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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 부정행위

우리나라에서 사람 인생에 큰 영향을 주며 이 때문에 부정행위도 많은 대표적인 전국구 시험은 수능과 토익이 아닐까 한다. 수능은 10여 년 전인 2004년 11월에 치러진 2005년도 시험에서 200여 명에 달하는 수험생이 조직적으로 컨닝을 한 게 뒤늦게 적발돼서 전국적으로 난리가 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과 더불어 국가적인 흑역사가 아닐 수 없다.

수능 부정 적발은 뒤끝도 굉장히 오래 간 걸로 기억한다. 이미 대학에 갓 입학한 학생이 수능 무효로 인해 입학이 취소된 건 차라리 양반이다. 더 옛날에 그냥 넘어갔던 것까지 조사를 해 보니, 심지어 대학을 졸업하고 그 경력으로 학사장교로 들어가기까지 했는데 뒤늦게 수능 무효 → 대학 입학과 졸업 무효 → 학사장교도 무효로 테크트리가 모조리 아작난 사례도 있다. 이건 학력위조 적발로 인한 임관 무효 말고, 또 별개로 있었던 사례다.

저 부정행위의 여파로 인해 수능 시험엔 일체의 전자기기가 한 치의 자비심 없는 절대금기가 되었다. 특히 시험장에서 휴대전화란 마치 공항 세관에서 마약, 군대 훈련소에서 담배와도 같은 악의 축 취급을 받게 됐다. 굳이 벨소리가 나지 않아도, 끄고 배터리까지 분리해 놨더라도, 1교시 시작 전에 전화기를 제출하라고 곱게 말로 할 때 제출하지 않은 게 적발되면 무조건 각서 쓰고 퇴장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정행위 정황이 있건 없건 이번 수능은 무효가 되니 내년에 다시 쳐야 된다.

사실 이마저도 죄질이나 처벌 수위가 가장 약한 '규정 위반'에 속하기 때문에 이번 수능만 무효 처리되고 끝나는 거다. 하물며 대놓고 부정행위를 한 게 적발된다면 올해뿐만 아니라 1년간 추가로 수능 응시 자격 상실이 뒤따른다.
그런데 매년 전국에서 수~열몇 명 정도는 바보같이 휴대전화 규정이 걸려서 퇴장 당하는 안습한 사람이 꼭 나온다고 한다. 자기가 아니라 부모님이 넣어 놓은 휴대전화가 뒤늦게 발견된다거나..;;

시험 부정 행위는 크게 다음과 같은 네 카테고리로 나뉜다.

  • 혼자: 시력, 컨닝페이퍼
  • 다른 수험생과 짜고: 답안지 보여주기, 특정 동작으로 신호
  • 다른 외부인과 짜고: 무선 통신, 대리 시험
  • 시험 관계자와 짜고, 혹은 시험장 "밖에서" 혼자: 아예 문제와 답안 유출, 답안지 바꿔치기

'혼자' 테크닉을 봉쇄하기 위해 같은 문제지도 A형과 B형으로 막 나뉘어 배부된다. 같은 문제를 풀더라도 수험생이 마킹하는 답안이 제각각이 되게 말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치면 소스 코드의 난독화 테크닉과 비슷하다.
그리고 컨닝페이퍼를 책상 주변에다 미리 만들어 놓으려는 시도를 분쇄하려고 학생들의 고사장 좌석도 랜덤화한다. 마치 Windows Vista에서 도입된 실행 주소 랜덤화 기법이 떠오른다.
옛날에 초딩 시절에도 도학력고사 같은 큰 시험은 아예 반을 싹 바꿔서 쳤던 걸로 기억한다.

수험생간에 필기구가 가리키는 방향, 기침, 시선 등으로 신호를 주고받는 건.. 물증이 없는데 감독이 어지간히 눈썰미가 있지 않으면 혐의를 어떻게 입증해서 어떻게 잡아 내는지 궁금하다. 주고받는 학생들도 언제 걸릴지 모르는데 완전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어떻게 그 짓을 할지? 멘탈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요즘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위의 1~2단계는 제끼고 최소한 외부인과 공모하는 3단계부터 시작한다. 초소형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한 덕분이다. 덕분에 시험장에 출입할 때는(특히 중간에 화장실에 갔다 올 때) 애들을 공항에서 검문하듯이 X선 금속 탐지기라도 통과시켜야 할 판이다.
하긴, 굳이 시험이 아니어도 노름판 같은 데서도 이런 방식으로 사기 치는 놈들이 많긴 하다. 몰래 카메라로 상대방의 패를 다 본다거나, 밖에 있는 고수에게 바둑판을 보여주고 훈수를 듣는다거나.

차량은 시험장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외부에서 통신을 주고받는 부정행위 공범에게 훌륭한 엄폐성과 주거성을 제공하는 도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 부정행위 사건 이후로는 시험 시간 동안엔 시험장 주변의 반경 200m 이내에는 차량의 주정차도 전면 금지되었다. 이건 단순히 소음 방지가 아니라 이런 보안을 고려한 측면이 있다. 소음이 문제라면 차량 통과 자체를 금지시켜야지?

아예 시험지나 답안지를 사전에 빼돌리는 건 방송으로 치면 어지간한 방송 사고를 넘어 전파 납치 같은 급의 엄청난 범죄가 된다. 굳이 관계자를 매수하는 것뿐만 아니라 혼자 건물에 침입하는(!!) 짓도 여기에 해당되는데, 우리나라는 최근에 이런 사건도 두 번이나 발생한 바 있다.

대표적으로 전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던 사건은 2013년 말에 발생했던 연세대 로스쿨 캐비닛 사건 되겠다. 문제의 그 학생은 변호사 시험도 아니고, 학교 내부 시험 문제를 빼돌리려고 교수 연구실에 몰래 침입해서 컴퓨터에다 해킹 프로그램을 설치하려 했다. 연구실 도어락의 비번은 그 교수가 문을 열고 있을 때 옆에서 몇 차례 몰래 훔쳐봐서 '시력'으로 익혔다고 한다.

그런데 으슥한 밤에 웬 학생이 혼자 교수 연구실에 들어가는 걸 동일 로스쿨의 다른 학생이 우연히 보고 수상하게 여겨서 경비 직원에게 신고했고, 경비원이 출동했다. 경비원들이 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 대담한 학생은 근처의 캐비닛 안에 황급히 들어가 숨었지만... 결국은 덜미가 잡혔다. 들켰을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당신은 누구요?" 개쪽에 개망신에;;;

걔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서든 1등이란 걸 놓쳐 본 적이 없었댄다. 물론 이전에 치른 시험들도 부정행위의 도움으로 1등을 한 게 있었겠지만 모든 성적이 송두리째 조작은 아닐 것이고, 그 친구도 기본적인 머리와 실력이 있으니 컨닝 없이도 올백· 올1등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상위권은 유지 가능했을 것이다.

학부는 당연히 서울대 졸업. 허나 로스쿨은 서울대를 못 가고 겨우 연세대에 그친(?) 것에 무척 애석해하면서 재수를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로스쿨은 어딜 가든 그야말로 전국에서 날고 기는 공부 기계 암기 괴물들의 집단이 아니던가? 법학 전공도 아닌 그에게는 서울대가 아니라 연세대 로스쿨도 감지덕지이고 엄청난 학업량을 따라가기가 버거운 곳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1등 강박관념을 유지하기 위해, 어찌 보면 지금까지 늘 해 오던 대로 저런 짓까지 감행하게 됐고 그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당연히 징계 제적을 당해서 짤렸으며 법조계 쪽으로는 영원히 발을 들일 수 없게 됐다. 몇 년 전에 고려대 의대생 성추행 사건 가해자가 출교 당하고 의료계에서 매장 당한 것과 같은 처지가 됐다.

이 소식을 접한 동기생들은 그를 그냥 '캐비닛'이라고 부르면서 혀를 차고 허탈해했다. "그럼 그렇지 어떻게 저렇게 시험만 쳤다 하면 올A+을 제조하는 천재일 수가 있나 싶었는데 역시 제 실력이 아니었구나. ㄲㄲㄲㄲ"
그는 최종적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동기생 출신인 본인의 모 지인에게 듣기로는, 걔는 IT 쪽으로 뭔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헐.. 뭘 해도 근성과 끈기는 있으니 나쁜 짓만 안 하면 성공은 하겠다..;;

캐비닛 사건이 가라앉고 얼마 뒤엔(2016년 3월) 웬 공무원 지망생이 정부 서울 청사 인사혁신처에 몰래 침입해서 자기 점수를 고치고 합격자 명단 문서 파일에 자신을 올려 놓다가 결국은 잡혔다. 이 사람은 공부는 그 연세대 캐비닛만치 잘한 것 같지 않지만, 잔머리와 대담성은 어쩌면 캐비닛을 능가한다고도 감히 말할 수 있다. 도대체, 무슨 약 빨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서 그 정도로 실행했는지 그 엽기성과 대담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정부 서울 청사는 나름 청와대와 같은 급의 보안 시설인데 내부 헬스장에서 직원의 출입증을 훔치고, 경비가 허술한 시간대에 여러 사람들 사이에 껴서 뒷문으로 들어가는 식으로 감시를 피했다. 게다가 캐비닛의 경우 강의동 건물 자체는 출입이 가능하니 훔쳐보는 걸로 방 비번을 알 수 있었지만, 저 공시생은 처음 들어가 보는 정부 청사 안에서 하필 청소부가 편의를 위해 버젓이 적어 놓은 비번을 이용해 방에 침입해 들어갔다고 한다. (직원이 출근하기 전에 미리 방에 들어가서 청소를 끝내 놔야 하므로)

게다가 이 사람도 과거 이력은 더 화려했다는 게 밝혀졌다. 꾀병으로 약시 진단서를 받고 기간을 위조까지 해서 각종 시험에서 응시 시간을 1.5배 더 받았다. 다음으로, 매 시험의 1배수 시간이 끝날 때마다 수능 문제의 정답이 인터넷에 공개된다는 점을 이용하여, 그때 화장실에 가서 사전에 잘 숨겨 놓은 휴대전화로 인터넷에 접속 후 답을 알아 와서 마킹을 했다. 이런 허점을 찾아냈다는 것 자체가 보통 잔머리가 아닌 거 같다~!
또한 대학 진학 후에 7급 공무원 시험의 지역 예선급 시험을 학원에서 칠 때는 대놓고 문제 유출까지 해서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러니 여죄를 수사한 경찰들부터가 경악하고 "얘는 국정원 같은 데에 특채 좀 시켜야겠다 ㄲㄲㄲㄲ" 이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거기는 그야말로 위장과 조작이 직업인 곳이니, 혹시 사법 거래라도 하면 난폭운전 폭주족을 F1 서킷으로라도 보내는 인재 활용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_-;;

그야말로 영화 Catch me if you can을 떠올리게 하는 행적이 아닐 수 없다. 그 영화의 배경에서는 그래도 사회 시스템이 전산화되기 전이었으니 그 짓이 가능했을 뿐이다. 지금은 서버 DB를 직접 해킹하지 않는 한, 어설프게 엑셀/워드 문서 몇 개에다 점수 조작하고 자기 이름 넣어 봤자, 없던 공무원 자리가 하나 더 뿅 생겨서 자기 신분이 성공적으로 조작될 리는 만무하다.

컨닝을 소재로 기가 막힌 첩보물 학원물 짬뽕을 만들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웹툰으로는 <빵점동맹>을 참 재미있게 봤는데, 재미는 있지만 그래도 현실과는 많이 동떨어진 허구라는 점을 감안해야겠다. 백 희지는 주토피아에서 토끼 주디 같고 남캐인 임 수영은 여우 닉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게 정성껏 컨닝을 할 시간과 머리가 있으면 공부나 빡세게 하라고 다들 말한다. 하지만 차근차근 공부하는 데 필요한 지적 능력과, 정교하게 컨닝하는 데 동원되는 지적 능력이 같지는 않은 관계로.. 사람을 변별하는 중요 시험엔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가 부정행위를 자행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앞으로 또 무슨 엽기적인 부정행위자가 적발되어 뉴스 사회면을 장식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 여담

1. 이 글에서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토익도 나라 망신을 시킬 정도의 대규모 부정행위가 몇 번 저질러지고 적발된 적이 있다. 그래서 이 때문에 다수의 선량한 토익 응시자들이 싸잡아 큰 불편을 겪어야 했다. 불법복제 때문에 정품 사용자가 도리어 피해를 입은 것처럼 말이다. (올라가는 구입 가격, 제품 인증 관련 번거로움)

2. 그러고 보니 정부 서울 청사는 더 전에 2012년에도 어떤 이상한 사람이 무단으로 뚫고 들어가서 투신 자살까지 했었다. 어째 그리 보안이 허술한지 그것도 질타 사항이다.

3. 예전에 '짜장면'이 표준어로 인정받게 됐을 때 '컨닝'도 같이 좀 등재됐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자장면만큼이나 커닝도 완전 현실성이 없지 않은가?

Posted by 사무엘

2016/12/20 08:29 2016/12/20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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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다소 민망한 주제 이야기를 이것저것 나열하고자 한다. 작년과 재작년에도 이 주제와 관련된 글을 1년에 하나씩은 쓴 적이 있었는데.. 관심 있으신 분은 '투신'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 보면 나온다.

1.
2012년과 2013년에는 아파트에서 투신 자살하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깔려 죽는 사고가 한 건씩 있었다. 물론 피해자만 죽은 건 아니고 가해자도 나란히 사망. 자동차 위에라도 떨어졌으면 보통은 살던데 겨우 사람은 자신이 충격을 받고 깔렸다고 해서 투신 자살 가해자를 살릴 정도로 실드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동일한 패턴의 사고가 그로부터 3년쯤 뒤인 2016년에 또 반복됐다.
5월 31일 저녁, 광주 북구 오치동에서는 퇴근한 남편, 부인, 6살짜리 아들 이렇게 일가족이 아파트 단지 입구로 들어가는 중이었는데, 처지를 비관하여 동일 아파트의 20층에서 뛰어내린 한 20대 청년이 세 명 중 가장인 남편을 덮쳤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뛰어내린 그 사람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깔린 40대 남성은 치명상을 입고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약 3시간 만에 숨졌다고 한다.

누군가가 투신 자살한 것은 '사건'이지만, 투신 자살자에게 다른 사람이 깔려 죽은 건 '사고'이다.
안타까운 음주· 졸음운전 교통사고가 해마다 반복되는 것처럼, 이런 사고도 교통사고만치 잦지는 않지만 어째 이렇게 반복되나 모르겠다.

가해자는 공시를 준비 중인 공무원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허나, 잘 알다시피 살인적인 경쟁률을 자랑하는 그 시험에서 호락호락 좋은 결과가 나올 리는 없었을 것이고, 이 때문에 열등감, 무력감, 비관의식 등에 사로잡혀 극단적인 선택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자살 말고 다른 극단적인 선택을 한 어떤 사람은 아예 정부 청사에 침입해 들어가서 어설프게 성적을 조작하려 하기도 했다. 어느 경우든 다 멘탈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다.

그런데 저 사람의 경우, 자기가 죽으면서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워너비에 속하는 다른 '공무원'을 같이 죽게 했으니 이 아이러니를 말로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가장은 전남 소재의 어느 도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었기 때문이다(집은 광주). 부인 되시는 분은 그냥 남편도 아니고 최고로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던 남편을 하루아침에 잃은 충격과 대미지가 차마 감당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을 것이다. 게다가 둘째 아이를 임신까지 한 상태였는데! 그 자살자 때문에 저 가정도 완전히 파탄 나고 말았다.

2.
이제 좀 옛날 이야기를 하겠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아직 어수선한 미군정 시절이던 1947년 5월 1일, 에블린 맥헤일(Evelyn McHale)이라는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여느 아파트도 아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 올라가서 무려 86층, 거의 300m에 달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1940년대 당시엔 그 건물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다.

이 사람은 무슨 모델이나 연예인, 유명인사도 아니고, 정말 평범하게 월급쟁이 직장인 생활을 하다가 평범하게 남친 사귀고 약혼까지 하고.. 정황상 자살할 만한 이유가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머릿속으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단지, 약간 성깔 부리는 완벽주의자 성향은 좀 있었던 것 같으며, 유서를 보면 그런 기질이 더욱 느껴진다. (☞ 이 사건에 대한 더 자세한 정황 설명)

그녀는 운명의 그 날엔 별안간 집을 나와서 "남친에게서 결혼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난 좋은 아내가 될 자신이 없다. 난 어떤 남자에게도 좋은 아내가 못 될 것 같다. 그이는 내가 없으면 더 잘 살 것이다. 나는 가족· 타인을 불문하고 아무에게도 내 모습, 내 존재를 더는 노출하고 싶지 않다. 내가 죽더라도 제발 장례식 같은 거 치르지 말고 시신을 화장해서 완전히 없애 달라" 라는 요지의 꽤 염세적인 논조의 유서를 썼다. 그러고 나서 그 높은 곳에서 아래로 뛰어내렸다.

건물 아래는 사람과 차들로 가득한 뉴욕 시내 한복판이었다. 그녀는 사람이 아닌 어느 리무진 승용차 위에 떨어졌다.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자동차는 굉음을 내며 박살이 났지만, 차가 그렇게 충격을 받아 주고도 그녀는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즉사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단,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고 없애고 싶었던 그녀의 바람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오히려 나 같은 사람조차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 정도인 유명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떨어진 직후의 모습 때문이다. 시신은 마치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300m 미터 높이에서 투신 자살한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양호하고 평온했다.

마침 현장 근처를 지나던 어느 사진학도가 굉음을 듣고 투신 지점으로 달려왔는데.. 이거 보통 모습이 아님을 직감하고 현장 보존 상태에서 사진을 남겼다. 이건 인위로 연출한 장면이 아니며.. 섬뜩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살"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에블린 맥헤일의 투신 모습 보기

비록 겉으로는 저렇게 평온해 보여도 신체 내부는 다발성 골절, 장기부전, 폐출혈 등으로 다 망가졌을 것이다.
아무리 자동차가 충격을 흡수해 주고 공기 저항까지 있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수십 kg에 달하는 '인간'이 낙하산도 없이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하물며 그냥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졌다면 300미터보다 훨씬 더 낮은 곳에서 투신해도 시신은 절대로 온전히 남아나지 못한다. 피 튀고 뼈 꺾이고 심하면 머리가 깨져서 뇌수가 새어나오기도 한다. 즉사할 정도의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그 어떤 자세로 떨어지더라도 결국은 머리에까지 어떤 형태로든 충격이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무렇게나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은 절대로 저런 우아한 자세로 죽지 못하며, 시신 수습하고 청소하는 사람들한테 큰 민폐만 끼친다는 걸 명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에블린은 무슨 실연을 비관해서 자살한 게 절대 아니니 오해 없기 바란다. 오히려 멀쩡히 약혼/청혼까지 다 성사된 상태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자기가 반대로 남친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남긴 꼴이 됐다. 그녀는 몇 개월 안으로 임박한 결혼이 자기 인생을 완전히 얽어매고 속박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죽기 직전까지는 아무것도 튀는 게 없는 삶을 살았는데 도대체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사건 이후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는 자살 방지를 위해 쇠로 얽히고 섥힌 난간이 설치되었다.

3-1.
공교롭게도 에블린 맥헤일 이전에도 죽은 모습이 칭송의 대상이 된 여인이 또 더 있었다.
1880년대 말, 프랑스 센(Seine) 강에서 어떤 소녀가 익사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런데 옛날이어서 그녀가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 신원이 전혀 밝혀지지 않았다고 함. 외관상의 상처는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실족사가 아니면 자살로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죽은 것치고는 얼굴이 아름답고 표정도 굉장히 평온하고 순수하고 행복해 보였던지라 이 시신을 검시한 어떤 사람은 즉시 데스마스크를 만들어 시신의 형상을 남겼다. 예술가들도 감탄했을 정도라고 한다. 저 소녀는 자기가 죽고 나서 몸이 저렇게 칭송받고 데스마스크가 만들어질 걸 과연 예상했을까 싶다.

L'Inconnue de la Seine

3-2.
한편, 에블린 맥헤일은 같은 미국에서 의문의 참혹한 죽음을 당한 엘리자베스 쇼트(Elizabeth Short), 일명 '블랙 달리아'라는 아가씨와 거의 동갑내기이다. 둘 다 1923~1924년생이고, 엘리자베스의 시신이 발견된 때는 1947년 1월 15일로 같은 1947년이다.

저 사람은 본격적인 할리우드 배우 지망생이었다. 시신이 발견되기 약 1주일 전부터 연락이 두절된 실종 상태였는데 이때 어디서 누구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알 길이 없다고. 하지만 이 사람이 옷이 다 벗겨지고 전신 피멍에 허리가 두 동강 나고 혈액과 장기 적출로도 모자라 입이 양쪽으로 귀까지 찢어진 정말 끔찍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어야만 할 정도로.. 누군가에게 원한을 살 정황은 전혀 없었다. 금전 쪽으로든 치정 쪽으로든. 사람 입이 찢겼다는 얘기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 승복 이후로 처음 듣는다.. ㄷㄷㄷㄷㄷ

범행 용의자는 영국의 잭 더 리퍼처럼 신체 해부와 외과 수술에도 식견이 있는 어느 싸이코패스일 거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 이건 결국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았다. 21세기도 아니고 1940년대에 워낙 엽기적인 사건이다 보니, 오히려 자기가 블랙 달리아를 죽인 범인이라고 뜬금없는 거짓 자수를 한 관심병 미친놈들만 몇십 명이나 나와서 수사에 혼선을 끼쳤다고 한다. 고문이나 강압 수사도 없었는데 웬 허위 자백이냐..;;

4.
투신 자살과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사례는 일본의 '오카다 유키코'(1967-1986)이다.
검색을 통해 사진과 프로필을 보면..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다 잘하는 엄친아 연예인 지망생 그 자체. 데뷔 후엔 실제로 인기가 아주 좋아서 1980년대 중반을 풍미한 일본 아이돌계의 떠오르는 샛별 소리를 들었다.

그런데 보아하니 이 아가씨도 너무 완벽주의자였던 것 같다. 그야말로 살인적인 스케줄 강행군을 소화하면서 연예인 활동을 했는데.. 치정 스캔들 때문인지, 악성 루머 때문인지, 소속사와의 불화 때문인지,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인생에 회의를 느꼈는지, 아무튼 하나로 딱 떨어지는 원인이나 정황 없이 그녀는 1986년 4월 8일, 별안간 소속사 건물의 창문 밖으로 뛰어내림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아, 당일엔 투신 자살에 앞서 가스를 피워서 자살을 시도하다가 저지당하기도 했다.

오카다 유키코는 배를 땅으로 향하는 자세로 콘크리트 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고인에게는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죽은 모습이 미국의 에블린 맥헤일의 경우와는 달리, 저질 옐로우 저널리즘의 먹잇감으로 전락해 버렸다. 일본의 찌라시들은 겨우 고삐리 연예인이 죽은 모습을 바닥에 튄 핏자국까지 그대로 모자이크 처리 하나 없이 사진으로 찍고 내보냈기 때문이다. (겉으로 욕하면서도 결국은 다 사서 보거든 ㄲㄲㄲㄲㄲ)

이런 선정적인 보도 때문인지, 이 아이돌의 자살로 인해 당시 일본 내부에서는 그야말로 수십~수백 명에 달하는 팬들이 같이 자살했다고 하니 더욱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한번 유명해지고 나면 자기 혼자 곱게 세상에서 뿅 없어지는 것조차도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 그러니 정말 입과 몸을 사리면서 행동해야 할 것 같다. 자살 이것도 정말 어지간한 멘탈로 가능한 게 아닐 텐데..! ㅠㅠ

* 아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별도의 번호까지 또 할당해서 소개하기는 좀 뭣하다만.. 2011년에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40대 여성이 25층에서 투신 자살했는데 하필..;; 맨홀 뚜껑을 정확하게 강타하고 그 구멍 아래로 떨어져 숨지기도 했다. 다른 인명이나 차량 피해가 없는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만, 이건 뭐 멀쩡히 길거리를 가던 행인이 땅이 쑥 꺼지고 맨홀로 빠진 것만큼이나 황당한 소식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27 08:34 2016/11/27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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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의 자동차세는(영업용 말고 자가용) 차의 배기량에 비례하는데, 이것도 정비례하는 건 아니고 비례상수 자체가 배기량에 따라 3단계로 정비례해서 커진다. 예전에는 단계수가 더 많던 것이 근래에 그나마 더 간소화가 된 거라고 들었다.
그러니 자동차세는 배기량 n에 대해서 약하게나마 O(n^2)에 가까운 형태이다. 작은 차는 저렴한 세금으로 우대하고, 겨우 5인승 승용차 주제에 너무 돈지랄 대형차를 굴리면 세금도 더 많이 매기겠다는 취지이다.

2000cc 이상일 때부터가 최대 rate가 적용된다. 단, 통상적으로 2000cc급이라고 불리는 쏘나타, K5 같은 중형 승용차는 제원상의 실제 배기량이 1998cc 같은 식이기 때문에 최대 rate를 턱걸이로 피해 간다. =_= 영미권에서 10달러짜리 물건을 일부러 9.99$ 이런 식으로 선전하는 것과 동일한 꼼수를 동원해서 성능 대비 최대한 절세를 시행하고 있는 셈이다.

2.
2016년 여름. 전국에 폭염 주의보, 경보, 특보가 며칠째 내려질 정도로 살인적인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한반도가 슬슬 아열대 기후로 진입하고 열대야가 이변이 아니라 한여름의 일상적인 모습이 될 거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때문에 에어컨의 사용과 전력 소비량이 폭증했다. 그런데 가정용 전기 요금이 비현실적인 징벌적 누진제를 적용받고 있다고 말이 많다.

누진제 자체는 우리나라가 아직 못살고 석유 파동크리까지 터졌던 시절에 도입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6단계 누진제는 그때부터 있었던 게 아니다. 누진제에 대한 해석마저도 정치 성향별로 진영 논리로 갈라져서 "친기업 재벌 우대를 위한 음모" vs "북에다 몰래 전기 퍼 주기 위한 음모" 이러는 듯한데, 진실은 어느 한쪽에만 편중돼 있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가정용 전기 요금 체계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가장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때는 노 무현 정권 시절이긴 하다.

과거에 언론에서 '징벌적'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던 다른 문맥이 뭐냐 하면 '카이스트의 징벌적 등록금' 제도였다. 지난 학기 GPA가 B0 3.0에 미달되면 0.01당 6만원꼴로.. 그러니 GPA가 2.0이면 600만원을 내게 하는 것이었다.
뭐, 다시 찾아보니 엄밀히 말해 이건 '누진제'는 아니다. 개막장 GPA라고 해서 6만원이라는 '단가'가 더 올리가지는 않는다.

또한, 굳이 금전적인 불이익이 없더라도 원래부터 한 학기 GPA가 C0 2.0도 안 되면 학사경고이고, 전체 GPA가 그 따위면 애초에 졸업도 못 했다. 그러니 그에 근접하는 2.x대의 평점은 뭔가 페널티를 줄 법도 한 열악한 상황인 건 사실이나... 안 그래도 누군가는 반드시 중하위권을 차지할 수밖에 없는 '상대평가' 하에 전국에서 날고 기는 괴수들이 피튀기게 경쟁하고 있는데 단가 자체가 '징벌적으로' 지나치게 높긴 했다. 성적이 아닌 다른 특기로 입학한 비과학고 출신 친구들이 피해가 제일 컸다. 2011년에 학생 4명이 자살을 하는 참극이 벌어진 뒤에야 그 제도는 폐지던가 전면 완화던가 어쨌든 상황이 바뀌었다.

다시 현행 전기 요금 얘기로 돌아오면.. 얘는 6단계로 100KWh의 배수를 넘길 때마다 기본 요금과 임율이 거의 1.6배씩 증가한다. 이건 제곱도 아니고 아예 지수함수 수준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O(2^n). 다만 1~2단계와 마지막 5~6단계 사이의 증가폭이 더 크다. 가정에서는 6단계인 500KWh 이상은 정말 절대로 쓰지 말라는 얘기다.

3.
누진제가 지수함수라면, '종량제'는 O(1)이던 것을 O(n)으로 변경하는 것에 해당한다. 건물별 쓰레기 수거 비용이 먼 옛날에는 그냥 건물의 면적에 비례하는 고정된 값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부터는 배출하는 쓰레기의 양에 정비례하는 O(n) 종량제로 바뀌었다.

이거 그 시절로서는 굉장히 파격적인 변화였다. 쓰레기는 반드시 유료로 구입한 종량제 전용 봉지에 넣은 것만 수거하는 관행이 첫 도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쓰레기 중에 재활용 가능한 건 재질을 최대한 분리해서 배출하고, 재활용 불가능한 건 저렇게 배출 방식을 바꿨다. 이런 과정을 통해 1인당 쓰레기 배출 1위였던 우리나라의 불명예스러운 위상도 차츰 개선됐다.

허나, 인터넷 통신비를 데이터 패킷/트래픽에 대한 종량제로 매겼다가는 아마 혼돈의 카오스가 펼쳐지지 싶다.
물론 자유를 악용하여 인터넷 트래픽을 쓸데없이 점유하는 소수의 악질적인 스패머와 악성 코드 유포자들이 끼치는 민폐에 대해서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한때 '다음'에서 뻘짓이라 욕 먹으면서까지 온라인 우표라는 걸 도입하려 했던 심정 자체는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가 무식하게 돈으로 찍어누른다고 해서 해소가 되겠나..;;
극소액이라도 통신비가 데이터 패킷 단위로 유료화가 된다면 동영상 재생은 올스톱될 것이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돈 아까워서 각종 소프트웨어들의 업데이트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네트워크 전체의 보안에도 악재가 될 것이다.
지금은 무선 와이파이 태더링 같은 데서나 패킷량 O(n) 요금을 볼 수 있으며, 이것도 데이터 무제한 요금제를 통해서 얼마든지 피해 갈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인터넷 종량제조차도 과거의 PC통신 시절보다는 훨씬 나은 거라고 봐야 할 것이다. 1980년대 먼 옛날에는 일반 전화건 PC 통신이건 사용 시간에 관계없이 한 통화당 n원이던 꿈 같은 시절이 있었으나, 이내 '시간 비례' 종량제로 요금이 결국 바뀌었다. 업/다운로드 없이 가만히 있기만 해도 모뎀으로 전화가 연결돼 있는 한 요금이 계속 올라갔으니 이거 뭐..

스크롤의 압박이 있는 긴 텍스트는 일단 캡처만 해 놓은 뒤, 나중에 전화 끊고 PC 통신을 종료하고 나서 차근차근 읽어야 했다.
동영상 재생도 아니고 채팅을 몇 시간 하다가 다음 달에 전화비 n만원 폭탄을 맞았다(25년 전 물가 기준!). 그림 한 장 음악 한 곡 없이, 겨우 사람 손가락으로 생성하는 텍스트 나부랭이가 정보량이 얼마나 된다고..;;

지금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과금 체계가 아닐 수 없었다. 한 가지 더.. 2010년대엔 무선 와이파이 인터넷으로도 100Mbps대의 속도가 나오고 유튜브로 고화질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보는 시대가 열렸지만, 아날로그 전화선 기반인 모뎀은 1990년대 말, 겨우 56Kbps대의 속도가 기술적인 상한선이었고 이내 전용선으로 체제가 바뀌었다는 점도 생각할 사항이다. K와 M 사이에는 무려 1000배의 차이가 있다.;;

4.
지금까지 요금제에 대해 거론한 내용들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O(1) 복잡도의 요금제가 쓰이던 곳이 갑자기 O(n)으로 바뀌었을 때(종량제), 그리고 O(n)이 기대되는 곳에 갑자기 터무니없는 O(n^2), O(2^n)에 준하는 요금제가 시행되면(누진제) 사람들은 빡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너무 평범한 결론이 도출된다.;;

단, 주차 요금이나 연체료· 과태료 중에서는 일정 시간이 경과하면 오히려 rate가 더 줄어들거나 완전히 0이 되는 것도 있다. 이미 매겨진 요금이 탕감· 면제되는 게 아니라, 증가하는 속도가 말이다.
주차장의 경우, 주차된 시간에 비례해서 요금이 몇백· 몇천원씩 쭈욱 올라가지만 하루에 최대 얼마는 초과하지 않는다.
인천 공항 장기 주차장은 하루에 최대 얼마인데, 주차된 지 며칠째부터는 그 최대 요금이 살짝 낮아지는 제도가 있었다. 외국에 장기 출장을 가서 꼬박꼬박 주차장 요금 셔틀 역할을 해 주는 고객에 대한 배려이며, 누진제의 반대 경우라 하겠다.

그런데 이것도 케바케이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공영 주차장이나 상가 주차장은 몇 시간 이상째부터는 아까의 자동차세처럼 rate가 더 올라가기도 한다. "여기 안 그래도 공간 비좁아 죽겠는데 볼일만 보고 빨리 나가라. 어지간하면 여기는 차 끌고 오지 마라"라는 무언의 경고 되겠다. 주차장의 회전률을 올리기 위한 조치이다.

공기 저항 같은 자연 현상뿐만 아니라 이 세상 제도에도 non-linear한 복잡도를 가진 것들이 있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복리 이자도 그 예일 것이다. 그런 걸 보면서 그런 제도가 어떤 배경에서 정립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이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14 08:33 2016/11/14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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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태생적으로 신체 활동을 싫어했다. 운동 경기는 스스로 하지도 않고, 남이 하는 걸 즐겨 보지도 않았다. PC 게임으로도 액션· 아케이드에 밀려서 거의 안 했다.
야구의 경우, 아직까지도 정확한 룰과 득점 조건도 모를 정도이다. 투수가 던진 공을 쳐내고 나서 각 선수들이 무엇을 목표로 어디로 그렇게 열나게 뛰어가는지 로직을 모른다. 배구· 농구· 축구만치 룰이 직관적이지 않아서 말이다. 당연히 유명 구단이나 선수 같은 것도 전혀 아오안이다.

야구는 옛날에 '하드볼'이라는 PC용 고전 게임이 있었고, 축구는 더 나중에 'FIFA 연도' 이런 게임이 있었던 것 같다. 요즘도 계속 나오는지는 모르겠다.
그런데 스포츠라는 장르에 속하는 고전 게임 중에는 그렇게 한 종목에 특화된 놈이 있는가 하면, 간단한 종목들을 여럿 옴니버스 식으로 제공하는 게임도 있었다. 오늘은 그런 게임들을 먼저 좀 늘어놓아 보겠다.

먼저, 캘리포니아 게임즈이다. 학교 친구와 함께 디스켓으로 실행하며 즐겼던 추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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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yx라고 옛날에 스포츠 게임 시리즈를 전문적으로 개발해 온 회사에서 1987년에 발표한 게임이다. Epic Games와는 다른 회사임.
IBM PC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랫폼으로 만들어졌다. PC용의 경우 VGA 카드가 개발되기도 전이었으니 최고 그래픽은 응당 EGA 16컬러였다.
게임 로고가 뜬 뒤엔 위의 사진과 같이 검은 배경에 흰 글씨로 게임 방식을 선택하는 메뉴가 뜬다. 선택막대가 Doom은 두개골이라면 얘는 야자수인 게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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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게임은 여러 간단한 퍼즐형 스포츠의 컬렉션이다. 요즘 같으면 플래시나 모바일용으로 만들면 딱일 듯한 스케일이다.
보드 타기, 파도 타기, 제기 차기, 롤러 스케이트처럼.. 무슨 올림픽 종목까지는 아니지만 미국 서부의 길거리 스포츠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이 제공되었다.

각 경기별로 주인공은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다. 특히 부메랑처럼 생긴 디스크 날리기(flying disc)도 있는데... 뭔가 좀 미국스러운 게임 같다. 사람이 날리고 개가 받아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남자가 날리고 여자가 받는다. 실사로 치면 이런 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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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남자가 각도와 힘을 설정해서 디스크를 날리는데, 이 자체는 뭐 투사체를 던지는 기능이 있는 게임들과(QBasic 고릴라, Scorched Earth 등) 크게 다를 바 없는 UI이다.
디스크를 날린 뒤부터 게임 컨트롤은 파트너인 여자에게로 넘어간다. 디스크가 떨어질 걸로 예상되는 위치에다 파트너를 잘 조종해야 디스크를 붙잡을 수 있다. 디스크와 여자 파트너의 위치는 화면 위의 미니맵에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남자가 디스크를 오랫동안 안 날리고 가만히 있으면.. 하늘에서 무슨 UFO 같은 게 내려와서 여자를 납치해 가 버린다..;;; 그 장면을 우리가 직접 볼 수는 없고 미니맵 상으로만 표시된다. 그리고는 게임오버. 디스크가 외형상 비행접시와 비슷하니 이런 깜짝쇼를 넣은 건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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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캘리포니아 게임즈에서 즐겨 하던 게임은 사이클이었다. 장애물을 요리조리 잘 피해야 넘어지지 않고 제한 시간 안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으며, 그 와중에 회전이나 바퀴 들기 같은 위험한 묘기도 종종 해서 성공해야 점수를 딸 수 있다. 생각보다 어려웠던 걸로 기억한다.
1990년에는 VGA를 지원하고 1보다 그래픽이 크게 강화된 캘리포니아 게임즈 2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본인은 2는 접해 보지 못했다.

Epyx에서는 역시 비슷한 시기인 1988년경엔 우리나라에서 개최된 서울 올림픽을 게임화한 The Games: Summer Edition을 내놓았다. 전편인 Summer Games도 있고 자매품인 The Games: Winter Edition까지 있으니 저 회사는 진짜 스포츠 게임 전문이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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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느 작품과는 달리, 이 The Games: Summer Edition은 올림픽 개최국인 한국을 지도까지 곁들여서 굉장히 자세히 소개했다. 위의 애니메이션을 보시라. 한복에다 서울 남산 타워도 나온다. 이 정도면 저 제작사가 그냥 스스로 저렇게 만들지는 않았고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협찬· 후원도 받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쟤들은 캘리포니아 하계 스포츠를 소개하는 게임을 만들면서도 1984년 LA 올림픽을 대놓고 홍보하는 게임을 만든 적은 내가 알기로 없다.

플레이 동영상에 나와 있듯이, 얘는 올림픽 스포츠 게임답게 평행봉, 다이빙, 기계 체조, 양궁, 장애물 넘기, 육상, 사이클까지 간단하지만 다양한 종목의 경기를 제공했다. 게다가 제한적이나마 1인칭 시점 3차원 애니메이션까지 제공하며 그래픽의 퀄리티가 높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의 게임이다!)

운동 선수가 하는 동작의 무엇을 컨트롤해서 무엇으로 승부를 가르고 재미를 만들지를 설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 당시 이 게임을 만든 개발자들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들이었음이 틀림없다. 허나, 정작 본인은 우리나라를 소개하는 이 게임은 어렸을 때 접해 보지 못했다.

그 다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종합 스포츠 게임은.. 위의 것들과는 달리 '동계' 스포츠 담당이다. 바로 Ski or Die. 제목이 참 아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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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Ski or Die와 캘리포니아 게임즈가 성격이 비슷하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Ski or Die는 Epyx 사의 작품이 아니다. 그 이름도 유명한 Electronic Arts에서 개발했다고 나온다. 다만, 신기술의 도입이 늦었는지 1990년작임에도 불구하고 VGA를 지원하지 않고 여전히 16컬러인 것은 좀 아쉬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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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메뉴를 고르는 게 아니라 주인공의 스키를 조종해서 원하는 경기를 선택하는 형태로 진행된다. 스키, 보드 또는 튜브를 타고 슬로프를 내려가는 건 기본이며, 스키 점프 묘기에다 심지어 눈싸움도 있다. 눈싸움은.. 뭐랄까 SEGA 시노비에서 한 레벨을 깬 뒤에 등장하는 보너스 게임과 비슷한 스타일 같다. (돌아다니는 자객들을 전부 표창 던져서 맞히는 거)

캘리포니아 게임즈에서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타고 이동하는 게임은 다 횡(가로) 스크롤이지만, Ski or Die에서 스키를 타고 이동하는 게임은 다 종(세로) 스크롤이라는 차이가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07 08:32 2016/11/07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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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전에도 한번 이런 비유를 꺼낸 적이 있었는데.. 라면을 소프트웨어 플랫폼에다 비유하자면 봉지 라면은 PC, 사발면은 태블릿, 컵라면은 스마트폰 정도에 대응하는 것 같다. 그래서 한 플랫폼에서 잘나가던 라면이 다른 플랫폼으로 종종 포팅되곤 한다(카카오톡 PC 버전, 오피스 안드로이드 버전처럼). 비록 둘이 맛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말이다.

식당에서 주문해서 먹는 라면은 집 밖의 거대한 다른 가게에 들어가서(서버 접속) 먹는 것이니 서버 사이드 웹 애플리케이션일 것이며..
분식점 같은 식당 납품을 목적으로 라면 제조사가 면이나 스프만을 대량으로 따로 파는 건 '엔진' 같은 미들웨어 컴포넌트 내지 라이브러리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겠다.

2.
스마트폰은 컴퓨터와 달리.. (1) 특별한 일이 없는 한 24시간 켜져 있고, (2) 열받고 뜨거워질지언정 그래도 팬 돌아가는 소리가 안 나고, (3) 보조 기억장치가 있지만 하드디스크 돌아가는 것 같은 소리는 전혀 없다.
그래서 (2)와 (3)을 종합하면 스마트폰은 아주 조용하다. 게다가 얇기까지 하다.
어찌 보면 세상에 어떻게 이런 컴퓨터가 존재 가능해졌는지 신기한 노릇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화면은 옛날 구닥다리 액정 같은 단색이 아니라, 고해상도 천연색 그래픽을 찍어 낸다. CPU뿐만 아니라 디스플레이나 메모리까지 총체적으로 왕창 발전했기 때문에 스마트폰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옛날에는 뭔가 영상이 표시되는 기계 자체가 굉장히 미래 하이테크의 상징이었다. 집 현관을 표시해 주는 인터폰이나 자동차 내비 같은 거 말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니터는 아날로그 신호에 둥그런 브라운관 형태로나마 진작부터 천연색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들고 다닐 수 있는 소형 텔레비전이나 인터폰, CCTV 같은 건 원가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의외로 흑백 버전이 2000년대까지 쓰였다. 본인은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며 집을 옮긴 적이 있지만, 컬러 화면이 나오는 인터폰 실물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구경을 못 해 봤다.

그런데 어느 샌가 갑자기 CCTV의 화질이 급격히 향상되고 차량들이 개나 소나 내비에 블랙박스까지 달고 다니면서 블랙박스에 찍힌 사고 영상만 모아서 보여 주는 TV 프로가 큰 인기를 모을 정도가 됐다. 사진과 동영상을 즉각 생성해서 남들 보는 사이버 공간에 용량과 트래픽 걱정 없이 올리는 게 너무 금방, 쉽게 가능해졌다. 이건 1980년대의 SF물들이 제대로 상상하지 못한 너무 엄청난 변화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컴퓨터 자체도.. 이젠 스마트폰 내부에서 가상 머신을 돌려서 도스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의 Windows 9x를 구동할 수도 있게 됐다. 머리만 비교하면 스마트폰의 CPU가 일반 데스크톱 PC의 CPU와도 성능이 호각이 됐으며, 단지 PC에 비해 부족한 건 입력 장치와 하드디스크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발열이나 전원의 한계는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모바일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PC에서 x86 계열 CPU + Windows 계열 운영체제를 총칭하는 '윈텔' 독점 구도도 상당 부분 흔들리게 됐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시장 수요를 창출해 냈으니까. x86은 30년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유구한 하위 호환성을 자랑하지만, 그 때문에 저전력 모바일에서 빠릿빠릿 움직이는 용도로는 상당히 부적합한 CPU가 돼 버려서 말이다. Windows도 마찬가지다.

다만, 단순히 이미 만들어진 정보들을 받아 보기만 하는 인터넷 단말기 이상으로, 뭔가 글쓰기나 코딩 같은 생산적인 활동을 하기에는 스마트폰은 문자 입력이 너무 불편한 게 흠이다. 구닥다리 타자기의 인터페이스를 답습하고 있지만 그래도 문자 입력 분야에서 키보드만 한 가성비를 제공하는 물건은 아직까지 없다.

예전에 그나마 전화기 버튼이라도 있던 시절에는 3*4 배열이라는 틀은 고정돼 있었는데..
요즘 스마트폰은 화면의 절대적인 크기나 종횡비까지 전부 그냥 흰 도화지 수준인 거 같다. 인간에게 가장 적합한 글쇠 scheme은 어떤 형태일까? 블루 오션이다 보니 먼저 연구해서 표준 틀을 정착시키는 사람이 그냥 장땡이 돼서 혼자 다 해먹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난 잘 모르겠다. 난 한글 입력 쪽은 글쇠배열이 아니라 일단은 근본 메커니즘 연구가 주 관심 분야인지라..

글쇠 수가 너무 많으면 안 그래도 작은 화면에 너무 작은 글쇠 버튼을 잘못 찍어서 오타를 내기 쉽고, 반대로 글쇠 수가 너무 적으면 타수가 늘어나고 이것저것 모드를 바꾸는 빈도가 잦아져서 그것대로 또 입력이 불편해진다.
구글 단모음을 한동안 써 보다가 불편해서 다시 나랏글로 돌아왔다. ㅎ, ㅔ 같은 자모를 한 번에 바로 입력할 수 있어서 편한 것보다, 오타가 나서 불편한 게 더 크게 느껴졌다. 개인적으로는 나랏글을 거의 2004년부터 10년 넘게 쓰기도 했고 말이다.

3.
스마트폰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오늘날과 같은 사진· 동영상 업로드 문화를 만들어 낸 건 두 말할 나위 없이 '디지털 카메라' 기능까지 전화기 안에 쏙 들어간 덕분에 가능했다.
오늘날 폰의 카메라가 단순 화소수와 색감만 따지자면 어지간한 보급형 디카의 성능을 다 따라잡고도 남는다. 하지만 폰 카메라가 전용 디지털 카메라를 결코 따라잡지 못하는 게 크게 둘 있는데, (1) 줌과 (2) 부팅 속도이다.

근본적으로 카메라의 형태로 적합하게 설계되지 않은 그 얇은 몸체에다 두꺼운 다기능 렌즈까지 우겨넣는 건 아무래도 무리다. 그렇기 때문에 폰 카메라는 줌 기능이 전문적인 카메라의 적수가 될 수 없다. 시야각도 한계를 받기 때문에 이걸 극복하려면 별도의 파노라마 합성 앱 같은 것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디지털 카메라는 사진을 찍을 때에만 잠시 켰다가 끄는 걸 스마트폰보다 훨씬 더 간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밖에서 사진을 몇백 장씩 산발적으로 찍을 일이 있을 때 전력 소모 부담이 훨씬 덜하다. 부팅도 아예 범용 컴퓨터인 스마트폰보다야 비교할 수 없이 더 빨리 되며, 전원을 켜자마자 거의 곧장 촬영 ready 상태가 된다. 그 반면 스마트폰은 이런 특성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

하긴, 피처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스마트폰에 온갖 복잡 다양한 기능들이 추가될수록 사용자가 알게 모르게 치르는 대가로는 배터리 시간이라든가 폰의 물리적 내구성 같은 게 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스마트폰도 켠 직후에 수 초 이내로 바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PC에 준하는 급의 부팅이 필요하고 엄청난 양의 초기화와 캐싱, pre-fetching을 해 줘야 쓸 수 있는 물건이 되고 있다. 예전에 PDA나 공학용 계산기가 그렇게 부팅 시간이 긴 물건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부팅이 존재하고 악성 코드 걱정을 해야 하는 기기는 다른 전자 기기와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며 훨씬 더 능동적인 물건이다.

한때는 이런 작은 화면에 찍히는 글자는 초간단 비트맵 글꼴 기반인 게 당연시되었는데 그게 힌팅까지 적용된 미려한 윤곽선 글꼴로 바뀌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소프트웨어적으로는 예전에 비해 그야말로 엄청난 부담이 추가된 거나 다름없다. 윤곽선 글꼴은 캐싱 없이는 도저히 쓸 물건이 못 되며, 캐싱이라는 건 굉장한 양의 메모리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컴퓨터 프로그램들이 같은 일을 해도 예전보다 메모리와 CPU를 훨씬 더 많이 요구하는 이유는 유지 관리 차원에서의 범용성과 추상성을 높인 대신에 오버헤드가 더 커지고 성능 희생을 감수한 게 매우 크게 작용한다(가상 머신, 가상 함수, 등등등등). 스마트폰의 전력 소비나 부팅 속도도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11/05 08:37 2016/11/05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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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래의 후손이 보라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옛 말이 있다. 비록 인간은 개인 단위로는 수명이 유한하지만,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잊혀지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이런 기록 덕분에 인간은 과거 선조들의 경험을 전수받고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며, 지식과 정보를 축적할 수가 있다.

조선 시대의 실록은 굉장히 값진 문화 유산이다. 오늘날은 컴퓨터가 발명되고 반도체 기반의 초소형 고밀도 기억장치가 등장한 덕분에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엄청난 문자 및 멀티미디어 정보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다.
단, 여기에 저장된 정보는 접근을 위해서 역시나 복잡한 컴퓨터 장비가 필요하며 열과 자성, 충격, 습기 같은 물리적인 악재에 취약하다. 충분히 백업을 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몽땅 소실될 위험도 있다.

비록 비효율적이고 저장 밀도도 안습하지만, 수백· 수천 년을 버티고 살아남은 정보 저장 매체는 결국 돌판이나 종이책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그 반면, 수백 년 전의 인류가 사용한 플로피 디스크 내지 자기 테이프가 발견되었다면 후손들은 과연 해독이 가능할까?

뭐 아무튼, 굳이 정보뿐만이 아니라도 인간은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이런 걸 향유하며 살았다"라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종종 '타임캡슐'이라는 걸 만들어서 매립해 왔다. 한 시대를 대표하고 추억이 될 만한 물건들을 커다란 통에다가 넣어서 밀봉하고 땅 속에 파묻어 둔다. 그 뒤 지금으로부터 수십~수백 년 뒤에 개봉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지난 1994년에 서울시에서 서울 도읍 600주년을 기념해서 타임캡슐을 제작한 것이 유명하다. 다른 건 모르겠고 아래아한글 2.5 패키지가 포함된 것이 본인의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요즘이야  플랫폼이 Windows로 넘어가면서 아래아한글의 점유율이 그 시절 만하지 않은데 나중에 그 2.5 패키지를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요 캡슐은 남산 한옥 마을 인근의 타임캡슐 광장에 매립돼 있다. 설정상의 개봉 예정일은 600에다가 400을 더해서 1000이 되는 무려 2394년. 그런데 미래의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이 수틀려서 자기 권한으로 그냥 조기 개봉해 버려도 할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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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말고도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이것저것 타임캡슐을 만들어 묻은 게 의외로 굉장히 많다는 걸 본인은 처음 알았다. 이런 용도의 캡슐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가 있을 정도이니 자세한 건 여기를 참고하면 되겠다.

타임캡슐은 뭔가 킬로그램 원기 내지 인간의 냉동보존 같은 느낌이 드는데, 꼭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공기와 습기를 완벽하게 차단한 채로 보존이 잘 돼야 한다. 안 그러면 보관된 물건들은 수백 년 뒤에 낡고 썩는 바람에 후손들은 쓰레기밖에 건질 수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매립된 모 타임캡슐을 겨우 50여 년 뒤에 조기 개봉했는데, 캡슐이 습기를 제대로 차단하지 못한 바람에 매장품이 이미 다 폐품으로 전락한 사례도 있었다.

2. 외계인(?)이 보라고

자, 그럼 후손들이 보는 타임캡슐만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성격이 위의 것과는 좀 다르지만 일종의 우주 스케일인 타임캡슐(?)도 있다.
1972년과 1973년에 발사된 외행성 탐사선인 파이어니어 10호와 11호는 혹시 마주칠지 모르는 외계인에게 인간의 존재를 소개하기 위해서 요런 그림이 그려진 동판이 장착되었다. 유명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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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 이런 것까지 생각할 만한 사람은 외계인 덕후 과학자인 칼 세이건밖에 없다. ㄲㄲㄲㄲㄲ)

일단 외계인이 보는 게 목적이니 인간의 언어와 문자는 전혀 동원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는 GUI 운영체제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아이콘과도 비슷한 컨셉이 된다.
당장 보아하니 이 탐사선이 어디서 왔는지를 태양계와 지구를 통해 표현했고, 이걸 만든 주체인 호모 사피엔스를 그림으로 묘사했다. 옷을 그려 넣으면 옷까지 신체의 일부라고 외계인이 오해(!)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부득이 사람을 알몸 형태로 그렸다.
그것 말고 다른 의미도 있는데 귀찮아서 검색은 생략한다.

굳이 비주얼한 것 말고 다른 인위적인 의미를 외계인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그야말로 우주 공통인 수학· 과학 원리를 동원하는 것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됐다. 그래서 영화 <컨택트>에서도 전파 신호가 2 3 5 7 11 13 같은 소수 수열 주기로 오는 걸 인지하고는 주인공이 "이건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신호야. 노이즈가 아냐!"라고 흥분· 감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수학이 문자이고 물리학이 언어가 되는 셈이다. "같은 우주에서 살고 있다면 이들도 같은 물리 법칙을 발견했을 것이고 우리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파이어니어 이후, 1977년에 발사된 보이저 1호와 2호는 가히 외행성 탐사선의 끝판왕인데, 얘는 아예 축음기와 음반이 들어갔다.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서 금칠까지 한 엄청 비싼 음반이다.
이 음반에는 파도와 바람 같은 자연의 소리, 시대별 주요 음악, 세계 55개 언어로 발성한 인삿말(한국어도 포함) 등이 수록되었으며 음반 뒷면에는 파이어니어 금속판과 동일하지는 않지만 다른 상징적인 그림도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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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행성 탐사선에 실린 물건은 기껏 지구의 땅 속에 묻힌 타임캡슐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먼 미래를 상정하고 만들어졌다. 물론 이걸 누군가가 실제로 발견하고 읽어 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저건 지구의 타임캡슐과는 달리, 사실상 그냥 상징적인 퍼포먼스일 뿐이라고 봐야 한다.

가까운 별이나 행성 하나까지 가는 데도 거리가 기본이 광년급이다. 외계인의 존재 가능성을 차치하고라도 그 우주에서 좁쌀, 먼지보다도 작은 탐사선을 누가 발견한다는 기약이 있을까? 차라리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유리병에다 구조 요청 쪽지를 넣고 밀봉 후 병을 흘려보내는 게 훨씬 더 희망적이다.

그래도 인간이 이런 식으로 땅 속과 우주로, 서로 다른 방식과 목적으로 미래에 누군가가 보라고 자신의 족적을 남긴 내역이 있다는 게 흥미롭다.
뭐, 성경적으로야 우주 공간에 지구 말고 다른 곳에 지적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이란 없을 것이고 거기에 너무 집착하는 건 별로 권장할 만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아는가. 기독교를 변증할 때도 "인간이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무수히 넓은 영역 안에 하나님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이런 말을 하는데, 같은 논리로 "인간이 아직 탐사하지 못한 무한히 광대한 우주 안에 인간 말고 다른 지적 생명체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되십니까?" 이건 종교색을 떠나 자연을 탐구하는 관점에서만 보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의문이니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엔 만화가 박 무직 씨가 그린 <호텔>이라는 만화가 꽤 히트 쳤다. 거기서는 인류가 지구 온난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하기 전에, 거대한 '호텔'을 지어서 자신의 유전자를 보존해서 남긴다. 그걸 까마득히 먼 미래에 외계에서 온 지구인의 후손(?)이 발견한다. 뭔가 지구 버전과 우주 버전을 합친 느낌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10/03 19:35 2016/10/03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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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차량 + 대포

전차와 자주포를 구분할 줄 아는지 여부는(외형, 용도 모두) 아마 일반인과 밀덕을 구분하는 가장 기본적인 잣대가 아닐까 싶다. 군사 디테일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느 것이든 그저 똑같은 탱크로 보이겠지만, 둘은 그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차는 적진을 향해 말 그대로 돌진해서 싸우는 역할을 하는 차량이다. 눈에 보이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적을 향해서 포를 직사로 쏜다.
그 반면 자주포는 대형 곡사 화포에다가 움직이는 기능을 부가적으로 추가한 형태이다. 탱크만치 험지와 급경사, 물 속까지 돌아다니지는 못하지만 수~수십 km 밖에 있는 표적에다가 위력도 훨씬 더 강한 포를 쏜다.
스타크래프트 탱크에다 비유하면 전차는 말 그대로 탱크 모드이고, 자주포는 시즈 모드에 대응하는 셈이다. 게임에서는 한 차량이 두 모드를 겸하는 재주꾼이지만 현실에서는 둘은 별개로나 운용 가능하다.

군용차 중에는 전차보다 더 무장이 작은 장갑차도 있다. 이런 차량은 전차보다도 더욱 이동과 방어에 특화돼 있으며, 무장은 있더라도 포가 아닌 중기관총 같은 더 가벼운(?) 형태로 국한되곤 한다.
심지어 바퀴도 궤도가 아닌 일반 고무 타이어가 달려 있기도 하다. 굴삭기가 궤도형도 있고 고무 바퀴형도 있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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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군용차의 속성에는 이동 능력과 전투 화력이 일종의 tradeoff 형태로 존재한다. 그래서 장기에서도 이런 점을 반영하여 차(車)와 포(包)가 가장 값어치가 높은 말인 것이지 싶다. 적절한 작명이다. "차 떼고 포 떼고"라는 관용구는 핵심요소를 빼서 엄청난 핸디캡을 부과하겠다는 얘기이며, 윷놀이로 치면 윷과 모를 빼고 하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말(馬)이나 코끼리(象)를 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2. 드래군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 공격 유닛 중에는 '드래군/드라군'이라는 놈이 있다. 영어로는 dragoon인데 '용'을 뜻하는 dragon과 철자가 아주 비슷하다(O가 하나 더 붙었을 뿐).
드래군은 우리 문화권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근세 서양에 존재했던 기마병을 뜻한다. 시기가 중세 이후이기 때문에 무슨 두꺼운 갑옷 차림에 냉병기 무장은 아니고, 그 대신 머스킷으로 무장해 있었다.

그런데 영한사전을 찾아보면 드래군의 원래 우리말 번역이 '용기병'이라고 그러길래.. 저 '용'은 도대체 무슨 한자이고 무슨 뜻으로 말이 저렇게 번역되었는지가 몹시 궁금해졌다.
설마 했는데 그 용은 龍이었다. 드래군들이 지닌 장구류(깃발, 헬멧)에 용 모양의 휘장이 붙어 있었다고 말이다. 불과 천둥을 내뿜는 머스킷 총구가 서양 문화권에서 용의 입을 연상시켰는가 보다.
영어로도 '드래곤'과 굉장히 비슷한 단어인데 한국어 '용'도 그걸 노린 건지, 마치 dung과 '똥'과 비슷한 급의 우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프로토스의 드래군은 다리가 넷 달렸고 덩치도 아주 크다. 비슷한 테란 메카닉 유닛인 골리앗보다도 더 크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프로토스 용사들의 수족만 기계로 교체한 거라면 외형이 이족보행 로보캅처럼 됐을 텐데, 저렇게 '기마병'을 표방하느라 다리 개수도 늘어난 듯하다. 원래 프로토스 족이 근본적으로 인간보다 덩치가 더 큰 걸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군대 조직 생각을 하다가 문득 스타크래프트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3. 육군 보병을 지원하는 화력

전쟁에서 가장 본질적인 주역은 예나 지금이나 땅개 보병 소총수이다. 사람은 결국 물이나 하늘에서 사는 게 아니라 땅에서 사니까.. 그리고 온갖 최첨단 무기들이 등장하고 그로 인해 특수하고 전문적인 병과들도 많이 생겼지만, 얘들도 존재 목적은 결국 보병이 벌이는 전투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난관에 부딪힌 보병 부대가 통신으로 "우리는 현재 적에게 포위됐다. / 이런이런 장애물 때문에 진격을 못 하고 있다. 여기여기 좌표를 폭격해 주길 바란다! 지원 바란다!" 식으로 후방 기지에다 연락을 한다.

군대에 어떤 기계가 도입되면 기계 덕분에 인력만으로 할 수 없는 넘사벽 급의 일을 거뜬히 하게 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기계는 아무 환경에서나 제 능력을 발휘 가능한 게 아니며, 유지 보수하고 관리하는 인력을 추가로 필요로 한다. 기계는 사람보다 생물학적으로 척박한 곳에서는 더 잘 견디겠지만, 너무 복잡하고 정교한 물건이라면 충격이나 진동에는 의외로 취약하고 신뢰성이 마냥 무한하지 않다. 만능 강화복이나 로봇 병기 같은 게 2010년대에도 실용화되지 못하고 여전히 공상과학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총체적인 가성비를 따졌을 때, 알보병은 현대전에서도 가성비가 그렇게까지 꿀리지 않는다. 군사 분야에서 알보병이라는 병과가 송두리째 100% 기계로 대체되지는 않았으며, 기계는 자기 전문 영역에서만 언제까지나 인간을 보조하는 형태로 운용되고 있다.

보병을 지원하는 화력은 크게 포격과 폭격으로 나뉜다. 포격은 앞서 소개했듯이 자주포로 어마어마하게 먼 표적에다 포를 쏘는 것이며, 폭격은 공군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폭격기들이 직접 날아와서 적진에다 폭탄을 떨구고 가는 것이다. 비주얼은 폭격이 더 멋있을지 모르지만, 포격이 더 안전하고 저렴하며 포탄을 더 안정적으로 공급받으면서 더 오래 지속적으로 공격을 할 수 있다.

한편, 위의 것과는 성격이 좀 다르지만 저격도 매우 훌륭한 지원 임무이다. 적군 한 명을 죽이기 위해 소모하는 총알 효율로는 이거 뭐 게임이 안 되니까..
다만, 얘는 화력 덕후나 지휘 통솔 공동작업 같은 일반적인 군사 이념을 추구하지는 않으며, 혼자 하는 잠입 액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나름 전문직 병과임에도 불구하고 포병 장교나 전투기 조종사와는 달리 장교가 아닌 부사관 계열로 간주된다. 해군으로 치면 여느 군함이 아니라 잠수함 근무에다 비유할 수 있겠다고 본인이 언급한 적이 있지 싶다.

적군의 대포 사격은 우리 역시 대포 사격으로 대응하고 제압하는 편이며, 적군의 저격수를 제압하는 것도 일반적으로는 아군의 저격수이다. 급이 같아야 서로 싸움이 되는가 보다.

4. 군용기

수송기: 군용기 중에서 말 그대로 이동과 수송에 가장 특화돼 있으며 민항기와 가장 비슷한 역할을 하는 물건이다. 모든 전쟁에는 전투 인원보다 보급· 지원 인원이 더 많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군용기에서도 수송기는 비록 직접 교전을 하지는 않아도 역할이 가히 절대적이다. 공중급유기도 수송의 일종으로 봐야 하려나?

정찰· 조기경보기: 수송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아래의 비행기들처럼 본격적으로 공격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공중이라는 특성상 땅과 바다의 어떤 기계도 할 수 없는 첩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명백한 이유로 인해 군용기 중에서 무인화가 가장 먼저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폭격기: 무장을 잔뜩 실어서 아래의 땅을 쑥밭으로 만드는 일에 최적화돼 있다. 군용기 중에서 실질적인 kill 수를 제일 많이 달성하고 20세기 전쟁사를 가장 거창하게 장식한 물건이 바로 폭격기이다.
항공 폭탄은 그냥 중력의 힘으로 낙하만 하는 것이니 포탄· 미사일이나 어뢰와는 달리 추진을 위한 기폭제나 엔진이 필요하지 않고 순수하게 본연의 임무인 파괴를 위한 폭약만 잔뜩 집어넣어서 만들면 된다는 큰 장점이 있다. 다만, 요즘은 정밀 유도 미사일의 발달 덕분에 옛날처럼 무식한 융단폭격 전술이 그렇게까지 막 쓰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전투기: 얘는 수송기나 폭격기, 혹은 동급의 전투기 같은 다른 군용기를 떨구는 일에 최적화됐다. 공중에서 매우 빠르게 날아가는 비행기를 공격하는 것은 지상의 목표물을 공격하는 것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투기는 기동성이 그 어떤 군용기보다도 뛰어나며 무장도 최첨단으로 달려 있다. 여러 비행기 조종사 중에서도 전투기 조종사는 되기가 가장 힘든 전문직이다.
전투기는 과격한 기동 때문에 탑승자 대비 연료 소모도 많은지라, 커다란 전투기의 내부도 겨우 2명이 타는 좌석을 빼면 다 연료를 싣는 공간이다. 여객기는 공간 확보 때문에 연료가 날개 안에 실려 있는 편이지만, 전투기는 날개 주변에다가는 무장을 싣는다.

5. 총포

일반 총(개인 소화기급은 사정거리 수십~수백 m, 대형 중화기급은 수 km): 총구에서만 불이 뿜어져 나오고, 그 뒤에 총알 하나에서 탄두 하나가 목표물의 특정 지점에 곱게 박힌다. 작은 권총 정도는 비교적 자유로운 자세로 쏠 수 있지만 장거리 사격은 화력이나 정확도 면에서 영 무리이다. 적어도 강선이 새겨진 소총급은 돼야 군인이 개인 화기로 쓸 만하며, 이런 총은 개머리판을 어깨에 댄 채로 쏴야 한다.
혼자 들고 다닐 수 있는 소총도 잠깐 동안이나마 자동 연사 기능이 있다(방아쇠를 한번 당기고 있는 동안 계속 총알이 나가는..). 하지만 총열 순환과 냉각 기능이 있고 위력이 더 강한 중기관총 같은 급이 되면 운용을 위해 여러 인원이 필요하며, 경화기를 넘어 중화기의 범주에 들기 시작한다.

산탄총: 총구에서만 불이 뿜어지는데 총알 하나에서 단일 탄두가 아니라 여러 쇠구슬들이 퍼지면서 목표물에 박힌다. 이것도 스플래시 대미지인지?
이런 총기는 사정거리가 짧기 때문에 전투용으로는 부적합하며, 인명 구조를 위해 자물쇠를 부수고 문을 딸 때 혹은 그냥 사냥 용도로 쓰인다. 마치 칼 중에서도 부엌칼처럼 어째 비군사적인 목적으로 유용한 구석이 많다. 물론 그래도 부엌칼이나 샷건 역시 사람을 얼마든지 끔살시킬 수 있는 위험한 흉기인 건 자명한 사실이다.

대포(사정거리 수십 km): 사람이 혼자서 들고 다닐 수 없는 물건이다. 옛날에는 성벽 요새나 군함에 달려 있었으며, 야전에서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굴려서 운반하곤 했다.
그 시절에는 대구경 화포답게 무슨 볼링공 같은 거대한 탄환이 날아가서 목표물을 박살내곤 했으나, 요즘 대포에서는 그냥 단단한 탄두가 아니라 고폭탄이 날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총구뿐만 아니라 명중 지점에서도 불꽃과 폭발이 일어나며, 넓은 영역에 파편이 날리면서 '스플래시 대미지'가 발생한다.

로켓과 미사일(사정거리 수백~수천 km): 대포보다도 더 강하고 정확한 화력을 원한다면 결국 탄환에다가 직접 로켓 엔진을 달아서 추진시키는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이것이 20세기 중후반이 돼서야 등장한 미사일이라는 물건이다. 얘는 발사 직후(총)나 명중 직후(포)뿐만 아니라 날아가는 동안에도 꽁무니에서 불과 연기가 피어오른다. FPS로 치면 얼추 로켓 런처처럼 되는 셈이다.
미사일은 고작 수십 km가 아니라 수백~수천 km를 날아서 대륙을 건널 수 있는 지경이 되었으며, 목표물을 향해 스스로 자세를 잡는 유도 기능도 갖추고 있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다가 고작 재래식 폭탄이 아니라 핵폭탄을 장착하면 가히 인류 역사상 최강의 병기가 탄생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요즘 북한이 하는 짓을 보면 알 수 있듯, 핵무기의 개발에는 장거리 발사체의 개발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과거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처럼 일개 폭격기가 적국의 영공 깊숙한 곳까지 친히 기어 들어와서 핵폭탄을 떨구는 짓은 오늘날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 로켓 기반 화기 중에도 바주카처럼 상대적으로 작은 놈도 있긴 하지만, 대략적인 추세가 이러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6/09/28 08:31 2016/09/28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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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상륙 작전 (영화)

영화 인천 상륙 작전, 혹은 오퍼레이션 크로마이트.
일부러 날짜를 맞춘 건지는 모르겠지만, 6· 25 전쟁의 휴전이 타결된 날인 7월 27일에 개봉했다.
보는 내내.. 감독이 표현하고자 한 사상이 본인의 내면과 잘 통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반대로 좌빨 매체에서 별 이유 같지도 않은 궤변 늘어놓으면서 이 영화를 왜 저렇게 못 물어뜯어서 야단인지가 적극 이해되었다. 북괴 치하에서 벌어지던 잔학한 공포통치, 세뇌, 인민재판, 숙청을 저렇게 적나라하게 그려 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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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막론하고 전쟁은 그저 참혹한 거고(그 전쟁을 먼저 일으킨 쪽이 누군데?), 공산당도 알고 보면 사실 착한놈이고 미군 국군도 민간인 왕창 학살했어(민간인 위장해서 치사하고 비열하게 도발한 놈 얘기는 절~대로 없이), 동족상잔의 비극은 남북 모두 책임이네 식의 메시지를 본인은 거의 부모 모독 패드립과 같은 급으로 정말 온몸으로 혐오한다. 저건 정말 천하에 듣기 싫은 불순하고 사악하고 마귀적인 사상이다.

이 영화는 요즘 각종 다른 매체들이 그러는 것처럼 이미 다 검증돼 있는 선악 구도를 괜히 비비 꼬고 비틀고 재해석(?)하고 절대악과 필요악을 교란하는 식의 전개가 없다. 그래서 참 건전하다.
스토리의 표현이나 묘사가 옛날 영화처럼 좀 진부한 건 일단 사상이 건전한 것에 비해서야 그리 큰 흠이 아니라고 본다.

특공대가 기차를 타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건 김 재현 기관사(미군 딘 소장 구출 작전)의 이야기를 다룬 <미카 129> 애니메이션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1950년 7월에 있었던 일이니 시기적으로 인천 상륙 작전보다 2개월 전, 이제 막 대전을 빼앗겼던 시절의 얘기다. 그 시절엔 열차 객차들이 다들 저렇게 목재에 직각 의자로 돼 있었나 보다.

그리고 대원들이 흩어지기 직전에 서로 손목시계의 시각을 동기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래야 시간 약속에 맞춰 정확하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엔 그 정도로 소형화된 손목시계는 굉장한 사치 고가품이었기 때문에 아무나 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한반도의 해방 직후에 소련군이 들어와서는 민간인에게 행패와 약탈을 일삼았으며, 특별히 약탈한 손목시계들을 한 팔목에다 주렁주렁 차고 다녔다는 걸 생각해 보시라.
그로부터 20여 년 전에 윤 봉길 의사가 김 구와 교환한 시계는 손목시계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회중시계였다는 점도 같이 생각해 보자.

본론으로 돌아오면, 이 영화에서 맥아더 장군 역을 맡은 배우는 잘 알다시피 그 이름도 유명한 리암 니슨이다. 테이큰에서 내가 완전 반해 버린 그 아저씨가 '군산, 원산, 인천' 등 한국의 지명을 발음하면서 맥아더 연기를 하다니 무진장 기쁘고 고맙다. 잘생겼고 무엇보다 우리나라에 호의적이고 개인적인 품행과 사상이 건전한 배우인 것 같아 더욱 믿음직스럽고 호감이 간다. 아주 건전하고 뜻깊은 역사물 영화를 만든대서 여느 할리우드 영화를 찍을 때보다 훨씬 더 저렴한 출연료만 받고 선뜻 출연해 줬다고 한다.

이 사람이 전화통 붙들고 김 일성과 "난 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전쟁을 멈추고 철수하지 않으면 난 군대를 보내서 널 찾아내고 널 죽여 버릴 것이다." / "풋~ 잘해 보라우" 설마 이런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영화엔 더 감격스러운 장면이 있었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었을 때, 그리고 선발대로부터 조명탄이 성공적으로 발사됐을 때.. 어둠 속에서 '빛'이 쫙~ 비친다. 맥아더도 이걸 보고는 감격한다. 작전 성공을 이렇게 묘사한 게 단순히 적진을 다 때리부순 장면보다 더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었다. 성경에서도 빛은 절대적으로 긍정적인 심상이고 어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고 나쁜 심상이다.

  • 어머니를 지켜 주고 싶어 군대에 자원한 이 정재 vs 이념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이 범수
  • 부하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이 정재 vs 홧김에 부하를 쏴 죽이는 이 범수
  • 대통령 하고 싶어서 인천 상륙 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반대 세력 vs 나라를 지킬 총과 탄약을 더 달라는 소년병의 군인정신에 감동해 반드시 이 전쟁을 이기겠다고 다짐한 군인 맥아더
  • 인민군 내부에서조차 림 계진과 박 남철은 서로 감시 vs 국경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는 맥아더와 장 학수

어느 게 선이고 어느 게 악인지, 어느 게 빛이고 어느 게 어둠인지를 이 영화는 단순하게 잘 대조해서 보여 줬다.
또한 러시아어를 읊조리는 북한군 애들은 "신이 도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보이기나 해?" 이러지만 맥아더 포함 미군 장성들은 수시로 "신의 가호가 있기를.." 이러는 것 역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간호사로 출연한 진 세연은 여기서도 항거 대상이 일제에서 북괴로 바뀌었을 뿐, 각시탈의 오목단과 비슷한 역할을 한 것 같다.

결말부로 가면 드디어 인천 시내에 시뻘건 저주받을 선전 구호들이 철거되고 시내가 태극기 물결로 바뀐다. 이건 그야말로 8· 15 해방과 동급의 기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이걸 아미타불로 바꾼 원흉이 중공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미제 분단 식민지로 들어갈 게 아니라 김 구와 함께 김 일성 밑에서 무혈 통일 이뤄서 우리 민족끼리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다" 요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인천 상륙 작전>은 감동적이면 감동적이지 불편할 내용은 하등 존재하지 않는다. 괜히 표현이 식상하고 진부하네 이런 거 불평하기에 앞서 난 이런 역사를 다룬 귀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 자체가 일단 고맙고 기쁘다.

이 영화에서는 일명 "맥아더 장군을 감동시킨 소년병" 씬이 흑백 과거 회상 형태로 잠깐 들어갔다. 이건 문헌에 따라서 날짜와 대사가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한데.. 6월 27일 or 29일, 서울 영등포 or 흑석동.. 어쨌든 개전 초기 서울을 빼앗기기 직전 또는 직후에 서울 한강 이남 전선을 시찰하던 맥아더 장군이 통역 장교를 대동하여 어느 앳된 병사와 실제로 나눈 대화이다.

"후퇴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자리를 지킬 것이고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싸울 것입니다."
"원하는 건.. 딴 건 필요 없고 단지 총과 실탄을 좀 더 주십시오."


본인은 저 일화를 먼 옛날 시스템클럽 글을 통해서 진작부터 접했었다. 거기 운영자분이 맥아더를 굉장히 좋아하시기 때문에.

훗날 박 정희 대통령이 무슨 미국 무기 회사 임원과 청와대에서 몰래 거래를 하면서 "님이 내게 준 개인 비자금 100만 달러를 도로 님에게 줄 테니 이 가격만치 M16 소총을 더 주시오" 뭐 이랬다는 일화(?)도 전해 내려온다. 그런데 그건 솔직히 출처와 정확도를 확신을 못 하겠다. 그것과는 달리 맥아더 + 소년병 일화는 국내외 여러 군 관계자의 회고록에도 수록돼 있으며, 주작이 절대로 아니다.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자. 비록 당장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모한 짓으로 보여도, 계속 항쟁과 의거가 벌어지니까 외국에서도 "조선은 정말로 일제와 한 뿌리가 아니며 독립을 원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윤 봉길 의사가 폭탄 투척을 했을 때 장 제스가 얼마나 감탄했던가?

이런 일들이 쌓이고 쌓이니 1940년대의 국제 여론은 구한말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일제를 쫓아낸 뒤 조선을 독립시키자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조선은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일제 식민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 보장이 명시되는 감격의 성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바로 그것처럼.. 당장 자국민부터가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확연한 의지를 드러내니 그것이 나비효과가 되어 맥아더 장군의 심리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역사를 바꾸게 됐다.

개전 초기에 국군은 전열이 무너지고 지휘 체계가 황폐화되는 혼돈의 카오스 속에서 허둥대다 1개월쯤 뒤부터는 희대의 막장 조치인 즉결처분조차 시행할 정도로 암울한 지경에 도달했다. (군기가 얼마나 개판이었으면 상관의 '까라면 까' 명령에 불응하는 부하를 현장에서 재판 없이 바로 사살 허용..;; 부하란 굳이 병뿐만 아니라 초급 장교들도 포함이다. license to kill -_-)
게다가 맥아더는 채 병덕 같은 남한의 X맨 급인 무능한 수뇌부에 이골이 나 있기도 했다. (유 재흥은 전투 패배 후에 밴 플리트 장군에게 까였고, 채 병덕은 개전 초기부터 맥아더에게..)

그랬는데 그 타이밍에 마침 저런 모범 병사를 만난 것이다. 맥아더가 포레스트 검프에서 "이런 씨발.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훌륭한 대답이다. 귀관은 IQ가 한 160쯤 되는 천재임이 틀림없다!" 거의 이런 급으로 감탄했을지도 모르겠다.

66년 전에 거기에 있었던 그 소년병 당사자(고 신 동수 옹. 2013년에 작고)의 부인 되시는 분<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관람하고는 감격에 눈시울이 젖었다고 한다! "우리 남편이 살아서 같이 봤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기자 양반, 혹시 이 영화 비디오로 하나 살 수 없을까? 남편 얼굴이 가뭇가뭇할 때마다 보고 싶어서 말이야." 가슴 뭉클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분의 인터뷰가 보도되고 나자 주연 배우인 이 정재 씨가 직접 비디오 테이프와 꽃다발을 들고 그분을 찾아뵈었으며, 리암 니슨도 직접 이분을 칭송하고 격려하는 이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이것만으로도 인천 상륙 작전은 평론가 평점 3점대 테러나 당할 작품은 절대로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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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시 2:2-4라든가 계시록에서 여러 민족들이 한데 뭉쳐서 특정 한 민족을 대적하는 사건을 언급한다. 이것은 영적으로 명백하게 좋은 현상이 아니며, 사실은 UN조차도 앞으로 그런 악역을 수행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런 트렌드와는 반대로,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나라들이 한데 뭉쳐 한 나라를 도왔던 6· 25 전쟁은 거의 전무후무한 사례이고 예외적으로 봐야 하지 않나 싶다. 미국이 개입했던 전쟁들 중 정당성 명분이 톱급으로 가장 큰 전쟁이었다.

뭐 괜히 쓸데없이 김치, 된장, 한복 이런 것보다야 차라리 한글이라든가..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시대를 너무 앞서 간 엄친아 괴수요 국제 정세의 달인인 어느 할배에 의해 미국의 도움을 받아 기적적으로 건국됐고, 저렇게 드라마틱하게 지켜져 왔다는 사실에나 좀 자부심 가졌으면 좋겠다. 과장 보태면 그런 건 좀 국뽕에 취해도 되겠구만, 왜 저런 정말 중요한 아이템엔 사람들이 관심이 별로 없나 하는 생각이 든다.

6· 25 개전 초기에 남한 정부의 우왕좌왕 실책과 병크가 나온 것을 비판할 건 비판하더라도... 국내 관료들과 미국 정치인들이 그 할배의 선견지명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받아들였다면 애초에 그 전쟁 자체가 벌어지지 않고 피해가 훨씬 줄어들 수도 있었다는 걸 먼저 감안해야 될 것이다.

그에 반해 김 구는 '그 할배' 같은 선악 관념이 없이, 남북 분단을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며 어떻게든 중재하고 막으려 했다. 이 사람이 덜컥 암살 당해 버리는 바람에 중재자가 없어졌고 남북 관계는 더욱 싸늘하게 식으면서 전쟁이 났다는 식의 해석도 있는데.. 그건 김 일성을 너무 착하고 순진하게 본 어리석은 생각이다.

김 구는 암살 당하지 않았고 계속 살았다면 최악의 경우 피아 구분을 못 한 채 적화통일 꼭둑각시로 이용당하면서 이 승만의 4· 19 부정선거 하야보다도 대한민국의 미래에 더 악영향을 끼치고 더 추하게 몰락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잘해 봐야 그냥 전쟁 타이밍의 시간만 약간 더 버는 역할밖에 못 했을 것이다. 악한 힘은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고 견제하는 것밖에 답이 없다.

이런 북한이 <인천 상륙 작전> 영화를 좋게 평가했을 리는 만무하다. 대남 종북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를 통해 신랄하게 디스했다. 지난 7월 29일자 보도를 보면 "남조선 괴뢰들이 지난 27일 그 무슨 '인천상륙작전'이라는 영화에 대한 시사회 놀음을 벌리였다. 불가능한 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된 작전이니, 죽음을 불사한 이야기니 뭐니 하는 희떠운(분에 넘치며 버릇이 없는) 수작들을 늘어놓고 있다."고 비난했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나에게 날개셋 한글 입력기의 새 기능을 코딩할 자유를 지킨 호국영령들의 은혜를 잠시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상.

Posted by 사무엘

2016/08/23 08:33 2016/08/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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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S 회상

1. 들어가는 말

오늘날의 거대하고 복잡한 운영체제와는 달리, 도스는 이니셜 D-_-가 암시하듯이 달랑 플로피디스크 한 장만으로 부팅이 가능할 정도로 참을 수 없이 작고 가벼웠다. 정말 필수불가결인 파일은 부팅에 쓰이는 io.sys, 그 뒤 셸 역할을 하는 텍스트 명령 해석기인 command.com이 전부다.
msdos.sys라는 파일도 있는데 얘는 정확하게 무슨 존재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사실은 config.sys의 DEVICE 명령을 통해 실행되는 sys 파일과, com 실행 파일이 서로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마우스, 그래픽 카드 에뮬(simcga, msherc ^^), 사운드(sound, unsound) 같은 여러 램 상주 드라이버들은 com이었지만, 씨디롬 드라이브는 sys였으며 그것도 주 메모리를 꽤 많이 차지하는 드라이버였다. 단, 부팅 후에 sys 파일을 별도로 실행해 주는 유틸리티가 있기도 했다.

디스크로부터 파일을 읽으려면 파일 시스템이 정립돼 있어야 하며, 이건 운영체제가 하는 일 중 하나이다. 그런데 그 운영체제를 로딩하는 프로그램도 파일 형태로 저장돼 있다. 이런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 딜레마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부팅에 쓰이는 운영체제 프로그램은 디스크에 단순히 파일 형태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바이오스가 물리적이고 원초적으로 인식 가능한 첫 지점에 저장돼 있어야 한다. 이건 굳이 도스뿐만 아니라 어느 운영체제라도 마찬가지이다.

도스는 단일 사용자 단일 프로그램 구동 체계이다 보니, 한 프로그램이 그야말로 컴퓨터 하드웨어를 전부 있는 그대로 조종 가능하게 허용하는 백지수표, 열린 허허벌판 같은 환경이었다.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도 명령 기반, TUI, GUI 등 제각각이었고 정말 창의적이었다. 요즘 프로그램들만치 UI가 획일화됐다는 느낌이 없이 형형색색 컬러풀했다.

물론 그건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그리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런 빵빵한 컴퓨터 자원에서 여러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행하고 작업 전환을 할 수 없다면 그것도 컴퓨터에 대한 예의-_-가 아니다.
그러니 운영체제가 더 강력하게 모든 걸 통제하는 지금 같은 환경으로 궁극적으로는 바뀌는 게 맞긴 하지만.. 인제 와서 도스가 다시 새삼스럽게 그리워질 때도 있다.

2. 역사

본인이 경험한 MS-DOS의 가장 옛날 버전은 학교 내지 컴퓨터 학원에서 봤던 3.2/3.3이다. 2.x 이하나 4는 실물로 구경을 못 해 봤다. 다만, 5.0과 6.2는 집 컴퓨터에 내장돼 있던 물건이다 보니 개인적으로 친숙하다.

1981년에 첫 출시되었다고 전해지는 MS-DOS 1.0은 그야말로 정말 골동품 폐물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Windows 1.0이 프로그램 창을 겹치게 배열하는 걸 지원하지 않았다면, DOS 1.0은 디스크에 서브디렉터리를 만드는 걸 지원하지 않았다..;;
그나마 도스가 최소한의 도스다운 틀을 갖춘 건 2를 거쳐서 3.x대에 와서부터이다. 특히 5.25내지 3.5인치 고밀도(1.2, 1.44MB) 플로피디스크를 지원하기 시작한 첫 버전이 이 버전이기 때문이다. 3.x에 와서야 좀 물건다운 물건이 나왔다는 점에서는 도스와 Windows가 역사가 서로 비슷한 것 같다.

그 다음 4.0의 아주 기념비적인 업적은 파일 시스템이 FAT12에서 FAT16으로 확장되어, 이론적으로 지원 가능한 디스크 볼륨의 용량이 2GB로 커진 것이다.
그 시절에 기가바이트는 가히 꿈의 규모였기 때문에 홍보 자료에서는 그냥 '제한이 없어졌다'라는 표현이 관용적으로 쓰였다. 참고로, FAT12 시절의 하드디스크의 용량 한계는.. 고작 32MB였다. =_=;;

또한 MS-DOS shell이라고 나름 드래그 드롭도 지원하고 Windows GUI를 어설프게 베낀 듯한 파일 관리자 셸이 추가된 것도 4부터이다. 하지만 MS-DOS 4는 구체적인 내역은 모르겠지만 불안정하고 버그가 많아서 좀 문제작으로 남았다고 한다.

도스 5.0에서 기념비적인 업적은 그 이름도 유명한 HIMEM.SYS와 DOS=HIGH일 것이다. EMM386은 4.0 때 SYS 버전이 있었지만 5.0부터는 EXE로 형태가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이 버전에서는 과거의 불편하던 EDLIN을 대체하는 QBASIC 기반의 텍스트 에디터가 추가되었으며, 명령 프롬프트에서 cursor 이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고 히스토리 기능도 넣어 주는 DOSKEY 유틸도 이때 추가됐다.

지워진 파일을 첫 글자 이름을 집어넣어서 복구하는 undelete 역시 아마 6이 아닌 5에서 첫 추가됐지 싶다. 이건 PC-tools나 노턴 유틸리티가 먼저 제공하던 꼼수 기능이었는데 동일 기능을 도스에서 직접 수용한 것이다.

그 뒤 6.0은.. 변한 게 많았다.
가장 유명한 건 하드 디스크를 압축해 주는 '더블 스페이스'라는 유틸리티의 도입이다.
이건 무슨 요술을 부리거나 하드 디스크를 물리적으로 어떻게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파일 시스템 차원에서 데이터를 zip 같은 소프트웨어 압축을 적용하는 것일 뿐이다. 당장 용량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만 디스크의 액세스 속도가 좀 느려지고 에러에 취약해지며, 하드웨어를 좀 험하게 다루는 일부 프로그램과는 트러블의 여지가 생긴다.

참고로 1993~1994년이면 Windows 3.1이 보급되고 어지간한 PC의 하드디스크는 몇백 MB 정도이던 시절이다.
더블 스페이스는 그렇잖아도 꽤 중요하고 민감한 간판 기능인데, 버그를 많이 잡고 안정화를 더 시켜서 6.2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스태커'라는 타사의 제품을 무단 도용한 것으로 판결이 나서 '더블 스페이스'를 뺀 6.21이 나왔고, 저작권 문제를 해결하여 '드라이브 스페이스'를 대신 도입한 6.22로 6.x대가 마무리 되었다. 지금이야 마소에 대해서 IE 브라우저의 독점 소송이 유명하지만, 1990년대 중반엔 저거 저작권 침해 소송이 IT 업계에서 굉장한 화두였다.

압축 유틸리티 말고도 6.x대엔 멀티 부팅이라는 매우 유용한 기능이 추가됐다. 즉, C/C++의 조건부 컴파일처럼 사용자가 선택한 옵션 방식대로 디바이스 드라이버를 로딩하여 부팅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디스크 점검 scandisk, 조각 모음 defrag, 시스템 점검 msd, 주 메모리 확보 유틸리티 memmaker 등이 추가되고 PC-Tools로부터 라이선스 받은 안티바이러스 msav 같은 유틸도 도입됐다. 덕분에 노턴 유틸리티가 예전보다는 좀 덜 필요해졌다.

모든 내부/외부 명령에 /? 옵션을 줬을 때 도움말이 나오는 것도 처음부터 존재한 게 아니었다. 6이거나 아니면 5부터인데 그건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난다. 옛날에는 도움말 텍스트를 일일이 내장시켜 줄 정도로 컴퓨터의 메모리나 디스크 용량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단독 제품으로서 MS-DOS의 역사는 1994년에 출시된 6.22가 끝이었다. 도스는 Windows 95/98/ME와 함께 7.0. 7.1. 8.0 버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0년에 드디어 20여 년의 긴 수명을 마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도스 외부 명령어 중에서 몇몇 필요한 건 Windows 9x 계열에서는 Windows\command로 갔고, NT 계열은 그냥 system32 디렉터리에 있다. 그리고 NT 계열은 format이나 diskcopy 같은 유틸리티도 콘솔에서 실행될지언정 도스가 아니라 Windows용 프로그램이라는 차이가 있다.

3. 그 당시의 유사품/경쟁자

한편, 도스의 바리에이션으로는..
PC-DOS는 그냥 MS-DOS가 IBM 브랜드만 달고 나온 동일 제품이었다고 한다. 한동안 그러다가 6.x대부터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는데 이미 그때는 PC 환경이 Windows로 충분히 넘어가기 시작했으니 별 의미는 없다. 따지고 보면 IBM은 OS/2가 망한 데다, 도스 분야도 뒷북으로 끝나고 별 재미를 못 본 셈이다. "IBM 호환 PC"라는 걸출한 대인배 이름만 남긴 채 PC 시장에서는 철수했다.

DR-DOS는 MS-DOS의 전신인 CP/M을 직접 만든 게리 킬달이라는 엔지니어가 '디지털 리서치'라는 회사를 세워서 따로 만든 MS-DOS의 대항마이다. '디알'이지 '닥터 도스'는 아님.. 뭔가 기능이 MS-DOS보다 뛰어났다고 얘기는 들었는데 구체적인 내역은 잊어버려서 기억이 안 난다.
DR-DOS를 '노벨' 사가 인수하여 새로 내놓은 것이 '노벨 도스'이며, 이건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나왔다.

한편, 4DOS는 커널을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건 아니고 명령 인터프리터인 COMMAND.COM만 대체하는 기능 확장판으로 컴덕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이걸 시먼텍(Symantec) 사에서 인수하여 자신들이 인수한 다른 유명 솔루션인 '노턴 유틸리티'에다가 집어넣은 것이 NDOS이다. 각종 도스 명령들에서 2% 부족하던 것을 보완하는 편의 기능이 굉장히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가령, 중간에 파일이 사라져도 괜찮은 batch-to-memory 배치 파일)

그리고 8.3 짧은 파일 이름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descript.ion이라는 숨김 파일을 만들어서 파일명에 대한 '주석'을 표시하는 것도 4DOS의 작품이었다. 옛날에 MDIR도 이걸 지원했다. 파일이 복사· 이동· 개명· 삭제됐을 때 주석도 같이 관리하는 게 좀 번거로운 일이 됐으니까.. NTFS처럼 운영체제의 파일 시스템 차원에서 메타데이터를 관리하는 기능이 없으면 어쩔 수 없이 셸 유틸리티가 뒷감당을 해야 한다.

4. MS-DOS의 한글화

MS-DOS가 최초로 한글판이 나온 것도 2나 3 버전부터이지 싶다. 정말 먼 옛날에는 마소가 잠깐 동안 조합형 코드 기반으로 도스를 한글화화기도 했다는데 지금으로서는 거의 Windows 2.1의 한글판 같은 도시전설이 돼 간다.
허나, 1987년에 지금의 KS X 1001, 그 당시의 KS C 5601 완성형이 제정되자마자 표준을 잘 지키는 마소는 완성형으로 광속으로 갈아탔다. 그게 이미 도스 3 시절의 일이다. 마소는 그냥 표준을 따른 것일 뿐이지만, 결과적으로 조합형 코드를 죽이고 한글을 파괴한 원흉(?)으로 일부 진영으로부터 좀 지탄받곤 했다.

그런데 한글 MS-DOS가 텍스트 모드에서 한글 입출력을 구동해 주는 바이오스 유틸리티를 처음부터 내장하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쉽게 말해 hbios와 그 특유의 바탕체 글꼴을 구경한 건 최소한 도스 5나 6부터이다. 3이나 4 시절에나 그런 게 없었으며, 한글 바이오스는 다른 프로그램으로 구동했었다. 이건 내 기억이 잘못됐을 수도 있음.

hbios는 Windows 95로 가면서 mshbios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 당시의 고유 글꼴은 <날개셋> 편집기에 '마소바탕'이라는 글꼴을 통해 구경할 수 있다. 도깨비나 태백한글 같은 싸제 한글 바이오스들은 조합형/완성형, 두벌식/세벌식, 명조/고딕 등 글꼴과 글자판과 코드를 다 선택 가능했지만, 마소의 보급 바이오스는 당연히 완성형, 두벌식, 명조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전에도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지만, 마소에서 한글화한 프로그램들은 2바이트 문자에 대한 처리가 굉장히 잘 돼 있었다. 2바이트를 구성하는 앞뒤 문자 중 하나가 가려지거나 지워지면 다른쪽 문자도 반드시 같이 사라졌기 때문에 텍스트 모드에서 메뉴나 대화상자가 표시될 때도 문자가 깨지는 걸 보이는 법이 없었다. 이에 대한 처리가 세심하게 돼 있었다.

5. 도스 시절의 멀티태스킹

비록 그래픽은 아니고 텍스트 기반이긴 하지만, Windows 3.x 비스무리한 도스 기반 멀티태스킹 운영환경(운영체제는 아니고..)으로 DESQView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 난 이름만 들어 보고 실제로 구경은 못 했다. 외국에서는 그럭저럭 쓰는 사람이 있었던 듯하지만 Windows의 등장 이후에는 조용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사실은 더 발전된 멀티태스킹 운영체제를 마소에서 직접, 그것도 Windows나 OS/2와는 별개로 만들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무려 1986년, Windows조차 이제 막 개 허접한 1.0이 나왔던 시절에 MS-DOS 3을 기반으로 일명 '멀티태스킹 MS-DOS 4.0'이 계획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그 도스 4.0과는 무관한 새로운 개발 브랜치였다.

멀티태스킹 MS-DOS 4는 제품이 나오기는 했고 의도도 나쁘지 않았지만, 1980년대 중반에 시대를 너무 앞서간 문제작이었다. 그 옛날에 그 열악한 하드웨어 환경에서 도대체 뭘 더 바라겠는가? 컨셉에 비해 상품성이 떨어졌다.
게다가 그 당시 마소는 지금처럼 독자적인 불특정 다수용 유명 소프트웨어를 독점 판매하는 공룡 기업이 아니었으며, 여전히 하드웨어 제조사에다 소프트웨어를 납품하면서 먹고 사는 기업이었다. 즉,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잘 안 되지만, 업계에서의 위상이 '갑'이 아니라 '을'이었다.
프로젝트를 발주했던 IBM이 이 물건을 더 구입해서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자 프로젝트는 흑역사가 되었고, 이 멀티태스킹 MS-DOS 4는 오히려 유럽의 일부 컴퓨터에 OEM 형태로 공급되는 걸로 개발 계보가 끝났다.

멀티태스킹 MS-DOS 4는 비록 GUI 환경은 아니지만 Windows의 전유물로만 알려졌던 NE (new executable) 실행 파일도 지원하고 지금으로서는 무척 신기한 면모가 많았다고 한다. 정작 NE를 사용하던 Windows는 NT가 등장하기 전에는 콘솔 모드라는 게 없었는데, GUI 기반이 아니던 멀티태스킹 도스가 NE를 어떤 형태로 사용했는지 궁금하다.

6. 맺는 말

도스 시절에 메모리 관리를 하는 건 요즘으로 치면 연봉별로 돈 관리하는 요령과 비슷했다. 램이 1MB 이하일 때, 2MB일 때, 4MB일 때, 8MB 이상일 때... HIMEM.SYS와 EMM386을 세팅하는 법, 기본 메모리를 최대한 확보하는 법, 메모리가 왕창 많이 있다면 램 드라이브와 디스크 캐시를 운용하는 요령 등.. 그런 게 1990년대 컴퓨터 잡지들이 고급 정보랍시고 많이 다룬 정보였다.
지금으로서는 그저 격세지감이 느껴질 뿐이다. 그 당시에 기본 메모리라는 개념은 돈에다 비유하자면 당장 손에 있는 현금이고, 나머지 확장 메모리는 통장 잔고나 신용카드 같다는 생각도 든다. =_=;;

MS-DOS의 역사를 살펴보면 많은 걸 느낀다. 금수저 출신의 독종에 천재에 똘끼와 운, 엔지니어 기질과 사업가 기질을 모두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슨 여건에다 던져 놔도 결국은 성공했겠다 싶다. 공부만 계속했어도 교수나 변호사가 됐을 사람이 결국은 소프트웨어의 황제로 등극해서 교수· 변호사보다 더한 억만장자가 됐으니까.

물론 빌 역시 그 과정에서 언제나 실력만으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지는 않았으며, 경쟁자 치사하게 죽이기 같은 짓을 전혀 안 했다는 건 아니다. MS의 모든 기술과 제품이 100% 빌의 머리에서 비롯된 원천기술인 건 아니며, 그가 미래에 대해 예측한 것이 전부 적중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는 자기보다 더 똑똑한 엔지니어들을 한데 통솔하고 이끌어서 시너지 효과를 잘 낼 줄을 알았다. 그리고 실수를 하고 병크를 저지르더라도, 회사를 완전히 말아먹을 정도로 치명적으로 하지는 않았으며 곧 수습했다.

한편, 게리 킬달은 뭔가 스티브 워즈니악 같은 포스가 느껴지는 공돌이로 보이는데, 실력에 "비해" 빛을 못 보고 좀 어이없게 훅 가 버린 게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기술만 있고 너무 고지식하기만 하면 저렇게 되기 쉬운데, 나부터가 딱 그런 스타일이라는 게 문제임.. -_-;;

Posted by 사무엘

2016/05/18 08:39 2016/05/1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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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이야 우리들의 눈을 현혹하는 온갖 사진과 짤방, 동영상들이 인터넷을 통해 컴퓨터로 현기증 날 정도로 범람하고 터져 나가는 시대이다.
하지만 불과 2~30년 전만 해도 PC는 글이 아닌 그림을 처리하기에는 용량과 성능이 꽤 버거운 물건이었다. 컴퓨터로 뭔가 실사 사진 자체를 구해다 보기가 쉽지 않았다. PC 통신으로 인기 연예인 사진을 단 한 장 다운로드 해서 보는 것조차도 단단히 작정하고 기다릴 준비를 하고서 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도 출처는 종이 화보나 필름 사진 스캔, 또는 아날로그 TV 화면 캡처였다..

21세기에 태어난 애들이 이런 얘기를 듣는 건.. 우리 세대가 부모님에게서 1950, 60년대에 나라가 얼마나 폐허였고 못살았는지를 듣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아아~ 나도 이런 식으로 올드 타이머 꼰대의 대열에 합류하는구나..;;
그래도 난 옛날 컴퓨터 환경 회상이 좋다. 그러니 얘기를 계속하겠다.

그 시절엔 bmp, pcx를 넘어 gif 정도만 돼도 디코딩이 만만한 작업이 아니었다. 아래아한글 도스용에서 그림을 삽입해 보면 gif는 유독 렌더링이 더뎠다. 그런데 하물며 jpg는... 전용 뷰어가 필요하고 386에 램 얼마 이상, 부동소수점 코프로세서는 필수 이런 걸 요구하는 엄청난 포맷이었다. png 역시 그 당시로서는 신생인 만만찮게 무거운 포맷이었고.

이런 이유로 인해 도스에서 그래픽 뷰어는 나름 단순 텍스트/헥스 뷰어 이상의 유니크함과 전문성(?)을 지녔고 또 그래픽 에디터와는 별개의 입지를 가진 프로그램이었다. GUI 운영체제의 셸이 제공하는 기본 중의 기본, 필수 중의 필수 기능이 그때는 그렇게나 특별한 기능이었다. 도스까지 갈 것도 없이 무려 Windows 95 시절, 웹 브라우저 같은 게 없던 때엔 운영체제 차원에서 jpg 파일을 바로 볼 수 있지 않았다. 그림판은 bmp/pcx 전용이었으니까.;;

그래픽 뷰어는 완전 상업용 제품이라기보다는 셰어웨어로 만들기에 좋은 소재였다. 디렉터리 이동 + 파일 리스트 선택 기능을 구현한 뒤, 사용자가 엔터를 누르면 그 그림을 표시해 주는 게 기본 형태이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좀 단조로우니 그래픽 뷰어에는 여러 장의 그림을 슬라이드 쇼처럼 보여주는 기능이 응당 추가됐다. 현란한 화면 전환 효과는 덤이고. 요즘 같으면 화면 보호기와 역할이 비슷해졌다.

비주얼 쪽 말고 다른 방면으로는.. 파일 관리 기능이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단순히 뷰어 이상으로 많은 그림 파일들을 일괄적으로 포맷을 변환하고 크기를 보정하고 효과를 주는 기능이 들어갔다. 이건 전문적인 그래픽 에디터와도 기능이 겹치는 구석이 있지만, 이쪽은 드로잉 기능이 없으며 한 파일이 아니라 여러 파일들에 대한 일괄 편집에 더 최적화되었다.
이런 분야에 속하는 프로그램으로 본인은 현재까지 다음과 같은 제품들을 기억하고 있다.

1. Graphic Workshop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모 컴퓨터 잡지/서적을 통해 알게 됐다. 1990년대 초인 꽤 옛날부터 개발되어 온 프로그램이며, 내 기억이 맞다면 GIF를 굉장히 일찍부터 지원해 온 걸로 유명했다.
스크린샷을 보면 알 수 있듯, 전반적으로 셸은 파란 배경의 단순한 텍스트 모드에서 동작했고 단순 표시뿐만 아니라 포맷 변환, 크기 조절 같은 그림 파일 관리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1989년에 처음 개발됐는데 91년에 벌써 버전이 6을 넘어간 건 도대체 개발과 버전업이 어떻게 돼 왔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MS Word는 다른 제품과 번호를 맞추기 위해서 2에서 바로 6으로 넘어가긴 했다만..;;
개발사인 Alchemy Mindworks라는 회사는 지금도 살아 있으며, 이 프로그램은 Windows용으로 계속 개발 중이다.

2. SEA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래픽 뷰어 중에서는 느낌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일단, 왓콤 C/C++ 32비트 에디션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게임도 아닌 것이 첫 실행 때 DOS/4GW(도스 익스텐더) 로고가 떴다.
성능면에서는 jpg 파일의 디코딩이 경쟁 프로그램들 중 가장 빠르다고 자처했다. 그림뿐만 아니라 소리 파일 재생이 됐으며, 동영상도 AVI 중에 1990년대 중반 런렝쓰 정도의 간단한 방식으로 압축 된 건 바로 재생 가능했다.

스크린샷을 보면 알 수 있듯 일괄 변환과 슬라이드 쇼 기능 정도는 물론 갖추고 있었으며,
이 모든 것에 더해서 전반적인 GUI 껍데기도 NextStep 운영체제를 흉내 낸 듯한(바탕에 검정 제목 표시줄) 상당한 고퀄이었다.
여러 모로 인상이 좋고 장인 정신이 느껴지는 잘 만든 프로그램이었다. 비등록 셰어웨어 버전도 첫 실행 때 '등록 해 주세요. press any key'가 뜨는 것 말고는 별다른 제약이 없어서 상당한 대인배이기까지 했다.

3. ACDSee

운영체제에 gif/jpg/png급 그림 파일을 보는 기능이 자체적으로 없던 Windows 95~98/2000 시절에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유용하게 썼다. 이름이 똑같이 '씨'인데 앞의 도스용 프로그램은 sea이고 요 프로그램은 see이다.
얘도 한때는 내가 운영체제를 새로 설치한 뒤에 MDIR만큼이나 곧장 설치하는 필수 프로그램 중 하나였다. 굉장히 유용하게 썼다. SEA의 Windows 버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해당 기능을 운영체제가 흡수한 뒤에는 정말 자연스럽게 존재감이 싹 없어져 버렸다.

그 첫 신호탄은 Windows에 IE 웹브라우저가 포함돼 들어가면서 기본적인 그래픽 뷰어 문제는 사실상 제공되기 시작한 사건이다.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게 글과 그림으로 이뤄져 있으며 웹브라우저는 그 자체가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은 아니고 훌륭한 그래픽 뷰어였기 때문이다. 단, IE는 옆 파일을 바로 열람하는 기능조차 없고 진짜 보는 것 하나만 가능하기 때문에 전문 뷰어/슬라이드 쇼 프로그램이 여전히 존재 의미가 있었다.

한 디렉터리 안에 있는 그림 파일들을 IE 창에서 쭈욱 열람하기 위해서 그 디렉터리를 기준으로 <img src="...."/> 태그를 쭈욱 나열하는 html 파일을 '생성하는 프로그램'을 짜서 개인적으로 활용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이건 썸네일만 읽어들이는 게 아니라 파일들을 몽땅 한 페이지에다 읽어들이는 것이니 성능면에서는 좀 안습한 짓이긴 하다.

그리고 둘째 확인사살은 Windows XP이다. 얘부터는 탐색기 내부의 파일 리스트에서 그림 썸네일을 보는 편의 기능이 크게 강화되었으며, 그럭저럭 가볍고 괜찮은  그래픽 뷰어까지 내장됐기 때문이다. 그러니 별도의 싸제 그래픽 뷰어 프로그램에 대한 필요는 거의 사라졌다. 이런 이유로 인해 기존의 그래픽 뷰어들은 생존을 위해서 포토샵 같은 이미지 보정 기능을 더 강화한다거나 디지털 카메라 사진 관리 같은 더 차별화되고 전문적인 영역으로 넘어갔으며, 내 기억 속에는 현업에서 다들 물러나고 추억의 영역만 남게 되었다.

한때는 Paint Shop Pro에 내장돼 있는 Browse 기능도 유용하게 썼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냥 MS Office에서도 2003부터 Picture Manager라는 유틸리티가 생겨 있다. 예전에는 희귀했던 기능들이 지금은 다 기본으로 내장되고 대중화가 된 것이다.
단, Windows XP의 기본 그래픽 뷰어는 애니메이션 GIF를 재생하는 것까지도 지원했는데 Vista 이후부터는 그 기능은 없어졌다. 왜 빠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여기까지가 그래픽 뷰어 프로그램에 대해 본인이 갖고 있는 추억이다.
하긴, 음악을 듣는 것도 한때 꽤 먼 옛날엔 거원 제트오디오, WinAmp 같은 프로그램을 따로 썼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그냥 WMP만 쓰지 다른 건 안 쓰게 됐다.
그래도 동영상은 WMP가 코덱과 자막 등 부족한 구석이 많이 있어서 팟/곰 같은 제3자 프로그램이 여전히 살아 있다. 내가 알기로 마소에서 WMP도 거의 IE11만큼이나 이제 더 만들 게 없는지 별로 육성은 안 하는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5/16 08:32 2016/05/16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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