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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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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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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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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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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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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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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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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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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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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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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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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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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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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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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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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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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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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삼일절엔 두 가지 볼일이 있어서 합정 역 일대를 방문했다.

먼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1, 2학년 학생들이 주최한 “서울여자, 취미는 한글” 전시회를 관람했다.
한 재준 교수님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레터링 수업을 듣고 결과물로 만든 작품을 전시한 듯하다.
장소는 <벼레별씨>라는 카페 건물인데, 합정 역 7번 출구로 나온 뒤 뒤돌아서 우리 은행 건물이 있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300미터가량 직진하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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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작품에 대한 설명은 땅바닥에 쓰여져 있는 게 인상적임.
한글은 앞으로는 가변폭 글꼴이 대세가 돼야 하며, 영문 글꼴처럼 다양한 metric을 지닌 들쭉날쭉 창의적이고 기상천외한 글꼴이 많이 나와야 하리라 여겨진다.

원래 3월 2일까지 하기로 예정됐던 전시가 3월 8일까지로 연장돼서 아직 시간이 며칠 더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가 보시길 바란다.

혹시나 해서 독자 여러분께 당부하는데... 내가 북한 비판하고 종북들 까는 글, 철도 찬양하는 글을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빈도가 지나치게(?) 잦아진다고 해서, 내가 내 본업을 잊어버린 건 절대로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길.
오히려 내 진짜 본업과 생업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잠수 탄 상태에서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자, 합정동까지 온 김에 이거 다음으로는.. 근처의 유명한 기독교 유적지를 들렀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선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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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서울이 강북 4대문 안으로 완전 코딱지만 하게 작던 시절엔, 강변은 완전 외곽 변두리였다. 군사 요새가 있고 사형장, 묘지 같은 거나 있을 정도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양화진은 바로 그런 곳이었으며, 그래서 묘지도 있고 바로 근처엔 절두산 같은 종교 성지도 존재한다(난 거기까지는 안 갔음).

우리나라는 천주교가 먼저 전래된 뒤에 흔히 개신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교파들이 구한말에 들어왔다.
자국 정부에 의한 박해와 순교는 천주교에 더 많이 남아 있는 반면, 기독교는 민간 차원에서의 정서적 왕따 말고 딱히 공권력에 의한 박해는 없었던 듯하다. 워낙 나라가 망해 가는 막장 시기에 들어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다만, 성경 번역 역사는 천주교가 아닌 기독교 쪽이 확실한 우위를 쥐고 있다. 그리고 일제와 북한 공산당에 의한 박해 역사도 기독교의 비중이 더 높다. 이것이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한반도 교회사이다.

단군의 후손들은 기독교를 전파받은 여러 민족들 중, 일찍부터 자국어 성경이 잘 완역된 좋은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일찍부터 성경의 중요성을 알았으며, 선교사들이 놀랄 정도로 성경 공부에 완전 목숨을 걸기도 했다고 함.

“성경 번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사라질 뻔했던 한글을 구원하셨고, 그 한글은 복음에 봉사하도록 부름받아 태어났다.” (전시관 안의 동영상 끝에 나오던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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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화자찬 아전인수식 해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조차도 제대로 된 회개와 부흥이 아니라 은사주의 난장판이었을 뿐이라는 의혹도 있는 마당에...;;
다만, 이왕 이런 성경적인 배경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 한반도에 들어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매우 큰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묘지나 기념관은 일단은 기독교 색깔이 80%이나, 가끔 천주교 쪽 얘기도 나오더라. 묘지에도 천주교 특유의 그 P와 X를 겹쳐 놓은 심벌이 묘비에 새겨진 무덤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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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니, 일부 묘비엔 아예 프리메이슨 컴퍼스와 G 표식까지 있기도 했다. 이 불모지에 와서 복음 전하고 병원과 학교 세우는 등 좋은 일을 하고 간 사람이긴 하나, 저건 정체가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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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로만 듣던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지를 드디어 처음으로 봤다. 감개무량했다. (프로필을 보면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박사 학위가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국내에서는 으레 박사 호칭이 붙더라)
한국과 한글을 워낙 사랑했던 분인지라 한글 학회에서도 완전 띄워 주고 존경하고 추모하는 바로 그분이다.

석 호필 박사--저 사람은 정말로 수의학 박사 맞음--가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로서 서울 현충원에 묻혔는데 헐버트가 그보다는 격이 낮아(?) 보이는 이곳에 묻힌 이유는...
6·25가 발발하기도 전에, 그 서울 현충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그냥 여기에 묻혔고, 굳이 이장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외국인 중에 대한민국의 영원한 은인 1호인 분이다.

이렇게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용인 산골짜기에 소재한 총신대 신학 대학원 근처에 있는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도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어졌다.
양화진이 순교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외국인 선교사 위주라면, 저기는 실제로 박해를 받은 자국인 크리스천들의 일대기를 다루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04 08:32 2014/03/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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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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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명이 그렇게 일본인 몇 명하고 목숨을 맞바꾸는 식으로 백 날 노력해 봐라. 독립이 되나? 조선의 대외 이미지만 나빠지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이렇게 무력 독립 투쟁을 평가절하하는 편인 사람들이 과거에나 지금에나 있다. 외교파이던 이 승만도 딱 저런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고... 비록 그 생각 역시 일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폭탄을 들고 무장 투쟁을 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그런 것 정도는 다 예상하고 감안했던 사람이다. 그러고도 자기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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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윤 봉길이 맞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던 사진이다.
실제로 윤 의사는 체포 직후부터 일본 헌병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해서 피떡이 된 상태였지만, 일본은 대외적으로 신사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멀쩡한 사람을 정중히 끌고 가는 사진을 대외적으로 내보냈다고 그러는데..
하지만 윤 의사의 후손 중 어떤 분은 저게 윤 의사가 맞다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위의 사람하고 아래의 사람은 아무래도 얼굴색을 포함해 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정말 동일 인물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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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면 윤 봉길 의사 동상이 있다. 날씨가 온통 흐리고 비가 오기 직전이어서 색감이 저렇게 됐다.
그런데 동상의 얼굴은 사진으로 보는 윤 의사와는 인상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으로 기념관 관람 후기는 마치고, 숲 남부의 기념비/위령비 인증샷을 남기겠다.

4. 양재 시민의 숲 남부에 있는 3대 비석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유격 백마 부대 충혼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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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왜 10월 1일을 국군의 날이라고 기념하는지 아시는가? 이 날이 바로 우리 국군이 6· 25 때 38선을 넘어 이북 땅으로 최초로 진군한 날이기 때문이다.

1950년 6· 25 전쟁이 터진 직후,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겨우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대통령이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 할 정도로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몰렸었다.
그러나 UN군이 참전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빼앗긴 지 딱 3개월 만이다! 그리고 10월 1일엔 38선을 넘었으며, 그 달 19일엔 평양을 점령했다.
11월쯤에는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물을 떠다가 대통령에게 진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김 일성 패당 무리들을 완전히 추방하고 대한민국 자유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중국도 아닌 중공군이 북한의 원군으로 참전하면서 국군과 UN군은 평안도 일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안북도 일대에서 몇몇 학생과 젊은이들이 정식 군번도 없이...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의병'을 조직하여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2600여 명의 병사들 중 500여 명(552명이라 함)이 전사했으나, 이들은 정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의 전적이 없었다면 1· 4 후퇴도 타이밍이 더욱 앞당겨져서 12· xx나 11· xx 후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 기념비는 바로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다. 현장에 게시된 설명문은 이렇게 끝난다.
“길 가는 손들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무 살 안팎 젊은 목숨을 반공 구국에 기꺼이 바친 뜻을 새기고 넋을 기려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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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가장 큼직한 이 비석은 1987년 11월 29일,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건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한 정도가 아니라 방해까지 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 이라크 발 대한민국 행 대한 항공 소속 여객기에다 폭탄을 슬쩍 설치한 것이다.
이것이 터지면서 그 비행기는 인도양 상공 망망대해 위에서 실종되었으며,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사망한 정도를 넘어 시신조차 한 구도 못 건졌다.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북한의 공작원 커플은 외국에서 체포되었다. 남자는 검거 직후, 사전에 훈련받았던 대로 청산가리 앰플--윤 봉길 의사에게도 자결용으로 차라리 이런 간편한 물건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만--을 깨물어서 자살했으나 여자는 실패하여 국내로 송환됐다. 그녀의 이름은 김 현희. 맨날 인권 유린이라고 비난받아 온 코렁탕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조지라고 있는 필요악일 게다. 그러나 그녀는 전향 후 사면받고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잘 살아 있다.

참고로 북한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직전에도 남의 나라 잔치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김포 공항 청사 안에서 폭탄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북괴 천하의 개쌍놈들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이런 놈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항공업계에서는 누가 비행기에 탔다가 여행을 포기하고 도로 내린 경우, 기내를 싹 다 수색하고 수하물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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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가장 남쪽에 가장 최근에 생긴 이 비석은.. 북한과는 관계가 없긴 하다만 그저 한숨뿐. 6· 25 이래로 평시에 단일 사고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502명. 아까 500여 명의 저 백마 부대 유격 대원들은 그래도 전투 중에 영예롭게 전사하기라도 했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저 희생자들은 대체 뭐냐. (하긴, 대한 항공 858편 희생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 주변엔 유족들이 헌화해 놓은 꽃을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더라.
유족들의 희망 사항은 삼풍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이런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이었으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거기는 워낙 금싸라기 땅인지라 아크로비스타라는 다른 주상 복합 주택이 들어선 지 오래다.
참고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현장과 비교적 가까운 성수대교 북단의 한강 둔치에 들어서 있다.

삼풍 백화점의 경우, 부실 공사에 대해 조금도 사죄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건물이 무너졌으니 고객도 고객이지만 우리 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거야!”라고.. 정말 개념 안드로메다로 보낸 회장의 발언이 더욱 어그로를 탔었다. 정말 북괴 뺨치는 철면피 천하의 개쌍놈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같았으면 책임자가 할복을 해도 시원찮았을 일이다! 1985년 JAL123 추락 사고로 520명이 죽었을 때도, 별로 책임이 크지도 않은 정비사 한 명이 자살했잖아.
물론 지금은 피해자 보상하느라 삼풍 그룹 전체가 자산이 싹 압류당하고 진작에 공중분해되었으니 그들은 정말 최소한의 죄값은 치렀다.

이상이다.
우리나라 역사· 지리를 사랑하는 철덕이라면 양재 시민의 숲 역은 이렇게 볼거리가 많으니 꼭 답사해서 주변 시설들을 둘러보도록 하자.

아, 그나저나 여기 근처에 aT센터가 있고, 말로만 듣던 코스프레 오덕들이 공원에서 모임을 한 게 진짜 보였다.
그런데, 일본 오타쿠 복장을 하고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화장실에 갔다 오거나 근처를 들락날락하는 애들이 정서적으로 많은 논란이 된 바 있다.
옛날에, 일본 야동 업로드로 유명했던 김 본좌 양반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서 광복절에는 업로드 안 했다고 한다. =_=;; 정말 그런 애가 있다면 제발 개념 탑재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02 08:26 2013/11/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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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매헌) 역

신분당선은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분당과 서울 강남을 16분 만에 잇는 민자 전철이다. 기본 요금이 수도권 전철의 일반 구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지만,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비싼 값을 하며 환승 할인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현재 개통해 있는 신분당선의 역들을 살펴보면, 강남(2호선), 도곡(3호선), 정자(분당)는 환승역이다.
판교는 판교 신도시 구간에 놓인 유일한 역이며 앞으로 성남-여주선과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신분당선 본사도 여기 인근에 있다.
여기 말고 서울 구간에 있는 비환승 신규역은 둘 있다. 하나는 등산 코스로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청계산입구 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역은 잘 알다시피 '양재 시민의 숲' 역이다. 분당선에는 '서울숲'이라는 역이 있고 신분당선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라는 역이 있는 게 흥미롭다.

이 역은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 사이의 경계인 강남대로 상에 있다. 논현(7호선)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남(2호선), 양재(3호선)의 순인데, 그 다음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IC 근처이고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이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양재에서 끝나기에는 양재 역 이남에도 여러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이 역은 양재 역만 있었을 때의 2% 부족한 면모를 다소 보충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 교육 문화 회관이 있다.
2011년에 본인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에 참가했었고, 그때는 발표 심사와 시상식이 거기서 열렸다.
그때는 근소한 차이로 신분당선이 아직 개통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회관에서는 양재 역에서 주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그걸 타고 회관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기면서 장소가 역에서 600m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마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의 바로 옆에는 말 그대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이 숲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1번 출구로 나가면 북부 쪽으로 간다. 좁은 의미에서는 북부만을 양재 시민의 숲이라고 치는 듯하다.
그리고 5번 출구로 나가면 남부로 향하게 되며, '여의교'--여기가 여의도도 아닌데 이름이 왜 이럴까?--라는 개천 다리를 건너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역명이 괜히 윤 의사의 호인 '매헌'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각종 위령비들은 북부가 아닌 남부에 있다.

이런 관광 명소들이 여럿 있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 지하철 정기권 떨이를 위해 일대 답사를 떠났다.
최 용신 기념관(안산선 상록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3호선 독립문) 가듯이 답사를 갔다.

2. 윤 봉길 의사

매헌 윤 봉길 의사 (1908-1932).

그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경축 행사장에 들어가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묵념을 시작했을 때 용감히 폭탄을 던졌다. 천장절(쇼와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한 행사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정도로 뜻깊은(?) 행사장에다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는 유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립서비스 생색내기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장 제스 총통이 이 사건에 완전 반해서 극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그로부터 불과 3~4개월 전엔 일왕을 죽이려는 이 봉창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이번 행사에서는 보안을 나름 강화하려 애썼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이번엔 불발하지 않게 정말 튼튼하게 폭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이 사용한 폭탄을 만든 사람은 김 홍일 장군으로 동일 인물.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동명인 바람에 독립 운동가의 이름이 이미지가 다소 실추했다.)

일본은 보안 차원에서 행사장 입장객에게 초대장 검사를 실시하고, 도시락과 물통 외의 소지품은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서 식사는 제공 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X선 금속 탐지기가 쓰이던 시절은 아니었던지라, 우리 쪽에서는 폭탄 자체를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지품은 통과 판정을 받았다.
초대장이 없는 건 윤 봉길이 시치미 뚝 떼고 유창한 일본어로 “아 왜 이런 기쁜 행사에 우리 자국민이 참석을 못 하냐?”라고 우겨서 넘겼다고 한다. 시쳇말로 '멘탈 갑'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의사는 물통 모양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진 걸 확인한 후 도시락 모양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폭탄은 또 불발하여 실패했다. 그는 이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자폭에 실패하고 죽지 못한 대가로, 잡힌 후엔 이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폭탄을 누가 만들어 줬는지 불라고 그야말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본토로 끌려가서 재판받은 뒤, 비공개로 집행된 총살로 겨우 24년간의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감정 같았으면 이런 반동분자에게 능지처참을 가해서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 처형 즉결처분을 했다간 오히려 일제의 잔학함이 국제적으로 폭로되고 조선에 대한 여론이 좋아질 걸 우려해서 일을 조용히 해치웠다.

그 대신 윤 의사는 모 형무소 내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수십 발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마치 차우세스쿠의 최후의 순간처럼 끔살당했다. 격발 중 일부는 윤 의사를 겨냥하지 않은 페이크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단 몇 발이라도 권총도 아니고 돌격소총으로 복부의 심장도 아니고 얼굴 미간을 집중적으로 맞았으니 형체가 남아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신은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그래도 안 중근과는 달리 해방 후에 유해가 수습· 송환되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다. 백범 김 구가 이 봉창· 윤 봉길 같은 사람을 침투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윤 의사는 정말 가슴이 터질 듯한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훙커우 공원으로 가야만 했을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사내 대장부는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상하이 의거를 앞두고 아직 갓난아기인 두 아들들에게 미리 남긴 유언)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 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저런 말과 글의 퀄리티를 보노라면, 누가 윤 의사를 감히 무식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유언을 보면 '빈 무덤'이랜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기 시체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다 염두에 둔 듯하다. 아아...
자, 배경지식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부터 기념관과 주변 지역 사진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3. 윤 봉길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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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입장은 무료이나, 주차장은 무료가 아니다.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은 둘 다 무료였던 걸로 기억.)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경우, 재정난· 운영난 때문에 유품들이 제대로 관리도 못 되고 기념관 자체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들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아서 유료화를 해도 좋으니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념관은 중앙 홀의 좌우로 방이 2개 있었다. 내부의 관람 컨텐츠는 이게 전부다. 2층과 3층이 있긴 하지만 거기는 관람 공간이 아님. 3층의 경우, 기념 사업회의 수익 모델 차원에서 강당 공간 유료 대여를 한다고 한다.
안에는 윤 의사의 여러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어록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 의사를 소재로 초등학생들이 포스터를 그린 것도 잔뜩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첫 개관한 건 1988년으로, 천안의 독립 기념관보다 살짝 늦지간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셈이다.
참고로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별도의 윤 의사 생가와 기념관이 있긴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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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윤 의사의 생애에서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못 읽는 어떤 문맹 청년이 윤 의사에게 자기 아버지 묘비를 좀 찾아 달라고 동네 야산의 묘비들을 죄다 뽑아 왔는데...
“님 선친 묘비는 골라 낼 수 있지만, 묘비들 원상복귀는 어떻게 시킬려고?”라는 한 마디에 데꿀멍해 버린 사연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 그 청년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묘지도 못 찾게 만드는 초대형 민폐를 달성했다. -_-;;

안 중근도 그렇지만 윤 봉길도, 테러리스트(?)이기에 앞서 민족 독립의 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상가이고 계몽가였다. 윤 봉길의 삶에서도 의외로 최 용신스러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교육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지식인이 얼마나 고민하던 끝에 폭탄까지 들게 됐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3/10/30 08:23 2013/10/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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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이라 하면 철덕이라면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중앙선 및 경춘선보다는 살짝 이른 1937년 8월 5일에 개통하여 대한민국 최후의 협궤 철도로 남아 있었지만 199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운행이 중단된 추억과 비운의 노선 말이다.

단, 최후까지 살아 있던 구간은 인천-수원 전체가 아니라 한대앞-수원 사이의 비교적 한적한 구간이다. 한적하다는 말은 재개발을 위해 선로를 철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객 수요도 안습하다는 뜻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운행 중단’ 상태라지만 실질적으로는 폐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된 선로를 곧장 악착같이 모조리 철거한 것도 아니었다. 관리가 중단된 협궤 선로는 이내 시뻘겋게 녹이 슬고 잡초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은 일상적으로 보기 쉽지 않은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철덕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8년 전인 지난 2005년에 상록수-한대앞 역 사이의 수인선 선로 흔적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수인선의 표준궤 복선 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거기에 있던 선로는 의외로 얼마 못 가 철거되었다. 사진을 찍어 놓길 잘했다. 본인은 별다른 의심의 여지 없이 이제 수인선 협궤 선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대앞 바로 다음의 중앙-고잔 사이에 선로가 아직까지 의외로 잘 보존되어 있고, 일부 구간은 안산시에서 관광 시설로 조성해 놓기까지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의외로 각종 위키 부류의 정보 사이트에서도 수인선 잔여 구간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은 석가탄신일 연휴 때 곧장 안산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마침 사랑 침례 교회의 정 동수 목사님께서 뉴에이지 특강을 했는데, 안산선과 수인선 답사를 먼저 한 뒤, 안산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편인 그 교회에서 강의도 듣고 왔다. 이렇게 동선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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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었지만, 잠시 반월 역 주변의 사진을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에 이렇게 전원적이고 산과 들로 뒤덮인 전철역이 또 있을까 싶다. 안산선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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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역은 굉장히 드문 특성을 여럿 갖춘 특이한 역이다.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으며(이런 역도 몹시 드문데), 역무 시설과 승강장이 모두 지상 평지이면서 선로 횡단은 육교가 아니라 지하도로 한다. 지하철과의 환승역이 아니면서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 역은 구일이나 대방 역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역 입구엔 작게나마 광장도 있다.

잘 알다시피 반월과 다음의 상록수 사이는 거리가 3.7km가량으로 수서-복정급으로 매우 길다. 두 역은 지상이지만 잠시 몇백 m 길이의 터널도 지나며, 아래로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그리고 위로는 경부 고속선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상당히 긴 역간거리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 사이에는 역이 또 생길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본인은 여행을 계속했으며, 드디어 중앙 역에 도착해서 내렸다.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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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그분이 내 눈에 펼쳐졌다! 하앍하앍...;;
한대앞 역의 경우(그리고 안산 역도), 안산선의 승강장도 지상 평지이다 보니 수인선과 승강장이 나란히 건설되는 게 가능했던 반면, 중앙이나 고잔 역은 안산선 선로가 고가로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평지인 수인선은 역의 밖에 이렇게 있을 수밖에 없다.
금정 쪽으로 되돌아가는 한대앞 방면으로도 수인선 선로가 살짝 있긴 했지만 얼마 못 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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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 주변은 그야말로 경치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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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그렇다 쳐도 영문 서체는 마치 Mac OS 클래식의 서체와 닮은 것 같다.
이런 클래식 역명판도 누가 잘 보존해 놔야 할 텐데 말이다.
과거엔 이곳에 수인선 승강장이 있었기 때문에, 열차 승강장도 아니고 역의 외벽에 이런 물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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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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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에 가까워지자 웬 이런 시설물도 있었으나, 식물 넝쿨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주변 식물들의 키는 낮아져서 시야가 확 트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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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수인선 고잔 역 승강장과 열차를 재연해 놓은 시설물도 있었다.
안산선의 역들 중 수인선을 가장 잘 보존해 놓은 구간은 중앙-고잔이며, 역 하나만 꼽자면 고잔 역 주변인 듯했다.

고잔 역은 수인선 시절부터 있었던 역일 뿐만 아니라 안산선이 개통한 뒤에도 한동안 수인선 영업만 하고 안산선 쪽 승강장은 수 년 뒤에 생겼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정서적으로 수인선이 ‘갑’이었던 역이기 때문에 보존 시설도 고잔 역을 중심으로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 반면, 그 옆의 초지(구 공단) 역은 그렇지 않다. 수인선이 본격적으로 망해 가던 1994년에 추가로 생긴 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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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을 지나고부터는 수인선 선로는 다시 잡초로 무성하게 덮이더니, 나중에는 안산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개천과 철길 공사장(원시-소사선!)에 가려져 선로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땡볕에서 중앙-고잔-초지 사이의 거의 3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으면서 수인선 성지순례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광역전철 분당선이 첫 개통한 날이 반대로 수인선의 상당 구간이 폐선된 날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KTX가 개통한 날이 교외선 열차가 없어지고 경춘선 통일호가 없어진 날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지금 오이도 역은 과거의 수서 역과 비슷한 위상이 돼 있다. 옛날에는 3호선의 남쪽 종점이 수서였고, 동시에 노란 분당선의 북쪽 종점도 수서였으며 둘은 한데 이어진 노선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4호선의 남쪽 종점이 오이도이고, 동시에 분당선과 직결될 예정인 노란 수인선의 종점도 오이도인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04 08:27 2013/07/0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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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下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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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 선생 묘소의 비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닳아 있었는데 이곳이 허 준의 묘지라는 것은 꽤 어려운 계기를 통해서 알려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이 출간된 게 1611년이라고 하니 KJV 신자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에서 흠정역 성경이 나온 동안 조선에서는 의학 서적이 만들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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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의 언덕은 전원적이고 경치가 좋았다. 물론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지뢰밭?)이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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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주 적성면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였다. 주변엔 공원도 있어서 산책하고 쉬기에 좋았다.
미국의 인지도에 밀려서 그렇지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도왔던 국가이다.

특별히 이 전적비는 1951년 4월 22~25일 동안 이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하고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번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 자신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652명 가운데 겨우 67명만 살아남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제일 먼저 여기 가서 참배부터 한 뒤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육해공 참모총장과 김 관진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화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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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글자가 좀 작긴 하지만, 임진강 역과 일대의 임진각 관광지는 지도에서 4번이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가 3번, 제3 땅굴은 2번이다. 땅굴을 견학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지하로나마 DMZ 구간에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동그란 점선은 민통선이고, 더 이북으로 길쭉한 점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허 준 선생 묘지는 24번이요, 영국군 전적비는 22번 근처에 있다. 이 지도 자체가 영국군 전적비 입구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초청자분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왕 적성면까지 자차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적군 묘지도 좀 들를까 했다.
국도 37호선을 타면서 근처를 분명 지나긴 했을 터이나 발견은 못 했다.

하긴, 이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진짜 최소한의 예우만 해서 매장해 놓은 묘지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묘비에 이름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결정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종북 간첩 불순분자 정치인도 여기 가서 참배를 했다거나, 이곳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병신짓을 한 적도 없다. (뭐, 적군 묘지를 띄워 줄 수는 없으니, 반대로 국립 현충원 참배가 부당한 강요라고 희대의 개드립을 날린 빨갱이 정치인은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게 되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과 종북 좌빨의 spirit은 역시 절대로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민통선 안에 들어가서 제한적으로나마 사진 찍고 실시간으로 SNS와 카톡으로 자기 근황까지 알리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게 무엇 덕분이고 누구 덕분일까?
또한 공무원· 관료가 아니라 엔지니어· 발명가가 대접받고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 구조 덕분에 컴퓨터가 발명되고 인터넷이 뚫리고 페이스북,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레알 넘사벽급 선진국이 맞다.)

그에 반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전국을 드나드는 게 우리가 지금 민통선을 드나드는 것과 비슷한 절차이다. 평양 시민이 아니면 일반 평민들은 출입증 없이는 시· 도도 못 빠져나간다.

우리나라는 군대 현역 복무가 2년가량이고 예비군까지 합쳐야 10년 남짓이지만, 북한은 남자들의 현역 복무가 10년이어서 20대 중· 후반까지를 전부 군대에서 날린다. 예비군 소속은 사실상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60대) 평생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전국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경찰도?)을 무진장 많이 뽑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생산을 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군대를 돌아가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진장 착취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근본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북한의 비효율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야기되는 게 아니다. 겨우 이념만이 문제였다면 북한도 중국이나 소련처럼 경제 시스템을 개방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냥 무력 군사 도발에 분노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북한 수뇌부의 시스템과 대처 매뉴얼, 알고리즘이 본질적으로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선이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는 점도 말이다. 이걸 놔 두고 무슨 미국이 경제 봉쇄를 해서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니,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니 하는 건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악한 국가가 6·25 시절처럼 정상적인 무력 기습으로는 우리나라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유를 악용하여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족 자주 통일 드립을 치면서 안보관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띄울 건 없으니 반대로 남한을 비하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통선 패스를 갖고 계신 어르신은 역시 안보관과 사상에 관한 한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 더하시더라. 정말 울분을 터뜨리면서 지난 종북 정권이 저지른 반역 행위를 비판하셨다. 개성 공단은 10년 공들인 탑이 아니라 10년간 앓던 충치에 더 가깝다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도 잘한 것만 있는 게 아니며 역사적으로 자신의 병크를 북풍으로 합리화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안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한 이슈로, 무슨 국내 치안처럼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처럼 신사적으로만 진행해서는 곤란한 면모도 있다. 간첩 한 명만 칼같이 가려내고 단 한 명도 억울하지 않게 공권력을 집행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 아라크넹 님은 “원전을 없애자고 할 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필요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몇 배로 오른 기름값과 전기료를 감수하면서 무턱대고 원전을 없앨 참인가? 현실적인 변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무작정 원전을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부 수사 기관이 종북 수사를 병신같이 한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종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더 시급한 때임이 틀림없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전툴루, 전땅크 각하는 잘 알다시피 퇴임 후에도 25년이 넘게 장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강의 호강을 누리는 중이다. 돈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세금 추징금도 안 내고, 훈장도 반납 안 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는 다 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 건강도 아직 좋고 팔팔하다.

리즈 시절에 제3 땅굴을 발견한 것 좋으며,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형 집행을 시원스럽게 잘 해 준 것도 분명 잘한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의 모습은 좀 좋은 간증(?)이 못 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놈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전땅크 각하에게 공개적으로 제안 드린다.
아예 대놓고 국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 줬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지고서 이왕 구겨진 이미지를 확실히 완전히 구기란 얘기다. -_-;;
저 사람이 그 배짱으로 광주 5.18 피해자들한테 사죄(?)를 할 리는 없으니, 사죄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우익 쪽에 힘을 실어 주는 소신 발언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서”라고 말할 배짱이 있으면, 차라리 그때 명령을 따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고, 팀킬 오발 사고 때문에 몇몇 광주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희생된 건 애석한 일이라고... 심지어 5.18 때 북한 특수군이 쳐들어온 게 사실이기라도 하면 그것도 언급하라.
그게 사실이고 그 시절 자기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면 그 소신이라도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란 말이다. 지 만원 박사 같은 사람이 기를 쓰고 주장하는 내용을 당사자가 직접 입증해 보아라.

전직 대통령이니 얼마나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겠는가? 그런 말 아무리 해도 신변에 위협을 받을 일도 절대 없을 테고!
그것이 전땅크 각하가 그나마 마지막에 세금값 하는 인물로 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난 광주 5.18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성향으로든 남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꿔 놓을 정도의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뭐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경의선 쪽을 갔으니 다음 안보 관광은 철원 경원선 라인으로 갈 예정이다. 제2 땅굴, 노동당 청사, 백마고지/월정리 역, 금강산선 옛 철교 흔적 등 말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6/11 08:39 2013/06/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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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中

다음은 임진각 전망대에서 북쪽 도라산 역 방면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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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북쪽으로도 철조망이 쳐져 있지만 철조망 건너편은 비무장지대(DMZ)가 아니며 북한 땅은 더욱 아니다. 건너편은 그저 민통선 안쪽일 뿐이다.
과거의 경의선 철교와 지금의 경의선 철교의 위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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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에서 평화 공원으로 가는 길엔 이렇게 6·25 참전국 기념비가 있고, 아웅산 폭탄 테러 순직자의 위령비도 있다.
6·25는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현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전쟁이다. 6·25만치 선악 이념이 분명했던 전쟁은 흔치 않다.

오죽했으면 UN이 창설 이래로 거의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딱 한쪽 편을 들어서--당연히 대한민국 편-- 반대편을 적극적으로 퇴치하는 군사 활동을 했으며, 전세계 역사를 통틀어 이토록 많은 국가들이 오로지 한 자그마한 나라 편을 들었던 전쟁은 존재하지 않는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5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벌어진 불법 침략 전쟁에 대한 정당방위이기 때문에 그렇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전 등을 생각해 보아라. 미군이 개입했던 전쟁 중에 6·25만치 참전 명분이 깔끔하고 정당한 전쟁이 있었는지를. 굳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제3자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그런 이유 때문에 6·25는 여타 전쟁들과는 달리 미디어에서 다뤄지는 인지도가 매우 저조하다. 아예 the forgotten war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절대적인 선과 악 구도가 너무 명확하다 보니, 딱히 역사에 대한 재해석을 하거나 삐딱하게 풍자· 비판을 할 껀덕지가 없어서 잊혀졌다는 게 나의 짧은 생각이다.
이라크, 베트남 등에 비해, 6·25는 전쟁을 겪은 당사자가 경제 성장과 민주화를 거뜬히 이뤄 내고 G20 급의 선진국이 되어 있다는 점도 크게 다른 점이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나라에 대해 자부심을 충분히 가져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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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S. 트루먼.
원래 부통령이다가 프랭클린 루스벨트(FDR)가 급사한 뒤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며,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한국과의 인연도 각별한 양반이다.
그가 6·25 때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북한· 중공군을 완전히 격퇴하지 못했다”와 “한반도에서 또 핵이 떨어지고 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뻔했던 상황을 예방했다”라는 두 평가가 공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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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평화 공원을 살펴본 뒤, 우리 일행은 다시 역으로 돌아와서 도라산 행 열차를 탔다. 문산-도라산도 아니고 임진강-도라산 겨우 한 정거장 거리만을 이용한 것이다.

개인이 도라산 역으로 가려면 신분증을 제시해야 하며, 왕복 승차권 구입과 더불어 연계 안보 관광 패키지 신청도 같이 해야 한다. 예전에는 역 주변만 둘러보고 돌아오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은데 정책이 또 바뀐 것 같다.
이 지대의 관광 상품은 도라 전망대, 제3 땅굴, 통일촌 견학으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은 식사 시간을 포함하여 3~4시간 정도 걸린다.

역 주변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은 역시 보안 시설에서 온갖 사람들을 통제하는 헌병이어서 그런지, 다들 키 크고 체격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보다 10살 가까이 어린 20대 초반 나이일 텐데 말이다.

도라산 역의 옛날 사진을 보니 역명판의 서체가 목판체 계열이었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저건 코레일체도, HY울릉도도 아니라 윤 디자인에서 만든 월드컵체이다. 철도역에서 월드컵체를 볼 일이란 원래 전혀에 가깝게 없을 텐데 뜻밖이다.
역이 개통한 시기와 저 서체가 만들어진 시기가 비슷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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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라산 역은 출· 입구 관리 사무소와 세관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물론 현재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시설) 내부가 꽤 크고 넓다. 승강장 역시 KTX 한 편성 정도는 너끈히 세울 수 있어 보이는 규모이다.

이제부터는 사진 없이 한동안 설명만 좀 늘어놓겠다.
역에서 내린 우리 일행은 준비된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오른 뒤, 도라 전망대로 향했다. 여기는 민간 관광객에게 개방되긴 해도 엄연히 일종의 GOP이며 군사 시설이다.

날씨가 굉장히 좋았다. 이 전망대로 펼쳐진 곳이 바로 말로만 듣던 비무장지대이고, 북한 땅이 코앞이다.
저 멀리 말로만 듣던 대성동의 태극기 깃대가 보였다. 기정동 쪽은 깃대만 있는 줄 알았는데, 유료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니 펄럭이지 않을 뿐 인공기도 꽂힌 게 보였다. 게다가 북한 쪽 비무장지대 근처에서 서 있는 북한군 병사까지 보였다! 김일성 백성들도 머리 하나, 팔 둘, 다리 둘 달린 호모 사피엔스이긴 했다.

이게 내가 브라운관이나 LCD 같은 전자 기기가 아닌 매체로 북한 관련 시설물을 본 첫 경험이었다. 하지만 북한 쪽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는 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 날은 외국인 관광객도 굉장히 많았다. 미국인이야 그렇다 치지만 왁자지껄 떠드는 중국인들도 많았다.

도라 전망대 다음으로 우리는 말로만 듣던 제3 땅굴을 견학했다.
옛날에는 관광객들이 건물 수십 층에 달하는 높이를 걸어서 내려갔다가 올라와야 했지만, 지금은 승강 열차가 생겨서 편하게 왕래를 할 수 있다.

주요 소지품들은 사물함에다 맡기고, 헬멧을 지급받은 뒤 몇백 m 정도 거리를 산보하듯 다녀 왔다. 땅굴 입구 자체가 거의 DMZ 경계선 근처에 있고, 땅굴 내부를 견학할 수 있는 한계는 지상에서 군사 분계선이 200m도 채 안 남은 지점이 끝이다. 그 이상은 철조망과 콘크리트 벽, 굳게 잠긴 철문으로 봉인되어 있다.

땅굴은 키가 170cm가 넘는 사람은 허리를 굽혀야 할 정도로 높이가 낮은 편이었다. 안 들키게 병력 수송을 위한 정말 최소한의 크기로만 굴착을 한 셈이다. 땅굴을 파는 게 좀 힘드나.. 지하철이라는 게 처음 등장하고 전기 철도가 도입되었을 때 제3궤조 집전식이 괜히 쓰였던 게 아니었겠다 싶었다. 터널의 단면적이 작아도 되기 때문이다.

육로를 통한 남침 방법이 완전 원천 봉쇄되고 차단되자, 비열한 김 일성은 퀴퀴한 냄새가 나는 어두컴컴한 땅굴을 파라는 지시를 내렸다. 악한 통치자 밑에서 영혼이 완전히 황폐화된 채 사는 북한의 노동자와 군인들이 한편으로 가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땅굴은 여러 개 팠으면서, 북한은 정작 평양 지하철을 만들던 중에는 대동강 아래를 관통하는 하저 터널 건설에 실패했다니 참 아이러니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제3 땅굴은 1978년에 전땅크가 육군 제1사단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에 박 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를 받아 탐사 작업을 통솔하다가 끝내 발견했다. (...) 이 양반, 그래도 리즈 시절에 나라를 구하는 과업을 한 건 이뤘다.

우리가 주로 관광한 것은 이 둘이었고, 그 뒤엔 통일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좀 놀다가 다시 도라산 역으로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민통선 내부는 온통 농경지나 황무지, 군부대이고, 민통선 내부이다 보니 사람이 없이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황무지는 그냥 황무지가 아닌 게, 철조망이 둘러져 있고 지뢰 매설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었구나.

도라산 연계 관광을 마친 뒤에는 초청자를 따라 개인 명의로 두 곳을 더 돌아다녔다. 일단, 허 준 선생 묘지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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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통선 안에 들어와 있음을 나타내는 자동차 내비 화면 인증이다(텅 빈 지도!). 파주시는 임진강 건너편은 다 민통선 내부라고 생각하면 된다.

허 준 묘지는 아무나 곧장 갈 수 없다. 도라산 안보 관광과 마찬가지로 공인된 여행사를 통한 단체 관광으로만 갈 수 있으며, 개인 자격 방문은 민통선 내부 출입증을 갖고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만이 가능하다. 한 사람이 일행을 얼마나 인솔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몰고 오는 차량의 대수가 늘어나면 절차가 그에 비례해서 더 까다로워진다.

민통선이 생기기 전, 그러니까 조상 대대로 그 지대에 땅을 갖고 있었거나 그 지대의 땅을 산 지주는 국가로부터 출입증을 교부받는다고 한다. 물론, 출입 가능 지역이 정해져 있으니, 그 출입증만 있다고 해서 전국의 모든 민통선 지대를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여담이지만, 민통선 출입이 일반 커피라면 대성동 출입은 가히 TOP이다. 거긴 민통선뿐만 아니라 남방 한계선까지 넘은 최고로 위험한 DMZ(비무장지대) 안이고, 레알 군사 분계선이 코앞이기 때문이다.
거길 드나들려면 당일 신분증 제시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최하 두 주 이상 전에 방문 신청을 해서 신원 조회를 받아야 하며, 마을에 들어간 뒤엔 신분증을 아예 맡겨야 된다. 승용차에는 하늘색 천을 달아서 펄럭이게 하고, 유엔 사령부 소속의 군인으로부터 완전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으며 이동해야 한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8 19:34 2013/06/0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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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上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 나오시는 모 자매님은 고향이 파주 적성면이다. (그런데 제주도 출신인 형제님과 결혼을 하셨으니 그야말로 대한민국 최북단 거주자와 최남단 거주자가 만난 셈.)
이분은 성장 배경의 특성상, 어릴 적부터 파주 북부의 지리에 아주 밝고, 또 부모님이 민통선 출입증까지 갖고 계셨다.

본인은 이분과 같이 교제를 하던 중에 어째 이 주제로 얘기가 나왔고, 덕분에 하루는 이분의 가족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파주 경의선 라인 쪽으로 거창한 안보 관광을 같이 가게 됐다.
작년 여름에 갔던 평택 해군 기지 이후로 바이블 빌리버와 함께 하는 안보 관광 제 2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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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찍 승용차를 몰고 임진강 역으로 향했다.
강변북로와 서쪽에서 직결되는 자유로는 무려 10차선에 달하는 정말 넓은 도로였다.
과연 인천 공항 고속도로와 더불어 폭주족들이 스포츠카를 몰고 새벽에 난리를 부릴 만도 한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죽했으면 중간에 딱 한 번, 지점이 아니라 구간식 속도 단속기가 있을 정도이니 말 다 했다.
즉, 특정 지점 한 군데에서만 제한 속도를 넘는지 단속하는 게 아니라, 시작점부터 끝점에서 차량 번호와 진입 시각을 두 번 파악하는 단속 방식 말이다. 그 구간 사이를 너무 빨리 통과해 버리면 단속에 걸리니, 차들은 강제로 천천히 달릴 수밖에 없어진다.

서울과 멀어질수록 도로는 더욱 한산해졌다. 차선 수도 덩달아 줄었다.
옆에 강이 있어서 그런지 주변은 어느 샌가 짙은 안개로 확 뒤덮였으며, 차의 유리에도 성에가 꼈다. 좌우 주변의 경치가 거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뭐 날이 밝자 안개는 곧 걷히고, 다행히도 하루 종일 아주 맑고 좋은 날씨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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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역은 바로 옆에 관리인이 없는 무료 주차장이 있었고 주변에도 공간도 넉넉했다. 그러나 나중에 낮이 됐을 때는 수많은 관광객들이 세워 둔 차들로 인해 그 공간이 꽉 차고 빈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현재 경의선에는 문산 역까지 전동차가 다니고 있다. 문산은 1906년에 경의선이 처음 개통할 때부터 있었던 역이며 남북이 분단된 뒤부터는 수십 년간 경의선의 북쪽 종착역이었다. 문산 다음에는 곧바로 장단 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김 대중 정권 시절에 경의선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북한과 선로가 연결까지 되면서 21세기에 문산 이북으로 3개의 역이 새로 생겼다.

2001년에 가장 먼저 임진강 역이 생겼고, 2002년에는 드디어 민통선 안에 도라산 역까지 생겼다. 운천 역은 더 나중인 2004년에 문산과 임진강 사이에 생긴 임시승강장이다. 지역 주민의 교통 편의를 위해 만든 역이지만 어차피 전철이 문산까지밖에 운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리 유용하지는 않을 것 같다.

임진강 역 근처에는 임진각, 평화 공원 등 여러 볼거리가 많다.
위의 사진에서 교각만 놓인 옛 다리는 6·25 때 파괴된 원래 경의선 철교의 흔적이고, 그 옆에 놓인 새 다리가 바로 다시 놓인 경의선 선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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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각 평화 공원에는 '평화 열차'라 하여, 관광용 협궤 증기 기관차가 다닌다. 물론 생김새만 증기처럼 생겼고, 실제로는 기름으로 달린다.
나의 관심사는 (1) 이 선로의 궤간은 얼마 정도 될 것이며, (2) 남이섬에 있는 '유니세프 나눔 열차'와는 동일한 규격이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내 기억으로 평화 열차의 선로는 수인선 협궤(762)보다는 약간 더 작은 듯했고, 한 우진 님께서 남이섬 열차의 궤간도 640쯤 되는 듯하다고 추측하신 걸로 보아, 둘이 거의 동일한 규격이 아닌가 싶다.
눈짐작으로 이런 궤간을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도 철덕에게 필요한 능력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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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중단점은 경원선 신탄리 쪽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더라. 사실, 상술했듯이 경의선도 시설이나마 연결된 지는 10여 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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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도 유명한 '미카' 형 여객용 증기 기관차이다. 의왕의 철도 박물관과 더불어 임진각에도 한 량 전시되어 있다.
참고로 6·25 때 순직한 김 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도 이것과 같은 차종으로, 그 실물은 기관차뿐만 아니라 객차까지 그대로 대전 현충원에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미카'는 emperor를 뜻하는 일본어 '미카도'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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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분단의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아주 유명한 증기 기관차가 또 하나 있다. 바로 이분 되시겠다.
'마터' 형 화물용 증기 기관차. 이름부터가 mountain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산악+화물 컨셉으로 제작된 고출력 기관차이며, 1940년대에 일본에서 비교적 최근에 제조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생김새가 전통적인 미카, 파시 같은 열차보다 좀 이질적이다.

이 열차는 1950년 12월에 영문도 모른 채 북한 쪽으로 달리다가 경의선 장단 역에 정차 중이었는데, 열차와 수송 물자를 적군에게 뺏기지 않으려는 청야 전술에 의해 아군의 사격을 받은 거라고 한다. 그래서 그 쇳덩어리가 수백 발의 총알을 맞아 벌집이 되고 탈선하여 밖에 내팽개쳐졌다.

겨우 그게 목적이라면 열차를 다시 남쪽으로 돌려보내면 되지 않느냐 싶을 것이다. 허나 증기 기관차는 무슨 전후대칭 전동차 같은 열차가 아니기 때문에 전차대가 없는 역에서는 진행 방향을 그렇게 전환할 수 없다. 불가피하게 열차를 운행 불능화시킬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 때문에 장단 역은 완전 쑥대밭이 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은 비무장지대가 되었다. 그와 함께 이 기관차도 핏빛에 가깝게 새빨갛게 녹이 슨 상태로 무려 수십 년 동안 수풀 속에 버려져 있었다. 1990년대에 분단, 안보 관련 서적에는 이 기관차의 사진이 꼭 등재되곤 했다.

그러다 2004년이 돼서야 이 기관차는 등록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남쪽으로 가져와서 녹 벗기고 광 내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2009년부터 임진강 역 주변 평화 공원에 정식으로 전시되기 시작했다. 붉은색이 이제 갈색으로 바뀌었다. 단,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은색 도색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

이 열차를 당시에 운행했던 기관사는 한 준기(1927-2011) 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음, 이거 안보 관광으로 시작했는데 철도 얘기만 자꾸 나오는 듯한 느낌이다. ^^;; (거 봐, 철도와 안보 의식은 서로 별개가 아니다)

Posted by 사무엘

2013/06/06 08:40 2013/06/0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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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저수지 답사를 마친 뒤 다음으로 본인이 간 곳은 또 다른 철도 성지였다.

2. 철도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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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이제 내가 여기를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방문하는 날도 찾아오는구나! 그렇잖아도 의왕 역에서 철도 박물관까지 가려면 수백 m 이상 걸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주차는 공간이 아주 넉넉하고 요금 걱정도 없고 아무 문제 없었다.

예전에 철도 박물관은 겨우 몇백원 대의 비현실적이기까지 한 저렴한 입장료를 징수했으며 그나마도 철도 회원은 동반 1인까지 아예 무료 입장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가 보니 그런 대인배스러운 제도는 언제부턴가 없어져 있었다. 일반인은 입장료 2천원을 내야 하며, 철도 회원 혜택 같은 거 없다.

물론 난 철덕으로서 예전에도 여길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기를 또 찾아간 이유는, 여기가 반월 저수지로부터 10km가 채 안 되는 가까운 거리이기 때문에 겸사겸사 또 찾아갈 만한 명분이 성립하고, 개인적인 볼일이 좀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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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경부선 선로에 대한 좋은 전망을 제공하는 것도 철도 박물관으로서 장점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아까의 KTX 촬영지와 마찬가지로, 이 박물관의 근처에도 저수지가 있다는 점이다.

철도 박물관에서 본인은 부족했던 박물관 관련 사진을 찍고 자료를 수집했으며, 방문 기념으로 구내 서점에서 다음 아이템들을 질렀다. (정 용태 님, 보고 계신지? 레일러 14호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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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판매하던 철도 박물관 도록은 이제 절판되고 없었다. 있을 때 사 놓길 잘했다. 그 대신 동인지 <레일러>를 박물관에서 정기적으로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박물관 직원을 불러서 새마을호의 역사와 관련된 날짜가 두 군데 잘못 소개되어 있는 걸 고쳐 달라고 건의를 했다.
차량실에 새마을호 PP 디젤 동차가 1987년 7월 1일부터 운행을 시작했다고 소개되어 있는 걸 7월 6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로 새마을호 PP가 최초로 서울-부산 4시간 10분 운행을 시작한 것도 아니라고 얘기해 줬다. 그건 PP가 등장하기 전에 1985년 11월 16일부터 달성된 것이니까 말이다.

3. 오봉 역

철도 박물관 다음으로 승용차로 가 보지 않을 수 없는 철도 명소로는 오봉 역을 빼놓을 수 없다.
얘는 경부선에서 분기하는 지선인 남부 화물기지선의 끝에 있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여객 영업 없이 화물만 취급하는 역이다.
먼 옛날에는 경부선 전철 의왕 역의 이름은 '부곡'이고 오봉 역이 '의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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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박물관과 오봉 역의 거리는 4km도 채 되지 않는다.
입구에 경비실이나 차량 진입 차단기 같은 건 없는지라, 별 부담 없이 차를 끌고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단, “직원 차량 외 주차 금지”라는 압박을 주는 표지판이 있긴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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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건물은 이렇게 생겼다.
철덕들 중에는 아예 승강장 내부로 들어가서 사진 촬영을 한 사람도 있는 듯하던데 난 차마 그렇게는 안 하고 잠시 있다가 다시 나갔다. 그 대신 이런 근처의 선로 사진을 좀 남겼다.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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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과 부산 일대도 면적이 무척 넓고 철도 배선이 의외로 복잡하며, 항구나 공업 단지로 빠지는 지선 철도가 많기 때문에 승용차를 끌고 답사할 만한 곳이 무척 많을 것이다.

4. 김포 공항 근처

수도권 남부의 “반월 저수지-철도 박물관-오봉 역” 3대 명소를 아우르는 테마 여행을 이렇게 잘 마쳤다.
임무를 다 마쳤으니 이제 집에 갈까 생각했는데 아직 시간이 좀 더 남아 있었고, 철도를 출사한 날 비행기도 같이 출사하여 둘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래서 점심을 먹을 생각도 포기하고, 국도 1호선을 타고 서울 서부로 간 뒤 곧장 다시 김포 공항으로 향했다. 해가 지기 전에 가야 하니 말이다.

반월 저수지가 KTX 촬영의 명당이라면, 오쇠 삼거리는 비행기 출사의 명당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정말 공교롭게도 여기도 전철 김포공항 역으로부터는 3.2km 정도 떨어져 있다. 다만, 여기는 버스가 수시로 많이 지나다니는 편이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는 비교적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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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 주변의 흔한 보안 경고문.
여기는 시끄러운 비행기 소리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황무지이지만, 엄연히 국유지이기 때문에 민간인이 무단으로 이곳 땅을 이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래도 처음 와 봤을 때에 비해서는 주변에 이것저것 공사도 많이 진행 중인 것 같았다.
덕분에 주차는 샛길 인근에 아무데나 얼마든지 해도 되니 걱정할 것 없다.
여담이지만 이 공항 주변의 황무지 일대에는 군부대인지 예비군 훈련장인지 어쨌든 군사 시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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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여기 온 보람이 있었다.
지금 비행기가 놓인 저 활주로 말고, 왼쪽에도 활주로가 하나 더 있었으며 공항 내부의 비행기는 그 왼쪽 활주로에서 이륙을 하는 편이었다.
김포 공항에서는 아까 KTX보다도 더욱 자주, 수 분 간격으로 정말 시도 때도 없이 비행기가 이착륙했다.

이륙은 본인이 서 있는 공항 남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북쪽으로 한 관계로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하지만 착륙은 다행히 근접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치 UFO처럼 아주 멀리서 불빛만 어렴풋이 보이던 비행기들이, 형체와 비행 소음이 갈수록 커지더니 공항 담장 너머로 사뿐이 착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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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덕들은 비행기 한 대만 보면 보잉 7xx 같은 기종은 물론이고 소속 항공사 같은 것도 곧바로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의외로 여객기 말고도 소속이 어딘지 모를 터보프롭 경비행기 같은 것도 착륙하는 게 종종 목격되곤 했다.
그런 작은 비행기라면 모를까 중형 여객기 이상 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마찰로 인한 연기가 튀는 게 이 멀리서까지 보였다.

이곳에 공개하지 않은 다른 사진과 동영상도 많이 찍었다. 소기의 방문 목적을 달성했다.
내가 선 지점은 여전히 공항 담장으로부터 500m에 가깝게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그래도 비행기의 착륙 경로와 일직선상에 있고, 지대가 살짝 높은 덕분에 보다시피 공항 활주로까지 어렴풋이 보인다는 점이 좋았다. 다음에 또 촬영할 기회가 있을 때는 다른 장소도 탐색해 봐야겠다.

동영상들을 보니, 보잉 737급의 여객기가 내 머리를 지난 뒤, 활주로에 착지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23~25초였다.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에서 활주로의 착륙 지점까지의 거리는 정황상 거의 1km는 된다. 담장에서 활주로 사이에도 수백 m에 달하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착륙 직전 상태인 비행기의 주행 속도는 대략 시속 140~150km대는 된다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시간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퇴근 시간대가 되어 귀가하는 길이 도로 정체로 애로사항이 꽃폈을 것이다.
만약 그랬으면 난 정체 시간대를 피해서 그냥 밖에서 저녁을 먹고, 차에서 한두 시간 좀 자면서 아예 밤 9시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귀가하려 했다. 난 어차피 차에서 야영을 하는 걸 아주 좋아하니 말이다.
하지만 다행히 서울 외곽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만 좀 막혔을 뿐, 서울 시내에서의 자동차 전용 도로 주행은 그다지 최악의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무사히 잘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3/05/07 08:31 2013/05/07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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