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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외가가 의성군 춘산면에 있다. 지금은 외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본인에게 그렇게 큰 의미는 없지만, 어머니는 고향인 거기를 굉장히 그리워하시며, 본인 역시 최근까지도 어머니와 함께 이제 외갓집은 아니지만 외조부모님의 산소를 찾아 그쪽 근방으로 드라이브를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요 몇 년 전부터는 외가로 가는 길목에 무슨 추모비 같은 게 새로 생겨 있었다. 국도 35호선을 타고 청송까지 가다가 의성 춘산면 방면으로 서쪽으로 꺾은, 청송과 의성의 경계 지점이다. 외가에서 걸어서 찾아가기에는 좀 멀지만 자전거 정도만 있어도 갈 만한 곳인지라, 본인에게 그렇게 생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건 다름아닌 지난 2003년의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때 희생된 어느 학생을 기려서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추모비는 꽤 오래 전인 2004년에 세워졌고 본인 역시 그 사실을 몇 년 전부터 어머니에게서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그걸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겨 왔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우연히 호기심이 생겨 인터넷 검색을 해 봤다. 고인의 동상도 세워졌다고 하는데, 위치가 너무 외진 곳이고 고인이 그렇게 유명 인사는 아니어서 그런지 인터넷 상으로 사진 같은 건 찾을 수 없다.

고인이 누구냐 하면 이 현진 양이다(1984-2003). 본인하고 나이 차이도 별로 안 난다. 대구 외고 출신의 서울대 예비 03학번이었다.
고인은 사망도 아니고 실종으로 공식 처리됐다. 시신 수습도 못 할 정도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http://daegusubway.or.kr/lost_detail.html?no=734&page=10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2577&yy=2004

보통 불행은 꼭 가난하고 못 사는 집안에 터지는 경우가 많은데(일단 그런 사람이 숫자도 더 많으므로), 일단 이 양의 가정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버지가 당당한 대구 시청에서 직급도 높은 공무원이고, 고인의 남동생도 나란히 대구 외고에 진학한 상태였다. 그런 데다가 고인이 서울대 입학까지 앞두고 있었으니 이 양만이 비슷한 다른 또래의 희생자보다 언론에 더욱 안타까운 죽음으로 부각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저 가정은 대구 토박이인 것 같은데, 의성 내지 청송 쪽으로는 무슨 연고가 있어서 저기에 추모비가 세워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머니 왈, 고인이 어머니의 대학 동창의 질녀였다고 함.)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덤은 허묘인 건가?
근처엔 고인의 모교인 대구 외고 교장의 추모사, 서울대 정 운찬 전총장의 애도사(우리 서울대는 이 현진 양을 서울대 입학생으로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고인의 생전 일기, 그리고 고인의 친구들이 돈을 모아 만들었다는 동상이 기념물로 놓여 있다.

대구 지하철 화재는 한 정신병자의 미친 짓부터 시작해서 지하철 당국의 병맛 나는 사건 수습 등 여러 악재들이 겹친 덕분에, 단일 화재 한 건 당 사망자(실종 포함) 수로는 전세계의 대형 사고들 중에서도 톱클래스에 드는 끔찍한 참사로 기록되었다. 192명 사망에 148명 부상은 심지어 1971년의 대연각 호텔 화재의 사상자마저도 능가하는 규모이다. 최초로 화재가 발생한 전동차보다도, 아무것도 모르고 반대편에서 진입한 전동차가 불이 옮겨 붙고 기관사가 그 상태로 문을 잠근 채 튀는 바람에 승객들만 몰살을 당했다. 이런... 마른 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다.

내 기억이 맞다면, 사상자 명단 중에 본인의 고등학교 동기하고 성명과 생년이 완전히 일치하는 사람이 있었다! 게다가 걔도 당시 경북 대학교 재학 중이었으니 대구 거주. 그러니 그 친구는 그 날 안부를 묻는 연락 때문에 전화기 트래픽이 폭주크리를 먹었다고 한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전국민에게 휴대전화가 보급된 21세기에 터졌다. 그래서 불타는 전동차 안에 갇힌 채 연기에 질식해 죽어가면서 희생자가 남긴 애절한 통화와 문자 기록들이 네티즌들의 심금을 더욱 울렸다. 비행기나 선박에서 난 사고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게 가능했다. 이것도 의미심장하지 않은지? 사실, 일본에서조차도 지하철 내부에서는 휴대전화가 안 터진다.

(과거 1985년 8월에 일본의 JAL123기 추락 사고 때는 승객이 흔들리는 기내에서 여권 여백에다가 유서를 간신히 쓴 게 남아 있음을 기억하라. 그때는 대구 지하철 참사와는 대조적으로, 비행기가 추락만 하고 다행히 화재는 발생하지 않아서 그런 유서가 전해질 수 있었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의 여파는 오늘날의 서울 지하철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바로, 딱딱한 불연재로 완전히 개조된 좌석이다. 당시 노 무현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거의 2~3년만에 인테리어가 싹 물갈이가 되었다. 그리고 2007년 즈음부터는 스크린도어까지 급속도로 보급됨으로써 서울 지하철의 외관은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딱히 부실 공사 같은 부류는 아니다. 단지 직원들이 군기가 빠질 대로 빠져서 비상사태에 대처를 못 하고 병크를 잔뜩 터뜨려서 긁어 부스럼을 낸 것이다. 지하철 탑승객에게 비행기 수준의 보안 검색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휘발유를 소지하고 타는지-_-), 앞으로 사회에 불만이 있는 저런 싸이코가 또 나오지 않으라는 법은 없다. 그러더라도 저 때보다야 시민들이나 승무원이 대처를 잘 해서 다시는 이 정도의 참사가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다음에 외조부모 산소를 찾을 일이 있으면 이 현진 양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곳에 예전보다 더 세심하게 눈길이 갈 것 같다.

끝으로 비슷한 사건이 또 떠올라서 사족 하나.
2003년 그 무렵이면 이 지선 씨가 인터넷 상의 유명인사로 한창 등극하던 시절이었다. 2000년경에 음주 운전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여자의 생명인 얼굴에 중화상을 입고 안면 장애 인증을 받은 그분 말이다. 그런 와중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더구나 컨택트 렌즈가 녹아내리지 않은 건 천만 다행이었다고 함. <지선아 사랑해>라는 신앙 간증 도서는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본문의 일부는 본인이 개발한 타자연습 프로그램에도 실려 있다. 지금도 이분의 개인 홈페이지는 잘 운영되고 있는 모양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1 09:29 2010/07/01 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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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흑역사 -- 무장 탈영

1993년 4월 19일. 구포 역 무궁화호 전복 사고가 터진 지 한 달이 채 안 되어 서울 한복판에서는 한 무장 탈영병 때문에 무려 총격전이 벌어지고 시민들은 잠시나마 극도의 공포에 떨어야 한 일이 있었다. 그 탈영병의 똘끼는 그야말로 북한 무장 공비를 능가하는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탈영 역사에 관한 한, 아마 창군 이래로 전무후무한 흑역사로 남지 않을까 싶다.

사건의 주인공은 철원의 전방 부대에서 근무하던 임 채성 일병. 그는 이 대형 사고를 치기 전에도 이미 탈영으로 구속된 적이 있는 군 생활 부적격자 관심 사병 단계였다고 한다.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기라도 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그냥 괜히 부적격자였던 것 같다. 불만이 쌓인 끝에 그는 결국 K1 기관단총에다가 무려 130여 발에 달하는 실탄과 수류탄 22발을 갖고 탈영했는데... 이 정도면 가히 터미네이터 내지 듀크 뉴켐 수준이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4426_6127.html

탈영은 굉장한 중범죄이다. 특히 무장 탈영병은 현장에서 사살 당하는 수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 헌병대는 탈영병 잡는 건 전문가이며, 탈영병의 인맥과 연줄까지 다 동원해서 정말 잘 잡는다. 군인은 아무리 옷 갈아입고 가발까지 써도 딱 보면 군인이라나? 얼마 전에 이 재진이 잡힌 걸 생각해 보라. 거기에다 탈영은 매해 내려지고 ‘갱신’되는 3군 참모 총장들의 “탈영병 복귀 명령” 덕분에, 사실상 공소 시효가 없다는 것도 상식에 속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만화나 게임 같은 매체에서는 탈영을 무슨 철없고 혈기 만연한 20대 청년이 한 번쯤 해볼 만한 탈선 정도로 아주 가볍게 다루는 듯. 군대가 없어서 총 쏴 보려고 우리나라 부산까지 원정 오는 애들이, 병역 의무 여부가 대통령까지 바꿔 놓은 이웃 나라의 정서를 이해할 리가 없다. (이상, 탈영에 대한 엔젤하이로 위키 설명을 재구성)

군부대를 빠져나간 임 일병은 민폐를 정말 많이 끼쳤다. 근처의 민간인을 위협하여 옷을 뺏고 차를 얻어 탔으며, 덕분에... 무려 7군데에 달하는 검문소를 유유히 통과하여 서울로 진입했다!

탈영 후, 밀항해서 곧장 해외로 뜨거나 첩첩산중에서 은둔해도 시원찮을 판에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었으니, 그의 행적은 곧 헌병대에 발각됐다. 그런데 그를 처음으로 발견한 헌병이 상부에다 보고를 하면서 개삽질을 하는 바람에 그를 놓치고 만다. 그때 임 일병을 신속하게 체포 내지 사살하는 데 성공했으면 차후의 유혈 사태를 예방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여기 헌병들은 나중에 가루가 되도록 깨지고 까였다고 한다. “선조치 후보고라는 게 바로 이런 상황을 위해 존재하지 않느냐 이 ㅂㅅ아!” 같은 식이었을 것이다. -_-;;

왜 그거 있지 않은가? “시꺼 임마, 난 간부다” 한 마디에 기가 눌려서, 나중엔 그거 훼이크를 구사하는 북한군까지 밤에 통과시켜 줘 버린 초병처럼 말이다.

본격적으로 뮌헨 올림픽 참극이 벌어진 건, 임 일병이 자기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됐음을 스스로 직감하고부터였다. 어느 30대 여성을 포함해 주위 사람을 닥치는 대로 인질로 잡고, 주변에 움직이는 차나 사람을 향해 총질을 했다. 소이탄과 살상용 수류탄까지 막 던졌다. 겨우 리볼버 권총으로나 무장한 경찰은 무려 기관총을 소지한 임 일병의 전투력을 제압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 1명이 총상을 당해 숨지고, 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결국 임 일병은 화이바가 아니라 베레모를 쓴 저격수의 총을 복부에 두 방이나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졌다. 외국에서는 총기 난사 사고를 내는 또라이들은 보통 자기도 자살하는 걸로 끝을 내는데 그는 그러지는 않았던 듯. 이로써 희대의 무장 탈영병 총격전은 끝이 났다. 그는 중상을 입었지만 즉사하지는 않았으며, 아직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송된 병원에서는 가히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으로 통했다고 한다. 뭐, 치료가 끝나 봤자 남은 건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사형 선고 인증 받고 다시 총살형-_-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일개 병사가 무장 탈영하여 서울 한복판에서 멀쩡한 시민들을 인질로 붙잡거나 살상하고, 총과 수류탄까지 난사했으니... 이 친구가 군대에 끼친 후폭풍은 가히 엄청났다. 소속 군부대에서는 줄초상이 났다. 사단장이 경질되었고, 대대장부터 일직하사까지 간부들은 죄다 군복 벗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구속크리를 먹었다고 한다. 그가 통과한 검문소를 관할하던 헌병대장도 응당 짤렸다.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민간인의 사형 집행은 교수형--뭐, 이제 집행 안 한 지 10년도 더 됐으나--이지만, 군인의 사형 집행은 여전히 총살형을 쓰고 있다. 군인이 총으로 적군을 안 죽이고 도리어 아군을 죽이거나 심지어 이적 행위를 한다면, 그 총으로 자기가 죽는다는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런데 그 총살형 집행도 헌병이 한다고 하니 흠좀무스럽다.

지난 2005년 6월엔 역시 전방에서 군 복무 부적격 티가 농후하던 김 모 일병이, 자살이나 탈영은 아니고 고참들에게 앙갚음을 하려고 총기 난사+수류탄으로 대량 팀킬을 저질렀었다. 이 참극으로 무려 8명이나 목숨을 잃고 김 일병 역시 응당 군사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그건 집행이 됐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당시 피해자 유족들은 그저 “저 나쁜 쌍노무 새키 어서 사형에 처해라”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군이 온갖 의혹들을 해소해 주지는 않고 김 일병만 희생양으로 뒤집어씌워 자기네 실수와 비리를 슬쩍 덮으려 한다면서 관계자들을 강하게 비난했다.

물론 군대에서 이따금씩 일어나는 이런 불상사들은 아주 예외적이고 극단적인 경우일 뿐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유능하던 인재가 군대에서 그 능력을 썩히고 도리어 캐 고문관 취급이나 당한다면... 그리고 실제로 북한과 싸우지도 않고서 앞날이 창창한 청년들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어 나가고 군대에서 그 원인에 대한 해명과 재발 방지조차 약속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안보와 기강은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대에서 병사가 저렇게 나쁜 사고를 큼직하게 치면 위의 간부들은 이제 진급에 애로사항이 꽃피게 되며, 심하면 줄줄이 짤린다. 하지만 병사가 전투 중에 북한군(무장 공비)을 사살한다면? 상황은 완전 그 반대가 된다. 1 kill만 달성해도 당사자는 최소한 천만원 대 단위의 포상금부터 시작해서 훈장에, 계급 특진에, 정말 헬기 타고 금의환향 포상 휴가까지 주어진다. kills수가 많으면 바로 전역도 가능할 것이다. 그 병사의 관할 간부들은 승진길이 확 트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있는 줄도 몰랐던 그 병사한테 엄청 잘 해 주게 된다.

아무리 남북 화해 분위기가 만연하다 해도, 또 국방백서에 주적 표기가 있든 없든, 우리나라는 현실적으로 휴전선에서 북한군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고 있으며, 우리나라 국군은 북한군의 목숨을 노리고 거기에 목말라하는 집단임을 부정할 수가 없는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26 08:39 2010/06/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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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과 커피

우리나라가 삼겹살과 커피 소비가 과거에 비해 급격히 늘었으며, 세계적으로 비교해도 인구에 비해 소비량이 많다고 들었다. 마치 일본이 유별나게 참치와 고래고기 소비가 많은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과거'란 불과 2, 30년 전이며 그렇게 먼 과거도 아니다.

커피를 예로 들어 보자. 사람 만나서 부담 없이 마시는 기호품 내지 음료수로 거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본좌급으로 등극해 있으며, 청량음료와 더불어 양대 산맥이다. 재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주제에 말이다. 스타벅스 정도밖에 모르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있는 커피집들을 보라. 원래 우리 민족은 이 정도로 커피 즐겨 마시지는 않았다.

삼겹살도 마찬가지. 서양에서는 베이컨을 만들어 약간씩 먹는 부위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게 푸짐한 서민 요리이고 회식 술안줏감이다. 우리나라는 돼지의 다른 부위는 별로 안 먹는데 그 부위만 기형적으로 수요가 많아서 수입에 의존한다고 한다. 전국 방방곡곡에 널려 있는 삼겹살 식당들.. 오죽하면 축산업계에서 다른 부위도 좀 먹어 달라고 캠페인을 벌일 정도이다.

원래 삼겹살은 중금속/먼지 제거 효과 때문에 광부들이 작업 마친 후에 먹었고 황사 때나 생각나는 그런 고기였다고 한다. 저런 삼겹살 문화가 생긴 건 상당히 최근이라 함.
자기 소득이 없는 가난한-_- 학생이 구내 식당에서 비싼 커피를 마시거나, 저녁 식사로 삼겹살을 사먹을 일은 흔치 않다. 본인 역시 학생 딱지를 떼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커피와 삼겹살을 자주 접하게 됐기 때문에, 우리나라 사회 풍토가 원래부터 이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라는 게 충격적이다. 마치 서울 지하철 1호선이 옛날에 빨간색 인테리어였다는 사실만큼이나 적응이 안 된다. 본인은 빨간색 인테리어를 본 기억이 전혀 없으며, 처음부터 1호선이 군청색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므로.

본인은 커피는 오로지 맛으로만 마신다. 마셔도 졸음 방지 효과가 전혀 나타나지 않으며, '카페인? 그거 조미료임?' 그냥 그러는 수준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카페인 중독 증세가 나타날 때까지 퍼 마시고 싶지는 않다. ^^;;
또한 삼겹살도, 참치 요리도 아주 좋아한다. "이모코와 참치는 사이가 좋아요 투나잇 / 베개의 속에는 참치가 한가득" -_- 참치는 그렇다 쳐도, 이렇게 맛있는 돼지고기를 못 먹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사람들은 무척 딱하다. -_-;;

끝으로,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신분이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바뀌면서 학생 시절에는 전혀 존재감 없던 날이 공휴일로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한 게 생각난다. 바로 성탄절과, 근로자의 날이다.
전자는 어차피 방학 기간에 포함되다 보니 별도의 휴일로서의 의미가 전혀 없었으며, 후자는 취지부터가 학생과는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도 학생과 직장인의 차이라 볼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24 09:52 2010/06/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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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 말, 석가탄신일 연휴 때 고향에 가서 부모님께서 쓰시는 컴퓨터를 여러 군데 손 봤다. XP 정도나 돌릴 수 있는 구형 컴퓨터이다. 내가 없는 사이에 컴퓨터 A/S를 받아서 하드를 포맷하고 운영체제를 새로 설치했다고 하던데, 파일 시스템이 웬 생뚱맞게 FAT32로 되어 있어서 당장 NTFS로 바꿨다.

그리고 드디어 IE7을 설치했다. 부모님의 반응은 “서울 컴퓨터와 같은 인터페이스이구나”였다. 내가 있는 곳에서는 XP가 없고 비스타만 있기 때문이다. 탭을 지원하고 메뉴가 기본적으로 숨어 있는 IE7의 외형과, 그렇지 않은 IE6의 외형은 부모님이 보시기에도 차이가 명백했던 것이다.

때가 2010년인데 IE8이 아닌 IE7을 선택한 이유는 짐작하다시피 병맛 같은 국내 사이트 때문이다. 교사가 쓰는 컴퓨터에다 NEIS가 안 돌아가는 브라우저를 설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본인 역시 IE8을 비스타 64비트에서 한번 설치해 봤다가 국민 은행 뱅킹이 에러 메시지도 없이 그냥 전혀 동작하지 않는 걸 보고, 혼비백산하여 곧바로 IE7로 복귀해야만 했다. 본인의 개인 노트북에만 IE8을 설치해 쓰는 중이다.

IE8이 IE7보다 그렇게도 가벼워지고 성능이 향상되고 ACID 지수도 올라갔다고 하는데 본인은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탭의 윗부분 색깔이 colorful해졌다는 차이밖에 안 보인다. 세월이 흐르면서 본인은 얼리 어답터 기질은 다 죽어서 업데이트 같은 걸 귀찮아하는 타입. O<-<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지금까지 서울 각지에서 이용해 본 PC방들은 어쩜 이리도 한결같이 IE6을 쓰고 있으니 과연 충격과 공포이다. 각종 통계에 잡히는 IE6 사용자들의 상당수가 PC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윈도우 XP sp3이면 어차피 IE8까지 돈도 안 들이고 업그레이드 가능한데 왜 이런 투자에 인색한 걸까?

여기서 IE의 역사를 좀 살펴보자. 1은 가히 듣보잡이고, 2는 윈도우 95 번들로 제공된 최초의, 그러나 정말 빈약한 버전이었다.
3은 드디어 넷스케이프 3과 맞장뜨기 시작한 버전인데, 넷스케이프의 플러그 인에 대응하여 ActiveX를 최초로 내장했다. IE3은 MS가 개발한 프로그램 중 전무후무하게 toolbar에 텍스처가 존재했으며, 마우스가 가리키고 있는 버튼에만 윤곽이 나타나는 소위 flat 스타일 toolbar를 최초로 도입한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나름 산뜻한 외형을 지향했다는 뜻.

오늘날의 IE의 근간이 잡힌 건 4부터이다. HTML 도움말, 액티브 데스크톱 같은 갖가지 기술이 이때 첫 도입됐다. 5에서는 complex script, global IME 등 다국어 처리 능력이 크게 강화된 걸로 기억하며, 무려 윈도우 3.x를 지원한 마지막 버전이다. 그 이후의 버전에 대해서는 설명을 생략하겠다.

윈도우 XP와 같은 시기에 출시된 IE6이 수 년간 엄청 장수하고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면서, MS에서는 이제 IE 팀을 해체할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하는데 흠좀무. 그러던 차에 2004년 가을을 생생히 기억한다. 모질라 재단에서 파이어폭스라는 획기적인 브라우저를 내놓으면서 현재까지 IE의 독점 구도를 크게 무마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은 잘 알다시피 구글 크롬까지 빠른 속도를 강점으로 승부 중이다.

2.
오늘날처럼 블로그나 트위터 같은 게 생기기 전, 너도 나도 나모 웹에디터 같은 프로그램으로 아기자기한 홈페이지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딱 그런 옛날 스타일 홈페이지를 보면 감회가 새롭다. 애니메이션 gif, 아주 초보적인 수준의 플래시, 그리고 테크노트나 제로보드 기반 게시판들. 본인이 학창 시절 때 몇몇 선생님들이 만든 홈페이지가 아직도 그런 스타일이다. 옛날 생각이 난다.

본인이 인터넷이란 걸 처음 접한 게 1997년 말이다. 내가 저장해 놓은 적이 없는 새로운 글과 그림이 화면으로 쏟아져 나오는 게 이리도 신기할 수 없었다. 그때 조선일보던가 MBC던가.. 국내 언론사들은 웬 VivoActive player라는 듣보잡 ActiveX로 동영상도 보여주곤 했다. 물론 지금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열악한 화질이었지만 말이다. 그때는 RealAudio/Video도 있었으나, 컴퓨터와 네트워크 속도의 향상 덕분에 이내 mp3 등에 캐발리고 말았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넷스케이프도 IE에 완전히 발린다.

3.
맥 OS에는 애플에서 자체 개발한 사파리라는 브라우저가 기본 내장되어 있다. 비록 사파리는 크로스 플랫폼 프로그램이기는 하지만, 윈도우에서는 별 재미를 못 보고 있는 모양이다.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그렇게 윈도우, 맥, 리눅스를 다 날아다니는 프로그램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나저나 맥 OS 클래식은 9까지만 해도 메모리 보호와 선점형 멀티태스킹조차 지원되지 않았다니 대체 뭐야... 90년대 말까지 쓰이던 운영체제가 기술적으로는 그 허접한 윈도우 3.1과 다를 바가 없었다는 말인지? CPU가 16비트였는지 32비트였는지? PC 쪽과는 역사가 너무 다르니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어렸을 때부터 본인에게 매킨토시에 대한 이미지는, 전자 출판과 복잡한 그래픽 작업처럼 PC하고는 가히 넘사벽인 최고급, 최고가 컴퓨터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맥 OS X에는 그림판뻘 되는 간단한 그래픽 편집기를 내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도 깜짝 놀랐다. 워드패드와 메모장 둘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는 TextEdit는 있지만 그림판에 대응하는 프로그램은 없다니... =_=

Posted by 사무엘

2010/06/18 08:55 2010/06/18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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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 소개하는 두 게임은, 본인이 좋아한 장르가 아니고 즐겨 하지는 않았지만, 본인의 기억에 비교적 좋게 남아 있는 고전 게임이다.

1. LHX

헬리콥터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1992년 5월, 초등학교 4학년의 나이로 본인이 최초로 접한 개인용 컴퓨터가 286 AT급 기종이었다. 40MB짜리 하드디스크의 GAME 디렉터리 아래에 기본으로 깔려 있던 게임이 페르시아 왕자 1과 바둑(the many faces of go던가? 그 유명한 프로그램), 그리고 이놈이었다. 그러니 이 게임을 어찌 잊을 수 있으리요?

그 시절엔 단순한 화면 스크롤이나 스프라이트의 2차원적인 이동 말고 전체 화면급으로 프레임이 완전히 새로 바뀌는 애니메이션 자체를 보기가 쉽지 않던 시절이었다. 컴퓨터 성능이 뒷받침을 못 해 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동소수점 전용 프로세서조차 없던 그 열악한 기계에서 비록 허접하게나마(텍스처 같은 것도 없고 그저 solid color ^^) 3차원 공간이 구현되고 헬리콥터 조종석이 1인칭 시점으로 보이니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인트로 화면에서 LHX 글자와 ■●▲ 도형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애니메이션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캐드 프로그램 같다. 본인이 먼 훗날에 3차원 그래픽 시연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 수 있게 됐을 때도 둠, 퀘이크와 더불어 이 장면이 떠오를 정도였다. 아 이제야 나도 저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론적인 배경을 터득했구나!

꽤 현실감을 추구했던 만큼, 헬리콥터의 체력은 단순히 hit point 하나로만 표현되는 게 아니라, 속도계의 일부가 깨지거나 어느 부품이 날아가거나 무슨 기능이 박살나는 것처럼 무척 세세한 묘사가 지원되었다. PC 스피커로 나오는 소리 역시 백미. 본인은 도스 시절에 하드웨어 제어 프로그래밍 경험이 전혀 없이 32비트 윈도우 운영체제로 바로 넘어간 세대이기 때문에, 옛날에 그런 걸 갖고 놀았던 시절이 무척 신기하게 느껴진다.

LHX의 개발자는 Brent Iverson이다. 프로필을 보니 예술 쪽과 전산학 내공을 두루 갖춘 굉장히 탁월한 프로그래머인 것 같다. 과거에 유명한 2D 그래픽 프로그램이던 딜럭스 페인트의 도스용 포팅을 한 사람이기도 하다.
(상업용 게임들이 320*200 256컬러 VGA에서 돌아가던 시절에는 딜럭스 페인트가 오늘날의 포토샵 정도로 스프라이트 만들 때 필수 툴이었다. ^^;;)
듣기로는 군 복무 경력도 있는 듯? 그러니 저런 사실적인 군사 미션 게임도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다음은 LHX 화면 녹화 동영상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rbgJGg5yd1A (인트로 화면)
http://www.youtube.com/watch?v=VC3OUrgf1Lg (게임 플레이)

2. 대항해시대 2

대항해시대 시리즈 중에서 가장 명작이었다고 평가 받는 작품. 본인에게는 국산 게임인 <그 날이 오면 3>만큼이나, 음악이 아름다워서 기억에 남는 게임이다.
오프닝부터... 툭툭툭툭 툭툭툭툭.. 빠암 빠암.. 빠암 빠암.. 빠 밤 빰... ^^;;
그리고 비록 3D와는 관계가 없고 16컬러이기까지 하지만, 그래픽 역시 16컬러치고는 색상이 미려하고 고해상도의 장점을 살려 깔끔한 편이다.

다음은 이 게임의 오프닝 동영상이다.
http://www.youtube.com/watch?v=EM143YYEdEg

일본물에 조예가 깊은 분이라면 이미 알겠지만, 이 게임의 음악들을 작곡한 사람은 칸노 요코라는 40대 중반의 여성 음악가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작곡을 했다는 음악 신동이라 한다. 캐릭터 선택 음악, 항해 중 음악 등등... 아주 낭만적이다.
이 사람은 유수의 게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몇몇 드라마 주제곡도 작곡했으며, 한국에도 팬이 많다.

이 게임은 한글화도 되어 나왔다. 요즘처럼 유니코드도 없고 문자 처리의 국제화와 관련된 그 어떤 표준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에 localizing은 상당한 고역이었을 것이다.
특히 이름을 입력할 때 쓰이는 한글 입력 루틴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키보드를 이용한 두벌식 한글 입력 같은 건 당연히 존재하지 않았으며, 한글 자모를 화살표로 일일이 선택한 후 조합해야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날처럼 터치 스크린이나 포인팅 장비가 대중화하기 전부터도, 아주 제한된 key만으로 한글이든 로마자든 글자를 입력해야 하는 환경이 있었다. 게임, 특히 오락실 게임에서 말이다. 알파벳과 숫자 정도야 그냥 A부터 Z까지 위 아래 화살표로 고르고, 대소문자마저 무시하고서 이니셜만 입력하게 해도 되지만 한글은 그보다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한글은 그래도 그런 환경에서 입력을 구현이라도 할 수 있지, 일본어와 한자로 가면 정말 답이 안 나온다. 일본이 다른 소프트웨어 중에서도 오직 게임 산업이 발달한 것은 그나마 가장 locale-neutral한 분야여서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인지?

우리나라가 한글 처리에 특화된 아래아한글이라는 워드 프로세서가 강세이듯,
일본도 외국 기업이 흉내 내기 어려운 수준의 일본어 처리 능력을 자랑하는 이치타로(일태랑)라는 토종 워드 프로세서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래아한글만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지는 못하고 결국 MS 워드에게 발리고 있는 듯? 하긴, 일본은 IME마저 패키지 소프트웨어로 팔리는 나라이니, 문자 사정이 한국과는 마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단적으로 다르다. 그래도 한국에도 <날개셋> 같은 3rd-party 입력기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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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얘기가 문자 쪽으로 새었다. 다시 게임 얘기로 돌아오자면..
풍부한 리소스와 하드웨어 환경만이 명작 게임을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 것 같다.
개나 소나 3D를 써야 하는 오늘과는 달리, 옛날에는 오히려 제한된 자원의 특성을 이용해서 더욱 창의적인 방식의 게임이 많이 시도되었다. 레밍즈나 테트리스 같은 게임이 3D로 컨버전된 후 완전 ㅈ망이지 않았던가.
또한, 그야말로 불멸의 명작으로 평가 받는 스타크래프트도 3D가 전혀 아니며, 무려 윈도우 95에서 실행 가능하고 640*480 256컬러로 돌아가는.. 초 구닥다리이다.

본인은 온라인 게임류를 별로 안 좋아해서 품질 좋은 패키지 게임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게임 업계의 현실은 불법 복제 걱정이 없는 온라인밖에 답이 없는 모양이다.
마치 노트북도 4:3 화면을 선호하는데 온통 와이드 화면밖에 안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7 09:04 2010/06/17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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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공익 광고들

1. 주제: 공중도덕
파란 정장 차림의 한 남성이 갑자기 털이 북실북실 나면서 원숭이로 변한다. 그리고는 새치기, 운동 경기장에서 난동 등 갖가지 추한 행동을 다 한다.
거의 1990년대 초반에... 엄청 옛날에 본 광고였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옛날엔 그러고 보니 전화기도 다이얼이요, TV도 채널 바꾸는 다이얼이 있었구나.
사람 얼굴이 원숭이 얼굴로 바뀌는 CG가 하도 엽기적이고 흉악했던지라, 초등학교나 그 이전에 봤을 장면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다.

2. 주제: 환경
어느 아날로그시계가 물속에 빠져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다. 그런데 시계 바늘은 째깍거리면서 점차 자정으로 다가가고, 물은 점점 흐려지고 더러워져서 시계를 볼 수가 없게 된다. 아마 시계도 고장 나서 작동을 멈췄지 싶다. 어린 나이에 보기에 은근히 무서운 인상을 받았다.

3. 주제: 환경
남녀 어린이들이 하얀 세트장에서 놀고 있는데, 바닥 곳곳이 시꺼멓게 변하고, 그런 구역이 늘어나면서 아이들이 있을 수 있는 공간도 갈수록 좁아진다. 애들은 겁에 질리고...
이것도 보기 무서웠다.

4. 주제: 과소비
새까만 세트를 배경으로 어느 중년 남성과 여성이 번갈아가면서 풍선을 분다. 부풀어 오르는 그 풍선에는 외제차, 고급 양주, 보석 등의 사진이 번갈아가며 오버랩된다. 그러다 나중에 풍선은 펑! 터지고 “과소비는 나라 경제를 어렵게 만듭니다”라는 무거운 멘트가 나간다.
닥치고 근검 절약 국산품 애용하자고 한창 밀어붙이던 5공스러운 이념이 좀 담긴 공익 광고이긴 하나, 오늘날도 곱씹을 가치는 있는 내용이다.

"국민 소득 4천 $. 소비 수준은 2만 $." 와.. 정말 언제적 멘트냐..;;
옛날 <과학의 노래>에서 수출 100억 $, 국민 소득 1천 $.. 이랬지 싶은데.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국민 소득 2만 $에는 도달 못 해 있다. 흠좀무.

5. 주제: 에너지 절약
다른 건 기억 안 나는데, 나중에 석유 드럼통이 견디질 못하고 옆으로 쿵! 쓰러지는 장면이 나온다.

6. 주제: 음주 운전
사고로 처참하게 부서진 차 옆에 운전자가 바깥까지 튕겨나간 채 죽어 있다. 그런데 카메라의 역방향 재생이 시작된다. 차가 다시 원래 형태로 돌아오고 운전자가 다시 운전석으로 쓰윽 돌아온다. 차는 비틀거리면서 한없이 후진을 반복하는데... 재생이 끝나는 곳은, 바로 운전자가 술잔을 거하게 짠~ 부딪치는 지점.
나름 참신하게 잘 만든 광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은 되돌릴 수 있어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술 마시고 나서 '필름 끓겼다'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니 무척 잘 만든 광고 카피이다. 마치 "5분 먼저 가려다 50년 먼저 갑니다"처럼 말이다.

요즘은 음주 운전뿐만 아니라 '운전 중 전화질'도 안전을 아주 위협하는 요소로 등극한지라, 외국에서는 Don't text and drive라고 교통사고 장면을 꽤 노골적으로 잔인하게 묘사한 공익 광고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나저나 음주 운전 단속은 꽤 엄격하게 하는 걸로 아는데, 우리나라는 성 범죄는 여전히 왜 이리도 술에 관대한 걸까?

7. 주제: 언어 순화
앵무새가 ‘저 녀석! 저 녀석!’ 이라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학습한 말을 흉내 내는 게 나온다.
평소에 앵무새 주인이 말을 험악하게 하다 보니, 말을 조심해야 할 곳에서 앵무새가 자기 주인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나름대로 시간 순으로 배열했다. (1 oldest, 7 latest)
기억에 남는 공익 광고들을 나열해 보니까 은근히 많네... 혹시 이런 것들 기억하는 분은 없으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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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고 난 후...
http://www.kobaco.co.kr/ 에서 위의 공익 광고 방송들을 다 열람해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참 대단하다. -_-;; 그래도 내 기억도 상당히 정확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1990 늑대인간
1989 생활하수
1990 런칭
1989 풍선
1990 스위치
1991 필름역회전
1995 앵무새

한 가지 확실하게 느낀 건,
요즘 광고들은 처참하거나 무서운 장면을 옛날만치 노골적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히 본인이 나이가 들고 감수성이 무뎌져서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니라 생각한다. 노골적인 공포감과 혐오감 조장은 지양하는 한편으로 메시지는 더욱 implicit(간접· 암시적)해졌다.
가령, 옛날 광고에서는 무질서 난동 부리는 나쁜놈을 저렇게 원숭이로 묘사하여 노골적으로 깠다면, 요즘은 마치 서울 메트로 광고처럼 럭비 선수에다 비유해서 "님들은 럭비 선수가 아닙니다. 지하철 탑승을 그렇게 하는 건 반칙입니당^^"이라고... 재치를 동원하는 식.

환경을 소재로 한 광고만 해도, 옛날에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하게 주변 환경이 시꺼매지고 더러워지는 모습, 물고기들이 몰살 당해 물에 떠오른 사실적으로 묘사한 반면, 1996년도 광고를 보면 그냥 민속 그림을 CG로 애니메이션화해서 보여주면서 "그 (물이 깨끗하던) 시절이 정말 그립습니다"라고 표현의 수위가 한결 누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0/06/10 08:57 2010/06/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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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도우 비스타/7에서는 아래아한글의 키매크로가 지원되지 않는다는 걸 며칠 전에야 처음으로 확인했다. 메뉴가 흐려져 있고 아예 선택이 되지 않더라. XP를 졸업한 지 2년이 넘었는데 몇 년째 이 사실을 왜 모른 채 지냈는지 모르겠다. 키매크로는 도스용 1.x 시절 이래로 아래아한글 고급 사용자의 최강의 애용 기능이었는데도 말이다.

아니 그럼 도움말에다가 언급이라도 해 놓지 왜 아무 설명도 없이 메뉴 접근만 막아 놨는지? 그 이유는 인터넷을 검색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말이다.
(아래아한글 2005는 비스타/7에서는 수 차례의 패치를 안 받으면 에러가 나고 아예 동작을 하지 않으며, 2007도 패치를 받아야 Aero가 적용된 운영체제 표준 모양 스킨을 쓸 수 있다. 비스타에서 키매크로 메뉴를 막은 것도 2005의 패치부터 그렇게 된 거라 함.)

비스타 이상부터는, 아래아한글이 키매크로를 구현할 때 쓰이는 기능 내지 테크닉이 운영체제의 보안에 영향을 끼친다고 간주되어 그걸 운영체제 차원에서 막아 버린 모양이다. UAC 끄고 관리자 모드로 실행해도 별 소용 없다.

사실, 도스가 아닌 윈도우 같은 이벤트 위주 환경에서 키매크로 같은 걸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도스처럼 한 프로그램이 모든 하드웨어 자원을 장악하고 독점하고 일괄 처리를 하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래아한글이 윈도우용으로 처음으로 포팅되었던 3.0B 시절에는 기능은 분명 화려해졌다. 드디어 아래아한글에다가 윈도우용 TTF에다가 여타 프로그램의 OLE 개체를 집어넣는 게 가능해졌다니.. 그리고 도스용 아래아한글과 정보 손실 없이 파일 공유까지 가능하다니!

하지만 윈도우용에 매크로 기능은 응당 포팅이 안 돼 있었다.
Win32s에, 95에, NT까지 다 신경써야 하던 시절에 그렇게 하드웨어에 민감한 고급 기능을 넣기는 현실적으로 곤란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96까지도 아직 없었다.
그러다가 97에 와서야 프로그램이 Win32s를 제낀 체제로 개편되고 매크로 기능도 다시 생겼다.

그랬는데 한 가지 굉장히 신기한 것은, 매크로를 기록하는 파일 포맷이 9x 계열과 NT 계열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다. 아래아한글 사용 안내문에서 분명히 본 문장이다. 즉, 똑같은 97을 쓰는데, 윈도우 9x에서 녹화하여 저장한 매크로 파일을 NT4에 설치된 97에다 가져와서 쓸 수는 없으며 동일한 매크로를 해당 플랫폼에서 다시 만들어야 했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슨 데이터를 저장하기에 똑같은 x86 계열 컴퓨터에서 저장한 매크로 파일이 왜 서로 호환이 안 됐을까? 단순한 키 시퀀스를 저장한 게 아니라 아래아한글의 매크로 구현 방식이 아주 특이했을 거라는 짐작만을 해 볼 뿐이다.
본인은 나름 한컴사전의 노클릭 단어 인식 기능도 어떻게 구현했을지 대략 짐작할 정도이지만, 매크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쏭달쏭 갸우뚱이다. 노클릭 단어 인식도 훅 DLL이 9x과 NT 계열이 서로 별도로 존재하며, 심지어 16비트 프로그램용 훅 DLL까지 들어있다.

그렇게 아래아한글은 윈도우에서도 키매크로를 살려 내기는 했지만, 도스 시절 같은 빠른 속도까지 회복하지는 못했다. 전광석화처럼 화면이 깜빡이며 돌아가는 도스 매크로에 비해 윈도우는...;;
그냥 화면에 그림만 그리는 도스 시절의 대화상자와, 수십/수백 개의 개체로 이뤄진 윈도우 대화상자가 뜨는 오버헤드는... 서로 비교가 안 될 것이다.
게다가 Alt+L, K, T, A, D (블록으로 잡은 텍스트의 한글 서체를 궁서로 바꾸기) 같은 궁극의 단축키 신공도 느릿느릿 마우스 위주인 윈도우에서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게 됐다.

도스든 윈도우든 키매크로 자체를 구현할 정도라면, 매크로가 실행되는 중에 화면 업데이트를 안 하게 하는 옵션을 넣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것만 해도 매크로의 실행 속도를 무척 향상시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크로는 일반적인 워드 프로세서 사용자보다 더 전문적인 컴덕후들이 즐겨 사용하는 텍스트 에디터에서는 더욱 필수인 기능이다. 비주얼 스튜디오의 경우 긴 매크로가 실행 중일 때는 트레이에 풍선 도움말도 뜨고, 이걸 건드리면 실행 중인 매크로를 손쉽게 중단도 시킬 수 있다. 아래아한글에도 이런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

윈도우 환경에서는 도스 시절 같은 기계적인 키매크로의 의미가 여러 모로 퇴색한 만큼, 아래아한글도 최신 버전부터는 스크립트 기반 매크로를 지원하고 있다. 과거 PC 통신 에뮬인 이야기에 혼잣말 기능이 있었듯이. 키 조작이 아니라 키 조작이 의미하는 명령을 기록함으로써 좀더 똑똑하고 효율적인 매크로를 구현하고 간단한 프로그래밍 로직과 분기까지 구현한 것이다. 이 정도로 매크로가 능동적인 존재가 되고 나면, 슬슬 매크로의 보안도 따져야 할 필요가 생길 것이다.

스크립트 매크로는 키매크로와는 내부 구현 방식이 다른 듯하며, 아래아한글도 앞으로는 키매크로를 빼고 스크립트 매크로만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스크립트 매크로를 이용하여 키 입력을 녹화해 봤는데 이상한 에러와 함께 실행이 안 돼서리...;;;
급하게 매크로를 수만 번 실행해야 할 일이 있는데 결국은 VMware 아래의 윈도우 XP에다가 아래아한글을 설치해서 키매크로 뺑이를 돌려야 했다. 아놔이런....;;;;;;;;

HWP.EXE의 속성-호환성 탭을 이용해서 운영체제의 버전을 일부러 낮춰 주면 매크로 메뉴를 사용은 할 수 있게 되나, 반복 실행이 되지 않았다. Alt+번호로 개개 실행도 속도가 매우 느렸다. 앞서 말했듯이 아래아한글의 키매크로는 어떻게 구현됐는지 정말 궁금할 따름이다.

제대로 된 매크로를 응용 프로그램이나 운영체제가 지원해 준다면, 매크로를 실행 중인 프로그램은 매크로 실행 결과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 하든 안 하든, 최소한 응답이 없이 죽어서 ghost 윈도우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하며, 언제든지 중단도 시킬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른 프로그램에서 사용자가 키 입력을 하든 말든 자기는 자기 일만 잘 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아래아한글은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매크로를 돌리고 나서 한참 컴퓨터를 가만 놔뒀더니, 화면 보호기가 갑툭튀 실행된 후로 프로그램 창은 거의 ghost 윈도우처럼 아무 응답이 없고, 게다가 그때부터 키보드 입력이 엉뚱한 곳으로 갔는지 매크로가 제대로 실행되어 있지 않았다. 이런 망할 화면 보호기.. -_-

요즘 사람들은 컴퓨터를 안 쓸 때도 그냥 켜 놓는 경우가 워낙 많기 때문에 컴퓨터 설계자들은 idle 상태일 때 전기를 최대한 아끼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가끔씩은 컴퓨터를 서버 용도로 쓸 때도 있고, 프레젠테이션 발표용으로 쓰기도 하고, 윗글처럼 일괄 처리를 시켜 놓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오랫동안 키보드 입력이 없다고 해서 컴퓨터가 함부로 툭 꺼져 버려서는 안 된다. 이 둘이 마치 교통수단의 이동성과 접근성처럼 동전의 양면 같은 면모가 아닐까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20 08:32 2010/05/20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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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근황

본인은 군 장성하고는 아무 인연도 없다. 그냥 생각이 나서 자료를 모아 본 것이다. ^^
각 사람이 아니라 장군이라는 직급이 주제이기 때문에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로 글을 분류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09년 3월, 투스타 신분으로 안양의 모 예비군 훈련장을 발칵 뒤집어 놓으며 매스컴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방 원팔 장군(1956년생. 육사 35기)을 기억하는가?
뉴스 기사를 검색해 보니 작년 말까지도 여전히 사단장 직급이던데 지금은 진급은 했으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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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스타와 포스타의 만남.
정 승조 장군(1953년생. 육사 32기)은 2007년 말에 저 사진에 나온 대로 군단장에 취임하고, 2009년에는 47대 육군 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한 후, 현재는 포스타로 진급하여 제1야전군 사령관을 맡고 있다. 육사 교장 재임 기간이 5개월 남짓밖에 안 되는데, 이는 일찍 진급한 덕분에 보직이 바뀐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등병과 포스타!!!
와.. 옆의 저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덜덜덜덜... 얼어붙어 있는 게 표정만 봐도 느껴진다.
임 충빈 장군(1950년생. 육사 29기)은 45대 육군 사관학교 교장(2006~2008)과 39대 육군 참모 총장(2008~2009)을 연달아 맡은 후, 현재는 더 진급할 곳이 없으니 예편한 상태.
저 사진은 2009년 언젠가 육군 참모 총장의 초소 시찰 중에 촬영된 것이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19 08:19 2010/05/19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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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학력 실업자

- 이 사람들은 나이가 많고 가방끈도 너무 길다 보니 일단, 일반 직장의 고용주의 입장에서는 싸게 이것저것 시키고 갈구면서 굴릴 수가 없으며, 그들 역시 그런 일은 못 한다. 박사까지 마치느라 투자한 돈과 시간이 얼만데..;;
- 그런데 그런 까다로운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전문직은 얼마 많지 않고 수요도 아주 한정돼 있다. 대학 같은 경우,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기존 정교수한테 주는 어마어마한 보수를 빼고 나면 남는 건... ㅎㄷㄷ

결국 도출되는 결론은 무엇인가?
월 100도 못 버는 시간 강사 신세가 되는 것이다. 흠좀무.
외국에서 박사 학위 받은 뒤 한국에서 도저히 취업을 못 하고, 이거 뭐 수 년 뒤에도 도무지 미래가 안 보이니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까지 생긴다.

노는 물만 다를 뿐 88 세대와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진짜 말 그대로 잉여 인간으로 전락.
특히 인문학 같은 쪽은 정말 답이 안 보이는 모양이다.
(하다못해 아무리 IT계가 야근과 박봉에 시달린다고 해도, 어지간한 스킬과 경력만 있으면 월 100도 못 버는 직종은 절대 아니다. 몸 쓰는 힘든 노동에 비하면 정말 편한 환경에서 일하는 좋은 직종이다.)

물론, 극소수 잘 배운 부유층 지식인들만 경쟁 없이 쉽게 교수가 되어 평생 떵떵거리던 옛날에 비해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다 나쁘기만 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이다.
이런 부조리가 해결되려면 교수 내부의 시스템도 바뀌어야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학력 인플레가 좀 진정되어야 할 것이다.

대학 수부터 구조조정 되어야 하고 입학이 아니라 졸업이 어렵게 바뀌어야 할 것이며,
대학 이상은 경제력을 떠나서 정말로 공부에 뜻이 있는 친구들만 가고, 고졸만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직업에는 고졸이(또는 '만') 종사하는 세상이 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이제 와서 그렇게 바뀔 수 있을지는... 글쎄다.

지난 2009년에는 연간 배출된 '국내 대학 출신 박사 학위 소지자'가 1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이제 토익 몇 점, 학부 간판과 평점, 어학 연수 같은 단순 스펙 나부랭이에 연연하는 레벨이 아니다. 자기 논문과 연구 실적으로 승부해야 한다.

워낙 박사가 많아지면, 앞으로는 박사도 그냥 박사가 아니라 그 안에서도 계급이 나뉠 것이다.
박사 세계에서도 요즘 학부가 그렇듯이 학교 간판을 따지게 될 것이고,
또 그냥 교수가 정해 준 주제로 수동적으로 떠먹여 주는 연구만 하다가 박사가 된 사람인지, 아니면 진짜로 창의적이고 실용적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연구를 자기 노력으로 이뤄낸 박사인지 따지게 될 것이다.
마치 IT업계에서 단순 글자판때기 스크립트 코더냐, 아니면 진짜배기 전산학 고수이냐가 갈리듯이.

앞으로는 의사와 변호사 세계도 경쟁이 치열해지고 자본 논리와 시장 경제가 통용될 것이다. 옛날처럼 철밥통이 보장되는 시절은 없을 것이다.
일단 이 좁은 땅덩어리에 수요에 비해 공급이 지나치게 많아지고 있는 게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전문직도 임금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계약직, 비정규직, 프리랜서 형태가 늘어나고 고용과 해고가 무척 유동적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어느 분야를 종사하든 자기가 좋아하고 즐기고 자기 실력이 뛰어나야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요즘 무슨 분야가 뜨든지, 남들이 지금 몰리는 곳에 줏대 없이 따라가지 말고 이 세상에서 나와 내 적성의 객관적인 좌표를 직시하여 내가 일류가 됨으로써 사회에 뭔가 공헌을 할 수 있는 분야에 올인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부와 명예라든가 학위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내가 그런 활동을 하면서 덤으로 따르는 부산물 정도로 봐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사무엘

2010/05/15 15:47 2010/05/15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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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 잡설

스타에서 프로토스 하이템플러는 바이오닉 유닛들을 번갯불(사이오닉 스톰)로 지지는 무서운 공격 유닛으로 보통 쓰이나, 잘 알다시피 할루시네이션이라는 마법도 있다.

내 유닛의 가짜 분신을 만들어서 적에게 나의 병력이 실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처럼 보이게 훼이크를 구사할 수 있으며, 위험한 곳에 공격이나 드랍을 시도할 때 가짜 분신들을 총알받이 역할로 삼을 수도 있어 매우 유용하다.

분신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경로를 막는 것)과 이동과 기본 공격만 가능하다. 그 외에 일꾼이나 마법 유닛, 수송선 등이 하는 동작은 그런 유닛을 복제했다고 하더라도 못 한다.
공격 역시 폼일 뿐 실제로 적에게 데미지를 주지는 않는다. 상대방에게 under attack이라고 빨간 경보음까지 주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부르들링처럼 지정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펑 사라진다. 이렇듯 분신은 실체가 없는 만큼, 상대방을 실제로 해치지는 못하는 일종의 read only 유닛인 셈이다.

이런 점에서는 할루시네이션 분신은 마치 페르시아 왕자 2에서 영혼과 비슷한 면모가 있는 것 같다.
게임을 해 본 분이라면 알겠지만, level 10 이상부터 시작되는 빨간 궁전 안에서는 왕자를 좌우 화살표 키를 번갈아 누르면서 고개를 앞뒤로 뱅글뱅글 돌리기를 반복하면, 자기 분신 내지 영혼을 꺼낼 수 있다. 왕자의 분신은 새까만 그림자 형태이며, 분신이 튀어나오면 왕자의 몸은 죽어서 쓰러진다.

이 분신은 닫힌 문도 통과하고 발판을 부러뜨리지 않으면서 자유롭게 이동 가능하고 심지어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악당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악당에게 실제로 데미지를 주지는 않는다. 이런 특성이 스타의 할루시네이션과 살짝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분신이 나오는 과정에서 왕자는 체력을 무려 8칸이나 영구적으로 잃으니 안습. 분신은 나중에 마지막 레벨에서 Jafar와 싸우기 직전에만 꺼내야 한다.

페르시아 왕자의 분신은 처음에는 시꺼멓기만 하지만, 나중에 Jafar와 싸울 수 있는 능력의 화염을 먹은 뒤에는 시퍼런 불꽃이 이글거리는 색으로 변한다. 그런데 이 파란색도 웬지 하이템플러가 만들어 낸 파란 분신과 좀 비슷한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아래의 그림을 참고할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페르시아 왕자 얘기는 여기까지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겠다.
하이템플러 분신은 외부로부터 공격을 받으면 실제 유닛보다 데미지를 두 배로 받으며, 각종 나쁜 마법을 맞으면 곧바로 정체를 드러내고 펑 사라진다. 분신이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적군의 마법 유닛을 낚시질하여 MP를 허비시키면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괜찮다.

그런데 이런 할루시네이션 분신은, 스타 개발자의 입장에서 생각해 봐도 구현 로직이 굉장히 복잡하고 버그가 틈탈 여지가 많았던 모양이다.
분신은 분명 훼이크만 구사하는 read-only 유닛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마치 진짜 유닛처럼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극소수 존재한 것이다.

가령, 브루드워가 처음으로 출시되었던 1.04에서는 할루시네이션 디바우러가 적 유닛을 공격하면 데미지는 안 주지만, side effect인 acid spore를 마치 진짜 디바우러처럼 남기는 버그가 있었다. 디바우러는 브루드워에서 새로 추가되었으며 유일하게 그런 특이한 방식으로 공격하는 유닛이다 보니, 이는 충분히 수긍이 가는 버그이다. 1.05 패치에서 곧바로 수정되었다.

그리고, 무려 1.16까지 나온 오늘날까지도..
할루시네이션 가짜 퀸은 다른 건 못 해도 테란의 커맨드센터를 감염시킬 수 있다! 이건 가짜 디바우러가 acid spore를 남기는 것보다 더 큰 side effect이지 않은지?
가짜 퀸은 클릭해 봤자 어차피 Move, Patrol 이런 명령밖에 안 뜨는데도 불구하고, HP를 절반 이상 잃은 적군의 커맨드센터를 목적지로 우클릭해 주면 거기 가서 알아서 감염시킨다.

사실 ‘감염’이라는 동작은 딱히 이동도 아니고 kill 수가 느는 공격도 아니고 무슨 마나를 사용하는 마법도 아니고... 참 퀸에게만 존재하는 이상한 개념이긴 하다.
이것도 원칙대로라면 분명 교묘한 버그일 텐데 워낙 인페스티드 커맨드센터 자체가 캐관광 용도가 아니면 볼 일이 없고, 아군이 하이템플러와 퀸을 동시에 보유하는 건 무한 맵 치트가 아니면 거의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니 블리자드도 그냥 묵인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리플레이 기능이 추가된 이후부터는 게임의 동작 알고리즘을 이랬다 저랬다 고치기도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져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프로브는 다른 일꾼들보다 시야가 1 더 넓다는 것,
질럿은 야마토 포를 한 대 맞아도 안 죽는다는 것,
사이언스 베슬은 보통 때는 Detector라는 단어 때문에 다른 테란 유닛들과는 달리 군 계급을 볼 수 없지만, 락다운을 당해서 디텍터 역할을 못 하고 있을 때는 Major(소령)이라는 계급이 뜬다는 것.

등 스타는 나온 지 무려 10년도 더 된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그 깊이와 완성도는 정말 불멸의 명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윈도우 95급 컴의 256색 환경에서 쌩쌩 돌아가고 더구나 그 열악한 환경에서 클록킹 같은 이펙트까지 구현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팔레트 사용을 기가 막힌 방법으로 튜닝했다는 뜻이다.

스타는 최초에는 비주얼 C++ 5.0으로 개발하다가 요즘 최신 패치는 7.1 (2003)로 개발되어 오고 있다. 캠페인 에디터는 MDI 프로그램이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여러 맵을 동시에 열 수 있는 건 아니다. 문서는 여전히 한 번에 하나밖에 못 열고, 단지 한 맵의 서로 다른 제각기 표시하는 창들을 여러 개 만들 수 있다. 좀 특이한 형태의 MDI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14 08:01 2010/05/1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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