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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영체제 사용 내력

구경이란 해당 운영체제가 설치된 다른 컴퓨터를 본인의 눈으로 처음으로 직접 보고 잠시나마 다룰 기회가 있었던 때를 말한다.

※ 윈도우 95
출시: 1995년 중반
구경: 1996년 초. 당시 정말 전율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1996년 말. 컴퓨터를 한번 업그레이드 하면서.

※ 윈도우 98
출시: 1998년 중반. 윈도우 95+IE4일 뿐이라는 비아냥거림 잔뜩.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개선되고 나아진 게 엄청 많음
구경: 1999년 초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0년 후반. 구닥다리 노트북이 장수한 덕분에 95를 굉장히 오래 사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윈도우 95 환경에서 개발됐다.

※ 윈도우 2000
출시: 2000년 초
구경: 2000년 후반. layered 윈도우 + 마우스 포인터 주변의 그림자가 무척 신기했다.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중반. NT 계열로 갈아타는 데 은근히 오래 걸렸음

※ 윈도우 XP
출시: 2001년 말
구경: 2001년 말. 대학 내의 얼리 어답터 덕분에 꽤 일찍 구경. Luna 화면은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말. 램 256MB로는 돌리기 좀 무겁다는 걸 실감함.

※ 윈도우 비스타
출시: 2006년 말~2007년 초
구경: 2007년 초. 세벌식 파워업 패치 만드느라 어둠의 경로로 구했음. Aero는 역시 충격과 공포였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7년 후반, 새 데스크톱 컴퓨터를 장만하면서

※ 윈도우 7
출시: 2009년 중반
구경: 2009년 중반. 윈도우 7은 정식 출시 전부터도 구해다 쓰는 용자들이 워낙 많아서 구경하기 매우 쉬웠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Not yet! 회사 컴, 집의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전부 여전히 비스타임.

새로운 윈도우 운영체제가 출시되면 본인이 그걸 실제로 내 컴퓨터에서 쓰게 되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넘는 간극이 있어 왔다. 과연 난 7은 언제쯤 써 보게 될까?
하지만 PC 성능의 상향 평준화, 그리고 운영체제의 안정성 증가(운영체제를 재설치할 일이 별로..-_-), 불법 복제 방지용 인증 같은 요인들 때문에 당분간 내 PC가 운영체제를 갈아탈 날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09 08:48 2010/08/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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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클럽과의 인연

2005년 초의 일이다. 그때 본인은 인터넷 상으로 짜증나는 소식을 하나 접했다.
고려 대학교의 한 모 교수(정확히는 이미 명예 교수 랭킹인)가 일본의 무슨 출판물에다가 “일제 식민 통치는 조선에게 축복”이었다고 기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치고 상식적으로 이 한 줄만 딱 접하고서 열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사람을 옹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본인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친일파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평균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패거리들이 또 고루고루 나서서 ㅈㄹ을 하는군.. 이번엔 대체 누구야?’ 정도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2005년에는 연초부터 일명 ‘박 정희 배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도 개봉해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여차여차 하다 보니 관람하게 됐고, <만화 박정희>라는 책도 나왔다. 박 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써 놓은 광화문 현판을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글 진영 내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다 비슷한 시기이다! 이게 다 우연일까?

게다가 압권이었던 것은 CBS 방송국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 바로 이를 계기로 본인 역시 지 만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으며, 시스템 클럽이라는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공개 토론을 계기로 지 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미친 수꼴 개새끼로 확실하게 인증 받게 됐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회자조차 그다지 중립적인 위치에 안 서고 진 중권 씨와 한 패가 되어 지 박사를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보기 안 좋았다. (성공회대 교수라는데 성향 면에서 뭘 더 바라겠는가.)

도대체 지 만원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갑툭튀한 사람인가? 당사자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히 인상이 좀 얍실한 족제비-_- 같고 영화로 치면 주동 인물보다는 반동 인물, 진짜 친일파처럼 보이긴 했다. O<-<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스템 클럽 글을 읽고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외부로도 보도가 되어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골수 수꼴로 굳히는 데 일조한 글로는,

<민족, 외세만 아는 바퀴벌레들>: 공산주의, 좌익, 운동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감
<역대 대통령의 자질 추이>: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만 우왕ㅋ굳ㅋ이었고  그 후대 대통령들은 타락일로

이런 것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가 결코 아니며 그런 글들을 쓰는 것이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본인은 느낄 수 있었다. 김 완섭 같은 싸이코 부류가 절대 아니다! 일본 내지 친일파 후손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며, 군 복무도 월남전 참전까지 하면서 명예롭게 마쳤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서 미 해군 대학원에서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말마따나 자신만의 정리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일평생을 자기 계발과 교양 수련에 투자하고 살았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정말 대쪽같은 분이다. 본인은 진 중권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 지 박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중에, 저 정도로 대인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지 박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스템 공학자 내지 군사 평론가를 비롯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리랜서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김 대중 정권 때부터 나라에서 하는 짓을 보니까 이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한 2002년부터 본업을 버리고 시사 논객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혀 청렴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민주화 패거리 저질 정치인들이.. 능력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옛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욕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 기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살짝 수구 극우 성향이고 시국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음모론스럽게 확대 해석하는 면모가 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만한 수준이다. 음모론이야 반대편 진영도 어차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안함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등등등.. 지 박사의 주장이 선동조라면,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13구절이나 통째로 삭제되고 무려 6만 개의 단어가 변개됐다"는 주장도 충격적이고 선동조이긴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의 문제의 발언도 “조선이 러시아에게 안 먹히고 일제에게 먹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요지였다. 그에 대해서 “차라리 러시아가 낫지 일제는 훨씬 더 막장이었다”라고 정당한 반론을 할지언정, 앞뒤 문맥 다 떼어내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조센징을 일제가 보살펴 준 건 축복이었다”고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 매장하는 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본인은 예전에 “그나마 숙군 작업부터 한 뒤에 6 25가 터진 건 천만다행이었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걸 마치 “김 용묵이라는 작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터진 게 잘 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인 것이다. 난독증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본인은 지 박사의 행적에서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 본업을 버리고 생뚱맞은 분야로 뛰어든 점,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점(공 박사는 남산으로, 지 박사는 광주로. -_-)이 말이다. 특히 지 박사가 5 18 사태에 대해서 야사를 캐고 자료 모으는 건, 공 박사 버전으로 치면 과거 글자판 제정 과정의 흑역사를 추적하는 수준과 맞먹는다.

물론 본인은 이 승만과 박 정희에 대한 견해 외에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그의 견해에 다 동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잘 모르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의 자세를 높게 사고 존경할 뿐이다. 요즘 세상에 색깔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서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 자가 바로 빨갱이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빨갱이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렇게 분명한 흑백논리 자체는 성경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다. 빨갱이 대신에 죄나 지옥 같은 개념을 집어넣어 봐라. (게다가 지 박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일제 강점기가 ‘러시아 강점기에 비해서’ 축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이 나라에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주민 중에도 지 박사를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건 상식. 지금 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지 박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티를 공개적으로 낸 것만으로도 본인을 싫어하게 되고 떠나고, 심지어 <날개셋> 사용마저 보이콧한 사람이 좀 있다. ^^;;; 지 만원 박사의 사상이 뭐가 그렇게도 악하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대화조차도 원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있을 것이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지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2 08:30 2010/07/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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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특 시절

본인은 올해로 예비군 2년차이고 전반기 향방 작계도 받았다. 이 달 말이면 군필자가 된 지 드디어 만 2년이 된다.
본인이 그럴 때 전투복 상의 안에 늘 즐겨 입는 옷은 병특 회사에서 받은 체육 대회 참가용 티셔츠(물론 회사 로고가 새겨진)이다. 이제 그 회사와는 인연이 없는 사람이니, 가끔 집안에서 입거나 아니면 이런 용도로나 쓴다.

향방 작계 가서 하는 건 동네 산책, 심폐 소생술, 8자 매듭 포박 정도뿐이다. 이번에 가니까, 전투모는 아예 따로 제출했다가 퇴소 때 돌려받는 시스템이 추가되어 있었다. 전투모는 무조건 지참해야 하는 예비군 복장이면서 정작 훈련 때는 전혀 쓰이지 않는 정말 아이러니한 물건이다. ^^;;; (훈련 중엔 거기서 지급하는 헬멧? 철모? 화이바만 쓰므로)

우리나라에서 남자로 태어나서 군대라는 산을 넘고 나니까, 그 전과 후에 인생을 보는 느낌이 확 달라져 보인다. 정말 대학 입시에 이은 제 2의 큰 관문이 맞다.

이제 다 지난 일이니까 슬슬 털어 놓는 얘기이다. 뭐, 내막을 이미 아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본인은 윈도우용 온라인 게임 개발 회사 두 곳을 거치면서 병특으로 병역 의무를 수행했다.
전직을 한 번 했다는 얘기인데, 의무 근무 기간인 1년만 딱 채우고 나서 대우가 더 나은 곳으로 냅다 튄 게 아니라, 순수하게 회사가 망해서 전직한 것이었다. 그래도 첫 직장은 내게 생명 같은 병특 TO를 준 곳인데 내가 무슨 달다 쓰다 말을 할 자격이 있으리요?

그 회사에서 만든 게임은, 비록 아주 유명한 대박은 아니지만 매니아 계층들로부터는 아주 사랑 받던 게임이었다. 망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다시 하고 싶다고 그리워하는 사용자의 블로그 글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이다.

나중에 간 곳은 회사 자체는 아주 튼튼하고 유능한 게임 개발자들이 꼭 가고 싶어하는 곳이었다. 벤처 기업으로 시작했으나 이제 큰 건물의 여러 층을 차지하고 어느 정도 중견 기업 수준으로 성장한 규모였다. 송년회나 체육 대회도, 꾀죄죄한 작은 회사 다닐 때는 경험할 수 없는 으리으리한 스케일로 치렀었다.
게다가 이 직장은 본인이 지금까지 서울에서 다닌 직장 중 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지라, 마음만 먹으면 자전거 출퇴근조차 가능한 곳이었다.

여러 모로 좋았으나... 내가 근본적으로 게이머나 게임 개발 적성이 전혀 아니니 그곳 역시 본인의 생업이 될 수는 없는 분야였다. 게다가 거기는, 회사 자체야 건재하지만 내가 소속되어 있던 스튜디오가 내가 병특이 끝난 후 2년이 채 안 지나서 망했다. 프로젝트가 접혔다.

사실 내가 입사하던 당시부터도 그 스튜디오는 이미 만들어 놨던 게임을 고치고 또 고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출시가 꽤 심하게 지연된 상태였다. 그 후에 행해진 작업은 온라인 게임을 전혀 안 하는 내가 보기에도 시스템을 WOW와 굉장히 비슷하게 고치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제대로 서비스도 못 해 보고 경영진으로부터 돈과 시간 먹는 하마라고 낙인 찍힌 채, 더는 돈과 시간을 못 주겠다고 접게 된 것이다.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백수십억 원대의 자금이 투입된 프로젝트가 말이다.

첫 직장에서 만들던 게임은 Direct3D SDK만 갖고서 밑바닥에서 완전 쌩으로 모든 걸 만들어 놓고 있었다. 후덜덜..;;
다음 직장의 게임은 게임브리오 기반이었다. 나름 상업용 게임들이 비주얼 C++을 써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다는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개발 중이던 게임을 테스트한답시고 바닷가, 숲 속, 중세 도시, 창공, 던젼 등 여러 맵들을 돌아다니면서 마치 여기가 내 집인 것 같은 아늑함(?)을 경험하기도 했었는데... 모든 게 역사 속으로 사라진 셈.

어지간한 게임 개발 회사에서는 남이 짜 놓은 코드를 고치고 덧대는 잔업이나 한다.
자기가 진지하게 따로 시간을 투자하여 코드를 공부하지 않는 한 3D 그래픽 이론이라든가 게임 엔진 구현 원리 같은 근본 테크닉을 배울 기회는 없다. 자기 하기 나름이다. 직장에서 괜히 당신에게 돈까지 주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회사들을 거치면서 내가 만난 '직속 상사'들의 컴퓨터 실력은 제각기 정말 대단했다. 그들 역시 대학 졸업 후 처음엔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서 그 바닥에 최소한 10년이 넘게 구르다가 관리자의 자리에 오른 사례일 것이다. 나는 언제쯤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아니, 근본적으로 저 길이 내게 맞는 적성이라 할 수 있을까?

미래에 나의 소속이 또 바뀌면 지금 다니던 직장에 대한 추억도 블로그에 언젠가 올라올 것이다.
그나저나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는 직장인에게 일정 예측이란 분야를 막론하고 정말 영원히 해결 불가능한 스트레스로 남을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1 08:42 2010/06/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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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간선 도로

동부 간선 도로는 서울 지하철 7호선의 강북 구간과 비슷한 노선으로 서울 동부를 관통하는 자동차 전용 도로이다. 중랑천을 나란히 끼고 달리며, 노원구, 중랑구, 광진구 등을 경유한다.

한강을 끼고 달리는 올림픽대로와 강변북로는 주행해 봤지만, 저쪽으로는 지금까지 갈 일이 도통 없었다. 그러다 요 며칠 전에 노원구 일대까지 드라이브를 했는데, 역시 자동차가 막히지만 않으면 지하철보다 확실히 빠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서울 북부도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보다 은근히 더 빨리 갈 수 있었다.

이 도로는 상행과 하행이 하천의 이쪽과 저쪽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는 점이 매우 특이하다. 다른 도로에서는 한쪽은 평지이고 다른 쪽은 그 옆에 강 위의 고가와 같은 식으로 건설된 경우는 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고... 한강으로 치면 올림픽대로는 동쪽으로만 가고, 강변북로는 서쪽으로만 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도로에 진입한 후, 하천 건너편에 있는 방면으로 들어가려면 긴 다리를 빙 돌아서 건너야 한다.

달리다 보면 차창 밖으로 코레일 동부 전동차 사무소를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수백 m 간격으로 철길 두 개가 위로 교차하는 것도 볼 수 있는데, 본인은 처음엔 ‘중앙선이 상행과 하행이 이렇게 긴 간격으로 분리되어 있지는 않을 텐데 뭐지?’ 하고 처음엔 궁금했다.
하지만 답은 간단하다. 교각이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는 하나는 중앙선이고, 다른 하나(빨간색)는 경춘선이다. 앞으로 경춘선은 망우 역에서 분기하게 되므로 옛 선로 교각은 없어질 것이다. 이는 앞으로 성북 역은 경춘선 열차 취급 기능을 상실할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동부 간선 도로는 편도 3차선인 총 6차선 도로이다. 진출입로가 입체 교차로로 정말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어서 초행자는 내비 없이는 찾아가기 정말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뿐만 아니라 워커힐, 구리, 남양주, 양평 등도 언젠가 국도를 타고 철도 중앙선 노선을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싶다. 이쪽은 이렇다 할 고속도로도 없고 관광용으로 정말 좋은 코스인지라 주말마다 차들로 극심한 정체라고는 들었다. 하긴, 주말에 서울 근교에 안 막히는 도로가 어디 있겠는가? 경부 고속도로도 토요일 오전에 승용차로 하행을 타 봤다가 피 본 기억도 생생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06 08:38 2010/05/06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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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옛날에 만든 프로그램들

1. PentaCombat (마지막 빌드 2000): 2000년대 이후로 개발이 중단됐다. (그 당시 이 프로젝트 이후 곧장 <날개셋> 한글 입력기 개발로..) 나름 3*3과 4*4 판단 알고리즘을 굉장히 정교하게 구현해 냈고 오목은 AI 연구용으로도 굉장히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더 개발을 못 하게 된 게 무척 아쉽다. 지금 공개되어 있는 컴파일 EXE, DLL은 무려 비주얼 C++ 4.2로 빌드되었으며, 날짜도 1999년~2000년대이다. ㅎㄷㄷ

2. WordTech (마지막 빌드 2007): 이것도 굉장한 애착을 갖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국내에서 스크래블/업워드 크로스워드 게임을 자체 개발한 사례는 이 프로그램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컴퓨터 AI에다 네트워크 기능까지 말이다.
지금은 10년 전보다 더 효율적인 단어 목록 자료구조와 더 빠르고 똑똑한 AI 알고리즘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네트워크 쪽도 구닥다리 DirectPlay 대신 저수준 네트웍 API로 새로 짤 필요도 있다. 하지만 본인은 이제 이걸 도저히 손댈 수 없는 처지가 됐다.

3. <날개셋> 타자연습 (마지막 빌드 2009): 더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게임은 좀 3D로 고쳐야 하고 각종 바이러스들의 비주얼 효과도 더욱 현란하게 고쳐야 한다. 윈도우 비스타부터는 운영체제의 기본 내장 게임조차 Direct3D를 쓰는 세상이 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네트워크 기능을 적극 도입하여 온라인 타자방, 실시간 연습글 업데이트 같은 기능도 넣어야 한다.
하지만 타자연습도 작년 말 3.21을 끝으로, 더는 내가 더 손을 볼 수 없는 사실상 개발 중단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지원 중단이라는 뜻은 아님. 여건상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지는 못하지만, 버그 패치나 보안 업데이트 정도만. ㅎ)

4. <날개셋> 한글 입력기: 그나마 지금까지 독자적인 아이템으로, 10년간 가장 열정적으로 기능 연구와 개선을 해 온 프로그램. 엔진 쪽도 사실 최하 6.0까지는 더 만들고 싶지만 현실은 5.7, 혹은 5.53에서 끝날지도 모르겠다. 엔진 차원에서 더 고차원적인 개념을 생각하자면 끝도 없지만, 일반 사용자의 관점에서는 지금 엔진만으로도 기능은 이미 너무 많아서 미처 다 활용도 못 할 수준이리라.
지금의 5.5x대 엔진을 바탕으로 아무래도 여타 운영체제 포팅을 할 가능성부터 먼저 찾는 걸로 계획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그것부터 된 후에 여건이 남으면 엔진 작업도 더 할 것이다.

본인에게는 <날개셋> 한글 입력기만큼이나, 한글과 관련된 또 완전히 다른 솔루션을 연구하고 싶은 게 있다.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 카드도 슬슬 꺼내 봐야 할 것 같다. 그러니 언제까지나 기존 아이템의 유지 보수에만 매달려 있을 수가 없다. 지저분한 윈도우 IME 쪽 버그 살펴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은 점점 발전하는 것 같다.
역시 어렸을 때, 실패에 대한 위험 부담 내지 사회적 책임이 적을 때 하고 싶은 일을 실컷 해 놔야 한다. 게임으로 허비하기엔 인생은 너무나 아깝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과감하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을 만들었기 때문에 10년 뒤에 이것이 5.5까지 버전이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전에 허접하게나마 저 두 보드 게임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기술과 경험을 근거로 이듬해에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저 프로젝트들 생각만 하면 그나마 프로그래머다운 기질이 팍팍 살아나는 걸 느낀다. 하지만 나는 순수 공돌이나 전산학도는 아니기에, 내 경쟁력을 위해서는 아무 프로그램이나 짜서는 안 되고, 컴퓨터를 수단으로 삼아 다른 특정 분야에서 활로를 찾아야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0/02/26 09:05 2010/02/2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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텝스 또 친 소감

두 주 전에 텝스 시험을 쳤는데, 2년 전에 학교에서 응시한 기관 텝스 때에 비해서 점수가 50점이 넘게 "하락"했다. 멍.... =_=

듣기: 뒷부분으로 가니까 내가 지금 영어를 듣고 있나 하는 회의감이 들 정도로 멍... 총알 같은 속도와 모르는 단어들 때문에 내용을 전혀 못 알아들은 문제도 속출했다. 영어 공부 의욕마저 대략 상실. 내가 실력이 떨어졌다기보다는 2년 사이에 텝스가 더 어려워진 것 같다. -_-;; 아니면 기관 텝스하고 정식으로 치는 텝스 사이의 gap이 크던가.

==> 결과: 완전히 파토를 친 줄 알았지만, 듣기는 2년 전에도 원래 워낙 못 했었기 때문에 하락의 폭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음. 다행.

문법: 삽질을 너무 했다. 앞부분은 별다른 트러블 없이 한 것 같았는데 슬슬 시간에 쫓기기 시작했고, 게다가 마지막의 어려운 세 문제.. 즉 장문에서 문법이 틀린 문장을 찾는 건.. 아무리 문장을 뚫어지게 들여다봐도 문법이 틀린 놈이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대략 패닉. 여기서 점수 다 깎였지 싶다. 나중에는 앗차 답이 이거였는데! 한두 문제는 뒤늦게 답을 찾아냈지만, 시간에 쫓겨 미처 수정도 못 하고 틀린 답안을 그대로 제출하는 삽질까지 했다. ㅠ.ㅠ

==> 결과: 예상했던 수준대로 점수 하락. 그래도 문법은 워낙 배점이 낮아서 그렇게 큰 데미지는 아님. 나름 문법은 자신 있다고 생각해 온 나의 자존심에 상처. -_-;;

어휘: 이제야 듣기와 문법에서 받았던 데미지를 극복하고 평상시 페이스를 되찾았다. 쭉쭉 읽다 보면, 답이 이것밖에 없다는 게 금세 찾아졌다. 이상하고 모르는 생소한 단어는 의외로 맨 뒷부분에 잠깐밖에 안 나왔고 양이 적었다. 시간도 그렇게 부족하진 않았다.

==> 결과: 완전 극과 극. 2년 전에 상당히 어렵다고 느꼈고 점수도 제일 안 나온 분야를 이번에 압도적으로 제일 잘 했다. 문법 점수가 까내려간 것보다 이거 점수의 상승폭이 더 컸다. =_=;;

독해: 도대체 문장을 봐도 하얀 건 종이, 검은 건 글씨.. 무슨 소재에 대해 다루는 글인지 앞이 캄캄할 때가 좀 있었다. 왜 이렇게 빨리빨리 머리에 들어오질 않을까?
하지만 어휘 때부터 회복한 컨디션을 바탕으로 최대한 빨리 넘기면서 풀었다. 머뭇거리질 않았다. 시간 조절 성공. 뒷부분의 어색한 문장 찾기 문제도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년 전과 비슷한 점수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 결과: 망했다. 그때보다 몇 문제 더 틀린 듯한데, 일단 문제 수에 비해 배점이 매우 높은 분야이고 2년 전에 워낙 만점에 가깝게 잘 쳤다 보니, 이번 점수 하락에 제일 기여한 주범은... 앞부분에서 말아먹었다고 생각한 듣기도 문법도 아니요 독해 분야가 됐다.

내가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생각했고 2년 전에 당당히 1+ 등급이 나왔던 문법과 독해의 등급이 싹 까내려가고, 어휘만 급상승한 이상한 시험 결과가 나왔다.:
물론 나도 평소실력이나 다름없는 상태에서 컨디션 조절 워낙 못 했고 삽질에 패닉을 거듭하긴 했지만,
"이건 내가 변한 게 아니라 시험이 변한 거다" 에 한 표 던진다. -_-;;;

물론 지금 점수만으로도 국내 어딜 가더라도 영어로 밥벌이 하는 직종만 제외하면 입시, 입사 스펙 따위를 걱정할 필요는 없긴 하다. 하지만 역시 텝스 800에 토익 900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_-

하긴 평생에 해외에 나가 생업에 종사해 본 적이 없고, 20대 나이 이후로 공부다운 공부 한 번 한 적 없으며, 미드나 CNN 방송, 영어 팝송, 영화 따위와도 담을 쌓고 지내 온 주제에 이런 영어 시험에서 대박이 나길 바라는 것 자체가 도둑놈 심보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정말 영어 쓸 일 없다. 그리고 영어는 역시 한국인에게 어려운 언어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2/20 09:31 2010/02/20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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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 소감

본인은 얼마 안 있으면 적성 검사를 받아야 할 정도로 면허를 딴 지 오래 됐지만, 지금까지 차를 몬 경험이 거의 없고 운전 실력 역시 그 이름도 유명한 장롱 면허 수준에 머물러 왔다. 명절 때나 아니면 다른 일로 인해 고향을 드나들 때는 당연히 선택의 여지가 없이 대중교통만 이용했다.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한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번 설에는 어떻게 여건이 잘 맞은 덕분에 21세기 이래로 최초로 자차를 이용했고, 더구나 꽤 장거리를 직접 운전까지 해서 무사히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맨날 고속버스에 의지해서 다니던 경로를 내 손으로 주파하니 무척 기분이 좋았다.

1. 천호대로를 타고 지하철 5호선 라인을 따라 동쪽으로 쭉: 천호대로는 서울 시내에서 중앙 버스 전용 차선이 가장 먼저 생겼을 정도로 넓은 도로이다. 직진만 하면 되지만 길 자체가 직선으로만 된 것은 아니다. 중간에 커브도 있고, 언덕도 꽤 있다. 이쪽 구간은 한강이 수평선 방향이 아니라 수직선 방향에 가깝게 흐르기 때문에, 동쪽으로 가는 과정에서 천호 대교로 한강을 건너게 된다.

2. 외곽 순환 고속도로의 상일 IC까지 43번 국도: 강동 역까지 통과하고 나면 5호선 라인을 벗어난다. 이때부터 차선이 좁아지고 지나가는 차들이 눈에 띄게 뜸해지며, 아파트 대신 각종 화원, 공원, 언덕이 나타나면서 시가지가 아닌 교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직진만 쫙 하면 고속도로가 나오니 이보다 간편할 수가 없다. 상일 IC로 진입하지 않고 또 직진을 하면 하남시가 나온다.지도로만 보던 지역을 실제로 구경할 수 있었다.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이 반포 IC 인근에서 경부 고속도로를 접수하고 있다면 강변 동서울 터미널은 중부 고속도로를 접수하고 있다. 사실 이 터미널 자체가 중부 고속도로의 활성화를 위해 정책적으로 세워진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서울 터미널에서 출발하여 중부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버스들은 알고 보면 굉장히 비효율적인 경로를 이용한다.

먼저 올림픽 대교를 이용하여 강남으로 건넌 뒤, 올림픽대로를 타고 한참을 동쪽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주행한다. 남쪽으로 가야 할 차가 북쪽으로 가서 상일 IC가 아닌 강일 IC를 통해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버스 차창을 살펴보면 서울 지하철 5호선 고덕 차량기지 근처를 지나는 게 보이니, 얼마나 우회 경로인지 알 수 있다. 이번에는 자가용을 직접 운전한 덕분에 그런 우회 경로를 피할 수 있었다.

3. 외곽 순환 고속도로(100): 8차선으로 된 근사한 도로이다.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하남 분기점이 나오고 여기서 중부 고속도로(35) 쪽으로 가면 동서울 요금소가 나온다. 새벽에 출발했지만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극심한 정체가 계속됐다.

4. 중부 고속도로: 이 도로는 처음엔 8차선인 것처럼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 차선의 절반은 제2 중부 고속도로(37)로 빠져나가고 4차선으로 줄어든다. 제2 중부는 잘 알다시피 중부 고속도로의 용량 확장을 위해, 영동 고속도로(50)와 만나는 호법 분기점까지 오리지널 중부의 옆에다가 도로를 또 지은 것이다. 중부 고속도로는 경기도 남동부의 험악한 산지를 터널과 교량으로 연결한 험한 선형이기 때문에, 경부처럼 차선 확장을 도저히 할 수 없고 옆에 도로를 또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5. 영동 고속도로: 호법 분기점과 여주 분기점까지는 잠시 영동 고속도로 구간을 이용한다. 8차선의 아주 시원시원한 길이었지만 중부내륙 고속도로(45)로 진입하는 길부터는 다시 차들이 거북이걸음을 시작했다.

6. 중부내륙 고속도로: 가장 장거리 구간이지만 정체가 심해서 좀 답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4차선이고 최고 시속이 100이 아닌 110이며 터널과 고가 교량이 많다는 점에서는, 중부 고속도로와도 비슷하다.
내가 운전하던 무렵엔, 정체에 시달리던 하행과는 달리 맞은편 상행은 차가 거의 없고 한산하여 극단적인 대조를 보였다. 정체는 거의 괴산 이남까지 가서야 풀려서 차가 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날씨가 정말 판타지 급이었다. 눈이 부슬부슬 내리다가 산악 지대로 가니 함박눈으로 돌변했는데, 터널을 하나 지나고 나오자 눈이 그치고 햇볕이 났다. 그랬는데 어느 샌가 또 잔뜩 흐린 날씨로 바뀌었다. 하지만 다행히 빙판길은 없었으니 눈 때문에 딱히 고생하지는 않았다.

7. 경부 고속도로: 김천부터 드디어 내게 아주 친숙한 경부 고속도로이다.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8차선이나 되는 유일한 고속도로이다. 물론 경산부터는 6차선으로 줄어들고 영천 이남부터는 4차선으로 줄어들지만 말이다. 경부 고속도로가 개통한 지 벌써 40주년이 돼 가는데, 아직까지 4차선을 유지하고 있는 극소수 구간이 그쪽이다.

여기부터는 가끔 서행 상태가 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소통이 원활했다. 무척 인상적인 점은 아까와는 반대로 상행이 막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그나저나 포항으로 가는 길목인 도동 분기점에서의 극심한 혼잡이었다. 저 많은 차들이 포항을 드나드는 차들이라는 것에 적지 않게 놀랐다.

서울에서 경주까지 문에서 문까지 7시간 가까이 걸렸으니 그렇게 빨리 가지는 못했다. 워낙 정체가 심해서 이거 시속 100은 낼 기회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래도 이따금씩 앞에 차가 없을 때는 순간적으로 130~140까지 밟은 적도 있었다.

영천에서 경주까지는, 중앙 분리대와 입체 교차로까지 갖추고 준 고속도로 급으로 변모해 있는 4번 국도를 이용했다. 시설 좋고 차도 거의 안 다니니 최적의 드라이브 코스였다. 최대 시속 80km로 설계되어 있지만 120까지 밟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역시 고속도로와의 차이는 뭐니 뭐니 해도 커브의 반경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거친 어느 고속도로에서도 찾을 수 없는 급커브가 곧바로 느껴졌다. 국도와 고속 국도의 차이가 이런 것이구나. 도로의 설계 최대 시속은 이런 것까지 감안하여 산출된 것이다.

이렇게 무사고로 한번 완주는 했지만, 여전히 난 운전이 어렵게 느껴진다.
군대에서도 사고는 이병 시절이 아니라 어설프게 고참 행세를 시작하는 일병 시절에 많이 난다고 하듯, 자동차 사고도 완전 긴장이 바짝 든 왕초보 시절보다는 스스로 초보 딱지를 뗐다고 생각하고 방심할 때 가장 많이 난다고 생각한다.

아직까지도 핸들을 잡던 기억이 머리에 선하다. 방심하다가 금방이라도 앞 차를 추돌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 말이다. 차간 거리를 굉장히 길게 유지하면서 달리고 싶은데 그러면 내 뒤에 있던 차가 어김없이 앞으로 끼어드니 그렇게 하기도 쉽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2/15 08:42 2010/02/1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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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성경 통독 내력

※ 1독 (1998. 10. 28 완료)
그 전부터도 성경을 한번 쭉 읽긴 해야겠다는 부담감은 갖고 있었지만, 미처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세벌식 연습과 더불어 마음을 강하게 먹고 실행에 옮겼다. 개역 성경 본문에다 각종 관주와 주석, 해설이 딸려 있는 <아가페 큰글 성경>을 읽었다.

그 당시는 아무 신학 배경도 없고 성경을 혼자서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지식 수준이었으니, 이게 무슨 말인지는 온통 해설과 주석에 의존해야만 했다. 비록 다음 장을 읽으면 앞 장 내용을 까먹는 악전고투를 하면서도, 어쨌든 태어나서 꾸준히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을 완독하기는 이 때가 처음이었다. 예후, 히스기야 같은 사람 이름은 이 때 이미 익숙해졌다.

※ 2독 (2000. 5. 21. 완료)
이듬해에는 드디어 영어 성경에 도전해서 그 이름도 유명한 NIV를 다 읽었다. 아직 비록 킹 제임스 성경을 모르던 시절이었지만, 각종 성경 책명과 인명/지명, 신학 용어의 영어 표기에 익숙해짐으로써 훗날 KJV를 읽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죽임 당하신 어린양’은 영어로 killed를 안 쓰고 slain을 쓴다는 걸 처음 알았고, crucify, atonement 같은 단어도 이때 알게 됐다. 사도행전이 무척 재미있는 책이라는 인상을 받았고, 각 책들이 분위기별로 차이에 대해서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쓰는 신세계역(NWT)이 성경을 어떻게 변개했는지를 NIV와 대조하면서 분석했다. 이로써 본인은 고등학교 시절에 성경을 두 번 완독했다.

※ 3독 (2004. 3. 6. 완료)
본인은 대학에 가서는 한동안 성경과는 동떨어진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면서 인생의 일대 격변을 겪었다. KJV는 그저 400년 전에 출간된 ‘개역성경’의 영문판뻘 되는 성경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2독 이후로는 현대어 위주로 여러 다양한 성경이나 읽어볼까 하다가 그 계획은 전면 수정되었다. 3독은 2003년부터 시작했는데, 영어 킹 제임스 성경과 기존 성경을 일일이 대조하고 메모하고 영어 단어장까지 만들면서, 지금까지 본인이 행한 통독 중 가장 꼼꼼하게 읽었다. 본인이 지금 갖고 있는 성경 지식의 상당수가 이때에 축적되었다.

※ 4독 (2006. 12. 22. 완료)
영어는 시간 관계상 보지 않고 우리말 흠정역 성경만으로 3독보다는 가볍고 빠르게 읽었다. 다만, 이때는 누나와 함께 번갈아가며 ‘낭독’을 했다. 덕분에 이때 우리 누나도 난생 처음으로 나와 함께 성경 1독에 성공했다.
이때쯤부터 드디어 이스라엘 주요 족장의 가계도, 사복음서의 구성별 차이 같은 게 슬슬 머리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5독 (2007. 10. 3. 완료)
한국어, 영어를 거의 섞어 가며서 읽었다. 일과가 끝나고 남은 시간에 성경을 읽는 게 아니라, 성경부터 읽고 다른 일과를 진행하는 습관이 붙기 시작했다. 1~3독 때와는 달리, 특별히 성경을 읽었나 하는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도통 기억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소선지서의 각 책 내용도 머릿속에 남기 시작하고, 성경의 어느 책 어느 부분 하면 대충 무슨 내용인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 6독 (2008. 9. 21. 완료)
5독과 동일한 페이스로 영어 문장을 다시 독해하며 읽었다. ‘성경 지도’가 전보다 더욱 선명해졌다.

※ 7독 (2009. 11. 17. 완료)
가장 최근에 성경을 통독한 기록이다. 여전히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었나? 예전엔 이런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좀 느낌이 다르구나’ 하는 면모를 발견하면서 놀라곤 한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통상 1년 1독 속도로 성경을 읽고 있는데, 이를 좀더 올릴까 고민 중이다. 하지만 영어 성경은 조금 해 봤는데 증속이 여전히 무리이다. -_-;;
그리고 7독이 끝난 후, 아직까지 8독을 시작하지는 못하고 통독이 중단된 상태이다. 4독째부터는 거의 1년에 한 번꼴로 거의 쉬지 않고 성경을 많이 읽어 왔는데 그 페이스가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겠다.

바깥에서 온통 세상적인 고민, 번뇌-_-, 육신의 욕망에 노출되어 살다가 매일 짧게나마 세속적인 현대 영어가 아닌 킹 제임스 영어에 발을 담글 필요가 있으며, 인간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사고방식에 내 머리를 동기화시키는 작업이 크리스천에게 꼭 필요하다. 그게 꾸준히 진행되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나의 영적 상태는 알게 모르게 차이가 벌어지게 마련이다.

나는 신학 지식도 없고 히브리/그리스어도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절대무오하게 온전히 기록해서 오늘날까지 보존하셨다는 사실을 못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최소한 신학의 저주 정도에는 안 낚일 자신이 있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고 비평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고 비교하고 분석하고 믿고 따르고 싶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22 01:11 2010/01/22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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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변천사

본인이 고등학교 때부터 딱 바뀌어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생활 습관을 들자면,
매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세벌식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트북 컴퓨터를 끼고 살기 시작했다.

그래서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노트북 없이 산 기간은 몇 개월이 채 안 된다.
노트북보다 더 작은 기계에조차 관심을 두지 않을 정도이다. 통화와 문자 이외에 스마트폰 같은 건 전혀 필요를 느끼지 않으며, 심지어 지하철 안에서 MP3조차도 노트북을 켜서 들을 정도이다.

초대: 삼성 센스 (1998. 3. ~ 2003. 5.) 지하철에서 분실
펜티엄, 윈도우 95/98급, 800*600 화면
USB 포트도 없는 완전 구닥다리였지만, 잃어버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인생의 멋진 동반자였고 이걸로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무려 2.x대까지 개발해 냈다. 램이 원래 16MB이던 것을 48MB까지로 확장하고 유선 랜 카드도 따로 장착했다.
전반적으로 튼튼하고 특히 내장 마이크 성능이 매우 뛰어난 게 마음에 들었으나, 아래 화살표 같은 키캡이 곧 빠지고 99년 무렵부터는 액정 접촉 불량도 조금씩 감지됐다. 2000년 말엔 한번 대대적인 수리를 받기도 했다.

2대: HP 프리자리오 (2003. 7. ~ 2005. 11.) 사고로 파손
펜티엄 III 중고, 윈도우 2000/ME급, 1024*768 화면
초대 노트북보다야 훨씬 성능이 좋지만, 그렇게 좋은 성능은 또 아니었기 때문에 데스크톱 완전 대용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중고여서 그런지 값은 쌌지만 내구성이 좀 약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때 USB 플래시 메모리를 최초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무선 랜 카드를 달아서 썼다.
2004년 말엔 컴퓨터가 아예 켜지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여 메인보드를 교체하는 수리를 받았다. 그렇게 계속 사용해 왔지만, 그로부터 1년 남짓 뒤엔 노트북 책상 위의 열린 창문으로 폭우가 그대로 쏟아지는 사고가 나는 바람에 기계 사망.

3대: LGIBM XNOTE (2005. 12. ~ 2008. 5.) 자폭
펜티엄 M 준중고, 윈도우 XP급, 1400*1050 화면
이제야 좀 데스크톱 성능과 비슷한 컴퓨터다운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화면도 큼직하고, 윈도우 XP도 마음껏 돌리고 배경 사진도 트루컬러로 지정하고, 가상 머신도 돌리고 용량 걱정 없이 백업도 마음껏 하고.. -_-;;

모든 게 괜찮았고 이 기계를 한 5년은 쓸까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역시 준중고여서 그럴까? 구입한 지 몇 개월이 안 돼 액정 접촉 불량이 생겼다. 화면을 펼치다 보면 화면이 꺼져 버리는 것 때문에 굉장히 답답했고, 서비스 센터에 문의하여 부품을 여러 차례 교체한 뒤에도 이건 지병처럼 달고 다녀야 했다.
그러다 결국은 병특 기간 3년을 미처 못 채우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5.0이 완성되는 걸 미처 구경 못 하고서 저절로 메인보드가 사망해 버렸다. 컴퓨터가 잘 돌아가다 갑자기 꺼져 버리거나, 켜지질 않았다. 내가 평소에 좀 험하게 다루긴 했어도 딱히 물이 들어가거나 떨어뜨리거나 외부적인 요인은 없었다.

4대: LGIBM XNOTE (2008. 6. ~ ) 현역 활동 중
Core2Duo, 윈도우 비스타급
3대 노트북의 후속 기종으로, 성능은 더욱 향상됐다. 또한 요즘 추세와는 달리 4:3 화면인 아주 희귀한 기종인데, 본인은 와이드 대신 4:3 화면이 훨씬 더 익숙하고 이를 더 선호한다.
지금까지 약 1년 반 동안 썼지만, 잔고장이 전혀 없이 어디서나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어서 매우 만족스럽다. 역시 신제품이 튼튼한 건 사실이다.

액정 접촉 불량도 없고, 심지어 노트북의 고질병인 키캡이 빠진 것도 지금까지 전혀 없다. 엔터 키가 조금 약한 상태이긴 하지만 우려할 만한 정도는 아니다. OS로 비스타를 사용하고 있으나 7을 설치하는 데도 아무 문제 없다. 앞으로 수 년은 더 이 기계를 쓸 것이다. 3년을 미처 못 쓴 2대와 3대보다야 임기가 더 오래 유지되지 않을까? ^^

노트북은 너무 작으면 성능에 비해 가격이 치솟으며 더구나 본인처럼, 빠른 타자와 넓은 화면이 보장되는 준 데스크톱 급의 개발 환경이 필요한 사람에게도 부적합하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무겁고 크면 LCD 때문에 역시 가격이 비싸지며, 들고 다니기도 힘들어진다.
역시 자기 용도에 맞는 녀석 구입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4 23:55 2010/01/14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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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군 갔다 온 소감 (2009/7/8)

본인, 병특 만료한 지 그래도 1년이 경과했고, 예비군 1년차 동미참 훈련에 들어갔다. 첫 날 갔다 온 소감을 분야별로 옴니버스 형태로 정리해 본다.

  총평: 합법적으로 꽤 오래 회사 빠질 구실 생겼다고 그저 꿀빨고 좋아만 할 사항은 아니다. =_=;; 훈련 자체야 하나도 안 빡세며, 조교나 교관은 그냥 친절한 후배 내지 동네 아저씨인 거 맞다. 하지만 오지로 왔다 갔다 하면서 군화 군복 차림으로 장시간 땡볕에서 고생하고 평소에 안 하던 꽤 긴 거리 도보-_-를 하는 거.. 본인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고생스러웠다. 갔다 오니 피곤해 죽겠다.

  훈련 교장의 접근성: 퇴소 명령이 떨어진 후 집까지 도착하는 데 1시간 반이 걸렸다.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고 전철+버스 연계가 괜찮으며 부대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는 것은 좋았다. 하지만 부대 내부의 집결/퇴소 장소에서 정문까지 가는 게 걸어서 15분 ㅜㅜ! 자가용 내지 수송 버스(물론 있었으나, 비싸고 어차피 집 근처까지 바로 안 감)가 아쉬운 순간이었다.

  현역 훈련병과 예비군의 차이: 물론 군기가-_- 들어간 정도라든가 조교/교관들이 대하는 태도 같은 것도 천지 차이이지만, 내게 질문한다면 외형상으로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란 바로, “머리 길이와 담배”라고 요약하겠다. 이거 뭐 단순 80년대 장발 스타일을 넘어서, 뒤에서 보면 여자처럼 보일 정도로 치렁치렁 긴 머리를 묶은 예비군 아저씨도 있었으니 원! 현역 입대하는 훈련병이라면 상상도 못 한다.

  다른 아저씨들하고는: 말 한 마디도 안 했고 할 일도 없다. 서로 아는 사이인 예비역들은 같은 지방에서 자란 친구이기라도 한 걸까?
사실 근본적으로 나는 내 고향이 아닌 지역으로 부대 지정을 받았으니 이런 곳에서 아는 사람을 찾을 수도 없다. 차라리 2002년 신검 받을 때는 그때 중/고등학교 동기놈하고 얼굴 마주치기도 했는데 말이다.
작대기 네 개짜리 예비군 병장이 대부분이고, 가끔 해병대 출신 예비역도 보였는데 이들은 명찰이 빨간 배경 노란 글씨인 게 인상적이다. 나처럼 병특이나 공익 출신은 상의 주머니에 계급 작대기가 찍혀 있지 않다.

  담배: 우리나라의 내 또래 남자들의 평균 흡연율을 짐작케 할 정도였다. 현역 입대 훈련소라면 상상도 못 하겠지만, 일과 끝나고 조금만 틈만 생기면 예비군 아저씨들은 대부분 담배 뻑뻑 피워 댄다. 교관들도 “담배 피우는 분들은 건물 아래 말고 밖에서 피우세요” 이런 주의나 주는 정도이다.
예비군들이 머물렀던 훈련 교장 인근은 온통 담배꽁초 투성이가 되었다.

  손전화: 주위 아저씨들은 무지막지하게 들고 다닌다. 이건 반입을 원천 금지하는 게 사실상 불가능이니, 교관들도 사실상 묵인해 주고, 훈련 중에 대놓고 전화질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는 수준이다. 사실 예비군 가 보면 기다리느라 보내는 시간 엄청 많은데, 심심하면 전화기라도 만지작거려야 직성이 풀리긴 한다. 하지만 나는 뭐 딱히 전화할 상대도 없고, 갖고 다니기가 거추장스러우니 앞으로도 손전화를 갖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점심 식사: 인터넷 상으로는 고작 4000원짜리 밥이 요 따위라니, 도대체 예비군 식사 납품 업체는 차익을 얼마나 챙기는지 모르겠다는 식의 악플이 엄청 많았지만 오늘 여기서 먹은 밥은 괜찮은 편이었다. 국은 육개장 내지 갈비탕 컨셉이었고, 더 달라고 하면 무료로 꽤 푸짐하게 많이 주기도 해서 잔반 하나 안 남기고 잘 먹었다. 밥에 관한 한은 나는 불만 없었다.

  총: 예비군한테는 이거 뭐 2차 세계 대전 내지 6 25 때나 쓰였다는 카빈 소총이 지급됐다는 루머-_-도 있었지만, 내가 간 교장에서는 오로지 M16 소총이었다. 논산 육군 훈련소에서도 만져 본 총이어서 친근했지만 사격 때는 정말 정신없었다. 물론, 폼으로만 들고 다니는 개인 소총으로 총 쏜 건 아니고, 사격은 사격장에 비치되어 있는 실제로 동작-_-하는 별도의 총으로 한다. ^^;;
물론 거기서 근무하는 현역들은 여전히 K2 소총 쓰더라.

  정신 교육: 앞으로 현역들의 복무 기간이 더 짧아지고 저출산 때문에 인구 갈수록 적어지면 예비군의 중요성이 더 커지게 되며, 여러분들이 국가 안보의 초석이라고 띄워 주는 멘트는 꽤 많더라. 그 외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며 과거에 이렇게 나쁜짓 많이 저지르고도 전혀 반성의 기미가 없다는 식의 레퍼토리임. ㄱㅅ 그나저나 입소식 때, 현역 조교들도 앞으로 제대 후 우리처럼 될 애들인데, 걔네들 보기에 부끄러움이 없게 훈련에 임해 달라고 말한 연대장의 훈화가 좀 마음에 와 닿았다. =_=;;
참고로 정신 교육 때는 사람들 진짜 거의 다 잔다.

여기까지는 좀 평범한 내용이었고, 지금부터가 좀 썅소리 나오는 내용.. -_-

  날씨: 정말 증오로 죽이고 싶었다. ㅜㅜ 별로 덥지도 않았고 섭씨 20도 후반 정도의 평범한 흐린 날 같았는데 땀이 왜 이렇게 분수처럼 솟구치는지! 이미 오전이 채 가기 전에 온몸이 땀으로 샤워를 했다. 땀으로 젖은 손은 끈적끈적. 한번 어디 걷고 나면 몸의 기력이 싹 빠지는 느낌이었고, 강당에서 엎드려서 눈 좀 붙였다간 땀이 눈으로까지 들어갈 정도로 흘렀다.
햇볕은 별로 나지도 않은 거 같았는데 결국 팔뚝은 약간 벌겋게 타서, 손목시계를 찬 부위와 나머지 부위가 색깔이 다르게 보일 정도가 됐다. 어쨌든 날씨에 관한 한 최악이었다. 참을 수 없는 찝찝함!

  갈증과 피로: 훈련 자체는 예비군 특유의 정말 얼렁뚱땅 야메였음에도 불구하고, 집에 도착하자 녹초가 됐다. 술 좀 마셔서 알코올 독기가 몸에 퍼진 상태도 아닌데, 다리가 이렇게 저리고 쑤신 건 참 오랜만에 겪어 본다. 2년 전 훈련소에서 행군하고 나서도 저랬나? =_= 내가 체력이 꽝이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고 멍하고 짜증만 날 지경.
그리고 갈증. 내일 갈 때는 손수건(땀 닦으러)하고 사제 물병으로 물을 최소한 1리터는 꼭 챙겨 가야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을 정도로 제대로 고생했다. 너무 목이 말라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물, 우유 등으로 거의 2리터 가까이를 비웠다. (음료수 사 먹고 싶지는 않아서. -_-)
그나마 집에서 싹 샤워하고 속옷 다 갈아입고 에어컨 바람 쐬면서 쉴 수 있었으니 망정이지, 동원(2박 3일 외박)이었으면 정말 자살했겠다. =_=;;

  증오로 죽이고 싶은 전투화: 내 발 상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그 널널한 예비군 훈련을 극기 훈련으로 바꾼 일등공신이었다. 도대체 재질이 궁금하게 느껴질 정도로 까끌까끌 배긴다고 해야 하나? 결국 고무링이 닿는 발목에는 긁힌 흔적이 남았고, 양발 모두 발뒷꿈치는 완전히 까져 버렸다. ㅆㅂ~  사람 피부 껍질을 벗긴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체험했다. 발이 그렇게 아프니 뛰지도 못하고 오르막이나 내리막 걷는 것도 힘들고 엉거주춤 걸어야 했다.
이거 때문에 샤워도 제대로 못 했다. 가죽이 벗겨진 발뒷꿈치로  물이 흘러들어가자 “Oh no~” ㅠ.ㅠ
발도 발이지만 양말도 굉장히 무리를 많이 받았을 텐데, 이렇게 한두 번 신은 양말은 곧 발가락이나 뒤꿈치 쪽에 얼마 못 가 펑크가 날 것 같다. 이거 군화 뒷부분에다가 솜이나 휴지 같은 거라도 잔뜩 집어넣어야겠다.

이 짓을 금요일까지, 그리고 월요일에도 해야 한다. 발도 그렇고 팔뚝, 그리고 총을 메었던 오른쪽 어깨까지 벌건 자국이 생겨 있다.. 벌써 side effect가 꽤 크다.. ㅜ.ㅜ
빌어먹을 전투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손을 좀 봐야 되는데 막막하구나.

동미참 교육은 금요일이 끝이지만, 월요일엔 지난번에 경조사 때문에 못 간 전반기 향방 작계 보충 교육을 받게 된다. -_-;;
집에는 회사 다닐 때보다야 일찍 들어왔지만, 무척 피곤하고 자기도 일찍 자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그렇게 많이는 못 난다. 그래도 동원보다는 동미참이 낫다. ㄱ- 부하 직원이 예비군인 회사의 생각은 이와 좀 다르겠지만.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10:07 2010/01/11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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