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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

크리스천이라면 인간의 '탐욕'이라는 심보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특히나 오늘날 같은 자본주의 황금 만능주의 사회에서는 말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covet-ous-ness (동-형-명사)이라는 단어가 주로 쓰이고, lust도 그 자체가 동사도 되고 명사도 되는 단어이다.

살인· 간음보다야 격이 상대적으로 낮아서 종종 간과될 뿐이지, 탐욕도 살인· 간음만큼이나 십계명의 마지막 10째 계명으로 당당히 등재되어 있는 금기 사항이다.
아니, 저걸 충족하기 위해서 살인(6)· 간음(7)· 도둑질(8)이 저질러지며, 그걸 합법의 이름으로 위장하거나 은폐하기 위해 거짓 증언(9)이 저질러지는 게 태반이니, 알고 보면 탐욕은 정말 무시무시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잠시 첨언하자면, 본인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저지르는 무수한 죄들이 죄라는 n차원의 벡터 공간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여러 점· 선· 면이라고 했을 때, 십계명의 각 계명이 커버하는(금지/정죄하는) 영역은 그 벡터 공간의 기저 벡터들이 아닐까?
물론 기저 벡터이니 각 계명들은 벡터 공간 안에서 서로 선형적으로 독립(linearly independent)일 것이다.

아놔 갑자기 웬 선형대수학 드립이냐.. 어쨌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마치 삼원색의 각 색을 여타 색깔의 혼합으로 얻을 수 없듯이, 탐욕은 여타 다른 죄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원천이라는 것.
살인과 도둑질은 몸으로 짓는 죄요, 간음은 몸'에다' 짓는 죄요, 거짓 증언은 입으로 짓는 죄라면,1) 탐욕은 마음만으로 지을 수 있는 죄이다.
그럼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자.

성경은 구약 율법 시절에서부터 지도자의 요건으로 탐욕을 미워하는 성품을 제시하고 있으며(출 18:2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고기 드립 범죄 역시 그 원인이 탐욕이었다고 거듭해서 말한다(민 11:4, 시 106:14). 아간은 또 어땠던가(수 7:21)?
성경 66권을 통틀어 최악의 양다리 회색분자요 잔머리 굴리기의 달인으로 기록된 발람을 보라. 성경은 그도 탐욕이 문제였다고 지적하면서 신약에서까지 그를 두고두고 깐다(벧후 2:15, 유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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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도 이런 사람은 '싫은 녀석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출처는 개그 만화 일화 종말편.

이 탐욕 앞에서는 그 대인배인 사도 바울마저 GG를 쳤다! (롬 7:7) 이거 내가 보기엔 꽤 심각한 사실이다. 자기는 지금까지 어지간한 기독교인들보다 의롭고 선하게 살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며 예수 따윈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하지만 탐욕이 출동하면 어떨까? ㄲㄲㄲㄲ 타! 암! 욕!

그렇게도 육신의 스펙이 완벽한 엄친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의가 충분했다고 생각한 바울도, 그 계명으로 인해 고꾸라지고 자신이 죄인임을 인지한 것이다.
뒤이어 유명한 골 3:5는 탐욕이 우상숭배와 같다고 선언하며, 딤전 6:10은 돈을 사랑함이 그야말로 모든 악의 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세상이 원수지간(약 4:4)이며 세상에 태양이 둘일 수 없는 것만큼이나,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도 없다(마 6:24, 눅 16:13).

한국의 일부 몰지각한 '교인'들이, 돌부처 앞에서 절하고 조상신 숭배하는 사람들을 우습게 여기고 각종 무례한 짓(병크라고 부르는-_-)을 저질러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난 그 친구들이 지능안티가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쉴드를 치고 싶다만, 뭐 지능안티가 아니라 해도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러는 당신도 하나님을 들러리 삼아서 돈님을 더 섬기고, 예수 믿어서 삼박자 축복 받고 팔자 펴고 예수 이름으로 주식 대박이나 나고 로또가 당첨되고 벼락부자 되길 바라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 상태도 그런 돌부처 섬기는 미개한(?) 부류들과 똑같다. 동일한 목적인데 추구하는 방법만 다를 뿐, 극과 극은 통한다! 이것이 성경의 판결이다. 아시겠는가?

남과 비교하면서 나도 더 열심히 살고 분발해야겠다고 단순히 긍정적으로 다짐하는 걸 넘어...!
자신의 정당한 수입에 만족하지 못하며 자기 신세 비관하고, 남이 잘 되는 걸 배아파하고 그게 미움으로까지 발전하는 것은 탐욕이며 죄악이다.
엄친아· 엄친딸이라는 말 자체가 그런 심보가 어떤 형태로든 반영된 말이다. (왜 그런지 생각해 보라)

“누구누구는 강남에 번듯한 아파트 장만했는데 우리는 아직도 월세야, ㅆㅂ” 라고 한탄하는가?
당신은 '너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를 정확히 위반했다. 근거는 출 20:17을 찾아보면 다 나온다.
“누구누구는 30대 나이에 벌써 그랜저 뽑았는데 우리는 아직도 마티즈야” 하면서 부럽고 갖고 싶고 배가 아픈가?
약간 transform을 하자면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네 이웃의 소유 중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저촉이다.
자기도 유부남인데 친구나 친인척의 배우자가 너무 예뻐 보이고 같이 자고 싶은가? 이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내가 보기엔 요즘 TV 광고, 인터넷이 전-_-부 저걸 조장하고 있다. 그러나 칼 들고 강도짓 하는 걸 금지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은 저런 것도 금지하신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교과서적으로 훈계조로 “그러니 넌 무조건 닥치고 꾹 참고, 욕심이라곤 부릴 생각도 하지 마”로만 결론을 낼 거라면 내가 이런 글을 길게 쓸 필요도 없었을 터이니, 이제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 보자.

어디까지가 인간의 정당한 욕구 충족이며 어디부터가 죄악인 걸까?
탐욕을 부리는 사람들도 일부 아주 완전 막장 인생이 아닌 이상, 자기도 욕심 부리고 싶어서 부리는 건 아니다.
이렇게 안 하면 이 험악한 세상에 눈 뜬 채로 코 베이고 바보 신세 되고, 뒤쳐지고 도태하는 것 같으니까 치열하게(?) 산다.

게다가 사실 알고 보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자식 먹여 살리고 자식을 잘 되게 해 주려고 나쁜짓 하는 사람도 많다. 성경에도 마 7:11과 눅 11:11-13에서 이런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듯이 말이다.
이런 케이스들 때문에, 직업 종교인들은 사리사욕을 안 품으려면 아무래도 가정을 아예 안 꾸리고 평생 동정-_-으로 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천주교나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까지 있다. 음, 그럼 사랑의 열매를 허락해 준 하나님이 나빴던 것이군. -_-

인간이 말세에 자동차와 컴퓨터 같은 눈부신 기계 문명의 혜택을 입으면서 나타나고 있는 분명한 추세가 있다. 인간의 심성 내지 양심을 이젠 도저히 믿을 수 없고(그러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다), 그 대신 눈에 보이고 분명하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 위주로 사회 구조가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반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과 심성은 눈에 절대 보이지 않고 측정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는가?

우리나라 교육 제도의 본질적인 문제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 아무리 제도를 개혁해도 입시 병폐는 없어질 수가 없으며, 이렇게 땅 좁고 주변 강대국들 사이에 낀 콩라인인 우리나라가 안정적으로 돌아가려면, 그런 형태로라도 애들 교육을 빡세게 안 시킬 수가 없다. 정말 측정해야 하는 걸 인간의 기술로 측정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시장 경제와 자유 경쟁 구조에서 그나마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이고 믿을 만한 건 돈뿐이니, 영적 조명이 없이는 세상은 결국 황금 만능주의와 양극화로 당연히 치달을 수밖에 없다. 그게 효율적이니까. 고삐 풀린 탐욕은 바이러스의 효과적인 매개체이다. 욕 얻어먹어도, 남들도 다 똑같이 하는데 나도 안 하면 나만 바보 되니까 어쩔 수 없다.

이제 세상은 적당히 먹고 살 만하게 지내는 중산층이라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잠 30:8의 기도 제목이 얼마나 절실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의식주' 중에 주(집!)조차도 빠진 채, “생명이 붙어 있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걸로 만족하라”는 성경 말씀은 너무나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이고 지킬 수 없는 명령인 것 같아 보인다. (딤전 6:8)

누구는 손 하나 안 더럽히고 돈으로 돈을 벌고 지내는 반면, 평생 뼈빠지게 일하고도 가난을 못 벗어날 것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가난 구제는 나랏님이라도 못 한다”란 속담은 신 15:11로부터 미뤄 봤을 때 굉장히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 명언이다.3)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이삭 줍기 같은 복지 제도는, 부자들의 자발적인 기부를 독려함과 동시에 수혜자도 직접 나가서 활동을 함으로써 생존할 만큼만 식량을 모으는 등, 여러가지 바람직한 면모를 갖추고 있긴 한데... 지금은 그조차도 시행하지 못할 정도로 인간이 악해졌으니 문제이다.

다만, 세상이 이렇게 불공평한 구조라고 해서 그 대안이, 정부에서 부자들 재산을 강제로 빼앗아서 나눠 주는 것이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교도소 인권이 아무리 좋아지더라도 “어차피 할일도 없는데 사고 한번 치고 빵에나 갔다 와야지”가 될 정도로 좋아져서는 안 되고, 복지 제도가 아무리 좋아져도 신체 멀쩡한 인간이 “연금만 받으면 되니 이제 일할 필요가 없네”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그건 정말 망조가 단단히 든 미친 사회이다.

자본주의의 온갖 병폐를 만든 것도 탐욕이지만, 사악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계를 만든 것도 탐욕이다. 난 개인적으로 그런 식으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부추기는 복지 포퓰리즘을 혐오 수준으로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나라를 무슨 유럽의 복지 국가들과 비교하면서 이상하게 열등감과 피해의식 조장하는 글 내지 통계도 싫어한다. 자세한 이유는 이 자리에선 언급을 생략함.

이제 슬슬 글을 맺겠다.
지금 전세계 국가들이 경제가 어렵다고 하고, 특히 막대한 빚에 허덕이고 있다. 세계 패권 국가인 미국조차도 빚이 억소리 나는 수준이라고 하니, 이 세상에 그럼 도대체 진짜 채권자는 누구인지 궁금하다. 극소수 석유· 에너지 재벌? 돈놀이를 세계적으로 잘 하는 은행? 도대체 누굴까?

결혼을 위해 집을 마련해야 한다거나, 누가 갑자기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 어지간하면 없으면 그냥 없는 대로 분수껏 살고 싶은데 이 세상의 신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다가 돈 돌아가는 통로 어디선가 지뢰가 빵! 터지기라도 하면, 전세계 경제가 가까운 미래에 수습 불가능의 막장 패닉으로 빠지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성경을 통해, 인간의 탐욕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해 보았으나, 그 처방은 영적 전투를 야기하며 결국은 역시 개인의 믿음과 영적 상태에 달려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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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다고 탐욕이라는 번뇌가 극복되는 건, 만화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고.. ㄲㄲㄲㄲㄲ

Notes:

1) 성경은 당연히 거짓말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며 사탄 마귀가 거짓의 아비(요 8:44)라고 말한다.
하지만 십계명의 제9계명은 쉽게 말해, 돈이나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곳에서 부당한 이익을 위해 거짓말--특히 법정에서 위증--을 하지 말라는 문맥이다. 일체의 거짓말을 무조건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가령, 좋아하는 여자를 꼬시려고-_-, 데이트 분위기를 매끄럽게 유지하려고 당장 마음에 없는 말을 좀 한 걸 갖고 나중에 하나님이 “너 임마, 그때 왜 거짓말 했어?” 라고 책망을 설마 하시겠는가?
성경의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기계적이고 융통성 없고 deterministic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ㄲㄲ

뭐 그렇다고 해서 모든 white lie가 성경적으로 다 바람직하기만 한 건 또 아닌데.. 대표적인 예로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알려 주는 게 좋겠냐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열하자면 글이 또 길어지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쓰자.

2) 발람의 길, 발람의 잘못이라는 불명예스러운 타이틀까지.

3) 천년왕국은 절대로 공산주의의 이상향처럼 운영되지 않는다. 예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동안에도 사유 재산 제도는 건재하며, 가난한 사람과 빈부 격차는 존재한다! 사유 재산은 마치 부부간의 사생활만큼이나, 그리고 보호 모드 운영체제에서 각 프로세스의 메모리 공간만큼이나 철저하게 개인별로 보장된다.
구약 성경에 '네 포도원', '네 우물'에서 잘 먹고 잘 산다는 말이 얼마나 많이 나오던가.

Posted by 사무엘

2011/11/10 19:21 2011/11/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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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함수와 회전 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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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그림이 고등학교 수학 II에서 배우는 진정한 묘미 중 하나입니다.

(0, 0), (x, 0), (0, y)의 직각삼각형을 원점을 축으로 θ만큼 돌리니까 원점은 그대로고 밑변은 (x cosθ, x sinθ)가 됩니다.
그런데 밑변보다 y만치 위로 떠 있던 점은, 회전 과정에서 가로로는 높이 y의 sin값만치 “감소”(왼쪽으로)하고, 세로로는 cos값만치 증가합니다.

그러니 (x cosθ - y sinθ, x sinθ + y cosθ)의 형태가 되는데, 이는 원래 점인 x, y에 대한 일차변환으로 일반화할 수 있습니다. 결국

(cosθ, -sinθ)
(sinθ,  cosθ)


가 됩니다. “꼬마신 신꼬”라고 외우는 그 유명한 회전변환 행렬입니다.
이걸 모르면 특히 컴퓨터그래픽에서 현란한 벡터 조작이나 3차원 그래픽 같은 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행렬식의 값은 1 (임의의 각도의 cos 제곱과 sin 제곱의 합은?), 따라서 이렇게 도형을 일차변환 시키더라도 원래 도형의 넓이를 바꾸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역행렬은 sin 쪽 부호만 맞바꾸면 됩니다. 기하학적으로, 상식적으로, 역행렬 공식에 맞춰 생각해도 전부 명확합니다.

공통수학에서는 삼각함수란 게 있다는 것, 그리고 한 삼각형의 세 변과 세 각이 주어졌을 때 삼각함수가 이런 특성을 갖는다는 것을 배웁니다. 기하학인지 대수학인지 감을 못 잡는 이 괴상한 함수는 흥미보다는 학생들에게 어마어마한 암기를 강요하면서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수학 II로 오면서 단순히 삼각형과 관련된 것이 아닌 삼각함수 자체의 특성을 더 깊게 공부하게 됩니다. 이 회전행렬은 삼각함수의 덧셈 정리를 유도시킵니다.
특히, 저 행렬에다가 회전 행렬과 같은 각인 (cosθ, sinθ) 열벡터를 뒤에 곱해 주면 cosθ와 sinθ 값으로부터 cos 2θ, sin 2θ의 값을 얻을 수 있게 되고, 그 값으로는 아예 cos²θ, sin²θ의 값도 구할 수 있게 됩니다.

  cos 2θ = cos²θ - sin²θ,  cos²θ = (cos 2θ + 1)/2
  sin 2θ = 2 cosθ sinθ

공을 공중을 향해 몇 도로 던져야 가장 멀리 날아가는지를 삼각함수를 계수로 하는 이차방정식으로 풀어 보면, 결국 cosθ sinθ 값(곱)을 최대로 하는 θ 값을 구하는 문제로 귀착됩니다. 이는 sin 2θ의 값을 최대화하는 것과 같으므로 θ는 45도임이 명확해집니다.

sin과는 달리 cos은 양 함수의 제곱의 합으로 바뀐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2θ보다 더 일반적인 α와 β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더욱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데요, 덧셈 대신 두 각의 차이를 나타내는 뺄셈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cos(α-β) = cosα cosβ + sinα sinβ
  sin(α-β) = sinα cosβ - cosα sinβ

cos을 보면 이는 정확하게 벡터 내적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x, y 성분인 벡터를 거리와 각도로 바꿔서 표현해 보면, Ax·Bx + Ay·By가 왜 |A||B| cosθ인지가 명확해집니다. 공통수학 때 배운 코사인 제 2법칙과도 이미 관련이 있고요.
cos은 90도일 때 0이 되기 때문에 두 벡터가 기하학적으로 직각인지 판단할 때 유용히 쓰일 수 있습니다. 부호가 갈리는 기점이 직각이죠. 시계에서 3시를 향하고 있는 벡터가 있다면, 5시나 1시를 향하는 벡터와는 양수이고, 7시나 11시 벡터와는 음수가 되는 셈입니다.

그럼 sin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요? sin은 90도가 아닌 0도를 기점으로 부호가 바뀝니다. 3시를 향하는 벡터 기준으로 5시나 7시를 향하는 벡터의 부호가 서로 같고, 1시, 11시 벡터와는 서로 다릅니다.
정보 올림피아드 대비하여 기하 알고리즘 공부할 때, 특히 convex hull 같은 거 구할 때 단골로 등장하는 게 세 점이 시계 방향인지 반시계 방향인지 판단하는 공식인데요, 그게 바로 sin과 관련이 있습니다. Bx·Ay - By·Ax입니다. 이 식은 두 벡터가 일직선상에 있을 때 값이 0이 됩니다.

그러나 cos 계열인 벡터의 내적은 sin과는 달리 3차원 이상에서도 일관되게 구하는 공식이 있고 임의의 차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계 방향 여부는 2차원 평면에서만 의미를 가지며, sin과 관련이 있는 벡터의 외적 역시 3차원 공간에서만 정의됩니다.

이렇게 한바탕 수학 II 초· 중반에서 홍역을 치른 삼각함수는 나중에 아예 sin(x)/x의 0 극한을 구하고 삼각함수를 미· 적분함으로써 더욱 해석학적으로 접근하게 됩니다. 고등학교 수학 교육 테크트리에서 맨 마지막으로 지어지는 최고급 건물 내지 유닛은 단연 미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1/11/02 19:31 2011/11/0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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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下

첫째, 하나님은 죄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자비심이 없다. 지옥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정서가 좀 이상하고 사법 체계도 그런 관행에 맞춰져 있는 것 같다. 나쁜짓을 저질러도 가해자 역시 죽었다거나, 술 취해서 실수한 것이라거나, 우울증 때문이라거나, 뭐 이런저런 사정이 있으면 굉장히 동정· 미화와 정상 참작을 잘 한다. 싸움을 중재하는데 누가 먼저 시비를 걸었으며 시빗거리가 정당한 것인지를 보는 게 아니라 누구 처지가 더 딱한지, 그리고 결과적으로 누가 더 많이 얻어맞고 다쳤는지를 더 감안하는 식이라고나 할까? (그냥 눈에 보이는 결과로, 객관적인 증거 확보가 용이한 쪽으로만. -_-)

하나님은 이런 사고방식을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지옥엔 히틀러, 유 영철 같은 사람뿐만 아니라 너무 착해서 구원도 못 받은 사람도 많고, 비참하게 살다 불쌍하게 죽은 사람도 엄청 많이 가 있다! 이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죄는 철저히 미워하고 회개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로 인해 민망해하고 가슴 아파하고 죄의 결과를 수습하고 그 대가를 기꺼이 치러야 한다. 죄를 무슨 치유 받아야 할 질병인 것처럼 여기고 동정하는 것, 죄 지어서 당연하게 받은 벌을 무슨 의인이 받는 시련과 영적 전쟁처럼 미화하는 것, 그 사람도 잘못된 사회 시스템의 피해자일 뿐이라고 감싸는 것...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의 성품과 복음에 대해 아주 잘못된 인식을 심어 놓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종교의 탈을 쓰고 부추기는 위선자들에게 절대 속지 말아야 한다. 용공 사상만 불온 사상이 아니다.

둘째, 하나님은 진심어린 회개에는 무한 관대하다.

제아무리 인간의 죄가 무겁고 심각하다 한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명예 살인이란 건 없다. 자해나 자결로 명예를 회복하는 행위를 결코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것이 일본과 서양 문화권 사이에 죽음에 대한 인식을 서로 극과 극으로 갈라 놓기도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 때문에 진짜로 죽어야 할 때에도 동물을 대신 죽게 하셨다가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 하나님의 보혈이 대가로 치러졌는데 그 무슨 죄인들 회개하면 사해지지 않겠으며, 과거에 어떤 나쁜짓을 한 사람이라도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는가? 죄에 대한 찔림부터 있은 후에 그 상처를 아물게 해 줄 복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법칙이다. 예수님은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는 성도를 결코 거절하지 않으신다. "넌 그리스도인이 될 자격도 없다. 너처럼 우리 교회를 배반하고 내 명예에 먹칠을 한 녀석은, 부끄러운 줄 알면 나가서 곱게 할복해라" 그러시지 않는다!

셋째, 박해 상황만 아니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와 대체로 모순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양심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양심도 믿음도 필요하지 않은 '시스템'이라는 것을 과학 기술의 힘을 빌려 발달시키려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것엔 별 관심이 없다. 크리스천은 불신자가 언뜻 보기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을 믿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 말도 안 되고 보편적인 이성과 양심에 위배되는 사항을 믿는 게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의 모습은 불신자에게 어떤 형태로 비쳐져야겠는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사람에게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는 게 당연하다고 성경은 증언한다. 그래서 성경엔 굳이 야고보서 말씀을 차치하고라도 요 13:35, 요일 4:11-12 같은 준엄한 구절이 있다. 하나님께 예물을 바치기 전에 사람하고부터 먼저 화해하라고 말한다(마 5:23). 하나님 따로 사람 따로가 절대 아니다. 대인 관계와 대신(對神) 관계는 별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께 고백하더라도, 죄의 결과로 인해 야기된 잘못과 허물은 사람 간에 서로 고백하라고 성경이 명령한 것이다. (약 5:16)

- 하나님께 자백(소스 코드 차원에서): 돈을 사랑했다,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사람으로부터의 칭찬을 구했다,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다, 결과적으로 이 모든 죄는 결국, 선하신 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지 않고 그분 말씀을 믿지 않은 잘못된 마음 상태에서 비롯됐다 등등..

- 사람에게 자백(실행 결과 차원에서): 오늘도 내 성질대로 욱하고 말았는데 이건 내 잘못이다. 미안하다, 내가 좀더 당신 입장에서 생각을 못 했다, 이 사고는 내가 잘못된 지시를 내려서 일어난 것이다, 내가 뭘 제대로 안 해서 그렇다, 내가 몰래 슬쩍 했다 등등...

명확하지 않은가? 그 후 회개의 열매는 당연히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음을 완전 정반대로 돌이키고, 과거의 잘못을 적극적으로 수습하는 것이다. 성령님이 임재하고 죄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진 사람이라면, 저렇게 안 하는 게 비정상이다.

남이 받아들이든 말든 내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면 사과하고, 처벌을 감수하고, 필요하다면 물질적인 배상도 하고...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그럼 평생 나쁜 짓 해 놓고서 주둥이로 예수 믿고 회개만 달랑 하면 천당 가냐?” 뭐 이런 식의 비아냥거림이 나올 일이 없게 하나님은 다 배려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불신자에게라도 그런 식의 실족거리를 만들지는 않는다.

죄를 마음껏 지을 수 있던 상황에서는 온갖 나쁜 짓 다 하다가, 죄가 탄로나고 경찰에 검거된 뒤에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 싹 씻듯이, 잘못을 일단 인정하는 게 전략상으로 더 나으니까 '죄송~' 이러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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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것 말이다. ㄲㄲㄲㄲㄲㄲㄲ 개그 만화 일화 3기 4화 요가 교실 편 -_-;; 비둘기의 포즈로 사과드리겠습니다.

또한, 몇 년 전엔 우리나라에서 어느 사형수가 그저 죄책감과 불안에 사로잡혀서 안절부절 못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마치 가룟 유다의 도피성 자살을 연상케 하는 이런 행위도 회개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며, 동정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냥 속 시원하게 사형 집행 해 주는 게 당사자와 국가와 국민 모두를 위해서 훨씬 나을 텐데!

본인은 보지는 않았지만, 수 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도 복음을 왜곡하는 여러 스토리 중, 이런 장면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저 놈(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 안 했는데 어떻게 신이 먼저 용서를 할 수 있어?” 정말 가슴아프기 그지없는 장면이다. 이 글의 서론에서 언급한 저 두 사람은 “피해자 여러분께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가 있길 원합니다” 같은 말이 입에 발린 위선으로 비치지 않도록, 더는 실족거리를 만들지 않도록, 어느 사역자보다도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자기를 희생하여 회개의 열매를 보여야 할 것이다.

끝으로, 성경에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구원과는 완전 별개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개념이 있음을 첨언하고 글을 맺겠다. (요일 5:16-17) 이 사망이란 하나님께서 도저히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성도를 극단적으로 데려가시는 경우라든가 사회의 형벌을 의미할 수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연쇄 살인 흉악범이 회개하여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그는 구원 받은 사형수이다.
기독교 만화 전도지를 보면, 안티들이 그렇게도 조롱하듯이 흉악범이 감옥에서 예수 믿어서 사형 당한 뒤 천당 가고, 그 반면 자기 의에 가득차서 예수님을 거부한 형사 내지 교도관은 죽어서 지옥 가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심지어 더 극단적으로 가자면, 그 흉악범에게 살해 당한 피해자는 지옥 가고 가해자는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 것마저도 가능하다. 교리적으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단 하나 최후의 보루. 성경은 사형수에게도 인격이 있네 같은 인권 드립-_-이나 치면서 주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사형 제도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는다! 구원받아서 천당 가더라도, 사형은 당하고서 그 뒤에 간다. 이것이 기독교 교리의 논리 체계이다. 지금도 사형 반대 외치면서 피해자 유족들의 가슴에 두 번 못을 박는 위선적인 종교인들 역시,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다시 공부하면서 자기의 오류에 대해 깊이 회개와 반성을 해야 할 것이다.

CASE STUDY:

1980년엔 5공 시절을 떠들썩하게 한 이 윤상 군 유괴 살해 사건이 있었다.
원조 교제로 여고생을 임신시키기도 하고 도박빚에 시달리기도 하던 어느 불량한 체육 교사가,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하던 제자인 이 군을 납치하여 인질극을 벌이려 했는데, 가혹한 환경에서 감금당해 있던 이 군이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다.

이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이 군이 수 개월째 행방불명이고 수사가 벌어지던 동안엔 전통이 이 군의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부모를 위로하고, “유괴범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를 살려 주면 당신도 살고(정상 참작-_-), 아이를 죽이면 당신도 죽는다”고 이례적으로 전두환스럽게 강경한 대국민 담화를 손수 발표할 정도였다.

범인은 결국 잡혔고, 전통은 약속을 지켰다. 살해범인 주 영형이 수차례 항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1982년에 사형이 확정되었으며 1983년, 서울 구치소에서 교수형을 당함으로써 세상을 떠났다.
제아무리 29만원, 빛나리, 전통이라 해도, 저 순간만큼은 정말 사회 정의를 실현해 냈다. 멋있다. -_-;;;

돈 때문에 제자를 유괴· 살해한 천하의 개쌍놈인 주 영형도 옥중에서 기독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순간에 이 군과 그의 유족에게 사죄하는 말을 남겼으며, 나름 두 눈과 콩팥을 기증하고 죽었다. 오늘날도 사회 구조가 최소한 이런 결말이라도 만들 수 있는 형태라면 유가족들에게 그나마 덜 억울할 텐데!

Posted by 사무엘

2011/10/31 08:41 2011/10/31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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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上

우리나라에는, 전국민이 알 정도로 시끄러운 사고를 쳐서 20세기에 교도소에 갔다가, 출소 후 기독교에 귀의하여 21세기의 여생을 이 분야의 사역에 바치겠다고 공언한 사람이 최소한 둘 있다. 이들의 발언은 매스컴에도 보도되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누군가 하면......;;
하나는 삼풍 백화점 사장이던 이 한상 씨이다(회장이던 이 준 씨의 아들). 몽골 선교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잘 알다시피 고문 기술자라는 말을 만들어 내며 한때 악명을 떨쳤던 이 근안 씨이다. 요 몇 년 전에 아예 목사 안수를 받았다.

대한민국 국민에게 그야말로 저주의 이름으로 전락한 삼풍 백화점!
당시 경영진은 돈에 눈이 먼 나머지, 전세계의 건축 전문가들을 경악케 한 전대미문의 비리와 편법을 동원하여 백화점 건물을 혹사시켰다. 그러다 결국 1995년 6월, 거대한 백화점 한 동을 지진이나 외부 폭격도 없이 제 발로 와르르 무너뜨리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렸다. 4층 기준으로 설계된 건물을 5층으로 무단 증축하고, 미관을 위해 기둥 수를 줄이고 있던 기둥도 굵기를 줄이고, 윗층에는 무거운 온돌을 얹고, 옥상에는 규정 하중의 몇 배나 더 무거운 에어컨까지 얹고... 전문가들은 그 상태로 건물이 어떻게 6년씩이나 버텼는지를 더 신기해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의 죄질이 더욱 나쁜 이유는, 건물이 붕괴할 걸 알고도 자기네만 쏙 피하고 영업은 계속 강행시켰다는 점 때문이다. 귀중품을 지하로 옮기고 고위 임원들은 미리 대피하고서 말이다. 이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 패닉 상태에 빠져서 자기 혼자 마스터 키를 빼들고 전동차를 탈출해서 달아나 버린 기관사와는 차원이 다른 악행이다.

이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던 1천 명이 넘는 종업원과 쇼핑객은 건물과 함께 그대로 폭삭..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불과 8개월 남짓 만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로 평시에 최다 사상자를 낸 최악의 참사를 일으키고 국제 망신까지 초래했다.

한편, 이 근안의 과거 행적도 충격과 공포이다. 심문 전에 기선 제압용으로 한주먹으로 사과를 으스러뜨리는 퍼포먼스부터 시작해 물 고문, 전기 고문, 통닭 고문, 잠 안 재우기 등등.. 말이야 쉽지 당해 보면 정말 차라리 죽여 달라는 말밖에 안 나온다. 그는 말했다. “내가 손대기만 하면 누구라도 불게 돼 있어.”

고문 출장까지 갔던 그가 돌연히 목회를 선택한 것은 단순히 흉악범이 회개하여 목사가 된 것과는 다른 차원이며, 왕년에 크리스천들을 핍박하던 바울이 회심한 것과도 성격이 다르다.

고문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반인권적이고 사악한 행위이다. 성경의 그 엄한 구약 율법조차 사형은 백 번 인정할지언정, 고문은 절대 없다.
다만, 이 근안을 까는 글은 인터넷에 이미 널리고 널렸으니 본인은 for the sake of completeness 차원에서, 일부러 좀 다른 관점에서 논리를 잠시 펴도록 하겠다. 오죽했으면 인류 역사에 고문이란 게 존재했을지도 잠시 생각해 보자.

뻔히 드러나 있는 혐의를 일단 부인부터 하고, 아무 죄책감도 없이 거짓말로 태연하게 잡아떼기만 하던--그래 봤자, 밑져야 본전이므로-- 인면수심 흉악범 김 길태를 보고 열불이 안 났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을까? 고문이란 저런 신발샛길을 위해 존재하는 거라는 게 본인의 육신적인 심정이었다. -_-;;

그리고 2006년 이래로 결국 미제 사건으로 남은 전북 대학교 이 윤희 씨 실종 사건을 기억하는가? 딸을 잃은 아버지는, 강력한 용의자이자--그러나 무능한 수사로 말미암아 증거 확보와 유죄 입증엔 실패-- 딸의 스토커이던 뻔뻔한 남학생으로 하여금 읽으라고 쓴 공개 성명서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이 사건을 맡은 수사관이라면 누구라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이 정도 사건은, 30년 전만 해도 물고문에 고춧가루 한방이면 일도 아니었을 거라고 말이다. 네놈 선배들이 피땀 흘려 이뤄낸 민주화의 열매를 네놈 같은 녀석이 악용하는 게 통탄스럽다.” (☞ 원문이 있는 곳 클릭)

요즘 같은 첨단 과학 수사 기법과 심리 프로파일링 같은 기술도 없던 시절에 흉악 범죄에 맞서서 치안은 유지해야겠고, 특히 우리나라 같은 경우 정말 누가 누군지 모르는 간첩 불순분자도 우글거리던 시절,
비열하고 부작용의 우려도 만만찮으나 저비용으로 성과를 제일 간단하게 내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외면할 수 있었겠냐 말이다.

고문을 옹호나 정당화할 의도는 절대 없으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단지 전국민의 지탄을 받고 있는 그의 과거 행적이 그저 아무 이유 없이 하늘에서 그저 뚝 떨어진 건 아니라는 걸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더 잃을 게 없으니 배째라 하는 악질을 다스리는 제일 쉬운 방법은, 그 녀석들에게도 “더 잃을 게 있다는 걸” 일깨우고 공포에 빠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다스리기 위해 인간이 이열치열로 만들어 낸 차선책 중 하나가 고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이렇게 서로 다른 분야에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두 사람은 동일하게 징역 7년이라는 죄값을 치렀다. 가정 전체가 풍비박산 났고 가족들까지 밖에 얼굴을 들고 다니질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 한상의 집안은 피해자 배상금 명목으로 전재산을 압류 당했으며, 이 근안의 자녀 중엔 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지자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다 못해 직장을 그만두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몽골로 떠난 후 언론으로부터 수 년째 별다른 소식 없이 잠적해 있는 이 한상과는 달리, 이 근안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도 언론 인터뷰에도 적극 응하면서 국내에서 활동 중인 것 같다. 그런데 발언의 수위가 다소 우려스럽다.

그래, 만에 하나 그는 왕년에 정말로 국가 명령에만 충성한 사람일 수 있으며, 고문도 상부 기관의 명령 내지 묵인하에 실적 쌓으려고, 처자식 먹여 살리려고 수행한 것일 수도 있다. 무고한 사람 잡은 것보다는 그래도 진짜 흉악범이나 간첩을 잡은 공이 더 클 수도 있다. 나라가 망하기라도 한 것도 아닌데, 당대 상황을 감안하지도 않고 어제의 충신이 무작정 오늘의 역적으로 뒤죽박죽 평가 잣대가 바뀌는 언론 플레이도 본인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말은 목사 타이틀을 갓 얻은 그의 지금 처지에서 할 말이 아니다. 그런 변명은 그가 회개의 열매부터 충분히 보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이 근안 목사에게서 그리스도를 발견한 주변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옹호하는 발언을 자발적으로 한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직도 그로 인해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린 사람, 파탄 난 가정이 즐비한 현 시국에서 그의 자기방어 변명성 발언은 더욱 많은 사람을 실족시키고 복음을 비방할 빌미만을 불신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 죄와 벌, 회개 같은 것은 민감한 주제이다. 성경이 매우 중요하게 다루며 오늘날 사람들이 반드시 정확하게 갖추고 있어야 하는 개념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이라든가 복음에 대해 요즘 나돌고 있는 무수한 오해들도 불식시킬 수 있으며, 불신자에게 복음을 정확하게 전한다든가 교회 내부에서 죄로 인해 간증을 잃은 사람을 다루는 과정도 원만하게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저 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저런 개념을 재정립을 한 번쯤 할 필요를 느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기독교는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종교 중 하나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굳이 종교라고 풀이하자면,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을 죄 때문이라고 규정하며, 그 죄를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좀더 구체적으로는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으로 해결하고 내세의 구원까지 얻으라고 가르치는 종교이다.

그 교리는 인간의 머리로 만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래서 자연인들 보기에는 완전 황당무계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 믿음으로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그거야말로 인간의 지혜와 시스템을 초월하는 기독교의 본질이기 때문에, 그 교리로 인해 복음이 초기에 비방 받고 조롱 받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당연한 귀결이다. 성경은 그것 자체만으로 두려워하거나 쫄 필요는 절대 없다고 거듭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주신 간증도 무수히 많으며, 그 어리석음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역설적으로 드러나는 게 바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원칙은 변함이 없다. (下에서 계속)

Posted by 사무엘

2011/10/29 08:40 2011/10/29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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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찬송 몇 곡

Wonderful Grace of Jes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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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이렇게 선율이 아름다운 찬양도 있구나!’ 생각이 곧장 들어서 자료를 검색해 봤다.
작사· 작곡자는 Haldor Lillenas. 사실 그는 20세기 초의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평생 수천 편의 찬송시를 지은 굉장히 유명한 분이며, 저 Wonderful Grace of Jesus는 그의 작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가장 유명한 곡이라고 한다. 그럼 그렇지..;; 왜 우리나라의 통일 찬송가에 수록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참고로 저 곡이 발표된 때는 1918년. 유럽에서는 독가스와 탱크가 첫 등장한 1차 세계 대전이 끝나 가고, 우리나라는 일제의 무단 통치 하에서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이 곡을 모르는 분이라면 한번 들어 보기 바란다. 후렴을 돌림노래 비슷하게 편성한 것도 그렇고, 너무 우아하고 멋있지 않나..?
증오심으로 가득한 “개미를 죽입시다 개미는 나의 원수” 짤과는 정반대로, 구원받아서 진심으로 기쁘다는 감격이 느껴진다.
곡 전체를 통틀어 당김음 하나 없는데도 전혀 단조롭지 않다.

Sing On, Ye Joyful Pilgr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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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ful Grace of Jesus에 필적하는 미려한 선율을 자랑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참 즐거운 노래를>로 잘 알려져 있다. 이것도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라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불멸의 명작이지 않던가.

한국어 가사도 아름답지만, 영어 원문 가사는 크리스천이 이 세상에서 떠돌되 방랑자가 아닌 순례자의 삶을 살고 있다는 심상이 더욱 잘 드러나 있다.
그 곡의 작사자는 Carrie M. Wilson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이는 필명일 뿐, 그 이름도 유명한 Fanny J. Crosby 여사의 작품이라는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Meekness and Maje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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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소개한 세 곡보다는 훨씬 더 나중에 발표되었고 어찌 보면 CCM에 가깝다.
영국의 그 유명한 Graham Kendrick의 곡으로, 저분 하면 <비추소서>(Shine, Jesus, shine), <God Is Good>, <Heaven Is In My Heart> 등이 바로 떠오를 것이다.
좀 더 매니악한 분이라면, 주찬양 선교단 8집 <Hosanna! 이 땅을 고치소서>의 타이틀곡의 뒷부분에 이어지는 <Lord Have Mercy On Us>가 저분의 곡이라는 것도 아실 테고.

허나, 본인은 Meekness and Majesty을 그분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도 단연 일품으로 친다.
예수님을 너무 사실적이고도 서정적으로 잘 묘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rhyme을 봐라. -ty, -ce, -le 등을 포함해서 단어 선택을 정말 절묘하게 했다.
화음도 특히 후렴 부분은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 느낌을 잘 살리려면 꽤 어려운 chord를 넣어서 연주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1/10/23 19:21 2011/10/2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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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교리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원색적인 문구에 잘 요약되어 있듯, 뭐니뭐니해도 내세관이 아주 분명하다는 게 특징이다.
이걸 믿지 않는 분이라면 이 글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것이고 본인 역시 그들을 설득할 생각이 없다.
다만, 그 교리가 논리적으로 성립하려면, 어떤 사람이 구원받아서 하늘로 가며 하늘나라에서의 삶은 어떨지 이런 면모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 어린아이들은 무조건 하늘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내가 예전 글에서도 쓴 적이 있지만, 너무 어려서 스스로 선이나 악을 판단할 수 없으며 아직 자기 행동에 책임을 질 능력이 없는 아기, 영· 유아, 어린이, 정신박약아, 지적 장애인은 죽으면 무조건 하늘로 간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분명한 논리로 요약할 수 있다.

- 그들은 구원자 예수님을 자기 의지로 스스로 영접하지 못하지만, 거부하지도 않았으므로(못하므로)
- 그들이 태생에서부터 아무 죄가 없고 순수하고 깨끗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법적으로 그들에게 죄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에

아멘!
다윗이 삼하 12:23에서 이 사실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어른들의 욕심과 잘못 때문에 이런 애들이 죽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이고 죄악의 결과이다. 당장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태어난 첫 아이도,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 명목으로 1주일을 열병을 앓다가 죽었다. 애가 무슨 잘못이 있나?

하지만 그들이 죽어서 하늘로 가는 것 자체는 나쁜 게 아니며, 오히려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위로를 줄 수 있다. 다윗은 죽어서 하늘나라에서 그 아이도 다시 보게 됐을 것이다.

심지어 2000여 년 전에 예수님이 태어나던 당시에도, 헤롯 왕이 예수님의 동갑내기 2살 이하 유아들을 대상으로 학살극을 저지른 적이 있다. 온 인류의 구원자가 태어난 덕분에 주변의 동갑내기 아기들이 다 뒈져셔 지옥으로 떨어졌을 리는 없잖아? 아이들이 죽어서 가는 곳에 대해서는 이 이상 어떤 논쟁도, 이견도 필요하지 않다.

2. 그러나 동물은 죽으면 끝이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기를 쓰고 기독교의 지옥 교리를 부정한다. 그 대신 내세우는 것이 영혼 멸절이다. 즉, 죄인은 그냥 자기 인격체가 완전히 없어지고 끝난다는 것.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영혼 멸절은 사람이 아닌 다른 짐승들에 한해서만 성립한다.

발생· 유전학적으로 사람과 굉장히 비슷한 유인원 동물이 존재하여 소위 진화론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을 하는 것, 불을 다루는 것 이상으로 사람이 짐승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영적인 위상이라고 성경은 말한다(전 3:21).

사람은 불멸이지만 짐승은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가령, 어떤 개가 아무리 충성스럽고 어지간한 인간 말종 개차반보다도 낫다 하더라도, 개는 개일 뿐이다. 짐승은 지옥에 가지 않는 것만큼이나 하늘로도 가지 않으며 완전히 없어진다.
지금 당신이 현 세상에서 보는 바로 그 동물은, 비록 지금 아무리 사랑스럽게 보일지라도 내세에서 볼 수 없다. 이 사실을 알면 사람과 짐승 사이의 우정(?)을 다룬 각종 문학 작품에도 그리 애착이 가지 않게 될 것이다.

3. 사람 식별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성경에는 예수님 같은 생사람을 못 알아봐서 실수를 한 주변 사람들 얘기는 나오지만, 정작 고인을 못 알아본 경우는 없다.
예수님이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왔을 때, 제자들은 모세와 엘리야의 생전 모습을 전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사진 같은 것도 없던 시절!) 그들을 바로 알아봤다(눅 9:28-34).
그리고 예수님이 미래에 지구에 재림하실 때도 세계 어디에서도 이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못 알아볼 사람은 없을 거라고 성경은 말한다.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할지 그 디테일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하늘나라에서는.. 신참이 한 명 들어올 때마다 마치 공항 입국장처럼 지인들이 이름 적힌 피켓 들고 사람 찾는 광경은 없을 걸로 보인다. 시대를 초월한 상봉이 이뤄질 때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1번과도 연동하여, 하늘나라에 가서 어떤 사람으로부터 “내가 예전 세상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지적 장애아였을 때 형제님이 나를 잘 보살펴 주셨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같은 인사를 들을 걸 생각해 보라.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이런 데서 나오는 법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장애인을 만들었는지에 대해서조차도 답을 주고 있다. 이런 게 감히 아메바· 원숭이 진화론이나 귀신 이야기 따위와 비교가 되겠는가!

4. 이 땅에서와 같은 결혼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와 같다”라는 한 마디로 모든 논란이 끝난다.
하늘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을 입고 현 세상에서 살던 때와 같은 결혼의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배우자가 죽었을 때 재혼이 가능하다. 성경은 간음과 음행을 그토록 싫어하지만, 과부에게 평생 수절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이건 무척 중요한 개념이란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의 범죄처럼 간음을 재혼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살인에 대해서도 이미 다 예상하고 언급하고 있고, 이 체계를 악의적으로 비비 꼰 트집성 질문에 대해서도 해답을 마 22:23-33에서 마련해 놓았다. 난 성경에서 이 논리 체계를 발견하고서는 개인적으로 무릎을 탁 치고 감탄했었다.

더 현실적인 예를 들어 보겠다.
소설 <상록수>의 스토리를 잘 아실 것이다. 지금 안산에 가면 상록수 공원이 있는데, 거기에는 실제 여주인공인 최 용신하고, 그분과 약혼한 사이였던 김 학준이 나란히 묻혀 있다. 김 학준에게는 훗날 실제로 결혼한 부인(길 금복 여사..)이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근본적으로는 김과 최가 연애 기간이나 약혼 기간을 너무 길게 잡지 말고 가능하면 어서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게 훗날 문제가 되긴 했다. 또한, 옛 약혼녀 옆에다 묻어 달라고 부탁한 김의 이런 유언 때문에 가정에 내부적으로 좀 갈등이 일기도 했다. 상식적으로 충분히 갈등이 있을 만도 하지 않은가? 이건 대놓고 저지른 불륜은 아니지만 뭔가 좀 미묘한 감정 싸움이다.

허나, 세 분 다 크리스천이었고, 세 분 다 지금은 고인이 되어 하늘에 있다. 그들이 거기서 한데 만나서 이 세상에서와 같은 질투와 갈등을 겪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아시겠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세상 매체에서 말하는 '영혼 결혼식'이라는 건 부질없는 개념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5. 다른 건 못 가져가도 자식은 가져간다

저 하늘나라에 우리가 도대체 돈을 가져가겠는가, 집과 차를 가져가겠는가, 심지어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가져가겠는가?
다른 건 못 가져가도 육신의 자식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보고 지내게 된다.
아 물론, 이건 제대로 키워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식에 한해서 말이다.
아니면 차라리, 앞의 1번 항처럼 엄청 어렸을 때 불의의 사고로 잃은 자식이라면, 부모가 구원받았다면 최소한 하늘에서는 다시 만날 수 있다.

요즘 정말 결혼할 엄두를 못 내고 애 낳고 키울 엄두를 못 낼 저출산 시국인 거 나도 너무나 잘 안다.
또한 하나님은 음행을 극도로 정죄하는 것만큼이나 그와 반대로 결혼한 부부끼리의 사생활은 그 어떤 형태라도 무조건 존중해 주시며, 이는 자녀 계획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게 정말 영원을 생각하는 투자인지 크리스천이라면 이 변수도 잘 생각해 봐야 한다.

6. 이 땅에서 갖고 있던 기억은 과연?

이건 무척 재미있으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현 세상에서 습득된 개개인의 인격과 지식이 그곳에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본인의 철도 덕후 기질은 하늘나라에서도 변함없을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거기서 온 우주를 누비는 철도를 구상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서는 육신의 성별이나 나이가 의미가 없을 것인데,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부활한 예수님처럼 33세 남자처럼 될까? 내 애인과 어머니까지? 거기까지 당장 여기서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또 하나.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친하게 지내던 가족과 지인들 중 상당수가 예수 안 믿고 죄 가운데 죽어서 지옥· 불못으로 영원히 이별을 하고 말았는데 우리가 과연 하늘나라에서 기쁘게 지낼 수 있겠나?”라는 고전적인 질문이 있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따지기나 하지 말고 당장 가족과 지인에게 복음부터 전해야 할 것이다. -_-;; 그렇게 자기 할일부터 다하고 그것 때문에 무시와 따돌림과 핍박까지 당했는데도 그들이 끈질기게 복음을 거절한 것이면 그들이 자업자득이고 우린 덜 슬프겠지.

(그리고 당신의 신앙을 비웃고 조롱할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당신이 지금까지 지나치게 잘 어울리고 아쉬울 것 없이 지내 왔다면, 당신의 영적 본분에 대해서도 어차피 다시 생각을 좀 해야 할 것이다.;;)

큰 백왕좌 심판 후에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에게서 눈물을 닦아 주실 거라는(계 21:4) 약속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의 죄악을 다시는 기억도 하지 않는 것처럼(할렐루야!), 그리고 반대로 지옥에 떨어진 죄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기수열외'되고 단절되고 잊혀지는 것처럼, 이때 우리는 과거의 '흑역사'에 해당하는 온갖 쓰라리고 아픈 기억들이 말 그대로 '포맷'되기도 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의 기억은 영원히 남는 것도 있고 잊혀지는 것도 있지 않을까 싶다.

7. 고참, 말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대에다가는 1을 더해도 무한대이고 1억을 더해도 무한대이다. 하늘나라도 영원하고 지옥· 불못도 영원하다.
하나님의 사고방식에는 은퇴· 졸업 같은 게 없다. 수료만 있을 뿐이다. 나는 이 말을 어렸을 때 주일학교를 수료하고서 목사님에게서 들었다.
마치 마태복음 1장은 오로지 '낳고'만 있지, 창세기 5장처럼 '죽었더라'가 없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랄까?

군대에 고참· 말년이 있고 이등병부터 말년병장까지 계급별로 온갖 독특한 문화가 존재하는 건 '제대'가 있기 때문이다.
군대에 영원무궁토록 갇혀 있어야 한다면 그런 관행이 생기겠는가? -_-
명심하자. 내세에서는 고참, 말년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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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늘나라와 지옥 구성원하고, 하나님이 실제로 생각하시는 하늘나라와 지옥 구성원은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굉~장히' 차이가 크다.
예수님을 절대적인 의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라면 절대적인 선과 악 관념이 있을 수가 없다. 그저 상대적인 권선징악 패러다임에다 “이런 사회 시스템 하에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지”, “남들만치만 하면 되지”, “이 상황에서는 어느 누구라도 해먹지 않을 수 없지”, “죄도 적당히 즐길 줄만 알면 되지”의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완전히 반성경적인 내세관을 전달하고 있는 웹툰 <신과함께> 같은 걸 보아라, 기반 사상이 딱 저것이다. (개인적으로 내용을 무척 재미있게-_- 봤으나, 안타깝긴 하다.;;) 내세를 소재로 하면서 성경을 배제한다면 솔직히 저 수준을 벗어날래야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하늘나라(그리고 지옥)에 대해서 이 글과 비슷한 방향으로 알 레이시 목사가 디테일을 재미있게 잘 논증한 바 있다.
예전에 말씀과 만남 출판사에서 <천국은 있다>(Window of Heaven)라는 책이 나왔고, 이걸 현재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 <천국과 지옥 바로 알기>라고 천국편과 지옥편 합본을 내놓았으므로 관심 있으신 분은 참고하기 바란다.

끝으로, 글을 맺기 전에 한 마디 더... 하늘나라는 거룩~하고 경건한 꼴통들만 있어서 조용하고 따분하고 지겹기 그지없는 곳인 반면,
오히려 지옥이 신나고 화끈하고 다이나믹한 곳이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드립에 결코 현혹되지 말기 바란다.
성경이 말하는 지옥은 아버지와 함께 럭키짱 만화책이나 볼 수 있는 곳이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대사가 '지옥'으로 알려져 있는데, 짤방을 뒤져 보니 '저승'이구나..)

Posted by 사무엘

2011/10/16 08:42 2011/10/16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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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약 율법과 말라기 구절을 근거로 십일조 헌금을 부과하고, 심지어 솔로몬을 따라 일천번제(?)라는 이상한 헌금 제도까지 시행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
2. 목사는 거~룩한 “주의 종”이고 구약으로 치면 레위 인이다. 교회 예배당은 거룩한 ‘성전’이다.
3. 안식일은 고증상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이라며, 어떤 교회는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 안식일도 모자라서 유월절을 지키는 곳도 있다.
4. 오늘날 수많은 개독안티들은 모세오경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여 트집을 잡는다. 그러면서, 기독경 바이블이 말하는 신은 반인륜적이고 잔인하고 장애인을 비하하는 신이라고 공격한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고 행한다면 이런 것도 그대로 행하겠냐ㅋㅋ라고 막 빈정댄다.
5. 성경을 잘 모르지만 어쨌든 위의 조롱을 좀 의식하는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의 신인 반면, 신약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의 신”이라는 식의 드립? 쉴드?를 친다. 이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근거로 제시되는 각종 ‘보수적인’ 기독교 윤리관(사형 제도, 동성애, 낙태, 옷차림과 외모 등등등)에 대해서도, 동일한 알고리즘을 적용하여 쏙 빠져나간다. -_-;;


이 모든 사례는 성경을 바르게 나누지 않아서 발생하는 촌극이다. 그 사례가 겨우 저 다섯 가지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신약과 구약 교리를 잘못 분간하여 저질러지는 병크는, 기독교회가 존재하는 한 아마 지구상에서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 같다. -_- 구원받은 크리스천이든, 개독안티이든, 성경을 공부하지 않으면 방향만 다를 뿐 그 누구라도 똑같이 걸려 넘어지고 오류에 빠지게 된다. 성경은 그렇게 호락호락 만만하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위의 다섯 사례들에 대한 본인의 코멘트는 이러하다.

1. 이스라엘 백성과 신약 성도는 복, 믿음에 대한 구도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말 3:10 같은 십일조에 대한 보상 자체가 오늘날의 크리스천에게는 약속되어 있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신약 성도가 예수 잘 믿거나 교회 열심히 잘 다니거나 헌금 많이 하면 물질적인 복을 받고 부자 된다는 약속은 없다. 신약 성도들이 이미 받은 영적 복은 엡 1:3에 규정되어 있고, 헌금 원칙은 고후 8:12 같은 자발적인 규정이 전부이다. (이 관행에 대해서 통탄하는 어느 목사님의 글)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과 시간과 물질을 바치지만, 그 일을 하는 동기에다 구약의 마인드를 집어넣는 건... 정말 생뚱맞고 안 어울리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 믿음으로 헌신할 뿐이지, 걔네들처럼 ‘십일조 바치면 정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상 받는지 따져보자’ 이러는 구도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2. 구약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벧전 2:9, 엡 2:21, 고전 3:16 같은 구절과 비춰 봤을 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_-;;;
물론 본인은, 자긴 그 잘난 제사장의 의무를 다하지도 않으면서 입으로만 만인 제사장 운운하는 뺀질이를 아주 싫어하며, 목사와 교사 직분 자체를 부정하는 모임도 명백히 잘못됐고 비성경적이라고 여긴다.

3. 오늘날 신약 교회가 지키는 주일은 안식일이 아니며, 그와 아무 관계가 없다. 일요일 예배는 예수님이 부활한, 더 정확히 말하면 부활이 알려진 날에서 유래되었을 뿐이다. 태양신 축제와 연관 짓는 건 성탄절, 이스터 정도로 족하다. 일요일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게 없다.

4. 이런 부류들은 도대체 어디부터 상대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환이 상한 자, 안면이 함몰된 자는 군대에 가지 못할지니라”고 하면, 얘네들은 군대가 장애인을 비하하고 차별하는 집단이라고 드립을 칠 친구들이다. 가나안 백성들을 다 진멸하라고 명령한 하나님 탓할 줄만 알지, 정작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명령을 100% 이행 안 하고 걔네들로부터 안 좋은 거 배워서 동화되다가, 죄에 빠져서 하나님에게서 똑같이 큰 벌 받은 건 눈에 안 들어온다.

트집 잡는 게 다 저런 식이다. 저 친구들은 성경에서 그런 의문과 이해가 안 되는 부분만 해결되면 성경을 믿겠다는 의향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게 아니다. 그들의 불순한 의도를 알기 때문에, 나도 더 친절하게 설명 안 할 생각이다.
수학의 ‘수’짜도 모르는 초딩이 “님들아, 입실론 델타 증명부터 로피탈의 정리까지를 A4 한 장에다 내가 알기 쉽게 좀 설명해 주셈” 질문 달랑 던져 놓고는, 답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욕지거리 하는 것과 같은 꼴.

그리고 끝으로,
5. 성경 66권을 통틀어 짐승과 수간하지 말라고 명령되어 있는 곳은 구약 율법밖에 없다. 그럼, 저 논리대로라면, 신약 크리스천들은 짐승과 수간해도 괜찮겠다. ㄲㄲㄲㄲ
저 사고방식의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이 시대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게 절대 아니라는 데 있다. 단적인 예로,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명제는 신약과 구약에 동급으로 인용되어 있다(신 4:24, 히 12:29). 그리고 구약 율법에도 정말 가난한 자, 어려운 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난 구절은 얼마든지 있다.

신약과 구약의 공통점과 차이에 대해서 여러 할 말이 있지만, 요약하고 또 요약하자면 이렇다.
구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하셨다. 각자 자기 favorite gods들을 찾아 떠난 이방 민족들을 상대로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객관적으로 맞장 뜨는 구도였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신정 국가 컨셉의 특이한 규범이 많았고 당장 눈에 띄는 보상에 대한 약속도 많았다. 그러나 몇몇 얘네들의 민족적 특수성이 감안된 규범을 제외하면, 윤리와 관련된 대다수 규범들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유익한 것들이다.

그 후 신약 시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는데 정작 유대인들은 그분을 거부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방인을 상대로 교회를 만들고, 교회로 하여금 유대인들의 질투심을 유발해서 유대인들까지 예수님을 믿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래서 신약 규범은 비격식· 비가시적이고, 자율적이고, 영적인 것이 많다. 그런데 그게 더 수준이 높다.

다만, 이런 하나님의 경륜의 저변에 깔린 공의와 사랑이라는 두 성품은 시대를 불문하고 불변 동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사실을 전제에 깔면 신구약과 관련된 상당수의 오류를 예방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신자? 개독?)들은 도대체 왜 너네 주장만 맞다고 생각하느냐? 맞다는 근거로 맨날 성경을 들이대는데 그건 순환논리이고 우리 같은 불신자한테는 씨알도 안 먹힌다.”
본인은 왕년에 종교 배틀을 한두 번 벌여 본 것도 아니고, 걔네들의 심리 정도는 다 꿰뚫고 있다.

그런데, 참 애석하게도... 진짜로 성경은 순수한 동기로 먼저 믿어야지 나머지 부분도 나중에 차츰 이해가 되게 된다. 나도 저것보다 더 속시원한 반격을 하고 싶어 죽겠는데, 더 할 게 없다. 성경 신자들의 신앙은 세속 논리학의 관점에서 봤을 때 당연히 순환 논리도 갖고 있고,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도 범하고 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이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겠는가.

단, 일단 먼저 믿어서 나쁠 게 절대 없는데도, 안티들은 성경을 잘못 적용한 극단적이고 이상한 부류들이나 들먹이면서, 그걸 일반화하여 종교가 사람의 정상적인 이성을 마비시키고 우민화한다고 깐다. 그건 그렇지 않다고 그 정도는 본인이 반박해 줄 수 있다. 이해나 증명이 불가능한 몇몇 핵심 명제만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나면, 그 이후부터 기독교 교리는 그걸 바탕으로 철저한 논리와 일관성과 질서 그 자체이다.

본인은 구약 율법과 크리스천의 관계를 군대에다 비유한 적이 있다.
율법은 군인에게 부과되는 온갖 제약과 규율들이다. 그 중에는 각종 심신 단련과 규칙적인 생활처럼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유익한 게 많다. 인간에게도 유익하고 군대가 돌아가는 데도 필요하니까 그런 게 명시된 거겠지.

마치, '10시 취침, 6시 기상'은 전세계 군대나 민간인들이 지켜서 나쁠 게 없는 규정인 반면, '우리의 주적은 북한'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대한민국이라는 민족의 특수성 하에서만 유효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리고, 개독안티들이 비판하는 건, '전시에 적진으로 도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 같은 법규를 보고는, 잔인하고 반인륜적이라고 욕하는 것과 거의 똑같다. 저 군법이 과연 잔인하고 반인륜적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신약 교회의 크리스천은 민간인이다. 그걸로 끝이다. -_-;;
내가 아는 한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이보다 더 확실하게 먹혀드는 비유는 없을 거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가 낳은 사람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일어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크니라. (마 11:11)

위의 말씀은, 제아무리 뼛속까지 FM인 1등급, A급 병사라 해도, 제대한 민간인보다는 못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뭐가 못하다는 건지 모르는 분은 없을 테고.

오늘은 요기까지만 쓰련다.
신약 vs 구약과 더불어 자매품(?)으로는, 신구약 ‘과도기’의 교리와 신약 교리를 잘못 분간하는 오류가 있다는 걸 아울러 밝힌다.

요놈의 주된 부작용으로는 치유나 방언 같은 잘못된 은사주의 교리가 있다. 그래서 행 2:38이 교회 성도들에게 직접 적용되는 교리로 왜곡되고, 막 16:17-18을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이 나 버린다. 배운 적이 없는 외국어를 구사하고, 중환자에게 안수만 하면 병이 즉시 낫고, 청산가리 같은 걸 마셔도 안 죽고..;; 우리가 시도했다가는 다윈 상 수상자밖에 되지 않을 것 같은데? -_- ㄲㄲㄲㄲㄲㄲㄲㄲ

이건 다른 책보다도 마태복음과 사도행전과 히브리서를 잘못 적용했을 때 나타나기 쉬운 증상이라고 알려져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1/09/30 08:46 2011/09/30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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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말, <날개셋> 한글 입력기 6.2가 공개된 때와 아주 비슷한 타이밍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출판사에서는 영어 킹 제임스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킹제임스 흠정역> 성경의 ‘KJV 출간 400주년 기념판’을 내놓았다. 버전으로 치면 5판이다. 4판이 나온 지 3년 만의 일이다.

2~4판 사이에서도(특히 3판에서) 한국어 문장에 revision과 breaking change가 적지 않았지만, 2011년은 아주 특별한 해이지 않던가. 영국에서 KJV 출간을 기념하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고, 미국은 의회가 아예 KJV가 미국에 남긴 공적을 기리는 성명서를 냈을 정도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의 엄청난 공을 들여서 번역을 다시 가다듬었다. 전체적으로 예전보다 좀 더 영어 직역에 가까워졌다.

성경이 무슨 컴퓨터 프로그램도 아닌데, 본문을 자꾸 패치한다고 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이나 모두 시간과 돈이 들고, 번거롭고 귀찮고 골치아프다. 성경은 모름지기 권위가 담긴 텍스트여야 하는데 명분이야 어떻든 자꾸 바뀌어 버리면, 그럼 예전 판은 무슨 신세가 되는지에 대한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요즘 컴퓨터 프로그램이 보안 업데이트를 귀찮더라도 자꾸 해 줘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그걸 왜 꼭 해야 하며,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프로그램 개발자는 너무 자세히 알려 줄 수 없다. (당연히, 모방범죄 같은 안 좋은 파급효과 때문)

성경 번역자도 이와 비슷한 처지인지라, 성도들에게서 안 좋은 소리와 심지어 오해까지 받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이런 개정을 하는 것이다.

이미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에 법인까지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번역하고 이를 교계에 가장 먼저 알린 단체는 대한 항공 조종사 출신의 모 목사가 설립한 ㅁㅂㅎ라는 곳이다.
이들은 교리도 그럭저럭 건전한 편이었으나, 초창기에 세상 교회를 상대로 appeal을 굉장히 잘못하는 바람에 이곳과 더불어 킹 제임스 성경은 한국 교회에서 이상한 이단으로 완전히 낙인찍혀 버렸다. 그게 1990년대 중후반의 흑역사이다.

진리를 정말 성령 충만한 애끓는 사랑으로 호소하며 전해도 말귀 못 알아듣는 사람이 태반이며 열매가 맺힐까말까인데, 그걸 육신의 깡을 동원한 온갖 과격· 극단적인 표현으로 밀어붙였으니 튕겨나오는 역효과는 100배이다. 뭐, 나라도 겪었을 시행착오이니 ㅁㅂㅎ를 그렇게 욕할 생각은 없다.

둘 다 잘못했다. 비록 ㅁㅂㅎ도 잘못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경이 역본마다 다르고 변개· 삭제된 말씀이 있다고 해도 아무 경각심도 안 느끼고 최소한의 진실 규명도 안 하는 사람들 역시, 크리스천의 자질이 굉장히 의심되는 부류가 아닐 수 없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의 영감성과 무오성, 보존에 대해서는 불신자 내지 개독안티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요즘 굉장히 많다.

그런 사람들은 도대체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과 근간이 뭔지 난 정말 궁금하다. 겨우 그런 허술한 근간으로 예수쟁이 행세하고 교회 댕기기에는, 기독교계가 요즘 저지르는 병크가 너무 많고 예수쟁이들보다 인격적으로 훌륭한 불신자들도 너무 많으며 반기독교 정서는 너무 팽배해 있지 않은가?

아무튼,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한국의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은 안 그래도 소수이던 것이 n갈래로 더욱 소수로 쪼개지는 비극을 겪었다. 이때 모 공대 교수가 다시 동지들을 모아서 ㅁㅂㅎ의 <한글 킹제임스 성경>과는 별개로 성경 번역을 시작하였고, 그래서 나온 것이 <킹제임스 흠정역>이다. 초판이 나온 게 2000년 여름인데,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태어난 시기와 비슷하다.

성경 번역이란 건 자금과 지지 기반이 필요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정치성도 띠고 있다. 본인은 그래서 우리나라 KJV 진영의 양상을, 우리나라 근현대사에다 비유해 보곤 했다.

일제의 갑작스러운 패망 이후 우리나라는 온갖 정치 집단과 이념 세력의 각축장이 되었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워졌다. 이처럼 한국 교계도 개역성경의 권위가 무너져 내리고 ㅁㅂㅎ 진영까지 분열된 후, 어중이떠중이가 다 KJV를 번역하겠다고 나서면서 난장판이 되었다.
(단, 그렇다고 해서 개역성경이 일제 같은 존재는 절대 아니다. 오해 말길!)

이때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우리나라의 독립 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치면, 이 승만 같은 일을 해냈다. 당연히 긍정적인 면에서 말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를 간단히 설명하겠다.

일제 강점기 때 국내의 독립 운동가들이 무력 투쟁 정도만을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이 승만은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미국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국제 사회의 냉정한 현실을 직시했고, 당대의 강대국이던 미국을 일본이 아닌 한국의 친구로 만들려 애썼다. 그리고 당대의 여타 민족 지도자들과는 달리, 공산주의의 해악을 완전히 간파하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이념이 지켜지는 국가를 한반도에다 세우고 정부를 수립했다. 이북처럼 자기 지지자들만 잘 먹고 잘 사는 개막장 독재 국가를 세우지 않았다!

그것처럼 흠정역의 주 번역자 역시, 명색이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공대 교수이다. 객관성과 정확성을 생명으로 여기는 분야에서 학문 하는 훈련을 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 번역자라는 소영웅주의에 도취해 자신을 드러내고 appeal한 게 아니라, ㅁㅂㅎ로 인해 치명적으로 실추된 KJV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했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성경이, 성경 오타쿠들이나 자기 교리 노선· 자기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들만 보는 성경이 되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최대한 기존 성경의 컨벤션을 존중하고, 교리적으로 튀는 번역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대인배적인 마인드이지 않은가? 난 그 의도가 존경스럽다.

기존 개신교회들이 변개된 성경을 쓰고 잘못된 관행을 저지른다고 비판하고 까기만 하는 건 쉽다. 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사람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KJV를 읽게 하려고 노력한 끝에, 자기 출판사를 기성 기독교 인터넷 서점에 입점시키는 데 성공한 것은 과연 KJV 교계의 이 승만 같은 사람의 업적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금까지 어느 KJV 진영도 한국 기독교회에 KJV를 이런 방식으로 알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잘한 건 티가 별로 안 나는 반면 못하면 바로 티가 나고 온갖 괴담과 비방, 오해가 나돌기 딱 좋은 분야이다. 이 승만이 악의적인 세력들에 의해 부관참시 당해 온 것만큼이나 저 번역자도 성경 번역 하나 때문에 지금까지 이단 소리 듣고, 반대편 진영으로부터 욕도 얻어먹고 험한 꼴 꽤 많이 봤다. 평범하게 자기 연구만 계속하면 돈도 훨씬 더 많이 벌고 교수로 아주 편하게 잘 살았을 텐데, 지금까지 인생의 어마어마하게 많은 부분을 성경 하나 때문에 희생한 것이다.

어쨌든 여러 모로 유사점이 보인다. 본인은 이런 식으로 비교한 글을 예전에 모 기독교 커뮤니티에다 올린 적이 있다. 당사자더러 보라고 쓴 글은 아니었지만, 어째 정보가 퍼져 나갔는지 그분의 사모님께서 그 글을 보고는 본인에게 따로 연락을 주셨다. “우리 쪽에서 직접 말하기 민망한 심정을 잘 이해하고 대변해 줘서 정말 고맙다”고 말이다.
뭐, 그래도 이 승만을 그저 증오하는 사람들은 그 글을 보고도 불편해하더라. ㅋㅋㅋㅋㅋ

그에 반해, 흠정역과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간 모 진영이 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파울로, 밥티스마 같은 말을 일일이 만들면서 완전히 자기네 진영에서만 쓰는 독자적인 번역을 만들었다. 기존 개신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여타 KJV 진영과도 일체의 교제를 끊고는, 자기 말고는 전부 배도하고 타락했다고 거의 사람 취급을 안 한다. 내가 보기에는 덜 배운 친구들이 이 승만이 친일 공화국 만들었다고 욕하는 것과 쎄임쎄임이다. 머리에 든 게 부족하면 그 정도 수준밖에 안 보인다.

양 진영이 맺은 열매는 난 이렇게 비유하겠다.

http://www.keepbible.com/bbs/board.html?board_table=notice&write_id=81
그분은 채팅과 교제를 통해 많은 추종자를 얻었지만 저(흠정역 진영)는 성경과 교회들과 성도들을 얻었습니다.

http://systemclub.net/bbs/zb4pl5/zboard.php?id=new_jee&no=2563
김 구는 아들에게 유언장을 남겼지만, 이 승만은 국민에게 대한민국과 주권을 남겨주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꾼을 쓰신 수준의 차이이다! 킵바이블 사이트의 글과, 시스템클럽의 글을 이런 식으로 비교해서 종합한 사람은 지금까지 나밖에 없지 싶다. ㅋㅋ

말이 길어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본인은 그리스도 예수안에 킹제임스 흠정역 진영을 지지하며, 이 성경을 쓰는 교회에 다니고 있다. 흠정역이라는 이 우리말 성경은 만만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게 아니다. 킹 제임스 성경 진영을 국내에 이 정도로 정착시키기까지 성도들의 무수한 노력과 헌신, 기도가 있었다. 부디 KJV에 대한 근거 없는 이단 낭설이 하루빨리 불식되고, 이 땅에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가 굳게 서고 이를 전파하는 지역 교회들이 많이 세워지길 바랄 뿐이다.

(흠정역 홍보 동영상 클릭)

Posted by 사무엘

2011/09/19 08:13 2011/09/19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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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에서 ‘남산’은 보통명사와 고유명사의 경계가 모호한 단어이다. 그래서 한국에는 남산이 여러 군데 있다. 경주에도 남산이 있고 서울에도 남산이 있다. 그럼 애국가 2절 가사에 있는 남산은 특정 남산일까 아니면 보편적(?)인 남산을 가리킬까?

서울의 남산은 용산구와 중구, 정말로 서울의 정중앙에 있는 산이다. 그렇게 크거나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다. 한때는 국가의 첩보 기관이 이 근처에 있었던지라 남산에 끌려갔다는 말은 코렁탕 같은 단어와 연관되어 무척 무서운 말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이다.

대도시의 한가운데를 가로막고 있고 또 그렇게 크지도 않은 산이다 보니, 교통 편의를 위해 이 산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터널이 진작부터 뚫렸다. 그것이 바로 ‘남산 n호 터널’이라고 알려진 터널들이며 이때 1<=n<=3이다. ‘제n’ 대신 ‘n호’라고 번호가 붙은 게 좀 특이한 작명 컨벤션이다. 혼잡 통행료가 징수되는 터널로도 알려져 있다.

세 터널은 모두 길이가 1.3~1.6km에 달하여 한강 다리보다 길이가 길며, 간격이 좀 긴 지하철 역간 거리 정도 된다. 이들 터널이 건설되던 시절에는 광폭 터널 같은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크고 아름다운 서울 도로를 주행하다가 겨우 2차선 나부랭이의 좁고 낡은 터널로 들어가면 좀 놀라게 된다.

가장 먼저 건설된 남산 1호 터널은 용산구 한남동에서 중구 필동을 거쳐서 명동과 종로 2가로 그대로 이어진다. 남쪽으로는 한남 대교와 경부 고속도로로 직결. 그야말로 강남과 종로를 잇는 핵심 교통축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왕복 2차선 터널 하나만 있다가 나중에 터널을 하나 더 건설하여 왕복 4차선이 되었다. 그래도 오늘날의 교통량을 감안하면 여전히 좁다.

남산 2호 터널은 1호 터널과는 반대 방향으로 남산을 X자로 관통한다(물론 양 터널끼리는 입체 교차하며 만나지 않음). 중구 장충동과 용산구 이태원동을 연결하는데, 북쪽 방면에서의 진입로는 큰 도로와 바로 연결되어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즉, 접근이 좀 불편하다.

2호 터널은 남산 터널들 중에 가장 길지만 4차선이 아니라 여전히 2차선이고, 유일하게 혼잡 통행료를 징수하지 않는다. 1호와 3호가 ↖ 선형인 반면, 2호만 ↗ 선형인 것도 특징이다. 2호는 나머지 둘과는 달리 경유하는 시내버스도 전혀 없다. 2호는 아무래도 명동 같은 도심과 직접 맞닿아 있지는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끝으로 남산 3호 터널은 남쪽은 2호와 비슷한 용산2가동에서 시작하여 중구 회현동 내지 명동으로 간다. 북쪽으로는 서울 시청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반포 대교를 따라 고속버스 터미널, 예술의 전당(남부 순환로)과 우면산 터널까지 쭉 갈 수 있다. 1호와 비슷한 위상이며 1호 터널의 역할 분담을 위해 건설되었을 거라는 짐작을 가능케 한다. 요컨대 남산 터널들 중 2호만 위상이 좀 다르다.

난 정말 21세기엔 남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철도도 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늘 해 왔다. 특히 신분당선은 강남 역에서 한남 대교와 남산 1호 터널의 선형을 따라 광화문까지 연장돼야 하는데 웬 엉뚱하게 용산으로 가게 됐다고 하니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특히 서울 지하철 4호선은 용산 미군 기지와 남산을 피하느라 강북의 선형이 굉장히 이상해졌고 1호선과 어정쩡하게 중복 노선이 되어 있다.

2호를 제외한 남산 터널들은 비록 통행료를 걷는다고 하지만 고속도로 통행료와는 좀 다른 개념이다. 시설 이용료라기보다는 서울 중심부에 대한 불필요한 통과 교통의 억제가 목적이기 때문에, 차에 3명 이상만 타고 있으면 면제이다. 그리고 밤 9시 이후와 오전 7시 이전 사이에는 통행료를 걷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1/08/23 19:25 2011/08/23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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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 the hood

예나 지금이나 생긴 것, 하는 일은 비슷한데 내부 메카니즘은 상당히 달라진 물건은 어떤 게 있을까?

※ 헬리콥터

회전익 항공기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로터의 영향을 받아 동체까지 반대 방향으로 돌게 된다. 그래서 이 현상을 상쇄하기 위해서 탠덤 형 헬리콥터는 동체가 길쭉하고 서로 반대 방향으로(시계/반시계) 도는 동일 크기의 로터가 앞뒤로 달려 있다. 철도 차량으로 치면 전후동력형 동차와 비슷한 형태. 그리고 동축 반전 로터형은 그 로터를 위아래 높이만 다르게 하여 동일 위치에 포개 놓았다. 양방향으로 도는 로터 두 개를 모두 배치함으로써 동체의 회전을 방지했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동축 반전 로터는 만들기가 더 어렵고 고속 주행의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오늘날 대부분의 헬리콥터는 꼬리날개(테일 로터)를 수직 방향으로 따로 다는 방식을 쓰고 있다. 뭐, 테일 로터 방식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어서 동체를 뜨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 잉여 로터에다가 엔진의 출력이 쓸데없이 낭비된다는 점, 그리고 테일 로터는 사람이 끼여서 죽거나 다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는 점이 지적되곤 한다만...
어쨌든 요지는, 옛날에는 꼬리날개의 기능을 다른 형태로 구현한 헬리콥터도 있었다는 것이다.

※ 마우스

구슬을 굴리던 방식에서 광학 레이저로 위치를 탐지하는 방식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사실은, 볼마우스가 바닥 매체에 관계없이 동작 가능하고 가끔은 사람이 일부러 트랙볼처럼 아래의 볼을 직접 굴려서 포인터를 움직일 수도 있어서 심리적으로는 무척 편하다. 그러나 볼에 먼지와 이물질이 껴서 주기적으로 청소가 필요하다는 건 답이 없는 문제이다. 청소를 안 해 주면 동작이 금세 뻑뻑해지고, 포인터가 잘 안 움직이고...;; 불편하다. 청소 때문에 볼은 필연적으로 분리가 무척 용이한 구조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고, 그래서 공공 PC에서 마우스의 볼은 자주 분실되기도 했다.

오늘날, 아래에 볼이 달려 있지 않은 요즘 마우스를 보면 본인은 옛날 생각이 난다. 초창기의 광마우스는 반드시 바닥에다 마우스 패드를 깔고 써야 했고 가끔 마우스 포인터가 오작동으로 움직이는 등 단점도 있었으나, 요즘은 많이 개선되었다.

※ 아날로그 시계

생긴 건 1부터 12까지 일정 간격으로 새겨진 원판에 시침과 분침(, 그리고 초침)이 놓인 구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하지만 옛날의 시계는 태엽과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구조이던 것이 오늘날의 시계는 반도체를 이용한 전자식 쿼츠 시계로 다 바뀌었다. 예전에 글로 쓴 적이 있듯이, 둘은 구조가 완전히 다르다. 쿼츠 시계는 단순히 전기 에너지로 기계식 시계를 돌리는 시계가 아니다.

※ 모니터

21세기엔 컴퓨터 모니터든 텔레비전이든, 크고 아름답고 둥글기까지 하던 브라운관이 디스플레이 장비에서 완전히 퇴출되었다. 그 타이밍이 플로피 디스크나 카세트 테이프의 퇴출과도 시기적으로 비슷한 것 같다.
컴퓨터의 두뇌인 집적 회로가 더욱 작고 정밀해진 것만큼이나 디스플레이 장비의 소형화도 스마트폰 같은 작은 컴퓨터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 고작 단색, 혹은 청색이 표현 안 되던 저해상도 화면도 이젠 안녕이다.

액정 모니터는 전기 적게 먹고 전자파 안 나오고, 작고 가볍다. 물론, 단점도 없지는 않아서 특히 초창기엔 비슷한 크기와 성능의 브라운관 모니터보다 상당히 비싸고, refresh rate 및 최대 해상도가 떨어지고 색감이 좀 시원찮으며, 설계 해상도 외의 해상도에서는 픽셀이 번지고 불량 화소 같은 문제가 있었다만.. 오늘날은 역시 상당수 개선되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옛날 브라운관 모니터는 다양한 해상도에서도 픽셀이 번지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모니터를 처음 켰을 때는 무슨 형광등처럼 화면이 표시되는 데 딜레이가 길며 그것도 서서히 fade in이 됐었다. 이런 장면 역시 액정 화면에서는 볼 일이 없어져 있다.

※ 철도 차량

잘 알다시피, 옛날의 그 크고 아름답던 증기 기관차가 디젤로 바뀌고, 나중에는 최종 완전체인 전기 동력차로 바뀌었다.
그리고 똑같이 전동차도 처음에는 원시적인 저항· 쵸퍼 제어이던 것이 오늘날은 만렙인 VVVF 기반 제어로 바뀌었다.
심지어 VVVF 내부에서도 서열이 있어서, 처음에 GTO 소자이던 것이 더 조용하고 효율 좋은 IGBT 소자 기반으로 바뀌었다.
전기 철도는 힘 좋고(탁월한 가감속력) 조용하고 공해 물질이 배출되지 않으며 동력비 조절이 유연하다는 압도적인 장점으로 인해 철도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특히 전기 없이는 고속철이나 지하철이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 프린터

한 20년 전의 컴퓨터 입문 서적을 보면 프린터의 메카니즘으로는 도트, 열전사, 잉크젯, 레이저 4종류가 있다. 그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건 역시 잉크젯과 레이저. 그렇게도 비싸던 레이저 프린터가 이렇게까지 싸져서 가정용으로 보급된 건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잉크젯은 프린터 값이 잉크 카트리지 값보다 더 싼 기형적인 물건이 됐고..

마치 오늘날 286, 386 급-_- CPU는 키오스크나 우주선-_-, 임베디드용으로나 제한적으로 쓰이듯, 도트와 열전사는 영수증이나 각종 토큰 같은 걸 찍는 용도로 물러났다. 그나마 도트는 진짜 완전히 사라진 듯하고, 요즘 기계는 영수증도 열전사 방식으로, 언뜻 보기에 레이저 프린터가 돌아가는 것처럼 조용히 쓰윽~ 인쇄하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1/08/11 08:28 2011/08/1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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