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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봄 근황 -- 호박

2023년 올해도 벌써 1/4이 지났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오긴 했지만 지난 3월 하순부터는 갑자기 5~6월 수준으로 너무 더워졌다. 이건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전례가 없던 이상 고온이었고, 덕분이 벚꽃도 예년보다 훨씬 일찍 폈다.

그리고 비가 너무 오랫동안 안 와서 난리였다. 뭐, 건조하니 빨래가 아주 잘 마르고, 바람 불 때나 그늘 안이나 밤이 됐을 때 금세 시원해지는 건 좋았다. 하지만 갑자기 산불이 너무 많이 나고 물 부족 때문에 농사에도 애로사항이 꽃폈다. 인왕산과 예봉산이면 본인이 수 년 전에 오르기도 했던 산인데.. 거기까지 산불이 덮쳤었다.

그러다가 요 며칠 전, 식목일을 전후해서 정말 반가운 단비가 내렸다.
비의 양 자체는 여느 평범한 봄비를 웃돌았고 적은 게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가뭄이 워낙 너무 심했기 때문에 완전한 해갈까지 바라기에는 이마저도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이러다가 여름에는 또 반대로 미친 듯한 폭우 물폭탄 때문에 난리 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요즘은 지구에 물의 분배에 양극화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아무튼;;

본인은 지난 2월말 이후로 개인적인 근황엔 별 변화가 없다. 그래도 호박 관련 얘깃거리들이 여럿 수집됐으니 이것들을 엮어서 늘어놓도록 하겠다.

1. 포천에서 구한 최우수 호박

지난 2월엔 SNS 지인과 함께 포천의 어느 식당에서 늙은 호박을 2덩이 사 왔었는데, 그걸 이 달 초에야 모두 죽 쒀서 먹어치웠다.

이 두 아이는 크기와 외형과 무게는 비슷했지만 내부 상태는 서로 꽤 달랐다.
먼저 먹은 녀석은 2월 말에 벌써 꼭지 부분이 물렁해지기 시작해서 황급히 어서 처분해서 죽 쒀 먹었다. 물렁해진 부분을 여럿 도려내야 했다.
쪼개 보니 내부는 지저분한 편이었고, 씨가 저절로 싹이 터서 콩나물처럼 된 것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과육이 별로 맛이 없어서 설탕과 꿀을 많이 보충해 넣어야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주나 뒤에 먹은 나중 녀석은 정반대.. 가히 최상의 상태에 최우수 품질을 자랑했다.
처음 호박을 두 동강 내서 개방할 때의 포스부터가 달랐다.
마치 성경 복음서에서 어느 여인이 향유 옥합을 깨뜨리듯이, 향긋한 호박 내부 냄새가 온 방에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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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육은 선명한 주황색이요, 일체의 병충해나 변질의 조짐이 없었다. 그리고 죽의 맛은 아주 달콤했다.
내부는 너무 마르지도 젖지도, 휑하지도 않고 적당히 촉촉했다.
씨는 내부에서 오발아한 것 없이 깔끔하게 가지런히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쪼개 본 늙은 호박들 중에서 정말 역대급으로 훌륭했다...!!! ^^ 그래서 여기서 좀 자랑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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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호박은 좋은 호박이었습니다~~~^^)

바로 이 아이. 지난 5주 동안은 내 방에 얌전히 앉아 있으면서 비주얼만으로 나에게 정신적인 만족과 평안과 힐링을 선사했다.
동글동글 납작 쭈글쭈글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그냥 기분이 평안해지고 좋아진다.
죽으로 바뀐 뒤엔 이 아이는 거의 2주 동안 내게 달콤한 맛과 영양을 선사하게 주었다.

  • 두 동강 내서 씨 제거하는 데 10분
  • 옴푹 들어간 주름을 따라 칼로 써는 데 30분
  • 껍질 까는 데 40분
  • 더 잘게 깍두기 모양으로 써는 데 30분

혼자서 다 분해하는 데 2시간이 덜 걸렸다. 세상에 어느 채소가 처리하는 데 이 정도로 손이 들까?
먹을 갈듯이 꾸준히 인격 수련하는 마음으로 호박을 썰고 껍질을 벗겼다. ^^
호박을 많이 다뤄 보면 이것들이 다 같은 호박이 아니며 상태의 좋고 나쁨에 대한 감이 생기긴 하더라.
호박을 도축하는 데도 요령과 매뉴얼이 생기고 속도도 더 빨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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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호박의 내부 상태를 겉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게 참 묘하다.

2. 키운 호박

호박을 사 먹기만 하면 심심하니 2~3월에는 계속해서 실내에서 호박을 키웠다.
지난번 근황글에서는 1월 말에 수분된 단호박을 하나 소개했었는데, 그 뒤로도 2월 중순, 그리고 3월 중순에 수분 성공한 열매(2개)가 더 생겨서 단호박을 총 3개 얻었다. 일단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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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올겨울 동안 실내 호박 농사는 작년에 비해 결과가 별로 좋지 못했다.
겨울에 춥고 바깥 바람을 제대로 못 쐬어 주긴 했지만, 이를 감안해도 시꺼먼 진딧물과 흰가루병이 유난히 너무 심했다. ㅠㅠㅠ 재사용하고 있는 흙이 문제인가?

이 때문에 잎들이 제대로 마음껏 자라지 못하고 다들 병들어 죽었다. 기껏 생겨난 잎들을 몽땅 뜯어내야 했는데, 새로 생긴 잎에도 병이 자꾸 도지는 편이었다.

그리고 한 달에 1개꼴로 수분을 성공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기껏 맺힌 열매가 더 커지지 못했다. 더 커지지 않는 정도를 넘어, 이미 있던 열매도 쭈글쭈글 오그라드는 기미가 보였다~!!
그러니 열매가 겨우 귤이나 주먹만 한 크기밖에 안 되지만 바로 따서 먹어야 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낙과’이다. 낙태의 식물 버전..
호박이 애써 키우고 있던 자기 열매를 포기하고 떨굴 정도이면 이건 영양이 엄청나게 부족하거나 생존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는 뜻이 아닌지..?? 안타까웠다.

그래도 날씨가 따뜻해지니 지금은 흰가루병이 예전에 비해서는 퍼지지 않는 것 같고, 호박이 그때보다는 더 잘 자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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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룻밤 사이에 새싹이 고개를 빼꼼 든 모습이다. (같은 놈임)
호박 덩굴이 뻗어 나가는 모습은 뭔가 국수 면발 같기도 하고 뱀 똬리 같기도 하고.. 사랑스럽게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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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덩굴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시라~~
이제 집에서 화분 상자에 담아 키우던 호박들을 밖에 갖다 놓고, 야외 아지트에다가도 호박을 더 심었다. 식목일은 이제 나무를 심는 날이 아니라 호박을 심는 날인 듯..??
아무쪼록 올해는 재작년 같은 호박 대박이 다시 재현되었으면 좋겠다. 겨우내 황량해져 있던 땅을 호박 덩굴로 잔뜩 replenish시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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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러운 호박들.. 인터넷 아무 데서나 퍼 온 사진임. 내 밭 아님)

3. 호박 품종

내가 생각하는 호박의 매력 포인트는 이런 것들이다.

  • 정말 크고 무거움
  • 수박 등 다른 박과와 달리, 납작하고 쭈글쭈글함. 평범한 공 모양이 아님
  • 색깔도 누렇게 변하고 흰 가루가 앉음.
  • 그래서 단순히 익었다, 삭았다고 하지 않으며, 늙었다고 표현함

호박은 품종이 워낙 다양한지라,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늙은 호박은 영어권에서는 long island cheese pumpkin 내지 Chinese tropical pumpkin이라는 품종명으로 불린다고 한다.
그에 비해, 단호박은 kabocha squash 또는 Japanese pumpkin이라고 불리며..
길쭉한 애호박은 zucchini라고 불린다. 그런데 주키니도 다 같은 주키니가 아니다.

서양 주키니는 거의 가지나 심지어 오이처럼 극단적으로 길쭉한 애호박이다. 우리말로는 그냥 ‘돼지호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애호박은 그것보다는 통통하고 약간 타원처럼 생기기도 했다. 이건 Korean zucchini, 또는 그냥 aehobak이라고 통용되어서 나름 한국 브랜드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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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호박은 더 통통하고 색도 더 옅은 반면, 주키니-돼지호박은 거의 오이 급으로 더 홀쭉하고 색깔도 더 짙은 듯..??)

애호박, 늙은호박, 단호박에 각각 한중일 국가 정체성이 각인돼 있다는 게 무척 흥미롭다. 하긴, 중국식 늙은호박 중에 쭈글쭈글한 걸 '맷돌호박'이라고 하고, 더 통통하고 표면이 매끈한 건 아예 '조선호박'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다.. ^^
그리고 서양 주키니에는 웬 뜬금없이 '돼지호박'이라는 별칭이 있다. 얼마 전엔 이 호박의 일부 품종이 미승인 유전자 조작 논란 때문에 뒤늦게 잔뜩 반품되고 폐기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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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복덕방은 외형부터 첫인상이 아주 좋고 마음에 든다. ^^
들르는 모든 고객들에게 딱 맞는 부동산 매물이 합리적인 가격으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들어오듯이" 딱딱 굴러 들어오기를 축원한다.
호박은 둥글둥글 큼직하고 복과 덕이 담겨 있는 채소이다. 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23/04/18 08:35 2023/04/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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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덩치와 스케일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탱크, 가장 큰 비행체(비행선), 가장 큰 육상 대포는 나치 독일에서 만들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자력 이동 기계인 Bager 288도 독일제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전함은 태평양 전쟁 시절에 일제가 만들었고, 그때 이후로 전함은 미사일에 밀려서 유행이 끝났다. 그 대신,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모함은 현재까지 미국이 타이틀을 쥐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핵폭탄은 냉전 시절에 소련이 만들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도 지금은 파괴되고 없지만 구소련의 작품인 An-225이었다.
허나, 세계에서 가장 큰 우주 발사 로켓은 역시 냉전 시절에 미국이 개발했던 새턴 V이며.. 얘가 인간을 달로 보내는 용도로 쓰였다.

2. 거리

아폴로 8호 이전까지 인간은 지표면으로부터 겨우(?) 200~300km 떨어진 가까운 우주에서 지구를 빙빙 돌며 우주 유영이나 우주선의 도킹 같은 것만 테스트 했다.
그러나 1968년 12월 말에 발사되었던 아폴로 8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을 태우고 단순히 지구 대기권만 벗어난 우주가 아니라, 지구의 중력을 벗어난 아득히 먼 우주까지 나가서 달을 한 바퀴 돌고 돌아왔다.

지표면으로부터의 거리 킬로수가 갑자기 1000배가 넘게 뻥튀기된 것이다. 정말 놀랍지 않은가?
1960년대 안으로 인간을 반드시 달에 보내야 한다는 일념으로, 무인부터 보내면서 차근차근 테스트했어야 할 여러 위험한 사항들을 한 미션 때 몰아서 수행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전 미션들도 지구를 돌기만 했을지언정, 비행 속도 자체는 비행기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상태였다. 아폴로 8호가 추가로 한 일은 거기에다 몇 분 동안 약간만 더 가속을 해서 그 속도로 달에 가게 한 것이었다. 나머지 3~4일에 달하는 시간 동안은 그냥 우주 글라이더 같은 관성 활강이다. 우주 비행은 지구에서 우주로 나가는 게 우주에서 달로 가는 것보다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뭐 하나라도 잘못되면 아폴로 8호는 승무원들을 태운 관짝이 된 채 우주 저 멀리 날아가 버리거나, 지구로 영원히 못 돌아오고 달을 돌게 됐을 수도 있는데.. 위험한 도박이 성공해서 승무원들이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사람이 탔을 때야 달에 무조건 최대한 빨리 가야겠지만.. 그런 제약이 없는 무인 탐사선은 겨우 그 거리(?)도 다른 행성들의 중력 평형점을 이용해서 연료를 최대한 아끼면서 달에 천천히 가기도 한다. 지난 8월에 우리나라에서 발사된 '다누리'처럼 말이다.

3. 아폴로 11호 이전의 10호

1969년 7월의 아폴로 11호는 뭐 인간이 역사상 최초로 지구 외의 다른 천체에 발을 딛는 데 성공한 과업이었다. 정말 전세계를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는 이 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했으며, 서로 전쟁 중이던 나라들이(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일명 축구 전쟁) 월드컵 축구 경기도 아니고 달 착륙을 관람하려고 잠시 휴전을 했을 정도였다.

그럼 11호의 영광에 가려진 앞뒤의 콩라인 은메달 미션들은 어땠을까?
10호는 8호 때와 달리 달 착륙선이 준비돼 있었다. 착륙선이 달에 내려가는 시늉만 살짝 하다가 도로 상승해서 사령선과 합체하고 돌아왔다. 요 최종 절차만 빼면 그 전까지는 이제 달에 다녀올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생각 같아서는 이때 바로 달에 착륙까지 하고 싶었겠지만, 이때는 달 착륙선이 땅의 맨땅에서 다시 발사되어 귀환할 준비가 다 갖춰지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달 표면과 착륙 예정지의 상태에 대한 조사도 다 돼 있지 않았다.
달에다 내 뼈를 묻어 버리고 싶다면야 어째 무리해서 착륙을 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지구로 돌아올 수는 없었다. ㄲㄲㄲㄲ

10호 발사 당시에 NASA 관계자들은 승무원들이 공명심에 사로잡혀서 통제를 무시하고 달 착륙을 감행하는 객기를 부리면 어떡하나 약간 불안한 기색이었다고 한다.

4. 아폴로 11호 다음의 12호

초대박을 쳤던 아폴로 11호의 바로 다음에 달에 갔던 12호 승무원의 심정은 10호 승무원의 심정과는 사뭇 달랐을 것 같다. 달나라에 간다니 정말 가슴이 벅찼겠지만 하필 인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는 2등이니까 말이다.

아폴로 계획 중에서는 큰 사고가 터져서 승무원들이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생환한 13호가 유명하다. 그러나 자잘한 사고나 돌발상황은 이때 말고 늘 있었으며, 특히 12호는 발사 거의 직후에 지구상에서 벼락을 맞았다..;;; 타이밍 한번 참.. ㄲㄲㄲㄲㄲ

이 대미지 때문에 사령선 안의 컴퓨터가 상당수 다운되고 손상이 발생해서 미션이 거의 실패 직전까지 갔다. 로켓의 맨 꼭대기에 있는 비상 탈출 로켓이 실제로 사용될 뻔했지만 어째어째 대미지를 수습하고 달에 잘 다녀왔다. 달에 최초로 가는 것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 다녀오는 것도 충분히 감격스럽기는 했을 것 같다.

이 12호는 미국이 1967년에 먼저 달에 보냈던 자국의 '무인 탐사선'인 서베이어 3호의 착륙 지점과 거의 같은 곳에 착륙했다. 당연히 의도적으로 지점을 거기로 맞춘 것이다. 그런데 유인에 비해 무인 달 탐사 내력은 정말 존재감이 없긴 한 것 같다.;;

그 외에, 12호는 달 탐사 장면을 컬러 텔레비전으로 생중계 하려 했지만.. 승무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니다가 실수로 렌즈를 태양 쪽으로 들이대 버렸고.. 맹렬한 열과 빛 때문에 카메라가 망가져 버려서 생중계는 행해지지 못했다. 이런 해프닝도 있었다.

벼락을 맞은 직후, 지상 기지에서는 발사체들의 상태에 이상이 없는지 파트별로 꼼꼼히 질문하고 지시를 해서 점검과 보수를 마쳤다. 그러나 다 마치고 지구 재진입 때 펼쳐야 하는 낙하산은 지금 이 상태로는 확인을 할 수 없었다. 만약 낙하산에 이상이 생겼다면 승무원들은 달 탐사를 마치고 지구에 다 와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게 됐을 것이다.

기지에서는 "낙하산이 펼쳐지지 않을 수도 있다"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미리 알고 죽으나, 아니면 그때가 다 돼서야 뒤늦게 알게 되나 상황이 달라지는 건 전혀 없으니.. 기왕이면 임무 수행 중에 승무원들의 사기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12호의 낙하산은 이상 없이 잘 펼쳐졌다.

5. 13호 승무원의 대사

  • "어 휴스턴, 이거 문제가 생겼다"의 대사가 we've had인지 혹은 we have인지에 논란이 많은가 보다. "이제 막 돌발상황이 발생했다"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모르던 문제가 쭉 있었다"로 뉘앙스가 미묘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 안 그래도 똥줄 타는 상황이었는데 사령선이 재진입 중에 이례적으로 오랫동안 연락이 두절된 이유는?? 아무래도 수십~수백 kg에 달하는 월석을 가져오지 않아서 사령선이 예상보다 더 가벼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 대신 13호는 달 착륙선도 예기치 않게 지구에 도로 가져오게 됐다. 달 착륙선은 바다로 풍덩..

  • 재진입 성공 후 이들의 첫 교신은 옛날 영화 "에어 포스 원" 결말부의 "Liberty 24 is chainging the call sign. Liberty 24 is now air force one."와 같은 느낌을 준다.

6. 과학 탐사

아폴로 계획은 전반부 11~14호, 그리고 후반부 15~17호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전반부를 넘기고 후반부에 가서야.. 달에 다녀오는 과정은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안정화가 됐으니(?) 승무원도 무작정 극기훈련 생존왕 군인 파일럿이 아니라 민간인 과학자 중에서도 선발할 여유가 조금씩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달에 갔다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달에서 뭔가 의미 있는 채취와 탐사를 하는 것에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긴 것이다. 15호는 최초로 월면차를 투입됐으며, 역대급으로 월석을 많이 캐어 오기도 했다.

하긴, 1910년대에 남극 탐사 경쟁이 벌어졌을 때도 아문센 팀은 역대급 오지로 모험을 떠나는 만큼, 전원 생존 전문가 위주로 팀원을 뽑았다. 개썰매를 타고 다니고 개고기도 서슴지 않고 먹었다.

그러나 스콧 팀은 자금빨 기계빨만 믿고 남극을 너무 여유롭고 낭만적으로 생각했나 보다. 민간인 과학자도 끼워 넣었으며, 가면서 수시로 남극 생태 관찰을 하고 돌 같은 거 수집도 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다가 스콧 팀은 1등을 놓쳤을 뿐만 아니라, 전원 남극에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됐다.;;

7. 마지막 17호

끝으로, 1972년 말에 마지막으로 발사된 아폴로 17호야.. 어찌된 일인지 전 미션을 통틀어서 유일하게 깜깜한 밤에 발사됐다(왜?). 그리고 달에서 달 착륙선이 발사되어 달 지면을 이륙하는 광경이 촬영된.. 유일한 미션이기도 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15, 16호 때도 촬영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것이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월면차와 함께 달에 남겨진 카메라를 지구 기지에서 1.4초가 넘는 랙을 감내하면서 원격으로 어렵게 조종했다는 게 신통방통하기 그지없다. 달 착륙 승무원이 조종한 게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이 나와 있는 지구 사진이 바로 아폴로 17호 때 달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폴로 17호 승무원은 이게 사실상 마지막 유인 달 미션이라는 걸 알았던 모양이다.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하고 확인사살까지 한 이상, 제아무리 천조국이라도 이 정도로 등골이 휘는 미션에 계속 자금을 대 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애초에 11호 때부터 "달에 가겠다고 돈지랄 하지 말고 당장 도탄에 빠진 민생부터 챙겨라~!!" 이런 발사 반대 시위가 있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래서 유진 서넌 선장은 지구로 귀환할 타이밍이 되자 달 착륙선에 오르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겨서 방송으로 내보냈다고 한다.

"... we leave as we came, and God willing, as we shall return, with peace and hope for all mankind. Godspeed, the crew of Apollo 17." -- 우리 반드시 돌아올 그 날, 전 인류의 평화와 희망을 담아오겠습니다. 아폴로 17호 대원들, 잘 다녀와라.


이건 뭐 맥아더 장군이 필리핀을 떠나면서 "나는 되돌아올 것이다" 이러고, 리 승만 할배가 휴전을 수락하면서 "지금은 비록 휴전하지만 우리는 북녘의 동포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통일 과업을 꼭 이루고 말 것이다" 이렇게 말한 것과 비슷한 비장함이 느껴진다.
달에 최초로 착륙했을 때 11호 승무원이 한 말, 일명 "작은 발자국과 위대한 도약" 드립과도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 같다.;;

8. 소스 공개

여담이지만, 지난 2010년대쯤부터는 github에 온갖 옛날 골동품 소프트웨어들의 소스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오픈소스니 카피레프트니 하는 이념에 충실하던 존 카맥 같은 몇몇 매니아들이나 유행이 지난 Doom, Quake 같은 자사 게임의 C 코드 소스를 공개하는 게 고작이었는데..

저 때부터는 페르시아의 왕자(Apple-II 원본)나 MS-DOS 1.x 같은 까마득한 유물의 어셈블리어 소스도 올리는 게 유행이 됐다. 물론 걔네들은 지금 환경에서 빌드는 못 한다. -_-
그 와중에 아폴로 11호 우주선의 총괄 제어 시스템 프로그램의 어셈블리어 소스조차도 NASA에 의해 공개되기도 했다. 마가렛 해밀턴 선생과 그 동료/부하들의 손길이 깃든 그 코드 말이다.
달 표면 사진이나 각종 로켓 설계도뿐만 아니라 이런 것까지 공개되다니, 컴덕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하다.

미국이나 서구권에서는 이런 것도 다 보존되어 있는데 우리나라는 서울 올림픽 총괄 전산 제어 시스템인 GIONS의 소스가 전해지지 않는 것이 개인적으로 몹시 안타깝고 유감스럽다. 시스템을 잘 만들어 놓고는 일회용으로만 써먹고 끝났기 때문이다. 유지보수? 노하우 전수? 수출? 아무것도 안 되고 개발팀이 공중분해되어 흩어졌다.

우주선에서 돌아가는 프로그램이라면 임베디드에 어셈블리어이겠지만, 얘는 IBM 메인프레임에서 돌아가는 물건이고 성격이 성격이다 보니.. 내가 듣기로는 말로만 듣던 그 코볼(!!) 언어로 작성됐다.
얘를 시험한 이전 미션인 전국체전은 제미니나 아폴로 초기 미션이고, 86년 아시안게임은 아폴로 8이나 10 정도에 대응하고, 서울 올림픽은 대망의 아폴로 11.. 이러면 싱크로가 잘 맞는데..

사실, 전국체전이나 아시안게임은 실패했을 때의 쪽팔림과 사고 여파가 올림픽보다 작을 뿐이지, 세부 종목이나 처리할 것들의 복잡도는 오히려 올림픽보다 더 높았다. 그러니 베타테스트 용도로는 아주 적격이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5 08:35 2023/04/1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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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는 1942년 6월 13일, 리 승만 할배가 워싱턴 D.C.에서 Voice of America 단파 라디오를 통해 고국으로 내보냈던 7분 남짓한 길이의 항일 독립 투쟁 격려 선전 방송이다.

“나는 이 승만입니다.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외 2300만 동포에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 지극히 기쁜 소식을 전하노니, 누구든지 귀가 있는 자는 듣고 주변 동포에게도 이 소식을 일일이 전해 주시오~ 일제의 학정에 신음 중인 우리 동포에게 자유의 소식을 전하시오. 철창 감옥에 갇히고 형틀에 묶여서 죽어가는 우리 동포에게 생명의 소식을 전하시오…” (약간 요약하고 각색)

내 개인적으로는 이런 방송이 있다는 건.. 지난 2007년 말에 출간된, “일본 그 가면의 실체”(청미디어) 책에 별첨돼 있던 음원 CD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

저 방송이 나갔던 때는 할배가 Japan Inside Out 책을 저술해서 출판한 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그리고 1942년 6월이라는 날짜를 보면 알 수 있듯, 저 때는 이제 막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겨우 승기를 잡았던 시점이었다. 아직 카이로고 포츠담이고 그런 선언이 나오기도 1년 이상 전이었다.

하지만 할배는 배짱 장사를 서슴지 않았다. 그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반 년 이상 일찍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패망도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예상하고 확신했던 것이다.

“저 악독한 왜적은 하와이와 필리핀을 일시에 침략하여 제 무덤을 팠으니 미국은 잊지 않고 보복할 것입니다.
왜적들은 지금은 의기양양해 있지만 이내 혹독한 불벼락으로 응징당하고 패망의 길로 갈 것입니다. 일황 히로히토는 필히 파멸당할 것이니, 이는 세상이 다 아는 이치입니다.”

“우리 독립군이 중국 및 영국 미국과 더불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당당히 왜적을 타파할 기회가 주어졌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요? 이 순신의 후예로서 우리 군인의 의기와 용맹이 세계에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 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아~~ 전시에 선전 선동은 이런 식으로 피끓는 말투로 하는 게 정석이구나 싶다. 전쟁에서 사기라는 게 기여하는 바가 정말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을 저 따위로 했으니.. 할배가 나중에 미국을 상대로도 광복군 규모를 말도 안 되게 부풀리고 개 뻥카를 쳤겠구나 싶다. 이제 이해가 된다.

1940년대 정도면 일제의 악랄 집요한 탄압 때문에 국내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사실상 씨가 마른 상태였다. 본인이 전에도 얘기했지만..
“일제가 망할 일은 없을 것이고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 건 영원히 물 건너갔구나, 이대로 세대가 교체되면 한국인의 정체성은 진짜 씨가 마르겠구나. 물론 최후의 발악을 하는 소수의 불령선인 민족주의자가 있긴 하겠지만, 말 그대로 최후의 발악일 뿐 대세를 뒤바꾸지는 못하겠구나.. 지금까지 30년을 애썼지만 아무 소득이 없는 걸 보면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이미 이런 생각이 퍼져 있었다.

항일 독립 운동은 무의미하고, 이제는 2등 신민 조선인의 권익 향상, 차별 철폐, 일본 내에서의 참정권 쟁취 운동이나 해야겠다는 게 그 당시 국제 정세를 알지 못하는 민족주의 지식인 상류층의 주된 생각이었다.

이런 와중에 단파에 실려 태평양 너머로 울려 퍼진 리 승만 할배의 독려 메시지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엥, 이건 뭐지..?? 울나라 임시정부인지 뭔지는 중국에 있는 걸로 들었는데 본부가 언제 미국으로 이사 갔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할배의 선전 방송은 일제의 입장에서는 어지간한 불순불온 삐라를 훨씬 능가하는 최악의 불온 유언비어였다. 그들은 자국민이건 조선인이건, 전쟁 중에 외국 단파 라디오의 청취를 엄금했다. 요즘으로 치면 서버가 외국에 있는 불법 도박이나 마약을 단속하듯이 단속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당시 조선인 중에서 엄청난 고가였던 단파 라디오에 접근 가능해서 외국 소식을 직접 접할 수 있었던 사람은 방송국 기술자와 언론인 등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혼자만 이 소식을 들은 게 아니라, 목숨 걸고 방송 내용을 주변에 퍼뜨리다가 결국 1942년 하반기부터 줄줄이 걸렸다.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코렁탕을 먹고 투옥됐다. 이것은 '단파 방송 밀청 사건'이라고 알려져 있다.

옛날에 전파 통신 기술이 미약하던 시절에는 전파 거리가 적당히 길고 지구 전리층에 반사되고 산란성 투과성도 적당하고.. 취급하는 기술 난이도도 아예 초단파 FM 방식보다는 낮던 ‘단파’ 라디오가 장거리 통신용으로 즐겨 쓰였다. 음질이야 메롱이기 때문에 천상 음성용이지, 음악은 안 된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모스 부호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에 비해 지금 인터넷 기반 스트리밍은 대륙 간 전송은 거의 다 해저 케이블이 담당하고, 지역 내에서 무선 전송용으로는 곳곳에 기지국을 도배해 줘야 하는 극초단파가 쓰인다. 이런 기술의 변화도 참 격세지감이다.

* 여담: 반일 감정

요즘 본인은 채널 A도 아니고 채널 W라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의 문화랄까 분위기가 지난 쌍팔년도 이후로 참 많이도 달라졌다는 생각을 몇 년 전부터 해 왔다.
위성 방송 같은 걸로 외국 방송을 쌩으로 그대로 보는 것도 아니고.. 나름 정식으로 수입돼서 우리말 자막까지 붙은 일본 드라마와 다큐를 그대로 보다니..

거기에다 일본어 학습(한국인 화자 입장에서)이라든가 일본 연예인 얘기도 나온다.
노인과 바다처럼 망망대해로 나가서 낚싯대로 '마구로' 잡는 어부가 울나라로 치면 무슨 인간극장 다큐의 소재이다.
아무리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이라지만 저게 제도적으로 가능한가 궁금했다. 검색을 해 보니 채널 W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일본 방송 컨텐츠의 직수입 방영이 허가된 케이블 방송이라고 한다.

일제 시대의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했던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는 SKY 명문대에 일어일문학과가 없다. 아.. 내가 알기로, 그나마 셋 중 한국대에만 1980년대가 돼서야 일어일문 비스무리한 학과가 유일하게 추가됐다.

최근에 만들어진 '항거' 영화에서야 형무소장이나 간수, 헌병뿐만 아니라 조선인 죄수인 유 관순 본인까지도 현장에서는 현실 고증을 반영해서 일본어를 쓰는 걸로 나온다. 그러나 옛날 1950, 70년대에 만들어진 국내의 유 관순 영화들은 반대로 재판정에서 일본인 판사와 검사까지도 편하게 한국어를 쓴다.
그 시절에 일본어를 구사하는 배우를 구하지 못해서일 리는 절대 만무하고, 당연히 그냥 "왜색을 제거하기 위해서" 언어 고증을 무시한 것이었다.

찬송가조차 일본인이 작사한 건 슬쩍 '작사자 미상'으로 처리하고 넘기기도 했었다.
가라데?? 당연히 태권도라고 바뀌어서 소개됐다.
국어에 별 희한한 단어까지 다 일본식 한자어라고 추방해야 된다느니 마느니 그랬다.

역사, 지리, 언어 등 온갖 분야에서 "원래 잘 될 수 있었는데 일본놈들의 로비와 방해 때문에 못 된 거다" 식의 피해망상이..
적당하거나 그나마 동정하거나 이해 가능한 수준이 아니라, 병적으로 치달으려 했다.

그리고 피해의식에 비례해서 일본한테 너무 쫄아 있기도 했다.
나 학생 시절에 정신력 강조하는 선생들의 훈화 말씀만 듣고 있다 보면.. 이렇게 군기가 개 빠져 갖고는 얼마 못 가 우리나라가 쫄딱 망해서 다시 일제 식민지가 될 것만 같았다. -_- 일제 식민지가 아니면 다시 북괴가 남침해서 적화통일 되거나.. =_=

과장 좀 보태면 쓰레기 하나 없는 일본 길거리가 우리집 안방보다 더 깨끗할 것 같았다.
일본인은 진흙처럼 잘 뭉치고, 조선인은 엽전까지는 아니어도 모래알처럼 제 팔 흔들면서 안 뭉치다가 각개격파 당한다는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들었다.
이러니 1990년대 말까지 "일본은 없다", "일본은 있다" 같은 선정적인 책이 많이 팔리고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그러던 게 세월이 많이 흐르기도 하고, 울나라도 일본의 경제와 과학기술을 많이 따라잡고, 다이쥬 대통령 때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됐고 월드컵은 어쩌다 보니 한일 공동 개최로 치렀고..
또 요즘은 일본보다도 중공이 훨씬 더 많이 깽판 치고 망언 어그로를 끌고 있기도 하니 원색적인 반일감정이 상대적으로 누그러졌다.

뭐, 아직도 반일 정신병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과거사 정도면 "일본이 이만치 유감이니 사과니 보상이니 했으면 많이 한 거다, 더 논하지 않고 퉁치기로 해 놓고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더 문제"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요즘은 많이 눈에 띈다.
아직까지 일본이랑 대놓고 갈등하는 티라도 나는 아이템은 독도 하나만 남은 것 같다.

허나, 역대 울나라 대통령 중에 리 승만 할배만치 편집증적으로, 거의 트라우마 급으로 일본 싫어하고 반일 반일거린 지도자는 없었다. 북괴와 전쟁을 치르던 중에도 “어디 우리 집안 싸움에 개입하기만 해 봐라, 우린 왜놈부터 죽여 버린 다음에 괴뢰군을 쏘겠다” 이랬었다.

세상에 저런 방송을 했던 당사자가 대통령이 됐는데 반일을 안 하고 배기겠는가? 이건 당연한 귀결이니 우리가 이해해야 된다.
한편으로, 오죽했으면 이런 반일 대통령 밑에서조차 노 덕술이니 김 창룡 같은 간부가 있어야 했겠는지도.. 자세한 맥락을 살펴보고 이해해야 된다.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들과 교류하며 가능한 한 화평하게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일본하고는 독특한 과거사 때문에 우리만의 고유한 외교 정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 -- 할배가 양자 이 인수에게 남긴 유언 중 일부

이건 성경으로 치면 마치 예수님이 구원을 위해 유대인에게만은 행 2:38 같은 회개의 침례를 추가로 요구하고, 베드로에게는 뭔가 특별한 회개· 회복 절차를 요구하신 것과 비슷한 맥락인 것 같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고, 또 베드로야.. 이와 관련해서 인생 최악의 사고를 한번 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래를 지키고 울창한 산림 환경을 지켜 준 것은 고래기름의 대체제와 화석연료 원자력을 개발해 준 과학자 기술자 공학자라고 믿는다. 알량한 환경팔이 파이터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고 본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를 자랑스럽게 만들고 반일 항일 극일을 제일 잘 실현해 준 것은 횬다이 쌤숭 같은 기업이라고 믿는다. 국부를 창출하고 실력으로 일본을 이긴 주역들이 아닌가? 어설픈 반일정신병자들이 기여한 건 거의 없다.

아무쪼록, 독도가 일본땅이라고 대놓고 로비 한다거나, 일본 기업에다가 횬다이 쌤숭 기업의 기술 기밀을 팔아넘기는 간첩이 없는 한... 지금 우리나라는 친일파가 문제인 나라는 절대 아니라고 본다. (일본이 아니라 중공이나 북괴에다가 팔아넘기겠지!!)
과학기술과 팩트와 개방을 통해 양 나라가 과거의 앙금을 극복하고 털어냈으면 좋겠다. 침략한 쪽이든 침략당한 쪽이든 죄악이나 병크를 반복하지 말고 서로 손잡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

* 옛 중앙청 건물은 그 위치에 있지만 않았어도 개인적으로 더 강하게 존치를 주장했겠지만.. 광화문과 경복궁과 청와대를 다 틀어막는 건 좀 아니어서 철거 쪽 입장도 이해를 한다. 할배 대통령도 당연히 그 건물을 없애고 싶어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2 08:36 2023/04/1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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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앵남 역

먼 옛날에 우리나라 전라남도 화순군 앵남리에는 ‘앵남’이라는 이름의 경전선 간이역이 있었다. (지난 2008년에 완전히 폐역돼서 지금은 없음)

이 역은 적자가 너무 심해서 이미 쌍팔년도 시절부터 철도청 정직원들이 철수해 버리고 관리와 운영을 포기했다. 그런데 쌍팔년도 즈음에 이 미정 씨라는 26세 여성이 늙은 부친의 권유로 이 역의 관리를 시작했다. 학교 졸업 후 타지에서 직장을 다니던 중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이다. 부친과 오빠 다음으로 이 일을 물려받은 거라나..??

열차가 오는 시간대에 열차 승차권을 위탁 판매하는 게 주 업무이지만.. 역내 접객과 주변 청소 같은 일체의 잡무도 몽땅 담당하게 됐다. 열차가 없는 시간대엔 집안일 돕고 마을 농사일도 거들고..
이분은 젊은 청년을 찾기 힘든 시골 깡촌에서 처녀 역장님이라고 불리며 오랫동안 칭송받았다고 한다.

이 미담은 1989년 10월 18일자 대한뉴스 1771호 “이런 일 저런 일”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통해 전국에 소개되었으며.. (☞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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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듬해 “월간 샘터 제21권 5호(1990년 5월호)”에도 “전남 화순의 앵남역장 이 미정 - 징검다리역 처녀역장”라고 또 자세히 소개되었다.
그렇잖아도 2010년대 초에 코레일에서는 간이역 명예역장이라는 제도를 잠시 시행했었다. 저런 분이야말로 이런 명예역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인물이었을 텐데 시대를 너무 앞서갔던 것이 참 아쉽다.

그 뒤로 저분이 어찌 됐는지 근황은 전해지는 바가 없다. 남자 잘 만나서 결혼하셨으려나? 저분은 지금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있을 것이다.

2. 경주 직업 전문학교

자 그리고 지난 2022년 8월 22일엔 KBS 인간극장에서 비슷한 미담이 또 소개됐다. 이번엔 위치가 내 고향과 같은 경주이다.
박 소정 씨. 부친 박 성환 씨는 공돌이로 자수성가해서 정말 좋은 뜻으로 경주 직업 전문학교라는 걸 설립했는데, 그만 2020년 초에 지병으로 쓰러지고 때마침 우한 괴질이 창궐해서 학교 운영이 어려움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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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타지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던 딸이 고향으로 돌아와서 학교 행정 업무뿐만 아니라 수강생들 코치에다, 거기서 가르치는 각종 중장비의 운전 시범까지 일당백을 담당하면서 거기 원래 직원들과 수강생들로부터 칭송을 받고 있다. 아버지 간병도 당연히 하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활력이 좋은 분 같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거 관련 자격증도 이미 4개나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이제는 트럭· 버스 운전을 넘어 포크레인· 지게차 운전 같은 분야에도 금녀의 벽 따위는 없는 듯하다. 용접이나 배관 같은 업종은 어떨지 모르겠다.
(☞ 관련 영상 / 관련 보도 1 / 관련 보도 2 )

이 일화는 “외모보다 더 고운 심성을 가진 소정 씨 '참 예쁜 그녀'”라는 타이틀로 한 번이 아니라 시리즈로 꽤 길게 방송을 탔는가 보다. 8월 22일부터 26일까지 5393~5397화.
세상엔 이런 훈훈한, 존경스러운 사람도 있다.

내가 철덕이다 보니 1은 개인적으로 지금보다 훨씬 전부터(수 년 이상 전) 알고 있었던 얘기인데.. 비슷한 다른 사례가 또 발견되어 한데 엮어서 언급할 수 있게 됐다. 두 일화 사이에는 30년이 넘는 간극이 존재한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10 08:35 2023/04/1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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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본인이 개인적으로 서서히 불현듯이 꽂히고 있는 찬송가는..
To god be the glory "주 하나님 큰 일을 행하셨네" 이다.
제도권 교회 찬송가(통일/새)에 수록돼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없는 듯..

1. To God be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So loved He the world that He gave us his son;
who yielded his life an atonement for sin,
and opened the life gate that all may go in.

2. Oh, perfect redemption, the purchase of blood,
To every believer the promise of God;
The vilest offender who truly believes,
That moment from Jesus a pardon receives.

(3절도 있긴 하지만 생략)

(후렴)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earth hear His voice;
Praise the Lord, praise the Lord, let the people rejoice;
Oh, come to the Father, through Jesus the Son,
And give Him the glory; great things He hath done.


이 곡은 멜로디가 좀 클래식하다 보니 엄근진한 경배로 분류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멜로디가 그저 "면류관 가지고"나 "다 찬양하여라", "기뻐하며 경배하세"처럼 힘차고 엄근진한 것뿐만 아니라 화사하고 우아하고 예쁜 면모도 있다. 그래서 더욱 꽂혀든다.

또한, 가사를 뜯어보면 "주께 영광"뿐만 아니라 요 3:16 인용에 대놓고 복음 메시지로 가득하다. 복음성가에 아주 충실한 곡이다.
2절은 최악의 나쁜 범죄자 죄인(vilest offender)이라도.. 진심으로 믿으면(행 8:37 마음을 다하여 믿으면!!) 그 순간 예수님으로부터 pardon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이 엄청난 가사의 작사자는 또 패니 크로스비 여사이더라. 명불허전 또 걸려들었다.;;
이분은 정말 복음의 본질을 정확히 간파했던 것 같다.
이 곡의 작곡자는 William Doane으로, 위키백과의 설명에 따르면 패니 크로스비와 오랫동안 같이 활동한 동역자라고 한다. 그녀의 시 중 무려 1500편에다가 곡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독자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는 분 계시면 이 찬양의 시청을 권한다.
난 G장조로 머리에 입력돼 있는데 공식 반주는 반음 더 높은 A플랫인가 보다.
https://www.youtube.com/watch?v=-15v9iworAU
https://www.youtube.com/watch?v=2CeBoSQsBR0

2.
다음으로 찬양의 형태와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
큼직~~한 채플 안에서 성가대가 아니라 사복 입은 남녀노소 몇백 명이 단체 합창으로 무슨 찬송가를 부르는 영상은
의외로.. 천조국뿐만 아니라 영국 것이 걸려 나오는 경우도 많더라.
본인이 유튜브를 뒤지면서 지금까지 한두 번 경험한 게 아니었다. 이건 걔네들 문화인 것 같다.

회중 합창은 영국 게 많고,
뭔가 가족 중창이라고 해야 하나 요런 건 미국 내륙의 크리스천 동네가 본좌이다.. 특히 자녀가 대여섯 이상씩 있는 대가족이 악기 하나씩 쥐거나 파트 하나씩 맡아서 찬양 부르는 건.. 개인적으로 정말 보기 좋고 부러웠다.

3.
참고로 To God be the glory는.. 쌍팔년도 시절 미국의 유명한 흑인 복음성가 가수 겸 작곡자인 Andrae Couch의 곡 My tribute (어찌하여야 / 나의 찬미)의 후렴부에 나오는 To God be the glory (하나~~~~님께 영광)와 동일한 표현이다. 개인적으로 곡의 제목을 보는 순간 저 곡이 떠올라서 멈칫 했다.
그리고 부활 찬송 "주님께 영광"은 Thine be the glory라고 시작하니 헷갈리지 않도록 하자.;;

4.
그리고 또 참고로.. 본인이 예전 2010년대에 꽂혔던 찬송을 열거하자면..

  • Wonderful grace of Jesus
  • And can it be that I should gain
  • 그 참혹한 십자가에 주 달려 흘린 피

이런 것들이다. 이 블로그의 과거 글에서도 흔적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클래식 스타일 찬송가인데 통일 찬송가 따위에 실리지 않았고 기성 교회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곡은 어떤 경로로 국내에 소개되고 알려졌는지 개인적으로 굉장히 궁금하다. Ron Hamilton 같은 사람도 기성 교회에서는 내가 알기로 거의 듣보잡이지 않나?

대체로 기성 장로교니 감리교니 하는 개신교와 잘 섞이지 않는 침례교 교단 쪽에서 자체 찬송가를 편찬하면서 번역하고 소개했지 싶다. 성서 침례교회처럼 말이다. 내력 면에서 킹 제임스 유일주의와는 큰 관련이 없다.
본인의 찬양곡 스펙트럼은 저런 침례교 스타일에다가 1990년대 국내 CCM도 좀 추가돼 있는 편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8 08:34 2023/04/08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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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몇 차례 글을 썼던 바와 같이, 킹 제임스 성경은 로마 교황에 정치적으로든 교리적으로든 반대한 종교 개혁 내지 개신교 진영의 산물이다. 성공회건 청교도건, 세부 신앙 노선은 다를지언정, 반가톨릭이라는 이념은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이니 루터니 개혁주의를 그렇게도 떠받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의 가치를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칼빈이 활동했던 제네바를 알면서 KJV의 전신인 제네바 성경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이 이미 성경이 필사본 번역본이라도 완벽하게 보존 가능하다고 명시한다"
이런 식으로 장로교인을 상대로, 특히 목회자에게 킹 제임스 성경을 소개하고 변증하는 분도 있다.

다만, KJV 유일주의를 믿는 바이블 빌리버 진영 자체는 개신교보다는 침례교, 특히 재침례회에 가까운 노선을 표방하고 있다. 이건 말보회 한킹 진영이건, 후대에 추가로 등장한 흠정역 진영이건 공통 동일이다.

세례가 아니라 반드시 물 침례를 고집하고,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행위 구원이나 구원 상실을 주장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일단 구원받기까지는 자기 자유의지에 따른 믿음 고백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개인의 구원 여부가 몽땅 다 답정너 예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사람들은 저 문제에 대해서는 칼빈주의도 알미니안주의도 아닌 중간 제3의 견해를 가지며, 이 때문에 두 진영으로부터 모두 배척당하기도 한다. =_=;;

문제는 그 당시 걸출한 종교 개혁자들의 통찰이 저런 것에까지 미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개신교는 이신칭의 교리를 재확립하고 교황을 대적하고 가톨릭을 반대했다는 점에서는 옳았다.
그러나 온전한 정교분리라든가, 믿음 고백자에게만 물침례.. 이런 것까지 정립한 건 "아니었고", 오히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을 여전히 박해하곤 했다.

그 이름도 유명한 KJV의 번역을 지시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 왕에게도 이런 한계가 있었다.
http://baptistnews.co.kr/mobile/article.html?no=13605

  • “왕은 백성들에게 세속적인 모든 사항은 명령할 수 있으나, 개인의 신앙과 영혼에 관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사옵니다.
  • “폐하께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시오이다~!” (석총 - 궁예의 700여 년 뒤 잉글랜드 버전.. ㄲㄲㄲㄲㄲ)

이 당연한 말을 한 게 그 시절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었나 보다.
저 주장을 한 ‘토머스 헬위스’는 체포되어서 1616년경에 옥사했고, 또 다른 침례교 지도자인 ‘에드워드 와이트먼’이라는 사람도 이단으로 몰려서 1612년에 화형 당했다.
좀 과장 보태면 태조 왕 건에서 궁예가 석총을 죽인 것과 정말 비슷하다..;; =_=

제임스 1세는 전반적으로는 당연히 선한 군주였다. 세계에서 거의 최초로 금연 운동을 추진한 걸로도 유명하고..
(뭐,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개신교도들 수백 명을 박해하고 죽인 전임인 메리 여왕조차도 종교 말고 세상 정치 쪽은 그닥 암군 폭군 악녀가 아니었다.)

단지, 제임스는 가톨릭 신자는 아니었지만, 강력한 왕권신수설 신봉자에 국교회주의자였다. 국왕이 곧 성공회 수장.. 왕이 곧 제사장..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다스리는 왕이 돼서는 온갖 삐딱서니 타는 귀족과 신하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킹 제임스 성경이 막 번역되고 출간됐던 1610년대에.. 토머스 헬위스 같은 자국의 침례교 지도자가 반역자로 몰려서 순교한 것은.. 좀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단순히 반가톨릭 정도를 넘어 정교 분리까지 대놓고 주장하다 보니, 왕권신수설을 밀어붙이던 절대군주한테 찍혔던 것 같다. 성공회도 청교도도 아닌 침례교인들은 세속 세계사에서는 그냥 듣보잡 취급일 뿐이고..

텐데일이나 세르베투스뿐만 아니라 저런 사람도 순교한 것이다. 제각기 완전히 다른 사유로 인해서.
틴데일이야 킹 제임스 진영에서 워낙 띄워 주는 인물이기 때문에 0순위로 접했고, 세르베투스는 칼빈의 흑역사 얘기하는 데서 접했다. 그 반면, 이런 얘기는 우리 진영에서 전혀 접한 적 없었다.
역시 각 진영에서는 자기에게 유리한 것 위주로만 가르치는 것 같다. 우리 진영에서.. 무슨 예수회 선교사가 일본에서 순교한 걸 가르칠 리는 만무할 테니 말이다.. =_=

본인은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침례교 신앙을 모두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건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로 느껴진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진영이 특정 번역자 자체를 우상화하고 떠받드는 게 아니니 “아 그렇구나~ 저 사람도 자기 신념 때문에 저랬었구나”하고 넘길 뿐.. 킹제임스 성경의 권위는 이런 제임스 왕이나 성경 번역자들의 인품, 개인사 등에 좌지우지되는 게 아님을 알 필요가 있다.

물론, 제임스 1세 왕도 명색이 크리스천인데, 설마 무슨 북괴 김 부자라든가 느부갓네살/네로 같은 정신나간 개인 우상화 개인 숭배를 조장한 건 아니었다. 일단 황국 신민들이 먼저 형식적으로라도 "교회의 머리이신 우리 개인의 신앙의 수호자이신 위대하신 국왕 폐하 만만세" 이러면.. 왕도 "허허~ 과인도 일개 인간일 뿐이니라~ 교황놈은 적그리스도일 뿐이고 진짜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겠지" 이렇게 겸손하게(?) 화답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교인들은 좀 더 시대를 앞서 간 요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세상 역사에서는 가톨릭에서 이탈한 개신교.. 이런 식으로만 다루는 경향이 크지만, 침례교는 종교 개혁 이전부터 이미 개신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던 다른 그 무언가로 여겨진다.
개신교 측에서는 미국 건국에도 청교도가 큰 기여를 했고, 청교도의 근면 성실 청부 개척 정신이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편이다.

그러나 침례교 측에서는 자기들이 청교도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았고, 자기들이 노력한 덕분에 미국이 국교 없이 진짜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참고로 침례교라는 말은 교리/교파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은 용어이다. 침례에 대한 교리 하나만 지지한 뒤에 구원관이나 하나님의 경륜 쪽은 완벽한 칼빈주의인 사람도 있고, 반대편인 사람도 있다.

다만, 통상적으로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침례교는 대외적으로는 알미니안/웨슬리안에 더 가깝다고 여겨진다. 개신교와 척졌다는 역사 내력이 있고, 칼빈주의 예정을 대놓고 지지하지 않기 때문에 저런 식의 편견이 형성돼 있는 것이다.
단지, 킹 제임스 유일주의를 표방하는 '독립 침례교회'(독침;;)들은 개신교 종교 개혁자들을 추앙하기보다는 그쪽 동네에서 평이 좋지 않은 세대주의를 지지하는 편이다.

이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한킹 진영이건 흠정역 진영이건, KJV 독침들은 칼빈주의를 거의 진화론 반박하듯이 맹렬히 반대하고 비난하곤 했다.
어디 그 뿐이랴? 그쪽에서는 기성 개신교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르고 다 타락하고 종교 통합 은사주의에 물들고 어쩌구 하면서 비판하고 척지고, 반대로 거기서는 킹진영을 향해 성경 역본을 우상시하는 이단에 세대주의 시한부 종말론자니까 상종을 말라고 욕하고..;;;
이게 바로 말보회의 창립 이래로 2~30여 년째 이어져 온 갈등과 대립과 반목이었다. 상대방에 대해 정확하게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뭐, 나도 교리 노선이야 KJV 유일주의에 세대적 진리보다 더 나은 패러다임을 지금까지 결코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허락하시는 뜻"을 분간하지 않는 말장난 역할극 예정론은 결코 지지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내 교리적 정체성을 타협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서로 비방만 해 갖고는 득/덕이 될 게 없지 않겠는가? 개신교에서 유래되지 않은 기독교 교파의 내력에 대해 더 체계적으로 고찰하면서 타 교파 사람들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 보고 소통하고는 싶다.
침례교 중에서는 심지어 속세를 떠나 자연인처럼 살고 심지어 세상 정부와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는 곳도 있다는 식의 인식이 있는데.. 적어도 KJV 독침은 그런 곳은 결코 아니다. ㅡ,.ㅡ;;

킹 제임스 성경은 명백한 개신교 배경의 성경이었으니 이 점을 이용하고 어필을 해야 하는데.. 개신교를 마냥 적대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접근 방식이기 때문이다. 말보회는 초창기에 조금만 더 젠틀했으면 이단 소리 훨씬 덜 듣고 오해를 훨씬 덜 사고 적을 덜 만들면서 킹 제임스 성경을 훨씬 더 널리 전할 수 있었을 텐데.. 좋은 기회를 놓쳤던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5 19:33 2023/04/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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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층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그런데 건물이 왕창 크고 층이 수십 개 이상으로 많고, 이용하는 사람도 왕창 많으면.. 엘리베이터도 한 대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니 여러 대를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이게 설치만 한다고 장땡이 아니다. 엘리베이터는 에스컬레이터나 다른 정규 노선 대중교통과 달리, 승객의 수요예 따라 그때 그때 이동하는 물건이다. 이 점에서는 버스보다는 택시에 더 가까운데, 그래도 중간 합승이 허용된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런 특성상, 엘리베이터는 승객과 차량을 똑똑하게 분배하는 운영 시스템이 필요하다. 무식하게 운용하면 차량이 많아도 승객들은 엄청 오래 기다려야 하고, 탄 뒤에도 층마다 서면서 엄청난 비효율이 발생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똑똑하게 분배하는 시스템이 없던 과거부터 현재까지 제일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단순한 방법은 (1) 각 차량의 용도를 그냥 층별로 물리적으로 분할하는 것이다. 저층부/고층부, 그리고 홀/짝 이렇게 말이다.
이건.. 모든 엘리베이터들이 바쁠 때야 그럭저럭 괜찮은 방법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구간끼리 오가는 사람은 불편하게 환승을 하거나 인접층으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들이 전혀 바쁘지 않은데도 나와 더 가까이 있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고 먼 쪽의 엘리베이터를 강제로 이용해야 하는 비효율이 발생한다.

얘보다 약간 더 발전된 엘리베이터는.. 버튼을 누르면 그 층의 모든 엘리베이터의 버튼에 불이 켜진다. 그리고 (2) 지금 층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엘리베이터를 중앙 시스템이 알아서 골라서 보내 준다.
고급 호텔 같은 곳의 엘리베이터가 이런 형태인 경우가 있다. 각 엘리베이터들이 현재 몇 층에 있는지 표시도 해 주지 않는다. 그리고 더 신기한 건.. 밖에서 상행이나 하행 중 한 버튼을 누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가고 싶은 층을 찍게 돼 있는 것도 있다.

요런 엘리베이터는 어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릴지 알 수 없어서 승객이 처음에 약간 헤맬 수 있지만, 그래도 물리적인 층 분담보다는 더 똑똑하고 효율적으로 동작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약간 아쉬운 점은.. 중앙 시스템이 찜한 엘리베이터가 승객의 층으로 오는 도중에 다른 승객 때문에 많이 지체되고 있을 때, 그냥 다른 엘리베이터를 대신 지정하는 게 안 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AI가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만들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건 절대적인 정답이 없는 문제이다. (1) 엘리베이터를 이미 탄 승객, (2) 밖에서 기다리는 승객, 그리고 (3) 엘리베이터 자체의 주행 거리 총량(소모 전력) 사이의 trade-off 제로썸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적해에 근접하는 가장 효율적인 전략은.. (1) 엘베들이 바쁘지 않을 때는 층수 구분 따위 불문하고 가장 가까이 있는 차량을 보내 주고, (2) 도중 정차도 일단은 아무 요청이나 들어 주되, 이 방향으로 가는 동안 2번, 3번 이상 이미 정차를 했다면 그때부터는 요청을 서서히 안 들어 주고 다른 차량을 대신 보내는 식으로 유도리를 발휘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횟수 제한, 또는 앞으로 최소한 n층 정도는 무정차로 진행.. 이런 식으로 정차를 제한할 수 있다.

물론 대체 차량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거나 하면 전략이 달라지게 된다.
그리고 처음에 찜했던 차량이 너무 오랫동안 '열림'으로 붙잡혀서 못 가고 있을 때도 가까이 있는 다른 차량을 대신 보내 줘야 한다.

이 정도면 거의 AI 기술까지 접목해도 되지 않나 싶다.;;
AI가 진짜 똑똑하게 동작하려면 승객을 목적지 층별로 분할하는 것까지 알아서 처리할 필요가 있다. 차량들을 강제로 홀/짝, 고/저로 구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모든 차량에 모든 층 승객이 고르게 뒤섞여 있으면 AI 할아버지라 해도 효율이 떨어지는 걸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가고 싶은 층을 미리 지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이 AI가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는 "3층, 7층, 12층 가실 승객은 지금 오는 엘리베이터 B차량을 타십시오. 4층, 10층, 15층에 가실 승객은 1분쯤 뒤에 도착 예상되는 저쪽 A차량을 타십시오" 이렇게 구간을 적절하게 나눠서 교통정리를 할 수 있다.
물론, 다음 엘리베이터의 도착이 너무 늦어지고 있으면 한 엘리베이터가 좀 더 촘촘하게 정차하게 된다. 이걸 유동적으로 결정하는 것도 AI의 몫이다.

이렇듯, 엘리베이터 분배도 깊고 어렵게 생각하면 끝이 없는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실용성도 아주 높고 말이다. 오죽했으면 엘베 관제는 1989년 제1회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의 문제로 나오기도 했다.
층수가 20? 30? 정도 넘어가면 주행 속도도 굉장히 빨라져서 도착하기 수 층 전부터 감속하는 게 느껴지는 고속 엘리베이터가 투입되는 듯한데.. 이런 건 본인도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게 극소수이다. 엘베가 다 같은 엘베가 아닌 듯하다.
딱 층에 맞게 정차하는 건 지하철 전동차가 역의 정차 위치에 정확하게 맞춰서 정지하는 것과 비슷한 테크닉이라 하겠다.

2.
고층 건물에서 다수의 엘리베이터를 분배하는 알고리즘은 자동차를 통제하는 신호 알고리즘과도 비슷한 구석이 있다.
특히, 도로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냥 무조건 일정 간격으로 적록 신호를 주는 게 엘베로 치면 무식하게 홀/짝, 고/저를 나눈 것과 비슷하다.

모든 방향에서 차들이 엄청 많이 다닐 때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렇게만 해도 충분히 공평하다. 그러나 차량 통행이 아주 적을 때도 그렇게 하면 쓸데없는 대기 시간이 길어져서 비효율적이고 불편하다.
그래서 작은 도로에서는 평소에는 적록 신호이다가 심야에는 황색 점멸로 신호가 바뀌어서 일말의 스마트함을 추구하기는 하는데.. 신호 종류가 바뀌는 기준은 그냥 밤 11시에서 아침 6시 사이처럼 미리 지정된, '하드코딩'된 시간대일 뿐인 게 좀 아쉽다.

그러니 미래에는 신호라는 것도 더 스마트하게 바뀌어야 하리라 생각된다. 아까 그 엘리베이터 분배 알고리즘에서 하던 고민이 그대로 적용된다. 트래픽이 많을 때와 적을 때의 전략이 서로 크게 달라지는데, 그 경계 판단을 잘 해야 한다.
그래서 운전자가 시험 든다거나 분노해서 신호를 위반하려는 충동을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1) 다니는 차가 아무도 없는데 빨간불이어서 쓸데없이 멀뚱멀뚱 서 있는 것, 그리고 (2) "왜 나만 갖고 그래~ 왜 교차로마다 계속 신호에 걸리는 거야..?? 이런 걸 아주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좌회전을 위해서 비보호나 점멸 대신 감응 신호가 더 늘어나고, 교차로 건너편이 계속 막히고 있으면 애초에 파란불이 되지 않게 신호등이 더 똑똑해져야 할 것이다.
비보호를 대체하는 좌회전 감응 신호는 좌회전 차량이 요청하자마자 무작정 맞은편 방향을 틀어막는 게 아니다. 처음 20~30초 정도 동안은 맞은편에 차가 없어서 충분히 안전할 때만 파란불 신호를 준다. 그렇지 않고 너무 오랫동안 좌회전을 못 하고 있으면 그때에야 불가피하게 맞은편 방향을 막고 파란불 신호를 준다.

이전글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교차로 건너편에 차가 들어갈 자리가 없으면 우리 신호가 돌아왔더라도 파란불 신호를 주지 않는 것도 덤.. 꼬리물기도 원천 차단된다.
이런 스마트 신호 체계 하에서는 교통법규 위반 건수가 줄어들고 교통사고도 자연히 더 줄어들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4/03 08:35 2023/04/03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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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예전에 몇 차례 글을 쓰기도 했었다만.. 본인은 운전 습관이나 도로 교통 정책에 관한 한 골수 우파이다.
마치 빈부 격차처럼 빠른 차와 느린 차의 격차를 인정하고 큰 효율, 큰 자율과 큰 책임, 정부 개입의 최소화를 추구한다. 나라에서 불필요하게 쓸데없이 지나치게 규제하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공권력은 뺑소니나 음주운전자들 잘 잡아내고 걔네들 반 죽여 놓는 형벌 집행만 잘 하면 된다.

다시 말하지만, 환경이 후손으로부터 빌려 쓰는 공간이라면, 공공 도로는 뒷차 운전자로부터 빌려 쓰는 공간이다~!!
고객의 시간을 아껴 주는 버스/택시 운전사가 존경과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천천히 부드럽게 가는 건 안전이 아니라 기름 아끼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생각과 의견이 여럿 있기 때문에 또 글로 정리해 놓고자 한다.

1. 우회전 후에 나오는 횡단보도가 청신호일 때의 답답함

요즘 도로교통법이 바뀐 것 때문에 예상되고 우려됐던 부작용이 고스란히 나타나는 중이다. 이 때문에 차들 흐름은 더 꼬이고 도로 정체가 더 심해지고 운전 스트레스가 더해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교차로 우회전 “후”에 나오는 횡단보도는 파란불이더라도 건너는 사람이 전혀 없으면 비보호로 조심해서 그냥 통과하면 된다..!!!!! 이 규칙이 달라진 적은 없었다!!!!!
차들이 그것까지 일일이 우두커니 하염없이 기다렸다가 가면 이거 뭐 우회전을 할 수가 없고 도로가 난장판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근데.. 우회전하면서 이 횡단보도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차를 한두 번 봤어야지.. 어휴~ 성질 같았으면 그냥 빵빵~ 하고 싶다.
최근에 바뀐 건.. 신호 없는 횡단보도나 아까 같은 우회전 후 횡단보도에서 “사람이 근처에 서 있기만 해도 차가 알아서 정지해라”이다.
그게 적용된 거지, 딴 게 바뀐 게 아니다.

하지만 나라에서는 최대한 차들 속도를 줄이고 차를 멈추게 만드는 쪽의 홍보만 댓다리 하지, 불필요하게 서 있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는 쪽의 홍보는 절대 안 한다.
기름값 인상분 반영은 광속이고, 하락분 반영은 거북이 속도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젠장 제기랄..
이런 건 도대체 어떻게 해야 바로잡을 수 있을까?

2. 구간 과속 단속은 정말 사회악 적폐 쓰레기 (거친 표현 주의)

먼 옛날 1945년 8월 15일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됐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운전자들이 빌어먹을 저주받을 이 개썅 미친 변태 적폐 사회악 암유발, 시간 낭비 기름 낭비 공해 유발 백해무익 ㅈ같은 과속 단속 카메라의 학정 압제로부터 해방은 언제쯤 될까? 누구나 자유롭게 악셀 콱 밟으며 운전하는 날이 오기를 염원해 본다.
아 그래서 예로부터 8 15 광복절 폭주족이 있었던 거구나 이런 깊은 뜻이..!

이 멀쩡한 경주 토함산 터널에 전 구간을 틀어막고 시속 70km 구간 단속이라니.. 진짜 미친 거 아니냐..?
카메라를 넣을 거면 70 마일로 하라고.. 킬로미터가 아니라..?
씨발 200으로 밟으면서 쌩 지나가도 시원찮을 이 곧은 길을 말이야?
터널 닦은 근로자와 자동차 개발한 연구원들이 통곡을 하면서 울겠다!

서울 수도권만 이런 줄 알았더니 이런 깡촌 시골에까지 뭔 놈의 카메라가 이렇게 생겼냐..??
그렇게 차들 강제로 발을 묶어 놓으니까 만족스럽냐 이 색X야?
담당 공무원놈 멱살 잡고 죽빵 날리고 싶다.

리 승만 할배를 존경하는 자유 우파들은.. 1930년대의 자동차로도 미국 시내를 100 넘게 밟으면서 경찰 단속을 따돌리고 사고 한 번 안 내고 발표 강연 스케줄을 소화했던 할배의 전설적인 행적과 근성을 본받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과속이 나쁜 게 아니라 주변 차들의 흐름을 깨는 게 더 나쁘다는 선진적인 인식이 자리잡혀야 할 것이다.

3. 꼬리물기를 억지로 계도하기보다는 신호등을 개선해야

“교차로에서 꼬리물기 좀 하지 마세요~ 교차로 건너편에 차들이 막혀서 못 지나가고 있으면 파란불이더라도 당신도 지나가서는 안 됩니다. 앞차가 안 가고 있을 때 빵빵거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렇게 백 날 홍보하고 계도해도 별 소용 없다.

꼬리물기 차들 때문에 엉키고 엉망이 된 교차로를 보면서 “역시 조선놈들은 교통 문화가 미개하고 답이 없다. 앞으로 꼬리물기 적발 차량은 신호 위반과 동급으로 벌점 얼마에 과태료 얼마, 12대 중과실..” 이것도 별 영양가가 없는 짓이다.

감흥 신호 개발하고, 꼬리물기 차량을 자동으로 적발하는 무인 탐지기를 개발할 정도의 기술과 자금이라면.. 그걸로,
교차로 건너편에 차들이 못 가고 있는 걸 감지해서 그때는 애초에 파란불을 주지 않는 스마트 신호등을 만드는 게 훨~~~씬 더, 월등히 더 깔끔하고 더 나은 해결책이다.

어떻게든 운전자를 벌 주고 괴롭히고 차를 못 가게 만드는 쪽으로 머리를 굴리지 말고, 운전자가 누구나 수긍 가능한 합리적인 쪽으로 문제 해결책을 개발해야 한다.
옛날에 시스템 클럽에서 예시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선 엽전들이 질서 의식이 없다고 탓할 게 아니라 번호표를 도입해 놓으니까 은행 창구에서 무질서가 싹 사라졌었다.

4. 교차로 통과 결심 지점

난 예전에도 말했지만, 노란불 딜레마로 인한 사고를 봉쇄하기 위해서는 “교차로 통과 결심 속도” 표식 같은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지점을 시속 60 이상으로 지났다면, 중간에 신호등이 노란불이 되더라도 속도를 더 줄이지 말고 그냥 통과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브레이크 밟고 서시오” 말이다. 비행기의 이륙 결심 속도(V1)에서 착안한 개념이다.;;

난 자동차에 대해서는 파란불은 남은 시간 표시에 반대 소신이다. 남은 시간이 촉박할 때 교차로를 난폭하게 통과하거나, 아니면 자기는 시간 넉넉하다고 뒷차를 배려하지 않고 세월아 네월아 너무 느리게 갈 수 있다.
예수님이 부작용을 우려해서 재림 날짜를 인간에게 예고해 주지 않고 있듯, 저런 건 굳이 예고할 필요가 없다. 파란불 잔여 시간 대신에 저런 교차로 통과 결심 힌트만 있으면 된다고 본다.

그 대신, 빨간불의 잔여 시간은 표시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10초나 5초 이하로 남았을 때는 도로 숨긴다. 이때부터는 예측 출발을 하지 말고 파란불이 되는 것만 보라고 말이다.

5. 기타

(1) 비보호 좌회전이라든가,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게 해 주는 좌회전 유도 차로 같은 것도 최대한 활용하는 게 좋다.
하지만 전자는 멍청한 사고가 몇 번 난 뒤엔 또 무식하게 오래 기다려야 하는 적록 신호로 바뀌어 버린다.
후자도.. 멍청한 운전자가 노란불에 쫄아서 말단 지점에서 멍하니 서 버리면.. 본의 아니게 꼬리물기를 저질러서 옆 차로의 진행을 틀어막는 민폐를 끼치곤 한다. 그러면 또 없어지고.. 으이구~~

그러고 보니 앞서 얘기했던 교차로 통과 결심 지점이라는 건 이런 좌회전 유도 차로 같은 데서 더욱 필요한 것 같다. 이 지점을 지났으면 여기서는 노란불이더라도 멈추지 갈고 지나가라는 것을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2) 자동차 전용 도로의 진출로나 분기 지점 근처에서 차들이 막히고 있을 때 말이다. 뒤에는 차들이 못 가서 줄줄이 늘어서 있는데.. 정작 앞에는 차들이 너무 띄엄띄엄 천천히 여유롭게 가는 건 큰 문제이다. 이러면 뒤에서 줄서 있는 차들이 호구 바보가 되고, 눈치껏 앞에서 끼어드는 새치기 차량이 더 빨리 가게 된다.
새치기 차량을 욕하고 벌줄 게 아니라, 새치기를 조장하는 앞차들의 운전 습관을 바꾸도록 계도해야 한다.

(3) 주행 중에 뒷차가 빵빵거리는 것보다, 앞차가 불필요하게 쓸데없이 브레이크 밟아서 브레이크 경고등이 깜빡거리는 게 더 짜증나고 불편하고 싫은 지경이라면..
당신은 운전자로서의 인격이 한 단계 성숙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장이 반찬이듯, 성질 급해서 답답한 게 최고의 운전 교사가 될 수 있다.

(4) 터널과 교량에서 차로 변경이나 추월을 금지하는 무식한 규정도 이제 좀 완화하거나 없앴으면 좋겠다. 비행기 이· 착륙 때 전자기기 사용 금지처럼 거의 의미가 없는 짓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31 19:35 2023/03/31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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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지역 특성

1. 경부선 철도 연선의 도시들

우리나라는 경부선 라인에 광역시 대도시들이 콕콕 박혀 있어서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찍고~!!" 이러는 노래도 있다.
일본의 도카이도 신칸센이 도쿄-나고야-오사카-교토를 줄줄이 잇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런데 경부선 라인의 대도시들 중에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대도시인 '-주' 지명이 전혀 없는 게 참 신기하다.

제일 먼저 대전이야.. 원래는 이름에 대놓고 '밭'이 있을 정도로 깡촌이었다. 그랬는데 뜬금없이 철도가 생기고 호남선과 분기까지 되면서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 버렸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철도 건설비를 절약하려고 산을 최대한 피해서 평지를 찾다 보니 상주-충주-용인 대신 이쪽까지 우회한 것이었다.

부산은 우리나라의 직할시/광역시 1호인 데다 서울 다음의 대도시인데도 불구하고 구한말까지는 의외로 굉장한 듣보잡이었다.
일본인들이 드나드는 관문 통로가 아니었으면 그 지역은 절~~대로 지금의 부산 같은 도시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까놓고 말해.. 을미사변이 벌어졌을 때만 해도, 민비를 살해한 일본 자객 일행은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걔들이 중국에서 출발한 것도 아니고, 조수 간만의 차이를 이용해서 상륙작전을 벌인 것도 아닌데 굳이 인천항을 이용한 이유는.. 한반도에 제대로 된 육로가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경부선 철길이 있었으면 걔들도 당연히 부산으로 입국했을 것이다.

부산이라는 이름 자체가 조선 시대엔 없었고 그냥 중심부만 '초량'이라고 불리는 정도였다.
일제 시대엔 부산 역이 지금의 부산 역보다 더 남쪽 바닷가 근처에 있었고, 열차 시각표에 일본 본토 연락선 셔틀의 시각표도 같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서울-경성 방향이 아니라 부산 방향이 '상행'이었다..!!

끝으로, 대구도... 정말 믿어지지 않지만 철도가 없던 시절엔 달구벌이 경주, 상주, 진주보다 더 작았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오히려 중앙선에 경주, 영주, 원주 이렇게 '주'짜 지명이 3개나 있다. 하지만 중앙선은 경부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낙후해 있다.
상주, 충주, 공주.. 이런 곳은 철도 간선에서 열외되면서 대전, 대구에 비해 정말 처참해졌다.

한때는 철도가 침략의 상징이라고 여겨졌지만 조선인들도 자기 지역에 철도가 있어야 하겠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일제 시대에 조선인 스스로 자주적으로 주체적으로(!!) 놓은 거의 유일한 철도는 바로 구 경춘선이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1940년대 일제 말기가 다 돼서야 생겼다.

2. 광역시들

우리나라의 6개 광역시 중..
울산은 지하철이 없고 대전은 공항이 없고(그 대신 청주..), 인천은 아직까지는 KTX가 없다.
광주는 타 대도시에 비해 유명 브랜드 쇼핑몰 같은 게 없거나 개수가 빈약하다고 한다.
대구와 부산만이 그런 나사 빠진 게(?) 없는 광역시인 듯하다.

그리고 대전은 전국에서 중전철 도시철도가 마지막으로 건설된 광역시이며(그 이후엔 다들 경전철만),
울산은 우리나라 역사상 마지막으로 광역시로 승격된 도시이다(1997). 그래서 울산은 직할시 시절을 유일하게 겪지 않았다.
울산 이후로 수원이나 고양 같은 대도시는 더 가벼운(?) 특례시라고만 불리며, 여전히 주변의 '도'에 소속되어 있다.

아울러, 6개 광역시는 바다를 접하고 있는 곳(부산 울산 인천)과 그렇지 않은 곳(대구 대전 광주)으로 딱 반반씩 나뉘기도 한다.

3. 서해안의 유일한 명소

  • 우리나라 서쪽의 황해는 동해보다 물이 탁해서 해수욕장으로서의 인기가 아무래도 덜하다. 그래도 황해에서 딱 하나 전국구 급으로 유명한 해수욕장은 아무래도 대천이 유일하다.
  • 동해안이 아니라 서해안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는 영광 한빛이 유일하다.
  • 당진의 왜목마을은 서해안 베이스이지만 동쪽으로 살짝 돌출된 해안선이 있어서 일출과 일몰, 월출까지 볼 수 있는 특이한 곳이다.

4. 외세 침략의 잔재

우리나라에 외세로부터 당한 침략의 상징 내지 흔적으로 남은 시설은.. 철원 로동당사(북괴), 조선총독부 청사 첨탑(일제), 그리고 더 옛날 삼전도비(청-_-) 같은 게 있다.

그런데, 일본과 관련해서는 전국 곳곳에 적산가옥이 아직 남은 게 있고, 또 왜성이라는 것도 있다. 이건 옛날 임진왜란 시절에 왜군이 우리나라 남부 지방의 강가나 바닷가에서 자기 스타일로 성을 쌓고 버텼던 흔적이라고 한다. 오오~
울산, 부산, 양산, 창원, 거제 등.. 여러 지역에 생각보다 널리 분포해 있다.
심지어 일본의 역사학자들이 자기들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의 왜성을 찾아온다고 한다. 자기네 본토에는 옛날 성곽이 별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건 자랑스러운(?) 문화재가 아니니 일부러 막 띄우고 세금 들여서 복원까지 할 필요는 없다. 허나, 반대로 일부러 부수고 없앨 필요도 없으며, 최소한의 보존과 관리만 하면 될 것 같다.
뭔가 이런 유형의 옛날 유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던 적이 전혀 없는데 신기하다. 청도에서 옛날 경부선 터널을 봤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5. 문화 유적

(1) 경주에서 황룡사의 재건· 복원이 오랜 떡밥이라면, 서울에서는 서대문(돈의문)의 재건· 복원이 오랜 떡밥인 것 같다.
서대문은 주변이 너무 많이 개발돼서 부지를 확보하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황룡사는 주변이 온통 허허벌판이니 부지 걱정은 없는 반면, 건물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과 정보가 부족한 게 애로사항이다.

(2) 지난 2011년, 이 명박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문화 유적들의 명칭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던 것 같다.
경주 안압지가 '동궁과 월지'라고 완전히 변경된 게 이때였고, 인서울이던 서울 성곽도 '서울 한양도성'으로, 삼전도비도 '서울 삼전도비'라고 명칭이 정착됐다.

(3) 과거에 리 승만 할배 대통령이 다른 많은 문화 유적들을 놔두고.. 왜 하필 남한산성에 꽂혔었는지는 참 의문이다. 무슨 계기로??
오죽했으면 1950년대 중반에 남한산성 주변에 큰길을 내고 거기에다 자기 호를 이름으로 붙였다(우남로). 그리고 남한산성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허나 우남로라는 도로는 근처의 헌릉로와 합쳐졌으며, 국립공원 시스템도 1960년대에 완전히 재개편됐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야 할배의 흔적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한산성은 국립이 아닌 도립공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29 08:36 2023/03/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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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대도시의 도로가 다른 중소도시· 시골의 도로와 다른 점은 가장 먼저 (1) "차로가 많고 폭이 크다는 것", 그리고 신호 대기조차 없는 입체 교차 "자동차 전용 도로"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즉, "무신호, 점멸 신호 내지 자그마한 로터리 < 일반 적록 신호 < 입체교차로"의 순으로 도로의 규모가 커진다.

여기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몰려들고 이들을 빠르게 소통시켜야 하니.. 다른 지역에는 해당되지 않는 시설 투자가 많이 이뤄진다. 국도나 고속도로가 아니고 평범한 시내 도로도 아니면서 '도시 고속화도로'라는 건 또 뭘까? 대도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물건일 것이다.

20세기 말까지는 단순히 폭이 큰 길을 넘어서 (2) 고가 차도라는 게 간지 나는 산업화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없는 길을 만들어 내는 제일 무난한 방법이 고가이기 때문이다. 강 위로든, 기존 도로 위로든..
하지만 21세기부터는 진출입로 주변이 여전히 심하게 막혀서 교통 혼잡을 부추김, 고가가 주변 건물이나 아래쪽의 거주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침, 환경이나 보행자에게 친화적이지 못함 등의 이유로 인해 고가 도로를 더 만들지 않으며, 이미 있는 것도 서서히 철거하는 추세이다.

물론 멀쩡히 잘 닦여 있는 고가를 일부러 때려부숴 없애는 건 아니다. 그런 것들은 한번 만들어 놓고 끝인 반영구적인 물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유지보수를 해야 하는데.. 마침 수십 년 전에 만들었던 시설이 노후화가 너무 심해서 유지보수 비용이 너무 많이 들면 이 참에 그냥 없애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서는 서울 역 고가 차도, 그리고 서대문 고가 차도가 2015년경에 철거돼 없어진 것이 유명하다. 더 전에 2003년쯤엔 청계 고가 차도가 없어졌었다.

2000년대 이후부터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 중 하나는 (3) 산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긴 터널이다.
20세기에는 길이가 1km 남짓이나 그 이상 되는 메이저한 '인서울' 터널은 남산 터널 3형제가 전부였다. 얘들은 서울 시내에서 보기 드문 유료 도로이기까지 했다. 원효대교나 북악 스카이웨이가 처음에 유료였다가 한참 전에 무료로 풀린 것과 달리, 남산 터널만은 2호를 제외한 1호와 3호가 줄곧 유료이다.

그러나 남산 터널은 밤 시간대와 공휴일엔 무료이며, 차에 3인 이상이 타고 있어도 면제이다. 또한 아주 특이하게도 하이패스를 지원하지 않는다.
전국에 이런 특이한 시스템과 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유료 도로는 저기 말고는 없지 싶다. 역사가 긴 만큼 남산 터널만이 지닌 독특한 점이라 하겠다.

남산 터널 이후로는 2004년 초에 우면산 터널이라는 유료 터널이 개통했다.
그 다음으로는 용마산· 아차산· 망우산의 중앙을 횡축으로 관통하는 용마 터널이 2014년에 개통했다. 비슷한 시기에 경주에서는 토함산 터널도 개통했기 때문에 본인의 기억에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산을 최단거리로 횡단하는 터널 수준을 넘어, 대놓고 (4) 산이나 시내의 아래를 지나는 장거리 지하 도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첫 시작은 2016년 7월, 강남 순환로였다. 그 동네에는 남부 순환로라는 옛 도로가 있긴 하지만 이미 느린 시내 도로의 퀄리티로 전락해 있었기 때문에 대체 도로가 필요했다. 남부 순환과 강남 순환의 관계는 거의 통일로와 자유로와 비슷한 정도랄까..

그러니 호암산과 관악산 아래로 새 길을 뻥뻥 뚫어 버렸다. 특히 이 길은 안양 부근에서 서울 강남으로 접근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줬다.
그 뒤 이듬해엔 제2 경인 고속도로의 연장인 안양-성남 구간도 비슷한 방식으로 산 아래로 뚫렸다. 강남 순환로가 서울대와 가깝다면, 이 고속도로는 경인교대 근처를 지난다는 유사점이 있다.

2010년대 말~2020년경엔 서울의 좌우 양쪽에 17과 29라는 종축 고속도로가 만들어져서 한강 이북에도 무려 폐쇄식 요금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다.
그 전까지는 한강 이북에 존재하는 고속도로는 오랫동안 100 외곽순환(수도권 1순환)밖에 없었다. 얘는 말 그대로 순환선이고 개방식 요금 구간이기 때문에 다른 장거리 고속도로와는 느낌이나 성격이 많이 차이가 났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 무렵에 동부 간선 도로의 북쪽 구간이 통째로 지하로 들어갔고..
2021년에는 신월-여의 지하 도로(4월)와 서부 간선 복층 지하 도로(9월)가 개통했다.
신월-여의는 여의도에서 경인 고속도로(120)로 빠르게 연계하는 횡축 도로요,
서부 간선 지하는 월드컵대교에서 서해안 고속도로(15)로 빠르게 연계하는 종축 도로이다.

얘들은 건설 비용을 낮추고 싶었는지, 처음부터 작은 승용차들의 트래픽만 흡수하려 했는지, 터널의 높이를 겨우 3미터 남짓으로 아주 낮게 잡았다.
우리나라 도로교통법에서는 공도 주행 가능 자동차의 높이 한계를 4미터로 규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높이가 3미터를 초과하는 대형 버스나 트럭은 구조적으로 이런 곳을 지나갈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가 무슨 열악한 굴다리도 아니고 새로 건설한 번듯한 지하 터널이 높이가 이렇게 낮은 건 생소한 트렌드였다. 그래서 대형차가 별 생각 없이 여기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천장을 긁는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하곤 했다.
사실, 이 정도로 물리적인 높이 제한이 없더라도 우면산 터널이나 강남 순환로조차 수십 톤급 트레일러는 통행을 제한하곤 했다. 그리고 이게 고속도로와 시내 고속화도로의 큰 차이점이지 싶다. 고속도로는 건설 취지의 특성상 산업용 대형차들을 당연히 무조건 받아들여야 할 테니 말이다.

이제는 시내 고속화도로를 넘어서 (5) 기존 고속도로조차 경인과 경부는 수도권 일부 구간을 지하화하겠다는 말이 나오는 중이다. 특히 경인은 엄청 옛날에 만들어져서 지반이 어차피 만만한 평지이며 고속도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한 상태이니.. 고속도로는 통째로 지하로 내리고 기존 평지 도로는 시내 도로로 바꾼다는 것이다.

이건 마치 철도에서 지상의 용산선을 지하의 공항 철도/경의선으로 바꾼 것과 비슷한 발상 같다.
아 그리고 요즘은 대학교 캠퍼스나 아파트 단지도 지상을 몽땅 공원처럼 꾸미는 게 유행이다. 단지 내에서 지하 주차장 입구를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단지 입구에서부터 자동차를 싹 지하로 넣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아파트 단지 내 도로부터 시작해 간선 도로와 고속화도로, 심지어 고속도로까지.. 자동차 도로는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최후 테크가 될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부터 전깃줄이 지하로 내려가더니 이제는 도로까지 그 뒤를 따르는 듯..
물론 지하 차도는 고가 차도보다도 건설비와 유지비가 훨씬 더 비싸기 때문에 모든 도로가 그렇게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지하 차도는 화재에도 훨씬 더 취약하다는 걸 감안해야 할 것이다. 단순 고가나 교량은 옆으로 도망칠 곳이 없다는 점만 낭패이지만 지하나 터널은 숨까지 제대로 못 쉬게 될 테니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3/03/27 08:35 2023/03/27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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