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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탄 십용사

본인은 작년 말쯤에 본인과 같은 진영에 속한 이웃 교회 형제들과 교제할 일이 있어서 화성 동탄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반원 모양의 방사형으로 만들어진 시가지가 인상적이었는데.. 외곽의 도로에는 웬 '십용사로'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흠, 육탄 십용사 멤버 중 일부가 이 지역 출신이기라도 했나 보다.

3년쯤 전에 도로명을 통해서 우연히 이 윤탁 한글 영비를 알게 된 것처럼.. 도로명을 잘 지은 게 나름 지역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다.
저기는 아예 육탄 10용사 기념 공원까지 길목에 있는 걸 봤다. 다만, 시간과 동선 관계상 개인적으로 들러 보지는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군사 정훈 차원에서 기리는 여러 인물과 사건들 중, 육탄 10용사는 극히 드물게, 거의 유일하게 6 25 사변 "이전"의 굉장한 옛날이 배경이어서 이질적이다. 1년 남짓 전이던 1949년 5월, 지금 같은 휴전선이 아니라 38선이 아직 유효했고 개성 시내가 남한 땅이었던 시절이다.

문제는.. 38선에 따르면 개성 시내는 남한이지만, 바로 북쪽의 고지대인 송악산 중턱과 정상이 북한 땅이어서 남한이 방어하기가 매우 불리했다는 것이다. 북괴는 6· 25를 벌이기 전부터 여기에서 수시로 툭탁거리고 국지전 시비를 걸면서 남한을 귀찮게 했다. 그래서 그걸 견제하려면 북괴가 송악산의 남쪽 기슭에 만들어 놓은 벙커라도 파괴해야 했다.
(뭐, 그 시절 용어로는 벙커 대신 러시아어 '토치카'가 더 즐겨 쓰인다. 휴전선의 길이도 킬로미터가 아니라 꼭 155 '마일'이라고 얘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 특공대에 자원해서 혈혈단신으로 괴뢰의 토치카를 수류탄으로 까 버리고 전세를 뒤집고 송악산 고지의 탈환에 큰 공을 세운 용사들이 열 명이었고 '육탄 10용사'라고 전해진다. 이들은 적진에서 장렬히 산화했다고 한다.
그러니 나라에서는 이 사람들을 진정한 군인 애국자라고 아주 성대하게 기념했다. 동상 만들고 노래 만들고 학교에서 가르치고 이름을 딴 군부대와 상 등도 제정하고 별 짓을 다 했다.

전쟁터라는 게 한 사람의 뻘짓 때문에 수십 명이 몰살당할 수 있고, 반대로 한 사람의 희생 덕분에 수십 명이 목숨 건질 수도 있는 동네이다. 그리고 옛날에는 지금보다 인명 경시 풍조가 더 심했으며, "이기든지 죽든지", 멸사봉공 진충보국 같은 관념이 더 강했다는 것도 감안할 점이다.

하지만, 저 사람들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송악산 기슭과 개성 시내는 6 25 전쟁 때 결국 지못미가 돼서 완전히 북한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저 사람들도 죽은 게 아니라 작전에 실패했으며, 전부나 일부가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갔다는 증언이 훗날 나오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의 대남 방송에서도 육탄 10용사 출신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병사가 출연해서 자기 고향과 가족 인증을 했댄다..;;

너무 옛날 일인지라 이제 와서 정확한 진실을 알기는 난감하다.
다만, 북한에서 존재를 인정하고 언급한다고 해서 걔네들 말이 언제나 다 맞는 건 아니다.
북한에서 뜬금없이 효순이 미선이 자리를 만들고 추모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걔들이 무슨 대공 안보 관련 사건에 휘말렸거나 미군의 '악질 범죄'에 희생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무슨 광주에 투입됐던 대남 공작원의 묘지인지 위령비인지를 만들었다면서 5 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걔들은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4 19 의거나 6 29 민주항쟁 등도 자기들이 이용할 가치가 있으면 제멋대로 기념하고 선동 자료로 써먹는다.
그리고는 정작 진짜로 침투했던 대남 공작원이나 6 25 공산군 병사들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면서 존재를 부정하고 유해를 가져가지 않는다.

즉, 이런 쪽으로는 북괴의 대처가 일관성 없이 제멋대로인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쟤들의 반응만을 직접적인 근거로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 육탄 10용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정황상 그 시절에 10명의 특공대가 조직돼서 폭탄을 들고 송악산 고지를 향해 달려갔다는 사실 자체는 팩트이지만.. 그 이상 정확한 사건의 결말을 알기는 어려워 보인다. 거기가 무슨 철원 백마고지마냥 6 25 때 피로써 수복해 내서 지금 전해지는 영토인 것도 아니고, 또 지금이 옛날처럼 카미카제 같은 전술이 마냥 미화되는 시기인 것도 아니니..

그러니 육탄 십용사는 문자적 적용보다는 '영적 교훈'이 더 의미를 갖는 영역인 것 같다. 북괴 몰아내고 개성 시내를 대한민국 국민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해당 장소에 대한 고증과 재조사 발굴이 대대적으로 필요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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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에 있는 육탄 10용사 현충비. 굉장히 옛날(2007년!)에 찍은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또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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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21/07/05 08:35 2021/07/05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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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인권 선언

지난 1948년에는 이스라엘이 건국됐고(5월) 대한민국도 미군정을 졸업하고 정식으로 정부를 수립하여 건국됐으며(8월), 이어서 연말인 12월 10일엔 UN 총회를 통해 '세계 인권 선언'이란 게 선포됐다. (☞ 한국어 번역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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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어떤 아지매가 4절지? 2절지 정도 되는 큼직한 종이에 뭔가가 빼곡히 인쇄된 걸 펼쳐들고 있는 모습 패러디 짤방을 본 적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하지만 그 아지매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영부인이었고, 원전이 바로 세계 인권 선언이라는 것을 본인은 비교적 최근에야 알게 됐다. =_=

  • 어린이 헌장도 아니고(어린이를 학대하지 말고 기본적인 건 보장해 주며 특별히 보호해 주자),
  • 제네바 협약도 아니고(전쟁을 하더라도 지킬 건 지키고 싸우자, 포로의 인권을 최소한은 보장하자),
  • 국민 교육 헌장 같은 것도 아니고(교육 잘 하고 잘 받아서 민족을 중흥시키고 새 역사를 창조하자)..

모든 인간은 누구나 인종 피부색 국적 종교 무관하게 존엄하고 평등하다, 저것 갖고 부당한 차별 박해를 하지 말자,
인간에게는 결혼하고 먹고 자고 국적 선택할 권리가 있고, 거주지 옮기고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전근대적인 세습 노예 제도나 피의자 고문은 잘못됐다, 자국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등등~~

지금 우리로서는 너무 당연한 말 같지만, 그야말로 제국주의 식민지와 우생학, 2차 세계 대전 같은 비극적인 짓거리를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30개에 달하는 조항에 담겨 있다.

이 선언은 비록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저기에 담긴 이념이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의 헌법에 그대로 녹아들어가 사실상 국제 관습법이 됐다. 그리고 성경 같은 여느 유명 문헌 만만찮게 수백 가지의 언어로 번역됐다.
이 시기에 세계 각국의 나라들이 왕정을 버리고 공화정으로 체계가 바뀌었다. 오죽했으면 조선 만만찮은 꼴통 카스트 신분제 국가이던 인도조차도 최소한 법으로는 이제 신분제를 부정하고 만민이 평등한 민주 국가를 표방하게 됐을 정도이다.

물론 지금은 인권 운동이라는 것들이 너무 오바하고 선 넘어서 사형 제도 폐지와 동성애 합법화, 범죄자 인권만 챙기기, 죄 지을 권리만 챙기기, 죄를 죄라고 말하는 것을 반인권 프레임 씌워서 금지시키기.. 이딴 식으로 변질된 면모도 많다. 하지만 저 시절에 저런 인권 선언이 세계적으로 선포된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었다.

저런 인권 선언이 없던 옛날을 생각해 보자. 서양은 타 인종· 타 민족을 노예로 부렸고, 조선은 자국민의 과반을 노비로 부려먹었다. 그리고 서양에서는 과학 기술이 발전하고 국력이 강해지고 나니 아예 인종 전시회, 인간 동물원을 열었다.
흑인 노예는 짐승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과도기 생물 정도로 여겨졌다. 죽은 시체를 해부해 보니 장기 구조가 백인과 아무 차이가 없는 걸 보고는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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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원주민 여성인 사키(세라) 바트만(1789-1815). 유럽인들의 침략으로 영국에 혼자 끌려와서 알몸으로 구경거리 취급을 당하다가 타지에서 한 많은 삶을 일찍 마감했다.)

그리고 상피병이나 이상한 비늘증 유전병에 걸려 외모가 흉측해진 사람은 구약 시절의 문둥병 환자 취급이었다. 천벌 받은 죄인이니까 왕따 시키거나, 아니면 서커스에 보내서 놀림감으로 만들었다. (요 9:2 같은..).
세계 인권 선언은 바로 저런 짓을 앞으로 되풀이하지 말자고 다같이 결의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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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 메릭(1862-1890). 흑인이 아니라 엄연히 유럽 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전병으로 인해 심각한 피부 기형이 발생하여 인간 취급을 못 받았다. 평생을 놀림과 학대를 받으며 기구하게 살았다. 이 사람의 일대기를 배경으로 the elephant man (1980)이라는 영화도 이미 나와 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 포로 70년을 겪고 나니 종족 특성이 싹 바뀌었다. 비록 그 뒤에도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을 다해 100점짜리로 섬긴 것은 여전히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옛날처럼 바알 같은 우상을 대놓고 따르지는 않고 외형적으로 골수 유일신 민족으로 탈바꿈했다.
그것처럼 이 인류도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참극까지 겪은 뒤에야 옛날 같은 식민지 쟁탈전, 인종과 종교로 인한 전쟁이 '1세계의 외형'으로 한정이긴 하지만 어쨌든 멎었다. 아쉬운 대로 평화가 찾아온 셈이다.

다음으로 국제 기구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기독교계 중에서도 꼴통에 가까운 보수 우파, 그리고 정치 종교 통합과 세계 단일 정부 음모론 이런 걸 진지하게 고려하는 진영에서는 UN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보는 편이다. 심지어 UN이 창립된 뒤부터 세상은 전쟁이 오히려 더 늘어나고 더 혼란스러워졌다고 까며, 미국 한정으로는 "The UN wants your gun! 총을 빼앗긴 다음에는 성경을 빼앗길 겁니다" 이런 괴담까지 나도는가 보다.

물론 UN이 딱히 기독교 성경적인 이념을 실천하는 기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장 우리나라부터가 UN이 없었으면 어떻게 버텼겠는가?
글쎄, 미래엔 성경의 예언대로 세계가 연합해서 이스라엘을 대적할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6 25 사변 때는 세계가 연합해서 대한민국을 도와줬다. 우리나라는 그게 너무 고마워서 향후 수십 년간 UN 창립일을 공휴일로 기념하고 놀 정도였다.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에 전쟁이 늘어난 것은.. 오히려 식민지 지배를 하던 강대국들이 물러나고 나서 그 지역 조무래기들이 정치가 불안정해서 툭탁거리고 싸우는 것의 비중이 더 크다. UN이 능력이 부족한 건 있어도 UN이 잘못한 결과라고 보기는 어렵다.
뭐, 내가 보기에도 21세기의 UN은 20세기 중반의 창립 당시 초심을 갖고 있던 UN과 같은 성격의 조직이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쟤들의 존재 자체를 근본부터 백안시하고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오죽했으면 국제 연맹을 계승해서 UN이란 게 생겼을까? 그것도 세계 대전 연합국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따 와서 말이다.
창조 진화 논쟁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 장춘 박사와 종간 잡종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고, 연대기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우주 배경 복사와 방사성 원소 연대 측정법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입장에 대해 찬성하건 반대하건, 그 대상이 뭔지는 정확하게 알아야 하므로!)

그런 것처럼 세계사,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심 있는 사람, 프란시스 셰퍼의 "그러면 우리는 어찌 살 것인가" 의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UN과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경과 맥락을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제국주의 시절에 진짜 불쌍한 사람과 희소병 환자의 인권을 당대의 기독교회가 챙겨주지 못했다면, 훗날 그냥 무신론적 인본주의에 입각한 인권 선언이 태동하는 것을.. 신자들이 마냥 부정적· 회의적으로 보고 목소리를 내기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니면, 반대로 세계 인권 선언의 등장 배후에 성경적인 동기가 들어간 걸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21 08:36 2021/06/21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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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다 살아나온 사람

"한글이 목숨"....;;; 이라는 압도적인 문구를 남긴 외솔 최 현배 선생(박사).
그리고 "죽으면 죽으리라"라고 한국 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안 이숙 여사.

이분들은 대놓고 정치· 군사· 외교 쪽으로 항일 독립 운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 한글,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자기 관심분야를 통해서 한국은 일본과 같지 않고 우리 민족은 일본이 강요하는 천황 숭배와 전쟁 프로파간다에 따를 수 없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저것 말고도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무엇인지 아시는가?

일제 말기에 투옥됐고, 1945년 8월 18일에 형무소에서 처형될 예정이었는데 그 전날 17일에 극적으로 석방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는 것이다. ..;; 이건 검증 가능한 사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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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현배는 조선어 학회 사건 때문에 1942년에 체포· 투옥돼서 징역 4년형을 받고 함흥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안 이숙의 기록은 정확도가 더 떨어지는 것 같다. 1939년에 일본 국회의사당에서 불온삐라(?)를 뿌린 뒤 체포됐는데 굳이 조선의 서대문도 아닌 평양 형무소에 옮겨져서 해방될 때까지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무슨 죄로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둘 다 이북 지역이긴 하네..
(뭐, 주 기철 목사도 정식 재판과 형 선고 없이 그냥 경찰서 명의로 멋대로 구금 당한 채로 옥사함)

이 자리에서 모든 정황 근거를 나열할 수는 없지만.. 일제는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고 자기 나라가 망하는 최악의 상황이 올 경우.. 식민지의 형무소 죄수들을 몽땅 죽여 버리고, 본토 안에 있는 조선인들도 어떻게든 제압하고 해코지하고 같이 동귀어진할 시나리오 정도는 준비해 놓고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에서 지자 프랑스 파리를 포함해 자기 휘하의 도시들을 몽땅 불살라서 없애려 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심리, 같은 이치이다. 북괴도 무력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저런 식의 자폭을 얼마든지 감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원자폭탄 두 방으로 인해 일본이 8월 15일에 갑작스럽게 항복하고 허겁지겁 본토로 돌아간 건 우리 입장에서도 굉장한 호재이고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전쟁이 장기화됐으면 굳이 8월 18일이 아니었더라도 저 사람들 다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뭐 광복군이 참전을 못 해서 나라가 분단됐네..? 애걔 그 병력으로 싸우긴 뭘 싸우냐, 아무 영양가 없는 소리이다.

그런데 정말로 쟤들이 8월 18일에 최소한 함흥과 평양.. 전국의 모든/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도 않은 죄수들을 제멋대로 한꺼번에 몽땅 죽여 버릴 계획을 세워 놓았었는지는 나로서는 판단을 못 내리겠다. 비밀 행정 명령 문서 같은 거 나오는 게 없으려나..?? 8월 18일이 또 다른 D-day이기라도 했는지 말이다.

2. 일제 말기의 한국 교회 강제 통합

안 이숙 여사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잘 알려지지 않은 그 시절 얘기를 하나 첨언하자면..
1945년 7월, 우리나라의 모든 기성 기독교 교파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 통합되어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단일 교파로 잠시 들어갔던 적이 있었다. 이건 갑자기 하루아침에 된 게 아니라 거의 1940년대 초부터 일제가 한 교파씩 야금야금 회유시키거나 없애면서 집요하게 노력한 끝에 이뤄낸 것이었다.

이제 무슨 평양 봉수교회마냥 어용 단일 교파만이 공인 정통이고, 나머지는 몽땅 비인가 이단이 된 것이다. 주 기철 목사가 순교한 지도 1년 넘게 지난 때이고, 내가 보기엔 이건 신사참배 이상으로 교회의 정체성을 훼손한 더 심각한 문제 같은걸..? 그러나 다행히도 이 상태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일제가 그로부터 겨우 한 달 남짓 뒤에 완전히 패망했기 때문이다.

미군정이 시작되었던 1945년 9월 8일, 서울 새문안 교회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기존 교단 교파 지도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그리고 긴 토론 끝에 통합 상태를 유지하는 게 아니라 교파별로 다시 찢어지고 각자 제 갈 길 가기로 결의했다. 이것은 마치 정교분리만큼이나 불가피하면서도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그리고 이런 거야말로 진정한 일제 잔재 청산이었다.

3. 과거 커밍아웃

박 영희 여사는 함흥여고보에 재학 중이던 1942년경, 전혀 의도치 않게 조선어 학회 사건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했다. (자세한 내역에 대해서는 이전 글을 참고할 것.)
저분은 그 당시에는 경찰서에 연행돼서 고생 좀 했지만 곧 풀려나고 학교를 무사히 졸업도 했는데.. 그 뒤로 저런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엄청난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이 사건을 일생의 비밀 흑역사로 치부한 채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그랬는데 40년이 지난 1982년 여름, 일본에서 자기네 역사 교과서를 개정해서 침략을 진출이라고 수정하고 일본어 강요를 자발적인 일본어 선택 같은 식으로 말을 이상하게 바꿨다는 게 알려지면서 한국과 중국이 크게 반발하게 됐다. 이때 이분은 자신이 조선어 학회 사건의 발단이 됐던 그 여학생 박영희였다고 커밍아웃을 했다.

“아직 나 같은 역사의 증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 일본놈들은 아직도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너무 뻔뻔합니다. 나 때문에 고초를 겪으신 분들께 너무 죄송합니다” 라고 언론에다 인터뷰를 했다. 그게 1982년 8월 2일자 중앙일보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것도 지금도 검색해 보면 나온다.

이분은 1982년 당시에 환갑을 앞둔 58세였다고 소개됐다. 그러니 한국식 나이라면 1925년생이겠다.
이분은 그 뒤로 딱히 다른 근황이나 소식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분이 지금도(2021년) 살아 있을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1982년 이후로 또 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러 있으니..

그리고 저 박영희 여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사람.
김 학순 할머니(1924-1997)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태평양 전쟁 기간에 타지에서 일본 군인들에게 납치와 윤간을 당하고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 노릇을 하다가 살아서 나온 피해자라고 국내에서 최초로 공개 증언했다. 요즘 용어를 동원하자면 일종의 ‘미투’ 운동을 시작했다.

박 영희 여사와 거의 같은 연배이고,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시기도 41~42년 사이.. 조선어 학회 사건과 아주 비슷한 시기이다. 그랬는데 전자는 그나마 학교를 다니던 중에 저런 사건을 겪었고, 후자는 그렇지 못하고 더 험한 일을 당했다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커밍아웃을 한 시기가 9년 정도 차이가 있다.

최 현배 박사 vs 안이숙 여사 다음으로는 박 영희 여사 vs 김 학순 할머니 비교가 나왔다. 판단은 각자 알아서..
그래서 나는 1980년대, 길어야 90년대까지 아직 암울하던 시절에 반일 하던 것은 그럭저럭 진정성을 인정하지만, 2010년, 2020년대에까지 뗑깡 부리듯이 되도 않은 반일 거리는 것은 진정성 신빙성을 굉장히 의심하고 반쯤 정신병으로 치부한다.
여사와 할머니라는 호칭은.. 중요한 커밍아웃을 하던 당시의 나이를 감안해서 서로 달리 붙였다.

4. 조선어 학회와 한글 학회의 사무실

정 세권(1888-1965)이라고 일제 시대인 1920년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근대식 부동산 개발 회사인 ‘건양사’를 설립해서 건축 사업을 진행한 기업가가 있다. (☞ 관련 링크)

일제 시대에는 남산과 남대문에서 가까운 용산-중구 일대엔 일본인이 주로 살았고(지금의 서울/경성 역도 처음엔 이름이 남대문 역)..
좀 더 북쪽으로 서대문 근처 중-종로구 일대엔 조선인이 주로 살았다. 경부선 철도가 맨 처음 생겼을 때는 서대문 역이 경성 역 역할을 했는데 3· 1 운동 이후에 그 구간이 없어졌다.

이에, 정 세권은 일본인의 주거 구역이 서울의 북쪽으로 더 올라오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서 종로구 북쪽에 한옥 주택을 많이 지을 생각을 했다. 지금의 북촌 한옥 마을도 이때 그의 계획에 따라 조성된 주택 중 하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일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다.
특히 국어사전을 편찬하고 있던 조선어 학회에다 건물을 기부해서 사무실을 무료로 마련해 줬다~! 영화 <말모이>에서도 주된 배경으로 나오는 그 작업실 말이다.

딱 종로에다가 사무실을 마련해 줬기 때문에 거기서 일하던 간사장 이 극로 선생이 눈병에 걸렸을 때 근처의 공안과를 찾아갈 수 있었다. 그래서 공 병우 박사가 안과 의사에서 한글 덕후 세벌식 타자기 발명가가 되도록 동기를 불어넣을 수 있었다. 사건의 인과관계가 이렇게 연결된다.
정 세권은 건축과 자금으로 민족 정체성(!!)을 지킨 큰 공로가 인정되어 사후에 당연히 각종 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조선어 학회는 해방 후에 한글 학회로 간판을 바꿔 단 뒤에도 장소와 관련된 혜택을 받았다.
지금까지 입주해 있는 광화문 근처의 빨간 벽돌 한글 회관은 197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이거 건립을 위해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한 애산 이 인 선생이 사재를 무려 3천만 원이나 기부했고.. (당시 현대 포니 승용차 한 대가 230만 원 남짓) 그걸로도 모자라 죽을 때 자기 재산을 몽땅 한글 학회에다 기증했다.

그리고 박 정희 대통령이 1억 원을 기부하고 그걸 당시 영애이던 박 근혜가 직접 전해 줬다고 전해진다.
한글 회관은 이런 식으로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지어졌다. 4년쯤 전에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또 한번 이렇게 복습해 보았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18 08:35 2021/06/18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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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 이야기

물리학이 작용 반작용이 어떻고 하다가 전자기력, 핵력 따위를 다룬다면, 화학은 산과 염기가 어떻고 극성과 무극성(수용성 지용성..), 유기물과 무기물이 어떻고를 논하는 꽤 오묘한 과학 분야이다.
다만, 화학과하고 화학공학과는 일반 음대와 실용음악, 물리학과와 기계/전자공학, 심지어 언어학과 문예창작(!!)이 다른 것 이상으로 공부하는 것과 지향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20세기 이래로 인류가 누리는 복 중 하나인 합성섬유와 플라스틱, 냉장 냉동 시설의 냉매, 휴대용 전자기기에서 쓰이는 고성능 배터리, 이것 말고도 각종 저렴한 인조 물질들을 존재 가능하게 한 것이 화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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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다이어그램에서 파랑이 아닌 주황색 화살표는 아무래도 물리보다는 화학의 비중이 더 큰 영역이라 생각된다.
그림에서 반영되지는 않았지만, 열을 효율적으로 내기 위해서 연료를 잘 정제하는 것도 응당 화학의 몫일 테고.. 그러니 화학 회사는 전지 쪽이든 석유 쪽이든 '에너지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좀 있다.

비전공 화알못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화학에서 굉장히 의미심장 대단한 변화/발견이라고 생각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산과 염기 정의의 확장

전자기학에서 + -라는 양극을 다루는 것과 비슷하게 화학에서는 산과 염기라는 상극 개념이 있다. 그런데 그걸 엄밀하게 정의하는 게 은근히 난감했다.
처음에는 물에 용해됐을 때 H+ 이온을 내놓는 물질이라고 비교적 단순하게 정의됐는데(19세기 아레니우스의 정의).. 나중에는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예: 수용액이 아닌 곳에서는?).

그래서 화학에서도 산· 염기의 특성을 더 미시적으로 규정한 새로운 정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비전공자로서 본인이 기억하는 건 루이스의 정의 정도가 전부이다.
이런 게 물리로 치면 미터와 초의 정의가 더 엄밀하게 바뀌는 것과 비슷하고, 수학에서 음수의 거듭제곱이나 로그, 팩토리얼, 제타 함수 따위를 대수적으로 확장하여 정의하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스타에서 디바우러가 뱉어내는 독성 물질이 설정상으로는 산성의 독액이다.;;
글쎄, 황산 염산에 비해 강염기가 금속을 녹인다는 말은 딱히 못 들어 본 것 같다. 하지만 생체 단백질을 녹이는 성능은 염기도 산보다 더하면 덜하지 결코 못하지는 않다.

그나저나 염기하고 '알칼리'의 차이는 뭐지..?? 단순 별칭인가?
원래는 동일한 개념인데 지질학인가 특정 분야에서는 둘을 약간 다른 용도로 구분해서 쓰지 싶다.

2. 유기물의 합성

인류는 연금술을 이용해서 구리에서 금을 '저렴하게' 인위로 만들어 내는 건 성공하지 못했다.
(오늘날은 뭐.. 입자 가속기 돌려서 원자 단위의 조작을 가해서 금을 이론적으로 만들어 낼 수는 있다..;; 하지만 실패 확률이 매우 높고 초극미량밖에 안 생기는데 비해 가속기 돌리는 비용은 가히 살인적.. 그냥 금은방에서 금 현물을 구입하는 게 더 쌀 정도로 가성비가 안 맞을 뿐이다. 물질을 원자 수준에서 본성을 유지시키는 원초적인 힘은 매우 매우 어마어마하게 강하기 때문에 현대의 과학 기술로도 제어하고 조작하기가 몹시 어렵다.)

그 반면, 인간이 금 생성 대신 다른 영역에서 성공한 것이 있는데.. 바로 요소라는 유기물을 실험실에서 자체적으로 합성해 낸 것이다.
그 전에는 고온에 노출됐을 때 곱게 녹고 달궈지고 증발하기만 하는 물질과(비등점), 불이 붙어서 에너지를 내며 활활 타고 재가 되는 물질(발화점).. 동식물 생명체로부터 유래된 물질은 근본이 서로 완전히 다르다고 여겨졌다. 그런데 그 통념이 깨지게 됐다. (플라스틱만 해도 열가소성 수지와 열경화성 수지로 나뉘는 걸 생각해 보자~!)

금을 인위로 만드는 것과 동급으로 불가능이라고 여겨졌던 유기물의 인위 합성(무기 화합물로부터)은.. 프리드리히 뵐러라는 독일 화학자가 1828년에 최초로 성공했다. 수학으로 치면 초월수임이 최초로 증명된 수, NP 완전 문제임이 자가증명된 최초의 문제와 비슷한 지위라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연소와 관련하여 플로지스톤설이 부정되고, 생명의 자연발생설이 부정되고, 빛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이 알려진 것과 비슷한 급의 혁신이었다. 19세기에 물리학에서 전자기학이 새로 태동한 것처럼, 화학에서는 복잡한 탄소 화합물의 분자 구조를 다루는 유기화학이라는 난해한 분야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요소 말고 다른 유기물들도 실험실에서의 합성 성공 사례가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왔다.

3. 암모니아, 아세톤의 합성

역시 독일의 화학자인 프리츠 하버는 1909년, 공기 중의 질소로부터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공법을 개발했다. 이 덕분에 질소 비료를 원하는 만치 인위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됐고 콩이나 휴경 같은 자연 요법 없이도 지력을 유지하며 농사를 계속해서 지을 수 있게 됐다.

이건 정말 '공기로부터 빵을 만드는 기적'을 행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식량 생산이 인구 증가를 못 따라간다는 맬서스 트랩이 이 업적 덕분에 불식되었다.
그래도 이 사람도 구리로 금을 만들지는 못했기 때문에 조국 독일의 1차 대전 패전 배상금을 갚기 위해서 바닷물을 대량으로 증발시켜서 거기 녹아 있던 금을 추출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이건 가성비가 안 맞아서 곧 포기..

비슷한 시기에 '하임 바이츠만'이라는 영국계 유대인 화학자는 또 다른 유기물인 아세톤을 인위로 합성하는 방법을 개발해서 화약의 대량 생산과 1차 대전 연합국의 승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는 그거 보답으로 유대인들이 들어갈 팔레스타인 땅을 요구했고, 훗날 이스라엘의 초대 대통령까지 됐다. 프리츠 하버와 하임 바이츠만의 비교는 수 년 전에 이미 한 적이 있으니 여기서는 그냥 링크로 대체하겠다. (☞ 링크)

20세기 전반은 정말 화학 강세였던 시절 같다. 정확하게는 화학공학..

Posted by 사무엘

2021/06/07 08:33 2021/06/07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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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질적이지 않은 오해와 중상모략

세상에는 기독교의 탈을 쓴 이단 사이비가 여럿 있다. 이단들은 단번 속죄 구원의 영원한 보장 교리를 이상하게 배배 꼬는 경향이 있다.
아예 구원의 상실,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 건 예사이고, 반대편 극단으로 가서 이제 죄 용서 받았고 구원받았고 무슨 짓을 해도 지옥은 안 가니 "니 꼴리는 대로 살아도 된다, 심지어 일체의 참회나 회개를 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롬 6:1-2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헛소리를 하는 곳도 있다.

이런 소리를 정상적인 크리스천이 들으면 "그건 성경의 가르침을 일부만 그것도 아주 잘못 적용한 이단 교리일 뿐이다. 성경은 그런 막장 결론을 의도하거나 조장하지 않으며, 우린 그런 가르침하고는 아무 관계 없다"라고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묘사된 것처럼 "나는 신에게 다 용서받았으니까 괜찮아~" 이러는 양심 마비자를 제정신 박힌 크리스천이라고 간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비슷한 논리로, 진화론에 대해서도 진화론적 세계관, 무신론, 유물론, 우생학, 사회 진화론 이런 것까지 연루시키면서 이놈의 사탄 마귀적인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서 나치즘과 공산주의가 생겨났고 젊은이들의 정신이 황폐해지고 어찌 됐네 이렇게 프레임을 씌운다면... 단순히 과학 이론으로서 진화론을 지지하는 사람하고는 더 대화를 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진화론자라도 "흑인은 인간과 짐승 사이에 진화가 덜 된 생물이다" 이딴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개인적인 소신은 당연히 "이 우주와 생명이 우연히 저절로 생긴 게 아니고 절대자가 있다"라는 신의 창조이다. 그 정도 진화가 가능하다고 해서 인간 정도의 고등한 생명체가 그런 진화의 산물로 저절로 생기는 건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하지만 믿음을 발휘할 영역과 과학 관찰로 승부할 영역,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파생 효과 내지 오해· 중상모략 같은 것은 분명하게 분간해서 주장해야 할 것이다.

2. 과학 관찰은 종교색과 무관

이 세상 학계에서는 누구 말마따나 그저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서 과학 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 걸까? 20세기에 천문학계에서 벌어졌던 논쟁을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좀 다른 관점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천동설과 지동설, 창조와 진화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천문학계에서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 대폭발설(일명 빅뱅)과 정상 우주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 당시엔 두 이론이 모두 상대편 이론을 완전히 제압할 정도로 과학적 증거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심상을 고려하면 오히려 빅뱅이 뭔가 시작과 기원, "빛이 있으라" 같은 창세기 1장 느낌이 물씬 풍긴다. 게다가 빅뱅이라는 개념을 1930년대 초에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은 천문학자 겸 현직 가톨릭 신부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무신론 과학자들은 이를 심리적으로 거부했다.

이와 달리 정상 우주론--딱히 기원이 없고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하게 있음--은 벧후 3:4의 심상과 비슷하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이건 잘못된 사고방식이라고 깐다. -_-;;
그랬는데.. 훗날 우주 배경 복사라는 게 발견되면서 이 주제는 빅뱅이 맞는 것으로 사실상 결론 지어졌다. 정상 우주론은 천동설 급으로 완전히 폐기된 건 아니지만 거의 소수설 비주류로 전락했다.

요지는.. 세상 학계도 과학적인 증거만 있다면 창세기 냄새가 좀 풍기는 학설이라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공립 학교에서 과학 시간에 창조론(?)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세상 인명 사전에서 예수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다음으로 "사흘 만에 부활했고 승천했다"라고 차마 쓰지 않는/못하는 것과는 성격이 약간 다르다.

비슷한 예로 초능력이니 UFO니 하는 것도 꼭 기독교계에서 사탄의 미혹 운운하며 난리를 치지 않더라도, 과학적으로 검증 가능하지 않으면 이 바닥 종사자들이 알아서 배척한다.

물론 과학이 만능은 아니고 과학으로 알 수 없는 현상도 많다. 하지만 그 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집단 지성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정작 창조 과학 진영에서는 빅뱅을 여전히 배척한다는 게 아이러니이다. 빅뱅이 기원이라는 개념 자체는 성경과 일치하지만 연대기는 젊은 우주를 지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으로는 창 1:1,3이나 벧후 3:4가 지구를 넘어 우주의 기원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구절인지 잘 모르겠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땅의 원 위에 앉으신 이"가 딱히 지구가 둥글다는 걸 말하지는 않으며, 계시록에 나오는 "땅의 네 모퉁이"가 지구가 평평하다는 걸 말하지는 않는다고 본다.

성경에 따르면 세상이 과거에 있었던 세상, 현 세상, 다가올 세상이라는 세 종류가 존재하고 하늘도 세 계층이 있다는 것 정도까지만 알 수 있다. 그 개념이 현대의 지질학이나 천문학이 밝혀낸 자연의 모습과 어떻게 대응하는지는 인간이 적절히 잘 풀어야 하는 숙제일 것이다. 다만, 성경이 문자적으로 사실이기 위해서 반드시 젊은 우주, 젊은 지구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본인의 소신이다.

3. 창조 과학의 정체성

창조 과학회라는 곳에서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 성경 내용은 문자적으로 옳고 정확하며, 과학적으로 사실이다.
  • 이 세상(우주, 지구, 생물..)은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신에 의해 창조되었다.
  • 지구와 우주의 나이는 젊다.

성경이 오류가 없고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은 본인도 적극 동의하는 바이다. 창세기의 6일, 계시록의 1000년이 대표적인 예이다. 성경에 나오는 각종 인물, 명칭과 숫자들, 사건들은 대놓고 비유 허구라고 명시된 게 아닌 한 당연히 역사적으로 과학적으로 정확한 레알이다. 피나 일부 위생 관념에 대해서 말한 것은 분명히 시대를 앞섰던 것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성경이 원자와 분자를 논하고 definition, theory, lemma가 나오는 이공계 학술서적 스타일로 저술된 책은 또 아니다.
성경에는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만 나오지, 당장 금성 화성 목성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 맥락에서 난 성경에 딱히 지구 자체가 둥글거나 평평하다고 말하는 암시는 없다고 생각한다.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의 질문은 이런 식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내가 우주를 한 점에서 시작해서 대폭발 시킬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니가 인간 DNA의 염기 서열을 아느냐? 양성자와 중성자가 서로 붙어 있고 전자가 원자핵을 돌게 하는 힘이 어디서 나고 그게 무엇 덕분에 가능한지 니가 아느냐?
길바닥의 이끼도 해내는 광합성의 명반응 암반응 메커니즘을 니가 아느냐? 네가 전자기파의 속도가 유한하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능히 측정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 성경이 문자적으로 사실이긴 한데.. 도대체 어느 문맥과 scope까지 문자적인 사실인지, '모든'이라고 했을 때 얘는 도대체 어느 범위의 전체를 말하는 건지 정도는 그래도 최소한 성경이 자체적으로 정해 놓은 원칙에 따라 분간을 해야 한다. 그러니 창조 과학이라 해도 과학뿐만 아니라 바른 신학을 저변에 깔고 있어야 한다.

그 다음 지적 설계는 심증으로서는 매우 유력하며 신앙을 갖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시 19나 롬 1:19가 말하는 일명 자연 계시 말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과학으로 증명도 반증도 제대로 할 수 없으며, 이것이 과학의 관점에서 '물증'이 될 수는 없다.
이건 당연한 귀결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들은 조금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창조 과학 진영에서 위의 두 명제.. 즉, 성경의 사실성과 지적 설계를 입증하기 위해서 그 다음으로 끄집어낸 카드가 바로 젊은 지구이다.
지구와 우주의 나이가 젊다는 학설? 가설 자체는 신학하고 전혀 무관하게 오로지 과학만으로 승부할 수 있는 분야이다. '세상이 우연히 만들어질 수 없다', '성경은 사실이다' 이런 것과는 좀 성격이 다르다.

이게 제대로 진행됐다면.. 세상 학계에서도 "난 무신론자여서 성경이니 신이니 그딴 건 모르고 믿지도 않음. 하지만 그와 별개로 지층을 관찰하고 물리 법칙을 생각해 보니 우주와 지구의 나이는 1만 년 이내로 보인다" 이렇게 주장하는 과학자가 나와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과연 그러한가? 창조 과학이 성경과 과학 중 하나라도 제대로 잡고 있는가..?? 이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무척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나로서는 젊은 우주/지구에 대한 일말의 증거가 있다면 그건 아담 이래로 재창조된 현 세상의 연대기가 젊다는 과학적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니 good luck~! 우주 배경 복사나 방사선 연대 측정법의 허를 찌르면서 부디 과학계에 좋은 기여를 하길 바란다. 무슨 지구 온난화 허구설, 지구 평평 같은 이상한 유사과학 음모론으로 치부되지 말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21/06/04 19:35 2021/06/0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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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6과 5 18

1. 군사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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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우리나라의 역사를 크게 바꿔 놓은 혁명이었다. 저 우표가 나왔던 때는 당해(1개월), 그리고 1주년이었는데.. 올해는 무려 60주년이다.

원조가카는 그 암울하던 시절에 어째 자기 목을 걸고 저렇게 나라를 뒤엎어서 통째로 마개조할 생각을 했는지.. 가히 또라이 그 자체였다. 10여 년 뒤엔 이걸로도 모자라서 유신이라는 것까지 만들어 내고..
할배는 자기가 물러난 이후로 웬 미친 후계자가 갑툭튀해서 그래도 선한 독재를 하고 있는 걸 하와이에서 인지할 기회는 있었나 모르겠다.

10수 년 전부터 해 온 생각이지만, 할배는 정말 모세 같다. (넘사벽급의 위대한 초대 지도자. 홍해 -- 원자탄, 타지에서 죽음)
원조가카는 느헤미야(느 4:17,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하고..)나 웃시야 왕(대하 26. 영농과 국방 개혁, 기계 제조) 같다.

박 정희 시절부터 사회 시스템이 바뀐 것 중 하나가 단기 대신 서기 연호이다. 그래서 당장 저 우표만 봐도 1961년에 나온 첫 버전은 날짜가 단기로 표기된 반면, 1주년 기념 우표는 서기 표기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진 중 하나가 바로 이거다. 자유당 시절의 정치 깡패들이 서울 시내에서 공개 조리돌림 당하는 거.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_=;;

특히 다른 깡패들은 여럿이 뭉쳐서 퍼레이드(?)를 했지만, 수괴이던 이 정재는 단독으로 제일 앞장서서 가면서 개쪽을 당해야 했다.
옆에 감시하는 사람들은 경찰도 아니고 무려 특수부대 급의 군인이었다. 알고 보니 이것 말고 다른 각도와 시점에서 찍은 사진도 여럿 전해진다.. 오오~

대한민국에서 1948년 건국 이래로 공권력에 의해 공개 조리돌림이 행해진 건 이게 유일하다. 우리나라 역사상 살인 없이 연쇄 강간만으로 사형이 선고된 건 5공 시절이 유일했듯이 말이다.
이때가 혁명일로부터 겨우 닷새 뒤인 1961년 5월 21일이었다는 것도 같이 알아 두면 좋다. 요즘은 악질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나 아동 학대치사 살인범을 이런 방식으로 죄값을 좀 치르게 했으면 좋겠다.

2. 광주 사태

1980년대 노래 중에서 '바위섬'이라는 유명한 노래가 있다. 얘는 벧후 3:5-6의 without form and void 분위기를 온몸으로 외치는 노래 같다.

  •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 없던 이 곳에
    (==> 하늘들이 옛적부터 있었고 또 땅이 물에서 나와 물 가운데 서 있는 것을)
  •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 그때 있던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성경에 창 1:1과 1:2 사이에 정말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처럼, 저 노래도 사실은 정말 엄청난 과거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진 거라고 한다.
그럴싸해 보이지 않는가? 언젯적부터 해 온 오래된 생각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5월 16일로부터 겨우 이틀 뒤는 어째 16하고는 이념적으로 완전히 딴판인 기념일이다. 이 날에 대한 나의 생각은 이렇다.

  • 소수의 북괴 공작원이 시민을 사칭하면서 진짜 시민과 군경 사이를 이간질하고 서로 오해하게 만들고, 약간만 대립하고 끝났을 사건을 악에 받친 유혈 참극으로 도지게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음.
    (진실을 규명하려면 이런 거나 규명해야 하는데, 인제 와서 규명이 제대로 될 가능성은 거의 없음. 참고로 1980년대 초는 무장공비가 활발하게 드나들었으며, 동해 서해의 남부 지방까지 막 침투하고 잡히기도 하던 시절이었음.)

  • 누구 말처럼 600명씩이나 침투는 가능하지 않음. 6 25 초반의 대한해협 해전 때의 북괴 공작원의 침투 규모하고 딱 혼동한 것 같다.
    더 옛날에 북쪽에 더 가깝게 침투했던 울진-삼척 무장공비도 100여 명에 불과했고, 그것도 여러 차례 나뉘어서 침투한 것이었다.

  • 안면인식으로 30여 년 전의 광수 찾는 건 너무 심한 뱀발 무리수

  • 무기고 탈취와 탱크 조종, 능수능란한 군사 활동 자체만으로는 북괴 공작이라고 전혀 간주할 수 없음.
    저 땐 남한도 남자들이 군사 독재 하에서 군복무를 3년씩이나 강제로 했었다. 훗날 LA 폭동 때도 군대에서 배운 게 제대로 발휘됐다니까?

  • 북괴에서 띄워주고 선전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자신과 관계 있는 사건이라는 보장도 없음.
    아웅산 테러 공작원의 존재는 생까고, 효순이 미선이한테는 평양 학교 명예 학생 임명도 하고 저런다. 이것 말고 다른 일관성 없는 반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러니,

  • 시민군들이 몽땅 북괴 공작원 빨갱이라는 소리나, 그 반대 극단으로 진압군이 멀쩡한 비무장 시민들 가슴을 도려내고 싸이코패스마냥 총질했다는 소리는 거의 다 신빙성이 결여되는 과장 거짓이라 여겨진다. 악의적이거나, 아니면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왜곡됐거나.
  • 도를 넘는 성역화, 그리고 반대로 도를 넘는 폄하와 비하 모두 금물. 시민 희생자를 추모할 거면 진압 군경 전사/순직자도 같이 추모해야 한다.
  • 김 일성이건 전땅크건 회고록은 공평하게 다 출간하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광주 사태가 진짜로 전대갈의 쿠데타에만 반대하고 항거하는 민주화(?) 시위였다 하더라도 그건 나라를 북괴 침략으로부터 지키고 가난을 떨쳐낸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하고 위대한 업적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파급력과 영향력을 따지자면 4 19 의거보다도 가중치가 더 낮다. 그냥 제주 4 3 사태나 박통 말기의 부마 항쟁 이런 것보다 급을 높게 쳐야 할 이유를 난 모르겠다.

그런데 지들이 뭐 나라를 구하기라도 한 줄 알아요. 유공자 생색 제일 많이 내고.. 뭐? 5 18 왜곡 금지법??
이딴 식으로 나오니 그때 정말로 억울하게 무고하게 오인 사격으로 죽었을 수도 있는 광주 시민을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추모하고 기리고 싶은 생각마저도 싹~~ 사라지게 된다.

나도 망망대해 위에 솟은 바위섬 꼭대기에서 밤에 텐트 치고 코딩 하다가 자 보고 싶다~
그리고 저 노래의 모티브인 동네는 구질구질한 피해의식 반골기질 좀 버리고(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건 물론 아님) 건전한 생각과 의식으로 "재창조" 됐으면 좋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22 08:36 2021/05/22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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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의 마을들

우리나라 영토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다. 휴전선이라고도 불리는 군사분계선이 중앙에 있고, 거기 곁을 비무장지대와 민간인 통제 구역이 감싸고 있다. 여기 주변은 위험하기 때문에 비행 금지 구역임은 물론, 지리 정보가 민간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다. 여기서 민간 지도란,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전자는 원칙적으로 군인과 민간인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고 가끔 GP를 지키는 소수의 군인들만이 경찰처럼 둔갑해서 몰래 들어간다. 그 반면, 후자는 민간인만 출입 금지이다. 거기에 조상 대대로 밭이나 묘소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농사나 성묘 같은 정당한 볼일이 있을 때만 인근 군부대의 허가를 받고 낮 시간대에 한해 드나들 수 있다.

그럼 전국의 모든 민통선 안(= 민통선 이북)은 밤엔 군인을 제외하면 쥐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암흑 지대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다. 거기에 주민이 상주하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그 원조 1호는 판문점에서 제일 가까이 있고 휴전 직후부터 조성됐던 대성동 마을이다. 이 마을은 처음부터 이 근처에 존재했던 마을이며, 6· 25 정전(휴전) 협정에 따라 존재를 인정받고 보장받았다.
여기는 휴전 회담이 진행된 판문점의 근처인 덕분에, 1951년 하반기부터는 전쟁의 포화에 휘말릴 일이 없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 대신 여기는 우리나라가 땅을 수복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방어하기 불리한 곳을 포기하게 됐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해주 반도와 개성 시내를 내어주고 북한이 서울과 더 가까워졌다.

사실 대성동 마을 일대는 민통선과 남방한계선의 구분도 아직 없어서 코앞이 군사분계선이며, 강원도 전방에다 비유하자면 아예 비무장지대 안이나 마찬가지이다. GOP도 아니고 GP가 있을 곳에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뜻이다. 그만치 엄청나게 위험하고 거주민들의 행동과 이동에 제약이 크다.

한때 우리나라 대성동과 건너편 북한의 기정동에서 국기 높이 달기 병림픽(?)을 벌인 적이 있었고, 그게 초등인가 중인가 도덕/윤리의 마지막 단원 북한 통일 문제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나중엔 남한이 그냥 gg 치고 손 떼서 북괴의 160m짜리 깃대가 한동안 세계에서 제일 높은 깃대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는데.. 구체적으로 몇 년대에 벌어진 일인지는 아무리 찾아 봐도 정확한 기록이 나오는 게 없다. 팩트 확인이 잘 안 된다.

나중에는 저기 말고도 통일촌, 해마루촌, 횡산리 등 민통선 안 마을들이 몇 곳 더 조성됐다. 아래 그림을 보시라. (☞ 출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민통선 마을은 출입이 까다롭긴 하지만, 대성동만치 군사분계선과 북한이 코앞이고 위험하고 유엔군의 통제를 받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곳은 아니다. 그림에서도 대성동은 다른 마을들과는 성격이 다름을 언급하고 있다.

단적인 예로, 통일촌이나 해마루촌은 파주의 도라 전망대 및 제3 땅굴 임진각 안보 관광 패키지에도 포함돼 있어서 일반인이 비교적 쉽게 찾아갈 수 있다. 그러나 대성동을 아무 연고 없는 일반인이 단순 호기심 차원에서 관광..??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쪽의 관광 난이도는 판문점의 관광 난이도와 대등하다.

이런 마을들은 전쟁 때 원주민들이 다 피난 가면서 폐허가 되고, 그 상태로 민통선 구역으로 봉인됐다가 뒤늦게 마을로 재건되었다. 사람을 받아들일 거면, 밭은 몰라도 주택이 있는 곳은 그냥 민통선에서 해제해 주지 싶은 생각도 든다만.. 지형상의 한계나 군사 관리의 편의성 때문에 그리 하지 않은 것 같다.

철원에 이런 마을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저기가 넓은 평야를 낀 천혜의 곡창 지대이기 때문이다. 6 25 때 우리나라가 수복해 냈고 김일성이 빼앗긴 걸 통탄했을 정도인 금싸라기 땅이다. 그 유명한 민통선 안 메기 매운탕 식당인 '전선 휴게소'도 이 지대(정연리-유곡리) 사이에 있다.

그 반면, 철원보다 더 동쪽부터는 산세가 더욱 험해지고 지형이 너무 메롱이 되는 관계로, 민통선 마을 같은 게 없으며 거주민도 없다. 가령, 동쪽 끝의 고성군 수동면 같은 곳은 마을이 산과 휴전선으로 완전히 고립되게 생겼으니 주민들이 모두 이주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는 주민이 전무하여 사문화된 행정구역으로 전락했다.

그림에 표시된 마을들 중에서 마현1리는 혼자 조성 시기가 1959년인 게 이색적이다. 얘는 바로 그 시기에 나라의 동남부 지방을 깡그리 삭제해 버린 태풍 ‘사라’의 피해 이재민들이 이주해서 개척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어느 지역이냐 하면 부산이 아니라 무려 울진이다. 1963년 이전엔 울진이 경북이 아니라 강원도 소속이었던 관계로, 강원도 도지사가 이재민들에게 이 참에 정부 지원금도 받아서 같은 강원도인 철원으로 이주를 주선했다..;;

그렇게 66세대 359명의 주민들이 군용 트럭 23대를 나눠 타고 저 마을로 가는 데만 3박 4일이 걸렸다고 한다. 그 시절에 울진에서 철원까지 가는 경로에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도로 따위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한동안 군용 텐트에서 살면서 근성으로 황무지를 일궈서 밭을 만들었다. 여기가 한때 격전지였던 관계로 땅 조금 파면 탄피들이 무슨 광물처럼 튀어나왔나 보다. 그걸 주워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그랬는데 이듬해 봄엔 이 승만 정권이 갑자기 무너지면서 마을에 파격적인 지원을 약속했던 강원도 도지사와 철원 군수는 모두 교체됐다. 이 사람들이 마현1리에 정착한 때가 1960년 4월 7일이니 4 19 의거로부터 겨우 두 주 전... 말 다 했다. =_=;;
그리고 기껏 고생해서 밭을 일궈 놨더니 여기에 진짜 원래부터 살았던 원주민이 찾아와서 땅 내놓으라면서 소송을 걸기도 했는데.. 이 때문에 자금이 부족한 입주민은 여기서도 소작농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 마현1리 이주민촌은 30년전 경상도지방을 휩쓸고 지나간 태풍 사라호 (59년9월17일)에 가옥과 전담을 모두 떠내려보낸 경북 울진군 일대의 농민 66가구가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시작한 곳이다.
(...)
조국강토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동족상잔의 흔적만을 안은채 갈가리 찢겨버려져 있던 민통선 안쪽 황무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기름진 철원 평야의 한 부분이었지만 이들이 도착했을 때는 우거진 잡초더미와 6·25가 남겨준 온갖 잔재들만 눈앞에 가득할 뿐이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국군과 인민군의 훈련 포성에 몸을 떨며 군용 천막을 치고 개간의 삽질을 시작했다.
부르튼 손으로 잡목과 온갖 무기 파편·돌등을 제거하고 우거진 싸리숲을 없애기 위해 몸에는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다.

곳곳에 처박혀있는 불발포탄의 위험 속에서도 『이 땅을 일구어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에 개척의 삽질은 끝없이 이어졌다.
눈앞의 황무지가 옥탑으로 변할 생각을 하며1인당 2·5홉씩의 배급잡곡으로 허기진 배를 달랬다. (☞ 출처)


이때 선조들이 얼마나 고생했으면.. 그로부터 30여 년 뒤인 1989년, 마현리 주민의 세대가 바뀔 즈음에 건립된 입주기념비에는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조국강산의 가장 중심된 이 농토가 누구의 피땀으로 가꾸어졌는가를…. 괭이와 호미로 6·25 동란 이후 버려진 황무지를 옥토로 가꾼 개척 정신의 빛나는 업적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라는.. 정말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하고 처절한 문구가 새겨져 있다.

핵심은 대성동 말고도 민통선 안에 자리잡은 민간인 마을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마현리 주민들은 실제 이곳 출신이 아니며 오히려 진짜 여기 원주민들과 분쟁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더 관심 있으신 분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존 보도 자료들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 링크 1, 링크 2, 링크 3, 링크 4)

그리고 요즘은 마현리는 주변의 밭은 몰라도 마을 자체는 민통선 안이 아닌 것 같다. 국도 5호선에서 멀쩡히 진입할 수 있고 마을 내부도 버젓이 로드뷰가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이길리에 소재한 마을은 민통선 안이다. 72~73년에 조성된 민통선 마을들, 특히 이름이 대놓고 통일촌이라고 지어진 저 마을은 임진각이 건립되면서 같이 만들어진 거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해마루촌은 시기가 시기인 만큼 김 대중 대통령의 햇볕 정책 내지 경의선 연결과 같은 맥락에서 조성된 실향민 마을이다. 상공에서 보면 마을 도로가 높은음자리표 모양으로 꼬불꼬불하게 만들어져 있는 걸로 유명하다.

끝으로, 철원도 아니고 서쪽 끝도 아닌 중간(연천)에 마을이 딱 하나 있는 게 연천의 횡산리이다. 시기도 혼자 1977년으로 따로 떨어져 있는데.. 얘는 임진강과 군사분계선의 선형이 굉장히 교묘하게 꼬이는 곳에 있어서 뭔가 섬 같은 느낌이 들며, 제2의 대성동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는 특별한 사연 없이 원래 여기서 살던 사람들이 나중에 민통선 마을이 조성됐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온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정확하게는 1977년, 1985년 두 차례에 걸쳐서이다.

이상이다.
대성동 마을의 주민이 납세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다는 건 이제 다들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나무위키에는 거기뿐만 아니라 저런 다른 민통선 마을 거주민에게도 같은 혜택이 적용된다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 그러한지 법적 근거를 잘 모르겠다.

병역법이나 병역법 시행령 등 관련 법을 아무리 찾아봐도 장애인이나 탈북자가 면제이지, 저 지역 출신에 대한 언급은 딱히 안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육지 말고 바다 쪽 민통선도 생각해 봐야 한다. 교동도는 통제가 아주 느슨하긴 하지만 그래도 민통선에 속한 곳이며, 백령도나 연평도 같은 서해5도도 개념적으로 대성동 및 타 민통선 마을에 준하는 특이한 오지이다. 그러니 면제 혜택을 주려면 그쪽과의 형평성도 생각해야 한다.

물론 저 정도로 특이하게 사는 극소수의 사람들한테, 부정 수급의 가능성도 전무한 혜택을 주는 것 자체야 형평성 불만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민통선 마을들과 대성동을 완전히 같은 급에 두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지난 2019년경엔 대성동 마을 토박이인 어느 친자매(유 수빈· 유 정빈)가 대학 졸업 후에 무려 여군 장교를 같이 나란히 지원해서 매스컴을 탔다. (☞ 관련 링크)
남자였어도 합법적으로 군대를 안 갈 수 있는 신분인데 여자가 그것도 언니와 동생 둘 다 군대 쪽으로 진로를 정했다니 매우 특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어릴 때부터 맨날 군인들을 보고 살았는데 자기도 그런 군인처럼 남을 돕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세상엔 이런 일도 있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5/09 08:33 2021/05/09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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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일반 공도에서 주변 민폐를 끼치면서 차나 오토바이로 과속· 폭주를 즐기는 양아치한테 일반인들이 흔히 하는 핀잔 중 하나는 "그렇게 폭주가 좋으면 그런 짓은 서킷에나 가서 해라"이다.

본인도 나름 성질이 급하고 운전대를 잡으면 과속을 즐기며, 난폭운전은 직접 하는 것과 남의 차에 탑승하는 걸 다 좋아하는 취향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짓을 주변 차에다가 피해를 주면서까지 하지는 말아야 한다. 차가 없고 시야가 확보돼 있는 한적한 고속도로에서야 150~200km/h까지도 밟지만, 엄폐물이 많고 당장 앞과 옆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좁은 골목길에서는 시속 20도 안 밟으면서 천천히 가는 게 베스트 드라이버의 덕목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본인은 이 시점에서 의문이 들었다. 그 말로만 듣던 서킷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더 나아가 Formula 1처럼 지금까지 말로만 들어 온 자동차 경주라는 업계의 사정은 어떠할까..?

1. 도로 시설

서킷은 통제된 환경에서 프로 선수들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차를 위험하게 다루면서 극한의 속도 경쟁을 하는 곳이다. 공도가 전혀 아니며, 통상적인 도로교통법이나 자동차 보험 등에서 완전히 열외되어 있다. 일반인이 차를 슬금슬금 몰다가 실수해서, 혹은 극소수의 술 먹은 미치광이가 난입해서 사고가 나는 곳이 아니다.
이는 군인이 전투 중에 적군을 사살하는 건 살인죄가 전혀 아니며, 반대로 자기가 전사하는 것에 대해서도 통상적인 민간 생명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것과 같다. 위험도와 사고 발생 형태가 규모와 차원 면에서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자동차가 발명된 이래로 자동차 경주라는 건 경마의 업그레이드 버전 차원에서 옳다구나 거의 곧장 존재해 왔다. 물론 이건 말 그대로 기름을 길바닥에다 뿌리는 짓이며, 장비값, 기름값, 보험료, 선수 인건비 등 돈이 굉장히 많이 깨지는 비싼 스포츠이다.
하지만 자동차 경주는 나름 흥미진진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자동차 제조사들이 자기 제품의 기술력을 뽐내는 중요한 자리이기도 하다. 이런 이벤트가 하나쯤 있는 것은 자동차 산업의 관점에서 이해타산이 맞고도 남는다.

그렇기 때문에 자동차 경주 대회는 망할 일이 없으며, 기업 후원을 통해 꾸준히 잘 유지되고 있다. 아니, 그저 명맥만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올림픽이나 축구 월드컵에 맞먹는 팬을 보유하고 있고 장사가 잘 된다. 물론 경주용 자동차들의 표면과 레이서들의 옷은 온~~통 스폰서의 광고들로 덕지덕지 도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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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10여 년 전에 전라남도 영암에서 F1 서킷을 건설하고 경기를 유치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기를 진행해 보니 수지가 맞지 않고 적자만 쌓인지라, 몇 년 못 가 중단됐다.
우리나라는 세계 선진국들의 평균 추세에 비해 경주처럼 자동차 자체를 즐기는 문화가 영 발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니 모터쇼도 자동차가 아니라 반쯤 레이싱걸 모델 전시장처럼 됐고 말이다..;;

2. 레이서

레이싱에서는 머신(자동차)뿐만 아니라 레이서, 즉 사람의 역량도 매우 중요하다. 사고가 나지 않을 만치만 차의 성능을 극한까지 짜내면서 최대의 급가속 급선회 기동을 적절한 타이밍 때 수시로 구사해야 한다. 그리고 전투기 조종사만큼이나 사방에서 발생하는 가속도를 잘 견뎌야 한다.

그래서 이 사람들도 몸 쓰는 게 아니라 기계를 조종한다고 해서 심신 단련을 안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여느 운동 선수나 정예 군인에 준하는 수준으로 한다.
키와 체중은 일정 수준 이하여야 하며 높은 시력도 타고나야 한다. 말 타는 기수도 아니고 몇백 마력의 출력을 자랑하는 자동차를 모는데 체중이 10kg 가까이 더 나가 봤자 무슨 차이가 있겠는지 이해는 안 되지만.. 그 바닥 사정이 그러하다.

오죽했으면 세계적으로 봤을 때, 각 스포츠 분야의 1인자들 중에서 연봉과 사회적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은 무슨 축구나 농구 스타가 아니라 특급 카레이서이다~! 물론 여기에는 위험 수당도 있고, 타 스포츠와 달리 자동차 산업으로부터의 자본 투입이 많아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3. 차량

그럼 서킷을 달리는 차들은 어떤 형태일까?
레이싱의 성격에 따라서는 일반 양산차를 쓰기도 하고 그보다 더 뛰어난 스포츠카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속도가 생명인 경주용 차들은 공도를 달리는 평범한 차들과는 지향하는 특성이 다소 차이가 있다.

  • 무게 최소화: 일반 양산차로 경주를 한다면, 불필요한 좌석이나 편의장치를 몽땅 떼어내는 정도의 개조가 무조건 필수이다.
  • 접지력 최대화: 그래서 스포츠카들은 조금만 툭 튀어나온 과속방지턱도 제대로 지나기 어려울 정도로 바닥이 낮다(무게중심이 아래에 있어야..). 그리고 주름이 하나도 없는 타이어를 장착한다. 주름 없는 타이어는 접지력은 좋지만 도로가 조금이라도 젖으면 미끄러져서 위험하다. 공도에서는 이런 타이어를 장착하고 주행할 수 없다.
  • 공기 저항 최소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니 자동차 경주에서는 양산차도 아니고 부가티· 포르셰 같은 차도 아니라, 큼직한 바퀴가 네 짝 달리긴 했는데 굉장히 특이하게 생겼고 한 명만 탈 수 있는.. 그 경주 전용 자동차들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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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네들은 그야말로 배기량이 제한된 엔진의 힘을 이용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일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는 것만을 목표로 아주 특수하게 커스텀 제작된 물건이다.
부가티· 포르셰 같은 차는 성능에다가 일반인 운전자의 편의성까지 생각한 자동차이지만, F1용 머신은.. 오로지 성능 지향이다.

그런데 F1 경주라고 해서 무슨 부가티· 포르셰 급의 8기통 이상 6000~8000cc짜리 엔진이 장착된 차량이 달리는 게 절대 아니다.
이런 경주에서 엔진에 아무 제한을 걸지 않으면 온갖 기상천외한 짓거리를 한 머신이 등장해서 사고의 위험이 커지며, 자동차 제작 비용이 너무 치솟아서 경기가 제대로 진행될 수 없게 된다. 거기에다 아무리 속도만을 즐긴다고 해도 배기가스 환경 문제도 전혀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격투기에 체중에 따른 체급 구분과 제한이 있는 것처럼 자동차 경주에는 엔진의 배기량 제한이 있는데.. 이게 낮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한 끝에 2014년부터는 F1 기준으로 겨우 1600cc라고 한다..;; 헐~~ 쏘나타보다도 작은 아반떼 배기량인데..

요즘 F1 차량은 그 배기량만으로 1000마력이 넘는 출력을 내고 2~3초대의 사기적인 제로백을 자랑한다. 즉, 튀어나가는 성능은 당연히 부가티· 포르셰에 뒤지지 않는다.
차 무게를 600kg대까지로 후려치고, 엔진 내구성도 후려치고.. 차량을 그야말로 경주를 위해 몇 시간 동안만 돌아가는 사실상의 일회용품 수준으로 쥐어짠 덕분이다.

컴퓨터계는 해커들이 겨우 100KB짜리 압축된 실행 파일로 거의 5분, 10분짜리 3차원 그래픽 데모를 선보이는 미친 최적화를 하기도 하는데, F1 머신에는 그런 식의 마개조가 일상이다.

그 대신 이런 F1 머신 같은 차들은 시동 걸고 운전하는 방식이 일반 차들과는 완전히 다르며, 사실 일반 공도를 제대로 주행하지도 못한다. 일반 자동차들은 동력원이 전기로 바뀌고 자율 주행 기술이 도입되고 있으니 경주용 자동차와는 개발 방향이 더욱 달라지고 이질화되고 있다. 스포츠 사격과 군대 저격수의 사격이 성격이 서로 다른 것처럼 말이다.

※ 그 밖에

(1) 지금까지 주로 F1을 기준으로 얘기했지만.. 이것보다 더 작은 체급으로 '카트'를 이용한 레이싱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넥슨의 캐주얼 게임인 카트라이더의 인지도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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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너무 작기 때문에 아무래도 큰 엔진을 얹어서 막 빠르게 달리지는 못한다. 그래도 바닥에 주저앉다시피해서 달리기 때문에 체감 속도는 굉장히 높게 느껴진다.
F1 프로 레이서들도 어린 시절에 카트부터 먼저 시작한 경우가 많다. 카트는 아무래도 양발을 한데 모을 수 없으니 브레이크는 어쩔 수 없이 언제나 왼발로 밟게 된다.

(2) 비포장 도로를 주행하는 오프로드 레이싱이라는 것도 있다. 얘들은 아무래도 속도에만 최적화된 타 레이싱과 같은 속도를 느낄 수는 없지만, 또 다른 방면으로 스릴과 박진감을 선사한다.
여기를 달리는 차들은 아주 큼직한 타이어를 장착하고 차체가 높은 게 특징이다. F1 머신과는 디자인이 정반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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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에 Ivan "Ironman" Stewart's Super Off Road, 일명 방구차라는 게임이 바로 오프로드 레이싱을 다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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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자동차 경주 게임이지만 화면 스크롤이 없다~! 한 화면에서 모든 경주가 행해진다. 스크롤도 없고 콩알만 한 자동차 스프라이트로 무슨 박진감을 표현하겠나 싶지만 평면에서 나름 복잡한 지형과 입체적인 자동차의 움직임을 그 시절 하드웨어로 표현하는 것은 딱 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어 보인다. 방향과 각도별 스프라이트 로직 설계를 어떻게 했을까? 나보고 저것과 똑같은 게임을 만들라고 하면 못 하거나 엄청 고생하지 싶다.

우리 주인공은 빨간 차인데, 노랑과 파랑은 제끼고 회색 차가 유난히 잘한다. 쟤만 따돌리면 된다.
이 게임의 별명이 '방구차'인 이유는.. Nitro라는 아이템을 먹어서 그걸 터뜨리면 마치 스타크래프트 마린이 스팀팩을 쓰듯이 일시적으로 차의 추진력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3) 사회 각지에서 금녀의 벽이 허물어진 지 오래이지만, 교통수단을 다루는 분야는 여성의 진출이 더딘 편이다.
옆의 레이서들에게 양산 씌워 주거나 자동차 옆에서 포즈만 취하고 있는 레이싱걸 병풍 말고.. 현업 여성 카레이서도 있다. '권 봄이'라는 사람이 지난 2010년대 동안 꽤 유명했는데 요즘은 뭘 하고 지내나 모르겠다.

또한, 여성 오토바이 라이더들도 모임이 있을 정도이며, (☞ 링크)
20대 여성 고속버스 기사 (☞ 링크),
20대 여성 트레일러 기사 (☞ 링크),
도 있다~!
한때는 " '이 운전사는 저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 '이 아이는 제 자식입니다' 그럼 저 버스 기사의 정체는?" (아이의 어머니)
이게 "논리야 XXX" 시리즈 책에 실려 있을 정도로.. 짙은 선입견 때문에 일반인이 답을 선뜻 떠올리기 어려운 퀴즈였는데..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Posted by 사무엘

2021/04/27 08:36 2021/04/2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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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일제가 조선의 주권을 빼앗고 저지른 만행 중에서 물자나 노동력을 저렴하게 착취한 것, 사람을 차별 대우한 것, 독립 운동을 탄압한 것 자체는 아무래도 식민 통치를 하고 식민지에서 뽕을 뽑으려는 주체로서 당연히 할 만한 짓을 한 것이다.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생학과 제국주의가 만연하던 그 시절에 일제만의 독보적인 악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구나 조선에서의 양반 쌍놈 차별이라든가 기존 탐관오리들의 악행도 같이 비교한다면 상대적인 수위가 더욱 낮아진다.

그 반면, 일제 말기의 태평양 전쟁 관련 뻘짓과 악행은 성격이 좀 다르며 별개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1) 일반적인 차별과 착취, 그리고 (2) 전쟁 준비에 속하지 않으면서 일제가 특별히 큰 죄악을 저지른 것, 정당하지 않은 명분으로 조선 민간인을 싹 학살한 만행을 추려내면 제암리 학살이라든가 관동 대지진 학살 정도가 남는다. 특히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위안부보다도 관동 대지진 학살이 죄질이 더 나쁘다고 본다.

뭐, 일제도 한 마을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싸이코패스마냥 몰살시키고 마을을 지도에서 지워 버린 건 아니었다.
3· 1 운동 만세 시위를 진압하던 헌병인가 누군가 한두 명이 성난 군중에게 구타 당해 죽었다. 그러자 일제는 범인이 저 마을 사람 중에 있다는 명목으로 보복을 저렇게 저지른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면.. 처음엔 태극기만 들고 평화롭게 함성 지르며 행진하던 시위대가 격분· 흥분한 건 일본 헌병들이 실탄을 발사하고 피를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유 관순 같은 시위대 리더들이 우리까지 폭력으로 나서면 안 된다고.. 그랬다가는 더 큰 보복을 당하고 만세 시위가 더 큰 참극으로 바뀐다고 군중을 말렸지만 혼란스러운 와중에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처음에 일부 헌병 주재소가 박살나고 유치장 수용자들이 풀려나긴 했지만, 일본 쪽의 추가 지원 병력이 도착한 뒤부터는 시위대는 공중분해되고 더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헌병들도 흥분해서 다 죽이거나 잡아 가두고, 마을 집까지 불지르게 되었다.

이때는 오늘날 민주 국가의 경찰처럼 폴리스라인 치고 공포탄 경고 사격부터 몇 발 한 뒤에 암염탄이니 테이저건이니 발사하는 신사적인 매뉴얼이 없었다. 일제 저놈의 입장에서도 남의 나라 식민 통치라는 건 처음 해 보고, 반항하는 애들에 대해서는 그냥 닥치고 총칼로 위협하고 고문하고 죽여서 제압한다는 매뉴얼밖에 없었다.
(하물며 우리나라조차도 해방 이후에 4 19 같은 시위를 진압할 때 잘 알다시피 경찰이 대놓고 시위대에게 총질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보고 배우고 행한 관행이 그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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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제암리 학살은 이런 배경에서 벌어졌다.
석 호필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가 제암리 학살 현장의 참상을 촬영하고 세계에 타전해 줬다.

우리 선조들은 민족 자결주의 하나만 달랑 믿고 무슨 "꿈은 이루어진다"마냥 "대한 독립 만세"를 열심히 외치면 진짜 일제가 물러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정한 현실에 비춰 본다면야 3· 1 운동은 그냥 숱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만 야기한 순진해 빠진 망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희생을 치른 덕분에 조선은 일본과 다른 민족이며 일제의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메시지 하나는 세계에 확실하게 전하고 일제의 입장을 굉장히 난처하게 만들 수 있었다. 전술의 패배 대신 전략의 승리를 얻은 건지..?

강대국이 식민 통치를 하는 것 자체는 합법이고 관행이던 제국주의 시절에도 "당신 일본은 식민지를 얼마나 개판으로 관리했으면 10년을 못 채우고 저런 대규모 항쟁이 전국에서 벌어졌냐? 그리고 그걸 또 그 따구 방식으로 겨우 진압했냐?"라는 질타가 들어왔을 정도였다. 그러니 조선 총독도 본토로부터 당연히 내리갈굼을 먹었다. -_-;;

그래도 3· 1 운동 같은 발악이 있었던 덕분인지 일본 내부에도 조선의 식민 통치를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소수의 일본인이 생겨났으며, 그 흐름이 지금까지 이어져서 자국의 만행을 사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거 마치 임진왜란 시절에 조선으로 귀순한 왜군 장수를 보는 듯한 느낌인데.. 이런 사람들이 제일 최근에 대대적으로 매스컴을 탄 건 2년 전, 2019년 2월경이다.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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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이젠 됐어요'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계속 사죄하겠습니다."

"주여, 식민 통치 시절 일본 관헌들에 의해 가장 험한 사건이 일어난 곳이 이곳 제암 교회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3·1운동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교회를 불태웠습니다.
일본 정치인들은 한 번도 사과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했으면 사과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 최악의 한일 관계가 호전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습니다. (저희 사죄는) 작은 일이지만 주께서 저희를 사용해 주시고, 인도해 주소서. 아멘."


우와, 읽는 내가 눈물이 나려 한다. (반어법이 아님!)
저 사람들이 다른 사회· 정치 쪽으로 다른 이상한 운동에 연루돼 있지 않고, 신학 노선이 그리 이상한 곳도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난 저 사죄가 진심 레알임을 인정한다.

정치인들의 정식 사죄?? 바라지도 않는다. 사실 외교적으로는 우리나라는 이미 일본의 까임권을 다 써 버린 지 오래다. 그걸 아직도 우려먹는 게 비정상이고, 외교 신뢰를 깎아먹는 바보짓이다. (이제 더 논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퉁쳤잖아! 그런데 이거 뭐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말이 달라지니..)

정치인이 아니면 민간에서라도.. 저렇게 자기 나라 참전 때문에 남북 분단을 영구히 고착시켜 버린 것을 안타까워하고 미안해하는 대륙 사람이나 조선족이 어디 있나? 비열한 전쟁과 테러 공작에 대해서 진심으로 유감스러워하고 화해하고 싶어 하는 동족이 이북에 어디 있긴 하냐?
이러니 내가 종북이 친일보다 더 나쁘다고 논리적으로 정정당당하게 주장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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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렇게 대표 기도를 한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라는 목사는 나이가 이미 90을 넘은 고령인데..
행적이 정말 엄청난 분이더라. 제암리 학살에 대한 사죄와 추모를 50년 이상 전부터, 1965년 한일 수교가 최초로 이뤄졌던 시절부터 일평생을 바쳐 해 왔다!
1969년 4월 15일, 인류가 아직 달에도 가기 전이었던 시절의 중앙일보 보도를 보자. (☞ 링크)

오야마 이마히도(미산금인).. 저 사람 맞다. 령을 금이라고 표기한 건 종이 신문 OCR의 한자 판독 오류일 테고..
그는 진작부터 하나님께 나아오기 전에 니 형제와 화해부터 먼저 하라(마 5:23-24)는 말씀으로부터 깊은 부담을 느꼈고, 60년대부터 "일본은 히로시마· 나가사키를 기억하기 전에 제암리부터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 링크)

"제암 교회 방화 사건 속죄 실행 위원회"라는 걸 만들어서 자국에서 성금을 1천만 원(50년 전 물가.. 책 한 권 가격이 백원대 단위이던 시절)을 모아서.. 제암리 교회를 재건하고 주민 의료 진료소까지 만들려고 했다...;;

감리교 교단에서는 이를 환영하고 동의했으나(오리지널 제암리 교회도 감리교였음).. 문제는 민심이었다.
제암리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왜놈들의 더러운 돈으로 교회를 세우는 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다. 죽어도 결사 반대!!" 이렇게 나오면서 성금 따위 한 푼도 안 받으려 했으며, 오야마 씨를 만나 주지도 않았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는 그야말로 반공과 반일이 가히 하늘을 찌를 기세였던 시절이다. 일가족이 몰살당했던 유족들의 저 까칠한 반응에 대해서도 후손인 우리 세대가 뭐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야마 목사는 저런 냉대조차도 담담히 감내하면서 몇십 년을 한결같이.. 2019년까지도 "일본의 과거 침탈을 깊이 사죄합니다. 주여, 우리 일본인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래 왔던 것이다. 한국, 일본 모두로부터 그다지 지지나 환영받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이 정도면 대인배만으로는 표현이 부족하고.. 예수쟁이로서 좀 거시기한 표현이긴 하지만.. 가히 보살 급이지 않은가..??
이 뿐만이 아니다. 쟤들은 무려 2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의사자 이 수현 씨를 아직도 기억하면서 매년 추모식을 연다.

JR 서일본(☞ 링크)은 2005년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에 대한 사죄와 반성 문구를 자사 홈페이지에다가 15년째.. 지금까지도 사실상 영구 박제 수준으로 걸어 놓고 있다. 이런 걸 보면 일본인의 근성에 참으로 놀라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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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야마 이마히도 목사도 신학을 한 구체적인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인으로서 꼭 기억할 만한 양심적이고 훌륭한 일본인이라 하겠다. 얼마 안 있으면 소천해서 근황을 못 보게 될 수도 있다.

그럼 제암리 학살과 관련하여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꺼내고 글을 맺겠다.
미국 독립 전쟁을 배경으로 20년 전 옛날 영화 '패트리어트'에서는 영국군 레드 코트들을 개 싸이코 악마 병신으로 묘사하기 위해,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제암리 학살 사건을 오마주 한 듯한 장면이 들어갔다.
니들이 식민지군 반역자들을 숨기고 있다는 죄목으로 주민들을 예배당 안에 한데 모아 놓고 문을 못질 하고 건물을 불지른 것.

하지만 영국군이 그런 잔학한 짓까지 실제로 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영국은 이 장면에서 언짢은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제암리 학살조차도 여자, 아이들까지 다 예배당에다 가두고 문에 못질을 한 건 아니었다고 사료가 정정되고 있다. 키가 일정 수준 이상인 15세 이상 남자만 죽였다고.. 뭐 그것도 비무장 양민에 대한 반인륜적인 학살인 건 변하지 않지만 말이다.

심지어 그때 불타는 예배당 안에서 어떤 여인이 "제발 우리 아이만은 살려 주오"라고 담요에 둘러싸인 아기를 밖으로 내밀었는데 헌병들이 칼질을 했던가 총질을 했던가.. 그런 얘기까지 전해지는데.. 그것도 일단은 현실성을 의심해야 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21/04/24 08:35 2021/04/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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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크 밸브

요즘은 트럭이나 버스가 아닌 승용차 차급에서 수동 변속기라는 게 사실상 전멸했다 보니, 어지간한 일반인 운전자들은 면허를 딴 뒤부터 클러치 페달이라는 걸 밟은 경험이나 기억이 전혀에 가깝게 없다.

오르막을 출발할 때의 떨림 찾기, 반클러치, 시동 꺼뜨림, 반대로 배터리가 나갔을 때 밀어서 시동 걸기.. 이런 것들을 모르는 사람이 주류가 되고 있다. 그러니 수동 차량은 대리 운전을 시키거나 중고로 파는 게 갈수록 난감해져 간다.
그래도 수동 변속기는 대형 상용차가 있기 때문에 완전히 멸종할 일은 없다. 쟤도 마치 에어 브레이크만큼이나 대형차만의 전유물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운전과 관련하여 지금은 완전히 멸종했고 수동 변속기보다도 더 하드코어한 과거 유물은.. 초크 밸브이지 싶다.
연료 분사가 지금처럼 전자화· 자동화되기 전, 원시적인 카뷰레터(기화기)가 쓰이던 시절엔 연료 분사량을 조절하는 악셀 페달과는 별개로 공기 주입량을 조절하는 밸브도 운전석에서 수동 조작 가능한 기기 형태로 존재했다.

엔진의 출력이라는 함수값은 단순한 1변수이지만, 내연기관은 연료뿐만 아니라 공기까지 감안해서 동작하는 2변수 함수이기 때문이다. 비행기가 공중에서 선회를 위해서 자동차처럼 단순히 핸들을 꺾는 게 아니라 pitch와 roll이라는 2축, 2변수를 조절하는 것처럼 말이다.

추운 겨울에 디젤 엔진에다 시동을 걸 때는 초크 밸브를 이용해서 공기를 더 불어넣어 줘야 했다. 그리고 반대로, 공기를 수동으로 차단하지 않으면.. 지금으로서는 믿어지지 않지만, 키를 뽑는다고 해서 엔진 시동이 즉각 꺼지지도 않았다고 한다.

가파른 내리막에서 저단+높은 rpm 상태로 엔진 브레이크가 걸렸을 때 연료 공급이 차단되는 fuel cut도 없고.. 이 정도로 공기 공급과 연료 공급이 서로 맞물려서 효율적으로 통제되지 않으니 엔진 출력 대비 불완전 연소 매연과 그을음(특히 디젤)이 심하며 연비도 요즘 자동차보다 훨씬 더 나빴다.

초크 밸브까지 적절히 활용해야 하던 포니 같은 승용차는 운전하는 난이도와 느낌이 어떠했는지 궁금하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암울하던 16비트 시절에 HMODULE과 HINSTANCE라든가 원거리 근거리 포인터 구분 등.. 지금은 신경쓸 필요가 없는 별 복잡한 요소들을 구분하고 따로 취급해야 했던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이런 번거로운 기기는 전자식 연료 분사 기술이 도입되면서, 아니 그 전에 카뷰레터 자체도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1980년대 중후반에 완전히 사라졌다는 점에서 버스 안내양이나 항공 기관사와 시기가 비슷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옛날 차는 요즘 차에 비해 침수(!!)나 저질 연료에 강하고 엔진음이 더 터프하고 웅장(?)하고, 악셀을 밟았을 때 밟은 대로 튀어나가는 반응성 하나는 좋았다고 한다.

2. 휠

옛날에는 자동차 타이어에 장착된 휠이라는 게 완전히 희거나 검은 표면이 있고, 중심부와 가장자리에 동그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마치 사람 얼굴처럼 보였다. 중심부의 동그란 원은 입, 휠너트는 콧구멍, 휠너트 주변의 돌출된 부위는 뽈살(!!), 그리고 제일 바깥쪽에 숭숭 난 동그라미들은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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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 식으로 말이다.
그에 비해 요즘 승용차들의 휠은 굵직한 스포크 몇 개가 전부이고 나머지 부위는 다 뚫려 있어서 안쪽의 디스크 브레이크 패드가 다 보일 정도이다. 그리고 옛날 휠에 달리, 은색의 반들반들한 광택이 난다.
옛날 방식의 전통적인 휠은 트럭· 버스 같은 상용차에서나 볼 수 있다.

난 이게 단순히 디자인 트렌드의 차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재질부터가 다르다. 옛날 휠은 철제(스틸)인 반면, 나머지 더 뽀대나는 휠은 알루미늄 재질이다.
옛날에는 외곽의 '눈' 부위가 저렇게 아주 납작해서 눈을 흐리멍덩하게 떴다거나 우는 듯한 모습인 것도 있었지만, 원래는 모든 구멍을 그냥 원 모양으로만 뚫은 게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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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떤 자동차에서 아무 옵션도 장착하지 않은 제일 저렴한 사양에 최하위 모델은 휠이 요런 모양이었다. 아니면 같은 차종이라도 자가용 말고 택시의 휠 역시 요런 편... ^^
조금 상위 모델로 가면 저기에다가 껍데기 하나 씌워 주는 게 관행이었다. 스틸 휠의 단조롭고 추레한 외형에 좀 변화를 주도록 말이다. 옛날엔 고속버스 타이어 휠에 반들반들한 휠캡이 따로 달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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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는데 요즘은 "철제 휠 + 휠캡 껍데기" 관행이 사라지고 알루미늄 휠이 대세가 된 듯하다.
그렇다고 가느다란 스포크가 수십 개씩 박힌 건 내구성이 약해서 그런지 자전거나 리어카 타이어의 휠에서나 볼 수 있고..
이런 것도 변화라면 변화라고 하겠다.

3. 엔진음과 동력원

(1) 요즘은 길거리를 달리는 자동차에서도 일반적인 부르릉이 아니라 전기 기관차 같은 조용한 웨에엥~ 전자음이 많이 들리기 시작해서 기분이 묘하다. 소형차에서 카르릉~ 디젤 엔진 소리가 나는 것 이상으로 이색적이다. 하이브리드, 배터리 전기, 수소 연료전지 같은 변종들이 갈수록 늘고 있긴 하다. 전기차는 내연 기관 같은 냉각 계통이 필요하지 않으니, 이런 차는 앞에 라디에이터 그릴도 없다.

(2) 그리고 요즘은 쬐끄만 소형 스쿠터(발을 한데 모을 수 있는..)들도 예전 같은 하이톤 앵앵앵 대신, 일반 오토바이와 동일한 부르릉 털털털 소리가 난다. 신기하지 않은가? 이제 이륜차도 내연기관형은 다들 2행정이 아닌 4행정 엔진을 쓰기 때문이다. 아니면 덩치 작은 놈은 아예 전기 모터로 바뀌고 말이다.

2행정은 구조가 간단하고 배기량 대비 더 큰 출력이 나지만, 엔진 내구도와 환경면에서 4행정보다 불리하다. 이제 소형 2행정 엔진은 교통수단이 아니라 제초· 제설 장비 정도에서나 볼 수 있다. 휴대용 엔진 발전기조차도 휘발유, 디젤, 터빈 등 다양한 엔진이 쓰이지만 2행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3) 하지만 군용차라든가 대형 버스나 트레일러는 저런 트렌드를 다 씹어먹고 여전히 디젤이 본좌다. 제아무리 깨끗하고 다재다능한 전기 에너지라 해도, 말통에다가 석유 담듯이 많은 양을 화학적으로 곱게 축적하는 효율은 인류의 과학 기술로는 아직 메롱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기 에너지는 실시간으로 생산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형태를 벗어나지 못해 있으며, 그나마 연료 전지는 배터리와 엔진의 중간 위상인 타협안이다. 현대차에서 열심히 연구· 노력한 덕분에 수소 연료전지 정도가 승용차 레벨을 벗어나 대형차 버전까지 만들어져 있다.

(4) 그리고 EQ900, 롤스로이스 같은 초호화 기함급 승용차들도 역시.. 하이브리드고 디젤이고 전기고 다 필요 없고, 안정성이 검증된 땡 휘발유 다기통 대용량 엔진이 사용되는 중이다. 부유하고 높으신 분들이야 길바닥에 돈을 줄줄 흘리고 다녀도 걱정할 게 없기도 하니.. 디젤과는 반대편 극단에 속한 분야라 하겠다.

Posted by 사무엘

2021/04/08 19:33 2021/04/0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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