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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매헌) 역

신분당선은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분당과 서울 강남을 16분 만에 잇는 민자 전철이다. 기본 요금이 수도권 전철의 일반 구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지만,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비싼 값을 하며 환승 할인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현재 개통해 있는 신분당선의 역들을 살펴보면, 강남(2호선), 도곡(3호선), 정자(분당)는 환승역이다.
판교는 판교 신도시 구간에 놓인 유일한 역이며 앞으로 성남-여주선과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신분당선 본사도 여기 인근에 있다.
여기 말고 서울 구간에 있는 비환승 신규역은 둘 있다. 하나는 등산 코스로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청계산입구 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역은 잘 알다시피 '양재 시민의 숲' 역이다. 분당선에는 '서울숲'이라는 역이 있고 신분당선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라는 역이 있는 게 흥미롭다.

이 역은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 사이의 경계인 강남대로 상에 있다. 논현(7호선)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남(2호선), 양재(3호선)의 순인데, 그 다음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IC 근처이고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이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양재에서 끝나기에는 양재 역 이남에도 여러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이 역은 양재 역만 있었을 때의 2% 부족한 면모를 다소 보충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 교육 문화 회관이 있다.
2011년에 본인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에 참가했었고, 그때는 발표 심사와 시상식이 거기서 열렸다.
그때는 근소한 차이로 신분당선이 아직 개통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회관에서는 양재 역에서 주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그걸 타고 회관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기면서 장소가 역에서 600m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마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의 바로 옆에는 말 그대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이 숲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1번 출구로 나가면 북부 쪽으로 간다. 좁은 의미에서는 북부만을 양재 시민의 숲이라고 치는 듯하다.
그리고 5번 출구로 나가면 남부로 향하게 되며, '여의교'--여기가 여의도도 아닌데 이름이 왜 이럴까?--라는 개천 다리를 건너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역명이 괜히 윤 의사의 호인 '매헌'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각종 위령비들은 북부가 아닌 남부에 있다.

이런 관광 명소들이 여럿 있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 지하철 정기권 떨이를 위해 일대 답사를 떠났다.
최 용신 기념관(안산선 상록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3호선 독립문) 가듯이 답사를 갔다.

2. 윤 봉길 의사

매헌 윤 봉길 의사 (1908-1932).

그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경축 행사장에 들어가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묵념을 시작했을 때 용감히 폭탄을 던졌다. 천장절(쇼와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한 행사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정도로 뜻깊은(?) 행사장에다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는 유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립서비스 생색내기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장 제스 총통이 이 사건에 완전 반해서 극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그로부터 불과 3~4개월 전엔 일왕을 죽이려는 이 봉창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이번 행사에서는 보안을 나름 강화하려 애썼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이번엔 불발하지 않게 정말 튼튼하게 폭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이 사용한 폭탄을 만든 사람은 김 홍일 장군으로 동일 인물.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동명인 바람에 독립 운동가의 이름이 이미지가 다소 실추했다.)

일본은 보안 차원에서 행사장 입장객에게 초대장 검사를 실시하고, 도시락과 물통 외의 소지품은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서 식사는 제공 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X선 금속 탐지기가 쓰이던 시절은 아니었던지라, 우리 쪽에서는 폭탄 자체를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지품은 통과 판정을 받았다.
초대장이 없는 건 윤 봉길이 시치미 뚝 떼고 유창한 일본어로 “아 왜 이런 기쁜 행사에 우리 자국민이 참석을 못 하냐?”라고 우겨서 넘겼다고 한다. 시쳇말로 '멘탈 갑'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의사는 물통 모양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진 걸 확인한 후 도시락 모양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폭탄은 또 불발하여 실패했다. 그는 이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자폭에 실패하고 죽지 못한 대가로, 잡힌 후엔 이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폭탄을 누가 만들어 줬는지 불라고 그야말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본토로 끌려가서 재판받은 뒤, 비공개로 집행된 총살로 겨우 24년간의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감정 같았으면 이런 반동분자에게 능지처참을 가해서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 처형 즉결처분을 했다간 오히려 일제의 잔학함이 국제적으로 폭로되고 조선에 대한 여론이 좋아질 걸 우려해서 일을 조용히 해치웠다.

그 대신 윤 의사는 모 형무소 내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수십 발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마치 차우세스쿠의 최후의 순간처럼 끔살당했다. 격발 중 일부는 윤 의사를 겨냥하지 않은 페이크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단 몇 발이라도 권총도 아니고 돌격소총으로 복부의 심장도 아니고 얼굴 미간을 집중적으로 맞았으니 형체가 남아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신은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그래도 안 중근과는 달리 해방 후에 유해가 수습· 송환되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다. 백범 김 구가 이 봉창· 윤 봉길 같은 사람을 침투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윤 의사는 정말 가슴이 터질 듯한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훙커우 공원으로 가야만 했을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사내 대장부는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상하이 의거를 앞두고 아직 갓난아기인 두 아들들에게 미리 남긴 유언)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 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저런 말과 글의 퀄리티를 보노라면, 누가 윤 의사를 감히 무식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유언을 보면 '빈 무덤'이랜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기 시체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다 염두에 둔 듯하다. 아아...
자, 배경지식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부터 기념관과 주변 지역 사진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3. 윤 봉길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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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입장은 무료이나, 주차장은 무료가 아니다.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은 둘 다 무료였던 걸로 기억.)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경우, 재정난· 운영난 때문에 유품들이 제대로 관리도 못 되고 기념관 자체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들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아서 유료화를 해도 좋으니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념관은 중앙 홀의 좌우로 방이 2개 있었다. 내부의 관람 컨텐츠는 이게 전부다. 2층과 3층이 있긴 하지만 거기는 관람 공간이 아님. 3층의 경우, 기념 사업회의 수익 모델 차원에서 강당 공간 유료 대여를 한다고 한다.
안에는 윤 의사의 여러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어록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 의사를 소재로 초등학생들이 포스터를 그린 것도 잔뜩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첫 개관한 건 1988년으로, 천안의 독립 기념관보다 살짝 늦지간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셈이다.
참고로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별도의 윤 의사 생가와 기념관이 있긴 하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것도 윤 의사의 생애에서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못 읽는 어떤 문맹 청년이 윤 의사에게 자기 아버지 묘비를 좀 찾아 달라고 동네 야산의 묘비들을 죄다 뽑아 왔는데...
“님 선친 묘비는 골라 낼 수 있지만, 묘비들 원상복귀는 어떻게 시킬려고?”라는 한 마디에 데꿀멍해 버린 사연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 그 청년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묘지도 못 찾게 만드는 초대형 민폐를 달성했다. -_-;;

안 중근도 그렇지만 윤 봉길도, 테러리스트(?)이기에 앞서 민족 독립의 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상가이고 계몽가였다. 윤 봉길의 삶에서도 의외로 최 용신스러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교육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지식인이 얼마나 고민하던 끝에 폭탄까지 들게 됐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3/10/30 08:23 2013/10/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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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구상엔 여름에 우리나라보다 더 더운 나라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나라들은 여기만치 습하지는 않다. 그래서 낮 기온이 40도를 넘어가더라도 그늘에 들어가거나 조금만 바람이 불어 주면 또 금세 시원해지기도 한다.
자동차의 성능을 잴 때 마력뿐만 아니라 토크도 봐야 하고, 전기가 얼마나 위험한지 측정할 때 전압보다도 전류를 더 봐야 하듯(엥?), 사람의 불쾌지수에는 온도 이상으로 습도가 참 크게 작용하는 게 틀림없다.

요즘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이놈의 습기를 증오로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반대로 습도가 너무 낮을 때 발생하는 현상도 절대로 유쾌한 게 아니다. 겨울철의 끔찍한 정전기와 거칠어지는 피부, 따가워지는 코와 까지는 입술을 생각하면 말이다. 지금은 최소한 그런 현상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어 본다.

2.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도로의 인도에 대대적인 보도블록 교체 공사가 시작되었다. 인도가 전부 흙밭으로 바뀌었으니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차도로 다니게 됐다. 지금까지 보도블록의 교체에 대해 “쓸데없는 전시행정, 세금 낭비” 같은 부정적인 얘기만 언론으로부터 잔뜩 들어 왔던지라 나도 불평을 하면서 길을 지나갔는데..

생각해 보니 저 도로의 인도는 원래부터 상태가 진짜로 안 좋았다. 손상된 블록, 불쑥 튀어나오고 움푹 패인 곳 때문에 어차피 자전거가 인도로 다니기엔 위험했으며, 난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여기 도대체 보도블록을 교체 안 하고 뭐 하냐?”라고 불평을 하면서 다니곤 했었다! 그런데도 상황이 조금만 바뀌니까 생각과 관점도 덩달아 달라지니.. 사람은 사고방식을 논리적으로 단련하지 않으면 참 간사해지기 쉬운 동물이란 걸 내 경험을 통해 느꼈다.

3.
사실은 알게 모르게 세상이 좋아진 게 많다.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장마철만 끝나면 어김없이 수재민 돕기 성금 모금이 연중관례였는데 요즘은 그런 거 없다. 독자들 중에 2MB나 4대강 싫어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니, 저게 강 정비를 잘 해 놓은 덕분에 필요 없어진 거라고 굳이 결론을 내리지는 않겠다. -_-;;

20여 년 전만 해도 추석· 설 때 서울-부산을 가는 덴 10몇 시간이 훌쩍 넘게 걸렸다. 그러나 지금은 고속도로와 우회도로가 워낙 많이 생기고 실시간 도로 안내 시스템도 하도 발달한 덕분에, 명절에도 국토를 종단하더라도 10시간은 정말 안 넘긴다.

또한, 정부에서 시내버스를 경유 대신 천연가스 차량으로 교체하고 자동차에 대한 배기가스 규제를 꾸준히 강화한 덕분에(특히 디젤 차량을 상대로) 서울 시내는 그렇게 많은 자동차들이 지나다님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 같은 끔찍한 스모그나 환경오염 사상자는 더 발생하지 않고 공기가 그나마 지금만큼이라도 유지되고 있다.

난 자연이 언제나 인간에게 선한 것만 주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인 문명의 이기 부정(특히 원자력 발전 반대 같은 거 ㄱ-), 친환경, 채식 같은 구호에 동조하지 않는다. 백신과 수돗물 약품 소독만으로도 그야말로 넘사벽급으로 인간 주거 환경의 위생이 개선되었으며, 무수히 많은 전염병이 예방되고 영아 생존률이 올라가서 숱한 생명을 구했다. 이게 없으면 인구가 이렇게 밀집한 대도시는 위험해서 도저히 돌아갈 수가 없다.

그런 디테일은 간과한 채 오늘날과 같은 현대 문명을 이뤄 낸 과학 기술이나 사회 체제에 어설프게 이상한 음모론 제기하고 체제를 부정하는 낭설을 난 믿지 않는다. 그래, 가끔은 진실이 정말로 과격· 극단적인 곳에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센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는 정말로 팩트에 대한 철저한 교차검증과 균형 잡힌 판단이 필요하다.
내가 처한 상황으로 인해 위의 권위나 세상에다 불평을 하기 전에 정말로 그게 합당한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오히려 세상이 좋게 바뀐 건 없는지 살펴보는 안목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8/08 08:38 2013/08/0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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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이라 하면 철덕이라면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중앙선 및 경춘선보다는 살짝 이른 1937년 8월 5일에 개통하여 대한민국 최후의 협궤 철도로 남아 있었지만 199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운행이 중단된 추억과 비운의 노선 말이다.

단, 최후까지 살아 있던 구간은 인천-수원 전체가 아니라 한대앞-수원 사이의 비교적 한적한 구간이다. 한적하다는 말은 재개발을 위해 선로를 철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객 수요도 안습하다는 뜻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운행 중단’ 상태라지만 실질적으로는 폐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된 선로를 곧장 악착같이 모조리 철거한 것도 아니었다. 관리가 중단된 협궤 선로는 이내 시뻘겋게 녹이 슬고 잡초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은 일상적으로 보기 쉽지 않은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철덕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8년 전인 지난 2005년에 상록수-한대앞 역 사이의 수인선 선로 흔적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수인선의 표준궤 복선 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거기에 있던 선로는 의외로 얼마 못 가 철거되었다. 사진을 찍어 놓길 잘했다. 본인은 별다른 의심의 여지 없이 이제 수인선 협궤 선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대앞 바로 다음의 중앙-고잔 사이에 선로가 아직까지 의외로 잘 보존되어 있고, 일부 구간은 안산시에서 관광 시설로 조성해 놓기까지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의외로 각종 위키 부류의 정보 사이트에서도 수인선 잔여 구간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은 석가탄신일 연휴 때 곧장 안산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마침 사랑 침례 교회의 정 동수 목사님께서 뉴에이지 특강을 했는데, 안산선과 수인선 답사를 먼저 한 뒤, 안산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편인 그 교회에서 강의도 듣고 왔다. 이렇게 동선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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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었지만, 잠시 반월 역 주변의 사진을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에 이렇게 전원적이고 산과 들로 뒤덮인 전철역이 또 있을까 싶다. 안산선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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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역은 굉장히 드문 특성을 여럿 갖춘 특이한 역이다.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으며(이런 역도 몹시 드문데), 역무 시설과 승강장이 모두 지상 평지이면서 선로 횡단은 육교가 아니라 지하도로 한다. 지하철과의 환승역이 아니면서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 역은 구일이나 대방 역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역 입구엔 작게나마 광장도 있다.

잘 알다시피 반월과 다음의 상록수 사이는 거리가 3.7km가량으로 수서-복정급으로 매우 길다. 두 역은 지상이지만 잠시 몇백 m 길이의 터널도 지나며, 아래로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그리고 위로는 경부 고속선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상당히 긴 역간거리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 사이에는 역이 또 생길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본인은 여행을 계속했으며, 드디어 중앙 역에 도착해서 내렸다.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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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그분이 내 눈에 펼쳐졌다! 하앍하앍...;;
한대앞 역의 경우(그리고 안산 역도), 안산선의 승강장도 지상 평지이다 보니 수인선과 승강장이 나란히 건설되는 게 가능했던 반면, 중앙이나 고잔 역은 안산선 선로가 고가로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평지인 수인선은 역의 밖에 이렇게 있을 수밖에 없다.
금정 쪽으로 되돌아가는 한대앞 방면으로도 수인선 선로가 살짝 있긴 했지만 얼마 못 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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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 주변은 그야말로 경치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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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그렇다 쳐도 영문 서체는 마치 Mac OS 클래식의 서체와 닮은 것 같다.
이런 클래식 역명판도 누가 잘 보존해 놔야 할 텐데 말이다.
과거엔 이곳에 수인선 승강장이 있었기 때문에, 열차 승강장도 아니고 역의 외벽에 이런 물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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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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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에 가까워지자 웬 이런 시설물도 있었으나, 식물 넝쿨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주변 식물들의 키는 낮아져서 시야가 확 트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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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수인선 고잔 역 승강장과 열차를 재연해 놓은 시설물도 있었다.
안산선의 역들 중 수인선을 가장 잘 보존해 놓은 구간은 중앙-고잔이며, 역 하나만 꼽자면 고잔 역 주변인 듯했다.

고잔 역은 수인선 시절부터 있었던 역일 뿐만 아니라 안산선이 개통한 뒤에도 한동안 수인선 영업만 하고 안산선 쪽 승강장은 수 년 뒤에 생겼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정서적으로 수인선이 ‘갑’이었던 역이기 때문에 보존 시설도 고잔 역을 중심으로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 반면, 그 옆의 초지(구 공단) 역은 그렇지 않다. 수인선이 본격적으로 망해 가던 1994년에 추가로 생긴 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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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을 지나고부터는 수인선 선로는 다시 잡초로 무성하게 덮이더니, 나중에는 안산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개천과 철길 공사장(원시-소사선!)에 가려져 선로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땡볕에서 중앙-고잔-초지 사이의 거의 3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으면서 수인선 성지순례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광역전철 분당선이 첫 개통한 날이 반대로 수인선의 상당 구간이 폐선된 날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KTX가 개통한 날이 교외선 열차가 없어지고 경춘선 통일호가 없어진 날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지금 오이도 역은 과거의 수서 역과 비슷한 위상이 돼 있다. 옛날에는 3호선의 남쪽 종점이 수서였고, 동시에 노란 분당선의 북쪽 종점도 수서였으며 둘은 한데 이어진 노선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4호선의 남쪽 종점이 오이도이고, 동시에 분당선과 직결될 예정인 노란 수인선의 종점도 오이도인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04 08:27 2013/07/0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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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 지능 검사

다중 지능 검사 (링크 클릭).

얼마전에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 URL이 나돌고 있더라.
누가 만든 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해 보니 재미있는 테스트 같았다.
나의 결과는 주변의 페친들의 결과와는 사뭇 달랐다...

1위 음악 지능: 음악가, 음향 기술자, 음악 평론가, 피아노 조율사, 영상 음악 작곡가 등... =_=;;;;;;;
2위 자기 성찰 지능: 심리학자, 작가, 발명가, 기업가, 신학자
3위 언어 지능: 작가, 언어학자, 연설가, 방송인, 정치가, 설교자, 번역·통역사

이고

4위가 논리· 수학 지능
꼴찌는 신체 운동 지능

...;;;
여느 공대 출신 프로그래머답지 않은 이상한 결과이다.
다른 지인들은 대체로 논리· 수학 지능이 3순위 안으로 들던데 난 그렇지 않았다.
나의 경우 1위는 아예 예체능이고 2위와 3위는 전형적인 문과 적성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저게 꽤 정확한 결과인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ㅎㄷㄷㄷㄷㄷ

저 검사 결과가 정확하다면, 내가 음악 지능이 저렇게 높게 나온 이유는 빼도 박도 못하고 철도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Looking for you를 완전히 뼛속까지 분해하고 씹어 먹어서 소화했기 때문에..;;; ㅎㅎ
그렇지 않고서야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고, 밴드 하나 한 경험이 없는 왜곬수가 어째 저런 적성이 나오겠는가? 가끔 이공계 엄친아 중에서는 스스로 작곡까지 하고 음악에도 프로급의 재능을 보이는 괴물이 종종 있긴 하나(안 지홍 씨라든가..), 난 그 정도 타입까지는 절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확실히 융합형 적성이긴 해 보인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14 08:27 2013/06/1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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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下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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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 선생 묘소의 비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닳아 있었는데 이곳이 허 준의 묘지라는 것은 꽤 어려운 계기를 통해서 알려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이 출간된 게 1611년이라고 하니 KJV 신자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에서 흠정역 성경이 나온 동안 조선에서는 의학 서적이 만들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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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의 언덕은 전원적이고 경치가 좋았다. 물론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지뢰밭?)이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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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주 적성면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였다. 주변엔 공원도 있어서 산책하고 쉬기에 좋았다.
미국의 인지도에 밀려서 그렇지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도왔던 국가이다.

특별히 이 전적비는 1951년 4월 22~25일 동안 이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하고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번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 자신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652명 가운데 겨우 67명만 살아남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제일 먼저 여기 가서 참배부터 한 뒤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육해공 참모총장과 김 관진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화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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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글자가 좀 작긴 하지만, 임진강 역과 일대의 임진각 관광지는 지도에서 4번이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가 3번, 제3 땅굴은 2번이다. 땅굴을 견학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지하로나마 DMZ 구간에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동그란 점선은 민통선이고, 더 이북으로 길쭉한 점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허 준 선생 묘지는 24번이요, 영국군 전적비는 22번 근처에 있다. 이 지도 자체가 영국군 전적비 입구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초청자분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왕 적성면까지 자차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적군 묘지도 좀 들를까 했다.
국도 37호선을 타면서 근처를 분명 지나긴 했을 터이나 발견은 못 했다.

하긴, 이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진짜 최소한의 예우만 해서 매장해 놓은 묘지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묘비에 이름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결정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종북 간첩 불순분자 정치인도 여기 가서 참배를 했다거나, 이곳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병신짓을 한 적도 없다. (뭐, 적군 묘지를 띄워 줄 수는 없으니, 반대로 국립 현충원 참배가 부당한 강요라고 희대의 개드립을 날린 빨갱이 정치인은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게 되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과 종북 좌빨의 spirit은 역시 절대로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민통선 안에 들어가서 제한적으로나마 사진 찍고 실시간으로 SNS와 카톡으로 자기 근황까지 알리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게 무엇 덕분이고 누구 덕분일까?
또한 공무원· 관료가 아니라 엔지니어· 발명가가 대접받고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 구조 덕분에 컴퓨터가 발명되고 인터넷이 뚫리고 페이스북,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레알 넘사벽급 선진국이 맞다.)

그에 반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전국을 드나드는 게 우리가 지금 민통선을 드나드는 것과 비슷한 절차이다. 평양 시민이 아니면 일반 평민들은 출입증 없이는 시· 도도 못 빠져나간다.

우리나라는 군대 현역 복무가 2년가량이고 예비군까지 합쳐야 10년 남짓이지만, 북한은 남자들의 현역 복무가 10년이어서 20대 중· 후반까지를 전부 군대에서 날린다. 예비군 소속은 사실상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60대) 평생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전국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경찰도?)을 무진장 많이 뽑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생산을 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군대를 돌아가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진장 착취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근본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북한의 비효율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야기되는 게 아니다. 겨우 이념만이 문제였다면 북한도 중국이나 소련처럼 경제 시스템을 개방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냥 무력 군사 도발에 분노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북한 수뇌부의 시스템과 대처 매뉴얼, 알고리즘이 본질적으로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선이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는 점도 말이다. 이걸 놔 두고 무슨 미국이 경제 봉쇄를 해서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니,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니 하는 건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악한 국가가 6·25 시절처럼 정상적인 무력 기습으로는 우리나라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유를 악용하여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족 자주 통일 드립을 치면서 안보관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띄울 건 없으니 반대로 남한을 비하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통선 패스를 갖고 계신 어르신은 역시 안보관과 사상에 관한 한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 더하시더라. 정말 울분을 터뜨리면서 지난 종북 정권이 저지른 반역 행위를 비판하셨다. 개성 공단은 10년 공들인 탑이 아니라 10년간 앓던 충치에 더 가깝다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도 잘한 것만 있는 게 아니며 역사적으로 자신의 병크를 북풍으로 합리화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안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한 이슈로, 무슨 국내 치안처럼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처럼 신사적으로만 진행해서는 곤란한 면모도 있다. 간첩 한 명만 칼같이 가려내고 단 한 명도 억울하지 않게 공권력을 집행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 아라크넹 님은 “원전을 없애자고 할 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필요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몇 배로 오른 기름값과 전기료를 감수하면서 무턱대고 원전을 없앨 참인가? 현실적인 변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무작정 원전을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부 수사 기관이 종북 수사를 병신같이 한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종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더 시급한 때임이 틀림없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전툴루, 전땅크 각하는 잘 알다시피 퇴임 후에도 25년이 넘게 장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강의 호강을 누리는 중이다. 돈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세금 추징금도 안 내고, 훈장도 반납 안 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는 다 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 건강도 아직 좋고 팔팔하다.

리즈 시절에 제3 땅굴을 발견한 것 좋으며,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형 집행을 시원스럽게 잘 해 준 것도 분명 잘한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의 모습은 좀 좋은 간증(?)이 못 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놈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전땅크 각하에게 공개적으로 제안 드린다.
아예 대놓고 국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 줬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지고서 이왕 구겨진 이미지를 확실히 완전히 구기란 얘기다. -_-;;
저 사람이 그 배짱으로 광주 5.18 피해자들한테 사죄(?)를 할 리는 없으니, 사죄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우익 쪽에 힘을 실어 주는 소신 발언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서”라고 말할 배짱이 있으면, 차라리 그때 명령을 따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고, 팀킬 오발 사고 때문에 몇몇 광주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희생된 건 애석한 일이라고... 심지어 5.18 때 북한 특수군이 쳐들어온 게 사실이기라도 하면 그것도 언급하라.
그게 사실이고 그 시절 자기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면 그 소신이라도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란 말이다. 지 만원 박사 같은 사람이 기를 쓰고 주장하는 내용을 당사자가 직접 입증해 보아라.

전직 대통령이니 얼마나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겠는가? 그런 말 아무리 해도 신변에 위협을 받을 일도 절대 없을 테고!
그것이 전땅크 각하가 그나마 마지막에 세금값 하는 인물로 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난 광주 5.18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성향으로든 남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꿔 놓을 정도의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뭐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경의선 쪽을 갔으니 다음 안보 관광은 철원 경원선 라인으로 갈 예정이다. 제2 땅굴, 노동당 청사, 백마고지/월정리 역, 금강산선 옛 철교 흔적 등 말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6/11 08:39 2013/06/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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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中

다음은 임진각 전망대에서 북쪽 도라산 역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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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 건너편은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며 북한 땅은 더욱 아니다. 건너편은 그저 민통선 안쪽일 뿐이다.
과거의 경의선 철교와 지금의 경의선 철교의 위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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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에서 평화 공원으로 가는 길엔 이렇게 6·25 참전국 기념비가 있고, 아웅산 폭탄 테러 순직자의 위령비도 있다.
6·2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전쟁이다. 6·25만치 선악 이념이 분명했던 전쟁은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UN이 창설 이래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딱 한쪽 편을 들어서--당연히 대한민국 편-- 반대편을 적극적으로 퇴치하는 군사 활동을 했으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국가들이 오로지 한 자그마한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불법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을 생각해 보아라. 미군이 개입했던 전쟁 중에 6·25만치 참전 명분이 깔끔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굳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제3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6·25는 여타 전쟁들과는 달리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지도가 매우 저조하다. 아예 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구도가 너무 명확하다 보니, 딱히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하거나 삐딱하게 풍자· 비판을 할 껀덕지가 없어서 잊혀졌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이라크, 베트남 등에 비해, 6·25는 전쟁을 겪은 당사자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뜬히 이뤄 내고 G20 급의 선진국이 되어 있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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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원래 부통령이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DR)가 급사한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 양반이다.
그가 6·25 때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북한· 중공군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다”와 “한반도에서 또 핵이 떨어지고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뻔했던 상황을 예방했다”라는 두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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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화 공원을 살펴본 뒤, 우리 일행은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도라산 행 열차를 탔다. 문산-도라산도 아니고 임진강-도라산 겨우 한 정거장 거리만을 이용한 것이다.

개인이 도라산 역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왕복 승차권 구입과 더불어 연계 안보 관광 패키지 신청도 같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역 주변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정책이 또 바뀐 것 같다.
이 지대의 관광 상품은 도라 전망대, 제3 땅굴, 통일촌 견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4시간 정도 걸린다.

역 주변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역시 보안 시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통제하는 헌병이어서 그런지, 다들 키 크고 체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20대 초반 나이일 텐데 말이다.

도라산 역의 옛날 사진을 보니 역명판의 서체가 목판체 계열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코레일체도, HY울릉도도 아니라 윤 디자인에서 만든 월드컵체이다. 철도역에서 월드컵체를 볼 일이란 원래 전혀에 가깝게 없을 텐데 뜻밖이다.
역이 개통한 시기와 저 서체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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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은 출· 입구 관리 사무소와 세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물론 현재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시설) 내부가 꽤 크고 넓다. 승강장 역시 KTX 한 편성 정도는 너끈히 세울 수 있어 보이는 규모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없이 한동안 설명만 좀 늘어놓겠다.
역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른 뒤, 도라 전망대로 향했다. 여기는 민간 관광객에게 개방되긴 해도 엄연히 일종의 GOP이며 군사 시설이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이 전망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가 보였다. 기정동 쪽은 깃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료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펄럭이지 않을 뿐 인공기도 꽂힌 게 보였다. 게다가 북한 쪽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서 있는 북한군 병사까지 보였다! 김일성 백성들도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호모 사피엔스이긴 했다.

이게 내가 브라운관이나 LCD 같은 전자 기기가 아닌 매체로 북한 관련 시설물을 본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 쪽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광객도 굉장히 많았다. 미국인이야 그렇다 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도라 전망대 다음으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을 견학했다.
옛날에는 관광객들이 건물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를 걸어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지만, 지금은 승강 열차가 생겨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다.

주요 소지품들은 사물함에다 맡기고, 헬멧을 지급받은 뒤 몇백 m 정도 거리를 산보하듯 다녀 왔다. 땅굴 입구 자체가 거의 DMZ 경계선 근처에 있고, 땅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한계는 지상에서 군사 분계선이 200m도 채 안 남은 지점이 끝이다. 그 이상은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 굳게 잠긴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땅굴은 키가 170cm가 넘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안 들키게 병력 수송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만 굴착을 한 셈이다. 땅굴을 파는 게 좀 힘드나.. 지하철이라는 게 처음 등장하고 전기 철도가 도입되었을 때 제3궤조 집전식이 괜히 쓰였던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터널의 단면적이 작아도 되기 때문이다.

육로를 통한 남침 방법이 완전 원천 봉쇄되고 차단되자, 비열한 김 일성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땅굴을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악한 통치자 밑에서 영혼이 완전히 황폐화된 채 사는 북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한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땅굴은 여러 개 팠으면서, 북한은 정작 평양 지하철을 만들던 중에는 대동강 아래를 관통하는 하저 터널 건설에 실패했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제3 땅굴은 1978년에 전땅크가 육군 제1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박 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탐사 작업을 통솔하다가 끝내 발견했다. (...) 이 양반, 그래도 리즈 시절에 나라를 구하는 과업을 한 건 이뤘다.

우리가 주로 관광한 것은 이 둘이었고, 그 뒤엔 통일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좀 놀다가 다시 도라산 역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내부는 온통 농경지나 황무지, 군부대이고, 민통선 내부이다 보니 사람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가 아닌 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지뢰 매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도라산 연계 관광을 마친 뒤에는 초청자를 따라 개인 명의로 두 곳을 더 돌아다녔다. 일단, 허 준 선생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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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내비 화면 인증이다(텅 빈 지도!). 파주시는 임진강 건너편은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 준 묘지는 아무나 곧장 갈 수 없다. 도라산 안보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인된 여행사를 통한 단체 관광으로만 갈 수 있으며, 개인 자격 방문은 민통선 내부 출입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행을 얼마나 인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고 오는 차량의 대수가 늘어나면 절차가 그에 비례해서 더 까다로워진다.

민통선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조상 대대로 그 지대에 땅을 갖고 있었거나 그 지대의 땅을 산 지주는 국가로부터 출입증을 교부받는다고 한다. 물론, 출입 가능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 그 출입증만 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민통선 지대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민통선 출입이 일반 커피라면 대성동 출입은 가히 TOP이다. 거긴 민통선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까지 넘은 최고로 위험한 DMZ(비무장지대) 안이고, 레알 군사 분계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거길 드나들려면 당일 신분증 제시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하 두 주 이상 전에 방문 신청을 해서 신원 조회를 받아야 하며, 마을에 들어간 뒤엔 신분증을 아예 맡겨야 된다. 승용차에는 하늘색 천을 달아서 펄럭이게 하고, 유엔 사령부 소속의 군인으로부터 완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이동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8 19:34 2013/06/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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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上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시는 모 자매님은 고향이 파주 적성면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인 형제님과 결혼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북단 거주자와 최남단 거주자가 만난 셈.)
이분은 성장 배경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파주 북부의 지리에 아주 밝고, 또 부모님이 민통선 출입증까지 갖고 계셨다.

본인은 이분과 같이 교제를 하던 중에 어째 이 주제로 얘기가 나왔고, 덕분에 하루는 이분의 가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주 경의선 라인 쪽으로 거창한 안보 관광을 같이 가게 됐다.
작년 여름에 갔던 평택 해군 기지 이후로 바이블 빌리버와 함께 하는 안보 관광 제 2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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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승용차를 몰고 임진강 역으로 향했다.
강변북로와 서쪽에서 직결되는 자유로는 무려 10차선에 달하는 정말 넓은 도로였다.
과연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더불어 폭주족들이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에 난리를 부릴 만도 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딱 한 번, 지점이 아니라 구간식 속도 단속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즉, 특정 지점 한 군데에서만 제한 속도를 넘는지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작점부터 끝점에서 차량 번호와 진입 시각을 두 번 파악하는 단속 방식 말이다. 그 구간 사이를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리면 단속에 걸리니, 차들은 강제로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차선 수도 덩달아 줄었다.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느 샌가 짙은 안개로 확 뒤덮였으며, 차의 유리에도 성에가 꼈다. 좌우 주변의 경치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뭐 날이 밝자 안개는 곧 걷히고, 다행히도 하루 종일 아주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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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은 바로 옆에 관리인이 없는 무료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도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나 나중에 낮이 됐을 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워 둔 차들로 인해 그 공간이 꽉 차고 빈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 경의선에는 문산 역까지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문산은 1906년에 경의선이 처음 개통할 때부터 있었던 역이며 남북이 분단된 뒤부터는 수십 년간 경의선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문산 다음에는 곧바로 장단 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대중 정권 시절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북한과 선로가 연결까지 되면서 21세기에 문산 이북으로 3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2001년에 가장 먼저 임진강 역이 생겼고, 2002년에는 드디어 민통선 안에 도라산 역까지 생겼다. 운천 역은 더 나중인 2004년에 문산과 임진강 사이에 생긴 임시승강장이다. 지역 주민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역이지만 어차피 전철이 문산까지밖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임진강 역 근처에는 임진각, 평화 공원 등 여러 볼거리가 많다.
위의 사진에서 교각만 놓인 옛 다리는 6·25 때 파괴된 원래 경의선 철교의 흔적이고, 그 옆에 놓인 새 다리가 바로 다시 놓인 경의선 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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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평화 공원에는 '평화 열차'라 하여, 관광용 협궤 증기 기관차가 다닌다. 물론 생김새만 증기처럼 생겼고, 실제로는 기름으로 달린다.
나의 관심사는 (1) 이 선로의 궤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2) 남이섬에 있는 '유니세프 나눔 열차'와는 동일한 규격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평화 열차의 선로는 수인선 협궤(762)보다는 약간 더 작은 듯했고, 한 우진 님께서 남이섬 열차의 궤간도 640쯤 되는 듯하다고 추측하신 걸로 보아, 둘이 거의 동일한 규격이 아닌가 싶다.
눈짐작으로 이런 궤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철덕에게 필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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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중단점은 경원선 신탄리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사실, 상술했듯이 경의선도 시설이나마 연결된 지는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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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미카' 형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의왕의 철도 박물관과 더불어 임진각에도 한 량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6·25 때 순직한 김 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도 이것과 같은 차종으로, 그 실물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객차까지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미카'는 emperor를 뜻하는 일본어 '미카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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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증기 기관차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분 되시겠다.
'마터' 형 화물용 증기 기관차. 이름부터가 mountain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산악+화물 컨셉으로 제작된 고출력 기관차이며, 1940년대에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에 제조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생김새가 전통적인 미카, 파시 같은 열차보다 좀 이질적이다.

이 열차는 1950년 12월에 영문도 모른 채 북한 쪽으로 달리다가 경의선 장단 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열차와 수송 물자를 적군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청야 전술에 의해 아군의 사격을 받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쇳덩어리가 수백 발의 총알을 맞아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밖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그게 목적이라면 열차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것이다. 허나 증기 기관차는 무슨 전후대칭 전동차 같은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차대가 없는 역에서는 진행 방향을 그렇게 전환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열차를 운행 불능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장단 역은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 기관차도 핏빛에 가깝게 새빨갛게 녹이 슨 상태로 무려 수십 년 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분단, 안보 관련 서적에는 이 기관차의 사진이 꼭 등재되곤 했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이 기관차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으로 가져와서 녹 벗기고 광 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2009년부터 임진강 역 주변 평화 공원에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이제 갈색으로 바뀌었다. 단,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은색 도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이 열차를 당시에 운행했던 기관사는 한 준기(1927-2011) 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 이거 안보 관광으로 시작했는데 철도 얘기만 자꾸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 (거 봐, 철도와 안보 의식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6 08:40 2013/06/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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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 개론

모태신앙일 뿐만 아니라 모태솔로-_-인 본인더러, 연애 하는 걸 좀 배우라고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볼 것을 강력히 권하는 지인이 주변에 있었다. 그래서 1년 전 영화를 찾아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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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영화를 보고 느낀 점이다.

1. 1990년대도 벌써 20여 년 전의 추억이 돼 가는구나.

2. 내가 보기에도 남자가 정말 미치도록 숙맥이긴 하다. ㅎㅎ 스토리가 참 서정적이고, 흥행 성공했다는 게 수긍이 간다. 기존 소설을 영화화한 게 아니라니 의외.
나도 철도 얘기, 정치 얘기, 프로그래밍 얘기 같은 거 집어치우고, 이성하고 같이 순수하게 저렇게 놀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 좀 들긴 했다. 그게 과연 가능하긴 할까?

3. 건축학개론의 스토리 설정은.. 뭐랄까, 황 순원의 <소나기>에다가 옛날 하이텔에 pctools(김 현국) 님이 지은 <소나기 그 15년 후>-_-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저 15년 뒤 패러디판을 아는 분이 독자 여러분 중에 혹시 계시려나.. 물론 영화는 그 패러디물만 한 막장 스토리는 아니며, 여자 쪽이 죽는 걸로 끝나지는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4. 그리고 결정적으로, 극중에 나오는 수업 내용은 건축공학하고는 아무 관계 없고 지리에 훨씬 더 가까운 것 같은데? 내가 연세대 건축공학과의 수강 편람까지 다 찾아봤는데, 현실을 감안했을 때 제목은 좀 낚시 같다.

지도 펼쳐서 길과 건물 살피고 여행 가는 건 철도에만 미치고 나면 알아서 다 하게 된다. 내가 예전에 짜 놓은 “철도학 개론” 커리큘럼을 참고하시라. 건축학 개론 영화가 나오기도 전에 만들어 놓은 자료이지만, 저거야말로 음대생도 부담 없이 들을 수 있고, 영화의 성격과 훨씬 더 부합하는 이상적인 형태의 수업이다

철도를 배경으로 사랑이 맺어지는 스토리의 영화가 나온다면 얼마나 멋질까! 영화 장면 중에는 중앙선 구둔 역도 나오더구만.

자, 그런 의미에서 “코레일-광역전철 길라잡이-구석구석 상상여행” 코너를 소개하며 글을 맺겠다.
KTX 촬영 명당인 반월 저수지 인근 야산도 아예 반월 역과 함께 공식적으로 소개되어 있다. 단, 이곳은 저 사이트에서 소개된 바와는 달리, 반월보다는 대야미 역에서 접근하는 게 거리가 약간 더 짧고, 찾아가기도 훨씬 더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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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오늘도 기승전철 달성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19 08:26 2013/05/19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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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씀 보존 학회와 한글 킹 제임스 성경

1994년,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라는 단체가 그 이름도 유명한 “한글 킹 제임스 성경”이라는 역본을 내놓으면서, 한반도에 한국어라는 언어와 한글이라는 문자를 매개로 명목상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 처음으로 출간되었다. 사실 그 전부터도 '새성경'이라는 이름으로 신약이 먼저 나와 있었으나, 방대한 분량의 신구약 성경전서가 최초로 완역된 게 저 때이다.

한킹이 처음 나왔을 때는 한국 교회가 말보회에 대해 그렇게까지 적대적이지 않았다고 한다. KJV라고 하면 그래도 신학깨나 했다는 사람들한테서 충분히 인정받을 만한 인지도가 있는 성경이었고, 어차피 기존 개역 성경도 허접한 구석이 있다는 걸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지어 모 대형 교회에서는 한킹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쓸 의향을 밝히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보회는 이 좋은 기회를 얼마 못 가 스스로 차 버렸다. “개역 성경은 사탄 마귀의 성경이기 때문에 그걸 읽어서는 구원도 못 받는다 / 우리 성경 침례 교회 이전에 대한민국엔 진정한 신약 교회라는 게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심한 병크를 저질렀고, 대표의 싸이코 같은 모습이 부각되면서 한국 교회는 마음을 완전히 닫아 버렸다.

배교의 결정판 NIV
스스로 성경이기를 포기한 현대어 성경
오리겐도 울고 갈 변개 실력
현대어 성경으로 한국 교회를 뜨겁게 할 유일한 방법은 땔감으로 쓰는 것밖에 없다 (레알 불쏘시개 인증)


이런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표현은 당시 말보회가 광고로 퍼뜨리던 문구였다.
왠지 “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생각이니” 짤방이 생각난다... “개역성경은 성경의 쓰레기이고 NIV는 성경이라 불릴 수 없는 저질 족속이며 공동번역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저질 성경이다. 그러나 ...” ㅋㅋㅋ

비록 말보회의 주장 중에 일리가 있는 말도 있었고 한국 기성 교계가 각종 비성경적인 관행들을 답습하고 있는 게 한둘이 아닌 건 사실이지만, 말을 저 따위로 해서는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겠나. 말보회는 1998년에는 모 교계 총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이단 판정까지 받음으로써 확인 사살을 당했다. 말씀 보존 학회가 아니라 “말썽 보존 학회”로 찍혔다.

이로써 한국 교회는 변개되지 않은 올바른 성경을 통한 영적 부흥 따위는 아주 안드로메다로 가 버리고, '킹 제임스'의 '킹' 자만 꺼내도 “거기 이단 아냐?”란 반응이 나오는 영적 무지가 판을 치는 암흑기로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변개된 성경이 삭제한 게 아니라 “KJV의 구절이 후대에 근거 없이 추가된 것이다”는 식으로, 변개된 역본 및 본문을 옹호하는 신학자들의 잘못된 궤변이 교계에서 더욱 힘이 실리는 계기가 마련되어 버렸다.

2. 킹 제임스 흠정역

그러던 1990년대 중· 후반엔, 말보회 내부에서도 성경의 편집 방침에 대한 대립이 심해졌고 대표 되시는 분의 막무가내 식 독단과 횡포를 견디지 못해 내부 인원이 일부 이탈했다. 이런 식으로 말보회의 밖에 있는 국내 킹 제임스 맨들이 여럿 이를 악물고 의기투합한 끝에 자기네만의 성경 역본을 2000년 여름에 처음으로 내놓았는데,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흠정역”이다. KJV는 왕이 공인한 성경이라 하여 이를 한자어로 표기하면 '흠정역'이 되는데, 그 단어를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시기가 정보 올림피아드 출품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이 완성된 것과 매우 비슷한 건 우연이다. ㄲㄲ

말보회 측에서는 이런 움직임을 좋아할 리가 없었으니 당연히 크게 반발했다. 흠정역은 한킹을 베껴서 쉽게 만들어진 거라고 엄청 중상모략과 악담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둘을 펴서 대조해 보면 이런 모함은 설득력을 잃는다. 한킹은 몇몇 센세이셔널한 구절을 제외하면 흠정역보다 품질이 훨씬 더 열악했으며, KJV가 아니라 실은 공인 본문(TR)을 번역한 이역도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한킹을 베끼는 식으로는 흠정역 같은 성경이 결코 나올 수가 없음이 자명하다.

시대를 풍미하면서 좋든 싫든 대한민국 땅에 KJV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했던 말보회는 21세기 이래로 어찌 지내고 있는지 난 잘 알지 못한다. 과거의 너무 지나쳤던 병크에 대해서 말보회 내부에서도 “심했다, 그땐 좀 유감이다” 같은 자정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다고 난 들었다.

이제 이 글의 초점은 한킹에서 흠정역으로 바뀐다. 흠정역의 주 번역자는 잘 알다시피 정 동수 교수(인하대 기계공학과..;)인데.. 자기 입으로 민망하게 떠벌리지를 않을 뿐이지, 한국에 바른 성경을 보급하고 바른 교회를 세우려는 열망과 부담감을 주체하지 못해 몸서리쳤던 분이다. 그래서 생업을 제외하고 40대를 전후한 인생을 죄다 그 일에 바쳤다.

흠정역 초판이 완성되었을 즈음, 정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안에>라는 기독교 자료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성경 이슈를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이트는 게시판이 없고 딱히 양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없었다. 난 대전에서 대학 생활을 하던 이 시기에 그 사이트를 통해서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한편, 그분은 안식년을 이용해 미국으로 건너가서 KJV를 쓰는 펜사콜라 크리스천 대학에서 신학 석사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후 곧장 귀국하여 몸소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이때의 목회는 실패하고 교회가 와해되고 말았다. 2000년대 중반이던 이 시기가 정 목사의 인생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였다고 그분이 스스로 증언하며, 지금의 설교 때에도 스스로 언급한다. 뭐 비윤리적인 일이나 스캔들 때문인 건 절대 아니고, 약한 성도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세세하게 어루만진다거나 하는 심리적인 일에 서툴렀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건 성경 지식만으로 되는 게 아니며, 누가 목회를 하더라도 몹시 어려운 일이다.

3. 사랑 침례 교회

말보회가 흐려 놓는 바람에 한번 부정적으로 굳어진 KJV 이미지의 여파는 꽤 컸다. 그러나 말보회의 밖에서 바른 성경을 알리려는 분들의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수 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그 상처는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흠정역 성경을 기존 기독교 매체에다 광고하고, 또 기성 기독교 출판사를 통해 시판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KJV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불식시키고 이것도 신뢰할 수 있는 어엿한 대체 한글 성경 역본임을 알리게 되었다.

2008년경, 정 동수 목사는 개인적으로 다시 인도하던 성경 공부 모임을 기반으로 지금의 사랑 침례 교회를 다시 세웠다. 그리고 Keep Bible이라는 후속 웹사이트를 개설하여 기존 <그리스도 예수안에>를 흡수했다. Keep Bible은 예전 사이트와는 달리 커뮤니티 기능이 크게 발달해 있으며, 각 지역 교회 홈페이지별로 찢어져 있던 커뮤니티 기능을 죄다 흡수하고 명실상부 국내 최고의 KJV 신자들의 교제 공간 겸 자료 창고가 되었다. 현재 Keep Bible에 버금가는 다른 양대 산맥 커뮤니티는 청지기 카페 정도가 고작이다.

이를 통해 흠정역 성경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고, 사랑 침례 교회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성장했다. 2012년에는 예전보다 꽤 더 큰 건물을 구해서 인천 남부로--서울에서 가기는 더 힘들어짐-- 이사를 갔으나, 거기도 이내 꽉 차서 주일 오전 예배 때 300명에 가까운 인원이 온다고 한다.

첫 개척했던 교회가 실패했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성공이다. 온라인 상으로 정 동수 목사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도 국내외에 굉장히 많으며 설교에 대한 반응이 굉장히 좋다.

잘 생각해 보면, 지금은 시기적으로도 예전에 비해 KJV 거부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고, 기존 교계 자체도 개역 성경을 개역개정으로 바꾸려는 분위기인데 이 참에 성경 이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른 성경을 기반으로 성경대로 건전하고 바르게 행하는 교회에 대한 영적 갈급함을 느끼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추세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고무적인 현상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문제는 정 동수 목사는 전임 사역자가 아니라는 것.
대학 교수와 목사를 겸임하고 있는 엄친아라서, 머리는 듀얼코어일 수 있어도 몸이 둘이지는 않다.
주중에 수요 기도회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날짜를 불금 시간대인 금요일 저녁으로 대신 잡고, 가끔은 학회 때문에 미국 출장도 가신다. 그런 상태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많은 성도들을 다 감당할 수는 없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정 목사는 자기는 애초에 전임도 아니니 아예 사례비를 받지 않고 목회를 했다. 그 대신 부목사를 아예 자기 사비로 사례비를 주면서 초빙하기까지 했다. 다시 말해 사랑 침례 교회는 덩치에 비해 사역자의 부족을 호소하고 있었다.

4. 김 문수 형제님

그런 와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분이 바로 김 문수 형제님이었다.
2009년, Keep Bible 사이트가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부터 이분은 정 목사를 빼닮은 말투로 성경의 어려운 내용들을 풀이하고 흠정역을 적극 옹호하는 글들을 시리즈로 올려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야말로 최고의 원군이 등장한 셈이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서 사랑 침례 교회에서는 그분을 초청도 한번 했다.

그랬는데 알고 보니, 이분은 나하고도 더 옛날에 PC 통신 하이텔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는 분이었다.
그때는 난 겨우 중학생-고등학생이었고 저분은 아마 서울대 박사 과정이 꺾였거나 이제 막 박사를 마치신 상황. 베이직 동호회 같은 프로그래밍 동호회에서 마주쳤었기 때문에 난 그분을 컴공 전공자 정도로 생각했다. 물론 컴퓨터 선교회(kcm) 같은 기독교 동호회에서도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이 독실한 크리스천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PC 통신 시절부터도 그분은 쓰는 글의 스타일이 굉장히 자상하고 포근하고 뭔가 권위가 있어 보였고, 박학다식함이 느껴졌었다. 질문이나 잡담을 거의 안 올리고, 올리는 글은 정보나 답변밖에 없었다. 아, 그분은 1999년에 본인이 Intel ISEF에 국내 최초로 출전하게 됐을 때, 하이텔 베이직 동호회에다 해당 신문 기사 본문을 올리면서 내 축하를 해 주시기도 했다. 우와..!

그 뒤 PC 통신이 몰락하면서 그분과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고 그분에 대한 기억은 내 머리 한쪽 구석에만 남아 있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10여 년 뒤에 그분을 킹 제임스 교회에서 정 동수 목사와 얽혀서 다시 상봉하게 될 줄이야. 세상에!

직접 만나고 보니 이분은 1960년대생으로, 정 목사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나는 분이었다. 연세가 생각보다 많으신 셈. 그리고 컴공 전공이 아니라 언론정보학 쪽의 문과 출신이었다. 헐, 그런데도 프로그래밍에도 그 정도로 관심을 보이셨나? 전공의 특성상 연설(스피치), 정보 커뮤니케이션 쪽의 전문가였으니 이건 뭐 설교자에게 이보더 더 적절할 수 없는 전공인 듯하다.
이것저것 엉뚱한 짓을 하는 걸 좋아하는 나와는 달리, 그분은 첫인상만 봐도 책을 무섭게 파는 걸 즐기는 학구파, 학자 기질이 얼굴에 딱 써져 있었다.

만남이 있은 후, 이분은 정 동수 목사로부터 신학 공부 제안을 받으신 듯했고, 처자식까지 있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락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정 동수 목사가 10여 년 전에 거쳤던 동일한 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부를 하고, 각종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를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그 동안 10대 초반 나이인 두 아들에게 영어를 마스터시킨 건 덤. 2010년 가을부터 2012년 가을까지, 내가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재학했던 기간과 동일한 기간 동안 말이다.

5. 사랑 침례 교회 부목사로 부임

이런 과정을 거친 후, 김 문수 형제님은 귀국해서는 딴 데 갈 필요도 없이 사랑 침례 교회의 부목사로 정식 부임했다. 이미 Keep Bible에 올리는 글들을 통해 사랑 교회 성도들과도 친숙한 상태였으니, 일꾼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그 교회를 위해 완전히 준비된 최적의 인물이었다. 그래서 현재 그분은 대학 강사와 목사 직분을 겸임하고 계신다.
다음은 사랑 침례 교회 홈페이지에 올라 있는 김 목사의 가족 사진이다.

사실 내가 김 문수 목사님하고 과거 친분이 있었다는 사실은 내가 정 동수 목사님하고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데에도 꽤-_- 기여를 했다. 친구의 친구 같은 명목으로? =_=;;; 난 사랑 침례 교회에 다니지 않으며, 그 교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었던 서울 소재의 다른 KJV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서울 진리 침례 교회).

김 문수 목사님이 유학 가 계시던 딱 그 기간 동안 마침 흠정역 제 5판(400주년 기념판)의 교열과 간행 작업이 진행되었는데, 나도 여차여차 하던 끝에 이것 저것 작업을 돕는 일에 연루되곤 했다. 김 목사님과의 이런 특별한 만남이나 계기가 없었으면, 다른 목사님들과 친분도 없고 나이도 한참 어린 본인이 그런 일에 개입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을 것이다. 당사자 자신의 역량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어 준 것만으로도 김 문수 목사는 정 동수 목사의 사역에 매우 큰 유익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킹 제임스 성경과 성경대로 행하는 교회들이 대한민국 땅에서 부흥하면 좋겠다. 그리고 비록 각자 섬기는 교회는 다르지만 믿음이 같은 지체들끼리 언제 또 만나서 교제할 날도 오길..

Posted by 사무엘

2013/05/16 08:21 2013/05/16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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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저수지 답사를 마친 뒤 다음으로 본인이 간 곳은 또 다른 철도 성지였다.

2. 철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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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이제 내가 여기를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방문하는 날도 찾아오는구나! 그렇잖아도 의왕 역에서 철도 박물관까지 가려면 수백 m 이상 걸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주차는 공간이 아주 넉넉하고 요금 걱정도 없고 아무 문제 없었다.

예전에 철도 박물관은 겨우 몇백원 대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저렴한 입장료를 징수했으며 그나마도 철도 회원은 동반 1인까지 아예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가 보니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언제부턴가 없어져 있었다. 일반인은 입장료 2천원을 내야 하며, 철도 회원 혜택 같은 거 없다.

물론 난 철덕으로서 예전에도 여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를 또 찾아간 이유는, 여기가 반월 저수지로부터 10k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겸사겸사 또 찾아갈 만한 명분이 성립하고,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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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경부선 선로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것도 철도 박물관으로서 장점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의 KTX 촬영지와 마찬가지로, 이 박물관의 근처에도 저수지가 있다는 점이다.

철도 박물관에서 본인은 부족했던 박물관 관련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문 기념으로 구내 서점에서 다음 아이템들을 질렀다. (정 용태 님, 보고 계신지? 레일러 14호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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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판매하던 철도 박물관 도록은 이제 절판되고 없었다. 있을 때 사 놓길 잘했다. 그 대신 동인지 <레일러>를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직원을 불러서 새마을호의 역사와 관련된 날짜가 두 군데 잘못 소개되어 있는 걸 고쳐 달라고 건의를 했다.
차량실에 새마을호 PP 디젤 동차가 1987년 7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고 소개되어 있는 걸 7월 6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로 새마을호 PP가 최초로 서울-부산 4시간 10분 운행을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그건 PP가 등장하기 전에 1985년 11월 16일부터 달성된 것이니까 말이다.

3. 오봉 역

철도 박물관 다음으로 승용차로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철도 명소로는 오봉 역을 빼놓을 수 없다.
얘는 경부선에서 분기하는 지선인 남부 화물기지선의 끝에 있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객 영업 없이 화물만 취급하는 역이다.
먼 옛날에는 경부선 전철 의왕 역의 이름은 '부곡'이고 오봉 역이 '의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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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박물관과 오봉 역의 거리는 4km도 채 되지 않는다.
입구에 경비실이나 차량 진입 차단기 같은 건 없는지라, 별 부담 없이 차를 끌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단, “직원 차량 외 주차 금지”라는 압박을 주는 표지판이 있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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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은 이렇게 생겼다.
철덕들 중에는 아예 승강장 내부로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한 사람도 있는 듯하던데 난 차마 그렇게는 안 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나갔다. 그 대신 이런 근처의 선로 사진을 좀 남겼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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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부산 일대도 면적이 무척 넓고 철도 배선이 의외로 복잡하며, 항구나 공업 단지로 빠지는 지선 철도가 많기 때문에 승용차를 끌고 답사할 만한 곳이 무척 많을 것이다.

4. 김포 공항 근처

수도권 남부의 “반월 저수지-철도 박물관-오봉 역” 3대 명소를 아우르는 테마 여행을 이렇게 잘 마쳤다.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이제 집에 갈까 생각했는데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고, 철도를 출사한 날 비행기도 같이 출사하여 둘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을 생각도 포기하고, 국도 1호선을 타고 서울 서부로 간 뒤 곧장 다시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말이다.

반월 저수지가 KTX 촬영의 명당이라면, 오쇠 삼거리는 비행기 출사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 공교롭게도 여기도 전철 김포공항 역으로부터는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다만, 여기는 버스가 수시로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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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주변의 흔한 보안 경고문.
여기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이지만, 엄연히 국유지이기 때문에 민간인이 무단으로 이곳 땅을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처음 와 봤을 때에 비해서는 주변에 이것저것 공사도 많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덕분에 주차는 샛길 인근에 아무데나 얼마든지 해도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여담이지만 이 공항 주변의 황무지 일대에는 군부대인지 예비군 훈련장인지 어쨌든 군사 시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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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지금 비행기가 놓인 저 활주로 말고, 왼쪽에도 활주로가 하나 더 있었으며 공항 내부의 비행기는 그 왼쪽 활주로에서 이륙을 하는 편이었다.
김포 공항에서는 아까 KTX보다도 더욱 자주, 수 분 간격으로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가 이착륙했다.

이륙은 본인이 서 있는 공항 남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 한 관계로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착륙은 다행히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UFO처럼 아주 멀리서 불빛만 어렴풋이 보이던 비행기들이, 형체와 비행 소음이 갈수록 커지더니 공항 담장 너머로 사뿐이 착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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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덕들은 비행기 한 대만 보면 보잉 7xx 같은 기종은 물론이고 소속 항공사 같은 것도 곧바로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의외로 여객기 말고도 소속이 어딘지 모를 터보프롭 경비행기 같은 것도 착륙하는 게 종종 목격되곤 했다.
그런 작은 비행기라면 모를까 중형 여객기 이상 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마찰로 인한 연기가 튀는 게 이 멀리서까지 보였다.

이곳에 공개하지 않은 다른 사진과 동영상도 많이 찍었다. 소기의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선 지점은 여전히 공항 담장으로부터 500m에 가깝게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비행기의 착륙 경로와 일직선상에 있고, 지대가 살짝 높은 덕분에 보다시피 공항 활주로까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다음에 또 촬영할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장소도 탐색해 봐야겠다.

동영상들을 보니, 보잉 737급의 여객기가 내 머리를 지난 뒤, 활주로에 착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3~25초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활주로의 착륙 지점까지의 거리는 정황상 거의 1km는 된다. 담장에서 활주로 사이에도 수백 m에 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착륙 직전 상태인 비행기의 주행 속도는 대략 시속 140~150km대는 된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퇴근 시간대가 되어 귀가하는 길이 도로 정체로 애로사항이 꽃폈을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난 정체 시간대를 피해서 그냥 밖에서 저녁을 먹고, 차에서 한두 시간 좀 자면서 아예 밤 9시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귀가하려 했다. 난 어차피 차에서 야영을 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서울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만 좀 막혔을 뿐, 서울 시내에서의 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은 그다지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사히 잘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07 08:31 2013/05/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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