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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은 가까운 이웃 나라이지만 기독교계 종교에 대한 정서는 거의 지구와 금성의 차이만큼이나 극과 극이다. 물론 일본뿐만이 아니라 북한 내지 중국하고 비교해 봐도 극과 극에 가까운 건 마찬가지이지만.

난 솔직히 말해 일본의 보편적인 종교관을 잘 모르겠다. 완전히 불교도 아니고 유교, 도교도 아니고 전적으로 샤머니즘이라고 봐야 하는 건지? 신사는 무엇이고 덴노(일왕/천황)는 무엇이고 이들이 정치 종교 통합적인 존재인지? 어쨌든 기독교 배경이 절대로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한국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단군을 숭배한다거나 하지는 않는데?

일본은 서양 문물을 잘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잘해서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며, 반대로 다른 식민지를 거느리고 침략 전쟁을 일으키기까지 할 수 있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종교 교리도 당연히 전파되었고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단,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 계열은 아니고 스페인의 예수회가 주축이 된 천주교 중심이었다.

16~17세기 사이는 조선에서는 임진왜란이 벌어져서 나라가 작살이 나 있었고, 서양의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찰스 1세의 순으로 왕이 바뀌고 있었다. 신대륙에서는 버지니아 주 제임스타운, 포카혼타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스페인에서는 종교 개혁을 저지하고 유럽을 다시 가톨릭화하기 위해 예수회가 만들어졌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 천주교가 전래되었다.

조선도 한때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없지는 않았다. 황 사영 백서 사건 같은 병크 때문에 스스로 매를 번 것도 있었고. 하지만 그 기간이나 규모는 일본의 박해에 비할 바는 못 됐다.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부터가 극렬 "안티개독"이었으며, 정말 중세 종교 재판을 뺨치는 가학· 변태적인 악랄한 고문과 형벌로 신자들을 괴롭히고 죽이고 박멸했다. 천주교고 기독교고 그딴 건 그 양반이 알 바 아니었을 테고.

다른 때도 아니고 서양에서는 킹 제임스 성경이 나오는 동안 동양에서 저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천주교 기독교를 떠나서 일단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은 일본의 B급 새디스트 사극 영화의 좋은 소재가 되어 왔다. <쇼군의 새디즘>처럼.
사람을 십자가에다 묶어 놓고 산 채로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기, 미꾸라지가 가득한 어항에다 사람을 옷 벗겨서 집어넣기, 썰물 때 바다 갯벌에다가 십자가 기둥을 꽂고 사람을 거꾸로 묶어 놓기(그 상태로 나중에 밀물이 되면..;;) 이런 건 중세 서양에서는 못 본 장면 같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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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육체적으로 끔찍한 형벌이나 고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런 것도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당시의 기독교인을 색출, 고문, 박해하는 형태를 여러 가지로 연구하면서 철두철미하게 기독교 박해를 자행했다. 십자가나 예수나 마리아 상을 새긴 동판이나 목판 위를 밟게 함으로써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후미에 제도는, 1629년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걸쳐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어디에 절을 해라", "입으로 믿음을 부인해라", 아니 단순무식하게 "김 일성 개XX 해 봐라" 식의 더 간단한 판별법도 있었을 텐데, 저건 그야말로 성상, 형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스타일에 최적화된 판별법이라 여겨진다. 나 같았으면 저런 건 걸릴 게 없었을 것이다. 마치 주의 만찬이 끝나고 남은 빵과 포도 주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누가 몽땅 집어먹거나 여느 잔반을 처리하듯이 임의 처분해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소설 <바비도>에 나오는 것처럼, 성찬식에 대한 견해 하나만으로도 서양에서는 한때 순교 사유였다. 기독교인이 천주교인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북한은 민주화에 실패하고 8월 종파 사건을 계기로 완전 김씨 일가의 철권독재 생지옥으로 전락했다. 종교도 주체사상 외에는 당연히 전면 말살. 스페인은 종교 개혁이 실패하고 다시 가톨릭 국가로 돌아가서 20세기까지만 해도 누가 '개신교인'(천주교의 입장에서 기독교의 호칭)이 되면 잡혀 가는 나라가 됐다.

그것처럼 일본도 이 박해를 못 이기고 천주교/기독교를 막론하고 양놈(이 또한 엄밀히 말하면 양놈이 아니라 유대계=_=) 종교는 거의 씨가 말라 버렸으며, 그 상태가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신교 계열 교파가 나중에 안 들어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1억이 넘는 일본 인구 중에 그나마 명목상 교회 다니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은 몇십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배경이 있는 일본은 오늘날까지도 이슬람도, 공산주의도 아니고 나름 자유 진영의 강대국 선진국인 것치고는 상당히 이례적인 기독교 선교의 불모지로 여겨진다. 솔까말 기복신앙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뭐, 국가가 부유한 것만치 국민들이 다 잘사는 건 아니더라도 말이다. 쟤들이 과거에 한국의 크리스천들을 박해하긴 했지만 역사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아예 자국민에 대한 천주/기독교 박해는 그 이상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사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인이 일본 선교를 가는 건 마치 요나가 니느웨로 설교하러 가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앗시리아가 훗날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게 뻔히 보이니, 요나는 니느웨로 가기 싫어서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생쑈를 했던가? 하지만 인제 와서 일본에서 니느웨 같은 대각성 부흥이 과연 일어나기라도 할지는 좀 회의적이다. 성경적으로 민족주의를 적용할 문맥이 있고 그게 별 의미나 영양가가 없는 문맥도 있는 법이다.

한국은 역사가 워낙 스펙타클하다 보니, 조선 정부에 의한 박해보다는 일제 말기에 일제로부터의 박해, 그리고 해방 후에 공산주의자에 의한 기독교 박해가 더 부각되는 편이다. 그리고 아시아의 여느 나라들과는 달리, 기독교회가 이 정도로 양적 성장을 이루는 이례적인 선례를 세계에 남겼다. 신자라면 감사할 일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21 08:31 2015/08/2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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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손 평전

성경에 나오는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치고는 너무 괴팍하고 특이했던 사람이며, 천하장사였지만 여자에게 배신을 당해서 인생을 망친 비운의 사나이라고 비기독교인에게도 그럭저럭 알려져 있다.
삼손은 혼자서 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살상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식으로 군대를 소집하고 전쟁을 벌여서 블레셋으로부터 확실하게 독립을 쟁취해 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명색이 민족 지도자인데 적국의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 너무 똘끼 넘치게 행동했다.

민족 대표, 민족 지도자라 불리는 사람은 적국이 아니라 그냥 중립적인 외국인을 애인· 배우자로 맞이하는 것만 해도 민족 정서상 대외 평판에 절대로 좋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연걸의 정무문> 영화에서 일본인 여자를 사귄 진진, 그리고 에티오피아 여인과 재혼했다고 비방을 받은 모세(민 12:1) . 거기에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 승만도 그 많고 많은 한국 여자를 놔 두고 '호주댁'과 결혼했다고 비방 받곤 했다. 삼손 역시 그런 격이었다.

사사기 14장을 보자. 그는 부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첫 블레셋 여인에게 청혼을 하러 갔다. 그런데 포도원에서 사자를 만났다. 이건 단순히 위험에 처한 상황이기에 앞서 여러가지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왜 포도원인 걸까?

삼손은 나사르 서원의 적용을 받는 사람이어서(삿 16:17) 머리를 깎는 것뿐만이 아니라 포도도 절대 금지이다. 단순히 알코올 성분이 든 포도주를 안 마시는 것 정도를 넘어, 아예 생 포도송이, 포도 주스, 건포도 같은 것도 먹어서는 안 된다. (민수기 6장 참고) 불자에다 비유하자면 오신채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삼손은 왜 포도원을 갔을까?
그리고 포도원에서 뱀이라든가, 혹은 여우(아 2:15)처럼 성경에도 나오고 이솝 우화에도 나오고 침입자로서 비교적 흔히 연상 가능한 동물을 만난 게 아니라, 하필 야생 맹수인 사자를 만난 걸까?

구약 역사서에서 동물 사자는 사람을 징벌하는 용도로 종종 쓰였다. 그러나 저기서는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몬스터/몹만 소환한 게 아니라 Doom 2 게임으로 치면 Berserk 파워업 치트키를 먹여 주셨다. 다윗은 돌팔매질로 맹수들을 내쫓았다지만, 삼손은 도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냥 맨주먹으로 사자를 찢어 죽였다. FPS 용어로 치면 gib을 했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무용담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습니다"라는 공개적인 간증거리가 될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화재 현장에서 저를 기적적으로 지켜 주셨습니다" / "오 그래요? 어디서 화재를 겪으셨는데요?" / "나이트클럽에서요" =_=;;; 이런 꼴이었기 때문이다.
삼손은 공인으로서 포도원 안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는 얘기를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나중에는 삼손이 죽인 사자의 시체에도 이변이 생겼다. 더러운 구더기가 들끓는 게 아니라 여왕벌이 들어오기라도 했는지 안에 벌꿀이 생겼다. 하지만 아무리 꿀이어도 그렇지 저건 시체 안에 담겨 있는 건데..;;
원효대사의 이야기만 봐도, 밤에 마셨던 물이 더러운 해골 안에 담겼었다는 걸 알게 되자, 그 사람이 우웩~ 하면서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그런데 삼손은 참 멘탈도, 비위도 강했나 보다. 부정한 걸 만져서는 더욱 안 되는 나사르 인인데도 손수 사자의 시체를 뒤져서 꿀을 가져와서는 자기도 먹고 부모에게도 줬다.
이것 다음에 꿀 이야기는 사무엘기상 14장에서 또 나오는데 이것과는 어떤 영적 관계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삼손은 혼자서 사자를 때려 잡고 그 시체에서 꿀까지 득템한 행적을, 비록 공개적으로 간증은 못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분명 뿌듯한 자랑거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율법을 몽땅 어긴 건 안중에 없고 말이다.
그래서 결혼식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그걸 절대 풀지 못할 수수께끼 문제로 냈다. 사자와 꿀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리기란 물론 불가능했다.

삼손의 친구들은 치사하게도 삼손의 여친을 공갈 협박해서 답을 알아 냈다. 이것은 오늘날 정보 보호· 보안의 관점에서도 의미 있는 사례이다. 이중 삼중으로 복잡하게 암호를 걸어 놔도, 관리자 당사자 내지 그 지인을 매수하거나 족치는 데 성공하면 그냥 끝이니까. 결국 모든 문제의 정점에는 사람이 있다.

이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졌으며, 옷 서른 벌을 마련하느라 다른 동네의 블레셋 사람 30명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게 됐다. 옷 서른 벌 때문에 30킬이라니 오늘날로 치면 그야말로 개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가 따로 없다. "피해자들은 모조리 시체도 없이 실종"되거나 또는 "피해자들은 모두 겉옷이 없어졌다는 공통점 있음" ㅎㄷㄷㄷㄷ
그 시절에 마을 곳곳에 CCTV가 없었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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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림의 출처는 삼손의 생애를 그린 칙 출판사 만화 전도지 <Superman?> (1990) 편.)

그리고 또 생각할 점이 있다. 피해자가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벗겨서 줘야 하니, 사람을 죽이는 것도 옷이 찢어지거나 핏자국이 묻지 않게 매우 조심해서 죽여야 했다는 점이다. 때리거나 칼로 찔러서는 안 되고, 뒤에서 덮쳐서 목을 조르거나 비틀기라도 해야 했을 것이다. 물론 삼손은 워낙 천하장사 인간흉기였으니, 사람 목을 움켜쥐고서 손가락에 까딱 힘만 주면 곧바로 경동맥이 작살이 났을 테고, 사람을 무슨 개미를 눌러 죽이듯이 죽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중에 당나귀 턱뼈로 블레셋 사람 1천 명을 죽인 건 고전 FPS로 치면 천하무적 주인공이 잡몹들을 싸그리 사냥하면서 1000 kill / frags를 달성하는 것과 똑같다. 삼손의 이야기는 은근히 게임스럽다. 턱뼈가 아니라 칼이나 창 같은 진짜 냉병기가 있었다면 삼손의 주변에 있던 적군들은 그냥 죽는 수준을 넘어 그야말로 사지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단, 이 사건은 포도원에서의 사자 킬과는 달리 공적인 찬양 명분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삼손은 딱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내가 당나귀 턱뼈로 시체로 산을 쌓으며 1천 킬을 달성했도다"라고 으쓱하기만 했다(삿 15:16).
이에 삼손은 싸움을 다 이겨 놓고는 곧 극심한 갈증으로 인해 죽을 지경이 됐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당장의 기도 응답과 승리는 주시지만 그래도 뼈 있는 경고도 같이 주셨다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경고에 담긴 메시지를 삼손이 더 일찍 간파했으면 자기 자신이나 민족이 훨씬 덜 불행을 겪어도 됐을 텐데 말이다.

이것들 말고도 삼손의 차력 기행 중에는 성을 탈출하기 위해 그 크고 무거운 성문을 잠금 장치까지 포함해 통째로 뜯어 버린 뒤, 그걸 방패 삼아 등에 지고 도망친 것이 있다(삿 16:3). 못해도 수백 kg 내지 몇 톤에 달하는 무게였을 것이다.
이 정도면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전의를 상실케 하는 충격과 공포 도시전설 괴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엔 상황이 역전되어 블레셋에서 골리앗이 배출된 것이 참 공교롭다. 삼손과 골리앗이 일대일 맞장을 떴으면 어땠을까? =_=)

그런데 삼손이 그저 무식하게 힘만 셌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잡아 꼬리와 꼬리를 묶고 불붙는 나무 조각들을 취하여" (삿 15:4)
이것도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알아야 한다.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산과 들로 나가서 여우를 300 마리나... 그것도 학살이 아니라 산 채로 수집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얼마나 들었을까?

이건 힘만 세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퀘이크로 치면 Frags나 Excellent가 아니라 Impressive, Perfect, Accuracy 같은 분야에 속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생포하는 과정에서 여우를 다리 같은 걸 조금이라도 다치게 해서도 안 된다. 여우들을 꼬리에 불을 붙인 채 풀어 줘서 남의 밭을 왕창 불태워 버릴 작정이었으니 말이다. 얘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밭을 전속력으로 뛰어다닐 수 있는 상태여야 한다!

삼손은 늘 개인 플레이를 하다 보니, 딱히 자기 동지· 부하나 공범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만에 하나 공범이 좀 있다 하더라도 여우를 300마리나 곱게 사로잡는 건 어떤 방법으로든 정말 보통일이 아니다. 삼손은 굉장한 근성가이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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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삼손이 한 순간의 실수로 인해 너무 허무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자기의 엄청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헬스 트레이너-_-로든 성경· 정치· 군사 어느 쪽으로도 후계자 양성을 못 하고 정규전 한 번 제대로 못 치른 채 혼자 원맨쇼만 일삼다가 자폭으로 모든 것을 끝냈다.

삼손은 들릴라의 치명적이고 위험천만한 질문에 대해 너무 째째하고 진지하고 재미없게(?) "당신, 내 힘의 근원을 알려고 했다간 다쳐. 그런 건 다시는 묻지 마시오. / 내 힘은 우리 민족의 신인 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오" 이렇게 원천차단 돌직구를 날리기에는... 너무 대인배였다.
예전에 사자를 죽이던 시절부터 수수께끼와 내기를 즐기던 근성이 여전했다. 이제는 절대로 유출되어서는 안 되는 자기의 힘의 근원마저도 수수께끼 소재로 삼아서 "그게 궁금해? 그럼 내가 힌트 줄 테니 알아맞혀 보셔" 유흥거리로 생각했다. 그러면서 살얼음판위를 걷는 것과 같은 위태로운 게임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하지만 그는 영적으로 순진하고 철딱서니 없는 구석은 있을지언정, 교활하거나 나쁜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동족들로부터 버림받을지언정 자기가 먼저 동족을 해치지는 않으려 했으며, 철저하게 피아 구분을 할 줄 알았다. "나 한 몸 죽어서 다른 사람들을 살리리라"라는 뭔가 요나와 예수님의 예표스러운 행적도 있다.
그 스펙과 지위에도 불구하고 여자한테는 완전 순애보였고..;; 어쨌든 교활 잔머리의 천재인 발람하고는 억만 광년 떨어진 성향이었다.

"오 하나님이여 간구하옵나니 이번 한 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들이 내 두 눈을 뺀 것을 단번에 원수 갚게 하옵소서. (...) 나를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죽게 하소서"(삿 16:28,30)는 눈물이 핑 돌 정도의 회한 서린 비장한 기도가 아닐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람은 적군에게 잡히고 나서 꼴좋다고 얼마나 새디스틱한 모욕과 능멸을 당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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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로 치면 ㅎㅎ/ㅋㅋㅋ를 W를 붙여서 haw haw라고 표현하는 건 칙 만화 전도지의 고유한 관행이다.)

가정용 소형 맷돌이 아니라 아예 감옥에 있는 대형 맷돌은 나귀나 소 같은 동물을 동원해서 돌리는 물건이다. 요즘 같았으면 당연히 내연기관이나 모터를 쓰지 생명체는 쓰지도 않는다. 자동차에 밀려서 인력거가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삼손은 딴 데다 비유하자면, 배나 건물의 지하 기계실 같은 데서 평생 힘만 쓰는 동력 셔틀로 전락하고 말았다(삿 16:21).
작업 환경이 어두컴컴한 건 삼손에게는 별 상관이 없다. 어차피 눈이 없는 상태이니까. 사람을 무진장 귀찮게 하던 파리나 모기가 결국 생포당해서 날개가 뽑힌 것과 비슷한 격이다.

삼손의 생애를 각색한 드라마 중에는 (1) 들릴라가 마치 가룟 유다마냥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삼손을 배반한 것을 후회하고 울고불고 매달리는 이야기가 들어간 게 있다. 요즘 사람들은 절대적인 선악 구도보다는 대체로 입체적인 인물 위주의 휴먼 드라마를 좋아하니까.
또한, 삼손이 마지막 순간엔 자기가 신전의 기둥을 붙드는 것을 도와 준 소년에게는 몰래 (2) "고맙소. 당신은 이 신전에서 최대한 멀리 빨리 탈출하시오."(내가 곧 신전을 무너뜨릴 거니까)라고 귀띔을 하는 애드립이 있기도 하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진실은 저 너머에"이다. (1)과 (2)는 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는 애드립일 뿐인 것을 감안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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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따르면 삼손은 거대한 석조 건물을 맨손으로 붕괴시킴으로써, 자폭하면서 죽인 블레셋 사람 수가 생전에 죽인 블레셋 사람 수보다 더 많았다고 말한다. 저 정도 대형 신전은 폭탄 테러로 붕괴시킨다고 해도 TNT가 몇 톤짜리가 필요했겠는가? =_=;;; 이거 정말 그냥 웃어 넘길 일이 아니다.
(참고로 1995년 오클라호마 폭탄 테러가 TNT 2.3톤 정도의 위력이었으며 영국의 Gunpowder plot이 위력계수 0.55짜리 흑색 화약 1.n톤이니 TNT 1톤에 약간 못 미치는 정도의 위력으로 추정됨)

성경에 기록된 생전의 kill 수만 해도 최하 1000+30+알파인데, 저 붕괴 사고로 몰살당한 사람은 제일 적게 잡아도 3천 명가량으로 추정한다(삿 16:27, 30). 블레셋 민족의 원수 삼손이 재주 부리는 꼴을 보러 사람들이 참 많이도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20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로 죽은 사람이 600여 명, 부상자가 900여 명이니 저 살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추측할 수 있다.

삼손은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으며, 덕분에 자살· 자폭을 하고도 정황상 얼마든지 구원받는 게 가능하다는 예로도 언급된다. 삼손이 실존 인물일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는 믿음의 선진이라는 것을 히브리서의 저자(아마 사도 바울)가 확실하게 인증한 셈이다. "삼손도 믿음으로 신전을 무너뜨렸다." 같은 말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속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히 11:32).
또한 딸을 죽이는 대형 사고를 치긴 했지만 그래도 믿음이 있었고 나쁜 사람은 아니었던 입다 역시 같이 믿음장에 있는데, 삼손은 저 사람하고도 뭔가 통하는 맥이 있어 보인다.

그나저나 머털도사가 삼손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땄나 싶은 생각이 든다. 거기에도 머리털이 다시 자라는 게 나오는데..;;

Posted by 사무엘

2015/08/18 08:27 2015/08/1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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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말에서 "교장 선생님 말씀이 계시겠습니다"는 높임법이 잘못 적용된 비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에 말씀이 계셨느니라"(요 1:1)는 높임법이 아주 적절하게 쓰인 문장이다.
사실, '말씀'이나 '지옥' 같은 단어는 성경 용어로서 어쩌면 영어 단어보다도 잘 번역되고 잘 만들어진 단어이다. 성경 번역 같은 데서 영어에 비해 한국어의 어휘와 문법의 한계가 많은 편이지만, 그래도 한국어가 오로지 약점밖에 없는 건 또 아니다.

2. 여느 관광 여행이나 맛집 방문 같은 것이야 당연히 백문이 불여일견이며, 직접 가서 겪어 보고 체험하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글을 통한 간접 체험이 당대의 직접 체험보다 더 확실하고 더 낫다고 보증이 돼 있는 유일한 예외가 있다. 무엇일까? (힌트: 벧후 1:19, 요 20:29)

3. 세상의 다른 고전 문헌이나 골동품은 아무래도 제일 오래 된 필사본이 원문, original에 가장 근접해 있을 거라고 여겨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것들은 나이가 깡패이다.
그러나 이 책만은 애초에 오래 된 필사본 같은 건 닳아 없어지고 남아 있질 않으며, 반대로 최근까지도 잡초처럼 많이 필사되어 읽히고 내용이 일치하는 것으로 교차 검증된 집단이 진본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4. 세상의 다른 모든 텍스트들은 원어가 당연히 원저자의 의도에 가장 근접해 있고 가치가 가장 높다. 그래서 예전에 일본어 중역이던 텍스트가 나중에 직통 번역으로 재출간되고, 그 분야 전문가는 아예 원어를 공부해서 원문을 다시 구해다 읽는다.
그러나 이 책만은 번역본이 원어 원문에 꿀릴 게 없으며, 오히려 다른 n차 파생 번역본을 모두 판단하는 절대 기준이 되는 번역본을 보유하고 있다. 이건 무엇일까?

1과 2, 그리고 3만 해도 불신자의 통념을 한참 거스르며 상식을 벗어난 논리이다. 기독교는 원래 그런 종교이다.
그러나 반대로 1~3을 일단 믿는 사람이라면 4를 믿지 못할 이유는 추호도 없다고 여겨진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안타깝게도 안 그러시는 분도 있지만, 그분의 양심과 믿음이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밖에.
이것 말고 다른 분야에서도 1~9를 다 믿으면 10도 당연히 믿지 못할 이유가 없는데 도대체 왜 저러시나, 딱히 충분히 대안이 될 만한 논리 체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싶은 게 있다.

아무리 상수도관에서 깨끗한 물이 만들어져도 가정의 수도관이 더러우면 최종 소비자는 더러운 물을 받을 수밖에 없다. 4는 앞의 다른 명제들을 성립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 다음으로, 이 4에 대한 보충 설명 차원에서 성경을 구성하는 언어 계층에 대해서 살펴보자.

1. 원어
성경의 '원문'이 기록된 언어이다. 구약은 히브리어(다니엘서 같은 일부는 아람 어라 함), 신약은 그리스어(헬라· 희랍은 그리스와 동의어).
그럼 원어로 원문만 읽으면 끝이고 성경의 내용 전수에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서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1) 오늘날 성경의 최초 자필 원본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또한 그 어떤 성경 필사본도 단일 필사본에 성경 66권이 온전히 집대성돼 있지 않다. 즉, 이것들은 partial이다. 내용 자체가 변개된 필사본이 있긴 하지만, 변개되지 않은 계열의 필사본이라 해도 결국은 빠짐없이 모아서 짜깁는 과정이 필요하다.

(2)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는 이들 언어가 인지도와 중요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원어가 사어가 돼 있다.
여느 언어들이 그렇듯이 원어의 어휘 역시, 같은 단어라도 문맥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들이 굉장히 많다. 이 단어가 여기서는 무슨 뜻인지 분별해 줄 수 있는 절대무오한 권위자 역시 오늘날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도의 표적이 없는 것만큼이나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만든 사전· 어휘집도 100% 믿을 게 못 된다. 그러니 원어 원문만 있다고 해서 장땡이 아닌 거다. 환상을 깨시라.

2. 영어
오늘날 원어 원문이 갖고 있는 위의 문제들을 모두 해결하여 원어(영어) 원문(KJV) 차원의 지위를 가진 절대기준이다. 솔까말 기독교는 논리로만 따지면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가 있는 종교인데, 그 원천적인 권위가 무엇인지 정도는 인류 역사를 주관하는 하나님께서 보장을 해 주셔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만 그 체계 하에서 최소한의 '논리'와 일관성을 갖추지 않겠는가. 원어 원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배교한 불신자 신학자들의 말장난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게 말이다.

원어가 불필요하다거나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다. 단지 성경의 이 구절에서 이 원어를 어떻게 해석하는 게 맞는지 모르겠으면 KJV의 번역을 보면 된다. 요일 2:23 후반부가 원래 필사본에 있는지 없는지 궁금하면 KJV 구절을 보면 된다는 얘기다. 원어 원문조차도 KJV로 판단 가능하다. KJV는 단순히 가장 뛰어난 번역, 우수한 번역 차원이 아닌 것이다. 관점이 완전히 다르다. 이런 번역본 KJV에 하나님의 영감이 있는 걸까 없는 걸까? 판단은 여러분이.

KJV를 최종 권위로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 신자라면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적으로 생각을 해 보시라. 기독교라면 저런 절대 기준이 상식적으로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믿는 건전한 하나님이라면 언어 접근성으로 사람 차별을 하지 않으시며, 그런 것쯤은 보장해 주셨을 것 같지 않은가?

지옥에 대해 경고를 하기 위해 굳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내서 증언시킬 필요가 없듯(눅 16:27-31),
원어가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현대인들을 위해 굳이 그 시절의 원어 토박이를 무덤에서 끄집어내어 보내실 필요가 없다. 킹 제임스 성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이미 아버지를 보았거늘"(요 14:9)라고 책망했듯이, 킹 제임스 성경을 읽은 사람은 이미 원어 성경을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관계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성경 언어의 관계는 성경의 여러 비유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3. 자국어
절대 기준인 영어 KJV를 바탕으로 건전한 교리관을 갖춘 양심적인 번역자가, KJV의 표현을 그대로(가령, '유월절' 대신 '이스터', '기뻐하라' 대신 '잘 있으라', 요일 5:6-7도 온전히 갖추고 등) 자국어로 일관성 있는 스타일로 번역할 수 있다. 그 성경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복음 전하고 신앙 서적을 만드는 용도로 쓰일 수 있다. 이것은 "신들과 같이", "절대무오한"은 못 되더라도 노아나 욥이 "완전했던" 것과 같은 완성도를 갖췄다.

해당 자국어의 특성을 이용해서 번역을 아주 적절하게 할 수도 있지만(하나님, 말씀, 지옥 등), 어휘와 문법 체계의 특성상, 그리고 해당 언어권의 문화· 관습의 한계로 인해 KJV 특유의 도치나 중의성, 운율, 미묘한 문법 요소들을 다 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건 해당 언어나 번역자의 자질 문제가 아니다. 성경 강사가 영어 KJV를 참고하여 보충 설명을 해 주면 된다. 마치 데나리온이라는 화폐 단위가 요즘 물가로 얼마 정도라고 얘기하듯이. 오늘날 영어의 지위를 생각하자면 히브리어, 그리스어를 꺼내는 것보다야 상황이 훨씬 더 나아진 것이다.

(그럼 원어에서 영어로 번역될 때는 원어의 모든 뉘앙스가 고스란히 옮겨지는 게 가능했느냐 하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언어학적인 팩트 답변도 있고, 그것만으로 좀 확신이 안 서서 믿음의 영역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넘겨야 하는 면모도 있다. 이 글에서는 이 정도까지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다만, 각 언어마다 최종 권위가 제각각 또 있는 건 아니다. 그건 최종 권위라는 게 무슨 뜻인지 파악을 못 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단지 모든 언어적인 혼란을 일축하는 중심점에 영어 KJV가 있다는 것이 KJV 유일주의 신자의 믿음이다.

'영킹 유일주의자', '이중 영감론자' 등의 누명 내지 딱지에 전혀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그럼 그들이 미는 대안은 뭔데? '원어 원문 유일주의자'이건 '영어 숭배자'건 '자국어 만능주의자'이건, 어느 편에 서더라도 그에 대한 멸칭은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결국은 뭔가를 신념으로 믿는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마치 무신론도 유신론만큼이나 동일하게 신념이고 신앙인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겠는가? 원어 원문은 앞서 말했듯이 실체가 없으며, 반대로 자국어 최종 권위 운운은 당장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영어 중심이 가장 현실성 있고 균형 잡혔으며, 실제로 KJV의 출간 이래로 지난 400여 년간 역사적인 증거와 열매도 넘치는 건전한 관점이다. 애초에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과격하고 극단적인 교리를 믿는 신자가, 한 성경 역본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이와 일치하지 않는 역본은 틀렸다고 믿지 못할 이유는 단언하건대 절대로 없다.

Posted by 사무엘

2015/08/06 08:31 2015/08/0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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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허라이즌스 호, 명왕성 접근

지난 7월 14일, 인류는 드디어 "명왕성과 카론의 모습을 실제 컬러 사진으로 볼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 관련 링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와 세상에~!! 우주덕 천문학 덕후라면 저 사진 보고 감격에 눈물이 줄줄 흐르지 않을까 싶다.
이미 위키백과와 각종 인터넷 사이트들은 지금까지 상상도 아니면 작은 점으로만 존재하던 명왕성 그림/사진들을 죄다 레알 표면 사진으로 업데이트한 지 오래이다.

내가 대학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어 병특 회사에 다니고 <날개셋> 한글 입력기 버전이 3.x 후반대이던 2006년 1월, 뉴 허라이즌스 호가 발사되던 시절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리고 그게 우주 공간에서 총알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무려 9년 반을 날아간 뒤에야 인제 명왕성에 그럭저럭 도착했다. 욕봤다. 몇 년 전에는 "쟤는 아직도 토성과 천왕성 사이의 방대한 허허벌판을 열나게 뺑이 치며 날아가고 있겠구나!"하고 생각했더랬다.

뉴 허라이즌스 호가 있는 곳은 여기서는 빛이나 전파로도 가는 데 거의 5시간 반이나 걸린다. 그리고 지난 14일 저녁에 명왕성을 제일 가까이 통과했다.
명왕성에 무슨 착륙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인증샷 찍고 제대로 관측과 탐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단 몇 시간에 불과함.

뉴 허라이즌스는 1970년대의 작품인 보이저 1, 2와 파이어니어 10, 11에 이어 21세기에 오랜만에 발사된 외행성 탐사선이다.
옛날에 보이저 2호는 때마침 외행성들이 쭉 늘어선 시기에 발사를 잘 한 덕분에, 명왕성은 말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천왕성과 해왕성의 근접 사진을 유일하게 전해 줄 수 있었다. 토성에서 천왕성, 천왕성에서 해왕성까지 가는 데 2, 3년씩 걸렸다. 그만큼 거기는 공간이 방대하다.

그 뒤, 명왕성은 나름 유일하게 미국인이 발견한 태양계 행성이라고 해서 미국에서 애착을 많이 가졌다.
하지만 해왕성 이후로 거기는 뭔가 행성다운 행성이 없고, 명왕성은 너무 작았다. 더구나 유사 궤도에 명왕성과 비슷하게 생긴 왜소행성들이 연달아 발견되면서 명왕성은 행성 지위를 잃게 됐다. 그렇게 결정된 게 하필 뉴 허라이즌스가 발사된 지 얼마 안 된 2006년 8월인 것도 참 절묘하다.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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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명문 사립정글고>라는 웹툰에서는 명왕성이라는 이름의 학생이 저렇게 멘붕해서 열폭· 자폭하는 장면도 나왔다. =_=;;

한편, 킹 제임스 성경 신자라면 친숙할 라킨의 <세대적 진리>라는 책에도 행성들이 늘어선 태양계 그림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해왕성까지만 있고 명왕성이 없다.
그 이유는 그 책 자체가 명왕성이 발견되기 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명왕성은 1930년, 1차 세계 대전도 끝나고 대공황 이러던 시절에 클라이드 톰보라는 천문학자에 의해 발견됐다. 아마 은하의 생성 방식도 성운설이 대세이던 시절이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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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모교 고등학교에는 천문 동아리가 있었는데 이름이 POP (명왕성 너머의 행성)였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잘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태양계에서 태양이 전체 물질들의 질량의 99%를 넘게 차지하는 중력 끝판왕인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으로 그 중력이 내는 인력은 거리의 '제곱'에 비례해서 급격하게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해왕성보다도 더 먼 거리에 설마 단독 궤도를 가질 정도로 충분히 무거운 행성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행성이 딱 8개가 있다는 건 마치 정다면체가 딱 5개 있다는 것과 비슷하게 들린다.

그리고 끝으로.. 명왕성의 '명'은 한자가 '어두울 명'(冥)이다.
'사다'와 '팔다'가 형성자로 같은 '매'이고 '주다'와 '받다'가 역시 형성자로 같은 '수'인데 '밝다'와 '어둡다'까지 같은 '명'이라니 본인은 한자 내지 중국어가 참 이상한 문자와 언어라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저런 반의어의 소리가 동일해도 될 정도로 중국어는 성조가 음운 변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 같다. 물론 한국어에서는 '어둡다'라는 한자어는 '암'(暗)이 더 많이 쓰이긴 하지만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7/18 08:32 2015/07/1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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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예전에 한번 다윗과 미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작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자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 얘기를 작정하고 좀 늘어놓아 보겠다.

구약 성경을 좀 읽은 분들이라면 이미 아시겠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직후에는 왕도 아니고 대통령도 아니고 사사(재판관)라고 불리는 정치· 종교 지도자가 백성을 통치했다.
정치 삼권 중에서 입법과 행정이 빠진 사법이 부각되어 나오는 점이 특이하다. 입법은 이미 모세의 율법이 있으니 더 건드릴 필요 없고 행정은 글쎄..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니 너희 인간들은 이미 있는 법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법의 집행만 하라는 뜻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절의 사사는 말 그대로 판관 포청천 같은 위상이었다. 다만, 본업인 재판만 한 게 아니라 때로는 전쟁을 지휘하고 민족을 외세 식민 통치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다. (혼자 블레셋 사람들을 다 때려잡은 삼손도 사사였으니) 하지만 호화로운 궁전에서 산해진미를 먹고 수많은 종과 상비군을 거느리면서 산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다른 민족들의 왕과 비교했을 때 '가오'가 안 났다.

이스라엘 역사상 마지막 사사 겸 첫 대언자는 '사무엘'이었다. 그의 시대 때 백성들은 드디어 자기에게 왕을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삼상 8:5).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우리도 이방 민족들처럼 절대권력 국왕 휘하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보고 싶지, 하나님 특유의 '그때 그때 달라요' 식의 믿음 행사가 필요한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는 반역의 영으로 인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하는 꼬라지를 보니, 안 그래도 걸핏하면 전쟁에 외세 식민지인데 권력이 부족한 사사 통치 체계로는 나라의 앞날이 영 불안하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도 있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더니"란 표현이 사사기에 도대체 몇 번 나오던가? 사무엘은 인생이 다 좋았는데 자녀 교육만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이런 요구를 듣고는 불쾌한 반응이었지만 "이제 올 것이 왔구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긴 하지"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셨다. 애초에 율법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훗날 왕정으로 전환할 때 왕이 지켜야 할 덕목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기도 했다. "율법 말씀을 필사해서 부지런히 묵상해라", "권력의 상징이라고 해서 사치품인 동물 말을 너무 많이 장만하지 말라" 같은. 신명기 17장을 읽어 보면 참 절묘함이 느껴진다.

단, 하나님은 왕을 가져 본 적이 없던 백성에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거듭 확인시켜 주셨다. 간지 넘치고 뽀대 나는 왕권을 유지시키는 원천은 전~~부 죄다 너희들의 노동력과 세금이라는 것을 말이다.
얘들은 안 그래도 율법에 따라 종교적으로 바쳐야 하는 헌물들이 장난이 아닌데, 거기에다가 정치적인 세금 수탈까지 추가되면 도저히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왕정이 유지되는 동안 안식년은 사문이 되고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또 생산해야 감당이 되니까.

그때 가서 너무 힘들어 죽겠으니 도로 왕을 없애자고 하소연해 봤자, 대통령도 아니고 한번 왕좌에 앉아서 절대권력의 맛을 봐 버린 왕이 호락호락 하야해 줄까? 천만의 말씀. 역성혁명, 쿠데타 급의 일이 터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지 않는 이상 정세가 그렇게 바뀌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고는 단순히 "어쭈? 네놈들이 내 통치를 원하지 않는다고? 괘씸한 것들! 어디 엿먹어 봐라" 같은 보복성 공갈 협박이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하는 조언이었던 것이다(삼상 8:18). 성경은 생각보다 정치 분야의 통찰도 많이 담긴 책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본인은 "우리에게 왕을 주소서"라는 그 시절의 역사가 지금으로 치면 "우리에게 자가용을 주소서"와 비슷하게 읽힌다. 차가 있으면 이동이 정말 편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간지와 뽀대도 많이 난다. 그러나 차도 일단 장만하고 나면 유지비가 도대체 얼마나 깨지던가? 그야말로 그 사람의 생활 패턴과 경제 양상이 확 달라지게 된다. 빚 내 가며 차 잘못 샀다가 도로 무를 수도 없고 손가락만 빨며 카푸어로 전락한 사람 많다.)

아무튼, 이런 우여곡절 끝에 이스라엘은 역사상 전무했고 현재까지도 다시 없는 왕정 체제가 시작되었다. 베냐민 지파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출되었다. 성경의 사무엘기, 열왕기와 역대기는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중에서 이런 특이한 시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사울은 키 크고 잘생긴 미남이었다(삼상 9:2). 군사 영도력도 훌륭했고(삼상 14:47-48), 재임 기간 전체를 통틀어 봤을 때 후임인 다윗과 같은 수준의 큰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없었다(밧세바 간음, 인구 조사). 하지만 성경에서의 평가는 다윗과 너무 차이가 난다 싶을 정도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긴다.

사울은 영적으로 점점 타락했다. 다윗이 자신의 위험한 정치 라이벌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그를 정당한 이유 없이 죽이려 했으며, 다윗을 신고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막 죽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기가 금지해 놓고는 위급하니까 결국 부리는 영을 지닌 무당을 찾아가서 점괘를 구할 정도로 심각한 막장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런 행적에 대해서 본인은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정말 불신자스러운 '적당히' 세상적인 사고방식의 관점에 아주 충실했다. 세상의 정치판에서 성공하는 데는 이런 유도리 타입이 딱 적절하다.
그는 하나님께 대놓고 반역을 한 게 아니었고, 발람처럼 교묘하게 잔머리를 굴리는 사악한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 자기 마음을 전적으로 드린 건 아니었다.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과 완전히 일심동체가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경험하는 그런 영성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저런 부분적인 순종과 온전하지 않은 마음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 쉬운 것보다 하나님이 광장히 싫어하시는 사고방식이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잔인하고 부정적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하나님께 헌물로 바친답시고 가축들을 살려 갖고 왔다. 사무엘이 이를 지적하며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라는 그 유명한 말로 책망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상황 파악을 못 한 듯 회개하지 않고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먼저 혼자 휙 가 버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백성들 앞에서 가오가 안 서니, 같이 좀 나가시죠, 네?"(삼상 15:30)라고 자신의 정치 생명과 체면치레 걱정만 했다.

사실 사울은 예전에도 위급한 상황에서 사무엘이 좀 도착이 늦어진다 싶으니까 자기가 제사장 행세를 하면서 하나님께 헌물을 바친 적이 있었다. 성직과 관련된 절차와 규율이 제멋대로 문란해지는 걸 하나님이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는 구약 성경 역사서 곳곳에서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이때에도 사울은 제대로 회개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 내지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 같은 영적인 일에 전반적으로 관심이 별로 없는 딱 세속 정치가 타입이었다.

이렇게 사소하다면 사소하지만 근본이 글러먹은 사고방식으로 인해 하나님은 사울에게서 완전히 학을 떼 버리신 것이다. 이것이 사울이 간음과 살인방조죄를 저지른 다윗보다도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나게 저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내가 이렇게 비참해지면 하나님도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삼하 16:11-12)라고 말한 다윗하고는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예수 믿는 크리스천은 이 점을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거지이기라도 해서 사람으로부터 헌물을 받아야만 하고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해 줘야 할 처지가 전혀 아니란 말이다!

자, 사울이 몰락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충분히 분석과 설명이 됐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좀 꺼내 보겠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최후의 전투를 앞두고 그야말로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다윗은 자기가 쫓아낸 상태이고 사무엘은 죽고 없으며, 하나님은 그에게 아무 응답도 주지 않으셨다. 그러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것은 하나님이 변덕쟁이여서가 아니라 사울이 여전히 자신의 나쁜 버릇을 안 고치고 "흐음.. 대충 기도해 보고 이래도 응답이 없으면 마지막 카드로 점이라도 쳐야겠다" 같은 불순하고 이중적인 마음을 품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대상 10:13-14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애초에 여쭌 게 아니었다고 진술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있다.
엔돌의 무당이 불러 낸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이었을까? (삼상 28:7-14)

나도 옛날에, 한 15~20년쯤 전에는 무당이 불러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개 무속인이 그렇게 죽은 사람의 혼을 불러낼 능력이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그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생각이었으며,
또 진짜 사무엘이라면 지금이라도 사울과 다윗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겠지, 저렇게 잔인하고 매정하게 사울을 멘붕시키고 죽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인간적이고 '사람을 살리는' 사고방식이 당시에 더 우세했기 때문이다. 마치 입다의 딸이 설마 진짜 죽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물론 지금은 진짜 사무엘이라고 생각이 바뀐 지 오래다.
무당은 평소에 하는 것처럼 사무엘 행세를 하는 부정한 영이나 하나 불러내려고 푸닥거리를 했는데.. 하나님이 그 타이밍에 맞춰 레알 사무엘을 소환시켜 주셨다. 돌발 예외상황이 발생하는 바람에 무당은 깜짝 놀라 자빠지고, 자기에게 온 고객이 무려 이 나라의 왕인 것도 알아채게 됐다.

그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인 가장 성경적인 이유는.. 인간적인 거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사무엘의 예언이 다음날 정말 문자 그대로 정확· 정밀하게 적중했기 때문이다. 비록 마귀에게도 예언을 적중시킬 능력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모호하게 한 예언이 어쩌다 부분적으로 적중할 수도 있지만, 일단 저 문맥에서 사무엘이 가짜라고 생각하기에는 "예언의 성취"라는 건 성경 전체에서 일관되게 너무 너무 긍정적으로 흐르는 심상이다.
욥의 행동에 대해 사탄이 예언한 것, 이스라엘을 말아먹은 거짓 대언자들의 온갖 거짓 예언들 등등과 비교했을 때 말이다. "예언의 성취 여부"만이 중요하지 그 예언에 담긴 메시지가 긍정적인 내용이냐 부정적인 내용이냐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이런 것들이 성경을 많이 읽으면 자연스럽게 사고방식이 성경의 저술 분위기대로 바뀌는 현상이다.
다른 예로, 한때는 예수님이 그저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피땀 흘리면서 울부짖었고, 동정과 연민 때문에 울었을 거라고 나도 실제로 생각했다. 하지만 성경을 제대로 많이 읽고 나면.. 그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셨다는 게 납득이 되게 된다. 그런 것과도 같은 이치이다.

끝으로, 사울은 죽어서 어디로 갔을까 하는 문제가 있다. 말년에 너무 타락했고 자살까지 했는데 도저히 하늘로 갔을 것 같지 않지 않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신 듯. 성경에서도 사울은 신약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한 단서를 얻을 수도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구원조차 못 받은 사람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아무래도 사울도 구원받은 사람인 사무엘 내지 요나단과 같이 있을 거라는(= 낙원에) 언질이 있으니(삼상 28:19) 굳이 따지자면 사울도 구원은 부끄럽게나마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일단은 지배적이다.
신약에 부끄러운 구원의 상징으로 아나니야와 삽비라가 있다면, 구약에서는 사울이 그와 비슷한 급이 아닐까 싶다.

관심 있는 분은, 사울 왕과 관련된 의문을 더 자세하게 다룬 윤 성목 목사님의 글을 참고하시라.
난 아시다시피 '새마을'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닉으로 쓰고 있다. ㅎㅎ

Posted by 사무엘

2015/06/21 08:28 2015/06/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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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의자, 피의자, 피고(인), 범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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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류, 금고,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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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태료, 범칙금, 과료, 벌금, 추징금
  • 불법주차, 부정주차

법률 용어에는 비슷해 보이지만 관점이 서로 다른 개념들이 의외로 많다. 이 글에서는 자동차 운전과 관련된 것들을 좀 살펴보도록 하겠다.

신호와 속도는 딱히 악의적이지 않아도 운전자가 경미하게라도 종종 위반하기 쉬운 사항이다. 주변에 차가 없고 위험 요소가 보이지도 않는데, 고지식하게 기다리기 싫고 규정 속도대로만 가기가 싫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게다가 그놈의 노란불 딜레마 때문에 어영부영 하다가 본이 아니게 신호 위반에 걸리기도 하며, 이 때문에 면허 시험에서 떨어지기까지 하면 억울함과 짜증이 최악에 달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교통법규 위반을 단순 경범죄 급으로 용인했다가는 도로가 난장판이 되고 교통사고가 폭증할 것이니 누군가는 이걸 단속도 해야 한다. 자동차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매우 무겁고 빠르고 단단하고 위험한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런 속도· 신호 위반에 걸렸을 때 우리는 국가에게 돈을 뜯기는데, 그 형태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범칙금 또는 과태료라는 두 형태가 존재한다.
범칙금은 경찰이 실운전자에게 직접 징계를 내리는 관점인지라 돈+벌점 형태이다.
그러나 과태료는 실제 운전자가 아닌 차량 소유주에게 행정부가 제재를 가하는 관점이다. 같은 위반 아이템에 대해서 액수가 범칙금보다 약간 더 높지만(+1만원) 벌점은 없다.

이렇게 체계가 이원화된 이유는 단순히 "너 벌금+벌점 같이 받을래, 아니면 돈 더 내고 벌점은 안 받을래? 골라" 차원이 아니라 더 깊은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도로 위에서의 경미한 위반을 일일이 다 단속하면서 운전자들을 사법부 차원의 형벌을 내려서 범죄자· 전과자로 만드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그리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보다 아랫단에서 더 가볍고 뒤끝 없는(?) 처벌을 선택하는 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또한 더 근본적인 이유로는, 무인 카메라 단속에 걸린 건 현장에서 경찰에게 걸렸을 때와는 달리 면허증을 까고 실운전자의 신원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는 과태료 또는 범칙금 선택의 형태로 고지서가 날아온다. 교통법규의 위반에 대해서 실운전자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
이런 단속 방식과 관점, 단속 명의의 차이로 인해 범칙금과 과태료라는 두 체계가 공존하는 것이다. 뭐,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원래는 범칙금이 원칙이긴 하지만.

땅은 좁은데 차가 너무 많은 관계로, 운전을 마친 뒤엔 불법 주정차도 운전자들이 꽤 자주 저지르는 위반 사항이다. 이로 인해 정부 기관에게 단속을 당했다면 그때는 운전자가 현장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 없이 차주에게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긴, 애초에 주정차 단속은 구청/시청 공무원이 하지, 경찰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리고 주차 위반 과태료는 일찍 내면 원래 내는 금액의 20%를 깎아 주는 듯하다.

과태료(행정부)와 범칙금(경찰)의 관계는 이렇게 설명이 됐는데..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을 때 뜯기는 돈은 과태료나 범칙금이 아니라 "벌금"이다. 이것은 집행 주체가 사법부이며(= 판사의 판결), 똑같이 돈을 내더라도 집행유예만큼이나 전과가 남는 대단히 무거운 처벌이다.
음주운전 정도면 사고 안 낸 초범이어도 액수부터가 수십~수백만 원급으로 나오니 단순 속도· 신호 위반 과태료와는 차원이 다르다. 또한 벌금형까지 받은 사람이라면 공무원 내지 직업 군인 진로에도 애로사항이 꽃피게 된다.

과료는 그냥 벌금의 다운사이즈 버전으로, 이 역시 과태료나 범칙금과는 성격이 다르다. 주로 쓰레기 무단 투기나 노상방뇨 같은 경범죄를 저지르다 걸렸을 때 부과되는데, 현실에서는 이것도 사법부 주관의 과료보다는 경찰 주관의 범칙금 형태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주차 얘기가 잠깐 나왔으니 말인데, 불법주차와 부정주차의 차이는 이러하다.

  • 불법주차: 어떤 자동차라도 세워진 채 공간을 차지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다른 차의 교통 흐름에 지장을 주고 시야를 가려서 사고 위험을 높이기 때문이다. 대로변을 포함해 교차로, 횡단보도, 버스 정류장, 소화전의 근처는 더욱 그러하다.
  • 부정주차: 차를 세울 수는 있는 곳이지만 그 차가 네 차는 아니다. ㄲㄲㄲㄲ 주로 거주지 우선 주차 구역이나 골목길, 아파트 단지 안이 이런 곳에 속한다.

그러니 불법주차는 길에 대해서 public한 성격이 강한 반면, 부정주차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private한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지방 정부가 거주자 우선 주차 구역을 정하기도 하기 때문에 공공기관이 불법뿐만 아니라 부정 주차를 단속하기도 한다.

구석에 주황색 실선이 그어진 도로는 원래 주· 정차가 모두 금지되는 곳이지만 현실에서는 불법 주차된 차들이 많고 관례적으로 단속도 없이 그 관행이 묵인되는 곳도 왕왕 있다.

단, 위의 모든 규정에는 예외가 있다. 긴급 자동차를 비켜 주는 등 지극히 정당한 사유로 인해 정지선을 넘고 신호를 좀 위반한 거라면, 상황 입증만 가능하면 과태료 부과는 당연히 면제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차 위반도 정당한 사유로 인해 불가피하게 한 것이 인정되면 마찬가지로 구제 방법이 있으니 더 자세한 사항은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아 보면 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13 08:28 2015/06/13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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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예수님에게 향유를 부은 여인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병이어나 십자가 사건과는 달리 동일한 공통 사건이 아니다. 도대체 어느 게 어느 사건인 걸까?

분류 마태 26:6- 마가 14:3- 누가 7:36- 요한 12:3-, 11:1-2 판정
누가 한 여자 한 여자 죄인인 여자 마리아 일단은 이 단서만으로는 동일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 알기 어려움
언제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얘만 세 복음서보다는 시기적으로 명백하게 훨씬 전 예수님 살해 모의와 유다 배반 사이 누가복음만 혼자 차이가 남
어디서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베다니에 있는 나병 환자 시몬의 집 어떤 바리새인의 집. 하지만 40절을 보면 그 사람 이름도 "시몬"이라고 나오긴 함 베다니에 있는 모처 (마르다와 마리아가 섬김) 누가복음만 베다니 언급이 없고 그 문맥이 아님.
무엇을(향유를) 예수님 머리에 부음 깨뜨려서 예수님 머리에 부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눈물로 발 씻고, 발에 입맞추고 머리털로 발 닦음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음 얘는 이상하게 마태와 마가, 누가와 요한이 동일 그룹으로 묶임
그 뒤 들어온 태클 제자들 왈, "향유를 비싸게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어떤 사람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 이상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그 바리새인 왈, "예수님이 레알 대언자라면 저 여자가 얼마나 질 나쁜 여자인지 바로 눈치 챌 텐데" 가룟 유다 왈, "향유를 300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 구제나 하지" 누가복음만 크게 차이가 남
이에 대한 예수님의 실드 (왜)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여인 이야기는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그녀의 죄가 용서되었다 이 향유는 나를 장사지내기 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누가복음만 완전히 딴판인 내용

보다시피 우리에게 혼선을 주는 요소는 딱 두 가지이다. (1) 인명 '시몬'의 정체가 오락가락하고, (2) 머리와 발 부위 묘사만 다른 카테고리와 다른 방식으로 분류된다는 것.

하지만 사복음서에 기록된 사건의 큰 그림을 육하원칙에 의거해서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누가복음만 다른 사건이고 마태· 마가는 동일 사건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머리와 발에 모두 향유를 부었다고까지는 취합이 가능할지 모르나, 시몬이 바리새인 겸 나병 환자인 동일 인물이고 마리아가 과거가 추잡하기도 한 여자이고, 예수님이 한 장소와 한 시간대에 자기 장사 얘기와 "마리아 너의 죄가 용서되었다" 말을 동시에 하셨을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다.

요한은 마태· 마가와 상당히 비슷한 사건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른 듯하다. 하지만 똑같이 300데나리온 드립이 나오고 예수님이 같은 이야기를 두 번이나 하셨다는 걸 생각하니 좀 이질감이 느껴지긴 한다.

다음에 교회에서 <내게 있는 향유 옥합 주께 가져와> 같은 찬양을 부를 일이 있을 때 참고하도록 하자. 가사를 분석해 보면, '깨뜨린다'는 마가복음에 있고, '발 위에 입맞추고 붓는다'는 내용은 누가복음에 있다. 여러 사건을 한데 살짝 뭉뚱그려 놨다는 뜻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10 19:29 2015/06/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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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행위의 관계

세상의 다음 법칙들을 생각해 보자.

  • 길거리에서 나눠 주는 무료 유인물이 공짜라고 해서, 거기 있는 유인물들을 몽땅 혼자 가져가도 되는 건 아니며,
  • 지하철역의 쓰레기통이 공짜라고 해서 자기 집 쓰레기를 몽땅 가져와서 거기에다 버려도 되는 게 아니다.
  • 뷔페가 음식 무한 리필이 가능하다고 해서 딴 그릇에 담으면서까지 막 퍼 가도 되는 건 아니다.
  • 노인은 지하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고 해서 무임 승차권조차 아예 없이 개찰 구역 안으로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건 아니다.
  • 남이 만든 어떤 소프트웨어가 누구나 무료로 쓸 수 있다고 해서 그걸 자기가 만들었다고 저작권 자체를 사칭해도 되는 건 아니다.
  • 자유가 있다고 해서 남의 자유를 침해할 자유,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와해시킬 자유까지 허용되는 건 아니다.

우리 주변엔 이와 비슷한 원리의 적용을 받는 것들이 이것 말고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finally..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혼의 구원이 공짜이고 영원히 지속된다고 해서 □□□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안에 들어갈 말은 건전한 예수쟁이라면 누구나 유추 가능할 것이고. (롬 6, 엡 2, 고전 8:2, 갈 5:13 등)

다시 말하지만, 크리스천은 구원받기 위해서, 혹은 받은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서 선행을 하는 게 아니다.
단지 그 구원에 감격하고 감사해서, 다른 사람이나 세상 정세를 보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선과 보상의 기준을 보고 믿음 안에서 성령의 열매 차원에서 선행이 나오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믿음의 선행을 하는 것은, 마치 철덕이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우리나라 철도의 모든 것을 줄줄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자연스럽고 지당한 이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는 형태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Q. 너는 철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일 테냐?
A. 새마을호 객실에서 흘러나왔던 Looking for you를 3천 번 듣고 악보로 만든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입증하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건 물론 아니다. 복수 정답이 존재함)


이렇듯, 로마서와 야고보서는 lexical하게는 이랬다 저랬다 하는 진술처럼 보일지 모르나 그 실질적인 내용은 일맥상통하며 모순이 아니다.
그 정도 모순도 분간 못 할 정도면 성경 못 읽는다. 성경엔 그거 말고도 이랬다 저랬다 하는 말이 차고 넘친다.

Posted by 사무엘

2015/06/03 08:29 2015/06/03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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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영화나 드라마 같은 창작물 매체에는 "열린 결말"이라는 게 있다. 총이 그 수단으로 즐겨 쓰인다.
일례로 웹툰 <26년>은 그냥 건물 밖에서 "탕!" 총성만 나면서 끝난다. 격발은 대머리 전대통령을 저격하려는 그 여주인공이 했는지, 아니면 그녀를 저지하려는 다른 경호원이 했는지 알 수 없는 구도로 끝난다.

완전한 열린 결말은 아니지만 그에 좀 근접한 예로는 <이연걸의 정무문>이 있다. 결말부에서 주인공 진진이 "내가 모든 책임을 져야겠군요"라고 하면서 총을 한 발 쏘긴 하는데, 그래도 죽지는 않고 몰래 빠져나와서 김 두한 코스프레를 하고 택시를 타는 걸로 끝난다. 이건 뭔가 성경적인 심상이 담긴 게 아닌가 싶다. "한 사람이 온 백성을 위해 죽는 것이 유익하다." (요 18:14)

그리고 사실은 성경 내부에도 뭔가 열린 결말처럼 보이는 스토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의 사사 시절에 활동했던 '입다'라는 사람이다. 사사기 11장을 읽어 보시라.
이 사람은 사생아 출신이어서 동족들로부터 냉대받으며 서럽게 자랐지만, 훗날 동족을 구하는 영웅이 되었다.

그는 암몬 족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했는데.. 내용인즉슨 "하나님이 이 전투를 이기게 해 주신다면, 돌아오는 길에 우리집 문앞에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오는 생명체를 번제 헌물로 바치겠다"였다. 이 사람은 가축을 많이 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싸움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자기를 가장 먼저 맞이하며 축하해 준 생명체는...;; 자신의 외동딸이었다.

입다는 대성통곡을 했다. 하지만 그의 딸은 담담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으며, 아버지에게 어서 서원한 대로 행하라고 당부를 했다. 단, 친구들과 함께 자신의 처지로 인해 무려 2개월 동안 펑펑 울면서 애곡을 하고 온 뒤 그렇게 했다.

입다는 "한번 서원한 건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는 말씀 하나만은 일말의 책임감을 갖고 철썩같이 곧이곧대로 실천했다(신 23:21-23). 그러나 그는 아무리 전쟁을 앞둔 위급하고 비장한 상황이긴 했다지만, 일단 생명체 번제 헌물까지 걸면서 애초에 서원을 리스크가 큰 형태로 좀 무리하게 했다.

그리고 서원을 잘못 적용했다. 법과 약속의 적용 우선순위에 무지했다. 서원을 빌미로 다른 사람을 막 죽여도 되는 게 정당화되지는 않을 뿐더러, 설령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 해도 부정한 짐승인 개나 돼지가 가장 먼저 마중을 나왔다면 그런 건 바칠 수 없다. 허나 입다는 개나 돼지가 1타로 걸렸다면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다. =_=;;;

이는 사사 시대에 심지어 정치· 군사 지도자인 사사(판관)들마저도 율법에 대해 굉장히 무지했으며, 요즘 스타일로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성경을 바르게 나누어 적용할 줄 몰랐음을 암시한다.
나중에 삼손조차도 율법 따위는 깡그리 무시하고(삿 13:14) 죽은 사자의 부정한 시체에 있는 꿀을 막 먹었으며 부모에게까지 준다. 그러니 입다 정도는 약과였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이때 입다의 딸은 실제로 비참하게 죽어서 번제 헌물로 바쳐진 게 아니라, 그냥 시집 갈 자격을 박탈당하고 평생 처녀로 살면서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기만 한 거라고 해석하는 분들이 있다.
당장 본문만 보면 입다의 딸이 "처녀 됨 / 남자를 알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사실만 엄청 부각되어 나오지, "죽었다"라는 직접적인 표현 자체는 안 나오긴 한다.

그러나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고 해서 그 문맥에서 딸이 죽지 않고 생존했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과 딱히 논쟁을 하거나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그 문맥에서 딸이 실제로 죽은 게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도대체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가장 핵심 전제 조건부터 제시하겠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이 인신제물/인신공양을 받아들이는 잔인한 신이냐, 그게 율법적으로 맞느냐 아니냐 같은 게 아니다!
오로지 '입다'가 자기 딸을 죽이는 뻘짓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냐 안 벌어졌느냐만을 따져야 한다. 잘못을 해도 그건 입다의 개인적인 삽질일 뿐이지 하나님의 성품 같은 건 이 자리에서 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의하시는가?

그런데 (1) 저 주장을 하는 분들은 먼저 그걸 혼동하는 것 같다.
마치 사형 제도가 하나님이 제정한 제도이며 성경적으로 옳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걸 마치 "우리가, 교회가 흉악범에게 직접 보복을 하는 것인양" 이상한 비약을 혼자 자기 상상 속에서나 하면서 반발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2) 단순히 잔인하다는 이유만으로 '애비가 딸을 정말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실드를 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성경에는 애비가 외동딸을 죽인 것보다 더 잔인한 장면도 많다.
다윗이 이방 민족들을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말도 있고, 개독안티들이 맨날 욕하는 가나안 백성 진멸도 나오고... 비록 실행은 안 됐고 문맥이 좀 다르긴 하지만, 하나님은 애초에 아브라함 보고도 외아들 이삭을 번제 헌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 요 문맥만 딱 떼어서 생각하면 발상 자체는 영락없이 인신제물인 것이다.

심지어 변개된 잘못된 성경들은 원어 드립을 치면서 그걸 '보정'하기까지 했다. 톱과 써레로 잘랐다는 표현을 톱과 써레로 강제 노동을 시킨 것으로 바꾸고, 지옥을 삭제하고 음부· 스올로 바꾸고, devil을 덜 자극적인 단어인 demon으로 바꾸는 등..

입다의 외동딸 생존을 주장하는 분들은 비록 성경 변개자들처럼 악의적이지는 않겠지만, 혹시 자신도 부지중에 저런 성경 변개자의 심정에 동조하고 있지는 않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모세는 정말로 홍해를 건넌 게 아니라 갈대밭을 건넌 것이다"와 "입다의 딸은 정말로 죽은 게 아니라 그냥 평생 동정으로 산 것이다"의 차이는 의외로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3) 원래 서원을 보면 대명사가 he가 아닌 it으로 표현돼 있고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바치는 서원이었을 뿐이라는 해석이 있는데 이 역시 금방 반박되는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럼 딸이 마중 나왔을 때 부녀가 애초에 슬퍼하고 난리를 칠 필요가 없지 않았겠는가.

이런 것들 외에도 입다의 딸의 생존 가능성을 0으로 확인사살하는 요소는, 그녀의 또래 친구들이 단순히 1회로 그치지 않고 해마다 무려 나흘씩이나 그녀의 '처녀 됨'을 애곡했다는 것이다(삿 11:40).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주께 바쳐져서 수녀처럼 헌신하며 사는 게 무슨 무인도 염전이나 꽁치잡이 어선 노예로 팔려가는 것이기라도 하나? 영원히 연락이 끊기는 실종이기라도 하나?
사무엘처럼, 혹은 누가복음 2장의 안나처럼 사는 게 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엽기 뉴스이고 매년 애곡할 만한 엄청난 비극인가? 일단 당사자가 목숨이 붙어 있는데..?

우리 조선 시대에는 팽형이라는 제도가 있었다. 그건 실제로 죽이지만 않을 뿐이지 그 죄인의 존재를 사회에서 완전히 지워 버리는 형벌이었다. 유족들은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의 장례식을 치르고 제사까지 지내야 했다.
사사 시절의 이스라엘 사회에 그런 팽형에 준하는 제도라도 있지 않았다면, 입다의 딸은 정황상 도저히 살아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그녀는 자기가 무슨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녀에게 행하니 그녀가 남자를 알지 아니하니라." (삿 11:39 did with her according to...)를 보면, 본인은 창세기 9장의 다음 구절도 오버랩 된다.
"노아가 포도주에서 깨어나 자기의 작은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what his younger son had done unto him)

이때도 do만 나오지만, '함'은 자기 아버지가 술 취해서 곯아떨어진 사이에 아버지의 몸에다 굉장히 흉한 짓을 했음을 성경은 암시하지 않은가 말이다. 함이 한 짓이든, 입다가 딸에게 한 짓이든, 그리고 발람이 민수기 24장에서 25장 사이에 발락에게 무슨 조언을 줬는지 같은 것은.. 성경이 굳이 구차하고 민망스럽게 일일이 묘사를 할 필요가 없다. 성경의 저자가 쑥덕같이 말했으면 우리 신자들은 찰떡같이 알아들어야 한다. 하긴, 생각해 보니 창 1:1-2 사이의 "간극"도 이런 implicit한 어려운 주제에 속하는구나!

입다 하나를 갖고 정말 다양한 얘기를 했다.
그런데, 믿거나 말거나 이 '입다'는 히브리서의 믿음장에 이름이 올라 있다. (히 11:32)
'입다'가 실수· 오타가 아님을 인증하기 위해, 심지어 입다 이상의 좌충우돌 사고뭉치이고 자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삼손도 믿음장에 등재되어 있다. 이건 반전이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긴, 입다든 삼손이든 삽질만 했지 확실히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마치 롯처럼 말이다.

Posted by 사무엘

2015/05/28 08:25 2015/05/28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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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를 끌어올려 분사하는 일을 하는 물건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물뿌리개: 일면 주전자처럼 생겼지만 주둥이의 끝은 샤워기처럼 생긴 물통이다. 확 들이붓더라도 물이 넓은 면적에 고르게 퍼져 나오도록 만들어져 있다. 다만, 물을 내보내는 메커니즘은 중력밖에 없으니 딱히 신기할 게 없다. 이름 그대로 화단에 물을 주는 용도로 쓴다.
  • 펌프: 진공을 만들어서 압력차를 이용해 물을 끌어올리는 도구이다. 옛날에 오늘날과 같은 편리한 상수도 시설이 갖춰지기 전, 시골에서는 종종 볼 수 있었다.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끌어올리던 시절보다는 많이 발전했지만, 그래도 수동식 펌프는 펌프질을 위해 여전히 사람의 체력이 필요했다.
  • 분무기: 물이나 향수 같은 걸 펌프와 같은 원리로 끌어올린 뒤, 안개처럼 조금씩 뿌옇게 분사한다. 손으로 손잡이를 눌러서 손잡이가 끝까지 들어갈 때까지 그렇게 동작한다. 그리고 정확하게 어떻게 조작을 했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일부 분무기는 노즐 '모드'를 바꿔서 물을 뿌옇게 분사하는 게 아니라 물총처럼 가느다란 물줄기를 찍찍 갈기게 만들 수도 있었다.
  • 스프레이: 분무기보다 기술적으로 더 발달했다. 위의 분무기는 손잡이가 끝에 닿아서 멈춘 뒤엔 더 분사가 되지 않지만, 스프레이는 버튼을 누르고 있는 동안 계속해서 액체가 분사되어 나온다. 스프링이나 태엽, 전기 동력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닌데 액체를 밀어내는 역할은? 같이 들어가는 압축 기체가 한다. 그 대신 여기에 들어가는 액체도 역시 단순한 물 같은 게 아니라 아무래도 살충제, 페인트 같은 화학 약품들이다. 아, 그러고 보니 소화기도 따지고 보면 이런 스프레이에 속한다.

총으로 치면 단순 압축 분무기는 반자동 모드이고, 에어로졸 스프레이는 연사가 되는 자동 모드에 해당한다고 봐도 되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전에 본인은 액체 연료와 고체 연료의 차이에 대해서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액체를 끌어올려 뿌옇게 분사하는 기술은 액체 연료를 다루는 핵심 기술이며 기계공학에서도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나 싶다. 유체역학과 열역학의 영향을 많이 받을 것이다.

난 사람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세제, 치약, 샴푸 같은 것에 유체의 극미량 분사 기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찌익 짜서 쓰는 양보다 훨씬 적게 써도 씻는 데 부족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상의 이유로 과다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자동차 엔진에서 분사 기술의 중요성은 그야말로 물으면 잔소리이다.
<이연걸의 정무문> 영화의 맨 앞부분을 보면.. 주인공 진진은 설정상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내연기관이라는 신문물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게 나온다. (오오~ 기계공학..) 그때도 대사를 들어 보면, 선생이 '카뷰레터'라는 장치를 언급한다~!
서양 제국주의는 내연기관이 달린 기계와 총기를 통해서 이뤄진 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 당시로서는 엔진 기술이 오늘날의 반도체나 소프트웨어 기술만큼이나 최첨단 기술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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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는 잘 알다시피 공기 중에 연료를 아주 희박하게 분사한 뒤 이를 폭발시켜서 그 힘으로 피스톤을 누르고 바퀴를 굴린다.
이를 수행하는 가장 원시적인 장치가 바로 '카뷰레터'이다. 얘는 말 그대로 분무기처럼 동작을 하여 가솔린+공기 혼합 기체를 엔진에다 보내 준다. 참고로 카뷰레터는 탄소 carbon에서 유래된 탄화물 carburet의 파생어이다.

어린이용 과학 실험 중에.. 빨때를 ㄱ자로 꺾어서 수면에다 꽂은 뒤, ㅡ 모양의 한쪽 끝을 입으로 세게 불면 아래에 있던 물이 빨려 올라가는 실험이 있다. 바로 그 원리이다. 유식한 표현으로는 베르누이의 정리 내지 벤트리 효과이다.
더 나아가 바다에서 사람이 배의 스크류에 빨려 들어가서 사고를 당하는 것, 열차가 빠르게 달리는 쪽으로 사람이 빨려 들어가는 것도 다 유체역학적으로 같은 원리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옛날 이야기를 하겠다.
현대 자동차에서 예전에 만들었던 승용차인 '엑셀'. 그 기원을 찾자면 포니 엑셀, 프레스토 등 더 옛날 차로 거슬러 올라가긴 하는데, 그 중 가장 엑셀스러운 첫 모델은 1989년 4월에 나온 2세대 모델이다. (그러고 보니 저 시기는 아래아한글 1.0이 나온 시기와도 비슷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 당시 엑셀은 1300cc, 1500cc GL, 1500cc GLSi 이렇게 세 모델로 출시되었다.
창문도 최하급은 전도어가 수동이고 중간급은 앞좌석 두 개만 자동, 고급은 전좌석이 파워윈도우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차이는 연료 분사 방식인데, 앞의 둘은 기계식 카뷰레터보다 약간 더 발전한 전자식 피드백 카뷰레터인 FBC이고, 최고급 GLSi는 그 당시로는 최첨단 기술이던 다중분사 MPI 방식이었다.

GLSi의 경우, 차 측면에 Multiple Point Injection이라고 당당히 자랑하는 글귀가 붙어 있을 정도였다. DOHC 흡기 방식이거나 자동 변속기가 달린 차는 측면에 Automatic 내지 DOHC라고 자랑을 치던 시절의 얘기다.

흐음, 기계식 카뷰레터, 전자식 카뷰레터, MPI(완전 전자식)라는 세 계층의 기술을 보니..
이듬해 봄에 발표되었던 마소 Windows 3.0의 리얼 모드, 286 표준 모드, 그리고 386 확장 모드가 같이 연상된다!
그땐 자동차와 컴퓨터 모두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던 과도기이긴 했다. 전동차로 치면 저항, 쵸퍼, VVVF와 비슷하다.

카뷰레터는 전자 제어가 없이 전적으로 밟은 만큼 밸브가 열리고, 곧이곧대로 연료가 분사되다 보니.. 구조가 단순하고 저렴하고 무엇보다도 정비성이 좋았다. 변속기도 수동이었으니 반응 하나는 정말 최강이었을 것 같다.
193,40년대에 미국에서는 퍼져 버린 차를 시골 깡촌의 소녀가 간단한 공구로 뚝딱 수리하는 걸 보고 미국으로 견학을 간 어느 일본군 장교가 경악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전국민이 저렇게 기계를 잘 다루는 나라와는 전쟁을 벌여서 이길 수 없다"라고 직감을 했다고.

미국이 (1) 193,40년대에 이미 마이카 시대가 열렸을 정도로 잘사는 나라이며, (2) 인건비가 높아서 어지간한 작업은 스스로 다 알아서 해야 하는 나라인 것도 있지만, (3) 한편으로 그 시절엔 자동차의 구조가 지금보다 훨씬 더 단순하기도 했다는 뜻이다.

물론 지금은 기계식 카뷰레터만으로는 요즘 정도의 엄청나게 까다로운 연비나 배기가스 기준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 지금은 MPI에 이어 직분사라는 GDI 엔진까지 출현했고, 또 그 동작을 제어하는 것 역시 옛날보다 훨씬 더 똑똑하졌다. 컴퓨터가 이것저것 따져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기계식 카뷰레터 기반이던 포니에는 초크 밸브를 개폐하는 스위치도 운전석에 있었다니 참 신기하다. 공회전 때 엔진 회전수를 조절하는 역할도 하고, 또 추운 곳에서 오랜만에 시동을 걸 때는 이거 제어를 잘 해 줘야 했던가 보다. 지금은 그런 밸브는 오토바이에서나 볼 수 있는 물건인 듯.

Posted by 사무엘

2015/05/25 08:30 2015/05/25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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