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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소리를 찾아서

오늘날 개인용 컴퓨터를 포함해 소리를 낼 수 있는 소형 개인용 전자 기기에서 두루 통용되는 사운드 단자는 ‘TRS 커넥터’라고 불린다. 제정된 지 꽤 오래 된(누가 처음 고안했는지?) 아날로그 오디오 커넥터 규격이지만, 지금까지도 아주 대중적으로 쓰이고 있다.
TRS는 tip, ring, sleeve의 이니셜을 딴 것인데, 마치 끝이 펜촉처럼 생긴 독특한 커넥터의 생김새를 표현한 단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실 TRS 커넥터도 크기별로 몇 가지 종류가 존재하며, 우리가 사용하는 건 3.5mm (1/8인치) 규격이다. 하지만 TRS 커넥터가 최초로 개발된 건 1/4인치짜리 크기였다고 한다. 본인이 어렸을 때 집에 있던 전축의 헤드폰 단자도 1/4인치 TRS 커넥터였던 것 같다.

PC99 규격에서는 컴퓨터에 꽂는 사운드의 단자의 용도가 색깔로 바로 분간이 되게 정해져서 한결 편리하다. 과거 카세트 테입 플레이어에서도 녹음 버튼은 언제나 빨간색이었기 때문에 빨간 단자가 마이크 입력 단자이다. 그 반면 이어폰을 꽂고 듣는 단자는 초록색이다.

입력 단자와 출력 단자를 양방향 잭으로 연결하면 한쪽에서 나는 소리를 컴퓨터로 녹음할 수 있고, 심지어 컴퓨터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를 그대로 녹음할 수도 있다. 하지만 TRS 커넥터는 아날로그 방식인 관계로, 출력되는 파형을 순수한 원형 그대로 추출할 수는 없으며 컴퓨터 내부의 잡음이 섞이는 것까지도 감안해야 한다.
컴퓨터 자신에게서 나는 소리를 녹음하는 방법이 윈도우 XP 시절에는 무척 간단했는데, 비스타 이후부터는 그 분야의 드라이버 계층이 크게 바뀌면서 절차가 다소 번거로워진 걸로 기억한다.

음반 매체는 카세트 테입, LP, CD 등 다양하게 바뀌어 왔지만 그 소리를 전달하는 단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어떤 발전이 있어 왔으며 TRS보다 더 나은 표준이 존재하는지 궁금하다. 모니터가 영상 신호를 받는 방식도 과거의 아날로그 D-sub 방식에서 디지털인 DVI 방식으로 바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소리 쪽도 정말 극악에 가까운 결벽증 매니아인 사람이 있다. 고음역과 저음역까지 귀가 굉장히 예민하기 때문에, 겨우 128Kbps짜리 mp3는 너무 저질이어서 못 듣는다. 대역폭이 최소한 300Kbps가 넘어야 하거나, 아예 무손실 압축으로 듣는다.

좋은 소리가 나려면 좋은 음원과 좋은 단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좋은 출력기가 한데 어우러져야 할 것이다. 스피커/이어폰은 흔한 필수품인 만큼 조악한 싸구려는 정말 싸지만, 품질 좋은 명품은 무슨 악기 이상으로 가히 살인적으로 ‘억 소리’ 나게 비싸다. 이런 걸 기를 쓰고 구하려고 하는 매니아가 있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에 나오는 싸이코패스 악당처럼 말이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품질이 열악한 테입도 거부하고, 비록 깨끗하지만 양자화와 디지털화를 거쳐 버린 CD도 거부하며, 진짜 아날로그 소리가 원형 그대로 담겨 있는 레코드나 축음기를 구하려 애쓰는 사람도 있다. 귀가 얼마나 예민해야 그런 소리의 차이까지 분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면 초음파까지 들리고 들어 봤자 인생만 피곤해지는 소리까지 다 들려서 고민인 경지가 아닐까 생각된다. 소리의 세계는 참으로 심오하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25 09:13 2010/08/25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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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비디오 테입 얘기.
옛날에 VHS 방식 VTR은 어린 본인이 보기에 정말 신기한 물건이었다.
비디오를 보기 위해서는 우선 TV 채널을 꼭 4번으로 바꿔야 한다. VTR은 또 자신만의 채널 선택 기능이 있으며, TV 채널이 4번인 상태에서 VTR 전원을 켜면 VTR이 설정해 놓은 채널의 TV 방송이 채널 4번으로 포워딩되어 흘러나왔다. 이것이 VTR이 인식하여 녹화 가능한 TV 채널이다. (그렇다면 VTR은 자체적으로 TV 신호 수신 기능이 있다는 얘기인지?)

좀 고급 VTR은 심지어 예약 녹화 기능까지 있어서, 사람이 대기하고 있다가 녹화 버튼을 안 누르더라도 지정된 시각에 특정 프로가 시작될 때 자동으로 녹화가 되게 할 수 있었다. 카메라에 간단한 예약 타이머 기능이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그런 VTR은 시계 기능도 필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VTR은 아날로그 방식이다 보니 화질은 그리 좋지 못하다. 수평 해상도가 240이면 도스 시절 게임 화면인 320*200보다 약~간 나은 수준밖에 안 된다는 소리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TV 신호이든 비디오 카메라 영상이든 녹화가 간편하게 잘 되는 게 좋아서 꽤 오랫동안 시대를 풍미했다.
그랬는데, 비디오와 카세트 테입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방송에 대한 녹음· 녹화 풍토도 확 바뀐 것 같다.

지나간 방송 정도야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고, 드라마 같은 건 고화질 동영상 파일을 유료나 무료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실시간 방송은 전문적인 비디오 스트림 캡처 내지 인코딩 프로그램으로 저장하면 된다. 어쨌든 영상 처리를 별도의 가전 기기가 아니라 컴퓨터로 하게 됐다.
방송이 아닌 일반적인 동영상 녹화는 이제 어지간한 디카나 캠코더로 곧바로 가능해졌으니 더 논의할 필요도 없음.

다음은 VHS 비디오 테입 내지 오디오 카세트 테입 관련 추가 잡설들이다.

1. 이 분야로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VHS가 한때 소니 사의 베타맥스 규격과 표준안 채택을 두고 티격태격 싸웠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베타맥스가 더 우수했으나 결국 VHS가 살아남았다.

2. 비디오든 오디오든 카세트 테입 재생기에는 위치 탐색용으로 간단한 카운터가 있었다. 오디오 테입은 보통 세 자리(0~999), 그보다 러닝타임이 긴 비디오는 네 자리까지 있었다. 자동차로 치면 구간 거리계 정도 된다.
카운터에는 reset 버튼이 있고, 카운터를 activate시키는 버튼이 있었는데, activate되어 있는 경우, 테입을 재생하거나 감던 중에 카운터가 0에 도달하면 테입의 주행이 자동으로 멈추었다.

오디오 CD는 모든 트랙이 분초 단위로 정확하게 카운트다운이 되다 보니 저런 아날로그 식 카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테입과는 달리 현 재생 위치가 매체의 외관상으로 전혀 드러나지도 않는다. ^^;;
그래서 되감거나 앞으로 빨리 감는 중에는, 감고 있는 해당 위치의 음향을 작게 잠깐잠깐 들려주는 방식으로 동작하곤 했다.

3. 카세트 테입 플레이어는 버튼이 동작하는 방식이 기계식과 전자식 이렇게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이건 본인이 편의상 붙인 용어이다. 재생되는 동안 '재생' 버튼이 쑥 눌러져 들어가 있는 놈은 기계식이고, 그렇지 않은 건 전자식이다. 좀 덩치 있는 라디오는 기계식이지만 워크맨이나 카오디오는 다 전자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기계식은 재생 버튼을 누르자마자 한 치의 딜레이도 없이 곧바로 테입 주행과 재생이 시작된다. 재생 버튼을 누르는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테입과 재생 헤드가 고정되며, 버튼이 완전히 눌러져서 고정이 끝나자마자 모터가 돌아가서 테입 주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반면, 전자식은 그렇지 않고 딜레이가 존재하여 불편하다.
비디오 테입은 전자식 카세트 테입보다도 딜레이가 훨씬 더 길며, 재생을 누르고 나서 거의 3초 가까이 뒤에야 재생이 시작됐다. 뭔가 초기화 작업이 많은 듯. 그 딜레이가 개선된 VTR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4. 플로피 디스크, 카세트 테입, 비디오 테입 등은 모두 쓰기 방지 딱지를 물리적인 형태로 내장하고 있다. 추억의 딱지이다. 다만, 3.5인치 디스켓은 별도의 딱지를 붙이는 게 아니라 스위치 비슷한 조작으로 쓰기 방지 설정을 바꿀 수 있었다.
USB 메모리에도 쓰기 방지 딱지 같은 게 있으면 어떨까? (뭐, USB에다 꽂는다는 특성상, 물리적인 형태로 구현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최소한 꽂는 것만으로도 루트 디렉터리에 악성 코드가 주입되는 것 정도는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 ㅠ.ㅠ 애초에 저런 일 자체가 어떻게 사용자의 동의 없이 일어날 수 있는지부터가 본인은 이해가 안 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8/02 09:04 2010/08/02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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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 이야기

집에서 컵라면을 먹기 위해 물을 끓일 때 평소에는 늘 전기 커피포트를 이용하다가 얼마 전엔 부득이하게 냄비+가스레인지라는 재래식 방법을 쓰게 되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뭐냐면, 화력을 최고로 설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끓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는 것이었다. 하긴, 물은 잘 알다시피 비열이 꽤 큰 물질이며 끓이기 위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하지만 도시 가스 정도만 해도 불꽃의 온도가 상당히 높다. 그을음과 배기가스도 (거의) 없어서 가정용으로 적합한 연료이며, 주부의 가사 노동을 크게 덜어 주고(깨끗하니까) 시간 아껴 주고(화력이 강해서) 산림 보존(설명이 필요 없음)에도 기여한 고마운 물질이기도 하다. 장작불 때서 목욕할 물을 데우거나 밥 지어 보시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를 이용하는 커피포트는 꽤 많은 물도 더욱 신속하게 펄펄 끓여 준다. 이때 얼마나 빡세게 열을 가할지가 상상이 된다. 그래도 주변은 완전히 플라스틱이고, 매우 안전해서 만지다 손을 델 염려도 거의 없다. (표면이 달궈진 냄비는 그렇지 않다.) 게다가 물이 다 끓으면 알아서 꺼진다.

이렇게 편리할 수가 없다. 다재다능한 전기 에너지를 가장 무식하게 활용하는 게 고작 저항을 이용한 전열기라 하지만, 전열기 역시 유용하다. 밖에 나갈 때야 휴대용 가스레인지가 필요하겠지만, 집에서 혼자 고기 구워 먹을 때 안성맞춤인 전기냄비도 있다. 게다가 전자레인지는 주변 온도를 높여서 가열하는 게 아니라 음식 내부의 물 분자를 진동시켜서 열을 가하는 최첨단 장비이다.

전자기력은 물질이라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힘인 만유인력과 더불어, 이 자연의 거시 세계에서 비교적 쉽게 관찰도 가능한 신비로운 힘의 원천이다. 우리보다 수천 년 전에 산 사람들도 마찰 전기라든가 자석 같은 걸 보고 굉장히 신기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이 에너지의 성질을 그럭저럭 파악하고 제대로 활용하게 된 것은 불과 200년 남짓?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패러데이, 맥스웰 같은 걸출한 과학자가 나와서 교류 전기와 발전기를 만들어 내고 전자기파를 발견하고, 거기에다 니콜라 테슬라 같은 전자 공학 덕후가 결정타를 날린 덕분에 인간은 전기 에너지를 대량 생산해 내고 이걸로 열과 빛과 동력(전동기)을 무한대에 가깝게 만들어 냈으며, 정보를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주고받고, 그걸로 인간의 지적 활동까지 분담하면서(컴퓨터) 오늘날의 찬란한 전기 문명 시대를 만들어 냈다.

본인은 시계에 대해서도 꽤 최근에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요즘 아날로그시계를 보면 십중팔구 얼굴에 Quartz(석영)라는 단어가 꼭 적혀 있다. 이것은 이 시계가 기계식이 아니라 말 그대로 쿼츠 시계임을 뜻한다. 과거에는 시계는 태엽과 용수철, 지레와 톱니바퀴가 맞물려 동작하는 초정밀 기계였는데, 쿼츠 시계는 무려 20세기 중후반이 돼서야 컴퓨터나 형광등보다도 더 늦게 발명됐다.

쿼츠 시계는 동작 방식이 기계식 시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전기 신호를 받고 규칙적으로 진동하는 석영의 진동을 반도체가 인식하여 동작하는데, 문제는 쿼츠 시계는 싸고, 더 간단하고, 만들기 쉽고, 게다가 기계식 시계보다 압도적으로 훨씬 더 오차가 적어 정확하고... 세상에 이렇게 단점이 없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대안이 나오기란 정말 흔치 않은데 쿼츠 시계는 기계식 시계를 완전히 떡실신시키고 시계의 표준이 되었다. 이 역시 전기 덕분이다. 전자식 시계는 단순히 기계의 동력을 전기로 바꾸기만 한 게 아니라는 걸 처음 알았다.

철도와 전기가 찰떡궁합이라는 것은 이제 더 설명하지 않겠다. ^^;;

이렇게 우리 생활을 이롭게 한 전기이나, 잘못 사용하면 매우 위험해진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다. 전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만큼 전기로 인한 화재(누전· 합선)가 잦아졌으며 감전 사고도 빼 놓을 수 없다. 정전기는 물기만 있으면 싹 없어지지만, 젖은 손으로 전기 플러그를 만지면 감전의 위험이 있다. 이 둘의 차이가 뭔지 아는 분이라면 용자. =_=;;

정전기의 전압은 순간적으로 수천, 수만 V가 되기도 하지만, 실제로 인체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전압(V)이 아니라 전류(A)이다. 정전기는 전류는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사람에게 치명적이지는 않으나, 사람에 따라서는 정전기에도 굉장히 민감한 경우가 있다. 이 점을 이용, 전기가 사람을 고문하고 사형 집행하는 수단으로도 쓰였다.

사람의 신경도 일종의 전기 신호를 따라 반응하는데 외부에서 그런 무자비한 전류가 들어오면 모세혈관이 터지고 사람 신경이 다 망가질 수밖에 없다. 어느 정도 이상으로 강하게 감전되면 사람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어, 감전을 일으키는 물체로부터 신체를 스스로 움직여 떨어질 수조차도 없어진다고 한다.

뭐, 전압마저 엄청 높으면, 그냥 퍽 불꽃과 함께 타 버리지만 말이다. 고압선 위에 참새가 앉아도 왜 감전되지 않는지도 어렸을 때 주된 과학 FAQ였는데, 답변의 요지는 물론 기억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설명은 잘 못 하겠다. =_=;;

니콜라 테슬라가 선보인 마술(?) 중 하나였다는 무선 송전이 앞으로 과연 현실이 될 수 있을까?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 현대 전자 공학의 총아로 칭송 받을 것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5/28 08:17 2010/05/28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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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전화의 추억

나온 지 거의 30년 가까이 된 계몽사 학습 그림 과학의 <내일의 과학> 편에서 묘사된 미래의 모습과 지금을 대조해 본다.
우주 개발이라든가 토목 분야는 상당수가 불발탄이 되었고 여전히 실현되지 않았다.
또한 자동차의 주 연료는 아직도 화석 연료 이외의 다른 것으로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지금도 기껏해야 하이브리드 위주이다.
 
하지만 정보 통신과 관련된 기술들은 역시 초과 달성되었다.
손목 텔레비전, 텔레비전 전화, 휴대용 번역기, 벽걸이 TV, 터미널 기반 지식 검색 등 별별 걸 그때 상상하였으며 오늘날 비슷한 형태로 실현된 것도 적지 않은데, 전국민이 주머니에 전화기를 가장한 초소형 컴퓨터를 갖고 다니며 살게 될 거라고는 왜 생각을 못 했을까? 특히 저 기능들이(벽걸이 TV 말고) 한 기계로 모두 가능해질 거라고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본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1980년대 말~90년대는 가정에서 다이얼을 돌려서 전화를 걸던 게 버튼으로 바뀌어 가던 때였고, 무선 전화가 이제 막 등장하고 있었다. 버튼식은 다이얼이 빙글빙글 도는 걸 기다릴 필요가 없이 전화를 더 빨리 걸 수 있고, 버튼을 누른 반응을 번호별로 톤이 다른 전자음으로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는 그 전자음도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다. 절대음감 소유자는 그 전자음의 톤만으로 번호를 바로 분간할 수 있었다는데...
 
그때에도 휴대 전화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물론 아예 선원이나 남극 세종 기지 대원 같은 사람을 위해 엄청 비싼 위성 전화라는 것도 있었으나, 그것 말고도 우리나라에 이미 1988년엔가부터 손전화라고 불리는 물건이 나온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말기는 거의 벽돌짝 같은 크기이고 가격 역시 여전히 서민이 엄두를 못 낼 수준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거래처와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는 넥타이 부대 영업맨이 아닌 이상 그런 게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때 손전화는 카폰이라 하여 주로 고급 승용차의 초호화 액세서리 정도의 위상을 차지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나라에 우등 고속버스가 등장한 게 90년대 초부터인데, 우등을 타면 앞자리에 공중전화가 고급 서비스라고 있기도 했다.
 
90년대 중후반에 정보 올림피아드 공모 부문 심사를 받으러 갔을 때도 대회 진행 요원들이 애들을 통솔하고 바깥의 다른 관계자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 무려 '무전기'를 이용하는 걸 본 기억이 생생하다. 폰이 안 터지는 첩첩산중 오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극비 군사 작전도 아닌데.. 흠좀무. 지금 같으면 그런 통신은 일도 아닐 텐데 말이다.
 
본인이 초등학교 고학년 내지 중학교 정도 나이일 때 한창 쓰였던 게 삐삐. 하지만 본인은 PC 통신은 경험했어도 삐삐는 전혀 소지한 적이 없고 남을 호출한 적도 없다.
그러다가 90년대 말부터 인터넷 검색 엔진과 포털 사이트라는 개념이 생기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휴대 전화도 급격하게 보급되어 오늘날과 같은 1인 1손전화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초창기에만 해도 휴대 전화의 통화 요금은 굉장히 비싸서 공중전화로 일반 유선 전화를 걸 때하고 휴대 전화를 걸 때 돈이 줄어드는 속도의 차이가 가히 기겁할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대중화 덕분에 굉장히 많이 저렴해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전국에 기지국 설치하느라 든 초창기의 어마어마한 투자 비용을 다 회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이익을 챙겼다나 어쨌다나..
 
그리고 이것 기억하는가?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발신자 번호 표시 기능도 한때는, 기술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사생활 침해 때문에 시행하네 마네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숫제 추가 요금을 받고 해 주는 부가 서비스로 취급되던 시절이 있었다.
 
손전화가 보편화하면서 이 물건은 단순히 전화기의 수준을 넘어 개인 종합 정보 복합기 노릇을 하면서 PDA, MP3, 전자 사전 등 기존 소형 휴대용 전자 기기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가지고 다니는 초소형 컴퓨터가 됐다. 기계의 성능 때문보다는, 절대적인 사이즈가 너무 작아서 사람이 뭔가 정교하고 빠른 타자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기존 데스크톱 컴퓨터와는 별도의 독립적인 위상을 지키고 있을 뿐인 것이다. 요즘 살면서 휴대전화를 반드시 꺼야 할 때란 비행기 탈 때나 시험 칠 때 정도밖에 없지 싶다.
 
이제 12키는 숫자만 입력하는 게 아니라 문자를 입력하는 소형 글자판이 되어서 이를 두고 문자 입력 솔루션 연구 기업 내지 발명가들이 수없이 생겨났다. 계산기처럼 단색 액정이던 화면은 잠시 256색을 거쳐서 트루컬러가 되고, PC 스피커 같던 벨소리도 애드립/미디를 거쳐서 이제는 자연 사운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글자조차도 비트맵 글꼴이 쓰이다가 지금은 일반 PC와 똑같은 트루타입 글꼴로 바뀌었다.
 
정말 격세지감이다. 카세트 테이프, VHS 비디오 테이프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아날로그 TV 방송과 2세대 휴대 전화도 단종이 수 년 앞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이 전화번호를 외우거나 수첩에 적어 놓고 찾아야 할 필요가 없어진 지도 오래 됐고 디지털 치매라는 용어마저 생겨 있다. 이제 사람이 머리로 꼭 기억해야 하는 건 디지털 세상에서 자기를 식별하는 유일한 수단인 각종 아이디/패스워드 정도가 아닌가 싶다.
 
컴퓨터와 전화기! 비록 1970년대 이후로 인류가 달에 또 가지는 못해도, 서울-부산이 초고속 자기 부상 열차로 1시간만에 연결되지는 못해도, 손전화와 디지털 카메라, 블로그, 유튜브, UCC, 트위터 같은 것이 2, 30년 전의 공상 과학 문학가조차 상상하지 못한 양상으로 세상을 뒤바꿔 놓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 에 그런 의미에서.. 조금 딴 얘기이지만, 국내 포털 사이트들 중 보안 쪽으로 제일 미개한 드림위즈는 반성 좀 요망..
싸이나 구글 같은 일부 사이트는 강력한 암호/약한 암호 체크를 하는 기능까지 추가됐는데
드림위즈만은 1999년에 처음 생겼을 때 이래로 지금까지도 암호를 최대 8글자까지밖에 지정을 못 한다. -_-;;

Posted by 사무엘

2010/03/11 18:59 2010/03/1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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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에서 컬러로

※ 정지 사진

사진술이란, 화학 물질을 잘 이용하여 빛의 강약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어떤 영상을 보존하려는 기법이다.
최초의 흑백 사진이라 흔히 알려져 있는 것은 1825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어 니엡스라는 사람이 남겼는데, 노출 시간이 무려 8시간에 달해서 태양이 한 나절 동안 만들어 낸 그림자가 모두 사진에 담길 정도였다.
19세기 중반에 유럽에서는 이미 흑백 사진 기술은 사실상 안정화가 되었다.

그러나 흑백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재 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은 빛이 RGB 세 축으로 분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낸 후 1861년, 최초의 컬러 사진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물론 지금처럼 쉽게 한 방으로 찰칵 찍은 게 아니라, 색깔 축별로 사진을 세 장 찍어서 정교하게 합성하여 만든 것이므로 방법이 쉽지는 않다. 그 전에는 흑백 사진에다가 수작업으로 색을 입히는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2차 세계 대전은 물론이고 1차 세계 대전과 1900년대 초를 찍은 컬러 사진도 "존재"는 한다. 단지 실용화가 안 됐을 뿐이지. 컬러 사진 기술 자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일찍 등장했다. 한국에서는 6· 25 사진조차도 컬러를 보기가 쉽지 않으나, 서양인이 구한말 1900년대 초에 서울 모습을 찍은 컬러 사진도 극소수 전해 내려오는 게 있다. 컬러 사진은 1920년대에 코닥 사에서 컬러 필름을 대량 생산하면서부터 보편화되었다.

※ 영화

기술적 토대는 19세기 말에 마련되어서 정말 초라한 흑백 무성 영화로 시작했다. 찰리 채플린 같은...=_=
그때 영화는 진짜 말 그대로 환등기 같은 걸로 틀어 주는 움직이는 그림일 뿐이었으며, 음악을 따로 곁들이거나 내레이터가 중간 중간 라이브로 설명을 해 줬다.

여기에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 기술이 결합하여 동영상에 소리까지 첨가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이다. 단순히 움직이기만 하던 그림이 말하는 그림으로까지 발전했다.
그 후 한동안 흑백 영화 전성기가 이어지다가 컬러 영화는 2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1940~50년대부터 차츰차츰 등장하기 시작했다. 십계(1956), 벤허(1959)가 그 초창기의 컬러 영화이며, 심지어 우리나라 6· 25 직후의 참상도 누가 컬러로 찍어 놓은 희귀 영상 기록이 남아 있다.

※ 텔레비전

비록 화질이 영화보다는 못하지만, 동영상과 소리를 전기 신호로 바꿔서 장거리로 송수신하는 방식이니, 기술적 난이도는 가장 높다고 볼 수 있다. 그 원리는 1920~30년대에 완성되고 실용화됐다.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음극선관(CRT)의 이름을 브라운관이라고도 일컫는다.

미국에서 1931년에 시험 방송이 시작되고 영국에서 1937년, 세계 최초의 TV 방송국인 BBC가 개국했다. 한국에서는 1956년이 돼서야 TV 방송이 첫 시작했다(물론 다 흑백). 즉, 일제 강점기 때엔 우리나라에 TV가 없었고,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이 지고 있다는 방송은 다 라디오를 통해서나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컬러 TV는 은근히 등장이 늦었다. 기술 개발이 성공한 건 1950년대이지만, 미국에서도 가격 장벽이 낮아지고 본격적으로 보급된 건 60년대가 돼서였다. 그래도 달 착륙 동영상을 흑백이 아닌 천연색으로 볼 수 있게 된 건 정말 천만 다행이다. 70년대 중후반부터 흑백은 이미 골동품 내지 휴대용 초소형 TV용으로나 전락했다.

우리나라는 잘 알다시피 5공 시절인 1980년대 초반이 돼서야 컬러 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3S 정책이라는 비아냥거림은 있다. 그런데 그럼 박 정희 때는 컬러 TV가 전혀 없었고 땡전 뉴스부터 천연색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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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천 년을 살아 오면서 뭔가 기록을 남기는 방법이란 글 아니면 기껏해야 그림밖에 없었다. 사진처럼 기가 막히게 초상화나 풍경화를 잘 그리는 화가가 장땡이었다. 아니면, 사람 얼굴 윤곽은 데스마스크 같은 걸로 남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던 것이 사진술이 개발되어 사진을 남기고 심지어 동영상을 만들고 이를 전파로 만들어 송출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전과 그 후의 인류의 삶의 양상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은 발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
1900년대 초에는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덕분에, 사람의 실물 사진도 모자라서 살아 있는 사람의 뼛속 사진까지 이미 찍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달한 사진술은 얼마 안 있어 금성과 달 같은 우주의 모습까지 담아 오는 데 성공한다.

사진을 한번 팟 찍으면 내 영혼이 빠져나가는 줄 알고 혼비백산했을 당대 사람들이 이해가 될 만도 하다.
사람을 해부하지 않고 자기 손의 뼈 사진을 봤을 때 그 심정이 어땠을까?
당대의 화가들은 사진술의 발명으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심각하게 재고하게 됐다고 한다.
(그래도 지금도, 도시 건물 같은 거.. 완전 실사 뺨치게 그리는 걸 업으로 즐기는 화가도 있다)

우리는 지금 불과 200여 년 전 사람들조차 상상도 할 수 없던 대단한 문명의 이기를 당연하게 사용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스팸 메일 없는 이메일을 상상할 수 없듯,
사진술의 대중화와 동시에 인류는 이제 음란물과의 전쟁을 치르기 시작하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10:39 2010/01/1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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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폭탄, 기타 이것저것

20세기에 인간이 이뤄낸 위대한 과학 성과 중 하나는 원자력에 대한 지식이다.
학생들이 무려 고등학교나 대학 학부 수준에서 배우는 물리 교재에 chapter가 하나 추가될 정도로, 종전의 고전 역학과는 차원이 다른 지식이 추가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예전에는 미처 상상도 할 수 없던 어마어마한 동력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원자력 발전은 태양에 전혀 근간을 두지 않고 에너지를 얻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20세기 이후에 시작된 찬란한 전기 문명은, 교류 전기의 실용화와 더불어 원자력 발전도 큰 일조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력은 이내 핵무기라는 것을 만들었고, 국제 사회 정세를 완전히 다른 양상으로 바꿔 놓기도 했다. 예전에는 마음에 안 들면 애들처럼 서로 주먹으로나 툭탁거리고 싸우던 것이, 이제는 총을 손에 쥔 거나 마찬가지가 됐다는 소리이다.
 
현재까지 인류 역사상 자국민이 사는 도시에 핵무기를 맞아 본 나라는, 잘 알다시피 전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그것도 두 번이나 맞았다. 2차 세계대전의 말기에 유럽에 독일, 이탈리아는 다 항복하고 히틀러마저 제거됐는데 아직 일본만 유일하게 개기고 있어서 저랬다. '무시무시한 폭탄'을 맞고서야 정신을 차린 일본은 왕이 직접 서면으로 연합국에 항복하고, 자기 식민지들에 대한 권리도 일체 포기한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이 정말 극적으로 끝나고, 우리나라도 일제로부터 해방된다.

아마 우리나라가 이렇게 당했으면 미국하고는 완전 철천지원수가 됐을 것이다. 방사선 피폭은 대물림까지 된다. 그 데미지의 레벨이 6 25 때 무슨 노근리 학살 같은 거하고 비교가 되나?
 
잘 알다시피 원폭은 1945년 8월 6일에 히로시마 상공에 먼저 떨어졌다. 의역 좀 하면 '귀여운 꼬마애'뻘 되는 길이 약 3미터, 무게 약 4톤쯤 되는 Little Boy 폭탄이 어지간한 여객기 고도와 비슷한 9.5km 상공에서 전투기로부터 투하되었다. 타이머를 걸었는지 뭐 어떻게 activate가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폭탄은 한참을 추락하다가 약 550m 상공에서 그대로 펑 터졌다.
수류탄도 그렇고 폭발물은 약간 공중에서 터져야 사방팔방으로 가장 큰 파괴력이 나오는 법. 이 원폭도 일종의 공중 폭발을 일으켰다.
 
곧바로 눈을 보호하기 위해 가글을 착용한 당시의 전투기 승무원들은 정말 경악할 만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을 것이다.
이것은 보어, 페르미, 천재 컴퓨터 과학자인 폰 노이만 등 이름만 들어도 아는 당대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일본 본토 지형을 치밀하게 분석하고, 폭탄을 어디에서 투하하고 터뜨려야 가장 큰 피해가 나오는지까지 계산하여 진행한 프로젝트였다. 그 첫 실험 대상으로 일본이 선택된 것이다.
 
눈을 상하게 할 정도의 엄청난 섬광이 비쳤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마어마한 불기둥과 무시무시한 후폭풍. 하늘이 어두워지고 그저 도미노처럼 힘없이 주저앉는 건물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순간.
아마 핵실험 촬영 같은 것도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zoom 무지막지하게 당겨서, 과장 좀 보태면 천체 활동 관측하듯이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히로시마 시는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다. 죽은 사람 시체 사진을 보니까 거의 유대인 홀로코스트 내지 관동 대지진 학살 사진 수준이었다.
물론 그 며칠 전에 미국에서는 원폭 투하를 예고하고 어서 대피하라는 경고 전단지를 살포하긴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방식이 "설마? 뭐 좀 위력이 큰 폭탄 떨어져 봤자, 늘 하던 대로 방공호로 대피하면 되겠지" 수준이었으며, 결국 원폭에 고스란히 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런 예화는 기독교에서 복음 전할 때 자주 인용, 등장하기도 한다.)
 
나는 일본에 대해 완전 몸서리치게 증오하거나 딱히 피해 의식이 있지는 않다. 원폭 맞아서 도시 전체가 저렇게 개떡이 되고 만 것은, "꼬시다 쌤통이다 메롱"까지는 아니더라도, 감정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봐도 정말 일본이 자기네가 심은 대로 거둔 것이다.
 
우리한테 한 짓이 얼마인데! 특히 잊어서는 안 되는 그들의 죄악 중 하나는, 관동 대지진 때 민심이 흉흉해지니까 조선인들을 폭도로 몰아서 수천, 수만 명을 다 학살하고, 그걸 일본 경찰과 정부 당국은 일부러 묵인까지 해 준 사실이다. 독립 운동 항일 투쟁을 하던 사람도 아니고 멀쩡한 민간인을! 사태가 수습된 뒤에도 이 학살극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을 진 쪽은 일본에 아무도 없었다.
 
외모가 비슷하니까 일부러 한국인이 발음하기 힘든 일본어 단어를 발음까지 시켜서 사람을 죽였으며, 그러다 심지어 몇몇 자국인도 오인 살해 당했다고 한다. 성경에서 사사기 12장 5~6절을 읽어볼 것. 오히려 조선인을 단원으로 고용하고 있는 야쿠자 같은 조직에서 조직원의 목숨이 위태로우니 애써 숨겨 줬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니 저런 죄값쯤은 좀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원폭 피해자 중에서도 조선인이 일부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자기가 저지른 죄에 대한 언급이나 진정한 반성과 사죄는 싹 회피하고, 오로지 핵폭탄을 맞아 자기네가 불쌍한 피해자인 것만 부각시키면서 동정을 호소하고 있으니, 경계해야 할 점이 아닐 수 없다. "다시는 이런 실수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 일본 문화 특유의 뱅뱅 돌려 말하는 모호한 표현인데.. 도대체 그들은 무엇을 실수라고 생각하는 걸까?
 
'귀여운 꼬마애'를 실은 전투기를 조종한 사람은 폴 티베츠라는 베테랑 공군 조종사이다. 당시 30대 초반의 혈기왕성한 대령이던 그는 2차 세계대전을 종식시키는 데 일조한 영웅으로 미국 내에서 추앙 받았으며, 나중에 원스타 준장으로까지 진급한 후 전역했다. 그리고 천수를 누리며 굉장히 오래 살다 2007년에 작고했다.
그는 2002년이던가 미디어를 통해, 당시의 원폭 투하는 그저 명령에만 따른 것일 뿐 딱히 개인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회고했다.
 
사흘 뒤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된 원폭은 원판보다 더 뚱뚱하고 위력도 좀더 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평지인 히로시마와는 달리 나가사키는 지형의 기복이 큰 편이어서 히로시마 만한 데미지는 나지 않았다.
 
핵무기까지 가미된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세계 지성인들의 세계관, 인간관은 정말 큰 변화를 겪게 되었음이 틀림없다. 아마 성선설에 대한 믿음이 크게 흔들리게 됐을 것이고, 이런 과학 기술로 이런 규모의 전쟁이 앞으로 더 터졌다간 진짜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경각심을 갖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국가 위의 다른 중재 조직이라도 만들어서 세계 열강이 또다시 이런 끔찍한 전쟁에 도미노처럼 휘말리는 것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유명무실하던 국제 연맹도 없애고 국제 연합이라는 조직이 새로 생겼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세상에 전쟁이 없어지지는 않고 있다. 사악한 자에겐 결코 평화가 없다고 말하는 주님의 이사야서 말씀을 기억하자.
 
어쩌면 6 25 전쟁이 장기화되었다면, 냉전이고 나발이고 없이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10년이 채 안 지나서 한반도에서 거의 세계 대전급의 피터지는 싸움이 또 벌어졌을지도 모르며, 최악의 경우 핵무기가 또 동원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맥아더 장군을 욕하고 비판하는 진영이 이런 점을 주로 들추곤 한다. 하지만 이런 진영은 그 불행의 근본 원인 제공자에 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언급이 없고, 저런 식의 주장을 하는 의도가 매우 불순한지라 본인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불순하다.)
 
사실 6 25도 1951년 하반기 이후부터는 38선 인근에서의 지겨운 엎치락뒷치락 소모전 위주였기 때문에, 미국도 필요 이상으로 소련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도 않았으며 어지간해서는 승산 없는 이 전쟁에서 적당히 손 떼고 싶었을 것이다. 이승만, 맥아더 같은 짝짜꿍이 맞는 꼴통(?)들만이 오로지 북진 통일을 고집했던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흘러 박정희 정권은 70년대 말에 우리나라도 전투기와 핵무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했다고 선언했다. 이는 박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국방 과학 연구소 연구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한 덕분이었다.
 
그는 더 나아가, 우리가 북한과 일본, 미국을 상대로 당당히 큰소리 치려면 우리도 핵무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박정희가 부하의 총에 맞아 비명에 가지 않았다면, 그리고 이휘소 박사 같은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 않았다면 한국의 역사가 또 바뀔 수 있었을까? 얘기를 더 하자면 정치성 논쟁이 되므로 이 자리에서는 생략하겠다. (그런데 정작 이휘소 당사자는 오히려 유신 독재와 핵무기 개발을 강력 반대했던 걸로 유명하다. 김진명 씨의 소설에 나오는 설정은 허구이다 ^^)
 
아무쪼록 이 바닥으로 글을 쓰면서 또 느낀 것은, 역시 아는 것이 힘이고 냉혹한 세상에서는 힘이 최고라는 것. 어차피 강자와 약자가 둘 다 시편 20:7 말씀을 모르거나 안 믿는 상황이라면 말이다.
"무기를 만드는 자는 지배자가 되고 방패를 만들지 않는 자는 노예가 된다는 진리"는 돌도끼로 전쟁을 할 때부터 미사일로 전쟁을 할 때까지 인류문명이 만들어 놓은 진리이다. 과거에 우리나라가 힘이 없어서 일제에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국민들이, 일본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이 부족해서 양국의 국력 차이가 그 정도이고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일본에 있는 동급의 저질 찌질이들하고 같이 댓글 논쟁, 사이트 DDOS 공격이나 주고받으면서 그게 애국인 줄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일본으로부터 받아낼 건 비용 대 효율 최대로 받아내고, 말 없이, 모방을 통해 창조를 해 내고, 실력을 쌓고 기술을 개발하고 국부를 창출하는 것이 일본을 가장 수준 높게 이기는 것이다. 일본을 그런 방법으로 이기려고 애썼던 옛날 지도자의 공도 과와 더불어 객관적으로 인정과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덧.
이 글의 전반적인 논조로부터 느껴졌겠지만, 본인은 원자력 발전 찬성이고, 핵무기 개발도 그렇게 반대 안 한다. 남이 만들면 우리도 해야 된다 주의에 가깝다. -_-;; 그깟 인본주의적인 반핵 반전 운동 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가 유지될 거라고 믿지 않는다.

Posted by 사무엘

2010/01/11 10:01 2010/01/11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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