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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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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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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하철 1호선의 역사

*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1. 개통식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인 8월 15일에 맞춰서 정부 수립을 했다. 그런데 이 8월 15일은 우리나라의 철도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날이다. 1974년 8월 15일은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광역전철이 같이 개통한 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의 최고급 열차이던 관광호가 새마을호로 이름을 바꿔 첫 운행을 시작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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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진을 보자. 이 둘은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서로 다른 장소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겉으로는 흑백 사진이지만, 철덕이라면 전동차의 색깔이 저절로 컬러로 복원돼서 뇌에 비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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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의 동선과 스케줄을 보면, '서울 지하철 1호선'(종로선)의 개통식이 먼저 청량리 역 승강장에서 열렸다. 마침 친절하게도 당시 시각까지 사진에 담겨 있다. 아침 11시 15분경.
지하철 개통식 때는 서울 지하철 공사(현 서울 메트로) 소속의 흰 배경에 창틀 부분만 빨강 도색인 전동차가 사진에 담겼다.

이 사람들은 저 열차를 마치 자가용처럼 시승하고 다녔다. 그 당시 종합 사령실이 종로5가 역에 있었던 관계로 그 역에서 내려서 사령실도 잠시 들른 뒤, 서울 역도 지나 남쪽으로 쭈욱 내려갔다.

그렇게 지하철 개통식 팀이 도착한 뒤에야 수원, 인천, 성북 방면의 지상 '수도권 전철'의 개통식이 바로 구로 역 승강장에서 아침 11시 50분쯤에 열렸다. 이번에는 철도청 소속의 파란 배경에 창틀 부분만 흰 도색 전동차가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 물론 '초저항'이라고 불리는 저 식빵 모양의 일제 전동차 자체는 철도청 것이든 서지공 것이든 완전히 동일하다.

서울에서 수원이나 인천을 가려면 예전에는 털털거리는 디젤 동차를 타야 했는데 그게 모두 깔끔한 전철로 바뀌었고, 그 전철이 서울 종로에 있는 지하철 구간과 직통 운행까지 한다는 것이 이 지하철· 전철 개통의 의의였다.

가끔 코레일이나 서울 메트로 전동차를 타고서 안에서 철도의 역사 관련 동영상이 나오는 걸 살펴보면.. 당연한 말이지만 자기 회사에 해당하는 얘기만 한다. 서울 메트로에서는 지하철 개통 얘기만 하고, 코레일에서는 수도권 광역전철 개통 얘기만 한다. 우리는 두 사건이 모두 순차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알면 되겠다.

지하철· 전철 직통 시스템의 개통식은 원래는 대통령도 참석하고 아주 웅장· 성대하게 치러졌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알다시피... 아침 10시부터 장충동 국립 극장에서 대통령 내외가 참석한 광복절 기념식이 있었는데 거기서 영부인인 육 영수 여사가 괴한에게 총격을 당했기 때문이다(10시 23분).

지하철 개통식 사진에 찍힌 11시 15분은 그 대형 사고가 터진 지 50분 남짓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러니 저 사진에 나온 사람들은 마냥 기쁜 표정만 지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서울 지하철 1호선은 그 당시 양 택식 서울 시장이 아주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과업이었으며, 원래대로라면 개통식은 그의 인생 최고의 날이 돼야만 했다. 하지만 하필 그 날 대통령의 영부인이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터지는 바람에 그는 사건의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그의 후임인 구 자춘 시장은 양 택식의 지하철 건설 계획을 거의 다 갈아엎었다. 하지만 저 사람도 선임 뺨치는 불도저였으며, 다음 노선인 2호선이 거대한 순환선으로 만들어진 건 그의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2. 발전 내력

서울 지하철 1호선 겸 수도권 전철은 처음에는 한 편성당 6량으로 개통했지만 이미 1980년 12월에 8량으로 증설되었고, 1984년에는 10량으로 증설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그 당시 열차를 타고 있는 동안은 "객실에서는 금연입니다. 출입문은 30초 동안 열려 있습니다(일반열차보다 훨씬 더 빨리 닫히고 금방 출발하므로). 지하철 전동차 안에는 화장실이 없습니다."라고, 난생 처음으로 일반열차가 아닌 지하철을 타는 사람을 대상으로 초보적인 안내 방송도 일일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고 한다. 경부 고속도로가 처음 개통했을 때 "이 도로에는 사람이나 손수레, 자전거 따위는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라고 한참 홍보를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1974년 첫 개통 당시의 운행 계통과 운행 시격은 다음과 같았다.

  • 청량리-성북(지금의 광운대 역): 40분
  • 서울역-청량리: 10분 (R/H 땐 5분)
  • 서울-구로: 10분
  • 구로-인천: 20분
  • 구로-수원: 40분

즉 남쪽으로는 10분 간격으로 구로, 인천, 수원, 인천 행이 번갈아가며 왔다고 생각하면 되고 북쪽으로는 4대 중 1대 꼴로 성북 행이고 나머지는 청량리까지만 간 셈이다.
인천까지 가는 전철이 급행도 없고 배차간격이 지금의 중앙선과 비슷한 수준이요, 수원 가는 전철은 지금의 소요산 행 열차보다 배차간격이 더 길었다는 얘기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는 경부, 경인선 모두 그냥 복선이었고 특히 경부선 전동차는 지금 급행 전동차가 그런 것처럼 일반열차의 틈새를 이용해서 운행되었으니, 열차를 많이 투입할 수 없었음이 자명하다.
1981년 12월 23일에는 경부선 수원-영등포 구간이 2복선으로 확장되면서 경부선 전동차를 더욱 증차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반열차 눈치 볼 필요 없이 전동차만의 선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때 상대식 승강장을 하고 있던 역은 자연스레 쌍섬식 승강장이 됐다.

2복선화 공사는 그때 이미 구로 이남은 방향별 복복선으로, 서울 시내 구간은 공사가 쉽지 않아 선로별 복복선으로 정착한 것 같다. 방향별 복복선은 기존 복선 선로의 양 끝에 선로를 하나씩 추가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예전부터 있던 내선은 일반열차가 계속 쓰고 신설된 외선으로 전동차가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수원 이남으로도 계속 달리는 일반열차와는 달리, 수원에서 북쪽으로 회차해야 하는 전동차는 선로를 바꾸는 회차 과정에서 일반열차 내선을 침범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회차할 때만은 여전히 일반열차 눈치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2복선의 선로 용량에 걸맞게 전동차를 증차하기가 어려웠다.
이 고질적인 문제는 먼 훗날인 2003년, 병점 역이 개통하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차량기지와 함께 회차 전용 입체 교차로가 신설된 것이다. 병점뿐만 아니라 천안에도 전동차 회차 및 장항선 분기가 모두 입체 교차로로 잘 구비돼 있다.

9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인선도 2복선화가 추진됐다. 거기는 일반열차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성, 타당성 조사는 진작에 다 통과했기 때문에 일이 성사됐다. 그리고 경부선과 경인선이 합류하는 구로-영등포 간은 아예 3복선화도 진행되었다. 1991년 11월 23일은 경인선 2복선화 기공식과 경부선 해당 구간 3복선화의 개통식이 거행된 역사적인 날이었다. 경인선 2복선화는 부평-주안-동인천의 순으로 진행되었으며, 구일 같은 역은 이를 계기로 형태가 크게 바뀌기도 했다.

사실 그 해 5월 25일에는 공사 때문에 1박 2일 남짓한 시간 동안 전동차가 잠시 단축 운행을 하기도 했었다. 지금 경부 고속철 2차 공사 구간에서 경부 고속도로 위를 타넘는 언양 고가 공사와 비슷한 맥락이라 보면 되겠다. 첨단 공법을 동원한 덕분에 공사의 대부분은 차량 통행을 막지 않고 그대로 진행할 수 있지만 아치의 기초를 놓는 한나절 남짓한 시간은 고속도로를 잠시 막아야 했다고 한다.

경인선과 더불어 경부선 수도권 전철도 수원이 아닌 무려 천안까지 남하하는 공사가 1996년부터 추진되었다. 그 시절에 경부선 일반열차를 타면서 아직 완공되지 않은 전철역 승강장이 휙휙 지나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경부선은 이제 천안 이북은 2복선 전철이 되었지만 일반열차 때문에 경인선처럼 충분하게 급행 전동차를 운행하지는 못한다.

서울 서남쪽이 그렇게 변화를 겪고 있는 동안, 북쪽 종점인 성북 일대에서는 1호선 전동차의 병목을 야기하고 선로 용량을 깎아먹던 '평면교차' 문제를 해소하려는 노력이 진행됐다.
1978년 12월에는 경원선 용산-성북 구간에도 전동차가 투입되어 종전의 디젤 동차를 대체하고 1호선의 지선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이놈은 선로 합류와 회차 과정에서 유감스럽게도 1호선 전동차와의 평면교차를 야기하고 있었다.

얘는 2005년에 광역전철 중앙선으로 분리해 나감으로써 문제가 해결됐다. 용산-성북이 아니라 용산-덕소가 됐다. 마치 안산선 열차가 처음엔 1호선 경부선의 지선으로 운행되다가 훗날 4호선으로 완전히 독립해 나간 것과 같은 방식이다.
또한 경춘선 무궁화호가 야기하던 평면교차도 경춘선 복선 전철이 다른 선로로 이설되면서 사라졌다. 다만 이런 조치로 인해 반대로 말하면 성북(지금의 광운대) 역이 그 덩치에 비해서 경춘선도 못 타고 중앙선도 못 타고 오로지 1호선 전동차밖에 못 타는 역으로 역할이 줄기도 했다.

다만, 처음에는 이 수도권 전철의 북쪽 종점은 계속해서 올라가서 한동안 의정부북부에 머물러 있다가 이제는 동두천과 양주를 거쳐 소요산까지 올라갔고, 장기적으로는 무려 연천까지 갈 거라고 한다. 경원선 자체는 아예 민통선 안의 월정리와 철원까지 복원할 계획이 잡혀 있고.. 정말 40년 동안 어마어마한 발전을 이룬 셈이다.

그나저나 먼 옛날에는 서울 지하철 1호선의 내부 인테리어가 온통 빨강이었다는 것이 본인은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로마자 표기법이 바뀐 게 반영되고 국철과 지하철 구분 없이 색깔을 남색으로 획일화한 모습만 직접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옛날 사진을 보면.. 오히려 "내가 착각을 하고 있나, 색맹이 됐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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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0 08:31 2016/03/20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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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에서 나오는 철도의 정체는?

<용감한 탈출> 책을 다시 보니, 스토리와 관련하여 내가 기억하지 못하던 추가 정보들을 다시 보충할 수 있었다. 그 정보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교통· 지리 분야의 설정이다. 철덕으로서 이런 쪽에 관심이 안 갈 수가 없다.

책에서 주인공인 두일이네 가족은 황해도 '사리원' 시에서 살고 있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지리적 배경은 한반도의 동부가 아니라 서부 되겠다.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도시에서 살고 있었지만, 삼촌이 탈출하는 바람에 가족이 반동으로 몰리면서 더 서쪽 구월산 기슭의 산골 벽지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고 한다.
이 설정대로라면 두일이가 탈출하기 위해 집에서부터 이동한 거리는 서부의 고양· 파주 쪽으로 최단 직선 거리를 잡아도 150km가 넘는다. 그 중 상당수의 거리는 철도로 커버가 돼야만 했다.

그렇다면 이 문제의 철도는 무엇이었을까?
본인은 당연히 경의선(북한의 평부선)만이 떠올랐으며, 답부터 말하자면 정황상 그게 맞다. 하지만 당장 떠오른 이 답은 아는 게 그것밖에 없으니까 찍은 답일 뿐이다. 사리원에서 개성까지 가는 철도가 경의선만 있는 건 의외로 아니다. 그래서 모처럼 이와 관련된 리서치를 좀 하게 되었다.

국토가 분단되기 전, 해방 당시에 경의선은 문산 역을 지나면 장단, 봉동을 거쳐 개성 역이 나왔다. 장단은 알다시피 시설이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DMZ 내부에 터만 존재하며, 반대로 도라산과 판문은 각각 남과 북에서 나중에 만든 역이다.
개성 역을 지나면 선로는 흔히 생각하기 쉬운 북쪽이 아니라 서쪽으로 향하는데, 개성에서 수 km 정도 떨어진 곳에 나오는 그 다음역은 개풍 역(옛 명칭은 토성)이다. 개풍을 지나서야 선로는 마치 남한의 서울-신촌을 연상케 하는 90도 드리프트를 하여 북쪽으로 향한다.

그런데 개풍에서 드리프트를 하지 않고 서쪽으로 계속 직진하여 연백 평야를 지나고 황해도 '해주'까지 가는 철도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해선'이다. 토해선 자체는 연백 평야에서 나는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일제 강점기 때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협궤였다. 표준궤인 경의선과는 한 역에서 환승은 가능해도 동일 열차가 직통 운행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훗날 북한에서는 토해선의 선로를 표준궤로 개량했다. 단, 토해선에는 우리로 치면 임진강처럼, 한강 하류로 합류하는 예성강이라는 강을 횡단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여기 있던 철교는 6· 25때 파괴된 이래로 복구되지 않았다. 현재는 철도가 아닌 인도· 차도교 형태로만 복구되어 있다.

과거에 일제는 경의선 자체를 해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었다. 경부선을 상주와 충주를 경유해서 만들 생각을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직 일제 강점기가 되기도 전인 20세기 초에 강 하류에다 거대한 철교를 그것도 표준궤 규모로 또 만드는 것은 재정상 "지금은 곤란하다" 상태였기 때문에.. 해주를 지나는 철도는 그로부터 수십 년 뒤에 그것도 지선 협궤 형태로 실현됐다.

그 철도가 경유하던 예성강 철교가 파괴되고서 복구되지 않은 것은 북한의 입장에서는 좀 트라우마가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저 다리를 통해 국군· UN군이 강을 쓰윽 건너서 북한군을 대거 엿먹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북한에서 토해선은 강을 건너기 전의 배천 역에서 끊어져 있고, 노선의 이름도 배천선으로 바뀌었다. 개성의 근처까지는 가지만 거기서 더 진행은 못 한다.

해주의 '해주청년' 역에 도착하고 나면, 서쪽 끝까지 더 진행하여 옹진 쪽으로 갈 수도 있고(해옹선, 지금의 옹진선), 북쪽으로 진행하여 사리원까지 갈 수 있다(황해선, 지금의 황해청년선). 북쪽으로 가는 요놈이 바로 경의선보다 더 서쪽에서 황해도를 종축으로 지나는 간선 철도이다. 구월산 기슭에서 탈출을 시작한 두일이의 입장에서는 경의선보다 황해청년선이 위치상으로 더 접근하기 쉬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스토리 설정에서 두일이의 탈북에 도움을 준 철도는 경의선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아이는 어떤 형태로든 경의선 구간에 도착해야만 했다.
결정적인 이유는, 스토리 상으로 걔는 육로로 탈북을 했기 때문이다. 황해청년+배천(토해)선만으로는 앞서 언급했던 예성강 하나 건너지를 못하고 내륙에서 엄청난 거리를 동쪽으로 뺑이를 쳐야 한다. 동쪽 이동 없이 그대로 남하해 버리면 서해나 한강에 다다르지, 육로와 철책이 나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열차에서 내린 뒤 두일이가 휴전선 쪽으로 접근할 만한 경로는 기정동이 있는 개성 시내 외곽의 평지 구간, 아니면 판문점이 있는 곳보다 더 동쪽으로 진행하여 장풍군 일대의 산지이다. <용감한 탈출> 스토리는 시작은 황해도 서쪽인데 전방 도착은 동부 전선스러운 것이 자칫 잘못하면 고증상 가장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도저히 절대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개연성이 성립하려면 저기서 철도는 아무래도 경의선이 돼야 하는 건 틀림없을 듯하다.

지도를 찾아 보면서 느낀 건데, 한반도에서 서울에서 인천 정도의 경도가 서쪽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한 오산이다. 인천은 한반도의 서부 중에서도 안쪽으로 제일 옴푹 들어간 지형에 있다. 그 반면, 북한 쪽으로 가면 서쪽 끝은 서울 경도에서는 수십~100수십 km 이상으로 벌어진다. 그러니 경의선의 철도역에서 황해안까지 들어가려면 직선 거리로도 굉장히 긴 거리를 가야 하며, 그 내륙에 황해청년선 같은 추가적인 철도가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참고로 북한에는 새로 만들거나 개량한 철도에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노선이나 역이 많다. 서부 말고 동부에는 '금강산청년선'도 있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말 그대로 20대 청년 공병들을 갈아 넣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2. 휴전선이 지금과 같은 모양으로 형성된 이유는?

우리나라의 휴전선 내지 군사 분계선은 서쪽으로 갈수록 남하해서 심지어 한강의 최하류와도 맞닿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서부 전선에는 동부 전선에는 없는 "강안경계"라는 게 존재한다. 우리나라가 6· 25 전쟁을 계기로 서울이 북한과 더 가까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남한이 38선 시절보다 절대적인 땅 자체는 더 많이 수복했지만 휴전선이 수평선이 아닌 / 모양으로 형성됐으며, 특히 고려의 역사가 담긴 개성시를 수복하지 못하고 빼앗긴 이유는 무엇일까? 까놓고 말해 선죽교가 있는 곳이 한때는 남한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게 된 거다.

<용감한 탈출>의 지리적 배경과도 전혀 무관한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저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일단 6· 25 전쟁 당시에 휴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판문점이 오리지널 38선과 거의 동일한 지점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덕분에 판문점 일대는 중립 구역으로서 전투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평화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반대로 국군이 서부 전선에서 더 북진을 할 수 없게 발목을 잡기도 했다.

둘째, 지형적으로는 이 송악산 때문이었다. (한자까지 일치하는 동명의 산이 제주도 남부에도 있으니 혼동하지 말 것. 단, 제주도 송악산은 기생 화산으로, 그냥 언덕에 불과한 자그마한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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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선 시절에는 개성 시내는 남한 땅이었지만 문제는 고지대인 송악산이 여전히 북한 땅이었다는 것. 남한의 개성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군사적으로 남한이 방어하는 데 절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북진을 할 거면 저 산까지 몽땅 화끈하게 차지하거나, 아니면 다 내어 주거나 해야 했다.
국군에서 다뤄지는 '육탄 10용사'도..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에 대해서는 미화다 날조다 잡음이 있다만 어쨌든 이건 6·25 전쟁 전, 1949년 5월에 바로 송악산 기슭의 그 불리한 상황에서 북한군의 벙커링을 뚫고 고지를 지키려는 목적으로 벌어진 전투였다.

더 서쪽으로 옹진 반도 일대도 상황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인지라, 뒤로 물러서면 보다시피 그냥 바다이다. 내륙으로 가려면 38선 이북 지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으니 그냥 배수진이요 고립된 섬이나 마찬가지였다. 38선은 지형을 고려하지 않고 쭉 그어졌다 보니, 서쪽 구간은 전반적으로 남한이 점령하고 있는 게 도저히 무리였다.
단지 북한이 해군이 궤멸 상태였기 때문에 연평도 백령도 같은 섬은 북한과 매우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다시 남한이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휴전이 맺어질 즈음, 북한은 영토를 다시 38선 시절로 원복할 것을 제안했으나 남한과 UN 측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개성은 참 아까우며 옹진 반도와 연백 평야를 잃은 것도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그 개고생을 하면서 남한이 동부 전선에서 땅을 더 많이 수복했으며, 38선 시절의 경계는 차라리 개성 시내를 포기하는 게 더 나을 정도로 남한에게 군사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거기를 포기한 대신 남한이 수복한 땅 중에는 당시로서는 금싸라기 곡창 지대인 철원도 포함돼 있었다.

경원선 소요산 역의 북쪽 다음 역인 초성리 역과, 그 다음 역인 한탄강 역 사이가 옛 38선 경계이다. 그리고 강원도에서는 양양 국제 공항이 38선보다 아주 살짝 더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그 북쪽의 연천, 철원, 화천, 양구, 인제, 속초, 고성은 약 5년 남짓 동안 북한 땅이었다가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한 것이다. 그러니 철원에 있는 노동당사 같은 건물은 역사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우리나라가 서쪽으로는 송악산, 동쪽으로는 금강산만 추가로 차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사실, 설악산도 그때 수복한 산이고, 동쪽 끝자락에서는 이례적으로 크게 북진한 덕분에 고성군에 있던 김 일성 별장까지 탈환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별장에 이어서 김 일성이 몰던 개인 리무진 승용차도 그때 전쟁 중에 아주 극적인 계기로 우리 국군이 노획하게 됐다. 여기에 대해서도 나중에 또 자세히 다룰 일이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4 19:38 2016/03/14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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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2년엔 강원도 동부 전선에서 일명 '노크 귀순' 사건이 벌어졌다.
굶주리던 북한 주민이 목숨 걸고 생지옥을 떠나 자유의 땅에 찾아온 것은 기쁜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와는 별개로, 남방 한계선의 경계 상태가 지금까지 개판이었다는 게 탄로나는 바람에, 군대의 높으신 분들 여러 명이 무더기로 징계를 받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과장 좀 보태서 서정적으로 묘사하면, 하늘에서는 별들이 우수수 떨어졌고 땅에서는 영창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난 탈출한 그 병사가 당연히 최전방 철책 근무를 하던 중에 근무지를 이탈해서 남쪽으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거기서 근무하던 중에 상관을 상대로 프래깅을 저지른 뒤 탈북한 병사도 실제로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저 노크 귀순의 경우는 검색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강원도 소재이긴 하지만 최전방은 아닌 데서 군생활을 하다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탈영했다. 몇십 km를 며칠에 걸쳐 혼자 걸어서 남쪽 전방까지 이동하고, 그 동안 잠은 산 속에서 자는 역경을 거친 뒤에야 탈출에 성공한 것이었다.

게다가 작년 6월에는 무려 함흥에서도 한 북한군 병사가 전방까지 수백 km를 걸어서 탈북했다.
이 시점에서 본인은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읽었던 반공 동화 <용감한 탈출>이 생각났다. 25년도 더 전에 본 책이다. <한국 서적 공사>라는 출판사를 통해 1987년과 1990년에 두 차례에 걸쳐 발간되었다. 사실 내가 태어나서 '탈출'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으로 접한 곳도 저기였지 싶다. 의미심장하다.

주인공은 역시 10살 안팎의 북한 어린이인데 부모가 하루아침에 반동으로 몰린다. 아버지는 어디론가 끌려가서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는 벌목장에서 중노동을 하다가 사고로 죽는다. 어머니는 “너는 이 생지옥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라” 이런 유언을 남기고, 애는 탈출을 결심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린 나이에 진짜로 저 노크 귀순자처럼 산 속에서 숨어 지내면서 남쪽으로 내려간다. 마침 집에 흰 개가 한 마리 있어서 아이와 동행한다.
(1) 차를 탄 군인들이 아이가 숨은 곳 근처에서 갑자기 내리는데, 다행히 노상방뇨만 하고 가 버린다. (2) 개가 어디 물자 보급고를 냄새를 맡고 찾아내서 건빵 포대를 물고 온다. 뭐 요런 깨알같은 장면이 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는 어떤 군인에게 걸린다. 전화를 걸어서 요런 정체불명의 어린이를 잡았다는 걸 본부에 보고를 하려는데, 개가 필사적으로 그 군인을 공격하고 기절시켜서 당장 위기는 넘긴다. 하지만 이제 탈북 시도가 들통났기 때문에 큰일 났다.

결말로 가면 군사분계선 근처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개는 총에 맞아 죽는다. 깨갱 소리와 함께 피 내지 '붉게' 이런 묘사가 분명히 있었다. 남한 쪽에서는 아이를 향해 군인들이 "안심하라. 우리는 대한민국 국군이다! 개는 버리고 어서 xxxxxx해서 여기로 뛰어 와라!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라!" 이렇게 외친다. Aㅏ...

초딩 1~2학년용이라고는 하지만 북한· 반공을 소재로 다소 무겁고 슬픈 내용이었다. 그 먼 옛날 초딩 시절에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반공 spirit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 성인의 관점에서 봐도 그 spirit은 충분히 유효하고 건전하지, 뭔가 방향이 수정되어야 할 아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책의 저자는 이 영두라는 분인데, 검색을 해 보니 퇴직한 교사이다. 2014~2015년 현재까지도 아동문학계에서 여러 동화나 희극을 지어 발표하면서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메일 주소도 있다. 10여 년 전에 작고한 이 오덕 선생과 비슷한 인상이다. 그렇다고 고향이 이북인 실향민이지는 않음.

너무 옛날 책인 관계로 오늘날 상업용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다. 그래서 본인은 국내에서 출판된 모든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국립 중앙 도서관에 들러서 몇십 년 만에 현물을 다시 구경할 수 있었다. 단, 득템 장소는 본관이 아니라 강남 역 근처 국기원의 옆에 있는 별관인 어린이· 청소년 도서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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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공 도서 읽기 운동..;; 우리나라가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렌드가 저랬다는 게 믿어지시는가?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우리 모두 힘을 합쳐 쥐를 박멸하자! / 머릿니를 퇴치하자" 이런 구호· 포스터가 나돌곤 했다. 그런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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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여러분! 우리나라는 88 서울 올림픽을 열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커졌습니다. 그러나 북쪽에는 자유와 행복을 몽땅 빼앗고, 얼어붙은 땅을 만들어 버린 음흉스러운 공산당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잘 사는 우리 대한민국을 몹시 배 아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며 쳐들어올 흉계만을 꾸미고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손발리 오그라들 정도로 민망한 반공 구호가 웃프게 느껴지겠지만 저 때는 마냥 웃을 일이 아니었다.
배 아파한 거 맞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1988 서울 올림픽이 개최됐을 때,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서 축하를 해 주거나 같이 참가하기는커녕 대회를 방해하기 위해 대한 항공 여객기를 폭파하고(1987, KAL 858) 김포 공항에서도 외국인까지 사주해서 폭탄 테러(1986)를 저지르기도 했다.

이건 수뇌부와 무관하게 말단의 또라이가 저지른 주한 미군의 범죄나 사고 같은 것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저런 인간말종들이 어떻게, 무슨 얼어죽을 민족, 통일 운운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쟤들은 어떤 이념이나 가치도 적화통일 내지 사탄적인 김씨 부자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은 집단이다.

특히 요즘은 북한도 과거 김 일성 시절 초기에, 고난의 행군이 있기 전, 8월 종파 사건이 터지고 주체 사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는 그럭저럭 살 만했다고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유행인 듯한데 전혀 그렇지 않다.
분단 직후와 6·25 전의 극초창기 때부터 이미 소련군과 김 일성 정권의 만행에 학을 떼고 공산주의의 실체를 깨닫고서 탈출을 생각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음을 알아야 한다. 남한의 반공 독재자들이 그렇게도 싫다면, 월남을 거부하고 북에서 최후를 맞이한 조 만식 선생의 비장한 유언이 어떠했는지라도 절대로 잊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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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의 어머니가 통나무에 깔려서 다친 그림이 있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쟤네 가족이 반동으로 몰린 이유는.. 다름아닌 삼촌이 탈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연좌제에 걸렸다.
삼촌은 예전부터 저 조카에게도 "우리나라(북한)의 선전선동에 속지 마라. 여기야말로 진짜 헬조선이다. 너도 남조선으로 탈출해야 한다"라고 자기 목숨을 걸고 얘기해 주곤 했다.

"남조선은 지옥이 아니란다." 그런데 책이 출간된 지 거의 30년이 돼 가는 오늘날은 남조선이 지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선동질 조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무리 대기업의 횡포(?)가 심하고 입시· 취업 경쟁이 심하다 한들 남조선이 북조선만도 못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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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맣게 잊고 있었다. 쟤들은 열차를 이용한 히치하이킹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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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들은 드디어 전방에 도착하고 북한의 민통선 지대에까지 진입했다. 나중에 어느 병사에게 들켰을 때에도 병사가 "여긴 민간인은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고, 일부러 침입하지 않고서야 길을 잃어서 들어오는 게 절대 불가능한 곳이다. 넌 누구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군사 분계선 인근은 민통선까지 넘어서 말 그대로 '비무장 지대'인데, 거기서 저 동화에 나오는 것처럼 거기서 개가 피탄되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지고 북한의 초딩 꼬마가 혼자서 남한으로 넘어온다는 건 정말 굉장한 허구 각색이긴 하다. 현실에서는 일어나기 거의 불가능하다. 게다가, 나중에 지리적인 설정을 더 고찰해 보겠지만, 저 스토리에서 총격전이 벌어질 만한 곳은 판문점과도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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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DMZ에서 적군과 총격 교전이 벌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TV와 신문에서 대서특필을 할 일이다. 그 와중에 "용감한 탈출"의 주인공인 북한 어린이는 온갖 매스컴 인터뷰를 타면서 떠받들어질 것이다. 더구나 TV에 나와서 저 책에서처럼 "우리 부모님과 사랑하는 재롱이(개)를 죽인 공산당은 나빠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외치기까지 하면..;;

저 애는 안 그래도 1980년대 5공 시절, 북풍에 없는 간첩도 만들어 내던 시절에 그야말로 제2의 이 승복으로 거의 국가적인 영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_=;;;; 군대에서 각종 정훈 교육의 소재로도 쓰이고 말이다.
그리고 이 정도로 유명세를 타 버렸으니, 먼저 탈북한 삼촌과의 만남도 큰 어려움 없이 성사되었을 것이다. 삼촌은 어떻게 탈북했을지가 궁금해지지만, 그래도 어린이가 아닌 성인이다 보니 그렇게까지 주목받을 일은 아니었으리라 생각된다.

자, 그림을 곁들이느라 분량이 길어졌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만 쓰겠다. 다음 시간에는 북한 정권 욕 같은 정치 얘기는 없이 북한 지리 얘기를 하면서 <용감한 탈출> 동화의 설정 고증을 해 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12 08:32 2016/03/12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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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쿠, 신분당선이 용인까지 연장됐고 수인선이 인천까지 연장된 이 와중에 철도 분석 카테고리에 몇 년째 새 글이 없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이번에 게재하는 자료는 수 년 전에 한 번씩 다 다룬 적이 있는 주제이지만, 그래도 최신 정보도 같이 업데이트 했다.

1. 이색 지하철역 열전 몇 가지

승강장은 지상이고, 입구와 통로가 지하인 역은?
구일(경인선 분기 직후의 교량 위에 세워진 역. 경인선 2복선화와 관련된 아주 독특한 내력이 있음), 대방(일반열차 선로가 평지이고, 전철 승강장은 고가이긴 하다만), 반월, (신도림도 해당하지만 지하 환승역)

출구가 하나뿐인 역은?
학여울, 독바위, 반월, 마곡(과거 마천 역이 그랬던 것처럼 출구를 추가로 만들려는 계획은 있는 듯함)

옛날 역명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역은?
중앙(바깥에), 신설동(환승 통로 어딘가에 일부러 남아 있음), 야탑(승강장에. 옛날 역번호와 로마자 표기를 볼 수 있음)

2. 역명에 등재된 대학교들

한때, 수도권 광역전철 1호선 회기 역의 부역명은 '경희대앞'이었다. 인근에 경희대 서울 캠퍼스가 있기 때문. 그러나 2009년부터 학교에서 부역명 표기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계약금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이 부역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 대신 2012년 말에 개통한 분당선 영통 역이 경희대 국제 캠퍼스와 가까운 관계로 부역명 '경희대학교'를 차지해 있다. 같은 학교가 두 전철역에다 동일 부역명을 번갈아 가면서 쓴 게 흥미롭다.

전철역명의 본좌급인 학교는 역시 부역명도 아니고 주역명으로 '한양대'(2호선)와 '한대앞'(4호선)을 모두 당당히 차지해 있는 한양 대학교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울 캠퍼스와는 달리, 안산의 에리카 캠퍼스는 전철역에서 그리 가까이 있지 않다.

한양대, 고려대, 숭실대는 지하철 출구가 정문이 바로 이어져 있을 정도로 가까운 학교이다. 서울 근교엔 가천대가 그러하며, 인천에서는 최근에 수인선의 연장 개통 덕분에 인하대도 이 반열에 합류했다.
2호선 신촌은 연세대, 서강대, 이화여대가 적당한 멀리 떨어진 채 비슷하게 인접해 있는 관계로 어느 학교의 부역명도 끼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신촌 일대는 교통이 헬인 관계로, 셔틀버스는 경복궁 역을 경유한다.

광운대는 "시종착역"인 성북 역이 자기 학교 이름으로 개명된 덕분에 학교 홍보 효과 하나는 정말 대박으로 누리고 있다.
중앙대는 원래 7호선 상도 역에 교명을 딴 부역명이 붙어 있었지만, 더 가까운 9호선이 개통한 뒤부터는 흑석 역으로 부역명이 이동했다.

그 반면, 총신대는 '총신대입구-이수' 병크 때문에 이 바닥 사정을 아는 철덕들로부터 두고두고 까이고 있는 중.
그리고 서울대입구 역에서 서울대까지 걸어서 가는 사람은 바보 중의 상바보이고. 서울대라는 이름 인지도가 아니었다면, 위치와 거리만으로는 절대로 저런 이름이 붙을 수가 없었다. 그냥 관악구청 역이 됐지 않겠는가.

3. 전철들의 급행 운행

우리나라의 지하철/전철에서 급행의 원조는 평일에 하루 세 번씩 다니던 서울-수원 급행이었다. 1981년에 서울-수원 2복선이 개통하면서 같이 운행을 시작했다.

그 뒤 좀 더 자주 다니는 급행은 경인선에 등장했다. 이 역시 선로의 2복선화와 함께 운행을 시작했다.
경부선에는 2005년 1월, 병점을 넘어 천안까지 2복선화가 완료되면서 경인선과 비슷한 계열의 용산-천안 급행이 추가로 등장했다. 기존 서울-수원 급행도 천안으로 구간이 연장됨. 기존 급행과는 달리 용산 착발 급행은 서울 시내 구간을 일반열차 선로가 아니라 급행 전동차 선로로 다닌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별도의 선로에서 상시 운행되는 급행은 경부선과 경인선에만 있다.
그러나 2000년대 후반, 2010년대부터는 편도로만(아침엔 상행만, 저녁엔 하행만) 기존선의 일부 구간에서 찔끔찔끔 다니는 급행이 안산선, 경원선, 중앙선, 경의선, 분당선에서 등장했다.

일산선과 과천선은 너무 짧고 딱히 건너뛸 만한 구간이 없어서 그런지 급행 운행이 없다.
경인선에는 한때 급행보다 더 정차역 수가 적은 특급까지 잠시 운행되기도 했지만 없어졌다.
경춘선은 역시 한때는 급행이 존재했으나, 지금은 급행 역할을 ITX-청춘이 대체한 지 오래이다.

서울 지하철 9호선은 광역이 아닌 도시철도에서 대피선을 이용한 급행이 처음부터 계획되고 운행되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한때는 개통해 봤자 공기수송일까봐, 지하철의 메리트를 만들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낸 아이디어였으나, 9호선은 예상을 뛰어넘는 대박을 쳐서 극심한 혼잡과 차량 부족을 호소하는 중이다.
서울 지하철 7호선도 이제 부천과 인천까지 가는 굉장한 장거리 노선이 됐는데 연장 구간만이라도 급행이 다녔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신분당선은 일단은 컨셉 자체가 '모든 열차 급행'이다. 하지만 정자 이남부터는 도시철도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중간에 자꾸 역이 생기면 완급 구분이 추가될지도 모른다.

공항 철도의 직통열차는 여느 급행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중간의 모든 역을 씹어먹고 진짜 서울 역과 인천 공항만을 찍는다. 이제는 KTX까지 공항까지 가게 됐지만, 그래도 공항 직통열차는 경춘선 급행과는 달리 고유한 자기 역할이 있다 보니 여전히 운행되고 있다.
전철들의 급행 운행에 대해서 이렇게 분석해 보니 재미있다.

4. 철도 터널

요즘 우리나라 철도의 대세는 왕창 깊고 왕창 긴 터널이다. 정말 시원시원하게 팡팡 뚫어 댄다. 철덕들은 반드시 암기하고 숙지할지어다.

(1) 금정 터널: 2010년, 경부 고속철 2차 개통과 함께 우리 곁을 찾아왔다. 부산 북부 노포동에서 부산진 역까지.. 거의 20km에 달하는 부산 시내 종축을 전부 지하로 관통해 버린다. 물론 부산은 어차피 동서를 가로막는 산이 있으니 고속선 역시 많은 구간을 산 아래로 지난다.
서울 쪽은 광명까지 20km를 약간 넘는 거리를 전부 지상의 기존선을 타면서 천천히 달리는 것과 대조적으로 부산은 참 복 받았다. 다만, 부산의 경우 고속선이 울산 쪽으로 우회하느라 근본적으로 거리 페널티가 굉장히 큰 것으로 인해 장점이 상쇄되기도 한다.

(2) 솔안 터널: 우리나라에 최후로 남아 있던 영동선 스위치백을 대체하여 새로 건설된 '루프식 터널'이다. 즉, 얘는 직선으로 빨리 이동하는 게 아니라 고저 차이를 극복하는 게 목적이다. 길이는 16.7km에 달한다. 2012년 6월 말에 개통함.
현재 우리나라에는 얘를 포함해 루프 터널이 총 4개가 있다. 중앙선에 두 군데, 그리고 함백선에 한 군데, 그리고 저것. 그 중 솔안 터널이 그리는 원은 다른 세 터널의 회전 반경보다 훨씬 더 크다.

(3) 율현 터널: 길이로 따지자면 위의 저 두 터널을 아득히 버로우 태우는 괴물이다. 서울 수서 역과 무려 평택에 있는 지제 역 사이의 50.3km를 지하로 연결했다! 작년 6월 말에 개통했다. '율현'이란 수서 역 남쪽으로 자곡· 세곡동의 사이에 있는 서울의 외곽 끝자락 그린벨트 지대이다. 그래도 행정구역상으로는 아직 인서울임.
이 선로는 수도권 고속선과 GTX(고심도 급행 광역전철)가 공유한다. 즉, KTX 산천이라는 장거리 고속열차와 누리로 급의 통근형 열차가 한 선로를 같이 쓴다는 뜻이다. 동일 선로 공유라니, 그 깊은 지하에서 속도 차이도 꽤 많이 나는 열차가 완급 결합을 하면 양쪽 다 선로 용량 제약도 많이 걸릴 텐데, 운영이 잘 될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4) 대관령 터널: 평창과 강릉을 잇는 21.7km짜리 터널로, 평창 동계 올림픽을 앞두고 곧 개통할 원주-강릉선 구간에 속한다. 부산을 관통하는 금정 터널보다 약~간 더 길다. 작년 11월 말에 개통했다.
서울에서 강릉을 가기 위해 먼 옛날에는 무려 영주까지 내려가야 했으나 1970년대에는 분기점이 제천으로 바뀌었고(태백선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해방 후에 만들어졌음), 이제는 원주로 바뀔 예정이다.

2000년대 초엔 영동 고속도로가 산을 몽땅 타넘는 고가로 다시 만들어졌는데, 철도는 오르막을 오르는 게 힘들다 보니 그냥 닥치고 지하 터널로 아주 완만한 경사를 만들어 냈다.
예전에도 한번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1) 광명 역에서 분기하여 인천대교를 따라 곧장 인천 공항으로 가는 철도가 필요하고, (2) 신분당선은 서울 남산 아래를 지나서 광화문까지 직통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이 없는 게 아쉽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9 08:37 2016/03/09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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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Windows 9x 시절에는 내부의 16비트 코드가 gdi/user 계층에서 사용하는 64KB짜리 구닥다리 힙으로 인해 일명 '리소스' 제약이란 게 있었다. 그래서 램이 수백, 수천 MB으로 아무리 많더라도, 프로그램을 많이 띄워서 UI와 관련된 오브젝트들을 이것저것 생성하다 보면 리소스가 바닥 나고 운영체제가 패닉에 빠지곤 했다.

지금으로서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황당한 제약이다. 9x에서는 메모장이 60KB를 조금만 넘는 파일도 열 수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숫자 세는 단위 자체가 16비트로 제한돼 있으니, 실제 메모리가 아무리 썩어 넘쳐도 셀 수 없는 영역은 몽땅 그림의 떡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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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랑 64KB짜리 중에서 메모리가 몇만 바이트 남았다고 출력하는 건 좀 민망했는지, 남은 리소스의 양은 퍼센트 비율로 출력되었으며, Windows 기본 프로그램들의 About 대화상자에서 값을 간단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퍼센티지를 얻어 오는 API는 무엇일까? Windows 3.x에서 도입된 GetFreeSystemResources라는 함수가 그 주인공이었다. 얘는 0~2 사이의 정수 인자도 받아서 시스템 전체, GDI, user 종류도 얻을 수 있었다.

Windows 3.1 SDK에서 windows.h를 열어 보면 저 함수는 #if WINVER >= 0x030a 안에 고이 감싸진 채 선언되어 있었다. 즉, 초창기부터 처음부터 존재하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Windows 1, 2 시절에는 샘플 프로그램들의 About 대화상자를 보면 그냥 남은 주메모리의 양(수백 KB)과 주 하드디스크의 남은 용량만 출력했지, 저런 비율을 따로 알려 주지는 않았었다. NT 계열이 아니라 도스 위에서 돌아가던 16비트 시절에도 말이다.

저 함수의 공식적인 수명은 Windows 3.x에서 그대로 끝났다. 32비트 Windows API에는 정식으로 이식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16비트 user.exe를 통해서만 제공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32비트 프로그램이 시스템 정보 같은 기능을 구현할 일이 있어서 남은 리소스 퍼센티지를 얻으려면... 원래는... 마치 32/64비트 훅 DLL을 따로 만들듯이 16비트 DLL을 만들어서 그 DLL이 16비트 API를 호출하여 값을 얻고.. 32비트 프로그램은 그 DLL과 flat 썽킹을 해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썽킹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한번 다룬 적이 있다.

이런 번거로운 일이 필요한 이유는 32비트 프로그램이 user.exe로 직통으로 API 호출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일단은 말이다.
옛날에 한컴사전이 노클릭 단어 인식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그래픽 API 훅킹을 했었는데, 훅킹용으로 32비트 DLL과 16비트 DLL이 모두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 있다. 32비트 gdi32.dll뿐만 아니라 16비트 gdi.exe로 직통으로 들어가는 그래픽 API 호출까지 잡아 내서 거기 문자열을 얻기 위해서 만든 거지 싶다. 그러니 32비트 DLL엔 훅 프로시저가 들어있고 16비트 DLL엔 썽킹 루틴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없는 길을 부분적으로나마 만들어 낸 용자가 그 시절에 이미 있었다.
Windows 9x의 kernel32.dll이 제공하는 비공개, 봉인, 문서화되지 않은 API를 이용해서 32비트 프로그램이 user.exe를 직통으로 호출해서 리소스를 얻어 온 것이다. Windows 95 Programming Secret의 저자인 Matt Pietrek가 그 용자이다.

마소 내부에서만 사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비공개 API 중에는 16비트 바이너리를 로딩할 수 있는 일명 LoadLibrary16 / GetProcAddress16 / FreeLibrary16 세트가 있다. 얘는 kernel32.dll의 export table에 이름이 노출돼 있지도 않아서 ordinal 번호로만 접근이 가능한데.. 이 번호를 근성의 리버스 엔지니어링으로 일단 알아 냈다. 참고로 얘들은 Generic 썽킹용으로 쓰이는 LoadLibraryEx32W처럼 뒤에 32W가 붙은 함수하고는 다른 물건이므로 혼동하지 말 것.

그런데 알아 냈다고 전부가 아니다. Windows 9x의 GetProcAddress에는 특별한 보정 코드가 들어 있어서 kernel32만은 예외적으로 ordinal을 이용한 함수 주소 요청을 고의로 막았다! 고로 이름이 없이 ordinal만 존재하고 운영체제 내부에서만 사용되는 비공개 API를 제3자 프로그램이 멋대로 사용하는 걸 자연스럽게 차단했다.

이런 조치를 취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같은 함수라도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뀜에 따라 ordinal이 수시로 바뀔 수 있으니 일반적인 함수라면 어차피 번호가 아닌 이름만으로 import하는 게 맞다.
또한 프로그램들이 비공개 API를 무단으로 사용하다가 Windows의 버전이 바뀌면 그 프로그램들이 호환성이 깨져서 동작하지 않게 되는데, 이 경우 사용자는 프로그램의 제작사가 아니라 마소를 비난하는 편이었다. 신제품을 팔아 먹으려고 일부러 프로그램의 동작을 막았네 뭐네 하는 음모론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마소에서도 이런 힐난에 이골이 났는지 더 방어적인 조치를 취하게 됐다.

그래도 이런 비공개 API들을 끝끝내 끄집어내서 사용하려면
(1) 로드 타임 차원: kernel32.dll의 비공개 API ordinal을 직결로 연결하는 import library를 직접 만들거나,
(2) 런 타임 차원: PE 파일 포맷을 분석해서 GetProcAddress 함수를 손으로 직접 구현하면 된다. 메모리에 로드된 kernel32.dll 내부의 export table을 수동으로 뒤지면 된다는 뜻이다.

L(로드), F(해제), G(함수 탐색) 함수의 ordinal은 1부터 시작하는 번호 기준으로 35~37이라고 한다. Windows 95부터 ME까지 변함이 없다. 어차피 더 바뀌어야 할 이유가 없는 번호이기도 하고.

이렇게 얻어 낸 HMODULE (WINAPI* pfnLoadLibrary16)(PCSTR)을 호출해서 "user.exe"를 로드한다.
그리고 GetProcAddress에다가 "GetFreeSystemResources"를 하면 드디어 우리가 원하는 함수 포인터를 얻을 수 있는데, 얘는 바로 호출 가능하지가 않다. kernel32에 존재하는 또 다른 비공개 API인 QT_Thunk를 거쳐서 함수를 호출해야 하는데, 이 함수는 또 기계어 차원에서 호출 방식이 반드시 일치해야 하기 때문에 대략 다음과 같은 인라인 어셈블리를 넣어야 한다.

_asm {
    push 0~2  ; 시스템, GDI, user. 얻고 싶은 리소스 타입
    mov edx, [pfnGetFreeSystemResources] ; 32비트 주소
    call QT_Thunk ; kernel32에 대해 "QT_Thunk"를 GetProcAddress 한 결과
    mov [ret_val], ax ; 함수의 실행 결과를 받을 16비트 WORD 변수
}

이렇게 하면 32비트 프로그램이 일단 16비트 API를 호출해서 리소스 값을 얻어 올 수 있다. (참고로 Windows NT 계열은 QT_Thunk 함수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실험해 본 바로는.. 저거 사용하는 게 굉장히 까다롭다.
저 어셈블리 코드에 도달할 때까지 각종 DLL를 로드하고 여러 단계에 걸쳐서 여러 함수들의 포인터를 얻는 등 절차가 복잡한데, 클래스를 만들어서 중간 단계의 결과들을 저장해 놓거나 절차를 여러 단계의 함수로 분리하면.. asm 부분이 갑자기 동작하지 않게 된다.

비공개 API가 내부에서 썽킹을 수행하는 동안 프로그램의 스택이라든가 내부 상태를 이상하게 건드리는 것 같다. 컴파일러의 최적화 옵션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서야 위의 저 간단한 어셈블리 코드가 딱히 뻑이 날 리가 없는데 말이다.

16비트 DLL을 따로 만들지 않고 편법을 동원해서 16비트 API를 호출하고 구체적으로는 리소스 퍼센티지를 얻는 방법을 알아 봤는데, 참 어렵긴 하다는 걸 느꼈다. 사실, 과거에 thunk 컴파일러가 하는 일 중 하나도 내부적으로 UT_Thunk를 호출하는 중간 계층 코드를 생성하는 것이었다. 더 들여다보니 말로만 듣던 ThunkConnect32 같은 함수도 쓰는 듯했다.

비공개라고 해서 무슨 ntdll 같은 하위 계층도 아니고 참 신기한 노릇이다. 어차피 Windows 9x는 kernel32가 최하위 계층이지 ntdll 같은 추가적인 하위 계층은 없으니 말이다.
Windows Programming Secret 책을 당시의 마소 Windows 95 팀의 엔지니어들이 직접 봤다면..
블리자드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직접 개발한 프로그래머들이 스탑 럴커처럼 자신조차 상상하지 못한 컨트롤과 테크닉을 구사하는 프로게이머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 싶다.

리소스를 되돌리는 함수 정도야 간단한 정수 하나만을 인자로 받고 역시 정수 하나를 되돌리는 아주 단순한 형태이다. 그러니 이런 테크닉을 구현하는 것에도 큰 무리가 없다. 구조체나 문자열의 포인터가 동원되기라도 했다면 메커니즘이 훨씬 더 복잡해지며, 그냥 정석적인 썽크 컴파일러를 쓰는 것밖에 답이 없지 싶다.
그러고 보니 문득 든 생각인데, 과거에 GWBASIC이 처음 구동되었을 때 Ok 프롬프트 앞에 "6만 몇천 바이트 남았습니다(6xxxx bytes free)"라고 메시지가 떴던 게 저런 리소스와 성격이 좀 비슷한 것 같이 느껴진다.

저런 식으로 프로그램이 시작된 직후, 혹은 프로그램의 도움말이나 About 대화상자 한 구석에다가 간단하게 남은 메모리/자원의 양을 표시하는 건 오랫동안 소프트웨어 업계에 남아 있던 관행이었다. 심지어 도스 시절부터 말이다.
그랬는데 요즘은 메모리가 너무 많아지고 숫자 단위가 커져서 그런지 Windows의 작업 관리자는 남은 메모리의 양을 KB 단위 대신 비율로 표시하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64KB짜리 리소스는 스케일이 너무 작고 민망해서 퍼센트로 표시한 게 아닐까 의심될 지경이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너무 커져서 세부적인 숫자가 무의미한 지경이 됐으니 다시 퍼센트로 복귀한 걸로 생각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6 08:35 2016/03/06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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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의 글에서 계속됨

1.
백장미단의 홍일점이던 소피 숄은 나치 반대 운동을 하다가 겨우 23세의 나이로 저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독일엔 이와 완벽한 대조를 보이는 아가씨도 있었다.
이르마 그레제(1923-1945)는 생년과 몰년이 모두 소피 숄보다 딱 2년씩만 더 늦어서 23세에 죽은 것은 동일하다. 허나, 이 사람은 나치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은 게 아니라 반대로 전후에 나치 전범으로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을 당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죄목은 바로 나치 수용소의 간수로 근무하면서 수용자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며 그걸 새디스틱하게 즐겼다는 것이다. 심심하면 자기 멋대로 수용자들을 구둣발로 조인트 까고 굶기고 때리고 채찍질하고 옷 벗겨서 성고문을 일삼고.. 아니면 굶주린 군견을 풀어서 물어 죽이거나 가스실로 보냈다. 차고 있던 권총으로 즉결처분을 해 버리는 건 차라리 자비로운 조치다.

수용자 목숨을 정말 파리 목숨 정도로 치부했으며 그녀는 수용소의 모든 수감자들 사이에서 "나치의 악녀"라고 악명이 자자했다고 한다. 하는 짓은 현신한 악마 그 자체인데 얼굴은 참 예쁘장했다니 기가 막힌다.
나중에 그녀의 죄상이 밝혀지고 그녀의 나이와 외모까지 같이 밝혀지자 연합국 측은 이런 아가씨가 저런 짓을 버젓이 저질렀다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녀는 사형 집행 직전에 수줍은 듯 "빨리(집행해 주세)요~(Schnell..)"라고만 말했지만, 밧줄이 목에 잘못 걸렸는지 곧바로 목동맥이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말 그대로 목이 졸리는 질식 과정을 거치면서 다소 길고 고통스럽게 죽었다고 한다. 고의는 아니었다고 하는데..

비슷한 시기를 살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죽기까지 한 같은 20대 여자라도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사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저렇게까지 달라질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북한 정권이 무너지면 거기 정치범 수용소에서도 이와 비슷한 죄목으로 죽거나 조리돌림 당할 악질 간수들이 많이 발견되지 싶다.

한편, 숄이 +1이고 이르마 그레제가 -1이라면, 그럭저럭 0 내지 -0.1에 해당하는 사람도 있다.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라고 알려진 여인인 '트라우들 융에'(1920-2002)인데..
전후에 길거리를 걷다가 소피 숄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걸 보고 그 유래를 궁금해하다가 큰 전율을 느끼고 데꿀멍 하고 말았다. "자기가 한창 히틀러 밑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동안, 같은 여자이고 나이도 거의 동갑인 한 이 친구는 나치와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저렇게 죽었구나..! ㅠㅠㅠㅠ 난 너무 어려서 히틀러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변명하는 것도 다 핑계일 뿐이구나"라고 영화 <몰락>에 직접 출연해서 증언을 했다.

그런데 세상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간으로 가는 게 제일 무난한 건지.. +1과 -1은 모두 진작에 사형 당한 반면, 정작 저 사람만이 독일이 통일되는 것까지 보고 천수를 누리다가 갔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 부정적인 인물 소개는 이걸로 마치고, 다음부터는 긍정적인 인물 얘기를 하겠다.

2.
한편, 우리나라 일제 강점기의 소년 항일 열사로 뒤늦게 알려진 주 재년(1929-1944)에 대해서도 한번 짚고 넘어갔으면 싶다. 그는 1943년 어느 날, 팀을 짜거나 삐라를 만들어 뿌린 것도 아니고 마을 담장에다가 "일본과 조선은 서로 다른 나라다(내선일체 대동아 공영권 따윈 X까라). 일제는 반드시 패망한다. 조선 만세" 이런 글귀를 써서 일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제는 당연히 "이딴 낙서를 한 놈이 누구냐? 안 나오면 마을 전체가 작살날 줄 알아라"라고 사람들을 위협했고, 이에 주 군은 당당히 "이건 내 소행이니 다른 사람들을 해코지하지 마시오"라고 자백하고 잡혀 갔다.
그는 그때 겨우 10대 중반의 중학생 나이로, 유 관순보다도 어렸다. 일제 강점기 35년을 통틀어 아마 최연소 항일 인사였을 것이다.

일제는 "이 짓을 니 혼자 했을 리가 없다. 누구 지시를 받은 거야? 앙?" 하면서 애를 무자비하게 때리고 고문했다. 주 재년은 몇 달간 헌병대에서 고생하다가 집행유예를 받고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이미 초죽음 상태였던 관계로 석방 후 한 달 남짓 만에 순국하고 말았다.

그냥 단두대에서 목을 뎅겅 쳐 버린 것하고, 대놓고 사형 선고를 내린 건 아니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사람을 죽게 한 것. 각각이 다 나치스럽고 일제스러워 보인다.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니까 "너희들은 전쟁에서 필패한다"라고 치부를 대놓고 찌르고 퍼뜨리는 사람이 더욱 미워 보일 수밖에 없었겠다. 사실 저런 소문은 병사들의 사기와 심리 차원에서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3.
일로나 토드(Ilona T?th, 1932-1957)는 헝가리 혁명 때 희생된 의대생이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서도 한국어로 된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는 인물이다. 네이버의 검색 결과와 구글의 검색 결과가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단 영문으로 된 관련글을 하나 링크로 소개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일단 위의 글을 읽어 보면 그녀는 FM에 엄친딸 모범생 그 자체였다. 집이 가난했지만 늘 검소하고 얼굴에 웃음을 잃지 않았고, 공부와 운동에 모두 능통했고 기독교 신앙도 독실했댄다. 의대인지 간호대인지 어쨌든 의료 계열 학교에 무난히 진학했다.

그런데 1956년, 나라에서 공산당의 억압· 통치에 반발하여 소련을 몰아내려 한 민중 혁명이 일어났다. 그녀는 딱히 정치에 관심이 많은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올바른 명분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여 시위 중 부상자를 치료하고 돌봐 줬다. 그냥 돌본 게 아니라 자기 몸을 사리지 않고 돌봐 줬다. 밤낮으로 환자들을 간호하고 인근 국가로 위험한 무단 월경까지 하면서 음식과 의약품을 구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혁명군은 소련군의 무자비한 유혈 대응에 패배했으며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혁명군의 간부들이 체포되면서 혁명군에 가담했던 일로나도 체포되었는데, 그녀는 아까 숄 남매나 주 재년 같은 적극적인 저항 활동에 대한 혐의가 붙은 건 아니었다. 그 대신 그녀는 다른 동지를 구하기 위해서 경찰을 살해했다는 누명을 혼자 뒤집어쓰다시피 했다고 한다. 치료를 가장한 독극물 주입으로. 그것 때문에 공산당 인민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끝내는 20대의 나이로 교수형을 당했다.

그녀의 모친은 마지막 면회 때 멘붕하여 "이 와중에 도대체 신은 어디 있는 거냐!"라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여기 제 바로 옆에 계셔요"라고 너무나 차분한 자세로 대답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고 전해진다.

"Don't cry mother, I will die as a brave Hungarian soldier. You know that the charge is false, and they just want to besmirch the holy revolution." (해석은 생략하겠다.)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돈 크라이 마미>라는 좀 어설픈 범죄/복수극 영화가 만들어진 적이 있다. (복수극을 만들려면 최소한 테이큰의 반은 따라가는 퀄리티로 만들 것이지, 저건 죽도 밥도 아닌 퀄리티였다. 흥행 실패할 수밖에.)
하지만 일로나의 저 말이야말로 "돈 크라이 마미"의 모범 사례였다. 이 결론을 소개하고 싶어서 이 인물까지 같이 소개하게 됐다. 헝가리에는 당연히 이 사람의 동상도 있고 그녀를 길이길이 기리고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3 19:32 2016/03/03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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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이나 단체에 대해서 잘잘못과 선악 구도를 평가할 때 어지간해서는 병크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는 정황이 감안되고 "그 상황에서는 너를 포함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 얘도 사실 알고 보면 착한 놈이다 / 시대적인 한계였다" 같은 실드가 작용한다. 하지만 정말 도저히 실드가 안 쳐지고 절대적인 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나쁜놈들도 드물게 있다.

과거 20세기 중반까지는 양대 추축국이던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그리고 현재는 북한 정권과 IS가 이 정도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 공산주의가 들어섰다고 해서 다 북한처럼 된 건 아니었는데 왜 저 동네만 저렇게 최악에 최악의 막장으로 곪았을까? 김 일성은 처음에는 소련의 꼭둑각시로 시작했다가 어떤 정치 수완을 발휘하여 다른 정치 라이벌들을 몽땅 숙청하고 김씨 왕조를 이뤄 냈을까? 북한 정권의 수립 과정을 잘 숙지해야 종북 좌빨들이 벌이는 역사 왜곡 싸움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히틀러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처음에는 총통 같은 절대권력에 이를 수 있는 처지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야당들을 야금야금 몰아내고, 천부적인 웅변술로 대중들을 현혹시키고, 특히 국회 의사당 방화 사건을 빌미로 대중 공포심을 조장하여... 누구의 진술에 따르면 그야말로 합법적인 방법의 약점만 최대한 요리조리 파헤쳐서 결과적으로 비합법적인 꼼수만으로 권력을 쟁취하는 데 성공했다고 그런다.
북한과 나치에 비해 IS나 일제는 생성 과정이 상대적으로 덜 궁금한 편이다. 이 글에서는 나치 얘기를 주로 늘어놓도록 하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차 세계 대전 때의 전쟁 영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히틀러를 키워 준 꼴이 되어 오늘날 독일 국민들로부터 좋은 평은 못 받는 지도자로 전락했다. 나치는 권력을 잡은 뒤 국민들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야금야금 통제하고 학교와 유치원까지 작은 병영처럼 꾸며서 자라나는 애들을 히틀러의 홍위병 총알받이로 키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유대인 학살에 장애인 말살 등 끔찍한 반인륜 범죄를 저질렀다.

이런 짓의 원흉인 히틀러가 열성적인 동물 보호론자였다는 것은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동물 학대를 처벌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동물 학대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에 반하며, 그걸 저지르는 사람은 사람까지도 학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반대로 동물 보호론자와 인간 백정 성질을 모두 지닌 캐릭터는 저런 통념(?)으로는 존재 이유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 마치 음란물과 폭력적인 게임을 많이 접한 사람이 실제로 유사 범죄를 많이 저지르는지 상관 관계만큼이나 연구가 필요한 대목이라 여겨진다.

나치 당 + 히틀러의 재임 기간은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임 기간과 거의 동일하다(1933-1945, 약 12년). 미국 대통령은 전쟁을 다 끝내 놓고 좋은 세상이 오기 직전에 히틀러보다 불과 몇 달 일찍 병사했다.
히틀러의 휘하에서 독일이 미쳐 가는 와중에, 나치의 지배를 받는 외국 국민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독일 자국민들은 그저 총칼 위협에 굴복하여 침묵만 했을까?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히틀러가 하는 광기 어린 인간 숙청과 정복 활동에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동조만 했던 것일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일부 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백장미단'(White Rose)이라고 청년이 주축이 된 소규모 비정치 비폭력 저항 단체가 있었다.
백장미단은 백색 테러 같은 것과는 전혀 관계 없고 정말로 "펜은 칼보다 강하다" 스타일로 움직였다. 주된 활동 방식은 공공장소에서 몰래 '삐라'를 살포하는 것이었다. 히틀러를 비판하고 나치의 비인간적 만행을 폭로하고 "우리나라는 연합국을 상대로 전쟁을 결코 이길 수 없다. 나치는 얼마 못 가 패망한다. 정부의 선전선동에 속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라. 우리는 세계 인류 앞에, 역사 앞에서 죄인으로 기록되지 말자." 이런 메시지가 담긴 논리정연한 글을 배부했다.

이 단체의 핵심 인물은 겨우 20대 초중반 나이인 '한스 숄'과 '소피 숄'(1921-1943)이라는 이름의 남매였다. 독일어에서는 음절 초의 s는 z로 발음되기 때문에 여동생의 이름은 '조피'가 더 정확한 표기이지만, 국내에서는 영어 스타일의 '소피'라는 표기가 더 유명한 듯하다. 이들은 그 어려운 시절에 남매가 모두 뮌헨 대학교에 진학했을 정도로 똑똑했고, 한편으로는 집안도 남매의 대학 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시절에 대학생인 게 얼마나 큰 특권이냐 하면, 대학교 재학생은 국가적인 엘리트이기 때문에 군대 징집이 면제되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그 미친 군국주의 국가에서 그것도 전시에 얼마나 큰 혜택을 줬는지 상상이 되는가? 대학은 개나 소나 다 가는 필수가 됐고 군대 휴학이라는 게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지금의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저 남매도 어린 시절엔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히틀러 유겐트에 열심히 동참했으며, 히 총통에게 충성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크면서 남과 다른 견해를 허용하지 않는 몰개성 세뇌 교육에 회의와 환멸을 느끼게 됐으며, 자기 나라 정부가 저지르고 있는 침략 전쟁과 장애인과 유대인 학살까지 접하면서 저항하는 쪽으로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 1941년, 오빠가 먼저 백장미단 활동을 시작했고 그 뒤에 동생도 동참하고 일부 대학 교수 등 동지가 조금씩 더 붙었다.

글로써 싸운다는 건 같은 나라에서 수백 년 전에 있었던 마틴 루터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루터의 종교 개혁도 인쇄술의 대중화로 인한 성경과 여타 책, 유인물의 대량 보급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1940년대는 아직 컴퓨터 시대는 아니었지만, 그때는 루터에게는 없었던 타자기와 등사기가 있는 덕분에 글로 싸우는 것이 좀 더 수월했다. 단, 전쟁 중이라 물자가 부족해서 종이가 지금만치 싸고 풍부하게 있지는 않았다는 점은 감안할 점이다.

하긴, 우리나라에서도 방 정환의 경우 3· 1 운동 때에 <독립 신문>이라는 반일 성향의 소식지를 몰래 인쇄해서 배부했는데, 이게 발각되어 집이 형사들에게 몽땅 포위당했다. 그는 인쇄된 신문과 등사기를 몽땅 우물 속에다 던져 버리고 시치미 뚝 뗀 덕분에, 1주간 구금을 당하긴 했지만 혐의를 겨우 피했다. 오염된 우물의 뒷수습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겠지..;; 그에 비해 오늘날의 변기는 종이를 아주 잘게 쪼개서 버릴 수는 있지만 여전히 막히는 거 걱정을 해야 하며, 등사기까지 처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방 정환의 경우 등사기만 갖고 있었지 타자기는 그 시절에 존재하지 않았다. 원고를 그냥 손으로 써야 했으니 얼마나 불편할까? 그러니 동양 한자 문화권의 선각자들은 서양 사람들의 획기적인 문자 기계를 보고 좌절했으며, 자국 문자도 타자기로 만들 수 있는 형태로 과감하게 개조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으리라 여겨진다.

흠, 갑자기 주제를 벗어난 이야기가 좀 길어졌다만..
백장미단의 활동은 불행히도 오래 가지 못했다. 몇 차례 불온삐라가 발견되자 정부 역시 통제와 단속을 강화했다. 운명의 그 날, 그들은 낮에 과감하게 뮌헨 대학교 강의동에 들어가서 유인물을 몰래 뿌리고 오기로 했는데.. 한번 뿌리고 나왔다가, 아직 유인물이 더 남아 있는 걸 보고 또 건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수상한 행적이 나치 끄나풀이던 건물 경비에게 눈에 띄고.. 이들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때가 1943년 2월 18일이었다.

남매는 서로 격리된 채로 "넌 정체가 뭐냐? 이 유인물 어디서 났냐? 누가 작성했냐? 누가 이 일을 시켰냐? 배후에 또 누가 있냐? 뭐, 우리가 전쟁에서 진다고라? 등등등등~~" 게슈타포로부터 끝없는 심문을 받았으며 결국은 혐의가 인정되어 구속됐다. 그리고 단심으로 진행된 형식적인 인민 재판에서 무려 내란· 반역· 이적행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고 전원 사형이 선고됐다.

이 재판은 북한의 인민 재판과 별 다를 바 없는 쇼에 지나지 않았다. 답은, 아니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백장미단을 재판한 사람은 '롤란트 프라이슬러'라는 악질 판사였는데... "대학까지 간 애들은 국가에서 특별히 배려해서 군대에도 안 보내고 공부를 더 시켜 줬더니만 이노무 자슥들이 은혜를 모르고 이딴 짓거리나 해? 대가리에 똥만 가득한 새퀴들 같으니!" 식으로 판사가 검사보다도 더 피고를 더 몰아세우면서 고래고래 욕설까지 퍼부었다.

그는 사법 권한을 이용하여 흉악범이나 간첩뿐만 아니라 반나치 인사들도 대거 사형으로 숙청했기 때문에 엄연한 나치 전범이다. 전후에는 판사복이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 피고인으로 법정에 다시 섰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나치가 패망하기 얼마 전, 길 잃은 포탄의 포격을 받고 죽어 버리는 바람에 험한 꼴을 용케 피해 갔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숄 남매와 유인물 가담자에게는 사형이 집행되었다. 체포에서 사형 집행까지 걸린 시간은 겨우 나흘(2월 22일!)에 불과했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은 총살도, 교수형도 아니고 무려 단두대 참수였다. 자기 정책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뿌렸다는 이유로 여자까지 낀 20대 대학생을 반역죄로 몰아 목을 베어서 죽인 것이다. 그것도 1940년대에, 피지배 식민지 주민도 아니고 자국민을 상대로..;; 나치가 얼마나 잔혹한 집단인지를 알 수 있다. 단두대는 프랑스 대혁명 때에만 쓰인 물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일행 중에서는 여자인 소피가 가장 먼저 집행되었다. 이거 집행 순서도 은근히 중요하다. 남이 죽는 걸 다 보고서야 제일 나중에 집행되는 게 사형수의 입장에서는 제일 무섭고 끔찍하니까. 사형과 정반대인 시상식에서도 1등상을 제일 나중에 주는 것처럼 말이다.
참고로 나치는 악질적인 죄인을 단두대로 처형할 때는 죄수를 엎드리게 한 게 아니라, 눕혀서 칼날이 떨어지는 걸 보게 하기도 했다. (그래 봤자 눈을 감으면 안 볼 수 있겠지..) 조선 시대에 정 약용의 형 정 약종도 천주교를 믿다 순교할 때, 하늘을 보면서 죽겠다고 하면서 비슷한 자세를 자처하며 참수를 당했다고 하지만 그것과는 분위기가 영 딴판이다.

숄 남매를 비롯해 백장미단은 꽃을 제대로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혀지지 않았다. 나치가 패망한 뒤 그들은 독일 내부에서 추모와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의 고향에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각종 길거리의 명칭에 그들의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의 일대기는 책과 영화로도 응당 나왔다. 영화로는 <백장미>(1982)와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2006). 전자는 활동 중심이고 후자는 활동보다는 체포 후의 길고 지린 심문과 재판 과정을 더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 당시에 단두대를 가동한 사형 집행관들은 흔한 제복이나 작업복이 아니라, 무슨 마술사처럼 검은 연미복에 실크햇, 나비넥타이 정장 차림이었던 게 인상적이다. 나름 자신들의 직업 의식을 표현하고 사형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려는 의도였다고 한다. 영화에도 잘 묘사돼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은 나치 시절까지 단두대 처형(백장단 단원까지 포함해)을 전문으로 맡았던 실존 인물인 '요한 라이히하르트(1893-1972)'의 근무 복장이다. 영화가 정말로 사실 고증을 반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사람이야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사형 집행을 한 죄밖에 없으니 딱히 전범으로 처벌받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연합국 측에 재고용되어서 사형 선고를 받은 다른 나치 전범들을 교수대에 매다는-_-;;; 일에도 동원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마치 실전 참전 용사들이 전쟁 영화를 싫어하듯, 사형 집행관들은 사람을 죽이는 게 직업이다 보니 그쪽 방면으로 극도의 트라우마와 거부 반응이 있다. 옛날에 성 바돌로매 대학살(1572) 때도 다른 시민들은 광기에 휩쓸려서 크리스천들을 마구 죽였지만, 이때 오히려 사형 집행관 망나니들은 그 일에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형 집행 이야기는 됐고... 백장미단의 일대기를 다룬 책은 유족들에 의해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1978년에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이거 한때는 운동권에서의 필독서이기도 했다.

아시다시피 본인은 국내 정치에 한해서는 종북 좌경화 역사 날조라는 변수 때문에 소위 말하는 '보수 우파' 성향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수만 없으면 난 얼마든지 성장과 분배, 진보와 보수의 장단점을 골고루 인정하고 중도를 갈 의향이 있다.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 자체를 좌파 빨갱이 식으로 몰아갈 생각은 물론 전혀 없다. 북한에 대해서도 정치적으로 접근하는 관점과, 비정치 학술적으로 접근하는 관점 정도는 서로 구분할 줄 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과거 군사 독재 정권이 무슨 북한 정권이나 나치와 똑같다는 식의 매도에도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 그들은 정부 비판이나 북한 관련 병크만 빼면 나머지 국민의 자유는 별로 침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거나 인종 학살을 저지른 건 더욱 아니고. 차라리 '진보 좌파'들이 반정부 투쟁을 안 벌이고 염전 노예라든가 형제 복지원처럼 그 당시 사회의 구석에서 벌어지는 비정치 분야의 인권 유린 같은 것만 폭로하고 비판했으면 그런 건 본인도 얼마든지 인정하고 공감했을 것이다.

글이 길어지니 백장미단 인물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만한 인물들 열전은 다음 시간에 소개하도록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3/01 08:35 2016/03/01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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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셋 한글 입력기 8.4

<날개셋> 한글 입력기 8.2가 나온 지 거의 4개월 만에 또 새 버전인 8.4가 나왔다.
이번 버전도 짬밥이 어디로 간 게 아니라 정말 많은 부분이 개선되고 중요한 기능들이 많이 추가되었으므로 많이 사용하시기 바란다.

API 구조의 변경으로 인해 타자연습도 3.45로 살짝 업데이트가 됐다.

1. 사용자 정의 후보 문자열에 @ 탈출문자 추가

지난 7.0 버전에서는 사용자 정의 후보 기능이 추가되었다. 덕분에 고급 입력기의 사용자 정의 조합이 아니라 일반적인 한글을 입력하고 있을 때도 한자 키를 눌렀을 때 나타나는 변환 문자들을 사용자가 임의로 정할 수 있게 되었으며, 원래 있던 한자 변환 기능과도 병용이 가능해졌다.

한자 후보에 대해서 한자의 훈과 음이 나오듯이 사용자 후보에 대해서도 사용자가 설명문을 기재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문자에 대해서 들어갈 만한 설명 정보라는 게 뻔할 뻔 자인 경우가 많은 관계로, 이번 버전에서는 그 절차를 간편하게 해 주는 탈출문자를 추가했다. 후보 문자열이 딱 한 글자로만 구성되어 있다면 탈출문자를 사용할 수 있다. 기본 입력기의 사용자 정의 후보와 고급 입력기의 사용자 정의 후보에서 모두 동일하게 쓸 수 있다.

탈출문자는 @로 시작한다. @N은 이 문자의 유니코드 번호이다. 그리고 문자가 BMP 영역에 있는 경우, 문자의 유니코드 명칭을 나타내는 @C를 사용할 수 있다. 이건 내 프로그램이 아니라 운영체제로부터 얻어 오는 명칭이다.
다음으로 @H는 이 문자가 BMP 영역의 한자인 경우 훈과 음이다. @ 자체를 표현하려면 @@이라고 쓰면 된다.

사용자 정의 후보의 설명문과 관련하여 뭔가 2% 부족한 게 있다고 지금까지 생각해 왔는데 그걸 탈출문자를 통해서 해결하게 됐다.
그러면 이제 여러 후보들에 대해서 설명문을 획일적으로 [@N] @C/@H 이런 식으로 지정할 필요도 생기는데, 이것도 대화상자 UI 차원에서 가능해졌다. 후보 목록에서 1개 이상의 후보 문자열들을 선택한 후, 위의 ‘후보 문자열 입력란’은 비우고 설명문만 입력한 뒤 ‘추가’를 누르면 선택된 후보들의 설명문이 모두 동일하게 바뀐다.

2. Alt+=를 끄는 보정 기능 추가

지난 8.2에서는 시스템 계층에 ‘키보드 드라이버의 동작 보정’ 기능이 추가되어서 type 1 키보드에서도 오른쪽 Ctrl/Alt를 인식할 수 있으며 반대로 type 3에서도 Shift+Space와 한영을 구분해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번 버전에서는 그에 덧붙여 Alt+=도 전/반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기능이 추가되었다.

전통적으로 Windows의 한국어 키보드 드라이버는 Alt+=를 전/반각 전환 글쇠로 인식해 왔다. 하지만 오늘날은 이건 거의 안 쓰다시피 하는 잉여 기능이며, 오히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저걸 누른 뒤에 알파벳과 숫자가 엉뚱하게 입력되어서 사용자를 놀라게 하는 경우가 많다.
이 보정 기능을 켜면 <날개셋> 외부 모듈에서 Alt+=가 눌려도 전/반각 전환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으며, 편집기 같은 다른 구현체에서는 거기에다 아예 다른 기능을 배당할 수도 있게 된다.

단, 보정 기능은 언제나 택일 형태이기 때문에 이 기능을 기존 type 1/3 한영 관련 보정과 같이 사용할 수는 없다.

3. 다단계 입력 분리

두벌식 글자판에서 음절 경계에 도달했을 때 앞글자 종성과 뒷글자 초성을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다.
보통은 자음은 종성에 최대한 붙을 수 있는 데까지 결합시켰다가 안 되면 다음 글자로 넘어가고, 모음은 직전에 입력되었던 종성 한 타만 다음 글자의 초성으로 이동하는 '도깨비불 현상'을 일으킨다. 그것보다 더 세밀한 제어가 필요하다면 크게 다음과 같은 방법들을 사용하면 된다.

  • 특수 도깨비불(3.9에서): 중성이 입력되어 도깨비불 현상이 일어날 때, 종성 입력 순서와 무관하게 아무 종성과 초성으로 쪼개지게 한다. 한글 로마자 입력기에서 ch, l, x 같은 건 이걸로 구현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
  • 초· 종성 공유 낱자 결합(6.0에서): 종성을 2개의 초성을 합성하여 입력하는 구도로 만들어 준다. 낱자 결합 규칙을 훨씬 더 간단하게 만들어도 후속 처리를 프로그램이 알아서 해 주며, 도깨비불도 오른쪽 초성 덩어리 단위로 떼어서(치는 데 몇 타가 들었든) 해 주니 매우 편리하다. 휴대전화 입력 방식은 이걸로 구현하면 된다.
  • 조합 종료 타이머(6.0에서): 특정 오토마타 상태에서 일정 시간 이상 동안 타자를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조합이 끊긴다. 천지인 같은 입력 방식에서 '국가/구카' 구분을 위해 사용하면 된다.

그 뒤 이번 버전에서는 "다단계 입력 분리"라는 제4의 메커니즘이 추가되었다.
이것은 도깨비불과는 달리, 초중종 등 동일한 성분의 낱자가 계속 N-1단계까지 입력되었는데.. 제 N째 낱자가 기존 낱자와 결합이 불가능할 때, N만 다음 글자로 빼는 게 아니라 M<N을 만족하는 임의의 M~N단계의 낱자 결합을 몽땅 다음 글자로 옮기고 앞글자는 1~M-1단계까지만 남기는 역할을 한다.
쉽게 말해 ㄺ 다음에 ㅅ을 입력했는데 ㅩ으로 갈 수는 없을 때, ㄺ+ㅅ으로 있는 그대로 분리되는 게 아니라 느닷없이 ㄹ+ㄳ으로 가게도 해 준다.

도깨비불은 두벌식 종성이 입력된 상태에서 두벌식 "중성"이 입력되었고 이로써 오토마타가 0으로 바뀌었을 때 발생한다. 하지만 저건 초중종 같은 성분의 낱자가 입력됨으로써 낱자 결합이 65531이라는 낱자로 도달했을 때 발생한다. 조합 중인 낱자를 0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는 65530에 이어 또 다른 특수 낱자가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세벌식이나 '종성 두벌식'이 아니라 일반 두벌식 형태의 종성이 분리되었을 때는 다음 글자는 종성이 아니라 초성으로 바뀐다. 그렇기 때문에 다단계 입력 분리로 할 수 있는 일의 일부가 바로 도깨비불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형태의 '두벌식 음절 경계 구분'이 된 것이다. 개념적으로 종성과 다음 글자 초성을 동시에 결합시키는 날개셋문자와도 좀 비슷하나, 형태가 간편한 대신에 자유도가 그것만치 높지는 않다.

현대 한글에서 초성 ㅃㄸㅉ, 옛한글에도 정치음· 치두음 같은 건 초성에만 존재한다. 이걸 초성과 종성에 공통으로 존재하는 낱자의 결합으로 입력할 수 있는데 두벌식으로 종성을 결합하는 도중에 인위적인 음절 구분(조합 종료) 없이 자동으로 초성으로 넘어가는 형태로 입력하고 싶다면 딱 이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예전 같았으면 '한글 출력 치환'을 이용해서, 여전히 조합이 끊어지지 않은 종성 상태이지만 겉보기로는 정치· 치두음 초성이라고 글자를 임시로 표시해야 했다. 그 뒤 모음이 입력됐을 때 특수 도깨비불 현상 같은 걸로 정치· 치두음 부분을 떼어냈겠지만 지금은 좀 더 직관적인 방법도 생겼다. 자세한 설명은 프로그램의 도움말에 나와 있다. 연속 입력 가능성 판별 기능도 다단계 입력 분리까지 감안해서 동작하도록 알고리즘이 수정되었다.

요건 원래 개발 계획에는 없던 아이디어였는데 꽤나 무겁고 중요한 기능이 되어 버렸다. 이런 기능이 지금까지 없었다. 예정에 없던 기능 때문에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그냥 훅 가 버렸지만..ㅠㅠ 투자한 시간이 아깝지는 않다.

4. 허용 한글 범위 관련 처리

아무 한글이나 조합이 되지는 않게 하는 '허용 한글 제약'과 관련하여 여러 기능들이 추가· 강화됐다.
먼저, '다단계 입력 분리'가 이 기능과도 연계된다. 가령, '쌰'를 조합할 수 없는 'KS X 1001 완성형 제약'을 사용하고 있는데 ㅑ를 ㅏ+가획으로 입력해서 '쌰'를 만들려고 시도했다면.. '가획'만 넘어가는 게 아니라 "ㅏ+가획"이 한꺼번에 다음 글자로 넘어가게 할 수 있다. 이전까지는 그게 가능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상황에서 그냥 '싸'와 함께 조합이 중단돼 버리곤 했다.

65031 낱자 결합을 통해 일어나는 다단계 입력 분리와는 달리 저 분리는 별도의 옵션이 지정되어 있을 때만 수행된다. 그리고 앞의 분리는 A+B+C+D와 C+D가 모두 가능하다면 A부터 시작해서 최대한 많은 타수를 분리하는 반면, '허용 한글 제약' 관련 분리는 C+D처럼 최대한 적은 타수를 분리한다. 분리의 성격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단순히 낱자 결합 규칙이 더 존재하지 않아서 결합 불가일 때랑, 허용 한글 범위 제약에 걸려서 결합 불가일 때를 구분 인식이 가능해진 것은 예전 글에서 이미 언급했으므로 참고하시고..

끝으로, <날개셋> 한글 입력기가 제공하는 "문자열을 글자판 입력으로" 필터는 '허용 한글 범위 제약' 기능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동작한다. 즉, '똠'이라는 문자를 조합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똠'을 입력하는 순서를 구해 준다.
그 동작을 약간 변경하여, 이걸 부분적으로 감안하여 동작하게 로직을 바꿨다. 이제는 KS X 1001 제약이 적용된 상태에서는 '똠'은 입력할 수 없는 글자로 간주하여 입력 순서를 찾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능은 중간 과정에서 생성되는 모든 글자들을 일일이 체크하지는 않는다. 즉, '썅'은 중간의 '쌰'를 입력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물이 입력 가능하기 때문에 입력 순서를 찾아 준다.

5. Backspace 3과 4 지원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한글 입력 과정에서 사용되는 Backspace와 후보(≒ 한자) 변환이라는 명령을 내부적으로 특수글쇠의 일종으로 취급한다. 그런데 그게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각각 4종류씩 있다.

먼저 후보 변환의 경우, 지난 7.0 버전에서 4개의 용례가 완전히 정착했다. 1은 고정적으로 제공되는 한자 및 특수문자 변환이며 2와 3은 각각 입력기 계층에서 제공되는 내장 및 외장형 후보 변환이다. 4번은 편집기 계층에서 제공되는 공통 후보 변환이며 형태는 내장과 외장 어느 것이든 될 수 있다.
후보 변환 데이터의 성격에 따라(공통인가, 아니면 특정 입력 방식에 종속인가?) 원하는 변환 방식을 고를 수 있다. 그리고 어떤 단계에서 후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이전 단계로(1) 갈 것인지 다음 단계로(4) 갈 것인지 포워딩 방식도 지정할 수 있게 했다. 이런 식으로 후보 변환과 관련해서 생각할 수 있는 customization 방식을 모두 구현했다.

이번 버전에서는 후보 변환에 이어 Backspace에 대해서도 손을 봤다. 예전부터 Bksp 1은 통상적인 bksp 글쇠에 대응하고 Bksp 2는 Shift+bksp에 대응한다는 관행이 정착해 있었지만, 3과 4는 영역이 배당만 됐고 실제로 쓰이지 않았다.
이제는 Bksp 동작 방식에서 '자세히'를 누르면 1, 2뿐만 아니라 3, 4도 다 제각기 동작 옵션들을 지정할 수 있다. 그리고 아무 글쇠에나 Bksp 3/4를 뜻하는 C0|0x8A 또는 0x8B를 배당하면 그 옵션대로 Bksp가 동작한다.

원래 Backspace는 한글 입력기(IME 프로그램)와 응용 프로그램이 공용하는 글쇠이다. 한글을 조합하는 중일 때는 IME가 Bksp를 가로채지만, 조합 중이지 않고 앞 글자에 딱히 달라붙거나 할 필요도 없을 때에는 IME가 Bksp를 가로채지 않고 그냥 응용 프로그램으로 넘겨 준다. 그렇기 때문에 A나 1 같은 문자 글쇠에다가 Backspace 1 같은 걸 배당하면 평소에는 글자가 지워지는 게 아니라 A나 1이 입력되어 버린다. 앞 글자를 지우고 싶으면 이런 고수준의 Backspace n 특수글쇠를 배당하는 게 아니라, Backspace가 수행하는 저수준 동작인 '한 타 지우기, 마지막 단계의 낱자 전체 지우기, 입력 순서와 관계 없이 마지막 단계의 낱자 한 단계 지우기'를 배당하는 게 보통이다.

Backspace 3과 4는 저런 오동작이 없다. 언제나 글쇠를 가로채며, 구현체의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앞 글자를 건드릴 수 없을 때는 그냥 아무 동작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한다. 입력기 차원에서 조합 바깥의 앞 글자를 직접 지울 수 없는 환경에서는 T ? C0|0x8A: KY|8 이렇게.. 한글을 조합하고 있을 때만 bksp 3, 아니면 수동으로 bksp 생성(응용 프로그램이 글자를 직접 지우게) 이렇게 bksp 기능을 혼용해도 된다. 이런 방식으로 bksp가 아닌 자리에 bksp의 기능을 독자적인 동작 옵션으로 온전히 이식이 가능하다.

6. 글쇠배열 편집 UI에 시각 피드백 추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잘 알다시피 기본 입력 스키마에 글쇠배열을 편집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데 상위 옵션의 영향으로 인해, 여기서 글쇠배열을 아무리 고쳐도 그게 실제 입력 때 반영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 첫째, '빈 입력 스키마와 호환되게' 옵션이 켜져 있고 현재 편집기가 아닌 외부 모듈/입력 패드 구현체를 사용 중일 때. 이때는 해당 입력 항목은 의도적으로 모든 글쇠를 처리하지 않고 넘기는 '빈 입력 스키마'와 동일하게 동작하므로 자신의 모든 입력 설정들이 무효가 된다.
  • 글쇠 인식 옵션에서 기존 글쇠배열의 문자· 숫자· 기호 47개 자리의 일부를 지정하여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을 때. 여기에는 가로채지 '않게' 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제는 이런 상황에 속하는 글쇠들은 회색으로 흐리게 표시되며, 전부 또는 일부 글쇠가 이런 이유 때문에 동작하지 않는다는 설명문까지 잠시 표시된다. 그러므로 글쇠배열을 고쳤는데도 그게 동작하지 않고 왜 그런지 사용자가 이유를 알지 못하는 상황을 예방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빈 입력 스키마와 호환되게'의 영향을 받는 구현체에서 해당 옵션을 켜면 추가 글쇠 인식 옵션이라든가, 고급 입력기의 고급 글쇠 인식 옵션도 다 흐리게 표시되어서 값 편집 불가 상태가 되게 했다. 어차피 이런 기능들이 동작하지 않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이번 버전에서는 이런 UI도 추가했다.

7. 그 밖에 사소한 개선과 버그 수정

(1) 편집기에는 한 글자만을 찾는데 찾는 조건을 수식을 이용해서 세밀하게 지정하는 '문자 영역 찾기'라는 기능이 있다.
거기에다가 앞글자 P와 뒷글자 N이라는 변수도 추가해서 사실상 최대 3글자까지 연달아 찾을 수 있게 했다. 마침표가 이어지지 않는 '다'를 찾는다거나, 한글 다음에 이어지는 한자를 찾는 식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문단의 앞에서는 P는 0, 문장의 끝에서는 N은 0이 된다.
또한 내정값으로도 한글 낱자 중에 유니코드 5.2 새 낱자만 찾는 수식도 추가했다.

(2) "한글 낱자 정규화" 텍스트 필터에 꽤 황당한 버그가 있는 것을 발견하여 고쳤다.
NFC 정규화를 시켜서 현대 한글이 옛한글처럼 자모 형태로 풀어져 있는 것을 바로잡고 나면, 그 뒤에 등장하는 옛한글들은 이상한 쓰레기 문자로 바뀌곤 했다.
한글의 정규화 방식이 바뀐 지난 8.0 버전에서부터 존재한 버그였다. 내가 스스로 찾아 낸 건 아니고 사용자의 제보를 통해 확인했다.

(3)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영문 UI에서 '한글'을 표기할 때 과거에는 Hangeul을 쓰다가 나중에 Hangul로 바꿨다. 당장 유니코드의 영역 이름에도 Hangul이 쓰이고 외국에서는 eu보다 u가 훨씬 더 널리 퍼져 있다고 판단되어서다.
그런데 프로그램 UI 중 특별히 콤보 박스 안의 항목이라든가, xml에 들어가는 내정값 같은 데에서 여전히 eu 표기가 남아 있는 것을 뒤늦게 자체적으로 확인하여 고쳤다.

(4) <날개셋> 제어판의 낱자 결합 탭에서 '낱자 결합 규칙'을 등록하는 UI에서..
'추가'를 그냥 클릭하면 지금까지 그런 것처럼 새 항목이 추가되고 입력 포커스는 A+B=C 중에 A의 위치로 간다.
하지만 Ctrl+클릭을 하면 A와 C의 값이 서로 뒤바뀌고 포커스는 A가 아닌 C에 가게(교환으로 인해 A의 값을 갖게 된) 했다.
그래서 A+B=C에 이어서 역으로 돌아오는 C+B=A라든가, C+B=D처럼 연타에 의한 후속 조합을 지금보다 더 수월하게 등록할 수 있게 했다.

(5) 끝으로 낱자 결합 규칙, 각종 사용자 정의 조합/후보 목록 등, <날개셋> 제어판에서 Windows 폰트가 아니라 자체 비트맵 글꼴로 출력되는 모든 UI들은..
뭔가 아이템을 추가/삭제하거나 순서를 조정하고 나면 지금까지는 스크롤 위치가 엉뚱하게 바뀌고 선택 막대도 화면 맨 아래에 어설프게 걸친 위치로 바뀌곤 했다. 이것 때문에 지금까지 무척 불편했는데 이걸 드디어 원천적으로 개선했다. 스크롤이 필요 없으면 스크롤이 발생하지 않으며, 선택 막대도 언제나 화면 안에 온전히 출력되게 했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27 08:30 2016/02/27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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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에 대한 논의 외

* 예전에 이미 했던 말도 있겠지만 중요한 사항이니 다시 정리하겠다.

1. 언어의 기원

기원을 알기가 제일 난감한 분야이다. 화석이고 뭐고 물리적인 형태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문자 기록으로는 음운 계층에서의 통시적인 변화만을 추적할 수 있을 뿐, 그 문자의 저변이 되는 그 시절의 실제 음성 기록을 100% 정확하게 재현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 시절에 녹음기가 존재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다못해 중세 국어에서 옛한글 자모의 음가조차도 여러 학자들의 추정만이 존재할 뿐 실제 발음이 딱 부러지게 어떠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음운뿐만이 아니라 형태· 어휘· 문법 쪽으로 간다 해도, 동물적인 꽥꽥 끼릭끼릭 의성 의태어로부터 추상적인 개념에다 복잡하고 재귀적인(안은 문장, 이어진 문장) 문법이 저절로 등장한다는 건 아무리 긴 시간이 흐른다 해도 실현 불가능이다. 그건 아메바로부터 원숭이를 거쳐서 사람이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만큼이나 불가능이다.

고대까지는 몰라도 중세급의 과거 언어는 현대의 언어보다 더 음운이 다양하고 복잡하면 복잡했지, 오늘날보다 더 단순한 구조는 아니었다는 게 통론이다. 한국어만 해도 과거에는 '여덟'에서 ㅂ이 실제로 발음되었고 받침 ㅎ도 발음되었고 자음이 두 개, 세 개씩 있는 등 지금보다 스케일이 더 컸으리라 여겨지고 있다. 언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저것 탈락하고 생략되고 중화되고 제약이 생기는 쪽으로 변하는데 그럼 처음에 그 복잡한 시스템은 언제 어떻게 갖춰질 수 있었겠는가? 통상적인 진화론과는 정반대 경향이 아닐 수 없다.

언어야말로 걍 GG 치고 신수설을 주장한대도 증명도 반증도 할 수 없는 가장 난감한 분야이다. 그냥 신앙· 신념의 영역일 뿐이다. 언어에서 기원은 언어학계에서도 불가지론으로 간주되며 더 구체적인 논의 대상이 아니다. 과학적인 방법론을 동원해서 연구할 거리 자체가 없다.

2. 생명의 기원

생명은 무생물로부터 저절로 생겨나지 않으며, 스스로 유전자 차원에서 더 고등한 종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이건 일단 인정하고 들어가자.
유기물· 단백질처럼 생명을 담는 껍데기 그릇을 일부 겨우 합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해서 거기에 생명이 생기는 것 역시 아니다. 다른 무생물 기계는 부품들의 상호 연결이 끊어지면 곧바로 작동이 멈춰 버리는 반면, 생명은 세포 단위로 쪼개도 각각의 단위들이 다 생명이 있어서 스스로 살려고 발버둥치고 노력한다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생물과 무생물의 차이 중 이런 고증을 반영한 것이 스타크래프트에서 저그와 테란의 대미지 컨트롤 능력이 아닌가 한다. 저그는 건물과 유닛 공히 체력이 1만 남아도 아주 천천히라도 자동 회복되는 반면, 테란은 그런 게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람 서플라이가 없는 건물은 체력을 2/3 이상 잃은 뒤부터는 스스로 파괴돼 버리기까지 한다.

이걸 인간이 도대체 어떻게 만들어 내겠는가? 지구 안에서는 빛도 산소도 없고 도저히 생명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척박한 수천 m 아래 초고압 해저에도 심해어가 존재하지만, 반대로 지구 밖의 광활한 우주에는 생명이란 게 일단은 전혀 없다는 것 역시 진지하게 생각할 점이다. 이건 뭔가 인위적인 현상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럽다.

다음으로 연대기 문제로 넘어가면,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은 할아버지에 할아버지를 거듭해서 거슬러 올라가면 6천여 년 전의 6일 창조에서 딱 끝난다고 일단 본인은 믿는다. 세속 역사에서도 인간의 문명이라는 건 천 자리 범위를 넘어서는 연도의 과거로는 절대로 가지 않는다.

단, 그 전의 엄청 옛날, 이전 세상에서도 생명체가 있긴 했다. 그러다 이전 세상이 멸망한 뒤 대부분의 품종은 원래 있던 종류대로 다시 창조되긴 했는데(after his kind), 다만 고래나 인간 같은 일부 종은 예전에 없었다가 6천 여 년 전에 새로 등장하기도 했다. 성경이 말하는 이전 세상의 멸망은 지질 시대에서 다루는 '대멸종'과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3. 지구의 기원

방사성 원소· 탄소 원소 측정법 등 다양하게 교차 검증되는 방법을 통해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 정도 되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인간이 달에 실제로 간 적이 없다고 믿는 아폴로 계획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 미션이 오로지 아폴로 11호밖에 없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자들은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 방법이 오로지 한두 가지 방법밖에 없는 것처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루는 우라늄 동위원소의 반감기를 이용해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는데 이상하게 실험 진행이 잘 안 돼서 원인을 찾다 보니, 공기 중에 납의 농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는 것을 알게 됐으며, 이게 자동차의 배기가스 때문이라는 것까지도 알아냈다. 이런 과정에서 20세기 후반에 무연휘발유가 발명될 수 있었다. 납은 인체에 몹시 해로운 중금속이기 때문이다. 연대 측정법이라는 게 저런 사소한 변인까지도 찾아낼 정도로 정밀하니, 창조 과학회의 주장만치 그렇게 호락호락 허술한 체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류 이전에도 죽음 자체는 지구상에 존재했다. 이전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했지만, 그 시절의 흔적은 화석이나 지층에 남아 있다고 본인은 믿는다. 노아의 홍수보다 훨씬 더 거대한 스케일로 말이다.

4. 우주의 기원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우주의 기원은 화석이나 지층 같은 '흔적'만으로 추론을 하는 게 아니다. 이 바닥은 수십억 년 전에 출발하여 수십억 광년 거리를 달려서 우리 눈에 도달하여 2차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내는 빛을 망원경으로 직접 관측하면서 현상을 해석한다! 방법론이 다른 기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래서 "관측 가능한 우주"라는 개념이 있으며 대폭발설 내지 130억 년~200억 년 같은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전산학에서 계산 가능한 문제, 과학에서 재연 가능한 현상, 철학에서 반증 가능한 명제처럼..)

이 연구 방법론이 근본적으로 부정되려면 (1) 예전에는 우주의 본질 자체가 지금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빛의 속도 자체가 지금과는 넘사벽급으로 달라질 수가 있어야 하거나, (2) 아니면 저 옛날 별빛의 모습이 실제 별빛이 아닌 페이크 가짜여야 한다. 허나 (1)은 과학적으로 가능성이 없으며, 과거라 해도 광속의 변화는 무시할 수 있는 아주 미미한 수준일 뿐이다.
그리고 (2)는 과연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연 계시를 설마 그렇게까지 속임수를 동원해서 남기셨을까 하는 신학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리 아담도 성년으로 창조됐고 닭과 달걀 중에 닭이 먼저라 해도, 저건 성년 창조설이라는 명목으로 실드 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고 여겨진다.

덧붙이는 말

0.
기원과 관련된 기독교계와 세속 과학계의 논쟁은 가장 먼저 잘 알다시피 "2. 생명의 기원"에서 시작되었다. 언어의 기원은 양쪽 모두 근거가 부족하다 보니 별로 이슈가 되지도 않는 것 같고(걍 서로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말자), 생명에 비해서는 지구나 우주의 기원은 비록 서로 전혀 무관한 건 아니지만 일단 부가적인 문제이다.
각각의 기원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건, 일단 언어, 생명, 지구, 우주의 기원은 문제를 보는 관점이 다르고 연구하는 방법론이 서로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을 인지해야 할 듯하다.

창조 과학회는 진화론만 반박하다가 "젊은 우주"를 주장하면서 생명 영역뿐만 아니라 지구와 우주 영역에까지 주변에 온통 적을 만들었다. 자기 학설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이비 유사과학 취급을 받는 게 온통 진리를 일부러 거부하는 부패한 무신론자 학계의 음모 때문이라는데... 진실은? 과연 글쎄다.

이들은 6천 년 전 문자적인 24시간 6일을 사수한 것은 잘한 것이지만 성경과 과학에서 모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병크로 인해서 오류를 저지른 것도 적지 않다. 결국은 이전 세상과 현 세상을 구분하고 6천 년 전 문자적인 6일 창조도 인정하되, 창 1:1-2 사이에 간극을 설정하는 것이 성경 교리도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사수하고(특히 물과 어둠, 사탄 마귀의 기원) 세속 과학의 관찰과도 조화를 이루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젊은 생물(현 세상의), 오래 된 지구"인 것이다. 내가 보기엔 그것 말고는 답이 없다.

1.
성인 형태로 어제 갓 창조된 따끈한(?) 아담을 생각해 보자. 그는 덩치와 지능, 떡대만이 30대 청년이지 피부 표면은 가히 갓난아기처럼 뽀송뽀송하고 노화의 징조는 통상적인 30대 성인 수준으로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활성 산소나 각종 해로운 찌꺼기 같은 것도 전혀 없었을 것이고 심지어 응가를 해도 우리와 같은 끔찍한 악취 없이 태변과 비슷한 분비물이 나왔을 것이다. (동안· 꽃미남· 미소년 이런 것과는 별개의 얘기임!) 그러니 생물학적 나이라는 것도 무슨 관점에서의 나이인지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그는 30대 성년의 형태로 갓 창조됐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겪지도 않은 유년기, 10· 20대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거짓으로 주입해 넣으셨을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주요 성품 중 하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딛 1:2).

비록 기술적으로야 가능은 하겠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에 위배되는 일을 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저 "오래 된 것처럼 보이게 창조를 하셨겠지"라고 기원에 대해 넘겨짚기 전에 이런 면모도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공장에서 갓 생산된 따끈한 새 자동차에 적산거리계만 한 10만~20만 km로 조작해 놨다고 해서 그 차가 진짜 오래 된 차인 것처럼 보일까?

2.
만화영화 라이온 킹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거기에 나름 우주를 논하는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심바· 품바· 티몬 일행이 거하게 저녁 식사를 한 뒤 풀밭에 누워서 밤하늘을 보고 있는데, 품바가 티몬에게 "야, 넌 저 밤하늘에 빛나는 점(별)들이 정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냐?" 라고 묻는다.
티몬은 자기는 답을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궁금하지 않다고 의기양양하면서, 저것들은 시꺼먼 표면에 달라붙은 반딧불이라고 얘기한다. 휴.. 시골에서 반딧불이를 직접 본 사람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품바는 "아 그래? 난 저것들은 수십억 마일 이상 떨어진 곳에 있는 가스 불덩어리인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이렇게 얘기함.
품바의 말이 정답임에도 불구하고 티몬은 "ㄲㄲㄲ 넌 그냥 모든 게 가스인 것처럼 보이지?" 이렇게 면박을 준다. 이전의 하쿠나 마타타 씬을 보면 품바는 배 속에 가스가 가득찬 지독한 방귀쟁이여서 어린 시절부터 왕따를 당했다고 나오니까..;;

이 대화에서 심바는 어린 시절에 부친에게서 언뜻 들은 종교 주술적인 대답을 했는데(돌아가신 선왕들이 별이 돼서 우리를 지켜본다) 이건 완전히 가루가 되도록 폭풍처럼 까인다.
그런데 영화 전체를 보면, 티몬의 말은 실제로 맞아서 적중한 게 별로 없었다. 오버와 허세가 좀 쩌는 듯..

  • 처음에 사막 한복판에서 쓰러진 심바를 발견했을 때 "사자를 키우면 위험하니 얘를 데려가서는 안 된다" → 심바는 전혀 위험하지 않았으며 품바· 티몬 일행과 잘만 친한 사이가 됨
  • "저 별들은 반딧불이다" → 네버.
  • 극중에서 Can you feel the love tonight 노래가 끝나고 결말부. "심바와 날라가 서로 상봉했으니 우리 우정은 이제 끝장났다" 엉엉 ㅠㅠ → 그 뒤에도 전혀 끝장나지 않음.

콜?

Posted by 사무엘

2016/02/24 08:36 2016/02/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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