, 패턴이 쫙 분류된다. 이와 관련하여 본인이 또 느낀 게 있다.

"내가 왼쪽 차로/1차로로 갔던 것은 우회전 할 반경을 얻기 위함이었다!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
이러다 사고 나는 게 참 많다는 거.
자매품으로는, "내가 우측 차로로 갔던 것은 유턴 할 공간을 얻기 위함이었다!"도 있다.

나름 버스나 트럭 같은 큰 차를 몰고 있거나, 혹은 승용차라도 도로가 폭이 4차선(편도 2차선) 이하의 좁은 곳이어서 후진 없이 한 번에 돌려고 저런 행동을 했을지 모르지만 저건 뒷차 운전자를 헷갈리게 하며 사고의 위험이 높은 행동이다. 현실에서는 상대방이 병신이 되는 게 아니라, 자기가 매우 높은 과실이 잡혀서 교통사고 가해자가 되며, 차후 자동차 보험료가 오르는 등 대가를 치른다.

자동차에는 평범한 좌우 회전용 깜빡이만 있지, 유턴이나 고반경 회전을 예고하는 깜빡이는 없다는 걸 명심하자. 또한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은 헷갈릴 것 없이 우회전은 최고 구석 차로에서만 가능하며 유턴은 1차로에서만 가능하다고 규정한다.

7.
우리나라에서 자전거는 일단 법적으로는 차도에서 달리는 것이 맞지만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인도 주행도 하며, 운전자의 습성에 따라서는 자전거에서 내린 상태가 아닌 탄 채로 횡단보도를 건너기도 한다. 일부 지역은 횡단보도와 인도에 대놓고 자전거 진행로를 나타내는 차선이 그어지고 전용 포장이 만들어져 있기도 하다.

자전거의 진행로는 인도나 차도 하나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자전거 운전자가 유도리 있게 취사선택 가능하게 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어 보인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처럼 자전거가 무슨 떼거지처럼 많이 다니는 것도 아니니.
횡단보도 신호를 따라 천천히 갈 것이고 사고가 났을 때 보행자보다 더 불리하게 처분되는 것에 이의가 없다면 인도로 가고, 횡단보도가 빨간불이더라도 자동차처럼 같이 직진하고 싶으며, 위험하지만 그래도 자동차에 비해서 약자로 대접받는 게 낫다 싶으면 차도로 가게 말이다.

단, 차도로 갈 경우 역주행은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건 법으로 막아야 한다. 역주행을 할 거면 무조건 인도로 가야 한다.
특히 최악인 것은 역주행인 주제에 교차로에서 코너링까지 하는 거.. 자동차 운전자를 정말 놀라게 한다. 이 상태로 충돌 사고라도 나면 자전거 운전자 과실로 몰빵을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아예 엔진이 달린 오토바이라면 선택의 여지 없이 차도로만 달려야 할 것이고 근처의 횡단보도나 교차로까지 주차· 출차를 위해 불가피한 초단거리 주행을 제외하고는 인도 주행은 금지다. 그리고 차도라 하더라도 최우측 차선에서 자동차의 틈새로 달리는 것도 금지다. 그건 자전거에게만 허용돼 있다. 그 상태로 차량의 도어가 갑자기 확 열려서 개문사고라도 나면 정말 골치 아파진다.

8.
운전자에게 '전방 주시 의무'가 있는 것처럼, 보행자도 차도에 발을 디딜 때면, 동급의 강한 의무까지는 아니어도 '측면 주시'를 강력한 권장 사항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고 이어폰도 잠시 빼고 말이다.
길 건너편에 목적지 또는 합류할 일행, 탑승할 차가 있을 때 그것만 보고 쪼르르 달려가다가 사고 난다.

한 차선은 직진 차로인데 신호가 빨간불이어서 차들이 서 있다. 한 보행자가 이 틈을 이용해 무단횡단을 한다. 그런데 그 차선의 옆 차선은 좌회전 차선이어서 차들이 달려올 수 있는데 그걸 모르고 지금 당장 텅 빈 것만 보고 건너다가 사고가 난다. 아까 운전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큰차에 가려져서 옆 차로에서 달려오는 차를 못 봐서 그 차에 치이기도 한다.

운전자와 마찬가지로 보행자도 당장 지나가는 차가 없는 도로에서 무단횡단의 충동을 얼마든지 느낀다. 그런데 그럴 거면 좌우 측면을 충분히 주시하고 정말 at your own risk로 잽싸게 민폐 안 끼치고 빨리 건너가야 한다. "불륜 저지를 거면 내가 모르게 하고 나한테 걸리지만 마라. 걸리면 뒈진다" 같은 마인드로 말이다. 그럴 자신 없으면 마음 가라앉히고 다음 신호를 기다렸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9.
그리고 시내버스가 기사 아저씨의 귀차니즘 같은 이유 때문에 인도에 바싹 붙어 정지하지 않고 승객을 하차시키는 바람에 사고가 나는 경우가 있다. 앞만 보고 쪼르르 내린 승객이 시내버스의 옆 여백으로 지나가는(특히 우회전) 자동차 내지 이륜차와 부딪치는 거다.

물론 이건 버스 기사의 과실이 최소 70% 이상은 먹고 들어간다. 하지만 멈춰 설 기미가 보이는 버스 뒤에서 다른 차량 운전자도 좀 조심해야 하고, 승객도 발이 차도에 닿을 것 같으면 좌우, 아니 차가 오는 오른쪽 방향을 주시하는 센스가 필요해 보인다. 밖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버스는 문이 열릴 때 밖으로 돌출되지 않기 때문에 택시· 승용차와 같은 급의 개문 사고가 나지는 않는다.

10.
끝으로.. 교통사고라는 건 내지도 당하지도 않아야겠지만, 일단 그런 불행한 이벤트에 말려 버렸다면 상황이 최소한 지금보다 더 나빠지는 일은 없게 사후 대처도 침착하게 잘해야 한다.
고속도로 한복판 같은 곳에서 사고를 당했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2차 사고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아니고 남이 당한 사고의 수습을 돕다가 사고 현장으로 그대로 돌진해 온 다른 차에 치여서 중상· 사망을 당한 의인의 안타까운 사연이 적지 않다.

"이 정도면 뒷차도 충분히 인지하고서 속도 줄이고 서겠지" 이렇게 안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속도로에서는 어떤 막장 차량이 달려와서 교통사고 현장에 그대로 꼬라박을지 알 수 없다. 그게 운동 에너지에서 질량이 왕창 큰 졸음운전 대형 트럭이 될 수도 있고, v가 왕창 큰 과속 승용차가 될 수도 있다.
차를 최대한 갓길로 빼고, 그럴 수 없으면 사람이라도 차를 벗어나서 도로 밖으로 멀리 대피해야 한다. 차 안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완전 자살행위다.

움직일 수 없는 고장· 사고 차량이 불가피하게 도로를 틀어막게 됐으면 비상등을 켜는 건 말할 것도 없고 트렁크도 열고 차량의 존재감을 최대한 알려야 한다. 사람이 200미터 후방까지 가서 삼각대를 설치하고 오는 건 현실적으로 매우 위험하니 삼각대 자체에 무슨 원격조종 동력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밤에는 스스로 터지는 불빛이 가시성이 좋다고 하는데 화약이 들어간 물건이어서 유통과 소지에 제약이 걸려 있다고 한다. 비현실적인 법률에 대한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7/01/20 08:37 2017/01/20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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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 의식의 변화

1980년대 말, 한강 고수부지에 가기 위해 사람들이 무려 올림픽대로를 무단횡단으로 건너고.. 아예 자전거를 몰고 역주행까지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1990년, 수도권 전철 1호선 신도림 역에서 내린 시민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패거리로.. 개집표기를 통과하지 않고 그냥 울타리를 넘어서 지상으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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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거 다 옛날에 9시 뉴스 카메라 출동 같은 데서 소개된 아이템들이다.
우리나라가 국민 의식이라는 게 저 정도로 무지하고 미개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저런 걸 고발하는 방송계도 남말 할 처지는 아닌 게.. 지금 같은 저작권 의식이 없어서 일본 TV의 시그널송이나 드라마 같은 거 무단으로 베껴 오는 건 예사였다.
지금 같은 초상권 보호나 개인정보 보호 그딴 관념도 없음. 저 부끄러운 짓을 하는 사람들을 그 어떤 보호 처리 없이 대뜸 인터뷰 해서 쌩얼을 내보냈다. 신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2, 30년 전 사람들이 지금 세대보다 특별히 더 사악한 게 아니다. 그냥 하는 짓도 수위가 세고, 그걸 통제하고 계도하는 방식도 수위가 셌을 뿐이다.
단군의 후손들이 역사상 피똥 싸는 가난을 떨쳐낸 지 얼마나 됐다고, 법과 질서와 시스템과 국제 매너라는 걸 접한 게 얼마나 됐다고 지금 같은 의식 수준을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그 시절에 올림픽대로의 경우는 도로 크기 대비 차도 지금보다 훨씬 덜 다녔으니 무단횡단이 가능했던 측면도 있을 것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갓 만들어진 시절에도 마찬가지다. 자동차 전용 도로라는 개념이 존재한 적이 없었고, 지금처럼 자동차가 넘쳐나는 때도 아니었으니.. 그때는 "고속도로에 보행자는 제발 얼씬도 하지 마세요. 제발 무단횡단 하지 마세요. 소 끌고 다니지 마세요"라고 지겹도록 계도와 홍보를 해 댔다.
게다가 일부 비상활주로 구간을 정기적으로 틀어막고 아예 전투기 이착륙 훈련도 할 정도로 고속도로가 널널했다. 지금은? 그랬다가는 작살나지..

(그리고 전철역의 경우도, 저 많은 사람들이 불법 무임승차를 했다는 소리는 아니므로 오해 말 것. 그때는 지금 같은 교통 카드가 없었다. 출발역에서 승차권을 선불로 끊은 뒤 도착역에서 그 승차권을 넣고 나가야 하는데, 나가는 절차만을 생략한 것일 수 있다. 그 시절의 마분지 승차권이야 어차피 재사용하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물론, 집표를 안 했으니 2구간 이상 장거리를 이용하고도 1구간 요금만 지불한 뒤 쓰윽 나갔을 가능성은 있음.)

뭐, 1970년대에 서울 지하철이 처음 개통했을 때는 "지하철 열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통상적인 여객 열차와는 달리) 이런 것도 차내 안내방송으로 나왔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세월이 흘러 198~90년대에 우리나라에 마이카 + 너도 나도 해외여행 풍조가 막 생겨났다. 그때는 인구당 교통사고 발생 세계 1위에, 외국 나가서 진상과 추태 부리는 어글리 코리안 이러면서 각성하자는 공익 광고 + 교통 안전 캠페인도 엄청 많았다.

이거도 무슨 조센징들만 국민성이 유전자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거나, 이 엽전노무 새끼들이 노예근성 쩔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보릿고개 이러다가 겨우 30년 남짓 만에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와 외국 여행이라는 걸 난생 처음 접해서 그런 것일 뿐이다.

난 어렸을 땐 우리나라 국민성에 뭔가 진짜 심각한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근데 이거 뭐 해외여행 전면자유화가 된 게 무려 1989년부터이고 그 전엔 외국행 어학연수와 신혼여행, 배낭여행 자체가 없었더구만, 지금까지 개같이 일하고 돈 버는 것밖에 안 해 본 집단한테서 하루아침에 뭘 선한 게 나오길 기대하겠는가?

지금이야 많이 고쳐졌다. 뭐, 레알 선진국 수준으로 고상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은 이웃집 '대륙'에서 우리나라의 전철을 밟고 따라오고 있을 뿐이다. 걔들도 국력 대비 외국 나가기 굉장히 어려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며, 그나마 제일 만만하게 갈 수 있는 외국이 제주도이니 거기에 왕창 몰리는 것이다.
'대륙의 기상' 이러면서 유커들의 미개한 짓을 보면서 비웃는다면, 과거에 한국인들도 외국에서 그렇게 비웃음 받았을 거라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며 왜 일본인이 선진국들에서 한국인보다 더 높은 대접을 받는지도 같이 생각해야 한다.

자동차에 이어 1990년대 말엔 국민 의식 관련 최대의 이슈는 응당 "공공장소에서는 휴대전화 제발 진동 모드로 해 놓으세요"였다. 기억나시는지? 그게 세뇌 수준으로 정착하고 공감대가 형성된 덕분에 지금은 그래도 이 정도로 괜찮아졌다.

이런 역사 선례들을 감안할 때 본인은 필요 이상의 '국까'나 "민중은 개돼지" 이런 식의 비하의식에 공감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으로도 미개하던 옛날에 바랄 걸 바라야지, 모 대통령이 경제는 살렸지만 민주주의는 죽였네 뭐네 하는 배부르고 비현실적인 불평불만 피해의식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195, 60년대에 애초에 무슨 성숙한 민주주의 같은 게 있었다고 개수작을. 어유;;; ㅉㅉㅉ

※ 우리는 할 수 있는가?

우리나라가 지금 같은 사회 구조와 분위기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에 과학 분야의 노벨 상 수상자가 나올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도대체 뭐가 잘못됐고 무엇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난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저 사회 탓, 제도 탓, 우리 모두의 잘못 이런 식으로 어물쩡 넘어가서도 안 될 문제인데도 말이다.

그리고 분야를 막론하고 '한국형'이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했던 무슨 프로젝트들이 잘되고 성공하고 지금까지 이어진 예가 있나? 이 역시 거의 없다시피할 것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는 점점 성장 동력이 멈추고 있다. 제발 내 느낌일 뿐이었으면 좋겠지만, 옛날, 특히 서울 올림픽을 준비하던 시절 같은 팀웍과 화합이 다시 이뤄지지 못하고 뭔가 국운이 다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든다. 지금까지 해 놓은 것, 벌어 놓은 게 적지 않으니 당장 몇 년간은 먹고 살겠지만 중국이 추격하고 일본· 미국이 더 격차를 벌리면 건축· 전자· 기계· 컴터· 항공우주 등 분야들이 미래에 어떻게 도태하고 뒤쳐질지 모른다.

지금만 해도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그저 오로지 돈, 돈, 돈, "스펙 아무리 좋아 봤자 부모 재력 절대 못 이김", "금수저 흙수저 헬조선 계급론" 같은 인식이 팽배한 지경인데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더 못살던 시절에는 도대체 무슨 일말의 희망이 있었을까 싶다.
그러니 옛날에는 나라에서 앞장서서 단순무식 반공뿐만 아니라 국뽕 주입도 정말 많이 했다. 엽전의식 노예근성을 없애려고 도로를 하나 닦고 지하철 노선을 하나 개통해도 현수막에 "선진조국 창조", "우리는 할 수 있다" 프로파간다를 집어넣었다. 그 시절 기록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지금이야 옛날 같은 그저 "국산품 애용, 과소비 추방, 닥치고 저축" 같은 국뽕스러운 경제 이념은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그러나 애국심 마케팅이 필요없어진 것 자체도 알고 보면 그 전에 한창 애국심 마케팅 하에서 육성된 국내 기업들이 세계적으로 꿀리지 않는 경쟁력을 갖춰서 외제품 수입하는 것만치 수출과 국부 창출도 대등하게 가능해진 덕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 거 못 하면? 우리나라도 그저 다국적 기업들에게 원자재 싸게 공급하는 셔틀 국가밖에 못 된다. 아니, 우리나라는 애초에 1차 산업만으로 먹고 살 수 있는 처지도 아니지. 외국에 기술 식민지, 경제 식민지가 돼 버리면 국산품과 수입품 한가하게 골라서 사는 사치를 누리는 시절도 다 끝난다.

이런 와중에 다시 나라의 기운이랄까, 성장 동력을 재충전할 만한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 올해는 안 그래도 대선도 있는 해인데.. 군인으로 치면 "이 지휘관 휘하에라면 내가 기꺼이 믿고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수 있겠구나!"처럼, 자기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 분야에서 열심히 일하고 연구할 만한 동기를 제공하는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

※ 물가 등 추가 회상

국민의식이고 뭐고 하는 골치아픈 얘기는 마치고, 이제부터는 순수하게 옛날 모습 회상만 더 하고자 한다.
내가 여기저기서 모은 자료들을 종합하자면,
1899년 9월에 경인선 개통했던 당시에 인천-노량진간 경인선 열차의 운임은 상등(퍼스트?) 1원 50전, 중등(비즈니스?) 80전, 하등(이코노미?) 40전이었다. 쌀 한 가마의 가격이 4원 정도 하던 시절이니 저기에다 0이 4개 정도 더 붙어야 지금 가격과 비슷할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의 철도는 지금의 일본처럼 사철 위주로 굴러갔으며, 물가 대비 운임은 지금보다 더 비쌌다. 지금 일본의 철도 운임이 매우 높은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일제 강점기 때 한반도에서 돌아갔던 철도 회사들은 대체로 수지가 잘 맞았으며 흑자를 많이 냈다는 통계가 전해진다.

그러니 그 시절에 기차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가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비행기를 타는 것과 비슷한 위상으로 생각해야 했다. 그것도 저가항공도 아니고 대한항공 급 비행기 말이다.
1899년 철도가 갓 개통한 직후의 얘기이긴 하지만, 그 시절의 느린 증기 기관차로도 최대 100분 남짓이면 갔을 서울-인천 거리에 무슨 장거리 여객기처럼 좌석이 3등급이나 존재했던 이유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 가능할 것이다. 경인선에 첫 도입되었던 증기 기관차는 탄수차가 별도로 있지 않았고 그리 큰 열차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신분제가 지금보다 더 고착화했던 시절임을 감안하더라도 많이 삽질스럽다.

그로부터 반세기쯤 뒤, 지금 "문화역 서울 294"로 바뀐 옛 서울 역 건물은 1925년에 완공됐으며 그 시절 물가로 건설비가 94만 5천원이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것도 지금 물가라면 '만'이 '억~십억'급은 돼야 할 것이다. KTX 광명 역을 건설하는 데도 3천억이 넘는 비용이 들었다고 하니 말이다.
강 우규 의사가 이 역 광장 근처 위치에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저격을 시도하긴 했지만, 시기가 1919년이기 때문에 이 건물이 있던 때는 아니었다.

그 다음 1935년, 소설가 심 훈이 잘 알다시피 소설 <상록수>를 집필해서 동아일보 발간 15주년 기념 소설 공모에서 당선되었다. 그때 상금이 500원이었던 걸로 유명하다. 소 한 마리의 가격이 60원 정도라고 하니 1900년대 초의 쌀 한 가마 4원과 대조해 보시길.
그 500원은 지금 물가로 최하 수천만~억대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심 훈은 상금의 일부를 떼어서(아마 100원)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고 한다.

1935년과 그리 멀지도 않은 1937년도 노래 중에는 놀랍게도 <백만원이 생긴다면>이라는 곡이 있다.
가사는 검색해 보면 나온다. 금비녀 보석 반지 살 거고 그랜드 피아노에.. 자동차도 아니고 비행기를 살 거라고 한다. 지금 100만원이면 당연히 택도 없는 소리지..

저때 100만원은 지금의 100억~1000억 원에 가깝다고 봐야 한다. 1960년대도 아니고 1937년에 저런 문명의 이기들은 서민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가사가 1960년대에 한번 리메이크가 됐는데, 이때는 그 시대 상황을 감안해서 TV를 장만하고 3절에 아예 "로케트 타고 달나라 가지"라는 가사가 등장한다. 1930년대에는 비행기가 각광받던 시절이었고 1960년대는 우주 시대가 관심사여서 그랬던 것이지 싶다. 참고로 지금도 혼자서 우주 정거장 정도까지 갔다오는 데 저 몇백~천억 가까이 돈이 든다.

사실, 일제 강점기와 그 이후 대한민국 사이에는 워낙 격변이 심하고 화폐 단위도 여러 번 바뀌긴 했다. 그걸 감안하고 계속 살펴보면,
1968년에 금성사에서 최초로 내놓은 국산 텔레비전의 가격이 68000원이었다. 그 당시 제조업 생산직 근로자의 1년 연봉에 맞먹는 가격이었으며 굳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도 TV는 집집마다 들여 놓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이걸 감안하면 독일이 영상 기술이 아주 앞서 있긴 했다. 나치 치하에서 1936년에 베를린 올림픽을 하던 시절에 벌써 공공장소 곳곳에 TV를 비치해서 경기 장면을 중계할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브라운관'의 원조 국가답다.

1976년 초부터 국내 판매가 개시된 현대 자동차 포니는 그 당시 대당 가격이 230만원 남짓이었다. 1974년에 개통한 서울 지하철이 기본 운임이 30원부터 시작했고 짜장면 한 그릇이 140원가량 했는데 비슷한 시기에 자동차 가격이 저러했다.

그 뒤, 1990년대 초로 가서 내가 직접 겪고 기억한 물가를 나열하자면, 봉지 라면과 200ml 우유가 전부 200원대이던 시절이 있었다. 포니 택시의 기본요금은 700원이었고, 버스비는 초딩 기준으로 80원으로 시작했다가 140원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1995년에 광역시 등 행정구역 통합이 이뤄지고 본인이 중학생으로 업글하면서 버스비는 400원으로 폭증했다.

휘발유 가격은 리터당 600원대 이러던 걸 본 기억이 있다. 그러다가 나중에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주유소마다 가격이 들쭉날쭉이 되고 또 리터당 1000원대 이상으로 가격이 확 올랐다.

서울 택시의 기본요금은 2005년에 1600원다가 지금은 거의 3000원에 근접하는 수준으로 올랐다. 그래도 여전히 택시 뒤를 보면 "10년째 동결인 주행 요금 재조정하라" 이런 구호가 붙은 게 있는데, 당연히 기본요금이 아니라 임률을 말하는 것이다.

버스/지하철의 기본요금은 10여 년 전에 600원인 것부터 봤다가 700원으로 오르고, 2004년 대개편 때 800원이 된 후 900 (2009), 1050 (2012)을 거쳐서 지금은 1250 (2015)이 돼 있다. 이 요금이 지금까지 은근히 가파르게 많이 올라 왔다.
한 줄짜리 일반 김밥도 2000년대 초에 김밥천국이 처음 나타났을 때는 1000원에서 시작했다가 지금은 1500, 2000이 된 지 오래다. 식당에서 시켜 먹는 사이다 한 병도 1000이 유지되는 곳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중.

그러고 보니 옛날에 지하철은 지금처럼 에어컨이 있는 것도 아니고(천장에 그냥 선풍기!) 열이 후끈후끈 올라오는 원시적인 저항 제어 방식인 데다, 기껏 직원용 사무실에 설치된 에어컨의 실외기가 승강장에 있는 무개념 구조이기도 했다. 그러니 승강장와 열차를 막론하고 여름에는 정말 찜통 불지옥이 따로 없었다.

옛날에는 유인 매표소가 있어서 "구로 하나요!" 이러면서 동전을 내밀면 직원이 마분지 승차권을 쓱 주곤 했었다. 요즘 시대엔 그건 인건비 투입하면서 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비생산적인 업무로 간주되어 다 무인화되고 없어졌음. 마치 버스 안내양이 없어지듯이 없어진 거다.
게다가 옛날에는 승차권을 개찰하는 직원도 있었다. 일반열차의 관행이 지하철에도 있었던 셈인데, 지금은 일반열차조차도 개찰이 없어진 지가 오래이니 생소하다.

1966년 서울 모습이 컬러 사진으로 담겨 있는 유튜브 링크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공교롭게도 서울 찬가(패티김)가 발표된 것도 1969으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꽤 옛날이다. 증기 기관차, 노면 전차 같은 게 싹 사라지던 시절. 또한, 산업화 전이라고 해서 마냥 환경이 깨끗하고 푸른 풀숲이 살아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옛날 '컬러'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뭐, 일본에도 <나 도쿄에 갈란다> 같은 노래가 있으니, 어디든 사람 많이 모여 사는 곳에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 심리는 변함없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7/01/17 08:38 2017/01/17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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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 이전에 현대에서 만들었던 소형 트럭과 승합차

내가 우리나라 자동차 역사라고 블로그에다 글을 올린 것들이 사실은 그냥 현대 자동차의 역사인 경우가 적지 않다. 내가 딱히 특정 기업으로부터 향응을 받았거나 거기 입장을 대변하는 처지인 건 전혀 아니고, 어렸을 때 많이 접했고 경험과 기억이 더 남아 있는 것들이 거기 자동차여서 그런 것일 뿐이다.

본인은 현기차의 빠도, 까도 아니다. 물론 걔네들이 무엇 때문에 국내 소비자들로부터 비판받고 있는지 정도는 그럭저럭 안다. 하지만 걔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정말 맨땅에서 죽도록 고생해서 '기술' 개발에 전념해서 우뚝 일어선 건 까든 빠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팩트이며, 본인은 그런 것에 흥미가 가서 추억을 정리한 글을 올리는 것임을 이 자리를 통해 밝힌다. 사실, 코티나가 어떻고 최초의 고유 모델, 최초의 전륜 구동, 최초의 DOHC 이런 198, 90년대 소사는 지금 현대 그룹에 다니는 직원들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오늘날 현대 자동차에서 생산하는 1톤 트럭의 이름은 잘 알다시피 '포터'이다. 모델이 여러 번 변경되면서 원조 포터는 이제 길거리에서 거의 찾을 수 없어졌지만, 이 각진 원조 포터의 모습을 기억하시는 분은 지금도 많이 있을 것이다.
요즘 차들에 비해 각진 헤드라이트의 모양, 그리고 문짝에 새겨져 있는 사선형 무늬가 특징이다. 저 사진에서는 흰색 배경에 무늬가 하늘색이지만, 반대로 하늘색 배경에 무늬가 흰색인 도색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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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실은 이것보다 더 옛날 모델도 있었으며, 걔도 '포터'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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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명의 이니셜을 딴 일명 HD1000. 얘는 일본 미쓰비시에 생산하던 트럭+승합차이던 델리카를 들여온 모델이었으며, 트럭에는 특별히 '짐꾼'이라는 뜻인 포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워낙 희귀한 차량이어서 인터넷을 뒤져도 저 하얀 도색의 모습밖에는 정보를 얻을 수가 없다.
난 저 트럭에 대한 기억은 정말 아주 희미하게.. 거의 영운기나 SMC 8톤 덤프트럭과 비슷한 급으로 남아 있다.

트럭이지만 뒷바퀴가 작은 바퀴 한 쌍이 아니라 앞바퀴와 완전히 동일한 형태인 게 인상적이다. 그래서 기아 세레스와 좀 닮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세레스는 HD1000보다 나중에 등장했으며, 헤드라이트가 저렇게 두 겹(?)이 달린 적이 없었다. 설마 HD1000도 사륜구동이기까지 했는지는 모르겠다. 자료가 없다.

HD1000은 1977년부터 1981년까지 생산되었다. 즉, 포니, 그라나다, 코티나 등과 동연배인 상용차였던 것이다. 승용차에서는 포니는 나름 고유 모델이고 코티나와 그라나다는 포드 사 자동차의 면허 생산인데, 포드와의 관계가 틀어지고 나니 현대에서는 미쓰비시와 이런 식으로 기술 제휴를 맺기 시작했다.

이 트럭은 가성비가 좋았는지 나름 잘 팔리고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5공 초기, 자동차 산업 합리화 조치로 인해 현대는 상용차를 생산할 수 없게 되면서 단종되고 흑역사가 되었다. 오일 파동 속에서 기름을 아끼고 자동차 회사간의 쓸데없는 중복 투자 과열 경쟁 낭비를 막자는 취지는 이해하지만, 이런 식의 무식한 규제와 칼질로 인해 자동차 회사들 간의 건전한 경쟁 구도까지 망가지고, 자기들끼리 구축하던 기술 노하우와 미래 연구 계획이 무자비하게 짤린 것은 업계의 입장에서 큰 손해를 끼쳤다.

기아의 경우 승용차 브리사가 짤려서 흑역사로 전락했다. 훗날 대우 자동차가 내놓은 로얄 디젤만큼이나 브리사를 디젤 모델로도 개발할 작정이었는데 실현되지 못했다.
그렇게 1980년대 초중반까지 자동차 업계의 중세 암흑기가 계속되는 동안 기아는 그래도 봉고라는 승합차와 트럭을 만들면서 회생에 성공했다. 봉고는 당사자들조차 예상하지 못했을 정도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뒀으며, 국내에 봉고라는 이름을 소형 승합차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정착시켜 버렸다. "봉고차!"

앞서 거론되었던 세레스도 1983년, 바로 이 기간에 만든 사륜구동 영농 최적화 트럭이다. 세레스의 모습을 위의 HD1000 트럭과 비교해 보시라. 맨 처음에는 헤드라이트가 각진 사각형 프레임 안의 원형이다가 중간에 텔레비전 브라운관 같은 둥근 사각형으로 바뀌었고, 그러다 곡선 프레임 안의 원으로 돌아온 듯하다. 어떤 경우든 HD1000처럼 1970년대 유행이던 쌍라이트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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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훗날 차종 생산 규제가 풀리면서 기아는 잽싸게 승용차 프라이드를 내놓았으며, 현대는 우리가 아는 그 포터와 그레이스를 내놓게 되었다.
이들과는 달리 대우 자동차에서 내놓았던 바네트와 엘프 같은 상용차는 정말 존재감이 없이 묻혀 버렸다. 오히려 경차인 다마스와 라보만이 불멸의 경지에 올라서 지금까지 생산 중이다.

2. 신칸센 0계와 미쓰비시 데보네어 1세대

끝으로, 과거에 현대 자동차의 기술 파트너였던 일본 미쓰비시 얘기를 하겠다. 한일 합작으로 만들었던 그랜저와 에쿠스가 한국에서는 대박을 친 반면 일본에서는 몽땅 망한 이야기는 차덕이라면 이미 잘 알 것이다.

그랜저의 경우, 한국에서는 1980년대 중반에 국산 고급 승용차를 개발하려는 시대적 필요가 있었다.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철도계에서는 서울 지하철 3, 4호선을 만들었고 새마을호 유선형 객차를 도입했다. 도로 쪽으로는 한강 종합 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올림픽대로를 닦았으며(김포 공항에서 올림픽 경기장까지 한강 따라 한번에!), 이런 분위기 속에서 그랜저도 개발해서 출시하게 됐다.

한편, 일본에서는 미쓰비시의 대형 고급차가 데보네어 1세대였는데 얘가 1963년? 1964년에 처음 나오고 나서 일체의 개량 없이 20년이 넘게 굴러가고 있었다. 자동차계의 살아 있는 화석 실러캔스라고 까일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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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데보네어의 신버전을 개발할 필요가 있었으며, 한국과 일본은 이런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 떨어져서 각그랜저 내지 데보네어 2세대를 공동 개발하게 됐다. 첫 작품이 나온 게 1986년의 일이다.

그런데 1964년부터 1986년까지 22년을 버틴 데보네어 1세대의 연대기는 일본의 고속철인 신칸센 0계와 연대기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신칸센 0계도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간 동일 차체가 죽어라고 폐차와 교체를 수십 번, 정확히는 무려 36차 도입분까지 반복해 왔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식빵 모양 초저항 전동차가 1974년 이래로 12년 동안 1986년까지 도입한 게 끝이었고, 서울 메트로 것도 1989년이 마지막임을 감안하면 동일 차량을 얼마나 오래 우려먹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나저나 각그랜저가 '88 서울 올림픽 대비라면, 데보네어 1세대 역시 신칸센 0계와 마찬가지로 '64 도쿄 올림픽을 대비해서 개발된 건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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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차량인 신칸센 100계는 도입 연도가 1985년부터 1992년까지로, 얘 역시 각그랜저의 생존 주기와 얼추 비슷하다. 뉴 그랜저는 1992년 가을에 출시됐으며, 신칸센 300계도 1992년에 등장했다. 300계는 우리나라의 고속철 차량 입찰 경쟁에 참여하기도 했었다.
철덕은 자동차의 역사를 동일한 시기의 철도의 역사와도 연계해서 생각할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23 08:32 2016/12/2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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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문제 끝장내기

난 소위 말하는 친일파· 민족 반역자라는 건 다음과 같은 세 그룹으로 나뉘며, 이들을 분명히 나눠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 A: 매국의 대가로 일제로부터 예우 받고, 당대에나 지금까지도 일체의 참회 없이 대대로 금수저로 잘 쳐먹고 잘살고 있어서 어그로 (조선 말기의 일부 관료· 지주· 황족 출신과 그 후손)
  • B: 일제 강점기 동안 독립운동가를 고문하고 때려잡는 짓을 해서 어그로 (악질 헌병· 경찰 복무자)
  • C: 공인으로서, 지식인으로서 먹고 살려고 권력에 아부하고, 자기 인지도를 이용해서 신사참배 내지 황국신민 징병 권유 같은 짓을 해서 어그로

그리고 난 이들의 적극성과 죄질은 명백하게 A > B > C의 순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비주얼한 임팩트는 B가 가장 강하겠지만 실질적으로는 A가 앞선다. 시간적인 등장 순서도 A, B, C의 순에 가깝고, 해당되는 사람 수도 A < B < C로 갈수록 많아진다.
점점 더 당대 사람의 책임보다는 애초에 나라를 말아먹은 선조의 책임이 더 커지며, 죄질이 가벼워지고 정상 참작의 사유가 생기는 건 당연지사다. 단적인 예로, 내가 그 시절을 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내가 C가 될 가능성은 조금 있지만 B나 A 같은 간 큰 짓을 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나치 치하에 한 몇 년만 점령당했던 프랑스하고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본데, 어디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세대가 바뀌어 버리니 한반도의 경우 해방 당시엔 태극기 모양을 기억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고 어린애들은 "어? 우리나라(=일본)가 전쟁에서 졌는데 왜 어른들이 다들 기뻐해?" 이럴 정도였다. 프랑스가 나치 독일한테 이렇게까지 오래 점령당하고 세뇌당했었냐? -_-;;

이 완용· 송 병준 같은 놈들은 A이고, 노 덕술은 B, 김 활란 같은 사람은 C다. 박 정희가 B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그 증거는 없다. 그냥 평범한 도적을 잡는 일만 한 경찰이나 중공군하고만 싸운 군인이라면 난 문제삼지 않음.
그 시절에 일제 치하의 공무원(교사, 경찰, 헌병 등등)에 취업하려 한 것 자체는 요즘 애들이 전부 공무원, 대기업에만 몰리고 과학고 나와서 의대에만 몰리는 것하고 하나도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공부 잘하면 다들 남을 통솔하고 다스리는 안정적인 직업을 갖고 싶어하지, 너 같았으면 평생 농사만 짓거나 프롤레타리아 로동자 기술자로만 살았겠는가? 굳이 "조센징 엿먹어라"가 아니라 단순 출세욕 때문이라는 것이다.

난 죄질을 A > B > C의 순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똑같은 일제 강점기 여주인공이 나오는 영화인데 C급인 <청연>은 친일 논란에 휩싸이면서 망한 반면, A급에 '준하는' <덕혜옹주>나 <명성황후>는 어째 항일투사로 미화되면서 필요 이상으로 흥행하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비록 그 사람들은 적극적인 매국노와 같은 급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잘한 것도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시절에 이 완용 내지 을사오적 같은 특정 개인 몇 놈만 없었다고 해서 대세가 뒤엎어졌다거나 나라가 안 망할 수 있었다거나 한 게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만, 이 완용이 진짜 개새끼인 이유는 매국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뒤의 태도와 처신이 더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로 그 어떤 실드의 여지도 없다.

A, B는 몰라도 C는 법적인 처벌까지는 아니고 도의적인 비판· 비난, 불이익 수준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음주운전 적발 경력 같은?
그 시절에 일제한테 그 정도 협조 내지 영혼 없는 립서비스조차 안 했으면 조선인이 기업을 경영하고 고급 기술을 그만치 만질 기회라고는 있을 수 없었을 거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물론 그땐 그랬다 치더라도 해방 후에도 일말의 반성이 없이 고개 꼿꼿하게 세우고 잘나가고 있다면 그 꼴은 보기가 참 민망하겠지만, 그래도 C 욕하는 그 의협심 강한 깨시민들도.. 자기가 그런 위기에 처하면 걔네 역시 십중팔구 변절하고 깃발 바꿔 달 거라는 건 내가 절대 장담한다. -_-;; 지금 중국에 대한 태도만 봐도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다.

신사참배 갖고 한국 교회가 썩었네 어쩌네 하는 좌독들이 있다. 물론 신사참배 결의는 한국 교회의 치욕적인 흑역사인 건 사실이다. 또한, 이 역시 외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한 것 자체보다도, 해방 후에까지 곧장 참회하지 않고 뻣뻣한 목을 유지한 것이 더 큰 죄악이긴 하다.

허나, 한편으로는 지들은 그 상황에서 과연 꼿꼿하게 버텼을까? 일제가 그땐 가족까지 인질로 잡아서 얼마나 치사하고 악독하게 협박과 회유를 일삼았는데? 흔히 생각하는 단순히 부정부패 때문에 굴복한 거 아니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서 판단한다. 저건 비판받을 사항이긴 하나, 자기가 도덕적으로 우월한양 정죄를 일삼고 교회 정체성을 부정할 정도는 명백히 아니다.

우리나라가 건국 초기에 반민특위의 해체와 친일 군경· 관리 재등용 때문에 문제가 되고 좌빨들에게 두고두고 꼬투리를 잡히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이건 C보다는 수위가 높은 B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아마 롤모델로 삼고 있을 북한조차도 B들을 재등용해서 쓴 건 동일할 뿐만 아니라, 내가 늘 말하지만 그건 정말 전적으로 불가피하게 그렇게 된 것이다. 인재가 부족해서 말이다.

"친일 군경들이 해방 후에 그대로 옷만 갈아입고 반공투사로 변신"
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절~대로 부정적이기만 한 현상이 아니다! 그땐 그런 반공투사라도 없으면 안 됐다! 그 시절에 불가능했던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자꾸 이상한 피해의식 망상 집어넣는 선동질에 속지 마라.

우리나라는 건국 당시에 대통령과 내각 등 브레인들이야 당연히 다 독립운동가에 광복군 출신이었다. 단지, 말단에서 궂은일 하는 중하급 군경 간부들 중에는 일제 부역자들이 있었다. 이거는 램 4MB에서 돌아가는 Windows 95가 32비트 껍데기 밑에 불안정한 16비트 도스 코드가 부득이하게 호환성 때문에 여전히 포함돼 있던 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이유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백성들의 컴퓨터 사정은 Windows NT 따위는 절대로 돌릴 수 없는 여건이었으니 말이다.

자, 그럼 마지막으로 남는 A급 잔당들은?
일일이 색출해서 재산 몰수했으면 좋겠지만 워낙 극소수이기도 하고 B급과 겹치는 놈도 있고, 그 혼란한 와중에 일일이 죄질을 파악해서 공산당 식으로 일을 처리하기 어려웠다. 이런 놈들이 일부 오늘날까지 호의호식하고 있는 건 안타깝고 화가 나긴 하지만, 정말로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지,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 비관하고 탓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2010년이던가, 산낙지 살인 사건 기억하는가? 이건 단순 사고가 아니라 보험사기를 노리고 남자가 여친을 살해한 악질 살인이 거의 확실해 보이는 모든 심증 정황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없고 피해자인 여자애가 일찍 화장되어 없어져 버리는 바람에 용의자는 증거불충분으로 덜컥 무죄 선고를 받아 버렸다! 그런 것과 비슷하다. 세상엔 그런 분통 터지는 일도 있다. 무고한 사람을 막 빨갱이로 몰아가서 억울한 피해자를 만든 '유죄 추정의 원칙'만큼이나, '무죄 추정의 원칙'도 이런 식으로 한계와 부작용이 있는 법이다. 100% 만능이 아니다.

또 다른 예로는, 가평과 춘천 사이에 있는 남이섬 유원지가 A급 친일파 반역자 민 모 씨 가문의 후예 소유라고 알려져 있다.
물론 직접적으로 일제로부터 향응 차원에서 남이섬을 하사받기라도 한 건 아니다. 그랬으면 해방 후에 국가에서 정말 0순위로 몰수했어야지. 반쯤은 자기들이 원래부터 한국은행장도 배출할 정도로 출세하기도 했고, 그래서 1970년대에 자기 돈 내고 전주인으로부터 남이섬을 통째로 산 거라고 한다. 이 정도면 어디까지가 친일매국의 댓가이고 어디부터가 개인 사유재산권 추구인지 따지기가 솔직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명백한 친일파 후손이 남이섬을 우리나라 안의 딴 세상 '나미나라 공화국'처럼 꾸며 놓았다는 걸 알면 그게 마냥 재미인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잠재적 내란죄? 남이섬이 평범한 국공립 유원지라면 마케팅을 그런 식으로 할 리는 절대 만무하지 않겠는가?
거기서 한 해 벌어들이는 입장료 수입이 어마어마하다던데, 이 문제에 양심이 민감한 분이라면 남이섬 관광 같은 건 안 가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이 맨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친일 청산 문제에 대한 나의 생각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 친일파라는 건 용어의 정의 내지 범위는 오락가락 하는데 빨갱이와 더불어 한국 사회에서 남을 인격 모독하고 억울하게 매장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 양대산맥이다.

자기도 감당하지 못했을 '의로운' 잣대를 강요하면서 남을 정죄하고 쓸데없이 세상 비관하는 건 옳지 못한 자세이다. 하지만 반대로 C급만 부각시키면서 단순 가담자와 악질 주동자를 한데 싸잡아 "그땐 누구나 다 그랬을 것"이라는 양비론으로만 퉁치는 것 역시 옳지 못하다. (1) 나라도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겠냐 (2) 동족을 괴롭히고 등쳐먹는 등 물질· 정신적으로 악한 영향을 적극적으로 끼쳐서 사익 챙겼냐 (3) 그 뒤에 참회· 반성하고 있냐 정도를 잣대로 판단하면 큰 오류에 빠질 일은 없으리라 여겨진다.

참고로 아래의 부류들은 이 글에서 진지하게 다루는 부정적인 심상의 '친일파' 라인이 아니므로 오해 없도록 하자.

  • 김 옥균: 매국 의도 제로. 정말 악의 없이 일본을 선하게 보고 걔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 했던 옛날 사람일 뿐이다.
  • 오덕: 그냥 비정치적으로 일본 문화만을 좋아하는 사람.
  • 김 완섭: 그냥 책 팔아먹으려는 관심병자 또라이 생계형 친일파일 뿐이다. 이 승만 대통령이 잘못한 게 부정선거 야당 탄압 독재 등등 많은 흑역사 과오들을 제치고 평화선을 그어서 독도를 빼앗은 것이라고 말하는데 더 일고의 가치가 있겠나? 국가 정체성에 아무 위협이 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위화감을 끼치지도 않는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5 18 민주화 운동 유공자랍시고 국가로부터 예우와 혜택도 받고 있다.
  • 일본과 일제 강점기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긍정적으로 말하는 편인 일부 우파 논객: 진짜 일본과 커넥션이 있고 자기 재산 지키고 싶고, 한편으로 우리나라가 망하길 바라는 개XX라면 절대로 저런 짓 안 한다. 얼굴 내밀고 소신 발언 하면서 어그로 끄는 멍청한 짓 따윈 절대 안 한다. 일부 과격 극단으로 치우친 견해가 있더라도 진짜 북한과 커넥션이 있고 지령도 받고 있는 종북 좌빨보다야 비교가 무의미할 정도로 해롭지도 위험하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14 08:31 2016/12/14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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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에서 수뇌부가 거주하는 곳은?

우리나라야 대통령이 근무하는 관저는 북악산 기슭에 있는 '청와대'이다. 대통령은 출퇴근 이동을 하지도 않으며, 잘 알다시피 보안을 위해 아예 이 캠퍼스 안에 가족이 다 눌러앉아서 지낸다.
그럼 한편으로 북한에서 청와대에 해당하는 건물은 무엇일까?

일명 주석궁이라고 불리는 평양의 그 거대한 건물을 떠올리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다. 본인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주석궁은 2~30년 전, 김 일성이 살아 있던 시절에는 '금수산 의사당'이라고 불리면서 김 일성이 거주하고 집무하는 관저로 쓰인 게 맞다. 그러나 저 사람이 죽고 나서는 그 궁전 전체가 무슨 성경에 나오는 지성소 같은 성역이 되어 버렸다. 이름도 '금수산 기념 궁전'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금수산 태양 궁전'이 됐다.

우리나라의 경우 전직 대통령이 서거하면 현충원에 묻어 준다. 그것처럼 김 일성 역시 개인적으로는 북한의 현충원뻘인 '대성산 혁명렬사릉'에 묻히길 원했으나.. 독재자를 한도 끝도 없이 우상화해야만 체제가 유지될 수 있는 북한에서 바랄 걸 바라야지. 그 유언은 상큼하게 씹혔다. (베트남에서는 호치민의 유언도 그렇게 씹혔음.)

그 큰 주석궁 전체가 예전에는 프로토스 넥서스에 해당했는데 이제는 시타델 오브 아둔 같은 역할로 바뀌었다. 김 일성의 미라가 들어갔으며 나중에는 김 정일의 미라까지 추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근처의 지하철역이던 광명 역은 보안 강화를 위해 폐역되고 열차가 무정차 통과하게 됐다. 달랑 미라 두 구만 보관하기에는 아무래도 너무 큰 건물인데.. 다른 공간은 어떻게 바뀌었나 모르겠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금수산 태양 궁전은 일종의 박물관 내지 왕릉 같은 곳이 됐기 때문에 지금 김 정은이 거기에 늘 상주하지는 않는다. 김 일성이 죽은 뒤 오늘날까지 김씨 가문이 사용하는 관저 내지 아지트는 평양, 신의주, 원산, 심지어 백두산 근처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평양 근처에 있는 걸로 알려진/추정되는 아지트도 시내에서 상당히 떨어진 외곽 모처이며, 위성 첩보 사진으로 위치를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거기는 워낙 폐쇄적이고 비밀도 많은 집단이다 보니.. 대한민국의 청와대, 미국의 북악관 같은 딱 떨어지는 단일 집무 공간이라는 개념이 현재 공식적으로 없는 셈이다. 더구나 그런 아지트들의 지하에는 무슨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가 깔려 있을지 생각하면 의문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김 정일의 카게무샤(대역)

우리나라 육군에는 KCTC(육군 과학화 전투 훈련단)이라는 훈련장이 있으며, 거기엔 '전갈 대대'라고 타 부대를 상대로 북한군 코스프레를 하면서 가상의 적군 역할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부대가 있다. 얘들은 마치 버추어 파이터의 듀랄 컨셉 같아 보인다고 본인이 예전에 언급한 바 있다. 여느 군부대 사격장이나 각개전투장에서 볼 수 있는 북한군 차림의 인형(?) 표적만으로는 실전 같은 훈련을 하기에 충분치 못하니 군대에서 저런 것까지 도입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북한군 코스프레만 하는 게 아니다. 북한 김돼지의 코스프레를 전문으로 하는 북한 전문가를 몰래 양성해서 운용하기도 했다. 요즘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에는 그런 게 확실하게 있었다는 것이 김 달술 씨 같은 전직 코스프레 요원의 증언을 통해 알려져 있다.

그런 사람을 왜 두냐고? 북한의 고위 관료나 심지어 김돼지를 직접 만날 예정인 우리나라 측의 대통령 내지 고위 관료를 비밀리에 교육· 훈련시키기 위해서라고 한다. 언어는 일단 같은 한국어를 쓰는데 현실적으로는 일본보다도 위험한 반국가단체 빨갱이들의 수괴요 적장이고.. 그런데 또 대놓고 적대시만 하기에는 좀 민망한 존재이니..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게 되더라도 절대로 기선제압 당하지 말고 쫄지 마라."라는 취지에서 우리 내부에서 모의 훈련을 할 만도 해 보인다. 이건 북파 공작원을 양성하는 것과도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김돼지 등 북한 역할을 하는 사람은 무슨 공작원처럼 인간흉기로 양성되지는 않는다. 단지, 자고 일어나면 맨날 역대 로동신문과 평양 방송을 송두리째 흡입하면서 북한 정세를 학습하고 김돼지의 말투와 몸짓, 요즘 관심사, 머리에 든 것 따위를 숙지했다고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단순히 정치 드라마에서 김돼지 연기만 하는 배우와는 차원이 다른 양의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데 남한 내부에서 북한의 사고방식을 룰 기반으로 정공법으로 익힐 수는 없으니, 결국 통계 기반으로 북한에 대한 빅데이터 머신 러닝 딥 러닝을 몸으로 실행하는 셈이다. 또한, 마치 음란물 자동 탐지 필터를 개발하는 엔지니어가 직업적으로 맨날 음란물에 파묻혀 지내야 하듯, 저 아저씨는 합법적으로 맨날 이적표현물에 파묻혀서 산다고 볼 수 있다.

북한 내부에서는 쿠데타나 암살에 대비해서 가짜 김돼지가 예비용으로 돌아다닐 법도 한데, 어쨌든 남한에서는 뭔가 다른 용도로 김돼지의 코스프레가 이런 식으로 그것도 몇 대에 걸쳐 비밀리에 양성되어 왔다는 게 신기하다. 인간을 화성으로 보낼 생각으로 지구의 하와이 모처에다가 화성 같은 환경을 꾸며 놓고 우주인들에게 몇 개월 동안 생존 훈련을 시키는 것과 비슷한 관행으로도 보인다.

우리가 자체적으로 이런 짓을 해 봤자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북한 사람과 만나는 데 무슨 도움이 됐겠냐 싶지만...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김 정일이 만나서 거론한 것, 질문한 것은 남한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해 간 예상 문제의 범위를 별로 벗어나지 않았으며 적중률도 대단히 높았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상 북한 수뇌를 최초로 직접 대면한 김 대중의 경우 70대 중반의 고령에도 참모진들이 준비해 준 대응 매뉴얼을 일일이 숙지하면서 답변을 아주 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까지 곳곳에 비밀도 많고 비리도 많고 숨겨진 게 너무 많은 채로 돌아갔던 게 사실이며, 저 카더라 통신도 한쪽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것이니 전적으로 믿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그렇게 기껏 철저히 준비하고는 김돼지를 만나고 와서 이뤄진 열매가 겨우 이 모양이라면 말이다.
김 대중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국정원을 싹 뒤집어엎고 북파 공작원들의 신원을 북쪽에다 넘겨 줘 버렸다는 말까지 나도는데.. 그것도 내가 직접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만 김 대중· 노 무현 같은 친북 성향의 정권이 설령 악의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북한에 엄청난 거금을 퍼 주고도 북한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으며 전화· 서신 왕래 하나 제대로 이뤄진 게 없었다. 가만히 놔두기만 하면 붕괴했을 북한 정권은 이 돈으로 원래 계획했던 핵을 무난히 개발하는 쾌거를 이뤘다. 철도 연결이나 이산가족 상봉 깜짝쇼쯤은 도박판에서 돈 다 날리고 받은 위로금 개평 수준?

남북 경제 협력 명목이랍시고 이뤄 냈다는 개성 공단을 온갖 이상한 논리와 궤변으로 옹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양심이 있다면 박통 시절에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 여건(특히 전 태일 열사)을 같이 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박통 시절에 아무리 노동자 인권이 열악했어도 임금의 90%를 체제 충성 비용으로 국가가 떼어 가던가?

이래도 햇볕 정책이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별다른 비판 없이 넘어간면, 그렇다면 6· 25 때 이 승만 정권의 한강교 폭파와 인명 살상이야말로 훨씬 더 악의적이지 않은 실책일 뿐이라고 실드 치고 넘길 수도 있겠다. 이게 전체 그림의 진실인 것이다.

정치색 들어간 얘기는 이쯤에서 접고 다시 본문으로 돌아오면..
이렇듯 국가 대표로서 적성국가 사람과 대면하는 건 어지간히 힘든 일이 아니다. 옛날에 이 후락 중앙정보부장도 몰래 북한을 방문했을 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만약을 대비해 언제든지 즉시 자폭 가능하게 독약 앰플을 준비해 갔을 정도였다.

그리고 같은 전방에서도 상대적으로 낙후해 있는 동부 전선 강원도 산간지대 말고.. 서울과 가까운 평지이고 판문점도 있는 서부 전선이 훨씬 더 엄선된(체력· 사상 모두) 정예 군인들이 배치된다. 여기 일대는 민통선과 DMZ의 구분이 좀 므흣해서 북한군과 직접 대면하기 쉽고 각종 높으신 분들도 많이 오며, 덩달아 어느 지역보다도 월북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여기가 그야말로 노다지 진급 코스이다. 육사 졸업생은 바로 이런 데에서 소대장으로 첫 근무를 시작한다.

3. 탈북자가 가는 곳

북한 주민들이 탈북을 하는 경로는 신분과 지위에 따라 다양하다. 외국에 파견 나가 있다가 별안간 망명을 신청하기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중국 국경으로 넘어간 뒤 다른 나라를 거쳐 한국으로 오기도 한다. 배를 타고 넘어오거나 국경에서 근무 중인 군인이 별안간 남쪽으로 오는 경우도 있다.

이렇게 남쪽으로 넘어오는 북한 주민들은 명목상으로는 반국가단체의 지배 하에 있다가 탈출해 온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자유 대한의 품에 안긴 그들을 최대한 인간적으로 대우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탈북자로 위장 행세를 하는 간첩도 있기 때문에, 대접을 하기에 앞서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심과 검증은 거친다. 탈북했다가 별안간 "나 마음이 바뀌었으니 북으로 다시 보내 주쇼" 하고 떼쓰는 이상한 아줌마도 있는데 이건 99.9% 간첩이다.

필요 이상으로 이상하게 북한을 자주 방문하는 사람도 굉장히 의심해야 한다. 그런 놈들은 북에 가서는 돈 왕창 바친 뒤 또 지령 받아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정치· 종교 쪽으로 유명한 사람이 북에서 자기 지위와 관련된 약점을 한번 잡힌 뒤부터는(마약이나 성 스캔들 같은) 북에 대해서 소신 발언은 끽소리도 못 하는 친종북 인사가 돼 버린다.

뭐 이런 경위가 있기 때문에, 탈북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접수되면 곧바로 하나원 같은 정착 지원 시설로 가는 게 아니다. 이들은 정확한 신원 파악을 위해 먼저 탈북자 전용 신문 센터에 며칠간 수용되어 정밀 조사를 받는다. 이건 국정원 자체는 아니지만 국정원에서 관할하는 시설이며, 시흥시 수인로라는 대로변에 자리잡아 있다. 당연히 아무 이정표도 없고, 밖에서 봐서는 이런 시설이 있는지 일반인은 전혀 알 수 없다.

정밀 조사를 통해 이들이 정말로 북한에서 왔고 악의가 없는 탈북자가 맞는지를 최종 확인한다. 우리나라도 정부 수립 이래로 지금까지 탈북자가 한두 명 쌓인 게 아니고 이 바닥 장사를 하루 이틀 하는 게 아닌데, 수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교차 검증 가능한 데이터쯤이야 왕창 쌓여 있다. 정말로 북한의 그 지역에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을 거듭 질문해서 제대로 대답하는지 확인한다.

검증을 통과한 뒤 탈북자들은 하나원에서 총 12주간 남조선 사회 제도에 대한 교육을 받은 뒤, 각종 정착 자금을 받고 사회로 배출된다. 게임에서 튜토리얼을 한 뒤, 캐릭터가 본게임 필드에 스폰돼서 처음엔 깜빡거리는 실드 모드이다가 그 뒤부터는 실드 모드가 꺼지는 것과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탈북자가 워낙 많아지고 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귀순 용사'로 일일이 띄울 필요도 없는 일상적인 일과가 되자.. 하나원 역시 2010년대에 와서는 화천군에 멀티를 또 만들었다. 본원은 안성 품곡마을 근처에 있다.

하나원과 신문 센터 모두 법적으로 '가급 보안 시설'이고 지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다. 북한이 위치를 알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시설이니까. 국정원 본원 자체도 코렁시설이지만 신문 센터라든가 국가 정보 대학원 같은 추가적인 연계 코렁시설도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나저나 서독산과 수리산의 사이에 있는 안양 박달동은 보아하니 산지 같은데 산 전체가 몽땅 온갖 군부대로 가득하구나. 예비군 훈련장도 당연히 있고. 산 전체가 탄약고인 천안 성환읍 학정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2/05 19:37 2016/12/0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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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 2014년에 썼던 글을 관련 내용을 크게 보강하여 리메이크 한 것이다.

디지털 컴퓨터라는 게 0과 1, 2진법을 사용하다 보니, 2^n이라 하면 정보량과 관련해서 특히 컴퓨터쟁이들에게 아주 친근한 수이다.
그런데 2^n보다 1 더 크거나 작은 수가 소수라면 제각각 수학적으로 좀 독특한 의미를 갖게 된다.

1.
2^n-1 형태인 수를 메르센 수라고 한다. n층짜리 하노이의 탑의 원반을 옆으로 모두 옮기기 위해서는 이 메르센 수만치 지수함수적으로 증가하는 횟수만치 원반을 이동시켜야 한다. 그리고 메르센 수 중에서 소수인 놈을 메르센 소수라고 한다.
얘가 소수이려면 n도 반드시 소수여야 한다. n을 a와 b라는 두 자연수의 곱이라고 생각하고 2^ab - 1을 인수분해해 보면 그래야만 하는 구조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ab는 (2^a)^b 와 같다. 2^(a+b)하고 혼동하지 말 것.)

n이 합성수여서 2 이상인 두 자연수 a, b의 곱으로 나타내어질 수 있다면 2^n-1은 빼도 박도 못하고 무조건 합성수가 돼 버린다. 전체 결과가 소수가 되려면 a는 1이고 b는 소수로 귀착되는 것밖에 가능성이 없다. 비록 이 조건이 만족된다고 해서 2^n-1이 언제나 반드시 소수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가장 작은 반례는 2^11-1이다. 11은 소수이지만 2047은 23*89로 소인수분해 되는 합성수이다.

메르센 수는 2^n에서 1이 부족한 형태라는 특성상 2진법으로 나타내면 모든 자리수가 1이다. 컴퓨터에서 취급이 간편하기도 하고, 또 n의 소수 여부를 판정한 뒤에 곧장 무려 2^n-1이라는 방대한 수를 취급할 수 있다는 특성상.. 컴퓨터로 가장 큰 소수를 찾는 프로젝트는 대개 메르센 수를 대상으로 진행되곤 한다. 물론 실제로는 메르센 수가 아닌 소수도 많이 있으며, 반대로 메르센 수 중에서도 메르센 소수는 매우 드물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저런 거 찾는 건 거의 애니메이션 렌더링과 같은 급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계산량으로 컴퓨터를 열받게 하고 혹사시키는 작업이다. 그나마 양만 많지 내부 과정 자체는 단순무식한 편이니 병렬화가 수월한 건 다행인 점이다.

메르센 소수는 짝수 완전수와 필요충분 관계로 정확히 대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약수의 합이 자신과 같은 6, 28, 496 같은 수) 메르센 소수 2^n-1에다가 2^(n-1)을 곱하면 완전수가 나오기 때문이다. 괄호 순서에 유의할 것. 즉, 저기서 n에다 소수를 집어넣으면 된다. 천재 수학자 오일러가 모든 짝수 완전수는 이런 형태라는 것을 증명했다.
현재까지 메르센 소수는 약 50여 개가 알려져 있으나, 무한히 존재하는지는 불명이다.

2.
그럼, 다음으로 2^n+1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1은 -1보다 더 자비심이 없다. n은 소수가 아니라 반드시 2의 거듭제곱 형태여야 그 값이 소수일 일말의 가능성이 생긴다. 이는 n의 소인수 중에 홀수가 절대로 존재해서는 안 됨을 의미한다. 아까 전과 비슷한 방식으로 2^ab + 1을 인수분해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n의 소인수에 홀수가 존재해서 그걸 b라고 설정하면 아까 -1일 때와는 부호만 미묘하게 다르게 저렇게 인수분해가 되며, 이 수는 100% 합성수임이 보장돼 버린다. (2^a - 1)이라면 a=1인 걸로 맞춰서 없앨 수라도 있지만, (2^a + 1)은 도저히 처분할 방법이 없다.

하긴, 고등학교 공통수학 수준의 인수분해 공식을 생각해 봐도, n이 홀수일 때에 한해서 (a^n + b^n)은 a+b로 나눠 떨어지며 인수분해가 된다. 나눠진 몫에 해당하는 항은 a^n에서 b^n으로 a와 b의 차수가 조금씩 늘고 줄고 부호가 교대로 바뀐다.
이를 일반화하면, n이 굳이 홀수가 아니더라도 6이나 10처럼 홀수 소인수가 포함돼 있으면(3, 5) (a^n + b^n)은 굳이 a+b가 아니더라도 (a^2+b^2) 같은 것으로라도 나눠 떨어지며 인수분해가 된다. 그렇지 않고 홀수 소인수가 전혀 없다면 +의 경우는 인수분해를 할 수 없다.

부연 설명 차원에서 인수분해된 식들이 전개되는 양상을 시각적으로 살펴보면 이러하다.
a^n - b^n은 n의 값과 관계없이 언제나 a-b로 나눠 떨어지며, 나눠진 몫의 항들은 부호가 모두 +가 유지된다. 전부 +인 항들이 한 칸 옆으로 물러간 채 -로 바뀌어서 전부 +/-가 상쇄돼 버리고 맨 앞의 +와 -만 남는다
++++
 ----
+...- (a-b)

하지만 a^n + b^n일 때는 +와 -가 교차하는 항들이 한 칸 옆으로 맞물려서 상쇄돼야 맨 앞과 뒤의 +가 남을 수 있다. 그러니 이때는 항이 홀수 개여서 양 끝이 +가 유지돼야 인수분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
 +-+-+
+....+ (a+b)

(쪼개고 쪼개도 분자 단위에서 계속 앞뒤로 + - 극을 갖는 자석 같아 보이기도 하고..;;)
이 두 경우를 모두 종합한 듯이 인상적인 상황은 (a^n - b^n)에서 n이 2의 거듭제곱 형태일 때이다. n=8인 경우를 예로 들어 보면, 이 식은 (a^4 + b^4)(a^2 + b^2)(a + b)(a - b)라고 아주 드라마틱하게 인수분해가 된다. n이 2의 거듭제곱이면 (a^n + b^n)은 -일 때와는 반대로 인수분해가 도저히 더 되지 않는 다항식계의 소수(?) 같은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2^n+1도 n이 반드시 2의 거듭제곱 형태여야만 구조적으로 인수분해가 되지 않고 소수일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2^(2^n)+1 형태인 수를 페르마 수라고 하며, 그 중 소수인 놈을 페르마 소수라고 한다. 간단하게 2^n-1로 정의되는 메르센 수와는 양상이 다르다.

그러니, 태생적으로 딱 봐도 페르마 소수는 메르센 소수보다도 더욱 드물 것 같이 생겼는데, 실제로 그러하다.
n에 비례해서 숫자가 넘사벽급으로 너무 폭발적으로 커지는 관계로, 페르마 소수는 n=0..4인 처음 겨우 5개밖에 알려져 있지 않다(3, 5, 17, 257, 65537). n이 아니라 2^n으로 계산한 것이다.

여기서 페르마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내지 추측을 제시했던 17세기 프랑스의 그 엄친아 변호사 겸 아마추어 수학자를 가리키는 거 맞다..
페르마 자신은 저런 형태로 생성된 모든 수들이 소수일 거라고 1637년에 추측하였으나, 그로부터 100여 년 뒤인 1732년, 오일러가 n=5인 2^32+1은 소수가 아니라고 반증을 해 버렸다. 아까 그 메르센 소수와 완전수 관계를 증명한 그 오일러 말이다.
지금이야 그 정도 크기의 수는 컴퓨터로 소수 여부를 아주 간단히 판별할 수 있지만 오일러는 컴퓨터도 없던 시절에 저걸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걸까? 찰스 웨슬리가 찬송시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을 쓰기도 전의 일이다(1738).

제곱근인 65536 이내의 모든 홀수들을 브루트 포스 식으로 일일이 주판 돌려서, 제자들까지 멀티코어로 동원해서 나눠 본 건 물론 아니고..
2^32 + 1의 소인수는 반드시 64k+1 의 형태라는 것을 어떤 계기로 알아내고는 찾았다고 한다. 범위를 많이 좁힌 것이다.
실제로 2^32 + 1은 641 * 6700417인데, 이는 (64*10+1)*(64*104694+1)이다.
그는 이를 일반화하여 페르마 수의 소인수는 반드시 "2의 거듭제곱의 a배 + 1"이라는 사실까지 정립했다.

n=5에 속하는 2^32+1에 이어 n=6 (2^64 + 1)의 경우도 합성수라는 게 추가로 밝혀진 건 오일러 이후로 또 100년이 넘게 지난 무려 1855년의 일이다(by Thomas Clausen). 나머지 페르마 수들도 대략 32까지 구해 보니 줄줄이 다 합성수라는 것이 계산을 통해 밝혀졌다. 페르마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흘러간 셈이다.
그러니 65537을 끝으로 페르마 소수는 더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닌가 추측되고 있으나, 이 역시 홀수 완전수의 존재 여부만큼이나 정식으로 증명된 것은 아니다.

메르센 소수가 짝수 완전수와 동치 관계이듯, 페르마 소수 역시 굉장히 의외의 곳에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작도 가능한 정다각형의 특성과 관계가 있다. 변의 개수의 소인수가 2 and/or 페르마 소수들로만 이뤄진 정다각형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를 이용해 작도 가능하다. 작도 가능한 수는 아무래도 사칙연산과 '제곱근'만으로 기술 가능한 수이니, 제곱근만을 연달아 적용하는 건 2의 거듭제곱만치 또 거듭제곱을 하는 것과 심상면에서 비슷해 보이긴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도 불가능한 최초의 정다각형은 정칠각형이며, 반대로 정17각형은 절차가 굉장히 복잡하고 까다롭긴 해도 작도 가능하다. 17은 페르마 소수이니까. 이걸 발견하여 증명한 사람은 오일러...는 아니고 18세기 독일의 천재 수학자인 가우스이며, 그것도 굉장히 어린 나이에 발견했다. sin 1도가 초월수가 아니라 대수적인 수이듯, cos 2*PI/17 역시 형태만 복잡할 뿐, 대수적인 수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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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출처: 나무위키)
뭐,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거지, 실제로 해 보면 누적되는 오차와 지저분한 보조선들 때문에 감당이 어려울 것이다. 하물며 정257각형과 심지어 정65537각형은? 이것도 이론에서나 작도 가능하다는 얘기다.

자, 지금까지 한 얘기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a^n-b^n은 언제나 a-b로 나눠 떨어지며 2^n-1 역시 그런 꼴의 수이므로, 얘를 소수로 만들려면 a-b가 반드시 1인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메르센 수에서 그 경우란 n이 소수인 경우밖에 없다.
  • 그리고 2^n+1의 일반형인 a^n+b^n은 아까처럼 한쪽 인수를 1로 만드는 게 불가능한 대신에, 인수분해 가능 여부가 n의 차수에 따라 조건부로 결정된다. 소수를 만들려면 물론 애초에 인수분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며, n은 단순히 짝수인 정도를 넘어 소인수에 홀수가 전혀 없어야 한다. 그래서 n 자체가 2의 거듭제곱 형태인 것만 남는다.

그러고 보니 페르마뿐만 아니라 메르센도 17세기 동시대를 살았던 프랑스 사람이기 때문에 둘이 공통점이 있다. 메르센은 블레즈 파스칼의 스승이기도 했다. 프랑스, 독일 그쪽은 수학· 과학 쪽으로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한가닥 하고 있는 대단한 동네이다.

* 소수 관련 여담

(1) 소수 자체가 안 그래도 수가 커질수록 (log n) / n 급의 스케일로 자연수에서 등장 빈도가 극도로 드물어진다. 그런데 그 소수들 중에서도 굉장히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메르센 내지 페르마 소수 같은 것들은 한계치 최대치가 존재한다 해도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굳이 수 자체가 특이한 게 아니더라도 2 간격으로 나란히 존재하는 쌍둥이 소수 쌍(5와 7, 11과 13, 17과 19..) 같은 것도 말이다. 그런데 한계치가 있다면 그 최대값이 알려져 있어야 할 텐데 그것이 수수께끼이다.

(2) 오일러의 업적 중에는 소수와 관련해서도 정말 살떨리는 것들이 많다. 자연수의 제곱의 역수의 무한합이 원주율과 관계 있는 수로 수렴한다는 것을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이건 소수의 분포와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임의의 두 수가 서로 소일 확률과 같다고 입증한 건 뭐.. 할 말을 잃게 만든다. 예전에 본인의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있다.

(3) 또한 그는 소수의 개수가 무한한 건 말할 것도 없고, 소수의 역수의 무한합이 무한대로 발산한다는.. 거의 충격과 공포 안드로메다급의 명제도 증명했다. 물론 속도는 이중 로그(로그에다 또 로그) 급으로 끔찍하게 느리니 기대하지 말자. 그냥 자연수의 역수의 합만 해도 얼마나 느린데 하물며 소수의 역수는! 쉽게 말해 10에다 0을 10의 20승개만치 붙인 영역만치 소수의 역수를 더하면 합이 20이 될까말까 한다는 뜻이다. 쟤가 도대체 제곱의 역수의 무한합보다 뭐가 더 나은 구석이 있다고 발산을 하는 걸까?

단, 쌍둥이 소수들의 역수의 합은 유한으로 수렴한다고 한다. 쌍둥이 소수가 유한하다면 당연히 유한 수렴이겠지만, 무한하다 하더라도 얘는 발산하지 못한다고.. 구체적인 값은 모르겠지만 추세가 그렇게 된다는 큰 그림만 증명을 한 것이다. 어떻게 증명했는지는 나한테 묻지 마시길.

(4) 가우스, 오일러 등 인류 역사상 수많은 괴수 천재 수학자들이 초월적인 업적을 남기고 갔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수 생성 규칙을 표방하는 모든 예측· 추측은 지금까지 하나도 완벽하게 적중한 게 없었다. 저 페르마의 추측처럼 말이다.
소수를 생성하는 규칙을 무슨 정보 검색이나 패턴 매칭에다가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정밀도와 재현율(precision & recall) 어느 것 하나라도 확실하게 잡는 규칙이 지금까지 발견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밀도가 100%라면 모든 소수를 커버하지는 못해도 일단 이 규칙이 생성하는 수는 다 소수임이 보장되는 것이고, 재현율이 100%라면 종종 소수가 아닌 놈(false alarm)이 섞여 있더라도 소수는 하나도 빠짐없이 커버한다는 뜻이다.

(5) partition number라는 게 있다. f(2)라면 1+1, 2 이렇게 2가지, f(3)이라면 1+1+1, 2+1, 3 이렇게 3가지, f(4)라면 1 1 1 1, 2 1 1, 2 2, 3 1, 4 이렇게 5... 뭔가 테트리스 조합처럼 올라가는데, 이 수열이 2 3 5 7 11 (15 22...) 이렇게 앞부분은 소수와 굉장히 비슷한 양상으로 시작한다. 무슨 파이의 그럴싸한 근사값을 보는 듯한 느낌이나, 얘는 실제로는 소수와는 수학적으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놈이다.

n에 대해서 f(n)의 값을 구하는 건 다이나믹 프로그래밍으로 해결 가능하다. 피보나치 수열 구하는 것보다는 어렵고 꽤 재미있는 프로그래밍 excercise이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도전해도 좋다. 참고로 점화식 함수 내지 테이블은 보기와는 달리 1변수로는 안 되고 2변수 형태로 짜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30 08:31 2016/11/3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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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계획과 달 탐사 이야기

* 옛날 2012년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월면차와 도킹 관련 내용을 새로 추가했다.

1. 인간이 달에 가기까지

콩코드 여객기가 날아다니고 인간이 달에 갔다 오던 1970년대는 그야말로 항공 우주덕을 꿈꾸는 과학도가 많이도 생겼을 것 같은 시기이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인간이 달뿐만이 아니라 화성도 정복하고 우주 식민지를 개척할 것 같은 희망에 부풀지 않았었을까 싶다. 비록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지만 본인은 이 시절을 어느 정도 동경까지 하고 있다.

아시아 최초의 우주인인 일본의 모리 마모루 박사는 그 당시에 만화영화 아톰을 보면서 과학자의 길을 꿈꾸었으며, 세계적인 우주론 전문가로 손꼽히는 천문학자인 연세대 이 영욱 교수도 어렸을 때 비슷한 체험을 하고 아폴로 계획의 성과에 감화도 받으면서 이 분야의 진로를 선택했다.

이 교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는 것을 봤다. 그 뒤 천문과 우주에 빠져 매일 하늘을 바라보게 됐다”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우주에서 쏟아지는 유성우(流星雨)를 본다고 3시간 동안 집 마당에 서있기도 했다. 마침 아폴로 달착륙 때 해설을 통해 ‘아폴로 박사’로 유명해진 고(故) 조경철 박사도 연세대 교수였다. 그렇게 연세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 링크 클릭)

모리 박사는 13세이던 1961년 옛 소련의 유리 가가린이 인류 최초로 우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우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고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꿈이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 링크 클릭)


이제 막 통신 위성을 통한 TV 중계 기술이 개발되어 1964년의 도쿄 올림픽이 역사상 최초로 지구 반대편으로 생방송 중계된 올림픽으로 기록되던 시절이었는데, 그로부터 겨우 5년 남짓한 시간 만에 인류는 달 착륙 모습을 라이브로 중계하는 데 성공할 줄이야! 대단하지 않은가?

물론 성경은 바벨 탑(창 11:4)이라든가 루시퍼의 반역(사 14:13)에서 볼 수 있듯, 하늘로 자꾸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부정적으로 디스하는 경향이 있다. 하늘이 인간에게는 금단의 영역이라는 심상은, 그리스 신화의 이카루스 이야기에도 반영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순수하게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기 위해 과학 기술을 개발하는 것 자체는 딱히 선악 대립 구도가 없는 이념 중립적 영역이라 하겠다. 아폴로 8호 승무원은 달을 돌면서 오죽했으면 감격에 겨운 나머지 1968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념하여 창세기 1장을 낭독하기도 했다. 바로 이런 광경을 보면서!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고로 아폴로 8호는 새턴 V 로켓으로 유인 우주 비행을 최초로 시도하는 것이었으며, 아예 지구 궤도를 벗어나서 달의 궤도까지 가는 것도 완전 최초였던 미션이었다. 달 착륙선만 빼고 각종 위험한 모험은 다 하고 왔다. 오히려 그 다음 9호는 달까지 가지는 않고 지구 궤도에 머물면서 달 착륙선과 우주복의 안정성을 시험했다.

구소련은 1950년대 말에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쏴서(= 대륙간 탄도 미사일 발사 기술까지 인증) 스푸트니크 쇼크를 일으키며 미국을 도발했다. 하지만 미국이 작정하고 NASA를 만들고 쇼미더머니를 치면서 이 분야를 무섭게 추격하자 10여 년 만에 전세는 역전되었다.

소련은 달에 무인 탐사선을 보내서 달 뒷면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고, 달 표면까지 내려가서 월석을 채취해 오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달 표면에 사람을 착륙시키는 것까지는 차마 달성을 못 했고 천조국 미국이 대신 해냈다.

한때는(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 갑자기 ‘달 착륙 구라설 / 아폴로 계획 자작극 음모론’이 인터넷에 나돌았다. 무슨 사진 모양이 이상하고 그림자 모양이 이상하다는 둥. 그 당시 기술로 우주선이 밴 앨런 벨트를 살아서 통과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둥. 그리고 그때 달에 착륙했다가 다시 출발은 어떻게 했겠냐는 둥.

그러나 이것은 우주 개발 역사와 달 탐사 우주선의 메커니즘 디테일도 제대로 모르는 비전문가의 무지의 소치이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라 점진적인 연습과 리허설을 거듭한 끝에 이뤄진 과업이다.

  • 아폴로 8호와 9호를 거쳐서 10호 때는 드디어 착륙선을 내려서 승무원이 달 표면 고도 10km대까지만 내려갔다가 도로 되돌아와서 사령선에 합류했다. 그 당시 착륙선은 기술적으로 달에 착륙까지는 가능했지만 거기서 재이륙을 아직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 최종 단계인 그것만 빼고 달에 갔다가 돌아오는 리허설을 다 수행했다. 10호 미션 도중엔 그 유명한 "이 똥이 누구 똥이냐"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 그 후 아폴로 11~17호 중 13호만 빼고 미국은 무려 여섯 차례나 인간을 달에 성공적으로 착륙시켰다가 귀환시켰다. 13호는 중간에 발생한 문제로 인해 착륙은 포기하고, 달 궤도를 멀찍이 삥 돌기만 한 후 지구로 귀환했다. 그래도 목숨 부지하고 돌아온 것만 해도 어디냐. 13호의 승무원은 인류 역사상 지구에서 제일 멀리까지 나갔다가 돌아온 사람이 되었다.
  • 사령선은 달의 궤도를 가까이서 빙빙 돌고 있고, 여기서 착륙선을 별도로 내려 보내서 착륙한다. 승무원 3명 중 1명은 모선인 사령선에 남아 있고, 2명만 달 표면을 밟게 된다. 사령관은 혼자 달을 빙빙 돌면서 고독스럽게 사령선을 지킨다. 어두컴컴한 달 뒷면을 도는 동안은 다른 승무원 내지 지구 기지와도 통신이 전면 두절된다.
  • 수 차례의 달 탐사가 진행되면서 인간이 달에다 남겨 놓고 온 흔적들도 많다. 가령, 착륙선의 발사대와 발사 흔적도 그렇고 아폴로 11호는 레이저 반사경을 달 표면에다 놔 두고 돌아왔으며, 이건 지금까지도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때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 아폴로 11호 때는, 미션 완료 후 착륙선이 다시 발사되어 올라가면서 발생한 배기가스의 강한 후폭풍 때문에, 인근에 꽂아 놨던 성조기가 쓸려 날아갔다. 어이쿠.. 그래서 그 뒤의 아폴로 미션 때는 성조기는 착륙선보다 최소 30m 이상 충분히 멀리 떨어진 곳에다 꽂게 되었다. 달 표면은 생각보다 딱딱해서 깃발을 꽂기가 힘들었다고 함.

이런 디테일을 모두 제대로 알기나 하고서 음모론, 자작극을 주장하는 사람을 난 못 봤다.
내가 기독교 식으로 좀 강한 비유를 동원하자면, 인간이 달에 갔다 왔다는 건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인 것만큼이나 확실한 사실이다. 마치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하고 안 믿으려면 무수한 역사적 사실들을 부정해야 하듯, 달 착륙도 증거가 의혹보다 월등히 더 많다.

만약 NASA의 달 착륙이 진짜로 자작극이라면 미국의 모든 첩보 기관들은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전세계 수많은 대학과 연구소, 기업들을 입 막고 매수하는 일에 대부분의 예산과 정보력을 쏟아붓고 있을 것이다. 정말이다. 성경의 마 28:12-13이랑 완전 똑같은 상황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요즘 NASA는 달 내부에서 아폴로 11호의 착륙 지점 같은 역사적으로 너무나 유서 깊은 장소를 있는 그대로 영구 보존하고, 훗날 이곳을 찾는 타국의 달 탐사선이 이를 훼손하지 못하게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려 하는 중이다.
다음은 역대 아폴로 계획 착륙선들이 달 표면에 착륙한 지점을 한데 나타낸 것이다. 무슨 사격 훈련 후에 표적지에 찍힌 탄착군을 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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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월면차

인간이 만들어 낸 전기차 중에 가장 독특한 임무를 수행한 물건은 월면차이지 싶다.
달은 공기가 없으니 기름으로 달리는 내연기관 차량을 운용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산소를 연료와 함께 섞어서 폭발 추진을 시키는 로켓을 만드는 것도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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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차는 아폴로 계획 11~17호 미션 중에서 15회 때부터 총 세 차례 투입되었다.
이게 없던 시절엔 기껏 쒜빠지게 고생해서 달에 갔는데.. 너무 힘들어서 승무원들이 좀 멀리까지 주변 지역 탐사를 하기가 어려웠다.
온갖 생존 장비들이 달린 우주복은 무게가 100수십 kg이 훌쩍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나마 중력이 1/6인 달이니까 부담이 군인의 '완전군장' 수준으로 줄어들었지, 지구였으면 자력으로 들고 일어서지도 못한다. 그 상태로 월석을 채취까지 하면 중량 부담이 얼마나 더 커졌을까?

월면차는 달에 간 우주비행사들의 기동성을 크게 올려 줬다. 같은 거리를 더 빠르게 가고도 산소 소모량은 1/3 수준으로 줄여 줬다! 달에 두 명이 내려갔으니 월면차 역시 두 명이 모두 같이 탈 수 있었다. 개인 월면차 두 대를 제각기 끌고 다닌 건 아님. 지구에서 테스트할 때보다 더 펄펄 날아다녔다는 것도 두 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없이 멀리 가지는 못했다. 혹시 월면차가 중간에 퍼지더라도 차를 버리고 착륙선이 있는 곳으로 걸어서 돌아올 수 있게, 착륙 지점으로부터 반경 6km 이내까지만 돌아다니게 FM에 명시를 했다고 한다. 달에는 보험사 긴급출동 같은 것도 있을 리 없으니까..!

월면차의 주행 장면은 달 착륙이 사실임을 매우 강력하게 입증하는 흥미롭고 감격스러운 영상이다. 저거 대수롭지 않아 보여도 지구에서 자연스럽게 만들 수 있는 영상이 아니다.
진공이니 (1) 바퀴가 튀긴 흙먼지조차도 연기를 형성하지 않고 마치 물보라처럼 착착 가라앉는다. (2) 차 속도 대비 흙먼지는 꽤 높고 큼직하게 생기며 지구보다 느린 속도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사람의 동작은 슬로우 모션이 아님.

지구에서 CG 없이 1970년대의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저런 걸 치밀하게 주작할 수 있었을까?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아예 무중력이어서 사람이 둥둥 떠다니는 건 와이어 써서 어설프게나마 만들었겠지만, 흙먼지가 저렇게 천천히 떨어지는 걸 어떻게 구현하겠는가? 훨씬 더 어렵다.

그 월면차들은 지구로 귀환할 때 회수한 게 아니라 전부 달에 버려져 있다..;; (오오~) 아예 월면차에다가 카메라를 장착한 뒤, 인근의 착륙선이 도로 하늘로 올라가는 장면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건 월면차의 투입과 동시에 시도했던 것이지만, 카메라를 지구에서 원격 조종해야 하니 꽤 어려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마지막 17호 때에야 간신히 성공했다. 아폴로 17호 때 촬영한 둥근 지구 사진(아프리카 대륙이 나온)만큼이나 아주 유명한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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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차를 두고 온 대신 아폴로 승무원들은 월석을 더 싣고 왔다. 월석은 지구의 사막이나 극지방에 있는 돌멩이는 물론이고 공기와의 마찰을 경험한 운석과도 성분이 다르고 유니크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3. 도킹과 재진입

달에 처음 갈 때는 어마어마한 지구 중력을 탈출하기 위해 인류가 발명한 가장 대형+고성능 로켓이 투입된다. 이름하여 새턴 V. 얘는 높이가 110미터, 연료 만재 중량이 3000톤에 달하며, 1단 엔진의 출력은 1억 6천만 마력이 넘는다!

지구의 중력뿐만이 아니라 공기의 저항까지 극복하면서 위로 올라가야 하고 하중은 기계선과 착륙선· 연료의 무게까지 전부 감안해야 하니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로켓 한번 쏘는 데는 가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이 든다. 이걸로 달까지 가는데 3~4일 정도 걸린다.

하지만 달 착륙선이 지구로 귀환하기 위해 이륙할 때는 차 떼고 포 떼고 아주 작은 로켓이 발사된다. 일차적으로는 달이 대기가 없고 중력이 작은 덕분이며, 또한 얘는 달을 돌고 있는 사령선이 있는 고도에만 도달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늘로 오르기만 하면 장땡인 게 아니다. 달의 공중에서 착륙선과 사령선이 정확하게 한 지점에서 만나서 도킹 합체하는 게 얼마나 어려울지 상상이 가는가?
착륙선은 처음엔 수직 상승을 하다가 점점 수평으로 속도를 내야 하고, 그렇게 사령선과 상대 속도를 비슷하게 맞췄다가 착 합체를 해야 한다.

비행기로 치면 공중 급유, 혹은 지상으로 치면 말이나 오토바이를 탄 채로 옆에서 달리는 다른 자동차나 열차에 옮겨 타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뭐 하나 삐끗 했다간 끝장이다. 그러니 아폴로 11호 이전 미션들이 달 궤도 진입 및 착륙선 분리와 합체를 차근차근 조심스레 리허설을 해야 했다.

달에서 도킹에 실패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달에 착륙했던 두 승무원은 달을 빠져나가는 데 실패하고 거기서 죽어 버리고, 사령선 선장만 혼자 돌아오는 참극이 벌어진다. 이건 어찌 보면 '깔끔하게 전원 사망'보다도 당사자에게 더 큰 트라우마를 안기지 않겠는가?

그것도 달 표면에 단번에 추락사 같은 부류라면 모르겠는데, 달 표면에 당장 생존은 한 채로 버려진다면 더 골치 아파진다. 그들은 굶어 죽거나, 아니 그 전에 산소가 먼저 고갈될 것이니 천천히 질식사한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청산가리 독약이라도 미리 챙겨 가지 않았다면 말이다. 아니, 이 사람들은 독약은 몰라도 최소한 유서는 미리 써 놓고 달에 갔다 왔지 싶다.

지구에서 이들에게 뭔가 도와 줄 수 있는 건 이제 없다. 그냥 통신을 끊고 미국 대통령은 "평화를 갈망하며 미지의 세계를 찾아갔던 영웅은 이제 그곳에서 평화롭게 영면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도전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유족에게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ㅠㅠ" 이런 담화문이나 발표하고 세계는 그냥 초상집 분위기가 됐을 것이다.
그리고 먼 미래에 남극에서 로버트 스콧의 시신, 에베레스트 산에서 조지 맬러리의 시신을 발견하듯이, 후속 발사된 발사된 유인 또는 무인 달 탐사선이 아폴로 우주선 승무원의 시신을 찾아낸 게 보도되거나 할 것이다.

뭐, 합류를 성공적으로 했다 하더라도, 그 다음으로 공기가 없던 곳에서 있는 곳으로 들어가는 재진입도 묘기가 따로 없다. 속도를 낮춰서 천천히 발사의 역순으로 90도 강하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지만, 재돌입할 때는 우주선에 아무 연료도 남아 있지 않다. 즉, 동력이 없이 지구의 중력에 그대로 끌려 들어오면서,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꼴, 유성 불쏘시개 꼴도 나지 않아야 한다는 게 큰 딜레마이다. 그래서 재돌입이 어렵고 위험하다.

이런 걸 생각하면 인간이 우주로 나간다는 건 정말 유리몸을 가진 캐릭터를 조종하는 아케이드 퍼즐 게임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뭐 하나 잘못되어서 경로를 이탈하거나 트랩을 툭 건드리면 즉사다. 칼날 위로 외줄타기를 하는 거나 다름없다. 게임 오버인데 현실은 게임이 아니다.

이 와중에 그 우주 개발 시대 동안 그래도 지구 바깥에서 사람이 사고로 죽어서 시신이 우주로 유실된 게 없다는 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공중에서 사망 사고가 발생한 것도 다 지구에서 시신이 수습됐으니까.

아폴로 13호의 경우, 지구 중력은 완전히 벗어난 뒤에 달 착륙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문제가 터진 게 정말 기적적인 천만다행이었다. 이미 사령선과 착륙선이 분리되어 달 착륙이 시작됐거나, 아예 지구 중력을 벗어나기도 전이거나, 지구 대기권 재진입 도중이거나.. 뭐 그랬으면 그 당시 귀환을 위해 동원되었던 테크닉의 대부분이 적용 불가능했을 것이고 승무원들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필 13공포증을 극복하긴커녕 오히려 더 증폭시킨 미션이 돼 버린 건 안타까운 일이다)

50년 전의 기계· 전자 기술로 달까지 사람을 보내고 오는 기술을 개발했던 미국, 그리고 그에 준하는 기술을 보유했던 구소련이 정말 대단하고 경이롭게 보인다. 이런 기술과 오늘날의 인터넷· 통신 기술이 세상에 공존하지 않는다는 게 뭔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19 08:30 2016/11/19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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