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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의 재발견

5년 전에 했던 얘기를 오랜만에 다시 늘어놓자면, 본인은 일단 운동이라는 걸 굉장히 싫어한다.
괜히 고생스럽고 힘만 들고 딱히 성취감이 느껴지는 게 없고, 이걸 해도 들인 노력에 비해 딱히 체력이 향상되거나 건강이 좋아진다는 느낌이 '거의'(전혀는 아니겠지만) 안 들어서이다. 가성비가 안 맞다.

초중고 시절을 통틀어서 체육 시간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었다.
(1) 애들이 왜 이렇게 연예인에게 열광을 하는지, 그리고 (2) 공이라는 도대체 왜 차고 뛰어다니는지 뭔 재미로 하는지를 이해를 못 한 채 학창 시절을 보냈다.
구한말 때 서양 선교사들이 볼 차고 노는 걸 보면서 조선 양반들이 “ㅉㅉㅉ 하인을 시켜서 주워 오게 하면 될 걸 왜 저리 뛰어다니고 고생이냐” 라고 비아냥거렸다는 게 실화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어쨌든 그 양반들 심정은 이해한다.

하물며 등산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난 “어차피 내려갈 걸 왜 힘들게 올라가냐”라는 지극히 경제적인 사고방식의 신봉자이다.
난 어떻게 '운동 중독'이라는 게 있을 수 있는지를 이해 못 한다.

러닝 머신?
쭉쭉 달리면 서울 지하철 터널이나 중앙선, 경부고속선의 전경이 화면에 펼쳐지는 러닝머신이라도 있지 않다면 동기 부여가 안 될 것 같다.
그나마 난 술· 담배를 전혀 안 하고, 먹고 자는 걸 스트레스 없이 잘하고 지내며, 또 전철역에서 회사까지 편도로 3km가 좀 안 되는 거리를 자전거를 타는 게 최소한의 건강 유지 활동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체중을 줄이는 데 부족하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살 수는 없는지라..
미리 운동 안 해 놓으면 40대가 넘어서 고생한다는 반 협박성 얘기에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 얼마 전부터 가끔 등산을 시작했다.

이건 뭐 안 믿어지지만 어쨌든 반신반의하며 그물을 던지는 베드로의 심정과 같고(눅 5:5),
마지못해 일단 요르단 강에 가서 목욕을 한 나아만 장군의 심정과도 같다(왕하 5:13-14).
젊었을 때 실컷 개고생 해서 돈 벌어 놓고 늙어서는 병원비로 그 돈을 다 탕진하며 가족에게 민폐 끼치는 바보짓은 나도 하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북한산 정상에서의 맥북 인증샷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사진이다.

그랬는데 요즘은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는 차원에서 발상을 좀 바꿔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신체 활동을 귀찮하고 싫어하지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예외가 있다.

1. 난 운동을 싫어하지만 그렇다고 게으르지는 않으며, 성질이 급하다. 할일 없이 기다리는 것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싫어한다. 고로 평소에 달리기를 아무리 싫어하더라도, 파란불 신호가 곧 끝나 가거나 지하철 문이 닫히려고 하면 필사적으로 뛰어가서 건너거나 탄다.
2. 난 뭔가 동기와 의미 부여만 되고 나면 움직이는 것도 삽질로 생각하지 않으며, 얼마든지 한다.

그래서 2번 원칙에 의거하여, 등산을 괜히 삽질만 하는 운동이 아니라 여행과 지리 답사로 자가승화할 생각이다.
기왕 등산을 가는 거면 오르기로 한 산에는 어떤 의미가 있고, 여기 주변은 조선 시대엔 어떤 지역이었는데 나중에 어떻게 바뀌었고 우리나라 정부 수립 이래로 어떤 개발 역사가 있었는지 같은 걸 모두 공부를 하면서 가는 것이다.

예전에 청계산을 오르던 중엔,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에 C123 수송기가 성남 서울 공항에 착륙하려다가 안개 때문에 시야를 잃고 여기 근처에 추락해서 탑승자가 모두 사망했다는 표지판을 본 적이 있다. 그런 것들이 본인의 기억에 남아 있다.

또한 본인은 서울 교외의 그린벨트 지역에 대해서 굉장히 동경을 하고 있다. 지방도 23호선의 왼쪽에 있는 성남의 그린벨트, 그리고 서울 서초구와 강남구 최남단에 자리잡은 그린벨트 말이다. 철도가 없는 이런 오지들은 왜 분당이나 판교 같은 신도시와는 달리 개발되지 못했는지도 세세히 알고 싶다.
서울 남부의 산들, 그리고 분당의 동쪽을 가로막고 성남과 광주를 분리하고 있는 산들도 생각해 보면, 주변엔 가 보고 싶은 산들이 온통 널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초엔 타워팰리스가 내려다보이는 서울 강남 일대의 모 야산을 정상까지 오르고 왔다. 인터넷 항공 사진으로만 보던 곳을 실제로 가 보니 힘들지만 재미있었다.
타워팰리스와 구룡마을은 같은 시와 같은 구에 사는 사람끼리도 이 정도로 빈부격차가 존재한다는 걸 단적으로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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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은 이남과 이북이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한쪽 방향으로는 여러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는 반면,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는 없다. 건너편은 문화 유산과 군사 사실 보호라는 명목으로 능선을 따라 철조망이 빽빽이 쳐져 있다. 산 절반이 이렇게 틀어막혀 있는 곳은 청와대를 감싸고 있는 북악산 말고는 이것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난 왜 그렇게 됐는지, 건너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지만, 자세한 내막을 이 자리에서 얘기할 수는 없다. ㅎㅎ 직접 가서 보니까 역시 감쪽같이 잘 은폐해 놨더라.

하긴, 여기 말고도 서울 시내를 감싸는 산들은 다 이런 식으로 수도 방위를 위한 군사 시설이 조금씩 비치되어 있는 것 같다.
나보다 덜 헉헉대고 덜 쉬고도 더 빨리 오랫동안 산을 잘 오르는 사람들이 좀 부럽긴 했다.
그래도 등산을 조금이라도 철도와 연관지어서 덜 괴롭게 하는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서 만족스럽다.

끝으로, 높이 300미터 남짓한 산의 정상이 이 정도라면, 비슷한 높이인 와룡산에서 내려오는 건 일도 아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명 개구리 소년이라고 알려진 옛날 성서 초등학교 애들은 나쁜 흉악범에게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죽었지, 자기들끼리 스스로 길을 잃거나 조난 당한 건 확실히 아닌 것 같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19 08:27 2015/05/19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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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설 연휴 기간에 본인은 가족 전체가 동남아로 가족 여행을 떠났다. 여행사를 통한 패키지 관광이다.
부모님이 퇴직하셨고 본인을 포함한 자녀들은 아직 미혼이니, 지금 같은 시기가 온 가족이 같이 여행을 떠나기에 적절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외국 가는 비행기를 탄 지도 무려 6년이 돼 가고..
더 늦기 전에 여행기를 이제야 간단히 정리해서 올린다.

가족이 한꺼번에 움직인 덕분에, 지금까지 공항 철도나 리무진 버스로만 가던 인천 공항에 난생 처음으로 자가용을 끌고 가 봤다. 운전은 언제나 본인이 도맡아 했고.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공항의 장기 주차장엔 벌써부터 차들로 포화 직전이었는데, 가까스로 빈 자리를 하나 발견해서 차를 세웠다.

그렇게 기대를 품고 공항에 도착했으나, 베트남 항공 소속의 여객기가 정비 상태를 이유로 거의 10시간이 넘게 지연됐다. 관광 일정에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어차피 이건 크리티컬한 업무를 목적으로 나가는 게 아니고 인천 공항은 안 그래도 내부 시설이 굉장히 좋은 공항이니, 출국 도장을 찍은 상태로 탑승동에서 이렇게 오래 지내고 있는 것도 나름 색다른 경험이었다.

항공사 측에서는 처음엔 기다리는 동안 밥이나 먹으라고 식권 정도를 내 줬으나, 지연이 길어지자 결국은 사람들을 버스에 태우고 도로 여객 터미널 입국장으로 보내서 출국 심사를 취소시키고 인근의 호텔에다 승객들을 보내 줬다. 저녁 식사까지 무료로 제공해 주고..;; 비행기 하나가 지연되는 바람에 승객들도 불편했지만 항공사 역시 손해를 굉장히 많이 봤지 싶다.

덕분에 현지 호텔을 구경하기 전에 운서동 공항 신도시 일대의 호텔부터 먼저 구경하게 됐다. 주변에 아파트 말고 전원 주택들은 전망이 참 좋아 보였다. 뭐, 본인이야 노트북 PC가 있으니 기다리는 동안 프로그램도 짜고 글도 쓰면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어쨌든, 이런 우여곡절 끝에 밤 비행기를 타고 먼저 베트남 북부의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하노이의 탑'의 원조 국가에 왔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여기는 역사적으로 나름 프랑스를 이기고 미국까지 이긴 나라라고 자존심이 쩐다고 한다. 그리고 호치민을 정말 미치도록 숭상한다고.

베트남에서는 해안으로 건너가서 배를 타고 우리나라 제주도나 남해를 뺨치는 다도해와 동굴을 구경하고 맛있는 해물 요리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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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시가지의 모습. 우리나라는 택시가 기본적으로 2000cc급 중형인 반면, 여기는 경차가 주류이다.
하긴, 우리나라도 2, 30년 전에는 1500cc급도 안 되는 소형차인 포니가 택시로 제일 많이 굴러다니곤 했다.
그리고 이보다도 베트남엔 오토바이가 훨씬 더 많이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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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호치민 광장을 구경했다. 호치민 자체는 나름 인품을 갖춘 좋은 지도자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어쩔 수 없는 사회/공산주의 국가이더라. 구소련이 망한 지가 언젠데 낫과 망치 깃발 실물을 볼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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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약 1시간 반 동안 1000km남짓을 비행하여 캄보디아의 씨엠 립 공항에 도착했다.
이 공항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비행기에서 내린 뒤, 브리지나 셔틀버스가 없이 승객들이 활주로를 직접 걸어서 여객 터미널로 들어가야 하는 공항이다. 철도역으로 치면 선로를 그대로 횡단해야 하는 시골 간이역 정도?

날씨는 베트남보다 더욱 더워져서 견디기 힘들었다. "여기가 위도가 몇 도이고 자전축이 몇 도 기울어져 있지? 서울과 비교했을 때 햇볕을 받는 각도의 cos 값이 얼마나 차이가 나지?" 같은 별 잡생각이 다 들 지경이었다.
여기는 입국 관리 공무원에게 공식적인 비자 발급 비용 외에도 대놓고 1$씩 뇌물을 줘야만 심사대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_=;;

날씨도 더운데 앙코르 와트는 정말 핵심만 초스피드로 보고 돌아왔다. 요게 제일 먼저 만들어진 사원이고, 그야말로 캄보디아의 국기에도 그려져 있을 정도로 상징적인 유적이다. 캄보디아를 먹여 살리는 제1순위 관광 자원인데.. 이것도 처음 발견되었을 때와는 달리 굉장히 많이 파괴된 거라고 하니 참 안습하다.
서양 사람들은 처음엔 이걸 미개한(?) 동남아시아 사람이 만들었을 거라고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인의 후손이 만들었다고 우기기엔 표현되어 있는 종교관이 전혀 서양스럽지가 않은걸?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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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뿌리와 뒤엉킨 이 유적지는 아까 것보다는 더 나중에 만들어졌다. 앙코르 제국도 여러 시즌이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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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코르 와트 유적지는 굉장히 넓기 때문에 중간 중간엔 툭툭이를 타고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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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적지들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얼마나 더 화려하고 웅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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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도시인 씨엠 립은 6번 국도던가 외국인 관광객들이 주로 다니는 큰길만 벗어나면 곧장 그냥 황무지 깡촌이었다. 카누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서민들이 사는 수상 주택 단지를 구경하기도 했다. 이런 단지가 조성된 것에도 다 사연이 있다고 함.

물은 별로 깊지는 않지만 정말 처참하게 더럽기 때문에 저 물이 몸이나 옷에 묻는 일은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저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1년 365일을 살 수 있나, 생계는 어떻게 꾸리며 위생 문제와 먹고 입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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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캄보디아라 하면 잊을 수 없는 건 일명 '폴 포트'라는 미치광이가 벌였던 킬링필드 학살극이다. 희생자의 유골을 안치해 놓은 어느 납골당을 방문하고 거기 적혀 있는 옛날 사진과 안내문을 보기도 했다.

어떤 나라가 힘이 없어서 남의 나라의 식민지가 되고 나중에 독립조차도 자기 힘으로 스스로 쟁취한 게 아니라면, 결국은 한 외세가 물러난 뒤에도 다른 외세들의 이념 각축장이 되고 파란만장 기구한 역사가 이어지는 건 남의 일만이 아닌 것 같다. 특히나 그런 와중에 공산주의는 단순히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농민· 노동자(?)뿐만이 아니라 먹물깨나 먹은 지식인도 잘 현혹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결국 실현 불가능한 사상을 강제로 실현하려다 보니 인민들을 온통 바보 노예로 만들어야 하고 딴 생각 잡 생각을 못 하게 극도의 폭력과 공포로 통치를 해야 하고 종교도 말살하고 서로 감시와 밀고를 하게 만들어야 한다.
지도자의 우상화와 절대독재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김 일성이고 호치민이고간에 자기 우상화를 하지 말라고 유언을 했어도 유언이 당연한 듯이 씹히는 이유는.. 그렇게 우상화를 해야만 공산주의 체제가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가 매우 악한 사상인 이유는 "능력껏 벌어서 필요한 만큼/혹은 1/n만치 분배한다"라는 성선설을 제시해 놓고는 정작 그걸 실현하고 운영하는 방법은 철저하게 성악설에 기반을 두기 때문이다. 정직하게 필요악이라고 선을 긋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성선설 따위는 없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고찰을 한 사람이라면 반공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으며 반공 때문에 불가피하게 벌어졌던 필요악이나 부조리를 보는 눈이 한결 관대해진다.

이런 것들을 보고 느꼈다.
귀국하고 나니 공항의 주차난은 더욱 심해져서 이중주차에, 도로변 주차까지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다른 가족들이 수하물을 찾는 동안 본인은 먼저 밖으로 나가서 차를 여객 터미널로 가져왔다. 여객 터미널에서 장기 주차장까지는 수백 m 이상 떨어져 있으니까. 차는 깜빡 잊고 블랙박스를 켜 놓은 채로 추위 속에서 닷새 가까이 방치됐지만, 다행히 시동이 잘 걸렸다.

동일한 고속도로 구간에서 불과 1주일쯤 전에 짙은 안개 때문에 106중 추돌 사고가 발생했었지만, 지금은 안개고 뭐고 없이 도로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여행을 잘 마치고 돌아왔다.

Posted by 사무엘

2015/03/13 08:30 2015/03/13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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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 관광도 하고 식사도 한 뒤, 다음 남은 시간 동안은 철원 서북부의 민통선 이남 지대를 차를 몰고 다니면서 내 마음대로 답사했다.
우리가 전선 휴게소로 갈 때는 지방도 464호선의 동남쪽을 통해 민통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다음으로 답사하는 곳은 그 도로의 서쪽 구간에 있다. 그래서 민통선 밖으로 나갈 때 그쪽으로 바로 나가면 목적지에 훨씬 더 빨리 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했으며, 철원 동북-서북 외곽을 횡단하기 위해 다시 남쪽의 고석정으로 되돌아갔다가 국도 87호선을 거쳐서 다시 지방도 464로 갈아타야 했다. (전선 휴게소는 동북 외곽에 있음) 동선이 대략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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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쉬어 가는 코너다. '오덕'의 압박..;;
하긴 그래도 야동리보다는 낫다. 옛날에 사람 중에도 이 오덕이라는 분이 계시기도 했고.
차 안에서 밖을 촬영한 것이어서 화면이 좀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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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말로만 들었던 백골 부대 백골 구조물을.. 국도 43호선상에서 실제로 봤다..;; (저건 내가 직접 찍은 사진은 아님.)

자, 내가 동선의 삽질까지 감수하면서 찾아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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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도 87과 지방도 464가 만나는 월하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가면 '한다리'라는 자동차 교량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남쪽) 방면으로 한 200m쯤 떨어진 곳엔 옛날 금강산선 철도의 교량이 기둥만 남아 있다. 이걸 현장 답사했다.
그 옆을 보면 언덕이 두 동강 나기도 했을 정도로 옛날에 철길이 있었다는 걸 유추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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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한다리로부터 3km 정도 동쪽으로 더 가면.. '대위교'라는 교량이 나오며, 역시 여기서도 오른쪽을 보면 한다리보다 더 온전한 형태의 금강산선 교량이 남아 있다! “금강산 가던 철길!”이라는 글자까지 있음을 주목하시라.
이걸 직접 발견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을지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으시겠는가? 자동차는 이런 걸 답사할 때 쓰라고 만들어진 물건인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면 나보다 어린 친구가 차도 없이 철원까지 대중교통으로 찾아간 뒤, 민통선이 코앞인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걸어서 답사한 경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빠르고 편안하게 찾아갔는가? 완전 양반이다.
한다리, 대위교 근처에 있는 교량과, 전선 휴게소 근처에 있는 교량을 지도에서 찾아서 한 선분으로 이어 보면, 옛날에 금강산선의 선형이 대략 어떠했을지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대위교 인근에는 '철길가든'이라는 식당이 있고, 또 민통선 구역으로 들어가는 초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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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교까지 간 뒤 본인은 차를 돌려 서쪽 백마고지 역으로 향했다. 지도를 보면 국도 87호선이 90도 꺾이는 지점이 있는데, 사실 길이 그것밖에 없는 건 아니다. 다른 방향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가는 길일 뿐. 그리고 바로 그 교차점에 그 이름도 유명한 노동당사가 있었다.

철원이 북한 치하에 있었을 때 그들이 후딱 지어 사용하던 일종의 관청 건물이다. 근대 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22호. 얼마나 튼튼하게 만들었으면, 6·25 때 주변의 다른 건물들은 폭격 때 다 폭삭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쟤만 그래도 뼈대는 저렇게 온전히 남았을 정도라고 한다.

우리는 조선 총독부 청사나 서대문 형무소를 기억하는 것만큼이나 이 건물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여기는 북한 공산당이 양민을 수탈하고 애국 우파 인사들을 체포하고 고문하고 죽이던 악마의 소굴이었다. 공산주의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그걸 강제로 실현하기 위해, 사람들을 감시· 억압하고 거짓 선동하고 자유를 빼앗는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악랄하고 잔학한 만행을 저질러 왔다.

남산 안기부? 남영동 대공분실? 노동당사의 악랄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는 될까 싶다. 내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는 분들은 절대악과 필요악을 분간 못 하는 오류를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공산주의자를 상대로 빨갱이라는 극단적이고 경멸적인 호칭이 괜히 생긴 게 아니었음을 알아야 한다. 북한은 순수한 의미에서의 공산주의 국가는 아니겠지만,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공산주의자가 사용해 온 악한 방법론과 배경 사상은 오늘날까지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사악한 반국가단체일 뿐이다. “우리나라에도 공산당도 허용돼야 진정한 민주주의..” 운운하는 건 정말 역사와 현실을 모르는 극도의 무개념· 무지의 소치이다..

오해가 없게 말씀드리자면, 나의 정치 성향은.. 악의 세력으로서 본질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북한 수뇌부와 잘 검증된 과거 역사 팩트에 굳건한 뿌리를 두고 있다.
그것보다 훨씬 덜 중요한 겨우 무슨 새누리당이니 민주당이니 일베 오유 같은 것에 뿌리가 있는 게 아니다.
달랑 진보냐 보수냐, 성장이냐 분배냐 그딴 것만을 논하는 거라면 정치색 같은 걸로 논쟁하고 싸울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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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각은 벌써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서쪽으로 수 km를 더 달려 도착한 우리의 마지막 목적지는 지난 2012년 말에 개통한 경원선의 북쪽 종점인 백마고지 역이었다. 근처에 백마고지 유적지가 있기도 하다.

원래 옛날에는 백마고지 역 일대도 민통선 지대였는데 나중에 해제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가면 어차피 또 민통선을 만나게 된다. 역 주변엔 걸어서 가 볼 만한 건 없다시피하다니, 연계 교통수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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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원선은 경의선과는 달리 남북 연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선로가 심지어 민통선 안 구간에도 못 들어가고 이렇게 딱 끊어져 있다. 경의선 도라산 역은 잉여롭긴 해도 출입국 사무소가 있고 승강장에서 북쪽으로 쭉 이어진 선로를 볼 수 있었던 반면, 이곳은 단촐하고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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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신탄리 역 이북에 철도 중단점이 있었는데 그걸 그대로 옮긴 건 아니고.. 철도 중단점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 이걸 실물을 직접 보면서 카메라에 담고 싶었다. 승차권이나 입장권 없이도 승강장과 선로 끝에 슬쩍 들어가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철원에서 철도 and/or 안보와 관련된 대부분의 명소들을 답사하면서 철덕력을 키웠다. 그리고 대한민국 땅에 주어진 자유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하는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올 때는 국도 3호선을 이용했다. 길이 상당 부분 경원선 철길과 겹치다 보니 돌아오면서도 철도역과 철길 구경을 덤으로 할 수 있었다. 도로 정체 때문에 돌아오는 길은 2시간이 좀 넘게 걸렸으며, 아침 7시 반으로부터 정확히 12시간 뒤인 저녁 7시 반에 서울에 무사히 귀환했다.

돌아오는 길엔 친구들은 너무 피곤해서 간식을 먹을 기력조차 없이 차에서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운전대를 잡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다. 단지 집에 도착한 뒤에 침대에 쓰러져서 시체 모드가 됐을 뿐.

철저한 준비 덕분에 길에서 전혀 헤매지 않았으며 시간도 적절히 분배하면서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장소를 답사할 수 있었다. 인파가 바글바글 몰리는 데가 아니어서 분위기가 좋았으며, 완벽에 가깝게 좋던 날씨 역시 성공적인 여행을 더욱 빛나게 해 주었고 말이다.
다음날 교회에서는 같이 간 친구들의 부친께서 한 분씩 날 개인적으로 불러서 좋은 구경을 시켜 주느라 수고 많았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4/05/14 08:24 2014/05/14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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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주변은 경치가 몹시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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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철원 평야에서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 공급이 원활해야 하는데, 북한에서는 철원을 빼앗긴 뒤 물귀신 심보로 철원으로 가는 무슨 강의 물줄기를 끊어 버렸다고 한다. 저수지는 그 난관을 극복하게 위해 만들어진 거라 함. 물론 여기는 낚시꾼 내지 철새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작가들도 많이 찾아온다.

워낙 날씨가 맑고 미세먼지도 없어서 북한 땅까지 어렴풋이 보였다. 다만, 이 지역엔 개성 공단이나 기정동 마을 같은 명물이 없는 관계로, 파주의 도라 전망대만치 북한 쪽에 딱히 볼거리는 별로 없다. 그냥 천혜의 자연만을 감상해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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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인터넷 사진으로만 보며 그리워하던 월정리 역 복원 건물을 드디어 직접 보게 되었다. 오오!! ㅠ.ㅠ 감사와 찬양이 절로 흘러나왔다.
난 역 건물을 팔로 꼬옥 끌어안은 채 감격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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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구내의 선로에는 두 가지 중요 유물이 있는데, 하나는 코레일 4001호 디젤 기관차이고, 다른 하나는 6·25 전쟁 중에 우리 아군의 폭격을 받고 부서진 어느 증기 기관차이다.
4001호 디젤 기관차는 굉장히 옛날 차량이긴 하지만, 월정리 역과 무슨 관계가 있으며 왜 여기에 전시되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거기 현장에서도 딱히 설명이 돼 있지 않다.

현재 임진각에 가 보면, 알다시피 경의선 장단 역에 있던 녹슨 증기 기관차가 녹을 최대한 벗겨 내는 가공을 거친 뒤 전시되어 있다. 그건 총격 때문에 표면이 벌집이 된 것만 빼면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편이며, 그때 그 기관차를 몰던 기관사가 누군지까지도 알려져 있다. 그 기관차는 '마터'라고 불리던 산악 화물용의 굉장한 대형 기관차였다.
그러나 월정리 역 인근에 있는 '경원선' 기관차는 총알이 아니라 포탄이라도 맞았는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 으스러져 있다. 이것도 마터 형 기관차인지는 역시 모르겠다.

예전에도 얘기를 한 적이 있나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증기 기관차는 원래 검정색이다. 붉게 녹이 슨 모습 아니면 옛날의 흑백 사진만 봐 왔기 때문에 상상하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이 지금은 온통 녹이 슬어서 퍼렇지만, 원래는 그거야말로 갈색이다. 평양에 있는 갈색의 김씨 부자 동상과 비슷한 색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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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리 역의 바로 옆에는 철원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을 박제해서 전시해 놓은 자그마한 박물관이 있어서 거기도 잠시 둘러봤다. 동물은 원래 화약 냄새를 잘 맡는 편이지만, 지뢰를 밟아서 다리를 잃은 동물도 있다고 한다.

이렇게 매우 유익한 구경을 한 뒤, 버스는 민통선 안에 있는 옛 철원 역 부지와 몇몇 옛 건물들 흔적을 지나갔다. 딱히 정차하지는 않고 가이드가 설명만 해 줬다. 일제 강점기 내지 북한 정권이 잠시 쓰던 건물 되시겠다.

그 뒤 버스는 처음에 입장할 때 거쳤던 민통선 초소와는 다른 초소에서 민통선 구역을 빠져나갔다. 관광버스가 아니고 민통선 패스를 갖고 있지도 않은 일반인이라면 이건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들어갔던 초소에다 신분증을 맡기기 때문에, 반드시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가야 한다. 이 점을 내가 오해한 관계로 추후의 여행 과정에서 약간 착오가 있었다.

전체 관광은 3시간이 약간 넘게 걸렸다. 우리 일행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로 돌아왔다. 시각은 1시 40분쯤. 이제 점심을 먹으러 '전선 휴게소'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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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 휴게소! 휴게소라고 간판은 걸려 있지만, 이곳은 잠깐 거쳐 가는 장소가 아니라 엄연한 목적지, 아니 종점 역할을 하는 식당이나 마찬가지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민통선 안에 있으면서 민통선 밖 민간인들을 상대로도 영업을 하는 식당이다. 식사 메뉴는 메기 민물 매운탕이 유일하며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근 군부대에서는 회식을 여기서 할지도 모르겠다.

파주 임진각 쪽에서는 민통선 안에 통일촌이라고 불리는 마을이 인근에 있는지라, 안보 관광 때 거기서 식사를 하는 스케줄도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전선 휴게소는 그런 식으로 연계가 돼 있지는 않다. 위치도 좀 외딴 곳이며 수십· 수백 명의 관광객을 한 번에 상대할 정도까지의 규모도 안 되고 말이다.

왔던 길로 돌아가서 국도 43호선을 탄 뒤, 철원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는 지방도 464호선을 갈아탔다. 그 길로 끝까지 가면 길이 더 없이 끊어진 것처럼 나오는 지점이 있는데, 거기가 바로 민통선 초소이다. 통과 허가를 받으려면 최소한 당일 아침에 식당에 전화해서 인원 수를 말하고 식사 주문을 한 뒤, 초소에서는 “전선 휴게소 방문”이라고 얘기해야 한다.

대표자의 이름· 연락처를 적고 신분증을 맡기고, 동승자들의 이름과 생일 정도를 적어서 제출하면 초소에서는 임시 출입증과 차량 식별용 깃발을 준다. 출입증은 운전석 앞유리에다 두고 깃발은 옆유리에다 끼워서 펄럭이게 해야 한다.
참고로 식당은 민통선 초소에서도 거의 3km가 넘게 떨어져 있다. 그리고 철원 북쪽 외곽에서 들판이 아니라 수풀이 우거진 곳이 있다 치면 십중팔구 거긴 지뢰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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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도 텅 빈 내비 화면으로 민통선 진입을 인증하련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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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지간해서는 개인 블로그에다 맛집 광고나 음식 인증샷 같은 건 좀체 안 올리는데.. 여기 민물 매운탕은 정말 별미였다. 한탄강에서 주인장이 직접 잡아서 요리한다는 생선은 살이 입 안에서 살살 녹았으며 곁들어진 수제비와 채소는 담백했다. 국물은 딱 적당히 구수하고 얼큰했으며 너무 맵거나 짜지 않았다.
먼 길을 힘들게 찾아간 보람이 있었다. 같이 간 일행들도 이를 인정하면서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그리고 전선 휴게소 근처에는 진귀한 구경거리가 하나 있었으니, 그건 바로 금강산선 옛 교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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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경치도 몸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 인파가 북적거리지도 않고 우리밖에 없으니 분위기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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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11 19:34 2014/05/11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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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3년 5월 4일, 어린이날을 앞두고 본인은 교회 지인 가족의 초청으로 파주 임진각 일대에 안보 관광을 갔다 왔다.
그 경험에 힘입어 그로부터 거의 정확히 1년이 지난 2014년 5월 3일엔, 본인은 교회 친구들을 데리고 철원에 안보 관광을 직접 갔다 왔다.

본인은 철덕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철원을 오래 전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군사분계선의 주변을 지도로 살펴보면, 판문점이 있는 서쪽이야 평지이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빽빽한 산악 지형이 이어진다. 그런데 수풀을 머리숱에다 비유했을 때 땜통 같은 지역이 강원도에 동서로 딱 두 군데 있는데, 하나는 '평야'가 있는 철원이고 다른 하나는 분지처럼 생긴 양구이다. 북한 역시 이 두 지역을 염두에 두고 과거에 남침 땅굴을 팠었다(철원 쪽으로 #2를, 양구 쪽으로 #4를).

철원은 예로부터 천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곡창 지대요 한반도 중부 지방의 교통의 요지이기도 해서 전략적 가치가 높았다. 6·25 휴전 이후에 서울이 북한과 더욱 가까워진 건 좀 ㅎㄷㄷ한 일이지만, 그래도 치열한 전투 끝에 철원을 수복해 낸 것은 굉장한 쾌거였고 김 일성도 이를 애석해했을 정도라고 한다. 여긴 나름 38선 이북이기 때문에 분단 직후 6·25 전쟁 전까지는 북한에 속해 있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건 여기에 철도가 있기도 했다는 뜻이다. 경원선이 지났고 금강산 관광 철도도 있었다. 우와..!
그래서 본인은 철원에 있는 다른 자연 관광지나 유적지들은 제쳐 두고 오로지 안보 그리고 철도와 관련된 곳을 골라서 답사하려고 마음먹었다. 로드뷰, 항공 사진 등을 참고하면서 모든 스케줄을 짠 뒤, 드디어 답사를 떠났다.
동반자가 없으면 나 혼자라도 차 끌고 가려고 생각했으나, 다행히 교회 친구를 세 명이나 꾀어(?) 내는 데 성공했다. “저런 델 도대체 왜 가 ㄲㄲㄲ” 같은 놀림과 비아냥은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자매까지 한 명 불러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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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반, 떠나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토요일 이른 아침엔 도로가 아주 한산하고 소통이 원활했다. 날씨도 아주 쾌청하고 좋았다.
동부 간선 도로를 탄 뒤 의정부에서부터 국도 43호선만 죽어라고 타고 올라가면서 드디어 철원에 도착했다. 북쪽으로 갈수록 군부대가 수시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편도로 약 85km를 달렸다. 고속도로의 혜택을 받을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가는 데 2시간이 넘지 않을까 예상했지만, 그래도 1시간 반 만에 잘 갔다.

처음 간 곳은 고석정 관광 사업소였다.
고석정 계곡은 예정에는 없이 시간이 남아서 들른 것일 뿐이었는데.. 경치가 끝내주게 아름다웠다. 하루 종일 날씨도 굉장히 좋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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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예매를 해 둔 패키지 안보 관광을 떠났다.
평일에는 허가를 받은 뒤에 민통선 안으로 자가용을 몰고 들어갈 수도 있는 반면, 인파가 몰리는 주말에는 셔틀버스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린 학생들까지 포함해 44개 좌석이 꽉 찬 만석이었다. 하지만 작년에 파주· 임진각· 도라산 역 일대는 외국인들도 많고 민통선 내부까지 완전 바글바글했던 반면, 여기는 우리 관광객 말고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으며 조용하고 한산한 편이었다. 그 이유로는 여기는 파주보다 서울에서 더 멀고 교통이 불편하며, 또 황금연휴여서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놀러 갔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진각으로 가는 길은 경의선 철도뿐만 아니라 자동차 도로도 신호 대기가 없는 자유로가 시원스럽게 뚫려 있다. 그러나 철원은 그렇지 않으니까 말이다.

버스는 지방도 464호선의 모 구간에서 좌회전하여 민간 지도에 나와 있지 않은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서부터는 초소를 지날 때마다 군인이 수시로 탑승하여 탑승 인원 숫자가 맞는지 검문을 했다. 그리고 버스는 토교 저수지보다도 더 북쪽으로 남방 한계선으로 추정되는 철조망을 따라 쭉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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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제2 땅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제1 땅굴이 발견된 지 반 년이 채 되기 전에, 거기서(연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더 깊고 더 큼직한 땅굴이 발견되었으니 국가적으로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제3 땅굴은 열차로 드나드는 진출입로가 뚫려 있으며 제4는 터널 안까지 열차로 다닐 수 있는 반면, 제2는 땅굴 출입과 관련된 그 어떤 동력 시설도 없다. 그리고 내부의 길이도 제3 땅굴보다 더 길다. 그러니 오갈 때 발품을 좀 팔아야 한다.
땅굴 내부는 사진 촬영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땅굴이라는 건 땅 속에 뭔가 빈 공간이 있다는 걸 감지하는 것이 별개이며, 그걸 찾아서 저지하려고 실제로 파 내려가는 게 또 별개이다. 우리나라에서 뚫은 출입로 땅굴에 들어가면, 북쪽으로도 길이 있고 남쪽으로도 길이 있다. 북쪽은 북한이 파 내려온 from 방향이고, 남쪽은 걔네들이 의도한 목적지 to 방향이다. 이 땅굴의 경우, 남쪽은 더 진행할 수 없게 길이 막혀 있고, 북쪽으로 약 500m 정도, 남방 한계선에 2~300m 앞까지 접근한 곳까지가 관광객에게 개방되어 있다고 한다. 사실 그건 제3 땅굴도 마찬가지다.

이 땅굴의 시점은 도대체 북한 어디에 있는 걸까? 쟤네들은 지하에 무슨 짓을 해 놨는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한반도가 통일되어서 땅굴도 남쪽 종점과 북쪽 종점이 모두 한데 뚫린 채로 역사 교육 현장으로 개방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통일이란 연방제니 나발이니 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김씨 부자 동상을 무너뜨리고 주체사상을 완전히 지워 버리는 제대로 된 통일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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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 땅굴을 탐사하고 저지하는 과정에서 이런 희생자가 있었다. 저기 나오는 계급은 아마 최소한 2계급 특진은 받은 것일 테고, 실제로 작업을 한 사람들은 다 병사 신분이었을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제1 땅굴은 발견 직후 지하에 있던 북한군 인부와의 총격전으로 인한 전사자가 있었고, 제2 땅굴 탐사 중에 발생한 전사자는 내부에 있던 지뢰를 밟고 산화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제3 땅굴을 탐사하던 때는 딱히 사상자가 나오지 않았으며, 제4 땅굴을 탐사할 때는 사람 대신 군견이 희생되었다. 땅굴이 발견되고 위험 요소가 완전히 제거되어 안보 관광지로 개방되는 것조차도 다 이런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 덕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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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 제2 땅굴을 발견하는 데에도 귀순자의 힌트가 기여했었구나.
땅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은 제3 땅굴 소개 자료에도 거의 똑같이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쉽게 말해 북한은 NATM 공법으로 굴을 팠고, 우리나라가 그 땅굴을 관통하기 위해 따로 굴을 판 건 실드 공법과 비슷하다는 얘기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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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이면 땅굴이 발견되기 한참 전이었고 서울 근처와 강원도 일대에 온통 무장공비들이 출몰하던 무시무시한 시절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때부터 벌써 땅굴을 팔 생각을 하고 그 땅굴의 남한 쪽 출구를 어디쯤에다 낼지를 생각했다니 이건 뭐 흠..?
그나저나 저 사살된 간첩의 임무가 그런 것이었다는 건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궁금하다.

땅굴 구경을 마친 뒤, 남방 한계선과 DMZ가 코앞인 평화 전망대로 갔다. 동송 저수지 근처이니, 구글 지도에서 위치가 어디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나저나 철원에는 다른 곳에 승리 전망대도 있다고 그런다.)

(to be continued)

Posted by 사무엘

2014/05/09 08:21 2014/05/0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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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삼일절엔 두 가지 볼일이 있어서 합정 역 일대를 방문했다.

먼저, 서울여대 시각디자인과 1, 2학년 학생들이 주최한 “서울여자, 취미는 한글” 전시회를 관람했다.
한 재준 교수님의 한글 타이포그래피· 레터링 수업을 듣고 결과물로 만든 작품을 전시한 듯하다.
장소는 <벼레별씨>라는 카페 건물인데, 합정 역 7번 출구로 나온 뒤 뒤돌아서 우리 은행 건물이 있는 모퉁이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 쭉 300미터가량 직진하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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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작품에 대한 설명은 땅바닥에 쓰여져 있는 게 인상적임.
한글은 앞으로는 가변폭 글꼴이 대세가 돼야 하며, 영문 글꼴처럼 다양한 metric을 지닌 들쭉날쭉 창의적이고 기상천외한 글꼴이 많이 나와야 하리라 여겨진다.

원래 3월 2일까지 하기로 예정됐던 전시가 3월 8일까지로 연장돼서 아직 시간이 며칠 더 남아 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가 보시길 바란다.

혹시나 해서 독자 여러분께 당부하는데... 내가 북한 비판하고 종북들 까는 글, 철도 찬양하는 글을 블로그나 SNS에 올리는 빈도가 지나치게(?) 잦아진다고 해서, 내가 내 본업을 잊어버린 건 절대로 아니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시길.
오히려 내 진짜 본업과 생업은 입이 아닌 행동으로 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잠수 탄 상태에서 묵묵히 수행하고 있다.

자, 합정동까지 온 김에 이거 다음으로는.. 근처의 유명한 기독교 유적지를 들렀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지와 선교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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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서울이 강북 4대문 안으로 완전 코딱지만 하게 작던 시절엔, 강변은 완전 외곽 변두리였다. 군사 요새가 있고 사형장, 묘지 같은 거나 있을 정도였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양화진은 바로 그런 곳이었으며, 그래서 묘지도 있고 바로 근처엔 절두산 같은 종교 성지도 존재한다(난 거기까지는 안 갔음).

우리나라는 천주교가 먼저 전래된 뒤에 흔히 개신교라고 불리는 기독교 교파들이 구한말에 들어왔다.
자국 정부에 의한 박해와 순교는 천주교에 더 많이 남아 있는 반면, 기독교는 민간 차원에서의 정서적 왕따 말고 딱히 공권력에 의한 박해는 없었던 듯하다. 워낙 나라가 망해 가는 막장 시기에 들어와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다만, 성경 번역 역사는 천주교가 아닌 기독교 쪽이 확실한 우위를 쥐고 있다. 그리고 일제와 북한 공산당에 의한 박해 역사도 기독교의 비중이 더 높다. 이것이 내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한반도 교회사이다.

단군의 후손들은 기독교를 전파받은 여러 민족들 중, 일찍부터 자국어 성경이 잘 완역된 좋은 경우에 속한다. 그리고 조선인들은 일찍부터 성경의 중요성을 알았으며, 선교사들이 놀랄 정도로 성경 공부에 완전 목숨을 걸기도 했다고 함.

“성경 번역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은 사라질 뻔했던 한글을 구원하셨고, 그 한글은 복음에 봉사하도록 부름받아 태어났다.” (전시관 안의 동영상 끝에 나오던 자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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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자화자찬 아전인수식 해석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심지어 1907년의 평양 대부흥조차도 제대로 된 회개와 부흥이 아니라 은사주의 난장판이었을 뿐이라는 의혹도 있는 마당에...;;
다만, 이왕 이런 성경적인 배경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없음'이 없고 변개되지 않은 성경이 한반도에 들어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매우 큰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묘지나 기념관은 일단은 기독교 색깔이 80%이나, 가끔 천주교 쪽 얘기도 나오더라. 묘지에도 천주교 특유의 그 P와 X를 겹쳐 놓은 심벌이 묘비에 새겨진 무덤이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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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니, 일부 묘비엔 아예 프리메이슨 컴퍼스와 G 표식까지 있기도 했다. 이 불모지에 와서 복음 전하고 병원과 학교 세우는 등 좋은 일을 하고 간 사람이긴 하나, 저건 정체가 도대체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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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말로만 듣던 호머 헐버트 박사의 묘지를 드디어 처음으로 봤다. 감개무량했다. (프로필을 보면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박사 학위가 있는 거 같지는 않은데, 국내에서는 으레 박사 호칭이 붙더라)
한국과 한글을 워낙 사랑했던 분인지라 한글 학회에서도 완전 띄워 주고 존경하고 추모하는 바로 그분이다.

석 호필 박사--저 사람은 정말로 수의학 박사 맞음--가 대한민국 독립 유공자로서 서울 현충원에 묻혔는데 헐버트가 그보다는 격이 낮아(?) 보이는 이곳에 묻힌 이유는...
6·25가 발발하기도 전에, 그 서울 현충원이 만들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서 그냥 여기에 묻혔고, 굳이 이장될 이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외국인 중에 대한민국의 영원한 은인 1호인 분이다.

이렇게 유익한 시간을 보내고 왔다.
용인 산골짜기에 소재한 총신대 신학 대학원 근처에 있는 기독교 순교자 기념관도 언젠가 한번 가 보고 싶어졌다.
양화진이 순교하고는 상관없이 그냥 외국인 선교사 위주라면, 저기는 실제로 박해를 받은 자국인 크리스천들의 일대기를 다루는 듯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4/03/04 08:32 2014/03/04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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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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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명이 그렇게 일본인 몇 명하고 목숨을 맞바꾸는 식으로 백 날 노력해 봐라. 독립이 되나? 조선의 대외 이미지만 나빠지지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뿐이다.” 이렇게 무력 독립 투쟁을 평가절하하는 편인 사람들이 과거에나 지금에나 있다. 외교파이던 이 승만도 딱 저런 견해를 지녔던 사람이고... 비록 그 생각 역시 일리가 있긴 하지만, 실제로 폭탄을 들고 무장 투쟁을 했던 독립 운동가들도.. 그런 것 정도는 다 예상하고 감안했던 사람이다. 그러고도 자기 목숨을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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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진짜 윤 봉길이 맞는지 논란이 일기도 했던 사진이다.
실제로 윤 의사는 체포 직후부터 일본 헌병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해서 피떡이 된 상태였지만, 일본은 대외적으로 신사다움(?)을 강조하기 위해 다른 멀쩡한 사람을 정중히 끌고 가는 사진을 대외적으로 내보냈다고 그러는데..
하지만 윤 의사의 후손 중 어떤 분은 저게 윤 의사가 맞다고 증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위의 사람하고 아래의 사람은 아무래도 얼굴색을 포함해 인상이 좀 달라 보인다. 정말 동일 인물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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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으로 나가면 윤 봉길 의사 동상이 있다. 날씨가 온통 흐리고 비가 오기 직전이어서 색감이 저렇게 됐다.
그런데 동상의 얼굴은 사진으로 보는 윤 의사와는 인상이 좀 다르게 느껴진다.
이것으로 기념관 관람 후기는 마치고, 숲 남부의 기념비/위령비 인증샷을 남기겠다.

4. 양재 시민의 숲 남부에 있는 3대 비석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유격 백마 부대 충혼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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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왜 10월 1일을 국군의 날이라고 기념하는지 아시는가? 이 날이 바로 우리 국군이 6· 25 때 38선을 넘어 이북 땅으로 최초로 진군한 날이기 때문이다.

1950년 6· 25 전쟁이 터진 직후, 잘 알다시피 우리나라는 겨우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고, 대통령이 부산까지 피난을 가야 할 정도로 나라가 없어질 위기에 몰렸었다.
그러나 UN군이 참전하고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고, 9월 28일에 서울을 수복·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빼앗긴 지 딱 3개월 만이다! 그리고 10월 1일엔 38선을 넘었으며, 그 달 19일엔 평양을 점령했다.
11월쯤에는 국군이 압록강과 두만강 물을 떠다가 대통령에게 진상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김 일성 패당 무리들을 완전히 추방하고 대한민국 자유 통일이 눈앞에 있었는데..

하지만, 하지만...
그 당시 중국도 아닌 중공군이 북한의 원군으로 참전하면서 국군과 UN군은 평안도 일대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안북도 일대에서 몇몇 학생과 젊은이들이 정식 군번도 없이... 옛날 식으로 말하자면 '의병'을 조직하여 북한군과 교전을 벌였다. 2600여 명의 병사들 중 500여 명(552명이라 함)이 전사했으나, 이들은 정말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들의 전적이 없었다면 1· 4 후퇴도 타이밍이 더욱 앞당겨져서 12· xx나 11· xx 후퇴가 됐을지도 모른다.

이 기념비는 바로 그들의 공적을 기리는 기념비다. 현장에 게시된 설명문은 이렇게 끝난다.
“길 가는 손들아! 잠시 걸음을 멈추고 스무 살 안팎 젊은 목숨을 반공 구국에 기꺼이 바친 뜻을 새기고 넋을 기려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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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으로 가장 큼직한 이 비석은 1987년 11월 29일, 대한 항공 858편 폭파 사건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보이콧한 정도가 아니라 방해까지 하려는 목적으로 북한이 보낸 공작원이 이라크 발 대한민국 행 대한 항공 소속 여객기에다 폭탄을 슬쩍 설치한 것이다.
이것이 터지면서 그 비행기는 인도양 상공 망망대해 위에서 실종되었으며, 승객 95명, 승무원 20명 총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그리고 사망한 정도를 넘어 시신조차 한 구도 못 건졌다.

일본인으로 위장했던 북한의 공작원 커플은 외국에서 체포되었다. 남자는 검거 직후, 사전에 훈련받았던 대로 청산가리 앰플--윤 봉길 의사에게도 자결용으로 차라리 이런 간편한 물건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만--을 깨물어서 자살했으나 여자는 실패하여 국내로 송환됐다. 그녀의 이름은 김 현희. 맨날 인권 유린이라고 비난받아 온 코렁탕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조지라고 있는 필요악일 게다. 그러나 그녀는 전향 후 사면받고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잘 살아 있다.

참고로 북한은 1986년 서울 아시안 게임 직전에도 남의 나라 잔치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김포 공항 청사 안에서 폭탄 테러를 벌인 적이 있었다. 북괴 천하의 개쌍놈들의 만행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이런 놈들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항공업계에서는 누가 비행기에 탔다가 여행을 포기하고 도로 내린 경우, 기내를 싹 다 수색하고 수하물 검사를 처음부터 다시 하는 번거로운 절차가 추가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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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가장 남쪽에 가장 최근에 생긴 이 비석은.. 북한과는 관계가 없긴 하다만 그저 한숨뿐. 6· 25 이래로 평시에 단일 사고로 가장 큰 인명 피해를 낸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 희생자의 위령비이다. 공식 확인된 사망자 수는 502명. 아까 500여 명의 저 백마 부대 유격 대원들은 그래도 전투 중에 영예롭게 전사하기라도 했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저 희생자들은 대체 뭐냐. (하긴, 대한 항공 858편 희생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여기 주변엔 유족들이 헌화해 놓은 꽃을 가져가지 말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더라.
유족들의 희망 사항은 삼풍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 이런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이었으나, 그렇게 되지는 못했다. 거기는 워낙 금싸라기 땅인지라 아크로비스타라는 다른 주상 복합 주택이 들어선 지 오래다.
참고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 희생자 위령비는 현장과 비교적 가까운 성수대교 북단의 한강 둔치에 들어서 있다.

삼풍 백화점의 경우, 부실 공사에 대해 조금도 사죄하지 않고 고개를 빳빳하게 든 채 “건물이 무너졌으니 고객도 고객이지만 우리 회사도 막대한 손실을 입은 거야!”라고.. 정말 개념 안드로메다로 보낸 회장의 발언이 더욱 어그로를 탔었다. 정말 북괴 뺨치는 철면피 천하의 개쌍놈이 아닐 수 없다.
일본 같았으면 책임자가 할복을 해도 시원찮았을 일이다! 1985년 JAL123 추락 사고로 520명이 죽었을 때도, 별로 책임이 크지도 않은 정비사 한 명이 자살했잖아.
물론 지금은 피해자 보상하느라 삼풍 그룹 전체가 자산이 싹 압류당하고 진작에 공중분해되었으니 그들은 정말 최소한의 죄값은 치렀다.

이상이다.
우리나라 역사· 지리를 사랑하는 철덕이라면 양재 시민의 숲 역은 이렇게 볼거리가 많으니 꼭 답사해서 주변 시설들을 둘러보도록 하자.

아, 그나저나 여기 근처에 aT센터가 있고, 말로만 듣던 코스프레 오덕들이 공원에서 모임을 한 게 진짜 보였다.
그런데, 일본 오타쿠 복장을 하고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화장실에 갔다 오거나 근처를 들락날락하는 애들이 정서적으로 많은 논란이 된 바 있다.
옛날에, 일본 야동 업로드로 유명했던 김 본좌 양반도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서 광복절에는 업로드 안 했다고 한다. =_=;; 정말 그런 애가 있다면 제발 개념 탑재 좀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Posted by 사무엘

2013/11/02 08:26 2013/11/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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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분당선 양재 시민의 숲(매헌) 역

신분당선은 경부 고속도로를 따라 분당과 서울 강남을 16분 만에 잇는 민자 전철이다. 기본 요금이 수도권 전철의 일반 구간보다 700원이나 더 비싸지만, 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비싼 값을 하며 환승 할인도 되기 때문에 수요가 많다.

현재 개통해 있는 신분당선의 역들을 살펴보면, 강남(2호선), 도곡(3호선), 정자(분당)는 환승역이다.
판교는 판교 신도시 구간에 놓인 유일한 역이며 앞으로 성남-여주선과의 환승역이 될 예정이다. 신분당선 본사도 여기 인근에 있다.
여기 말고 서울 구간에 있는 비환승 신규역은 둘 있다. 하나는 등산 코스로 큰 각광을 받고 있는 청계산입구 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남은 역은 잘 알다시피 '양재 시민의 숲' 역이다. 분당선에는 '서울숲'이라는 역이 있고 신분당선에는 '양재 시민의 숲'이라는 역이 있는 게 흥미롭다.

이 역은 서울의 강남구와 서초구 사이의 경계인 강남대로 상에 있다. 논현(7호선)부터 시작해 남쪽으로 내려가면 강남(2호선), 양재(3호선)의 순인데, 그 다음이 바로 양재 시민의 숲이다. 경부 고속도로 양재 IC 근처이고 현대· 기아 쌍둥이 사옥이 가까이 있기도 하다.
그렇잖아도 양재에서 끝나기에는 양재 역 이남에도 여러 중요한 시설들이 많이 있는데 이 역은 양재 역만 있었을 때의 2% 부족한 면모를 다소 보충해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서울 교육 문화 회관이 있다.
2011년에 본인은 국어 정보 처리 시스템 경진대회에 참가했었고, 그때는 발표 심사와 시상식이 거기서 열렸다.
그때는 근소한 차이로 신분당선이 아직 개통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회관에서는 양재 역에서 주기적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했다. 그걸 타고 회관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분당선이 생기면서 장소가 역에서 600m 남짓한 거리로 가까워졌기 때문에 아마 셔틀버스를 운행하지 않을 것이다.

이 역의 바로 옆에는 말 그대로 시민 공원으로 조성된 숲이 있다. 이 숲은 길을 사이에 두고 북부와 남부로 나뉘는데, 1번 출구로 나가면 북부 쪽으로 간다. 좁은 의미에서는 북부만을 양재 시민의 숲이라고 치는 듯하다.
그리고 5번 출구로 나가면 남부로 향하게 되며, '여의교'--여기가 여의도도 아닌데 이름이 왜 이럴까?--라는 개천 다리를 건너서 윤 봉길 의사 기념관 쪽으로도 갈 수 있다. 부역명이 괜히 윤 의사의 호인 '매헌'으로 정해진 게 아니다. 앞으로 소개할 각종 위령비들은 북부가 아닌 남부에 있다.

이런 관광 명소들이 여럿 있다는 게 잘 알려져 있기에, 본인은 하루 날을 잡아 지하철 정기권 떨이를 위해 일대 답사를 떠났다.
최 용신 기념관(안산선 상록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3호선 독립문) 가듯이 답사를 갔다.

2. 윤 봉길 의사

매헌 윤 봉길 의사 (1908-1932).

그는 중국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의 경축 행사장에 들어가서 참석자들이 일제히 묵념을 시작했을 때 용감히 폭탄을 던졌다. 천장절(쇼와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사변 승리를 기념한 행사였다.
일본의 입장에서 이 정도로 뜻깊은(?) 행사장에다 폭탄을 터뜨림으로써 그는 유수의 일본군 장성들을 죽이거나 병신으로 만들었으며, 세계에 조선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데 성공했다. 립서비스 생색내기도 있었겠지만 중국의 장 제스 총통이 이 사건에 완전 반해서 극찬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실, 그로부터 불과 3~4개월 전엔 일왕을 죽이려는 이 봉창 의사의 거사가 있었다. 그러니 일본은 이번 행사에서는 보안을 나름 강화하려 애썼고, 반대로 우리 쪽에서는 이번엔 불발하지 않게 정말 튼튼하게 폭탄을 만들려고 애썼다. 이 봉창과 윤 봉길이 사용한 폭탄을 만든 사람은 김 홍일 장군으로 동일 인물. (울산 자매 살인 사건의 가해자와 동명인 바람에 독립 운동가의 이름이 이미지가 다소 실추했다.)

일본은 보안 차원에서 행사장 입장객에게 초대장 검사를 실시하고, 도시락과 물통 외의 소지품은 반입하지 못하게 했다. 현장에서 식사는 제공 안 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 시절이 X선 금속 탐지기가 쓰이던 시절은 아니었던지라, 우리 쪽에서는 폭탄 자체를 도시락과 물통 모양으로 만들어서 소지품은 통과 판정을 받았다.
초대장이 없는 건 윤 봉길이 시치미 뚝 떼고 유창한 일본어로 “아 왜 이런 기쁜 행사에 우리 자국민이 참석을 못 하냐?”라고 우겨서 넘겼다고 한다. 시쳇말로 '멘탈 갑'이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윤 의사는 물통 모양 폭탄이 성공적으로 터진 걸 확인한 후 도시락 모양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다. 그러나 그 폭탄은 또 불발하여 실패했다. 그는 이내 일본 헌병에게 체포당했다. 자폭에 실패하고 죽지 못한 대가로, 잡힌 후엔 이 테러의 배후에 누가 있는지, 폭탄을 누가 만들어 줬는지 불라고 그야말로 온갖 악독한 고문을 당했을 것이다.

그는 일본 본토로 끌려가서 재판받은 뒤, 비공개로 집행된 총살로 겨우 24년간의 짧고 굵은 생을 마감했다.
일본은 감정 같았으면 이런 반동분자에게 능지처참을 가해서 시신을 본보기로 전시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공개 처형 즉결처분을 했다간 오히려 일제의 잔학함이 국제적으로 폭로되고 조선에 대한 여론이 좋아질 걸 우려해서 일을 조용히 해치웠다.

그 대신 윤 의사는 모 형무소 내부에 마련된 사형장에서 수십 발의 총알 세례를 받으면서 마치 차우세스쿠의 최후의 순간처럼 끔살당했다. 격발 중 일부는 윤 의사를 겨냥하지 않은 페이크였을지 모르나, 그래도 단 몇 발이라도 권총도 아니고 돌격소총으로 복부의 심장도 아니고 얼굴 미간을 집중적으로 맞았으니 형체가 남아나지 못하지 않았을까.

시신은 공동묘지 길 한복판에 표식도 없이 아무렇게나 암매장되었다. 그래도 안 중근과는 달리 해방 후에 유해가 수습· 송환되었으니 이는 매우 다행스러운 점이다. 백범 김 구가 이 봉창· 윤 봉길 같은 사람을 침투시키는 일뿐만 아니라 해방 후에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도 최선을 다한 덕분이다.

윤 의사는 정말 가슴이 터질 듯한 얼마나 비장한 마음으로 훙커우 공원으로 가야만 했을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전해진다!

“사내 대장부는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 (상하이 의거를 앞두고 아직 갓난아기인 두 아들들에게 미리 남긴 유언)

“이 시계는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니 저와 바꾸어 주십시오. 제 시계는 앞으로 몇 시간밖에는 쓸 일이 없으니까요.” (김 구와의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저런 말과 글의 퀄리티를 보노라면, 누가 윤 의사를 감히 무식한 테러리스트 정도로  생각하겠는가?
게다가 유언을 보면 '빈 무덤'이랜다. 그는 최악의 경우 자기 시체도 못 찾게 될 수도 있다는 것까지도 다 염두에 둔 듯하다. 아아...
자, 배경지식에 대한 복습은 이 정도로 마치고, 이제부터 기념관과 주변 지역 사진을 늘어놓도록 하겠다.

3. 윤 봉길 의사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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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을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입장은 무료이나, 주차장은 무료가 아니다. (박 정희 기념 도서관은 둘 다 무료였던 걸로 기억.)
윤 봉길 의사 기념관의 경우, 재정난· 운영난 때문에 유품들이 제대로 관리도 못 되고 기념관 자체가 폐관될 위기에 처했다고도 들었다. 차라리 입장료를 받아서 유료화를 해도 좋으니 부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기념관은 중앙 홀의 좌우로 방이 2개 있었다. 내부의 관람 컨텐츠는 이게 전부다. 2층과 3층이 있긴 하지만 거기는 관람 공간이 아님. 3층의 경우, 기념 사업회의 수익 모델 차원에서 강당 공간 유료 대여를 한다고 한다.
안에는 윤 의사의 여러 사진,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어록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 의사를 소재로 초등학생들이 포스터를 그린 것도 잔뜩 걸려 있었다.

여기가 첫 개관한 건 1988년으로, 천안의 독립 기념관보다 살짝 늦지간 그래도 비슷한 시기에 개관한 셈이다.
참고로 윤 의사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도 별도의 윤 의사 생가와 기념관이 있긴 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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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윤 의사의 생애에서 유명한 일화다. 한자를 못 읽는 어떤 문맹 청년이 윤 의사에게 자기 아버지 묘비를 좀 찾아 달라고 동네 야산의 묘비들을 죄다 뽑아 왔는데...
“님 선친 묘비는 골라 낼 수 있지만, 묘비들 원상복귀는 어떻게 시킬려고?”라는 한 마디에 데꿀멍해 버린 사연 말이다.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개고생한다. 그 청년은 자기뿐만 아니라 남의 묘지도 못 찾게 만드는 초대형 민폐를 달성했다. -_-;;

안 중근도 그렇지만 윤 봉길도, 테러리스트(?)이기에 앞서 민족 독립의 길을 장기적인 안목에서 진지하게 생각했던 사상가이고 계몽가였다. 윤 봉길의 삶에서도 의외로 최 용신스러운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렇게 교육자의 길을 갈 수도 있었던 지식인이 얼마나 고민하던 끝에 폭탄까지 들게 됐을까.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下에서 계속됨)

Posted by 사무엘

2013/10/30 08:23 2013/10/30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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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선이라 하면 철덕이라면 모르는 분이 없을 것이다. 중앙선 및 경춘선보다는 살짝 이른 1937년 8월 5일에 개통하여 대한민국 최후의 협궤 철도로 남아 있었지만 1995년 12월 31일을 끝으로 운행이 중단된 추억과 비운의 노선 말이다.

단, 최후까지 살아 있던 구간은 인천-수원 전체가 아니라 한대앞-수원 사이의 비교적 한적한 구간이다. 한적하다는 말은 재개발을 위해 선로를 철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객 수요도 안습하다는 뜻이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운행 중단’ 상태라지만 실질적으로는 폐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열차가 다니지 않게 된 선로를 곧장 악착같이 모조리 철거한 것도 아니었다. 관리가 중단된 협궤 선로는 이내 시뻘겋게 녹이 슬고 잡초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이런 것은 일상적으로 보기 쉽지 않은 구경거리이기 때문에 철덕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에 본인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8년 전인 지난 2005년에 상록수-한대앞 역 사이의 수인선 선로 흔적을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수인선의 표준궤 복선 전철 공사가 진행되고 거기에 있던 선로는 의외로 얼마 못 가 철거되었다. 사진을 찍어 놓길 잘했다. 본인은 별다른 의심의 여지 없이 이제 수인선 협궤 선로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대앞 바로 다음의 중앙-고잔 사이에 선로가 아직까지 의외로 잘 보존되어 있고, 일부 구간은 안산시에서 관광 시설로 조성해 놓기까지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의외로 각종 위키 부류의 정보 사이트에서도 수인선 잔여 구간에 대한 설명은 별로 없는 듯했다.

그래서 본인은 석가탄신일 연휴 때 곧장 안산으로 달려갔다. 그 날은 마침 사랑 침례 교회의 정 동수 목사님께서 뉴에이지 특강을 했는데, 안산선과 수인선 답사를 먼저 한 뒤, 안산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이 있는 편인 그 교회에서 강의도 듣고 왔다. 이렇게 동선을 효율적으로 활용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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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에 없었지만, 잠시 반월 역 주변의 사진을 먼저 카메라에 담았다.
세상에 이렇게 전원적이고 산과 들로 뒤덮인 전철역이 또 있을까 싶다. 안산선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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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 역은 굉장히 드문 특성을 여럿 갖춘 특이한 역이다.
출입구가 하나밖에 없으며(이런 역도 몹시 드문데), 역무 시설과 승강장이 모두 지상 평지이면서 선로 횡단은 육교가 아니라 지하도로 한다. 지하철과의 환승역이 아니면서 이런 구조로 만들어진 역은 구일이나 대방 역 정도밖에 없을 것이다.
역 입구엔 작게나마 광장도 있다.

잘 알다시피 반월과 다음의 상록수 사이는 거리가 3.7km가량으로 수서-복정급으로 매우 길다. 두 역은 지상이지만 잠시 몇백 m 길이의 터널도 지나며, 아래로는 서해안 고속도로를, 그리고 위로는 경부 고속선을 모두 구경할 수 있다. 상당히 긴 역간거리에도 불구하고, 지형적인 특성으로 인해 이 사이에는 역이 또 생길 여지가 거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본인은 여행을 계속했으며, 드디어 중앙 역에 도착해서 내렸다. 그랬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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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로 그분이 내 눈에 펼쳐졌다! 하앍하앍...;;
한대앞 역의 경우(그리고 안산 역도), 안산선의 승강장도 지상 평지이다 보니 수인선과 승강장이 나란히 건설되는 게 가능했던 반면, 중앙이나 고잔 역은 안산선 선로가 고가로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평지인 수인선은 역의 밖에 이렇게 있을 수밖에 없다.
금정 쪽으로 되돌아가는 한대앞 방면으로도 수인선 선로가 살짝 있긴 했지만 얼마 못 가 끊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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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로 주변은 그야말로 경치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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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은 그렇다 쳐도 영문 서체는 마치 Mac OS 클래식의 서체와 닮은 것 같다.
이런 클래식 역명판도 누가 잘 보존해 놔야 할 텐데 말이다.
과거엔 이곳에 수인선 승강장이 있었기 때문에, 열차 승강장도 아니고 역의 외벽에 이런 물건이 붙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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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계속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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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에 가까워지자 웬 이런 시설물도 있었으나, 식물 넝쿨 같은 건 없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주변 식물들의 키는 낮아져서 시야가 확 트여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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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수인선 고잔 역 승강장과 열차를 재연해 놓은 시설물도 있었다.
안산선의 역들 중 수인선을 가장 잘 보존해 놓은 구간은 중앙-고잔이며, 역 하나만 꼽자면 고잔 역 주변인 듯했다.

고잔 역은 수인선 시절부터 있었던 역일 뿐만 아니라 안산선이 개통한 뒤에도 한동안 수인선 영업만 하고 안산선 쪽 승강장은 수 년 뒤에 생겼을 정도이다. 그 정도로 정서적으로 수인선이 ‘갑’이었던 역이기 때문에 보존 시설도 고잔 역을 중심으로 생긴 게 아닌가 싶다.
그 반면, 그 옆의 초지(구 공단) 역은 그렇지 않다. 수인선이 본격적으로 망해 가던 1994년에 추가로 생긴 역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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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잔 역을 지나고부터는 수인선 선로는 다시 잡초로 무성하게 덮이더니, 나중에는 안산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개천과 철길 공사장(원시-소사선!)에 가려져 선로가 더 진행되지 않았다.

땡볕에서 중앙-고잔-초지 사이의 거의 3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으면서 수인선 성지순례를 마쳤다. 그러고 보니 광역전철 분당선이 첫 개통한 날이 반대로 수인선의 상당 구간이 폐선된 날이기도 하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치 KTX가 개통한 날이 교외선 열차가 없어지고 경춘선 통일호가 없어진 날이기도 하듯이 말이다.

지금 오이도 역은 과거의 수서 역과 비슷한 위상이 돼 있다. 옛날에는 3호선의 남쪽 종점이 수서였고, 동시에 노란 분당선의 북쪽 종점도 수서였으며 둘은 한데 이어진 노선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그랬던 것처럼 지금은 4호선의 남쪽 종점이 오이도이고, 동시에 분당선과 직결될 예정인 노란 수인선의 종점도 오이도인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3/07/04 08:27 2013/07/04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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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안보 관광 (2013/5/4) -- 下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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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준 선생 묘소의 비석은 글자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표면이 닳아 있었는데 이곳이 허 준의 묘지라는 것은 꽤 어려운 계기를 통해서 알려졌다고 한다.
동의보감이 출간된 게 1611년이라고 하니 KJV 신자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영국에서 흠정역 성경이 나온 동안 조선에서는 의학 서적이 만들어졌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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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 주변의 언덕은 전원적이고 경치가 좋았다. 물론 주변에는 여전히 철조망(+지뢰밭?)이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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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파주 적성면에 있는 영국군 전적비였다. 주변엔 공원도 있어서 산책하고 쉬기에 좋았다.
미국의 인지도에 밀려서 그렇지 영국은 6·25 때 미국 다음으로 많은 5만 6천여 명에 달하는 병력을 보내서 우리나라를 도왔던 국가이다.

특별히 이 전적비는 1951년 4월 22~25일 동안 이 일대에서 영국군 글로스터 대대가 중공군에 맞서 임진강을 사수하고 아군이 후퇴할 시간을 번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그러나 글로스터 대대 자신은 중공군에게 포위당한 채, 652명 가운데 겨우 67명만 살아남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영국의 '높으신 분'들이 한국을 방문하면.. 말이 필요 없다.
닥치고 제일 먼저 여기 가서 참배부터 한 뒤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한다. 엘리자베스 여왕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육해공 참모총장과 김 관진 국방부 장관의 이름으로 보내어진 화환들이 잔뜩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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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경로를 정리하면 이렇다.
글자가 좀 작긴 하지만, 임진강 역과 일대의 임진각 관광지는 지도에서 4번이다.
그리고 도라 전망대가 3번, 제3 땅굴은 2번이다. 땅굴을 견학함으로써 우리는 비록 지하로나마 DMZ 구간에 잠깐 들어갔다 나왔다.

임진강을 끼고 있는 동그란 점선은 민통선이고, 더 이북으로 길쭉한 점선이 바로 남방 한계선이다.
허 준 선생 묘지는 24번이요, 영국군 전적비는 22번 근처에 있다. 이 지도 자체가 영국군 전적비 입구에 있는 것을 촬영한 것이다.
이런 귀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초청자분께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전한다.

기왕 적성면까지 자차로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적군 묘지도 좀 들를까 했다.
국도 37호선을 타면서 근처를 분명 지나긴 했을 터이나 발견은 못 했다.

하긴, 이건 우리나라를 파괴하려 한 북한군과 중공군의 시신을 진짜 최소한의 예우만 해서 매장해 놓은 묘지이니, 대대적으로 홍보를 할 필요도 없고 그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묘비에 이름 같은 것도 당연히 없다.

결정적으로는 우리나라의 그 어떤 종북 간첩 불순분자 정치인도 여기 가서 참배를 했다거나, 이곳을 성역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식으로 노골적으로 자기 정체를 드러내는 병신짓을 한 적도 없다. (뭐, 적군 묘지를 띄워 줄 수는 없으니, 반대로 국립 현충원 참배가 부당한 강요라고 희대의 개드립을 날린 빨갱이 정치인은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의 소중함과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더욱 일깨우게 되었다.
또한 성경대로 믿는 크리스천과 종북 좌빨의 spirit은 역시 절대로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했다.

우리가 민통선 안에 들어가서 제한적으로나마 사진 찍고 실시간으로 SNS와 카톡으로 자기 근황까지 알리는 극한의 자유를 누리는 게 무엇 덕분이고 누구 덕분일까?
또한 공무원· 관료가 아니라 엔지니어· 발명가가 대접받고 마음껏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어떤 배경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그런 사회 구조 덕분에 컴퓨터가 발명되고 인터넷이 뚫리고 페이스북, 스마트폰 같은 것들도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미국은 레알 넘사벽급 선진국이 맞다.)

그에 반해 북한은 어떤가?
북한은 전국을 드나드는 게 우리가 지금 민통선을 드나드는 것과 비슷한 절차이다. 평양 시민이 아니면 일반 평민들은 출입증 없이는 시· 도도 못 빠져나간다.

우리나라는 군대 현역 복무가 2년가량이고 예비군까지 합쳐야 10년 남짓이지만, 북한은 남자들의 현역 복무가 10년이어서 20대 중· 후반까지를 전부 군대에서 날린다. 예비군 소속은 사실상 직장에서 은퇴할 때까지(60대) 평생 가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전국민을 공권력으로 억압하고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군인(경찰도?)을 무진장 많이 뽑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군대는 생산을 하는 게 아니라 세금을 소비만 하는 집단이다. 그러니 그런 대규모 군대를 돌아가게 하려면 주민들의 노동력을 무진장 착취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뼈빠지게 일하고도 근본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다.

이렇듯, 북한의 비효율은 단순히 사유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야기되는 게 아니다. 겨우 이념만이 문제였다면 북한도 중국이나 소련처럼 경제 시스템을 개방하고 주민들을 살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냥 무력 군사 도발에 분노하고 정치범 수용소의 참상에 안타까워하기만 할 게 아니라, 이 모든 사건들의 배후에 있는 북한 수뇌부의 시스템과 대처 매뉴얼, 알고리즘이 본질적으로 정말 사악하기 그지없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 노선이 지금까지 변한 게 없다는 점도 말이다. 이걸 놔 두고 무슨 미국이 경제 봉쇄를 해서 북한이 굶주리고 있다니, 개성 공단 폐쇄로 인한 경제적 손실이 얼마니 하는 건 개가 웃고 소가 웃을 일이다.

이런 악한 국가가 6·25 시절처럼 정상적인 무력 기습으로는 우리나라를 도저히 무너뜨릴 수 없으니 우리나라의 자유를 악용하여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민족 자주 통일 드립을 치면서 안보관을 무너뜨리고, 북한을 띄울 건 없으니 반대로 남한을 비하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민통선 패스를 갖고 계신 어르신은 역시 안보관과 사상에 관한 한은 말이 필요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보다 더하시더라. 정말 울분을 터뜨리면서 지난 종북 정권이 저지른 반역 행위를 비판하셨다. 개성 공단은 10년 공들인 탑이 아니라 10년간 앓던 충치에 더 가깝다는 말에 정말 공감이 갔다.

물론 우리나라 정부도 잘한 것만 있는 게 아니며 역사적으로 자신의 병크를 북풍으로 합리화한 것도 있다. 그러나 안보라는 건 대단히 위험하고 심각한 이슈로, 무슨 국내 치안처럼 “아홉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죄인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처럼 신사적으로만 진행해서는 곤란한 면모도 있다. 간첩 한 명만 칼같이 가려내고 단 한 명도 억울하지 않게 공권력을 집행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예전에 아라크넹 님은 “원전을 없애자고 할 게 아니라 원전에 대한 필요를 없앨 생각을 해야 한다”라고 정곡을 찌른 주장을 한 적이 있다. 지금보다 몇 배로 오른 기름값과 전기료를 감수하면서 무턱대고 원전을 없앨 참인가? 현실적인 변수를 고려하지는 않고 무작정 원전을 없애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다. 그런 것처럼 지금 우리는 정부 수사 기관이 종북 수사를 병신같이 한다고 비판하기에 앞서 종북 자체에 대한 비판과 성토가 더 시급한 때임이 틀림없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또 생각나는 게 있다.
전툴루, 전땅크 각하는 잘 알다시피 퇴임 후에도 25년이 넘게 장수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최강의 호강을 누리는 중이다. 돈방석 위에 앉아 있으면서 세금 추징금도 안 내고, 훈장도 반납 안 하고, 전직 대통령 예우는 다 받고 있다. 내가 알기로 건강도 아직 좋고 팔팔하다.

리즈 시절에 제3 땅굴을 발견한 것 좋으며, 그리고 대통령 재임 기간에 사형 집행을 시원스럽게 잘 해 준 것도 분명 잘한 일이다. 그러나 퇴임 후의 모습은 좀 좋은 간증(?)이 못 되고 있고, 우리나라 정체성을 부정하는 나쁜놈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주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지면을 통해 전땅크 각하에게 공개적으로 제안 드린다.
아예 대놓고 국가를 위해 악역을 자처해 줬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지고서 이왕 구겨진 이미지를 확실히 완전히 구기란 얘기다. -_-;;
저 사람이 그 배짱으로 광주 5.18 피해자들한테 사죄(?)를 할 리는 없으니, 사죄를 안 할 거면 차라리 우익 쪽에 힘을 실어 주는 소신 발언이나 계속 했으면 좋겠다.

“나한테 당해 보지도 않고서”라고 말할 배짱이 있으면, 차라리 그때 명령을 따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은 나라를 구한 사람들이라고, 팀킬 오발 사고 때문에 몇몇 광주 시민들이 불가피하게 희생된 건 애석한 일이라고... 심지어 5.18 때 북한 특수군이 쳐들어온 게 사실이기라도 하면 그것도 언급하라.
그게 사실이고 그 시절 자기 행동에 한 치의 후회도 없다면 그 소신이라도 정정당당하게 공개적으로 밝히란 말이다. 지 만원 박사 같은 사람이 기를 쓰고 주장하는 내용을 당사자가 직접 입증해 보아라.

전직 대통령이니 얼마나 철통같은 경호를 받고 있겠는가? 그런 말 아무리 해도 신변에 위협을 받을 일도 절대 없을 테고!
그것이 전땅크 각하가 그나마 마지막에 세금값 하는 인물로 남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난 광주 5.18 사건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는 어느 성향으로든 남을 설득해서 생각을 바꿔 놓을 정도의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뭐 그건 그렇고,
언제 또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경의선 쪽을 갔으니 다음 안보 관광은 철원 경원선 라인으로 갈 예정이다. 제2 땅굴, 노동당 청사, 백마고지/월정리 역, 금강산선 옛 철교 흔적 등 말이다. ^^

Posted by 사무엘

2013/06/11 08:39 2013/06/11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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