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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27일
반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개발해 온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프로그램과 설명서를 교육청에 제출했다.

2000년 8월 30일
밤 11시 20분경, 기숙사 사감 선생님이 나를 불러 집에 전화가 왔다고 전해 주셨다. 그리고 무슨 대회 예선을 통과했다고 하는 일종의 힌트도 덧붙였다. 집에 전화해서 보니 아니나다를까 어머니께서 ICC(당시 정보 문화 센터.. KOI 주최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고 전해 주셨다. 결과는 물론 합격이었다.
오! 이제까지 코딩한다고 겪은 고생과, 그 고통보다 더 컸던 기다림의 고통이 단번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2000년 9월 1일, 7교시 수업을 듣고 바로 가방을 싼 뒤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갔다. 2차 심사 준비를 해야 하니까. 2년 전의 기적이 재현됐으니 난 뛸 듯이 기뻤다.

그리고 9월 2일, 오전 6시에 출발하는 서울 행 고속버스를 타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서울로 떠났다.
97, 98년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2차 심사가 대학교가 아닌 ICC 본관에서 열렸다. 건물은 새로 지어져 있었고 무척 깔끔했다. 1년 반쯤 전에 여기 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넓은 홀에 도착했을 때는 아직 아침이었다. 몇몇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거기서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어머니와 점심을 먹었다. 오후 2시 20분이 되어서 나는 대기실로 들어가서 진행위원의 지시를 들었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몇 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나는 심사받는 15명 중 가장 먼저 심사받는 조에 걸렸다. 수험표를 받고 심사장으로 들어갔다. 카이스트, 고려대 교수를 비롯한 다섯 명의 교수들이 컴퓨터를 빙 둘러싼 가운데 설명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약간 떨리긴 했지만, 난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면서 진지하게 프로그램 소개를 했다.

교수들이 주로 질문한 내용은 두벌식 자판에 대한 내 입력기의 호환성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내 입력기의 장점을 강조하면서, 한글 기계화는 세벌식으로 가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을 이었다.
곧이어 심사 위원들은 이 프로그램을 무슨 언어로 짰는지 묻고, 여기에 대한 지식을 언제부터 쌓아 왔는지 물었다. 난 물론 사실대로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10분짜리 심사가 끝나고 나는 귀가하게 됐다. 그동안 조금도 떨지 않았고, 심사위원과 아주 평범하게, 부담없이 얘기를 나눴다. 시간이 내가 느낀 것보다 훨씬 빨리 갔음을 느낄 수 있었다.

2000년 9월 4일
아침 조회가 끝난 직후에 부랴부랴 ICC 홈페이지에 접속해 봤지만 별다른 소식은 없었다. 그런데 4층으로 올라가자 담임 선생님께서 내게 대상을 받았다고 전해 주셨다. 날 보더니 악수를 청하면서 “용묵아, 축하한다. 대상이더라.” 하고 말씀하셨다.
아니, 내가 컴퓨터실에 가 있던 사이에 선생님께서 먼저 교실에다 소식을 전하신 모양이었다. 급우들도 나를 보자 곧바로 축하 인사를 건네고, 이제 카이스트에 그냥 갈 수 있냐고 다그쳐 물었다.

-- 이 날은 네게 기념일이 될지니 네가 이 날을 평생 명절로 지키고 규례에 따라 그것을 영원토록 명절로 지킬지니라.
-- 보라, 김 용묵의 남은 행적 곧 그가 코딩을 하고 정올에서 입상한 과정은 그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느니라.

당시 17회 대회 때 고등부에서는 총 92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중 15편이 2차 심사 대상자가 되었다.
참고로, 대회 결과가 발표된 지 얼마 안 되어 ICC 홈페이지엔 이런 글도 올라와 있었다.

"공모는 대리 출품이 가능하다."라는 잘못된 인식;;

17회 공모 면접을 보신 분들은 2~3명만 빼고는 모두 망연자실한 표정으로..-_- 면접실을 나갔습니다.
다들..진이 빠진 상태에서;; 심사위원님들의.. 해박함에 질려서;;
또.. 몇 개월 동안 밤샘해서 만든 자기 프로그램이..심위분들 앞에서 일순간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황당함;; 때문에 말이죠.

아는;; 수상자님께서;; 면접 끝나고 나서;; 대기실에 있는 제게 오시더니 "그들은 모든 걸 알고 있어.."라고 하시더군요;;

그렇습니다;; 심위님들은.. 모든 걸 알고 있죠..--; 무슨 얘기냐 하면
어설프게 다른 프로그램 베끼거나..대리 개발해서 출품한 작품은
3분 내에 뽀록납니다.
작품과 관련된 배경 이론들을 모조리 물어보시며.. 우선.. 나쁘게 말해서-_- 작품을 무시하고 들어갑니다..
어떻게든 출품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게; 최고 미션인 듯;;하더군요-_-
심지어는.. 열심히 작품 설명하고있는데.. 딴 데 쳐다보시고..
심위님들끼리 딴 얘기 하시고..--; 중간에 말 끊고;; 이건 기본이구,

저는 맨 마지막쯤에..면접을 봐서리, 또 설치 중에 문제가 많아서 다른 분들 면접하시는 걸 거의 다 봤는데요..
거의 모든 분들 면접할때..심위님들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래서 되는 게 뭔데? 빨리 보여 달라니깐.."
"그럼 그게 뭐야? 이미 있는 거잖아? 좋을 게 뭔데?"
"뭐야? 아무 필요 없는 건데?"
"다 하는 거네.."
이런..--;성격의 것들이죠;

심위님들 앞에서 절대 거짓말 못 합니다.-_-
모르는 것 아는 체 못 하구요-_- 대리 개발작..바로 뽀록납니다..


본인은 심사 받으면서 저런 일을 전혀 겪지 않았으며(2~3명 중의 하나였군), 아주 무난하고 자연스럽게 내 프로그램 소개를 하고 질문에 답변도 하고 왔다. 또한 조원들 중에 가장 먼저 심사를 받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심사 장면은 보지도 못했다. 가히 best 케이스...;;
솔직히 말해서 내 프로그램은 대리 개발을 할래야 할 수가 없는 아이템이었으니 말이다.

대회 결과가 나오긴 했는데.. 문제가 있었다.
카이스트는 다른 대학보다 전형을 굉장히 일찍 하기 때문에, 본인은 이 대회의 결과를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원서를 '일반 지원자'로 제출해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카이스트는 추후에 발표된 이 대회 결과를 받아들였고, '일반 지원자'이던 본인의 등급을 '지정 대회 우수 입상자'로 업그레이드해 줬다. (지금은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이미 옛날에 없어졌음. ㄲㄲ)
나중에 카이스트에서 본인의 고등학교로 1차 서류 전형 합격자 명단을 팩스로 보내 줬는데, 그때 본인의 이름은 인쇄체가 아니라 맨 끝에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그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2, 3, 4를 거쳐서 10년이 지난 지금은.. 5.65까지 버전이 올라갔다. 5.65 버전이 일종의 개발 10주년 기념작이다. 소스 코드 줄 수는 10년 전에 비해서 5배가 넘게 불어났고, 기술 수준은 당연히 그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학부 시절엔 이 프로그램 개발과 관련된 연구만으로 5학점을 먹었다. 3학점짜리 학부 졸업 논문과 1학점짜리 개별 연구 두 건(TSF 모듈 개발, 그리고 3.0 아키텍처 연구). 이제 대학원에 가서도 써먹을 예정이다. 왜냐 하면 학부 졸업 후에도 또 논문 쓸 만치 연구 실적은 추가로 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은 <날개셋> 말고도 전산 기술을 접목시킨 다른 한글 관련 연구 주제도 생각하고 있는 게 있다.

프로그램 개발하면서 나름대로 아래와 같은 손발리 오그라들 것 같은 말도 들었다. 앞으로도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버전 6.0을 향하여 "cheers!"를 외쳐 본다.

-- 그 프로그램은 "날개셋 한글입력기 3.02" 이다. 세벌식의 무한한 가능성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준것이 바로 이 위대한 발명품(나는 그렇게 평가하고 싶다)이다.
정말 단순히 손목이 부담이 없고, 속도나 좀 더 빠르게 나올수 있다는 정도라면 나는 결코 세벌식 자판과 이 프로그램을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

-- 그냥 쓸 때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날개셋을 써 보면 왜 세벌식 최종이 좋은 지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무궁무진한 응용을 할 수 있죠..  “한글이 컴퓨터와 이리도 잘 어울리다니”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입니다. ^^

-- 용묵님은 우리나라 역사에 꼭 남을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문화사에는요.

-- 저는 이미 용묵씨의 <날개셋>은 영원한 한민족의 유산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앞으로 올 발전을 생각하면 가슴마저 뻐근할 정도의 감동을 느끼곤 합니다.

-- 이 프로그램은 프리웨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 10年前、高校生がこれだけ高度なIMEを??で開?するなんて、さすがはIT先進?の韓?。
10년 전에 고등학생이 이만큼 고급 IME를 독학으로 개발하다니, 과연 한국은 IT 선진국이다. (일본인 중에 내 프로그램 사용자)


 

Posted by 사무엘

2010/09/03 08:30 2010/09/0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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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 역에서 느껴지는 애환

* 카테고리를 뭘로 잡아야 할지 난감한 글이다. 철도 얘기, 성경 얘기, 별별 얘기가 다 들어가서... -_-

※ 철도 얘기

서울 지하철 5호선의 서쪽 종점은 잘 알다시피 방화 역이다. 그러나 서쪽 종점이라고 해서 이 역이 5호선 역 전체를 통틀어 서울 최서단에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5호선 최서단 역은 김포공항 역이며, 그 후로 5호선은 선형이 다시 살짝 동쪽으로 바뀐다. 김포 공항을 경유하기 위해 굴곡을 일부러 만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6호선의 최서단 역은 월드컵경기장 역이다. 서울 2기 지하철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월드컵 경기장을 강서구 마곡 지구에 만들지, 은평구 상암동에 만들지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결국 후자로 결정되면서 6호선의 노선에도 그쪽으로 급히 굴곡이 추가된 것이다. 이 때문에 건설업자들이 고생을 좀 했다고 들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조 순 서울 시장의 지시로 마곡 지구의 개발이 무기한 연기되면서, 5호선 마곡 역도 10년이 넘게 미개통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방화 역은 시의 거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종착역답게, 그 인근은 좁은 4차선 도로이고 한가한 베드타운이다. 동쪽 종점인 상일동이나 마천도 비슷한 분위기이다. 본인은 2008년 6월 말, 마곡 역이 거의 12년만에 정식 개통하기로 한 바로 전날, 방화 행 막차를 타고 거기까지 간 후, 근처 PC방에서 외박을 했다. 그리고 새벽 5시 반에 하행 첫 차를 타고 5시 38분경, 갓 개통한 마곡 역의 승강장에 지하철 회사 관계자가 아닌 사람 중에서는 최초로 발을 디뎠다!

이건 완전, 달에 최초로 도착한 아폴로 11호 조종사 같았고, 또 주의 첫 날에 아침 일찍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가는 심정이었다(막 16:1). 본인은 예수님의 부활은 눈으로 못 봤지만 마곡 역의 부활을 맨 먼저 목격한 증인이다. 본인처럼 마곡 역 답사하러 인천에서 미리 찾아와 기다렸다는 어느 철도 덕후도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그 날, 본인도 어차피 혼자 간 게 아니었고, 같은 철도 동호인 후배 친구와 함께 밤을 지새웠다.

본인에게 방화 역은 이런 오덕스러운 추억이 있다. 그런데 방화 역 인근에는 주거 구역만 있는 게 아니다. 국어학에 관심이 많고 동시에 KJV 빌리버이기도 한 본인에게 꽤 큰 의미를 지니는 기관이 두 곳이나 이 지역에 입주해 있다.
하나는 국립 국어원이고, 또 하나는 말씀 보존 학회(이하 말보회)이다. ㅎㅎ

※ 철도 말고 나머지 얘기

다만, 관심 분야가 유사할 뿐이지, 두 곳 모두 본인이 직접적인 인연을 맺은 적은 없는 곳이므로 오해 없기 바란다. 가령, 한글 학회와 국립 국어원은 민간 단체와 정부 기관이라는 차이도 있거니와 정체성도 완전히 다르고, 서로 원수지간까지는 아니어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 그 이유를 근본적으로 파헤치자면 서울대 이 희승 라인과 연세대 최 현배 라인까지 길고 긴 흑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이 글에서 다 다루지는 않겠다. 뭐, 요즘은 어차피 옛날 같은 그런 파벌 싸움 자체가 별로 무의미해지긴 했지만 말이다.

인터넷 게시판을 돌아다니다 보면, 국립 국어원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비판을 한글 학회에다가 하는 사람의 글을 예전에 좀 보곤 했다. 이건 지하철로 비유하자면, 코레일 관할 역 내지 코레일 소속 전동차에서 생긴 불만 사항 민원을 서울 메트로에다가 넣는 것과 같다.
어쨌든, 우리나라의 말글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문화 체육 관광부 소속 정부 기관이 방화동에 있다는 것이 이 글의 요지이다.

그리고 또 말보회도 아주 유명하다. 있는 위치가 하도 상징성이 크다 보니, 우리 진영에서 설교 같은 공식 석상에서 가끔 말보회를 완곡하게 언급할 때 ‘방화동 교회’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킹 제임스 성경에 대해서 제대로 잘 아는 게 아니라 어설프게 들어 본 사람의 머리에는 “KJV = 말보회 = 이 송오 = 피터 럭크만 = 이단”이라는 다중 거부 장치가 겹겹이 설치되어 있다. 이걸 두고 어느 한 쪽만 일방적으로 탓할 수는 없다. 바른 성경에 대한 관념이 없고 성경의 보존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삐뚤어진 신앙도 잘못됐지만, 바른 성경과 바른 교리를 알면서도 진리를 사랑으로 전하지 않고 무례하게 깽판 부리면서 간증을 다 망친 진영도 잘못한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도 남 탓할 자격이 없는 게... KJV를 처음부터 말보회 진영을 통해서 받아들였다면, 난 과격 면에서는 아마 이 송오 목사의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의 전투종족이 되지 않았을지? ㅋㅋㅋㅋ 럭크만 정도의 성경 실력은 없는 주제에 그 사람의 성깔만 Ctrl+C, Ctrl+V가 돼서.. 성경을 무기로 삼아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에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단들 욕하고 까는 글 기고하면서 말이다.
그 사람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오버하느라 기성 교회 사람들 마음을 아주 닫아 버리게 만든 건 분명 잘못이다. 오죽했으면 “말썽 보존 학회”로 전락을.. -_-

“처음에 한국에 변개되지 않은 바른 성경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더라.”(1절) “And 한국 교회는 교리의 혼돈과 공허로 가득한데, 정작 KJV 교계는 여러 파벌들로 갈라져 있으며 기성 교회들로부터 이단으로 찍혔더라.”(2절)
이게 한국 KJV 교회 역사의 간극 이론이 아닌가 싶다. 그 간극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2절을 1절 이후의 시간 순으로 해석하면 간극 이론이고, 2절을 1절이 일어나던 당시의 배경 상황 내지 부연 설명으로 풀이하면 간극을 배제한 해석이 되는 셈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기발하다 ㅋㅋㅋ)

Posted by 사무엘

2010/09/02 09:10 2010/09/0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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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와 더불어 본인에게 21세기 이전에 기차 타고 방문한 추억이 있는 곳은 바로 수원이다. 고등학교 시절, 인텔 ISEF 참가 준비와 교육 때문에 한동안(1999년 3월~4월).. 무려 주말마다 성균관 대학교 수원 캠퍼스를 찾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거사를 치르느라 그 옛날에 휴대전화까지 잠깐 구경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구미와 삼성 하니까 둘 다 경부선 철도가 지나고 삼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산업 도시라는 공통점이 있네? 뭐 그건 그냥 우연의 일치인 것 같고.

저것도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나고 값진 경험인데, 내가 그때는 지리와 교통 쪽 감각이 백지나 다름없는 상태여서 당시에 대한 기록과 기억이 전혀에 가깝게 없다. ㅠ.ㅠ 새마을호나 무궁화호 같은 관념도 없어서 어떤 열차는 좀 으리으리하고 고급스러운데, 어떤 열차는 좌석도 작고 입석 승객까지 있어서 혼잡하다는 식의 인식만 있었다.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집에 돌아갈 때 기차를 잘못 타서 삽질한 적도 있었다.

수원 역에서 성균관대 역까지는 전철로 금방이다. 출구로 나가면 곧바로 야구 연습장이 보였고, 언덕을 내려서 조금 걸어가면 성균관 대학교 이공계 대학 캠퍼스가 나왔다. 당시 지도 교수는 워낙 유명한 분이니 실명을 거론하겠다. 황 대준 교수님의 멀티미디어 연구실에 있었다. 그러면서 거기 랩에 있던 대학원생 형들과도 부대꼈고, 아마 이분들이 지내는 기숙사 내지 대학원생 아파트 구경도 했던 것 같다. 난 그로부터 10년도 더 지나서 이제야 대학원으로 고고씽이구나. ㅠ.ㅠ

그때가 본인 역시 이제 막 도스+C에서 벗어나 윈도우 API+MFC를 같이 공부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때의 대회 준비 경험은 본인의 실력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됐다. 단편적인 프로그래밍 지식뿐만이 아니라 영어 프레젠테이션, 대인 관계, 대학과 대학원의 분위기 같은 것들도.
내가 조금만 더 세상 보는 식견이 넓었으면 그때 마주쳤던 분들에게 훨씬 더 예쁘게-_- 보이고, 그분들에게서 더 많은 걸 배워 올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학 시절 한때는, 밤에 자다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로 ISEF에 다시 나가는 괴상한 꿈을 꾸기도 했다. 그건 아주 한국적인 소재인 데다, 고3 때 입상한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일은 현실에서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본인이 ISEF 첫 출전 티켓을 딴 것도, 전적으로 당시 본인보다 더 뛰어난 작품을 만든 학생은 이듬해에 대학에 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아직 인지도가 부족한 관계로 ISEF 참가 경험은 IOI(국제 정보 올림피아드) 참가와는 달리 입시에서 뭔가 가산점으로 인정이 안 되었다. 그런데 그게 본인에게는 역설적으로 기회로 작용했다. ISEF에 갔다 온 후에도 아예 고3 때 과거 ISEF 작품과는 관계가 없는 작품을 하나 또 만들어서 그건 아예 대상을 받아 버렸기 때문이다. 정올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 아닐지? (경시부였다면 불가능한 일. IOI 참가자는 이제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전까지 KOI에 또 응시할 수 없다.)

첫 참가자인 본인 이후로 ISEF 참가자 교육은 카이스트에서 이뤄지고 있는 걸로 본인은 알고 있다. 그리고 혼자만 가는 게 아니라 최하 두 팀이 가는데, 동 대회에 출전하는 ISEF 참가자들끼리는 서로 그렇게 자주 교류한다거나 친한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후배에게서 들은 증언) 차라리 서로 다른 기수의 대회에 참가한 선후배끼리가 친해진다나?

정보 올림피아드와 관련하여 본인이 방문한 적이 있는 대학으로는 성균관대 말고도 KOI 경시부가 당시 치러졌던 서울대, 그리고 공모부 2차 심사가 열렸던 중앙대(1997)와 숭실대(1998)가 있다. 경시부의 경우, 지방에서 온 애들은 대회 전날의 예비 소집에 참석한 후 무려 학교 근처의 여관에서 자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런 행사들이 대학에서 개최되지 않고 백범 기념관이라든가 정보화 진흥원 본관에서 개최되는 걸로 안다. 기관 이름도 처음엔 정보 문화 센터(ICC)이다가 정보 문화 진흥원(KADO)을 거쳐 지금은 정보화 진흥원(NIA)으로 참 자주 바뀌었다.
옛날에는 역대 수상자를 조회하면서 공모부의 경우 작품명까지 볼 수 있었는데 그건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삭제한 모양이다.

어쨌든 결론은!
본인의 인생에서 정올과 관련된 옛 추억에도 철도가 조금이나마 끼여 있다. 그걸 이제 와서 추적하려고 하니까 쉽지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2 09:01 2010/08/12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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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에는 경북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다.
포항에 있는 본인의 모교인 경북 과학 고등학교도 1993년에 개교했으니 본인이 중· 고등학생 나이이던 당시에는 꽤 최근에 생긴 학교이긴 했으나, 외고는 더욱 나중에 생긴 학교였다.

경북 외고는 1995년에 설립 인가가 나고 1996년 개교로 알고 있고 있는데, 그땐 아직 기숙사나 강당 같은 건물조차 다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런데 학교 홈페이지엔 연혁이 안 나와 있다. -_-)
1996년 개교이면 민족사관 고등학교와 생년이 동일하다. 1995년 중학교 <방학책>(초등학교의 탐구생활에 해당하는 책자?)의 뒷표지 광고에 민족사관 고등학교 1회 입학생 요강이 적혀 있던 걸 기억한다. 물론 살인적으로 까다로운 전형 절차와 우수한 성적, 요구 조건으로 말이다. 내신에 심층 면접에, 나중엔 체력장까지... 흠좀무.

어쨌든 본인은 경북 외고가 그 민사고와 동급으로 그렇게 역사가 짧은 파릇파릇한 학교인지는 그 당시에 잘 몰랐다. 하도 특목고, 특목고 하니까 내가 사는 경북에도 그런 외국어고가 으레 있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다른 과목에 비해 영어가 상대적으로 강하고, 비록 전교 열 손가락 안의 순위까지는 아니어도 평소실력(?)만으로 나름 상위권이고...
머리는 나쁘지 않-_-은 거 같은데 그닥 노력파 성실형은 아니고 자꾸 컴퓨터로 쓸데없는 짓만 하던 본인에게, 당시 중학교 선생님들의 진로 조언은 불 보듯 뻔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공부 열심히 하고 내신 튜닝-_- 해서 외고 가라”였다.
백 번 수긍한다. 내가 선생이어도 본인 같은 학생에겐 그렇게 조언했을 것이다. 뭐 나중엔 정보 올림피아드 입상 실적 덕분에 과학고로 당첨됐지만-_- 말이다.

그러던 차에 본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사실상??)으로 경북 외고와 인연을 맺은 일이 있었다. 바로 1997년 가을, 본인이 중3이던 시절에 거기서 자기네 학교 홍보를 목적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제 1회 외국어 경시대회를 개최했던 것이다. 외국어 경시대회라고 해 봤자 사실상 영어 필기시험이었다.
이 대회의 입상자는 외고에 지원할 때 가산점을 준다는 단서도 당연히 붙었다. 그래서 본인은 그 대회에 우리 중학교에서는 혼자서 참가했다. 덕분에 대회 당일 수업은 공결로 째고, 경북 외고로 고고씽.

깔끔한 붉은 벽돌 건물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때는 이미 이런 특목고에 진학해 있는 외고 재학생들이 가히 하늘처럼 높게 보일 뿐이었다. 시험 치는 느낌이 어땠는지는 13년이나 지난 지금 기억이 날 리가 없고, 어쨌든 그때 본인은 장려상 하나 겨우 건져 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한 게 있다.
그때 본인은 동행하는 인솔 교사가 없이 혼자 기차 타고 타지에 있는 학교에 찾아가서는 시험 치고 돌아왔다!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900m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타지에서 방문할 때는 철도가 딱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이면 본인은 지리 하나도 모르고, 혼자서 기차 탈 줄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어떻게 갔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시험 치고 나서는 확실하게 혼자였다는 게 기억난다. 담임 선생님에게 경과 보고를 공중전화로 하고, 귀가도 다시 기차 타고 스스로 해냈다. 그때 지금처럼 일기를 써 놨으면 그 당시 철도가 어땠는지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기록이 되었을 텐데!

사실 경북 과학고도 포항 역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 남짓한 가까운 거리이다. 포항에 지하철이 있다는 소리는 물론 아니지만, 뭐 1.5km 남짓한 거리니까... 본인은 그것도 까맣게 모르고서 고등학교 시절 3년간을 철도는 전혀 이용하지 않고, 더 멀고 비싼 시외버스만으로 경주와 포항을 왕래했다. 그 정도로 지리에 문외한이었는데 그때 구미 여행은 어떻게 해냈을까?

그때 이후로 본인은 구미를 다시 찾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 경험 덕분에 ‘경북 외고는 구미 역에서 무척 가깝다’는 기억 하나는 지금까지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제 본인이 글을 쓰는 전형적인 방식인, 관련 잡설들을 옴니버스 형태로 나열하는 걸로 글을 맺겠다.

1. 경북 과학고와 외고뿐만 아니라, 초등학교를 제외한 본인의 모교들은 전반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었다. 계림 중학교는 1986년 개교로, 이는 포항 공대의 생년과 카이스트의 학부 개설 연도와 공교롭게도 일치한다. 다만, 본인은 이제 대학원은 역사가 무진장 긴 학교로 가게 된다. ^^;;

2. 그러고 보니 정보 올림피아드 경시 부문의 전신이던 PC 경진대회의 경북 지역 예선은 포항도, 구미도 아닌 안동에서 늘 개최되어 왔다. 안동은 경북 내륙의 중심지이지만 당시 고속도로 하나 없는 교통 불편한 곳이다 보니, 인솔 선생님이 꼬불꼬불한 국도로 차를 몰면서 대회장까지 학생들을 태워다 주었다.

3. 본인에게는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을 한 적이 있고 당시 같은 영어 사교육-_- 학원에서도 각종 대회에서 본인과 1, 2등을 다투는 라이벌 사이이던 여자 동창이 있다. 예쁘고 못 하는 게 없는 모범생 엄친딸이었는데, 이 친구는 결국 경북 외고에 진학했다. 저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를 안 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때 현장에서 걜 만나지는 못했다. (어머니께 고증을 의뢰하니, 어머니 왈, 걔도 그 대회에 응당 참가했고 역시 장려상 받았다고 한다)
본인은 뭐 과학고에 합격했으니, 중학교를 마칠 무렵 서로 축하 전화를 주고받았다. 본인의 어머니와 그 친구 어머니께서 서로 아는 사이여서 말이지..;;;

4. 하지만 과학고도 가 보니, 당시 외국어 경시대회에 참가했던 친구가 그래도 딱 한 명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때 외고에서는 모든 대회 참가자에게 학교 마크가 인쇄된 공책을 사은품으로 줬는데, 본인과 그 친구가 서로 그 공책을 갖고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5. 하긴, 내 기억이 맞다면, 본인이 중학교에 갓 들어간 시절인 199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의 언어 관련 교육 제도에 좀 변화가 생겼다. 논술이 처음으로 부각되고 논술 경시대회라는 게 생긴 게 그때이다. EBS에서 중·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전국에서 동시에 영어 듣기 평가를 시행해서 그 점수 20점이 중간· 기말고사의 영어 점수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 또한 나름 영어 말하기(혼자 웅변이 아니라 연극) 대회도 그때 생겼다.

세월이 흘러 어느 지식인 검색을 보니, 영어 말하기 대회 때 써먹겠다면서 개그 만화 일화 3기 3화 쇼토쿠 태자 대사를 좀 영작해 달라는 요청을 본 기억이 난다. Inside the pillow is full of tuna (베게의 속에는 참치가 가득) ㅋㅋㅋㅋㅋㅋ 이 나라의 미래는 밝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11 08:49 2010/08/11 08:49

나의 운영체제 사용 내력

구경이란 해당 운영체제가 설치된 다른 컴퓨터를 본인의 눈으로 처음으로 직접 보고 잠시나마 다룰 기회가 있었던 때를 말한다.

※ 윈도우 95
출시: 1995년 중반
구경: 1996년 초. 당시 정말 전율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1996년 말. 컴퓨터를 한번 업그레이드 하면서.

※ 윈도우 98
출시: 1998년 중반. 윈도우 95+IE4일 뿐이라는 비아냥거림 잔뜩.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으며, 개선되고 나아진 게 엄청 많음
구경: 1999년 초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0년 후반. 구닥다리 노트북이 장수한 덕분에 95를 굉장히 오래 사용.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은 윈도우 95 환경에서 개발됐다.

※ 윈도우 2000
출시: 2000년 초
구경: 2000년 후반. layered 윈도우 + 마우스 포인터 주변의 그림자가 무척 신기했다.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중반. NT 계열로 갈아타는 데 은근히 오래 걸렸음

※ 윈도우 XP
출시: 2001년 말
구경: 2001년 말. 대학 내의 얼리 어답터 덕분에 꽤 일찍 구경. Luna 화면은 당시 엄청난 충격이었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2년 말. 램 256MB로는 돌리기 좀 무겁다는 걸 실감함.

※ 윈도우 비스타
출시: 2006년 말~2007년 초
구경: 2007년 초. 세벌식 파워업 패치 만드느라 어둠의 경로로 구했음. Aero는 역시 충격과 공포였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2007년 후반, 새 데스크톱 컴퓨터를 장만하면서

※ 윈도우 7
출시: 2009년 중반
구경: 2009년 중반. 윈도우 7은 정식 출시 전부터도 구해다 쓰는 용자들이 워낙 많아서 구경하기 매우 쉬웠음.
본인 컴퓨터의 OS로 사용: Not yet! 회사 컴, 집의 데스크톱과 노트북이 전부 여전히 비스타임.

새로운 윈도우 운영체제가 출시되면 본인이 그걸 실제로 내 컴퓨터에서 쓰게 되기까지 짧게는 1년, 길게는 2년이 넘는 간극이 있어 왔다. 과연 난 7은 언제쯤 써 보게 될까?
하지만 PC 성능의 상향 평준화, 그리고 운영체제의 안정성 증가(운영체제를 재설치할 일이 별로..-_-), 불법 복제 방지용 인증 같은 요인들 때문에 당분간 내 PC가 운영체제를 갈아탈 날은 금방 올 것 같지는 않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09 08:48 2010/08/09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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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잡설

서로 완전히 다른 주제의 글들의 모음인데, 분량상 귀찮아서 한데 뭉뚱그려 올린다. -_-;;

1. 한국인이 어려워하는 영어의 3대 요소

- 관사: 딴 거 필요없고.. 어떨 때 the를 붙이고 어떨 때 안 붙이나? 불특정 개념을 단수로 일컬을 때와 그냥 싸잡아 복수로 지칭할 때의 미묘한 어감 차이는? 생각만 해도 머리에 쥐 난다.
- 시제: 어떨 때 과거형을 쓰고 어떨 때 완료형을 쓰면 되겠는지가 제일 알쏭달쏭하다. 관사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는 이런 걸 거의 따지지 않으나 불행하게도 영어에서는 저게 아주 중요한 개념이다.
- 전치사: 한국어는 간단하게 '-에', '-에서', '-으로'로 딱 떨어지는 게 영어는 정말 헷갈린다. in, on, at 또는 by, with 같은 걸 잘 분간해서 쓰는 사람이라면 영어 걱정 확실하게 놓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미국인은 wear 하나로 끝나는 동사를 끼다, 입다, 쓰다.. 이런 걸 어려워하려나?

2. 스마트폰

스마트폰은 일단 손가락 터치를 주 입력 장치로 사용하는데, 단순 마우스 포인터와는 달리 잘 알다시피 멀티터치가 지원된다. 즉, 둘 이상의 손가락을 동시에 대서 움직인 것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덕분에 타자의 경우 동시치기가 실현 가능하겠다. 그리고 악기를 흉내 내는 앱을 스마트폰으로 만들 수 있다. 피아노 건반도 있고 손으로 조작하는 어지간한 현악기나 타악기도 구현 가능하다.

윈도우 7에서는 멀티터치를 지원하는 모니터로부터 그런 동작을 인식하는 메시지와 API가 추가되었다. 이건 문자 입력에도 직접적으로 적용 가능한 기술인데, 본인은 아직 그걸 접해 보지 못했다. 윈도우 7은 당장 그림판부터가 멀티터치를 지원하기 때문에 여러 손가락으로 색칠을 동시에 하면 그렇게 그려진다. 무척 신기했다.

설마 태블릿처럼 압력까지 인식 가능하려나? 그러면 악기 앱의 경우 소리의 강약도 변화를 줄 수 있고 그래픽 앱이라면 색깔의 강도도 변화를 줄 수 있을 것이다. 상당히 응용 가능성이 많으며, 기존의 마우스 부류의 입력 장치와는 또 차원이 다른 HCI(인간과 기계 사이의 의사소통)의 통로를 제공할 것 같다.
물론 hovering이 안 되고 누른 것만 인식된다는 특성상, 기존 포인팅 장비를 완전히 대체하고 흡수할 것 같지는 않지만.

스마트폰녀 동영상을 보고 생각나서 끄적인 뻘글이다. -_-;; 어쩜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 부르고.. 부럽네. ^^;;; 하지만 난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노트북만 끼고 사는 걸로 충분하다.

3. 고인드립

고인+애드립의 준말인 인터넷 유행어로, 죽은 사람을 쓸데없이 들먹이면서 고인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냥 감성에 호소하는 오류를 조장하는 걸 일컫는 개념이다. 현 진건의 소설 <운수 좋은 날>에서 김 첨지는 오타쿠일 뿐만 아니라 조삼모사 패러디도 구사하고, 술집에서는 친구들에게 아내 '고인드립'까지 쳤는데 이 정도면 그는 21세기 인터넷 유행에 대해 상당한 식견이 있었던 것 같다. ^^;;
그러고 보니 개그 만화 일화 서유기 편의 삼장법사도 저팔계 고인드립을 친다. “뜻있게 죽은 동료로서 저팔계가 마지막 날 한 말을 생각해 보세요.” ㅋㅋㅋㅋ

요즘 도철에서는 신당 역에서 곤충 생태 학습 체험 전시관을 연 모양이던데, “올여름, 곤충 박사가 되어 보세요!”라는 광고 문구를 보니, 개그 만화 3기 2화의 변태 고추잠자리 박사가 딱 생각나더이다. 나 개그 만화 너무 많이 본 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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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6 09:05 2010/08/0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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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 -- 버스 괴담

※ 버스에서 안 내려서 살아난 경우

-- 여고생 봉고차 납치 괴담 (출처: 한국어 위키백과)

어느 여고생이 버스에 타고 있었다. 도중에 탄 어떤 할머니가 그 여고생이 앉은 자리 앞에 와서 서 있었다. 친절한 여고생이 할머니 앉으시라고 자리를 양보하려 하자, 할머니는 몇 번이나 괜찮다면서 사양한다. 거듭된 권유에도 괜찮다는 반응에 여고생은 머쓱해 하다가 자리에 그냥 앉아 있었다.

몇 정거장이 지나고 한참 있다가 갑자기 그 할머니가 여고생에게 노인이 바로 앞에 있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앉아 있다는 둥, 버르장머리 없는 년이라는 둥, 돌연 막말을 퍼부어 대며, 여고생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주위 승객들이 모두 쳐다보기 시작하고 여고생이 어찌할바를 모르다가, "할머니 제가 아까 앉으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욕을 한다. 그 할머니가 버스에서 내리면서 "너 따라와 이년아" 라고 말하면서 여고생에게 버스에서 내릴 것을 종용했다. 억울함을 느낀 여고생이 시비를 가리려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자, 잠자코 있던 버스 기사가 조용히 뒷문을 닫으면서 "학생, 가지 말고 그냥 있어"라고 말한다.

버스 기사의 백밀러에는 아까부터 따라오던 봉고차가 대기하고 있고, 그 할머니는 버스에서 내려서 그 봉고차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ㅎㄷㄷㄷㄷ;;

※ 버스에서 내려서 살아난 경우

-- 본인의 기억을 바탕으로 재구성. 설정이 앞의 괴담보다는 좀 현실성이 떨어진다. 치안이 불안정하고 사람들도 이기적-_-인 중국 대륙 같은 곳에서 일어날 법한 이야기이다.

첩첩산중 오지를 운행하는 시골 버스를 한 젊은 여성 기사가 운전하고 있었다(위험하게도). 시간도 밤이었던 듯? 그런데 치한들이 탑승하여 운전사를 희롱하기 시작했다. 다른 승객도 적은 편은 아니었으나, 못 본 척 아무도 운전사 아가씨를 도와주지 않았다. 이 광경을 보다못한 어느 중년 신사가 혼자 나서서 치한들을 저지하려 나섰지만 주변에 거드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한주먹에 나가떨어졌다.
그러니 승객들은 더욱 겁을 먹었으며, 치한들은 더욱 대담해져서 아예 차를 세우고 운전사를 끌고 나가 밖에서 그녀를 욕보이고 말았다. 흠좀무..;; 도대체 그 동안 다른 승객들은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잠시 후 치한과 운전사는 다시 차에 올라탔는데.. 운전사는 갑자기 다른 승객도 아니고 아까 그 중년 신사를 가리키며 차에서 내리라고 말했다. 당신 같은 무능한 남자는 버스에 탈 자격이 없다고 모욕까지 주면서 말이다. 영문을 모르는 중년 신사는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주변 승객들은 그저 ㅋㄷㅋㄷ거릴 뿐이었고, 아예 신사의 짐까지 창밖으로 던지면서 그를 차에서 강제로 쫓아내 버렸다. 버스는 다시 출발.

그 뒤의 스토리는 뻔하다.
그 여성 운전사는 자기를 구해 주려 한 중년 신사를 내려 보낸 후, 이를 악물고 악셀을 밟아서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버스채로 절벽으로 추락해 버렸다. 나쁜 치한과 더 나쁜 승객들을 포함한 전원 사망.
중년 신사는 이 사고 소식을 며칠 후 신문으로 접하고는 슬피 울었다고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20 08:50 2010/07/20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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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잡설

1. 오늘날 철도가 도로 교통에 비해 본질적으로 우월한 점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만약 버스도 철도처럼 자신만의 전용 도로를 확보하고 완벽한 정시성을 갖춘다면 철도가 도로 교통에 비해 경쟁력이 있다고 볼 수 있게 될까?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다 보면, 결국 21세기에 장거리 간선 교통수단으로서 철도가 차별화를 이루고 살 길이란 오로지 고속철(동력원은 전기)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버스가 전용 도로 등 다른 건 다 따라하더라도, 육안과 핸들로 조향하는 육상 교통수단이 시속 300으로 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2.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스마트폰(과 그와 같은 부류의 초소형 컴퓨터 기기)은 걸어 다니면서 문자 입력이 가능하다는 게 큰 장점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그리고 긋는 것처럼 지속적으로 정확한 행동이 필요한 게 아니라, 특정 버튼 지점을 꾹 누르는 ‘순간’에 입력이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배나 자동차 내부처럼 주변이 막 흔들리는 곳에서도 글자 입력을 정확하게 할 수 있으며, 이런 엄청난 장점은 심지어 기계식 타자기도 갖고 있다.
그러나 노트북과 타자기는 길거리에서 걸어 다니면서 쓸 수 있을 정도로 작지는 않으므로 앞의 문맥에서는 스마트폰만이 조건을 만족하는 셈. 비록 컴퓨터 키보드보다는 버튼 수가 적고 입력 속도가 훨씬 더 느리지만, 나름 요긴한 점이 있다.

3. 앞바퀴와 뒷바퀴의 크기가 완전히 같아지는 트럭은 2.5톤 규모부터인가? 평소에 눈썰미 있게 보지는 않았는데 갑자기 궁금하다. 소형인 1톤 트럭은 당연히 앞바퀴가 뒷바퀴보다 훨씬 더 크다. 언제부터 크기가 같아지는지... 아시는 분은 답변 부탁.
우리나라는 그러고 보니 엔진룸이 운전석 앞에 있는 트럭이 없다. 미국에서는 아주 쉽게 볼 수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승용차급 크기인 400~700kg급 픽업도 옛날에는 포니 개조 차량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수요가 없어서 그런지 사라진 지 오래. 피아노 한 대 정도 싣는 용도로는 딱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4. 살인· 강간처럼 사람을 물리적으로 해치는 흉악 범죄도 아니고, 그렇다고 국가 이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이적· 반역 행위도 아닌데 굉장히 무겁게 처벌하는 범죄가 있다. 바로 위조지폐이다. 위조지폐는 특정 범죄 가중 처벌법이 적용되어 사형, 무기 혹은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해질 수 있으며, 이는 살인과 동일한 형량이다! 장난 전화만큼이나 장난으로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조지폐는 한 나라의 경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어지럽히는 매우 중대한 범죄이다. 그리고 이거 잡아내는 기술도 굉장히 발달해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바로 잡힌다.
한국에서는 서 태석 씨가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위폐 감별사로 유명하다. 마치 과거 철도청 시절 열차 시각표 작성의 달인 김 영근 씨처럼, 학벌 없이 장인 정신과 근성만으로 자기 분야의 프로가 된 존경스러운 분이다.

5.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민간인용 지도에 표기가 일부러 금지되어 있는 아이템은 청와대, 발전소, 군부대, 교도소 말고 더 있나? 청와대야 뭐 전국에서 유일한 장소이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위치를 모르는 사람이야 없지만, 가끔은 이런 비밀스러운 조직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고 거기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업무 분위기는 어떨까 궁금해진다. 나라에서 보유하고 있는 금, 외화, 석유 같은 것도 관리하는 비밀 장소가 따로 있을 것이다.
수능 출제가 이뤄지는 장소, 대학에서 학생들의 학적 정보가 저장된 서버가 있는 위치,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는데 특실 두 칸은 국가 귀빈용으로 따로 떼어 놓았다는 KTX 모 편성, 그리고 국가 정보원 직원(자기네들끼리 자기 소속을 회사라고 은어로 일컬음)의 생활 같은 것 말이다. ^^

6. 우리 교회에는 생선을 정말 충격과 공포스럽게 드시는 분이 계신다. 생선을 한번 들면, 머리부터 시작해서 꼬리지느러미까지 순서대로 입안으로 들어가는데, 머리와 내장, 등뼈까지 다 먹어 치워서 폐기물이 “하나도 안 남는다고 한다.” 세상에!
하긴, 인간의 위는 생선뼈 정도는 다 소화해 낼 정도로 굉장히 튼튼하다고 한다. 오히려 너무 맵고 짠 음식에 약하다고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 딱딱하고 날카롭고 목에 걸리기 쉬운 뼈를 어떻게 다 먹는지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16 09:05 2010/07/16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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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클럽과의 인연

2005년 초의 일이다. 그때 본인은 인터넷 상으로 짜증나는 소식을 하나 접했다.
고려 대학교의 한 모 교수(정확히는 이미 명예 교수 랭킹인)가 일본의 무슨 출판물에다가 “일제 식민 통치는 조선에게 축복”이었다고 기고를 했다고 한다. 한국인치고 상식적으로 이 한 줄만 딱 접하고서 열받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이 사람을 옹호하고 나서는 사람이 등장했다. 본인도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친일파 문제라는 것에 대해서 평균적인 국민들이 생각하는 수준의 막연한 피해의식을 갖고 있었던지라,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그쪽 패거리들이 또 고루고루 나서서 ㅈㄹ을 하는군.. 이번엔 대체 누구야?’ 정도의 생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필 2005년에는 연초부터 일명 ‘박 정희 배틀’이 벌어졌다. <그때 그 사람들> 같은 영화도 개봉해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여차여차 하다 보니 관람하게 됐고, <만화 박정희>라는 책도 나왔다. 박 정희 전대통령이 한글로 써 놓은 광화문 현판을 철거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한글 진영 내부에서도 대립이 있었다. 다 비슷한 시기이다! 이게 다 우연일까?

게다가 압권이었던 것은 CBS 방송국에서 벌어진 공개 토론. 바로 이를 계기로 본인 역시 지 만원이라는 사람을 알게 됐으며, 시스템 클럽이라는 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게 됐다. 그런데 그 공개 토론을 계기로 지 박사는 젊은이들에게 완전히 미친 수꼴 개새끼로 확실하게 인증 받게 됐으니 참 안타까운 노릇이다. 사회자조차 그다지 중립적인 위치에 안 서고 진 중권 씨와 한 패가 되어 지 박사를 멸시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좀 보기 안 좋았다. (성공회대 교수라는데 성향 면에서 뭘 더 바라겠는가.)

도대체 지 만원이라는 사람은 어디서 갑툭튀한 사람인가? 당사자에게는 좀 죄송한 얘기지만, 솔직히 인상이 좀 얍실한 족제비-_- 같고 영화로 치면 주동 인물보다는 반동 인물, 진짜 친일파처럼 보이긴 했다. O<-<
궁금해졌다. 그래서 시스템 클럽 글을 읽고 그의 프로필을 찾아보았다. 외부로도 보도가 되어 그의 이미지를 더욱 골수 수꼴로 굳히는 데 일조한 글로는,

<민족, 외세만 아는 바퀴벌레들>: 공산주의, 좌익, 운동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감
<역대 대통령의 자질 추이>: 이 승만, 박 정희, 전 두환만 우왕ㅋ굳ㅋ이었고  그 후대 대통령들은 타락일로

이런 것도 있다.
그러나...
그는 친일파가 결코 아니며 그런 글들을 쓰는 것이 애국심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본인은 느낄 수 있었다. 김 완섭 같은 싸이코 부류가 절대 아니다! 일본 내지 친일파 후손하고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며, 군 복무도 월남전 참전까지 하면서 명예롭게 마쳤다. 공부도 정말 열심히 해서 미 해군 대학원에서 응용 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그의 말마따나 자신만의 정리와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일평생을 자기 계발과 교양 수련에 투자하고 살았으며,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정말 대쪽같은 분이다. 본인은 진 중권 씨는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상적으로 지 박사의 반대편에 선 사람 중에, 저 정도로 대인배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

지 박사는 20세기까지만 해도 시스템 공학자 내지 군사 평론가를 비롯해 자기 전문 분야의 프리랜서로 자유분방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놈의 김 대중 정권 때부터 나라에서 하는 짓을 보니까 이 반역 행위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본격적으로, 한 2002년부터 본업을 버리고 시사 논객으로 악역을 자처하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전혀 청렴하지도, 도덕적이지도 않은 민주화 패거리 저질 정치인들이.. 능력면에서는 자기보다 훨씬 더 뛰어났던 옛날 정치인의 도덕성(?)을 욕하면서 그들이 만들어 놓은 나라 기강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걸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 살짝 수구 극우 성향이고 시국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음모론스럽게 확대 해석하는 면모가 좀 있긴 하다. 그러나 그 정도는 사상의 자유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허용할 만한 수준이다. 음모론이야 반대편 진영도 어차피 만들어 내기는 마찬가지이다. 천안함에 대해서, 미국에 대해서 등등등.. 지 박사의 주장이 선동조라면, "우리가 읽는 성경에서 13구절이나 통째로 삭제되고 무려 6만 개의 단어가 변개됐다"는 주장도 충격적이고 선동조이긴 마찬가지이다.

고려대 교수의 문제의 발언도 “조선이 러시아에게 안 먹히고 일제에게 먹힌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는 요지였다. 그에 대해서 “차라리 러시아가 낫지 일제는 훨씬 더 막장이었다”라고 정당한 반론을 할지언정, 앞뒤 문맥 다 떼어내고 “자립할 능력이 없는 조센징을 일제가 보살펴 준 건 축복이었다”고 말을 완전히 곡해하여 사람 매장하는 건, 인간이 해서는 안 될 짓이지 않은가!

본인은 예전에 “그나마 숙군 작업부터 한 뒤에 6 25가 터진 건 천만다행이었다”라고 글을 쓴 적이 있다. 이걸 마치 “김 용묵이라는 작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가 터진 게 잘 되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떠벌리고 다닌다”라고 왜곡하는 것과 똑같은 맥락인 것이다. 난독증의 결과는 이렇게 무섭다.

본인은 지 박사의 행적에서 공 병우 박사의 정신을 새삼 느꼈다. 본업을 버리고 생뚱맞은 분야로 뛰어든 점, 공권력의 탄압을 받은 점(공 박사는 남산으로, 지 박사는 광주로. -_-)이 말이다. 특히 지 박사가 5 18 사태에 대해서 야사를 캐고 자료 모으는 건, 공 박사 버전으로 치면 과거 글자판 제정 과정의 흑역사를 추적하는 수준과 맞먹는다.

물론 본인은 이 승만과 박 정희에 대한 견해 외에 너무 전문적인 분야에 대해서는 그의 견해에 다 동감하지는 않는다. 솔직히 말해 잘 모르며,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단지 그의 자세를 높게 사고 존경할 뿐이다. 요즘 세상에 색깔 구분을 명확하게 하고서 ‘빨갱이를 빨갱이라고 하지 않는 자가 바로 빨갱이이다’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 얼마나 될까? 비록 빨갱이의 기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저렇게 분명한 흑백논리 자체는 성경적으로 매우 바람직한 사고방식이다. 빨갱이 대신에 죄나 지옥 같은 개념을 집어넣어 봐라. (게다가 지 박사는 예수 믿는 사람도 아닌데!)

일제 강점기가 ‘러시아 강점기에 비해서’ 축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본인은 아직 이 나라에 지 만원 박사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심지어 북한 주민 중에도 지 박사를 알고 존경하는 사람이 다수 있다는 건 상식. 지금 내가 이 정도 수준으로 지 박사를 지지하고 존경하는 티를 공개적으로 낸 것만으로도 본인을 싫어하게 되고 떠나고, 심지어 <날개셋> 사용마저 보이콧한 사람이 좀 있다. ^^;;; 지 만원 박사의 사상이 뭐가 그렇게도 악하나? 정말 이해가 안 되는데... 얘기나 좀 들어 보고 싶지만, 그들은 그런 대화조차도 원하지 않을 정도로 마음을 꽉 닫아 놓고 있을 것이다. 그럼 평생 그렇게 살지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7/02 08:30 2010/07/02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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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지식과 실무 지식

일반적으로 대학교 전산과는 무슨 비주얼 C++ IDE 사용법이나 C/C++ 문법 같은 걸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그 정도로 특정 플랫폼에 종속적인 툴이라든가 테크닉은 학생이 알아서 익히는 걸로 간주하며, 학교에서 따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런 걸 전문으로 가르치는 곳이라면 아주 실무 위주 교육의 IT 학원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반면 대학교 전산과에서 가르치는 건 오늘날 디지털 컴퓨터의 이론적 기반이 되는 배경 지식이다. 튜링 기계, 시간 복잡도, 형식 언어, 오토마타, 유한 상태 기계, 계산 이론 같은 것들. 오늘날 무수한 IT 노동자들이 생업의 수단으로 삼는 툴과 테크닉들을, 처음에 만든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그런 걸 만들었을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배운다. 아주 고차원적인 방향으로 머리를 단련하는 것이다.

비슷한 논리를 국문과에다가도 적용해 보자.
본인은 국문학 전공자라고 해서 표준어/맞춤법을 다 꿰뚫고 있다거나 우리말의 달인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알맞은’과 ‘알맞는’ 중 무엇이 맞는지, ‘내일’을 나타내는 순우리말이 있는지, 어떨 때 ‘잘못’을 쓰고 어떨 때 ‘잘 못’을 쓰는지, ㅐ와 ㅔ의 발음 차이가 뭔지 같은 것들은.. 물론 국문학 전공자라면 응당 알아야 하는 내용이지만 대학교의 국문과가 저런 단편적인 지식만--전산과로 치면 프로그래밍 언어 스킬-- 주입하는 곳은 결코 아닐 거라는 게 본인의 생각이다.

저런 건, 저런 쪽으로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련 서적 한두 권만 사서 공부해서 쉽게 익힐 수 있는 내용이다. 대학에서는 그런 지엽적인 게 아니라 더 어려운 걸 가르칠 것이다. 국어학 분야로 한정짓자면 한국어가 세계 각국의 언어들과 비교해서 무엇이 특이한지, 이 단어의 품사가 무엇이고 형태소 분석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중세 국어는 현대 국어와 무엇이 달랐는지 같은 것들.. 그러고 보니 국문과는 뭔가 언어학 계열 아니면 문예 창작 계열로 나뉘는 듯.

영문학을 전공하고도 미국인과 free talking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전산학을 전공하고도 컴퓨터 조립을 못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렇듯, 어느 분야를 가도 실무 지식과 이론 지식은 뭔가 살짝 괴리가 있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아는 국문과 출신의 지인 중에는, 학창 시절에 수능 언어 영역 110점을 어렵지 않게 넘기는 친구도 있었고(아버지가 소설가라고 한다!), 일반인은 400~600점대밖에 안 나온다는 KBS 한국어 능력 시험에서 무려 800점을 넘긴 친구도 있었다. 물론 둘 다 여자. 차라리 텝스를 800 넘으라면 공부 좀 해서 넘겠는데, 저 시험은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이다. 한 번 응시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시험 수준을 안다. -_-;;;
문과 머리와 이과 머리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

* * * * * * * * * *
저는 학부를 졸업한 지 거의 5년만에 풀타임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올가을부터 학생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대학원에 합격했거든요. (연세 대학교 언어 정보학 협동 과정)
블로그 말고 제 홈페이지 대문이나 방명록을 보신 분이라면 이미 눈치 챘을 겁니다.
윗글에서 언급한 딱 국어학 + 전산학을 결부 지은 협동 과정이지요.

Posted by 사무엘

2010/06/19 13:35 2010/06/19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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