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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 중에는 아동용 위인전을 안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어렸을 때 위인전을 읽으면서 어떤 인물을 왕창 좋아하고 존경하게 됐는데, 나중엔 그 사람에 대해 감춰져 있던 흑역사도 알게 되고 위인전들이 그 인물의 긍정적인 면만 부각시키면서 미화와 왜곡을 일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환상이 깨지고 일종의 동심 파괴를 경험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발명왕 에디슨의 경우 경쟁자인 테슬라와 얽힌 아주 지저분한 흑역사가 존재하며, 나폴레옹도 단순히 전쟁만 벌인 게 아니라 부하의 아내를 비열하게 빼앗은 것과 타 원주민 학살이라는 흑역사가 있다. 십일조 잘 바친 신앙인(?) 기업가로 칭송받는 록펠러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일본의 생리학자 노구치 히데요는 자국의 지폐에 등재될 정도로 유명세를 탔지만 사실 업적으로나 인간성으로나 위인 레벨은 절대 아니라는 게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사실은 심지어 세종대왕, 이 순신 같은 (복음을 거부하는 핑계로 즐겨 언급되는) 언터쳐블급인 인물이라 해도 업적과는 별개로 다 부족한 죄인인 건 변함없으며, 까보면 다 흑역사가 나올 것이다. 성경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으로 판명되고 지옥에 가는 게 어떤 경우건 아무 이유 없이 어거지로 이뤄지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성경은 어떤 인물을 다루면서 일방적인 미화나 왜곡을 하지 않고 인간적인 심정으로는 도저히 기록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은 내용도 너무 적나라하게 써 놨다. 그래서 성경은 정황상 도저히 인간의 저작물일 수가 없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이런 식으로 성립할 정도이다.

다윗의 흑역사, 모세의 흑역사.. 그리고 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욥기만 해도 그렇다. 흔한 동화라면 권선징악 구도를 설정한다 하더라도 나쁜 부자, 구두쇠 악당 부자, 나쁜 계모를 조지는 이야기가 주류일 텐데 이건.. 부자인데 아주 착한 부자이고 의인이 왜 아무 까닭 없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너무 초월적으로 심오한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렇다고 욥이 이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이 무조건 모범적이고 바람직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으며, 욥 역시 극한의 상황에서 너무 답답한 나머지 결국 성질 부리고 인간성의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사람을 모 종교의 성인처럼 너무 떠받들고 칭송하는 것도 잘못됐지만, 그렇다고 자기도 그 상황에서는 그 이상으로 뻘짓 했을 거면서 남을 탓하고 욕만 하는 것도 바른 자세가 아니다. 감히 예수님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인간적인 수준에서는 아무리 까발려 봐도 정말 먼지가 거의 안 나올 것 같은 인물이 있으며, 예수님에 근접하는 삶을 살았던 극소수의 인물은 있다.

우리나라의 일제 강점기 때 주 기철 목사는 바로 그런 그룹에 속하는 인물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교회가 무너지고 교단이 무너지고 조선 기독교계가 황폐화되는 현실 속에서 신사 참배를 홀로 거부하다가 온갖 악랄한 고문을 당하고 형무소에서 순교한 분이다. 게다가 유 관순이나 윤 봉길, 조선어 학회 학자들과는 달리 법정에서 정식으로 재판을 받아서 형벌을 받은 것도 아니고, 걔네들 일제의 관점에서도 법적으로 아무 근거 없이 불법으로 구금· 협박· 폭행을 당한 것일 뿐이다.
작년 성탄절 때 웬일로 KBS1에서 다큐멘터리를 방영한 것을 감명깊게 잘 봤다.

일본은 단순히 조선에서 수탈만 저지른 게 아니라 조센징들의 문화와 언어, 관습을 없애고 그들을 무력을 동원하여 강제로 일본인으로 개조시키려는 시도를 했다. 영미귀축과 맞장을 뜨려면 자기 제국의 덩치를 부풀려야 했으며, 그래서 조센징들도 단순히 노예에 물자 셔틀에만 머물 게 아니라 그들 자신이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덴노 헤이카를 위한 총알받이가 되게 세뇌를 시켜야 했다.
쉽게 말해 SCV, 드론을 넘어서 마린이나 인페스티드 테란이 필요하다는 걸 느낀 거다. 정신 상태로 치면 질럿에다가도 비유가 가능하겠다. "My life for Tenno!" -_-

지금 생각하면 이건 정말 "무슨 마약 빨고 그런 생각을 했어요?" 급이었다. 뭐, 일본인으로 만들어 봤자 자국민과 동등한 레벨도 아니고 2류 3류 신민이었겠지만. 일본 자국민과 동급의 권리는 없고 의무만 있는 신노예를 만들려는 의도였으니 말이다.
또한 그렇다고 자국민도 편하게 지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고 걔네들 역시 전쟁광 수뇌부 때문에 겁나게 고생하긴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조선 신궁을 보니까 저 정도면 단순히 국기/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가 아니라 종교적인 게 맞긴 해 보였다.
일본에서는 패전 후에 덴노가 인간 선언을 하자 고작 그것만으로도 자신의 평생 신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때문에 멘붕해서 자살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였다. "내가 신으로 떠받들던 존재가 사실은 나와 똑같이 먹고 자고 싸는 인간에 불과했다니!"

맥아더도 이런 일본의 문화와 일본인들 습성을 감안했기 때문에, 비록 히로히토 덴노가 악질 전범이긴 하지만 대놓고 그를 법정에 세워 처벌하거나 덴노 제도 자체를 없앨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일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 맥락이다. 북한 정권이 확 붕괴하고 김씨 부자가 자기와 똑같은 인간임이 폭로되고 나면 북한에서 제대로 세뇌돼 있던 핵심 계층 중에는 저렇게 멘붕하는 사람이 분명 나오지 싶다.

그 대신, 맥아더는 자신이 히로히토 옆에서 일부러 양아치 같은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사진을 언론을 통해 내보냈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로 맥아더를 신으로 숭배하고 집에 신사까지 만들어 모시는 사람들이 나왔다고 한다. 거의 행 14:11-13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이래저래 일본은 전반적인 정신 문화가 성경의 기독교와는 완전 상극이라는 게 느껴졌다. 일제는 이런 정신 문화를 조선인들에게 강요했다. "누가 너희 하나님을 믿지 말라고 그러더냐? 니 예배도 할 거 다 하고, 여기서 잠깐 고개만 까딱하고 경의를 표해 주면 너도 살고 나도 가오가 살고 아무 탈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뻣뻣하게 구냐? 이건 그냥 대일본제국 신민으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이지 종교적인 게 아니래도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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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참배와 동방요배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이 지켜야 할 신성한 제1의 임무이다. 일찍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성주들께서도 서양 기독교를 신봉하는 자들을 모두 참(수)하고 유황불에 던져 넣었던 것을 기억하라. 저들의 유일신은 우리 천황과 태양신 아마테라스를 대적하는 것이다."

조선 땅에 있던 대다수의 종교 종파들은 집요한 협박과 회유, 특히 가족까지 동원한 악랄한 해코지를 이기지 못하고 굴복했다. 거기에 굴복했다고 해서 딱히 민폐가 가는 게 아니니 이건 애초에 예수님을 안 믿는 불신자의 입장에서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비판할 거리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인 민폐는 굴복 안 했을 때 더 끼쳤을 가능성이 높지..

그러나 일부 기독교회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주 기철 목사 같은 영성으로는 저런 일제의 꼬드김은 영적으로 볼 때 출애굽기에서 파라오가 모세에게 제안했던 교묘한 절충안과 별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빤히 보였다. 오늘날로 치면, 성경을 들먹이면서 일부 배도한 목사가 "하나님은 동성애자도 사랑하니까 동성애자들도 다 자기 스타일 대로 순수한 사랑을 하면 됩니다" 이러는 것과도 같다.

회유에 안 넘어가자 일제는 결국 "어쭈? 우리 덴노 헤이카가 더 강한지, 네놈들이 믿는 여호와 하나님이 더 강한지 두고 보자!"로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는 여러 번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를 반복했고 지독한 고문을 당했다. 나중에는 목사직에서 해임되어 사택에서도 쫓겨났으며 교회가 폐쇄당했다.

주 기철 목사의 막내 아들 주 광조는 어린 시절, 그 와중에도 평소에는 평양 경찰서를 거의 자기 집처럼 드나들면서 형사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저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도 모른 채. "광조 왔다~!!ㅋㅋㅋ" 그러면 형사들이 용의자 취조할 때 먹이는 코렁탕...은 아니고 주먹밥이라도 쥐어 주고 "요 귀요미 녀석 또 왔냐?" 그렇게 귀여워해 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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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거기서 주 목사의 가족들을 다 불러 놓고 주 목사를 공개적으로 고문 시연을 했으니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생겼겠는가?
주 광조는 정신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몇 년간 실어증을 앓았다고 한다.

저 때 TV에서 맛보기로만 묘사한 고문은 '비행기 태우기'이다. 그 당시에 일제가 행한 '흔한' 고문이다.
그나저나 주 목사 하면 못 위를 맨발로 걸었다는 ㅎㄷㄷ한 일화까지 전해지는데, 이건 언제 어느 형무소에서 있었던 일이고 누구의 증언을 통해서 전해지는지 정확한 출처를 지금까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는 것 같다. 그게 궁금하다.

성경은 평소에는 그렇게도 친가정적인 교리를 표방하기 때문에, 근대 이래로 마 19:29, 막 10:30처럼 가족을 버리는 것까지 권장하는 정말 극단적인 상황은 대환란이 아니면 역사적으로 북한이나 일제 말기, 이슬람권 같은 곳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들은 나중에는 주 목사의 부인인 오 정모 사모도 두들겨 패면서 분풀이를 했다. "에라이, 남편을 죽으라고 부추기는 독한 년 같으니! (네놈들 때문에 우리까지도 실적 못 내서 상부로부터 잔뜩 갈굼 먹고 고달프단 말이다!)"

주 기철 목사뿐만 아니라 오 정모 사모도 신앙면에서는 정말 한 근성 한 분이었다. "따뜻한 숭늉을 한 사발 좀 마시고 싶소" 이런 유언을 남긴 남편 보고 "당신은 살아서 형무소를 못 나갑니다. 조선의 교회를 위해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이런 말을 격려(?)랍시고 이를 악물고 했을 정도이니 일본 경찰과 간수들이 경악할 법도 했을 것이다. "저 조센징이 믿는 신은 도대체 어떤 신인가? 우리 황국신민 중에 덴노를 위해 저렇게까지 충성을 바칠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같은 생각을 한 번쯤은 하지 않았을까.

주 목사는 정식으로 사형을 당한 게 아니며, 비록 지독한 고문에 만신창이가 되긴 했지만 최후의 순간 자체가 "바보야, 그러게 좀 적당하게 두들겨 패고 강약 조절을 했어야지 아주 죽여 버리면 어떡해!" / "헉~ 죄..죄송합니다 ㅠㅠ"  같은 고문치사도 아니었다. 일제는 이런 면모에서는 오히려 아주 치밀하고 교묘했다. (유명한 고문치사 사건은 일제 강점기가 아니라 훗날 대한민국 시대에 몇 건 터졌었다.)

이거 뭐 아무리 고문을 해도 소용없고 주 목사만 회생 불가의 죽기 직전 상태가 되자, 일제는 그를 슬쩍 병보석으로 풀어 주려 했다. "이 사람은 어찌 됐건 우리가 죽인 건 아니야. 우리 손으로 위대한 순교자 따위 만들고 싶지는 않아~" 면피를 위해서였다.

이런 예가 의외로 여럿 있다. 3· 1 운동 당시에 수원의 유 관순이라고 기록을 통해 뒤늦게 알려진 이 선경, 일제 말기에 진실을 외치다 주 기철과 비슷한 시기에 순국한 소년 주 재년도.. 다 의외로 옥중에서 죽은 게 아니다. 풀려나긴 했지만 고문 후유증 때문에 몇 달 못 가 죽은 거다. 풀어 줘도 그건 사실상 석방이 아니었다.

이런 속셈마저 눈치 챈 오 사모는 남편에 대한 병보석 제안을 거부하였으며, 주 목사는 마지막 면회 후 감방 바닥에 누워 있던 중에 드디어 기력이 다하고 소천했다. 허나, 오 사모의 강직하고 대쪽같은 행적은 남편이 이렇게 순교한 뒤에도 계속되었다. 속된 말로 '시체 장사'를 하지 않았다.

"주 목사는 당연히 외쳐야 할 때 도저히 벙어리로 있을 수가 없어서, 무익한 종으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을 갔을 뿐입니다. 주 목사의 행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절대 안 됩니다"라고 못을 박았다! 남편 개인이 대외적으로 막 알려지고 떠받들어지는 것을 우상 숭배라고 최대한 경계하고 만류했다.
뭐, 주 목사를 거론할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개나 소나 "나도 저분 존경해요" 립서비스 차원에서 위선적으로 이러는 건 대단히 보기 좋지 않으며, 이런 짓은 심지어 본인에게조차도 적용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으니 특별히 조심해야겠다.

그 시절에 주 목사의 자녀들은 일제로부터 불령선인 취급을 받아 쫄쫄 굶고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니고 너무 고생하면서 컸다. 너무 고지식한 아버지와 어머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부모가 매정하고 야박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의로 양육된 자녀들은 바르게 잘 컸다. 장남 주 영진은 6· 25 때 빨갱이들에게 순교하여 손 양원 목사 가문처럼 부자가 순교자의 반열에 올랐다. 4남인 주 광조가 제일 늦게까지 살아 있으면서 선친의 행적에 대해 증언하다가 지난 20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주 목사는 일제의 통치에 정치적으로 반대하고 저항한 독립 운동가는 아니었다. 종교 영역의 침범이 아닌 창씨 개명 정도까지는 별 반발 없이 따르기도 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의 길을 간 것일 뿐이지만, 그 행동이 결과적으로 나라 사랑에 항일 운동을 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 됐고 일제로부터 그런 짓(?)을 한 반동분자로 취급을 받았다. 덕분에 그는 '건국훈장 독립장'이라는 꽤 높은 등급의 훈장이 추서되었으며(유 관순· 윤 동주와 같은 급) 서울 현충원에 가묘까지 만들어져 있다. 평양에서 유해를 찾아 와 이장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특별히 만화로 각색된 것이 <만화로 보는 나의 아버지 순교자 주 기철 목사>(2007), <대동강의 순교자 주 기철>(1998, 두란노) 이렇게 두 종류가 있으므로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시기 바란다. 이 글에서 몇 컷 소개한 만화는 전자이다.
KBS 다큐멘터리는 일본의 신학계에서도 주 목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취재해 보인 것이 흥미로웠다. 하긴, 일본인들은 이 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그렇게도 치밀하게 연구했다는데 그 국민성으로 주 기철 목사까지 연구하는 건 이상한 현상이 아닌 것 같다.

일제도, 북한 정권 같은 것도 없는 이 대한민국 땅에도 엄연히 신앙 생활에 고난과 시험은 있다. 내가 늘 말하지만, "너 이렇게 믿으면 죽는다" 대신에 "너 여기서 약~간만 타협하면 돈과 명예와 좋은 대외 평판을 무진장 얻을 텐데!"라고.. "눈 딱 감고 나에게 절만 하면 이 모든 걸 네게 주겠다"라는 마귀의 시험과 본질적으로 똑같은 시험이 존재한다.
그래서 신앙 생활은 교리 쪽이든, 행실 쪽이든 참 좁은 길이다. 예수님을 위해서 내가 더 낮아지고 바보 되는 것. 그걸 내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 견디고 할 말한 뿐이다.

그리고 지난 3월 17일엔 다큐멘터리에서 나왔던 배경과 출연진을 토대로 <일사각오>라는 영화도 나왔다. .

신사 참배 거부는 단순히 자기 종교 입장에서의 지조만을 고집한 게 아니라 사악한 일제의 군국주의 통치에 대해 거부의 뜻을 당당히 표현한 거라고 의미를 굉장히 많이 부여하고 있다. 그 당시 일제 당국조차 기독교는 자기네 식민 지배에서 굉장한 걸림돌이었다고 문서에다 기록했다고 영화는 소개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조선 청년들을 군대에다 강제 징집하자는 발상은 1930년대에 이미 논의됐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징병은 완전 말기인 1944년이 돼서야 시행됐는데, 여기엔 조선인들의 이런 저항이 기여한 게 클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의식이 고분고분 일본인으로 개조되지 않은 사람에게 함부로 총을 쥐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Posted by 사무엘

2016/03/28 08:36 2016/03/28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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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오래 전인 블로그 개설 초창기에 썼던 글을 리메이크 한 것이다.

※ 1.0부터 9x/ME까지
가난하지만 파이가 가장 큰 16비트 도스 진영을 특별히 공략한 전용 제품이다. 그러니 x86 전용. 가난한 컴에서 리소스를 최대한 짜내야 했던 관계로 코드는 쑤제 어셈블리어가 가득했으며, 어차피 이식성도 없었다.

※ NT 3~4
9x 같은 현실 절충이 아니라, 이상과 이식성을 추구한 컨셉을 살려 x86뿐만 아니라 Alpha, MIPS를 지원했다. 특히 NT 4의 경우 PowerPC까지 지원하여 지원하는 아키텍처가 가장 많았다. 실행 파일 포맷의 이름을 괜히 Portable Executable이라고 지은 게 아니었다.
Alpha의 경우 64비트 아키텍처이긴 했지만, Windows 자체는 여전히 32비트로만 동작했다. 물론 그때는 메모리 용량상으로 64비트는 어차피 전혀 의미가 없었으며, 단지 같은 클럭으로 32비트보다 대용량 데이터를 더 빠르게 처리한다는 점에서만 의의를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OS/2는 Windows NT에 준하는 귀족 된장(?) OS임에도 불구하고 이식성이 없이 x86 전용이었다. 이식성 있는 코드 위주로 개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2000
NT 계열이지만, 이제 한물 가고 망했다고 간주되는 아키텍처들에 대한 지원을 대거 끊어서 사실상 x86 전용이 됐다. 인텔에서 발표 예정인 IA64 Itanium 아키텍처와 연계하여 최초의 레알 64비트 OS로 거듭나려 했지만 CPU의 출시가 늦어지는 바람에 제대로 성사되지 않았다.

※ XP
이제야 x86 (32비트)과 Itanium (64비트) 에디션이 동시에 발매되었다. 하지만 Itanium는 알고 보니 정말 대차게 망한 관계로, 얘를 정식으로 지원하는 Windows는 XP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다. -_-;;
그 대신 x86과 잘 호환되는 x64 내지 x86-64라는 새로운 아키텍처가 64비트 PC의 대세가 되었다. PC도 이제 메모리가 슬슬 4GB 방벽에 걸릴 타이밍이 되기도 했고.

그래서 2005년, 이미 SP2까지 출시되고 나서야 Windows XP는 x64용 에디션이 나왔다. 허나 정말 존재감 없이 지나가 버렸으며, XP는 대외적으로 여전히 싱글 코어 + 32비트 OS의 상징이라는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다.

※ Vista와 7
Itanium은 칼같이 짤렸고 그 대신 x86 (32비트)과 x64 (64비트) 패턴이 나란히 정착했다. 7부터는 서버 에디션은 이제 32비트가 없이 64비트 에디션만 나오고 있다.

※ 8과 그 이후
저기에다가 모바일용 CPU인 ARM 에디션이 새롭게 추가됐다만, 이 에디션은 키보드 달린 일반 컴퓨터에서 볼 일은 딱히 없을 것 같다. 이 구도가 당분간 계속 이어질 듯.

이렇듯, Windows는 운영체제의 버전이 바뀌면서 지원 플랫폼도 은근히 자주 바뀌어 왔다. 이 외에도 운영체제 별 문자 입력 시스템의 변천사라든가 다국어 글꼴 시스템의 변천사를 다뤄도 무척 재미있을 것 같다.

다국어 하니까 짚고 넘어갈 사항으로는..
Windows NT는 3.51부터 한글화되어 나왔다. 그러나 한글판이 나온 건 1996년, 이미 95도 나오고 NT 4.0이 나오기 몇 달 전이었던지라 3.51의 한글판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니 NT 3.51이 윈도 3.x의 셸 기반이었다고 해서 NT 3.51의 한글판이 한글 윈도 3.x의 투박한 비트맵 바탕체를 썼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Windows 자체가 한글판이 나온 건 무려 2.1때부터라고 한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우리나라 IT 인프라에서 뭘 그리 바랄 게 있겠는가..? 이 역시 3.0이 나오기 얼마 전일 정도로 시기가 매우 늦기도 해서 존재감은 거의 부각되지 않고 싹 묻혔다. 저 광고 말고는 스크린샷이고 기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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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사무엘

2016/03/23 08:24 2016/03/23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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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한국어가 한편으로는 끔찍하고 한편으로는 구수한(?) 욕설이 유난히 발달해 있다고 하는데.. 사람 사는 곳은 동서고금 어디나 마찬가지이고 다른 문화권에서 폭언과 욕설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한국어는 다양한 욕설 표현에 비해 '똥'이 단순 비하(똥컴, 똥차, 똥폰..) 이상으로 저주나 다른 욕설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는 게 이례적이다. (shit, 쿠소 등)

미국은 마초이즘에 입각한 군사물에서 욕설이 많다.
듀크 뉴켐 3D/포에버에서는 게임 중에 개마초 주인공의 궁시렁궁시렁 성인 욕설을 들을 수 있으며,
둠도 게임 자체는 스토리가 부실하지만 이를 배경으로 한 둠 코믹스는 매 장면들에 강렬한 욕설을 동반한 명대사들이 즐비하다.
포레스트 검프에서는 카우보이 모자를 쓴 훈련소 교관이 그냥 말 끝마다 '갓댐'인 거 다들 기억하실 것이다.

이거 끝판왕은 역시 월남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풀 메탈 자켓>에 나오는 하트만 상사. 후대의 전쟁 영화에 등장하는 악질 교관의 표준 컨셉을 제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훈련소를 수료하고 나가는 날 네놈들은 일당백 인간 흉기 전사로 개조돼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까지는 네놈들은 그냥 인간 이하의 구더기, 토사물만도 못한 개 쓰레기들이다! 알겠나~~!"

제3자가 들으면 그야말로 웃음이 나오기까지 할 정도의 찰진 욕설, 특히 부모 패륜 드립과 음담패설이 넘쳐난다. 흔히 군대에서 총(개인 화기)은 니 애인, 니 불알보다도 더 소중하게 간수하라고 그러는데, 실제로 그걸 빗댄 섹드립 군가를 부르는 것도 있다. 똑같이 내 총인데, 이건 전투용, 저건 유흥용이라고.. -_-;

듣기로는 시나리오 작가가 써 준 정식 대사 외에 배우의 즉흥 애드립으로 들어간 것도 많다고. 이런 욕도 어지간히 창의력이 뛰어난 언어의 마술사가 돼야 만들어 낼 수 있지 아무나는 못 한다. 근데.. 현장에서 그 욕설을 듣고 진짜로 웃어 버린 고문관은 저 교관한테 완전 찍혀서 군생활이 꼬인다.

스타 1에서 시즈 탱크를 지겹도록 클릭했을 때 나오는 대사 중 하나가 What is your major malfunction?인데.. 이것도 출처가 이 영화에서 하트만 상사의 대사이다. 사실은 "너 미쳤냐 쳐돌았냐? 도대체 어디 장애가 있냐? 대가리에 총 맞았냐?" 급의 꽤 강한 비하· 모욕 뉘앙스가 들어간 갈굼이다.

이건 반전 컨셉으로 군대의 비인간적인 면모를 비판하고 깔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저런 묘사가 마초스럽고 멋있다며 미군 관계자들이 좋아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왜, 국내에서도 10여 년 전에 MBC 제5공화국 드라마가 방영되니까 이 덕화 씨의 연기 덕분에 멋있다고 도리어 전 두환 팬클럽까지 생겼다지 않는가? 정치 견해 때문이 아니라 그냥 멋있다고. -_- "좋아, 아주 좋아"처럼 말이다..;; 원래는 그 드라마가 군사 정권을 얼마나 비판하고 까는 컨셉인데도 역효과가 난 것이다.

21세기 이후에 오늘날까지 전대갈, 전땅크 하면서 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멋있어하는 이미지는 거기서 유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또한 이건 옛날에 얼짱 강도 현상수배 포스터가 나돌자 그 사람 팬카페가 생겼던 것과도 비슷한 이치이다. -_-;;
(얼짱 강도도 참 오랜만에 다시 회상하네. 그 예쁘장한 아가씨는 남자 친구 잘못 사귄 죄로 강도 공범 혐의로 어린 나이에 전과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알려져 버리기까지 해서 인생이 한동안 굉장히 꼬였지 싶다. 안됐다. 그 뒤로 개명에 성형이라도 하고서 새 삶을 잘 살고 있길..;;)

창작물이 아니라 실존 인물 중에서는 성깔 하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웠던 조지 패튼 장군이 있었다. "제군들은 이제 제대 후 고향에 가서 손주들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할아버지는 2차 대전 때 후방에서 꿀이나 빨고 있지 않았다. 조지 패튼이라는 빌어먹을 개XX와(a son-of-a-goddamned-bitch named George Patton) 함께 최전방에서 용감하게 진군했다'라고 말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예 연설을 저렇게 했다.

정치· 군사· 안보 같은 심각한 주제 말고 다른 분야에서는 '욕쟁이 할머니'라는 컨셉· 기믹이 있다. 한국만의 고유한 문화인지는 모르겠다.
10여 년 전에 웹툰 츄리닝에서는 미국인 손님이 들어오자, 주인공인 욕쟁이 할머니 역시 영어를 직접 구사하진 못해도 비장한 표정과 함께 꼴뚜기질로 기선 제압을 했다는 병맛 만화가 올라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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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말이던가 박 정희 대통령이 전주에 시찰을 와서는 삼백집이라는 실존 콩나물국밥 식당을 이용했는데, 그 당시 거기도 주인장이 내공 백 단의 욕쟁이 할머니였댄다.
처음엔 수행원들이 미리 방문해서 배달 주문을 하려 했으나, 당연히 "이 썩을놈들이 얻다대고 배달 같은 소리나 씨부리고 쳐자빠졌네(혹은, X랄이야).. 직접 와서 쳐먹어!"라는 불호령과 함께 단칼에 문전박대를 당했다.

주인장은 직접 찾아온 박 대통령에게도 인정사정 없이 욕으로 상대했고.. 식사 중인 박통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더니 반숙 계란 요리를 서비스로 가져와서는 "어라, 이눔 봐라? 네놈은 신문에서 보던 박 정희랑 어찌 그리 얼굴이 묘하게 닮았더냐? 그런 의미에서 옜다, 이거나 더 쳐먹어라." 그랬댄다.. =_=
박통은 껄껄 웃으면서 "내가 박 정희를 닮은 게 아니고 박 정희가 날 닮은 거요"라고 넘겼댄다. 주인장은 그건 "에라이 니미럴 염병하네"라고 응수했을 테고.

박통은 훈훈하게 밥을 잘 먹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 식당 주인장은 몇 년 후 노환으로 타계했지만, 전해지는 야사에 따르면 그때 그 놈팽이는 대통령을 아주 닮은 사람이었을 뿐이라며, 설마 진짜 박통이었을 거라고는 죽는 순간까지도 절대로 믿지 않았다고 한다.

군사 쪽이든 민간 쪽이든.. 욕도 아무 컨트롤 없이 무개념으로 싸지르면 정말로 교양 없고 무례한 양아치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욕을 해도 때와 장소와 대상을 가려 가면서 센스 있게, 창의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듣는이에 대한 애정을 담고 자기 본업의 장인 정신까지 포함해서 "츤데레"스럽게 구사해야 할 거다.
이런 가이드라인을 준수할 자신과 멘탈이 없다면, 차라리 언제나 정중하게 바른말 고운말 컨셉만 유지하는 게 자신의 대외 평판에 나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21 08:29 2016/02/21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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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죽었다

“왕을 해하려 하는 모든 자들은 그 청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삼하 18:32)
성경에서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죽은 것을 부하의 이 말만으로 바로 알아채고 멘붕에 빠졌다.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이 저렇게 은유적이고 드라마틱한 경우가 실제 역사나 창작물에서 종종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엔 잘 알다시피 박 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당시 대통령의 주치의였고 국군 수도 병원 서울 지구의 원장이던 김 병수 공군 준장은 엄중한 감시 하에서 얼굴도 모르는 어느 VIP 중상자의 의학적 사망을 인증했다. 허나, 복부를 보고서 이 사람이 다른 외국 귀빈이나 극비 첩보 요원이 아니라 대통령 각하임을 직감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 보안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는 청와대 경호원의 감시 때문에 이 사실을 마음대로 발설할 수 없는 처지였다. 이때 전화를 건 우 국일 준장이 거기 상황을 눈치 채고는, 대답을 예/아니요로 아주 간접적으로만 하면 되게 상황을 만들어 줬다.

작고했나? / 예
차 실장(차 지철)이냐? / 아니요
코드 원(각하)이냐?


이로써 군부는 대통령의 죽음을 확인하게 됐다. 무슨 통화를 했느냐는 경호원의 추궁에 김 병수 준장은 즉석에서 이렇게 둘러댔다고 한다.

거긴 아무 일 없냐? / 예
너 혹시 지금 신변의 위협을 받고 있냐? / 아니요
알았다. 여기도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고 있어라. / 예


2. 사람이 살았다

사망이 아니라 생존을 은유적이면서도 아주 짜릿하게 잘 표현한 경우는... 비록 실화가 아니라 영화 속 허구이긴 하지만 <에어 포스 원> 대사를 따를 게 없다. 이 영화는 딱 두 마디만 기억하면 된다. “내 비행기에서 내려! (Get off my plane)”와 바로 이것.

“자유 24호, 콜싸인을 변경합니다. 자유 24호가 이제 에어 포스 원입니다! (Liberty 24 is changing call signs. Liberty 24 is now Air Force One.”
“와아아~~~!!”


대통령이 죽거나 실종돼 버렸다면, 이 비행기는 대통령의 유가족만 탔기 때문에 콜싸인이 에어 포스 원이 아닌 다른 명칭이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이터를 켜라>도 "열차가 부산 역에 안전하게 멈춰 섰다. 다시 반복한다. 열차가 ..." 이런 방송과 함께 중앙 통제실이 환호 분위기로 바뀐다는 점에서는 <에어 포스 원>의 결말과 좀 비슷한 구석이 있다. 하지만 간지는 훨씬 덜하다.

정부에서 운용하는 물리적인 대통령 전용기가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현실에서는 그 특정 비행기가 아니라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그냥 에어 포스 원이 된다. 물론 평소에는 대통령은 줄곧 그 전용기만 타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오성장군 군대 계급인 원수랑, 국가 수장을 뜻하는 원수만큼이나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될 개념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병역특례 티오하고도 비슷한 개념이다. 처음엔 병특 지정 회사들이 병무청으로부터 올해는 총 몇 명을 채용할 수 있다는 티오(인원 편성)를 받는다. 하지만 회사가 티오를 써서 일단 사람을 채용한 뒤에는, 그 티오는 회사가 아니라 복무자 자신의 소유가 된다.

어떤 회사가 2명 티오를 받아서 그만치 채용을 했다고 치자. 그런데 도중에 한 명이 전직· 만료하고 나간다 해도 그 회사는 다른 한 명을 병특으로 또 채용하지 못한다. 반대로 그 복무자는 병특 지정 업체이기만 하다면, 이미 티오를 다 쓰고 없거나 애초에 올해 티오를 한 명도 못 받은 회사로도 얼마든지 전직이 가능하다. 복무자 자신이 곧 추가적인 티오이기 때문이다.

즉, 회사 사정이 어떤지와 무관하게 업계 전체의 관점에서는 '병특 인원 보존의 법칙'이 성립한다. 그러니 이 제도는 상대적인 약자인 복무자에게 유리할 뿐만 아니라 병무청의 입장에서도 인원 관리하기가 수월해서 좋다. 복무자가 사고로 죽기라도 해야 그 티오가 그 사람이 당시 종사하던 회사로 돌아가지 싶다.
얘기가 어쩌다가 옆길로 한참 샜지...;; 아무튼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곧 에어 포스 원인 것만큼이나, 병특은 복무자 자신이 곧 티오인 시스템이라는 얘기를 엮어서 하고 싶었다. -_-;; 본인이 산업 기능 요원 출신이기도 해서 말이다.

3. 넌 죽을 것이다

사람이 죽었거나 살았다는 통보에 이어 마지막으로 이번에는 죽을 거라는 경고 차례다. 이 분야는 간지 넘치는 대사가 픽션이 아닌 현실의 정치 분야에도 꽤 있다. 예전에 한 번씩 인용한 적이 있는 대사들이지만 다시 복습해 보고자 한다.

(1) “빈 라덴을 용서하는 건 신이 할 일이다. 그러나 빈 라덴과 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건 우리가 할 일이다.
너무 멋있지 않은가? 이것은 빈 라덴이 살아 있던 시절에 미군 해병대의 모토였다고 한다. 그런데 '빈 라덴'을 임의의 '테러리스트'라고 말만 바꿔서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또 유사한 드립을 쳤다고 한다.

(2) “아이를 살려 보내면 너도 살고, 아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예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1980년 가을에 이 윤상 군 유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전대갈 아저씨가 남긴 대통령 특별 담화이다. 나중에 가해자가 잡히고 아이가 죽은 채로 발견되자, 전대갈은 실제로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 강제로 사형을 때려서 가해자도 죽여 버렸다.
삼권분립의 관점에서는 좀 아슬아슬하게 월권을 한 것이진 하지만, 요즘처럼 강력 사건에 가해자 인권만 있고 피해자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는 시기엔 저렇게 시원시원하던 옛날이 그리울 때도 왕왕 있다.

(3) “지금이라도 내 딸을 보내 주면 그걸로 일이 끝날 거다. 하지만 안 보내면 난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네놈을 기필코 찾아 내어 죽여 버릴 거다.”
테이큰, 브라이언의 전화 대사 의역.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난 복수극 영화 취향인가 보다. <테이큰>, <킬 빌>, <에어 포스 원>이 딱 내 스타일이다.
성령 충만으로 용서하는 게 가능한 맥락이 아니라면(개인이 아닌 공권력/국방 문제라든가..) 악당은 다 때려 부숴야 제맛 아니겠는가? 성령 충만은 악에게 굴복하는 나약함을 조장하는 게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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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히 쓸데없이 종교색 표방하면서 성경이나 교회 왜곡하는 것들은 극혐(<밀양> 같은 거). 세계관이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뭔 어설픈 열린 결말 이런 것도 싫음.

Posted by 사무엘

2016/02/15 08:34 2016/02/1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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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빨고 영상물 만드는 실력은 일본이 무척 탁월한 편이니 먼저 일본 얘기부터 좀 하겠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일본 환타 CF 시리즈가 떠오른다.
A반 가죽점퍼(록커) 선생부터 시작해서 아침 멜로 드라마 여선생까지 골고루 나오고, 별난 선생 때문에 학교 생활이 참 고달픈데 그래도 결론은 기승전..환타이다. 나중에 번외편으로 교장 선생편도 있었다.
DJ 선생은 학생에게 문제 풀이를 시킬 때도, 그리고 풀이의 정오 여부를 알려 주기 전에도, 심지어 교장 선생이 훈화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완전 음악에 심취해서 지내더라.

뭐, 그래 봤자 환타는 인공 색소와 설탕이 가득하고 마치 콜라만큼이나, 스팸 가공육만큼이나 몸에는 별로 좋을 게 없는 탄산음료일 뿐이겠지만, CF에서는 한자 선생이던가? '트로피칼 후르츠'를 강조하면서 열대 과일을 표방한다는 선전을 잔뜩 했다.

그리고 공익 광고 중에 이런 게 있었다.
학교에서 동물 그림을 그리는 시간에 어떤 애는 도대체 뭐가 씌였는지 흰 도화지 몇 장째를 온통 새까맣게 도배할 뿐이다. 장난 깽판을 친다고 보기에는 아이의 표정이 너무 진지하고 눈이 초롱초롱하니, 차마 대놓고 혼내지도 못하겠고.. 그래서 선생과 부모는 그 아이에 대해 정신 감정을 의뢰한다.
그런데, 각각의 종이들을 가로 x칸 세로 y칸으로 연결하니까 아이는 무진장 큰 시꺼먼 고래를 그리고 있었다는 게 밝혀진다.
...;; 아이의 잠재성과 창의성을 어른의 잣대로 단정짓지 말라는 뭔가 의미심장한 광고였다.

다음으로, 토요타보다는 아니고 '혼다'라는 일본 자동차 회사에서 2000년대에 창의성과 근성이 돋보이는 2분짜리 CF를 두 편 선보였다.
혼다 시빅(Civic)이라는 아반떼급 준중형차 CF는 무슨 합창단이 자동차의 엔진음과 주행음, 바깥 소음을 사람의 발성 기관만으로 흉내 내는 궁극의 비트박스를 시전했다. 컴퓨터에서 아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아스키 아트 텍스트 파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심지어 씨디를 집어넣어서 카오디오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까지도 비트박스로 재현했다.

그리고 혼다 어코드(Accord)라는 쏘나타급 중형차 CF는.. 근성 도미노 스타일이다. 자동차 부품을 일렬로 쭈욱 늘어놓고 하나만 툭 건드려 주니까 나사가 돌아가고 나사 하나의 무게 차이 때문에, 기름 몇 방울의 무게 때문에 시소가 기울고 뭐가 툭 굴러 떨어지는 장치가 열몇 개씩 이어진다. CG가 아니라 진짜 다 실제로 세팅해서 촬영한 것이며, 세팅을 처음부터 전부 갖추는 데만 몇 시간이 걸렸을 정도의 극도의 근성의 산물이라고 한다.

옛날에 월트 디즈니 만화영화 <뮬란>에서 황제의 대사 중에는 "A single grain of rice can tip the scale. (쌀 한 톨의 무게 차이만로도 저울이 기울어질 수가 있는 법일세)"가 있었다. 영화에서 그 대사는 뮬란이 바로 전쟁이라는 저울의 승패를 가르는 그 쌀알이 될 거라는 복선이다만, 저 CF는 황제의 그 대사의 물리적인 실사판이나 다름없었다. ㄲㄲㄲ 다만, 타이어가 관성만으로 오르막을 저렇게 오른다거나 기름통이 너무 잘 굴러가는 건 현실성 개연성이 좀 떨어져 보여서 어색하다.

저것과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옛날에 근성 도미노의 원조가 있었다. 바로 지금은 KCC로 바뀐 고려 화학의 '고려 페인트' CF다. 고려 페인트 광고는 지금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참신함과 기발함 덕분에 굉장한 호평을 받으며 회사 이미지의 제고에 도움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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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페인트의 도미노 CF는 원조가 첫 등장한 게 1989년이고 2차가 1992년, 마지막 3차가 1996년으로, 총 세 종류의 버전이 있다. 저 엄청난 양의 도미노는 CG가 아니며 실물을 직접 만들어서 쓰러뜨리며 찍은 거라고 한다. 세팅 하느라 굉장히 고생 많았을 듯. 1992년 당시의 신문 기사를 보면, 2차분 CF의 경우 8만 개에 달하는 도미노 칩을 사용해서 제작되었다는 보도가 있다. 도미노는 개념상 카드섹션 매스게임의 무인 버전뻘 되지 않을까 싶다. =_=;;

사실, 1990년대 초는 미국 할리우드의 영화/애니메이션 업계에서조차 CG가 이제 막 슬금슬금 도입되던 과도기 단계였다. 가령, 월트 디즈니를 예로 들자면, 1989년에 나온 <인어 공주>가 CG가 전혀 없이 100% 셀 애니메이션만으로 만들어진 '마지막' 작품이고, 그 뒤 <미녀와 야수>, <알라딘>에서는 배경부터 시작해 CG가 조금씩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나라는 그 시절의 CF는 아직 아날로그 기술만으로 실사 제작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기술 격차는 갈수록 줄어들고, 우리나라 역시 기상천외한 CG 합성 CF들이 곧 등장했다. 당장 떠오르는 건 하이칼스(1993) Alias라는 워크스테이션급 CG가 온통 도배가 돼 있다.

비주얼 다음으로 청각적인 면을 살펴보자면, 고려 페인트의 1차 CF에서는 도미노가 쫙 넘어지는 동안의 BGM은 그냥 피아노 건반으로 음이 또르르르르르 올라가는 소리 위주이다. 마치 보글보글에서 잔기가 하나 늘었을 때 나는 소리(점수가 일정 숫자 돌파, 혹은 EXTEND 보너스)와 비슷하게 들린다.
2차에서는 '도도 도 솔파미레도'로 시작하는 C장조 전자음 BGM이 추가되어서 음향이 더 미려해졌으며,
3차에서는 도미노가 실사 사진으로 바뀌는 효과가 더 부각되고 BGM은 뭔가 코러스가 곁들어진 명랑한 외국 팝송으로 바뀌었다.

본인은 3차 CF에서 나오는 A플랫 장조의 짤막한 BGM을 무척 좋아했다. 저런 음악이 있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이 역이 고려 페인트 CF의 일부인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도미노 CF에 대해 검색하던 과정에서 지금까지 끊어져 있었던 연결 고리를 되찾았다.
고려 페인트 CF에는 클래식 음악이 쓰였고 출처가 뭐냐 하면 그리그의 <페르 귄트 모음곡 - 솔베이그의 노래>라고 각종 지식인, 개인 블로그, 음악 음원 사이트에 잔뜩 소개되었으며 심지어 1996년도의 신문 기사에도 올라 있다.

그런데... 저건 도대체 고려 페인트의 어느 CF에 들어간 음악이지?? 아시는 분?
내가 듣기에는 2차 버전, 3차 버전 그 어느 것도 여자 솔로인 "솔베이그의 노래"하고는 하나도 닮은 구석이 없는데?

딱 들어 봐도 CF에 들어간 음악은 명랑한 장조이지만 저 원조 클래식은 단조풍이다.
원곡을 리메이크 했다고도 볼 수 없고 그냥 완전히 다른 음악이다. 저 세 편의 고려 페인트 도미노 CF에는 클래식이 들어간 적이 없다. 3차 CF에 들어간 그 명랑한 BGM의 정확한 출처를 알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래 전에 한번 다루기도 했지만 우리나라의 역대 공익 광고들을 또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내가 인생에 대한 기억이 본격적으로 생겨서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로 바뀐 게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이다. 그래서 그 시기에 텔레비전 화면을 본 기억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시절엔 환경 오염, 반공, 마약 등을 소재로 하는 공익 광고는 강한 훈계조에 섬뜩하고 무섭기로 악명 높았다.

시꺼먼 감방 같은 배경에서 "마약은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가 흘러나온다든가(1989) 올가미가 휙휙 던져지기도 하고..(1991) 국민 소득 4천$, 소비 수준은 2만$. 풍선이 뻥 터지는 과소비 추방 광고(1989)까지. 어린애들은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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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딩 시절, "두껍아 두껍아..."로 시작하는 요 1990년작 CF를 직접 본 기억이 있다. 음산한 BGM과 함께 흰 바닥에서 시꺼먼 얼룩이 불어나는 게 공포 그 자체였다. 마약 광고보다도 더 무서웠다. ㅠ.ㅠ 하물며 저 얼룩이 블랙이 아니라 핏자국을 표방하는 레드였다면 아마 최악의 안구 테러가 됐을 것이다.

사실은 고려 페인트 이전에도 도미노를 소재로 한 광고가 있었다. 바로 도미노 블럭이 쓰러지는 걸 범죄자들이 소탕되는 것에다 비유한 1989년도 공익 광고이다. 본인은 이걸 직접 본 기억이 있다.
20년 남짓한 세월 동안에도 영상 문화의 흐름이라는 게 정말 확 달라졌다.

그 중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고퀄의 공익 광고는 "필름 역주행"(1991, 1분)이다. 처참한 정면 충돌 교통사고가 난 동영상을 뒤로 돌려 보니 결국 발단은 질펀한 술자리. "필름은 되돌릴 수 있어도 생명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와 함께 영상이 끝난다. 이건 당시 무슨 국제 광고 공모전에서도 입상했다고 한다.
시대 정황상 역시 CG의 도움을 그다지 받지는 못했을 텐데 설마 자동차 두 대를 진짜로 충돌시켰을까? 어떻게 만들었까 싶은 생각도 든다. 8만 개짜리 도미노 블럭이야 그래도 생명의 위협이 없으니 근성으로 만들었다 치더라도. 아니면 충돌해서 운전자가 튕겨 나가는 부분만 실제 배우 대신 정교한 마네킹으로 대체했을 수도 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에 만들어진 음주운전 추방 광고는.. 아주 경쾌한 BGM과 함께 맥주잔이 출렁거리면서 도로를 질주하다가 교통사고가 나는 걸로 끝난다. 묘사가 훨씬 덜 간접적인 형태로 바뀌었으며, 앞부분만 봐서는 오히려 맥주 상업 광고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결말부에는 역시 "즐거우셨습니까? 인생의 마지막 운전이 될 수도 있습니다"라는 경고문이 나온다.

이렇게 내 기억에 남는 CF들을 좀 늘어놓아 보았다.
작곡가, 기자, 작가(글/사진), 영화 감독처럼 뭔가 창의력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평생 한두 번 찾아올까 말까인 '명작운', '특종운'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난 영상이나 음악은 아니고 아시다시피 글과 코드를 주로 창조해 왔다. 하지만 음악 쪽도 언젠가 내가 만든 곡에 내가 꺼뻑 가는 작곡을 하는 순간이 왔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프로그램 쪽이야 난 날개셋을 계속 만들지 않았으면 진작에 철도로 전공과 직업을 바꿨을 수도 있다. -_-;; 어쩌다가 약을 단단히 빨고서 이렇게 아무도 관심 안 갖는 분야의 엽기적인 프로그램의 창조자가 됐는지 모르겠다.
여러 분야의 글 중에서 기독교/성경 쪽만 예를 들자면, <음란한 성경은 가라>에 아마 평생의 명작운이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 투입되지 않았나 싶다. 그게 정말 독보적인 대박을 쳤으며 킹 제임스 옹호 진영과 반대 진영 모두에 내 이름을 알렸다.

페인트 광고에 근성 도미노가 나오고, 자동차 광고에 궁극의 부품 도미노와 합창단 비트박스가 나오는.. 그런 급의 명CF가 앞으로 또 국내외에서 얼마나 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본인 역시, 30여 년 평생에 뭔가 똑같은 내용을 공부하고 암기해서 치는 시험에서 남보다 앞서고 뭔가 재미를 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 대신 남 안 하는 짓, 창의적인 분야에서 뭔가를 기여하고 명성을 얻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게 꼭 부귀영화를 가져오는 분야는 아니어서 문제이긴 하다만=_=, 난 앞으로도 계속 그 방면을 파면서 살게 될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6/02/09 08:35 2016/02/09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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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왕국 (Frozen)

우리나라는 동북 아시아 CJK 중 유일하게 12월 25일 성탄절이 빨간날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딱 1주일 뒤에 있는 1월 1일 신정도 빨간날이다.
지난 2015년은 성탄절과 신정이 금요일이고 그 뒤에 토요일과 일요일이 이어져서 황금 연휴가 두 주 연속으로 있었다. 그 사이 기간을 연차 휴가로 연결하면 직장인도 사실상 겨울방학 기분을 낼 수 있었을 듯하다. 장기간 외국 여행도 가능하다.
그래서 그런지 금요일 오후 당일은 도로도 왕창 막히고 지하철도 혼잡했다. 그러나 연휴 동안은 도로와 지하철이 텅 비어서 한산했다.

그때는 밤 10시에 텔레비전에서 이색적인 프로가 방영되었다.
12월 25일엔 종교 케이블 방송도 아니고 공영 방송인 KBS1에서 주 기철 목사 다큐를 방영했으며, 그 다음날 26일 같은 시각엔 OCN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월트 디즈니 <겨울왕국>을 방영했다.

본인은 전국· 전세계가 Let it go로 열광하던 그 시절에도 <겨울왕국>을 보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그 대신 얼마 후 개봉했던 <신이 보낸 사람>은 봤다.
그로부터 2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 TV 방영이 될 정도가 돼서야 <겨울왕국>을 보게 됐다.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저 노래들이 어느 문맥에서 등장하는지가 궁금하기도 해서 주의 깊게 시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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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의 뒷북인 주제에, 저걸 보며 아이디어 메모를 남겨 놓은 게 한 페이지가 넘었다. =_=;; 주 기철 목사에 대해서도 지금까지 내 블로그에서 다룬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긴 한데, 일단은 겨울왕국 얘기부터 먼저 하겠다.

- 연관 검색: 제목이 '테이큰'처럼 '-en'형 불규칙 동사의 과거분사형 한 단어로 구성되어 있어서 인상이 왠지 좋게 느껴졌다. Frozen. 참고로 난 '테이큰' 광팬이다.;;

- 연관 검색: 극지방 근처 북유럽 하늘 → 오로라 → 안나와 엘사 → 아 맞다 옛날에 "오로라 공주" 이런 거 나오는 만화영화가 있었는데.
검색을 해 보니 80년대 말에 <SF 서유기 스타징가>, 국내에서는 <오로라 공주와 손오공>이라고 소개된 일본 애니가 있었다는 걸 확인했다.
일본은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미국산 애니로는 <우주 보안관 장고>가 있었다. 보안관이라니 역시 발상이 미국스럽다..;; 내가 '텍사스'라는 단어를 태어나서 최초로 접한 매체가 저거였다. '캘리포니아'는 건포도 제조지로 처음 접했고.

- 연관 검색: '안나'라는 이름은 포카혼타스에서는 인디언들 언어로 작별 인사 '굿바이'라는 뜻인 게 와 닿는다. 기억하시는지? 만났을 때 인사인 '윙가포'의 반의어이다.

- 잠깐 깨알같이 등장하는 룬 문자로 쓰인 책이 인상적이었다.

- 월트 디즈니는 내가 알기로, 없는 눈을 CG로 만들어 내는 기술이 세계 최정상급이라고 들었다.
하긴, 대전 액션 게임들이 눈 덮인 바닥을 실시간으로 렌더링하는 것도 보면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사람이 그 위로 밟거나 자빠지면 자국이 물론 패인다.

- 엘사는 뭔가 초월적인 자기 능력을 컨트롤을 못 한다는 점에서 가위손 같기도 하며, 섬뜩한 쪽을 더 부각시키면 M에 나오는 주인공 박마리 같기도 하다.
애들의 기억을 지우네 뭐네 하는 게 M스럽게 느껴지며, 가위손의 경우 거기에도 나름 얼음으로 조각품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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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액체 상태의 물 위를 걷긴 했는데, 엘사는 아예 물을 실시간으로 꽁꽁 얼려 버려서 얼음 위를 달려간다. 물이 비열이 얼마나 높은 물질인지를 생각한다면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는데, 어느 게 더 기술 레벨이 높은 건지는 내가 판단을 못 하겠다.

- 안나는 정말 '금사빠'다. "나 미친 소리 좀 해도 돼? 나랑 결혼해 줄래?" /
"나 더 미친 소리 좀 해도 돼? 응! 그럴게! ^^" 우와 정말..;; ㄷㄷㄷㄷ
그 반면 한스는... 라이온 킹 Be prepared 같은 악역 노래 하나 없이 관객까지 뒤통수 칠 정도로 180도 돌변하는 게 디즈니의 관행상 이례적이다.

- 눈사람 올라프는 정말 플라나리아 급의 초재생능력의 소유자이다. 사지가 잘리고 데굴데굴 굴러도 살아 있는데, 그래도 녹으면 죽는 듯하다. 플라나리아도 사지가 1/n로 짤려도 다 살아나지만, 살고 있는 물이 조금만 더러워지면 녹아 버린다. 세포 구조가 아주 단순한 덕분에 외부적인 생존성은 강하지만, 복잡한 물질대사를 할 수 없어서 내부적인 생존성은 쥐약이기 때문임.

- 주인공이 타고 있던 말이 도망가고 겨울에 눈 쌓인 숲 속에서 늑대 떼에게 쫓기는 것, 그리고 악당들이 주인공이 사는 산 속의 성에 쳐들어가는 건.. <미녀와 야수>를 쏙 빼닮았다.

- 영하 수십 도 이하의 혹한에서 쇠붙이 수갑이 깨져 버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석(Sn)은 실제로 그렇게 부스러진다. 이것 때문에 남극 탐험을 갔던 영국의 스콧 일행, 그리고 러시아로 원정 갔던 나폴레옹까지 낭패 보고 고생했었다.

- 기온이 올라서 현실에서 주변의 눈이 녹는 장면은 저 영화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지저분하다. 곳곳이 축축하고 도로는 온통 진흙투성이가 되고...;;
그리고 군대에서 제설의 트라우마를 경험한 분이라면 애초에 겨울왕국 같은 영화가 결코 낭만적으로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 영어에서 heart는 사람의 장기인 '심장'도 되고 추상적인 '마음'도 되는 중의적인 단어인지라 성경 번역에서도 다루기가 까다롭다. 그래서 결말부에서 이런 대사도 나오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스: 어, 언니가 니 heart를 얼려 버렸잖아? (그런데 너 어떻게 생물학적인 목숨이 붙어 있지?)
안나: 지금 여기서 heart가 얼어붙어 있는 놈은 너뿐이지! (너 완전 인간 말종이야)

- 겨울왕국과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매체로는 영화 <투모로우>, 이말년 씨리즈 제100화 <얼음탑의 마법사들>, 계몽사 어린이 세계 명작 미국편 <샴라크의 크리스마스>를 참고하면 될 듯하다. 게다가 이말년 씨리즈는 겨울왕국보다 훨씬 먼저 만들어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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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얼음 마법을 잘 쓰기 위해선 마음을 차갑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금부터 한 명씩 나와서 쌀쌀맞게 대하는 연습을 한다. 실시!"

- "몇몇 좋은 부분이 있지만 기본적으로 애들 영화입니다.", "전형적인 디즈니 영화입니다."라고 SNS에서 영화에 대해 본인에게 힌트를 준 분이 있었는데, 본인 역시 이에 적극 공감한다. 결말이 좀 허탈하고 오글거리게 느껴질 수도 있다.
고전 게임 <보글보글> 오락실판의 해피 엔딩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던가. 딱 그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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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gratulations!
Now you found the most important magic in the world.
It's "LOVE" & "FRIENDSHIP"!

Posted by 사무엘

2016/01/26 19:32 2016/01/26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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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초등학교 때 GWBASIC으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8비트나 자기 테이프 같은 건 경험하지 못했고 16비트 교육용 PC가 최초로 프로그램을 짜 본 컴퓨터 환경이었다. 중학교 때는 전국 PC 경진대회가 정보 올림피아드로 바뀌는 것을 겪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이 상협 씨던가 1990년대 후반에 <칵테일>이라는 멀티미디어 저작도구를 개발해서 벤처를 차리는 것을 봤다. 지금 그분은 언론에 일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교육 제도가 너무 일률적이고 꽉 막혀 있다고는 하지만 그때는 그나마 그 분위기에 많이 편승하는 편이었다. "나이 타파, 학벌 타파,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간다, 하나에 미쳐야 산다" 이러던 시절이었으며, 본인 역시 그런 풍조의 덕을 봤다.
내가 그때 컴퓨터보다 새마을호를 먼저 많이 타고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Looking for you를 들었으면, 난 컴퓨터 대신 철도를 직업과 전공으로 선택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도 철도는 컴퓨터 프로그래밍만치 학교 교육과정하고는 완전 딴판인 오덕질을 요구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난 지금과는 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지 싶다.

뭐, 지금은 그때에 비해 컴퓨터 프로그래밍 특기자에 대한 거품이 많이 빠졌다. 일류 공대들의 컴공/전산학과의 입결은 2000년대 초반보다 훨씬 더 낮아졌다. 사실은 나조차도 전형적인 IT 엔지니어 형태의 길을 갈 사람이 아닌 건 오래 전부터 스스로 느끼고 있다.
기술은 끊임없이 상향평준화하고 있고 어지간한 건 다 오픈소스다 뭐다 하면서 무료로 풀리고 있는데, 앞으로 컴퓨터 코딩만으로 무슨 창의적인 물건을 더 만들 수 있으며, 먹고 살기 위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난 그런 건 모르겠고 단지 아무도 관심 안 갖는 한글 입출력 기술 쪽 연구만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칵테일보다도 더 전, 까마득한 옛날에 1980년대에도 언론에 이름을 날렸던 10대 고딩 프로그래머가 국내에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눈길이 간다. 이 글에서는 두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박 현철 씨.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컴퓨터 하드웨어의 조립만으로는 한계를 느끼고 프로그래밍 공부를 직접 시작했다. 그래서 하드웨어를 직접 제어하여 (보아하니) 일종의 전자식 타자기처럼 한글 문장을 찍어 주는 초간단 한글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했다. 무려 1982년의 일이다.
저 때가 얼마나 옛날이냐 하면, 한글 입력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지금의 표준 KS X 5002 두벌식 글자판이 거의 저 무렵에 제정되었다. 그리고 국내 열차 승차권의 전산 발매가 시작된 게 1981년이며, 그것도 한번에 왕창 된 게 아니라 경부선 새마을호부터 시작해서 1984년까지 끌었을 정도이다.

당시 이분을 소개한 TV 동영상을 한번 보시라.

별도의 하드웨어 없이 소프트웨어만으로 화면과 프린터로 한글을 찍는 프로그램이라니!
워드 프로세서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어서 프로그램의 이름이 그냥 '한글 워드 프로세서 버전 1.0'이었다.
이걸로 이분은 겨우 17세의 나이로 전국적으로 매스컴을 타고 일약 스타가 됐다. 굴지의 대기업들 전산실에서는 스카웃에 유학 등 각종 러브콜을 보냈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당시 비슷한 연배의 천재이던 김 웅용 씨를 신기하게 여겼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분은 그런 지나친 관심을 부담스러워했으며, 당장의 부귀영화보다는 그저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개발자' 노선만을 고지식하게 추구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50대 중년이 된 이분은 작은 회사에서 프로그램을 개발하며 일단은 아직까지도 개발자로 종사하고 계신다. 잠시 미국에도 갔다 오고 창업을 하기도 했지만, 운이 없었는지 사업 수완이 부족했는지 실패하고 빚도 지고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관련 신문 기사: 스티브 잡스를 꿈꿨지만 현실은 참담했다

사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와 함께 동업을 사람들도 그저 그의 유명세와 재능을 이용만 해 먹으려는 먹튀형이 많았다고 한다.

오, 나름 이념 쪽의 소신을 밝힌 것도 있다. "국내의 많은 진보 인사들이 잡스를 존경한다는 사실에 난 충격을 받았다. 잡스는 (빌 게이츠와 같은 급의 세계정복만을 이루지 못했을 뿐) 여러 행적으로 볼 때 악덕 독재 경영자의 전형이다. 그런데도 한쪽에서는 한진 중공업 김 진숙(노동 운동가)을 옹호하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스티브 잡스를 맹신하다니, 그건 논리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본다."
빌 게이츠만이 절대악이고 더구나 그의 대안이 스티브 잡스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저분의 말을 한번 곱씹어 봤으면 싶다.

그리고 최근에 또 이분의 인터뷰 기사가 인터넷에 소개됐는데..
이분은 그 어린 나이와 그 옛날에 한글 워드 프로세서를 개발한 분답게 굉장한 '한글빠'라는 것이 밝혀졌다.

관련 신문 기사: 한글은 세종대왕이라는 천재가 후손들에게 준 선물

한글빠 + 고딩 나이로 한글 입력 프로그램을 만들고 지금은 철도 관제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니..
난 고딩 때 날개셋 한글 입력기 1.0을 만들었으며 지금은 완전 철덕이다. 처지만 빼면 여러 모로 완전 나의 롤모델이 아닐 수 없다.
꼭 뭐 돈방석 위에 앉아야 하나, 자아 성취를 이뤘다면 저 정도도 충분히 성공한 게 아닌가..;; 엄청 고지식한 것까지도 나랑 완전 똑같다.

그 다음으로 비슷하게 주목받은 분으로는, 고딩 때 최초의 "한글 롤플레잉 게임"인 <신검의 전설>(1987)을 개발한 남 인환 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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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는 같은 나이의 어느 괴수 고등학생이 Another world를 만들었다지만, 그래도 그보다 전에 우리나라에서는 애플 2 어셈블리를 독학한 고등학생이 국내 최초의 상용 게임을 만들어 냈다니 참 대단하고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글 출력, 그래픽, 기획 등등 다 혼자 했다는데, 학교 공부를 어지간히 땡땡이 치지 않고는 이런 작품을 만들 수 없었지 싶다.

그는 똑같이 애플 2 플랫폼에서 <페르시아의 왕자>를 만든 조던 메크너처럼 영상 종합 예술에 관심이 있었는가 보다. 뭐, 게임 개발자로서는 같이 연계해서 나쁠 게 없는 분야이다. 그는 1990년대 초엔 무명이나마 영화 배우로 잠시 활약하다가 다시 게임 업계로 돌아오고, 지금은 온라인 게임 개발사의 부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한글 워드 프로세서 같은 '애국심 마케팅 + 생산용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게임을 만들어서 그런지, 이분이 1987년 당시에 막 매스컴을 타고 대기업 스카웃을 받았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게임 개발을 한 이분이 돈도 더 많이 벌고 더 잘나가고 있는 듯하다. 역시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 SI 같은 품팔이가 아닌 방식으로 돈을 벌려면 게임밖에 답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든다.

...;;
본인 역시 고등학교 나이 때 컴퓨터 프로그램을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 덕분에 전국 대회에서 상도 받고 언론도 타 봤다. 그런 특권을 입은 사람으로서 나 역시 가능한 한 잘됐으면 좋겠고, 그때 입상했던 프로그램이 계속해서 명맥이 유지되고, 내 연구의 뒤를 잇는 후배들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어린애가 컴퓨터를 뚝딱 해서 뭐 좀 비범한 걸 만들어 내면 언론에서 금방 '한국의 스티브 잡스, 한국의 빌게이츠' 드립을 치며 온갖 호들갑을 떨고 애를 막 비행기를 태운다. 그러나 그 열기가 좀 가라앉거나 그 애가 약간 실패라도 하면 분위기는 싹 바뀐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런 냄비근성 관행부터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주목을 받는 아이도 겨우 그런 것에 일희일비 연연하지 않는 근성과 멘탈을 갖출 필요가 있다. 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게 프로그램 개발 공부와는 별개로 필요한 인생 공부라는 느낌이 들었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언론이 스티브 잡스보다 데니스 리치를 더 중요하게 언급해 주기를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서 <날개셋> 한글 입력기는 오늘도 8.x 다음 버전의 개발이 계속 진행 중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나에게서 한글 입력기 새 버전을 창조해 낼 자유를 앗아 갈 수는 없다. 정말 극소수 예외가 아닌 한은 대한민국은 아직은 '노오력'하는 사람이 인정받고 성공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싶다. 부정적인 예외만 작정하고 찾자면 뭐 나보다 훨씬 천재인데도 시대를 못 타고 나서 인정 못 받고 무진장 불우하게 살다가 간 경우도 엄청 많을 테고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6/01/21 08:33 2016/01/21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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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죽음, 영웅 이야기

1. 장기를 기증하고 죽은 어린이

'리앙 야오이'라고 중국에서 11살짜리 소년이 뇌종양을 앓다가 지난 2014년 6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 자세한 내용) 그런데 그 아이는 전에 학교에서 뭔가 배운 게 있었는지, 기왕 죽더라도 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 장기 기증을 유언으로 남기고 죽었다.
그래서 아이의 부모는 유언을 따라 아이의 신장, 간 같은 주요 장기를 다른 환자에게 기증해 줬으며.. 그 장기 이식 수술을 마친 의사들은 아이의 시신의 옆에 늘어서서 허리를 90도로 팍 숙이고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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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굶는 건 의사로부터 굶으라는 처방을 받았을 때뿐이다"라는 말이 있다.
의사는 남의 의학적인 생명을 관할하는 전문직이다. 그러니 부자를 강제로 굶게 만들 수 있다. 남에게 "병 빨리 낫고 싶으면 / 건강을 되찾고 싶으면 이렇게 하세요, 저건 하지 마세요"라고 고자세로 훈수를 놓으면 놨지, 의사가 남에게 저 정도로 감사와 경의를 표할 일이 평소에 얼마나 있겠는가? 그런데 환자이던 고인이 자기 장기 기증을 하면서 갔으니, 저건 정말 의대생 시절 해부 실습용 시신 기증에 맞먹는 예우를 해 줘야 할 것이다.

저 사진을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 초록색 아니면 파란색의 solid color(순색) 배경을 볼 수 있는 분야가 크게 둘 있는 것 같다.

  • 외과 의사의 수술복
  • 일기예보나 일부 영화처럼 크로마 키를 사용하는 촬영 현장

(군인 전투복은 황록· 갈록 등에 가까우니 이 범주에 속하지 않음)

2. 6· 25 국군 전사자 유해

다음으로 군대 이야기이다.
이 명박 정권 시절이던 2012년 5월 25일, 6· 25 전쟁 중에 다른 지역이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국군 무명 용사의 유해 12구가 처음으로 우리나라로 운구되어 왔다. 정확히는 장진호 전투에서이다. 장진호는 인명이 아니라 함경남도 장진군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며, 저 전투는 UN군이 트라우마급의 참패를 당했던 치열한 전투였다.

6· 25 전쟁은 잘 알다시피 (1) 초반에 남한이 대구와 부산까지 밀림 (2) 인천 상륙 작전을 계기로 확 북진 (3) 중공군 때문에 다시 후퇴 뒤, 1951년 하반기쯤부터는 지금의 휴전선 일대에서 고지 탈환 엎치락뒷치락이 2년간 계속되고 후방은 사실상 일상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그러니 대한민국 국군이 저렇게 북쪽 끝에서 전사했다는 건 국군이 일시적으로나마 쭉쭉 북진해 있던 1950년 가을경의 일이다.

북한은 만만한 호구 겸 자존심 문제가 걸려 있는 남한하고는 손잡지 않고, 오히려 원쑤 미 제국주의자들과 협정을 맺어 자국 영토 내의 장진호 전투 전사자 유해를 합동으로 발굴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북한에 아마 돈 많이 쑤셔넣어 줬을 듯) 미국은 거기서 발굴된 유해를 미 합동 전쟁 포로· 실종자 사령부(JPAC)로 옮겨 신원 확인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12구가 아시아 인종으로 분류되었다.

이 단계가 돼서야 대한민국 국방부 소속의 유해 발굴 감식단이 나서서 추가 감식을 실시한 결과 그 유해는 국군 전사자로 확인됐으며, 그 중 2구는 김 용수· 이 갑수라고 신원이 완벽하게 확인되고 유족들과 연결까지 되었다! 저런 걸 도대체 어떻게 다 확인할까? 현대 과학 기술의 위대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우여곡절을 거쳐서 거의 70년간을 북한 땅에 파묻혀 있던 무명 용사의 시신은 하와이로 갔다가 대한민국 땅으로 귀환하게 됐다. 위안부 할머니와 일본군 만행을 배경으로 <귀환>이라는 영화가 제작 중이라고 들었는데 이것도 또 다른 종류의 "귀환"인 셈이다.
시신은 군 수송기를 통해 서울 공항에 도착했으며, 이때는 대통령, 국방부 장관, 한미 연합사 사령관 같은 최고의 높으신 분들이 쭈욱 도열해서는 관을 향해 이등병마냥 각 잡고 거수경례를 하면서 최고의 예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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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사람들이 현직에 있으면서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각 잡고 경례할 일이 도대체 있겠는가? 의사들이 장기 기증을 하고 죽은 아이의 시신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고 경례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남을 구하기 위해 죽음도 감수하는 직업으로는 경찰, 소방관, 군인, 보디가드· 경호원=_= 등이 있다.
이에 덧붙여 기독교 역시 나를 사랑하여 누군가가 나를 위해 대신 죽어 주었다는 걸 가르치고 믿는다. 물론 저런 세상 직업에서의 죽음과는 성격이 좀 다르며,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까지 있기도 하지만 말이다.

3. 불굴의 의지로 43년 만에 귀환한 국군 포로 조 창호 중위

1994년 10월 23일, 겨우 이틀 전에 성수대교 붕괴 사고 때문에 전국이 떠들썩하던 시절에, 서해상에 어느 괴선박이 남하해서 우리나라의 어업 지도선에 나포되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먼 옛날 6·25 때 납북되었던 국군 포로가 타고 있었다.

조 창호 중위(1932-2006). 그는 연세 대학교의 전신인 연희 학교를 다니다가 겨우 대학 새내기 나이 때 6· 25 전쟁을 맞이했다. 그 옛날에 대학생이면 굉장한 엘리트였으니 그는 국군 포병 장교로 임관하여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다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에서 중공군에게 밀려 대참패를 당했던 그 '현리 전투' 때 그는 포로로 잡혀서 북한으로 끌려갔다.

그는 다른 국군 포로들과 함께 탈출을 계획했다가 적발되어 13년간을 북한 내부의 온갖 오지에 있는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하며 고생했다. 농장과 광산에서 온갖 중노동을 해야 했으며, 작업 중에 사고로 몸의 이곳저곳이 다치고 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포로들이 다수가 희망을 잃고 북으로 전향해 버린 것과 달리, 그는 끝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며 대한민국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요양을 빙자하여 변방에서 늘그막을 보내게 되었는데, 거기서 한 조선족 상인과 접촉하면서 고향의 가족들과 서신 연락이 닿고 더 나아가서는 탈북에 기적적으로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1951년 이래로 무려 43년 만에 남한 땅을 다시 밟게 되고 가족들과 상봉했다. (북한에서 새로 둔 처자식들과는 안타깝지만 이별이지만)

그는 곧바로 병원에서 총체적인 치료와 회복에 들어갔다. 이 놀라운 소식이 전해지자 그 당시 김 영삼 대통령, 국방 장관에 육군 참모 총장까지 높으신 분들이 줄줄이 문병 와서 이 위대한 노병 영웅을 깍듯이 예우하고 격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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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참모 총장에게 "귀환"을 정식 보고했고, 서울 현충원에 가서 실종-전사자로 처리되어 있던 자기 이름을 손수 지웠다. 국가로부터는 훈장(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으며, 6· 25 당시 계급이었던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한 뒤 곧바로 육사 생도들의 사열을 받으며 전역했다. 모교인 연세 대학교로부터는 명예 졸업장도 받았다.

그는 그 뒤 12년을 더 살다가 2006년 11월에 향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6· 25 당시에는 아직 정식으로 있지도 않았던 군진수칙을 43년간 몸으로 실천한 대한민국의 참 군인이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며 쥐도 새도 모르게 보낸 북파 공작원이 아니라, 대놓고 국가 정규군으로 전투에 참가하다가 북으로 끌려간 포로들에 대해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생각하고 있는 걸까?

1.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신명을 바치겠다.
(중략)
4. 나는 만약에 포로가 되더라도 아국이나 우방에 불리한 여하한 적의 권고나 우대도 거절하며 추호도 적을 돕지 않겠다.
(중략)
6. 나는 만약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더라도 계급·성명·군번·연령을 제외하고는 진술을 회피하며 아국과 우방에 불리한 서명, 기타 여하한 요구에도 응하지 않겠다.
7. 나는 조국에 신명을 바친 대한민국 군인임을 명심하고 나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 나는 조국을 사랑하며 조국은 나를 보호하고 있음을 확신한다.
(국방부 훈령 제27호 군진수칙의 일부)

Posted by 사무엘

2016/01/03 08:33 2016/01/0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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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코딩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전설적인 인물을 좀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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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는 무려 아폴로 11호 우주선을 총괄 제어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한... 열혈 공순이 되시겠다. 이름은 마가렛 해밀턴(1936~). (마가렛 대처..는 영국의 정치인 이름이고.)

지금은 이미 80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되었지만 저 사진은 1968~1969년경에 촬영되었으니, 지금 내 나이 때 저런 일을 해낸 것이다.
IBM PC도, 인텔 마이크로프로세서도, C/파스칼도 없던 시절에 프로그래밍을 도대체 어떻게 했다는 건지 실감이 안 감. 기껏해야 어셈블리어, 포트란, 코볼 정도나 있었을 텐데.
우주선이나 전투기에는 Ada 언어가 많이 쓰인(쓰였)다고 하지만 이마저도 거의 1980년대는 돼서야 등장한 언어이다.

저기 옆에 있는 서류더미는..;; 프린트된 전체 소스 코드 리스트라고 한다.
그녀는 노가다 코딩만 한 게 아니라 수학자· 과학자· 공학자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까마득한 옛날에 사실상 소프트웨어 공학이라는 학문 영역을 새로 개척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의 숨결을 받아서인지 NASA가 예로부터 컴퓨터 프로그램 최적화의 종결자 소리를 듣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한 마디로 여군 장성인 그레이스 호퍼의 뒤를 이은 미국의 천재 여성 프로그래머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그녀는 나중엔 자기 이름을 따서 Hamilton Technologies라는 회사도 차렸다.
주요 솔루션이 Universal Systems Language이라고 하는데.. 말만 들어서는 PL과 SE 분야의 융합 같기도 하고 도대체 핵심 기술이 무엇인지가 봐도 모르겠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그런지...

저 때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절이니, 그 당시에 딱 현업에서 종사하고 있었던 저분은 그 영화를 보는 눈이 남달랐을것이다. 아니 아예 영화 제작 과정에서 기술 자문도 해 주지 않았을까.

이 사람과 대등한 레벨의 괴수를 우리나라에서 찾자면 아무래도 성 기수 박사를 꼽을 수 있겠다.
일단 1934년생으로 연령도 비슷하고, 하버드 최단기 박사 졸업에다 우리나라 컴퓨터 역사의 산 증인인 분이기 때문이다.
우주선 시스템은 아니지만 88 서울 올림픽의 전산 운영 시스템을 총괄 개발했다. 게다가 이분 역시 원래 전공은 항공 우주로 NASA 입사를 지망하기까지 했으며, 1960년대의 컴퓨터와 프로그래밍 환경을 접했던 분이기 때문에 일치하는 면모가 많다.

저런 천재들을 보면 난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하고 살았나 싶은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여담.

  • 저 사진에 있는 마가렛 해밀턴의 옷차림처럼, 무릎까지 올라오는 미니스커트(!)가 세상에 첫 등장한 것도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그러니 저 복장은 그 당시로서는 최신 패션이었다..!
  • '그레이스 호퍼(Grace Hopper)'는 grasshopper(메뚜기)와 단어 발음이 참 묘하게 비슷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6 08:39 2015/12/2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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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재 양성 기관

대기업· 공기업이나 정부 기관 같은 거대 조직은 망할 일이 없이 안정적이고 임직원에게 복리후생도 좋다 보니, 똑똑한 사람들이 들어가려고 많이 몰린다. 그런 조직은 일단 뽑은 사람들을 자기 조직의 일원으로 동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또 이미 입사한 간부들이라 해도 부려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때때로 재교육을 하려는 목적으로 자체적인 연수 내지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법조계에는 사법 연수원이 있으며, 군대 내부에도 장교를 첫 양성하는 사관학교뿐만 아니라 기존 장교들을 재교육하는 학교들이 자운대에 있는 게 그 예이다.
이런 교육기관들은 입소자들의 합숙(?)을 목적으로 도시의 외곽 내지 산기슭에 있는 편이며, 존재가 대외적으로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은 알려져야 할 필요도 없고.

(1) 한전 인재 개발원
태릉 사격장, 서울여대, 서울 과학 기술 대학교 사이의 산기슭에 있다. 한전에 합격한 신입사원들은 여기서 연수를 받는다. 연수 시설치고는 보안 수준이 이례적으로 청와대· 군부대와 동급인 최고이다. 지도에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으며, 항공 사진 지도에는 숲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던 중, 공채를 뚫고 한전에 합격해서 연수까지 다 받은 어떤 사람의 수기를 본 적이 있다. 만인이 부러워하는 안정적인 공기업에 합격했다만, 급여가 당장 그렇게 많지 않고 결정적으로 첫 발령지가 강원도 깡촌인지라 무척 고민 중이었는데.. 마침 인서울 근무를 하는 다른 대기업으로부터 추가 합격 통지가 오는 바람에 한전을 퇴사하고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 당장 연봉은 더 높을지 모르지만 일은 더 빡셀 텐데.. 그래도 인서울인 것이 결정적인 메리트였다고 한다. 공기업과 대기업을 나란히 선택해서 들어간 그 글쓴이가 참 대단하다.

(2) 국가 정보 대학원
국정원에 합격한 신입 사원..은 아니고 요원들이 비밀리에 직무를 위한 연수를 받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부지도 어지간한 군부대 급으로 넓다. 소재지는 성남시 운종동으로, 반경 수 km 이내엔 이 경석 선생 묘, 대한 송유관 공사, 고기리 유원지, 한국학 중앙 연구원이 있는 깡촌이다.
얘 역시 (1)처럼 100% 은폐이므로 지도에서 찾을 생각은 하지 말 것. 단, 국정원 본원과는 달리, 근처 도로의 이정표에는 잠깐 언급이 돼 있는가 보다.

원래 이 기관은 서울 이문동의 천장산 동쪽 구석, 의릉 인근에 있었으나 2003년경에 이전을 했다. 지금은 거기 일대는 한국 예술 종합 학교 캠퍼스가 돼 있다.
천장산 서남쪽 구석의 홍릉 일대는 잘 알다시피 수백· 수천 명의 이공계 박사들이 근무하는 과학 연구소들이 즐비하다. 여기 부지가 너무 좁아졌고 또 서울이 북한과 너무 가깝다는 안보 문제도 있고 해서 1970년대엔 나라에서 대전 대덕에 연구 단지를 추가로 만들고, 카이스트도 거기로 이전을 시킨 것이다. 다만 지금은 인서울 연구소들을 모두 이전하려는 계획도 있는 듯하다.

(3) 서울특별시 인재 개발원
시에서 운영하는 연수원도 있다. 서울시 인재 개발원은 예술의 전당 옆 서초 IC 근처의 우면산 기슭에 있다. 지도에는 표시가 돼 있고 내부의 로드뷰까지도 별 제한 없이 제공되지만, 최소한의 보안이 필요한지 항공 사진만은 흐리게 처리되어 있다.

여기는 서울시 소속 공무원들이 입소하여 교육· 연수를 받는다. 하지만 지방에서 서울시 공무원 공채를 지원하러 상경한 수험생들의 숙소로도 쓰이는가 보다. 전국에서 서울만이 유일하게 타 지방 사람들도 공무원 취업에 지원을 할 수 있다.

(4) 코레일 철도 인력 개발원
철도 회사에도 인력 양성 기관이 응당 존재한다. 코레일의 경우, 철도 박물관과 한국 교통 대학교 의왕캠(구 철도 대학)사이라는 아주 적절한 곳에 있다. 여기는 자사 직원의 재교육뿐만 아니라 철도 차량 기관사 지망생들의 학원 역할도 한다.
여기는 항공 사진으로 딱히 가려져 있지는 않다. 여기 대신 구로 역 인근에 있는 철도 교통 관제 센터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보니 완전히 은폐되어 있다.

코레일 말고 서울시의 지하철을 운영하는 공기업인 서울 메트로와 서울 도시철도 공사도 자체적인 인재 개발원을 두고 있다. 원래는 두 회사가 따로 썼는데 서울시의 조율로 한데 통합했다고.
서울 남산 어디 모처에도 무슨 기관의 연수원이 있는 걸 옛날에 지도에서 봤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설마 이전했나?

2. 대한 송유관 공사

우리나라에 에너지 기업으로는 SK 에너지 같은 사기업 내지 '한국 석유 공사' 같은 공기업이 있는데, 그와 더불어 송유관 시설 자체만을 관할하는 기업도 있다. 본사는 아까 잠시 언급했던 국가 정보 대학원과 가까운 위치에 있다.

외국에서 수입된 석유를 비축해서 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시설들은 다 발전소와 동급의 보안이 필요한 기간 시설이기 때문에 민간 지도에 나오지 않는다. 또한, 이런 기름은 유조차로만 수송하는 게 아니며, 경부 고속도로의 노선과 얼추 비슷한 선형인 온산-울산-경주-대구-대전-천안-성남에 이르기까지 송유관이 매설돼 있다고 한다. 그 송유관의 중간엔 역시 항구로 통하는 몇몇 지선도 있다.

하긴, 그 많은 석유를 전부 엘리베이터로만 나르기에는 양이 너무 많다. 에스컬레이터도 좀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다니지도 않고 그렇다고 통상적인 화물을 수송하는 것도 아닌 선이 매설되어 있다는 게, 마치 해저 인터넷 광케이블과 비슷해 보인다. 우리 땅 밑엔 신기한 시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석유 공급과 관련된 범죄는 크게 (1) 유사 석유 제조..;; (2) 면세유를 무단 유출 판매하여 차액 챙기기, 그리고 아예 (3) 지하 수십 m에 매설된 저 송유관을 근성으로 뚫어서 기름을 직통으로 탈취..로 나뉜다.
(3)은 개념적으로 은행 현금 수송 차량을 털거나 TV 방송에서 전파 납치를 하는 것과 별 차이 없다. 혹은 폐전자기기 재활용 업체에서 회수되는 금 같은 귀금속을 직원이 몰래 조금씩 빼돌리는 짓하고도 비슷하다.
물론 송유관 공사 같은 데서는 송유관의 유압을 측정해서 누유가 발생하고 있는지 체크를 하기도 하니, 오차 범위에 들 정도로 조금씩 찔끔만 빼돌린다고 한다.

3. 자동차 주행 시험장

다음으로, 옛날 엑셀 추억의 CF 영상을 하나 시청하도록 하자.

여기서 드는 의문: 이거 어느 도로에서 찍은 걸까?
이건 여느 고속도로나 시내 도로는 아니고, 자동차 연구소 안의 주행 시험용 전용 도로이다.
지금이면 경기도 화성시에 있는 교통 안전 공단 내부의 주행 시험장에서 찍을 수 있었겠지만 저 모델의 엑셀이 출시된 건 무려 1980년대 말이다. 그때는 저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그렇다고 레이싱 서킷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길이 너무 곧고 넓고 평평하다.

외국에서 찍은 게 아니라면 저건 현대 자동차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행 시험장에서 촬영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는 울산 공장 근처에 시험장이 있었고, 그로부터 몇 년 뒤엔 남양읍(동) 연구소에 또 시험장이 신설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엑셀의 CF는 엑셀 개발의 산실이던 남양 연구소의 주행 시험장에서 곧바로 찍지 않았나 싶다.

이건 사람이 뛰는 운동장· 경기장이 아니고 경마장도 아니다 보니 한 바퀴 도는 전체 거리가 거의 4~5km에 달할 정도이고 반경이 그런 경기장보다 훨씬 더 크다. 동일 축척의 항공 사진들을 한데 대조해 보면 자동차 주행 시험장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짐작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시설은 자동차가 나름 시속 200~250km급으로도 밟을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초고속 주행 테스트도 해야 되니까... 이런 이유로 인해, 뱅글 도는 곡선 부분은 원심력의 상쇄를 위해 노면 cant(좌우 기울기)가 굉장히 크게 잡혀 있다.

자동차 제조사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주행 시험장은 나름 기업의 자산이고 보안 시설이기 때문에 항공 지도 사진에도 완전 은폐까지는 아니지만 흐리게 표시돼 있다.
여담이지만 현대 자동차 미국 연구소는 모하비 사막에도 주행 시험장을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노후 비행기들이 가는 모하비 공항이 있는 그곳 말이다.

4. 남북 분단 관련

우리나라에서 봉인된 장소의 갑중갑은 단연 정치· 안보 분야 쪽일 것이다.

(1) 오리지널 판문점
본인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건데.. 6· 25 중 당시에는 판문점이 지금의 판문점 위치에 있지 않았다. 지금 판문점은 휴전선의 선형에 맞춰서 오리지널 판문점보다 동쪽으로 약 1km쯤 이전하여 새로 만든 것이다.
물론 그게 시점이 1953년 10월이므로, 휴전 거의 직후부터 판문점이 지금의 위치에 있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이뤄졌던 그 장소는 지금은 완전히 북한 영토로 넘어갔으며, 옛 판문점은 지금 판문점에서 먼발치 너머로나 볼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
군사 분계선 안의 경의선 철길 주변 사진을 보면, 장단 역 옛 부지라든가 "죽음의 다리"(판문점 인근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말) 따위는 있는 그대로 보존돼 있는 듯하다.
단, 장단 역은 전쟁 폭격으로 인해 돌 위에 돌 하나 안 남고 사라진 반면,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은 폐건물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 사실이 나를 자극한다.

물론 얘는 민통선 정도가 아니라 위험한 DMZ 안에 있기 때문에 개인의 접근이나 관광은 불가능함.
그리고 인터넷에 나도는 주소 중에 '동장리 어쩌구' 하는 주소는 잘못됐다. 언론에서 공개한 주변 사진을 보면 이 건물은 분명 길가에 있는 반면, 동장리 일대는 아무리 뒤져도 허허벌판일 뿐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도라산리'로 시작하는 주소가 길가에 있는 맞는 주소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철원 노동당사는 38선 시절에 북한 치하에 있다가 우리가 수복한 폐건물인 반면, 옛 장단면사무소 건물은 38선 시절에는 남한 관할이다가 나중에 봉인되어 버린 폐건물이라는 차이가 있다.

이런 곳에 실제로 드나들고 싶은 분이라면 열심히 공부해서 각종 공기업, 관공서, 군부대에 취업(!)을 하거나, 기자가 돼서 방문 취재를 하면 될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12/23 08:25 2015/12/23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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