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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을 오르는 이유는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마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처럼, 좋게 말하면 심오하고 나쁘게 말하면 '그래서 뭐 어쨌다고?' 병맛스러운 저 말을 한 사람은 20세기 초에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인 조지 맬러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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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저 말이 나온 주변 맥락과 뉘앙스는 그렇게 고상하지 않았다.
"왜 산을 오르시는지?" / "(아 씨바, 날파리 같은 기자들한테 같은 대답 90번만 더 하면 100번이네...) 왜긴, 산이 거기 있으니까 오르는 거지 딴 이유가 있겠어요?" 이런 성가신 상황이었다. -_-;;
실제로 저 사람은 성격이 꽤 저돌· 괴팍· 충동적이고 다혈질적이었다. 괄호 안의 말은 내가 아무 근거 없이 상상만으로 윤색해 넣은 게 아니다.

난 이말년 씨리즈 <아낌없이 아끼는 사나이> 편에서 저 말을 난생 처음으로 접했다. 거기서는 "내가 아끼는 이유는 아낄 것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라고 패러디됐다. 아 이말년은 교양과 상식을 더해 주는 유익한 만화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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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드립은 나라도 치겠다. "내가 <날개셋> 한글 입력기를 자꾸 버전업 하는 이유는 코딩할 게 거기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1924년에 해발 고도가 8848m에 달하는 에베레스트 산을 올랐다. 정상을 불과 몇백 m (높이) 정도만 남긴 제6캠프에서 마지막 일꾼 및 셰르파 가이드들과 작별한 뒤, 제7 캠프를 만들 재료들을 들고 뿌연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이제 산소통 운반을 도와 주는 앤드루 어빈이라는 파트너하고만 동행했다. 그 시절엔 산소통이 지금보다 더 크고 무거웠기 때문이다.
목적지와 가까워질수록 보급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이탈한다는 점에서는 마치 연료통을 하나 둘 떼어내면서 상승하는 우주선 로켓과도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그는 제7 캠프를 넘어선 뒤, 악천후 속에서 그대로 실종되어 버렸고 영원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나중에 그가 빙벽에다 꽂은 피켈이 발견되었지만, 올라가는 중에 박은 건지 아니면 하산 중에 박은 건지 판별할 수 없었다. 즉, 그가 사고로 죽긴 했지만 에베레스트 정상을 실제로 정복했느냐 안 했느냐는 산악계의 긴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영국은 10여 년 전에 남극점과 북극점의 최초 정복도 대영제국 소속이 아닌 사람에게 뺏긴 적이 있던지라, 에베레스트 산의 최초 정복만은 기필코 자국인이 이뤄 내길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공식적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최초로 정복한 걸로 인정되는 사람은 뉴질랜드 출신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셰르파) 듀엣이다. 시기는 1953년. 에휴, 그래도 뉴질랜드 정도만 해도 영연방의 범주에는 들지 않나.

만약 맬러리가 이들보다도 30년 가까이 먼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밟았다면 이는 엄청난 일이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당시의 날씨와 열악한 장비를 감안하건대 그건 불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한다. (하산 중이 아닌 등산 중에 죽었을 거다)
수학으로 치면 페르마의 대정리는 1990년대에 상상을 초월하게 복잡한 현대 수학 이론을 총동원해서야 겨우 증명이 완결됐는데, 설마 1600년대 사람인 페르마가 수학적으로 아무 오류 없이 그 명제를 완벽하게 증명했을 것 같지는 않다고 추정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고인의 유품 중에 정상 인증샷을 찍은 카메라 필름이라도 있었으면 정상 정복 여부 논란이 확실하게 종결됐을 텐데 그게 발견되지 못했던가 아니면 시간이 너무 오래 되어 필름이 다 망가졌던가.. 아무튼 그 방법으로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힐러리/텐징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도달했을 때에도 주변에는 깃발이라든가 인간이 닿은 흔적 같은 건 주변에 전혀 없었고 말이다.

1924년으로부터 무려 75년이 지난 1999년 5월에는 국제적으로 조직된 수색단의 수색에 의해 조지 맬러리의 시신이 드디어 발견되었다. 타이타닉 호도 1912년에 침몰했고 잠수정에 의해 침몰 잔해가 최초로 발견된 게 1985년인가 1986년이니, 시간 간격(74년)이 서로 비슷하다.

시신 사진 보기

등산복은 상당 부분 삭아 없어졌지만 추운 날씨 덕에 고인을 알아볼 수는 있는 형태였다. 시신은 앞으로 엎드린 자세였고, 동선을 재구성해 보니 산소도 부족하고 너무 숨가쁘고 힘든 상황에서 아마 추락사를 했을 거라는 결론이 도출됐다고 한다.
실제로 저런 고산 지대에 폐활량 훈련을 따로 받지 않은 일반인이 내던져지면, 한 발자국만 내디뎌도 숨이 너무 차서 견딜 수가 없어진댄다. 이거 무슨 우주 비행사나 전투기 조종사가 받는 G 견디기 훈련도 아니고..

맬러리는 저렇게 시신이라도 발견된 반면, 파트너인 앤드루 어빈은 여전히 아무 흔적조차 아직까지 발견되지 못한 증발 상태이다. 에베레스트 산은 히말라야 산맥의 산들 중에 워낙 유명하고 등산로도 다 개척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일부 운 나쁜 산악인들은 등반을 시도했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공동묘지라는 타이틀이 괜히 붙은 게 아니라고 한다.

페르시아의 왕자나 툼 레이더 같은 게임이야 분위기 내는 차원에서 던전 한쪽 구석에 해골이 놓여 있는 반면, 저기는 해골이 실사판으로 존재한다. 지나가는 등산가들은 그걸 "그저 그러려니" 하는 생각으로 보고 넘어간다. "나는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한편, 맬러리 이후에 에베레스트 산을 확실하게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가이는 서로 정말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정상을 몇 발자국 앞두고 서로 "니가 먼저 가라" 그랬을 정도로. 의 좋은 형제 그 자체였다.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 <서유기 -- 여행의 끝>과는 정말 대조되는 장면이다.

정상 인증샷에는 온통 텐징의 사진만 있고 힐러리의 사진은 없는데.. 원주민인 텐징이 카메라를 다루는 방법을 몰라서 힐러리가 찍은 사진만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딱히 남에게 카메라 사용법을 가르칠 만한 상황은 못 됐다"는 게 그의 공식적인 답변이다. 그땐 카메라가 더 크고 무겁고 복잡했으며, 요즘처럼 스마트폰에 셀카봉이 있던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어차피 내려갈 거 왜 산을 오릅니까?"라고만 생각하면 등산만치 삽질스러운 짓도 별로 없을 거다. 딱히 운동이나 경치 감상, 탐험에 애착이 없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질문을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삽니까?" 정도의 어리석은 질문으로 치부하는 산악인들은 오늘도 산을 오른다.
난 그 정도로 거창한 이념은 없고, 그냥 운동과 경치 감상, 탐험을 목적으로 요 근래에 등산을 좀 시작하고 있다. 높이가 에베레스트의 10%도 채 안 되는 산들이만. ^^

Posted by 사무엘

2016/05/03 19:37 2016/05/0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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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양 아래

개그에 장난끼가 농후하던 <디 인터뷰>보다야 훨씬 더 고퀄이고 진지하고 고증 잘 됐고,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외국 영화가 하나 만들어져 나왔다. 감독은 러시아 사람임. 본인은 바로 극장에 가서 관람했다. 이런 진귀한 영상은 돈 주고 볼 가치가 있다.
제목이 태양 아래(under the sun)라니, 영락없이 전도서의 표현에서 모티브를 딴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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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엔 <태양의 후예>라는 드라마가 그야말로 국내외로 초대박을 쳤는데, 한편으로 뭔가 반인륜 범죄를 폭로하는 영상물에도 '태양'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우가 있다. 국내에 마루타라고 소개되었던 1988년작 고어 영화 <흑태양 731>도 영어 제목은 the men BEHIND the sun이다. 물론, 이제 와서 북괴는 잔학함(함수의 특정 지점 최대값)과 지속 기간(함수의 구간 적분값)이 둘 모두 과거 일제를 능가하고 있긴 하다만 말이다.

<태양 아래>는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이지만 딱히 스릴 넘치게 싸우고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전혀 없다. 이건 탈북자나 북한 지하 교회, 국경의 버려진 꽃제비나 정치범 수용소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며, 오히려 완전히 반대다.
북한이 외국인에게 어느 정도 촬영해도 좋다고 허가를 했을 정도로, 평양에서 핵심계층으로 최상위급으로 잘사는 어느 집안의 애가 2014년도 김 일성 탄신일(태양절) 행사를 앞두고 소년단에 가입하고 행사 준비에 어떻게 투입되는지를 굉장히 잘 묘사해 놓은 일종의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러니 잘 조작되고 각본대로 돌아가고, 북이 찍어도 좋다고 OK 한 장면 위주로 영화를 만든 건데 애초에 그런 위기나 돌발상황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런 장면에다가 감독이 위험을 무릅쓰고 추가로 몰래 찍은 북한의 민낯 폭로 장면이 들어갔을 뿐이다.

영화에서 먼저 인상적으로 와 닿았던 건 언어와 말투다.
이 영화에는 북한 사람들의 라이브 실황이 담겨 있다. 남한 사람이나 다른 외국인, 재외 교포가 북한 사람을 어설프게 연기한 게 아니다.
먼 옛날, 초등학교 사회/도덕 시간에 교과서에서 "남과 북은 언어도 차츰 이질감이 생기고 있다"의 예로 딱 한 번 들은 걸로 기억하는 북한말 '마사지다'(못 쓰도록 망가지다)를 현지인이 구사하는 걸 난생 처음 봤다. 저 영화 중에 나온다.
" '입빠이'는 일본어 잔재이니 쓰지 맙시다" 이런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일본 사람이 직접 저 말을 쓰는 걸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에서 봤을 때 신기하게 느낀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평양 사람들이 대놓고 "일정이 급하지비. 날래 하라우. 내레 죽겠시요." 이렇게 사투리를 구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신이 보낸 사람>에서는 남한의 배우가 종결어미만 저렇게 어설프게 북한 말 흉내를 내면서 북한 사람 연기를 했지만, 현실적으로 진짜로 어색하고 북한말처럼 느껴지는 요소는 내가 이 자리에서 차마 흉내내기 어려운 고유한 억양이더라.

학교에서는 한복을 입은 여선생이 김 일성 수령님의 리즈 시절 행적을 설파한다. 사악한 왜놈과 지주놈들을 방법했으며, 1950년에 원쑤 미국놈들이 백두조선을 침략했을 때 전투기를 무슨 척 노리스처럼 빵~ 하고 떨어뜨리면서 무용담을 남겼다고 가르친다.
애들이 언제부터 세뇌 받았는지 "동방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고운 나라래서 이름도 '조선'이래요. 아~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이런 오글거리는 노래를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부른다. 여기가 정녕 2016년에 서울에서 불과 200km쯤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이란 말인가... 연기가 아니라 라이브 실황??

수령님의 탄신일이 다가오니 평양의 어린이들은 다들 온갖 매스게임에 동원된다. 체제 선전 내지 외화벌이용으로. 저것들 정말 얼마나 연습해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2012년쯤이던가, 이 명박 대통령이 이 태양절 행사를 겨냥해서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에 돈지랄 안 하면 인민이 얼마든지 더 먹고 살 수 있다"라는 요지로 살짝 쿠사리를 먹였더니.. (말 표현을 대놓고 저렇게 한 건 당연히 아니지만, 뜻은 통하게)
북에서는 발끈 해서 "우리의 최고존엄을 모독한 불구대천의 원쑤 쥐명박 역적패당 무리를 죽탕치자!!"라는 구호로 또 인민들을 끌어들이며 더 지X을 해 댔다. 이에 대해 더 자세한 사항은 옛날 글을 참고할 것.
그런 식의 인민 동원이 내부적으로 어떻게 이뤄지고 각본이 어떻게 짜여지는지, 저거 연기를 하다가 어떤 NG가 나기도 하는지를 저 영화를 보면 얼추 알 수 있다.

그렇게 밤낮으로 안무 공연 연습을 하던 중, 여자애 하나가 발목이 삐어서 병원 입원 신세를 지게 됐다.
그러자 학교 선생과 급우들이 단체로 문병을 가는 장면도 선전용으로 취재해서 내보냈는데.. 선물에 잔뜩 둘러싸여 있는 당사자는 "저는 수령님의 은덕으로 완치 중입니다. 당장 내일이라도 복귀하겠습니다" 이러고, 선생과 급우들은 "네가 없으니 너무 가슴이 아파 연습이 안 될 지경이야. 동무야, 빨리 복귀해서 같이 자리를 빛내자" 대사를 카메라 앞에서 읊어 댄다..

다친 당사자는 속으로 얼~마나 압박을 느꼈을까..? ㅠㅠ 이거 뭐 한 번만 더 다쳐서 병원 갔다가는 나가 죽어야 하지 싶다. 사실, 북한은 자살조차 했다가는 가족에게 뒤끝 해코지가 가는 곳이긴 하다만..;;

북한은 정말 개인은 없고 오로지 집단, 당만이 존재하는 숨막히는 곳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완벽한 실사판이다.
임금님이 아주 아름다운 어의를 입고 계신다고 침이 마르도록 아부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임금님이 벌거벗었네?" 그랬다가는 가족이 다 수용소로 끌려가는 곳. 그게 동화와 다른 점일 뿐이다.

영화는 제일 압권인 장면을 맨 마지막에 보여준다. 주인공인 북한 소녀(진미)에게 어느 기자가 "이제 소년단 가입해서 빨간 머플러 받으니 뭐가 좋을 거 같아요?"라고 슬쩍 물었는데.. 얘는 오로지 각본 대사만 읊지 자기 생각을 말을 못 하고 울먹인다.
"좀 서정적인 동시 같은 거 생각나는 거 없어요?"라는 질문에 즉시 튀어나오는 건 "나는 소년단에 가입하면서 위대하신 김일성 수령님 ..." 어쩌구저쩌구다.

이 영화를 찍은 만스키 감독은 "북한에 살지 않는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와 삶이 얼마나 행운인지, 북한에서 반인륜적인 범죄가 아직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그래서 난 지금으로부터 70여 년 전, 한반도 전체를 이런 생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반쪽에나마 자유를 선사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했던 그 남조선 할배가 떠올랐다.

내치에서 잘못한 것, 병크와 과오도 많았지만 공로가 과오를 넘사벽급으로 압도한다고밖에 볼 수 없다. "ㅇㅅㅁ 없었으면 적화통일"은 "ㅂㅈㅎ 없었으면 아직도 보릿고개"보다야 훨씬 더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사실이다. 그 할배에 대해서 뭐 부정선거, 야당 탄압, 다리 끊고 도망한 거(?) 그거야 결과만 보면 뭐 잘못한 거니 더 할 말이 없는데, 딴 건 몰라도 분단의 원흉이라고?? 이건 한 마디로 정신병자 급의 미친 소리다.

난 자유가 없는 곳에서 살았으면 일찌감치 미쳐 버리거나 자살했지 싶다. 내 인생 최고의 업적인 날개셋 한글 입력기도, <음란한 성경은 가라> 같은 글도 자유가 있으니 만들어질 수 있었지. 난 남조선 정도의 통제나 억압도 못 견뎌서(교육제도, 군대 문제) 옛날엔 개 깽판 난리를 쳤는데 하물며 북에서는 상상도 하기 싫다.

한편으로 ㅅㅇㅁ 같은 사악한 미국 서식 종북충들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평양은 참 살기 좋은 도시예요" 저런 악한 인간들이 버젓이 활개를 치는데 지금이 어디 겨우 일베충 따위나 욕하고 있을 때냐?
"남이나 북이나 '똑같다' " 이러는 인간들하고도 난 정말 상종을 하고 싶지 않다.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나라가 마음에 안 들고 현 대통령이 싫고 더러운 감정을 표출할 게 있더라도, 정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지키면서 해야 하는 법이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이지 좌우 이념 문제가 아니다.

저런 악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서 저 무리들과 공존? 통일?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저기엔 절대 침묵하면서 일본 욕만 하고 민족 팔고 통일 파는 그 어떤 짓거리들도 내 경험상 다~ 멍청하거나 사악한 수작이다. 그놈의 전쟁이 무서워서 저 체제를 무너뜨릴 수가 없다면야 차라리 영구 분단을 유지하면서 놈들을 고립시켜서 말려 죽이고 굶겨 죽이기라도 하는 게 100배 1000배 나은 전략이지.

이 문제에 관해서는 난 그 어떤 금전적인 손해나 인간 관계 단절을 감수하고라도 한 치도 뒤로 물러서고 싶지 않다. 악의 제국을 미화하면서 자국 정부과 국민을 이간질시키는 악한 무리들은 대한민국 땅에서 썩 꺼질지어다.

영화 제목에서 '태양'이란 김씨 왕조의 자칭 타이틀을 풍자하여 붙은 단어이다. 아래 성경 말씀은 굳이 북한 왕조 같은 곳이 아니어도 보편적인 세상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겠지만, 이북 저 동네는 정말 이 말씀이 절실히 적용된다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해 아래에서(under the sun) 이루어진 모든 일을 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로다. (전 1:14)

Posted by 사무엘

2016/05/01 08:38 2016/05/01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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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를 입력· 편집하는 기능을 제공하는 에디터나 개발툴, 워드 프로세서에는 응당 텍스트를 검색하는 기능이 있다.
찾기 명령은 아무래도 바꾸기 명령과도 같이 쓰이는 경우가 많으니 이건 편집 기능의 일종으로 간주되며, 보통은 '편집' 메뉴의 하위 항목으로 들어가는 편이다.
그러나 편집 메뉴가 이미 다른 기능들로 너무 비대한 상태이거나, cursor를 원하는 조건대로 이동시키는 찾기/탐색 기능이 별도로 굉장히 전문적으로 발달해 있는 경우, '검색(Search)'이라는 메뉴가 따로 존재하기도 한다.

이 메뉴 구성은 프로그램들마다 제각각이다.
과거에 아래아한글은 1.x대까지 '찾기' 메뉴가 별도로 있다가 2.1부터 '편집'으로 들어갔다. 전반적으로 기능들이 메뉴에 많이 추가되면서 두 메뉴의 인수 합병에 정당성이 생긴 것이다.
Windows의 메모장은 9x 계열의 것은 '찾기' 메뉴가 존재하는 반면, 2000/XP의 것은 그렇지 않고 '편집' 메뉴에 있다.

<날개셋> 편집기는 1~2.x대까지는 찾기 기능이 '편집' 메뉴에 있었지만, 3.0부터는 별도의 '검색' 메뉴로 분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검색과 관련된 기능들을 전부 편집에다가 몰아 넣으면 보기, 삽입, 도구 같은 다른 메뉴들에 비해 '편집'만 항목 수가 너무 많고 비대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날개셋> 편집기가 무슨 메모장만치 그렇게 기능이 적은 초소형 프로그램도 아니니.. 양 극단 사이에서의 고민 끝에 지금과 같은 메뉴 배치를 선택했다.

한편, 내 편집기에는 없지만 좀 기능깨나 있다 싶은 텍스트 에디터들은 Find in files 기능이 필수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얘의 정체성도 약간 오락가락 하는 편이다.
아래아한글은 2.0에서 이 기능이 최초로 추가된 이래로 요게 '파일' 메뉴에 쭉 있어 왔으며, Visual C++ IDE도 옛날 버전에는 한동안 파일 메뉴에 있었다. 아무래도 한 문서를 편집한다기보다는 inter-file스러운 기능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파일'에다 분류했던 듯하다.

하지만 Visual C++의 경우 6인가 닷넷 이후부터 이 기능은 '편집' 메뉴로 이동했으며, IDE의 버전이 올라갈수록 요건 기존 '찾기' 기능의 자연스러운 연장선 형태로 인터페이스가 바뀌어 왔다는 게 주목할 점이다.
물론 '검색' 메뉴가 별도로 있는 에디터라면 Find in files는 응당 파일도 편집도 아닌 그 메뉴에 자리잡고 있다.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옵션을 지정하는 명령이 요즘은 도구 메뉴의 맨 마지막에 있는 게 대세이지만, 한때는 preference라는 이름으로 파일 메뉴에 있기도 하고 Adobe Reader처럼 아예 편집 메뉴의 있기도 한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옛날에는 역시 '옵션'이라는 메뉴가 별도로 있기도 했지만 프로퍼티 시트의 등장으로 인해 한 대화상자에서 엄청 많은 옵션들을 죄다 몰아서 지정하는 게 트렌드가 되면서 옵션만을 위한 메뉴는 요즘 UI 트렌드에서는 사라지는 추세이다.

끝으로, 이 검색 메뉴가 존재한다면 그 위치가 어디쯤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파일이야 맨 먼저 등장하는 것이 불문율이지만, '보기', '삽입(입력)' 같은 다른 메뉴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인 순서가 어떻게 될까?
앞서 말했듯이 찾기 기능은 편집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편집 메뉴의 바로 다음에 오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래서 실제로 검색 메뉴가 따로 존재하는 많은 프로그램들은 "파일-편집-검색-(보기)"의 순으로 메뉴가 구성되어 있다. NotePad++, Source Insight, 그리고 도스와 Windows용을 막론하고 볼랜드 IDE (Borland C++, C++Builder, 델파이), AcroEdit 등.

그런데 <날개셋> 편집기는 "파일-편집-보기-검색"으로, View 메뉴가 더 앞에 있다. 검색 메뉴가 처음으로 추가되었던 3.0 초창기 시절에는 "검색-보기"이었는데 나중에 모종의 이유로 인해 "보기-검색"으로 바뀌었다.
"검색-보기"가 적힌 과거의 흔적은 까마득히 먼 옛 버전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 스크린샷 움짤들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보기-검색"으로 순서를 바꾼 이유는 아마 본인이 옛날에 개발 과정에서 참고했던 EditPlus가 "보기-검색" 순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또 흥미로운 것은, 마소에서 만든 도스용 QBasic과 QuickBasic, 그리고 후대 버전인 QBX (MS Basic PDS 7), 도스용 비주얼 베이직 그쪽 라인은 역시 "보기-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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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Windows 95와 그 이후에 새로 등장한 MS-DOS 에디터는 "검색-보기"로 돌아갔다. 대화상자에 선문자가 없는 그 프로그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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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론적으로 따졌을 때 "검색-보기"가 더 자연스러우며 그 역순은 EditPlus와 QBasic 계열 같은 예외적인 프로그램에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날개셋> 편집기도 이번 8.4부터는 다시 "보기-검색"이 아니라 "검색-보기"로 복귀했다.
이 조치를 내리기 위해 저런 리서치와 고민이 있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힌다. ^^

Posted by 사무엘

2016/04/25 19:36 2016/04/2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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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개인적으로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소한 옛날 추억 아이템인데, 지금까지 한 번도 공개적으로 언급한 적이 없었던 관계로 털어놓고자 한다.

Windows에 메모장은 1.0 시절부터 있었던 터줏대감 기본 프로그램이다. 기본 윈도우 프레임 껍데기에다 운영체제의 내장 에디트 컨트롤 하나만 달랑 얹은 극도의 최소주의 형태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워드패드와 그림판은 리본 UI가 탑재됐고 계산기도 아주 화려한 UI로 리모델링된 마당에, 메모장만은 외형이 거의 바뀐 게 없다.

Windows 프로그래밍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메모장 정도는 하루 정도만 투자하면 동일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있는 그대로 복제품만 만드는 건 너무 시시하고, MDI 정도는 지원하게 확장해서 만들기도 한다. 지금도 있는가 모르겠는데 비주얼 C++의 MFC 예제에는 MultiPad라고 실제로 메모장의 MDI 버전도 소스 코드와 함께 제공된 바 있다.

그런데 Windows 95부터 ME까지 9x 계열의 메모장은 '도움말'이라는 메뉴 명칭의 뒷부분에 출처를 알 수 없는 공백이 하나 더 들어가 있었다. 아래 스크린샷을 참고할 것. 계산기의 '도움말'과는 달리, 메모장의 '도움말'은 파란색이 조금 더 긴 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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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신기한 건, 98과 ME로 버전이 올라가도 상황이 바뀐 게 없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한글판과 영문판 공히.
메모장이 아무리 최소주의 기본 프로그램이었다고 해서 그 시절 동안 변화가 전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았다. 보다시피 아이콘 모양이 바뀌었으며 본문의 글꼴을 변경하는 기능이 98에서 추가되었다. 코드뿐만 아니라 리소스 쪽도 검수할 기회가 있었는데 저 문자열의 뒤의 공백은 여전히 제거되지 않은 채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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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면, Windows 2000의 메모장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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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는 2000보다 나중에 나왔음을 감안한다면, 같은 메모장도 NT 계열의 것과 9x 계열의 것은 코드와 리소스가 정말로 한데 공유된 구석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다. 같은 소스에서 조건부 컴파일을 한 것조차도 아닌 듯하다.

심지어는 도움말도 둘 다 완전히 다르게 따로 만들어졌다. Windows ME의 메모장 도움말은

Using Notepad to edit text files
You can use Notepad to create or edit text files that do not require formatting and are smaller than 64K (kilobytes).


이라고 사용자에게 당장 필요한 task 지향적인(use, using) 설명 위주인 반면.. Windows 2000의 메모장 도움말은

Notepad overview
Notepad is a basic text editor that you can use to create simple documents.


이라고 프로그램의 정체성에 대해서 더 사무적이고 격식을 차린 문체로 시작한다.

메모장은 아주 단순한 프로그램이지만 9x 계열의 것과 NT 계열의 것이 기능상의 차이도 꽤 크다. 후자는 (1) 유니코드를 지원하며 (2) 64KB 이상 크기의 파일도 열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자는 "파일이 너무 큽니다. 워드패드에서 여시겠습니까?" 이런 로직이 존재하며,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UTF8 방식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조차도 지원하지 않았다.

물론 운영체제의 에디트 컨트롤이라는 건 리치 에디트와는 달리 아주 방대한 텍스트를 편집하는 데는 최적화되지 않았던지라 단일 버퍼 기반이라는 한계는 NT 계열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또한 NT 계열의 메모장은 BOM이 없는 유니코드 텍스트 파일에 대해서 IsTextUnicode라는 휴리스틱 API를 호출해서 텍스트 파일의 인코딩을 판단했었다. 그런데 그게 좀 버그가 있어서 정상적인 영어 단어로만 이뤄진 짤막한 파일을 UTF16 방식으로 저장된 중국어 한자로 오판하곤 했다. 0x41, 0x42.. 이런 묶음이 코드값상으로는 한중일 통합 한자 내지 확장 A이다 보니.. -_-;;
이 버그는 보안 쪽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을 성가시게 하는 문제인 관계로, 2000이던가 XP 즈음에 패치가 나와서 고쳐졌다.

Windows 9x에는 IsTextUnicode라는 함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니 9x 계열의 메모장이야 저런 문제가 존재할 여지조차 전혀 없었다.
끝으로, 메모장은 아마 Windows XP에서 '상태 표시줄'을 표시하는 옵션이 추가된 게 현재까지 외형상의 마지막 변화 사항이지 싶다. '자동 줄바꿈'을 사용하지 않을 때에 한해서 줄/칸 위치를 표시하는 깨알같은 기능이 추가된 것이다.

이런 Windows와 메모장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도스용 Windows 3.x 내지 NT 3~4의 메모장에는 '불필요한 공백'이 존재했었나 모르겠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18 08:33 2016/04/18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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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와 유닉스 명령창 공히 디렉터리를 이동할 때는 cd 내지 chdir이라는 명령을 사용한다. 단, 도스는 드라이브 이름을 A~Z 알파벳 한 글자로 표현한다는 게 마치 날개셋의 수식 변수만큼이나 특이하며, Windows는 이 관행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파일명에 대소문자를 구분해서 표현은 하지만 유닉스와는 달리 이를 서로 다른 것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 또한 디렉터리 구분자가 /가 아니라 \(역슬래시)라는 것도 유닉스 계열과 다르다.

그 뿐만이 아니다. 도스는 cd라고만 치면 현재 디렉터리를 표시만 해 주는 반면, 유닉스는 cd라고 치면 그냥 자신의 홈 디렉터리, Windows로 치면 "C:\Users\계정명" 정도로 이동해 버린다. 도스가 유닉스의 다른 개념들은 다 따 왔어도, 이건 다중 사용자라는 개념이 없던 물건이다 보니 홈 디렉터리 같은 건 도입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닉스에서 지금 디렉터리를 표시하는 명령은 잘 알다시피 pwd라고 따로 있다.

그렇게 도스와 유닉스 계열이 차이가 나는 와중에도 . 가 현재 디렉터리를 의미하고 ..는 부모 디렉터리를 의미한다는 건 둘이 동일하다. cd ..를 하면 부모 디렉터리로 갈 수 있다. 다만, 문법이 둘이 완전히 동일한 건 아닌지라.. 도스는 cd..라고 둘을 띄지 않아도 됐던 반면, 유닉스는 둘을 띄워야 한다는 깨알같은 차이점이 또 있다.

그런데 Windows 9x의 도스창에서는 숨겨진 기능이 더 있었다. cd 다음에 점을 세 개 이상 늘어놓음으로써 두 단계 이상의 조부모 디렉터리로 이동이 가능했다. cd...처럼. 그럼 저건 cd ..\.. 를 의미한다. 네 개 이상 숫자를 얼마든지 늘어놓아도 된다.
게다가 이건 파일 시스템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식하기라도 하는지, 굳이 cd에서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dir ... 이라고 하면 두 단계 상위 디렉터리를 조회할 수 있고, Windows의 파일 열기/저장 대화상자에서도 "..."이라고 치면 동일 기능이 동작했다.

Windows 9x는 C:\Windows 디렉터리를 가 보면 readme 등 몇몇 '읽어 보세요' 문서가 html이나 doc나 rtf가 아니라 txt 파일로 들어 있었는데, 그 중엔 tips.txt가 있다. 그 파일에 cd...에 관한 언급이 존재한다.

MS-DOS COMMAND PROMPT
=====================

Directory Shortcuts
-------------------
Related directories have the following shortcuts:

. = current directory
.. = parent directory
... = parent directory once removed
.... = parent directory twice removed

For example, if you are in the C:\Windows\System\Viewers
directory, and you enter cd... at the command prompt, the
directory changes to C:\Windows.


위는 영문판 Windows ME, 아래는 한글판 Windows 95의 tips.txt 내용 일부이다.

* 디렉토리 단축키
다음과 같은 디렉토리 관련 단축키를 사용할 수 있다.
. = 현재 디렉토리
.. = 상위 디렉토리
... = 하나의 디렉토리가 삭제된 상위 디렉토리(Windows 95에 새로 추가)
.... = 두 개의 디렉토리가 삭제된 상위 디렉토리(Windows 95에 새로 추가)
예를 들어, C:\Windows\System\Viewers 디렉토리에서 명령 프롬프트에 cd....를
입력하면 디렉토리는 C:\로 바뀐다.


이 기능은 이전의 도스 시절엔 존재한 적이 없었으며 Windows 95에서 처음으로 추가되었다는 것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95의 문서에서는 ....로 디렉터리를 세 단계 건너뛰는 예를 제시하는 반면, 후대 98/ME의 문서는 ...로 두 단계만 건너뛰는 예를 제시한다. C:\로 바뀌는 건 cd\와 동일하기 때문에 예제를 바꾼 게 아닌가 싶다.
참고로 Windows의 한글판은 98부터 '디렉토리'라는 표기가 '디렉터리'로 바뀌고, 문서들의 문체가 반말에서 존댓말로 바뀌었다.

놀라운 사실은, 이 기능은 오늘날의 Windows NT 계열에서는 지원되거나 존재한 적이 전혀 없었고 오로지 95, 98, ME만의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The old new thing 블로그의 설명에 따르면 cd ...는 노벨 네트웨어(Novell NetWare)라는 네트워크 솔루션에서 제공하는 명령 문법과의 호환성 때문에 편의 차원에서 도입된 기능이라고 한다. 그땐 노벨 사의 IPX/SPX 프로토콜 기반으로 네트워크 구성요소들도 있었으니 수긍이 간다.

그리고 9x와 달리 NT에서 ...를 지원하지 않은 이유는, 윈NT가 사용하는 NTFS 파일 시스템에서는 '.'나 '..'와는 달리 '...'는 그 자체가 올바른 파일이나 디렉터리 이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NT 계열에서는 이런 기능을 앞으로 지원할 의향은 더욱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냥 cd..\..를 해야지, 약칭인 cd...는 IPX 프로토콜이 존재하던 Windows 9x 시절의 추억으로 old timer들에게 남을 것으로 보인다.

9x 시절에는 dir con\con이던가, '실행' 대화상자에서 con\con 이런 걸 치면 운영체제를 뻗게 하고 도스창을 강제 종료시키는 게 가능했다. 이건 꽤 유명한 버그였으며 ME에서야 보정을 통해 패치가 됐다. cd ...는 그것만큼이나 9x 시절에 파일 시스템과 관련해 흥미로운 고유 아이템 추억거리인 것 같다.

여담으로, 명령 프롬프트에서 공백은 여러 명령 인자 토큰들을 구분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공백이 들어간 파일을 표시하기 위해서는 파일명 전체를 ""로 싸야 하며, 각종 프로그래밍 언어에는 따옴표 문맥을 인식하면서 공백 기준으로 명령 인자들을 파싱· 토큰화하는 라이브러리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 cd 명령만은 예외로 공백이 들어간 디렉터리도 CD Program Files 라고만 쳐도 인식되게 되어 있다. cd /?를 해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음.

그리고 cd에는 드라이브까지 같이 변경하는 명령이 한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도스 커맨드 셸의 대체제이던 4DOS 내지 NDOS에서는 자체적인 명령 확장을 통해서 그런 기능을 제공하곤 했는데, 오늘날 Windows에서는 /D 라는 별도의 옵션을 줘야만 드라이브도 변경 가능하다. 아마 드라이브를 변경하지 않는 게 보장된다는 무슨 호환성 때문에 옵션 형태로 기능을 추가한 것 같다. 참고로 /D는 9x의 도스창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Windows NT 계열의 명령 프롬프트에만 있다. ...를 지원하지 않는 대신 /D가 있는 셈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16 08:30 2016/04/1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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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창 피아노 CF

"온 세상에 울리는 맑고 고운 소리~" (☞ 영창 피아노)
영창 피아노는 어째 군대의 징계 시설과 이름이 같은 바람에 이상한 개드립에 동원되기도 하는 브랜드이지만, 한 30년쯤 전부터 CM송 하나를 기막히게 만들어 퍼뜨린 덕분에 경쟁사인 삼익 피아노에는 없는 독자적인 인지도를 확보하고 있다.
1989~90년대 그 옛날에 소리와 영상으로 온몸으로 '자연의 소리' 컨셉을 CF에다 담으려고 참 애 많이 썼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창 피아노는 한때는 무려 빈 소년 합창단을 초빙해서 CF를 찍기도 했다.
미국 NASA가 상업 우주 여행을 주선하지 않은 것만큼이나(러시아와는 달리. 하지만 앞으로는 NASA도 조만간 할 예정이라 함) 빈 소년 합창단도 원래는 상업 광고 따위에는 협조를 안 하는 고매한 단체이다. 하지만 그 당시 영창에서 피아노를 기증해 주기도 하고 어째 거래가 잘 성사되어서 자국도 아닌 동아시아 메이커 피아노의 CF에 출연하게 됐다.

원조 CF에서 피아노를 치는 소녀는 본인과 비슷한 또래의 '염 선희'라는 아이인데, 프로필과 스펙이 꽤 엄청난 사람이다. 저 나이 때 피아노 콩쿠르에서 입상해서 CF 모델로 뽑혔다. 그리고 아마 집도 꽤 잘사는 듯.
원래 음대에 가서 피아노까지 전공하고 싶었지만 손목 건강 문제 때문에 꿈을 접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는.. 웬 뜬금없는 컴퓨터공학과를 선택했다.

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타지에서 부모 간섭에서 벗어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스타크래프트에 파묻혀서 온게임넷 게임 자키를 하더니 숫제 한국으로 돌아와 여성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다. 한때는 같은 여자이고 특별히 미녀 게이머라고 이름을 날리던 서 지수와도 대결을 했을 정도였다.
재능도 재능이지만 처음엔 음대를 지망했다가 미국으로 대학 학부 유학(대학원 유학도 아니고)을 가고, 그 뒤에도 진로를 저렇게 뜬금없이 마구 바꾸는 건 집안이 경제적으로 받쳐 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손목 부상 때문에 피아노를 접었으면서 왜 피아노 이상으로 손목을 혹사시키는 직업인 프로게어머를 선택했는지는 궁금한 점이다. 외국어도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다 구사하는 엄친딸이라는데 어문 쪽 진로를 선택해도 됐을걸.
그녀는 프로게이머를 오래 하지는 못하고 2년 남짓 있다가 2005년경에 역시 손목 건강 문제 때문에 은퇴했다. 그 뒤로 이 "영창 피아노 CF 출신의 프로게이머"는 온라인 상으로 근황이 전해지는 게 없다. 아무튼 특이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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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영창 CF 얘기로 돌아온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저 CF에서 염 선희는 피아노를 치는 컨셉 연기만 했다는 점이다. 노래까지 저 애 목소리인 건 물론 아니며,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립싱크라는 걸 화면을 조금만 보면 알 수 있다. 좀 앳된 느낌이 있지만 저 목소리는 진짜 아동이 아니라 성우나 전문 가수의 목소리이다.

영창 CF 노래를 부른 사람은 '신 해옥' 씨라고 수백, 수천 곡에 달하는 CM송과 만화 주제가를 부른 경력이 있는 '얼굴 없는’ 가수이다.
얼굴 없는 가수라 하니까 딱 그 직업을 배경으로 다루는 <미녀는 괴로워> 영화라든가 풀빵닷컴 박분자도 생각나네.
이분의 대표작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1990년대 MBC <그림 명작동화> (꿈길에 들었던 꿈길에 놀았던..)의 주제가이다. 영창 피아노 노래와는 달리 저건 꽤 가요풍으로 불렀다.

2. 사이버 가수

아담, 류시아, 사이다. 지금으로부터 무려 18~20년 가까이 전, 본인이 중딩~고딩이던 시절에 우리나라에서 만들었던 '사이버 아이돌' 가수 캐릭터이다. (☞ 링크 1, 링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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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사이버 가수라는 '다테 쿄코'를 데뷔시킨 것에 착안해서, 그리고 또 그 당시에 <툼 레이더> 게임과 함께 주인공 '라라 크로프트'가 전세계에서 초대박을 친 것에 영향을 받아서 국내에서도 사이버 캐릭터를 만들려는 시도가 있었다. 1990년대 후반엔 그게 트렌드였다.

<세상엔 없는 사람> 노래와 뮤직비디오를 내가 어째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나 옛날 기억을 더 추적해 보니..
아, 그 시절에 정품을 구입했던 거원 제트오디오 CD에 아담의 탄생, 주제곡 등 주요 뮤비 동영상 파일들이 들어있었다. 난 그걸 여러 번 감상했었다.

'아담'을 개발한 '아담소프트'는 3차원 CG 분야에서는 나름 잔뼈 굵고 기술 있는 IT기업이었다. 창업자가 카이스트 출신이었던가..?
당시에는 <마이크로소프트웨어>와 더불어 <프로그램세계>라는 프로그래밍 관련 잡지가 발간되고 있었는데, 본인은 거기서 아담소프트 소속의 엔지니어가 칼럼을 기고한 것을 본 적도 있다. 글쓴이의 이메일이 도메인이 adamsoft.com이었다.

아담 말고 여성인 류시아와 사이다는 제각기 다른 회사에서 개발한 모델이다. 류시아는 루시퍼+메시야의 합성어를 의도하기도 했다니 거 참..;;
왜 한 회사에서 여러 명을 만든 게 아니냐 하면, 일개 벤처/스타트업 기업으로서 모델 하나만 감당하기에도 자본과 기술이 벅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하다.

사이버 가수는 처음 등장했을 때는 워낙 신기하니까 언론으로부터 주목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이게 오래 흥행하지는 못했다.
일단 CG 기술이 실사를 따라가기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캐릭터가 그렇게 충분히 잘생기거나 예쁘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실존 인물이 아닌 가상 캐릭터가 무슨 영화나 게임 캐릭터처럼 액션도 없이 예능만으로 팬심을 사는 건 한계가 있었다.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그나마 성공한 사이버 캐릭터인 라라 크로프트의 경우도, 말총머리 + 핫팬츠 + 쌍권총 같은 외형 특징을 본따서 홍보대사(?)를 모델 겸 체조 선수 출신의 실존 인물로 몇 기째 뽑아 왔을 정도이다. 영화도 당연히 안젤리나 졸리 같은 걸출한 실존 인물이 연기했고. (그나마도 리부트작이 나온 뒤부터는 기존 컨셉을 싹 갈아엎었다.) 어쨌든 오늘날까지도 어떤 형태로든 실존 인물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게다가, 1990년대 말 그 시절엔 CG를 만드는 것도 생각보다 굉장히 어려운 일었다고 한다. 시간과 비용이 억소리나게, 그냥 유명 실존 가수를 부르는 것 만만찮게 많이 들었다. 그냥 모션 캡처만 간단히 하면 장땡이 아니었던 듯하다.
어디 쇼 프로에 가상으로 출연시키려 해도 로봇 같은 엉성하고 경직된 모션을 보일 수는 없으니 1시간 분량의 동작과 입술 움직임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야 하는데 가히 억대의 돈이 깨졌다고 한다. 하지만 그 사이버 연예인이 음반 판매나 CF 촬영을 통해 그 이상으로 끊임없이 돈을 벌어 줄 능력이 있었느냐? 물론 그렇지 못했다.

아담소프트는 현란한 3D 그래픽 기술로 차라리 온라인 게임을 만드는 게 나았을지도 몰랐다. 리니지야말로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게임인데 아직까지도 '린저씨'가 있을 정도이며, 개발사인 NC소프트 역시 건재하니까 말이다.

이 사이버 가수의 노래를 실제로 불러 주는 사람은.. 설마 보이스웨어-_-를 쓰는 건 아니고 역시나 얼굴 없는 가수를 고용한다. 사이버 가수의 신비주의를 책임지는 중요한 사람인 만큼 계약 기간 동안 자기 정체를 절~~~~~대로 대외적으로 까발려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약속을 한다.
하지만 사이버 가수의 개발사들이 이미 10몇 년 전에 망하고 다~ 지나간 일이 되니, 이제는 그 가수가 당당히 정체를 드러내는 지경까지 됐다. 다 지나고 보니 허무하기도 하다.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출처는 모르겠다만, "Video killed the radio star"라는 문구가 있다. 물론 자동차 운전사 같은 업종도 있으니 라디오가 싹 망하고 비디오에 몽땅 흡수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어지간한 매체에서 비주얼을 이길 장사는 별로 없으며, 영화/드라마 배우와는 달리 성우나 연극 배우는 대우가 한 등급 낮은 게 현실이다. (재연 배우는 얼굴도 있고 엑스트라 단역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처지가 좀 안습하다만..)

가수 업계에서는 CM 송, 만화 주제가 같은 걸 부르는 '얼굴 없는 가수'가 바로 그런 2류 등급에 속하는 것 같다. 그 사람들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로 결코 작지 않지만 아무래도 대우가 인기 걸그룹에 비할 바는 못 된다.
그나저나 요즘은 걸그룹 트렌드에 밀려서 옛날과는 달리 여성 솔로조차도 찾기가 쉽지 않은 듯하다. 그 와중에 웬 트로트 <백세인생>(못 간다고 전해라...)의 갑작스러운 히트와 대박은 <참아 주세요>(뱀이다~ 개구리다~)에 이어 참 신선하고 이색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식으로 중· 노년이 돼서야 인생에 리즈 시절이 뒤늦게 시작되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4/06 08:33 2016/04/0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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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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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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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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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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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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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어가 한편으로는 끔찍하고 한편으로는 구수한(?) 욕설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고 하는데.. 사람 사는 곳은 동서고금 어디나 마찬가지이고 다른 문화권에서 폭언과 욕설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한국어는 다양한 욕설 표현에 비해 '똥'이 단순 비하(똥컴, 똥차, 똥폰..) 이상으로 저주나 다른 욕설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게 이례적이다. (shit, 쿠소 등)

미국은 마초이즘에 입각한 군사물에서 욕설이 많다.
듀크 뉴켐 3D/포에버에서는 게임 중에 개마초 주인공의 궁시렁궁시렁 성인 욕설을 들을 수 있으며,
둠도 게임 자체는 스토리가 부실하지만 이를 배경으로 한 둠 코믹스는 매 장면들에 강렬한 욕설을 동반한 명대사들이 즐비하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훈련소 교관이 그냥 말 끝마다 '갓댐'인 거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이거 끝판왕은 역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에 나오는 하트만 상사. 후대의 전쟁 영화에 등장하는 악질 교관의 표준 컨셉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나가는 날 네놈들은 일당백 인간 흉기 전사로 개조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네놈들은 그냥 인간 이하의 구더기, 토사물만도 못한 개 쓰레기들이다! 알겠나~~!"

제3자가 들으면 그야말로 웃음이 나오기까지 할 정도의 찰진 욕설, 특히 부모 패륜 드립과 음담패설이 넘쳐난다. 흔히 군대에서 총(개인 화기)은 니 애인, 니 불알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수하라고 그러는데, 실제로 그걸 빗댄 섹드립 군가를 부르는 것도 있다. 똑같이 내 총인데, 이건 전투용, 저건 유흥용이라고.. -_-;

듣기로는 시나리오 작가가 써 준 정식 대사 외에 배우의 즉흥 애드립으로 들어간 것도 많다고. 이런 욕도 어지간히 창의력이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가 돼야 만들어 낼 수 있지 아무나는 못 한다. 근데.. 현장에서 그 욕설을 듣고 진짜로 웃어 버린 고문관은 저 교관한테 완전 찍혀서 군생활이 꼬인다.

스타 1에서 시즈 탱크를 지겹도록 클릭했을 때 나오는 대사 중 하나가 What is your major malfunction?인데.. 이것도 출처가 이 영화에서 하트만 상사의 대사이다. 사실은 "너 미쳤냐 쳐돌았냐? 도대체 어디 장애가 있냐? 대가리에 총 맞았냐?" 급의 꽤 강한 비하· 모욕 뉘앙스가 들어간 갈굼이다.

이건 반전 컨셉으로 군대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비판하고 깔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런 묘사가 마초스럽고 멋있다며 미군 관계자들이 좋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왜, 국내에서도 10여 년 전에 MBC 제5공화국 드라마가 방영되니까 이 덕화 씨의 연기 덕분에 멋있다고 도리어 전 두환 팬클럽까지 생겼다지 않는가? 정치 견해 때문이 아니라 그냥 멋있다고. -_- "좋아, 아주 좋아"처럼 말이다..;; 원래는 그 드라마가 군사 정권을 얼마나 비판하고 까는 컨셉인데도 역효과가 난 것이다.

21세기 이후에 오늘날까지 전대갈, 전땅크 하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멋있어하는 이미지는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또한 이건 옛날에 얼짱 강도 현상수배 포스터가 나돌자 그 사람 팬카페가 생겼던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_-;;
(얼짱 강도도 참 오랜만에 다시 회상하네. 그 예쁘장한 아가씨는 남자 친구 잘못 사귄 죄로 강도 공범 혐의로 어린 나이에 전과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알려져 버리기까지 해서 인생이 한동안 굉장히 꼬였지 싶다. 안됐다. 그 뒤로 개명에 성형이라도 하고서 새 삶을 잘 살고 있길..;;)

창작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 중에서는 성깔 하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조지 패튼 장군이 있었다. "제군들은 이제 제대 후 고향에 가서 손주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후방에서 꿀이나 빨고 있지 않았다.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XX와(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함께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진군했다'라고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예 연설을 저렇게 했다.

정치· 군사· 안보 같은 심각한 주제 말고 다른 분야에서는 '욕쟁이 할머니'라는 컨셉· 기믹이 있다.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인지는 모르겠다.
10여 년 전에 웹툰 츄리닝에서는 미국인 손님이 들어오자, 주인공인 욕쟁이 할머니 역시 영어를 직접 구사하진 못해도 비장한 표정과 함께 꼴뚜기질로 기선 제압을 했다는 병맛 만화가 올라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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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이던가 박 정희 대통령이 전주에 시찰을 와서는 삼백집이라는 실존 콩나물국밥 식당을 이용했는데, 그 당시 거기도 주인장이 내공 백 단의 욕쟁이 할머니였댄다.
처음엔 수행원들이 미리 방문해서 배달 주문을 하려 했으나, 당연히 "이 썩을놈들이 얻다대고 배달 같은 소리나 씨부리고 쳐자빠졌네(혹은, X랄이야).. 직접 와서 쳐먹어!"라는 불호령과 함께 단칼에 문전박대를 당했다.

주인장은 직접 찾아온 박 대통령에게도 인정사정 없이 욕으로 상대했고.. 식사 중인 박통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더니 반숙 계란 요리를 서비스로 가져와서는 "어라, 이눔 봐라? 네놈은 신문에서 보던 박 정희랑 어찌 그리 얼굴이 묘하게 닮았더냐? 그런 의미에서 옜다, 이거나 더 쳐먹어라." 그랬댄다.. =_=
박통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박 정희를 닮은 게 아니고 박 정희가 날 닮은 거요"라고 넘겼댄다. 주인장은 그건 "에라이 니미럴 염병하네"라고 응수했을 테고.

박통은 훈훈하게 밥을 잘 먹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 식당 주인장은 몇 년 후 노환으로 타계했지만,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그때 그 놈팽이는 대통령을 아주 닮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며, 설마 진짜 박통이었을 거라고는 죽는 순간까지도 절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 쪽이든 민간 쪽이든.. 욕도 아무 컨트롤 없이 무개념으로 싸지르면 정말로 교양 없고 무례한 양아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욕을 해도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려 가면서 센스 있게, 창의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듣는이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자기 본업의 장인 정신까지 포함해서 "츤데레"스럽게 구사해야 할 거다.
이런 가이드라인을 준수할 자신과 멘탈이 없다면, 차라리 언제나 정중하게 바른말 고운말 컨셉만 유지하는 게 자신의 대외 평판에 나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21 08:29 2016/02/2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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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죽었다

“왕을 해하려 하는 모든 자들은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18:32)
성경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부하의 이 말만으로 바로 알아채고 멘붕에 빠졌다.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이 저렇게 은유적이고 드라마틱한 경우가 실제 역사나 창작물에서 종종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엔 잘 알다시피 박 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당시 대통령의 주치의였고 국군 수도 병원 서울 지구의 원장이던 김 병수 공군 준장은 엄중한 감시 하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느 VIP 중상자의 의학적 사망을 인증했다. 허나, 복부를 보고서 이 사람이 다른 외국 귀빈이나 극비 첩보 요원이 아니라 대통령 각하임을 직감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 보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 경호원의 감시 때문에 이 사실을 마음대로 발설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전화를 건 우 국일 준장이 거기 상황을 눈치 채고는, 대답을 예/아니요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하면 되게 상황을 만들어 줬다.

작고했나? / 예
차 실장(차 지철)이냐? / 아니요
코드 원(각하)이냐?


이로써 군부는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하게 됐다. 무슨 통화를 했느냐는 경호원의 추궁에 김 병수 준장은 즉석에서 이렇게 둘러댔다고 한다.

거긴 아무 일 없냐? / 예
너 혹시 지금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냐? / 아니요
알았다. 여기도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고 있어라. / 예


2. 사람이 살았다

사망이 아니라 생존을 은유적이면서도 아주 짜릿하게 잘 표현한 경우는... 비록 실화가 아니라 영화 속 허구이긴 하지만 <에어 포스 원> 대사를 따를 게 없다. 이 영화는 딱 두 마디만 기억하면 된다. “내 비행기에서 내려! (Get off my plane)”와 바로 이것.

“자유 24호, 콜싸인을 변경합니다. 자유 24호가 이제 에어 포스 원입니다! (Liberty 24 is changing call signs. Liberty 24 is now Air Force One.”
“와아아~~~!!”


대통령이 죽거나 실종돼 버렸다면, 이 비행기는 대통령의 유가족만 탔기 때문에 콜싸인이 에어 포스 원이 아닌 다른 명칭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터를 켜라>도 "열차가 부산 역에 안전하게 멈춰 섰다. 다시 반복한다. 열차가 ..." 이런 방송과 함께 중앙 통제실이 환호 분위기로 바뀐다는 점에서는 <에어 포스 원>의 결말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간지는 훨씬 덜하다.

정부에서 운용하는 물리적인 대통령 전용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그 특정 비행기가 아니라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그냥 에어 포스 원이 된다. 물론 평소에는 대통령은 줄곧 그 전용기만 타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오성장군 군대 계급인 원수랑, 국가 수장을 뜻하는 원수만큼이나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될 개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병역특례 티오하고도 비슷한 개념이다. 처음엔 병특 지정 회사들이 병무청으로부터 올해는 총 몇 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티오(인원 편성)를 받는다. 하지만 회사가 티오를 써서 일단 사람을 채용한 뒤에는, 그 티오는 회사가 아니라 복무자 자신의 소유가 된다.

어떤 회사가 2명 티오를 받아서 그만치 채용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도중에 한 명이 전직· 만료하고 나간다 해도 그 회사는 다른 한 명을 병특으로 또 채용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 복무자는 병특 지정 업체이기만 하다면, 이미 티오를 다 쓰고 없거나 애초에 올해 티오를 한 명도 못 받은 회사로도 얼마든지 전직이 가능하다. 복무자 자신이 곧 추가적인 티오이기 때문이다.

즉, 회사 사정이 어떤지와 무관하게 업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병특 인원 보존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니 이 제도는 상대적인 약자인 복무자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병무청의 입장에서도 인원 관리하기가 수월해서 좋다. 복무자가 사고로 죽기라도 해야 그 티오가 그 사람이 당시 종사하던 회사로 돌아가지 싶다.
얘기가 어쩌다가 옆길로 한참 샜지...;; 아무튼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곧 에어 포스 원인 것만큼이나, 병특은 복무자 자신이 곧 티오인 시스템이라는 얘기를 엮어서 하고 싶었다. -_-;; 본인이 산업 기능 요원 출신이기도 해서 말이다.

3. 넌 죽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거나 살았다는 통보에 이어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죽을 거라는 경고 차례다. 이 분야는 간지 넘치는 대사가 픽션이 아닌 현실의 정치 분야에도 꽤 있다. 예전에 한 번씩 인용한 적이 있는 대사들이지만 다시 복습해 보고자 한다.

(1) “빈 라덴을 용서하는 건 신이 할 일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다.
너무 멋있지 않은가? 이것은 빈 라덴이 살아 있던 시절에 미군 해병대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빈 라덴'을 임의의 '테러리스트'라고 말만 바꿔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또 유사한 드립을 쳤다고 한다.

(2)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1980년 가을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대갈 아저씨가 남긴 대통령 특별 담화이다. 나중에 가해자가 잡히고 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자, 전대갈은 실제로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 강제로 사형을 때려서 가해자도 죽여 버렸다.
삼권분립의 관점에서는 좀 아슬아슬하게 월권을 한 것이진 하지만, 요즘처럼 강력 사건에 가해자 인권만 있고 피해자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시기엔 저렇게 시원시원하던 옛날이 그리울 때도 왕왕 있다.

(3) “지금이라도 내 딸을 보내 주면 그걸로 일이 끝날 거다. 하지만 안 보내면 난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놈을 기필코 찾아 내어 죽여 버릴 거다.”
테이큰, 브라이언의 전화 대사 의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난 복수극 영화 취향인가 보다. <테이큰>, <킬 빌>, <에어 포스 원>이 딱 내 스타일이다.
성령 충만으로 용서하는 게 가능한 맥락이 아니라면(개인이 아닌 공권력/국방 문제라든가..) 악당은 다 때려 부숴야 제맛 아니겠는가? 성령 충만은 악에게 굴복하는 나약함을 조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괜히 쓸데없이 종교색 표방하면서 성경이나 교회 왜곡하는 것들은 극혐(<밀양> 같은 거). 세계관이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뭔 어설픈 열린 결말 이런 것도 싫음.

Posted by 사무엘

2016/02/15 08:34 2016/02/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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